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1

알라딘: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알라딘: 왜 용서해야 하는가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은이),원마루 (옮긴이)

포이에마2015-09-10원제 : Why Forgive?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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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1,000원

판매가

9,900원 (10%, 1,100원 할인)





8.9100자평(2)리뷰(9)

이 책 어때요?

272쪽

131*196mm

360g

ISBN : 979115809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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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용서'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 책.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용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풀어낸다. 독자들을 위해 한국 사례를 특별히 추가했고, 소그룹으로 모여 용서를 향한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용서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부록으로 실었다.





목차





추천의 말

들어가는 말



1. 원한이라는 암 덩어리

2. 기적을 믿으며

3. 증오의 악순환 끊기

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5. 용서와 정의

6. 자비를 베푸는 일

7. 화해가 불가능할 때

8. 일상 속의 용서

9. 결혼과 용서

10. 부모와 친구에 대한 용서

11. 하나님에 대한 원망

12. 자신에 대한 용서

13. 책임지기

14. 길고 힘겨운 여정

15. 파문 일으키기



나가는 말

부록: 용서 학교



접기





책속에서







P. 32 사람들은 고든의 진심을 오해했다. 조롱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든은 만약 테러범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딸이 가족들 곁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복수심에 매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용서는 개인의 삶을 넘어 훨씬 더 멀리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고든의 발언은... 더보기

P. 218~219 “몸이 마비된 채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20년간 아내를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새 청년이 된 코너와 캐치볼을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가끔은 이런 상황이 불만스럽고 힘들고 싫습니다.” 그런데도 왜 용서한 걸까? 스티븐은 이렇게 말한다.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고 믿으니까요.... 더보기

P. 250~251 폭력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키죠. 각 사람과 각 집단에 자기만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적’이 실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이 있다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후인 경우가 많고요. 제가 매일 대면하는 진짜 적은 따로 있습니다. 매일 끌어안고... 더보기





추천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전 세계에 꼭 필요한 메시지다.

- 넬슨 만델라 (노벨 평화상 수상자,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용서는 비본성적인 행위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순간에 감히 본성을 거스를 수 있을지 두렵다. 그럼에도 이 책에 실린 사례들을 통해 용서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고귀한 선택임을 깨닫는다. 본성을 거슬러 고귀한 선택을 함으로써 인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부장판사)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분단의 시대를 치유하는 길은 화해와 용서밖에 없다. 그 화해와 용서의 씨앗을 남과 북 어린이들의 여린 마음에 심어야 한다. 이 책은 한반도가 평화로운 미래로 가기를 기원하는 절절한 기도서다.

- 권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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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Johann Christoph Arnold) (지은이)





1920년 브루더호프를 공동 창립한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의 손자. 목사로서, 브루더호프의 장로로서 평화와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평생 헌신한 사람이었으며, 복음을 살아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싸운 전사였다. 마틴 루터 킹, 마더 테레사 수녀, 세자르 차베스, 도로시 데이, 체 게바라, 특히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아놀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9년부터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와 함께 ‘폭력의 고리 끊기’라는 프로그램으로 수많은 학교와 단체, 기관에서 용서의 메시지를 전했다. 결혼생활, 부모 역할, 평화 문제를 실재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동안 저자가 쓴 책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옮겨졌고 100만 명이 넘는 독자와 만났다. 대표 저서로 《왜 용서해야 하는가》, 《나이 드는 내가 좋다》,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아이들의 정원》, 《평화주의자 예수》 등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 비폭력을 추구하는 브루더호프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길 원하는 가족과 미혼자가 살고 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모든 것을 나누고 공동의 선을 위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힘을 보탠다. 더불어 살고,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식탁을 나누며, 매일 함께 노래하고, 예배하고, 결정을 내리고, 기도하고, 축하한다. 공동체에서는 학력과 나이, 능력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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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성, 하나님, 결혼>,<희망이 보이는 자리: 지친 영혼이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인생 좌표>,<왜 용서해야 하는가> … 총 65종 (모두보기)



원마루 (옮긴이)



영국 남동부 로버츠브릿지에 있는 브루더호프공동체에서 아내와 함께 세 아들을 키우며 산다. 옮긴 책으로 《왜 용서해야 하는가》, 《나이 드는 내가 좋다》,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숨어 있는 예수》, 《공동체 제자도》, 《바닥난 영혼》, 《아이들의 정원》이 있다.









최근작 :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용서만이 상실을 견디는 유일한 길이다!

‘폭력의 고리 끊기’라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용서’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 책이다. 촉망받는 축구선수였으나 무고하게 폭행을 당해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 환자가 되어버린 글렌 필더부터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켈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저자의 아버지까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용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풀어낸다. 2010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Why Forgive?에 한국 사례를 추가한 확대증보판.



[출판사 리뷰]

용서만이 상실을 견디는 유일한 길이다!

1995년 9월의 어느 아침, 저자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다가 동네에 사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유괴당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다. 범인은 일주일 만에 잡혔다. 유괴범은 아이의 가족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아이를 집 근처 숲으로 유인해서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유기했다. 뉴스를 접한 대중은 분노했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자기 손으로 직접 처리할 수 있게 그냥 풀어주라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가 과연 피해자 가족에게 위로가 될지는 의문이었다. 범인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던 저자는 몇 달 뒤 교도소에서 수갑을 푼 범인과 마주 앉았고, 저자는 그날의 만남이 자신에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남겼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 책은 ‘폭력의 고리 끊기’라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가 ‘용서’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 책이다. 촉망받는 축구선수였으나 무고하게 폭행을 당해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 환자가 되어버린 글렌 필더부터 어린 시절 갱단에 발을 디뎠다가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하심 개럿, 인종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자레드,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켈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저자의 아버지까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용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풀어낸다.

이번에 포이에마에서 번역.출간한 《왜 용서해야 하는가》는 2010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Why Forgive?에 한국 사례를 추가한 확대증보판이다.



■ 왜 용서해야 하는가

이 책에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상처는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게 마련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큰 사건이 아니라도 사소한 다툼 속에 서운한 감정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가슴에 쓰디쓴 응어리가 생긴다. 그렇게 응어리진 마음은 우리로 삶을 비관하게 하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원한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한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은 결국 나를 파괴하기 일쑤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용서를 향해 힘들게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뉴욕 시 경찰관으로 일하다 총을 맞고 전신이 마비된 스티븐 맥도널드가 용서를 택한 이유도 “등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힘든 순간에 고통을 완화하고, 죄에 대한 응징과 인간적인 공평함에 관한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타인을, 혹은 하나님을, 혹은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다.



■ 용서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용서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과연 이 세상에 용서가 쉬운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용서하고 그만 잊어버리라”고 쉽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해본 사람은 잊는 것도 용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저자의 말대로 의지를 가지고 미워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해야만 용서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서두에 이렇게 당부한다. “용서는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문이다. 낮고 좁아서 몸을 구부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찾기도 어려워서 찾는 데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모두 용서의 문을 찾아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신도 어느새 그 문 앞에 당도할지 모른다. 그때는 부디 그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당신뿐임을 기억하라.”(p.13) 저자의 당부대로 의지를 가지고 용서의 문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이 생겨나길,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온전히 오늘을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길,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시작한 용서의 물결이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포이에마에서 출간한 이번 책에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 사례를 특별히 추가했고, 소그룹으로 모여 용서를 향한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용서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부록으로 실었다. ‘폭력의 고리 끊기’ 세미나에서 나온 질문을 서로 나누며 용서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길고 힘든 여정의 첫걸음을 떼어보자. 접기





8.9









용서,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들



1986년 7월 12일, 미국 뉴욕 시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는 순찰을 돌기 위해 센트럴파크에 들어섰다가 수상해 보이는 십 대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경찰을 보고 달아나는 아이들을 쫓아가 잡았을 때, 한 아이가 (나중에 알고 보니 15세였다고 하더군요) 그의 뒤로 돌아가 그의 머리에 총을 쐈지요. 그가 쓰러지자 그 아이는 그의 목에 두 번째 총을 발사했고, 한 번 더 총을 쏘고 달아났습니다.



48시간 동안의 수술과 치료를 통해 의료진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전과 같은 삶까지 돌려줄 수는 없었지요. 목을 관통한 총알이 척추를 건드려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산소 호흡기가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정말 비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지요.



그리고 몇 달 뒤, 스티븐은 아내와 함께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와 그의 아내는 그 소년을 용서했다고 발표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고 믿으니까요. 만약 복수심을 안고 살았다면, 영혼의 상처는 더 깊어졌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분노는 감정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거의 매일 그날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용서한 걸 후회하지 않아'" 아...





기독교의 많은 덕목 중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선포할 정도이니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사랑의 최고봉은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이 책은 용서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조금 산만하기도 합니다.) 대신 용서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을 들려주지요. '용서의 사례'라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용서가 필요한 '악한 상황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 책에는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폭력부터 살인이나 폭행과 같은 범죄, 점점 일상화되고 있는 테러, 그리고 아우슈비츠나 르완다의 학살이나 미국의 인종차별 등과 같은 거대한 상황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지요.





그런데, 그 안에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아니, 별이라기 보다는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네요. 원망하고 증오하고 복수하기를 꿈꾸는 대신에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지요. 그들의 노력은 때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가해자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허탈하게 끝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가해자를 변화시켜서 새사람이 되게 하고, 주변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또다른 용서를 낳지요.





이 책은 결코 용서가 쉽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실천한 사람들도 용서가 단번에 되지는 않았다고, 용서했더라도 다시 복수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그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용서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싸움입니다! 아, 용서는 정말 어렵습니다.





또한 이 책은 용서에 대해 낭만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슬픔과 분노를 무시하거나 그 죄를 가볍게 보지 않지요.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 진실을 밝히는 것, 잘못을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용서의 힘을 더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장애물을 극복하게 하며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모두를 치유하고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 말입니다. 사실 우리를 본질적으로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도 예수님의 용서 아닙니까!





아내가 이 책을 읽더니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어휴, 이 이야기들을 읽으니까 우리가 용서 어쩌구 말하기는 너무 부끄럽다." 정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고민하고 상처받은 일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밴댕이 소갈머리같은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ㅜㅜ





이 책은 독자들을 용서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낙심과 복수, 증오와 상처의 자리에서 희망과 관용, 사랑과 회복의 자리로 오라고 부릅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고 권유합니다. 힘들지만 시작해보자고 말합니다.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에 퍼지고 퍼져 온 세상에 닿을 것입니다."





우리 손에 용서의 돌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그 돌을 던져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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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duck 2016-07-04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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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이어주는 책, <왜 용서해야 하는가>를 읽고서



아버지는 술꾼이셨다. 하루도 술을 안드시면 안되시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오실 시간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으시면 어김없이 찾아나서야했다. 길가에 앉아계신 날들이 다반사였다. 나는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싶기도 했다. 싫었다. 고3때는 남들 다들 고3이라고 집에서 배려해주는 것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술을 좀 덜 드시기만을 바랬다. 바람은 바람으로만 끝났다. 대학생이 되고, 주님 앞에서 내가 용서되었을 때에야 나는 아버지가 용서가 되었다. 아버지의 그 설음의 시간이 새로이 보였고, 육체 노동의 한계와 관계 속에서의 치임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형제 관계 속에서의 부침과 아버지 본인 스스로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사랑합니다!”라고 안아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용서했던 그 길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아버지 역시 용서했다. 나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한 것이 그저 한 번 고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희망을 써 내려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레미야의 말씀이 그때는 참으로 위로가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삼푸투는 술에 마약쟁이였습니다. 그는 하루도 술없이는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친구 빈센트가 자신의 부모님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르완다의 투치족이었던 삼푸투는 친구인 후투족 빈센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일에 동참한 것으로 인해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 일로 9년 동안 정신이 나간 채 지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 클라디아가 장애가 있는 것으로 인해 급기야 아내와도 헤어졌습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뮤지션이었지만 술과 마약으로 감옥을 오갔고, 그의 삶은 재앙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세라는 한 전도자를 만남으로 인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하라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빈센트를 용서함으로 인해 빈센트는 자기 죄를 뉘우쳤고 자신을 용서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와 자녀들도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용서의 힘은 그의 가족 또한 다시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당시을 용서한 게 아니야 당신을 용서한 건 하나님이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이 삼푸투를 통해 당신을 용서했다면, 나도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243쪽)







용서는 우리를 세계로 연결시켜준다. 우리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감옥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영혼”(38쪽)이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용서뿐이다.”(163쪽) “용서는 새롭게 출발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폭제다.”(70쪽) 이 책 곳곳에 펼쳐져 있는 용서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용서가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한지, 또한 복수하는 삶이 우리 삶에 얼마나 편만한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세계의 문제이며, 현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나의 한계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계와 화해하며 자신을 용서할 뿐 아니라 세계를 사랑하게 해주는 방법임을 힘주어 말한다. 폴 투르니에가 인격의학이라는 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회복하려 했듯이, 저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용서가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열쇠임을 전해준다. 저자의 세계 곳곳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나의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용서는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문이다.”(13쪽) 또한 “용서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아 누리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결단으로 이끌어주는 징검다리들을 잔뜩 놓아두고 있다. 읽다보면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그러면서 새롭게 다짐하게 된다. 읽다보면 언제 용서라는 은혜의 폭탄이 터질지 알 수 없다. 그 선물을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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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감람나무 2015-09-2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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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몸과 마음이 힘든 날이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몇 달 동안 지속되면서 점점 심해져 손바닥만한 두드러기가 온 몸을 뒤덮었다. 아토피에 우유 알러지가 있는 아기에게 모유를 계속 먹여야했기에 약을 쓰지 못했다.



