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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9

동성애에 대한 옹호론 / 곽분이(한성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nam's meditation


동성애에 대한 옹호론 / 곽분이(한성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 동 성 애


남전우 2010. 10. 18. 21:16

http://blog.daum.net/chrisnam1950/57

* 이 글은 진보적인 입장에 서서 동성애를 인정하는 성서해석을 하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옮겨왔습니다. 다만 제가 성서해석에 있어서 상황화와 계시의 진보성에 대한 것을 다른 글에서 설명했는데...바로 아래와 같은 성서해석이 그런 면을 무시하고 구약성서의 현재적 계시성을 부정하는 해석을 하고 있음을 지적해 둡니다.
소돔에 대한 해석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23:17-18, 레18:22, 롬1:15의 이러한 해석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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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입장

곽분이(한성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1. 시작하면서


서구사회는 동성애(Homosexuality)라고 부르는 것을 용인하고 받아주는 사회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서구라파에서는 동성애운동이 적극적이고, 긍정적 측면으로 표면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회는 동성애적인 사고의 대중적인 표현을 ‘나쁜’, ‘죄가 있는’ 혹은 ‘개인적인’것으로 통념화한다. 따라서 오늘날 동성애자들의 정치는 이러한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드러난다. 요즈음 잡지나 영화 그리고 소설과 같은 대중문화 속에서 이와 같은 도전들이 반영되는데 이것이 동성애자들의 정치적인 발언일 때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목표는 그들에 대한 지지뿐만 아니라 대중 인식의 변화를 도모하고, 성적인 억압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성혁명은 대체적으로 20세기 전반기에 발생했다. 그것의 특징은 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 의학의 발전, 여성의 해방, 종교적, 사회적 이완에 따른 성적 태도와 행위의 급변에서 찾을 수 있다.(1) 성혁명의 바람이 우리 사회에서도 불기 시작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조류로 이변해가는 상황에서 특히 동성애를 논한다는 것은 금지된 영역으로 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다만 공개적으로 정치, 사회, 종교, 집단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동성애 그룹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이미 동성애에 관한 담론이 나오고 있다.

이제 교회는 최근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인권문제, 민주화, 통일, 환경문제와 더불어 더욱더 심각해질 성폭행, 성희롱, 여성성직자 임명, 낙태 그리고 특히 동성애 해방같은 문제들에다 서구 쪽같이 인간의 성성(Sexuality)의 문화적-종교적 견해에 도전하는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이제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해석이 요청된다고 필자는 느끼고 있다. 동성애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성서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쳐 왔다. 따라서 더 이상 동성애는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취급할 수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공연한 공동의 대책정책으로 그들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실재적 정의를 명심하여 혼란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Sex)이란 용어는 보통 영어에서 생식 행위를 일컫는데 사용된다. 성성(Sexuality)이라는 말은 남성과 여성으로 우리를 규정하는 행위 전반을 일컬어 사용되어진다.(2) 연합 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인간의 성성에 관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성(Sexuality)이란 각 개인의 개성이 지니는 중심적 차원이기도 하지만 그 개성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자기 이해와 세상과의 관계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3) 오늘날 성차별주의는 선입관을 가지고 여성을 대하는데, 쾌락이나 번식을 위한 남성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이용되는 생식적 성행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성차별주의는 이성애주의로 이끌려지는데 이것은 동성간의 사랑을 선호하는 자들을 열등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이 결여된 자로 보는 사고 방식이다.(4) 그러나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그들의 주장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운동이 70년대에 비해 상당히 진행되었고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동성애에 대한 법정 개정의 측면과 더불어 그만큼 동성애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적 측면에서 신학적 성찰이 요구되며 따라서 교회는 동성간의 사랑이 인간 사랑의 정당한 사랑의 형태가 되는 가능성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발제문을 통해서 동성애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재조명함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고의 전환을 가져 보려는 것이다. 성서는 도대체 동성애와 성에 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2. 성서와 동성애


동성애를 언급한 성서를 골라 해석할 때 우리는 몇 가지 해석상의 원칙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해석상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직접 참여하시고 온전한 인간해방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성서가 쓰여졌을 때의 역사적-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기독교인들의 경험과 사고와 그 문화와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성서 연구에 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성서해석은 인간의 문제점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완전한 개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1) 구약의 입장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신구약에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 그 죄가 바로 동성애라고 이해하고 있다(창세기 18:16∼19:38). 소돔의 이야기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내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동성애의 개념이 가장 희박한 성서 구절이 바로 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두천사가 두도시(소돔과 고모라)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두도시를 멸망시키시기로 결정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더 이상 어떤 류의 죄/죄들이라는 언급이 없다.

소돔에 있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롯(Lot)에게 소리치기를 “오늘밤 너희 집에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겠다.”(창 19:5). 그러나 롯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을 주겠다는 대답을 한다. 여기서 우리나라 번역으로는 ‘상관 좀 해야겠다’ 또 ‘알아보겠다’라고 되어 있으나 ‘안다(Know)’라는 말은 이 히브리 성서(구약)에서는 수없이 썼다. 히브리어 ‘Yada’라는 말은 “to know” ‘안다’라는 의미다. 성의 관계를 직접 하는 것으로는 ‘Yada’라는 말을 7번을 썼다(에덴동산과 같은 곳에서). 7번을 썼을 때도 출산의 목적으로 했을 때였다.(5) 그 도시 사람들은 낯선 외지 사람으로부터 어떤 불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롯이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Hetero-sexuality) 혹은 양성애(Bisexuality)자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틀림없이 남성 동성애(Ga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굳이 성적인 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동성애의 행위가 아닌 오히려 양성애/이성애 경험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의 여러 곳에서 ‘죄’를 언급할 때 소돔/고모라를 들어 말한다. 그러나 이곳들의 멸망의 죄가 ‘동성애’라는 언급은 없다.(6) 대부분의 성서 본문은 죄라는 것은 외지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것,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 등등을 가리켰다.

다음과 같은 성서 본문 속에는 단순히 “소돔의 죄”라는 언급을 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신명기 29:22∼29, 에스겔 16:44∼50, 마태복음 10:14∼15, 베드로전서 2:6∼8, 유다서 1:7 등등이다. 만일 동성애가 소돔의 죄였다면 그 본문에 언급을 했을텐데 전혀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소돔과 고모라에서와 같은 “무법한 행실, 비도덕한 행위”, “음란에 빠져”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이 동성애인지 이성애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오히려 롯의 태도로는 이성애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동성애를 논하는데 더 이상 참고가 될 수 없다.

신명기 23:17∼18은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다. 또 이스라엘의 아들은 남창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성애의 성관계를 언급한 것이지 동성애의 행위가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구약성서에서 특히 동성애를 확실히 정죄한 본문이 레위기 18:22(원칙을 말함)에서 볼 수 있다. “너는(남자)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또 레위기 20:13에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다. 즉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으로 반듯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을 것이다.” 레위기에서 표현한 “망측한 짓”,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언급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히브리 민족의 문화적 배경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레위기에서 정죄한 이유를 뒷받침 해주는 성서본문은 창세기 38:1∼11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38:1∼11에 나타난 오난(Onan)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고대 이스라엘 문화권에서 정죄하는 이유의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주는데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7) 이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은 “정액을 땅에 쏟아 버렸다”는 것이다. 형이 죽은 후에 오난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동침할 때마다 임신하지 못하도록 정액을 땅에 쏟아 버렸다는 것을 창세기 저자는 대단히 심각하게 해석하고 기록하면서 악한 일로 여기고 주께서 노하셔서 오난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8)

여기에서 우리는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히브리 사람들의 성의 관계는 인간을 출산/생산하는 목적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작은 집단의 족장들이 외부의 도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다수의 인간 출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잉인구로 고민하는 우리들의 상황과는 엄청난 차이다. 출산에 대한 규범은 재검토되어야 할 우리들의 과제다.

둘째, 성서 전체를 통해서 생물학적인 무식에서 오는 잘못된 해석이다. 남성의 정액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명을 낳게 하는 것으로만 믿고, 또 여성은 애를 갖는 공간으로만 즉, 씨받이로만 취급했다. 그러므로 비생산적인 정액의 흐름은 인간생명의 파괴나 살인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성수음(Masturbation)과 남성 동성애의 행위는 생명을 죽이는 낙태와 살인으로 인정했다.(9)

셋째, “남성이 여자와 교합하듯 남성과 교합하면”(레위기 18:22) 그것은 특히 남성의 인격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위태롭게 생각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까지 타락시키는 것으로 인정했다.(10) 그러므로 남성의 수음이나 남성의 동성애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여성의 동성애보다 훨씬 비판적이었다. 유대문화의 남성 우월주의인 가부장제는 계명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남성의 동성애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여성의 동성애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성차별은 고대 유대문화 속에 남성우월주의로 고정화되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바울의 태도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11)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자들도 포함된다.(12)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 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15)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성서의 성에 대한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은 확실히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동성애에 느끼는 반감은 그것을 바른 관계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종교문화가 유대생활에 침투한 것으로 반유대인으로 취급했다.(17)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오늘 동성애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해석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또다른 성에 대한 규범, 태도, 실행, 실천 그리고 금지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더 이상 규범이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성서의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겠다.

