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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알라딘 한국을 다시 묻다: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이찬수, ,신현승,황종원

알라딘: [전자책] 한국을 다시 묻다: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한국을 다시 묻다: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이찬수,최준식,신현승,황종원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17-03-30 

책소개

'단일민족'이라는 울타리가 해체되는 한편으로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풍미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한국정신' 혹은 '겨레얼'의 실상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하고 조명한 결과물이다. 
  • '한국정신'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아, 고수하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 세계화 시대에 '더불어 삶'을 가능케 하는 근본 토대로서의 한국인의 정신, 민족, 문화, 얼 등을 스스로 이해하고, 
  •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세계에 설명할 수 있는 기본 교재라 할 수 있다.


목차

01 한국의 정신, 겨레얼은 무엇인가?
한국적 정신 
겨레얼과 민족성
풍류, 신명, 정한 
민족의식과 선비정신
민족종교에서 붉은 악마까지

02 겨레와 민족이라는 최신 언어
주체와 능력 
불변의 본질을 넘어
겨레와 민족 
민족과 민족의식
민족의식의 한국적 전개 
국가의 부재와 민족의식의 강화
조선혼과 조선학

03 겨레, 문화, 신화
우리말이 주는 착각 
수용과 변화의 능력
겨레얼과 문화의 구조 
겨레얼의 표현 방식, 신화
신화의 메시지, 홍익인간 
신화의 종교화

04 풍류도, 신명, 정한
다양성의 근원 
홍익인간의 빈틈
포함삼교와 접화군생 
불교의 수용과 전개
불교와 풍류의 관계 
풍류도와 화랑도
신명과 신기 무교와 정한(情恨)
정한의 사회화

05 조선의 문화와 겨레얼
겨레얼과 언어 문화 
국어와 한국적 정신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선비와 선비정신
선비의 의리 정신 
선비적 윤리, 청백리

06 근대 한국의 유교 정신
위정척사파의 선비정신 
상소운동의 재해석
유교적 계몽운동가 박은식 
저항으로서의 전통 연구
정인보의 양명학과 조선학 
조선학 운동과 겨레얼

07 신명의 근대적 개화
조선의 신명과 풍류 
신명의 유교화
서학과의 갈등과 수용 
개신교의 한국적 전개

08 자생 종교와 풍류도의 다변화
상층과 기층의 만남 
풍류 정신의 재현, 최제우
겨레얼의 양극화 
자생 종교의 풍류성
기독교의 한국적 특징 
대중문화의 풍류성
신명의 쏠림 현상

09 오늘 한국을 말한다는 것
겨레얼의 토발화(土發化) 
한국적 정신은 계속될 수 있을까?
위정척사파의 선비정신 
상소운동의 재해석
유교적 계몽운동가 박은식 
저항으로서의 전통 연구
정인보의 양명학과 조선학 
조선학 운동과 겨레얼

2021/08/30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0-12-10

328쪽

책소개

인간 개인은 물론 사회가 평화보다는 폭력과 갈등, 안전보다는 위험과 위기에 더 자주 더 오래 노출되는 현실의 원인을 짚어 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글들이 아니라 저자가 직면하는 삶의 매순간, 구체적인 사회 현실(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생애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사회로의 전진을 모색한다.

나를 포함한 사회가 아픈 근원적인 원인을 성찰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대안들을 40개의 다양한 사회의 제 부문과 요소, 인간관계 들을 통해서 제시한다. ‘사회의 아픔’의 원인과 대안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저자의 종교적 감수성 덕분으로 그 근저에 ‘사회적 영성’의 심층 맥락을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사회는 왜 아픈가
1.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평화학이 던지는 질문
2.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3.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4. 예수도 폭력을 썼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
5.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6. 우리도 난민이었다: ‘내로남불’의 난민론
7.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8. 더 큰 폭력이 더 큰 원인이다: 이스라엘-IS-미국
제2부 세상[世]을 어떻게 넘을까[越]
9. 평범함이 모이면 무력해지는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10. 예외가 일상이 되다: 일상의 속살
11.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12. 왜 배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는가: 그들이 세상[世]을 넘는[越] 방식
13. 폭력이 왜 권력이 되는가: 국가와 주권
14. 왜 정치인은 국민을 파는가: 정치와 종교의 모순들
15. 권위는 누가 주는가: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호칭
16. 서로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증여론
17. 나도 때론 정치하고 싶다: 함께 느리게
제3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18.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무역협정
19. 자유도 돈으로 사는가: 우리 시대의 장발장
20. 나는 두통을 소유한다: 소유와 존재
21. 오리는 아플 권리도 없는가: 생매장과 살처분
22.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사형제도
23. 핵발전은 필연인가: 통제 불능의 문명
24. 자연이 공격해온다: 재난과 인공지진
25. 이자를 금하라: 금융경제와 이자놀이
26. 아이도 국가를 위해 낳는가: 저출산 혹은 저출생
27. 학교는 왜 아픈가: 대학의 종말
제4부 한국과 일본은 왜 꼬였나
28. 한국의 시간을 복원하라: 한국 속의 일본
29. 동해는 동쪽인가: 푸른 바다 또는 평화의 바다
30. 일본은 왜 우경화할까: 영혼의 정치학
31. 평화를 내세워 전쟁할 것인가: 책임없는 평화주의
32. 왜 다케시마를 고집할까: 평화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
33. 호국영령도 여러 가지다: 일본 군국주의의 기초
제5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34. 왜 사람을 쫓아낼까: 아프지만 이긴 사람들
35. 법은 왜 상처를 줄까: 법력, 금력, 권력
36. 왜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할까: 종교의 앵똘레랑스
37. 김 교수는 왜 아팠을까: 악의 발생에 대한 상상
38. 왜 큰 것을 숭배할까: 박사학위에 대한 나의 고백
39. 깨어 있어야 하는가: 중취독성(衆醉獨醒)
40. 나는 무슨 공부를 해 왔나: 심층학의 가능성

접기
책속에서
P. 25~27 평화조차 의도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평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들이 도리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중략)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인 평화(ego-centric peace)’를 내세운다. 이것이 현실이다. (중략) 평화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그 자율은 타자를 포함하는 자율이어야 한다. (중략) 성경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갈라디아서 3,28)는 선언이 나온다. 타자를 긍정하면서 타자를 살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됨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접기
P. 31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더 많은 성과를 닦달하듯 요청한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을 착취해 성과를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성과 사회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능가해 온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해 더 많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자발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박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접기
P. 56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인정하면, 폭력성을 혐오하기보다는 폭력에 분노하며 폭력을 줄이는 길에 나서게 된다. 혐오와 폭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접기
P. 64 인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남[他]’의 권리이다.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다가, 결국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적 성과사회라는 구조적 갈등을 그대로 전제하기에 제기되는 것이다. 나만 내세워서 인간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권리[他權]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접기
P. 97~98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권력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기 힘들도록 되어 있다. 국가는 거대한 틈, ‘공(空)-간(間)’이다.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통일로 가는 보훈>,<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사회는 왜 아픈가>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금 우리는 아프다!
개인의 정서적(코로나 블루), 육체적(코로나19 팬데믹) 아픔은 물론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거리두기)인 차원에서도 아픔이 일상화, 보편화되었다. 사람과 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ex. 조류독감, 생물대멸종)도 아프고, 나아가 지구 전체가 심각한 질병(ex. 기후위기, 지구온난화)에 빠져 있다. 이 아픔은 지금-여기에서 예외적이고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늘 아프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시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아픈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폭력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데 비해, 평화는 간헐적이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흐린, 그러나 가끔 맑은” 세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로 흐린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의 속살은 위험, 피로, 폭력, 혐오, 차별, 아동폭력, 성폭력, 방치와 방임, 난민, 세월호, 국가 폭력, 정치와 종교, 생매장, 살처분, 사형, 핵발전, 문명과 통제, 재난, 이자, 학교의 종말, 전쟁, 법과 상처, 금력, 권력, 숭배, 중독 같은 세포들로 점철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이겨도 아프고 져도 아픈 가운데 살아간다.