시매부님에게 폭언을 듣고 난 후부터 두드러기가 시작되었다. 남편과 시누이 언니가 사과를 요청했지만 잘못한게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안타까워하시며 나를 많이 걱정해주셨다.



두드러기가 심하게 올라 잠을 잘 수 없는 날이면 분노가 함께 나를 덮었다. 그리고 가혹했던 비난의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사과를 받고 싶었다. 사과를 받아야지만 이 지긋지긋한 두드러기가 나를 떠나갈 것 같았다.



아토피가 있는 아가도 잠을 잘 때면 간지러워 깰 때가 많았다. 어느날 밤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가 잘 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시누이 언니에게 상처를 떠올리기보다 진심을 믿기로 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는 순간까지도 고민은 계속됐다. ‘다음에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미루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문자를 보낸 이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다행히 두드러기도 나지 않았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왜 용서해야 하는가”, 이 책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분노로 차오른 내 마음이 내 몸까지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지금이라도 만나서 다행이다. 용서는 한번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어야하니까.



“그 사람들이 한 일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죠(p67)”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p219)”



“용서하는 힘을 계발하고 유지해야한다. 용서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줄도 모른다.(p69)”







내 속에 자라는 끔찍한 마음을 직시하고, 예수님의 자리에서 죄를 심판하려는 오만함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용서하는 힘을 키우고 실천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용서하기 힘들 때는 이 책을 다시 펼쳐야겠다.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용서의 이야기들이 ‘함께 가자’고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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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건 2015-09-2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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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여섯 살 때쯤의 일이다. 무언가 큰 실수를 하고선 혼이 날까 두려웠던 나머지 마치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엄마 앞에서 연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허술해서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이었지만 그 땐 정말 완벽하게 엄마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엄마는 내가 죄(?)를 자백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결국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를 택한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엄마에게 용서를 빌었고 그런 나에게 엄마는 따끔한 회초리질 뒤에 콧물 범벅인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내 잘못을 용서해주셨다.



그때가 아마도 내가 최초로 ‘용서’라는 단어를 배우게 된 순간이었으리라. 엄마의 따뜻한 포옹을 통해 나는 ‘용서’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랑이 앞서지 않고는 진정한 용서란 받을 수도 또 베풀 수도 없다.







<왜 용서해야하는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용서’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쉽게 상처받는 허약한 사람들이나 용서를 이야기한다고 여기지 마라.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힘 있게 한다.”(61p) 저자는 용서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던 상대방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순간, 비로소 그 용서의 과정 속에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이정도 일쯤이야’라고 가볍게 여길만한 사건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뉴스나 신문에 등장할 법한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들은 결코 쉽지 않았을 용서의 과정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이웃, 전혀 모르는 사람, 심지어 가족)뿐 아니라 자신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 나간다. “사실 제가 그를 용서한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피해를 입으면 사람들은 흔히 복수와 용서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복수를 선택하면 분노하는 데 삶이 다 소진되고 맙니다. 복수는 일단 하고 나면, 사람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력이 있으니까요. 분노는 만족을 원하고, 그것은 상습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주죠.”(109p) 어린 시절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 뒤 습지에 무참히 버려두었던 한 남자를 끝내 용서한 크리스의 고백이다.



“원수를 친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사랑에만 이다. 미움에 미움으로 맞선다고 적을 없앨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적대감을 없애야 적이 사라진다. 미움의 본성은 파괴와 분리다. 그러나 사랑의 본성은 창조와 건설이다. 구원의 능력으로 사랑은 결국 변화를 이뤄낸다.”(69p)



사랑의 능력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한다. 용서의 힘은 한 개인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 이웃 그리고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파장을 일으킨다. 물론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바울의 가르침은 질투, 시기, 분노가 가득한 이 세대에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용서해야하는가. 용서는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고,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이 모두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야기한다. 용서는 여전히 어두운 과거에 머물며 분노와 증오의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는 당신이 그 고통의 사슬을 끊고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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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또자 2015-09-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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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쉽지 않은 단어, '용서'



술에 취한 소년의 운전으로 아들 마이클을 잃은 남자.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정의의 심판은 더디었다. 법정에서 운전자의 혐의를 밝히는 데만 일 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가해자의 어머니는 법정 최고형을 요구했다며 비난조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 소년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6개월의 교정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그 뒤 6년 동안 집중 관찰을 받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다.



아들을 잃은 남자는 이후로도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법으로 정의가 실현되었지만, 아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가해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용서의 길을 택했다.



‘용서’. 어쩌면 TV에서도, 책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주기도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기독교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용서라는 말은 묵상하면 할수록 가벼운 단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용서의 현장, 즉 내게 해를 끼친 사람 앞에 있다면, 용서는 상상할 수 없을 무게로 다가온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브루더호프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가 용서에 대해 썼다. 내게 해를 끼친 사람과 상황 속에서, 힘겹게 용서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십대 폭력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에게 아동 학대를 받아 온 여성, 인종차별을 겪어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르완다 사태에서 친한 친구에게 부모님을 잃은 뮤지션,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을 받은 한국 소녀...







용서를 선택한 이들의 리스트이다. ‘정말 이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힘겹게 용서를 선택한 과정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들의 가정과 일터, 삶의 현장을 방문해 직접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했고, 때로는 강렬했다. 앞에 언급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자.







용서의 길은 길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마이클을 용서해야 했고, 일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저 역시 술을 마신 상태로 마이클을 태우고 운전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94쪽)







그의 말처럼 책에 소개된 다른 사람들도 용서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질타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용서를 선택한 이들은 삶의 큰 보석을 발견해 간다. 다시 아버지의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건의 ‘끝’은 결국 용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용서의 힘은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용서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94쪽)



다른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십대 때, 크리스는 유괴범에게 머리에 총을 맞았다. 기적적으로 뇌는 다치지 않았지만, 한 쪽 눈이 실명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분노하고, 어떻게든 복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할텐데, 크리스의 선택은 용서였다.



사실, 제가 그를 용서한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피해를 입으면 사람들은 흔히 복수와 용서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복수를 선택하면 분노하는 데 삶이 다 소진되고 맙니다. 복수는 일단 하고 나면, 사람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력이 있으니까요. (109쪽)



상처를 입고, 그럼에도 용서를 택한 사람들. 이들의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이 책은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좋은 미담을 모아 적은 책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쭉 들으며, 질문 한 가지를 던질 수 있었다. ‘저 상황에 놓였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용서가 결국엔 내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상황에 놓인다면, 내 앞의 가해자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신중히 묵상하고, 용서에 대해 이전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은 결국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송곳처럼 계속 마음을 찔러 온다. 사실, 내게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용서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은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서가 정말 어렵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작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용서가 반드시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역시 연약하며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용서를 경험할 때에만 용서할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된다. (145쪽)



‘왜 용서해야 하는가?’ 독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작가는 책 마지막에 이렇게 당부한다.



우리의 손에는 용서에 이르는 열쇠가 쥐어져 있다. 그 열쇠를 사용할지 안 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264쪽)



용서, 생각보다 사용이 쉽지 않은 열쇠. 그럼에도 이 책의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용서를 선택해 서서히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의 가슴 먹먹한 목소리를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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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oad 2015-09-2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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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0

불교언론-스님들에게 기본소득을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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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에게 기본소득을

유정길
승인 2019.11.



매월 50만원씩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면

만일 당신에게 매월 50만원의 돈이 통장이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할까? 2019년 1인 최저생계비는 102만4205원인데 50만원이라면 약 반에 해당되며 적은 액수가 아니다. 만일 가족 한사람들에게 각각 지불되기 때문에 5인 가족이면 250만원이다. 그렇게 되면 비루하게 아등바등하게 살지 않게 되고 하고 당당히 싶은 일을 하며 가족 중 누군가 직업을 잃는다 해도 크게 두렵지 않고 소비도 늘어나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벌수 있다는 ‘임금노동’ 중심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겐 아무 일도 안한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일을 하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행하는 나라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밀하게 당신은 아무 일도 안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연관되고 서로 의존적인 연기적 이치로 보면 결국 각자가 존재 그 자체로 보이지 않게 도우며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덕분에’ 누군가에게로 돈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실제 우리사회는 가사노동이나 자원봉사, 친절과 배려 등 90%의 비지불노동이라는 바다위에 10%의 임금노동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점차 세계적인 추세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65세 이상 노인의 70%가 25만원 정도를 받고 있는 기초연금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최근 성남시의 청년기본소득(청년배당)이 24세 이상의 청년들에게 연 100만원을 경기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올해부터 해남은 1년에 60만원씩 전체 농가 1만4579가구가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아마도 매년 재원을 확보하여 액수도 늘어날 것이고 또한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알래스카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1982년부터 매년 1인당 약 1500달러씩 4인가족에 6000달러를 지급해왔고, 핀란드는 기본소득 매월 71만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등도 유사한 정책을 펴고 있다. 돈은 벌고 있지만 기술개발로 줄어드는 일자리를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부의 재분배를 위해 농민, 청년, 장애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기본소득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출가자가 증가와 종단민주주의에 기여할 승려기본소득
불교환경연대는 지난 2017년 3월 불교의 기본소득 실시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중앙승가대 유승무 교수는 ‘기초수행지원 보시금’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스님들에게 무조건 각각 50만원씩 연간 600만원을 지불하는 기본소득이 가능할 수 있다고 추진을 제안했다. 1만여 스님을 대상으로 할 경우 연간 600억 정도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일종의 토지세나 지대처럼 걷는 400억원 규모의 사찰점유비와 직영사찰수입의 4분1로 180억원, 그리고 각 사찰마다 승보공양 복전함 같은 기초수행지원 보시함을 마련하고, 관광사찰입장료의 일부, 기타 출자가의 재보시 등을 합치면 가능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대략적인 추산으로 더욱 상세한 계산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지급되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을까? 우선 삼보정재의 교리적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고, 권력지향적인 위계적 조직관행, 관료주의가 개혁되는 계기가 되며, 원융살림의 종단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스님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승단내의 불평등, 사유화, 세속화, 사사화 등의 온갖 부정적인 추세가 일소하여 승가의 공동체성과 화합에 기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지나 소임자로 하여금 돈보다 수행지원 등에 집중하게 되어 승단의 과잉정치화를 막을 수 있다. 또한 초발심의 자세로 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자가 늘어나게 되어 승단이 청정해지며, 승단의 경제적 안정화로 인해 출가자의 감소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기여하고, 행자시절 중도포기나 환계자를 줄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데다, 불교가 사회적 변화를 선도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점차 지급되는 액수는 늘어나게 되고 여기에 향후 국가가 지불하는 기본소득이 추가된다면 훨씬 더 안정적인 수행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기본소득의 특징은 무조건성이다. 누구에게 동일하게 지급되기 때문에 부자와 가난한자를 구분하는 행정비용이 전혀 지출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체로 앞날의 불안감으로 인해 돈을 모아 쌓아 놓으려 하며 이를 위해 권력다툼을 하게 된다. 승려기본소득으로 승단이 더욱 청정하고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면 불교가 부흥하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움이 될 것이다. ‘스님은 잘살기만 하면 먹을 것은 저절로 생긴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게 되니 복지도 이런 복지가 없는 것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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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2019-11-06 20:18:15
더보기땡중들한테 세금을 왜 줘 룸살롱 가려고?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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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던합의 2019-11-05 04:17:08
더보기저도 2년 전 유승무 교수의 기본소득 논의 기사를 공유한 적이 있었는데 불교환경연대 주최 였군요. 법보신문 의 이런 기사 좋습니다. 종단 합의까지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이 빠르면 빠를수록 종단에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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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2019-11-04 15:16:11
더보기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앤드류 양도 18세 이상 전 국민 1000불 기본소득 공약 제시했더군요
4차산업혁명시대, 생존권 보장은 기본소득이 주류인샘이네요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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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2019-11-04 13:25:59
더보기스님들에게 매월 50만원이 종단에서 지급된다면 아마도 대단히 바뀔 것같습니다.
분쟁도 훨씬 덜해져 더욱 청정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종단에서 합의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같지만...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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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농업을 포기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 오마이뉴스 모바일



독일이 농업을 포기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 오마이뉴스 모바일




독일이 농업을 포기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행복사회 유럽 27회] 농민끼리 협동하며 자치하는 슈바츠
정기석(tourmali)
등록 2015.10.26 



지금 우리 농촌 들판에는 난데없이 6차산업화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 농업의 돌파구가 열린다며 정부는 강변한다. 그러나 6차산업화의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보인다. 그곳에 농민은 없고 자본과 기업만 우뚝하다. 농업은 잘 안 보이고 공업과 서비스업만 무성하다.