1) 나체:유대교에서는 가족들에게까지도 비난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아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0∼27). 벗는다는 것이 부부관계에까지도 터부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체의 해수욕장을 흔히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부부가 벗는다 해서 죄라고 할 수 있는가?

2) 구약의 율법은 여자가 월경하는 동안 불결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가까이 해서는 안되게 되었다. “그 여자가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자리를 앉는 자는 모두 부정하다.”는 것이다(레 18:19, 15:20∼23). 그리고 누구든지 이것을 범하면 그 대가를 받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결별해야 한다. 오늘날 여성의 월경과 관계없이 성관계를 하기도 하고 그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죄인인가?

3) 성서는 서로 동의한 미혼 성인들 사이에 성관계를 금지한 곳은 없다.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아가서 1∼8).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비유적으로 해석을 해서 사랑의 장면을 은폐하려고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교회는 혼전/혼외 성관계를 금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 독신자들, 과부나 이혼한 사람들이 옛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면서 성관계는 결혼한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으로 믿고 있다면 도대체 누가 옳은 태도인가?

4) 남성의 정액과 여성의 월경이 있는 동안 몸을 닿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는 부정하고 그리고 남자가 정액을 흘렸음은 부정하다. 그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다 정액을 쏟으면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는 것이다.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다(레 15:16∼24). 지금도 정액이나 월경이 부정하다고 느끼는 청교도적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좀 지저분할 뿐이지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5) 구약에서 간음, 근친상간, 강간, 매춘 등에 관한 사회 규범은 여성의 억압과 남성들의 재산권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권속에 속했다. 남성은 창녀집에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미혼녀와의 관계는 그녀의 처녀성을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남성의 특권이었다.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을 받을지라도 창녀를 찾아가는 남자는 죄책감이 없었다(창 38:12∼19, 수 2:1∼7).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여성들의 지휘가 향상되고 권리가 주장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상호 존경심으로 남성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체제로 변모해 가고 있다. 훨씬 여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간음한 죄는 남성도 여성도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다(신 22:22). 한가지 다른 점은 여기서 남성의 경우 결혼한 여자를 상대했을때 간음죄로 정죄하지만 미혼여성과 성관계를 한 남성은 간음한 것이 아니다. 정을 통한 여자가 처녀가 아님이 증명되면 돌로 쳐서 죽이게 했다(신 22:13∼21). 여성의 순결에 대한 법은 모순성이 있다. 오늘날 소위 바람피는 남성들에게는 피임약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미혼녀와의 관계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에서는 유부녀보다는 처녀일 경우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7) 구약시대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신약시대에 바울은 감독 집사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 또한 이혼과 재혼을 금지했다(딤전 3:2, 12; 딛 1:6).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사회도 있지만 현대에 와서까지도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또 우리는 다시 한번 율법의 모순성을 발견한다.

8) 고대 이스라엘 유대교에서는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것은 결혼한 남자 형제 중에서 자식이 없이 죽으면 과부된 여인은 남은 다른 형제와 결혼해서 죽은 형제를 위한 씨받이가 되었다(신 25:5∼10). 예수께서도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있다(마 22:23∼33). 오늘날 이 해괴망측한 법규는 가정파괴 또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9)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울 자신의 충고이지 주의 계명은 아니라고 했다(고전 7). 바울은 혼인에 관한 문제들을 여러가지 면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성서는 남성 지배 문화의 가부장제를 규범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제는 우리를 영속시킬 수는 없다.

10) 유대인들은 열두지파 안에서 동족결혼(근친결혼)이 허용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미국 남부에서는 동족결혼이 시작되고, 우리 사회에서도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할 조짐이 보인다. 인종간의 결혼이 금지되었으나 지금은 인종을 초월해서 국제결혼이 자유로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리의 성의 형태도 급진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11) 구약에서는 독신을 비정상적으로 여겼다. 예레미야에 대한 주님의 뜻으로 독신을 예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위해서 불길한 징조 때문이었다(렘 16:1∼4).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교들과의 관계를 두려워해서 한 경고로 이해한다(딤전4:1∼3). 아직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독신을 정상으로 지키고 있다.

12) 성서는 또 다른 법을 제시하고 있다. “두 남자가 싸울 때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너희는 여인의 손을 잘라라.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말아라.”(신 25:11) 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의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낼 수도 있다.

신구약에서 노예제도는 정상적인 법이 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노예제도야말로 인간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성 노예신분/첩/여성을 성적 장난감으로서 또 남성은 성의 주체자로 여성은 성의 목적 대상으로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은 노예신분인 낮은 인간이하로 취급했음을 우리는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19) 이것은 마치 미국이 100년 이상을 노예제도 밑에 인권을 유린시킨 것과 같은 것이다.


4. 성서 권위의 문제


지금까지 논의된 여러 가지 성관계에 대한 사례들은 성서 권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혼란과 이중성과 모순성을 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성생활을 이끌어 오는 법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법은 신약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구약의 이러한 율법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복음이 아니라 율법 그 자체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어떤 권위를 가지고 우리는 선택할 것인가?

우리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이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의 맨 끝마침이 되셨다”(롬 10:4). 또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매였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고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성의 관습은 성령의 권위아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율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지 인간이 그 법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20)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의 의미를 우리는 택할 수 없을 경우도 있다. 바울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을 벗지 말라는 말을 함으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기를 살려 놓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서야말로 성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윤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그 사랑의 윤리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 어느 시대에도 변함없이 지배해오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이란 약속, 믿음, 존경, 신뢰를 서로 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性)을 단순한 동물적 본능의 발산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두 사람의 인간 관계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성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깊이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율법의 시각에서 성을 볼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들의 왜곡된 사고는 전환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이 허용되고 있느냐라는 질문보다는 내 이웃인 동성애자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성서가 무엇을 명령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성서, 전통, 신학, 심리학, 인류학, 유전학 그리고 생물학 등등의 관점에서 지금 성령이 교회에게 말하려는 그 말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동성애를 잘못된 판단과 해석으로 정죄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부정적인 판단이 어느 때 가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정죄라고 판단이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들은 성서의 동성애의 부정적인 측면은 마치 구약성서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서 노예제도를 부정의한 인권유린이라는 언급이 없었다. 오늘날 노예제도를 논의할 때 그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또 성서는 여성은 언제나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유대문화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오늘날 인정할 수 있는가? 예수 자신이 간음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혼은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쳤다. 오늘 우리들이 ‘절대 안된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절대의 진리로 지킬 수 있는가?


5. 인간의 편견


하나님은 약한자, 힘없는자 편에 계셔서 눌린자를 해방시켜 주시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모든 만물을 화해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우리의 역사속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를 구현하신 분이시다. 예수 자신이 동일시했던 세리, 창녀, 불구자, 병든자, 버림받은 사람이나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다. 그는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인간으로 인정해 주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편견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고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이성애만 옳다고 길들여진 사회 풍조에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나와 생활양식이 다르다 해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정죄할 수는 없다. 이성간의 성애가 옳다는 사고로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정죄하는 것은 성서적 윤리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사고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서 오는 근본적인 태도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억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이렇게 비교하고 싶다. 이 세상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더 익숙하지만 왼손잡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 양손 모두 잘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6. 끝내면서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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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4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POSTED ON 02/21
POSTED IN: 신앙칼럼, 신학논단, 전체기사, 크리스천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이번 글에서는 토지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원리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창조적이고도 신중히 적용하려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따라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토지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 노동과 자본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일하여 만든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구약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상태라고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정의와 사회질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말한다.

이러한 경자유전의 상태를 현대사회에서는 ‘토지 가치 공유’라는 방법을 통해 적용할 수 있다. 또한 희년 말씀에 담긴 노동과 자본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노동의 결과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 즉 노동의 결과에 대한 감세 및 면세나 노동 장려, 노동권 보장 등으로 적용할 수 있다.

토지 가치 공유를 통한 공평한 토지권 보장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한다고 구약 이스라엘처럼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방법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현대 사회에 문자 그대로 무리하게 적용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는 과거 농경 시대처럼 토지의 비옥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 위치가 더 중요하고 농경을 위해 모두가 땅을 많이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Rent, 지대)를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토지권을 보장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토지 가치에 따라 토지가치세를 사회가 거두어 사회 공동체를 위해 쓰면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하고도 창조적인 방법이 바로 희년 말씀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미국의 사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비봉출판사)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다. 1879년에 나온 진보와 빈곤은 당시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난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희년의 지공주의(地公主義) 사상이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토지가치세는 공평하고 효율적이다

이렇게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희년 말씀의 현대적 적용이 될 뿐만 아니라 경제학적으로도 공평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정책이다. 거의 모든 경제학자가 인정하듯이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는 토지가치세는 가장 공평하고 효율적인 세금이다. 토지가치세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한 가장 좋은 세금이다.

에밀 브루너는 <정의와 사회질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토지 소유자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회 발전과 사회 공동체 덕분에 얻은 토지 가치는 사회가 세금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대부 격에 해당하는 경제학자이자 세금 혐오론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조차도 토지가치세가 가장 나은 세금이라며 그 우수성을 인정한 바 있다.

