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허남진]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조성환·허남진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지구화’ 개념의 대두
1990년대부터 서양학계에서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어가 되다 시피한 ‘globalization’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기술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globalization’은 처음에는 ‘세계화’라는 번역어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때 ‘세계화’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세계적 전파다. 김영삼 정부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세계화’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이 중에서 특히 후자는 ‘국제화’라는 용어와 상통하고, 이를 위해 영어교육이 강조되었다.1)
그러다가 ‘지구화’라는 번역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울리히 벡의 <Was ist Globalisierung?>(1997)가 아닐까 싶다. 영어로는 “What is globalization?”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우리말로는 <지구화의 길>(2000)로 번역되었다. ‘세계화’가 아닌 ‘지구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globalization을 ‘세계화’라는 좁은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globalization의 자본주의적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globalization은 정보, 문화, 통신 등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자가 당시에 익숙한 ‘세계화’라는 말 대신에 ‘지구화’라는 표현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세계화’가 지구화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경제적인 면이 강조된 개념이라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지구화에는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위험이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위험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risk)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1986년의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부터 제기하고 있다. 우연하게도 이 해에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바람을 타고 미국 동부까지 날아갔다고 한다.2) 반면에 한국에서는 산업화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구화의 연구 분야
지난 20여년 동안 서양에서는 ‘지구화’라는 주제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가장 최근의 연구로는 맨프레드 스테거(Manfred B. Steger)의 <Globaliz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20)을 들 수 있다. 2003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전 세계 20개국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올해에는 제5판이 나왔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지구화의 연구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알 수 있다.
What is globalization? (지구화란 무엇인가?)
Globalization in history (역사 속의 지구화)
The economic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The polit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
The cultur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문화적 측면)
The ecolog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생태적 측면)
Ideological confrontations over globalization (지구화를 둘러싼 이념적 대립)
The future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미래)
여기에서는 지구화라는 하나의 주제를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생태의 각 분야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각을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이것들을 하나의 ‘학(學)’으로 독립시킨다면 지구경제학(global economics), 지구정치학(global politics) 등이 될 것이다. 실제로 역사분야에서는 최근 들어 ‘지구사’(global history)라는 새로운 영역이 확립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를 넘어서서 ‘지구’를 단위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지구역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구화로 인해 일어나는 지구적 이슈를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미 지구학을 연구하는 지구학 센터나 지구학과, 또는 지구학회 등이 조직되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조지형 교수에 의해 2008년에 설립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가 대표적이다. 국내의 ‘세계사’ 연구가 여전히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지구적 조망과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지구사’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 서강대학교의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연구소의 영문 이름이 ‘Critical Global Studies Institute(CGSI)’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구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지구적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지구사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의 설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세계사’(world history)와 ‘지구사’(global history)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종래의 ‘세계사’가 서구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대표적인 지구사가인 세바스티안 콘라드(Sebastian Conrad)는 그의 <What is Global History?>(Princeton University, 2016)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구사’는 그동안 역사가들이 과거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도구들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에서 탄생하였다. (…) 특히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 ‘태생적 결함들’이 우리로 하여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이 결함들의 기원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근대 학문의 형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결함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탄생이 (국민)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 역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국사(國史)에 한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결함은 근대 학문분야가 지극히 유럽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 국가, 혁명, 사회, 진보와 같은 분석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유럽의 경험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언어의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 지구사는 근대 학문의 두 개의 불행한 반점(=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pp.3-4).
여기에서 콘라드는 근대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하였는데, ‘국민국가의 탄생’과 같은 유럽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지구사는 국가 중심과 유럽 중심이라는 두 가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구사 연구자들이 ‘세계(world)’라는 말 대신에 ‘지구(glob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세계’와는 달리 ‘지구’는 서구중심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국제적(international)이나 초국가적(trans-national)과 같이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3)
‘지구인문학’의 제안
콘라드의 비판을 더 밀고 나가보면, 종래의 사회과학 중심의 ‘지구학’도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구성(Globality) 개념에는 인간을 제외한 비인간 존재들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의 역사가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지구화 담론이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국가 중심의 근대적 인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적 차원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학문을 이 글에서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여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구인문학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하며, 인간 중심이 아닌 지구 중심의 지구화를 학문적 모토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표적인 지구인문학자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이다. 자신을 ‘지구학자’(Geologian 또는 Earth Scholar)라고 자칭한 토마스 베리는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모두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의 목적을 위해 지구를 연구할 때가 왔다고 제창하였다. 지구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사귀어야 할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5)
아울러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생존권도 보장해주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의 필요성을 제안하는데, 이 제안은 최근 들어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017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는 세계 최초로 ‘강’에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였다. 왕거누이 강의 오염을 우려한 뉴질랜드 의회와 원주민 마오리족이 합작해서 지구법을 통과시킨 것이다.6)
최근에 한국에서도 지구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중심으로 <지구를 위한 법학 :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중심주의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가 출간되었다.
또한 인류학 분야에서도 종래의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beyond) 지구적 차원의 인류학이 시도되고 있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차은정 번역)가 그것이다. 원제는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으로 2013년에 나왔다. 부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는’ 인류학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인류학도 지구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인류학’(Global Anthrop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1910년에 나온 뤼시앙 레비브륄(Lévy-Bruhl)의 “How Natives Think”(원주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원용한 것이다(한글번역은 김종우 역 <원시인의 정신세계>). 레비브륄이 ‘이성’이라는 사유능력을 유럽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면,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서도 ‘사유’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고(beyond) 있다.
이처럼 현대 학문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지구인문학의 분야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지구살림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지 ‘문사철’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지구법학이나 지구인류학, 또는 지구민주주의나 지구종교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국철학 속의 지구인문학
이와 같은 지구인문학적 문제의식은 한국철학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추만 정지운과 퇴계 이황은 중국의 「태극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천명도」를 제작하였다. 「태극도」가 태극에서 만물이 생성분화되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그린 일종의 ‘음양오행도’라고 한다면, 「천명도」는 우주를 하나의 ‘원’으로 도상화하고, 그 안에 인간과 만물을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베리가 제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도상화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천명도」를 고도로 추상화시켜 ‘원’ 하나만 남겨 두면 원불교의 ‘일원상’과 상통한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구형설과 지구자전설 등을 주장하면서, “세계의 중심은 없다”는 탈중화주의를 선언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한기도 <기학(氣學)>(1857)이나 <지구전요(地球典要)>(1857) 등에서 사유의 중심을 중국에서 지구로 전환하고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현대 서양의 지구학이나 지구인문학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었다고 한다면, 조선후기의 실학이나 개벽학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동학에서 시작하여 천도교, 원불교에 이르는 근대 한국의 개벽종교에서도 지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구적 상상(global imaginary)’이나 ‘지구적 의식’(global consciousness)과 같은 개념을 찾을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의 “천지부모 만물동포” 사상, 소태산 박중빈의 ‘일원’과 ‘사은’, 정산 송규의 ‘한울안’과 ‘삼동윤리’, 천도교와 원불교의 사해일가(四海一家)나 세계일가(世界一家)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간과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구공화’(地球共和)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94년에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문화는 숙명인가?」(Is Culture Destiny?)에서 동학이나 불교와 같은 ‘아시아적 가치’를 언급하면서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 개념을 제창하였다. 그가 말하는 ‘지구민주주의’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도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927~1898)이 제시한 경물(敬物) 개념을 연상시키고,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생태민주주의’7)나 ‘지구법’과도 상통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구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인간세’ 또는 ‘인류세’에서 지구 중심, 생명 중심의 ‘지구세’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지구적 전환(地球開闢, Global Transformation)과 지구적 연대(地球共治, Global Governance)가 동반되어야 지구화로 인해 파괴된 지구시스템을 본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20년 8월 28일에 원광대학교에서 발표한 조성환·허남진, 「코로나 시대의 지구인문학」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발표 원고는 다음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www.wth.or.kr/modules/bbs/index.php?code=pds&mode=view&id=49&___M_ID=31
이문재, 〈일그러진 YS 정권의 ‘세계화’〉, 《시사저널》, 1998.01.15.
유철종, 〈(체르노빌 참사 30주년)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재앙은 진행형〉, 《연합뉴스》, 2016.04.25.
Dominic Sachsenmaie, Global History, Global Debates, in: Connections. A Journal for Historians and Area Specialists, 03.03. 2005.
<www.connections.clio-online.net/debate/id/diskussionen-582>
Dipesh Chakrabarty, “The Human Condition in the Anthropocene”, The Tanner Lectures in Human Values, Yale University, February 18–19, 2015, pp.141, 165-167.
토마스 베리 저, 이영숙 옮김,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뉴질랜드, 자연 훼손하면 상해죄…’지구법’, 한국은?〉, 《중앙일보》(온라인), 2017.04.15.
https://news.joins.com/article/21478072
가령 Roy Morrison 저, 노상우 역 생태민주주의, 교육과학사, 2005; 구도완, 생태민주주의 : 모두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 한티재, 2018.
2020/12/04
[조성환·허남진]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2020/11/28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여성회 25주년 심포지엄 공동 개최[원광대학교] – 원광대학교 | 사람 중심의 글로벌 마인드 대학!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여성회 25주년 심포지엄 공동 개최[원광대학교]
대외협력홍보과2020-10-15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찾아, 원불교의 나아갈 길’ 주제로 진행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원불교여성회와 함께 지난 5일 원불교소태산기념관 한강교당에서 원불교여성회 2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원불교여성회’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된 이번 심포지엄은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찾아, 원불교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원불교여성회에서 주최하고, (사)한울안운동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원불교여성회 김명화 회장은 개회사에서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원불교여성회의 나아갈 길은 원불교 개교의 동기대로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밝혔으며, 박맹수 총장은 환영사를 통해 이번 심포지엄과 더불어 초기 교단의 여성 선진들이 원불교 종사위로 추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염원하고, 축사에 나선 백낙청 명예교수는 초기교단의 ‘남녀권리동일’이 이후 ‘자력양성’으로 변천된 부분과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에 대해 심도 있는 사유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원불교 교정원 교화부원장 김제원 교무의 기조강연 ‘원불교 교단체제-대산종사 법문을 중심으로’에서는 총론으로서 원불교 교단체제, 즉 소태산으로부터 대산에 이르는 원불교 역대 교조들의 경륜을 살폈으며, 김제원 교무는 “교단체제를 바탕으로 작게는 개인의 신앙과 수행으로부터 시작하여 교단과 국가, 사회, 세계의 주인이 되어 모두가 잘사는 하나의 세계, 일원세계 건설에 함께 나가자’고 당부했다.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시민사회네트워크교당 김선명 교무는 ‘원불교공동체의 행복-오래된 새길을 다시 묻다’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더불어 탈종교시대가 도래한 지금 원불교는 새로운 백년을 지내고, 교단 4대를 준비하면서 ‘새 기준(뉴-노멀)’을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개벽종교의 출가와 재가’를 주제로 발표한 원불교여성회 정선희 교도는 ‘공도자’라는 정체성이 후천개벽시대 출가와 재가가 모두 지향할 대승적 공부인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원불교사상연구원 이주연 교무는 ‘은(恩)으로 혐오 넘어서기-지구화시대 원불교학의 방향’ 발표에서 지구화시대의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지구인문학의 관점은 어떤 것인지 논의하고, 전 지구적 존재들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주목하는 지구인문학과 더불어, 은(恩)사상은 이를 실천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인과보응의 신앙문으로 본 원불교의 지도자상-처처불상, 사사불공의 한 자락’을 발표한 서울대 사회교육과 정원규 교도는 원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상으로 ‘여래(如來)’를 꼽고, 여래의 비전은 ‘광대무량한 낙원과 사은사요의 세계’이며, 여래의 역량은 ‘만능(萬能), 만지(萬智), 만덕(萬德)’이라고 밝혔다.
