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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이은선 - 토마스 베리

(2) 이은선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6.10(토)> -횡성으로의 서재 이사와 토마스 베리- 지금까지 횡성과 서울... | Facebook

이은선
14 m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6.10(토)>

-횡성으로의 서재 이사와 토마스 베리-

지금까지 횡성과 서울 부암동으로 오가며 살았는데, 이제 횡성에 더 많이 있기 위해서 서재를 횡성으로 옮겼습니다. 글쓸 일이 있으면 서재가 있는 곳에 머무르며 그곳에 주로 있었는데 이제 그 서재를 횡성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더 집이 될 것같습니다.
그동안 손주들에게서 옮긴 감기가 잘 낫지를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병원약이 독해서 그런지 약먹고 더 힘들어서 남편과 나는 약을 끊고 비타민 씨와 유산균 등으로 열심히 노력했고, 이제 거의 물러갔습니다.

횡성 집의 여러 군데를 수선하고, 이층을 서재로 하기 위해 책장도 더 마련하고, 그 가운데서 지난 11월회 국제 퇴계학회 발표문, "퇴계 사상의 '信學'적 확장-참 인류세 시간을 위한 토대 마련하기"라는 글도 수정 보완이 끝나서 이제 곧 나오게 됩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누라는 심사자들의 권고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횡성에 와서 첫번째로 읽게 된 책이 토마스 베리의 평전이네요. 두 여성 제자가 쓴 평전에 
그가 어떻게 어린 시절 깊은 자연의 경험 속에서 먼저 세계 다양한 종교와 문명에 관심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구 전체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확장되었는지를 밝혀줍니다.
 '위대한 과업 (great Work)'에 대한 의식을 떼이아르 드 샤르뎅으로부터 얻고, 그 실현을 위한 사명감으로 지구와 인간을 다시 이어주고자 94세까지 지구학자로 산 이야기입니다.

제국주의 착취와 아메리컨 인디언 학살의 서구 미국인이 아닌 동아시아 종교 문명권의 한국인으로서 인류세와 그것의 정의로운 방향, 그에 대한 두렵고도 떨리는 성찰을 한국학으로 하는 일이 저의 관심입니다. 

마침 작년 변선환 출교 30년을 맞아 있었던 행사에 이어서 한국의 거의 모든 종교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 40여 분의 사유가들이 함께 쓴 책이 나왔습니다. 남편 이정배 교수가 그 책을 받으러 어제 먼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또 하나의 위대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장벽을 이겨내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와 문명의 갈 길을 40여명의 다양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으니요!

아침 일찍 산책하며 새소리와 벌레 소리, 나무 사이와 풀섶을 걸으며 앞으로의 시간과 있을 일들을 생각합니다. 사람에게서의 변화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곳에 와서,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자연의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동안 변화의 일을 친구들께 잠깐 보고드립니다. 이사와 정리에 힘을 보태준 동생과 여러 인부들, 이웃들께 감사합니다.
이제 손주들도 커가니 그들이 부모와 떨어져서 스스로 이곳에 머무르며 자연을 사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오래전 세종대의 한 제자가 선물한 저의 학문적 첫사랑 테이아르 드 샤르뎅의 사진을 다시 횡성 서재에 걸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위해 기도합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한국염

토마스 베리에 대해 어디선가 회자되어 짧게 읽은 적이 있는데, 전기가 있군요.

2022/12/16

(李信)이신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 - 크리스챤하우스

(李信)이신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 - 크리스챤하우스



(李信)이신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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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李信)이신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
소비자가 19,000원
쪽수 508p
제품 구성 낱권
출간일 2021-12-02
목차 또는 책소개 상세설명참조



‘돌’의 소리를 듣고 외쳤던 혁명가, 이신(李信)

이신(李信, 1927~ 1981)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는 목사이자 화가, 시인이었다. 아니,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사회와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꾸려 했던 혁명가였다.
그는 돈과 직위와 건물과 도그마를 우상화하는 것을 멀리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뛰어난 화가이자 목사였지만 한국 교회의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박사 출신이지만 낮은 삶을 살아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본질 신앙을 그림에 담아내며 평생 ‘한국적 그리스도교’ 꿈을 꾸었다.
본서는 이러한 故 이신(李信, 1927~1981) 목사의 신학, 시 그리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특별히 소천 40주기를 맞아서, 그의 자녀들과 정신적 후예들이 그가 남긴 신학적 그리고 예술적 유산를 기억하며 글을 썼다.
이신 목사는 산동네에서 정신지체아들을 모아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괴산의 산골에 손수 돌을 주워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고, 새벽이면 냉수마찰을 한 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이신은 천재적인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였고 멋쟁이였다. 스스로 자처한 곤궁함 속에서 안빈낙도하며 살면서도 한국 기독교를 위해 큰 외침을 남겼다.
본서는 한국 교회사 이 같은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주류교회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신 목사의 삶과 초현실적 신학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과 시(詩)를 통하여 내면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예술적 파토스와 구도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예술신학을 향한 새로운 문을 열어 주고, 시는 노래가 된다.
본서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억압과 침략으로 늘 깨달음 없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한민족을 안타까워하고 ‘신앙마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외쳤던 선각자의 삶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진정 코로나 국면의 시대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신앙을 넘어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차례


책을 펴내며 / 이은선

1부 󰠃 이신 신학의 새 차원 — 묵시의식의 토착화
토착화, 기독교사회주의, 그리스도환원운동, 이들 통섭의 토대로서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 ― 한국 신학 광맥 다시 캐기 __ 이정배
참된 인류세(Anthro-pocene) 시대를 위한 이신(李信)의 영(靈)의 신학— N. 베르댜예프와 한국 신학(信學)과 인학(仁學)과의 대화 속에서 __ 이은선

2부 󰠃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의 전개
묵시문학과 영지주의 ― 이신(李信)의 전위 묵시문학 현상 이해를 중심으로 __ 조재형
벤야민과 이신의 해방과 영성을 향한 신학적 구조 ― 이신과 벤야민의 초현실주의 신학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__ 최대광
동양 미학의 관점에서 본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 ‘망(望, 網, 忘)의 신학’적 관점에서 __ 이명권

3부 󰠃 이신의 시와 신학
이신의 묵시 해석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 시를 중심으로 __ 김성리
이신의 내면세계 ― 그의 시(詩) 작품으로 본 예술적 파토스와 구도적 누미노제(Numinose) 지향(志向)의 고찰 __ 최자웅
짙은 그리움이 깊은 고요를 만나 ― 이신의 시(詩)가 노래(歌)가 되다 __ 이혁

4부 󰠃 이신의 그림과 예술 신학
한국 초현실주의 미술사에서의 이신 __ 심은록
‘하나’로 솟난 감흥의 신명 ― 이신(李信)의 ‘님’ 회화론 __ 김종길
“묵시적 초현실에 비친 자화상” ― 이신의 미술작품에 대한 묵상 __ 하태혁

참고문헌



저자소개

표지 그림 해제

저자 소개

김성리 문학박사,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교수
김종길 미술평론가,
경기도미술관 DMZ아트프로젝트 전시예술감독
심은록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리좀-심은록 미술연구소 소장
이명권 코리안아쉬람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동양사상 강의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세종대학교 명예교수
이정배 현장아카데미 원장,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이 혁 의성서문교회 목사, 시노래 작곡가
조재형 케이씨대학교 강사, 환원연구회 회장
최대광 공덕감리교회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
최자웅 시인, 신부, 종교사회학박사,
코리안 아쉬람 인문예술원장
하태혁 단해교회 담임목사, U.H.M.GALLERY 단해기념관 부관장

엮은이
<한국信연구소>
‘한국信연구소’는 2016년 강원도 횡성과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근거를 두고 시작한 ‘현장(顯藏)아카데미’의 한국 신학 연구소이다. 동북아시아 사상적 전통인 聖 性 誠의 정신에 근거해서 ‘한국적 믿음의 통합학’(한국信學, 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을 지향하면서 2020년 7월에 개소하였다. 한국 토착화 신학의 전통에서 특히 목사이자 신학자,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이신(李信, 1927-1981)의 신학적, 예술적 유산을 중시하고, 그로부터 한국 종교사상 전통과 서구 기독교 문명과의 대화를 주로 한다. 여성주의적이고, 교육인문학적인 성찰과 실천을 중시하면서 ‘한국적 인지학’(Korean Anthroposophy) 등, 21세기 인류세 문명을 위한 대안의 길을 찾고자 한다



본문 속으로

우리는 그를 진정 한국 사상사에서 고유한 동서 통합의 묵시 사상가이고, 그 일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현실을 아파하며 거기서의 화해와 화평을 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했다. 그래서 ‘이신 40주기 준비위원회’라는 모임을 구성했고, 2020년 9월 24일(목) 20여 명의 위원이 처음으로 만나서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같이 모인 사람 중에는 신학자뿐 아니라 문학평론가, 미술평론가, 이신의 옛 제자 목회자들이 있었고, 이후 여러 기회에 모임은 점점 커졌다.
_ “책을 펴내며” 중에서

그의 근원 의식은 형식(교리)과 제도를 거부했고 성령을 통해 주체(비서구)적 사유를 토발시켰다. 크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했고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나 그는 선교사들에 종속된 그리스도 교단에서 늘 상 자발적 비주류였다. 이른 죽음 탓도 있겠지만 지금도 당시 이신의 족적은 상당 부분 가려졌고 저평가된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살아생전 환원운동의 근원성을 주체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자생적으로 시작된 환원운동의 본질과 가치를 동시대적 언어로 되살려내고자 애썼다. …

오히려 인간은 “소우주”이지 우주의 계층적 단계나 일부가 아니고, ‘전체’는 구체적인 인격의 자유와 영(spirit)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관념적 보편이나 자연 일반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통찰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고, 또한 가장 구체적인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 다시 인간에 의해서 참된 지구 생명 공동체가 회복되고, 그래서 지구 생명체의 ‘마음’(心)으로서의 인간의 회심과 역할을 통해서 지구 생명 공동체가 함께 ‘정신화’(靈化)하고, ‘인격화’하며, 보다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주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희망하며 제안한다.
_ “1부 _ 이신 신학의 새 차원 — 묵시의식의 토착화” 중에서

그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란 하나 되는 따뜻한 삶이다. 자기를 드러내어 갈라진 그 현실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자고 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갈라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예수 안으로 들어가 모두가 하나되는, 이 따뜻한 삶의 자리가 바로 이신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다. 이것이 not yet 곧,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분열의 현실을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 그의 슐리얼리즘 신학의 메시아니즘인 것이다.
_ “2부 _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의 전개” 중에서

이신은 이런 현상을 산문 <돌의 소리>에서 “현실적으로는 ‘돌’이 소리 지를 수 없는 것이지마는 그런 초현실로는 길가에 ‘돌’도 소리 지를 수 있는 것이고 또 응당 그렇게 의식구조를 어차피 돌이켜 놓은 것이니 ‘떳떳한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으로 설명한다. “돌이 소리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 절대의 것을 탐색하는 사람들에게 문제”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것만 탐색하는 역사의 시간에 있는 사람들은 초월의 시간이 지니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_ “3부 _ 이신의 시와 신학” 중에서

이 현실주의 선언문은 이후 민중미술의 첫 불씨가 되었다. 이신은 “전위 묵시문학의 신학”의 서론에서 프로스트(Stanly Frost)의 말을 빌려 “묵시문학은 본질적으로 권위에 대한 일종의 저항문학”이라며, “그 사유 방식의 고유한 급진적인 성격 때문에 묵시문학에는 분명히 역동성이 있었다. 역동성을 나타낸 역사상의 구체적 사례들은 일부 학자들이 묵시문학적 공동체라고 기술하는 에세네(Essene) 공동체와 열심당(Zealots) 운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인식은 그의 작품세계가 ‘저항’과 ‘역동성’을 가진 현실주의 미학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은연 중 제시한다.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 에큐메니안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 에큐메니안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한국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1
이은선 명예교수(한국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8.10.27



이 글은 원래 작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해서 그 전해 돌아가신 지 35주기가 되는 선친 이신(李信, 1927-1981) 목사님을 기리면서 펴낸 글을 근간으로 한다
(김성리 외,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동연, 2016). 

이렇게 1년이 지나서 다시 여기에 가져와서 약간의 보완과 더불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 성찰된 생각들이 또 다른 5백년을 향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좀 더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물론 개인적인 선친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꺼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 그분의 묘소를 일산기독묘지에서 충청도 괴산의 소수로 이장하면서 그의 생과 사상이 한국적 신학의 유산으로서 좀 더 보편적으로 해석되고, 다양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

이 책이 나온 후 1년간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나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재직하던 대학을 조금 일찍 떠나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聖․性․誠의 여성통합학문’을 염두에 두면서 여러 궁리 끝에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는 ‘信’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는데, 그것으로써 육신의 아버지 이신(李信)을 기리고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오늘 우리 시대 인류 삶의 문제가 바로 이 ‘믿음’과 ‘신뢰’, ‘공감’과 ‘상상’, ‘환상’의 문제에 집약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보다 통합학문적인 탐구와 성찰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가능성을 다시 찾아내는가 라는 점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제 오늘 우리의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간에 좀 더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깊이 공감하고, 또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고 환상하면서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의 물음을 묻고자 하는 의식이다. 나는 이신의 삶과 신학, 시와 그림이 바로 이와 유사한 생각 속에서 배태되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 문제의식과 탐구의 길이 결코 녹슬지 않았다고 본다.