토지 가치는 대부분의 경우 토지를 소유한 개인이 노력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 정부의 개발 정책, 사회 인프라 설치 등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 소득이 아닌 사회 공동체가 만들어 낸 사회 공동체의 것이다. 토지/주택(부동산)불로소득은 토지/주택(부동산) 투기를 유발하여 심각한 부동산, 경제문제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환수하여 사회를 위해 쓰는 것은 경제 정의에도 정확히 부합한다.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한국교회와 우리나라가 복을 받는다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는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고 개인이 땀 흘려 노동하여 만든 노동의 열매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 우리나라의 심각한 부동산 문제는 줄어든다.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는 늘어나는 동시에 가정의 소득과 소비가 많아져 경제도 자연스럽게 살아난다. 하나님의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나라와 모든 국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희년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는 약속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는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이 공유하고 노동의 열매는 노동한 사람에게 최대한 보장해 주는 희년의 지공주의 사상은 남한의 자본주의(토지와 자본 모두 사유)와 북한의 공산주의(토지와 자본 모두 공유)를 성경 말씀으로 통일할 수 있는 평화의 대안이기도 하다.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토지가치세로 사회가 환수하여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토지/주택(부동산)을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와 부동산 소유의 양극화, 이로 인한 빈부 격차가 줄어든다.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사회를 위해 쓰고 땀 흘려 일하여 만든 노동의 임금과 자본의 이자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 비율적으로 임금과 이자는 상승한다. 이렇게 하면 빈부 격차가 완화되고 소비와 생산이 늘어나 경제는 살아나고 일자리는 많이 생기면서 실업은 줄어든다.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모델

토지 가치를 사회가 환수하면 땅값이 낮아져 창업 및 사업에 드는 비용이 줄어들고 사업 수익도 많아진다. 토지나 건물을 임대하여 사업을 하는 기업들과 상가 세입자들은 쫓겨날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사업을 경영할 수 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영 노동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제가 살아나 고용을 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영 노동이 늘어나면 노동자가 부족해져서 노동자의 임금은 상승한다. 일하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일자리는 별로 없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업과 비정규직이 줄어들고 소득 격차에 따른 빈부 격차와 노동 착취, 노사 갈등도 줄어든다. 즉 토지 정의는 노동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내 집 마련이 쉬워져 결혼과 출산이 많아진다. 집을 사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 부담이 사라져 가계의 소비 여력이 생기면 기업이 투자와 생산을 늘리고 일자리가 늘어나 경제는 더욱 좋아진다.

게다가 토지 불로소득으로 인해 발생하는 뇌물과 향응, 퇴폐 향락 산업, 공무원의 부정부패, 강제 철거, 부동산 관련 각종 불법 및 탈법 같은 사회악도 줄어든다. 아울러 불필요한 개발과 도시가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스프롤 현상, 자원 낭비, 환경 파괴도 개선된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불로소득을 얻으려는 한탕주의와 기회주의가 사라지고 근로 의욕과 도덕성, 국민 의식, 준법정신 등 국민의 정신적인 수준이 높아진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무한 경쟁과 탐욕도 줄어들다.

또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맞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살 수 있게 되면 치열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 비용도 줄어들어 가정 살림살이는 좋아지고 아이들도 행복해진다. 교육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집안의 경제문제로 인한 부부 싸움과 가정 폭력, 이혼, 낙태, 가정 파괴와 같은 가정 문제도 줄어든다. 하나님의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이 세상이 점점 더 하나님나라의 모습에 가깝게 된다.

토지 가치 나눔을 통한 희년 말씀 실천

우리 그리스도인은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사회가 토지가치세로 환수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는 정책들을 정부가 법과 제도로 만들 수 있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한 희년 말씀에 가까운 법과 제도가 국가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개인과 공동체, 교회가 희년 말씀의 원리와 정신이 담긴 실천 사항을 직접 실천할 수 있다.

교회는 먼저 희년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희년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신도는 희년 말씀과 희년 실천 사례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한다. 또 교회와 신도는 희년 말씀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희년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구하고 따른다. 두려움과 탐욕의 죄를 인간의 자유의지로만 이겨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교회와 신도들은 교회 건물이 소유가 아닌 사용하는 것이라는 인식 전환을 하고 남는 교회 건물과 공간에 대해서는 선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공간으로 사용한다. 공간 나눔과 공간 기부를 하는 것이다. 좋은 예로 서부제일교회는 지역 주민에게 교회 주차장과 어린이 도서관, 북 카페를 개방하여 함께 사용한다. 교회 교육관을 필요한 단체에게 무료로 대관해주는 높은뜻숭의교회 청어람도 좋은 사례다.

한편 교회는 무작정 교회 건물을 확장하지 않고 꼭 필요한 공간만을 건축하고 거주할 곳이 없는 가난한 이웃과 대학생이 살 수 있는 전월세 주택과 학사관을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또한 다주택을 보유한 신도들이 있다면 이웃 사랑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전월세 값을 무작정 올려 받지 않고 동결해 준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새벽이슬, 희년함께가 함께 했던 전월세 동결 운동 캠페인을 예로 들 수 있다. 교회는 전월세를 동결해 주겠다는 신도를 무주택 이웃과 연결시켜 줄 수도 있다.

희년 운동 동참을 통한 희년 말씀 실천

교회와 신도들은 투기 목적이 아닌 실제로 필요한 부동산만을 구입하도록 노력한다. 교회와 신도들은 필요 없이 가지고 있는 땅의 임대 가치(임대료)를 지역사회와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나눔으로써 희년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교회나 개인이 교회 건물과 집을 이전할 때 생기는 시세 차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거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눌 수도 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생긴 60억 원의 시세 차익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당회에서 결정한 용인 향상교회가 좋은 사례다.

신도들은 토지가치세가 도입되기 전에는 지금 현실에서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어느 정도 환수할 수 있는 부동산 관련 세금(개발부담금,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양도소득세 등)에 찬성하면서 기꺼이 납부한다.

또 토지가치세를 정책으로 내거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투표하여 정치적인 실천을 할 수도 있다. 아울러 대만처럼 모든 사람이 땅에 대한 권리를 골고루 누리는 토지 공개념의 정신을 헌법에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희년 운동을 하는 여러 단체(희년함께, 희년사회, 토지정의시민연대, 토지+자유 연구소 등)에 참여하면서 희년을 실천하는 데 앞장설 수도 있다. 희년함께에서는 매년 추석 전 주일을 희년실천주일로 정해 교회가 희년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매년 희년실천주일에 희년실천주일 참여 교회들이 함께 모여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희년실천주일 연합 예배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통해 희년 말씀을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교회, 공동체, 가정에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희년 실천은 사회 개혁으로 이어져 우리 사회가 하나님나라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 길이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토지/주택(부동산)문제만큼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노동문제에 관한 성경 말씀과 기독교경제윤리를 살펴볼 것이다.

고영근 / 희년함께 사무처장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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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이철빈 / 희년함께 회원


「토지과 경제정의」, 이 책은 예수원의 설립자이자 토지정의 운동의 선각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님의 유고집이라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토지와 경제에 대한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왔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에 제시된 안식년, 희년법 등을 통해서 본 토지법, 그리고 그 법 위에 기반해서 어떻게 사회가 운영되어야 하는지 등을 제시한다. 토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저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노동을 해서 생산활동을 해야 하며, 그것을 향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토지를 인간 임의대로 사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까지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토지와경제정의.jpg이 책은 ‘하나님 나라와 토지법’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구약성경의 초반부에서 시작해서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성경을 영적인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는 관점만 접하다보니, 이 책의 관점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다. 특히, 구약의 왕국 분열~왕국 멸망 그리고 예언서의 저술 등의 배경에 토지 문제가 깔려있다는 해석은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예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인데, 이전에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나 악한 왕의 악행이라고만 치부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 매매를 거부한 나봇과 이방의 토지법을 들여와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 아합과 이세벨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 구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알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즉, 페니키아인들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고, 온갖 음행과 부도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토지를 사유하고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사는 공동체 사회였지만, 오므리와 바알 그리고 이세벨에 의해 하나님의 토지법이 폐기되고, 이방의 토지법과 문화가 이식된다. 그 후로는, 바알주의가 스며드는 가운데 여호와주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영적, 실제적 대결이 계속 이어진다.


故 대천덕 신부님의 문제의식은, 이 끊임없는 긴장과 대결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점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런 구절을 써놓으신 것이 정말 인상 깊었다.


“한국에는 경제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영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과 ‘실제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은 진실(또는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p,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中)



즉, 이 문제는 결코 영적이기만 하거나, 실제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문제임을 인식해야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고, 동시에 부와 가난의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역할이 막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하며, 실제적인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숱한 방해가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한다. 교회의 타락을 회개하며, 교회갱신 운동,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회개하자고, 기도하자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개해야할 수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토지문제, 부와 빈곤의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 교회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세속 체제로 편입된 이래로, 교회는 언제나 지주이자 권력층이었고, 토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왔다. 토지는 인간의 생활 터전이자 근원이기에 부와 가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도 교회는 외면했고, 성경을 입맛대로 번역하면서 기독교를 그저 영적이고 내세적인 종교로만 국한시켜버렸다. 성속이원론을 신봉하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개인의 영혼 구원 의미로만 격하시켜버리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희년, 토지문제, 예수원 정신 등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랐거나 편협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희년은 그저 하나의 이상적인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토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예수원은 그저 자연 속에서 기도하기 좋은 기도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참 씁쓸하다. 교회가 초대교회의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잊고 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누군가 내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준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려주셨다. 그 중,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며,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야할지 알려주는 방향타와 같다. 희년의 개념에 비추어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늘 점검해야한다.


