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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3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9-⑩ 심중식 소장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 아주경제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24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17 17:09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⑨ 심중식 소장<上>

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은 1946년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종의 자취를 찾아 화순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공이 작고한 지 몇 년 뒤였다. 현 총무는 세계의 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다석과 현 총무를 광주역으로 이현필(1913~1964)이 마중 나갔다.
이현필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발생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25 전쟁 중에는 600여 고아들을 보살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거두어 주었다.
이현필과 마더 테레사(1910~1997)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 동안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살았다. 이현필은 가톨릭 같은 교회나 조직의 지원도 없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길을 다니다 벌레를 밟아 죽일까 염려해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의 불(不)살생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비슷한 삶의 자세였다.
다석은 당대에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식인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현필은 변변한 학력이 없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진리를 구하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식색(食色)을 초월하여 절대이신 하나님만을 모시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우리말로 처음 고쳐 부른 사람도 다석이다.

食色을 초월하는 하루 한끼와 해혼(解婚)

벽제 계명산 앵무봉 골짜기에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움막이 있었다. 1956년 현 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 수녀와 함께 수도처를 개척했다. 수녀 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녀골이라고 불렀다. 이현필은 1964년 52살 때 광주에서 이곳을 찾아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벽제 동광원은 다석이 살던 구기동에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석은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다석은 가끔 이곳에 와서 동광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도 하고, 예배도 보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도 벽제리 웃골에 살았다. 다석은 벽제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정재용의 집을 찾았다.
동광원, 귀일원, 귀일사상연구소 등은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자매 기관이다. 현재(鉉齋) 김흥호 목사가 다석의 뒤를 이어 동광원 수양회 강사를 하다 2002년 경부터 나이가 들어 그만두면서 심중식 귀일사상연구소장이 강사를 맡았다. 현재는 다석이 아끼는 제자인 김 목사에게 내려준 호다.

-이현필 성인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나중에 부부관계를 끊는 해혼을 했습니다. 금욕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현필 선생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사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신극기의 삶을 사셨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죠. 전쟁 통에는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연명했습니다. 내가 안 먹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지 않겠는가, 그런 자비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였지 자기학대는 아니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은 귀일(歸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다석이 1955년 6월 2일에 쓴 일지를 보면 귀일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統一爲言 人間譌 (통일위언 인간와)
歸一成言 天道誠 (귀일성언 천도성)

한시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죠. ‘통일(統一)을 이루겠다 떠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짓이다. 귀일(歸一)하여 말씀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요, 진실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하겠다고 야단을 쳤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우면서 계속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6·25 전쟁 3년 동안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다석은 정치지도자들이 떠드는 통일이란 말을 싫어했습니다. 다 제 욕심에서 나온 통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여 무아(無我)가 되어 진리이신 한 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에 순종하는 통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귀일의 의미가 다석과 이현필에 의해서 기독교식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적 사회원리로 확장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선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법화경에 일승(一乘)을 설명하면서 ‘회삼귀일(會三歸一 ·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통일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 현실을 놓고 나온 정치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은 통일을 말하지 말고 귀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진실이 되면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전쟁이 부른 참화

이현필은 말년에 정인세 원장에게 ‘귀일원을 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귀일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영혼이 없는 그런 민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일원은 현재 약 150여명의 장애인들과 50여명의 직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직원들 가운데 동광원 출신은 거의 은퇴하고 수녀님들 몇 분이 함께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다. 심 소장은 귀일원의 천사 복은남 수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 수녀는 이현필의 초기 제자로 여러 언님(다석이 만든 말로 동광원에서는 수사 수녀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따랐다.
“복 수녀는 귀일원에서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며 생활했는데 언제나 그 얼굴이 화평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맡은 환우 중에 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24시간 누워 지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우의 얼굴이 항상 밝아 차츰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환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한 천사의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복은남 수녀였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그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조금이라도 환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일어나서 수발했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과 목욕, 자세를 돌려주고 옷 갈아입히고 세수를 시켜주고 온종일 쉴 새 없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한결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자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복 수녀에게 ‘얼마나 힘드시냐’고 물으면 “힘들다니요?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있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이지만 지금까지 쇠창살 자물쇠 등의 격리시설이나 통제 없이 한 가족이 되어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저절로 동화되고 치유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성과 영적 감화의 능력이 대대로 축적되어 흐르는 곳이 귀일원이라 하겠습니다.”



이현필 묘소 앞에서 대담하는 심중식소장(왼쪽)과 인터뷰어.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 신앙공동체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와 불치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동광원은 1965년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귀일원에서 정신장애 및 지체장애인들을 보살피던 언님들이 정년 퇴임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남원시 대산면에 새로 터를 닦아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이 현재의 남원 동광원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세운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복지 봉사 기관이다. 2010년부터 귀일원에서 귀일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귀일사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과 <씨알의 소리>에 접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지요. 그러다 방향을 전환해 1981년부터 현재를 찾아가 다석을 공부하고 실존적 신앙을 배우게 됐다면서요?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시절과 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남과 경쟁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몇몇 동아리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시작으로 역사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서 몇 번 데모를 하고 친구들을 따라 함 선생 집회에 참석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재 타도! 민주평화통일 만세!’ 라고 외치지만 저에게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처음으로 실존적 물음을 해보면서 내 자신이 백지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를 알고 싶어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함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고 동양 경전들을 읽어보고 김태길 교수님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18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만난 분이 현재였습니다. 현재가 이끄는 이화여대 연경반(硏經班)에 처음 참석했을 때 선생은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종교철학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고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하루 한끼를 먹으며 세속을 초탈한 도인같은 느낌이 들고 동양경전과 성경을 새롭게 그리고 쉽게, 깊은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을 보고 차츰 말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고 일식(一食)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참 스승을 모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독특한 해석이 제게 천둥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울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요한 사상으로 기독교를 다시 살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이야말로 동양인을 위한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어떻게 동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연경반에서 현재는 다석뿐 아니라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에 대해 가끔 말했습니다. 1985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전기를 읽었습니다. 엄두섭 목사가 1977년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도 봤습니다. 현재는 다석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이현필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옷 속에 있던 이가 소매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을 잡아서 너도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집어넣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YMCA 화장실이 아주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는데 이 선생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께서 직접 또는 제자를 시켜 계속 청소하고 관리를 하니까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가장 척박한 땅을 가장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동광원 사람들이라고 김흥호 선생은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제 동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동광원 간판이 없었습니다. 허름한 토담집들이 두어 채 있는데 거기가 동광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재가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현재가 동광원 수양회에서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찾아오기 힘들다고 하자 동광원 사람들이 제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내가 처음으로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석, 현재,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3대(代) 강사라 할까요. ”

-현재의 강의를 녹취 편집해 주역, 원각경, 양명학, 법화경, 화엄경 강해를 펴냈는데요.

“1981년 현재의 이화여대 연경반에 출석하면서 종교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석이 52세에 중생(重生) 체험을 했다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 현재는 35세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체험일까.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나 모두 거듭남의 체험을 가졌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현재는 늘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듣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의 말씀이 점점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깊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거의 다 알아듣는가 싶었지만 그게 곧바로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될 수 있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현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배우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댁으로 모셔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1992년 5월 5일 새벽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동광원 옆에 있는 현동완 YMCA 총무의 기도터. [사진=황호택]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최성무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아주경제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31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최성무<上>

최성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는 목회할 적에 교회 통장 갖지 말라 했어요. 누군가에게 가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돈이 교회 통장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교회가 통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날 필요한 것 그날 구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말씀을 믿든지 장사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요.
나는 교회 초창기부터 통장을 갖지 않았어요. 헌금을 놔두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했어요. 그 돈을 써서 돈을 벌면 다시 가져다 집어넣도록 했죠. 그럼 다음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지요. 그래서 저축할 겨를이 없었죠.”

-목사들은 하느님한테 십일조를 내는데요. 국가에 또 세금을 내야 하는 겁니까?

“호주에서도 세금을 냅니다. 목회자들은 돈으로부터 해방돼야 합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서 설교를 합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요. 통장에 돈이 있는데, 돈 없어 헤매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19세기 말에야 기독교가 전파된 한국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도수가 많고 특히 여성 신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국에는 예부터 내려온 전통신앙이 있지요. 샤머니즘의 근간은 ‘믿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할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한울님한테 빌잖아요. 한울님이 하느님으로 바뀌는 것은 쉽잖아요. 이런 전통적 신앙이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여성 해방운동과 직결되었습니다. 기독교만큼 여성 해방운동을 장려한 곳이 없었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여자 성도가 주류를 이루고,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여성도가 다 하죠.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도회가 부흥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여성 신분 상승에도 기여한 바가 있지요. 기독교 덕분에 우리 사회에 생긴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기독교에 개혁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최성무 목사 약력>
-1947년생
-1966년 춘천고 중퇴
-1967~71년 단국대 사학과(야간)
-1973~75년 고려대 교육대학원(석사과정 2년 수료)
-1973~1983년 용산고교 등 서울시 고교교사 역임
-1998~2000년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
-2001~2002년 Epping Christian church 부목(연수)
-2003년 목사안수(Assembles of god in Australia)
-2003~2015년 한인에핑교회 체스터힐교회 한우리교회 한가정교회 크리스챤라이프센타 One familyworld church 등 교회 개척하고 2년 후 사임(개척목사)
-2012~2013년 시드니 한의대 수학
-현 여의도 다석연구회 대표회원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일명 한국적 신학에 대한 단상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05.19 17:44


며칠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 생각을 나누었다. 모두들 학위를 마친 학자들이었지만 옛적 내가 그랬듯이 신학교 틀에 갇혀있거나 목회현장에서 적응하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하 내용을 나누고 돌아설 때 이구동성으로 신학함에 있어 ‘얼’이 모처럼 다시 깨어났다고 토로 했으니 이후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삶이 어려운 탓이겠지만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자들 영혼의 크기가 작아지는 현실을 우리는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의 언어가 쓸모없어 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용지용, 쓸모없는 쓸모로서의 신학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이 토착화 신학의 근거라 할 때 이 신학 전통 속에 몸담은 우리의 삶 역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 1 >

필자는 본래 영락교회 출신이며 그 재단 소속 학교인 대광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을 끝내고 친구따라 작은 감리교회로 이적했으며 그곳서 만난 큰 목사(장기천)님 덕에 감신에 입학했고 치구지간인 일아 변선환 선생을 사사했다. 자연스럽게 토착화 신학 전통을 배웠고 기독교와 유학의 대화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마친후 30년을 모교에서 가르쳤으며 4년 반 전 명예퇴직을 했다.

2020년 8월이 되면 만 65세가 되어 정년은퇴 시점이 될 것 인바 이제 서야 비로소 은퇴를 실감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나의 신학적 과제를 짧게 서술할 것이다. 이후 긴 글로 다시 쓰여 질 것을 기대하며 스승의 날 찾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 속내를 짧게나마 내비쳐 보겠다.

< 2 >

사실 명퇴를 작정하기 몇 년 전부터 나의 신학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고 ‘생명평화 마당’을 통해 ‘작은교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자타가 이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직 중 필자는 탁사 최병헌에게서 시작되었고 윤성범을 거쳐 변선환에게서 꽃피운 토착화 신학 전통을 잇고자 애썼다.

▲ 한국적 혹은 토착화 신학을 추구했던 유영모·윤성범·변선환(사진 왼쪽부터)


토착화 2세대란 평을 들었으며 제자들을 그 3세대로 키우기 위해 때론 민중신학과 토론하고 민족개념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나름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학을 비롯하여 유·불·선 동양 종교와 문화들을 연구했고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극복하고자 일아 선생처럼 그렇게 서구 종교다원주의 사조를 방편 삼았다. 기독교의 배타적 ‘오직(only)’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출현한 다원주의 신학사조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거기에 머물지 않았으며 근간에 있어 이들과 같을 수 없었다. 토착(뿌리내림)을 넘어 항시 토발(솟구침)을 꿈꾼 까닭이다. 토착이란 말 탓에 종종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할지라도 토착화를 수동적 개념으로 서구 다원주의 신학의 아류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서구신학은 어떤 것이든지 각주일 뿐 본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필자는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변별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했고 그 실상을 여러 곳에서 밝혀 놓았다. 다석 연구자들 간 견해차가 생긴 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교회와 대학 그리고 사회, 어느 곳에 발 딛고 서있는 가에 따라 담론의 무게중심이 달라졌을 듯싶다.

< 3 >

어느 순간 필자 역시도 기존 토착화 전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과거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민족 주체성을 일깨워 주었으나 정작 정치적 보수성에 고개를 좌우로 내 저어야 했다. 선배 신학자들의 무색무취한 정칙성향, 이에 더해 태극기 부대에 편승하며 가짜뉴스를 진실처럼 매개하는 이들의 적극적(?) 역할마저 목도했던 까닭이다.

▲ 박순경 교수


기존 토착화 스승들, 소위 문화신학자들이 종교해방신학자 변선환 이전으로의 퇴행한 결과였다. 이로써 예전부터 언급된 것이지만 감리교 내 토착화, 문화신학 전통의 한계가 분명해 졌다. 이는 자신들 속에 자유(문화)주의 전통 뿐 아니라 진보성, 곧 사회주의 유산이 있었음을 잊은 자업자득이었다.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창준 그리고 전덕기를 중심한 독립 세력들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후 장기천 감독이 NCCK를 통해 그 뜻을 펼쳤고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연구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필자가 세월호를 비롯하여 4.27 판문점 선언에 생각을 보탠 것도 그리고 5.18, 40주년 행사를 눈물로 지켜보며 힘을 합했던 것은 과거 전통을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가 본래 사회주의였기에 소중하다는 이들 목회자들의 주장을 폄하, 조롱한다면 자본주의에 먹힌 기독교, 감리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감신 내 한 건물 벽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모교 출신 목회자 7분 얼굴상이 걸려있다. 자진 월북한 김창준의 얼굴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한 때 팽배한 적이 있었다. 그 타협안이겠으나 김창준의 얼굴이 다른 분의 그것보다 동판에 아주 희미하게 표현된 상태로 걸려있다. 마지못해 주조되어 걸려 있는 듯이 말이다.

조만간 그의 상이 다시 또렷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사회적 실천력을 잊고 정치성을 망각한 기독교는 토착화를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토착화그 역시 반쪽 기독교의 민낯일 뿐이다. 민족의 현실과 맞닥트린 기독교, 바로 그것이 토착화의 다른 이름이어야 옳다.

< 4 >

▲ 이신 목사(1927.12.25-1981.12.17). 감리교 전통에서 기독교 환원운동에 전념하며 고독한 길을 갔다.


30년 재직하면서 아주 늦게 자각한 또 한 사조가 있다. 이는 시대를 앞선 목회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헌신의 발로였다. 기독교 주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을 뿐 이들의 공헌은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감리교 내에 ‘기독교 환원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석기, 강명석 목사 등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들이 온갖 교파를 넘어 그리스도에게로의 환원을 주창했다.

이들 사상은 의당 누혈의 목회자 이용도와 잇대어 있을 것이다. 당시는 교파적 기독교가 대세인 상황이었다. 교파에 의지하여 선교를 해야 살길이 열리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교파적 기독교가 민족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일찍 자각했다. 유학파, 감리교 목회자란 후광을 걷어차고 이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것이다.

신학자 이신 역시 감리교 전도사로 시작했으나 이들 선배를 만나 ‘훤원 운동’에 몸 담으며 고독한 길을 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 환원 운동은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겠으나 당시 이들은 이 길에 생명을 바쳤고 가족마저 희생시켰다. 우리가 토착화를 말함에 있어 이런 그리스도, 이런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과 사변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못난 짓을 해도 교회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 정신- 그것이 하느님 나라 사상이든, 묵시적 인자 사상이든 혹은 역사적 예수의 지혜이든지 간에-에 입각하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에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 5 >

이렇듯 세 사조가 공존하며 지난 백년 남짓한 한국 신학계에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저마다 어느 한 사조에 속하여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비판을 앞세우며 자기 영역에 갇혀 세월을 보냈다. 한 노학자는 이들 세 사조를 자유주의, 진보주의, 복음주의라 개념화 했지만 일리는 있되 전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뜻인 까닭이다. 지금껏 이 세 흐름과 옳게 만나지 못한 채 이들을 일개 ‘-주의’로 이해했으니 비극이다. ‘-주의’로서의 세 사조는 모두 서로를 냉대했고 함께 여성에 무지한 한계를 자체속에 노정한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 문제를 날 것으로 관심할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현실과 조우하되 그를 신학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향후 토착화는 세 흐름의 본질을 꿰뚫어 하나로 녹여내는 치열한 논리와 열정 그리고 함께하는 마음을 요구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신학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바꿀 수 없다. 신학보다 큰 담론을 말하는 학문이 없으나 누구도 신학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 현실에 가슴을 칠 일이다. 향후 교파의식 역시 필자에게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감리교 신학 속에 담겼던 세 요소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해 자신 속의 보고를 내다 버린 탓이다.

이웃종교들, 온갖 이념들이 기독교 근원과 마주할 때 모두가 하나 되는 교파 초월적 신학, 큰 기독교를 기대할 수 있겠다. 이를 필자는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그리고 이후 교회라 불렀고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에서 이런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수년전 필자가 문화신학자들과 『한류로 신학하기: K-Christianity』란 큰 책을 펴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 6 >

이보다 앞서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가 말한 3개의 ‘오직’ 교리를 달리 구성할 것을 제안했었다. 중세를 극복하여 근대를 열어젖힌 동력이었으나 근대(자본주의)와 짝하면서 이 셋이 중세의 면죄부만큼 타락했으며 시대를 타락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 필자는 근대성(자본주의)과의 투쟁을 위해 이 세 가지 ‘오직’ 교리- 믿음, 은총, 성서- 를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이라 달리 풀었다. 믿음을 고독으로, 은총을 저항으로 그리고 성서를 상상력의 보고로 달리 개념화한 것이다.

▲ 이정배·이은선 교수는 명예퇴직을 하고 강원도 횡성에서 각각 현장아카데미와 신연구소를 마련하고 토착화신학에 매진하고 있다. ⓒ한겨레 조헌 기자


떼거리 군중 속에서 신독의 삶을 구했으며 늦게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하늘 은총을 세상저항의 동력이라 여겼고 성서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상상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웃종교들과의 공존하는 세상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을 은총이라 하겠고 그리고 깊이로 침잠하는 환원의식을 고독이라 명명해도 좋겠다 여긴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담은 글을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발표한 바 있다.