▲ 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오늘 한반도의 삶에서 남북의 통일과 평화가 절체절명의 관건이 되었다. 그 일에서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우리 시대 최고 강국들의 각축이 심하다. 이미 이 한반도에서 그 각축이 일제식민지와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불러왔고, 잘못하면 다시 한 번 유사한 위기 앞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천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찾아가고, 개신교는 미국 교회에게 SOS를 친다. 그런 노력의 한 편에서 남한의 한 정당은 정부가 9월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서를 의결한 것에 대해서 위헌소송을 제기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리의 이러한 행보들이 앞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낼 것인지 매우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런 모든 일을 염두에 두면서 이신의 신학을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었다. 물론 당시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과는 많이 다르고, 그 시대적, 신학적 한계에 이어서 또한 나의 해석에도 치우친 면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함께 공유하며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이 시작하는 말의 마무리로서 나는 지난 2011년 이신의 30주기를 기리는 말로 썼고, 지난 여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을 생각하며 다시 패북에 올렸던 언어를 가져오고자 한다. 이 말의 원 출처는 스위스의 페스탈로치인데, 그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민중의 고통을 가장 근본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토대로서 바로 우리 인간성 안에 내재한 초월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써 그는 당시 국가교회로부터 파면을 당했고, 모두로부터 배척과 비웃음을 받았지만 그는 그 믿음과 저항, 환상의 행보를 고독으로 맞서면서 나아갔다.
“나는 여기 그 이상을 원했던 한 인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순진과 무구의 기쁨이 놓여 있었고, 아주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친절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사랑과 신뢰는 그의 본성이었으며, 가장 은밀한 내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의 작품이 아니었고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발견하고서 그의 죄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를 쇠망치로 부숴버렸고, 마치 미장이가 쓸모없는 돌을 보통인 돌로 쓰려고 깨는 것과 같이 그렇게 깨버렸습니다. 그는 깨어지고 죽어가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한 목적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소용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한 그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바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미주 1)


1. 이신의 ‘믿음’(信)에 대하여

이신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했던 것은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이름을 부모님들이 지어준 이름(李萬修)에 더해서 ‘믿을’ 신(信) 자(字)의 이신(李信)으로 할 정도로 ‘믿음’을 사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 말이 “신뢰의 그루터기”라는 말이었다고 생각하는데,(미주 2) 그는 왜 그렇게 ‘믿는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우리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일제 강점기에 부산에서 상업학교를 마치고 은행에 취업했다가 그만두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믿음의 학인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믿음을 찾아 나선 그의 행보는 더 이어져서 6.25가 발발하고 고향 전라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만나면서는 속해있던 감리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후일 1980년경 『기독교백과사전』을 위해서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라는 역사서술에 보면, 그는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도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발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스스로의 선행된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그 서술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신앙에서 다양한 교파나 그 교파에서의 신조를 따르기 보다는 원래 초대 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고, 그것을 깨달은 소수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혹독했던 상황에서 감리교회나 구세군에 속해있던 소수 목회자의 자각이 있었고, 그것이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과 연결되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본격화되었다고 밝힌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제 말기에 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을 가까스로 면하고서 해방 이듬해에 이때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일치를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기독(基督)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발표했다고 한다(1946.8월).
“우리 기독의 교회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돌아와서 각각 분열된 기독교에서 신약 시대의 기독의 교회로 같이 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聖旨)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신자는 말씀에 비추어 각각 교파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데 각각 속한 단체의 헌법 규칙을 존중시하고 분열됨으로 다투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구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 다시 조선 교회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 각 교파가 악마 왜정 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 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면 악마에게 굴복하여 신사 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성경 말씀인 주님의 성지를 반역하는 일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 시대의 교회를 찾으면 신약성경에서 찾자.”(미주 3)


여기서 분명히 서술된 대로 어떻게 이제 막 식민지 처지에서 벗어난 변방의 한 미약한 나라의 교회가 그것도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지도 얼마 안 되는 어려운 처지에서 교회 전체의 2천여 년 역사를 모두 뒤로 돌리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들은 기독교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창하게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쳐준 대로 다시 그 본래적 하나 됨과 교회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호소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일은 오늘 한국 개신교가 오랜 분열과 갈등을 뒤로 하고 다시 여러 형태의 에큐메니즘을 말하는 시점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과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더 이상 서구 교회나 교파나 교단 등에 좌우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개체 교회의 존재 가능성이 훨씬 커진 상황에서도 힘든 일인데, 이신은 이 일을 이루는데 온 힘을 쏟으면서 자신의 믿음의 일을 수행해 나갔다.

그래서 더욱 묻게 된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신약성서 히브리서의 유명한 언명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가 지시하는 대로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그의 의식으로는 과거의 어떤 ‘선험’이나 ‘원형’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지금 뚜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확고한 상(像)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애쓰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이렇게 지금/여기에 있으면서 과거와 미래, 이미 있음과 아직 아니의 공간을 통합하고, 아니 그보다 그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류 동서의 많은 성찰적 지성들은 이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 고유의 일이고, 마치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게 ‘선험적’으로 놓인 어떤 “선험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간 존재의 “신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겠다.(미주 4) 그래서 이 믿음을 가리키는 동아시아의 언어인 ‘신’(信)도 ‘인간’(人)과 ‘언어’(言)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믿음의 일은 여느 보통의 인간사의 일과는 달리 현재를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주로 현재에 몰두하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잘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배척을 당하고, 미움을 받으며, 몰이해와 배타 속에서 소외를 겪는다. 이신은 인간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일이 ‘믿음’을 지니는 일이고, 그것이 인간 삶에서 그렇게 근본적인 일(“그루터기”)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자유, “신앙적 주체성”을 찾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긴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고독하고 빈한한 삶을 살았다.

그의 딸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보니,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의 유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인 유물론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초자본주의 시대에 살다보니 사람들이 그 드러나는 것 이전 또는 너머에 있는 ‘진실’을 위해서,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뜻’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오늘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러한 믿음의 일을 위해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돌아올 물질적 이득과 소득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삶을 반추해 보면서 나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거의 못 배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생전에 그가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주저 두 권을 번역해내기까지 한 러시아의 사상가 N. 베르댜예프(1874-1948)에 따르면 오늘 우리 시대는 온통 부르주아지의 노예성에 사로잡혀 있는 시대이다. 그것은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인데, 여기서 인간은 세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스스로 서 있는 이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세계의 허영과 허무함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경제적 발전의 무한을 인정하나, 그가 인정하려는 무한은 그가 인식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것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미주 5) 이신은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깊이 없음과 불신, 자아에의 집중을 비판하면서 다시 인간 존재의 선험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며 그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인간 의식의 고양을 한껏 추구했던 20세기의 인지학자(人智學者)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인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찌감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부에 내몰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오히려 더 물질에 집착하고, 믿음과 상상력이 떨어지고, 빈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몸과 선한 의지로 세상에 튼실하게 발을 딛고 서기 전에 서둘러서 추상의 세계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지 이신은 어린 시절, 특히 그 어머니로부터 몸과 마음과 감정을 잘 배려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해졌는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이고, 그 분은 원래 할아버지의 첫 부인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죽자 속임수로 다시 결혼한 할아버지로 인해서 힘든 삶을 사셨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4남매의 양육을 위해 혼신을 다하시다가 6.25 전쟁의 와중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분이었고, 그 속에서 첫 자손으로 태어나신 아버지가 성인이 되어서 믿음의 전회를 감행했던 일들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러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인간 ‘언어’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도 나라는 주체의 능동성보다는 그보다 먼저 내가 믿어지는 선험성과 수동성이 함께 하는 것이고, 이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고, 강요당하면서도 자유로운 두 가지 속성, “서로 반대되는 두 성질의 통일성”이기 때문에 믿음이 “신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여겼다.
“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미주 6)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미주 7)


이신은 이 믿음으로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택했고, 6.25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경험 속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갔으며, 그 교회에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성서해석과 성령 이해의 차이로 그나마 안정된 자리를 떠나야 했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일, 돌아와서도 여전히 안정과 안위대신에 산동네 무허가촌의 궁핍한 삶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 거처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산골로 내려가신 일. 이런 모든 일들이 그의 믿음의 선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한 박사였지만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민중과 학벌이 높지 않은 변방의 목회자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한 좁고 허름한 방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은’(天恩)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잘 지낼 것을 당부하고 기쁜 모습으로 가셨다.

어디에서 그런 믿음의 지속하는 힘이 나왔으며, 어디에 근거해서 그는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읽고, 쓰고, 선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또 동료들을 모아 세상의 달라짐과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그의 믿음이 단순한 그의 의지가 아니고 ‘신의 의지’이고, 그 믿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비록 오늘날의 우리는 이 기원을 갖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 앞에 먼저 주어진 것에 대한 의식을 잘 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자아의 주관으로 돌리고, 그래서 신도, 전통과 권위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 믿음이 하나의 ‘기적’(a miracle)처럼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삶을 어쩔 수 없이 ‘조건 지어진 존재’(the human condition)로 보지만 그 삶의 활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행위”라고 하면서 그 행위는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과정의 환원불가능성”, 그리고 “작자의 익명성”이라는 불행한 요소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미주
(미주 1) J. H. Pestalozzi, Auswahl aus seinen Schriften, Bd.1, Hrg. von A.Bruelmeier, Bern/Stuttgart 1977, p.278-279.
(미주 2)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 동연, 2011, 300쪽.
(미주 3) 같은 책, 346쪽.
(미주 4)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 17쪽.
(미주 5)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244쪽. 이 책은 원래 이신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79년 가을에 번역 출간되었던 것을 2015년 필자에 의해서 다시 수정 보완되어서 출판사 늘봄에서 재간되었다.
(미주 6) 막스 피카르트, 같은 책, 33쪽.
(미주 7) 같은 책, 100쪽.


이은선 명예교수(한국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icon관련기사icon한국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2

2. 믿음의 ‘고독’(性)에 대하여

믿음의 행위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과정을 다시 뒤로 돌릴 수 없으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과거나 미래와 관계하는 일이므로 현실에서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만난다. 그것은 시간과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 믿음의 삶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가 될까? 믿음 삶의 또 다른 근거일까 아니면 한없는 장애와 걸림돌일까? 우선은 믿음의 사람에게도 가족은 자신의 길을 가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를 주고, 이해와 힘을 주는 지지대와 기반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해를 얻지 못하고 비난 받는다면 그 실망과 좌절은 가장 클 것이다.

아버지 이신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는 신학대학을 가기 위해서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고, 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을 통해서 혼인하게 된 아내와 자신의 생각을 깊이 나눌 수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두 분은 서로 무척 애틋해 하셨지만 자주 다투셨다. 사실 아버지 이신은 부인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찬찬히 길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이끄는 분이 아니었다. 자신 동생들과 자식들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중요한 선택들을 주도하셨지만 갈등이 있었고, 반목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꾸리고 나름의 뜻을 붙들고 살려다 보니 아버지 이신의 고통과 좌절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더 잘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믿는 자가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제일 큰 것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믿는 자는 그래서 참으로 ‘고독한’ 자이고, 그런 면에서 고독을 가장 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믿는 자로 하여금 가장 강하게 ‘현재’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자이고, ‘일상’을 청하는 존재이므로 그 충돌을 잘 예상할 수 있다.


이신은 1970년대에 저술한 신학 논문「고독과 저항의 신학-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초월자 앞에서의 열정과 믿음의 삶을 위해서 “세상의 그 어떤 고독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뇌가 따르는” 삶을 산 자로서 소개하고 있다.(미주 1) 많이 회자되듯이 키에르케고르는 어느 날 인지하게 된 자신 가계(아버지) 내의 ‘죄’에 대한 첨예한 의식으로 깊이 사랑하던 약혼자와의 결혼도 포기하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신앙의 의미와 기독자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에 몰두했다. 믿음을 지니고 산다는 일은 과거와 미래를 여기 지금에 가져와서 그 의미성을 현재적으로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에 이 신앙의 “동시성”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합리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스캔들을 일으킨다. 이신은 두 사상가를 특히 이러한 ‘신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와 동시대에 사는 것처럼 그의 믿음과 다시 그에 대한 믿음을 우리 시대에 우리 각자의 신앙으로 재현하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독한 고독과 고통도 참아내야 하는 일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그저 값싼 은총이 아니라 아주 값있는 것이고, “영원한 심각성”을 지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이다. 영적이란 내면성이요 내면성은 주체적인 것이요 주체적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열정적인 것이다. 그 최고 정점은 영원한 행복 속에 있는 무한한 인격적인 열정적 관심 그것이다.”(미주 2)
이렇게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위한 고독을 기독교의 정수로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이 고독을 따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떻게든 거기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은 질병과 연약함으로, 그 반대로 유대와 친밀과 소속은 선과 강함으로 찬양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 인류의 삶이 이제 전통적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가족적 삶마저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유기체와 비유기체(로봇)의 구분도 점점 더 모호해지는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적인 고유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의 물음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면, 오히려 고독과 단독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의미화해서 또 다른 차원의 생명적 삶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오늘날 참된 믿음이 매우 드물어졌고, 그래서 무엇이든 지속하고 약속할 수 있는 힘이 실종된 상황에서 ‘고독’으로 단련되어 몰두할 수 있고, ‘익명’(anonymity)을 견뎌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해방된 정신과 영적 자유의 정신으로의 고양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섰다면, 아니 그 고독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더 높은 고양(신앙의 동시성)을 위해서 긴요하기까지 하다면,  키에르케고르나 이신의 믿음을 위한 고독의 메시지를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정신의 참된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믿는 자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과 ‘영생’에 대한 이야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신은 1980년 6월부터 1981년 12월 세상을 뜰 때까지 순복음신학교를 통해서 관계 맺게 된 순복음 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카리스마적 신학」이라는 독특한 글을 연재하셨다. 오랜 동안 그가 생각해 왔고, 마침 그것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지만 충분히 펼치고 가지 못한 새로운 조직신학으로서의 “영(靈)의 신학”, “초현실주의 신학”에서 그는 삶과 죽음을 논한다. 거기서 그는 밝히기를, 사실 사람은 “생리적으로 종족적으로 혈통적으로”는 오히려 죽지 않고 영속적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의 유전법칙에 의해서 그의 유전인자는 계속적으로 자손이나 종족 등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참 죽음이란 바로 그의 “인격”이 죽는 것을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그것은 “생리적인 법칙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은 유전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요 그 근원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이요 자유의 영역으로서 말하자면 영원한 곳에서 날아 들어옴이요 그 인간이 갖는 독특성이요 유일회적인 것”이라고 서술한다.(미주 3)