희년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을 때, 故 대천덕 신부님의 마지막 유지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서 외쳐시오!”였다는 것이 기억난다.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공부한 영적 지도자의 결론은 ‘토지’였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부차적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마지막까지 토지와 경제정의를 부르짖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하곤 한다. 희년은 복음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세상을 바라는 관점,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방식, 내가 살아내야 할 삶 등, 하나님은 내게 희년을 통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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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이철빈 / 희년함께 회원


「토지과 경제정의」, 이 책은 예수원의 설립자이자 토지정의 운동의 선각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님의 유고집이라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토지와 경제에 대한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왔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에 제시된 안식년, 희년법 등을 통해서 본 토지법, 그리고 그 법 위에 기반해서 어떻게 사회가 운영되어야 하는지 등을 제시한다. 토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저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노동을 해서 생산활동을 해야 하며, 그것을 향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토지를 인간 임의대로 사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까지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와 토지법’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구약성경의 초반부에서 시작해서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성경을 영적인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는 관점만 접하다보니, 이 책의 관점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다. 특히, 구약의 왕국 분열~왕국 멸망 그리고 예언서의 저술 등의 배경에 토지 문제가 깔려있다는 해석은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예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인데, 이전에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나 악한 왕의 악행이라고만 치부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 매매를 거부한 나봇과 이방의 토지법을 들여와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 아합과 이세벨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 구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알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즉, 페니키아인들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고, 온갖 음행과 부도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토지를 사유하고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사는 공동체 사회였지만, 오므리와 바알 그리고 이세벨에 의해 하나님의 토지법이 폐기되고, 이방의 토지법과 문화가 이식된다. 그 후로는, 바알주의가 스며드는 가운데 여호와주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영적, 실제적 대결이 계속 이어진다.

故 대천덕 신부님의 문제의식은, 이 끊임없는 긴장과 대결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점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런 구절을 써놓으신 것이 정말 인상 깊었다.

“한국에는 경제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영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과 ‘실제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은 진실(또는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p,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中)

즉, 이 문제는 결코 영적이기만 하거나, 실제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문제임을 인식해야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고, 동시에 부와 가난의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역할이 막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하며, 실제적인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숱한 방해가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한다. 교회의 타락을 회개하며, 교회갱신 운동,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회개하자고, 기도하자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개해야할 수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토지문제, 부와 빈곤의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 교회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세속 체제로 편입된 이래로, 교회는 언제나 지주이자 권력층이었고, 토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왔다. 토지는 인간의 생활 터전이자 근원이기에 부와 가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도 교회는 외면했고, 성경을 입맛대로 번역하면서 기독교를 그저 영적이고 내세적인 종교로만 국한시켜버렸다. 성속이원론을 신봉하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개인의 영혼 구원 의미로만 격하시켜버리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희년, 토지문제, 예수원 정신 등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랐거나 편협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희년은 그저 하나의 이상적인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토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예수원은 그저 자연 속에서 기도하기 좋은 기도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참 씁쓸하다. 교회가 초대교회의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잊고 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누군가 내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준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려주셨다. 그 중,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며,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야할지 알려주는 방향타와 같다. 희년의 개념에 비추어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늘 점검해야한다.


희년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을 때, 故 대천덕 신부님의 마지막 유지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서 외쳐시오!”였다는 것이 기억난다.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공부한 영적 지도자의 결론은 ‘토지’였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부차적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마지막까지 토지와 경제정의를 부르짖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하곤 한다. 희년은 복음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세상을 바라는 관점,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방식, 내가 살아내야 할 삶 등, 하나님은 내게 희년을 통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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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희년책읽기] 희년, 한국사회, 하나님나라 - 정의와 은혜의 희년 공동체를 꿈꾸며

칼럼 - [희년책읽기] 희년, 한국사회, 하나님나라 - 정의와 은혜의 희년 공동체를 꿈꾸며



정의와 은혜의 희년 공동체를 꿈꾸며
[희년책읽기] 희년, 한국사회, 하나님나라
서장혁 / 희년함께 운영위원


17년 8월 8일
7월말에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 ‘희년학교’에 다녀왔다. 3박4일 동안 희년에 대한 말씀과 강의를 듣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일까?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죽음 후에 가게 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신앙의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죽음 이후의 세상도 그분이 통치하시고 다스린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약간은 막연하며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선포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4:18~19)


예수님이 전파하신 은혜의 해인 희년은 패자 부활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식년이 7번 지나는 희년의 해에는 토지를 반환하고 노예를 해방하고, 부채를 탕감해 주게 된다. 노예는 누구인가? 주인에게 속박되어 자신의 선택권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다.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고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채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인가? 경제적으로 예속된 사람들이다. 사회 구조적 문제이건, 자신의 게으름이건, 어리석음이건 어떠한 사유이건 간에 채권자에게 붙들린 사람들이다. 토지를 반환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신의 노력에 의하건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건 간에 부를 축적하게 된 사람들이다. 결국, 희년의 날에 어떤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되는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실패자들이다. 인생의 실패자들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날이다. OX 퀴즈를 하다가 보면, 맞추지 못하고 선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사회자 찬스에 따라서 다시 경기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내 자신도 언제든지 실패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기회를 주시는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라고 믿는다.


6인의 학자가 희년에 대해서 한국 사회에 대해서 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면, 희년의 성경적 관점, 교회사적인 관점, 사회정치적 관점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앙공동체와 동호회 모임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당연히 예배를 드린다는 본질적인 차이는 있겠으나, 실제 어떻게 다른 모임일까? 나는 다함께 손을 잡고 원을 그린 후에 서로를 바라보는 모임인가? 아니면 다함께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본 후에 뒤를 돌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임인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사용하는 모임의 에너지, 시간, 예산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우리 신앙공동체가 한 발자욱 더 나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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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전자책] 토지와 경제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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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토지와 경제정의 -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대천덕 (지은이),전강수 (옮긴이)홍성사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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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제공 파일 : ePub(50.77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248쪽


목차


Ⅰ. 토지와 경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희년 / 자본과 이자 / 재산에 대한 율법 / '미쉬팟': 토지법의 시행 / 열왕(The Kings)과 토지 / 분열된 왕가 / 나봇의 포도원 / 지주의 신, 바알 / '바알주의'와 '여호와주의' / 아달랴 / 부자와 가난한 자 / 선지자들 / 신약성경 / 자유를 선포하라 / 진행 중에 있는 희년 / 교회와 토지 / 토지와 교회의 소명 / 기독교적 식민주의와 제3세계의 빈곤 / 영원한 경제

Ⅱ. 성경적 경제학과 헨리 조지
헨리 조지의 《노동의 조건》에서 / 이자와 인플레이션 / 첫 번째 편지: 성경적 경제학의 적용에 관하여 / 두 번째 편지: 토지세에 관하여

Ⅲ. 성경적 경제학과 한국 교회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 / 영적 전쟁과 IMF / 한국인의 심성, 샤머니즘 / 통일을 대비한 한국 교회의 준비

Ⅳ. 성경 주석
미가서 6장 / 정의에 관한 복음서의 가르침

옮긴이의 말, 부록: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저자 및 역자소개
대천덕 (R.A. Torrey)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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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중국 산둥 성(山東省) 지난(濟南)에서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미국 데이비슨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건축노동자와 선원 등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익혔다. 후에 교파를 성공회로 옮겨 미국 남부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했으며, 1946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2년간 목회를 했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성 미가엘 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의 재건을 도와 달라는 요청으로 1957년 한국에 왔고,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1964년 신학원장직을 사임했다. 다음 해인 1965년,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역자들 및 아내 현재인(Jane Grey Torrey)과 함께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척박한 땅 강원도 황지(현 태백) 하사미에 노동과 기도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원’ 공동체를 세웠으며, 2002년 8월 6일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할아버지인 R. A. 토리 1세로부터 시작한 성령론과 헨리 조지의 원리에 토대를 둔 경제 이론 및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은 그의 치열한 삶과 함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주요 저서로 《대천덕 자서전-개척자의 길》,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나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 《대천덕 절기 설교》(이상 홍성사),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전4권, 신앙계)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5>,<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4> … 총 31종 (모두보기)