< 7 >

한편 여성신학자 이은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유교) 고전에서 배운 3개의 개념인 聖(성)·性(성)·誠(성)을 갖고서 나름 치열한 토착화 작업을 수행해 왔다.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재구성, 곧 여성신학적 차원에서 토착화 논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넓게는 기독교와 인문학간의 대화의 장을 펼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학적으로 위 세 개념들은 저마다 신론, 기독론 그리고 성령에 해당된다. 이를 인문학적 언어로 풀면 통합성, 타자성 그리고 지속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세 개념들은 모두 여성적 가치들로서 역사 속 남성들에게 많이 낯설 수도 있겠다. 체화된 한국적 여성의식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종교 보편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든 것과 관계하는 존재로서, 예수는 여성이 남성의 타자이듯 신의 타자성으로, 그리고 성령은 모성을 통해 경험하듯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지속성)으로 재언표 된다.

하지만 이은선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들 각각을 종교, 정치 그리고 교육의 차원에서 설명했고 셋의 한몸 짜기를 통해 토착화 과업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으로는 성과 속의 합일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유교의 일치(대화)일 것이며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서구(미국)와 중국문명(유교)를 함께 극복하는 길이라 하겠다. 이런 작업은 역시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소개되었고 그곳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결국 앞서 말한 환원운동과 저항운동 그리고 공존능력 간의 통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셋은 필자의 개념들,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과도 짝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믿음, 은총, 성서의 인문학적 재해석이라 해도 좋겠다. 이로부터 코로나 이후 시대 기독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8 >

이상에서 토착화론에 대한 짧은 단상을 소개했다. 압축적인 글이라 질문이 적지 않을 것이며 의심도 생겨날 수도 있겠다 싶다. 수많은 내용을 덧붙인다 한들 질문이 사라질리도 없고 의심 자체가 소멸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가 주장한다고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토착화 논의는 쉽지 않고 미정고로서 존재할 뿐이다.

주지하듯 은퇴 후 필자는 이은선 교수와 함께 강원도 횡성에 <현장 아카데미>을 열었다. 지난 주 한겨레 ‘휴심정’에 소개되었듯이 중세 수도원 전통을 따라 학문과 영성 그리고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토착화 연구를 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방향에서 우리 부부는 신학적 동지로서 통합적인 토착화 신학에 전념할 생각이다. 홀로 할 수 없기에 소장학자들의 뜻 또한 모아지기를 소망한다. 이 작업을 위해 조만간 ‘한국 신(信)연구소’가 출범할 것이다.

7월 중으로 예상하는 바, 이 시점에 맞게 몇 권의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가제)와 『동북아 평화와 聖(성)·性(성)·誠(성)의 여성신학』이 이은선의 이름으로 출판될 것이며, 필자 역시 『다석의 귀일신학』을 선보일 생각이다. 노동과 영성을 위한 연구와 실천도 별도로 계획 중에 있다.

실로 ‘다른 기독교’를 절실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작업을 위해 기꺼이 우리들 남은 시간과 여력을 바칠 작정이다. 이를 위해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이 그립다. 신학마저 각자도생의 작업이 될 경우, 우리들 미래는 더욱 볼품없어 질 것이기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7월 어느 날 우리들 책 한 권이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5.18 40주년 광주 아픔을 새기며 동시에 한겨레신문 1만호 출간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에큐지에 이 글을 보낸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영모의 귀일신학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알라딘: 유영모의 귀일신학


유영모의 귀일신학 -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지은이)밀알북스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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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500쪽


책소개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재정리한 책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목차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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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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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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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바치며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룬 부분은 다석에게 그만큼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종교는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향 2020-12-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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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유영모의 귀일신학, 이정배지음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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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15일 (수) 08:05:41
최종편집 : 2020년 07월 16일 (목) 09:06:35 [조회수 :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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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유영모의 귀일신학
 

 

지은이 이정배

펴낸곳 신앙과지성사

값 30,000원

ISBN 978-89-6907-235-1 93230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내며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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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현암사, 1990)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강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歸一神學)으로 바꿔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서구와 변별된 차원에서‘ 귀일’이란 말에서 찾곤 했으나 아직까지 이 주제를 사용한 책이 출판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다석이 구술한『 다석강의』가『 귀일신학』이란 이차적 언어를 갖고서 재탄생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귀일’이란 말도 다석이 즐겨 쓰던 용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귀일신학』이란 제목은 필자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귀일신학』 속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을 통해 필자는 다석 사상의 출처 및 세계사적 의미를 밝혔고 귀일신학의 핵심을 서술했다. 이는 오로지『 다석강의』를 엮어 펴냈던 다석학회 회원들, 특히 앞서 다석의 생각을 밝혀준 박영호 선생님, 정양모 신부님의 덕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여 두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과『 빈팅한데 맞혀놀이』(동연, 2011)가 그것이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김흥호 선생님과 함께 펴낸 책도 있었다. 여러 학자들의 글 모음집이었던『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출판사, 2002)이 그것이다. 다석을 연구한 필자의 처음 글이 실렸고 선생님과 함께 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연구서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선 두 책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책 제목들 또한 모두 다석 고유한 언어에서 비롯했다. 앞의 책에서 필자는 다석 사상을 서구의 종교다원주의 사조와 대면시켰고 다석을『 천부경』(天符經)을 매개로 동학과 연결했으며 함석헌, 김흥호로 이어지는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일본 교토학파의 그것과 견주고자 했다. 나중 책에서는 다석사상을 통해 서구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과 대화하되 그 한계를 밝혔으며 유불선을 회통한 귀일신학의 골격과 본질을 연구했고 그리고 동서 생명사상의 틀에서 다석을 재조명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금번 『다석강의』를‘ 귀일’(歸一)개념에 근거하여 독해했고 이에 방점을 둔 채 논지를 펼쳤다. 이 과정을 통해『 귀일신학』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다석의 생각이자 그분 직계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일 뿐 그 이상일 수 없다. 신학교에서 30년 토착화 신학을 가르친 학자로서 다석 사상을 신학적 언어로 개념화시킨 작은 공헌만이 필자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다석강의』를 본격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 대학을 명예퇴직한 이후 다석 유영모란 인물이 학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붙들고 씨름해야 될 영성의 사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를 알수록 동서를 막론한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애시당초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저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한 갈급한 상태에서 다시 손에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읽어 가면서 값진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그를 종종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온 욕망으로서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 간혹 페이스북에 글을 옮겼을 때 제법 많은 이들이 다석이 내리치는 죽비에 정신 차렸다는 답 글을 올려주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글이 모아졌고 오늘 이 시점에 이르렀다. 다석의 글은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결코 읽히지 않았다. 때론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리 쓰인 글들은 흡족지 않았고 폐기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다석강의』를 읽고 정리하는 동안 모처럼 직업적 종교인(신학자)이 아닌 신앙인, 구도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다석을 가르쳐 주신 김흥호 선생님을 많이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 년 초에 세배를 가곤 했었다. 정월 초하루였음에도 선생님은『 다석일지』를 풀고 계셨다. 팔순을 넘긴 연세였지만 스승의 구술 언어를 글로 재탄생 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경이롭게 기억된다.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시간을 바칠 만큼 스승의 말씀이 귀했던 까닭이다. 지난 2년의 삶에서 김흥호 선생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책『 귀일신학』을 두 해 전 탄생 백 주년을 맞았던 김흥호 선생님께 바치고자 한다.

 

『다석강의』를 꼼꼼히 읽으며 새삼 발견한 것은 첫 강과 마지막 강의인 43강이 모두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다석에게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리라. 각 강의의 제목이‘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귀일신학』에서 다석의 사생관과 성령의 삶이란 말로 바꿔 달았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었으되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뜻을 보태면서 말이다. 종교란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죽음 이후의 몸 적 소생이라는 인습적 부활신앙을 다루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믿었을 뿐이다. 죽음을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얼로 사는 삶이다. 얼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삶 속의 부활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들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믿었던 고린도서 저자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삶이겠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종교들이 죽음장사를 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장례식 이후 낯선 공간으로의 이주를 믿으라 권하며 정작 삶 속의 부활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극복)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 믿는 것이 다석이 말하는 부활인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다석의『 귀일신학』이 인습화된 기독교에 던지는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목도하며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뉴 노말’ (New Normal)을 요구받고 있는 중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타 성에 젖은 신앙양식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교회를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의 오만과 성직자의 무능을 목도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역할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교회인지 안식일을 위한 교회인지 되묻기 시작한 까닭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여겼던 종교의 자기반성이 통렬히 이뤄져야만 한다. 축복신앙이 무너졌고 절대라 여겼던 가치가 실종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무너질 것이나 영성으로서의 종교는 영원할 것을 의심

치 않는다. 물론 제도 없는 영성도 위태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제도를 최소화시키고 영성을 깊게 하는 일이 더없이 필요하다. 안식일의 종교화가 아니라 일상의 영성화가 더 화급한 현실이 된 까닭이다. 일상이 없는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켜 교회만을 살찌울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교회의 본래 이름인‘ 에클레시아’ 즉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과감하게 부활시켜야 옳다. 평신도,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독생자의 길을 걷도록 종교가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만인 사제직을 입이 아니라 삶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독(愼獨), 즉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확신 하에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 옳다는 배타성도 자연스레 옅어질 수 있겠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만 바라봤듯, 한국 개신교도 지금껏 미국 교회만을 쳐다봤고 서구 기독교에서 답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들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고 알았다. 코로나 사태로 허둥대는 기독교 서구 문명의 허약성을 목도한 탓이다. 이 점에서 본 책『 귀일신학』은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 아니 종교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위해 본 책이 기여할 바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정년을 4년 6개월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이제 그 시간이 다 지났고 마침내 은퇴시점에 이르렀다. 4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은퇴자로 살지 않았고 나름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며 땅을 일궜고 현장을 찾고자 했다. 김흥호 선생님께 헌정한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정식으로 은퇴의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해야 할 작업이 산적해 있다. 모든 일을 잘 마친 후 여유를 갖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염려하며 주변을 더 열심히 살피면서 살아가고 싶다. 필자가 쓴 다석의 글을 읽고 그때마다 마음을 나누고 평해 주신 여러분들이 기억난다. 이은선 교수를 비롯하여 석준복 감독님, 하중조 장로님, 박정규 교수님, 이면주 목사님, 조용훈 장로님, 김선주 목사님 등이다. 이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을 소개해준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의 이정훈 선생의 수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과지성사’에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일전의『 수도원 독서』에 이어 연거푸 두 번째이다. 본 책의 독자가 얼마나 될지 염려하면서도 출판을 결정해준 최병천 장로께 많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교정을 보아준 권오무 목사님과 직원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바라기는 이 책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다석 강독회 모임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모임이 만들어지면 만사제치고 달려가 함께 토론할 생각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석을 좀 더 체화시켜 멋진(?) 토착화 신학의 골격을 만들어 낼 뜻도 마음에 품고 있다. 다시 한번 말을 주신 다석 선생님과『 다석강의』를 펴낸 다석학회 회원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길을 가다 길이 되라 했으니 애써 이분들이 가신 길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달려가고 싶다. 말에 삶이 실려야 힘 있게 출발할 수 있으리라.

2020년 5월 7일

아내 이은선 교수의 63번째 생일 날

부암동 현장 아카데미에서

이정배 두손 모음

 

차례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2021/06/22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 李萬烈

 한국기독교사연구의어제와 오늘

李萬烈 *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3. 기독교사 연구의 확산

Ⅱ.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Ⅳ. 해방 후 한국기독교사

연구 연구의 진행과정

1.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연구 1. 한국기독교 通史의 출현

2. 선교사들의 傳記 - 해방에서 1960년대까지

3.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 2.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연구 한국기독교사 - 1970년대

Ⅲ.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사 3. 교회사와 국사학의 만남

연구 - 1980년대 이후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출발 Ⅳ. 맺는 말 - 한국기독교사

2.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연구1) 연구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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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된 지 한 세기가 넘었다. 그 동안 한국기독교는 자 기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에 노력해 왔다. 자기 정체성은 주로 두 가지 측면 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기독교가 갖는 핵심적인 진리에 얼마나 접근하고 충 실하려 하는가에 있다. 이 점은 세계 기독교가 갖는 공통의 과제로 자기 정체성의 보편적인 기반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한국기독교만이 갖는 개성으 로서 이것을 성숙시키는 정도에 따라 자기 정체성의 위상이 결정된다. 보편적인 기반 위에서 정립되어야 할 한국기독교이지만, 한국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의 또 하나의 축인 개성은 무엇보다 자기 전통과의 접목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기독교사는 그러니까 보편적인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과 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천착하는 과정이

다.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선교사들의 것도 있지만, 1920년대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in Korea,1832~1910에서부터 시작 된다고 할 수 있다. 백낙준의 연구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전해지고 정착하는 과정이 그려졌던 것이다. 1930년대 선교 희년을 맞아 역사의식이 고양되는 듯했으나 식민지적 상황은 이를 한계 이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해방은 기독교적 전통을 찾는 데에도 절호의 기회였으나, 신사참배로 얼 룩진 한국기독교계는 오히려 분열과 쟁투로 허송하였다. 역사는 오히려 자 기의 과거를 들쳐주는 거추장스러운 어떤 존재로 인식하였다. 그런 속에서 도 해방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현상 이었다. 시대사 및 특수사(분류사)의 인식 단계에서 한국기독교사를 通貫해 서 파악하려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4.19 후였다. 4.19는 의식을 새롭게 깨우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역사를 총체적으로 인 식하려는 작업이 주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1980년대 ‘선교 100주년’을 맞는 의식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새로운 분 위기를 마련하였다. 개교회사와 교단사가 준비되었고, 한국기독교 100년사 를 써야 한다는 논의가 비등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사연 구회’가 조직되었고, 연구 세대와 방법 등 연구 환경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단계를 끌어올린 환경의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그 동안 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 되어 왔는데, 이 무렵에 와서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참여, 국사학의 한 영역으로 접목되었다. 둘째,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개인적인 연구에서 공동 연구나 학회 수준의 연구로 상승하게 되었다. 이 말은 개인적인 연구가 공 동 연구보다 연구의 질이 부실하다거나 반대로 공동 연구가 연구의 질을 담 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자료가, 뒤에서 언급된 백낙준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내 자료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한계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자료 수집이 부진했던 이유는 자료 수집을 위한 경제적인 여건이나 해외여행의 자유가 제약당하고 있었던 상황과 관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연구 방법상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 기독교사가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과 역사학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에는 사료 활용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공동연구는 그 속성상 사료의 발굴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기 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과 문제점과 과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선각자들이 논구한 바가 있다.1) 그들의 이 분야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주제가 이 글이 뜻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글에서는 범위를 조금 넓혀 선교사들 의 업적도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범주에 넣어보려고 하였다. 한국인들의 것 은 크게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되 거기서도 시기상의 특징을 고려, 세분 하였다.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방법론이나 사관, 반성과 과제 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洪以燮, 한국기독교연구소사 (白樂濬博士 還甲紀念 國學論叢, 1955).

―――, 한국기독교사 연구 개황 (신학논단 7, 1962년 10월). 金得龍, 韓國基督敎史 硏究上 惹起되는 問題 (로고스 19호, 1967).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李章植, 韓國敎會史 編纂構想에 대한 提言 (基督敎思想, 1964년 6월호). 朱在鏞, 한국 교회 100년과 그 과제 (기독교사상, 1981년 2월호). 閔庚培,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민족’의 문제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이상규, 韓國 基督敎會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高神大學 論文集 10集, 1982). 金英才, 韓國敎會史 硏究 方法論 (神學指南 199호, 1983년 가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머리글 (한국기독교의 역사 I, 기독교문사, 1989). 金英才, 한국 교회사 연구 방법론 (한국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閔庚培, 한국 교회사의 제문제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연세대출판부, 1993). 이덕주, 한국교회사 연구 흐름과 최근 경향 (감신대학보, 1993년 10월 14일자). 신광철, 한국개신교사 연구사 (종교와 문화 제2호,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1996).

연구사 정리란 으레 선학의 업적을 평가하는 성격을 띄고 있다. 글의 성 격상 이 점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학문적 양심과 객관적 평가는 이런 글 의 생명이다. 그 점을 깊이 의식하였으나 褒와 貶, 添과 削을 공평하게 취했 는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격려에 유의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同學諸賢의 叱正을 기대한다.

Ⅱ.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연구2)

한국기독교사의 연구는 처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와 함께 이뤄졌다.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그들이 한국 선교에 종사하면서 이룩한 것으로 그같은 관심이 결국에는 한국기독교와 기독교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 결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초기에는 한국인들 못지 않게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전개과정 을 살피기 전에 그들의 한국 및 한국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살펴보려 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주로 1930년대까지 의 선교사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겠다.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해방후 50년 한국종교 연 구사, 한국종교학회 편, 도서출판 窓, 1997).