한편, 토론에는 원불교 교정원 기획실 이건종 교무, 영산선학대 권정도 교무, 청소년연대킥킥 정형은 교도, 원불교학과 임진은 교무가 나섰으며, 원불교학과 원익선 교무가 좌장을 맡아 진행한 종합토론이 유튜브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등 이번 원불교여성회 25주년 기념 심포지엄은 원불교가 걸어온 지난 역사와 앞으로 걸어갈 미래의 길을 허심탄회하게 더듬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2020/11/27
원불교 마음공부에서 ‘대중(大中)’의 의미 임 전 옥(원광대학교)
원불교 마음공부에서 ‘대중(大中)’의 의미
임 전 옥(원광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Ⅱ. 원불교 마음공부
Ⅲ. ‘대중 의’ 용례 분석
1. 용례에 따른 분류
2. ‘대중 의’ 의미
3. 원불교 마음공부와 ‘대중’: ‘대중 의’ 특징
Ⅳ. 원불교 예비교무들의 ‘대중 에’ 대한 인식조사
1. ‘대중 의’ 의미에 대한 인식
2. 원불교 마음공부에서의 역할에 대한 인식 3. 원불교 예비교무 교육에서의 함의
Ⅴ. 맺는말
Ⅰ. 들어가는 말
원불교에서는 ‘마음공부 를’ 교리와 사상의 핵심을 담은 실천 방법으로 삼는다. 원불교 마음공부란 마음을 잘 알고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경계에 접하여 이 경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 객체적( 자아 을) 또 다른 마음 주체적( 자아 이) 지켜보면서 성품에, 비추어 반응하는 마음이 적절한 지 대조하는 과정을 말한다. ) 말하자면, 경계를 접하여 성품 진공 에( ) 대조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실행 하여 모두 은혜롭게 생활하자는 것이다. ) 여기서 경계란 내 정신 마음 을( ) 시끄럽게 하고 정신(마음)을 빼앗아 가는 사람, 관계, 사건, 사물을 말한다. ) 경계는 우리 삶의 여정에서 필수적으로 동반되며, 결 국 마음공부는 이 경계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계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 음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행위들이 제안되고 있는데 천만, 경계에 ‘끌려다니지 말고,’ ‘마음을 빼 앗기지도 말며,’ ‘마음 대중을 잡거나 주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또한 경계에 임하여 때론 마음을 ‘돌 리기도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이겨 나가기도 해야 한다.’ 때론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나쁜 마 음의 싹을 제거하기도 하고,’ ‘착심을 놓기도 해야 한다.’4)
이 중에서 마음 대중을 잡는 것 즉, ‘대중 이라는’ 표현은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원불교 초기교서를 비 롯하여 「정전」, 「대종경」 등 여러 교서와 자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전에서는 ‘대중(大中)’의 의 미에 대해 “⑴ 겉으로 대강대강 어림짐작하는 것, ⑵ 마음공부를 해가는 데 있어서 자기 마음속으로 어 떤 표준을 잡아가는 것 원불교에서는. 마음공부에 있어서 대중잡는 공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라 고 하고 있다. ‘대중잡다 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엇을) 어림으로 헤아려 짐작하다” )임을 감안해보면,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 더하여 원불교에서는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좀 더 확장된 내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음공부와의 관련성 나아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교서에서의, ‘대중 이라는’ 표현은 상당 히 개괄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한 내용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대종경 제」 3 수행품 33장에서 “경계를 당할 때에 무엇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으오리까” “세 가지 생 각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나니” )에서의 대중은 취사를 할 때 어떤 것을 ‘표준하다, 기준하다’ 라는 의 미이지만, 「정산종사법어」 제7 권도편 46장 “우리가 세상에 출신하여 안위의 모든 경우를 당할 때에 그 가지는 바 정신이 오직 전일함이 평상심이니, 편안한 때에도 항상 조심하는 대중을 놓지 아니하 고” )에서의 대중은 ‘(어떤) 마음을 갖다, 마음을 지키다 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사전적으로 제시 된 의미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시각으로 보면 두 표현 간에 서로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대중 이라는’ 표현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점에 주목하고 대중에, 대한 좀 더 구 체적인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먼저, 원불교 마음공부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교서 및 자 료에서의 용례들을 분류하고 분석함으로써, 대중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원불교 예비교무들이 실제적으로 대중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대중이, 자신의 마음공부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느끼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Ⅱ. 원불교 마음공부
소태산 대종사는 100여 년 전, 원불교라는 새 종교의 문을 열면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 자” ) 하고 이를, 원불교 개교표어로 천명하였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정신 즉 마음이며, 마음에 힘이 있어야만 과학문명이라 대변되는 물질적 풍요에 끌려 중심을 잃지 않고 이를 선용하는 참 주인으 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는 마음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내포” ) 하고 있다. 즉 원불교, 마음공부는 정신개벽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개인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 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음사용 능력을 갖게” ) 하는 길이 된다.
마음공부는 한마디로 “마음을 바로 알고, 마음을 지키고 단련하며, 마음을 바로 쓰고 지혜롭게 쓰는 것” )을 말한다. 조명규와 이경열은 마음의 개념을 본래심과 분별심으로 구분하였으며, 본래심(참마 음 이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며, 분별심이란 사량계교심⋅분별시비심⋅차 별심⋅분별망상심을 통틀어 말한다고 정의하였다. ) 본 연구에서도 조명규, 이경열의 연구에서와 같 이 기본적으로 마음을 본래심과 분별심으로 구분하는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본래심은 일원상의 진리 그대로의 자리에서 나투어진 마음이라면 분별심은, 분리된 개별자로서의 나 자아 를( ) 중심으로 일 어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계가 있을 때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 본래심을 지키는 것, 또는 본래심을 회복하는 것 등은 마음공부의 중요한 측면들이다. 원불교 마음공 부의 특징은 특히 ‘은혜가 나타나는 것 에서’ 찾을 수 있는데 원불교, 교리의 핵심은 ‘은(恩)’이기 때문에 “은혜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 )이 되어야 한다.
Ⅲ. ‘대중 의’ 용례 분석
1. 용례에 따른 분류
1) 방법
용례 분석에 사용된 교서 및 자료는 「정전」 ), 「대종경」 ), 「정산종사법어」 ), 『대산종사법어』 ), 『대종경선외록』 ), 『한울안한이치에』 ), 『대산종사법문집1,2,3,4』 ), 『원불교 교고총간』 전 6권 )이 었으며, 이 중에서 ‘대중(大中)’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곳은 총 47건이었다. 발췌 결과, 한 가지 법문이 나 글 속에서 두 번 이상 언급된 경우가 다수 있었는데 한, 법문 내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경우 외에는 다수의 언급을 한 항목으로 취급하였다 또한. 같은 법문이 서로 다른 출처에 중복 게재된 경우 에도 이를 한 항목으로 처리하였다. 출처 표기의 우선순위는 현재의 교서를 위주로 하였다. 그 결과, ‘대중 이라는’ 표현이 수록된 곳은 총 38개 항목으로 압축되었다 교서. 및 자료명과 수록 항목 수, 출처 는 다음과 같다 분류. 절차는 먼저 본 연구자가 문맥상의 ‘의미 를’ 고려하여 용례를 분류하였다. 다음으 로, 원불교학 전공 박사학위자 2인, 국어교육 전공 박사학위자 1인, 근무 경력 25년 이상의 원불교교 무 1인으로부터 분류 기준과 항목에 대한 점검과 조언을 받으면서 수정, 보완하였다.
2) 용례에 따른 분류 결과
38개의 항목들을 의미에 따라 분류한 결과,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표준하다, 기준하 다,’ 둘은 ‘(어떤) 마음을 갖다 지키다, ,’ 셋은 ‘살피다 알아차리다 넷은, ’ ‘관조하다, 반조하다, 밝게 비추 다 이다 분류’ . 결과, ‘표준하다 기준하다 의, ’ 의미에 해당되는 항목이 16개로 가장 많았고, ‘(어떤) 마음 을 갖다 지키다 에, ’ 해당되는 항목이 9개, ‘살피다 알아차리다 에, ’ 해당되는 항목이 9개, 마지막으로 ‘관 조하다 반조하다 밝게, , 비추다 에’ 해당되는 항목이 5개로 나타났다.
2. ‘대중 의’ 의미
대중은 첫째, 대중은 ‘표준하다, 기준하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산종사는 “측량하는 사람이 먼 저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공부 사업에도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나니” )라고 하면서 공부나 사업에 있어서 기점(基點)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대중이 갖고 있는 ‘표준하다, 기준하다, 근본으로 삼다 의’ 의미는 바로 마음공부에 있어서 기점을 잡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기점은 기본 이 되는 곳이나 지점24)을 말한다.
대중이 담고 있는 의미 중 두 번째는 ‘(어떤) 마음을 갖다, 지키다 이다’ . 마음공부의 과정에서 강조하 는 것 중 하나는 어떤 마음을 놓지 않고 정진해가는 것인데, 두 번째 의미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의. 두 번째 의미는 삼매에 이르는 일념 또는 일심으로부터 마음공부의 과정에서 필요 한 자세와 뜻에 이르기까지 어떤, 마음을 지키고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대중의 세 번째 의미는 ‘살피다, 알아차리다 이다’ . 동정 간에 주의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것으로, 매 순간 마음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여서 살피고 경계,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가능하면 찰나 간에라도 “방심을 경계하고 정념(正念)을 가지는 공부”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대중은 의도를 가지고 주의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다. ‘살피다, 알아 차리다 는’ 두 가지 차원으로 좀 더 세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마음의 흐름을 살피고 지켜보 는 ‘주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둘은’ . 그 주의심을 기울이는 정도가 충분히 민감해서 매우 사소한 흐름 까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지각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미는 ‘관조하다 반조하다 밝게, , 비추다 이다 여기에서의’ . 대중은 진리의 속성 과 보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습관과 업력에 물들지 않은 자성의 영지 그대로 비추는 것을 말한다.