전강수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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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식민지 조선의 미곡정책에 관한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금융부동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신 있는 부동산 정책 전문가이자 토지경제학자로 널리 알려졌지만,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한국경제사를 전공하고 해당 분야와 관련된 주제로 학위논문을 집필했을 만큼, 식민지 치하에서 벌어진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관해 전문적 식견을 가진 학자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의 경제적 수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토지 수탈과 쌀 공출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국내외 사료들을 섭렵하며 일제의 수탈이 제도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고 치밀하게 자행됐음을 밝혔다.
그런 그에게 한때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던 이영훈, 주익종 등이 《반일 종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펼친 왜곡된 주장은 그냥 넘겨서는 안 될 학자적 소신의 변절이자 오만과 거짓으로 얼룩진 극우적 역사 인식 그 자체였다. 이 책을 통해 친일자학사관으로 점철된 《반일 종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의 허점과 오류를 백일하에 드러내서,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리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일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집필한 책으로 《토지의 경제학》 《부동산공화국 경제사》 《부동산 투기의 종말》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공저) 《헨리 조지 100년 만에 다시 보다》(공저) 등이 있고, 《희년의 경제학》 《사회문제의 경제학》 《부동산 권력》(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접기


최근작 : <다시 촛불이 묻는다>,<《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 총 22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8.0





예전부터 토지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은 나의 인생 방향을 바꿔놓고 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기독교인이라면 필독서적으로 추천
다시시작하기 2013-09-06 공감 (3) 댓글 (0)



어느 정권이든 간에 항상 토지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리스도인은 토지,부동산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대천덕 신부님의 유작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입장을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적 공개념과 유사해 보일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일수 있으나 이는 엄밀히 공산주의적 공유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의 개념이다.
Dr.Slump 2018-08-25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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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타난 토지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상가들의 이상향은 자유로운 개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능력, 즉 많은 경우 적당한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을 모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일전의 일독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역시 '종교(사상적 일치), 농업, 자생적 예술'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삶을 제시하고 있지요. 많은 생태적 아나키스트들과 기독교 공동체주의에서 공동적으로 발견되는 이상향입니다. 유교 역시 그렇지요.

<토지와 경제정의>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매매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토지의 위치나 생산성에 가치에 따라 과세 함으로써 토지의 가치가 모두 같아지겠지요. 현대적 표현으로 인간의 노동에 의해 추가적 가치를 생산한 것이 없는 토지에 대하여는 이익을 취할 수 없다 정도가 되겠지요. 같은 이치로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인플레이션 이상의 이자를 받는 것도 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현대가 도래하기 전에 대다수의 곳에서는 이자놀이를 천박한 것으로 부도덕한 것으로 판단했지요.

이처럼 성서 속의 공동체의 경제관념에는 현재와 다른 관념이 하나 들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도덕입니다. 현재와 같이 자본주의가 득세하기 전에 많은 경제연구는 도덕을 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에 빚을 탕감해 주는 것, 모든 계약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은 수천년 한곳에 이웃하며 살아가던 조상들의 해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과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말입니다.

또하나 저는 성서에서의 토지권의 보장을 단순히 현재와 같은 '주거권' 혹은 '토지의 공개념'으로 보는 것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성서가 생겨났을 때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보건데 생존을 위한 자립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보장해 주는 것, 어쩌면 현대의 '노동권'과 더 유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책의 후미로 진행될 수록 비기독교는 부도덕 혹인 미개인 것으로 바라보는 듯한 시각, 한국 기독교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읽는 동안 내내 불편하고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을 불러왔습니다. 논리또한 성서에 있으니 진리이다 라는 식의 전개가 보여 다소 불편하더군요. 그래도 기독교 교리로 꼭 설득해줘야 납득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한번 읽어봐도 괜찮지 싶습니다. 혹은 기독교도 임을 자처하면서 종부세를 없애려는 MB이하 국회의원들이 한번 읽어봐도 좋지 싶습니다.

백성이 하늘인 세상을 꿈꾸던 정도전은 남의 밥을 먹는 사람은 남을 책임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은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의 밥 먹고, 남의 옷을 입는 자로서 실패하더라도 내가 선 자리에서 '새끼 놓고 누울 자리, 먹고 살만한 일자리, 일끝내고 노래 한자락 할 시간'을 얻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워야지 생각해 봅니다.
- 접기
무해한모리군 2008-10-2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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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기독교의 경제 개념에 대한 반성 및 성찰


기성 교단에서 자라고 기성 교단에서 교육을 받고 기성 교단에서 잠시 주일 학교 교사를 지냈던 저에게 대신부님의 글은 항상 마음 속 한 구석 비워져 있던,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을 채워주셨습니다. 신부님의 유고작이 된 '토지와 경제정의'는 신부님 말년에 주장하신 올바른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친절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분들과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이 다소 어렵게 다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토지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비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경제 정의 실현을 위한 토지 제도 및 세제의 개편은 얼마든지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근대 국가 성립 괴정 중에 유럽과 미주, 호주에서 토지가치세 라는 이름으로 실현이 되었을 때 각각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얻은 엄청난 효과는 타 연구 보고서를 통해서도 입증된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한탄 되었던 부분은, 왜 기성 교단에서는 조국의 경제적 현실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2000년 전엔 말씀하시고 경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왜 기성 교단은 성경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이 땅의 소명 중 하나인 공의의 실천과 실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단지 예수 믿는다고 말 하는 사람의 확대에만 만족하고 있는 지...
마지막으로 대신부님의 말씀 중 기독교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을 적으며 정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에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흘러 넘칠 것 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허지 않고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
한국 교회가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실천과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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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休 2010-04-1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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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희년 공부모임

분야

토지


책 제목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작성자: 한형빈

제출일: 17.8.1.


<저자소개>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III)신부는 중국 산둥 성 지난(濟南)에서 1918년 1월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북중국 미국인학교와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 데이비슨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성공회 남부신학대학원, 영국 성 어거스틴 대학원, 하버드 대학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도 수학했다.




건축일, 선원생활, 노동조합 활동, 정치 참여 등의 활동을 했고 성공회 성 키프리안 교회(ST. CYPRIAN EPISCOPAL CHURCH) 등에서 목회했으며, 1957년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 신학원의 재건립을 위해 한국에 입국하여 1964년까지 학장으로 일했다. 이듬해 강원도 태백에 성공회 수도원인 예수원을 설립해 초대교회의 사동행전적인 공동체 생활의 한국적인 터전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2002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대천덕 신부의 뒤를 이어 아들 벤 토레이(BEN TORREY, 한국명 대영복) 신부가 예수원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부인 현재인(JANE GREY TORREY) 사모는 2012년에 소천했다.




대천덕 신부는 성경과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사회정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경제학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아주 사고팔지 못한다는 레위기 말씀에 근거해 성경에서 말하는 경제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책 목차>




Ⅰ. 토지와 경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희년

2. 자본과 이자

3. 재산에 대한 율법

4. '미쉬팟': 토지법의 시행

5. 열왕(The Kings)과 토지

6. 분열된 왕가

7. 나봇의 포도원

8. 지주의 신, 바알

9. '바알주의'와 '여호와주의'

10. 아달랴

11. 부자와 가난한 자

12. 선지자들

13. 신약성경

14. 자유를 선포하라

15. 진행 중에 있는 희년

16. 교회와 토지

17. 토지와 교회의 소명

18. 기독교적 식민주의와 제3세계의 빈곤

19. 영원한 경제




Ⅱ. 성경적 경제학과 헨리 조지

1. 헨리 조지의 《노동의 조건》에서

2. 이자와 인플레이션

3. 첫 번째 편지: 성경적 경제학의 적용에 관하여

4. 두 번째 편지: 토지세에 관하여




Ⅲ. 성경적 경제학과 한국 교회

1.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

2. 영적 전쟁과 IMF

3. 한국인의 심성, 샤머니즘

4. 통일을 대비한 한국 교회의 준비




Ⅳ. 성경 주석

1. 미가서 6장

2. 정의에 관한 복음서의 가르침




옮긴이의 말, 부록: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책 간략 소개>




희년 제도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제시하고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배경설명과 근거를 제시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글을 모아 낸 책이라 체계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탐욕과 불의에 기초한 바알의 토지법을 깨뜨리고 성경의 토지법을 실현하는 것은 대천덕 신부 필생의 소원이자 기도제목이었다.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서 있으면서도 사회정의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그는, 한국의 영적 문제와 사회 문제를 아우르는 강론과 사상의 깊이, 삶의 실천을 보여 주었다.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수립하라’는 제안을 담은 서신을 역대 대통령들에게 수차례 전하기도 했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더욱 치열하게 ‘외쳤던’ 성경적 토지제도와 경제정의 문제에 대해 연구한 이 글은 그의 오랜 소원과 기도가 담긴 유고(遺稿)인 셈이다. (출판사)




<책 내용 요약>




Ⅰ 토지와 경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희년



- 레위기의 토지법 (25장 23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 성경에는 임대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판다'라는 단어가 바로 '임대한다는 뜻'






2. 자본과 이자



- 자본 없이는 토지를 이용하기 어렵다.

- 성경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서로 돈을 빌려 주되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한다.

- 레위기 25장의 정신을 어느 정도 따르는 성경적 제도의 변형들 가운데 하나가 신용조합인데, 대출 이자가 대출 서비스 수수료에 불과하다.