2)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대단히 중요한 분야이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 뤄지지 않은 상태다. 선교사들의 이 방면에 관한 업적은 H. H. Underwood가

1931년에 간행한 BiographyonKorea(이 책은 1930년에 같은 저자에 의해 OccidentalLiteratureonKorea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에 그 때까지의 업적이 거의 소개되어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1.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개항을 전후하여 외국인들은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한국에 관 한 역사와 관찰을 남겼다. 1879년에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 羅約翰)는 HistoryofCorea,AncientandModern을 썼는데, 이는 한 국 선교에 관한 역사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을 앞두고 미국에서는 한국에 관한 소개서가 나왔다. 그리피스(Wm. E.Griffis)의 Corea,theHermitNation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11년까지 9판이나 거듭 출판되어 미국인들의 한국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그리피스는 처음 교육자로서 일본에 와서 동경대학을 설립하는 데에 공헌한 분으로 당시 한번도 한국을 다녀가지 않은 상태에서 그같은 한 국관계 저서를 남겼다. 뒷날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서도 활동하였 기 때문에 그의 저서 또한 선교사의 한국 인식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로스와 그리피스의 저서는 당시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에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그 뒤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 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선교적인 필요성과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이루어졌 다. 이들 업적 가운데는 뒷날 한국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없지 않다.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한국에 관해

남긴 저술들을 간단하게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은 한국 언어와 문자에 관한 소개서를 남겼다. 로스(J. Ross, 羅約翰)가 Korean Primer(1877)를 통해 영어로 처음 한 국어를 소개하였는데, 이 책은 한국어의 기본문장 얼마를 골라 한글로 쓰고 거기에 대한 발음을 영어로 그 밑에 쓰고 그 뜻을 풀이한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거의 서북지방의 어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로스에게 한국어를 소개한 사람이 평안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885년 4월 5일에 입국했던 언더우드(H. G. Underwood, 元斗尤)는 한영자전 (Korean-English Dictionary, Yokohama, 1890)과 English-Korean Dictionary (Yokohama, 1890) 및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Yokohama, 1890) 등 한국어 사전과 한국어 소개서를 남겼다. 게일(J. S. Gale, 奇一)이 辭課指南을 펴냈고 Korean Grammatical Forms (Seoul, 1893)와 한영대자전(A Korean English Dictionary, Yokohama, 1897)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 뒤 서양인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큰 도 움이 되었다. ) 그는 존 번연의 The Pilgrim's Progress를 天路歷程으 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金萬重의 九雲夢을 영어로 번역하여

The Cloud Dream of the Nine (London, 1922)라는 제목으로 간행하 였다. 베어드 부인(Annie L.A.Baird, 安愛理)은 Fifty Helps for the Beginner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Seoul, 1897)를 써서 한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한국어 습득에 도움을 주었고, 그의 남편 베어 드(Wm. M. Baird, 裵偉良)도 An English-Korean and KoreanEnglish Dictionary of Parliamentary, Ecclesiastical and Some Other Terms (Seoul, 1928)를 저술하는 한편 한국어 및 한국문자에 대 한 논설도 써서 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4) 이러한 사전과 어학서 들은 한국에 처음 오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안내서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경험담을 틈틈이 남기면서 한 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는 서책도 간행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처음 내한 하였으나 뒷날 외교관으로 더 오랫동안 활동한 알렌(H. N. Allen, 安連)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KoreanTales(1886), Korea,FactandFancy (Seoul, 1904), ChronologicalIndex(Seoul, 1901), ThingsKorean (New York, 1908) 등을 남겼는데, 특히 ThingsKorean은 알렌이 선교 사와 외교관으로서 한국에 머무르는 중에 보았던 한국의 풍물과 일화 등을 그린 것으로, 비교적 먼저 입국하여 자신이 목격한 바를 통해 한국을 해외 에 소개하는 데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언더우드는 The Call of Korea(New York, 1908) )와 TheReligionsofEasternAsia(New York, 1910)를 남겼는데, 특히 TheCallofKorea는 자신의 초기의 선교 경험담을 기록한 것으로서 초기 한국 기독교사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 다. 언더우드는 그 밖에도 각종 잡지에 한국과 한국의 선교를 소개하는 글 을 많이 기고하였는데, 그 중 선교 보고서 형식의 글들은 당시의 선교사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 그러나 초기 선교사 중에서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은 한국에 관해 공개적으로 글을 발표한 것은 거의 보이 지 않는다. 그가 발표한 글은 주로 복음 선교사로서 한국의 복음화에 관한 것들만 보이고 있다.

클라크(C. A. Clark, 郭安連)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서 1902년에 내 한하여 초기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승동교회당을 건축하는 등 선교와 목 회 및 문필 활동에 주력하였다. ) 클라크의 강연 원고 중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에 관해 발표한 것이 있는데, 이는 그의 사후에 ReligionsofOld Korea (Seoul, 1961)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21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선교학으로서 처음 강의한 것이며, 1929년에 다시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 와 연합장로회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보완되었고, 그 뒤 시카고의 장로회신 학교와 뉴욕의 어번(Auburn)신학교에서도 강의한 것이라고 밝혔다.8)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인 불교와 유교, 도교를 비롯하여 모하메드교와 일본 신도, 보천교, 단군교, 천도교 및 샤머니즘을 다루었으며, 기독교의 한 국 접촉도 다루었다. 그는 이 책 제 7장을 ‘고대 조선과 기독교의 첫 접촉’ 으로 설정하고 고대에서 천주교의 박해까지 다루고 있다. 그는 기독교와의 첫 접촉을 삼국시대에 한국에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고든(E. A. Gordon)의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히 고구려에 처음 불 교가 들어왔을 때 세워진 두 사찰 중 이불란(伊弗蘭, Ibullam)이라는 이름 은 외국어에서 음역(transliteration)된 말로서 그 뜻을 알 수 없고, 성경 의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Ephraim)이 중국문자로 그렇게 표기되었을 것이 라는 점을 들어 기독교와의 연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9) 미국계가 대부분인 초기 선교사 중에는 영국계 출신으로 캐나다 토론토대 학 기독교청년회의 파송을 받아 내한한 게일이 있는데, 그는 문필 활동을 통하여 한국 선교에 특이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한국의 언어를 연구 하고 문학작품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도 앞장 섰던 분이다. 그는 내한한 지 10여 년 만에 한국을 보는 신선한 감각으로 19세기말의 한국 상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그려 놓고 있는데 KoreanSketches (New York, 1898)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쓴 TheVanguard (New York, 1904)는 일종의 선교 소설로서 한국교회 초기의 장로의 한 사람이었던 고 찬익의 개종 실화를 비롯하여 한국 북부지방 선교의 이면사를 그린 것으로 선교 초기의 역사를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10) 그는 또 짧은 글이긴 하지만 1907년 한국 장로교회에서 처음으로 노회(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 한국의 첫 노회 (First Presbytery in Korea)라는 기독

8) C. A. Clark, ReligionsofOldKorea, p.5.

9) ibid.

10) 이 책은 심현녀가 선구자-한국 초대교인들의 이야기(대한기독교서회, 1993) 라는 제목으로 변역, 출판하였다.

교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그가 쓴 KoreainTransition (New York, 1909)은 제목 그대로 20세기 초 전환기의 한국을 그린 것이 지만, 거기에도 그의 선교 활동과 선교 초기의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 놓고 있다. 그가 남긴 한국의 전통과 역사 관계 저술은 KoreanFolk-Tales

(translated from the Korean of Im Bang and Yi Ryuk, London,

1913), KoreanLiterature(Chicago, 1918), TheHistoryoftheKorean

People(Seoul, 1931) 등이 있다. 그 밖에 게일은 선교 잡지 등에 한국의 언어 문자 등 한국의 문화와 관련된 글을 많이 기고하였다.12)

게일 못지 않게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소개한 선교사로서 존스(G. H.

Jones, 趙元時)와 헐버트(H. B. Hulbert, 訖法)가 있다. 존스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비교적 한국 문화에 관하여 폭넒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An

English-Korean Dictionary(Tokyo, 1913)를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한국문자 및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폭넓은 이해를 시도하고 있었 다. ) 헐버트는 처음에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 育英公院의 교사로 왔 다가 뒷날 다시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14) 그가 문필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야욕을 공격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대하여도 한국이 자주독립해 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랬던 만큼 그는 언어를 비롯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한국어 및 한국 문자에 관하여 깊은 관심15)을 보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에 관해서는 TheHistoryofKorea(Seoul, 1905), ThePassingofKorea (London, 1906) 등의 저술을 간행하였는데, ThePassingofKorea는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당시인 대한제국 종말의 역사를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밖에도 헐버트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관해서도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16)

초기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분들이 한국 사회와 한국 선교에 관해 남긴 글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17)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을 알게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또 한국에 오지는 않았으나 선교본부 등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선교와 정치 상황 등에 관해 남긴 글들도 많은데, 이 또한 당시의 상황을 일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18)

14) 헐버트에 관해서는 윤경로의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활동과 한국관(한국근대사 의 기독교사적 이해, 역민사, 1992) 참조.

15) 헐버트가 한국어 한국문자에 관해 글들은 The Korean Alphabet

(1892, 1896)를 비롯하여 Romanization Again (1895), The Itu (1898), The Korean Language (1903), A Comparative Gramme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 (1906) 등이 있 다.

16) 그가 잡지 등에 기고한 한국에 관련된 글 중 앞에서 언급한 한국어 및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Korean

Poetry(1896), Korean Proverbs(1896), An Ancient Gazetteer of Korean (Yo-ji Song-Nam)(1897), A Vagary of Fortune, A Korean Romance (1901), Korean Folk-Tales(1902), Omjee the Wizard(1925), Korean Reforms(1895), The Mongols in Korea(1898), The Enfranchi -sement of Korea(1898), Korea, The Bone of Eastern Contention (1904), Japan's Object Lesson in Korea(1908), Japan and Isothermal Empire(1916), Japan in Korea(1920), Korea(1899), Korea and its People(1899), Origin of the Korean People(1895), The Rise of the Yangban(1895), National Examination in Korea(1923), The Geomancer (1896), Russo-Japanese War and Christian Missions in the East (1904), Japanese and Missionaries in Korea(1908), Korean Inventions (1899), Korea's Opening by Rail(1904), Korean Art(1897), Korean Vocal Music(1896), The Face in the Mist(1926).


2. 선교사들의 傳記

20세기에 들어설 즈음이 되면 한국에 왔던 1대 선교사들 중에는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있었다. 유족들이나 선교회에서는 그들의 전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이 전기들은 전기 주인공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의 상황과 그들 선 교의 모습을 드러내주면서 선교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들의 전기는 선교 본국의 입장에서 전해주는 한국 교회사의 증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기들 먼저 꼽을 있는 것이 TheLifeofRev.William

JamesHallM.D.(New York, 1897)19)인데, 그의 부인 R. S. Hall이

 

17) Jean Perry의 UncleMactheMissionaryorMoreNewsfromKorea와 TheManinGreyorMoreaboutKorea,C.A.Clark의FirstFruits inKorea(1921), G. T. B. Davis의 KoreaforChrist(1910), Lois H.

Swinehart의 KoreaCalls!(1924), W. G. Gram의 KoreatheMiracleof

ModernMissions(1922), F. S. Miller의 OurKoreanFriends(1935), Daniel L. Gifford의 EveryDay Life inKorea(1898)와 A forward MissionMovementinNorthKorea 등.

18) 대표적인 것으로 W. E. 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5),

Robert E. Speer의 MissionsandModernHistory:Reportonthe

MissionsinKorea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 (1897), G. T. Ladd의 InKoreawithMarquisIto(1908), A. J. Brown 의 ReportofaVisitationoftheKoreaMissionofthePresbyterian BoardofForeignMissions(1902)와 MasteryoftheFarEast(1919) 등 이 있다.

19) 이 책은 玄鍾書에 의해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선교사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도서출판 에이멘, 1994)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참고로 윌리암 제임스 홀 의 아들 셔우드 홀이 쓴 WithStethoscope in Asia: Korea(McLean, 1978)는 金東悅이 닥터 홀의 조선회상(동아일보사, 1984)으로 번역하여 출판

편집한 것이다. 홀(W. J. Hall, 許乙, 賀樂)은 원래 캐나다인이었지만, 뉴 욕 빈민가에서 활동하면서 로제타를 만나 약혼하고 그녀를 뒤따라 1891년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평양에서 개척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과로로 1894년에 돌아갔다. 홀에 관한 영문판 전기가 출판되던 해에 한국에서는 이 를 부분적으로 발췌, 번역하여20) 국문 허을의원젹, 賀樂醫員史蹟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그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그가 남긴 편지나 글들도 상당히 모아 간간이 첨부하였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홀과 관련을 맺었던 당시 생존 인사들의 홀에 관련된 증언을 남겨 놓고 있어서 교회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21)

캐나다인으로 1893년에 교단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독립선교사로 내한했 던 매켄지(W. J. McKenzie, 梅見施, 金世)에 관한 전기로서 ACornofWheat ortheLifeoftheRev.W.J.McKenzieofKorea(Toronto, 1903) 가 있다. 매켄지는 소래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동학군이 소래로 진군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가졌던 총들을 부셔버렸고, 관군이 동학군을 찾아 처단 하려고 했을 때에는 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선교사이기도 하다. 이 전기 는 그가 한국에서 고독하게 돌아간 후에,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와서 원산에서 평생 독신으로 선교활동에 종사한 그의 약혼녀 맥컬리(E. A. McCully, 李愛理施)가 쓴 것이다.

내한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왔던 복음선교 활동을 전개한 선교사는 아펜젤 러와 언더우드인데, 이들이 1902년과 1916년에 각각 돌아가게 되자 그들의 전기가 편찬되었다. 아펜젤러의 전기 AModernPioneerinKorea, The LifeStoryofHenryG.Appenzeller(New York, 1912)22)는 일본에 와서 하였다.

20) 이성삼, 賀樂醫員史蹟 해제 , 賀樂醫員史蹟(홀 연구회 편, 1992).

21) 여기에는 노블, 마펫, 존스, 올링거, 노병선, 김창식, 오석형 등의 편지들이 보 인다.

22) 이 책은 한국에서 그의 내한 100주년을 맞아 필자가 번역하여 그의 자료와 함께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아펜젤러(1985, 연세대 출판부)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면서 Corea,theHermitNation(1882)을 출판하는 등 한국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그리피스(Wm. E. Griffis)가 쓴 것이다. 이 전기 집필을 위한 자료는 아펜젤러의 부인이 수집하였고, 그 일부가 뉴 욕 유니언신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언더우드의 전기 UnderwoodofKorea (New York, 1918)23)는 그의 부 인 언더우드 여사가 집필한 것이다. 언더우드 여사는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 교사로 내한하여 8세나 연하인 언더우드(元杜尤)와 1889년에 결혼하였고 궁중의 전의로도 활동하였다. 그녀는 문필에도 능하여 한국의 풍물과 선교 상황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24) 언더우드가 돌아간 후 그에 관한 行狀류의 글은 게일(奇一)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25) 이 중 백낙 준이 쓴 元杜尤博士 小傳은 1934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래 50주년을 맞아 간행한 것을 1959년에는 연세대학교가 ‘창립’됨에 그 설립자인 언더우 드의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재간행하였다.

해방 전에 간행된, 전기적인 성격을 띤 연구서로서 Fred H. Harrington 의 God,Mammon,andtheJapanese:Dr.HoraceN.AllenandKorean -AmericanRelations1884~190626)(Madison, 1944)이 있다. 부제에 서 붙여 놓은 바와 같이, 이 책은 초기에 미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왔던 알렌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해링턴은 알렌 문서와 미국 외교

 

23) 이 책은 필자에 의해,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24) 그 대표적인 것으로 FifteenYearsamongtheTop-Knots(New York, American Tract Society, 1904)와 WithTommyTomkinsinKorea(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905)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글들이 있다. 한편 그녀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의 자매인 Leonora Horton Egan이 쓰 고 그녀의 증손부(曾孫婦)인 Nancy K. Underwood(H. H. Underwood, 元漢光의 부인)가 편집한 LilieinKoreaandContributingCircumstances (1977)이 있다.

25)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역, 언더우드, 한국에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p.359 이하를 참고하라.

26) 이 책은 李光麟에 의해 開化期의 韓美關係 - 알렌 博士의 活動을 중심으로(일 조각, 1973)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문서를 총 섭렵하여, 선교사와 物神이 유입되는 한말에 한국선교 상황도 밝 히면서 일본제국주의 침략 과정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 책은 “1930년대 이후 조선신교사 연구에 현재까지 학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道標를 세웠다”27)고 평가되기도 한다. 3.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편 한국 선교의 연륜이 쌓여지면서 그 역사를 역사적인 기록의 형식이 나 역사 저술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게 일이나 언더우드에게서 이미 보인 것이지만, 그들이 보낸 연례보고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선교잡지 등에 소개된 이 같은 보고서만 하더라도 비단 위의 두 선교사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각 교단의 선교본부의 자료실에는 이 밖의 선교사들이 보 낸 각종 보고서도 보인다. 선교부에 따라서는 선교기념 책자를 간행하는 경 우도 있었다.

선교본부에서는 가끔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남기곤 하였다. 그 가운데는 당시의 현지 사정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한 보고서도 있어서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물론이고 교회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 록 해준다. 거기에는 미북장로회의 총무 브라운(A. J. Brown)의 Report ofaVisitationoftheKoreaMissionofthePresbyterianBoard ofForeignMissions(New York, 1902)와 ReportonaSecondVisit toChina,JapanandKorea(1909) 등이 있고, 역시 북장로회 총무로 있던 스피어(Robert E. Speer)의 ReportintheMissionsinKorea 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1897)과 Reportof Deputation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toSiam, thePhilippines,Chosen,andChina,April-November,1915(New York, 27)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41.

1915) 등을 들 수 있다.

1909년 선교 25주년을 맞아 在韓장로교 선교회에서는 25주년 기념책자 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자에는 복음 선교사업을 위시하여 의료 및 교육사업, 여성선교, 문서사업 등과 재정 상태와 각종 통계를 실었다. ) 이것은 바로 25년간의 宣敎史였다. 1910년에는 또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은 뉴욕의 미 국 감리교 본부가 KoreaQuarterCentennialDocuments라는 제목의 책자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에 관련된 여러 문 제들, 예를 들면 선교의 과정, 기독교 의료와 교육, 부흥운동 등을 열거하였 다.  ) 이같은 책자는 1934년 선교희년을 맞아 미북장로회 조선 선교부에서 간행한 JubileePapers,KoreaMissions,PresbyterianChurchU. S.A.(YMCA, 1934)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부(사)들은 그 동안의 한국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은 데다가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역사의식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된 데 이어 1912년에는 전국적인 총회가 조직되었고, 敎界禮讓이라고도 하는 감, 장 선교지 분할이 이뤄져 어차피 그러한 역사까지 정리해야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 교사 개인들도 개 교회 혹은 선교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

었다.30)

1910년대에 들어서서 펜윅(M. C. Fenwick, 片爲益)이 TheChurch ofChristinCorea(New York, 1911) )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엄격하 게 말해서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가 1889년에 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것을 서술하여 초기 한국인 신자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이 때 감리교나 장로교에 속하지 않 은 독립선교사로서 처음에는 황해도 소래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뒷날 원산 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다. 이 무렵 영국성공회의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는 TheChurchofCorea(1915)를 썼다.

선교사들의 역사의식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역사의 자료를 정리하는 작 업도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클라크(C. A.

Clark, 郭安連) 선교사가 펴낸 DigestofPresbyterianChurchin Korea(Chosen)(Yokohama, 1918)  )로 나타나게 되었다. 편자 클라크는 한국어․영어 회의록 등 당시 이미 한국에서 간행되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초에는 이 책 2장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교리와 교회법의 요약만을 모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33)

이 책은 자료집에 불과하여 엄격하게 말하여 사실의 기록에다 평가와 해 석을 곁들인 전형적인 역사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한국교회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작업이라고는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본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창설 후 각 會 역사와 교회헌법과 禮儀 와 인사의 변천과 각 年 총계를 수합, 편성한 것인데 六大條로 나누고 교회 사전휘집이라 명명”34)한다고 하였다. 그 6대조는 總會史記,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 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목사 명 부휘집 및 교회창설 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이며, 이 밖에 1901년부터 1906년까지의 공의회의 회록을 부록으로 첨부하고 각 조항을 찾는 데에 편 리하도록 목록을 삽입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제1장에 해당하는 ‘총회사기’ 부분으로 여기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경위를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였다.