그렇게 1차 농산물 재배는 없고 2차 농식품 제조와 3차 농촌관광과 유통 서비스만 있으니, 1곱하기 2곱하기 3을 해서 6차산업은 고사하고, 0곱하기 2곱하기 3을 하니 도로 0차 산업의 꼴이 된다. 2차와 3차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6차산업의 출발지점이자 바탕이 되어야 할 1차 산업이 비어있거나 모자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위장 6차산업'은 마치 공염불이나 신기루처럼 여겨진다.


정부의 느닷없는 6차산업 드라이브 정책에 6차의 의미와 의도를 잘 알 수 없는 농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입을 모아 불신과 우려의 목소리를 감추지 못 한다. "농촌의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제조·가공해 유통·판매·문화·체험·관광서비스와 연계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6차 산업에 대한 정의가 그저 막연하고 막막하다며 한숨을 쉰다.
무엇보다 '공동체농업과 농촌공동체' 방식을 '농정의 정도'로 알고 살아온 우리 농민들의 눈에는 왠지 옳고 바른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할 수 없는 남의 일처럼 들린다. 자본력과 기술력의 기업농을 내세운 6차산업화는 대다수의 소농, 가족농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다가온다.

참여하고 싶어도 대다수에게 문턱이 높은 정책은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름기지 올바른 정책이라면 자본이 모자라고 기술도 부족한 소농일지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정부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가진 자만 독과점할 수밖에 없는 정책은 정책이 아니고 어쩌면 특혜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6차산업화든 융복합산업이든 대농이나 기업농이 아니라 중소농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를 사업의 기반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 사업을 추진하고 지원할 농민이 주도하는 전문적이고 도덕적인 농업회의소 같은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하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현실적 주장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선진 농업경영체의 최적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1500명 농민들의 협동연대 경영체 '슈베뷔쉬 할 생산자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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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명의 농민생산자들의 협동경영체,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Gemeinschaft) - ⓒ 정기석

'할'이라 불리는 슈베비쉬 할(schwabiseh Hal|)은 독일 바덴-비텐베르크주의 작은 목가적 도시다. 인구는 3만6천 명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독일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 평가된다 경제는 주로 무역, 서비스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할' 지역은 호엔로에(Hohenlohe) 마을의 유기농업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하다. 그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맛난 음식은 나라 안팎의 관광객들을 지속적으로 호객하고 있다. 그 중심에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Gemeinschaft)이 있다. 조합의 기술지도사로 일하는 나드하 레온하드씨는 조합이 이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조합의 설립 목적 자체부터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삼았어요. 농업의 규모화나 기업화가 아니었어요. 1980년대 멸종위기의 재래종 돼지를 할 지방의 특산돼지로 되살리면서 조합의 역사가 시작됐어요. 1986년 설립 당시 불과 8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1500명 가까운 조합원이 모였어요. 연간 1억200만 유로(약 1400억 원)의 매출도 올리고 있고요.

조합의 회장은 설립 이래 연임하며 조합의 경영을 책임져 오늘날의 성과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가 중요하죠. 그리고 거기에 조합원들이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힘이 결합되었죠. 또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지역에 기여하는 사업철학과 전략도 변치 않았어요. 전통돼지 한 품목이 성공하면서 지역 전체의 경기가 살아났죠. 조합은 지역의 관광업체와 협력해 지역관광산업을 촉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어요."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역사는 돼지육종협회에서 출발한다. 1988년에 생산자조합을 결성하고 1992년에는 상장된 주식회사도 따로 설립하며 성장을 거듭한다. 조합과 별도로 공장의 운영주체인 주식회사를 굳이 따로 설립한 이유는, 생산자조합에서 고기를 수매해주면 세금문제가 원활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체 도축장, 소시지 가공장, 농민시장 등 1차 생산에서 2차 가공, 3차 직거래 유통에 이르는 이른바 6차산업화 과정을 내부 계열화했다. 이로써 지역 뿐 아니라 독일 전역을 대상으로 농식품을 판매하게 되면서 안정경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역직판장 뿐 아니라 독일의 고급호텔, 유명레스토랑, 기업체 식자재, 루프트한자 기내식 등에서 최우량 식자재로 대우받고 있다.

4000종 로컬푸드 복합 직판장 '호헨로에 농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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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0종 이상의 로컬푸드를 직판하는 호헨로에 농민시장 - ⓒ 정기석

이같은 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경쟁력은 한마디로 품질에서 나온다. 조합에 고용된 전문 기술지도사들이 수시로 생산자를 컨설팅하며 품질을 상향평준화시켰다. 유럽연합 최고 등급의 유기농 인증서 '외코테스트(Oekotest)'를 비롯해 Non-GMO 인증, 국제 표준규격, 독일농민협회(DLG) 골드라벨 인증 등 다양한 인증서가 조합 생산품의 품질과 진정성을 보증하고 있다.

심지어 원산지 스페인처럼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이베리코 돼지로 하몽(Jamon, 염장 건조 생햄)을 생산하기도 한다. EU의 지역특산물로 인정받은 암컷 슈베비쉬 헬리쉬 슈바인종과 수컷인 피에트램종을 교배한 돼지도 특별하다. 소시지 내용물은 당연히 지역농산물을 원재료로 한다. 지역에서 생산하지 않는 양념류는 루마니아, 인도 등의 생산지에서 현장 기술지도를 해서 생산한 것만 공수해 사용한다. 유해 식품첨가물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과는 다른 지역이나 조합에서 흉내낼 수 없는 차별화된 생산·가공 전략, 그리고 개발기술이 있어서 가능하다. 우리의 농식품부에 해당하는 독일의 소비자·식량 및 농림부 장관이 우수 사례지로 방문할 정도로 공인받고 있다.

"농민시장은 2007년에 문을 열었어요. 총면적 950㎡의 농민시장에서는 4000여 종류의 로컬푸드를 직거래 판매하고 있어요. 직판장 외에도 레스토랑, 허브가든, 빵가게, 지역여행사, 어린이 놀이터, 태양광발전소 등 복합시설을 함께 운영합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다보면 이 조합의 역할은 사실상 한국의 지역농협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만 독일에서는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자치하고, 한국은 사실상 행정이 관치하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사업 성과의 수혜자가 독일에서는 농민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한국에서는 농민은 소외되고 행정이나 농협이 차지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또 조합은 생산자에게 기술지도사를 통해 기술지도를 한다. 한국의 농업기술센터가 하는 일이다. 생산자는 기술지도 비용으로 연 550유로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그만큼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농민들은 생각한다. 모든 농민은 생산자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조합에서 가공·판매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주기 때문에 농민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다. 생산자가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농민들이 주인으로 자치하는 슈바츠군 농업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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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이 선거로 회장을 직선해 자치하는 슈바츠군 농업회의소 - ⓒ 정기석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동쪽 35km 지점의 로츠홀트지역에는 농민들이 자치하는 슈바츠 군단위 농업회의소가 있다. 티롤주 농업회의소 산하 3개 지역, 9개 시군 단위 농업회의소 가운데 하나다. 오스트리아의 다른 농업회의소와 마찬가지로, 농민 기술 지도, 농업정책 지원 등 우리의 농업기술센터의 역할을 대신한다. 오히려 지자체 관할이 아니라 지자체보다 상위의 기관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에는 우리의 농업기술센터 같은 기관은 굳이 필요없다.

농민은 모두 농업회의소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물론 연 40~100유로의 회비도 납부해야 한다. 업무와 책임은 어느 나라의 농정당국과 다를 바 없지만, 6년 임기의 회장은 정규 공무원이 아니라 농민들 손으로 직접 선출한 선출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오직 농민만 출마할 수 있다. 회의소의 직원은 명실공히 농업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다. 정년이 보장되는 준 공무원 신분이다. 농업회의소의 인건비 등 예산은 전액 정부에서 지원한다. 그러나 간섭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한국도 역시 농업회의소를 민관 거버넌스의 구체적 대안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성공적인 협치를 위한 전제조건인 행정의 태도 변화는 요원하다. 상근인력의 인건비 등 예산은 지원하지 않고 시범사업만 독촉하고 있다. 행정이 기존의 '갑'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슈바츠군의 사례를 따라할 필요가 있다. 관에서 먼저 목과 어깨의 힘을 빼지 않으면 농업회의소도, 민관거버넌스도 성공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가 이처럼 농민 자치기구인 농업회의소를 전면에 내세워 구현하려는 농정의 기조는 역시 '사람 사는 농촌'이다. '돈 버는 농업'이 아니다. 농업의 규모화나 현대화가 아니라 소농, 가족농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농촌은 온 국민의 휴양지, 농민은 온 국민의 별장지기"라는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농업의 10가지 기능, 독일이 농업을 지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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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과 황석중 연수단지도교수 - ⓒ 정기석

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은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서 본 듯한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즐겨입는다. 그만큼 농촌의 전통문화, 그리고 농부로서의 자긍심이 대단한 것이리라. 농민 출신으로 농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직선회장이다. 독일처럼 오스트리아도 농민이 농촌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있도록 지원하는 게 농정의 지상과제라고 강조한다.

"농가소득의 6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농민이 소를 기르지 않으면 나무가 무성해져 아름다운 농촌문화경관이 사라지게 되잖아요. 농민이 농촌을 떠나거나 농사를 포기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농민의 경관 유지 기능을 인정해 축산농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거죠."

오스트리아에서는 1ha 당 160유로, 고산지는 500유로로 차등지급한다. 경사지가 많은 산악지대로 갈수록 더 많이 지급한다. 그만큼 농업이나 주거여건이 열악해 농민들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산지대인 티롤지방은 1ha 당 800유로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황석중 연수단 지도교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토록 농업과 농촌과 농민을 보호하는 이유가 농업의 10가지 기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도 농업과 농촌과 농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10가지 기능 가운데 한 마디라도 틀린 말이 있다면 어디 한번 찾아보라. 나는 한 글자도 찾지 못했다.

하나, 농업은 우리의 식량을 보장한다.
둘, 농업은 우리 국민산업의 기반이 된다.
셋, 농업은 국민의 가계비 부담을 줄여준다.
넷, 농업은 우리의 문화경관을 보존한다.
다섯, 농업은 마을과 농촌공간을 유지한다.
여섯, 농업은 환경을 책임감 있게 다룬다.
일곱, 농업은 국민의 휴양공간을 만들어준다.
여덟, 농업은 값 비싼 공업원료 작물을 생산한다.
아홉, 농업은 에너지 문제 해결에 이바지 한다.
열, 농업은 흥미로운 직종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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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가지 농업의 기능이 지켜지는 독일의 전형적인 '사람 사는 농촌' 풍경 - ⓒ 정기석


○ 편집ㅣ박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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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세상읽기]내가 만일 촛불대통령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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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내가 만일 촛불대통령이라면




[세상읽기]내가 만일 촛불대통령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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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9.11.08.


아래로부터의 민생 요구는 분출하는데, 보수세력의 발목잡기 속 적폐청산은 갈수록 태산이다. 답답한 마음에 상상을 해본다. 내가 만일 촛불대통령이라면,

45년 전의 작고 가난한 나라 부탄처럼 더 이상 GDP(국민총생산)가 아닌 GNH(국민총행복)로 나라를 경영하겠다! 우리는 부탄보다 10배나 잘사니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나는 마을이장 너머의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첫째, 중립국 선언을 하고, 미국 트럼프가 요구하는 6조원 규모의 방위비를 거부한다. 약 3만명 미군을 집으로 보낸다. 이미 천문학적인 미군 주둔비와 국방비 등을 절약해 민생을 위한 농업, 교육, 복지, 평화통일 분야에 쓰겠다. 세계 중립국 동맹도 강화한다.

둘째, 대통령 욕도 모자라 ‘목’을 친다는 자, 거짓뉴스를 퍼뜨리는 세력, 촛불시민을 종북으로 몰아 계엄령을 공모한 자들을 척결한다. 촛불시민은 자유와 방종을 철저히 구분한다. 총선 땐 스웨덴처럼 정당에만 투표한다.


셋째, 모든 경제활동의 기본인 식량주권을 위해 농민·농촌을 살리는 정책(예를 들면 농민기본소득)을 편다. 현재 23%에 불과한 곡물자급률 100% 목표를 세우고, 특히 유기농업, 자연농업, 대안농업을 장려한다. 밥상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넷째, 한쪽에서는 과로와 일중독, 다른 쪽에서는 실업과 고용불안이 공존하는 모순을 고치고자 일자리 나누기(하루 4시간)를 한다. 없앨 일과 필요한 일도 엄격히 구분한다. 소득감소에도 민초의 삶이 여유롭게 주거비, 양육비, 교육비, 의료비 등을 온 사회가 분담한다.