- 덴마크에 토지가치세가 시행되었을 때 새로운 조세가 부과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토지가치세가 철폐되었을 때 세수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근로 계층이나 전문직 계층에 무거운 부담이 돌아가는 새로운 조세들이 도입되었다. 홍콩에서는 중간 부동산업자들이 토지의 임대 가치를 흡수하면서부터 세수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판매세와 기타 조세들이 도입되었다. (24쪽)






3. 재산에 대한 율법



- 성벽이 있는 성내 가옥의 경우 무를 수 있는 권리가 일 년으로 한정 됨

- 레위인의 경우 언제든 무를 수 있는 권리가 있음 (무를 수 없는 경우 가옥은 희년에 돌려받음)

- 토지 주인이 하나님께 바친 토지를 무르지 않고 제3자에게 팔 경우, 희년이 돌아오더라도 그 토지는 성전에 귀속됨

-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산 토지를 하나님께 바친 경우, 희년이 돌아오면 그 땅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감





4. 미쉬팟: 토지법의 시행



<시행된 근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실제 모세오경의 율법이 조목조목 언급되는 경우 없음

- 성경 어느 곳에도 오므리 통치 이전에 여호와의 토지법이 철폐되었다거나 다른 법이 시행되었다는 말이 없음



<근거 1> 한 남자가 딸들만 두었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 집 딸들이 시집가서 희년이 되면 시집간 지파로 땅이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내용이 등장함



민수기 36장 4절

이스라엘 자손이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감삭되리이다



<근거 2> 토지가 가족별로 분배되었다는 사실을 지지해주는 구절이 등장함



사사기 11장 2절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근거 3> 룻기



- 엘리멜렉은 기근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헐값에 팔고(빌려주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감

- 10년 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고 아내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옴

- 나오미에게는 토지 무를 권리가 있었으나 가난하여 여력이 없었음

- 대신 토지를 무를 친척을 찾음

- 토지를 무를 친척이 룻과 결혼해 죽은 아들의 상속자가 자라야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음

- 보아스가 대신 토지를 빌리고 룻과 결혼함






5. 열왕과 토지






6. 분열된 왕가

- 아합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키고 시행하려고 노력함



<근거 1> 솔로몬 왕



- 솔로몬왕이 즉위한 지 12년이 되는 해에 성전을 봉헌함

-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지 52년이 되는 해 (이스라엘 전체에서 왕으로 인정 받은 지 50년이 되는 해)



<근거 2> 아사 왕

- "함성과 쇠나팔 소리와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대하 15:14)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함



<근거 3> 아합 왕

- 아합 왕은 왕국에 ‘바알주의’를 들여옴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엣바알의 직계 후계자들이었다. 마침내 로마가 페니키아의 바알주의 토지법을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로마에서 확립된 바알주의 토지법은 유럽, 영국, 그리고 서방 세계로 퍼져 갔다. 사실 페니키아식 토지 제도는 엣바알 이전, 즉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 전의 가나안 땅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쓸어 버리도록 하셔야 할 만큼 땅이 더렵혀진 이유도 마로 그 바알주의 토지 제도 때문이었다 (41쪽)



왕하 1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렘 2: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출 23: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 18: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7. 나봇의 포도원



-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 왕이 토지에 대한 탐욕에 빠지고 이세벨이 페니키아의 (바알주의) 토지법을 이스라엘에 적용함 (열왕기상 21장)

- 아합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거나 다른 토지와 바꿔주겠다고 제안함

- 나봇은 여호와께서 땅을 주기를 금지한다고 이야기함

- 아합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근심에 빠짐

-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두로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임

- 바알은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착취하여 세를 불림

- 이세벨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이유로 나봇을 죽임

- 왕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왕에 대한 불경죄였고 지주제를 정당시하는 바알에 대한 불경죄였음

- 엘리야가 아합에게 경고함

- 아합은 회개하고 이세벨은 예언대로 죽음



8. 지주의 신, 바알



9. '바알주의'와 '여호와주의'



10. 아달랴

- 아합의 누이 아달랴는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함

-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 아하시야 역시 아합 가문의 길을 따라 악을 행함

- 예후에게 붙잡혀 살해당함

- 아달랴는 예후의 개혁이 유다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왕족을 숙청함

- 아하시야의 누의 여호사브앗은 여호와의 제사장인 여호야다와 결혼함

- 여호사브앗은 아하시야의 어린 아들인 요아스를 구해 성전에 숨김

- 6년 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왕으로 공포하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함





11. 부자와 가난한 자

- 북왕국 이스라엘, 예후의 혁명으로 많은 지주들이 숙청됨

- 예후의 4대손 여로보암 2세, 번영

-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뒷받침되었던 상류 계급의 생활 방식 (상아 궁전, 주연, 과식, 향락과 음악에 대한 탐닉)은 농부 출신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 정죄당함





12. 선지자들



- 요엘: 나팔을 불고 금식과 회개를 선포하라고 촉구함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 미가: 오므리와 아합 때 여호와의 율법을 거부하고 토지법을 바꾸어 버린 일이 문제의 근원임을 밝힘

미가 6: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 이사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8)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의 징조는 이렇다. 금년과 내년에는 너희가 저절로 자라난 야생 곡식을 먹고 3년째에는 농사지어 추수한 곡식과 포도를 먹을 것이다. (열왕기하 19:29, 현대인의성경)



- 히스기야 왕: 희년 선포 → 앗수르 군대가 물러감 (열왕기하 18장, 19장)

(질문) 희년이 실천되었다는 내용 없음 / 희년이 선포된 내용 없음



- 시드기야 왕: 안식년 선포 → 부채탕감, 노예해방 → 바벨론 군대가 물러감



- 노예해방

시드기야왕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들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 계약은 자유를 선포하여 히브리인의 남녀 노예를 자유롭게 하고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과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노예를 풀어 주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들의 종에게 자유를 주었다. (예레미야 34:8-10)



- 그다랴 총독이 바벨론의 비호 아래 토지 개혁을 단행함



또 그는 살아 남은 자들을 모조리 바빌로니아로 잡아갔으며 그들은 거기서 노예가 되어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할 때까지 그 곳 왕과 그 자손들을 섬겼다. 그래서 그 땅은 여호와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70년 동안 황폐하여 7년마다 한 해씩 땅을 묵히는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역대하 36:20-21)



경호대장 느부사라단은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들과 그 밖에 남은 백성들을 바빌로니아로 잡아갔다. 그러나 경호대장 느부사라단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다. (예레미야 39:9-10)



- 느헤미야



나와 내 형제들과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 주고 있습니다만 이제 그 이자를 받지 않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되돌려 주고 또 여러분이 착취한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감람기름의 100분의 1을 돌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되돌려 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제사장들을 불러 지도자들에게 자기들이 약속한 것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시키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옷자락을 털며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집과 재산을 털털 털어 빈털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모든 군중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그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약속을 지켰다. (느헤미야 5:10-13)





13. 신약성경



- 공의(justice)와 의(righteousness)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 헬라어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공의'가 500번 이상 사용되었는데 킹제임스 번역에서는 400회나 '의'로 번역됨



- 바나바: 레위인이었던 바나바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그때 사도들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라고 부른 키프러스 태생의 레위 사람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다. (사도행전 4:36-37)






14. 자유를 선포하라





15. 진행 중에 있는 희년






16. 교회와 토지



-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진 것을 나누는 자발적 희년을 실천함




- 로마가 카르타고를 점령했을 때 바알의 토지법이 로마인들의 탐욕을 부추김

- 로마 참전 병사들은 카르타고 제국의 영토를 하사받음

- 기독교가 이러한 토지제도를 개혁하지 않음

- 북아프리카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이슬람교도가 됨

(질문) 이슬람의 기원, 성경적 토지제도와 상관있는지

- 16세기 재세례파가 성경적 토지개혁을 요구함 →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박해함

- 잉글랜드 국왕은 영혼 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강탈하여 자신들의 심복인 국교도와 장로교도들에게 하사함

- 기독교적인 유럽인들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를 땅에 굶주린 식민주의자들에게 분배하면서 비교적 공정했던 아프리카의 토지 제도를 붕괴시키고 바알 제도를 수립함

(질문) 아프리카의 토지 제도





17. 토지와 교회의 소명



- 교회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몸

-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양육해 제자를 만드는 일,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투입하는 일



- 초기 기독교는 소수 집단으로 출발함

- 4세기 초반 통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함

- 구약 성경은 고대 유대 사회에만 적용될 뿐 현재의 인간 사회와는 상관없다는 주장이 확산됨 (어거스틴)

-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보급되면서 하나님이 현재의 세상에 관여하신다는 결론을 냄

- 교회는 토지를 갖는 일 그리고 또 하나의 지주로 전락해버리지 않는 일을 해야함 (토지 권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





18. 기독교적 식민주의와 제3세계의 빈곤



- 교회가 대지주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정치가와 성직자, 신학자들은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논했음