사회는 왜 아픈가?
개인적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대체로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얼마간의 아픔은 (개개의) 타인으로부터 오거나,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오고, 대부분의 아픔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직접적/간접적) 주어진다. 개인(국민) 국가의 주인이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에 종속되듯이, 우리(개인)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에 종속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며, 사회에 순응하고 예속되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아픔이 대체로 개개인의 생존 욕구,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그 개인들의 욕망 대 욕망의 부딪침으로 야기되는 것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욕망인 것 같지만, 특히 근대의 ‘성과(자본 확장) 중심주의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욕망조차도 사실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개인의 일탈(갈등, 폭력, 살인-사형)조차도,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누가, 왜 아픈가?
오늘날 사회는 근대 시기의 정치사회로부터 경제사회로 전이되어 왔다. 사실상 사회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우하던 아주 짧은 시기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경제권력이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좌우하는―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체제가 현대 사회 근본 체제이다. 개인의 아픔이든, 사회의 아픔이든 자생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적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아픈 것들’) 외적”인 것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책임은 그 전제 위에서 아픔의 근본 원인에 무지한 채 종속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의 양지에 서는 쪽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생겨난다. 무지해서 수용하든 자발적 선택으로 수용하든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매한가지다.

아픔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 책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저자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인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써 나간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차근차근 성찰하되, 스스로 그 일부로 자리매김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들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특히 기독교 목사이며, 평화학의 전공자이자 평화운동가로서, 그 자신이 겪은 해직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사회적 아픔들을 주관화하여 공감하면서, 평화의 폭넓은 의미 속에서 그 대안들을 찾아나간다.
결국 저자가 끝내 도달한 해결의 종점, 혹은 해결의 출발점은 인간의 정신성 ? 사회적 영성의 차원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의 정책적 대안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인간(개인) 자신의 아픔도, 사회의 아픔도(사회의 주체로서 개인), 그리고 이 지구상의 아픔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인간 ‘외적 존재’로부터의 해결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의 괴담’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평화 대신에 타자를 포함하고 긍정하는 평화를 추구할 때, 성과 중심 사회 체제에 내몰리다가, 스스로 내달리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거부할 때, 타자와 협의하고 타자의 동의를 수용할 때, 타의 권리보다 타자의 권리 ? 우리의 권리를 앞세울 때, 국가권력에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과 천부의 권리를 위임해 버리고 스스로 종속되기를 거부할 때,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꿰뚫을 때, 소유의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내려놓고 비워줄 때, 자유라는 이름의 자본이 던진 미끼를 좇아 돌진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설 때,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의 매 순간에 저질러지는 실수와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게 될 때, 정죄하는 자로부터 정죄 받을 줄로 알고 조신하며 조심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끊임없이 ‘큰 것’을 좇아 밖으로 나도는 마음과 몸을 우리-나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심층적인 공부를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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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프다, 사람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사회에서 자신도 모른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와 자본의 확대를 위해 자발적인 노예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중층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아픔을 파헤치고, 자기중심적 욕망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찰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철후 2020-12-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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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칼 마르크스의 인간해방과의 만남

   2020년은 지구의 아픔을 인류가 함께 느끼던 시간이었다. 울리히 벡(Ull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전 지구가 세계화로 들어서면서 산업화·근대화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요소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들은 일국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세계가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면서 ‘위험의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코로나19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그동안 신자유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떠한 결과를 양상하고 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거대 구조는 자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적 폭력을 개인 안에 자율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폭력을 감내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구성원 각자가 자본이 가하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그 폭력을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킨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서 폭력을 확대·재생산해 낸다.

    최근 이찬수교수(보훈교육원 원장)는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정신적 가능성을 통찰력 있게 살펴주었다. 저자는 십수년 동안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갔다.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역시도 비판적 대상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가진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성찰하되 단순히 객관적 비평문에 머물지 않고, 가능한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사회도 개인적 욕망들의 합집합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욕망을 돌파할 수 있는 심층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사회의 영성’(Spirituality of Society) 내지는 ‘사회적 정신의 심층’이라고 해도 좋을 긍정적 영역을 말하고자 했다.

    저자는 사회가 아픈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성들이 충돌하는 현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한다. 자기중심적 욕망들의 각축장이 되게 만드는 사회는 상대를 딛고 넘어서라며 경쟁적 성과를 끊임없이 부채질하며, 결국 개인인은 저마다의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게 한다. 그 경쟁은 더 많은 업적을 낳고 재화를 산출하며, 기존 사회의 구조를 확대시키고 다시 정당화시킨다. 그러면서 개인은 자기가 만든 사회에 종속된다. 문명을 만든 인간이 문명의 법칙에 예속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 사회란 사적 혹은 가정적 영역이었던 ‘이코노미들’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다차원적으로 뻗어가고 잇는 유기체적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통찰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욕망에 기반 해 정치를 이용하거나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면서, 끝모를 자기변화와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난 성과 지향의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질환’이라 할 수 있을 영역으로 이끌고 있으며, 사회적 아픔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자발적 노예들의 성과사회는 자기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일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작용된다. 성과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시스템에서 ‘자본’을 확장시키는 근본 동력으로 작용하고, 그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유 경쟁은 심신의 피로 뿐만 아니라 아픔도 더 수반하게 한다. 저자는 사회가 왜 아픈지 답을 하려면 경제의 문제도 되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문화와 사고 형태, 그리고 신념은 경제활동이 수행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적 하듯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양산해 낸 근대화는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의 모순과 인간 소외 현상을 발생시키고 있다. 산업적 생산방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을 가하게 하거나 파괴하게 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가 만든 산물과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결국 타인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계급구조의 모순과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해방을 지향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해방은 신과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를 인간 자신에게로 복귀시키는 것이라 한다. 인간 자신에게로의 복귀는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자기중심적 사유를 멈추고 “성찰” 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저자 역시도 노예로부터의 해방되기 위해서는 성찰을 통해서 기존의 흐름을 중단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피로사회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과사회에서 피로에 지친 인간에게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 자유경쟁 속에 내몰린 인간이 진짜 자유와 평화라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종교의 역할은 이러한 자유경쟁에 속박되는 모순을 멈추고 해체시키며, 보이지 않는 갈등과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를 해방시킴으로써 적극적인 평화를 구현해 내는 길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헤겔법철학비판』에서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에서 지적(知的) 무기를 발견한다. 철학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폐에 의해 실현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철학의 실현에 의해 철폐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철학은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고통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 유물이다.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지금 시대의 사회의 총체적 변혁이 내재적 사회영성의 인간해방을 낳을 것이라는 철학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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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후 2021-01-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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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종교로 세계 읽기 - 핵심으로 알아보는 세계의 종교들, 종교문화, 이찬수

알라딘: 종교로 세계 읽기

종교로 세계 읽기 - 핵심으로 알아보는 세계의 종교들, 종교문화 

이찬수 (지은이)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2009-02-27





184쪽

책소개


다양한 종교들의 핵심을 명료하게 풀어 쓴 세계 종교 입문서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유일신 종교들, 힌두교와 유.불.선, 일본 신도의 아시아 종교들, 한국의 종교인 무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을 종교별로 다루었다.

이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짧은 분량에 핵심을 담음으로써 세계 종교의 지형도를 신속
하게 파악하게 하는 것, 그리고 한국적 맥락을 견지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저자가 특히 신경 쓴 것은 문화적 감각이 종교와 연결되어 있음을 적절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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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다양한 종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라는 말 / 궁극적 관심의 상태 /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 체계 / 종교의 핵심, 신앙

2. 작지만 큰 종교 : 유대교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다 / 유대교란 무엇인가 / 유일신 사상의 출현 / 이집트 탈출과 건국, 분열 / 회당의 탄생 / 랍비의 출현 / 예언자들의 등장과 조로아스터교 / 그리스의 영향과 다양한 학파들 / 미쉬나와 탈무드 / 유대인의 수난과 박해 / 유대교 신비주의 / 유대인 해방과 건국

3. 세계 정신사의 큰 축 :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라는 말 / 유대교적 배경 / 예수의 출생과 성장 / 요한의 등장과 하느님 나라 / 예수의 율법 해석 / 예수의 죽음 / 그리스도로 받들어지다 / 교회와 신약 성서의 탄생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 근대의 그리스도교 / 한국의 그리스도교

4. 종교와 사회의 순수한 통합 : 이슬람
이슬람의 현황 / 이슬람에 관한 오해와 진실 /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 예수, 무함마드, 쿠란 / 천사, 내세, 심판 / 다섯 가지 실천 / 원리주의자와 거룩한 전쟁 / 이슬람의 유대교적 뿌리 / 움마의 확립 / 분파와 확대 / 이슬람 전성기 /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불행과 미국 / 현대 이슬람의 과제 / 알라와 야웨