다섯째, 재벌과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노동법, 환경법, 조세법 등을 철저히 적용한다. 위법, 탈법, 편법 사례 발견 시 ‘예외 없이’ 응당 조치를 하고 ‘3진 아웃제’를 실시, 경제와 사회의 건강성을 드높인다.

여섯째, 헌법 121조 ‘경자유전의 원칙’에 충실하게 농지 및 부동산 투기나 난개발, 자연훼손을 상시로 단속, 엄벌한다. 대신 공공의 땅을 싸게 임대해 주말농장·텃밭을 장려하고, 기후위기를 직시, 에너지 전환과 산·들·도로변 나무 심기를 지속한다.

일곱째, 학종과 정시 간 줄다리기게임에 빠진 대입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한국의 모든 대학을 K1~K100으로 재편, 공립화한다. 수능 70% 이상 학생은 합격하되, 소망·적성에 따라 5개 대학을 지원, 전자추첨으로 배정한다. 고졸 4년차와 대졸 초임을 같게 한다.

이 모두가 가능하려면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국정원, 공수처, 검경 등 이른바 공권력이 이 구상의 민주적 실현을 도와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촛불혁명 완성을 위해 위임된 것이니 민주주의의 수단일 뿐이다. ‘검찰개혁’ 역시 수사권이나 조직문화를 넘어 촛불혁명의 뜻대로 전 사회적 변화를 함께 이뤄야 마땅하다.

다른 하나는 대다수 민초의 뜻이 앞서 말한 ‘더불어 행복한 사회’로 모이는 것이다. 과연 우리 일반 시민들의 소망은 무엇인가? 만일 (50년 전 청년 전태일처럼) 나의 행복이 온 사회의 행복과 연결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즉 사회 전체의 행복 속에서 비로소 내 행복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의 행복’에 집착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야말로 우리가 없애려던 적폐 그 자체의 근본 토대 아닌가? 2016년 박근혜·최순실로 상징되는 국정농단 사태는 바로 그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의 행복’을 추구하던 이들이 재벌의 후원과 결합함으로써 발생한 일이었다. 돈과 권력이라는 이중의 중독! 천하무적 검찰과 다양한 스폰서의 결합, 권력중독에 빠진 국회의원과 자본의 유착 역시 같은 원리다. ‘조국 논란’ 당시 일부 건강한 분노의 바탕에는, 사회구조를 비판하던 이가 ‘자기 가족 행복’을 위해 기득권을 십분 활용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기득권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그러려면 단지 대통령 교체나 선거 승리라는 권력 지향적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 헌법에 나오듯 권력의 원천은 국민(민초) 자신이다. ‘피플 파워’가 중요하다. 파워는 단지 많이 모인다고 생기진 않는다. 이런 면에서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사람 수를 비교하는 건 그리 중요치 않다. 진정한 파워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떤 ‘가치’에 힘을 모으는지가 결정적이다. 자본의 가치가 아닌 인간의 가치, 파괴가 아닌 생명의 가치, 전쟁이 아닌 평화의 가치에 마음을 모으느냐, 이게 우리 미래를 좌우한다. 이런 가치 패러다임이 절박하다.

만일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가치로 나라를 경영할지, 각자 상상의 날개를 펴보자. 그리고 매주 토요일 동네 공원의 ‘자유발언대’에 올라 나름의 상상을 자유로이 말하는 운동을 펴자.

단, 폭언과 거짓, 비방은 절대 금지다!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04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이야기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이야기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유정길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 이야기 1

2004.04.29 / [불교정보센터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정토회의 유정길국장님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해외활동중이신 관계로, 국내에 왔었던 2월을 포함 서면인터뷰까지 포함해 여러차례의 인터뷰과정이 있었습니다. ‘개인 유정길에서 활동가 유정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씀을 듣다 보니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편집자 입장에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정길국장이“이렇게 속 시원하게 나와 정토회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한적이 없다”며 “가능하다면 원문을 그대로 살려달라”는 부탁말씀에 거듭 고민끝에 총 3회로 나누어 전문을 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소간 많은 분량입니다만 그 어디에서 다시 만나보기 어려운 흥미로움이 있을 듯 합니다. 사부대중 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불교정보센터]



한국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운동이나 불교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활동가의 이름을 한 번 들어 보았을지 모른다.



“유정길(본명 류길용)”,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의 사무국장이었던 사람. 그러던 어느날 사무국장직을 끝내더니만 불교환경교육원의 모단체인 ‘정토회’의 부엌살림을 책임지는 공양주가 되었던 사람. 그런데 그로부터 어느 순간 한국에서 사라져버렸던 사람. 노래 부르고, 놀기도 잘 놀았던 사람이고, 일도 무섭게 하던 사람. 그 사람은 한국에서 사라진 이후로 내내 미국의 침공과 탈레반의 붕괴 이후 재건의 길을 걷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었다.


지난 2월 그는 정토회 총회가 있어 잠시 한국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프간에서의 고생 때문인지 20Kg이나 빠져버린 날씬한 그를 만나 인터뷰를 부탁했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 때문에 인터뷰를 한번에 완결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음의 서면 인터뷰를 해줌으로써 이번의 만남을 완성해주었다. 불교 활동가들과 만나는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두 번째 편. 유정길(법운 법사) 님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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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작년 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들에게 근황을 알려주시는 것처럼 최근 살아오신 얘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일하는 곳은 아프가니스탄의 JTS로, 과거 ‘탈레반’의 거점이었던 ‘칸다하르’(편주 :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중심도시)를 중심적인 지원대상으로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지난 기간 이웃국가로 피난을 갔던 난민들이 파키스탄과 이란에서 다시돌아오고 있는데, 사실 이들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자국내 난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IDP)’(편주 : 해외로 피난하지 못하고 국내를 떠도는 난민들, 대개 해외난민들보다 사정이 열악하다)들입니다. 칸다하르에서 더 내려가 ‘레기스탄’이라는 큰 사막이 나오는데, 그 위쪽에 이들의 난민캠프가 있습니다. 이곳의 난민들은 탈레반 집권 기간 4-5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사막에서 칸다하르로 올라왔던 사람들입니다. JTS는 이들이 모여 있는 난민촌에서 학교 교육지원사업과 과부, 고아, 여성들의 직업교육지원 그리고 식량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불’ 북쪽 ‘사카르다라’ 마을에 병원과 다리, 학교를 짓는 마을공동체 개발사업을 하고 있으며, 카불시내의 전쟁고아나 거리의 아이들에 대한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족인 ‘하자라’들이 살고 있는 ‘바미안’의 와라스 지역에 대한 긴급구호사업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JTS가 지원하는 여러 지역 중에서도 특히 칸다하르는 자주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해서 현재 UN기구와 250여개의 외국 NGO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어 더욱 상황이 열악한 곳입니다. 가난한 아프간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이곳의 난민캠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카불 북쪽 사카르다라 마을의 다리, 병원, 학교 건설 사업의 복구(Rehabilitation)와 재건(Reconstruction)활동을 책임지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사로 돌아가 옛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법사님께서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본격적인 ‘운동으로써의 불교’를 하게 된 시발점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정토회 활동으로 오기까지의 신행사를 한 번 들려주시죠.



저는 79년부터 학생운동을 해왔고, 당시에는 교회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겐 ‘운동성’이 강하거나 종교내 진보적인 입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굳은 종교심이 없거나 종교를 그저 외피 정도로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랬지요. 종교가 단지 사회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서 운동의 보호막이 되어주는 일 외에 종교 그 자체는 운동에 별 도움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84년 학생운동 과정에서 수배생활을 한 7-8개월 하게 되었는데, 하도 힘들어서 이때 어느 지인에게 머무를 수 있을 만한 좋은 곳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절을 소개해 주어서 아주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불교를 전혀 모르는 저에겐 산속 아늑한 곳에서 공부하면서 도인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지낼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는데, 실제 데려간 곳이 서울시내 신림동에 있는 모선원이었습니다. 크게 실망했지요. 그러나 도피생활이 지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법륜스님(당시 최석호 법사)를 위시한 비슷한 또래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비슷한 경력의 사람들이 약 20여명 관계되어 활동하고 있더군요. 알고보니 다들 당시의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참 쟁쟁한 친구들이었어요. 당시에 법륜스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다들 함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륜스님에게는 그들을 묶는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졸지에 절에서 기도생활을 한 달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자체에 대해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고, 더구나 종교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시덥지 않게 생각하던 제가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는 천수경과, 능엄신주까지 하는 사분정근이며, 매회 한 500배 정도 절을 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함께 일하는 분들이 해인사로 청소년 수련대회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었습니다. 한 700명의 청소년이 참여했는데 거기서 어쩔수 없이 고3 담임을 맡게 되었고, 마지막날 3,000배를 한다길래 담임인 제가 안할 수 없어 따라 하게 되었었습니다. 처음엔 시늉만하다가 들어가 자려고 한 저에게 법륜스님은 순간순간 아주 이상한 이야기(당시에는)로 오기와 분심을 갖게하면서 포기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도는 새벽 4시에 되어서야 다 끝났습니다. 그후 또 잠은 재우지 않고 어느 절에 올라간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같이 올라갔습니다. 웬 노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길래 알게 뭐냐고 구석 기둥에서 잠을 잤지요. 나중에야 알고보니 그분이 성철스님이셨더군요. 그래서 이후 법륜스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때 삼천배 기도 공덕으로 지금 이런 일을 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이후 다시 수배생활하면서 시위를 준비하고 일을 만들고 하다가 결국 구속되어 서대문, 안양, 전주교도소를 거쳐 1년만에 나왔습니다. 출소 후에 당시에 일상적이었던 공장에 들어가려고 용접을 6개월간 배웠습니다. 이후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로동 공단 근처에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당시에 법륜스님과 함께 일하던 동료인 박수일 법사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일하는 비원포교원에 갔다가 책 만드는 일과 대불련 수련교육을 도우면서 조금씩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저에게 예상하지도 못한 인생의 전환이었습니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내게 불교공부는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전환이었다"



당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정말 눈이 확뜨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거지요. 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1학년때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다니길 그만두었지만, 종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 나에게 불교는 충격이자 운동적인 고뇌의 깊이를 심연 깊숙이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세계관의 지평을 새롭게 넓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일하지만 우리 도반들의 팀웍이 아주 좋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보았던 기라성같은 운동선배들이나 어느 사회운동조직보다 훨씬 수준과 질이 높았습니다. 그것도 큰 놀라움이었지요.

















그 이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계속 활동을 함께 해왔습니다. 당시에 대불련 교육이나 청년회의 교육수련, 불교 내의 운동이나 ‘청년여래회’를 만들고 스님들에 대한 사회과학세미나 등을 지원하면서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의 실무책임을 맞게 되었지요. 당시에 법륜스님을 비롯하여 우리 도반들의 팀웍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들 너무도 잘나서 주체못하는 젊은 열혈운동가들 속에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도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바로 그 다양하고 다른 성격이 오히려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법륜스님은 이 애물단지들을 건사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을 겁니다. 크고 작은 내부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법륜스님의 놀라운 통합력과 지도력, 위기관리능력은 우리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지금 내가 함께 하는 힘은 대부분 우리 도반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 도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90년 동구와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긴 고뇌의 시간을 갖었습니다. 당시 변화를 어느 규모로 인식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번의 변화가 세계의 대단한 지각변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을 위해 우리 정도의 규모에서 대안적인 모색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약 3년간 활동을 중단하면서 정말 징그럽게 많이 토론하고 논의했습니다. 한달에 약 보름이상은 합숙하면서 토론하고, 과거에 보지 못했던 세계관이나 관점에 대한 검토와 학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색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속하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중단하고, 새롭게 출발한 관점으로 밑그림을 그릴 것인가로 오랫동안 논의하다가, 활동을 전면중단하고 집중적인 고민을 해야한다는 문제의식에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90년 초기에 정토회가 운동을 포기했느니, 변절했느니하는 하는 욕을 불교의 진보진영 내에서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다 법륜스님의 승적문제가 또 문제가 되어 업친데 덥친격으로 보수진영의 욕까지 덤으로 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부 논의는 그정도에 흔들린 가벼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각자 최소한 10여년이 넘게 전 삶을 운동에 집중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나름대로 참으로 오랜 논의와 신중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비난과 오해에 일일이 우리의 과정을 해명을 할까 생각했지만, 운동가는 운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그걸 말로 설명하고 다니는 것은 운동가의 자세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삶을 믿는 것이지 말을 믿는 것은 아니며, 행동과 활동으로 확인시키면되지 짧은시간의 억울함을 해소하겠다고 여기저기 설득하면서 다니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튼 이후 우리는 나름대로 큰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근 90여년간 지속되어온 하나의 이념적 지형이 붕괴한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당시 이 교훈을 심각하게 고민은 하면서 다소 나른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전 삶을 바쳤던 신념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인거지요.