예수교장로회 선교사가 조선에 처음 건너오던 날부터 시작하여 금일까지 그 해수를 계산하면 백년에 삼분의 일(33개년)이 되었도다. 당초에 교회설립된 형 편을 생각하면 당시는 교회라 칭하는 자 하나와 선교사 거류하는 주택 한 곳에 지나지 못하더니 그 후에 점점 진보하여 일개 미슌회가 성립되었다가 계속하여 미슌회가 성립되며 이에 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고 一轉하여 전국연합노회가 성립 되고 再轉하여는 일개 총회와 9개 老會가 조직되었도다35)

고 하였다. 편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에 관해 언급하였 다. 자료 중 문제가 된 것은 공의회 성립 전의 기록이었는데 이것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부가 1909년에 작성한 선교 25주년기념회의록(theQuarter CentennialReportoftheU.S.A.MissionNorth,1909)에서 초출

(抄出)하였다고 하였다. 그 나머지는 직접으로 장로교회의 ‘고등회의록’(공의 회 노회 총회)에서 수집하여 각 조목마다 그 출처를 명기하였던 것이다. 교회사전휘집이 편찬되기 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1916년)에 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키로 하고 편집위원 14인을 택한 바가 있다.36) 전휘집의 편찬자 곽안련도 14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 전 휘집이 장로회사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밝혔다. 총회에서 거론한 조선예수교 사기는 “본교회의 보통사기로서 그 범위가 광대하여 각 사물을 자세히 기록 할 것”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제 1장의 ‘총회약사’는 ‘특별사’로서, 단지 “교 회정치규례 등 일의 발전 여하만 編述한 것”이며, 이 자료들은 다 각 회록에

 

35) 長老敎會史典彙集, p.1.

36) 14인은 다음과 같다. 마포삼열, 길선주, 이눌서, 김인전, 공위량, 임택권, 업아 력, 박창영, 왕길지, 정재순, 곽안련, 함태영, 함가륜, 정기정.

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등회(총회 노회 공의회 등)가 무슨 일을 의논하며 어떤 모양으로 결정하는 것만 밝히 나타내려고 하였다고 그 저술 동기를 밝 혔다.37)

이 전휘집은 비록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의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역사 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특히 기록의 전거를 일일이 밝혀 놓았 기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요약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곽안련은 뒤에 이 책의 후속편으로서 장로교회사전휘집(朝鮮耶蘇敎書會, 1935)을 간행하였다. 1918년에 간행된 것이 장로교 선교사의 입국에서부터 獨老會까지를 다룬 것이라면, 1935년에 간행된 것은 독노회 때의 사적을 간 단히 언급한 후에 주로 1912년 총회가 조직된 이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 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장로회사기를 상․하권으로 편집, 간행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전자가 선교사의 입장에서 한국 장로교회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후자는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한국의 장로교회사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전자가 주로 교회 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선교사적 시각이 투영되어 주로 장로교회를 위에서 부터 내려보는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라면 후자는 한국 교회의 역사가 밑에 서부터 조망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선교상황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907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대부흥운동에 관한 기록은 소책 자 형태로 많이 남겼다. 일제는 한국 강점 후에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소위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서북지방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 을 해 오던 미국 북장로회에서는 깊은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여기에 대처하 는 한편 미국의 선교본부에서는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여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총무로 있던 브라운(A. J. Brown) 등 은 초기에 일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1919년 3·1운동 후에도

 

37) 곽안련 편, 교회사전휘집, p.2.

선교사들의 보고를 받은 미 본토에서는 그 실상을 알리는 보고서를 출간하 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KoreanSituationI, II(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America, The Commission on Relation with Orient, 1919. 7, 1920. 4)이다.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서술이 본격화되는 것은 1930년대에 들어 서서,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이 성장하고 있던 한국 선교가 희년을 맞게 되 자 이를 기념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이에 앞서 선교사들은 오랜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선교 현장인 한국 선교의 여러 영역을 대상으 로 하여 저술하거나, 혹은 안식년 등으로 귀국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 면서 한국 선교를 그 논문 테마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간행된 저술 들은, 그것 자체가 한국의 선교역사나 기독교사를 연구한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하자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의 특수한 활 동 영역을 연구한 전문 서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의 아들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는 1925년 뉴욕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그 학위논문 이 한국의 근대교육(특히 선교사들에 의한) ModernEducationinKorea (New York, 1926)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간행했던 영한사전과 한국 어에 관한 책들을 보완하여 출판했고, 연희전문학교에 관한 소개서(Chosen

ChristianCollege,SeoulKorea,NewYork, 1925)도 간행하였다.

1919년에 부인과 함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5년까지 봉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 교수로도 활동한 피셔(J. E. Fisher, 皮時阿)는 컬럼비아대 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DemocracyandMissionEducation inKorea(New York, 1928)를 간행하였다. 그는 한국의 현대교육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교육이론을 한국에 소개한 분으로도 알려져 있다. 언더우드와 피셔의 저술을 두고 일찍이 홍이섭은 이렇게 평가했다.

右 二個의 저서는 한국근대교육사의 중요한 문헌임은 불문하고라도, 元漢慶선 생은 조선의 근대적 교육의 시책에 있어 기독교가 지녀온 경과를 兼行한 총독부 의 조선에서의 일본교육을 살피며 교회의 종교교육운동을 논함과, 皮時亞선생은 조선의 기독교 교육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구명키 위한 연구다. 역시 총독부하 의 일본교육의 究明 비판은 물론 기독교 교육의 반성을 구하며 근대 특히 식민지 하의 조선에 있어 정치 경제 전통적 문화와의 연관성을 유의하면서 그것의 교육 과의 관계를 논하고 조선에 있어 지성적인 자유주의와 종교적 威嚴主義 간에 전 개되는 갈등을 새로운 기독교적 종교교육으로 조절할 것을 논하고 있다. 이것이 특히 교육문제를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로되 우리 근대사의 정치 경제 전통적인 문화와 知的인 현대 조선청년(1920년대)의 사상적인 제 조건을 현실적으로 응시 하면서 우리 사회에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이 선교교육을 매개로 해서 여 하히 전달되느냐는 究明에 집결한 皮時亞선생의 정열적이며 정당한 심정이 맺혀 진 이 책은 곧 근대사를 정신사의 입장에서 파악케 하는 좋은 연구로 이대로 초 기에서 1920년대까지의 기독교사를 이해케 한다.38)

앞에서 거론한 바 있는 선교사 클라크는 1908년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 로, 神學指南 편집자로도 활동하면서, 시카고 대학에서 문학 및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앞서 말한 DigestofPresbyterianChurchin Korea(Chosen)(Yokohama, 1918)를 간행한 외에 1930년에는 TheKorean ChurchandtheNeviusMethods(New York, 1930)39)라는 책자도 간 행하였다. 이는 그 전해 그가 시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때의 학위논문이 었다. 이것은 한국선교부들이 1890년 네비어스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취 하기 시작했던 네비어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 으로 보고 이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네비어스 선교방법은 그 선교방법 수립 에 직접 참여했던 언더우드가 그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 것40) 외에는 거의

38)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40.

39) 이 책은 박용규․김춘섭에 의해,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대한기독교서 회, 199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40) H. G. Underwood, An Object Lesson in Self-Support(TheChinese Recorder, Aug., 1900 & Sept., 1900), Principles of Self-Support in Korea, TheKoreaMissionField,June, 1908.

볼 수 없는 것인데 클라크가 이렇게 학위논문의 테마로 설정하여 훌륭하게 소화하여 소개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필자가 그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지만, 1919년 미감리회 소속 으로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감리교 종교교육협회 총무로 활동한 바 있는 레이시(J. V. Lacy, 禮是約翰)는 ReligiousEducationintheMethodist ChurchesofKorea(Chicago, 1929)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190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재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이후에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경신학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쌓 은 쿤스(E. W. Koons, 君芮彬)는 PresbyterianChurchinChosen(New York, 1925)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남겼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의 역사를 쓰려고 하는 시도는 여러 방면에 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 1930년대이 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1934년과 1935년이 한국에 대한 선교 50주년을 맞는다고 하여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들 중에는 자신의 선교활동이나 자기 교단의 선교사 나아가서는 한국 의 선교를 정리해 보려고 하였다. 또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거듭 해온 한국의 복음화 과정에 대하여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보려는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우선 남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원산에서 주로 활동한 쿠퍼(S. Kate

Cooper, 巨布計)가 EvangelisminKorea(Nashville, 1930)를 써서 간 행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개관을 목적으로 한 것 이지만, 기독교복음이 한국이라는 토착문화 속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보 여주고 있다.”41) 이어서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만주와 평북 지방의 선교 활동을 거쳐 청주 지방에서 오랫동안 선교하고 있던 Stanley T. Soltau가

Korea:TheHermitNationandItsResponsetoChristianity

41) 이상규, 韓國 基督敎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高神大學 論文集 제10집, 1982), p.

198.

(New York, 1932)를 간행하였다. 이 역시 초기 한국사회의 기독교 수용 과 그 전개과정을 다룬 것으로 대표적인 연구로 지적된다.42)

1934년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선교 50주년으로 기념하는 해로서 각종 축하행사를 거행하고 많은 기록들도 남겼다. 1930년에 합동한 남북감리교회 는 1934년 6월 19~29일에 50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그 기념행사에서 발표 된 글들을 묶어 WithintheGate(YMCA, 1934)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 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글과 함께 선교사들의 글이 많이 실려 있고43) 와 그너(Ellasue Wagner)의 극본 At the Hermit's Gate도 실렸다.

선교희년을 맞아 선교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활발하였다. 1934년에는 남 감리회 선교사 왓슨(Alfred W. Wasson, 王瑛德)이 ChurchGrowthin Korea(New York, 1934)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1905년 밴더빌 트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해에 남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내한, 송도고보와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에는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1934년부터는 남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봉사하였다. 이 책은 선교 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 선교에 대해 외국인으로서는 최 초로 선교학적인 체계로 접근하여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생산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을 규명함에 네비어스 선교방법과의 관련을 중 시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개화인사들이 기독교를 한국 근대화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근대 교육에 노력하였다고 지적하는 한 편 선교에서는 근로층과 하층민을 주대상으로 하여 파고들었음을 중시하였 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선교의 영역을 점차 상류사회로 확대하여 한국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宣敎史 연구에서 1934년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낸 해다. 미국 북장로회 소

 

42) 이상규, 위의 논문, p.198.

43) 책에 기고한 사람들은 양주삼, 김활란, 신흥우와 E. M. Cabke, W. A.

Noble, R. A. Hardie, J. L. Gerdine, Annie E. Bunker, Mattie W. Noble, H. D. Appenzeller, Sherwood Hall, M. B. Stokes, John Z. Moore, B. W. Billings 등이다.

속의 로드스(Harry A. Rhodes, 魯解理)가 HistoryoftheKoreaMission, PresbyterianChurch,U.S.A.1884~1934(Seoul, 1934)를 ‘편집’하 여 출판하였다. 로드스는 1908년에 내한하여 처음에는 평북 강계․선천 지 방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선임되면서 상경하여 전도, 교수 및 문필 활동을 통하여 문서선교에 큰 공헌을 남겼다.

로드스(노해리)는 이 책의 출판에 앞서 1928년에는 당시 감․장 연합기 관지였던 긔독신보(基督申報)에 17회에 걸쳐朝鮮基督敎會略史(1월 4일 자~5월 30일자)를 연재한 적이 있고, 1933년에는 그것을 묶어 조선기독 교회약사(조선예수교서회)를 간행한 적이 있다.44) 그는 한국기독교사 서술 을 景敎에서 시작하여 천주교를 거쳐 ‘신기독교’(개신교)에 이르렀다. 경교비 를 소개하면서, 영국의 기독교인인 고든(E. A. Gordon)여사가 1916년 5 월 금강산 장안사에 중국 西安의 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방하여 세웠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또 최근 백년 이래로 한국만큼 신그리스도교가 속히 발 전된 곳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40년 동안의 신그리 스도교는 다른 나라 백년 통계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원인을 나

름대로 분석하였다.45)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U.S.A.1884~

1934는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여러 자료를 곁들여 편집한 것으로 사실상 역사 서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에 선교한 개 교 단으로서는 가장 먼저 자기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foreword)에는 이 책의 출판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북장로 회 선교회가 한국선교 25주년을 맞으면서 宣敎史를 간행하기로 하고 1906 년부터는 위원회의 위원까지 지명하는 데서부터 이 책의 간행 계획이 구체

 

44) 이 책은 景敎碑의 연혁으로부터 천주교와 개신교의 수용을 소개하였다고 하면 서, 이 책의 자료는 그리피스(Wm. E. Griffis) 박사가 일본에 와서 편집한 조 선 역사와 선교사들의 일련의 저서와 보고서 및 알렌의 소장자료들이라고 밝혔

다.

45) 魯解理,朝鮮基督敎會略史(16), 基督申報 1928년 5월 23일 5면.

화되었다. 이 책은, 뒤에서 언급할 백낙준의 한국교회 연구를 참고한 듯, 한 국 천주교회사와 만주를 통한 기독교 수용을 간단히 언급한 후 개항과 더불 어 시작되는 선교사의 내한과 북장로회의 선교활동을 서술하였다. 이 책이 북장로회의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선교거점별로 그 활동을 서술하고 각종 통계를 제시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이 책에 이어 선교 75주년을 맞아 노해리는 Archibald Campbell과 함께 공동편집으로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U.S.A.,Vol. II,1935~1959(New York, 1964)를 간행하였다. 이 책으로 미국 북장로 회는 한국 선교의 역사를 나름대로 총 정리한 셈이다.

북장로회의 선교사를 정리한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 Church,U.S.A.,Vol.I,II는 다른 선교부에서 펴낸 선교사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른 교단에서 출판한 한국선교사는 대부분 개인의 학위논 문의 형식을 빌어 개인이 연구,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북장로회의 것은 선 교부가 공적으로 그 정리와 출판을 계획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교단 선교부의 역사 이해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많은 1 차 자료를 비롯하여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뒤에서 언급 할 백낙준의 TheHistoryofProtestantMissionsinKorea,1832~

1910을 답습하고 있으며 거기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시대를 달리하여 선교사들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 업적이 있으

나, 그것들은 다음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Ⅲ.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 기독신자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한국 교회의 성장 속도에 상응하지 못했다. 1920년대,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40여년이 지난 후 에야 자기 역사를 정리하려는 의식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번역되었다거나 일찍부터 전도문서가 배포되어 기독교적인 문화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기독교에 의한 반봉건의식과 반외세의식이 고양되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런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부터 자기 민족에 대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달 은 기독교인들은 전도문서를 만들었고, 기독교를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면 서 자기 전통에 대한 확인 작업도 진행시켜 나갔다. 한말 일제하에 기독교 인들 중에서 민족문화를 중심으로한 국학에 관심을 가졌던 분들이 많았다. 국어학의 주시경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격인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등과 국사학에 관심이 깊었던 남궁억, 최병헌, 이윤재가 기독교인이었고, 안재홍 이 기독교와 관련을 맺었다는 것, 그리고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한국사 를 서술했다는 점46) 등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민족사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 정을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자기 전통에 대한 확 인작업의 하나가 가문의 개종 과정이나 교회의 설립 등을 중심으로한 역사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우선 한국 기독교의 역사서술의 과정을 살피겠다.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출발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에 대한 자기 인식을 나타내는 것은 기독교

46)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를 聖書朝鮮 1934년 2월호부터 연재 하기 시작하여, 1938년 3월호(22회)로 끝냈고, 해방 후 1948년에 단행본으로 묶었으며, 1967년에 이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개제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聖書 立場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전제하고, 성서적 사관을, 성서 는 역사적 本源을 하나님께 구하며,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이 세상은 終末의 날이 오며, 元始의 날과 終末의 날 사이에는 하나님이 통치하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일 뿐 아니라 통치주며, 존재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발전 의 원리가 되고 敎導者가 되며, 그러나 그는 우주 속에 자유의지를 넣었으므로 성서는 인생을 도덕적 책임자로 본다는 것 등이다.

회가 설립되고 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다. 우선 한국인들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공수단을 갖게 되는 것은 1897년 2월 2일과 4월 1일에 각각 창간되어 주간으로 간행되기 시작한 감리교회의 죠션크리스도 인 회보와 장로교회의 그리스도신문을 갖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신문들에는 초기의 교회의 사정을 말해주는 기사들이 더러 있지만 본격적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를 기재했거나 연재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 러나 그런 기사 가운데는 종종 개인 혹은 교회들의 단편적인 역사를 소개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신문(5권 38호, 1901년 9월 19일자)에는셔션생 샹륜의 경력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徐相崙의 개종을 알게 해 주는 서 상륜 자신의 고백인데, 그가 만주 영구에 가서 신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선교사 매킨타이어를 만나 예수를 알게 되는 경위 를 소개하고 있다. 개인의 회심 과정을 그린 글이면서 한국교회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이같은 글은, 그의 회심이 있은 지 20년 정도 경과한 후의 일 이지만 초기 한국교회사 연구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서상륜의 동생 徐景祚 도 神學指南에서경조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 設立歷史를 밝힌 바가 있는데 이 글도 초기 한국 기독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47)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소위 ‘105인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선 한국에 선교사 를 파송한 미주의 선교본부나 선교본부의 관할하에 있는 기관에서 ‘105인 사건’의 만행과 그것이 선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하면서 이를 폭 로하는 글들이 나왔다. 일본과 미국의 선교기관에서 일본의 조선 기독교인 학대에 항의하는 문서들이 간행되었는가 하면, 이승만은 한국교회 핍박(1913) 에서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고발하였다.

47) 서경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神學指南 1925년 10 월호 참조.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쓴 단편적인 글들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하여 간행한 基督申報(1915~1937)에 더러 나타나고 있다. 긔독신보는 1928년에 들어서서 ‘조선기독교 각파의 정세’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각파의 집필자도 소개하고 있다.48) 1934년의 희년을 맞으면서 역사의식이 고양되고 있었는 데, ) 이 때 앞서 말한 선교사 로드스(魯解理)의 조선기독교회 약사를 비 롯하여 조선 기독교 각파의 略史도 소개하고 한국기독교계의 여러 기관의 역사와 한국 신학과 문화의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0) 한국 교회가 자기 역사에 대하여 거교단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게 되는 것 은 1916년 장로회 총회에서 ‘사기편찬위원’을 선정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 2년 후 1918년에 선교사 클라크(C. A. Clark, 곽안련)가 敎會史典彙

48) 참고로 기독신보 1928년 4월 11일 및 4월 25일자에 소개된 필자는, 천주공 교(金翰洙), 장로교회(吳天泳), 북감리교회(金昌俊), 남감리교회(鄭春洙), 성공 회(李源昶), 안식교회(禹國華), 성결교회(李明稙), 회중기독교(柳一宣), 동아기 독교(安大闢) 및 구세군(李建泳) 등이다.