- 토지가 없는 대중이 봉기하여 이슬람과 공산주의를 받아들임

- 기독교국가들은 식민 제국을 건설함

- 기독교국가는 식민지를 착취하며 내세를 강조함

- 기독교국가들은 지주제를 통해 이득을 봄





19. 영원한 경계



- 덴마크, 호주, 미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뉴질랜드 등지에서 적용됨



<대만>

- 헨리 조지의 경제학을 실행해 옮긴 뒤 법을 바꾸지 않음

- 빚이 전혀 없는 순수 채권국이 됨



<덴마크>

- 조지스트의 원리를 따른 경제학이 시작되었으나 법이 조금씩 개정되면서 오늘날에는 조지주의적 법률을 찾아보기 어렵게 됨



<홍콩>

- 정부가 모든 지대를 징수함

- 이 때 빈곤은 없었으며 물가는 적당한 수준이었음

- 지금은 홍콩 부동산 임대가치의 3분의 2가 부동산업자의 수중에 들어감



<싱가포르>

임차권 투기를 허용함



<호주>

- 100년 전 헨리 조지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수용함

- 대학에 돈을 주어 신고전파경제학을 가르치게 함



<미국>

- 피츠버그

- 펜실베이니아주: 복수세율 재산세제 적용 (토지분 재산세의 세율은 높이고 건물분 재산세의 세율은 낮추어 가는 개혁 방식)

-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의 몇 개 주에서 단일세 제도가 도입됨

(탐 존슨, 뉴튼 베이커 등 단일세론자들이 시장으로 등장함)

- 캘리포니아: 1978년 토지가치세율을 1퍼센트로 제한함 → 미국에서 가장 번영하던 주에서 가장 침체한 주로 전락함



<캐나다>

밴쿠버, 빅토리아





Ⅱ. 성경적 경제학과 헨리조지



1. <노동자의 상태> 중에서

- 인간은 물질적 욕구를 가지고 있음

- 이러한 욕구를 바탕으로 생산을 하고 생산에 따른 결과를 향유할 권리를 가짐 (사적 소유권)

- 소유권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지만 소유자의 의사에 반해 권리를 빼앗을 수 없음

- 인간은 토지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

- 인간은 토지 위에서 생산활동을 통해 물질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음

- 노동을 통해 얻은 가치는 개인이 소유하고 토지의 가치는 공적으로 징수해야함



2. 이자와 인플레이션



<이자>

- 레위기 25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대출금에 대해 이자를 청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함

- 중세에는 교회가 이자와 폭리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고 성경의 원리를 실천하고자 노력함

- 미국의 신용협동조합은 이자율을 낮게 설정해 대출을 해주고 있음

-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은 물가 상승을 따라갈 정도의 대가만을 받고 자금을 빌려줌



<인플레이션과 하나님의 법>



너희는 재판할 때 공정하게 하라. 물건을 사고 팔 때도 서로 속이지 말며 공평한 도량형기를 사용해야 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레위기 19:35, 현대인의성경)



여러분은 저울과 되를 속이지 말고 정확한 되와 저울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서 여러분이 오랫동안 살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 25:12, 현대인의성경)



저울과 되를 속이는 자를 여호와께서는 미워하신다 (잠언 20:10, 현대인의성경)



너희는 정확한 저울과 되를 사용하라. (에스겔 45:10, 현대인의성경)



예루살렘 사람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성을 향해 외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참 지혜이다.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아, 들어라! 너희를 매로 치기로 작정한 자가 누구냐?

악인들의 집에는 아직도 부당하게 모은 재물이 있지 않느냐? 그들은 저울을 속이고 있다. (미가 6:9-10, 현대인의성경)



- 통화금융제도의 부정직성으로 화폐의 가치가 계속 떨어짐

- 노동의 가치가 떨어짐 (같은 노동을 하고도 대가를 적게 받게 됨)





3. 첫 번째 편지: 성경적 경제학 적용에 관하여



- 헨리 조지는 토지가치세를 주장함

- 대만: 톨스토이와 손문의 영향

- 한국과 일본: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이지만 토지개혁으로 경제성장

- 홍콩: 가장 부유한 정부가 됨, 토지 임대 수입으로 운영됨

-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성경의 토지법을 따른 나라는 성장함: 한국(민주주의), 일본(입헌군주제), 싱가포르 (약간 독재), 홍콩(식민지)

-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면 전 세계의 빈민가와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침묵할 수 없음





4. 두 번째 편지: 토지세에 관하여



<성경적 토지 제도의 문제점>

- 충분히 적용되면 상당한 부를 가져옴

- 이후 사람들이 이 제도에 대해 말하기를 그침

- 다음 세대는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게 됨

- 반대 세력이 제도를 바꿔버려 다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됨 (캘리포니아 주의 사례)





Ⅲ. 성경적 경제학과 한국 교회

1.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

- 모든 공공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토지세를 올리고 다른 세금을 철폐



2. 영적 전쟁과 IMF



3. 한국인의 심성, 샤머니즘



4. 통일을 대비한 한국 교회의 준비



Ⅳ. 성경 주석



1. 미가서 6장



- 영화 서머스비 토지문제를 다룬 영화



2. 정의에 관한 복음서의 가르침



유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5:5, 현대인의성경)



- 온유한 (meek)은 그리스어 프라우스(praus)에 해당하는데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타페이노스(tapeinos, '낮은', '압제받는', '겸손한')와 혼용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둘이 같은 단어임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5:6, 현대인의성경)



<질문>




1. 열왕기하 18장, 19장에 희년이 실천되었다는 내용이 있는지




2. 이슬람의 기원이 성경적 토지제도와 상관있는지




3. 식민지배 전 아프리카의 토지제도는 어떠했는지




4. 희년사상이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성경에서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할 법도 한데 왜 이렇게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을까





<적용 & 제안하고 싶은 내용>







Action Plan


당장




1달

(홍보) 책에 인용된 성경구절 페이스북 홍보에 활용


1년

(콘텐츠) 무이자대출의 필요성에 대한 홍보 자료 제작 (Ⅱ-2. 이자와 인플레이션)


3년

(콘텐츠) 희년법에 대한 성경의 근거 정리 (강의, 홍보물 등에 활용)

(콘텐츠) 토지문제 다룬 영화 목록 작성 (강의, 홍보물 등에 활용) - 서머스비, 강남1970

(사업) 토지 권력을 가지고 토지의 가치 (지대)를 구성원과 공유하는 것


5년

(콘텐츠) 토지공개념이 적용된 해외 사례 정리 (강의, 홍보물 등에 활용)


10년

(콘텐츠) 당대 근동 국가의 토지제도 비교 (강의, 홍보물 등에 활용)

(콘텐츠) 제국주의시대 토지제도 비교 (강의, 홍보물 등에 활용)


30년




50년







<1부>

1.희년 (성경)

2.자본과 이자 -> 2부 2.이자와 인플레이션, 경제

3.재산에 대한 율법: 희년제도의 구체적인 내용 (레위기)

4번~12번; 구약

13번~14번; 신약

15.성경 속 희년 이야기 마무리

16번~18번; (고대)교회

19.근대정부사례 (지켜야 하는 것)




+9장부터는 읽기 쉬움




<2부>

1.토지공개념의 정당성

2.이자와 인플레이션

3번~4번. 토지공개념이 필요한 이유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적용 후)




<3부>

한국사회에 토지공개념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주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4부>

성경주석;

미가서: 정의 다음에 자비


















2012.12.3.~4. 읽고 정리한 내용
















이 책은 '예수원'으로 유명한 대천덕 신부가 쓴 책이다.


한국어로 출간된건 2003년인데, 원서로 쓰여진 건 언젠지 모르겠다.




머리말


여러 증거를 검토해 볼 대, 희년의 선포와 준수에 대한 규정을 포함한 레위기 25장의 토지법은 북이스라엘에서는 700년 동안, 즉 오므리와 아합 왕 시대까지, 유다에서는 그보다 100년 더 유지되었던 것 같다.


토지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는 헨리 조지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누구라도 임의로 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전혀 없다면 그는 갈취를 당한 것이고, 토지를 매매하는 사람들은 장물 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 토지가 없는 사람은 생필품을 구입할 돈을 구하기 위해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비굴하게 일자리를 구걸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토지 소유자의 처분에 맡겨지게 된다.(p10)


성경에서 말하는..
토지는 어느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눠 써야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지켜져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틀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Ⅰ. 토지와 경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장 희년


나는 이 책에서 토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또 그러한 가르침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지켜졌다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단, 성경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며, 성경의 여러 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론'을 전혀 고려하기 않을 생각이다.(p15)


앞으로 증거가 무지막지하게 등장한다.....