실제 사회주의 붕괴를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사회구성체가 변했다고 해도 그것을 이끌어가는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그 사회는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결국 자신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는 나뉠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명제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수행과 운동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불교의 종교적 용어가 아니고 보편적인 일반을 위한 용어이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 자신이 변한만큼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 만큼 일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변화는 그만큼 중요한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불교적으로 더 깊어지기 시작한거지요. 그러면서 훨씬 대안운동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번 한 생을 안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정진...1992년부터 결사시작"



그리고 비전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비전과 대안을 만드는 창조의 과제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고민과 논의에 대해 무한대로 열어놓고 경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사회론을 펼치는 사람, 통일에 대한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 도인, 물리학자, 경제학, 인류학 등, 관련된 별아별 사람들은 만났고, 길게는 1-2년, 짧게는 1-2달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함께 토론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도반들은 자신의 삶을 두고 하는 고민이어서 비전의 불투명성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과정에서 그 비전을 모색하고 창조해야 하는 주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 과거처럼 한가지의 담론으로 일사불란하게 정리되거나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대안창조의 상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외피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기도하고 수행하며 스스로 보살의 삶에 대한 깊은 자기결단이 있지 않으면 멀어져가는 이상과 구체화되는 현실의 어려움을 관통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도반들이 윤회를 거듭하는 생에서 이번 한 생을 안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정진해보자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10,000일 즉 30년 정도 원력을 갖고 힘을 모으면 큰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발전적인 물꼬를 터놓는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1992년부터 결사를 시작하고 활동을 하게 된 겁니다.



/활동가로 일하시면서 개인적으로 일에 대한 의심이나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는 무디고 더딘 편입니다. 하나를 포기하고 선택할 때는 누구보다 늦는 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진아이지요. 아무튼 과정에서 고민을 오랫동안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일단 선택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선택과 포기가 분명한 편이지요. 그러나 저는 돈을 못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고 싶은 일을 나만큼 많이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나만큼 많이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일로 만듭니다. 집단의 원(願)과 개인의 원(願)을 일치시켜면 그건 일(Labour)이 아니게 됩니다. 재미있는 놀이(Recreation)이지요. 노는데 출퇴근이나 휴일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잖습니까? 그리고 조금 견해가 달라도 함께 결정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전화시킵니다. 즐기지 않으면 이런 일 오래할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포기하면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이 즐거움을 몰라서하는 소리지요.















저는 일단 경제적 이해관계의 세계를 떠나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일을 하면 제 주변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자신들의 일상생활은 돈에 찌들었을지라도 대부분 저에게 올때는 경제적 동기보다는 선(善)의지를 갖고 옵니다. 환경문제에 관심있거나 이웃을 돕는 일에 관심있어서 오지요. 그 분들이 자원활동을 하거나, 열성적으로 모금하시는 분, 집에서 지독스럽게 환경실천을 하거나, 근 10여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부가 새벽기도을 하면서 정토회에서 자원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 너무도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토록 열심히 북한동포나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직장 끝나고 모금하는 활동가 도반들이나 신도님들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이런 일하면 좋은 사람들만 만납니다. 감동적인 사람들만 만나요. 그리고 감동의 감각이 발달합니다. 그래서 나누기 할 때 사소한 것에도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그저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수많은 감동을 누리며 사는 일은 정말 행복한 일이지요. 정토회는 그 감동의 에너지가 만들어가는 조직입니다. 저는 사회운동은 항상 아트(Art)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모두 아트입니다. 감동을 생산하고 그 감동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니까요. 이제 저항 속에 너무 활동이 비장하면 고뇌에 찬 소수의 높은 결의 수준의 사람밖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의미와 감동, 내용과 재미가 에너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농담삼아 ‘조직의 쓴 맛’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조직이든 유지되는 것은 ‘조직의 단맛’ 때문입니다. 단맛이 워낙 좋기 때문에 약간의 쓴맛은 단맛을 누리기 위한 투자이자 일종의 ‘기회비용’라고 생각하지요. 그 감동과 재미가 단맛입니다.



/교육원 활동을 마치시고 정토회의 공양주가 되셨었는데 전성기의 활동가가 일선에서 떠나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글쎄요 저는 항상 전성기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도 아프간의 맑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생각해보면 지금이야 말로 나에게 최고의 시기, 최상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공양주는 그동안 제가 정토회에서는 선배축에 속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노고로 매일 밥을 얻어먹으면서 저는 드러나는 일만 했습니다. 표나고 드러나는 일은 공덕을 깍아 먹는 일인 것 같아요. 공덕을 쌓아야지요. 더 오래 일을 잘하려면 많은 사람을 대접하고 모시는 일을 많이 해야하는데 정토회에서 그동안 계속 부문에서 대장노릇만 해 온 것같아서 공양간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음공부도 많이 된다고 해서...



"아이의 인생을 우리의 취향때문에 희생해선 안돼...2세 생각하지 않아...



정토회는 1,000일(약3년)마다 전체활동을 모두 내려놓고 처음상태(Zero Point)에 놓고 전면 검토합니다. 그리고 그때 모든 사람들의 보직이 해임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바른 방향인지를 전면 검토하면서 없앨 것은 과감히 없애고 새로 만들 것은 새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그 일에 정말 맞는지를 검토해서 다시 배치됩니다. 설령 다시 같은 직책이 주어져도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속 2회 (2,000일)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조건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약 10년간 환경관련 활동을 해왔고 바꿔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공양간을 자청했고 도반들이 동의해주었습니다. 이런 방식도 오랜 토론을 통해 정착된 겁니다.



사람이 한분야에 활동을 오래하면 개인의 인맥과 활동의 노하우(Knowhow)가 생겨 훨씬 효율적이고 그 분야에 전문적이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의식이 생깁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로 옮기면 과거의 활동경험이 토대가 되어 훨씬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그 일과 분야가 새롭게 활성화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한사람이 너무오래 일을 하면 후배들의 지도력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책임지는 기회를 갖는 것이 지도력 훈련에 가장 좋은 방법이잖습니까?



/공양주가 된 것도 특별한 일이었지만 또 어느날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에 가신 것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프간으로 가시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습니까?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곳에 답사를 다녀온 도반들의 보고를 듣고는, 사람을 보내는데 일단 저도 고려는 해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3년 공양주를 해야하는데, 왠만하면 안보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일단 가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더욱 시급히 필요하다니 그냥 간거지요.



과거 7-80년대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이 현장으로 현장으로를 외쳤습니다. 아무튼 저도 그동안 20대의 사회운동의 에너지로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이제 40대 중반, 앞으로 스스로 새로운 에너지로서의 현장활동 바닥경험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어느새 시민사회단체 내에서 책임과 비중이 높아지고 사회적인 위치가 생긴 것 같아요. 더 있으면 아마도 많은 걸 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가 저에게 중요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 새로운 바닥에서 저의 능력을 점검해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셨지만 해외파견근무로 부인과 같이할 시간이 많지 않으시겠습니다. 부부 양쪽 다 현직 활동가인 경우인데 결혼생활과 불교운동이 긴장관계에 처하는 일은 없으신가요? (류정길씨의 부인은 현재 한국JTS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인 이지현(덕생법사)씨이다)



같이 일하고 경험세계가 같으니까 훨씬 편합니다. 내가 성격이 모난 편이어서 가끔 불평을 하지만, 덕생법사님은 별로 그렇지 않아요. 아니다. 요즘 내 건강문제 때문에 조금 잔소리는 많아지고 있어요. 사소한 것은 가끔 있지만 특별한 긴장은 없어요. 제 처는 저의 스승이자 도반입니다. 잘 모셔야 하는데... 그러진 못해요. 아무튼 항상 고맙게 생각하지요.



우리가 결혼한 지 15년되었습니다. 그동안 떨어져 산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이즈음에서 떨어져 살아보는 것도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상대에 대한 존재감, 고마움을 새삼 확인하는 좋은 기회인 것같아요.



아프간 사람들이 제 처에 대해서 물으면 제 처가 저의 보스(Boss)라고 합니다. JTS 실무책임자니까요. 아프간의 여성은 부루카를 쓰고 다기며 가족 이외의 남자들과 얼굴도 마주치면 안됩니다. 사회활동을 하기는 더더욱 어려운데, 제가 부인에게 지시(Order)를 받는다고 하면 아주 재미있어해요.



/장기간 해외파견근무를 하시는 것인데 이후의 출산의 문제나 자녀양육, 자녀교육의 문제 등에 대해 계획이 있으신지요. 어떤 정토회적인 해결방식이라도 있으신지?



저는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편입니다. 나의 삶은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에 고스란히 투입하고 싶어요. 그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 처도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은 못하면서 참으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다보니, 아이들의 문제는 뒤로 처지더군요.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이를 잘 건사하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야 자기의 판단으로 삶을 선택했다지만, 아이의 경우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 삶이 규정되는데, 그 과보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아이의 인생을 우리의 취향 때문에 희생하게 만들어도 안되지만, 우리처럼 돈 안벌고 살려는 사람에게 그것은 아이에게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 처도 능력이 있어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정토회에서 조건이 되면 아이문제나 부모문제도 공동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실제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지요. 단지 개인의 욕망을 잘 들여다 보라고 서로 이야기는 할 뿐, 정토회에서 해결방식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지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다음편에는 '유정길 그리고 정토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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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 그리고 정토회 2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유정길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2004.05.03 / [불교정보센터]





/‘정토회는 이런곳이다’ 라고 쉽게 설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단체든 '조직'이라는 틀을 만들게 되면 경계가 생기는 거지요. 조직의 안과 밖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조직적인 결속이 강할수록, 원력이나 의지가 강할수록 구심력의 에너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것은 밖에서 보면 그 경계가 강해서 폐쇄적이라고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적인 전혀 새로운 신행과 인간관계, 활동기풍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토회는 공동체입니다. 수행공동체이자, 사회운동공동체, 생활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현재 60여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활동이 결합되어 있는 단체입니다. 또한 사회운동과 개인의 수행을 아주 깊이 강조하는 단체입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일보다 수행을 강조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지요. 또 한편으로 활동보다 공동체 생활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냥 사회운동에만 관심있는 사람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수행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수행을 운동처럼 해야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존의 관행적인 신행을 기대하는 일반불교 신도들도 함께하기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운동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의 3,000여 신도들은 대부분 환경운동이나 평화통일관련 활동, 제3세계 지원활동에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서울정토회관에는 약 200여명을 포함하여 전국의 300여명의 활동가들이 일합니다. 이들 중 2/3가 학생, 직장인, 주부와 회사원들입니다. 때로는 풀타임, 파트타임, 무기한, 한정된 기한 동안의 활동을 합니다. 이들이 자신들이 직접 활동을 기획하고 시행하고 모금하고 평가하고 회의를 만들어나갑니다. 지금 우리는 활동가도 신도도 크게 구분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행과 깨달음의 내용을 강조하지만 불교임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식구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만 아무런 갈등 없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는 기본적으로 ‘나눔’의 문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나눔은 각자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보와 경험을 나누며 기분과 정서, 지혜와 지식까지 함께 나눕니다. 외부에서 개인에게 들어오는 어떤 선물이나 물건도 방침없이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누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음나누기’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정토회에서 생활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입니다. ‘나누기’라는 형태로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함께 공유하기도 합니다. 이 ‘마음나누기’는 사업과 일에 대한 토론만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면서 사소하게 올라오는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대해 솔직하고 거침없이 나눕니다. 하루 시작하고 끝날 때, 일이 시작되거나 끝날 때마다 전체 혹은 부서별 나누기를 합니다. 작업시의 나누기는 한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끌고 지시하지 않고 나누기를 통해 각자의 방식을 제안하고 함께 공감대를 얻으면 그대로 채택됩니다. 모든 논의에서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직위가 있거나 없거나 스님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하나의 대등한 의견으로 간주됩니다.

정토회에는 법륜스님과 유수스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회의 때에는 모두가 똑같이 대등합니다. 차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많은 정보가 집중되어 있고 경험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모두 존중하지요. 그리고 한가지 일을 할 때는 명확하게 책임선이 있고 스님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라줍니다.

우리는 10,000일 결사과정을 1,000일로 나눕니다. 매 1,000일마다 모든 일을 내려놓습니다. 사업의 방향과 보직까지 모두 내려놓는 거지요.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검토합니다. 그래서 방침이나 방향이 발전 변화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시 1,000일을 100일로 나누어 매 100일마다 전국의 결사자들이 전부 모입니다. 그래서 매일하는 아침기도와 수행을 점검하고 사회실천과제가 주어집니다. 그 실천 결과는 다음 100일에 보고하고 또 다음 실천과제가 주어집니다. 그 실천은 쓰레기 제로를 위한 환경실천, 통일관련 평화운동, 옷모으기, 모금하기, 자원봉사참여하기 등 신도대중들이 일상 속에 실천하도록 아주 다양하게 실시 되었습니다.