이신은 인류 문명의 과학적 성과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과학으로 아직 들추어내지 못한 ‘인격’과 ‘영’과 ‘초현실’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생리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인 인격의 죽음에 대해서 관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강조와 고독을 받아들이는 입장, 몸은 불사하지만 오히려 인격의 죽음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인공지능’(AI)과 ‘초인간(transhuman)’을 말하는 시대에 더욱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돋아나고 또 자라는 생리적인 것의 죽음이 아니라-어차피 이런 생리적인 것은 죽지 아니하는 것이고-그러한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의 요소의 멸절滅絶이요 알기 쉽게는 역사적 시간적으로는 그 영원한 씨(種子)가 한 번도 싹터보지 못하고 무서운 혹한 때문에 고사枯死하는 것이요 생존경쟁의 싸움터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무한한 위력을 가진 불발탄인 것인데 사실은 누구나 다 이런 인격의 영원성을 갖고 있는데도 생존경쟁의 하찮은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아깝게 사장死藏되어버리는 것이요 또 이어가는 이 역사의 휘몰아치는 추위 때문에 한 번도 인격의 아름다운 싹을 틔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미주 4)

앞의 아렌트도 오늘날 사람들이 “영원성”(eternity)에 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에만 관심하는 노동자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미주 5) 또한 이와 유사한 근대 부르주아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베르댜예프에게서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자기를 초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초월은 그가 지상에 정착하려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에게서의 신앙과 종교는 “항상 유한한 종교이며, 유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의 질은 그것이 이 세상의 조직에 헌신하는 봉사, 이 세상에서 그의 지위의 보존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측정된다.”(미주 6) 베르댜예프는 이러한 부르주아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에 의하면, “부르주아는 피안적 세계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다. 그들은 종말과는 인연이 없는 무리들”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미주 7)


그런데 사실 서구 역사에서 우리는 이미 플라톤에게서 매우 유사한 관점의 이야기를 들었다. 즉 그가 이상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세 가지의 파도로서 그 중 그 하나를 ‘처자공유’를 통한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일로 지적했다면, 베르댜예프나 이신의 삶과 죽음, 인격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흐름 속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신은 사람이 생리적으로 사는 것은 “다만 생식하고 번식하는 것으로 이어가는 삶”이라고 지적했는데, 베르댜예프는 그의 『인간의 운명』에서 이와 유사하게 ‘속’(屬, genus)을 통한 생명의 연속은 “임신을 통해 계속되는 삶을 알 뿐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종의 성적(性的) 범신론”이라고 비판했다.(미주 8) 여기에 대해서 베르댜예프는 “인격”personality)이라는 개념을 한없이 고양시켜서 바로 그렇게 생리적으로 계속되는 세계의 삶에 대해서 인격은 “침노”해오며, “돌입”해 와서 그 세계를 “정복”하고 “초극”하는 또 다른 “우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인격이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가 인격의 일부이며 그 질”이고, “인격은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다.”라고 선포했다.(미주 9)

나는 이 이야기들에서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가치 위주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흔적을 본다. 물론 베르댜예프 자신도 분명히 밝히기를 자신의 인격주의는 헤겔의 일원론보다는 칸트의 이원론에 더 가깝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후의 서구 생철학이 세계 이해에 나름으로 기여했지만 그것은 “우주적이며 사회적인 과정 속에 인격을 해소시킨다”. 대신에 자신의 인격주의는 그에 비해서 그 안에 “모순과 역설”을 담지한 “종말론적 전망”이고, “신비”라는 것이다.(미주 10) 그는 분명한 어조로 “신적-인간성의 이 신비를 동일철학, 일원론, 내재론의 빛 아래서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며, “신-인성God-humanity에 관한 진리는 교의적 신조나 신학적 교리도 아니며 경험적 진리 곧, 정신적 체험의 표현이다”라고 언명한다.(미주 11)

이렇게 베르댜예프나 이신이 강조하는 믿음의 종말론적 성격과 인격적 신비의 의미를 나 자신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며, 특히 오늘날은 온갖 과학주의의 비등으로 정신이 철저히 객체화되고, 기계화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인격’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특히 지금 이곳의 ‘몸’의 현실이 없으면 ‘힘없는’ 또는 ‘잔인한’ 관념일 뿐이며,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 불러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딸’로서,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성’과 ‘엄마’로서 경험해왔기 때문에 순전히 그저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미주 12) 아니 어쩌면 이신 자신도 이러한 인격과 자유와 자기초월에의 한없는 비상과 가치매김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곳의 현재로부터 더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무척 괴로워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학 시절에 고국에 남기고 간 병든 딸이 죽자 「딸 ‘은혜’(恩惠) 상(像)」이라는 시를 지으며 고통스러워했고, 그 이전에 6.25이후 모두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으며, 가족들의 생계와 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몸으로 고생하며 가족적 삶을 지켰다. 그 덕분에 우리는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그처럼 신학자가 되어서 그의 생각을 밝히고 이어가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오늘 우리 시대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대신에 ‘믿는다’는 것이 아주 드물어지고 어떻게든 고통과 아픔은 피하려 하고, 그래서 ‘죽음’은 더욱 외면당하고 억눌려지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생’과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촉구하고 대면하도록 초대한다. 이신은 인격성의 핵심인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며, “고뇌에 대한 능력이 없으면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자신의 삶으로 전한다. 그의 믿음의 고독은 “출발”이라는 제목을 가진 다음의 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출발>

운명을 전당잡고
풍진을 긁어모아 새로운 조형을
마련하려고 적막한 공지(空地)를 향해 출발하나
지평이 너무 낮고
하늘이 묵념만 반복하니
행려자의 가슴은
더욱 심연의 주변만 맴돈다.

길이 아무리 멀어도
자연이 전설을 고수하는 한
초속(超速)의 물체가
시간을 침식하는 논리는
심야의 기적 소리마냥
요란스럽게 굴러가고
증명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예언이
과학의 고독 때문에
오히려 찰나적 충동 속에서
질풍처럼 전달된다.

사색이 어떤 지점으로 고양되면
불투명한 풍토가
비극의 대안(對岸)을 환상적 토질로
변모케 하고
시대적 풍조 때문에
권력을 세낸 무리들이
몽롱한 달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한다.

이때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하는
새 풍토에의 출발이
마지막 기적 소리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정오의 태양을 쪼이며
빈손마저 뿌리치고
홀로 떠난다.
그러면 가로수의 그늘이
명상의 은거지를 마련한다.(1968/8/8)(미주 13)


미주
(미주 1)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3쪽.
(미주 2) Soeren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3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0쪽 재인용.
(미주 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306쪽.
(미주 4) 같은 책, 309쪽.
(미주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같은 책,
(미주 6)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252쪽.
(미주 7) 같은 책, 252쪽.
(미주 8) N. 베르쟈에프, 『인간의 운명』, 이신 옮김, 현대사상총서, 1984, 322쪽.
(미주 9)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28-30쪽.
(미주 10) 같은 책, 8-12쪽, 44쪽.
(미주 11) 같은 책, 58-59쪽.
(미주 12)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그리스도론과 오늘의 기독교」,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97쪽 이하.
(미주 13) 이신 지음, 『李信 詩集 돌의 소리』, 이경 엮음, 동연, 2012, 33-34쪽.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인류 종교의 미래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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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인류 종교의 미래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12.15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22




지난 1년간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라는 제목 아래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진행해왔고, 이제 22회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오래전 서구 기독교 신학의 한복판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만난 동아시아 한국 유교의 보화들과 대화하면서 나름으로 이 대화가 인류 문명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다. 

지난 글들에서 본인은 동아시아 유교 기원과 전개에서 한국 유교가 단지 수동적이었거나 외래로부터 전해 받은 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토대로서 역할을 했고, 특히 매우 고유하게 조선적 유교로 전개되어 왔음을 말했다. 또한, 유교 문명은 토착 지역의 오랜 무교(巫敎)나 도교(道敎)적 토양에서 함께 성장하면서 인도 문명으로부터 전해진 불교와 깊게 대화하며 신유교(新儒敎, Neo-Confucianism)로 전개된 것을 살폈다. 조선 유교는 특히 이 신유교의 확장이고, 그러므로 이 신유교와 더불어 서양 문명의 두 토대인 유대 히브리 정신과 그리스·로마 정신 위에서 성장한 서학(천주교)이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기독교와 대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종교 전통과 대화하는 것이 됨을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21세기 세계정세를 보면 미국과 중국이라고 하는 세계 두 헤게모니 사이의 각축이 치열하고, 그 둘의 관계 맺음에 따라서 인류 전체의 미래가 크게 좌우될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 한반도 땅에서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이상의 모든 종교 전통들이 여전히 활발히 역동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도 이 땅에서의 유교와 기독교, 그중에서도 이제까지 본 연재가 주로 초기 서학(천주교)과의 만남에 집중했다면, 마무리로 현대 개신교와의 만남을 잠깐이라도 살펴보는 것이 인류 종교의 미래를 그리는 일에서 무익하지 않으리라 본다. 

1884년경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알렌과 스크랜턴 등의 서양 선교사들 입국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는 유교와의 만남에서 주로 전격적인 개종(改宗)을 주장했다. 거기서 기독교 신앙은 주체가 되고 유교는 그 신앙의 보완자가 되어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정동감리교회 초대목사 탁사 최병헌(濯斯 崔炳憲, 1858-1927)의 『만종일련(萬宗一臠, 1922)』도 그랬지만,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번역해 냈고, 칼 바르트를 사사한 후 단군 이야기를 기독교 삼위일체 이야기와 견주기도 한 해천 윤성범(海天 尹聖範, 1916-1980)의 ‘誠의 신학’도 유사했다. 이어서 본인이 한국의 한 토착화 신학자로 보고자 하는 원초(原草) 박순경(1923-2020)의 ‘(민족)통일신학’도 히브리 유대 민족의 창세기 연원을 동이족 창세기에서 찾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그 모든 역사가 히브리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박순경,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2014; 이은선, “토착화신학으로서의 박순경 통일신학-한국적 信學의 관점에서, 한민족통일신학연구소 엮음, 『원초 박순경의 삶과 통일신학 톺아보기』, 2022).



이런 가운데 일련의 개신교 사상가들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한국 유교 전통을 내면화하면서 나름의 고유한 신학과 종교의식을 펼쳤다. 요사이 더욱 찾아지고 있는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유불도 삼도(三道)뿐 아니라 대종교 『삼일신고(三一神誥)』나 『천부경(天符經)』 등의 언어를 깊이 체화해서 지금까지 어느 개신교 신학자도 넘지 못한 전통기독교 기독론의 배타주의를 나름으로 넘어섰다. 그는 유교 『중용(中庸)』의 중(中) 개념이나 『대학(大學)』의 민(民)을 예수의 그리스도성을 지시하는 언어로 해석해서 그 그리스도성이 단지 2천 년 전 유대인 청년 예수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된 하늘적 ‘씨앗’과 ‘바탈’로 보았다(이정배, 『유영모의 귀일(歸一)신학』, 2020). 다석의 제자로서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스승보다 훨씬 더 탈종교적이고 보편의 언어로써 이 세상의 현실과 정치, 역사 속에서의 하늘 영(靈)의 활동과 ‘씨알’의 역동적 활동을 강조했다. 본인이 그래서 참된 한 “仁의 사도”라고 파악한 그는 염재신재(念在神在, 생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스승 유영모처럼 온 우주의 “영화(靈化)”를 말하며, 씨알의 핵심을 사유하는 일(思,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보았다. 본인은 여기서 깊은 맹자적 전승을 보고, 또한 그가 민족 개조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합작과 “혁명의 명(命)은 곧 하늘의 말씀이다”라면서 그 명을 공자의 천명(天命)과도 연결하는 일 등이 유교 맹자적 의(義) 의식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본다(이은선, “인(仁)의 사도 함석헌의 삶과 사상”,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2016).



그런데 사실 이들 모두에게 먼저 큰 영향을 준 사상가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鎬, 1878-1938)였다. 보통 개신교 사상가로 알려졌지만, 그 삶과 사상에서의 유교적 뿌리와 전개는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그의 흥사단(興士團) 운동이 그것인데, 유교 중용(中庸)과 성(誠)의 점진(漸進)의 덕을 민족 독립과 자주뿐 아니라 인류 공동체 미래를 위해서 참된 영적 생활 공동체 운동으로 펼치고자 한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의 ‘무교회’ 운동이 있다. 지난 편에 본 유교 개혁가 이병헌은 유교 종교화로서 공교회(孔敎會) 운동을 주창했지만, 김교신은 오히려 ‘무교회’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신생 한국 개신교가 서구에서 만들어진 각종 교단과 교권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고서, 참 신앙이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에 속하는 일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성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며 “날마다 한 걸음(日步)”씩 나가는 구도 정신으로 파악했다. 유교 남성들이 당연시해왔던 호(號)를 붙이는 일도 일종의 특권 의식으로 보아 거부했는데, 그와 함석헌, 송두용 등이 함께 창간한 월간지 『성서조선』은 대쪽 같은 선비 정신과 독립 기독교 신앙이 함께 일구어낸 뛰어난 열매라고 생각한다(김정환,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1994).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으로 또 다른 한국 기독교의 독립 정신을 강조한 이신(李信, 1927-1981)은 무교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갱신을 통해 그 뜻을 이루고자 했다. “신앙마저 남의 나라의 종교적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그는 서구 교회로부터 온 교단과 교권의 분열을 넘어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주창했다(이신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358쪽 이하). 
또한, 특히 신앙의 영적 역동성과 전위성을 강조했는데, 히브리 신구약 중간기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신앙의 시대 전복적 의식과 전적 새로움에 대한 간구가 시대와 민족, 문화 등의 차이를 넘어서 새롭게 지속적으로 영(靈)의 ‘동시성’으로서 역동하는 것에 대한 큰 믿음(信)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과 신뢰를 그는 인간 인식 연구에서 불모지와 다름없는 ‘상상력(imagination)’과 ‘환상(fantasy)’으로도 이해했는데, 예수의 하나님 의식, 키르케고르나 본회퍼의 고독과 저항의식, 한반도 최제우의 민중의식, 20세기 미래 전위파 예술 운동 등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되는 것을 보는 정도로 그의 하나님 영(성령)의 역동성에 대한 감각은 포괄적이고도 포함적이었다. 그리하여 본인은 그러한 이신의 사유가 16세기 조선 신유교 성리학의 창조에서 전위적인 역할을 한 퇴계의 천명(天命)이나 리도(理到) 의식과도 잘 통한다고 보고 그 둘의 사유를 우리 시대를 위한 참된 신학(信學)의 의미로 해석하고자 했다(이은선 외,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 2021, 129쪽 이하).