5. 없는 것이 없다 : 힌두교
왜 힌두교인가 / 광의의 힌두교 / 협의의 힌두교 / 베다 / 「우파니샤드」 / 범아일여와 해탈 / 업, 윤회, 카스트 / 후기 힌두교의 확립 / 힌두교 사상의 정수, 「바가바드기타」 / 인도의 근대

6. 동양적 정신의 정수 : 불교
세계 종교 지형의 변수 / 옷깃만 스쳐도 인연 / ‘나’는 없다! / 붓다의 삶과 부처님의 호칭 / 열반, 해탈, 입적 / 신처럼 받들어지다 / 보살 신앙의 등장 / 불제자의 길 / 스님이라는 말 / 한국의 불교 / 선과 화두 / 대한불교조계종 / 성철 스님

7. 동아시아 사회 질서의 근간 : 유교
한국인은 유교인 / 공자의 기본 정신 / 예를 통해 인을 구현하다 / 예의 구체적인 모습들 / 효, 자, 제, 충 / 장유유서 / 가족과 조상 / 신령과 조상신 / 신주와 성체 / 제사와 음복 / 유교의 현재

8. 종합적 민간 신앙 : 도교
불멸성의 추구 / 도가와 도교 / 한국 도교의 역사 / 신선의 추구 / 도교의 바이블 『포박자』 / 한국 민간 신앙의 근간

9. 한국적 종교성의 원형 : 무교
한국인의 우뇌적 기질 / 단군은 무당 / 크리스천 샤먼 / 억압의 역사, 불굴의 생존 / 무속, 무, 무교 / 무교와 샤머니즘 / 무당의 자격과 굿의 종류 / 무당의 기능 / 굿과 신령 / 무교의 민중성

10. 일본 종교의 근간 : 신도
일본적 종교성의 원형 / 일본의 시작, 천황의 기원 / 가미와 신도 교학 / 불교와의 습합 / 국가 신도의 출현과 야스쿠니 신사 / 근대와 전근대, 그리고 그리스도교 / 일상 문화로서의 신도 / 현세적 희망의 투사 / 일본 문화의 심층

11. 한국에서 세계로 : 한국의 신종교
외래 종교와 자생 종교 / 동학-천도교 / 증산교 / 원불교 / 종교 체험의 해석적 측면 / 할 말은 많은데

12.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
유교 문화와 그리스도교 / 제사와 그리스도교 / 무교와 불교 문화 / 종교 문화의 상호 침투

참고할 만한 세계 종교 입문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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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교宗敎’라는 말은 19세기 말 일본 학자들이 religion을 번역하면서 만들어내다시피 한 용어이다. 그 이전 한자 문화권에서 ‘종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던 특수한 용어였다. 그저 ‘진리를 파악한 최상의 경지〔宗〕를 말로 나타내 가르친 것〔敎〕’이라면서 중국 불교에서 간혹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religion의 대용어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종교’는 ‘마루 종宗’자에 ‘가르칠 교敎’자가 붙어서 된 말이니, 풀면 ‘최상의 가르침 또는 으뜸되는 가르침’이 된다. 하지만 religion의 어원은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동안의 쓰임새를 정리해보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re-legere(다시 읽다)와 re-ligare(다시 묶다)의 두 가지 뜻이 가능하다. 이 가운데 학자들은 ‘다시 묶다’, 즉 재결합이라는 의미를 religion의 어원으로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 다시 묶는다는 말인가? 좀 의역하면, ‘죄로 인해 멀어진 신과 인간을 다시 묶는다’는 의미이다. 신과 인간의 재결합, 신을 다시 만난 인간의 내적 상태가 religion이라는 것이다. 과거 중국 불교의 용례대로 하면 ‘진리를 파악한 최상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 본문, 13-14쪽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통일로 가는 보훈>,<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사회는 왜 아픈가>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양한 종교들의 핵심을 명료하게 풀어 쓴 세계 종교 입문서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유일신 종교들, 힌두교와 유 ? 불 ? 선, 일본 신도의 아시아 종교들, 한국의 종교인 무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을 종교별로 다루었다. 2005년에 나온 초판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듬고, 일본 신도에 대한 장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세계 종교 해설서가 되었다.
이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짧은 분량에 핵심을 담음으로써 세계 종교의 지형도를 신속하게 파악하게 하는 것, 그리고 한국적 맥락을 견지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말로 된 양질의 세계 종교 소개서들이 제법 출판되어 있지만, 대체로 규모가 커서 일반 독자가 단기간에 핵심만을 파악하며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게다가 번역서인 경우에는 한국의 종교 문화적 맥락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아, 한국 종교사는 무의미하거나 세계 종교사의 변방에만 머물고 있는 듯한 무의식적 착각을 일으키게도 한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저자는 세계 종교의 핵심 중 핵심을 가능한 한 쉬운 말로 추리고 풀되, 그저 옛날에 있었던 남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면서, 세계의 종교 사상이 한국의 문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룻밤에 읽을 만큼의 짧은 분량 안에 담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세계의 종교 전통과 문화적 연결망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간결하고 깊이 있는 세계 종교 입문서인 것이다.
저자가 특히 신경 쓴 것은 문화적 감각이 종교와 연결되어 있음을 적절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문화 및 사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비종교인도 사실상 종교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또한 여러 종교에 대한 서술이 객관적이고 학문적이면서도 특정 신앙적 깊이나 독특성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종교백화점 국가이다. 한국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세계의 대 종교전통은 거의 없으며, 한국의 종교상황을 잘 보면, 세계의 종교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아가 ‘종교’라는 것이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과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고, 복잡한 인간사의 총체인 세계를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이 책이 다양한 종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자신의 종교적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접기

2021/08/12

Kang-nam Oh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1-3]

 Kang-nam Oh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신학책이나 종교학 책을 보면 서문에 저자의 자전적 고백을 싣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신학은 자전적이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Paul Knitter라는 신학자는 책을 쓸 때마다 자기가 어떻게 그런 신학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자기의 삶을 반추하면서 풀어준다.

나도 나이가 들어 뒤를 돌아보면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신적 눈뜸의 순간들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 중 열 개를 적어 자전적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풀어 본다.  (지금 대선과 올림픽 열기가 대단한데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낸다.  양해 있으시길...)

1.  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호적등본에 의하면 나는 일본 동경(東京都 品川區 北品川 3町目 282番地)에서 8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의 공습 때문에 피란을 가야했는데, 우리 식구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살던 히로시마(廣島)로 갈까 하다가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때 원폭 세례를 받은 히로시마로 갔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내가 네 살 때 식구들과 한국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산에 정착하려고 집까지 샀는데, 부산에도 미국의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인 안동으로 와서 정착했다. 안동읍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동네. 이름은 ’머물‘이고 한문으로는 원호동(遠湖洞).  지금은 원호리라 바뀌어 있다. 나는 초등학교를 우리 동네에 있는 일직(一直)국민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북쪽으로 작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우리 동네는 백성촌이라고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동네에서 유일하게 펌푸가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난리 통에 어떻게 가지고 올 수 있었던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망원경, 자전거, 커다란 둥근 밥상, 오동 장롱, 아코디온, 유성기 등이 있어서 꽤 잘 사는 집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 덕택으로 큰 형님은 의성군 단촌에 있던 고운사(孤雲寺) 주지의 미녀 맏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동네가 거의 가난했지만 특히 육이오 이후는 가난이 극심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산골로 들어가 송기(松肌)라고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와 물에 담궜다가 부드러워지면 송기떡이든 송기죽이든 해 먹었다.  그러나 보리고개를 맞으면 부황(浮黃)인가 하는 것으로 굶어 죽는 이도 있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유행가 '보리고개‘, “아이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하는 것을 실감하면서 산 셈이다.