또한 매월 모든 실무자들은 ‘포살법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월 1회 ‘울력’이 있습니다. 또한 6개월에 1회 ‘자자법회’도 참여합니다. 모든 토론의 결정은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전통인 삼의제(三議制)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이 정착되기까지 지난 15년간 100여명의 활동가들이 만들어놓은 토론 기록은 아마 한 사람이 평생 보아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일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논의 속에 지금의 모양을 갖춘 것은, 정토회의 자산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자산일 수 있고, 사회운동의 자산, 불교 내의 자산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회단체들에서 정토회의 수행과 운동방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직접 공동체에 살아보려고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동체로서의 정토회’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회운동단체로서의 정토회만 알 뿐, 공동체로서의 정토회, 수행단체로서의 정토회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오랜동안 많은 좌절과 실패, 성공과 성취, 작은 변화에서 급격한 변화까지를 내부에서 만들어오면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점검과 단련과정을 통해 다져진 부분에서 나온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지금 현재도 정토회는 완성태가 아닙니다. 현재도 많은 과제가 남아 있고 변화의 과정에 있으며 계속 변할 것입니다. 아무튼 정토회는 수행과 보시, 봉사를 실질적으로 벌이는 수행공동체이며 사회활동단체입니다.


/아는 분들은 ‘법운(法雲)’ 법사님으로 호칭하시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은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이후 교육원)의 ‘유정길 국장’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육원 시절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그리고 일찍부터 환경을 운동주제를 선택하게 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처음에는 한국불교사회교육원 사무국장이었지요. 그때 주로 불교내의 대학생교육, 청년교육을 했고, 여성문제를 위한 여성운동관련교육, 민족불교학당, 그리고 스님에 대한 사회과학학습을 했습니다. 이후 민족불교학당출신들이 청년여래회를 만들어 불교내 사회단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활동했던 환상적인 단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참 정이 많이 가는 아끼는 도반들이지요. 그러다가 90년 환경문제로 관심을 돌려 이름을 한국불교환경교육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에 90년 초, 법륜스님이 ‘환경문제가 네가 그동안 알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훨씬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문제니까 관심을 갖고 활동을 준비해보라’고 권하셨고 오랫동안 설득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운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저에게 환경운동은 그저 운동적 결의수준이 높지 못한 사람들의 변방의 활동정도로 인식했었기 때문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깊은 조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같아서 다시 진중하게 받아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환경운동이 내가 알고 있는 환경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의식화의 중심내용이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이나 김민기씨나 김종철 선생님이나 생명운동을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환경운동하자고 강변하는게 아니거든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양쪽 모두 잘먹고 잘사는 것 그리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가 좋은 것이고 그것이 곧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분배방식으로 서로 우열을 다투는 문제였다면,

환경운동처럼 드러나보이는 생명운동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 해 온 근본전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되는 근본전제는 인간의 경제성장을 위해 자연(혹 자원)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중심이고, 인간을 위해 모든 자원이나 생명은 종속되거나 복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소위 ‘위기’라는 말을 쓰는 것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 앞에 다른 많은 문제는 2차화됩니다. 그 위기의 내용은 공멸의 메시지입니다. 그속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죽임의 관계와 문화가 보편화된 것지요. 그래서 생명운동 앞에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체제경쟁은 ‘그놈이 그놈인 싸움’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는 모든 활동이 생명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환경운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환경운동이라는 외피(?)를 쓴 근본주의적 생명운동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타인을 죽이고 다른 생명과 자연을 죽이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만다는 것은 이제 깊은 통찰까지도 필요없는 일상적인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운동은 완전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명운동 속에서 펄펄살아 가슴에 깊이 꽂히기 시작하더군요.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전혀 달라지고, 일을 펼치는 방법, 작은 계획을 수행하는 방법 모두 달라지는 겁니다. 당시 사회운동에는 과거의 맑시즘적 앙금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를 조직화하거나 저항을 동력화하는 것이 예전의 운동방식이라면 이제 그것은 낡은 것입니다. 분노와 저항은 단기간의 파괴의 에너지는 될지 모르지만, 전 삶을 던지면서 오랜기간동안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분노와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고 피폐되기 때문입니다. 네거티브 에너지는 창조와 건설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게 기뻐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거 아닙니까, 내가 일하면서 힘들어하는데 누가 그런 일을 따라오려고 하겠어요.

제가 하는 일이 과거 불교환경교육원 시절에는 환경운동이었다가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구호활동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때도 생명운동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과거에는 환경운동처럼 드러났고 지금은 구호활동처럼 보일 뿐입니다. 정토회도 마찬가집니다. 환경운동, 평화운동, 제3세계구호운동, 수행운동 모두 실은 하나의 다른 표현형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진보라고 바라보는 한 그것은 결국 죽임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신성은 피폐해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려는 것’이 과거의 가치라면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진보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깨달음의 가치는 풍요롭게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사회진화(진보가 아니고)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골고루 가난하게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나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개인이 사는 거지요.





/불교계 일반에서 정토회에 대해서 얘기들을 많이 하면서도 정작 정토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정토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점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게 있습니까?

그거야 정토회는 폐쇄적이다. 스님이 승적이 없다. 그런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저도 처음엔 외부의 그런 오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한편 그러한 비난도 우리가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폐쇄적입니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의지가 강하다보니 그리 보이는 거지요. 우리는 아무나 쉽게와서 쉽게가는 조직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절차가 있고 공감대를 얻는 공동체적 경험을 해야만 그만큼 책임있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폐쇄적이지만, 바로 그 점이 우리의 초발심의 순수성을 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 폐쇄적이라는 비판은 우리와 자주 접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견지동’적 시각이 아닌가 싶어요. 직접 한번 와 본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잘안합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원력을 갖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일할 수 있게 열려있는 곳이 정토회입니다. 정토회는 전국적으로 한 3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경우에는 일하고 싶어도 소수의 사람들만 하지 다수의 일반적인 대중은 그저 돈내는 것이외에 접근하기 어렵잖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일하고 싶은 누구나 어느 조건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하게 합니다. 상근실무자들은 그 사람들의 일감을 만들어주고 조정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예요. 이런 단체를 폐쇄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예전엔 승적문제 때문에 답답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스님이 승적이 있으면 있는데로 좋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문제삼지는 않습니다.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있으면 아마도 종단이나 불교공식기구의 수많은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을테고, 그려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을 만드는데 변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지요. 처처심심(處處心心), 처한 조건대로 살아야지요.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없는데로 살아야지요. 오해하면 어쩔 수 없지요. 받으면서 살아야지요. 욕 안먹고 살 수 있나요. 그것도 큰 욕심이지...


/정토회의 활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활발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외부에서의 기대 또한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 대중이 쉽게 참여할 수는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법사님이 하시는 일을 존경해도 법사님처럼 전일적으로 활동을 하기에는 현실적인 고려사항들이 많습니다. 특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크게 의미를 가지기 힘든건 아닐까요?

특수하지 않은게 있나요. 개개인 모두 특수한 존재입니다. 한 개인 개인을 각자 주의깊게 살펴보면 남이 따라할 수 없는 아주 특수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한 사람들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특수 속에 일반이 있고 일반 속에 특수가 있습니다. 한 개인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면 누구에게나 관념적으로 가능합니다. 단지 선택하지 않을 뿐이지요. 우리가 특별하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사회운동에 자신을 투신했던 사람들은 일반인이 볼 때 모두 특수한 별종의 사람들이었지요. 학교를 잘리거나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거나 했잖아요. 특수한 거지요. 그러나 정작 개인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는게 있기나 한건가요. 하나하나 모두가 특수하지요. 들판에 피어있는 풀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하나같이 모양이 다릅니다. 바로 그 점이 감동스러운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백인이나 흑인들을 볼 때 처음에는 누가누군지 구분 못하지만 조금 지나면 하나하나 아주 특별하고 영판 다르다는 것, 같은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겁니다. 다른 사람이 정토회를 볼 때도 불교신행단체, 혹은 운동단체와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도 다른 단체가 다른 것만큼 다르고, 같은 것만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대중이 쉽게 참여하는 운동을 기조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 통일운동, 제3세계 지원운동 모두가 몇몇 특별한 전문적 활동가들 중심의 활동을 포기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한 예로 환경교육원의 경우, 그동안은 환경교육과 생명운동에 대한 지역네트워크 및 이념개발과 공동체운동 등에 초점을 맞춰 활동을 했지만, 지난 1,000일 입재부터 방향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래서 다수가 참여하는 대중참여 운동방식으로 생태적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변화를 중요한 내용으로 쓰레기 제로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환경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실천해보고 안되면 주장하지 말자는 모토입니다. 그래서 실제 수많은 신도대중들이 참여하다보니 참으로 다양하고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와서 실천되고 있으며 그속에서 사례와 모범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신도대중들은 모두 최소한 일주일 2시간 이상씩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전국적으로 300명 정도가 완전상근하거나, 최소 일주일에 3일 이상 전일로 활동하고 대부분은 자신의 직장이나 집에서 아니면 법당에서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 외에도 매 100일마다 기도회향과 입재를 합니다. 그때마다 모든 대중들에게 사회적 실천과제가 나갑니다. 그것이 다음 100일에 실천보고회를 갖고 또 다음 실천과제가 나가지요. 이 정도면 어느 단체보다 대중이 쉽게 많이 참여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요즘 들어서 정토회의 사회적 활동이 많아질수록 기대감을 갖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더군요. 우리가 사회운동 내에서 혹은 불교 내에서 요구되는 많은 일이 있지만 물론 많이 못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그 정도의 단체가 이것도 하지 안다니... ”라면서 욕도 많이 먹을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우리의 기조를 정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나 운동은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며 깊이 공감하고 마음으로 참여하고 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단지 우리만 할 수 있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될 일을 되게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활동 기조입니다.



과거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강력한 파괴력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전노련, 전학련... 등 ’전‘자 돌림의 일사불란한 집단적 규합이 필요하고 그 범역에 포함되지 않으면 전선이 그어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비전과 생태적인 창조의 시기에는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로 규합되는 에너지도 필요하지만, 낫낫히 쪼개지는 다양성의 에너지가 훨씬 비전의 풍성함을 갖게 합니다. 기대는 하시겠지만, 그 만큼 실망도 돌려드릴 것 같군요.



아무튼 불교 내에서 우리같은 단체가 없는 것보다 있는게 낫잖아요? 우리로 인해서 불교가 욕을 먹었다든가 불교에 해를 끼쳤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뭔가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단체가 많은 수록 좋은거지요. 단지 변방에서의 비난이 아니라 불교나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불교 내, 사회운동내 에서 하는 좋은 일들은 모두가 의미있고 소중하지 않을까요?





/정토회는 조계종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조계종에 포함되려하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계 내부적으로 개혁해야 하고 고쳐져야 될 모습이 많은 시점에서 정토회는 왜 밖으로만 가고 겉에서만 바쁜 걸까요?



실제 정토회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분들의 기반은 대불련 출신의 비교적 선배그룹들이라서 조계종의 연줄이 많습니다. 저희 법당은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러나 사회활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구태여 조계종이라고 범역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할 필요도 없구요. 운동은 단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하는 거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보였나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안이다 밖이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안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분에게는 밖처럼 보였겠지요.



그리고 교계 내부개혁은 종단개혁을 말하는 것같군요. 불교는 정법안장하는 종교아닙니까? 정말 올바른 법을 수호하고 깨달음을 얻고 수행해 나가는 것,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자리를 찾아 살아가며, 그렇게 살려는 것이 개혁이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중 일부분도 80년대 초반에 내부개혁과정에 적극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 교계내부의 개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거 사회운동처럼 파괴와 타도를 중심으로 한다면 단체들이 집결해야 할겁니다. 그러나 개혁을 정치개혁처럼, 정치적인 논리로 바라보는 것은 정치혁명은 될지 모르지만, 종교개혁은 아니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종교적 근본성에 올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누가 개혁하는가,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개혁하는가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혁하는 사람들이 정말 개혁적인가, 그리고 충분히 대안적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반복에 불과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개혁하면 뭔가 저항과 반대의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종단과 제도’라는 한정된 공간의 변화만이 연상됩니다. 저는 종단과 제도의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보고 실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개혁을 종단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겁니다. 사회에서 한 문제가 발생하면 실은 전체 모든 사람 속에 베어있는 문제입니다. 개혁은 종단도 있지만, 불교 내 곳곳에서 올바른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과정도 개혁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형식의 변화를 수반할 내용과 정신의 회복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구조의 변화와 개인의 변화, 제도의 변화와 정신의 올바로 섬, 이것이 함께 하는 것이 개혁이며 저희가 90년대 사회변혁과 관련해서 고민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개혁은 종단만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종단이 문제가 있다면 승재가 우리 모두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은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개혁은 비판과 종단변화의 과정도 필요하지만, 올바른 방향에 대한 대안과 비전에 대한 모색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단체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지요. 많은 단체들이 분담을 해야합니다. 종단을 건강하게 만드는 단체들은 참 소중합니다. 우리는 관심있지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분들이 해야 할, 못하고 있는 한 부분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것도 저는 큰 불교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정토회의 사회변화의 전략은 일종의 ‘틈’전략입니다. 모든 변화는 실제 이 ‘틈’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변방에서 시작하지요. 모든 주류의 시작은 언제나 그 출발은 변방입니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로 전면 장악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반자본주의적 인간적, 공동체적 ‘틈’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걸 발견해서 확장시켜 나가면서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나가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이 안에 신경쓸 때 누군가 밖의 일하는 단체도 필요하잖아요.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단체는 그 자리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있는 겁니다. 중심과 주변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중심에 집착하고 강조하게 됩니다. 실제 뭐가 중심이고 어디가 주변인가요. 중심과 주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계적 사고에 빠져있는 것이며 다양성의 관점이 아닙니다.