21세기 오늘은 지금까지 인류 문명이 소중히 가꾸어온 정신성(理)과 온갖 드러남의 다양성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인격성(命), 그리고 모두가 하나라는 지속하는 기반으로서의 공동체성(仁)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힘을 주어서 한 존재의 존엄이나 권리가 이미 그가 여기 지금 단순히 태어나 있다(natality/生理)라는 탄생성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사실 속에서만 찾는 일을 감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떤 종족이나 국가, 종교나 문화의 소속 여부에 따라 그것을 조건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오늘 우리는 이제 인류 보편 종교(religio catholica/眞敎)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이고, 본인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러한 보편 종교(common religion)의 이상이 어느 경우보다도 한국 (신)유교와 기독교의 만남에서 잘 찾아질 수 있다고 보는 바이다. 예를 들어 ‘易·中·仁’ 이나 ‘聖·性·誠’ 등의 언어 쌍과의 대화인데, 이 언어들은 전통 기독교의 신론(神論)과 구원론, 교회론(성령론)을 훨씬 더 보편적이고 탈종교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더욱 포괄적이고 세속적으로 말해보면, 이미 동학의 최제우 선생도 밝힌 바 있는 ‘誠·敬·信’의 세 언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보기에 아직 깊이 천착 되지 못한 무의식의 영역이나 여전히 큰 보편 속에 통합되지 못한 우리 삶에서의 성차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물음이 남아있다. 미래의 보다 생명 살림적인 한국적 보편종교(天地生物之理/心)로서의 한국 신학(信學)을 위해 씨름해야 하는 주제라고 여기며 본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끝)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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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6

이것이 K정신이다 : 연재 한겨레

[한겨레-플라톤아카데미 공동기획] 이것이 K정신이다 : 연재 : 뉴스 : 한겨레



[한겨레-플라톤아카데미 공동기획] 이것이 K정신이다
UPDATE : 2022-10-2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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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빅뱅’ 만든 한국인의 기질은 이것에서 왔다

등록 :2022-06-07 18:16수정 :2022-06-08 02:32
조현 기자
 
[이것이 K-정신이다]
② ‘한국문화중심’ 대표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가무 즐기는 ‘무당열정’에 ‘인문학 교육’, 한류에 작용


한국문화중심 대표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두번째는 국제한국학회 회장이자 ‘한국문화중심’ 대표인 최준식(66)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미국 템플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1992년부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한 최 교수는 이미 1990년대 중반에 국제한국학회를 설립한 데 이어 10년 전엔 한국 문화가 중심이 된 복합문화공간인 ‘한국문화중심’(K컬처센터)을 만들어 한국 문화를 알리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경복궁 옆 한국문화중심 사무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그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을 경계한다. 종교학이나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기득권의 압력이 두려워 샤머니즘에 대해 애써 무시로 일관하는 것과 달리 샤머니즘, 즉 무기(巫氣)와 신기(神氣)야말로 한국인의 근본적인 기질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데서부터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샤머니즘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무속’이라는 용어 대신 ‘무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한국인의 주요 특질로 유교 인문학적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한 문기(文氣)와 무교적 신기를 꼽는다. 그는 <문기> <신기> <세계를 흥 넘치게 하라> 등 책을 통해 한류의 힘의 뿌리를 말해준다.

최 교수는 먼저 ‘한국인은 누구나 반쯤은 무당’이라고 본다. 2002년 월드컵 4강에 오를 때는 700만명이 거리로 나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는 온 국민이 금을 모으고, 관광버스에 타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네다섯시간 내내 날뛰고, 전국의 노래방에서 밤마다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밤새 뛰는 무당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또 “무교는 과거엔 권력과 불교와 유교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잡신 덩어리 정도로 폄하됐지만, 한국인은 무교를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평한다. 대표적 유교 마을인 안동 하회마을 한가운데는 당산나무가 버티고 있고, 교회에서 하는 부흥회에서 30~40분간 노래만 하다가 결국 망아경(忘我境) 속에서 통성기도와 방언을 하는 것이 굿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은 평소엔 자기 종교를 신앙하다가도 문제에 부딪히면 주저하지 않고 쉽게 무당을 찾는다는 것이다. 또 낮엔 유교 선비처럼 지내다가 밤이 되면 무당이 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화된 나라에서 무당이 여전히 20만~30만명이나 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름이 <무릎팍도사>와 <물어보살>이어도 생소할 게 없는 것은 무기가 우리 피에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류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류 뒤에는 문화적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한국이 최근에야 단군 이래 처음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주장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한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전 한국외대 교수가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라는 책에서도 말했듯이 한국은 서양인들에게는 미지의 땅이었지만, 삼국시대부터 17세기까지 세계 13대 선진국 가운데 하나였고, 한국이 후진국이었던 기간은 불과 100~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 인류사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만들고, 정보산업의 총아인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고, 오늘날로 치자면 하이테크급 기술로 고려청자를 만들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세계 최고 최대의 기록문화를 남기고,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인문학을 익힌 힘이 있었기에 최단시일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한국문화중심 대표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대금을 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국인이 가진 문기는 어디에서 왔나?

“조선의 인문학은 최고 수준이었다. 서당에 처음 가면 천자문부터 배운다. 이어 소학 같은 윤리서와 역사서를 배우고, 사서, 삼경, 주역까지 배우는 인문학적 교육 시스템을 가진 나라가 어디 있었나.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습격한 프랑스 군인들이 허름한 민가에도 집집마다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열등감을 괜히 느꼈겠는가. 한국인은 교육에 미친 나라다. 부처나 예수가 와도 교육열을 잠재울 수 없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나라가 됐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활용할 인재들이 나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인 아이큐(IQ)는 그런 교육열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무기의 열정에다가 브레인까지 더해졌다. 그러니 2011년 한국에 와본 워런 버핏이 ‘한국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한 것이다.”



―한국이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까지 이룰 수 있었던 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으니, 미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주인공은 필리핀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나 청나라보다 더 우수한 통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체제 안에서 공식적으로 왕을 감시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왕에게 직언할 수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통령 주변에 딸랑이들만 있는 현대보다도 최고 권력자에게 ‘아니되옵니다’ 하던 시대였다. 설사 왕이 받아주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귀양을 마다치 않고 저항했던 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지구상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코리아를 들지 않는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가 한류에 기여했다고 보는 이유는?

“한국인은 우리 집, 우리 딸, 우리나라라고 한다. ‘우리 남편’이라고 하지 ‘내 남편’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남편’이라고 하면 ‘너만 남편 있냐’고 비웃는다. 물에 빠져서도 개인주의인 서양인들은 ‘헬프 미’(나 살려)라고 하지만, 한국인은 ‘사람 살려’라고 한다. 한국인은 모임에서도 형, 동생처럼 가족 호칭으로 부르며 친족공동체화한다. 그런 가족 중심의 집단주의여서 한국의 아이돌도 연습생 시절 집단의 규율에 따라 그 힘든 훈련을 견뎌내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특징은?

“외국인들이 신기해하는 게, 중국에서 압록강 하나만 건너면 언어와 말과 문자뿐 아니라 음식이나 옷차림이 달라지고, 특히 음악의 박자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통음악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은 기본적으로 4박자인데, 한국은 3박자다. 정원을 만들 때도 중국이나 일본은 철저히 인간의 손이 타게 인간 위주로 만들지만, 한국은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만들려고 한다. 뇌 구조로 비유하자면 일본은 좌뇌, 즉 논리적이지만, 한국은 우뇌, 즉 감성적이다. 일본의 전통음악계에서는 스승의 것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퇴출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판소리에서 ‘사진소리’, 즉 스승의 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한국인들의 핏속에는 자유분방함과 창조에 대한 희구가 있다.”



―한국인의 가장 주요한 기질적 특징을 무기와 신기로 본 까닭은?

“한국과 중국, 일본 동북아 3국은 유교와 불교를 공유하고 있다. 다른 것은 무엇인가. 중국은 도교, 일본은 신도, 한국은 무교다. 여기서 세 나라가 달라진다. 도교, 신도와 달리 한국 무교는 시종일관 노래와 춤을 종교의례로 삼는다. 외국인 제자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면 일본인들은 박수 치며 논다. 한국인들이 길길이 뛰며 노는 것을 보면 ‘저렇게 노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고 놀라워한다. 유세 현장에서도 노래와 춤을 하지 않느냐. 월드컵 경기 때 집단적 망아경 속에 들어가 한국인들이 뿜어내는 열광적인 에너지를 보라. 그 무서운 신기가 지금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방탄소년단 슈가의 ‘대취타’ 뮤직비디오 장면. 유튜브 영상 갈무리

―한국인의 한국 문화에 대한 태도는?

“너무 모른다. 전세계인들이 한류에 열광하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한국 문화에 무지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오해를 시정해주지도 못한다. 방탄소년단(BTS)의 슈가가 ‘대취타’를 불러 전세계 아미들이 한국의 전통악기와 음악을 궁금해해도 국악을 모르니 설명을 못 해준다. 블랙핑크가 ‘하우 유 라이크 댓’이란 노래를 부르며 뮤직비디오에서 한복을 입고 춤을 추어 세계 팬들이 한복에 관심을 가질 때 한복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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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사상 종교, 중국서 꽃 피고 한국서 열매 맺어

등록 :2022-07-06 08:00수정 :2022-07-06
[이것이 K정신이다]
③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과 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세번째는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과 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다.








이동준(85)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 겸 유학대학원장,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장을 지냈고, 한국사상연구원 설립자이자 원장이다. 그의 집안은 한국 철학의 기둥이다. 부친 학산 이정호(1913~2004)는 ‘정역’(조선 후기 김항이 <주역>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해 주창한 역학사상) 연구의 일인자였다. 학산의 애제자이자 도반이고, 이 교수의 손윗동서인 류승국(1923~2011) 전 정신문화연구원장은 우리 문화의 원류인 동방문화를 밝힌 주역이었다. 이 교수의 딸 이선경(55) 박사는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주역을 연구한 뒤 <한국주역대전> 편찬팀장을 거쳐, 차기 주역학회장으로 선임된 상태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과천에서 부녀를 만났다. 이 교수가 지어 40여년을 산 단독주택은 학산이 말년에 함께 머물고, 류승국이 자주 드나들던 집이다.

학산은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과를 거쳐 의예과에서 의학도 공부한 수재였다. 해방 뒤 일석 이희승이 서울대에 국문학과를 재건하자며 그를 세번이나 찾아왔으나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계룡산에 들어가 3년간 정역을 만든 김항의 조카 덕당 김홍현으로부터 정역을 전수하였다. 그가 세상에 드러낸 정역은 조선의 패망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적 자존감이 꺾인 한민족에게 희망의 싹을 틔웠다. 우리나라가 세계 변화의 중심이 되어, 조화로운 화합 시대인 후천 시대로 세상을 이끈다는 정역은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국수주의자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쯤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나,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한류가 세계를 휩쓸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 교수는 사상과 문화에 대해 “중국에서 꽃이 활짝 핀다면 한국에선 열매를 맺는다”며 한국 정신을 ‘다양성의 조화’라고 결론짓는다.



정역 연구의 일인자였던 학산 이정호.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한국 사상은 오랜 세월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는 상반된 길을 달렸지만, 궁극적으로 이질성의 통합과 다양성의 조화라는 특징을 지녔다. 천지인 삼재라든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 풍류도 등 고대 정신에도 포용성과 통합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형이상의 정신과 형이하의 물질의 양면적 사고가 깔려 있으며, 어느 일면으로 기울어지다가도 다시 양면으로 통합하는 성격을 지닌다. 유불도(교) 모두가 이 땅에 들어온 뒤 그랬다. 한국 사상이 지향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의 존엄과 인격의 존중이다. 그것이 한국인의 성격과 가치관의 중핵이다.”

그는 또 “한국인들은 평화와 인(仁·사랑)을 지향하면서도, 기질적으로는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무사도 정신이 지배하고, 중국은 좋아도 싫어도 ‘하오하오’ 하며 원만한 군자를 지향한다면, 한국인은 백이숙제와 같은 의리학파가 뿌리내려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정신이 강하다. 그래서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지만, 돈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돈을 줘도 ‘누굴 거지로 아느냐’면서 돈을 내던지는 게 한국인이다. 학문을 하면서도 목숨을 내거는 게 선비다. 가치중립을 지향한다면서 누군가 자기 새끼를 죽이고 있는데도 ‘난 <중용>이나 읽을게’ 해선 선비라 할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과 700명의 의사를 보라. 700명은 무사나 농부가 아니라, 모두가 선비였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싸운 것이다.”

이선경 박사는 “우리나라엔 경학 고문헌 가운데 역(易)에 관한 것이 가장 많을 정도로 고대부터 정신의 저류에 주역을 비롯한 역의 사유 방식이 흐르고 있었고, 근대에 정역의 등장으로 또 한번 사고 전환의 일대 계기를 맞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문일답이다.



1975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류승국의 박사학위 수여식 때 학산 이정호와 류승국 전 정신문화연구원장.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한국 철학에 역이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보는 까닭은?

이선경(이하 경) “한국, 한국인의 사유 방식에서 역학적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훈민정음과 태극기를 봐도 그렇다. 류승국은 갑골문을 통해 상고대 동이의 ‘인방족’과 ‘어질 인(仁)’이 한국사상문화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어질 인(仁)’의 인도주의는 단군신화, 최치원 풍류도, 성리학의 태극, 훈민정음, 동학의 인내천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정역에서는 황극이라는 인간론으로 점을 찍었다. 중국에서 황극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이었지만, 정역이 말하는 황극은 보통의 인간이 절대주체로 선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18째 아들인 담양군의 13대손인 연담 이운규로부터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남학 창시자 광화 김치인, 일부 김항 세분이 동문수학했다고 하는데?