集을 편찬하였는데,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을 영문과 국문으 로 편찬하였다. 이것이 총회사기,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 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 목사 명부휘집 및 교회창설 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연혁과 각종 통계를 넣었기 때문에 이를 장로교회사전휘집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선교사가 편집한 것으로,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을 크게 자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일본 총독부가 식민통치의 필요상 기독교 에 대한 책자를 내부 업무용으로 편찬하였다는 것이다.朝鮮의 統治와 基督敎라는 이 소책자는 190 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 1919년 3·1운 동 직후까지의 기독교 상황을 정리하였는데, 이것은 총독부가 그동안 기독 교대책을 어떻게 세웠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식민지시대의 한국 기 독교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1)

192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인의 한국기독교회사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 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白樂濬(George L. Paik)이 한국교회사 연구로 박 사학위를 받은 데다 그 직후에 한국기독교사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시작된 한국인에 의한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 갔 기 때문이다.

2.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연구

백낙준의 역사 및 교회사 연구52)는 그의 미국 유학시절에 본격화된다. 평 북 선천의 信聖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 천진의 新學書院을 거쳐 1918년에 도미, 미주리주 파크(Park)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에서 신 학과 역사학을 연구한 후 예일대학에서 당시 선교학과 교회사로 이름이 높 던 라투렛(K. S. Latourette) 교수의 지도를 받아53) TheHistoryofProtestant MissionsinKorea,1832~1910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하였다. 백박사는, 과거 신성학교 시절의 은사였고 미국 파크 대학을 소개해 주었으며 그의 귀국 당시에는 평양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尹山溫

(George S. McCune) 박사의 호의로, 1929년 숭실대학 출판부에서 이 논 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가 논제로 했던 한국선교의 역사는 당시, 선 교사상 유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성장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 40여년 남짓 한 역사밖에 되지 않아서 박사학위 논문의 논제로 삼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 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와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교통편이나 자료수집의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한국의 초기 선교사를 훌륭 하게 정리해 냈던 것이다.

이 연구서는 제목이 ‘한국 개신교 선교사’이긴 하지만, 이 연구에서 시도 한 것은 “한국 개신교의 초기부터 1910년까지 그 수용과 확장 과정에서 실 제 일어났던 것들을, 문헌비판적인 확증성이 허용되는 한, 객관적으로 기술, 해석하려는 것”54)이었다. 저자가 선교학자인 라투렛의 지도를 받았고 그의 TheStudyoftheHistoryofMissions에서 제시된 관점이 백 박사의 탐구에 기본적인 골격으로 채택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자 자신이 적 어도 영문판 저서에서는 이 연구가 ‘순전히 선교의 역사’로 단정하지는 않았

다.

53) 홍이섭은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34)에서 “선생님은 …고국에 돌아올 준비로서 학위를 받을 계획으로 각 대학에 적당한 연 구과제가 없는가를 서신으로 문의하였을 때 예일대학의 라뚜렛 교수가朝鮮基督敎宣敎史 를 권함에 同 대학에서 2년간 연찬하여…”라고 하였으나, 백 박사는 1929년에 刊行된 영문판 서문(Preface)에서 “이 연구분야는 원래 예일대학교의 매킨토쉬(D. C. Macintosh) 교수로부터 권유를 받았고, 연구는 라뚜레트 교수 의 지도로 이뤄졌다”로 밝혔다.

54) L. George Paik, TheHistoryofProtestantMissionsinKorea,1832 ~1910, Preface, iii.

그러다가 저자가 1973년 그의 학위논문을 국문판으로 번역해 내면서 기

독교사가 선교사임을 분명히 했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 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 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 미한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종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 런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 한국개신교회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를 外人선교사에 의한 被宣敎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만은 아니된다. )

백박사가, 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의 한 국 개신교사를 포함하여 한국의 개신교회사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천 명한 것은 1973년이다. 1973년 국문판에서는, 영문판이 출간된 후에 나온 書評 중에 “한국측 사료가 결여되었음”을 지적한 것을 두고, 자신은 “이 연구 가 진행되던 때와 곳에서는 본래 여기에 인용한 자료 이외의 한국문헌 입수 는 불가능한 실정이었음”을 밝혔다. 이 反論은 그가 “한국기독교사의 사료, 적어도 그 초기사의 사료는 傳授圈側의 사료를 의거하지 아니할 수 없고 또 그리 하여야 된다”는 논점과도 상통한다고 생각되는데, 따라서 그가 한국개 신교사의 順序的 서술을 傳來史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후학들 에 의해 그것을 收容史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백박 사로서는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백박사는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초기사를 제대로 다뤄야만 후기사도 정 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초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저서가 零星”하다는 판단 하에 한국기독교사로서는 1910년까지 비교적 초기사에 해당하는 이 분야를 연구테마로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의한 것은 ‘국사의 한 분 류사’라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사를 “서구사학가들의 연구방법을 응용”하여 연구하겠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56) 따라서 이 연구는 역사학과 신학을 연 구한 학자가 서구의 역사학적인 방법을 충분히 구사하면서 역사학과 선교학 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생산해낸 업적이다. 이 점은 라투렛 교수가 서문에서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다.

그는 서양사학가의 방법응용에 능숙할만한 훈련을 받았으므로 持久力을 가지 고 자료를 수색 수집하였고, 그 자료의 비판과 해석에는 객관성을 견지할 줄 아 는 기술을 소유하였다. 그 결과는 초기한국개신교의 활동을 기록하는, 이 처음되 는 진지한 시도에 거의 완벽을 備하였다. 이 부분의 역사에 관하여는 다시 연구 에 착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57)

라투렛 교수는 이어서 백 박사의 이 연구를 두고,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 는 저술가나 학생은 백 박사의 저작을 숙독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고 극찬하였는데, 그의 이같은 찬사와 같이, 이 책은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시작 하는 학도들에게 꼭 거쳐야 할 입문서이면서 수준 높은 연구로 하여 한국사 학사에서도 손꼽혀야 할 한 고전으로서 불후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58) 이

57) K. S. 라투렛, 序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iv.

58) 일본의 山口正之가 지적한 이 저술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朝鮮新敎史 書評 (靑丘學叢 第7號, pp.144~146)에서 “朝鮮近代史의 중요한 일부 분을 구성하는 프로테스탄트傳道史에 관한 아카데믹한 名著를 맞이한 것을 깊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어서 그 내용에 관해서는 “백 박사는 조선에 있어 新敎의 전래 접촉기를 서설로 삼고, 성립의 기점을 개국에 두고 開國道程과 신교의 전래와를 불가분의 內的 連繫下에 파악하려는 것이다. 開國史와 新敎傳達史, 환언하면 정치사와 종교사를 상이한 궤도를 달리는 同元體로써 서구문화가 종합적으로 작용한 한 무브멘트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新敎各派의 교구(Mission field) 伸展과 문화시설의 情況을 精確한 사료를 전거로 하 고…명쾌히 논술하였으며, 늘 사회와의 관계에 관점을 두고 근대서구문화의 전달 자로서 선교사의 활동이 반도의 정치 경제 교육 사상에 여하한 변이를 일으키었 는가? 하는 문화현상으로서의 기독교의 가치에 주의를 돌리고 있다.…더욱 저자 는 엄정하여 그 풍부한 사료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半言雙句라도 소홀히 하지 않 았다.…歐文史料는 거의 전부 망라된 감이 있으며…脚註1,574개를 볼 때, 우리 들은 저자의 辛苦를 잊고 그 文獻學的 구성의 美에 황홀하게 된다…”고 극구 칭 찬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 대해 그는 “이 책이 지니는 전면적인 결함이라고 할 것은 조선측의 사료가 일체 묵살된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알바이트가 주로 미국 에서 된 것으로 할 수 없으나, 본국의 자료를 무시하고 如斯한 종교사의 문화적

저술은 또한 선교사에 의한 것이든 한국인에 의한 것이든 간에 한국 기독교 사 연구로서는 학적인 체계를 갖춘 가장 선행적인 연구였고, 이 연구를 계 기로 하여 그 뒤 이 분야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나오게 되었다.59)

백 박사가 이 연구에서 보인 역사적 관점은, 흔히 ‘宣敎史觀’으로 불려지 고 있으나, 1973년 韓國改新敎史라는 국문판이 간행됨으로 자료의 이용이 영문판에서 보여준 약점-이것은 비판자들이 그의 사관을 ‘선교사관’으로 보 려는 전거가 되기도 한다-을 상당히 보완하고 있다. 백박사의 이 저술은 한 국인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원자료를 이용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원자 료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소재처는 어디인가를 알게 해 준 통로적인 구실 을 했다. 그럴 정도로 이 책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필요한 1차적인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말까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선교사들이 남긴 1차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백낙준은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문 과의 행정책임을 맡아 국학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하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 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은 선교희년을 맞아 1934~35년에 각종 행사를 치르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역사문 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조선기독교 50년사(신동아, 1935)를 써서 일반 신자들의 역사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3. 기독교사 연구의 확산

백 박사의 학위논문이 완성된(1927) 후 그것이 아직 간행(1929)되기 직

 

연구가 가능하냐 하는 근본 疑義는 영원히 남는다.”고 하여 그 약점도 지적하고 있다(홍이섭, 앞의 논문, p.434).

59) 앞서 말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기독교사 연구는 대부분 백 박사의 연구 후에 나온 것이며, 뒤에서 언급할 한국인에 의한 연구도 한동안 백 박사의 학문적인 업적을 기초로 하여 이뤄졌지만 그 학문적인 영역과 수준을 능가하지는 못하였

다.

전인 1928년에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관련, 주목할 만한 책 두권이 간행되 었다. 李能和의 朝鮮基督敎及外交史와 車載明이 저작 겸 발행자로 된 朝鮮예수敎 長老會 史記가 그것이다.

이능화의 朝鮮基督敎及外交史는 “한국 기독교의 전개과정을 근대한국의 정세와 국제관계를 통해서 서술”60)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상, 하편 대부분 주로 천주교를 다루고 있고 개신교에 관해서는 이 책 하편 말미에 약간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61) 이에 앞서 이능화는 1923년 東明 에 朝鮮基督敎史를 연재(제2권 21~23호)한 적이 있다. 朝鮮基督敎及外交史 에서 저자는, 그의 다른 저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朝鮮王朝實錄 등의 관찬사료와 문집류 등의 자료를 활용,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자세를 견지하 였다. 그러나 이 책이 1928년에 간행되었다는 것과 이능화가 자료수집에 세 운 공헌 등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 나타난 한국개신교사 관계 기록은 미흡 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능화는 이 밖에도 한국의 여러 종교, 神敎․佛敎․道敎 등에 대한 저술도 남겼으나, 이런 저술들이 그의 자료 정리에 공 헌한 영예만큼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조선예수교장로

60) 신광철, 한국개신교사 연구사 (종교와 문화, 제2집, pp.184~185). 이능화 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 관해서는 홍이섭, 朝鮮基督敎 及 外交史 複印序와 이능화 선생의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김수 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특히 그의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를 중심으로(동아연 구 제4집, 1984)와이능화의 한국기독교 연구 (종교연구 제9집, 1993), 신 광철의 이능화의 종교사학과 한국 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와역사 제4호, 1995) 등 참조.

61) 이 책에서는 개신교와 관련, 하편 14장의 1832년의 귀츨라프의 홍주만 상륙과 관련된 기록, 22장의 ‘쩨네랄 서어맨’호 사건(특히 이능화는 이 배에 승선한 崔蘭軒은 耶蘇敎傳道師이며, 崔蘭軒의 원명은 토마스로 ‘米國人宣敎師’라고 하였으며, 崔蘭軒이라 한 것은 쩨레랄과 음이 비슷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29장의 立約後基督敎傳布狀態에서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의 선교사들은 이 나라들 과 조약이 맺어진 후에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 30장의地獄卽天堂에서 개화 파 인사들이 독립협회 사건으로 옥고(地獄)를 치르면서 개신교도로 개종(天堂)하 였다는 것을 쓰고, 마지막 31장에서朝鮮基督敎各派現狀及事業統計表를 제시 하는 정도이다.

회 제5회 총회(1916년)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키로 하고 편 집위원 14인을 택한 바가 있는데, ) 이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인 곽안련은 선교사들의 문헌을 토대로 1918년에 ‘교회사전휘집’을 간행하였다. 곽안련이 지적한 바, 위원 14인이 편집할 ‘교회사기’는 자신이 편집한 ‘교회사전휘집’ 과는 다른 것으로, 이것은 “본교회의 보통사기로서 그 범위가 광대하여 각 사물을 자세히 기록할 것”63)으로서 이것이 바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啓發時代와 公議會時代, 獨老會時代 등 3시기 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제1편 계발시대(1865~1892)는 토마스(R. J. Thomas) 목사의 한국 연해 접근시기부터 그 시기를 잡고 있지만, 그 전의 천주교의 유래도 다루고 있다. 제2편 공의회시대(1893~1906)는 미국 남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이 1893년 한국에서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고 1901년에는 합동공의 회(장로회공의회)로 개칭하여 1907년 獨老會를 조직하기까지의 역사를 기 록한 것이다. 제3편 독노회시대(1907~1911)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 회)를 조직하는 과정과 노회의 의안들을 쓰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京忠, 平北, 平南, 黃海, 全羅, 慶尙, 咸鏡)의 교회 조직과 전도 환란 교육 자선사 업 및 진흥을 기술한 것이다.

장로회 총회 사기편집위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편집하면서 원 래 1923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1928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할 때, 1912년 총회 조직 때까지의 사실만 수록하고 나머지 총회조직 이후(1912~1923)의 것은 원고 상태로 두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0년에는 이미 수정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未刊된 ‘史記 下卷’의 原稿 )는 몇 부 복사하여 보관하였던 것 같은데, 그 동안 총회사기편집위원 의 한 분이었던 咸台永 목사도 有罫美濃紙에 黑紙複寫된 한 帙의 完成稿本 을 갖고 있다가 6·25동란 중 釜山 피난지에서 東京 한인교회의 담임목사였 던 吳允台 목사에게 전달하였고, 그 원고를 찾고 있던 백낙준이 1965년에 東京의 吳목사로부터 이 원고를 발견하여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백 낙준)를 통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으로 간행하였다.65) 하권은 상권 에 이어 제4편 총회시대(1912~1923)로 하여 편집하였는데, 총론에서 총회 의 설립과 의안, 선교회의 사업, 청년운동 및 시대의 형편을 다룬 후 각 노 회별로 노회설립과 의안, 교회조직, 전도 교육과 환란 및 진흥 등을 기록했

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앞에서 언급한 선교사 곽안련 편집의 장로교 회사전휘집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책자는 상하권 모두 각각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사기가 1923년까지 취급한 데 비하여 전휘 집은 1933년까지 취급하였고, 사기가 각 시대별로 교회 설립과 조직, 각 급 회의의 의안, 전도와 교육, 환란과 자선, 진흥과 이단 등을 기술한 데 비 하여, 전휘집은 각급 기독교 조직의 사기를 비롯하여 헌법과 규칙, 선교 및 교육 사업, 그리고 각종 통계 등을 역사적으로 제시하였다. 전자가 조선 인의 입장이 강조되었다면, 후자는 선교사의 관점과 정리 방식이 적용되어 이룩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인들이 자기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려고 하는 시도는 성결교회 와 감리교회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1929년에는 성결교회의 李明稙이 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를 써서, 성결교단의 역사를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하였다.

1930년 남감리회에서는 자신들의 한국 선교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양주 삼(J. S. Ryang, 梁柱三)이 국․영문으로 된 朝鮮南監理敎會 三十年紀念 p.404)에 보면, 그가 수정완료하고 跋文을 쓴 것이 1930년 8월 20일로 되어 있

다.

65) 백낙준, 緖言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下卷), pp.1~2. 참고로 1928년에 간행 된 것은 첫 책에는 ‘上卷’이라는 표시가 없다.

報(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1930) SouthernMethodisminKorea.Thirtieth

Anniversary를 한 권으로 간행하였다. 미국 남감리회는 1925년 4월에 개 최된 ‘長老司會議’에서, 1926년 10월 16, 17일, 리이드 목사와 헨드릭스 감 독이 한국에 처음 온지 30주년이 되는 날에 한국선교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축하식과 교회사업전람회를 갖도록 하고 축하를 마친 후에 그 기록을 종합, ‘조선남감리교회30년역사’를 국, 영문으로 편찬발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 나 재정 형편으로 기념식은 1927년 9월로 미뤄졌고 소책자의 간행도 지체 되어 1929년에야 원고가 완성되고 1930년에 출판되었다. 編者는 이 책이 역사가 아니며 역사를 저술코자 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역사를 저술 하기에 不少한 자료가 포함되었다”고 밝혔다.66)

이 책은 남감리회가 한국에서 선교한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각 기관의 연혁을 소개하고 남감리회에서 활 동하고 선교사와 교역자의 이력서와 사진, 각종 통계 등을 모으는 한편 ‘조 선남북감리교회통합운동의 내력’도 적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자는 1930년 감리교단 통합에 앞서 남감리회의 역사를 정리한 셈이 되었다. 이 책은 북 장로회 선교사 클라크(C. A. Clark)가 1918년에 저술한 敎會史典彙集 (국, 영문)과 좋은 대조가 되는데, 클라크의 것이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영 문과 국문으로 장로교회 사료를 정리, 두권으로 펴낸 것이라면, 양주삼의 것 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영문으로 남감리교회 사료를 정리하여 한권으로 펴낸 것이다. 이것은 사료집이라는 점에서 이 무렵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 로회사기와 편찬의도상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것이다.

1934년은, 앞의 선교사들의 저술활동에서도 보았듯이, 한국선교 50주년 으로 기념하는 해였다. 그래서 수많은 행사가 있었다. 50주년의 역사와 기 록을 남기려는 작업들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이 해에 장로교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50주년 역사화보를 출판하였고, 鄭仁果는 조선예수교장

 

66) 梁柱三, 朝鮮南監理敎會 三十年紀念報(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1930), 서언 참

조.

로회50년사 일별을 간행하였다. 감리교계에서도 감리교 50년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여류시인 張貞心은 1934년에 朝鮮基督敎五十年史話를 썼다.

일제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에 대 해 전시체제를 강화함에 따라 민족말살 정책을 노골화하였다. 언어․문자 통제정책은 물론 전시사상통일을 강화한다고 하여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하여 거기에 불복하는 기독신자들을 투옥시켰다. 언론활동이 위축되고 1940년대에 들어서면 문필활동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어 갔다. 그런 상황에서 東京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채필근은기독신 문(1938. 8. 16~1942. 4. 23)에朝鮮基督敎發達史를 연재하였고, 조선 기독교회 전도부에서도 朝鮮基督敎會小史(1941)를 편찬하였으나 한국교 회는 역사의식을 회복하기에는 지쳐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 면서, 희년을 계기로 열기를 더해가던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점차 위축 될 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강요된 교단 통합정책은 교파 의식은 물론 한국 기독교 자체에 대한 정체성 의식에도 문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이 그렇듯이, 기독교회도 암흑기에 들 어서고 있었다.