거의 모든 집이 아침에는 보리밥을 먹고 점심은 아침에 해 놓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 마늘이나 마늘쫑이나 고추를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서 먹고 저녁에는 보리죽을 먹으며 연명했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놀다가 저녁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로 고무신을 공중으로 올려보내고 떨어질 때 엎어지면 저녁으로 밥을 먹고 똑바로 자빠지면 죽을 먹는다고 일종의 점을 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고무신이 엎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똑바로 자빠지기 마련이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보리죽 대신에 수제비 국을 자주 먹기도 했는데, 그 때 먹은 것에 질렸는지 지금도 나는 수제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때 먹은 고추 부각이나 호박잎, 피마자잎은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초등학교 4학년 쯤이라 생각된다. 우리 집은 신작로 옆이기 때문에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고무신을 하늘로 올려 보낸 다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에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가?  왜 다 같이 사람인데 이렇게 달라야 하나?  우리 동네 옆으로 중들(주들이라 불렀다)이라고 하는 꽤 큰 평야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거기 논과 밭 몇 마지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땅을 고르게 나누어주면 안 될까? 지금도 그 때 해질녁 남쪽에서 북쪽으로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에 골똘하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 때 이런 생각이 씨앗이 되었는가. 캐나다에 와서도 선거 때마다, 한국 사람이 입후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캐나다 무상 의료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신민당(New Democratic Party, NDP) 후보에게 언제나 표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투표권은 없지만 미국 대선에서도 언제나 민주당(Democratic Party)이 이기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지난 두 번의 미국 대선에도 민주당의 Bernie Sanders가 당선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2.  성경은 문자적으로 읽을 것이 못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어머님의 손을 잡고 안동읍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걸어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가시니 동행한다는 의미로 따라 간 셈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교회 학교를 다니던 형님이 방학 때 내려와서 아담, 하와니 엘리야, 엘리사 하면서 성경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나도 중학교 갈 때 그 교회 학교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당시 두꺼운 <전과자도서>를 몽땅 다 외운 것 같다. “태정태세문단세...”, “빨주노초파남보, 보남파초노주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사라가바나마”까지 입에서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사라가...는 악보에서 올림표(sharp)나 내림표(flat)가 없을 때는 다장조, 올림표가 하나 있으면 사장조, 두 개면 라장조, 세 개면 가장조, 내림표도 하나면 바단조, 둘이면 나단조, 세개면 마단조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 안동사범 병설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이것은 일직초등학교의 체면을 위한 것일 뿐, 처음부터 서울 교회학교로 가기로 한 것이어서 미련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교회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일년 동안은 모르던 성경 이야기, 특히 예수님의 생애를 배우면서 신이 났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성경의 이야기들이 문자적으로 맞을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하느님이 세상을 6일만에 지으시고 7일째는 쉬셨다고 했는데, 하느님도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하실 수가 있는가?  선악과를 두고 아담 하와를 시험해 보셨다고 하는데, 전지전능, 무엇이나 다 아시는데, 구태여 시험해 보실 필요가 뭔가?  선악과를 먹고 숨어있는 아담 하와에게 오시면서 너희가 어디 있느냐 물어보셨다는데, 다 아시는 분이 물어보시다니?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큰 벌을?  그러면 먹으려 했다는 것으로 시험 결과를 이미 아셨다면 이제 먹지 못하도록 말리셨어야지.  세상 아버지도 아이가 낭떨어지에 떨어지려 하면 가서 붙잡는데...  이런 식으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었다.  성경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니까 성경 선생님이 오강남은 믿음이 없으니 비록 성적으로 수석이지만 우등상을 줄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의 주장으로 우등상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James Fowler 교수가 말하는 신앙의 6단계 중 사춘기에 이르는 제3단계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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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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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 (2)

여기서부터는 약간 추상적이라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3.  온 세상이 함께 합창하다
고등학교 때 3년간 약 10km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통학 길에서 학교 부근에 가면 그 당시에는 오른 쪽으로 논이 있었다.  보통 친구 몇이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지만, 어느 가을 날, 그날 따라 혼자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고 가면서 내 삶의 진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던 벼이삭들이 춤추며 합창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치 천사들이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합창하는 듯하였다.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중국 고전 <장자> 제2편 첫머리에서 말하는 ‘땅이 부는 퉁소 소리(地籟)’인가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天籟)’인가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 웅장한 합창 소리로 하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생각이 내 속에 자리잡게 되고 이것은 내 영적 여정을 꼴지우는데 하나의 큰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는 일이다.  마치 화엄(華嚴)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있다는 상즉(相卽) 상입(相入),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세계를 미리 맛본 것인가?

4. 성서와 신화적 세계관
나의 이종사촌 형이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다녔는데, 그 형의 집이 대전이라 서울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쓰며 학교에 다녔다.  나보다 한 학년이 빨라 그는 대학생이지만 나는 아직 고3이었다.  그런데 그 형의 책꽂이에 재미나는 신학 책이 많았다.  김하태 박사의 책도, 폴 틸리히 책도 처음 접했다.  김하태 박사님의 책에 "종교의 정점(pinnacle)은 신비주의"라는 말은 내 일생을 따라다니는 말이되었다.  김박사님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뵙고, 비록 내가 연세대 출신이 아니지만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90회 기념 논총에 특별히 내 글을 싣도록 하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영어로 된 폴 틸리히 책애서는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는 것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 틸리히는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 중 한명이 되었다.  
아무튼 그 책꽂이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쓴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얇은 책이 있었다.  60년도 전 일이지만 지금도 그 책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노란 뚜껑에 비닐이 씌어져 있고, 옮긴이는 유동식 교수. (지금은 새로운 번역판이 나와 있다.) 그 책을 읽고 중학교 때부터 그때까지도 성경을 문자대로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혹은 틸리히 용어대로 ‘탈문자화(deliteralization)’해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실존주의의 렌즈를 통해 찾아낼 수 있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2001년 연세대학교 교회에 강연하러 갔을 때 유동식 교수를 만나 교수님이 번역해주신 그 책 때문에 제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고 말씀드리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 때 이후 해석학(hermeneutics)이 중요함을 확신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도 결국 기독교 성경과 교리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인 셈이고, 그 후 쓴 <또 다른 예수>라는 <도마복음> 해설서에서도 제1절에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구절을 풀이하며,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라는 주를 달았다. 
  