3. 원불교 마음공부와 ‘대중’: ‘대중’의 특징
마음공부와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중을. , 마음공부에 적용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같은. , 의미로 사용된 용례 내에서도 진리적인 차원과의 연관성이 보다 직접적으로 명시된 내용으로부터 마음공부의 과정에서 필요한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차원 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대중에. , 대한 네 가지 의미가 서로 중첩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나아가 경계에서 마음공부에 적용하기 위 해서는 대중이 내포하고 있는 네 가지 의미의 핵심을 중심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를, 실제 마음공부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셋째, 마 음공부에서 대중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챙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즉 대중은. , 기본적으로 마 음을 챙기는 것이 동반되는 과정으로, 불방심(不放心)하는 것을 말한다. 용례들을 통해 파악한 대중의 네 가지 의미는 모두 ‘방심하지 않는 것 이’ 전제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그 챙기는 마음의 지속성과 세밀함을 요구하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Ⅳ. 원불교 예비교무들의 ‘대중 에’ 대한 인식조사
1. 조사 및 분석 방법
대중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기 위한 도구로는 개방형 질문지를 사용하였다. 소수의 질 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질문의. 내용은 ‘①원불 교의 교서 및 자료에는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대중 이라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러한 ‘대중 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②‘대중 은’ 마음공부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 시나요?’였다. 83부의 질문지 중에서 성의 없이 작성된 4부를 제외한 79부가 분석에 사용되었다. 인식 조사의 응답에 대한 분석은 연구자의 1차 분석 후에 원불교학 전공 박사 1인 국문학, 전공 박사 1인과 함께 논의하면서 수정하였다.
2. 분석 결과
1) ‘대중 의’ 의미
예비교무들의 응답 내용을 분석한 결과, ‘대중 에’ 대한 자료의 용례 분석과 같은 내용의 네 가지 의 미로 분류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대중의. 네 가지 의미 중에서 예비교무들의 응답 비율이 가장 높은 것 은 ‘표준하다, 기준하다 로’ 전체 응답 중 47.2%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마음을 갖다, 지 키다 도’ 40.6%의 반응비율로서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였는데, ‘(어떤) 마음을 갖다, 지키다 와’ 관련하 여서는 비교적 높은 반응비율뿐만 아니라 가장 다양한 표현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 다 다음으로는. ‘살피다 알아차리다 가, ’ 9.8%, ‘관조하다 반조하다 밝게, , 비추다 가’ 2.4%의 응답비율을 보였다.
2) ‘대중 의’ 역할
대중의 역할에 대해 예비교무들은 마음공부의 과정에서 대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 고 있었다. 대중의 역할에 대한 예비교무들의 응답 내용을 분석한 결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 었다 그. 내용은 첫째는 ‘목표 목적 방향, , 제시’, 둘째는 ‘표준 기준, 제시’, 셋째는 ‘마음을 살피고 지켜 보며 챙길 수 있도록 도와줌’, 넷째는 ‘중심을 잡게 함 이다’ .
3. 원불교 예비교무 교육에서의 함의
먼저 대중의, 의미와 관련하여 예비교무들이 그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대중의. 의미에 대한 분류 결과, 대중을 ‘표준하다, 기준하다 라는’ 의미로 지각하고 있는 비율이 가장 높고, ‘(어떤) 마 음을 갖다, 지키다 라고’ 지각하고 있는 비율이 그 다음으로 나타나, 전체 중 거의 88%에 이르는 높은 수준이었으며, 따라서 예비교무들이 대중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 라서 대중이 마음공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끼고 있는 예비교무들이 대중의 의미를 보다 명확 하게 알고 자신의 마음공부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응답 비율을 보인 ‘살피다, 알아차 리다’ ‘관조하다 반조하다 밝게, , 비추다 의’ 의미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 . 다음으로, 대중을 마음공부와 표현하여 언급하게 될 때는 보다 분명한 의미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예비교무들은 기본적으로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등의』 원불교 주요 교서들을 공부하면서 원문의 의미를 해석하고 마음공부를 통해 이를 체득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므로, 대중이라는 표현 역시 각각의 맥락과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학습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평소 생 활 속에서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대중 잡는 공부를 지도할 때에도 대중의 의미가 교육자의 의도대로 전 달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Ⅴ. 맺는 말
본 연구에서 용례 분석을 통해 대중의 의미를 분류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이해를 얻고자 했음에도 불 구하고, 그 확장성과 중첩된 의미들로 인해 여전히 용례 중에는 분류가 모호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 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용례들 중에서 분명한 의미가 드러나는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모호하거나 지나치게 포괄적인 용례들을 제외시켜보거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중심으로 용례의 범위를 좁혀서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마음공부와 중요한 연관성이 있는 대중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 악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원불교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교서 및 교법을 바르고 명확하게 해석하는 일인 만큼, 대중과 같이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칫 모호하게 보일 수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본의에 맞게 활용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중 요한 일이다 본. 연구가 그 여정에서 또 하나의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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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사전.
지구여성학의 모색 페미니즘과- 원불교의 만남 이주연1
[한국종교분과 7발표]
지구여성학의 모색 페미니즘과- 원불교의 만남
이주연1)
-순서-
Ⅰ. 머리말
Ⅱ. 페미니즘, 경계의 해체
Ⅲ. ‘에코소피 로서의’ 원불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이 연구는 지구여성학의 기초적 바탕을 마련하고자 하는 일환으로서 페미니즘에, 원불교적 관점을 보완하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온 여성의 주체 성을 되찾으려는 취지에서 출발하였다.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인간중심주의나 자연을 바라보 는 관점들과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페미니즘은 지속적으로 진화해왔다. 그 예로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Chandra Talpade Mohanty)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 을’ 통해 서구중심적 페미니즘을 비판한 것은 전 세계 에 실재하는 국경, 인종, 성 정체성, 종교와 문화 등의 경계들이 각자 단 하나의 색깔을 띠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이고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에코페미니즘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을 비판함으로써 우리가 직면한 바이러스 확산 상 황에도 많은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데, 그러나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와 화합을 추구하면서도 다시금 여성 성을 강조함으로 인해 환원론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점에서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경계의 해체를 통 해 이 환원론적 특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전망되는 반면 인간의, 사이보그화는 인간성을 부정할 수 있다는 비 판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생기적 물질성에 단지 ‘참여 하고’ 있다고 본다면 사이보그의, 기계성이 인간성을 부정한다기보다 인간과 기계의 연대의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에서는 진화해가는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보완적 관점으로서 원불교 의 은(恩)사상에 주목한다 은사상은. 우주만유가 한 기운으로 맺어진 한 가족으로서 서로 은혜로운 관계를 맺 고 있다고 본다. 이때 은혜는 상대적 은혜가 아닌, 우주만유의 존재양태로서 절대적 은혜를 말한다. 서로를 절대적 은혜로 바라보는 관점은 타자에 대한 불공(佛供)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타자를 공경의 대상으로 정의 한다. 이 점에서 사이보그는 인간성을 부정하는 존재로서가 아닌 공경의 대상인 사이보그로 자리매김할 수
1)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있으리라 전망된다.
Ⅱ. 페미니즘, 경계의 해체
1. 에코페미니즘 조화와- 화합의 은유로서 여성
여성과 자연이 서구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당하고 착취되어온 점을 지적하고 나선 에코페미니스트들은 한 마디로 ‘남성적 생태주의 를’ 극복하고자 한다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로 경계 뛰 어넘기를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은 인간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바로. 하늘과 땅 그리고, 공기를 비롯한 ‘자 연 이’ 있어 우리는 삶을 영위해간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하는 점이 여기에 있다. 언제까지고 인간 중심 적 사고로 자연을 파괴할 수 없다는 반성, 이 곳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는 새로운 사유가 그것 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정당 화한다. 이러한 명제와 더불어 한동안 많은 인류는 사유 가능한 인간의 ‘존재함 이’ 비인간적 존재들의 ‘존재 함 과’ 다르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성과 합리, 인간은 우위에 있는 반면 자연이나 예측 불가능성 같은 것들은 그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 바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해도 된다는 자연은, 그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인간 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는 생태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어왔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경우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감수성이 가져다준 아주 멋진 일 중 하나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재 발견한 것 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중심주의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생물 종으로 생각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 에 초래한 결과라고 본다 우리. 자신은 다른 여러 생물 종과 함께 하나의 종이라는 것이다.2)
인간은 다른 종의 우위에서 그 종들을 도구 삼는 존재가 아니라 지구라는, 유기체에서 다른 종들과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베리는. ‘지구 공동체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지구가 모든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 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구 공동체는 어느 종이 다른 종의 도구가 되는 세상이 아닌, 서로의 단독성을 존 중하며 같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생명은. 기성제품과는 다르다 저. 강아지와 이 강아지는 다르고, 각각이 독특하며 특이하다 그래서, . 생명존중의 시작은 생명의 유일무이성 즉, 단독성을 승인하는 것에 있다.3)
에코페미니즘은 지구 공동체로의 전환을 꿈꾸는 성찰, ‘생태 를’ 향한 이 사유가 여성과 자연의 근접성을 바 탕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그간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사실상 남성중심적이었다고 말한 다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와 마리아 미즈(Maria Mies)에 따르면 서구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로 인 해서 여성은 타자화되고 생물다양성은 파괴되어 왔다 생물다양성은. 나무 · 작물 · 가축의 공존과 상호의존을 의미한다. 이 다양성의 상실은 단일문화, 획일성, 동질성을 향해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가부장적 진보 모델 이 치른 대가를 의미한다.4)
생물다양성의 상실은 유전공학과 재생산기술, 이른바 ‘하이테크 에’ 의해 가속화되어 왔다. 시바와 미즈는 유전공학과 재생산기술에 의해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이 무시된다고 본다 이런. 과학 기술들은 인간의 욕구와 사랑의 욕망에 따라 자유로이 생식을 조절하는 것과 다르다. ‘재생산 을’ 위해 바람직한 요소를 선택하고 바람
2) 토마스 베리, 『지구의 꿈』, 맹영선 역,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45-49쪽.
3) 신승철, 『철학, 생태에 눈뜨다』, 새문사, 2015, 39쪽.
4)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즈, 『에코페미니즘』, 손덕수 · 이난아 역, 창비, 2020, 284-294쪽.
직하지 않은 요소는 제거하기 때문이다.5)
인간중심적 사고로 인해 자연만이 배제되어 온 것이 아니라 여성은 특히( 제3세계), 그리고 비(非)백인은, 노동자는 도구화되고, 그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해왔다 에코페미니즘은. 이중에서 여성과 자연이 같은 방식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대지의 여신’, ‘어머니 지구’, ‘어머니 대자연 과’ 같은 표현들은 자연과 여 성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에코페미니즘이 여성과 자연을 서구의 이원론적 등식에 의해 ‘동일 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자연이 똑같이 비과학적이어서 남성이나 문명보다 뒤떨어진다고 본 다면 이는, 에코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여성과 자연의 관계가 아니다.