/운동가로써의 활동경력도 있고, 지난 기간 많은 인맥과 경험을 쌓아오셨기에 정토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정토회말고 다른 곳으로의 유혹을 받거나 한 눈을 파신 적은 없으신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여전히 정토회를 고집하고 계신 이유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우리는 모두가 정말 많은 과정을 거쳐 함께 만들어 온 단체입니다. 오랫동안 도반들이 함께 만들었지요. 그속에 저도 포함됩니다. 제가 만들었고, 제 스타일로 일이 진행되는데 달리 다른 곳을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단지 나른해지지 않기 위해서 정진하려고 할 뿐입니다. 함께 일한 도반들간의 애정, 그리고 부처님 법의 기쁨을 나누고, 사회적 열정을 갖는 이 곳이 저에게 참 과분한 곳이지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다음편에는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유정길편의 마지막, '유정길이 말하는 활동가의 삶'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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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이 말하는 활동가의 삶 3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 유정길 (마지막 편)

2004.05.07 / [불교정보센터]



/오랜기간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불교운동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제가 워낙 성격이 괴팍하고 미련하다보니 20년간 활동하면서 주변사람들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보고 인상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본데 실제 제 성격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몰아 부치고 혹독한 편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실무자이자 도반들은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지요.

예전에 환경교육원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간사들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6명이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보통 기가 ‘센’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회의는 언제나 전쟁이었지요. 한치도 자신의 의견을 접지 않았고 작은 일 조차도 세계관과 관점의 차이까지를 토론했어야 했으니까요. 그 과정에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싸우면서 깊이 정이 들고 함께 계속 일을 해갈 수 있었습니다. 실무자 잘못 얻으면, 애물단지고 상전하나 모시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게 저에겐 큰 수행이 되었지요. 그럼에도 참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싸우는 것도 에너지가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제가 그 일의 주체라고 생각하면 실은 아무리 힘들게 한다고 해도 저의 일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사람입니다. 정말 고맙지요.




아무튼 그후 5-7년을 함께 일하다가, 그 중 한 여성간사분은 결혼해서 한 생협에서 출중한 환경활동가로 일하면서 정토회의 일을 돕고 있고, 또 그들 중 두 명은 박사학위를 받고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곳은 기독교 단체이지만 생명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내용적으로 함께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 곳에서 우리단체 출신들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지금 다른 형태로 관계를 맺고 정토회 일을 돕고 있지요. 지금 만나면 서로 어쩔줄 모르고 반가워하고 좋아하며 연락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그리고 부산의 한 교수님과 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겨울방학에 아예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몇 달간 정토회의 전문적 일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정토회가 고향입니다. 모두 친구이자, 형 동생이고 가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정토회에서 일하고 있고, 거쳐갔습니다.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정토회에 상근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단체에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관계맺는 방식이 변화되었을 뿐 다양한 형태로 정토회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활동가들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저같은 젊은 사람에게 매우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현장의 최일선에서만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과 운동에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신지요.

정토회와는 달리 많은 불교활동가들은 일반사회인과 같은 생활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잘 아시겠지만 경제적 여건이나 환경은 열악한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이해나 극복의 지혜가 필요한 걸까요??

사람이 약해지는 것은 두가지 분별 때문입니다. 자꾸 비슷한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걱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살다가 먹고살기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지요.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원력이 약해집니다. 고민만큼 현재하고 있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에너지를 분산시키지요. 이 두 분별이 끊어지면 지금 하는 일을 미친 듯이 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고민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신없이 하다보면 만들어지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뭐 별건가요. 자꾸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고민하는건데, 까짓거 수많은 사람 중에 그저 별 볼일없는 한 인생이 이런 일하는거 뭐 별거 아니잖아요. 가볍게 던지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입니다. 아프간에 비하면 한 50배 넘게 잘살아요. 그곳에서는 정말 하루하루 생존의 문제가 턱에 찹니다. 저렇게도 사람이 사는데 한국과 같이 잘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한 인생이 못살겠습니까?

예전에는 개인에 대한 비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이렇게 살뿐이지요. 과거에는 물질적인 진화로 급급한 것이 한국사회라면 이제 사회단체나 시민운동은 정신적인 사회진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예전에 운동하면 돈버는건 고사하고 감옥가고 고문당할거 두려워했지만, 이제 누가 그럽니까 오히려 좋은 일한다고 칭찬도 많이 듣잖아요. 그리고 사회활동한다고 웬만해서 굶어죽습니까? 너무 엄살들이 심한 것같아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인데도 말이지요.

과거 경제성장은 물건과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시장의 확대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는 일종의 신념시장이자 도덕시장입니다. 상품시장이 포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신념과 도덕시장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무궁무진한 영역이 있습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돈벌 생각만 접어두면 훨씬 더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활동가의 삶 안정을 스님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교의 주인은 스님이라 생각하는것..“

그리고 요즘 취업이 안된다고 난리들인데, 저는 아주 잘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돈벌려고 일하는 시대에서 자신을 구현하려고 일하는 시대로 변하는 하나의 징후이지요. 열심히 살다보면 돈은 저절로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따라다니면 평생 인생이 돈으로 허덕댑니다. 대부분 돈을 굴리며 살아야 하는데 돈에 의해 굴려 다닌다니까요. 어떤 일이든 그길로 10년만 바닥을 기듯이 일하면 먹고 살길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걸 못해서 그렇지... 신념있게 살려면 처음에는 고생을 해야합니다. 그 정도도 안하려고 하면 도둑놈이지요. 그리고 10년 뒤, 20년 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야기해 줄만한 자신의 전설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삶에 있어 자신의 신화도 있어야 하잖아요. 돈버는 일과 관련없는 곳에서 이름없이 생고생하면서 사는 것도 행복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요즘 사회는 벤처를 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나 개인은 벤처를 절대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밴처를 원하지 않는 부모 말 잘듣고 살면 인생은 망칩니다. 벤처(Venture)라는 것이 번역하면 ‘모험’이잖아요. 취업이 안된다고 하는데 대부분 직장의 일에 고생하거나 혼신을 다해 일을 하기 보다는 적당히 돈벌 생각을 하고, 더 많이 돈준다는 직장이 나오면 홀연히 떠날 생각하잖아요. 회사의 사장들은 그거 다압니다. 그런 사람 누가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취업하기 어려운거예요. 그런데 실제 직장이 없나요? 회사에선 사람이 없다고 난리잖아요. 하물며 돈벌이도 처음에는 오랜기간 돈도 투자하면서 고생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기간이 있잖습니까, 운동하는 사람이 구속되고 고문당하는 것도 개인의 삶 속에서는 투자입니다. 고생도 투자예요. 그런 과정을 많이 겪은 사람이 성공할 자격이 있고 성공해도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일확천금한 사람은 쌓은 공덕은 없이 복만 누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나중엔 화가 됩니다.

사람이면 결혼도 해야하고 집도 장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도, 집도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거지요. 그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결혼도 그래요. 사람도 자기만큼 만나잖아요. 신념있게 살다보면 그 길에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길에 굳건하면 주변 사람이 나에게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변할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부인이나 가족이 흔들어대는 거지, 흔들어대도 안될 것같으면 오히려 그들이 변하고 배우자나 가족이 내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나를 던져 버리세요. 그러면 됩니다. 해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가난한 나라라면 모르겠는데 우리같이 잘사는 나라에서 뭘 걱정인가요? 자기 물질적 기대욕구가 많아서 문제지 그것만 내려놓으면 얼마나 하고 싶은 일하면서 풍요롭게 살수 있는데... 아프간에 있다보니 우리나라는 정말 괜찮은 나라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돈에 찌들려 사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에겐 왠만한 강한 충격(Impact)이 아니면 어려운데 마침 사업이 실패해줘서 바로 그런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 아닙니까.




불교 내에서 종단이나 스님들의 의식 속에서 재가사회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해주면 좋지만 안해줘도 상관없지요. 스님들이 해줘야 하고, 종단에서 해줘야 한다고 실제로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교의 주인은 스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사부대중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정말 스님들을 잘 모시면 그런 자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스님과 재가가 대등하다고 말은 하면서 불교의 모든 책임은 스님에게 있다고 하면, 편익만을 요구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수행도 활동도 똑같이 해야지요.

/현재 불교계에 많은 활동가들이 있고 활동분야도 점차 넓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조언은 없으신지? 불교정보센터의 독자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나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이제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영역은 이제 넓어져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진보운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영역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자기나라의 이익에만 몰두한다면 전세계가 모두 맹렬히 비난할겁니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세계문제에 책임져야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 올랐습니다. 국가나 정부의 인식보다 비정부기구(NGO)의 인식이 훨씬 폭넓고 유연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도 전지구적인 문제, 세계의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때 우리가 제3세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누구도 가난한 나라, 그래서 잘사는 나라로부터 피해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프간의 고통, 이라크에 문제, 버마나, 베트남 등 전쟁과 가난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는 연기적으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제 불교가 다른 사회운동보다 앞서가려면 세계의 문제로 적극 나가야 합니다. 저희 정토회 대학생회는 인도와 아프간 지원활동을 하다보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많이 옵니다. 참 좋은 학생들을 많이 만났고 그 분야에 많이 관심있어합니다.



요즘 대학생운동도 전망이 선명하지 못하고 활력도 떨어지잖아요. 그건 대학생 일반의 관심이 어학연수수다 배낭여행이다 국제화되고 있는데 진보적 대학생운동의 인식은 한국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용도 있지만 즐겁고 감동적인 곳에 사람이 모이는데, 비장하고 결의를 요구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오는 겁니다. 남을 돌아보고 걱정하다보면 자기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열심히 밖을 돕다보면, 그러한 분위기가 높아지면 불교내의 기운이 건강해집니다. 불교의 개혁에 일조하는 거지요.



지금 사회운동 속에서 지금만큼 주도력과 영향력을 불교가 발휘했던 시기는 없었던 것같습니다. 어쩌면 불교가 운동 뿐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가장 잘나가는 전성기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만큼 깊어져야 하고 넓어져야지요, 사회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즐거웠고 재미있었다면 그 보답은 이미 받고 있는 겁니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지향적이고 관계지향적인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아둥바둥 돈벌고 싶은데 취직도 안되고 해서 할수 없이 불교운동이나 사회운동하면 안됩니다. 돈도 못버는 사람은 운동도 못합니다. 그리고 돈버는 것이 부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 밀려서 들어와 일하면 열등의식이 있어 당당하지 못합니다. 불교내의 사람이 적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거 아닙니까, 한사람이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만큼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회사나 사람 많은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 중에 그저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지만, 불교 내에서 한사람이 갖는 파장과 영향력은 큽니다. 그만큼 가시적 생산성이 크다는 거지요. 가볍게 그냥 일하길 바랍니다. 대단한 일을 한다는 상도 갖지 마시고, 온갖 분별갖지 말고, 무식하고 미련하게...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 활동하실텐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필요하거나 있으면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도움이 안되더라도 말씀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

얼마전에 ‘실미도’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도 봤구요. 그리고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씨연대기’라는 연극을 봤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내용자체 보다는 아프간을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우리가 3년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이 50여년이 지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뿌리는 아픔과 서러움으로 남아있고, 그것이 영화나 연극이 대대적인 성공을 이룰 정도로 정서적공감대를 만들고 있는 걸보고, 그보다 더한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의 속내는 어떨까를 생각했습니다.

소련과 10년간의 무자헤딘활동, 그리고 13년간의 내전, 종족간의 전쟁, 종교전쟁등 총 23년간 진행된 아프간의 전쟁속에서, 내가 아프간에서 알고 있는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은 식구 중에 최소한 1-2명 많게는 6-7명이 죽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황량한 카불시내 곳곳에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곳곳, 특히 사막의 평야 가운데 우뚝 수많은 푸른깃발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이들의 원혼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참 가슴 에이는 아픔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3년간 싸운 우리가 이 정돈데, 23년 싸운 이들은 오죽할까. 우리 함께 일하는 아프간 스텝인 ‘모하메드 하심’은 소련의 폭격으로 어머니와 3명의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현지 스텝입니다. 참 성실하고 재미있고 속깊고 귀엽기까지 한 그는, 다 좋은데 아버지와 관계가 나쁩니다. 아버지는 65세인데 그가 40 넘어서부터 일을 안하고 아들인 자기에게만 의지 하고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집이다 땅이나 자식에게 물려주는데 본인은 하나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도 없고, 오히려 아들인 자기에게 계속 투정만 하고 불평만 하고 며느리를 못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소련폭격으로 자기 부인과 딸 셋을 여읜 그는 이후 ‘돈을 벌어야 할 의미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는 모든게 너무도 확연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심의 아버지 마음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의 앙금은 더 이상 삶의 의욕도 희망도 없이 절망 속에 지금껏 살아온거지요. 이곳에 술이 없으니 망정이지 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원한을 잊기 위해 알코올중독 폐인이 되었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간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이라크는 아프간보다 그래로 잘사는 나라입니다. 현재 세계어디에도 아프간같은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후원 많이 해주세요. 일단 오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활동을 하러 오셔도 좋습니다. 잘사는 나라만 가서 어학연수하지 말고 이런 곳에 와서 젊은 날 자신을 태우는 경험도 소중한 삶의 힘이 됩니다.