이동준(이하 준) “연담이 세분을 불러서 이걸 하라고 했다기보다는 최제우는 선도를 중심으로 법을 펴고, 김치인은 불교를 중심으로, 김항은 유교를 중심으로 법을 펴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다 알 수 없다. 연담은 실학자 이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006년 ‘학산 이정호와 정역’에 대해 학술 발표를 하고 있는 류승국.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정역은 어떻게 공부를 했나?

준 “학산과 도원(류승국) 등 8~9명이 계룡산 향적산방에 모여 밤엔 영가(음·아·어·이·우 노래)를 하고, 무도(춤)를 했다. 무도를 하다 신명이 나면 튀어 오른다. 영가 무도를 하면 동물과 자연물도 감응한다고 했다. 영가를 하면 그 소리를 들은 호랑이가 찾아왔다가 사람이 눈에 띄면 휙 사라진다고 했다. 겨울에 나가 보면 눈 위에 큰 발자국이 있었다.”

―정역이란 무엇인가?

준 “김항이 36살 때 연담 이운규에게 화두를 받고 54살에 정역의 세계를 깨쳤다. 복희 문왕 팔괘는 봄여름, 정역은 후천 시대인 가을 결실기를 제시한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간방(艮方)이 정역에서 중심이 되면서 간방 중심의 세상이 열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봄여름 성장기엔 경쟁이 심해 모순이 대립해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다툼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어른이 된다. 그런 여름이 가야 가을이 온다. 진(팔괘의 ‘震’, 현실에선 중국)이라는 것은 번성하고 화려하게 드러난다. 정역에서 보면 중국이 꽃이라면 우리나라는 열매다. 중국에서 핀 꽃들이 여기에 와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단군 이전 ‘구이’족이 가진 동방문화의 기반에서 유불도와 기독교까지 받아들여 통합했다고 했는데?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이 부친인 학산 이정호가 역의 원리로 밝혀낸 훈민정음의 원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준 “강자가 약자를,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정역에서는 조양율음(調陽律陰, 음양의 조화)의 시대가 온다고 봤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음의 시대가 지나면 양의 시대가 도래한다. 고려 시대엔 가요와 문학이 발달했다. 조선 시대는 고려의 문화예술을 당하지 못했다. 반면 고려는 조선 시대의 철학을 당하지 못한다. 고려는 악이 발달했고, 조선은 예가 발달했다. 고려 말에 자유로움이 심해져 너무 문란해지니 조선 시대는 예법으로 다스린 것이다. 그러자 학문·철학은 발달했지만 부드러움은 사라졌다. 다시 뼈에 살을 붙여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음악, 무용, 연극 등 예체능이 보완되어야 영육쌍전(정신과 육신의 균형 있는 발전)으로 온전해진다.”

―학산이 말한 훈민정음의 핵심은?

준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制字解)에 ‘천지의 도는 하나의 음양오행일 뿐’이라고 했다. 해례본은 역리와 성리학으로 설명되니 언어학만으로 해명이 어렵다. 1940년대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엔 훈민정음의 원리를 알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국립중앙도서관이 세계에 알릴 첫번째 우리 책으로 훈민정음을 정한 뒤 이창세 관장이 국문학자들을 찾아다녀도 역학을 모르니 제대로 해설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일석 이희승이 대전으로 학산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훈민정음의 구조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정음 글자에는 음양, 오행, 천지인 삼재 그리고 하도의 원리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뿌리 깊은 인도주의 정신 및 영육쌍전 사상이 뼈대가 되는 원리가 담겨 있다.”



2019년 미국 캔자스대학에 방문교수로 간 이선경 박사가 한국 사상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태극기의 원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경 “류승국이 ‘우주 만유의 근원이 태극인데, 내 주체가 남의 주체이니 남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 것은 기초적인 설명이다. 태극 모양은 동지부터 하지까지 밤낮 길이의 변화를 말한다. 45도 각도로 줄어들고 늘어나는 비율을 그리면 자연의 리듬을 따른 태극 문양이 된다. 태극 문양은 우리 고대부터 있었다. 태극을 중국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음악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틀이지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고 그리스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역도 보편적인 사유의 틀이다. ‘기원이 어디냐’보다 그것이 우리 삶 속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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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사회 꿈꾼 공자의 유학, K인문의 틀 다져”

등록 :2022-08-03 
조현 기자
[이것이 K-정신이다] ④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한학자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조현 종교전문기자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네번째는 김언종(70)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다.




한글전용이 대세를 이루고 한자는 갈수록 읽을 기회조차 줄고 있다. 그러나 한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다. 국회에서도 이모(이아무개)를 이모(어머니의 자매)로 혼동하는 일이 벌어질 만큼 한자를 모르면 여전히 언어 소통에 장애가 크다. 전국의 지명과 산과 강이 하나같이 한자 뜻으로 이뤄졌고, 이름도 한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수천년 역사와 고문헌, 문학도 절대다수가 한자 기록문이다. 한자와 유학을 두 다리 삼아 살아온 김언종 교수를 지난달 26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 서재 도가재(道可斎)에서 만났다. 도가재는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인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공자를 꼽을 정도로 천생 유학도다.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과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평생 한문을 업으로 삼은 그는 <한자의 뿌리>, <한자어 의미 연원사전> 등의 저서와 <한자의 역사>, <역주 시경 강의>, <혼돈록> 등의 역서를 낸 한학자다.

하지만 왕십리역 부근의 오피스텔에 자리한 서재에서 전자칠판을 비치해놓고, 멋진 모자를 쓴 채, ‘한잘알’이란 유튜브도 혼자 운영하며 현대식으로 한자 공부를 하길 그는 권한다.

“여전히 국어사전도 70% 이상이 한자어다. 가령 분수나 대수, 기하학 같은 수학 용어들도 한자를 알면 이해가 빠르다. 한자를 모르면 뜻은 모른 채 소리만 따라 하는 앵무새가 될 수 있다.”

그는 “한문 뜻글자는 칡뿌리처럼 곱씹으면 씹을수록 진국이 우러나기에 철학적·인문학적 사유를 깊게 해서 샤머니즘 감성에 치우친 한국인의 감성적 기질을 이성적으로 보완해주었다”며 “산골까지 서당이 생겨 당대 유럽보다 오히려 지식층을 두텁게 해서 케이(K)인문의 틀을 다져주기도 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를 한자나 유학 근본주의자로 알면 오해다. 그는 유학의 본고장 안동 출신이면서 다산 정약용이 변화를 거부한다며 칭했던 ‘안동답답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가 하면, 유학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김언종 교수의 서재인 도가재 편액. 김언종 교수 제공―우리에게 유학은 무엇인가?

“유학이 2000년간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의 식자들은 3경(시경·서경·역경)까지는 다 능숙하게 알지 못해도,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를 안 읽은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차별 없이 남을 자기처럼 아끼는 살 만한 대동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공자의 생활철학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만 한다면 계층 차이와 상대적 빈곤, 전쟁 같은 세상의 문제가 일거에 해소된다. 그러나 유학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고급 공무원들과 국민의 20% 정도 되는 양반들의 이념에 머물렀다. 조선시대 백성의 40~50%는 노비나 상민이었는데, 차별받는 이들이 유학을 좋아할 리 없었다. 공자는 대문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을 귀빈으로 대하라고 했다. 그가 ‘똥 푸는 사람’이어도 말이다. 백성들을 부리더라도 황제가 제후를 대하듯 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봉 조헌을 비롯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노예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한양에서 벼슬을 하면 통상 200~300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다산 정약용조차 <목민심서>에서 ‘민란을 쉬 진압하지 못하는 것은 노비 숫자가 적기 때문’이라고 했을 정도다.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한 종모법을, 서얼 출신인 영조가 종부법으로 바꿔 양반인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한 뒤 노비가 적어져서 민란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임진왜란도 지도층들이 싸운 것이 아니라 서애 류성룡이 꾀를 내어 노비들에게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구슬려 노비들을 동원해 극복한 면이 있는 것이다.”

―유학은 왜 제사와 문화엔 남았지만 국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졌나?

“조선시대 유학의 영향은 고급 공무원과 양반들에게만 해당됐다. 조선의 지배자들이 공자의 뜻을 거슬러 노비와 상민, 서얼, 여성을 차별하고, 자기들만이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는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오히려 무속과 무속화한 불교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를 보면, 야합이생(野合而生)이라고 했다. 70살 가까운 아버지 공흘과 10대 후반의 어머니 안징재가 야합, 즉 정상적인 혼인이 아닌 관계를 가져 공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공자야말로 처는커녕 첩의 자식도 못 된 셈인데, 공자를 하늘처럼 받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차별을 자행했으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유튜브 ‘한잘알’에서 논어를 강의하고 있는 김언종 교수. 유튜브 ‘한잘알’ 갈무리―공자의 유학이 왜 변질되었나?

“공자는 휴머니스트이자 유머가 풍부한 분이었다. 그런데 주자는 강력한 불교를 밀어내기 위해 공자를 석가모니와 같은 절대적 초월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공자의 부드러운 유머를 지우고, 의도적으로 공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공자의 제자였던 자로와 번지마저 희화화시키기도 했다. 빈천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공자는 가난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며 안빈낙도를 권했다. 그런 실천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여섯번이나 했으며 훗날 다산이 ‘청백리의 표상’이라 칭송했던 오리 이원익은 ‘물질은 남에게 양보하고, 정신적인 것을 가져라’ 하며 이를 실천했다. ‘힘든 일엔 앞장서고, 나눠 먹을 때는 뒤에 서라’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다산을 비롯한 탁월한 인물들이 실학을 주창했는데 조선은 패망했다. 한국실학학회 회장도 한 다산 전공자로서 이를 어떻게 보는가?

“노론과 남인 집권세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실학파와 이용후생학파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소외돼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시대를 극복해보려 애를 썼지만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쳐 변화의 동력이 되지 못했다. 성호 이익의 책도 출판조차 되지 못하고, 다산의 책이 출판된 것도 1930년대에 와서였다.”



한학자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조현 종교전문기자―조선 패망 이유를 어떻게 보는가?

“견제세력이 없으면 나라가 힘들어진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아무리 바른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니 속이 터져서 49살에 돌아가신 것인지도 모른다. 훌륭한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왔어도 그걸 활용 못하니 국란을 맞은 것이다. 서인 가운데 노론들이 막 나갈 때 젊은이들이 소론을 만들어 견제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미 숙종 때부터 막 나가 더 일찍 망했을 수 있다. 영조·정조 때까지는 그나마 당파가 있어 견제가 됐다. 뱀눈은 앞만 보지 위와 옆을 못 본다. 순조 때부터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로 견제세력이 사라져 뱀눈들이 지배했다. 일제 식민사관이 가르친 대로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다. 왕 앞에서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던 선비 정신이 사라지고, 당파와 견제와 비판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뱀눈들이 전횡을 일삼다가 망한 것이다. 나도 아내가 견제하지 않았으면 좋아하는 막걸리만 마시다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도 한자가 필요한가?

“한 정치인이 무운을 빈다고 한 것을 두고, ‘승리하기를 빈다’가 아니라 ‘운이 없기를’이라고 해석해 웃음을 산 적이 있다. 한자 뜻을 모르면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안 쓰고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한자 뜻을 알면 기미독립선언서를 한글로 읽어도 뜻을 알 수 있지만 한자를 모르면 읽을 줄 알아도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본이 중국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데도 왜 한문을 함께 쓰겠는가. 우리도 한자를 2000자만 알면 나머지는 유추해서 알 수 있어서 그 유익함이 무궁무진하다. 세종대왕이 말한 ‘어린 백성’ 즉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않으려면 한자를 알 필요가 있다. 한자는 2000년 이상 우리나라에서 국어 구실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 세계 속에 한자는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한국인들이 ‘음주가무’에 능한 기질대로 영화와 드라마, 케이팝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만약 한자 공부를 해 깊이를 더한다면 철학과 문학 면에서도 세계적으로 드날릴 수 있을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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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익과 자기 명리에 빠지면 결국 불심도 민심도 멀어질 뿐”

등록 :2022-08-31 08:00수정 :2022-08-31 09:28
조현 기자
[이것이 K-정신이다] ⑤ 40여년째 은둔 수행중인 현기스님

눈도 막고, 귀도 막고, 마음이 목석이 될 만큼
진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일념이 중생의 병을 낫게 합니다.
누가 누구를 시킬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승려들까지도 약자들을 패대기치고,
힘 있는 사람에게만 붙는 것은 왜일까요?
돈 없고 권력 없는 그 민심이 곧 불심인데.

지리산 상무주암 현기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다섯번째는 지리산 상무주암에 40여년째 은둔 수행 중인 현기(82) 스님이다.






경남·전남·전북 3도 800리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예부터 금강산·한라산과 함께 신의 거처인 삼신산의 하나인 민족의 영산으로 꼽힌다. 국립공원 1호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태초의 여신인 마고할미의 전설을 품고 있다. 천왕봉엔 마고할미를 모신 성모사가 있고, 노고단은 마고할미에게 매년 제사를 지낸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다름을 아는 산’(지리산·智異山)이란 이름처럼 동과 서, 호남과 영남이 함께 어우러지고, 다른 종교·사상까지 품는 어머니 산이었다.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지혜의 상징인 대지문수사리보살의 줄임말로 여기고, 문수보살이 1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이 산에 깃들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롭게 된다고 믿는다.



상무주암에서 보이는 지리산.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러나 어찌 지리산뿐일까. 전국 곳곳의 명산엔 하늘과 도(道)가 통하기 위해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치열하게 수도한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어디나 수도처였다. 그래서 불교학자이기도 한 문광 스님은 한반도의 풍수를 수도자가 좌선하는 모양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육체적·현실적 쾌락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일하고 전쟁하는 데 쓰는 에너지 이상으로 하늘과 자연과 소통하며, 정신적 깨달음을 위해 심혈을 쏟는 수도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은 우리나라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뭇별처럼 많은 이들이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은거하며 수도했던 지리산에서 현대에 들어 가장 오랫동안 은둔하며 수행한 자가 머문 곳이 해발 1100m 고지 상무주암이다. 지난 4일 현기 스님이 홀로 40여년을 지낸 상무주암에 오르는 길은 설렘이 고행으로 바뀌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백무동 계곡을 거쳐 마천면 삼정리에서 상무주암에 오르는 직선 길은 시종일관 급경사다. 음식물이 귀한 심산에서 수행하는 노승을 위해 음식을 메고 가다 보니, 경사는 덜하지만 멀다는 영원사 뒷길을 택해 올랐다가 조난을 당할 뻔했다. 때마침 장맛비까지 만나 천신만고 끝에 상무주암에 도착했다.