1970년대에 인도에서 일어났던 칩코 운동(Chipko movement)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환경보호운동이었 다. 나무가 베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페쉬와르(Gopeshwar) 마을의 여성들이 나무들을 하나씩 껴안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성공했고, 칩코 운동과 유사한 벌목 대항 시위가 곳곳에 이어졌다. 그런데 칩코 운동 에 여성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자연보호 여성의= 할 일 이라는’ 공식이 성립됨을 의미하진 않는다. 여성의 본능 적 여성성이 –모성을 기반으로- 당연히 자연을 지켜내려 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서구의 남성적 가부장제에 근거한 시각일 뿐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양육하고 살려내는 특성의 여성성, 즉 본질적 여성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칩코 운동 과 같이 비폭력적으로 전 지구적 존재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여성성을 지향한다 남성과. 여성 · 인간과 자연 · 노동자와 고용자 등을 단선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여성성, 나아가 조화와 화합을 이뤄내려는 여성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훼이리 리는 에코페미니즘이 강조하는 여성성이 또 다른 환원주의로 이어진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 어 시바는 ‘자연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단지 서구 남성 과학에 의해 통제되고 착취될 뿐이며 여성 과 비서구 민족들 역시 아무런 가치를 갖지도 생산하지도 못한다.’6)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발 전이 과연 남성적 특징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횡문화적(cross-cultural)으로 볼 수는 없다 즉. ‘여성이 본래 고유의 생태적 감수성 을 지니고 있는 반면 남성은, 자연 파괴적인 충동을 타고났다는 증거는 없다.’7). 서구 과학문명을 그저 남성적 이라고 개념화하고 비폭력 · 조화 · 화합들은 여성적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을까?
2. 사이보그 페미니즘-경계 해체하기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여성의 동일시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기술과학의 잠재력을 이용하고 있는 현재 세계를 철저히 분석하고 여성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8)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주창한 그는 현대에 등장한 SF를 통해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피조물에 착안한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여성 경험 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의 기준을 바꾼다고 말한다.9)
그는 서구 전통에서 특정 이원론들이 유지되어 온 점을 비판한다. 이원론은 남성과 여성, 주체와 타자, 신 과 인간 자연과, 문명 등을 끊임없이 나누어왔으며 각, 요소들 사이의 연속성이나 연결 관계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이원론이 만들어낸 경계를 벗어나며, 주체가 되어야 한
5)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즈, 앞의 책, 301쪽.
6) 반다나 시바, 『살아남기』, 강수영 역, 솔출판사, 1998, 327쪽.
7) 훼이리 리, 「에코페미니즘에 관한 횡문화적 비평」, 『자연, 여성, 환경』, 이소영 외 역, 한신문화사, 2000,
270-1286쪽.
8) 이지언, 『도나 해러웨이』,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101쪽.
9)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역, 책세상, 2019, 18쪽.
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권유한다.
이원론은 어디까지나 둘 중 더 나은 무언가를 설정하길 원한다. 남성과 여성 중 남성이 더 우월하다고, 자 연과 문명 중 문명이 더 유리하다고 주체와, 타자 중 주체가 되어야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여기게끔 한다. 그러 나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이런 주체됨이 곧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 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10)이다 즉. 이원론적 유토피아는 허구다. 대신 경 계가 사라지고, 혼종화되고, 그 모습이 희미해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게 사이보그 페미니즘의 입장이 다.
타자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순수함, 완벽함을 향한 동경을 저버림을 의미한다. 사이버 공간과 사 이보그가 자연스러워진 지금 여성은, 더 이상 재생산 기능을 담당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이보그는 ‘여성이냐, 남성이냐 는’ 방식의 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흔히 ‘포스트 휴먼시대 라고’ 불린다. 해러웨이가 강조한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자연과, 문화에 대한 이원론적 담론과 경계를 벗어난다.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함에 따라 나타난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그러나, 첨단 기술이나 유전공학을 이용할 수 있는 부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된 현 상태에서 사이보그를 찬양하는 것은 나이브한 자세라는 비판을 받는 다 또한.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생성과 소멸을 해야 하는 인간의 육체성 나아가, 인간성 자체를 ‘극복되어야 하 는 것 으로’ 보는데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관점은 결국 다시금 전체주의적일 뿐 아니라 여성을 육체 와 동일시하고 혐오하는 가부장적 관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11)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는 사이보그 페미 니즘이 에코페미니즘의 보완점을 지녔다는 점도 있다 해러웨이가. 언급했던 유전자 변형동물 앙코마우스TM 이나 여성인간Ⓒ는 남성 또는 여성으로만 설명되던 젠더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이들. 사이보그는 이전에 여성 이 전통적 방식으로 출산하던 존재가 아닌 기계와, 인간 자연과, 문화의 융합으로서 젠더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의 관념을 허물어뜨린다.
정말 사이보그는 인간성을 부정하는가? 사이보그가 인간과 기계의 혼융체라고 해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존 재라고 볼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닌, 사이보그 성 과‘ ’ 인간 성 이‘ ’ 함께 진화하는 길도 있 지 않을까?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생동하는 물질 에서』 ‘사물-권력’12)을 언급한다. ‘사물-권력 은’ 활기 없는 사물들의 기이한 능력을 말한다 베넷이. 물질의 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비인격적인 생명 또는 비유기 적인 생명에도 ‘행위소 행위의( 원천 가)’ 있으며 따라서, 인간과 다른 물질성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으로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권력도 ‘사물 권력 이다 비인간의- ’ . 권력도 ‘사물 권력 이다 인간은- ’ . ‘물질들이 특별히 풍부하고 복잡하게 모인 집합체 라는’ 점에서 그렇다. 베넷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 존재론적 구별을 지양해야 한다고 보 며 인간이, 세균보다 특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관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생기적 물질성에 인간은 단지 ‘참여 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동하는 물질성에 ‘참여 하는’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함께 한다 무릎. 연골이 손상된 환자가 인공 이식물을 신체에 삽입함으로써 사이보그가 되고 다리가, 불완전한 사람은 로봇의족을 착용하여 사이보그가 된다. 이와 같은 사이보그들은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며, 생기적 물질성에 참여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성을 부정당하 는 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인간이 인공 이식물이나 로봇의족과 새롭고 긴밀한 연결망을 형성함으로 인
10) 도나 해러웨이, 앞의 책, 77쪽.
11) 김영숙, 「사이버 페미니즘 다나( 해러웨이 과) 에코 페미니즘 김선희 의( ) 비교 분석」,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8-9, 한국콘텐츠학회, 2018, 73-74쪽.
12)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 46쪽.
해 ‘모든 신체가 관계들의 빽빽한 네트워크 속에서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점’ )을 증명한다 즉. 사이보그의 기계 성 이‘ ’ 인간성을 부정한다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불가분한 연결 관계를 통해 각 생기적 물질성이 연대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Ⅲ. ‘에코소피’로서의 원불교
에코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즘들에 비해 그 범주가 지구적이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고용자와 노 동자 백인과, 비백인 등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길 바라는 에코페미 니즘은, 다만 여성성의 강조로 인해 남성과 여성을 또 다시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려 한다는 아쉬움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 그리고 젠더의 규정을 허물어뜨리는 사이보그 페미니즘으로부터 이 아쉬움이 보 완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여기에도 물론 하나의 전제가 붙는다. 바로 사이보그로부터 창발 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상이 다른 정체 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님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사이보그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자연 질서에 묶인 존재가 아니며, 정신과 물질, 유기체와 기계, 자연과 기술문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 는 정치적 주체를 상징한다. )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즘에서 만들어졌던 또 다른 경계들을 해체한 다 무언가를. 해체한다는 것은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해체를. 통해 그간 묶여있던 것들 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폭력으로 이어지는 안정성, 그리고 여성과 자연,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들을 해체함으로써 우리는 우월 한 것과 열등한 것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오는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폭력성 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해서 해체된 각자가 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미래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운명을 가진다. ) 누구나 긴밀하게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이원론에 의한 폭력성 대신 ‘우리가 공유하는 행성 차원의 집에서 잘 살아가는 길에 관한 학문으로서 에코소피(eco-sophy)’ )를 기반으로 할 필요가 있다.
에코소피는 전 지구적 존재 가운데 서로가 잘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뜻한다. 인간과 기계가, 남성과 여성 이, 자연과 문명이 서로 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에코소피는 가까이 한국의 토착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즉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 다시 말해 하늘이 하늘을 먹여 살린다는 이 말은 성별이나 인간과 자연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적 구분을 초월해 모두가 하늘임을 의미 한다 하늘이. 하늘을 먹이니 서로에게 이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나 경물(敬物)사 상은 우리 모두가 하늘 아님이 없으므로 공경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을 지닌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이 제시한 ‘사은(四恩)’ 교의에서 모두가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 로서’ 은 혜로 만나진다고 밝힌 바 있다 원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은혜 아님이 없다고 보는 은혜의 사상 즉, 은(恩)사상 을 말하고 있으며 이, 은사상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밟아야 하는 요긴한 길을 말하는 ‘인생의 요도(要道)’ 에 해당된다. 은사상은 종래 유교에서 천(天)만을 중시하던 은관념을 ‘천지은 으로’ 전환시킨 데다 불교에서 부모은을 앞 세웠던 덕목 위에 천지은을 세운 점 그리고, ‘동포은 을’ 통해 하시(下視)되던 중생을 평등한 형제 정신으로 돌 린 점, ‘법률은 을’ 세움으로써 기존에 감정적인 사랑에만 흐르고 정의를 세우기 힘들었던 종래 윤리를 돌린 점 에서 그 의의가 깊다.17)
즉 하늘의 은혜만이 아닌 땅의 은혜를 알고 부모의, 은혜를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 천지의 은혜도 알며, 모 든 존재들을 중생과 부처 가림 없이 한 태포 안의 한 형제로 보고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으로 실질적인 안 녕과 질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과 천지자연이 동등하여 존중받을 권리를 가짐을 의미한다. 은사상이 에코소피의 하나로서 주목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 에서 은혜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에코소피로서의 가치가 드러난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은 본래 그 근원이 같으며 서로 공존하는 상즉(相卽)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정신과 물질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므로 정신에만, 치우치거나 물질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편견 이 된다는 입장이다.18) 그리고 생활불교를 표방한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라는’ 표어를 통해 종교의 문을 연 동기를 드러내고 있다.
원불교에서 강조하는 정신개벽은 현대사회의 물질적 요소들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만큼 이 물 질을 선용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중요하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불교에서 강조한 정신과 물질의 공 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을 적극적으로 선용함으로써 정신의 개벽을 도모하려는, 보다 적극적으로 물 질과 정신을 다루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예를. 들어 조성환과 이병한은 ‘일원주의 사상을 물질화하는 것이 바 로 공화제도’19)라고 말한다 단순히. 선거제나 민주제에 한정된 공화제가 아닌 ‘정신적 자각 이’ 동반되는 공화 제가 원불교가 추구하는 물질과 정신의 병행이자 물질의 선용을 동반하는 정신개벽인 것이다.