Ⅳ. 해방 후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

해방은 한민족 전체에 새로운 활기를 주었지만, 일제로부터 극심한 핍박 을 받아 굴절의 역사를 감수해야 했던 기독교계에는 새로운 소망과 함께 과 거청산이라는 큰 숙제가 주어졌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분열이라는 큰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역사의식이 제대로 있었다면 일 제하의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훼절한 오욕의 역사를, 한국 교회의 자기 전 통에 입각해서라도 새롭게 점검하면서 뼈를 깎는 회개와 자아반성이 있어야 했으나, 과오를 떠넘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몰역사적인 한국 교회는 이 귀중한 기간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방 공간에서 기독 교회가 민족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기의 철저한 회개 없이 민족을 회개운동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

다.

6․25전쟁이 끝나고 교회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한국 교회는 ‘선교’ 70 ~75주년을 맞게 되었다. 이런 일들로 한국기독교는 자기역사를 더 깊이 되 짚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몇권의 영문으로 된 기독교사’ 외에는 한국 기독교사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다. 교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자기의 교회사 를 가르치려 하여도 마땅한 책이 없었다. 한국기독교 통사를 저술할 만한 첫째가는 학자로는 백낙준이 손꼽혔는데, 그는 연희대학교와 나아가서는 한 국 교육의 책임자로서 투신하게 되어 자신의 학문을 더 발전시키거나 대중 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국기독교 통사가 출현하게 되었고, 신학 전공자들 중에서 역사신학의 한 分流로서 한국기독 교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1. 한국기독교 通史의 출현 - 해방에서 1960년대까지

해방 후 10여년간은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상잔, 남북 이산 가족의 양산 과 교회의 분열 등이 중층적으로 부닥쳐온 시기였다. 이같은 역사 전개는 당연히 역사가에게 자기 시대 역사전개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 다. 역사학도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역사적인 조명으로 답해야 했다. 당시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金良善은 먼저 자기 시대의 當代史로서 답하려고 하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 중의 한분이었던 白鴻俊의 外孫이었고 그의 부친을 이은 목사로서 자기 시대가 안고 있던 민족적 교회적인 문제와 관련,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大韓예수 敎長老會總會宗敎敎育部, 1956)를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회복과 분열, 6·25의 동족상잔과 그런 와중에서 많은 고난과 승리를 경험한 한국 교회를 보면서 저자는 한국 역사와 교회사 상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이 격동적인 사건들을 역사적인 안목으로 판단 하여 기록으로 남기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 이,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 가정적인 환경” 때문에 若冠 때부터 한국기독교 사료수집을 시작하여 해방 때까지 5천을 넘는 귀중 사료를 수장하게 되었 고,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기독교 전래사를 ‘탈고’한 지 오래되었다. 그 런 상황에서 그는 북한으로부터 가져온 일부 자료로써 1948년 기독교박물 관을 창설하였으나 6․25로 그들 사료를 거의 유실하게 되어 기독교사 집필 이 절망 상태였는데, 이 무렵 한국선교 70주년(1954년)을 맞은 한국기독교 연합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의 집필을 의뢰받고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

다.67)

그가 원래 계획했던 것은 한국기독교사를 전래, 포교, 부흥, 수난, 재건 (해방 십년사)의 5권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기독교 통사를 쓰겠다는 몸부림이었다. 그가 해방십년사를 펴낸 것은 계획한 5권의 순서를 바꿔서 “최후의 것을 먼저 내어 놓게 되는” 셈이었는데, 이는 “戰禍로 인한 사료의 결핍”에 대한 우려와 “경험과 기억을 중요사료로” 해야 하는 저자 나 름대로의 고충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관이 거의 현 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대한 사건일수록 완결되지 않고 진행되고 있어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보수주의 신학’이니 ‘자유주의 신학’이니 하는 역사적 용어의 不定性 등 여러 가지 애로 때문에 가능한 한 ‘述而不作’ 의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교회 해방십년사의 시기와 흐름 을 ‘해방과 재건’, ‘수난과 부흥’, ‘영도권 문제와 교파의 분립’, ‘한국신학 수 립의 태동과 교파의 분립’이라는 ‘四大題綱’으로 정하고, 그 네 ‘題綱’을 “‘고 난과 구원’, ‘대립과 화해’란 史觀의 테두리 안에서” 정리하되, “승리자로서의

67) 김양선, 自序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p.33.

교회와 신도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데 주력하면서 이 십년사를 요약 전

개시켰다”고 술회하였다.68)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는 우선 대결과 투쟁의 격동기에 상이한 이해집 단의 주장을 ‘대립과 화해’라는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한 점에서 저자의 역사 관과 용기를 엿보게 해주는 저술이다. 이 책은 사가들이 좀처럼 취급하기를 꺼리는 당대사를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였고, 격동기에 보존하기 어려운 이해쌍방의 문건을 중요한 대목에서 ‘공정하게’ 자료로 제시하려 노력했다는 점과, 기록사료 뿐아니라 경험과 기억을 자료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 선 저자의 역사서술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백낙준․함석헌 이래 확고한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한 기독교인이 없었는데 그런 공간을 메웠다는 점도 내세울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은, 장로교의 분립문제를 서술함에 불편부 당의 입장을 견지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김양선은 이 밖에도 간추린 한국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62) 와 韓國基督敎史(2)-改新敎史(民族文化史大系 Ⅵ,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70)를 서술하여 한국기독교사를 일반 학계에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 였다. 그의 사후에는 韓國基督敎史硏究(基督敎文社, 1971)가 간행되었는 데, 이 책은 “그가 생전에 한국기독교사 개설의 원고를 써놓은 것”인데, “그 의 별세 일주년을 기하여 그의 조카 김광수 목사가 이를 정리, 몇 개의 논 문을 가하여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69) 이 책은 원고상태로 보 면 가장 먼저 쓰여진 한국기독교사 개설서70)일 수도 있으나 출판된 것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이같은 업적에서 드러나는 점은 그의 한국교회사 연구가 한국측의 자료를

68) 김양선, 앞의 책, pp.33~35.

69) 안광국, 머리말 (韓國基督敎史硏究, 기독교문사, 1971).

70) 이 책에서는 목차 중에 -한국기독교사 개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책 에서 그는 개신교이전의 한국기독교에서 景敎와 천주교를 서설로서 다루고, 본문 을 新敎 전래와 開敎의 단서, 개국과 선교사업의 개시, 대부흥의 발흥과 교회기 반의 확립, 행정기구의 확립과 교회의 발전, 3.1운동과 민족교회로서의 성장 그 리고 禧年과 수난의 6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3편의 연구논문을 부록하였다.

발굴하여 활용하기에 애썼다는 것이다. 이 점은 그가 ‘恩師’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백낙준이 해외 선교사의 자료를 주로 활용한 것과는 대조가 되면서 보 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방법을 보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상했던 5권의 한국기독교사 서술이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과 그의 역사 서술에서 전승에 의존한 나머지 고증의 불철저한 점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하더 라도, 아쉬운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양선은 한국 교회사학자였던 것 못지 않게 한국의 고고학과 일반 역사 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학자였다. 그의 사후(1972)에 숭전대학교 박물관 에서 간행한 梅山國學散稿는 그의 이같은 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국사학자로서의 면모는, 그를 계기로 교회사연구에서 한국 측의 사료와 증언이 더욱 중요시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이해된

다.

1950년대는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분열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한국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단의 분열은 외국의 선교학자들에게는 교회성장 을 부추기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아무리 신학 의 정통과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일이라 할지라도, 민족상잔의 기간에 진행 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예 일대학에 유학 중인 全聖天은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연합’을 박사학위 논문 의 주제로 삼아 씨름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 靑山學院을 졸업하고 조 선신학원에서 7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 후 만학으로 프린스턴에 유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예일대학에 진학, 니버(Richard Niebuhr)와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도를 받아 SchismandUnityintheProtestant Churchesof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연구논문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1979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영문 단행본으로 출간되었 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한국 교회 분열의 경향성의 요인을 밝히고 후대 학자들의 연구토대를 마련하고 그들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준비함에 있다”고 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 분열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연합의 전망을 그 분 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세대로서 학문적인 접근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 다. ) 이것은 말하자면 김양선이 역시 분열의 현장에서 그것을 증언하는 심 정으로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김양선이 해방 10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면, 전성천은 한국 교 회의 분열을 한국기독교의 전 역사에서 조명하려고 했던 점이라 할 것이다. 백낙준과 김양선(생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계에는 아직도 한 국기독교의 통사를 갖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 점은 해방 후 일정한 시기 까지 한국기독교가 자기의 역사를 관통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통찰력을 갖 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한 이가 邊宗浩였 다. 그는 일찍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감리교신학을 마친 후 목회자가 되어 1937년경부터 그의 스승이기도 한 李龍道 목사의 전기를 쓰고 그의 서간과 시가를 정리해 왔으며 해방 후에는 이를 모아 전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양의 요한신학교에서 가르친 적이 있고 감신에서 야간부장을 맡은 적도 있어 교수 생활을 했던 지성인이었다. 그가 1950년대가 저물어 갈 무 렵 한국기독교사[개요](心友園, 1959)를 간행하였다. 그는 자신이 전문가 가 아니면서도 이 책을 쓴 데 대하여 이렇게 겸손해 했다.

한국에 기독교(개신교)가 전래한지 75년이 되었는데 그 역사책이 한권도 안 나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물론 영문으로 쓴 책 이나 어느 한 시대만의 국한된 사실을 기록한 책은 몇 종 있습니다). 5년전에 선 교 70주년 기념으로 기독교사가 나올 줄 믿었으나 안 나오더니 이제 75주년에도 또 안 나올 모양이므로 내라도 하나 간단히 써 본다고 쓴 것이 이 적은 책자입니 다. … 이 책은 학계에 무슨 공헌이 되리라고 해서가 아니고 또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그저 이백만 기독신자 중 한국 교회의 역사가 어떤 것 인지를 조금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 교회의 역사의 어느 일면이라도 알려드리려 는 적은 생각에서 써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시는 이들’에게는 대수로운 글이 못될 것을 알면서도 쓴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이들은 요해하심이 있기를 바랍니

다.72)

그는 ‘선교 75주년’을 맞아도 자기의 통사 한권을 갖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몰역사성을 안타까워하면서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 니지만,73) 이 책으로 그는 한국기독교사 전공자들이 갖지 못한, 한국 최초 의 개신교사를 저술한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경의 말씀대로 나중된 자 가 먼저 되었던 격이다. 이것은 자기 시대를 통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의 소 산이었다.

1960년에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상황은 물론 사상적인 풍토도 많이 변 화시켰다. 민주주의의 사상과 체제를 신장시킨 것은 물론 민족주의를 부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사학계에서도 申采浩․朴殷植 등 민족주의 사학자 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그 연구가 촉진되었다. 그 이듬해 5․16은 4․19로 고양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기대를 상쇄시켰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정권과 유착된 행태를 보여 왔다. 그 때문에 역사의식면에서는 투철한 편이 못되었다. 1960년대의 역사 의식의 수준은 기껏 몇몇 교단사를 편찬하는 정도에서 그쳤고 그 외에는 이 렇다 할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74) 이것이 한국인에 의해 이

72) 변종호, 머리말 (한국기독교사개요), p.1.

73) 이 책은 제1장 ‘기독교의 한국 전래’에서 경교,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를 다룬 이후, 푸로테스탄트의 한국 개교, 개척지 전교에의 三大 방도, 초기 전도상의 여 러 가지 곤란, 한국 교회의 급속 발전의 원인, 한국 기독교회의 三大 전투, 七大 정변과 선교사의 환경 대응, 시국의 변환과 신앙 사조의 추이, 한국교회사상의 三大 부흥운동, 한국 교회 이합운동의 개관, 한국기독교가 사회에 끼친 공헌, 한 국기독교 75년사의 개관, 각 교파史의 개요, 한국 기독교회의 금일과 명일, 양화 진의 가을 아침, 개신교회 사상의 ‘최초’와 ‘제일’(75항) 및 한국교회사 관계 주요 연대표로 된 국판 199쪽의 책자다.

74) 1960년대에 이뤄진 기독교사에 관한 저술을 대력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郭安全․심재원 공저, 한국교회사(대한기독교서회, 1961) ; 박용규, 한국교회 인물사(한조문화사, 1961) ; 김용해, 대한기독교침례회사(대한기독교침례회

루어진 기독교사 연구의 현황이었다.

1960년대에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특이한 것은 과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외국인들의 한국교회사에 관한 연구서가 많이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선교는 막을 내 리고 있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몇 대에 걸쳐 사역하던 한국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선교사들 혹은 선교사의 후예들 중에서는 한국이라 는 사역지에서 얻은 경험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런 이 유로 이 무렵 선교사 혹은 그 후예들이 한국선교사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

다.

먼저 스톡스(Charles D. Stokes, 都益瑞)의 HistoryofMethodist MissionsinKorea,1885~1930(1964)75)을 들 수 있다. 그는 1907년 이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거의 일생을 한국에서 보낸 스톡스(Marion B. Stokes, 都瑪蓮)의 4남으로서 1947년에 예일대학에서 이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나와 1955년에 대전 목원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는 감리 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때부터 남북감리회가 통합하는 1930년까지의 선 교의 역사를 정리했던 것이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950년에 내한, 1977년에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전임한 브라운(George T. Brown, 夫明光)은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사를 정리, MissiontoKorea(PCUS, 1962)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그가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AHistoryofthe

KoreanMission,PresbyterianChurch,U.S.,from1892to1962 라는, 767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의 논문을 축약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두 책으로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역사의 공백

 

총회, 1964) ;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시조사, 1965) ; 한국기독교장로회총 회편, 한국기독교장로회50년 약사(한국장로회, 1965) ; 서명원(이승익 역), 한국교회성장사(대한기독교서회, 1966) ;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선명문 화사, 1968) ; 김춘배, 한국기독교수난사화(聖文學舍, 1969).

75) 이 책은 1964년에 학위논문을 제출한 원고를 영인하여 배포한 적이 있다.

을 상당한 부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강계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해 방 후에 다시 내한, 대구 총회신학교 교장과 계명기독대학 학장 역임한

Archibald Campbell(甘富悅)은 한국 선교 경험담을 쓴 TheChristof KoreaHeart(Falco Publishers, 1954)를 남겼다. 그 뒤 그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북장로회의 후기 한국선교사로서 Historyof 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intheU.S.A.II,1935

~1959(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1964)를 로드스(H. A. Rhodes, 魯解理)와 함께 편집하였다.

시기 선교사의 한국선교사 연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클라크(Allen

D. Clark, 郭安全)가 저술한 History of the Korean Church(CLS, 1961) )와 스웨러(Roy E. Shearer, 徐明源)가 쓴 Wildfire : Church Growth in Korea(1966) ) 두 저서다.

클라크는 그의 아버지 郭安連이 한국선교사로서 기독교사 연구에 많은 공 헌을 남겼던 분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 때까지 발 전해 내려온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한국에서 기독교 청년들과 접촉 하는 중에 한국 교회사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한국교회사 에 관한 책을 찾았으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 이 책은, 백낙준과 노해리의 저서를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에 독창성에 문제가 있지만, 앞의 변종호의 것보다 장․절의 짜임새가 체계적이고 시대 구분도 합리적이다. )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처음 쓴 선교사로서 기억될 것이다.

스웨러의 한국교회성장사도 한국 교회의 성장에 초점을 두고 서술한 통 사적 성격을 지닌 저술이다. 저자는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서 신흥 교회의 성장을 돕는 데 실제로 참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먼저 고백하였다. 저자는 미국 연합장 로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장로교회에 중점을 두고 “10년간을 단위로 하여 교 회의 성장률”을 제시하는 방법을 취했다.79) 이 책은, 그 뒤의 한국교회의 성장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 무렵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교회성장론의 관 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보는 안목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기독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의 하나는 신학과 신앙의 토착화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 적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기독교 전통과 민족 전통을 배척과 단절 개념이 아 닌, 연결과 보완개념으로 전화시키려는 신학흐름”80)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같은 한국적 신학흐름을 土着化神學(indigenization theology)이라고 한 다. 이 문제에 관해 고민했던 분들 중 尹聖範은 基督敎와 韓國思想(대한 기독교서회, 1964)을, 柳東植은 韓國宗敎와 基督敎(대한기독교서회, 1965) 를 써서 이 분야의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이같은 저술들은 한국기독교 사 연구사에서도 길이 남을 것으로 간주된다.

2.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한국기독교사 - 1970년대

1950년대, 한국기독교계에서는 교단간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6·25를 계기 로 외국으로부터 여러 교파와 기관이 들어왔다. 외국 여러 기관과의 관계는

문제,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 변환기에 처한 한국교회.

79) 서명원(이승익 역), 머리말 (한국교회성장사), pp.3~5.

80)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앞의 책, p.83.

한국내의 교단분열을 가속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에는 교단분열이 계속되는 그만큼 교단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교단의 자 기정체성은 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 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역자를 양성해야 했고, 신학교육이 나 교단의 응집력을 위해서는 자기전통을 주입할 수 있는 교단의 역사가 필 수적이었다. 아마도 60년대와 70년대에 교단사의 간행이 부쩍 느는 것은 바 로 이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참고로 교단사는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1981년까지의 것을 연도별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

다.