5.  신은 존재할 수 없다
교회학교를 다니고 주위와 가정 환경 등의 덕택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같은 교회 다니던 형 중에 서울대 국문과에 다니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을 통해 서울대학에 종교학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성직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런 내 입장에 종교학이 적격일 것 같아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학년에서는 주로 교양과목과 라틴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2학년 때부터 전공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쯤 어느 분의 병 문안을 위해 그 당시 위생병원이라 불리던 병원 시멘트로 포장된 오르막 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이란 말은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존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고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중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를 알게 되면서 틸리히도 결국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틸리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전이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틸리히는 신이 ‘하나의 존재(a being)’일 수 없고 ‘존재의 근원(Ground of Being)’이라고 했다.  또 신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무엇, the Unconditioned)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말하는 신이란 ‘신의 상징(symbol of God)’으로 우리는 이런 상징으로서의 ‘신 너머의 신(God beyond God)’을 체득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틸리히의 이런 생각은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을 Ungrund라고 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생각은 나중 <도덕경> 제 1장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도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범주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해도 곤란하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든가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도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하면 성립되기 곤란한 말이다.  인간의 제한된 논리로 보면 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있기도하고 없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을 류영모 선생은 신을 “없이 계신 이”라고 표현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맥을 같이 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신이 절대적으로 초월(超越)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 속을 비롯 만물 속에도 내재(內在)한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을 주장하는 사상가들도 많은데 이것도 “없이 계심”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나온 신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그야말로 신비(mystery)다.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 그대로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계속)
47 comments
Il-y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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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넘 재미있고,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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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욱
고3 때 좋은 자극을 만나신거네요.
부럽습니다. ^^a…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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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섭
저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기독교의 하나님이 5차원적 존재라면, 그보다 높은 6차원의 신이 있을 겁니다. 이럴 경우, 5차원의 신은 6차원의 신이 보기엔 죄인일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서 이렇게 인간이 괴롭게 되도록 했으니까요. 6차원의 신이 보기엔 인간을 만든 것 자체가 큰 죄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보기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신도 우리처럼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5차원의 한계에 갇혀 있으니까요.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6차원의 신에게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 수 있는 것이죠. 6차원의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6차원에 갇혀 있죠.
그리고 우리가 2차원과 1차원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의 존재를 알 수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소통할 수 없듯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우리는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인간끼리도 완벽한 소통이 안 되고, 같은 시공간에서 사는 영장류와도 안 되는데, 어떻게 차원이 다른 존재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소통이 안 되는데 무슨 죄가 있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뛰어나다고 하면 할수록 그 신과 우리는 소통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면 그 하나님도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은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지론입니다. 인간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순간, 말씀하신 대로 신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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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환
오교수님이 실재에 전문가이시니'드릴말씀은 없읍니다.다만 절대적 진리는' 해석을 포함한 생각의 차원 너머에 있읍니다. 주객미분전이죠. 무아로 멸진정에 들어야합니다. 굳이표현한다면' 다석선생님의'없이 있는 이'가 근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불비례. 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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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고준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해석'이란 절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말에 대해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는 말씀하신대로 언어도단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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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환
오교수님.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을 잘수용해주셨읍니다. 언어도단' 심행처멸' 불가사의. 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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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Kyung Koh
ㅋㅋㅋ 다양한 생각들을...좋아요
bravo, GIF may contain Simon Cowell, Two Thumbs Up, Bravo, Nice, Happy, Smile, Good Job, Thumbs Up, Americas Got Talent and 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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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Tae Kwon
불트만 ,틸리히 이렇게 해서 교양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성경의 부 교재를 정리하게 됩니다.저도 이런 책을 정리해서 전문성이 아닌 얇은 책 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을까 ? 어떻게 기도 할까 ? 라는 고차원이 아닌 쉬운 책을 하나 낼까 합니다.
비전문성 기독교입문자들을 위해서요.
본류는 교수님이 하시고 지천을 하는 사람들도 더 있고 하면 이 분야도 재미 있는 곳이 될것 같은데요.지금은 활성화가 덜 되서 심심 하거나 아직은 외롭고 한산하게 보여서 통행량을 늘리는 의미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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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I love this 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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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락
3. 온 세상이 함께 합창하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따라 신비나 환상에 빠져 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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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Suh Giulio Park
대학교 4학년때 건강상의 이유로 재수강해야했던 교육철학 시간에 이기론의 "理"와 불교의 "空", 도교의 "道"의 개념적 유사성을 정리한 페이퍼를 작성하며 그때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being으로서의 神의 존재를 ground of being으로 확장해나갔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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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박준서 대학 4년 때라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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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nae Kim
신의 상징으로서 신 너머의 신을 체득해야한다. 공감합니다. 오늘 우물에서 건진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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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Jung
각 개인의 삶이 잘 쓰면 모두 역사책이라 오교수님 글을 읽으니 종교학자로 살아간 삶이 새로운 신선한 역사책을 읽는 기분입니다. 저가 무지한 종교에 대해 많이 배웁니다.
저가 남미를 여행하며 모두 일할 시간인데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신기했습니다. 삶이 참 힘든가보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고통을 감해주는 마취제 같은 역할, 종교의 순기능을 생각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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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Daniel Jung 종교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같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종교인이 종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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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식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목이 될 나무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군요. 예수는 없다 등등 오박사님의 우물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늘 고마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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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Lee
'종교의 정점(pinnacle)은 신비주의' 저도 참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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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Dean Lee 김박사님이 쓰신 영어 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he state of mystical consciousness, the pinnacle of all religious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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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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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Lee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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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신에 대한 해석이네요. 수많은 신이 있어요. 보편전쟁과 특수성 전쟁과도 같은, 신이 있고 없음에 대한 논쟁인데, 있고 없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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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tsSo8 Jmutpinliyot atsn nsoSa0re9do:4ee5sd  · 
세 번째 이야기 -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나의 독백에 공감하신다는 분들, 더욱이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는 페친분들이 계서서 감사합니다.  특히 박충구 교수님은 조금 전 “심오한 것에 대하여 편하고 쉽게 써주셔서 재미가 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고 하셔서 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약간 “깔때기”성 발언이 있더라도 널리 이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혹시 ‘깔때기’라는 신조어를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말씀드리면, ‘자화자찬’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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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양종교 사상에 눈뜨다

한국에서 종교학과를 다니면서 주로 서양의 종교 사상을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주 관심은 기독교 사상이었다.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를 수강하고 성경을 원문으로 읽기도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라틴어로 읽었다. 아우구스티누를 1년에 걸쳐 공부하는가 하면 기독교 사상사, 칸트 독어 강독, 하이데거 강의 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류승국 교수로부터 유교도 배우고, 대학원 때 홍제동 이기영 교수님 댁에 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같이 읽었지만 그 때만 해도 유교나 불교에 심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1년 초 캐나다 토론토 옆 해밀턴에 있는 맥매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 종교학과로 유학을 갔다.  대학원 학생만 80명으로 캐나다 최대의 종교학과가 있는 대학이었다. 그 때 서양에서는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이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서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고, 서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동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도록 했다.  나는 서양종교는 한국에서 열심히 했기에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고 서양 종교사회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대학원 과정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좌는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관론(中觀論, Mādhyamika system)의 세계적인 권위 T.V. R. Murti교수에게서 1년에 걸쳐 배운 불교 중관론 강좌였다.  인도 Banaras에 있는 Hindu University 교수인 그가 마침 방문 교수로 와서 그가 직접 쓴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를 교재로 하고, 강의 중 산스크리트 원문을 줄줄 외우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간 그의 강의도 훌륭했지만 특히 그의 책은 눈을 확 뜨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절대적인 것은 공(空, śūnyatā)이다. 절대적인 것에는 인간의 사견(邪見, dŗṣṭi)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텅빈 상태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에 갖다 붙이는 온갖 범주, 온갖 교설, 온갖 이론에서 해방되어 직관과 통찰, 프라즈나파라미타(般若波羅蜜多)로 직접 꿰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집에서 소파에 앉아 그의 책을 읽다가 크게 소리를 지를 번 했다.  공 사상이 이렇게 심오할 줄이야!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렇게까지 생각했을 수 있을까. 골수를 깨고 들어오는 듯한 지적 희열을 느꼈는데, 그 순간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외에 인도 베단타 철학, 도가 사상, 선불교 사상, 산스크리트 등을 이 분야의 전문가 교수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또 다른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깨침’이었다.  “깨침(悟)이 없는 선(禪)은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 같다.”고 한 스즈키(D. T. Suzuki)나, 자명종 시계는 그것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시계를 해부해서 그 기계적 구조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등의 지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종교의 핵심은 깨침이라는 것, 모든 종교적 교설이나 의식(儀式) 등은 깨침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 손가락을 보지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는 표월지(標月指),  깨침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등이 내 마음에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공부를 통해 그 문제의 책 <예수는 없다> 서문에서도 “아, 종교라는 것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구나!”하고 외치게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확신에서 학생들에게 러시아의 무명 저자가 쓴 󰡔예수기도󰡕를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과제도 내고, 내 자신도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번역 서문에 “종교라는 것이 결국 교리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체험과 깨달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고 동양종교 중 하나로 한국의 동학(東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고 선언하고, 그 하느님과 내가 하나다.  내가 곧 하느님이다(人乃天). 나만 하느님이 아니라 내 이웃도 하느님이니 이웃 섬기기를 하느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라는 기본 가르침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보다 윤리적으로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그날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종교사에서 본 동학의 위대한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로도 썼다.
학위논문 재료 수집차 일본 동경대학으로 가는 길에 한국에 들려 수운회관을 방문했다.  교령님을 만나 내가 본 동학, 그 놀라운 가르침, 21세기 대안 종교로서의 훌륭한 자격 등을 말씀드렸다.  (은퇴하고 한국 가서 천도교로 초청되어 여러 번 강연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책이나 강연을 통해 동학을 널리 알렸는데 그것이 공헌이라고 수운 선생 기일인가의 큰 모임에서 상패와 금일봉도 받았다.^^)  
(계속)