원불교에서 천지 · 부모 · 동포 · 법률의 네 가지 은혜를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은 (四恩)의 이 네 영역은 물질적 측면에 해당된다 이. 물질적 요소들이 전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 계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은혜에 보은하되 배은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물질의 은혜로운 특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태산은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 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라고.’ 하여, 사은 은 곧 일원상(一圓相)이자, 이 우주의 모든 존재임을 설명한 바 있다. 이때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20) 에 해당한다 박길진에. 따르면 일원상은 절대적 진리 즉, 법신불(法身佛)을 최고 경지로 알아서 이를 「○」으로 상징한 것이다.21) 일원상에 천착했던 그의 견해 중 ‘일원상의 진리를 인간 개개인의 성품 가운데에서 찾아낼 수 있다 고.’ 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원상은 즉. , 사은은 나 자신이기도 하고 우주만유이기도 하며, 따라 서 나 자신이 곧 우주만유임을 함의한다. 내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사은으로서의 은은 상대적인 관계로서의 은이 아니다.’22)
다시 말해 우주만유가 전부 절대적 은혜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우주만유와 하나로서 궁극의 긴밀성 아래 맺어져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점에서 ‘사은 교의를’ 통해 우주만유의 존재 양태를 은혜 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상대적인 은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며, 절대적 진리로서의 법신불이 물 질적으로 나타날 때 어떤 관계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어떤 관계로 발전되어야 할지를 절대적 은혜로 해석한
17) 한정원, 「恩으로 본 圓佛敎의 倫理觀」, 『교학연구』4, 원광대학교 교학연구회, 1970, 22쪽.
18) 오형근 · 강건기, 「佛敎에서 본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철학』35, 한국철학회, 1990, 85쪽.
19) 조성환 · 이병한, 『개벽파선언』, 모시는사람들, 2019, 224쪽.
20) 『대종경』 교의품 3장.
21) 박길진, 「一圓相 硏究」, 『일원상과 인간의 관계』,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79쪽.
22) 박상권, 「원불교 신앙론」, 『원불교 신앙론 연구』,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6, 68쪽.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2대 종법사였던 정산 송규의 삼동윤리 중 둘째 강령 ‘동기연계(同氣連契)’를 살펴 보면, ‘동기연계 는’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 합하자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3대 종법사 대산 김대거는 ‘동생일원(同生一圓)’이라 하여 전 인류와 모든 생 령이 하나로 엮인 가족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원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 지구적 존재는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로운 관계로 맺어 져 있으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불공(佛供)의 대상 공경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과 기계의 혼융 체 사이보그도 –서로 동일하게 생동하는 물질인 인간이나- 기계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닌 은(恩)적 존재, 서로 가 공경하고 공경 받아 마땅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사이보그가 인간성과 기계 성의 ‘이로운 융합 이’ 된다면,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을 모든 경계를 해체하는 사이보그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경하고 공경 받는 사이보그’, ‘은(恩)적인 사이보그 와’ 같은 패러 다임으로 구체화해도 좋을 것이다.
Ⅳ. 맺음말
긴 세월 불평등의, 세상을 견뎌온 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다양한 페미니즘들이 진화를 거듭해왔다. 물 론 페미니즘이 여성 외의 존재들이 겪는 불평등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불평등의 대표적 대상 으로서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며 민족과, 인종 계급, , 자연 등의 문제가 여기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 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고자 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한 때는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려 했고, 이제는 경계를 허물어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 · 문명 · 남성이 자연 · 여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해체하 고자 한다. 이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서열의 설정으로 인해 생성되던 폭력과 억압을 공경과 은혜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여성이 겪는 불평등의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이 다.
이 곳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호관계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관 계 속에 감돌던 답답한 공기를 밝고 맑은 공기로 전환시키는 것 이, 가운데 여성의 권리를 찾아가는 것, 바로 지구적 페미니즘의 갈 길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대종경』
김선희, 『과학기술과 인간 정체성』, 아카넷,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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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 『철학, 생태에 눈뜨다』, 새문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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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이리 리, 「에코페미니즘에 관한 횡문화적 비평」, 『자연, 여성, 환경』, 이소영 외 역, 한신문화사,
2000.
2020/11/24
■ 특별기고/원불교내의 근본주의 비판과 극복 원불교신문
특별기고/원불교내의 근본주의 비판과 극복
기자명 김도공 교무
입력 2013.07.12
-최근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경향의 비판과 극복을 중심으로-
▲ 김도공 교무/원광대원불교학과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다.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뜻이다. 이는 '초심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로, 근본(根本)을 잊지 않음 또는 죽어서라도 고향(故鄕)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말한다.
모든 존재에게 근본(根本)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필요한 것이며 중요한 것이다. 참된 근본은 굳이 근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모든 존재가 근본을 토대로 삶을 영위하여 간다.
본 고는 원불교의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새로운 원불교 100년을 열어가고자 최근 원불교내에 나타나고 있는 근본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극복방안을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를 중심으로 작성됐다.
2. 근본주의의 개념과 문제점
근본주의란 본래 18세기의 근대주의적 경향에 반대하면서 19세기 후반에 생겨나기 시작한 사조를 말한다. 특히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시대사조이다. 이는 기독교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침략에 대항하여 그 본래 교회의 전통신앙을 굳건히 지키려는 신앙 운동을 말한다. 본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본래 뿌리로 돌아가자는 의미있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현재 근본주의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그 변화에 따르지 않으려는 움직임으로 파악되는 것과 같이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근본주의는 이미 기독교의 영역을 넘어서 때로는 과격한 테러리즘과 연결되기도 하고,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와도 연결되어 사용되며, 일반 사회 속에서 조직 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지 오래 되었다. 이렇듯 근본주의는 종교적 근본주의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나치즘,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유사종교의 성격을 갖는 세속적 근본주의도 있다.
근본주의는 절대적인 도그마를 앞세우며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과 배타적인 독선을 표방한다. 더욱이 근본주의는 자신을 절대적 진리·정의·선(善)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타자를 절대적 거짓·불의·악(惡)으로 규정하여 억압하고 제거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선악 이분법적 믿음을 더욱 강하게 키워 나간다.
모든 조직과 단체 내에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존재한다. 보수파는 나름의 가치로 조직과 단체의 이념을 지키고 실현하고자 하며, 진보파는 조직이 나가야 될 이상적 방향에 대한 지적을 통해서 조직의 건실한 성장을 촉진한다.
보수파이든 진보파이든 조직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각각의 영역에서 근본주의가 싹이 트면, 특정한 가치를 도그마 속에 경색시켜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통로를 막으면서 스스로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고립의 길을 가게 되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3. 근본주의의 유형
일반적으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고립적 근본주의이다. 이는 적대적 모순의 위협에 대처해서 자신들의 조직과 기관을 확고히 하면서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유형이다. 둘째는 변형주의적 근본주의이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확대하고 조직과 기관의 외연을 선교를 통하여 연장하면서 세계를 변형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주의적 유형이다. 셋째는 정복주의적 근본주의이다. 이는 외부의 적을 전적으로 전멸시켜 버리거나 또는 전향시킴으로 신국을 지상에 실현하려는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유형이다.
세 가지 유형이 있지만, 모든 근본주의 운동은 잠재적으로는 모두 세계지배를 꿈꾸는 정복주의적 근본주의이다. 다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해 있으면서 고립주의나 변형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근본주의는 그 내면에 강한 정복주의적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심리적 거부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해법은 근본주의에 대한 대항적 비판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주의가 자랄 수 있는 근본 배경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방식이 제시되지 않으면 근본주의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4. 근본주의 해체정신과 원불교의 발생
원불교의 발생배경은 소태산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초기 전개과정에 나타난 정신은 기존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아온 유교근본주의 및 쇄락한 불교에 대한 해체와 근본 정신 재정립의 과정이었다.
소태산은 유교와 불교라는 거대한 종교적 전통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세워온 종교적 전통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고 있는 개혁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본정신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을 근본주의라고 한다면, 소태산은 유교와 불교의 본래 근본정신을 찾기 위해서 형식화된 유교와 불교의 근본주의를 과감하게 해체하여 재구성 하고 있는 것이다.
5. 원불교내 근본주의적 경향들
근본주의에 대한 옹골찬 개혁의지로 나온 원불교도 최근 역사가 100여년을 흘러오면서 그 과감한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방해의 요소가 되는 몇몇 근본주의적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1) 정전 무수정 무오류론
원불교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 경전은 〈정전〉이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사항은 교전을 새로이 편수 하는 데 있어서 1960년(원기44) 1월 18일 수위단회에서 "종법사님 친재 하에 전반의 수정을 거쳐 재간된 이후에는 다시 일언일구(一言一句)의 수정도 가할 수 없음"을 결의하고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후 1962년(원기47년) 7월 24일 제6회 임시수위단회에서도 이렇게 원불교 교전이 완성된 이후에는 이에 대한 일자(一字) 일구(一句)의 수정도 가할 수 없음을 거듭 결의하고 있다. 이는 〈원불교교전〉편찬에 들인 교단의 정성과 의지를 여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같은 강력한 결의사항의 영향 때문에 오자 및 탈자에 대한 수정의 요구에도 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울러 고어체나 한문 위주로 써진 문제 때문에 보다 쉬운 교전에 대한 요구가 많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교전을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
2) 오만년 대운론
원불교에서는 이 회상의 운수를 오 만년 대운의 회상으로 보는 수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대산(大山)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나, 그 이전에도 많이 사용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원불교의 운수를 오만년 대운에 연결지어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수많은 세월과 역사 속에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첫 회인 자회(子會)부터 시작하여 6회재인 사회(巳會)까지 성장하며 후반부인 오회(午會)부터 해회(亥會)까지는 줄어드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천 5만년 후천 5만년을 제하고 나머지 29,600년은 빙하의 휴지기가 되며, 이는 무한한 주기적 반복 순환을 한다고 보았다.
수운은 이러한 시운의 순환론을 믿었으며, 개벽으로 후천 오만년이 열릴 것으로 믿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동학군이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라는 기를 가지고 또 "오만년대운(五萬年大運)"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동학혁명을 일으켰다. '오만년 운수'는 수운가사인 용담유사, 검결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러한 사유의 원형은 조선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맞서 평민지식인들이 준비한 대항 이데올로기인 〈정감록〉과도 연결된다. 이 점은 19세기 후반 한국에 드러난 여러 신종교의 가르침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동학과 증산교 및 원불교는 하나같이 곧 밝아올 새 세상을 노래했으며, 조선왕조가 망하고 나면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고, 그때가 되면 문자 그대로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고 복된 사회가 건설되는데 그 운수가 오만년 대운(五萬年 大運)이라고 본 것이다.