현기 스님의 참선 정진하는 모습. 조현 종교전문기자

“스님은 어찌 이런 곳에 머물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중생의 푸념에, 현기 스님은 “스스로 그런 것을 난들 어찌하겠는가”라고 껄껄 웃으며, 지리산 같은 품으로 맞는다. 암자의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가 중생의 갈증을 녹인다. 갈증과 갈애가 깊지 않다면 어찌 이토록 시원한 감로수를 맛볼 수 있을까.

“한번 (깨달음이) 확연하면 다시 어두워지지 않는데, 어찌 다시 어두워진 것입니까?”

현기 스님이 죽비를 날린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상무주암에 올라온 사람 가운데 이렇게 산을 몇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한 이는 처음이라는 것이고, 더구나 16년 전이긴 하지만 두번이나 왔던 길을 이토록 헤맸으니, 죽비가 아니라 몽둥이라도 맞고 정신을 차려야 할 터였다.

“백일청천(白日靑天·밝은 해가 비치고 맑게 갠 푸른 하늘) 대낮에 꿈을 꾼 것이 아닙니까.”

“원래 누구나 청정한 법신(法身·진리의 몸인 붓다)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번뇌망상에 물들어 미망으로 헤맬 수 있습니까?”

“지금 그대에게서 나는 그 소리, 그 소리엔 아무런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꿈을 꾼다면, 어떻게 그 꿈에서 깰 수가 있습니까?”

“눈만 뜨면 됩니다.”

“대낮에 눈을 뜨고도 현혹돼 코 베이는 게 중생의 미망 아닙니까.”

“그렇게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사람은 눈을 막아야 합니다. 큰 절에 가면 차안당이 있는데, 차안(遮眼)이란 ‘눈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눈도 막고, 귀도 막고, 마음이 목석이 될 만큼 염불이나 화두를 진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일념이 중생의 병을 낫게 합니다.”



상무주암 한쪽에 있는 삼층석탑. 조현 종교전문기자

현기 스님이 40여년 전 이곳에 홀로 올라와 일체의 세연을 끊고 정진한 것도 눈과 귀를 막고 일념 정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상무주암 마당 한쪽엔 조그만 삼층석탑이 있다. 현기 스님이 고려 고종(1192~1259) 때 각운 스님에 관한 설화를 들려준다.

각운 스님이 이곳에서 선서(禪書)인 <선문염송설화> 30권을 쓸 때다. 이 고지에 올라올 때 가져온 붓이 다 닳아 더는 글을 쓸 수가 없었는데, 한겨울 눈이 내려 산에서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때 족제비 한마리가 마당에 와서 열반했다. 그 족제비를 묻어주고, 그 꼬리를 붓으로 삼아 명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각운 스님이 설화를 완성하자 붓 끝에서 물방울처럼 사리가 떨어져 내렸다. 삼층석탑은 그 ‘필단(筆端)사리’를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을 한곳으로 모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 말해주는 설화다.

상무주(上無住)의 상(上)은 부처도 발을 붙일 수 없는 경계요, 무주는 머무름이 없다는 뜻이다. 상무주암 마루에 앉아 스님과 문답을 나누는 사이 ‘지혜의 나툼’ 반야봉 위로 구름이 흘러간다. 법신이란 상(相)에도, 번뇌망상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푸른 하늘에 허공법계가 열린다.



현기 스님이 손수 개간해 가꾼 밭들.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국 불교의 상징 같은 존재인 고려 보조지눌국사는 상무주암에서 수행해 깨달음을 얻고, 이곳을 ‘납승귀납처(衲僧歸納處) 천하제일갑지(天下第一甲地)’라고 했다고 한다. 누더기를 입은 청빈한 이가 수도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현기 스님도 손수 산을 개간해 공양하며 살아왔다. 그 신산한 삶을 나뭇등걸 같은 손이 말해준다. 그사이 밖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지만, 이 깊은 산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처음 올라왔을 때만 해도 아침이면 눈밭에서 무슨 동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발자국이 발견되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발자국은 사라지고 오소리와 족제비만 남았다. 두번은 지리산에 방사한 곰이 공양간 문을 열고 들어오고, 어느 때는 노루가 자주 밭을 헤집어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낮엔 모처럼 진주에서 상무주암을 찾은 두쌍의 부부가 스님이 만들어 평생 가꾼 경사진 밭에 울타리를 두르는 울력을 했다. 노동한 불자들의 중노동을 위로하는 기자의 말을 옆에서 들은 스님이 말했다.

“나무 천수천안관자재로다. 관세음보살님은 천수천안, 즉 손이 천개고 눈이 천개여서 관자재(세상 모든 것을 잘 보살핌)라고 합니다. 다 자기 얼굴에 자기 눈, 자기 귀, 자기 손발을 가지고 관자재하게 일하는 것이니, 누가 누구를 시킬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지리산 상무주암 현기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제 그도 중노동이 힘에 부치는 노승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는 꽃이 피면 꽃이 피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좋았지만, 지금은 눈이 녹고 봄 햇살이 비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신만은 여전하다. 상무주암의 수행자들은 새벽 2시면 모두가 깨어난다. 새벽 3시면 3배로 간략히 예불을 마치고, 선(禪) 수도처답게 누구나 참선한다. 홀로 있으나 함께 있으나 변함없는 수도승의 일상이다. 2시간의 새벽 참선을 마친 뒤에도 여전한 어둠 속에서 뭇별들을 조우할 수 있다.

“바깥세상에서는 이익과 명리를 위해 달리는데 스님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척박한 곳을 지킨 것입니까?”

“지킨 것도 아니고, 오랜 것도 아니고, 별로 할 게 없고, 쓸모 없는 중이다 보니, 그런 게지요.”



지리산 해발 1100m 고지에 있는 상무주암.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러나 어떻게 안과 밖이 둘이겠는가. 보조국사는 상무주암에서 견성한 뒤 무신 집권과 몽골의 침략으로 극심한 사회혼란과 타락한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하산해 불교혁신운동인 수선결사를 결행했다.

“정치인과 언론인뿐 아니라 승려들까지도 약자들을 패대기치고,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에게만 붙는 것은 왜일까요?”

그 물음 속에서 뭇 중생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까지 거둘 수 없는 은둔승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는 “돈 없고 권력 없는 그 민심이 곧 불심”이라며 “사익과 자기 명리에 빠지면 결국 불심에서도 민심에서도 십만팔천리 멀어지게 될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더구나 “이제 시공을 넘은 과거·현재·미래와 9만리 먼 곳이 이 휴대전화 하나에 다 담긴 이치를 수천년 전부터 화엄경이 다 설파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 본마음인 보광명지(普光明知·널리 퍼진, 빛과 같은 밝은 앎)를 깨달으면 굳이 수만리 밖에 나가지 않아도, 시공간이 자기 손안에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은둔 암자와 도시, 번뇌망상과 깨달음,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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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흔한 말의 힘, 다툼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줘

등록 :2022-09-28 
조현 기자 
[이것이 K-정신이다] ⑥ 이기동 전 성균관대 대학원장

이기동 교수. 조현 종교전문기자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여섯번째 성균관대 유학대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이기동(71) 교수다.


이기동 교수는 성균관대 유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 쓰쿠바대학에서 공부한 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대만 국립정치대학과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그는 최근 <유학 오천년>(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을 정리해 5권의 책을 펴냈다. 이 방대한 저술은 동국 18현 중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하서재단의 김재억 감사가 “재단이 뒷받침해줄 테니 ‘유학 오천년’을 총정리하는 집필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이뤄졌다. 하서재단이 수많은 유학자 가운데 그를 선택해 중국·한국·일본·베트남의 유학사상과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게 한 것도 의미 있지만, 이 ‘유학 오천년’의 출현은 새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은 유학이 중국의 학문이라는 관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한민족이 유학과 동양학의 주체라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있다. 특히 그는 동아시아 가치의 주축인 유학의 발원이 중국이 아니라 고대 동이족이 살던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미 3년 전 <환단고기> 해설서를 펴낸 바 있다. 단군을 비롯한 한민족의 고대 역사와 철학을 담은 <환단고기>는 주류 사학계가 위서라며 금기시해서 학자들이 언급하고 싶어도 사이비 학자로 찍힐까 두려워 언급하기를 꺼리는 책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동양철학자 중 한명인 그가 책까지 펴낸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도 남의 말만 듣고 금기시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환단고기>를 제자들과의 공부 모임에서 우연히 함께 읽으면서, 그동안 수십년간 학자로서 풀리지 않던 유학과 철학의 의문들이 단박에 해소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한민족 고대 철학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을 인자(仁者·어진 이)와 지자(知者·지혜로운 이)로 분류하는데, 둘은 삶의 원리가 다르다. 애초 한국인은 인자다. 인자는 본질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을 만났을 때 ‘너다, 나다’ 분리하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쓴다.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아니까. ‘사랑한다’도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 하지 않고 그냥 ‘사랑한다’고 한다. 왜 ‘아이’와 ‘유’를 생략하는가. 사랑하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반쪽을 만나면 ‘반쪽 같다’는 의미로 ‘반갑습니다’라고 한다. 인자와 달리 지자는 ‘나는 나, 너는 너’로 철저히 상대와 나를 분리한다. 철저하게 ‘나는’을 강조한다. 이들은 남남끼리 사니, 기본적으로 삶이 경쟁이다. 따라서 물질적으로는 발전하고, 서로 이기려고 무기도 개발해 발전하지만 너무 경쟁만 하고, 서로 멀어지다 보니 외로워진다. 모두를 ‘하나’로 보는 우리와 달리, 각각 남남이라고 하면 열명이 모이면 10분의 1, 100명이 모이면 100분의 1, 70억명이 모이면 고작 70억분의 1이다. 그러니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을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다. 또 남남은 마음보다 몸 중심이다. 따라서 배가 고플 때는 내 몸 챙기려 열심히 사는데, 배가 부르고 넉넉해지면, 잠깐 살다가 마는 몸이란 존재에 대해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러면 외로움을 못 견디고 마약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이기동 교수. 조현 종교전문기자그는 <오징어 게임>이나 <수리남> 같은 드라마나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 등 한류가 뜨는 배경에는 이런 한국인의 독특한 ‘우리 정신’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인은 본래 ‘하나’와 ‘우리’라는 의식이 강하다. 어질 인(仁)을 보면 ‘두 사람’이란 뜻이다. 미국이나 일본·중국에서 지내봤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술 생각이 나면 혼자 술집에도 가고 식당에도 간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원래는 좀체 홀로 안 가고 함께 갈 친구를 찾는다. 한국 드라마에선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빠지면 목숨을 던지곤 한다. <미스터 션샤인>(tvN)을 보면 한 여자를 세 남자가 사랑하는데, 한 여자를 위해 세 남자가 모두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남자들이 죽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행복해하며 죽는다. 이를 보면 나도 저런 사랑 한번 받아 봤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남남끼리 경쟁과 다툼에 지친 세계인들에게 이처럼 하나 되는 사랑은 열망을 불러온다.” 다음은 이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통상 한국인을 ‘한’(恨)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 한은 외침을 많이 당해 생긴 것이라는 설이 많은데 그런가?

“중국에 <독단>이란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천자’(天子·하늘의 아들)라는 말은 이적(夷賊·오랑캐)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오랫동안 동이족에게 뒤처졌다가 전성기로 나아가던 중국인들은 동이족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동이족을 오랑캐로 낙인찍었다. 그런데 동이족은 모두가 다 천자라 칭했는데, 중국에선 황제에게만 갖다 붙였다. 목은 이색은 ‘천인무간’(天人無間·하늘과 인간 사이엔 간극이 없음)이라고 했고, 퇴계 이황은 천아무간(天我無間)이라고 했다. ‘하늘과 나 사이엔 간격이 없다’는 뜻이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했다. 이처럼 내가 하늘인데 현재 이 모양이라면 원래 하늘 모습을 회복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다. 그것이 한으로 나타나 수양을 철저하게 해서 본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한다. 우리 문화는 한을 푸는 한풀이 문화다. 서양 문명에 물들어 돈을 벌고 권력을 쥐어야 한이 풀릴 줄 알고 치열하게 열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한은 그렇게 해서 풀리지 않는다. 한국인의 한은 우리가 하나라는 본질인 한마음을 회복해야 풀린다. 그것이 원효의 ‘일심철학’이고, 퇴계와 수운의 철학이기도 하다.”




―주류 사학계가 인정하지 않은 <환단고기> 해설서를 낸 이유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을 성이라 함)은 주자학의 핵심인데 <환단고기>에서는 하늘의 마음을 성이라 하고, 이것은 ‘살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즉 하늘은 만물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명쾌한 말이 있는가. 만약 위서라면 누구나 다 아는 말을 뒤집을 수 없다. 너훈아는 나훈아와 비슷하게 노래를 부르지 전혀 다르게는 안 부른다. <환단고기>를 너무 국수주의적으로, 고토를 회복하자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본 이들 때문에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의심받게 된 측면이 있지만, <환단고기>는 민족을 넘어 드넓은 철학을 담고 있다. <환단고기>에서 너무나 놀라운 철학들을 계속 발견하게 되면서, 왜 남의 말만 듣고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학자로서 참회를 했다.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 가운데 4복음서도 안 읽어보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논어>도 안 보고 유교를 욕하는 분들도 있다. 적어도 학자라면 한번 읽어보고 비판도 해야 한다. 예컨대 추사 서책이 새로 나와 종이 감정사가 보고 추사 때 종이나 먹이 아니니 가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예가가 보니 추사 글씨가 틀림없다. 그래서 상세히 살피니 쥐가 갉아먹은 부분을 후대에 덧대기도 했다는 것이 판명될 수 있다. 따라서 추사 글씨를 감정할 때는 종이나 먹 감정사가 아니라 서예가의 감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환단고기>도 그동안 철학자가 감정하지 않았다. 철학적으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환단고기>를 보고 나서는 한국인이 더 위대하게 보인다. ‘이런 위대한 철학을 가진 민족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현대 지구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이다.”