47 comments
이흥복
종교를 진정 알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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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상
동학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지금 유튜브에서 도올선생이 자신의 저서「동경대전」강의를 하시면서 그간의 해석들이 "개똥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외람되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 대한 평론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후학을 위해 늘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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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덕상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잘 풀이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개똥도 약으로 쓰일 때가 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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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배
May be an image of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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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광배 제 책을 읽으셨군요. 제가 여기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던 세계종교 과목을 우리 말로 정리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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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배
쉽고 재미있게 잘 설명해 주셔서 잘 보고있습니다! 좋은 글도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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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더덕을 까면서 찐득이는 손으로 읽느라 덕분에 천천히 읽으며 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살짝 제가 늦게 태어났지만 같은 세대거든요. 감사하면서 다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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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Hum Kim 읽어주시고 다음을 기다려 주신다니 고맙고 박수와 두 개의 느낌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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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기독교 종교적 이해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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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경일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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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구
교수님
좋은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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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화구 잘 보셨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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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
외국에서 동양종교를 공부하신 여정에 놀랍습니다. 귀한 책 기도: '예수의 기도'를 주기도문으로 흔히 알고 있기에 '예수기도'로 구별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후속 편 '계속'이 기다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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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안광덕 맞아요! 예수기도로 해야겠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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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sub Choi
비판적 사고를 강조했던 제게는 殺佛殺祖가 깊이 꽂이네요.
덕분에 무더위를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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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Hyunsub Choi 세상에 제 글을 읽고 무더위를 이기시는 분이 계시다니 가히 불가사의입니다만 그렇다고 해 주시니 아무튼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나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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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락
6. 동양종교 사상에 눈뜨다.
종교를 배운다는 말이 낯설게 들립니다.
종교는 삶이고 과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스스로 더 큰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주의 광대함에서 인간의 존재를 본다면
인간은 인간일 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눈 속임이나 거짓일 것입니다
인간은 한 없이 연약하고 미개합니다.
그리고 무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부처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의지하고 추종하는 것이 종교가 되선 안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만이 자기를 위할 수 있습니다.
목사 신부 승려가 기도해 준다고
부모가 정성을 드린다고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자기 생각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를 깨닫고 대자연 앞에 겸손해야 생명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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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최형락 좋은 생각, 좋은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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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Cheol Lee
저는 선생님이 번역과 주해를 하신 도덕경과 장자를 늘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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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이걸 책으로 발전시키시면 너무나 좋을듯 합니다. 우리에게도 카렌 암스트롱 못지않은 세계적 종교학자가 계시다는 자랑스러움이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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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김민웅 아이고 황공무지로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만 새겨 듣겠습니다. 우선 에큐메니안에서 옮겨 싣겠다고 하네요. 고맙습니다. 저도 김 교수님이 꿈꾸는 대한민국이 되길 언제나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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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Kang-nam Oh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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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성
교수님.
소중한 고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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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용수의 중관사상을 본격으로 공부하셨네요. 종교가 교리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과 깨달음이라는 통찰에 공감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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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감사합니다. 지넌 중관학을 몇 년째 공부하는 '척'만 하고 있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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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부
제 경우도 나름의 신적체험과 깨달음/각성으로 인해서....
차츰차츰 교리적 준수나 심지어 이단타파(?)애도 큰 관심이 없고...
특히 교리+수행(결국 고행)마져도 타자들을 향한 보여주기/의인시하려는에서 넘어서니 그야말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의 축복누림으로 지금여기에서 작은 천국을 고백하며 또한 지극히 미력하지만 자원하여 만들어가며 그러니까 이생후 영생/저천국은 아예 언제부턴가 다 맡껴버리고 지금여기 오늘을 담대하게 한걸음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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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부
 · Reply · 2 w
김 종희
교수님의 글 많이 배웠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서경보 스님 생각이 났습니다. 경동교회에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강원용 목사님과 경동교회 직원 모임이었고 외부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서경보스님께서 한 시간 선 강의를 하시고 이어서 단전호흡 강의 실습을 하셨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성경도 불경 등 경전이 필요없고 명상을통한 직관으로 진리에 이르고 경전은 진리를 가르키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시면서 견월망지 손가락을 보지말고 손가락이 가르키는 달을 보라. 연못에 비친 달을 보지말고 하늘에 뜬 달을 보라는 강의를 듣고 신선한 깨우침을 얻었던 기억입니다.
칼 발트의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 선포된 말씀 과 같은 맥낙임을 어렴프시 느꼈습니다. 오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도 그런 글이 아닌가요.샬롬
 · Reply · 2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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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30 tsasJulery Sapdtofuansrdt onrm0e6:0dl7uo ·



막간을 이용하여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 자전적 고백 (4)>를 이어가기 전에 막간을 이용하여 웃기는 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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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를 받고 1977년 초 미국 오하이오주 옥스퍼드(Oxford)라는 아담한 도시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Miami University) 종교학과에 나 혼자 가서 한 학기 가르친 일이 있었다. 이 학교는 Oxford라는 도시 이름과 Miami라는 학교 이름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Florida에 있는 Miami 대학은 University of Miami라는 이름으로 구별된다. Miami University는 한 때 배우 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이낙훈(李樂薰)씨의 출신학교이기도 하다.
그 때 그 대학 종교학과 비서의 친정집에서 하숙을 했다.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그 넓고 조용한 집에 친절한 노부부와 고3 딸만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한 방을 얻어 혼자서 열심히 명상을 했다. 아침 저녁으로 냉수마찰도 해가면서....
그 집 Hatton이라는 노부부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으로 남편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여러 공장들에 기술 상담을 하는 분이었다. 부인은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하는 뜻으로 "Not that I know of"라는 말을 자주 하여 나도 그 말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인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라는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보니 매일 시(詩)한 편씩이 실려 있었다. 나도 재미삼아 시를 하나 써서 그 신문에 기고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시가 그 신문에 나왔다. 원고료도 그 당시 돈으로 30불인가를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 서류 정리를 하다가 그 신문 조각이 나왔다. 1977년 6월 24일자 29면 하단에 나와 있었다. 약간 부끄럽지만 이왕 찾은 김에 한 번 옮겨본다.