3)출가중심주의
원불교가 지향하는 정신 즉 재가 출가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다 같이 불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종교를 만들고자 하는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 재가출가 전교도가 다 같이 주인이 되어'라는 〈교헌〉전문에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커진 교단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전문 출가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가중심의 교단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가중심 의식구조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현상은 교단 여러 가지 모습에서 자주 관찰되고 있다. 재가 출가의 구분 없이 생활 속에서 불법을 실현할 수 있는 원불교의 구조와 조직 운영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원불교가 본래 출발한 지점 즉 재가 출가 유무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하고 수행할 수 있는 구조의 마련이 절실해 보인다.
5. 결론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당한 불편함을 초래한다. 그러나 기존의 개념과 용법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의문을 걸어봄으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의 다른 이면을 보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해체하고서 우리는 그전에는 전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맛보게 된다.
본 논고는 원기100년을 맞이하는 원불교 안에 익숙하게 자리 잡으려 하는 몇몇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앞으로 열어가야 할 새로운 100년을 전망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됐다.
개념 적용여부의 적합성을 떠나서, 원불교 창립초기의 생생약동함과 열정적 개혁성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근본주의의 개념으로 원불교에 나타나고 있는 최근 몇 몇 근본주의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본 것이다.
※ 이 글은 김도공 교무의 논문을 요약 정리 한 것이다.
김도공 교무 wonnews0601@hanmail.net
2020/11/12
希修 Facebook 개신교의 끊임 없는 테러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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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끊임 없는 테러에 늘 참기만 하던 불교계가 사상 최초로 항의 성명 발표한 이유: 사찰 내에 요양원이 있을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아파트 단지들과 학교가 모여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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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명령/옹호하는 부분을 경전에서 삭제하지 않고 여전히 유지하는 종교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싶다는 생각 자체도 불허하는 종교. 이 둘을 모든 면에서 무조건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과연 fair한지, 평화에 도움이 되려는지, 생각해 주셨으면. 남편이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가정사이니 저는 중립을 지키겠습니다"라는 식의 수수방관 태도가, 무슬림 이주민 인구가 날로 늘어 가는 한국의 현실에 어떤 작용을 하겠는지도 함께. 개신교가 이슬람에 테러한다면 이슬람은 불교만큼 참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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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s Park 궁금해서 여쭤보는데 기독교 성경에서 타 종교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어떻게 명령했는가요? 제가 알기로는 구약의 특정 역사적 사건 (예: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 의 컨텍스트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행동 강령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지시한 말씀은 직/간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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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s Park 만약 이슬람을 지칭하시는 것이라면 맞지만 - 이런 종류의 사건은 기독교와 교부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독교는 애초에 타이틀만 개신교 아래에 있을 뿐이지 각 교계가 서로 독립된 관계에 있고, 교단 내에서도 교단 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히 약하기 때문입니다.
특정 교회/목사가 이런식의 공격을 사주하였다면 분명 법적인 처벌과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겠지만 ... 기독교 전체로 확장시킬수 없는 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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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안녕하셔요 Moses Park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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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자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음 아프시게 해 드려서 일단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니 솔직히 화가 안 날 수가 없네요 ^^;. 한국 불교에도 6~70개의 종단이 있고 조계종은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어떤 종교든 개별 단체나 신자 개인의 행동을 일일이 단속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습니다만.. 천주교, 불교, 원불교, 증산도 등의 종교가 타종교의 건물/조각상을 훼손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는 늘 개신교 신자에 의해 자행되는 것 같네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혹시 경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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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아닌 여성은 돌로 쳐 죽이라거나 부모 말 안 듣는 아이들도 돌로 쳐 죽이라거나 등의 다른 종류의 물리적 폭력은 일단 제외하고요, 이교도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 해도 너무나 많아 다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그 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훑어 보시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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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급기 22장 20절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거나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끌어다 여지없이 쳐 죽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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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4장 16절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반드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타국인이든지 그 땅에서 태어나 자든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쳐 죽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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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3장 6절-9절
네 한 어머니 배에서 난 형제나 네 아들 딸이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 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와 가차 없이 그를 쳐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칼로 치고 후에 뭇 백성이 돌로 쳐 죽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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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3장 12-16절
다른 신을 섬긴다고 소문이 떠 돈 성읍에 사는 주민, 짐승(가축), 여자, 어린 젖먹이.... 등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칼로 쳐 죽이고 그 성읍을 다 불질러 없애 진멸시켜 버려라! 너희 중 어떤 잡것들이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들들도 모두 칼날로 쳐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주님 여호와께 드릴찌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만일 모두 쳐 죽이고 불살라 내 명에 그대로 따라 행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 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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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댓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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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
신명기 17장 2-5절
네 주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주이신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찌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다른 신에 절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사정없이 쳐 죽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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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장
10. 당신들이 어떤 성읍에 가까이 가서 공격할 때에는, 먼저 그 성읍에 평화를 청하십시오.
11. 만일 그 성읍 백성이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고, 당신들에게 성문을 열거든, 그 성 안에 있는 백성을 당신들의 노비로 삼고, 당신들을 섬기게 하십시오.
12. 그들이 당신들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싸우러 나오거든, 당신들은 그 성읍을 포위하고 공격하십시오.
13.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 성읍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 주셨으니, 거기에 있는 남자는 모두 칼로 쳐서 죽이십시오.
14.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과 그 밖에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가져도 됩니다. 당신들이 당신들의 대적에게서 빼앗은 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것이니, 당신들의 마음대로 먹고 쓸 수가 있습니다.
15. 당신들의 주변 민족들의 성읍에 딸리지 아니한, 당신들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성읍들에도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16.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17.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18.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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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기 8장
1.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라. 일어나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거라. 보아라, 내가 아이(Ai) 임금과 그 백성과 성읍과 그 땅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18.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에 든 창을 아이 쪽으로 내뻗어라. 내가 저곳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 여호수아는 손에 든 창을 그 성읍 쪽으로 내뻗었다.
19. 그가 손을 내뻗자, 복병들이 제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돌진하여 성읍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러고 나서 곧 그 성읍에 불을 질렀다.
21.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은, 복병들이 그 성읍을 점령하고 성읍에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돌아서서 아이 사람들을 쳤다.
22. 복병들도 그들에게 맞서려고 성읍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아이 사람들은 이쪽도 저쪽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그 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아남거나 도망치는 자가 한 명도 없을 때까지 그들을 쳐 죽였다.
24.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쫓아오던 아이의 모든 주민을 광야 벌판에서 다 죽였다. 그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칼날에 쓰러지자, 온 이스라엘은 아이로 돌아가서 그 성읍 백성을 칼로 쳐 죽였다.
25. 그리하여 그날 쓰러진 자가 남자와 여자 다 합하여 만 이천 명인데, 모두 아이 사람들이었다.
26. 여호수아는 아이의 모든 주민을 완전 봉헌물로 바칠 때까지, 창을 들고 내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28. 여호수아는 아이를 불태워 영원한 폐허 더미로 만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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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
그 외에도 인터넷 검색하면 이런 내용도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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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훼(여호와)의 명령으로 살육된 생명 100여만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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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성을 점령 시키고 1만 2천명을 살해. (여호수아 8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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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을 죽여 1만명 살육. (사사기 1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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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냐멘 사람 2만5천100명 살해. (사사기 20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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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을 시켜 이스라엘의 정예병 50만을 살육한 후 여호와(Jehovah)는 변덕을 부려 반대로 유태와 에로파안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에로파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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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수영에서 18만 5천명을 죽이고... 18만 5천명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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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이 자신을 섬기지 않고 신상을 만들자 3천명 살해.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캠프의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다니며 각자 너희 형제를, 너희 친구를, 그 이웃을 죽여라." (출애굽기 32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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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 에게 올리는 불을 잘못 올려서 산채로 2명 태워 죽임. (레10장,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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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를 저주하자 돌로 쳐죽이게 함. (레24장10-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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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에 일하는 남자를 여호와의 명령으로 돌로 쳐 죽임. (민수기 15장 32-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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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이 불평 하자 전염병을 내려 1만4천700명을 죽임. (민수기 16장 4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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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대낮에 내 앞에서 처형시켜라. 그러면 이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 "그 사람을 뒤쫓아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그 남자의 등에서부터 그 여자의 배까지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퍼진 전염병이 그쳤다. 그러나 그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24,000명이나 되었다. (민25장,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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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자 분노하여 전염병으로 7만명을 죽임. (사.하24장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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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에게 분향 하는 사람 250명을 태워 죽임. (민수기 16장 34-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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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세미스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자 분노하여 5만70명을 살해. (사무엘상 6장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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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궤를 싣고 가던 소가 뛰자 붙잡아준 웃사를 상(償)대신 쳐 죽임. (사.하6장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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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렸다고 곰 두 마리를 보내어 어린아이 42명을 찢어 죽임. (열왕기하 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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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그 날 밤 여호와의 천사가 앗시리아군 진영으로 가서 185,000명을 쳐죽였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 죽어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 있지 않겠는가!" (열왕기하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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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아합왕에게 가서 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왕에게 이런 알씀을 하셨습니다. '시리아 사람이 나 여호와는 산의 신이지 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많은 군대를 네 손에 넘겨주겠다. 너와 네 백성은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시리아군과 이스라엘군이 서로 대치한 지 7일 만에 전투를 벌였다. 이스라엘군은 첫날 시리아군 100,000명을 죽였으며 살아남은 시리아군은 아벡성으로 도주하였으나 거기서 성벽이 무녀져 27,000명이 죽었다." (열왕기상 20: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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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바알의 예언자들을 잡아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시오"하자 그들은 그 예언자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 거기서 그들을(450명) 모조리 죽였다." (열왕기 상 18: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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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자 하나님께서는 아비야왕과 유다 사람을 도와 여로보암왕과 이스라엘군을 무찌를 수 있게 하셨는데 그 전투에서 유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예병 50만 명을 죽였다." (역대하 13:16,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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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
*** 야훼(여호와)에 의해 살육되었으나 명확한 숫자를 기입하지 않은 경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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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홍수로 전 지구상의 생축을 다 죽임.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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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의 처음 난 아들(長子)을 남김 없이 살해. (출애굽기 12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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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애굽의 병사를 바다에 빠뜨려 모두 살해. (출애굽기 14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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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손을시켜 블레셋 사람1천30명을 쳐 죽였는데 숫자가 확인 된 것은 얼마인지 모름. (사사기 15,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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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라가 모세와 불화 하자 여호와가 진노하여 고라의 모든 백성을 삼켜 죽임. (민16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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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스본왕 시혼을 공격하여 시혼 백성 학살. (신명기 2장 32-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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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아모리인 에게 우박을 내려 백성을 살해 하였는데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더라" 함. (여호수아 10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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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을 시켜서 립나를 쳐서 립나 백성 학살. (여호수아 10장 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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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솔>을 쳐서 그 성읍에 호흡이 있는자 하솔백성 모조리 학살. (여호수아12장 13-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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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가 명령하여 미디안을 시켜 자기들끼리 미디안 골육상쟁 유도 학살. (사사기 7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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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몬과 모압을 격살하여 남김 없이 다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음. (역대하 20장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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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여호와가 분노. 청년, 남녀, 노인 모두 학살. 산 자는 노예 삼음. (역대하 36장17-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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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옮기자 분노하여 쳐죽이고 궤 옮긴자 학살. (사무엘상 5장 8-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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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고파 메추라기를 먹은 자 학살. (민수기 11장 32-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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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이 여호와에게 불평을 하자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함. (민수기 21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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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르앗 사람이 하나님의 총회에 불참하자 진노하여 모든 사람과 어린아이를 칼로 진멸하여 남김없이 살해. (사사기 21장 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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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략군에게 붙들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자비하게 학살당할 것이며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메어침을 당하고 그들의 집은 약탈당하며 그들의 아내는 강간당할 것이다. (이사야 1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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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jin Kim 먼저 개신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데 대해 분노하며 폭력을 입은 분들에게 죄송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라고 하신 바 있는데, 철저히 비폭력과 사랑을 주장하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사찰 방화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십자군전쟁이나 미국 원주민 학살과 마찬가지의, 하나님의 이름을 참칭하며 자신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행하는 죄라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님께서 구약에서 나오는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소개해주시고 나눠주신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란 책이 있는데(http://naver.me/FA1d3pR6), 내년 1월에 변호사시험이 끝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혹 공유할 내용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에 폭력이 나오더라도 현 사회에서 이름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의 문자대로 행할 것이라면 그 잣대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해야 하는데(ex."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태복음 18:9)) 그러는 사람은 없죠. 동성애를 죄악시하며 지탄하는 목사들이 교회 내의 물신숭배나 성적 착취에는 무감한 것처럼요.