金庄鎬, 朝鮮基督敎會小史, ) 朝鮮基督敎會傳道部, 1941 김용해, 대한기독교침례회사, 대한기독교침례회총회, 1964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 시조사, 1965 편찬위원회 편, 한국기독교장로회50년 약사, 한국기독교장로회, 1965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선명문화사, 1968 김세복, 한국그리스도의교회 교회사, 참빛사, 1969 이천영, 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970 장희근, 한국장로교회사, 아성출판사, 1970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구세군대한본영, 1975 기독교대한감리회교육국 편, 한국감리교회사, 1975 최 훈, 한국교회박해사,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이성삼, 한국감리교회사, ) 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교육국, 1980 전용복, 한국장로교회사, 성광문화사, 1980 김장배, 침례교회의 산 증인들, 침례회출판사, 1980

오만규, 재림교회사: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광, 1980 안수훈, 한국성결교회성장사, 기독교미주성결교회출판부, 1981 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30년사, 종려문화사, 1981

한편 신학교육이 궤도에 오르면서 한국교회사 과목도 신학교 교과목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러 과목의 세계교회사 강의 가운데 한국교회 사는 거기에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 예 한국교회사 강의가 없는 신학교도 있었다. 강의가 설정된 초기에는 한국 교회사 강의가 구전에 의한 단계를 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교회 내에 전 승되고 있는 구전의 역사가 기껏 강의의 주내용이었다는 뜻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와 일련 의 저작들을 남기는 저술가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은 분들로서 그들에 의해서 한국기독교사는 역사신 학의 위치로 접목하게 된다. 70년대는, 당시의 인식으로는, 80년대를 한국 선교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하는 시기로서 한국 교회내에서 역사의식이 환 기되기도 하였지만, 유신정권의 탄생 등 군사정권이 강화되면서 교회의 예 언자적 사명이 현실비판 대신 역사를 통하여 자기소리를 내려는 경향도 없 지 않았다. 이 점은 일반학계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회사 연구를 본격화하는 작업이 閔庚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한국교회사 연구를 목표로 하고 일관되게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써 왔다. 그런 학문적인 업적을 바탕으로 먼저 한국의 기독교회사(서울 기독교서회, 1970) )를 썼고, 그 2년 후에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를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론 에서 ‘기독교회사’의 개념과 범위를 정리하는 한편 ‘한국 교회사의 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그 이전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촌평을 가하면서 한국교 회사 연구에 임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그의 스승이기도 한 백낙준의 TheHistoryofProtestant MissionsinKorea, 1832~1910을 宣敎史로 보고, 선교사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 宣敎史는 저자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 교 선교의 역사이며 따라서 관점과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 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었다고 하는, 일방성을 가진다.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교회사를 한국 교회를 주제로 해서 취급하는 한국 민족 교회사의 저술로 시종 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史觀에서 비로소 한국 교회의 체 험과 삶이 혈맥처럼 파동쳐 갈 것이며, 우리 자신의 삶과 신앙이 역역히 뭉클하 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면에 남긴 학적 공헌이 공백임을

한으로 여긴다.84)

민경배의 비판은 백 박사의 연구가, 첫째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이 며, 둘째 史料의 선교사 파송국 편중성 때문에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 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 따라서 ‘한국 교회의 체험과 삶이 혈맥처럼 파동’치는 그러한 방면의 학적인 공헌이 될 수 없다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새롭게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시작하 려는 민경배의 연구방향을 감지케 하는 한편 사제간의 긴장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경배의 비판 중에서 백 박사가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 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라고 했다고 한 부분은 어디에 근 거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일찍이 山口正之가 “이 책이 지니는 전면적인 결함이라고 할 것은 조선측의 사료가 일체 묵살된 것” 이라고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러나 山口正之는 이렇게 된 이유를 “저자의 알 바이트가 주로 미국에서 된 것으로 할 수 없었다”고 여지를 열어 놓았다.

1972년에 이같이 민경배의 비판이 나오자 백 박사는 그 이듬해 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를 번역, 출판하면서, 영문판(1929년)과

 

84) 민경배,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 p.18.

는 다른 내용의 自序를 통해, 앞의 첫째와 둘째번 비판에 대해서는 정면 대 응하고, 셋째번 비판에는 답변을 보류한 채 그 답을 독자에게 맡겨 버렸다. 민경배의 비판에 대한 백 박사의 답변에서, 자신은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며,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였고,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山口正之와 민경배에게 함께 답하기 라도 하듯, “이 연구가 진행되던 때와 곳에서는 본래 여기에 인용한 자료 이 외의 한국문헌 입수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민경배가 인용한 사료의 양이나 질을 놓고 볼 때, 백 박사의 연구에 대해 사료편중을 들어 비판할 수 있겠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85)

閔庚培는 또한 김양선의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에 대해서도 “확실히 여 기에도 민족 교회사의 의식이 바탕처럼 깔려 있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 의 ‘민족 교회사’의 잣대로 비판의 기준을 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기에 다 그는 2년 후에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을 써 서 자신의 ‘민족교회론’을 확고하게 세워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가 백 박

 

85) 의문의 근거는 이렇다. 민경배의 저술은 백 박사보다 43년이나 뒤에 간행된 것 이어서, 여건 상 한국측의 사료는 희귀본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섭렵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민경배는 백 박사를 비판할 정도로 한국측의 자료를 섭 렵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가 말하는 대로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제대 로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백 박사가 저술의 하한연도로 잡은 1910년까지의 자료에 국한하는 것이다. 참고로, 백 박사가 인용한 각주는 1,574 개인데, 그 중 프로테스탄트 선교 이전의 것 183개를 제외하고 나면, 1,391개가 되는 셈이다. 그 중 대부분은 선교사들의 보고서나 선교본국의 자료들이고, 한국 쪽의 자료로는 朴殷植의 韓國痛史(1915)나 ‘韓佛條約’(1887), 헐버트의 The PassingofKorea(1906)나 이광수의 “Defects of the Korean Church Today” (KMF, Vol Dec., 1918) 등이 인용되고 있는 정도다. 거기에 비해 백 박사의 개신교사 서술영역(1832~1910)에 해당하는 민경배의 저술(pp. 99~ 231)에는 각주가 458개인데 선교사나 선교본국의 것이 아닌 것은 대략 150여개 가 넘는다. 그 중 1차자료에 해당하는 것은 朝鮮王朝實錄과 일본측 자료, 죠션그 리스도인회보 등 몇몇 교회사 자료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백 박사의 연구서 출판 후에 간행된 제2차자료들이다. 민경배가 인용한 1차자료에 해당하는 것들은, 백 박사가 연구하던 그 무렵에는 공개 또는 간행되지 않은 것이어서, 백 박사가 한 국에서 연구했다 하더라도 이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의 교회사를 ‘宣敎史’로 명명한 것처럼, 그의 역사학도 후학들에 의해 ‘민 족교회사관’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런 여러 관점을 통해서 볼 때 민경배의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는 ‘민족교회사관’이라는 사관을 토 대로 쓰여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스스로 확실한 사관을 의식하면서 쓴 최 초의 通史라고 할 수 있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사상의 의의는 또 있다. 아마도 그는 한국교 회사 연구를 필생의 전공분야로 설정하고 거기에 전 생애를 건 최초의 학자 가 아닌가 한다. 그 전에 백낙준도 평생을 學人으로 살기를 원하였지만 자 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양선 또한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평생을 걸었던 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해 민경배는 시종일관 한 길을 걸었다. 그 결과 남다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韓國基督敎會史는 두 번이나 개정판 을 내었고, 그 밖에도 한국의 기독교(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敎會와 民族(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순교자 주기철 목사(대한기독교서회, 1985),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日帝下의 韓國基督敎 民族․信仰運動史(대한기독교서회, 1991) 등의 저서 와 많은 논문들을 남겨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거목으로서 그늘을 널리 드리 우게 되었다.

1970년대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吳允台를 꼽을 수 있다. 그 는 동경한인교회 목사로서 오랫동안 일본에 있는 한국기독교사 관계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것을 토대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68년에 日語로 韓日基督交流史(한국어판은 1980년 혜선문화사에서 간행됨)를 간행 한 이래 70년대 이후 4권의 韓國基督敎史86)를 저술하여 한국기독교사 연 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때로는 중요한

86) 오윤태의 韓國基督敎會史는 제1권 韓國景敎編을 제1편 東方으로 傳來된 基督敎 라 하여 1973년에 간행한 이래, 제2권 韓國가톨릭史 I編을 제2편 가톨릭 敎會의 傳來와 成長 (1975)으로, 제3권 韓國가톨릭史 II編을 제3편 가톨릭 敎會 의 迫害史와 新敎前史 (1979)로, 제4권 改新敎傳來史를 先驅者 李樹廷編 

(1983)으로 각각 간행하였다.

자료를 싣고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자료 나열과 서술이 중복되는 등 저자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더러 있다. 오윤태는 韓國基督敎會史 제1권을 韓國景敎史編으로 하고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범위를 景敎에까지 확대하면서 이렇게 썼다.

東洋的 惰怠의 정치윤리 속에서 또한 생명의 경외감을 잊어버린 虛無의 철학 속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민족의 등불을 지켜온 이 민족 후예들의 구름기둥은 무엇이었던가? 또한 고대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지배해온 大衆佛敎의 내면에는 무엇이 그 支柱가 되어 왔던가를 살피면서, 극동의 이스라엘이라 할 한국역사의 기독교적 의미를 살피려 한 것이 이 책을 쓰는 의도였다. 使徒 도마의 동방선교 는 서역과 인도와 중국을 거쳐, 이미 예수님 시대의 기독교적 정신과 종교적 관 습이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동화하고, 이것이 오늘과 같은 기독교적 터전 이 되었음을 저자는 看過하려 하지 아니한다.… 이 민족사를 재음미함으로써, 민 족문화의 기저와 그 윤리적 근거와 및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에까지 시야를 넓혀 보려 한 것이 한국기독교사를 다시 쓰는 저자의 욕심이었다. 따라서 我田引水格 의 기독교 우월론에 스스로 도취하려 함이 목적이 아니며, 佛敎와 道敎와 民俗信仰 속에 감추인 신비한 신앙적 근거를 애써 부인하려는 의도도 없었음이 사실이 다. 다만 他宗敎 속에 감취인 기독교적 산 신앙의 실마리를 풀어 오늘의 역사에 연결해 보려는 욕심이 過했던 것만은 고백해도 좋겠다.87)

그의 고백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한국에 전래된 타종교 특히 불교의 大乘佛敎와 彌勒佛信仰 속에 기독교적 요소가 있었다고 보았고, 불교 예술 속에 도 그러한 요소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그가 경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분명하지만, 사료적인 뒷받침이 이를 담보하지 못하 는 데다가 고증하는 자세도 ‘욕심이 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기독교사의 산 증인으로 왕성하게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全澤鳧는 ‘토박이 신앙’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 신학의 한국적인 맥락을 찾는 데에 열중해 왔다. 그는 인간 신흥우(1971),

 

87) 吳允台, 韓國基督敎會史 제1권을 韓國景敎史編(惠宣文化社, 1973), p.18, 저 자의 말.

월남 이상재(1977) 등의 한국YMCA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전기와 한국 기독교청년회운동사(1978)를 쓰는 한편 토박이 신앙산맥 1, 2(1978/ 1982)를 썼다. 그는 또 서울YMCA 총무로서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관여하였던 만큼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를 써서 교회연합운동의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토박 이신앙의 관점에서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행적을 살피기도 하였는데 그 것이 이 땅에 묻히리라-양화진외인열전(홍성사, 1986) 이다. 그가 1980 년대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을 맞아 민경배, 송길섭, 이만열 등과 함께 기독교서회에서 기획한 ‘韓國基督敎百年史大系’의 제1권인 韓國敎會發展史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를 집필하였다.

1970년대에 보인 두 권의 통사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蔡基恩의 韓國敎會史와 李永獻의 韓國基督敎史이다. 전자는 기독교 언론인으로 활동 하였던 저자가 총회신학교에 출강하면서 오랜 동안 한국교회사에 관해 견문 하고 수집하였던 바를, 1972년 2월부터 ‘평신도를 위한 한국교회사화’라는 제목으로 40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연재한 것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88) 후자는 장로회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저자가 평신도들을 위해 쉽 게 써달라는 월간 새생명사의 요청에 따라 7년간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 다.89) 이 책은 해방 후의 교회사-한국교회의 재건과 시련, 분열과 종파운동 및 평신도 신학운동, 토착화운동, 복음화운동 등-에 대하여 다른 통사보다도 상대적으로 비중을 더 두고 집필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두 책은, 두 저 자가 모두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하였고, 신문사와 잡지사로부터 연 재 부탁을 받아 집필을 시작했으며, 평신도를 위해 쉽게 쓰도록 했다는, 공 통성을 갖고 있다. 평신도를 위한 ‘쉬운’ 한국교회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이 무렵에 평신도에게 한국교회사를 가르쳐야 할 정도로 그들이 성장하고 있었 음을 감지할 수 있다.

 

88) 蔡基恩, 韓國敎會史(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머리말. 89) 李永獻, 韓國基督敎史(컨콜디아사, 1978), 머리말.

70년대에는 한국기독교의 시대사와 분류사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 작업들이 엄격한 역사연구의 방법을 거쳤다거나 자기역사에 대한 깊은 고민 을 통해 저술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목회자, 문필가로 찬송가 작사에도 공헌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 등에서 교수 로도 활동한 바 있는 李浩雲의 사후에, 그의 韓國敎會初期史(대한기독교 서회, 1970)가 간행되었다.

김양선의 조카로서 일찍부터 기독교사연구 분위기에 익숙해 왔던 金光洙 는 東方基督敎史(기독교문사, 1971), 아시아基督敎擴張史(기독교문사, 1973), 韓國基督敎傳來史(한국교회사연구원, 1974), 韓國基督敎人物史(기독교 문사, 1974), 韓國基督敎成長史(기독교문사, 1976), 韓國基督敎受難史 (기독교문사, 1978) 등 7년 사이에 무려 6권이나 저술하였다. 그는 이 무 렵 그의 숙부 김양선의 韓國基督敎史硏究(기독교문사, 1971)도 편집하였 고, 長老會神學校七十年史(1971)와 大韓예수敎長老會最近史(1974)도 집필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에 간행된 분류사 혹은 기관사로서는 尹春炳의 韓國基督敎新聞雜誌百年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75)와,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항거한 재건 교회의 역사를 다룬 崔薰의 韓國敎會迫害史(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한 국YWCA50년사편찬위원회의 한국YWCA반백년(1976), 김남식의 韓國基督敎勉勵運動史(성광문화사, 1979) 등이 있다. 이 무렵, 앞에서도 언급 한 것처럼, 전택부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978)와 한국에큐메니칼운 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를 간행하였다.

특히 이 때 기독교여성사와 관련하여, 김현자의 기독교여성운동사(한국 기독교교육사, 1974)가 간행된 데 이어, 이원화의 서울YWCA 50년사(YWCA, 1976)가 출판, 한국여성운동사를 조명하는 시각이 열리게 되었고, 주선애의

장로교여성사(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1978)과 장병욱의 한국감리교여성사(성광문화사, 1979) 등의 교단적인 차원의 여성운동사가

출간되었다.90)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에 이르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이제 겨우 신학 교에서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 강의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 서는 연구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도약이 이뤄졌다. 한국기독교사 에 관한 알찬 통사가 저술되어 교회사의 틀이 접혔고,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겠다는 학자도 나왔으며, 기독교사를 연구, 서술하는 방 법과 史觀도 학적인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80년대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역사연구의 측면에서 준비하는 모습도 보여지고 있었다.

3. 교회사와 국사학의 만남 - 1980년대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지형이 새롭게 변화되기 시 작했다.

우선 정치환경에서 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을 기약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으나, 그 이듬해 신군부의 등장으로 극우 적인 파쇼군부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정치환경의 악화는 일반사학계에서 도 그러했지만, 기독교계에서도 새로운 역사의식을 환기시켰다. 종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인 기독교계는, 그 운동을 통해 역사의 주인

 

90) 1980년대 이후에 가면, 한국기독교여성사 관계의 저술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박순경의 한국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대한기독교서회, 1983)가 여성운동의 신학적인 과제를 제시한 데에 이어, 김영삼의 김마리아(한국신학연구소, 1983) 전기가 간행되었고, 李愚貞이 한국기독교 女性百年의 발자취(민중사, 1985)를 써서 여성운동사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 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에서 여성!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한국기독교여성100년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5)와 배가례의 성결교회 여성 사, 1907~1987(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1987), 김명현․엄마리 편의 민 족사 속의 감리교 여성: 연선교회 월례회 순서 공과(기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1989), 이우정․이현숙의 여신도회 60년사(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 합회, 1989) 등이 간행되었다. 한편 이덕주는 한국교회사의 관점에서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기독교문사, 1990)과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태화기독교 사회복지관, 1993) 및 한국감리교여선교회의 역사, 1897~1990(기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1991) 등을 썼다.

공으로서의 민중을 발견하게 되어 민중신학을 점차 정립하게 되었다. 한편 그 운동의 한계상황과 관련해서는 항상 안보라는 벽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안보는 곧 분단문제에서 오는 것이며 분단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이제는 인권․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통일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계가 1980년대에 들어 서서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통일신학을 말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사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84년에 가톨릭이 200주년을, 개신교가 100주년을 맞는 해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기념사업은 거의 역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많았다. 식자 들 중에는 100주년을 맞아 가장 의미있는 일은 정확한 역사를 쓰거나, 역사 를 쓸 수 있도록 흩어져 있는 기독교사 관계 사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런 교계의 분위기에 따라 개교단 혹은 개교회적으로 역사편찬위 원회를 조직하여 역사를 편찬하자는 의견들도 있었고 실제로 조직하는 경우 도 없지 않았다.

‘선교10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대한기독교서회(총무: 성갑식) 에서 먼저 계획되었다. 기독교 연합기관으로 1890년에 설립된 기독교서회는 1984년과 1990년에 맞을 의미있는 시간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기독교 백년사대계’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과거 100년의 역사를 현 시점에서 재검 토하고 앞으로 선교 2세기를 전망하도록”91) 하자는 것이었다. 1982년부터 계획된 이 사업은 1987년 4권의 책이 출간됨으로 마무리되었다. 全澤鳧가 집필한 韓國敎會發展史를 제1권으로 하여, 宋吉燮이 쓴 韓國神學思想史, 李萬烈이 쓴 韓國基督敎文化運動史 그리고 閔庚培가 쓴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 등 4권이 계획대로 간행되었으나, 원래 계획한 年表는 중도에 좌초 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간행되기 시작한 기독교문사의 基督敎大百科事典도 한국기독

91) 성갑식, 간행사 (韓國敎會發展史,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p.3.

교 100주년을 어느 정도 의식한 듯한데, 이 사전의 간행이 한국기독교사 연 구에 큰 촉진제가 되었다. 이 사전은 10여년 전부터 구상하고 자료수집에 5 년여를 경과하여 그 첫권을 1980년에 출판하였다. 이 사전에는 한국교회사 관계 항목(사건과 인물)이 많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한국기독교사 관계 자 료를 많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수집된 기독교문사의 한국 기독교사 관계 자료는 이 대백과사전의 편찬에만 활용된 것이 아니고 그 뒤 이 방면 연구자들에게 활용되어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문사의 이 자료는 이 방면의 학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공동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92) 한국기독교사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는 1982년 9월 말 한국기 독교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회는 지금까지 개별연구 단계 에 머물렀던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공동연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복간에 힘썼으며, 연구방법에서 역사과학적인 방법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 회원 중에는 역사신학을 전공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반 국사학을 전공한 학도들도 있어서, 이 연구회의 결성으로 과거 역사신학적 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자연스럽게 역 사학적인 문헌비판과 고증을 중시하는 학문적인 풍토가 조성되었고, 회원들 에게는 ‘신앙과 학문’을 같이한다는 동지애적인 유대가 아주 끈끈하였다.93) 이 연구회는 매월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일년 일차씩 한국기독교 유적지를 답사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이 날은 100년전 이 땅에 복음선교사 아펜 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을 기해서는한국기독교사연구 라는 격월간 소식지를 간행하여 회원들의 연구를 발표하는 장을 마련하기

92) 기독교문사40년사편찬위원회, 책에 담은 복음과 나라사랑(기독교문사, 1995),

p.182.