―보통 현대인들에게 학문이란 지식을 쌓는 것이라고 할 텐데, 마음공부라고 보는 까닭은?

“몸 중심, 마음 중심의 세상이 반복되는데 서구 근세 철학이 세계를 지배한 뒤로는 몸이 중심이 됐다. 하늘 마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마음이 몸속에 있다고 규정하면, 너와 나의 마음은 몸이 다르니 달라져 버린다.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현을 해야만 한다고 한다. 몸이 다르니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욕심을 채우려고 하니 다투게 되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된다. 그래서 규칙과 법을 만들고, 지식을 쌓아 싸움에 대비한다. 그러나 행복하지가 않다. 결국 불행에서 나오려면 마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욕심도 있지만 본래 마음, 하늘 마음, 세상 전체를 하나로 여기는 우리라는 마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마음공부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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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품은 한민족의 흥과 정, 서양사상과 회통해 만물 살려

등록 :2022-10-26 07:00수정 :2022-10-26 07:24
조현 기자 
⑦ 이정배 목사. 이은선 명예교수 부부

강원도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이은선·이정배 교수 부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일곱번째는 이정배(67) 목사(전 감신대 교수)와 이은선(64) 세종대 명예교수 부부다.




지난 17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갑천로 760번길 깊은 산골 현장아카데미를 찾았다. 부부 신학자와 인연이 깊던 류승국(1923~2011·전 정신문화연구원장) 교수가 작명한 ‘현장’은 주역 계사전의 현저인(顯諸仁) 장저용(藏諸用)에서 따온 말로, ‘천지의 도는 일상의 쓰임 속에 감춰져 있어서 사람들이 매일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 인(仁)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의 진리만을 내세워 다른 주장들을 배척하며 갈등하지 않고, 사람과 삶과 자연의 도와 조화하기 위한 신앙과 학문을 지향하는 곳이 바로 현장아카데미다. 부부가 현직에 있던 20여년 전 화전민이 살던 집과 땅을 인수해 주말마다 땀 흘려 개간하고, 나무를 심어 단장한 이곳은 수도원 문화가 부족한 개신교의 옹달샘이 될 만하다.


이정배 교수는 감신대 교수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장, 한국조직신학회장, 한국문화신학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했다. 이은선 교수는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한국유교학회와 양명학회 부회장을 거쳤다. 부부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계승한 프리츠 부리 교수의 지도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공부한 변선환·신옥희 부부의 뒤를 이어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를 공부했다. 따라서 윤성범(1916~80)과 변선환(1927~95)이 연 토착화 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의 보수 신학이 이식돼 주류를 형성해 전세계에서 가장 배타성이 높은 한국 개신교 풍토에서 ‘열린 신학’을 하기란 ‘닫힌 신학’을 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힘이 드는 일이다. 부부의 스승 변선환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며 종교 다원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교회 권력을 쥔 보수 목사들은 1992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한 그의 말만을 부각시켜 그를 ‘적그리스도’, ‘사탄’으로 매도하며 중세식 종교재판을 감행해 감신대 학장과 목사직, 교수직에서 파면당하게 하고 강제출교시켰다. 달걀로 거대한 바위와 싸우던 변선환은 몇년 뒤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변선환은 떠났지만 그가 ‘노다지’(금광)이자 ‘노터치’(내 제자들만은 손대지 마라)라고 한, 부부를 포함한 제자들은 오는 3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를 공론화할 계획이다.



이은선 교수의 선친으로 신학자·목사이자 화가, 토착적 영성가였던 이신(1927~81)은 변선환과 ‘절친’이었다. 부부는 변선환과 이신의 주선으로 맺어졌다. 현장아카데미엔 이신이 탐독하던 고서적을 비롯해 동서양을 가리지 않은 수천권의 장서들이 빼곡하다. 크리스천이면서도 동서양 사상의 진수를 꿰뚫었던 유영모(1890~1981)와 함석헌(1901~89) 사제를 따르는 이들답다. 이정배 교수는 다석 유영모의 유고집으로 밤을 지새우며 다석 사상을 정리해 <빈탕한데 맞혀놀이>와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낸 바 있고, 이은선 교수는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부부 신학자에게는 외래 종교가 아닌, 한국인의 심성 속에 애초 있었던 기독교를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토착적 기독교 사상·영성가들의 가르침과 삶이 녹아 있다.

부부를 비롯한 한국문화신학회 회원 20명은 한류 초기인 2011년 이미 <한류로 신학하기>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당시 후학들은 한류가 ‘한국적인 본질’보다는 세계의 것을 합친 ‘하이브리드’(혼합물)여서 세계에 잘 먹히는 것 아니냐는 반박을 하기도 했지만, 공간적으로 세계와 혼종된 것도 있으나, 시간적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혼종된 것도 있으니 그 차원에서 한류를 신학적으로 살펴보자는 데는 동의해 논의가 진행되면서 출간에 이르렀다.

“돌덩이처럼 백년 천년 잘 변하지 않을 만큼 자아동일성을 가진 것들도 있지만, 처음엔 조그만 것이 다른 환경과 만나 덧붙여지며 확대되는 동일성도 있다. 그것마저 부인하면 이스라엘 민족에서 시작된 조그만 정체성이 확대되어서 오늘날 거대한 기독교 문명을 이룬 성경도 다 부인할 수밖에 없다.”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산골에 있는 현장아카데미.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런 이정배 교수의 말을 이어 이은선 교수는 “종교학자 황필호 교수가 한국인들은 종교를 바꿔도 개종(改宗)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덧붙인 가종(加宗)이라고 했는데, 유교인이나 불교인이 기독교를 만나면, 불교적으로 생각한 것을 다 버리고 새롭게 기독교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고, 그 이전 것에 새로움을 더했다”고 보았다. 통상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 동학의 개벽사상을 유교와 단절시켜 이해하지만 이은선 교수는 서학도 동학도 모두 유학의 내적 발전으로 본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유교 선비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된 이들은 유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동기를 기독교에서 얻으면서 유교적 이상을 좀 더 빨리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열린 생각은 특정 종교나 종파를 넘어 근원을 찾는 성향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은선 교수는 “죽으면 천당 아니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현대 한국 기독교의 단차원적 신앙이 교권주의자들의 사유 없는 신앙과 목회자 타락을 부추긴 한계를 노출했다”며 “소위 성직자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모두가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길을 추구한, 선조들의 유교적 사유를 회복해 사유하는 신학이 될 때 과거의 한국 종교사상뿐 아니라 미래 과학 문명과도 보다 더 잘 회통되는 기독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배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선교한 것 같지만 이 땅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말처럼,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다가도 본질을 잃으면 거부하는 것처럼 기독교도 받아들였다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적 고유성을 흥과 정으로 정리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엔 단군 신화와 같은 천지강림신화와 박혁거세 신화와 같은 난생설화가 동시에 있다. 산의 수렵문화에서 나온 천신신화와 농경문화에 나온 난생신화가 함께한다. 하나는 초월적이고, 하나는 내재적 발전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배 교수는 “이 두가지에서 <천부경>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인간이 하늘과 땅과 하나다)이 나왔다”며 “대종교를 연 나철과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가 지닌 한민족 고유사상의 맥을 이은 다석 유영모도 이 사상을 통해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며,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에서 찾아 누구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고 전했다.

“우리는 인간이 본래 하늘(하나님)을 품고 있으니, 신(神)이 (안에서) 난다. 신나면 흥이 발동한다. 고통이 심해져 흥이 단절되면 한이 된다. 흥이 깨진 상태가 한인 것이다. 그 한을 치유하는 것이 정이다. 이 정은 기독교적 공동체성과 만난다.”

이정배 교수는 “우리 안에 하늘 의식이 있었기에 기독교의 하늘을 이해하고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며 “초월적 하늘(신)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동학과 같은 내재적 천(天)을 받아들일 때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와 더 깊게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은선 교수는 “흥이나 풍류보다 더 근원적인 한국정신은 생(生·살림)”이라며 “유교에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만물을 살리는 마음)이 있는데, 만물을 관장하는 이치인 리(理)에 대한 우리 민족의 생각은 ‘만물을 살리는 생리(生理)’였다.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도 살아 있는 역동적 살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박경리의 <토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난 속에서도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항상 같이하며 어떻게든 살려내 고난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참된 꽃을 피워내는 살림 의식이 우리에겐 있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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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5

이은선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ㅡ 이종철 서평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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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한국信연구소 오늘, 22.08.15(월) >
-8.15광복절에 오구라 기조 교수의 '조선사상사' 연구를 돌아보다-

어제 한국기독교협의회 한반도평화포럼 예배를 마치고 오늘은 다음주에 있는 한국양명학자 대회를 위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앉아있는데, 77주년 8.15 광복절을 그냥 지나가기가 죄송해서 지난 6월에 있었던 한국헤겔학회에서의 오구라 기조 교수 책서평(이종철교수)에 대한 저의 토론문이 있어 여기 가져옵니다. 
한반도 포럼에서 만난 일본 거류민 교회 조영철 목사님과 박현숙 교수님과의 사진과 함께.

한국 헤겔학회 6월 월례 발표회, 22.06.18(토). 줌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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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교수님의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 논평”을 읽고>

1.
먼저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종철 교수님은 물론 헤겔학회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헤겔학회야말로 일찍부터 ‘재세이화(在世理化)’, 리理(이성/정신)를 통해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리매김하고, 규정짓고자 한 분에 대한 학회이니, 오늘 오구라 기조 교수가 그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나 『조선사상사』를 가지고, 한국을 철저히 유교적 도덕 지향의 국가로 보면서 그 도덕 지향의 유교적 리理로 한국의 모든 것을 밝혀보려는 시도의 책을 다루는 것은 짐짓 마땅해 보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제가 맡은 역할의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저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화를 학문적 주제로 삼아오면서 거기서 특히 유교 문명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듯이 좁은 민족국가적 개념에서 중국 한족(漢族)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외래로부터 받아온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과거 고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더 근원적인 그룹에 의해서 기원을 새롭게 볼 수 있고, 그 전개와 확장에서도 단지 중국인에 의해서 정리된 것 이상으로 고대 한국인을 비롯한 동북아 민중들의 토착적 삶과 깊이 연결되어 전개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구라 교수도 이종철 교수님도 이러게 모두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보고자 하는 지금까지의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서 논의를 펼치기 때문에 저의 입장은 시작부터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나 저의 다름에 대한 논증은 오늘 짧은 논평이나 한 두 시간의 이야기로 언술 되기 어려우므로 일종의 벽 앞에 서있는 느낌입니다.

3.
따라서 저의 논평은 어떤 잘 정리된 구조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종철 교수님이 쓰신 논평문의 페이지를 따라가면서 생각나는 질문, 논의, 비판점 등을 단편적으로 제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첫 페이지에서 이 교수님은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유교적 ‘도덕 지향성’의 나라라고 보고 도덕을 명분으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형세라고 한 것에 동의하시면서 “나는 한일 간의 징용공을 둘러싼 논쟁을 ‘근본주의 도덕과 극우 종족주의’의 싸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을 우선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 문장에서 받은 첫인상이 한일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우익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구라 교수의 두 책이 물론 이 교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한국 사람보다도 더 지대한 관심과 공부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꿰뚫고, 한국사상사 전체를 통사적으로 살펴본 것이라는 점에서 감사와 감탄을 불러온다는 것에 일면 동의합니다. 

그는 한국에서는 체육선수도 도덕적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한국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놈’이 의미란 “자신보다도 도덕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가리킨다”라고 하면서 일본인들과는 다른 한국인들의 도덕지향적 성격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아직도 이 두 책을 읽으면 제일 거슬리는 것은, 그가 스스로 도덕 지향적이지 않다고 한 일본인이어서 그런지, 그럼에도 20세기의 한일병탄에 대해서까지 어떤 ‘불의’에 대한 감각도 없이, ‘사죄’의 마음도 없이 그냥 두 나라 사이의 일반적 관계의 일로 보는 것 같은 의혹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혹이 들 때는 이러한 모든 그의 작업이 저에게는 또 하나의 왜곡과 침략으로 보이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완용 등의 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195쪽), 한국의 ‘민족주의’ 리를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내보이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한국의 병합에 반대했던 이토를 암살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없지만”이라고 평하면서 이 시기에 왜 “강력한 친일 단체가 생겨났고, ... 한일합병을 주장했는가 ... 감정론이 아니라 냉정한 학문적 분석이 필요” 하다고 한 언술(『조선사상사』, 226-227쪽) 등을 말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이 교수님의 생각이 어떠신지 묻게 됩니다.
 