아무튼 다시한번 개신교인으로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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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jin Kim +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교계 차원에서 명확히 선언하고, 교단에서 일종의 강령을 각 교회에 내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러한 폭력이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행동이라 해도, 교회와 교단 차원에서는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선명히 보여줘야 각 개인도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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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Yoonjin Kim 윤진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저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네요. 윤진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고 제가 사과받을 입장도 전혀 못 되지만, 말씀이라도 이렇게 해 주시니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말 나온 김에 평소의 제 궁금증 몇 가지 여쭤봐도 될런지 모르겠네요..
(1) 이런 얘기들이 나오면 기독교 신자분들께서는 늘 "구약과 무관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전의 계약을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하셨다"고들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건 하나님의 이전 방침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혹 아닌지요? 유일신 종교들에서의 신은 대개 완전무결, 전지전능 등으로 정의되는 것 같은데, 완전한 신이라면 그 정책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보완이나 개선이 필요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상태가 완벽/완전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 아닌지..
(2) 어떤 이유로든 인간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침이 바뀌셨다면, 구약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 (천주교처럼)을 개신교가 고려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힘들 만큼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내용이 구약에 차고 넘치는데요. 인간의 어리석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에, 경전에 저런 내용들이 나오는 한, 이런 잘못들의 책임을 100% 개인에게만 지우는 것도 무리인 것 같거든요..
윤진님께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평소 궁금했던 점이 떠올라서요.. ^^;
권해 주신 책은 무척 흥미로와 보이네요. 나중에라도 직접 읽든지 리뷰라도 찾아보든지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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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jin Kim 希修 앗 천주교에서는 구약을 사용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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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m
希修 실은 제가 초등학생 때는 교회를 엄청 열심히 다니고 (우리 교회 대표로 성경 암송대회 뭐 이런 것도 나가고 그랬다죠, ㅋ), 중딩 때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성당을 나이롱으로만 가끔 다녔었어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성당에 가면 신약만 비치되어 있고 구약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사 때 나오는 주보나 신부님 강론에 인용되는 구절도 오직 신약에서만 뽑습니다. 사실 신약 중에서도 4복음서 위주로만 다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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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가령 외경(Apocrypha)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이상 기독교의 모든 교파가 신구약을 '정전(canon)'으로 보지 않나요...? 물론 예수 덕분에 구약의 모든 율법이 실질적으로 무효가 됐고 새로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게 교리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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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네, 천주교에서 구약을 외경으로 분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사 때 사용하지도 않아요, ㅎㅎ. 공식적으로는 외경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외경 비슷하게 취급되는 것 같아요. 제가 성당을 다니던 동안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워낙에 나이롱이었어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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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구약은 천지와 인간 창조의 기록, 그리고 예수의 조상이고 동족이자 '유일한 선민'인 유태 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에 기독교 어느 교단도 버릴 수가 없죠. 다만 구약의 신이 복수와 분노의 신이라면 신약의 신(+ 예수이자 = 예수)은 용서와 사랑의 신이기 때문에 후자를 강조할 수는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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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jin Kim 希修 아하 그렇군요.
1) 개신교의 경우 주보나 설교에 구약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폭력'을 담은 내용이 인용되는 경우는 없고, 주로 하나님의 창조와 인도, 혹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이야기할 때 구약의 해당 부분이 인용되곤 합니다.
2) '구약이 폐지되고 신약으로 대체되었다'는 말은 구원의 약속이 구약의 '율법'에서 신약의 '예수님의 구속 신뢰'로 대체되었다는 내용을 표현한 듯한데, 바울도 말한 바 있지만 그렇다고 구약이 폐기된 것은 아니고, 예수님도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6-40)라고 하신 것처럼 십계명과 같은 이전의 율법 또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신학을 공부한 바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구약에서 감동을 받을 때도 많고(구원사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기도 하니까요), 구약이 있어야 신약의 예수님의 사역이 왜 긴 역사 끝의 약속의 성취이자 예언의 실현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다만 구약의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질문이 남는데, 조심스럽지만 폭력을 수반한 선악 징벌 내지 가르침은 "그 시절" 사람들에게 특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었을까. 근데 이거는 너무 타자화 같기도 해서, 제가 위에서 언급한 책을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책을 읽어보시라고 하려 한 건 아니고 개신교 내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과 책도 있음을 말씀드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5)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에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기록된 게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사람 혹은 그 시대 사람들의 한계로 한번 필터링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이 여자는 머리를 길러 가려야 한다는 편견 및 사견 가득한 말을 했어도 그가 쓴 편지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여러 오류와 함께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려내는 게 필요하다 싶습니다.
2020/10/22
알라딘: [전자책] 어려움을 극복하는 마음의 힘 : RESILIENCE 원불교 미주 선학대학원
2020/10/20
한울안신문/마음공부/원불교 마음챙김 Chris Kragel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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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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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챙김] 자연과 인간 Nature and humans
원선일(크리스 크레겔로) | 2020-10-08 22:44
[원불교 마음챙김] 웰빙을 위한 단련법(Discipline for Wellbeing)
원선일(크리스 크레겔로) | 2020-09-06 19:57
[원불교 마음챙김] 분노 그리고 작업취사_Anxiety and choice in action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8-11 12:13
[원불교 마음챙김] [원불교 마음챙김] 불안과 삼학수행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7-08 11:34
[원불교 마음챙김] 마음의 걱정과 몸에 대해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6-10 09:40
[원불교 마음챙김] 위기로부터 얻어지는 은혜 Good things coming from any Crisis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5-13 13:19
[원불교 마음챙김] 고립된 존재에 있어서의 마음챙김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4-08 00:22
[원불교 마음챙김] 원불교와 심리학에서 일기기재의 유사성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3-18 14:28
[원불교 마음챙김] 원불교와 심리학의 관계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2-11 19:43
[오피니언] 운명처럼 다가온 원불교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1-08 14:59
[교화Talk] 원기105년 한울안신문 개편 방향
강법진 편집장 | 2019-12-2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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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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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 Nature and humans
자연과 인간 Nature and humans
This month’s article is about nature and humans. Here, I mean nature as anything that is not artificial or created by humans. Of course, we are actually also part of nature, but we have now started to modify our environment in such radical ways that it starts to differ from the environment in which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크리스 크레겔로) | 2020-10-08 22:44
웰빙을 위한 단련법(Discipline for Wellbeing)
웰빙을 위한 단련법(Discipline for Wellbeing)
수행이란 어쨌든 전적으로 즐거워야 한다.그렇게 될 때 생의 모든 부분이 오직 거기에 몰입되기 때문이다.웰빙이란 삶의 전체가 균형에 맞고 나와 타자 간에 이익이 되는 것을 뜻한다.오클랜드교당에는 영어로 된 큰 간판 싸인이 있다. ‘마음챙김과 웰빙을 위한 원불교 센터’이다. 이 이름은 교당을 정식으로 열기 전에 교무님과 오랫동안 다양한 토론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교무님이 나에게 원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할 때, 종종 웰빙(정신의 건강과 복지)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래서 원불교 이름 뒤에 웰빙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크리스 크레겔로) | 2020-09-06 19:57
분노 그리고 작업취사_Anxiety and choice in action
분노 그리고 작업취사_Anxiety and choice in action
지난 호에서는 삼학을 아는 것이 어떻게 분노를 조절하는 데 적용이 되는지에 대해 다뤘지만, 이는 단지 정신수양과 사리연구에 한정해 다뤘다. 이번 호에서는 수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분노를 다스리는 것과 관계가 있기도 한 ‘작업취사’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Last month, I talked about how the threefold learning can be applied to dealing with anxiety, but I was only able to discuss the first two, namely cultivati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8-11 12:13
[원불교 마음챙김] 불안과 삼학수행
[원불교 마음챙김] 불안과 삼학수행
“여기 내가 이렇게 다시 불안한 생각이 왔구나.”하지만 단지 지켜보기만 하면, 그 생각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지속적으로반복되는 걱정의 수레바퀴를 멈추어 조절할 수 있는능력이 생겼다는 말이지요.In last month’s article, I discussed how the effect of anxiety can be seen in our body. Making simple changes to our body can have powerful effects on our mood. For ex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7-08 11:34
마음의 걱정과 몸에 대해
마음의 걱정과 몸에 대해
저는 다시 몸에게 아침에 가장 우선순위는두렷한 마음을 가지고 몸을 이완시키는 것에전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그리고 바쁜 하루를 보낸 날에는,저 자신을 안정시키고 잠자기 전 제 몸에게이제는 휴식할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이것이 곧 제 무시선 수행의 일부분입니다.이번 호는 우리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세계적 유행병과 그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불확실성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약간의 불안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불안은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느낄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6-10 09:40
위기로부터 얻어지는 은혜 Good things coming from any Crisis
위기로부터 얻어지는 은혜 Good things coming from any Crisis
Covid-19의 위기로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그에 따라 나와지는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조명해보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물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는 것이 부정적인 면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인식해 나갈 필요가 있지만, 이 또한 이 세상의 긍정과 부정적인 측면이 서로 엮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일원상 서원문에서 ‘은생어해’와 ‘해생어은’으로 명시하고 있다.아마도 현재 각 세계로 퍼져 있는 봉쇄령(lockdown)의 가장 분명한 효과는 그것이 어떻게 자연환경에 영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5-13 13:19
고립된 존재에 있어서의 마음챙김
고립된 존재에 있어서의 마음챙김
어떻게 우리는 서로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혼자 방안에서오랫동안 선을 하겠다고 시도해 왔다. 이러한 수행은사회적 고립을 가능하게 했다. 원불교가 나에게 가르친마음공부는 그 이상이었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정신!당신의 마음공부가 자신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지만,이는 또한 다른 이들을 살피라는 것을 의미한다.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붕괴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
원불교 마음챙김 | 원선일 예비원무 | 2020-04-08 00:22
원불교와 심리학에서 일기기재의 유사성
원불교와 심리학에서 일기기재의 유사성