93) 초기 회원들은 이만열, 박효생, 윤경로, 김흥수, 이덕주, 서굉일, 이진호, 조영 렬, 심한보, 서정민, 김형석, 김승태, 한규무 등이다. 이 중 심한보는 자료를 복 간하는 데에 남다른 열성과 희생을 감수하였다.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활발하게 된 데에는 자료의 간행 보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심한보의 공헌 과 기독교문사의 협조는 길이 기억될 것이다.

도 하였다.

이 연구회가 모태가 되어 1990년 9월 27일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창립되었다. 자료의 수집과 공람, 연구인력의 조직화와 연구재정의 확보, 연 구의 체계화와 계속성 유지 등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한국기독 교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출발하게 되었다. 연구소로 발전한 뒤에도 매월 연구발표회 를 계속하였으며 계간으로 소식지를 간행하는 한편 1991년 7월부터는 연 2 회를 목표로한국기독교와 역사라는 학술잡지를 간행, 연구를 발표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 동안 연구회와 연구소에서 복간하여 보급 한 자료들94)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 다. 연구소에서는 또 통사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기독교문사, 1989, 1990)를 간행하였는데 한국기독교사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였을 뿐 아니 라 기독교사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논문선집과 연구총 서 번역총서 등 수십 권을 간행하였다.

한국에서 교회사 관계 연구단체로는 역사신학을 교수하는 학자들을 회원 으로 하여 1960년대에 조직된 韓國敎會史學會가 있는데, 초기에는 학회지를 간행하고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下卷을 간행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설립을 전후하여 최근에는 여러 연구기관과 역사자료실 등이 설립되었다. 그 중 한국감리교회사학회와 한국교회사학연 구원(1997) 및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원장 : 심한보) 등이 저술, 발표, 복 간 사업 등을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신광철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95) 때문에 필자는 먼저 아래와 같이 80~90년대의 업적(단행본 수

 

94) 복간 자료에는 선교사들의 저술 등 20여종을 비롯하여 기독신보 (1915~1937)와 1905년부터 1941년까지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간행한 월간지 The Korea

MissionField 등이 있다.

95) 신광철,한국개신교사 연구사-한국개신교사의 총체적 이해를 지향하며-,앞의 책, pp.191~195 참조.

준)만 나열하고, 이 시기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980년대~1990년대 한국기독교사 관계 단행본96)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장로교신학과 교단의 갈래, 개혁주의신행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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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이 목록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조사하여 저자명 가나다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필자의 분류기준에 따라 개 교단사와 전국적인 규모의 기관사는 수록하였지만, 개별적인 노회, 연회 및 개 교회사와 인물의 전기 등은, 학문적인 업적으로 충분히 간주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조사의 미비로 마땅 히 이 목록에 들어가야 할 것 중에서도 누락된 저작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점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보완토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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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김영재의 이 책은 특히 서론 : 한국 교회사 연구방법론이 주목된다. 이 서론 은 이미 신학지남 (199호, 1983년 가을)에 게재했던 것으로, 한국교회사 중요 저서 및 논문을 소개하고 한국교회사와 교회의 전통, 한국교회사의 과제 등을 기 술하였는데, 한국교회(사)를 대하는 저자의 신학사상과 인품이 잘 드러나는 글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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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성은 우선 1984년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을 맞아 역사의식이 고양됨으로 교회사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 되는 추세를 들 수 있다. 이 무렵에 개교회의 역사가 많이 출간되었다는 것 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데, ‘20년사’, ‘30년사’ 같은 명칭을 붙여 개교회사를 쓰겠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고 하는 짓이다.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나 연혁을 기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을 일관되게 꿰어 그 인 과관계를 정확하게 해야 하고 그런 뒤에 해석과 평가와 褒貶을 가하는 작업 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들의 역사의식이 고양되는 것은 환 영할 만한 일이지만, ‘역사’라는 명칭을 무분별하게 남용하여 개교회사, 그것 도 50년도 안되는 역사를 쓰는 데까지 적용하겠다고 하는 것은 삼가야 할 점이라고 본다. 그럴 경우에는 ‘역사’라는 말 대신에 몇 년‘誌’ 정도로 하면 적당할 것이다.

역사의식의 대중화는 이 시기에 교단사가 많이 출판되었다는 데서도 감지 된다. 역사의식의 대중화가 교단사 편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나무랄 수 없지만, 우리의 경우, 사분오열 분열된 교단이 분열을 정당화하고 분열된 자 기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편찬한다면, 이것은 금물이 아닐 수 없 다. 이럴 경우, 교단사는 분열을 합리화하는 바탕 위에서 자기 교단의 역사 와 전통을 심화시키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교단사가 많아지는 것은 그만 큼 교단의 통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우려를 낳게 된다.

1980~90년대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으로 교회사와 일반 역사학과 의 만남이 본격화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반 역사학을 공부한 이들은 주로 국사학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다가 기독교의 반봉건개화운동, 반외세민족운동 과 독립운동, 농촌운동 혹은 지성운동과 문화운동 등과 관련하여 한국기독 교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다. 과거 한국기독교사가 역사신학의 일 부로서 연구될 때는 때때로 사실을 구명함에 역사학적인 방법이 소홀하거나 무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 구명에 앞서서 해석과 평가를 성급하게 하려는 경향 때문에 잘못된 사실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고 평 가하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또 역사연구에서 지나치게 어떤 사관을 고집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관을 갖지 않고서는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없는 것 처럼 연구자세를 강조하게 되어 역사연구의 기본 핵이라 할 사실 규명을 소 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일반 국사학과 만남으로 그 방법론을 통해 문헌비판과 사실 고증이 한층 탄탄하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 도 없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사연구가 역사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 국사학계가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기독교사연구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복간한 자료들 이 각 도서관에 배포된 것과 관련이 깊다. 기독교 관계 자료의 보급이 학자 들로 하여금 그 방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였다는 뜻이다. 일반대학에서 한국기독교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논문을 윤경로의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일지사, 1990)라고 생각된다. 그 후 강인철, 이진구, 조영렬, 신광철, 한규무, 강명숙, 성백걸 등이 국내에서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들을 이어 일반대학원에서 많은 석․박사 후보생들이 한국기독교사를 학위논문의 테마로 잡고 있다. 최근 해외에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하여 박사학위 를 취득한 이들은, 미국에서 박정신(워싱턴), 박명수(보스턴), 신기영(애리 조나), 최재건(하버드), 이철(보스턴), 이승준(드루), 류대영(밴더빌트), 장 동민(웨스트민스터), 영국에서 고무송(버밍햄), 프랑스에서 김경빈(소르본 느), 일본에서 양현혜(동경대), 조재국(同志社大), 호주에서 이상규 등이 있

다.

일반 국사학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기독교사연구에 투신함으로 한국기독교 사와 민족운동사의 연구분야가 더 밀접해졌다. 특히 한말 일제하의 민족운 동 중 기독교민족운동 분야설정이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학문의 한 분야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실체적 모습에서 민족운동의 한 유파로 서의 ‘기독교민족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윤경로의 일련의 연구나 한규무와 강명숙 등의 연구는 이러한 가능성을 예견시켜 주고 있다. 또 1930년대 후 반부터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한국교회는 완강히 저항 하면서 신앙과 민족의 문제를 일치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연구도 재일 학자 韓晳羲와 구라다마사히코(藏田雅彦) ) 등의 저술과 김승태의 일련의 업적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문제는 한말의 반봉건운동과 일제하의 민족모순을 극복하려는 독립운 동만에 한정되지 않는다. 민족 분단의 문제는 더 심각한 민족문제임에 틀림 없다. 이것은 남과 북의 이념적인 대결에다 기독교 자체가 이념대결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계 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민간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열어 놓고 북 쪽의 형제들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하자면 文益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측에서는 80년대 이래 민간 통일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이를 이 끌어갔고, 자신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입장을 1988년 2월 29일민족의 통 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선언이 계기 가 되어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국 기독교계의 보수진영은 북한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한국기 독교사 연구의 중요한 분야가 되고 있다. 이 분야와 관련, 김흥수의 일련의 연구와 사와마사히코(澤正彦)의 저술100)은 대단히 중요하며, 한국기독교역 사연구소가 편찬한 북한교회사(1996)는 기독교의 통일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날로 그 유용성을 더해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가운데서 한편에서는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10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의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창달 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한국에 단순히 이식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국문화와의 접목을 통해서 이룰 과 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 전통과 만나 형성되고 있는 한국기독교에 대해 먼저 역사학적인 접근과 분석으로 그 정체성(identity)을 찾아야 한 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고민해 온 이덕주는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해석을 결부시킴으로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노 력해 왔는데, 이같은 평소의 생각은 최근 한국의 신학사상을 정리하는 작 업10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역사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은 신학과 종교학 등 인접학문의 뒷받침을 받는 역사연구를 통해서라야만 가능

100) 사와마사히코 저, 김숙자․강문규 역, 남북한기독교사론(原題 南北朝鮮基督敎史論 ; 민중사, 1997) 등.

101) 참고로 필자의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의 전개과정(민족통일을 준비하는 그리 스도인, 두란노, 1994)과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의 역사적 의의 (기독교사상, 1995년 1월호)도 그런 작업의 하나다.

102)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해방후 50년 한국종교연 구사, 한국종교학회 편, 도서출판 窓, 1997).

한 것으로, 각기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했으나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한국기 독교사 연구에 매진해온 서정민과 신광철은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80-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자들이 국내의 기독교 사적 답 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해석의 다각성을 시도하며 기독교 문화재에 대 한 개념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또 해외와의 학술교류를 통해 연구의 시야를 넓히고 학술정보를 원할하게 해 왔다. 1990년 2월과 91년 8월의 한국기독교 사학자들과 일본 교회사학계와의 상호방문 학술교류 를 진행시키면서 한일 양국민에게는 물론 양국교회 사이에도 앙금처럼 남아 있는 신사참배 문제와 3.1운동의 문제를 다루어 양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서 과거사를 해소하기 위하여 먼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감당해 야 할 것인가를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었다. 또 서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 키기 위해 교회사 관계 저술들을 서로 번역, 보급하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

시켜 왔다.103)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최근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선교사들과 재 외한인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초기 선교 사들의 傳記에 대해 언급하였거니와, 최근에 와서 내한선교사들에 대한 연 구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는 김승태․박혜진 공편의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1994)을 펴내어 선교사 연구의 기 초자료를 조사하여 제시한 바 있고, 선교사의 저서 등 평소에 대하기가 어 려운 자료를 복간하고 있으며,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장의 자료를 마이크 로필름화하여 연구자들이 공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104)

 

103)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일본의 유명한 교회사학자인 도히아키오(土肥昭夫) 교 수의 일본 기독교의 사론적 이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와 일본기독 교사(기독교문사, 1991)가 번역되었고, 일본에서는 민경배의 한국기독교사 (1974)와 유동식의 한국의 종교와 기독교(1975), 한국기독교신학사상사 (원제목: 韓國神學의 鑛脈, 1986), 한국의 기독교(1987) 등이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1996, 1997)가 교단출판사 등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10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지 및한국기독교와 역사광고란 참조.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가 오래 전에 학위논문의 테마로 등장하였고, 그들의 전기는 벌써 여러권 출판되었다.105) 또 재외한국인 및 재외한국교회 에 관한 역사도 간행되고 있다. 유동식은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85년사(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1988)와 在日本韓國基督敎靑年會史 1906-1990(在日本韓國基督敎靑年會, 1990) 등을 집필하였고, 김수진은 京都敎會의 歷史 1925-1998(在日大韓基督敎京都敎會, 1998)를 썼다. 멕시코 한인과 한인교회의 역사를 쓰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한 이자경의 노력은 돋보인다.

Ⅳ. 맺는 말 -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연구에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백낙준이 그 연구를 본격화하게 되는 시기를 거쳐, 해방 후 1990 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을 주마간산격으로 살펴 보았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연구사에 나타난 문제점을 짚어보고 앞 으로의 과제를 필자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현단계의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한국기독교의 여명기와 관련, 기독교의 수용과정과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 선교정책, 선교지역 분할 등은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복음의 이입과정이나 한국인들의 입신과정 그리고 그들의 사상 적인 변화 등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느낌이다. 초기사와 관련, 아직도 선교본국의 신학과 신앙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피선교지와 접맥되는

 

105) 예를 들면, 馬布三悅博士 傳記(마포삼열박사전기 편찬위원회, 1973)을 비롯 하여, Allen D. Clark(郭安全)의 AvisonofKorea, 에비슨 전기(연세대학 교 출판부, 1979), 김정현(J. H. Grayson)의 羅約翰 한국의 첫 선교사(계 명대학교 출판부, 1882), 이광린의 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연세대학교 출 판부, 1992) 등을 들 수 있다.

가를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인이 남긴 기록이 영성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자포자기적인 자세보다는, 비록 중국의 것을 번역한 것이라 하더 라도, 당시의 전도문서 등을 분석해서라도 그 접맥과정과 초기의 신앙이 어 떻게 형성되고 있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백 박사가 강조했던 것처럼, 초기의 것을 제대로 밝혀야 후기의 역사와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는 데도 도 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말 일제하의 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그 시대가 격동기였던만큼 기독교 와 대내외적인 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관심이 주어졌 으나, 그러한 민족운동의 기독교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는 거의 무신경하였다. 민족사에 나타난 굵직한 사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 는 데에 몰두하다 보니 당시 교회의 참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민족운동은 복음화된 신자들에 의한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들이 신앙했던 내용이 어떠했던지 를 知悉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 복음의 지방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상태이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아직도 연구가 취약한 시기는 해방 후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 국사학계에서 한국현대사 부분의 연구가 제 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과 상통하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 동시대에 이뤄지 는 대소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규명대신 정치적인 해결이 기독교 내에 횡행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에 연구자들은 그 시각을 해방 후 의 교회사에로 넓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 동안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로 떠오른 것의 하나 는 史觀이다. 요지는, 백낙준의 사관을 ‘선교사관’으로, 민경배의 것을 ‘민족 사관’으로 그리고 ‘민족사관’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민중사관’이라는 것인 데, ) 우선 이 사관들의 확실한 개념이 어떤 것이며, 과연 이러한 도식이 타당하고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이런 점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논급 할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필자는 하나의 일관된 사관으로 한국기독교사 전체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가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된 ‘사관’에서 자신들이 표방했던 ‘사관’ 대로 한국기독교사를 보았느냐는 의문 또한 없지 않다. 꼭 사관 문제를 거 론해야 한다면, 먼저 사관의 개념을 분명히해야 하며, 어떤 사관의 時宜性을 따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당성 여부는 따지기 곤란할 것이고, 또 그 사관 으로 역사를 제대로 충실히 보았느냐의 문제는 따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왜 그 사관이냐는 비판은 곤란할 것으로 본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자료수집과 보존의 문제가 있다. 현재 각 교 단에는 역사연구소 혹은 자료보관소가 있고 초교단적인 것으로 기독교문사 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그리고 기독교학교 소속의 여러 도서관들이 있다. 이런 기관들이 자료를 공개 공람하도록 하고 희귀자 료의 복사본 제작과 자료의 교환 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특히 외국의 한국기독교사 자료 소재처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반입 등은 시급히 해결해 야 할 과제라고 본다.107)

서 언급된 적이 있고, 이덕주가 감신대학보(1993년 10월 14일자)에서 ‘한국 교회사 연구 흐름과 최근 경향’에서 이 점을 거듭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후 이같은 견해가 정설처럼 되었다.

107) 참고로 국내외의 중요한 자료보관처는 다음과 같다.

海外지역 :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CUSA, Philadelphia, PA) / Historical Foundation (PCUS, Montreat, NC) /Methodist Archives (Drew Univ., NJ) / United Church Archives(Victoria Univ. in Toronto, Canada) / McRae Collection (Nova Scotia, Canada) / A. J. Brown Collection (Yale Div. School Lib.) / H. N. Allen Papers (New York Public Lib.) / Lib. of Union Th. Seminary in New York (Appenzeller Paper 등) / National Archives of USA (Washington D. C.) / Lib. of Congress (esp. Manuscript) Div. W. D. C.) / Ohlinger Paper (Fremond, OH) / G. S. McCune Paper (Univ. of Hawaii) / S. P. G. (London) / BFBS Archives (Lib. of Cambridge Univ.) / NBSS Archives (Edinburgh) / British Museum (London) / 靑丘文庫(神戶) 등.

끝으로 앞으로의 과제 몇 가지를 지적하고 끝맺고자 한다. 연구분야와 관 련하여,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2,300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둘째 로 최근의 연구와 관련, 기독교와 인권․민주화 운동과의 관계를 구명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군부독재 시절 해외에 보관한 한국기 독교사 관계 문헌을 속히 반입하여야 한다.108) 셋째,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연합에 관한 연구가 적극화되어야 한다. 특히 선교사들과 폐쇄적인 보수신 학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혔던 소수의 신앙인들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어쩌면 여기에서 한국기독교의 주체적인 모습의 일단을 발견할 수도 있을는 지 모른다. 넷째, 한국신학의 정립과 한국기독교문화의 정립을 위해 한국인 에 의한 신앙, 신학사상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지방 화시대를 맞아 지역교회사와 인물사에 대한 연구를 체계화하고, 수요가 급 증하고 있는 개교회사의 연구와 집필을 위해서는 토론과 훈련이 필요할 것 이다.

끝으로 연구의 협동화와 토론문화의 정착, 연구방법의 과학화가 더욱 필 요하다. 지금까지는 연구와 발표의 일방통행만 있었는데, 이제는 이것을 지 양, 협동연구와 성숙한 토론, 나아가서는 연구방법의 과학화를 통하여 한국 기독교사의 학문으로서의 질을 높이는 데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 : 기독교문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및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 숭실 대 박물관 / 사료관(예장 통합) / 연세대 도서관 / 기타 기독교대학 및 신학교 / 개 교회 사료관.

108) 예를 들면, 東京의 富阪 크리스챤 센터와, 뉴욕의 인터처치 센터에서 수집하여 현재 UCLA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