The Root
To the Eternal Root,
I now return my heart,
Quietly
Sitting.
My heart,
Filled with mysterious heat,
Bursts into tranquility.
O! New Life in the Root.
A fresh New Life, cleansed with
Tears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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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말로 옮겨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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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영원한 뿌리를 향해
이제 내 마음 그리로 되돌린다
조용히
앉아서
내 마음 알지 못할 뜨거움으로 가득차
터질 듯 평온 속으로 잦아든다.
아, 뿌리에서 찾는 새로운 삶
기쁨의 눈물로 씻어진
신선한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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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그 당시 의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줍잖게 일종의 오도송(悟道頌) 흉내를 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짧은 시에도 도덕경, 장자, 참선, 정좌, 파스칼 등의 요소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결코 내가 도통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30세 전후 crucial age에서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 Richard Maurice Bucke의 주장이나, 30대 초반에 ‘개인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 시작된다고 한 Carl G. Jung의 이론에 따르면 나도 그 당시 35세 청년으로 뭔가 특별히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학위를 끝내고 논문 쓰는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태에서 마음 가는대로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며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이런 시가 나온 것 아닌가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인생에서 하나의 전기(轉機) 비슷한 것이 마련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한 번 웃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The Root To the Eternal Root, I now return my heart, Quietly Sitting. My heart, Filled with mysteriousheat, Burst into tranquillity."
Woo Fa, 이찬수 and 30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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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ophyeon Min
    ㅎㅎ웃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음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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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t1Sapg AugeusoSotn saohrote s0u9fhcfl:3fhsdd0  · 
다시 막간을 이용하여
<자전적 고백> 시리즈을 올리는데 어느 신문사가 자기들의 신문에 그 글을 싣도록 해달라고 하고, 덧붙여 자기들 신문에 글이 나온 다음에 페북에 올려 주면 좋겠다 하여 지금 일단 멈추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막간을 이용하여 다른 종류의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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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님의 선생님인 다석 류영모 선생을 두고 “기독교 종교혁명가로 볼 것인가 기독교를 벗어난 사상가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어느 단톡방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솔직히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거들라고 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물론 그가 기독교로 시작했으니 그를 기독교인이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20대에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정통 기독교의 울타리를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혁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보다 기독교가 주는 전통적 신앙관을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라 봅니다.  그의 사상의 지평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 확대된 것이지요.  하느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요3:16을 하느님이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그의 씨앗을 심으신 것이라고 한 그의 풀이만 보아도 그것이 기독교 성경절을 인용했지만 정통적 기독교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간직했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만은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그 너머의 ‘속내’를 보려고 했습니다.  사람(l)이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십자가라는 해석, 올라간 예수를 내려오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라갈 생각을 해야 된다는 재림 해석,  대신 죄를 속해준다는 대속 대신에 스스로 죄를 없애야 한다는 자속 신앙 등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도덕경도 읽고 불경도 읽고 톨스토이도 읽었습니다.  무엇을 읽던 그는 그의 사유를 통과해서 얻은 결론을 나름대로 우리말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그를 기독교인으로 혹은 기독교를 혁명하려 한 기독교인이라 한정해서 규정하는 것은 어딘지 어패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제가 북미 학생들에게 세계종교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저보고 저의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너희들은 내 종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어보면 불교를 가르칠 때는 불교인 같고, 노장을 가르칠 때는 도교인 같고, 기독교를 가르칠 때는 기독교인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보았다.  “나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지만 지금 나의 종교는 일종의 ‘메타 종교적(meta-religious)’이다”하는 식으로 농담반진담반으로 대답합니다.  꿀벌이 어느 한 종류의 꽃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기 주위의 꽃들에서 꿀을 따듯 한다고 할까요. (꿀에도 유채꿀, 아까시아꿀 하는 것을 보면 벌들이 어느 한 종류의 꽃에서만 꿀을 따는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이 비유은 out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특정 기독교 교파에 속한 집에서 자라 그 교인이 되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일찌감치 그 교파는 물론 기독교도 떠났고, 학위를 받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는 그 교파나 기독교가 설정한 가르침의 울타리 안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진해서 교적 탈퇴를 시청해서 지금은 아무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저는 캐나다에서 퀘이커 모임에 자주 참석하고 밴쿠버 한인 캐나다연합교회에도 출석하여 그 교회 교인명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LA 형님 댁을 방문하면 형님 따라 옛날 그 교파 교회에 가서 옛친구들도 만납니다. 연세대, 감신대, 한신대, 서울신대, 장신대 같은 신학교에 가서 강연도 하고, 불교 사찰에도 참석하고 거기서 설법도 하고 강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백팔배도 합니다. 천도교에 가서 여러 번 강연도 하고 같이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도 외우고 원불교 원음방송국에 가서 2년간 매주 방송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남녀 평등을 강조하고 복비는 것을 미신이라 하여 거부하는 성덕도라고 하는 이색적인 한국 종교 모임에 가서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 그 종교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를 저 자신도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아마 믿음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은 제가 기독교인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이 믿는 식의 신을 믿지 않는다고 ‘무신론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불려도 저는 상관할 것 없습니다.  (최근 캐나다 연합교회 Gretta Vosper라는 어느 여목사님은 스스로 자기를 ‘무신론자’라 공표했지만 교단에서는 이와 관계 없이 목회를 계속하게 허용했습니다.)
제가 <예수는 없다>를 써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믿는 ‘그런 예수는 없다’고 하면서 제가 새롭게 이해한 대로의 기독교를 전하려 한 것이었는데, 물론 의외의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기독교인이 쓴 글이라 볼 수 없다고 배척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정통 근본주의 기독교의 신관, 기독론, 성서해석방법, 선교론 등을 모두 “애정을 가지고” 뒤집어엎으려 했습니다. 부제가 “기독교 뒤집어 읽기”이고 영어로 Reading Christianity Inside Out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꿈에도 혁명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자전적 고백’ 시리즈에 자세히 언급됩니다.)
이와 같은 저의 정체성을 이 토론방에 계시는 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규정하실지 궁금합니다.  꼭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저를 어떻게 규정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자신은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죽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장례 주례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있는 ‘아하! 모임’ 사람들이 농담삼아 자기들이 맡아 하겠다고 했지만, 캐나다에서 죽으면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물론 캐나다에도 ‘길벗모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저를 종교적 무국적자나 다국적자 혹은 경계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감히 다석 선생님과 저를 대조하다니.  그러나 다석 선생님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저의 입장과 비슷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 세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산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가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In the depth of every living religion there is a point at which 
         the religion itself loses its importance.)
                                                                   - Paul Til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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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comments
Jong-hun Kim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See more
 · Reply · 1 w
임원
자유인 혹은 경계인 !!!
 · Reply · 1 w
Charlie Lee
一以贯之하시고 밝고 높고 깊으시네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 Reply · 1 w
김영
신앙과 사상을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규정하려는 것은 매우 무모합니다.
오교수님께선 오직 진리의 자유로움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단은 진리의 반대입니다.
 · Reply · 1 w
김인범
종교와 탈종교의 긴장이 신앙이기도 하고, 그것이 왜 그런지 그 내용이 복음이라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합니다.
 · Reply · 1 w
이흥복
좋은 글 감사합니다.
 · Reply · 1 w
Panim Kim
다석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독교에서 어긋났고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고 그분이 잘못되는 것 아닌데..
한국적 기독교니 어쩌니 하면서 약간의 비평도 허용치 않고 그를 우상화하려는 사람들. 특히 감리교에 많이 있어서 우려의 마음이었습니다
 · Reply · 1 w
Kang-nam Oh
Panim Kim 그런가요? 저는 몰랐는데요. 감사합니다.
 · Reply · 1 w

이건주
김수영 시인의 다원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수영의 1950-60년대 시에서 예수나 부처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함석헌, 유영모 선생의 영향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교수님의 종교적 다원주의에 공감하고 지지합니다.
 · Reply · 1 w
Kang-nam Oh
이건주 김수영 시인에게 그런 면이 있었군요. 저는 김수영 시인을 잘 모르는데, 어느 분이 제 글이 김 시인의 글과 닮았다고 하더군요.^^
 · Reply · 1 w

김현호
네 고맙게 읽었습니다.
달리 평할수 없습니다.
 · Reply · 1 w
고준환
제가 보기에는' 부처는 부디스트가 아니고'예수는 그리스도이지'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다석선생님은 기독교로부터 시작했으나' 한국이 낳은 그리스도가 되셨읍니다. 기독교도 가운데' 훌륭한 크리스찬도 많으나' 말로는 근본적'정통적' 전통 예수교를 주장하나' 실제는 적그리스도인 경우가 흔합니다. 오교수님은 좋은길을 걸어오셨읍니다. 앞으로는 학설차원을 넘어' 절대적 대각이나' 중생체험을 하시기바랍니다. 다
 · Reply · 1 w
Kang-nam Oh
고준환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일차적으로 종교학자이지 수행자는 아닙니다. 너무 큰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Reply · 1 w
고준환
Kang-nam Oh 오교수님.미안합니다. 제가 부담을 드린것 같아서요.오교수님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십수년전 심재룡교수와 함께 오교수님을 만나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읍니다. 저는 또'성경엔없다' 라는 책도 썼읍니다. 저는 종종 오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배우고' 오교수님이 종교학자이시나' 그한계를넘어' 자유자재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외람된 글을 썼읍니다.다시는그런일 없을것이고'미안합니다.또 감사합니다.늘 건강하소서.
 · Reply · 1 w

고준환
사.
 · Reply · 1 w
태영최
유교전공자께서 아직도 ㅡ예수는 없다 ㅡ하시네요
예법에 따르면 ㅡ예수님은 안계신다 ㅡ하셔야.
 · Reply · 1 w
안광덕
제도종교에 갇히지 않고 참 영성종교를 보여 주신 선생니이십니다. 한참 제가 신학공부 할때 서울 하늘 아래 계시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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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안광덕 아쉽군요. 이렇게 페친이라도 된 것이 기쁨입니다.
 · Reply · 1 w

Joon Suh Giulio Park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라 하였습니다.ㅎㅎㅎ 뭐라 부를 이름이 없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1 w · Edited
Kang-nam Oh
박준서 재미있네요. 한세대 계속 가르치게 된 것 축하합니다. 그곳에서 도덕경 같은 것 들먹이면 위험한 것 아닌가요?^^
 · Reply · 1 w
Joon Suh Giulio Park
Kang-nam Oh 감사합니다!!!
다행히 개인적인 신앙의 색채에 대해선 제재가 있지는 않아 도교적 삶을 지향하는 천주교인으로서 재직해도 큰 문제는 없답니다.ㅎㅎ
 · Reply · 1 w
Kang-nam Oh
박준서 아, 그런가요. 금시초문인데 다행이군요.^^
 · Reply · 1 w
Joon Suh Giulio Park
Kang-nam Oh 딱히 기성교단에서 이단으로 찍은 데만 아니면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저야 오피셜로 천주교인이지만 도교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라 뭐 측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서요.
 · Reply · 1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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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ltSd4nd ddSAugupost ttuatuenSsoongr 1em8:4d6u  ·
 