원불교에서의 수행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일기를 기재하는 것이다. 이 일기법은 형식적이고 정련화된 수행법이며, 통찰과 지혜를 개발시킨다는 면에서 다른 수행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기를 어떻게 기재하는지는 교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선이나 다른 수행과 같이 일기법 또한 일기를 기재하는 습관을 일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을 갖기 위해 처음에는 잘 시작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그 횟수가 줄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일기 쓰는 습관을 계속 유지시키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기법은 우
원불교 마음챙김 |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3-18 14:28
원불교와 심리학의 관계
원불교와 심리학의 관계
이번 호에서 나는 원불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두 가지 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됐다고 볼 수 있다. 원불교는 20세기 초에 창시됐고, 심리학의 이론도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둘 다 훨씬 이전의 역사와 연결돼 있다. 원불교는 전통과 종교 그리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아시아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고, 심리학은 서양 심리학에 바탕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연구하는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과학화됐다. 비록 현재는 사회과학에서부터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전 학문분야를 포괄하고
원불교 마음챙김 |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2-11 19:43
운명처럼 다가온 원불교
운명처럼 다가온 원불교
나의 이름은 크리스 크레겔로(Chris Krageloh)이고 법명은 원선일이다. 나는 2010년에 입교해 법명을 받았다. 독일에서 1978년에 출생해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일본에 대한 기억이 많아서인지 아시아 문화에 대해 항상 깊은 인연이 있는 듯했다. 8세 때 다시 독일로 돌아가 지내다가 18세 때 뉴질랜드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때 부인인 Annie(법명 원선화)를 만났고, 현재 11살인 아들 아난다(법명 원법전)와 살고 있다.나는 어린 시절 철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심리학은
오피니언 | 크리스 크레겔로 | 2020-01-08 14:59
원기105년 한울안신문 개편 방향
[한울안신문=강법진] 한울안신문은 원기105년(2020)에 창간 25주년을 맞이한다. 올 한 해 수고해 준 필진 황상원·박세웅·김도연 교무와 조담현·김도경·조은혜·전낙원 교도에게 감사드린다. 내년에는
고립된 존재에 있어서의 마음챙김 Mind practice in self-isolation
원선일 예비원무
승인 2020.04.08 00:22
호수 1166
원불교 마음챙김4
https://www.youtube.com/watch?v=eB9kePD8oCU&feature=emb_logo
- 어떻게 우리는 서로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인가?
-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혼자 방안에서 오랫동안 선을 하겠다고 시도해 왔다.
- 이러한 수행은 사회적 고립을 가능하게 했다.
- 원불교가 나에게 가르친 마음공부는 그 이상이었다.
-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정신!
- 당신의 마음공부가 자신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 이는 또한 다른 이들을 살피라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붕괴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나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4주간의 국가 봉쇄령이 시작된 첫날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은 다른 나라에 비해 바이러스가 늦게 도달했지만, 바이러스 발생한 숫자가 그다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제재는 일찍 시작됐다. 세계적으로 대략 25억의 인구가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의 제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전 인류의 약 1/3가량 되는 숫자이다.
이러한 건강에 대한 위기는 향후 우리가 미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다. 혹은 적어도 이미 해오고 있었던 성장의 일부분에도 속도를 가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은 온라인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시스템의 증가를 포함한다. 나도 오클랜드 대학으로부터 온라인으로 강의할 수 있게 강의를 재구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현재 나의 아들은 비디오 컨퍼런스 콜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 만나고 있고, 아내 또한 별도의 컴퓨터로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 가정은 흔히 말하는 인터넷 카페를 집에서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응급상황이 결국에는 지나가겠지만, 이 기간에 만들어진 새로운 많은 종류의 습관들이 차후에는 우리 곁에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측면의 관심사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예를 들면, 집에 머물면 안전성과 편리성이 더욱 증대된다는 이유로 더욱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는 새로운 변화도 맞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벌써 더 많은 재택근무를 통해 점점 더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바이러스의 영향이 그 가중치를 더해 가고 있다. 각국의 나라들은 우울증과 분노를 가진 사람들의 확률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고,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들이 증대되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고립되기 때문에 형성되었다는 증거들이 보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울증의 소용돌이는 인간의 조절영역 밖에서 존재하게 될까? 혹은 우리의 기술을 활용해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나는 웹사이트나 스마트폰 같은 기술을 사용해 심리학적인 치료를 전달하는 내용에 관한 주제로 책의 한 부분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은 eHealth라고 불렸다. 이들의 대부분은 상담사가 일대일로 내담자를 만날 필요가 없었고, 그 효과도 전통의 치료법만큼이나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입증이 나타났다.
하지만 계속 보고된 바에 따르면, 모든 이에게 잘 적용되는 실례가 되지 못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도를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직접 내담자를 응하지 않고 하는 상담이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상담사들은 직접 일대일 면담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줄어들고, 온라인 치료를 선호하는 경향에 따라 관심과 효과는 더 증대할 것이라 여겨진다.
많은 연구가들이 현재 온라인을 바탕으로 한 명상과 마음챙김의 효과를 내놓고 있다. 예를 들면 뉴질랜드에서 우리 연구 그룹은 대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정기적으로 만나서 명상을 지도하는 교사들과 비디오 컨퍼런스를 통해 만나는 실험을 도입했다. 이 학생들은 몇 주 후 점점 더 스트레스에 적게 노출되었으며, 이는 명상이 오직 개인에게 온라인으로 가르쳐졌을 때보다 훨씬 더 기대효과가 컸다. 추측하건대,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일정 기간 명상교실에 오는 노력을 더하였고, 또 서로 간에 지지를 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사람들이 교당에 와서 함께 선을 할 때와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과 같다. 함께 선을 할 때 훨씬 더 힘 있는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향후 온라인 명상과 마음챙김 프로그램의 새로운 국면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서로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혼자 방안에서 오랫동안 선을 하겠다고 시도해 왔다. 이러한 수행은 사회적 고립을 가능하게 했다. 개인의 명상 수행에서 이러한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원불교가 나에게 가르친 마음공부는 그 이상이었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정신! 이는 현재 나의 친구가 혹 고립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체크 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특히 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운 이 시점에 말이다. 당신의 마음공부가 자신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또한 다른 이들을 살피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함께 건강한 마음공부를 함께해 나가기를 염원해 본다!
*아래는 크리스 원고의 원문이다.
Mind practice in self-isolation
The spread of Covid-19, the loss of lives, and the disruptions for society is tragic. Let us all pray for those who have lost their lives, for their families, and for all those who are experiencing severe hardship as a result of this.
I am writing this article during the first day of lockdown in New Zealand. Here, the virus reached us relatively late, but our lockdown started when the number of cases was still not very high. It has been reported that there are currently approximately 2.5 billion people around the world in either partial or full lockdown. This is about a third of whole humanity!
It is likely that this health crisis will have fundamental effects on how we do things in society in the future – or at least it will speed up some of the developments that have already been happening. For me personally, this includes a move towards increased online-based teaching. I have been asked by my university to re-structure my courses for online delivery. My son is now doing videoconference calls with his school teachers and classmates, and my wife is also doing her work on a separate computer. Our home is starting to look like those internet cafés that used to be commonly found.
Of course, the emergency situation will eventually pass, but it is likely that many of the new habits we formed during this time will stay with us. We will discover new aspects that are attractive, such as increased safety and convenience by staying at home more. However, we will also face new challenges. People have already started to be more and more isolated as a result of working from home more, and it looks likely that this trend will now accelerate. In many countries, rates of depression and anxiety have already been increasing dramatically, and there is evidence that much of these psychological problems are because people have become very isolated from each other. So, will depression spiral out of control? Or can we use the same technology that contributed to this problem in a way that it now helps us?
A couple of years ago, I wrote a book chapter about the use of technology such as websites and smartphones to deliver psychological therapy – sometimes called eHealth. Most of these do not require the client to meet the psychologist face to face, and the evidence indicates that these approaches can be just as effective as traditional therapy. However, what is often reported that a lot of people tend to drop out, which seems to indicate that it doesn’t work well for everyone. So far, this hasn’t been a problem, because people usually still have face-to-face therapy available as an alternative. But this may be the case less and less so, and therefore improving the attractiveness and effectiveness of online therapies has become a priority.
A lot of research has now been conducted about the effect of online-based teaching of meditation and mindfulness. For example, our research group in New Zealand got university students to meet regularly in a classroom while the meditation teacher was joining via videoconference. The students reported much less stress after a few weeks, and the results appeared to be larger than when meditation is only taught online. I suspect it is because the programmes forced students to have a routine, make an effort to come to a meditation class, and they had social support. It might be same effect when people get together in a kyodang for meditation – there is something more powerful when meditating it together. And this will be precisely the challenge for the next phase of online meditation and mindfulness programmes: How can we make sure people still feel connected with each other? Many people can try to lock themselves in a room and meditate for a long time. This kind of practice is possible in social isolation. And, yes, your own personal meditation practice is certainly important. However, what Won Budddhism taught me is that mind practice is more than that. Every act is a Buddha offering. This includes calling a friend to check whether they are lonely – and this is particularly important in this difficult time. Your own mind practice starts with you, but it also means looking after others. Let’s cultivate healthy minds together!
크리스크레겔로(원신일)
오클랜드교당 예비원무
4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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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다시 몸에게 아침에 가장 우선순위는
- 두렷한 마음을 가지고 몸을 이완시키는 것에
- 전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바쁜 하루를 보낸 날에는,
- 저 자신을 안정시키고 잠자기 전 제 몸에게
- 이제는 휴식할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곧 제 무시선 수행의 일부분입니다.
- “여기 내가 이렇게 다시 불안한 생각이 왔구나.”
- 하지만 단지 지켜보기만 하면, 그 생각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지속적으로
- 반복되는 걱정의 수레바퀴를 멈추어 조절할 수 있는
- 능력이 생겼다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