먼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다룰 때에는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정황도 함께 고려하려고 한다. 토지에 대한 율법의 규정은 아주 명료한데, 그 기본법은 레위기 25장에 들어 있으며 요지는 23절에 담겨 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가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p16)




2장 자본과 이자


토지를 매각한다는 말은, 토지를 영원히 상실하고 예전에는 자신의 농장이었던 곳에서 새로운 소유자의 소작인으로 일해야 하며, 자신의 노동에서 나오는 소득의 절반을 새로운 소유자의 소작인으로 일해야 하며, 자신의 노동에서 나오는 소득의 절반을 새로운 소유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더 이상의 여유란 없으며, 토지의 옛 소유자는 이제 영원히 가난해지고 만다. 예측하지 못한 비상상황에 대응하거나 개량을 위한 자본을 억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금을 차입한 사람들은 이자를 지불하다가 인생을 끝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자가 너무 높아 여생을 이자 지불을 위해 허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서로 돈을 빌려 주되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한다.(p22)




많은 경제학자들이 토지를 자본에 포함시킨다는 사실, 토지를 별도로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일은 도적질과 다를 바 없다. 자본은 '응축된 노동'이다. 그래서 자본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며, 노동의 결과물을 축적한 사람이나 그에게서 그 결과물을 증여받은 사람의 소유이다. 반면에 토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p23)




토지 그 자체, 위치(location)나 부지(site)의 기본 가치는 사회가 지대(토지나 자연자원의 사용료)로서 징수해야 한다.
...
토지가치세(Land Value Taxation)는 농민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는 전혀 과세하지 않는다. 단지 위치의 가치에 대해 지대를 부과할 뿐이다. 따라서 이는 실제로 조세가 아니라 사용료이다.
(p23-24)




3장 재산에 대한 율법


4장 '미쉬팟': 토지법의 시행


모세오경에 기록된 토지법이 실제로 시행되었는지 살펴본다.


1. 민수기 36장
한 남자가 딸들만 두었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 집 딸들이 시집가서 희년이 되면 시집간 지파로 땅이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한다(p29-30)


2. 사사기 11장 2절
전 친족이 들고 일어나 사생아인 입다가 가문의 기업을 받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민수기와 여호수아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와 같이 토지가 가족별로 분배되었다는 시실을 지지해 주는 구절이다(p30)


3. 룻기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이 이 이야기의 전체 배경이 되고 있다.(p32)




5장 열왕(The Kings)과 토지


6장 분열된 왕가


7장 나봇의 포도원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아합 왕이 토지에 대한 탐욕에 빠지고 이세벨이 페니키아의 (바알주의) 토지법을 이스라엘에 적용한 일이 이 사건의 주요 내용이다.


8장 지주의 신, 바알


9장 '바알주의'와 여호와주의'


10장 아달랴


11장 부자와 가난한 자


12장 선지자들


많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토지법을 위반하는 일을 규탄했으며, 메뚜기 데 재앙과 기근, 홍수 등 자연적, 초자연적 재앙을 맞게 되리라고 경고하였다.(p65)


13장 신약성경


14장 자유를 선포하라


15장 진행 중에 있는 희년


로마로부터 공인 받은 기독교는 토지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교회는 지주층이 되었다.


16세기에 재세례파가 성경적 토지개혁을 주장하지만 가톨릭과 기독교 모두 그들을 박해했다.


기독교적인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해 토지를 빼았았다. 그 결과 아프리카인들은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토지개혁을 실시했거나 토지가치세(토지는 팔아서는 안 되며 임대할 수 있을 뿐이라는 희년 개념을 현대화하려는 시도 가운데 한 가지)를 도입한 국가들은,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막아 냈으며 놀라운 번영을 누려왔다.(예를 들어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뉴질랜드, 호주 등)


16장 교회와 토지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초청하는 일이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양육하여 제자로 만드는 일 뿐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최선을 다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그들을 투입하는 일이다.(p95)


초기 기독교인들은 재력도 권력도 없는 작은 소수집단으로 출발했다.


4세기 초반에는 통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하나님 보다 권력에 관심이 있었다. ... 종교는 내세에만 관련이 있다고 보는 이러한 신앙관은 권력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위를 제멋대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17장 토지와 교회의 소명


교회가 대지주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정치가와 성직자, 신학자들은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논했고 실제적인 문제는 조심스럽게 회피했다.


18장 기독교적 식민주의와 제3세계의 빈곤


식민 제국들은 지주제로 이득을 보았다.


식민주의자들의 뒤를 이어 곧 성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파했다. 어떤 복음일까?
"제국주의자들이 당신네 나라를 약탈하고, 당신들을 빈곤에 허덕이게 만들며, 당신네들의 자유를 빼앗도록 내버려 두시오. 당신들은 주님께서 내세의 삶을 주신다는 사실만 신뢰하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견딜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실 것이오."


많은 신생독립국가가 공산화한 까닭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노력에서였으나 공산주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그 나라들은 이슬람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슬람에 무슨 경제 프로그램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이슬람을 통해 그 많은 세월 자신들을 착취하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을 분이다.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고 싶다면,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들을 암살하고 테러를 자행하는 일은 말할 나위 없고,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마호메트에 대해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믿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p105)

19장 영원한 경제


조지스트의 토지가치세 제도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하는 유일한 집단이 있다면 대지주들이다.


조지스트들은 가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을 표명한다. 실제로 그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아주 불리한 위치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주들은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언론과 대학, 대형 교단과 정부 부처들을 통제한다. 지주들보다 강한 세력은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조지스트들은 한 번도 이 사실을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 세력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고 성경적 경제학은 그분의 율법이다. (p116-117)




Ⅱ. 성경적 경제학과 헨리 조지


1장 헨리 조지의 <노동의 조건>에서


토지의 보유권이 노동 생산물의 사적 소유권을 손상하거나 부종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배타적 보유권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보유권의 이점을 정의성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토지 자체의 가치를 공적으로 징수하기만 하면 된다. (p123)


2장 이자와 인플레이션


중세에는 교회가 이자와 폭리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고, 성경의 원리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님은 이자가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리고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 월급을 받기 위해 은행에서 일하는 것과 주식 보유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점점 더 부유해지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돈 관리의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개개인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하ㅣ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노동자가 그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받아야 할 몫이 공제되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착취이다.(p126)




정의(신용협동조합이 빚지지 않을 정도의 이자만 받는 일)와 자비(7년마다 부채를 탕감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법이 지켜진다면, 가난하나 사람이 거의 없는 건강한 경제로 변모할 것이 틀림없다.(p128)





오늘날 세상은 정확하고 정직한 도량형을 사용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통화금융 제도의 부정직성 때문에 손상을 입고 있다. 은행과 정부는, 마치 무에서 화폐를 창조한 후 그것이 가치라도 가진 것처럼 꾸민다. 그 결과 모든 나라에서 화폐의 가치는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자는 같은 금액을 가지고도 자신의 아버지가 살았던 것처럼 살 수 없게 되었다.(p130)


우와,, 이런 생각은 처음 본다. 물건의 크기, 무게를 재는 도량형. 예전에는 도량형을 통해서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었다면 오늘날에는 화폐를 통해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니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돈을 마구 찍어내서 노동의 대가인 화폐의 가치를 낮추는 것은 잘못된 것.




3장 첫 번째 편지: 성경적 경제학의 적용에 관하여


4장 두 번째 편지: 토지세에 관하여


바알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가 토지를 엄청나게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임대료를 부과하여 지주들은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도 점점 부유해지며, 대신에 다른 사람들은 단지 일할 장소를 얻기 위해서 직, 간접적으로 무리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니 자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p146)


우리는 생산의 두 가지 요소가 토지와 노동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본'이라 불리는 것은 응축된 노동이며 과거에 생산적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저축한 것입니다. 실제 토지의 가치에 부과되는 세금인 부지 가치세를 의미있게 사용하면, 정부는 공공경비를 조달할 수 있는 동시에 토지 가격을 경쟁력 있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p150)






Ⅲ. 성경적 경제학과 한국 교회


1장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


모든 공공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토지세를 충분히 올리고 다른 모든 세금은 철폐.
...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 즉 토지에 대해서는 세금을 부과하고 인간의 노동 생산물에 대해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음.
...
이 방법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 준다.
인간 노력의 생산물에 대한 세금을 삭감하기 대문에 생산비는 낮아지고 그에 따라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은 높아진다.
토지에 대한 세금을 올리면 토지가 더 많이 시장에 나오게 되므로 토지 비용은 낮아지고 따라서 사업하는 데 드는 비용은 더욱더 낮아지게 된다.
조세 제도의 같은 변화는 수익성이 없던 사업을 수익성 있게 만든다.
복잡한 정부 규제가 사라지고 뇌물 수수의 유혹도 없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정책을 시행한 예는 다음과 같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홍콩, 미국의 알래스카.




토지의 가치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고, 전기ㆍ물ㆍ전화ㆍ관개ㆍ기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며, 인근의 다른 토지를 개발하여 토지에 접근 가능성과 이용 가능성 그리고 편의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회인데, 토지 자체는 이 사회에 의해 창출되는 가치 외에는 다른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토지세는 사회가 해당 토지를 가치 있게 만드는 데 투자한 것을 그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p164)




2장 영적 전쟁과 IMF


3장 한국인의 심성, 샤머니즘


4장 통일을 대비한 한국 교회의 준비








Ⅳ. 성경 주석


1장 미가서 6장


2장 정의에 관한 복음서의 가르침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빼앗긴 당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이 일은 '희년'에 일어난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잇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righteousness)는 '정의'(justice)로 번역해야 옳다.






개인적으로, 이 앞에 읽었던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가 더 깔끔한 구성인 것 같다. 내용 전개면에서도 그렇고..


어쨋든.. ㅎ 이분도 이런 주장을 하셨다니!


몰랐던 새로운 사실.


하루 속히 이런 제도가 시행되면 좋겠다.


20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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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_공_ 2018-01-0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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