이 교수님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천주교 박해, 대원군의 쇄국 정치, 오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모두 오구라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봉건적인 성리학적 이념의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뒤에서 스스로 “필자와 같은 문외한도”라는 말을 쓰실 정도로 한국사나 사상사, 유교사에 대해서 그렇게 탐구를 안 하셨다면,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은 일면적인 판단을 하시는지, 혹시 그것이야말로 오구라 교수도 많은 부분, 그리고 그 이전에 특히 일제강점 치하에서 식민주의 사가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과 가치절하 기도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4.
이 교수님은 두 책에 대한 논평에서 제가 이전에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하나의 리 철학의 나라, 그것도 리를 ‘상승’과 성취에의 열망으로만 본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을 일면 적실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오구라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한국인들이 진정 강한 ‘도덕(理)’ 지향성의 사람이라면, 거기에는 단지 ‘상승’의 방향만이 아니라 ‘자기희생’, ‘비움’, ‘겸비’나 ‘인내’, ‘고통’ 등의 ‘하강’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그것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구라 교수는 한국에서의 도덕 지향은 그것이 “도덕의 최고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21쪽).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오구라 교수의 규정이 진정 한국적 리 추구의 진면목, 즉 리와 기를 어떻게든 함께 하나로 이루어내고, 그래서 그것이 더 높은 리가 되도록 하는 의미의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그 리의 추구는 하강, 자기 비움, 겸비나 인내의 그것이 되어야 함을 보지 못한 것이고, 그것은 그가 한국인들의 리 추구가 단지 ‘도덕’이나 ‘철학’만이 아니라 ‘종교’이고 ‘영성’이며, ‘뜻’의 추구인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인선,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 「책을 내며」). 저는 그런 의미의 리 추구야말로 한국 사고의 진정한 고유성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또 다른 언어로 한국 유교의 ‘종교성(religiosity)’ 내지는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명했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보지 못한 것은 리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이고, 그것은 리 지향을 단지 하나의 ‘활동이나 운동(movement)’으로만 보는 것이지, 그것이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내용을 가진 ‘행위(action)’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최근에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렌트가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쓸 때 독일 나치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movement)의 법’을 비판한 것이 생각났고, 오구라 교수도 한국인의 삶을 바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절하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이 교수님은 그다음 책 『조선사상사』의 논평에서 오구라 교수가 “순수성, 하이브리드성, 정보, 생명, 영성”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조선사상사를 통찰하는 것에 주목하고, 특히 거기서 저자가 ‘영성’이라는 관점을 가져온 것에 여러 생각을 밝힙니다. 이 교수님도 지적했듯이 사실 순수성과 하이브리드성의 서로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가져와서 그것을 조선사상사의 특징으로 본 것은 “일종의 억지이거나 무리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오구라 교수가 그 전 단계에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한국 사상의 리기지묘적 특성을 나름으로 다시 파악한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앞 책에서의 리 일원적 사고를 리기불이적(不二的) 사고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비교에서 한국 사상을 외부로부터 도래한 것이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개변하고 부정하는 순수성의 추구 차원에 더 집중하여 보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축소지향적 일본이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지구상의 나라 중에서 한국만큼 지구라는 생명체에서 인류가 가꾼 제 종교들이 다양하게 현시적으로 역동하고 살아 역할 하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사상은 항상 다시 근원의 순수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하이브리드성을 지닌, 즉 지극히 이기묘합적이고, 그 리기묘합의 종교성과 영성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위한 것으로 표현되는 곳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전세계를 휘감고 있는 K-문화 한류의 바람이 그 한 증거라고 여기고, 여기서 저는 한국 사상의 종교성과 여성적 통합성, 실천성을 주장합니다(이은선,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영성”,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2016』, 55-84쪽).
 
6.
다시 반복하면 저는 오구라 교수가 리의 추구를 단지 ‘철학’이나 ‘도덕’, ‘상승’이나 성취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상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종교성’과 ‘영성’, ‘뜻’의 차원을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유교 성리학적 언어로는 ‘리기묘합’의 추구로 표현할 수 있지만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언술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의 언어로 仙, 道, 易이나 空, 또는 이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 전통이 된 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신앙 등으로 표현되면서 어떻게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는, 또는 변화시키는 이상의 초월과 뜻이 있으며, 그러한 궁극 내지는 근원의 심연과 현상의 불이성(不二性)을 놓지 않으려는 추구로 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탈형이상학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세상의 심연성과 궁극성, 초월성(life, 理)을 다원성(plurality, 氣) 속에서 마련하고자 하는 고투에서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말로도 표현했고, “차이의 어두운 심연(the dark background of difference)”이라는 말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성(聖, the sacred)과 속(俗, the profane)을 어떻게든 함께 연결하려는 추구가 한국사의 전개 속에서 비록 겉모습의 종교 형태는 다르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의 종교적 삶과 영적 추구에서 지속적으로 표현되어왔다고 보았습니다(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2009』).

이 교수님도 지적하신 샤머니즘(무교)을 포함해서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 오늘날의 탈종교적인 페미니즘의 추구도 그러한 시각에서 탐색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래서 이 교수님이 “일본 학자가 이런 책을 쓰는 동안에 한국의 학자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자괴심마저 들기도 한다” 등의 언어에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 사상의 고유성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 교수님이 지적하시는 “학자적 양심이나 부끄러움”, “학문적 무관심과 불통” 등의 질책을 들으면 과연 그렇게 말하는 분이 우리들의 연구를 인지했고, 살펴보았나 되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구라 교수의 이 책들은 원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 너무도 얕은 지식과 여전히 혐오적인 생각하는 일본 대중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역수입되어 번역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학자들이 보기에 일천한 측면이 많이 있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책의 저자조차도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마음을 잘 모르고, 여전히 오늘 남한과 북한이 분단으로 동시에 겪고 있는 이 고통이 그들로 인한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오구라 교수의 단어 선택이나 틈틈이 드러나는 뉘앙스조차도 거슬리는 것이 많습니다.
 
7.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오늘 탈종교와 탈 형이상학의 시대에 다시 ‘도덕’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며, ‘영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인에 의한 것이라면 앞에서 지적한 여러 한계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도 감사하고 감탄합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저의 앞선 시기부터의 한국 여성종교사 탐구와 한국사상사 관점도 알아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거나 ‘영성’ 개념과 관련해서 저작권 운운할 정도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일본적 영성’을 말했다고 하면서 거기서 ‘조선적 영성’이라는 표현을 얻었다고 합니다(『조선사상사』, 20쪽). 아무튼, 이런 교수님의 비판과 지적, 오구라 기조 교수의 두 책을 계기로 저와 같은 학자가 더욱 분발해서 한국사상사의 맥을 살피는 작업을 더 정교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면 그 또한 좋은 성과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종철 교수님의 노고와 열정, 애정 어린 비판을 잘 경청하여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3You, Sunghwan Jo and 21 others



Jong Cheol Lee

이은선 교수님, 훌륭한 논평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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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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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주간기독교 2022

전체 < 기사목록 - 주간기독교   2022

18, 19세기 조선 성리학,
천학(天學)에 이르다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8.03 09:56

사유하는 집사람
강정일당의 유교 종교성과 21세기 페미니즘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7.19 08:43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6.29 10:20

18세기 성호 이익,
조선의 주체성과 실학으로서의 성리학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6.14 21:33

17세기 하곡 정제두,
주자학과 양명학의 조선적 통섭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5.31 09:39

16세기 조선의 퇴계와 율곡,
그리고 오늘의 우리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5.17 16:12

16세기 조선에서 퇴계와 양명 만나다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4.29 16:35


맹자의 효(孝)와 유교적 궁극 신앙(事天)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4.15 15:10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4.01 09:51

공자의 어린 시절과 그 어머니 안징재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3.18 08:47

주희의 인설(仁說)과 성학지도(聖學之道)의 종교성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3.04 09:53

유교의 인간 이해(人)와 한국인의 사람됨(仁)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2.18 11:08

유교 문명의 기원과 전개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2.04 18:42

동아시아 문명화 과정과 유교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1.17 09:30

밭에 감추인 보화 같은 유교의 道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01.04 10:35

2022/04/05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학술 < 기사본문 - 주간기독교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학술 < 기사본문 - 주간기독교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4.01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7
 

   우리는 지난 6회 글에서 어린 시절 공자가 그 어머니 안징재로부터 어떻게 큰 사랑을 받았고, 그런 공자가 제자와 더불어 부모 3년 상(喪) 치르는 일로 어떤 쟁론을 벌였는지를 살폈다. 공자를 이어서 유가의 도를 공고히 하고 전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자(BC 372-289)가 살던 시대는 그보다 더한 실리주의와 패권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약육강식의 전국(戰國)시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맹자 삶에도 부모님 상 치르는 일과 관련한 설왕설래가 전해진다. 다름 아니라 맹자가 그 아버지 장례보다 어머니 장례를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렀다는 논란이다(『맹자』 「양혜왕」下16). 여기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반해서 어떻게 어머니 장례가 더 성대하고 ‘지나쳤다(踰)’라고 하는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근거는 알기 어렵지만, 그동안 맹자에 대해 알려진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상상해 보면 맹자도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란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맹자가 자신이 어머니 관을 준비하는 마음은 단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흡족(盡於人心)한가’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는 이야기가 있다(『맹자』 「공손추」 下 7).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이야기도 익히 알고 있거니와, 이것으로써 공자의 仁이나 맹자의 義처럼 ‘마음을 극진히 하는 일’과 관련한 유교 도는 당시 시대 일반을 훨씬 뛰어넘는 어머니들의 지극한 모성 실행과 그 체험과 깊이 연관되며 거기서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기독교의 예수에게서도 어쩌면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서 원치 않는 폭력적 임신으로 태어난 ‘사생아’ 예수가 그 어머니 마리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으로까지 키워지는 사랑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독교 여성신학적 상상과도 잘 연결되는 것 같다. 

 

   많은 유가도 연구가들에 따르면 맹자의 가르침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제일 잘 부합한다고 한다. 우리는 특히 맹자가 당시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시기와도 같이 패도의 시대였지만 위정자들에게 끊임없이 리(利)보다는 의(義)에 따라서 정치할 것을 강조했고, 그 義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이 義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끝없이 논쟁하고 고민한 것을 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지적이 맞는 것인지, 몇 년 전 미국 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만큼 많이 팔린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런 샌델 교수가 얼마 전 다시 『공정하다는 착각』을 내놓았는데, 거기서 그는 오늘날 소위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능력주의’ 내지는 ‘능력 평등주의’로서의 정의와 공정 개념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모순과 “착각”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즉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당연시하는 능력주의, ‘각자가 가져갈 가치와 보상은 각 개인이 내보인 능력에 따라서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라는 이상은 결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오늘날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학벌이나 지능, 신체적 재능까지도 결코 단순하게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 개인은 아무런 역할이나 기여도 하지 않은 前 세대의 삶과 수고가 녹아있고,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서 이루어진 공적 영역이 토대가 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 지구 집에 태어났으면 누구나가 고루 누릴 권리가 있는 지구 자연의 토대와 기여가 내재하여 있는 등, 그래서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얻는 데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제공되었던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심각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능력 평등주의의 폐해 앞에서 서구 기독교 전통의 샌델은 그러나 그 한계와 불의만을 지적할 뿐 그에 대한 대안은 잘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우리에게 아주 오래된 미래인 맹자의 ‘경장(敬長)’으로서의 義를 다시 가져와 보고자 한다. 맹자는 당시 오늘날보다도 때와 기회에 따른 ‘능력의 폭정’과 ‘힘과 무력의 폭정’이 심했을 전국(戰國)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그것을 넘어서 그와는 다른 인간적인 길을 찾고자 고투했는데, 거기서 특히 필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개념이 ‘경장(敬長)’으로서의 義 의식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 공동체가 더욱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단지 현세대 구성원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 현시대의 존재가 가능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었고, 토대가 되어준 과거 세대와의 관계에서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거와 더 오래된 윗세대, 거기서의 개인과 주체의 수행, 역사적 진실 등이 올바로 평가되고 살펴지는 일이 우선이라는 의식인데, 만약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되었고, 중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힘없는 대상이 된 과거에 대한 인정과 배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현재의 약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다. 반대로 온 공동체가 그와 같은 배려를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좋고 선한 것을 돌려준다면, 즉 눈에 보이는 능력과 힘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정과 공경이므로 거기서는 동물 세계처럼 능력 평등주의의 약육강식 논리가 아니라 약하고 힘없으므로 더욱 배려해주는 인간적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르침이다.

 

   정의와 공평이란 한 공동체의 힘과 권력, 재화와 기회 등을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편중되지 않게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지 않고, 만약 그것을 힘과 폭력으로 빼앗았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말한다. 그런데 맹자에 따르면 그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의 義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자기 욕망만이 다가 아니라 나보다 먼저 온 형과 언니가 있고, 그래서 그 윗사람인 형과 언니는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이며, 그것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체화하면서 얻어진다고 밝힌다(『맹자』 「진심」 上 15). 이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을 한 ‘조건 지어진 존재(conditioned being)’로 파악하는 일이다. 자기가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고, 자아의 지금이 자기 홀로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오래된 존재, 더 먼저의 세대, 더 근원적인 토대가 있었으므로 가능해진 것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에게 한계를 주는 능력이 한 공동체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강력히 요청된다. 오늘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위기가 인간 자아의 무한대 확장이 불러오는 자아 중심주의와 세계소외라고 했을 때 바로 이러한 경장(敬長)으로서의 정의는 그 자아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거기서 자기보다 먼저 온 세대의 수고와 희생,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오래된 것(長)에는 인간보다 먼저 이 지구 집의 주인이었던 다른 생명체와 자연의 토대 됨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으므로 현재 인류의 크나큰 생태위기 상황에서도 적실하게 적용될 수 있다. 맹자는 만약 그렇지 않고 오늘 우리 시대처럼 능력주의에 골몰할 때 극단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는데, 우리 시대에 대한 경고로도 낯설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일찍이 한 철학자가 지시한 대로 더 큰 능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 능력의 극대화와 거기서 얻어지는 실리에 대한 무한 추구로 결국 스스로를 잡아먹는 극도의 피로 사회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맹자의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은 어쩌면 그의 스승 공자의 인격을 지시하는 말대로 ‘안 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이루고자 하는 것(知其不可而爲之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맹자 이후 오늘 2천여 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서 능력 평등주의가 판치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현실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당선인은 얼마 전 선거 운동 시절 “민주화 운동 좀 했다고 그게 뭐 소용 있습니까?”라는 말을 했고, 그 이전에 일제 강점 시대나 전두환 시기에 대한 발언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 52시간제 폐지와 최저임금제 폐지를 당선 후 제일 먼저 추진하겠다고 한다. 매우 우려되는 지점이다. 물론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나라에서 그 전통이나 나이, 오래된 것의 권위가 항상 다시 오도되어서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패착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긴박한 상황은 다시 경장으로서의 義가 오래된 미래로서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와 같은 서구 정치사상가도 “전통, 종교, 권위”의 세 가지를 인간 공동체 삶이 지속하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기반과 조건이라고 강조했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경장으로서의 정의 의식과 잘 상통한다(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서유경 옮김, 2005년,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