또 다시 막간 - 종교와 세속화의 문제
제 <자전적 고백> 시리즈 4를 올리기 전 또 다시 막간을 이용한 글 하나 올립니다.  한국의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8월11일 Zoom으로 강연하라고 해서 그 때 할 이야기들을 대략 적어보았습니다.  질문자로 제 후배이자 제자인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가 등장하는데, 질문 중 하나가 현대의 세속화가 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 페친들에게도 관심사가 아닐까 하여 여기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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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런데 전통 종교의 의미 없는 교설이나 예식 등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전통 종교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통 “세속화”라 합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불어닥치는 탈종교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을 6일만에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걸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현대 교육을 받은 현대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이런 전통적인 종교들이 설득력 있는 대안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처럼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을 궁극관심으로 여기는 결과, 정신적인 가치를 등한시하는 경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세속화”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오늘날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세속화가 급진적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적 용어로 하면 이런 세속적인 가치를 신(神)인 것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세속화는 참된 의미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화(secularization) 혹은 세속주의(secularism)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람직한 세속화"입니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등을 저술한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그의 최근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2018)에 세속주의의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적 종교에서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증거(observation and evidence)에 기초하여 진리를 추구한다. 
--어느 단체나 인물이나 책만이 진리를 독점한 수호자인 것처럼 그런 것들을 신성시하지 않고 진리가 고대 화석화된 뼈들이나 저 멀리 은하계나 통계자료나 다양한 인간들의 전승 기록 등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 진리를 그대로 인정한다.
--이런 저런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세상에 편만한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자비(compassion) 때문에 윤리적인 삶을 살아간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하는 것은 신의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살해하는 것이 생명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간이 비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신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을까를 알기 위해서 과학적 진리(scientific truth)를 중요시한다. 과학적 연구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자비는 맹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자유(Freedom)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자유를 중요시한다.
--세속적 교육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증거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의견을 의심해보고 우리 스스로를 재점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역사는 무지를 인정하고 어려운 질문을 제기할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모든 사람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한 가지 대답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보다 더욱 융성할 뿐만 아니라 더욱 평화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들이 가진 진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보다 더욱 폭력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보통은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질문을 제기할 수 없는 대답들보다 훨씬 훌륭하다.”(People afraid of losing their truth tend to be more violent than people who are used to looking at the world from several different viewpoints.  Questions you cannot answer are usually far better for you than answers you cannot question.) (제 생각: 현 교황은 근본주의는 그 자체가 폭력적이다고 했습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태도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뜻이겠지요.)
--세속주의자들은 책임(responsibility)을 중요시한다.  신이 이 세상에 관여하여 착한 사람은 상주고 악한 사람은 벌준다든가 우리를 굶주림과 역병과 전쟁에서 보호해준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에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역병을 관리하고 기아를 물리치고 평화를 유지하는 등 현대 사회가 이룩한 성취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것이 신의 보호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들의 지식과 자비를 계발한 덕택이다.  물론 범죄나 종족말살이나 생태 파괴 등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도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라 받아들여야 한다. 기적을 바라며 기도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물어보아야 한다.(제가 항상 주장하는 바입니다.  "관여하는 신"을 상정하면 가난한 사람을 보아도 신이 가난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따라서 신을 열심히 믿는 사회는 복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문판 209-215)
만일 이런 것이 세속화라면 우리는 이런 세속화는 종교의 본래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환영해야 하고 나아가 이런 세속화를 촉진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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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comments
Gokin Moo-Young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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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tSpn5oomnusohredi  · 
계속 막간 이용!
자전적 고백을 올릴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계속 막간을 이용합니다.
오늘 플라톤 아카데미의 부탁에 따라 <인생교과서, 함께 찾는 삶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와의 대담 녹화를 끝냈습니다.  같이 한 얘기는 거의 다 이곳 페이스북에 올렸던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초입부분에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여기 올린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부분만 여기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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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종교가 무엇인가요?  종교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요.
답: 종교가 무엇인가 대답하기 전에 왜 종교를 연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국의 Oxford의 인류학자 R. R. Marret에 의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를 라틴말로 “homo religiosus”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를 다 돌아본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무슨 형태로든지 종교가 없는 부족이나 족속은 없고, 그에 비해 종교적인 낌새를 보이는 동물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동물과 비교해서 homo sapiens, 지적인 인간, homo faber, 공작하는 인간,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등으로 부르면서 이런 것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는데, Marret에 의하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의 유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종교를 모르고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학, 심리학, 철학, 문학, 사회학, 경제학 등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인데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인식 하에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심리학, 사회학 등과 함께 “종교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종교학을 독일어로 Religionswissenschaft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종교과학, science of religion입니다.  제가 캐나다 유학 갔을 때만해도 종교학과의 영어명이 Department of Science of Religion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어권에서는 science라는 말이 주로 자연과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카고 대학 같은 곳에서는 종교의 역사적인 면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History of Religion(종교사학)이라 부르고, 영국에서는 비교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Comparative Religions(비교종교학)이라 불렀는데, 요즘은 Department of Religious Studies 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에 대한 정의는 그야말로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독일의 종교사상가 루도르프 오토의 라틴어 정의,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엄청나고 매혹적인 신비”라는 것이고, 독일계 미국 신학자  폴 틸리히의 “ultimate concern” “궁극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추상적인 정의를 설명할 시간은 없고, 제가 그동안 생각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참된 의미의 종교란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  우물안에서 볼 수 있는 것만 전부인 줄 알고 있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아하! 하고 놀라는 것, 이런 것이 종교가 가져다 주는 경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더 이야기를 확장하면 이 개구리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밑에서는 그 주위에 있던 화단이나 집들을 보다가 좀 더 올라가면 저 멀리 호수도 보이고 다른 동네도 보입니다. 다시 하아!를 외칩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저 멀리 바다도 보이고,  다시 아하!  또 더 높이 올라가면 바다 건너에 있는 섬들도 보이고 다시 크게 아하!  이제 이 개구리는 우물 속에 있던 개구리가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개구리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아하 체험의 연속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무엇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어 자유스러워지는 삶을 살도록 해주고, 사물을 더욱 높고 넓은 시각에서 보고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좀 어려운 말로 고치면 사물의 실상, 혹은 실재(Reality)의 보이지 않던 다른 면, 혹은 다른 차원을 발견하여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결과 옛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실상의 더 깊은 차원에 눈뜨므로 삶이 그만큼 자유롭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종교학자 프레드릭 스트렝이 말하는 종교의 정의가 “a means to ultimate transformation(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인데, 제가 생각하는 종교 정의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transformation, 변화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시험 문제로 꼭 내는 것은 transformation과 information을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경전이나 교설이나 예식은 일차적으로 transformation을 위한 것이지 information(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불경에서 과학적이나 역사적 정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제공하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카소가 눈이나 코가 이상스럽게 그려진 그림을 그린 것은 생물학적인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슨 변화를 주려는 것이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 중 한 분이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도 종래까지의 “인습적 기독교”(conventional Christianity)가 “천당/지옥(Heaven/Hell)”을 강조하는 종교였다면 이제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newly emerging Christianity)는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책 중 많은 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기독교의 심장>이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쓰다보니 대담했던 것하고 좀 달라졌습니다만 별 상관 없겠지요.^^
14 comments
Hyunsub Choi
교수님의 팻북 종교 강좌가 너무 재미 있어요.
무료 강좌니 더욱 더요. ㅎㅎ
다음 강좌가 기다려지기는 처음 같네요.
감사합니다.
 · Reply · 13 h
Kang-nam Oh
Hyunsub Choi 아이고 감사합니다. "무료 강좌"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 Reply · 4 h

윤종모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가 됩니다.😍👌👌
 · Reply · 13 h
김재성
세계에 종교학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혹시 아시는지요? 오강남 종교학자님?
 · Reply · 12 h
Kang-nam Oh
김재성 세계에 종교학자가 몇명인지는 모르지만 매년 미국과 캐나다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열리는 미국 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AAR)에 제가 캐나다로 유학온 이래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년 참석했는데, 그 때 보면 참석하는 학자들 수가 대략 8천명 내외였습니다.
국제종교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he History of Religions, IAHR)는 매 5년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는데, 제가 참석할 때 보면 AAR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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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Park
공감
 · Reply · 10 h
Youngluck Sheen
교육의 목적(purpose of education)과 흡사한 부분이 많군요.
 · Reply · 10 h
Kang-nam Oh
Youngluck Sheen 그런가요? 구체적으로 어느 면에서 그런지가 궁금하네요.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면에선가요?
 · Reply · 4 h

Kang-nam Oh
어제 대담 끝나고 올리느라 피곤했던지 오늘 보니 오타가 몇 개 있네요. 공유하신 분들은 오늘 수정한 버전으로 바꾸시면 좋겠습니다. 예기->얘기, 영여->영어, 그의 중->그의 책 중.
한 가지 덧붙이면 종교학을 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종교 전통에 정통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종교학의 창시자라 여겨지는 Max Müller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종교학의 또 한 가지 조건은 "신앙고백적(confessional)"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하는 식의 접근은 종교학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 가지 다른 전제조건이 있지만 이정도에서 그칩니다.
 · Reply · 5 h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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