아하, 그러나 자원봉사하시려면 정토공동체에서 최소한 49일은 살면서 사전 교육을 받아야합니다. 그런 과정없으면 공연히 와서 분별만 내고 이곳에서 일하는 우리들의 힘만 들게 할수도 있습니다. 49일 살려면 3일간 1만배 기도해야 합니다. 절차가 복잡하지요? 그러나 한사람과 안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이래서 정토회를 폐쇄적이라고 하나?


/오랜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불교정보센터에 가끔 소식도 전해주시고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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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토회(淨土會)는 1988년 정토포교원을 개원으로 시작된 법륜 스님이 지도법사로 있는 불교수행공동체이다.

정토회는 대승 불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교와 사회운동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라 하면 개인의 완성 즉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사회운동의 영역은 사회의 완성 즉, 사회 변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토회는 이 영역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활동을 한다.

정토회에 참여하는 개인은 불교 수행법에 의해 기도하며 종교생활을 한다. 그러나 종교를 불교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영역은 국제구호, 통일, 환경의 영역이다. 그래서 산하단체로 국제구호민간단체인 한국JTS, 좋은 벗들, 에코붓다를 설립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정토회
(한국어) 청년정토회 - 정토회 청년단체.

분류:
대한민국의 단체
불교 단체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 단체











2020/02/19

Why is Stoicism so popular in the US Army? — Philosophy for Life



Why is Stoicism so popular in the US Army? — Philosophy for Life



Why is Stoicism so popular in the US Army?



I've noticed, during the research for my upcoming book on how people use ancient philosophy in modern life, how many of the Stoics I interviewed were or are soldiers (or cops, or firemen). Why is that? I asked Nancy Sherman, professor of ethics at Georgetown University and the author of Stoic Warriors, which looks at Stoicism in the armed forces. She replied:

There's a popularization of stoicism with a small s in our culture - the idea of being self-sufficient and self-reliant. In that sense, the word 'stoic' has survived in the popular vernacular. It has little to do with Stoicism. 

But Stoicism is also a natural fit for the military, in the sense of sucking it up, the stiff upper lip, and so on. Being a soldier is about deprivation, survival, the minimization of need and attachment. So Stoicism suits them.
In the US Navy and the military at the academy level, Admiral James Stockdale was also a popularizer of Stoicism. Epictetus and Marcus Aurelius are particularly popular, because they're accessible. And Aurelius was a soldier and emperor, which impresses military people.



Do you think Stoicism can be a harmful ethos?

I think the little s stoic ethos of 'suck it up and chuck on' can be harmful. It's a form of abstinence and denial. Your body goes into it naturally when you go into stressors. But it's also inculcated by the command. You're seen as a sissy if you cry, and a wimp if you go for therapy. If it's linked with a certain macho denial of emotions, then it can be extremely harmful. It minimises all the emotions that are desirable in peace time.



Have a look at this opinion piece 
Professor Sherman wrote for the New York Times on the harmful impact of an unexamined stoic attitude in the military.

Here's Admiral James Stockdale's account of how he used Stoicism to survive seven years in a Hanoi POW camp. Part 1, and Part 2.

And here's a video of Major Thomas Jarrett talking about his Stoic Warrior Resilience course, which he taught during the Iraq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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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 제이 맥다니엘 미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 다른백년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한 윤정 2020.02.10 0 COMMENTS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아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어떤 경험의 계기에서 주체성이 갖는 조화의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힘은 두 가지 요소, 즉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러한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강도를 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강도란 여전히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기여하는 것이다. – 존 캅, 「화이트헤드의 가치론」(https://www.openhorizons.org/whiteheads-theory-of-value.html)어니스트 캘런벡의 1975년 소설 <에코토피아>의 영화 이미지컷.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배경으로 에코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생활을 그렸다.



개요와 소개

“아름다움”은 생태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1)일상의 직접성에서 감정적으로 느낀 경험의 조화와 강도, (2)그러한 느낌을 환기시키는 경험의 객체, 즉 타인, 다른 형태의 생명, 인간 관계, 자연 세계를 뜻한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예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삶의 예술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은 삶 자체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활력이자 번영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는 다른 동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삶을 “삶”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폭넓은 감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ng),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그리고 신비에 대한 감각 등이다. (번역자주: 필자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감정의 요소가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나열했다.)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다섯 가지 형식은 생태문명에서 특히 중요하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과 강, 나무와 별),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예술, 음악, 그림과 음악의 풍경), (3)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 그리고 인간세계를 넘어선 사회로부터 얻는 관계의 느낌),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친절, 정의), (5)전인적 아름다움 (깊이와 넓이를 동반하는 ‘폭넓은’ 영혼의 성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의 생태학’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하게 만드는 벽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

이런 공동체가 “아름다운” 이유는 창조적이고 연민적이고 참여적이고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동물에게 자비롭고 지구에 좋고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우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공동체를 상상하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생태문명이라는 “전공”의 목적이다. 이 전공의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더욱 심화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1)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아름다운 공동체, (3)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4) 아름다움의 생태학.



1. 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수 년 전에 맥신 홍 킹스톤(湯婷婷)이 우리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논픽션 저자이기도 하다.

킹스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에 강연을 했는데, 그녀는 킹의 연민적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참조틀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킹은 연민적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로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그러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문구였다. 사랑의 공동체는 연민적인 공동체이며 애정 어린 공동체이다.

킹스톤은 킹의 문구에 기대어 예술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배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킹의 문구를 인용할 때마다 실수로 “사랑의 공동체” 대신 “아름다운 공동체”(beautiful community)라고 말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녀와 청중들은 매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지점에서 킹스톤은 결국 고쳐 말하기를 그만두고 강연 내내 예술과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에 익숙해졌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킹스톤에게 사랑의 공동체는 사실상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시적인 언어 말이다. 이 점은 뛰어난 과정철학자인 샌드라 루버스키가 쓴 「아름다움을 말하라(Speak the Name of Beauty)」라는 짧지만 우아한 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결을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자연의 질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삶을 격상시키는 만드는 관계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삶을 격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킹스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요? 그들은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킹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의 그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수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가 될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학생들이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전공” 혹은 전문분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2. 아름다운 공동체

세계 어딘가의 대학에 생태문명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아가 그 전공이 캠퍼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상상해보라. 학생들은 그 전공이 실천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전일적이면서 창조적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생태문명 전공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삶을 격상시키는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킹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공동체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아홉 가지 중요한 특성 혹은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창조적이다.

(2)연민적이다.

(3)참여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한다.)

(4)다양하다. (공동체가 종교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환영한다.)

(5)경제적으로 포용적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며 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다.)

(6)동물에게 자비롭다.

(7)지구에 좋다. (오염을 수용하고 자원을 공급하는 한계 내에서 살며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를 남겨둔다.)

(8)정신적으로 만족스럽다.

(9)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공동체의 “영성”은 감성적 지성과 일상에서 구현된 지혜가 조합된 것으로, 종교를 갖고 자신의 종교로부터 “영성”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에는 관심이 있으나 특정 종교에 연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영성은 인간성의 영적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관련된 형식의 마음과 정신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함한다: 주목(attention), 연민(compassion), 연결(connections),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상상(imagination), 재미(playfulness), 호기심(wonder), 침묵(silence), 정의(justice), 숭배(reverence),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번역자주: 여기서도 다시 알파벳 순으로 단어를 나열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내가 “전인적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부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바람직한 이상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동체도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가지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현존하는 공동체들은 사실상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구축하는 벽돌들이다. 생태문명 전공은 학생들이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는 긍정심리학, 도시계획, 유기농업, 사회정의, 영성, 종교 간 대화, 교육, 건강 관리, 환경경제학, 진화생물학, 생태학 실습 등의 과목이 포함된다. 생태문명 전공은 또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함으로써 생태문명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배움의 요소가 요구된다.



3. 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생태문명 전공을 위한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라 부른다.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생태문명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전반적인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이상인 “아름다움의 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가르친다.

처음에 학생들은 교과목의 제목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별적인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편협한 척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적인 감각, 개인의 취향 혹은 예술에만 한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공공의 선도 아니며 “실제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 과목에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공공의 선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예쁨도 아니며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는 성질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화이트헤드가 “아름다움의 힘”을 통해 말하고자 한 어떤 것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강도의 조합이며 경험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활력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것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력과 살아있음(강도)의 감각을 조합한다.

교수들이 강조하듯 아름다움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를 이끄는 이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서 생태문명과 그것의 출현을 위한 일차적인 가치가 된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생태문명이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나 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생태문명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등장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보다 좀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감각 말이다. 아름다움은 희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몇몇 화이트헤드의 관념을 배우며 그 관념들을 통해 교수들이 “아름다움의 우주론”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은 생명의 그물의 일부다: 인간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일부이지 그 바깥에 있지 않다는 관념.

(2)모든 것은 상호 생성의 과정에 있다: 전체로서의 그물, 그리고 그물의 각 매듭은 언제나 과정 혹은 되어감에 있다는 관념.

(3)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권리로서 가치를 지니며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관념.

(4)모든 곳에 살아있음의 활력과 같은 것이 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생명” 혹은 “살아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

(5)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서 내면적인 활력을 얻는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 안에 만족 혹은 삶의 충족을 향한 에로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의 풍부함 혹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관념.

(6)전체로서의 우주 또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우주 자체가 어떤 종류의 생명이며 우주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는 관념.

이러한 관념들은 학생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또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의 생태학을 위한 우주론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다른 철학적, 문화적 전통, 아마도 특히 동아시아 전통들에서 유사한 관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전통으로부터 비슷한 관념을 찾고 공유하도록 권장된다.



4. 아름다움의 생태학

이렇게 학생들은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입문한다. 생태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자연적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관계적 아름다움, 도덕적 아름다움, 전인적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생태문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생태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 강, 나무, 별, 동물, 식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서로 연결돼 존재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에서 외경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샌드라 루버스키의 말의 떠올려라: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인간이 설계한 다양한 형식의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도구와 가구, 건물과 도시경관 같은 유형의 생산물을 포함하며 상징과 로고스, 이야기와 시, 춤과 음악 또한 포함한다.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참여하거나 그것과 협동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과 함께하는 공동창조의 행위이다.

(3)관계적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이 우정과 가정생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 이런 아름다움은 예를 들어 유교경전, 성경, 코란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연결의 영성에도 내포돼 있다.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봉사,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 수필가 이푸 투안은 이를 이렇게서술했다: “사심 없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관용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이다. 진실된 겸손도 이타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몇몇 사람이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몇몇 사람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고무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등장하고 번창한다.”

(5)전인적 아름다움: “통합적인 되어감”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연민, 창조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혹은 되고자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노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름다움은 멋진 사랑스러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다 통합적인 것, 실체가 있는 되어감, 원만함의 출현, 은혜로움과 우아함의 위대한 감각, 깊이에 대한 깊은 감각, 그리고 만개하는 삶에 대한 풍성한 기억으로의 돌아감에 관한 것이다.”

예비과정의 끝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이처럼 생태적인 문맥에서 이해될 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태문명을 실현시키고자 활기차게 노력하기 위한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지구에 기반을 둔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아름다움이 갖는 매력은 삶의 활력과 격상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맥신 홍 킹스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 웹사이트 오픈 호라이즌즈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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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한 윤정 2020.02.03 0 COMMENTS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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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한 윤정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 다른백년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한 윤정 2020.01.27 0 COMMENTS


문제는 경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것은 정보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다.” 오래 전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다. 작가는 문학작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경, 생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와 문화적 인식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미국 예일대의 문화인지 프로젝트) 결과에 따르면 새로운 정보가 자신의 신념체계를 흔들어놓을 우려가 있을 때 인간의 두뇌는 불청객을 격퇴하기 위해 ‘지적인 항체’를 생산한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경험할 때 현실을 부정하는 편향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왜 생태위기 징후에 대해 이런 ‘지적인 항체’를 갖게 되었을까?



뉴욕 타임즈가 레이첼 칼슨의 『침묵의 봄』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관련 저작으로 꼽은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변화는 자본주의와 지구와의 전쟁”이고 자본주의가 언제나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전쟁은 벌써부터 진행되어 왔고, (…) 매번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내세워 기후행동을 미루고 이미 합의한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깨뜨리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위험성 높은 석유와 가스 채취 산업에 아름다운 바다를 내주는 것만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 베이징에서 숨이 차 쌕쌕거리는 어린 자녀에게 귀여운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방진 마스크를 씌워 학교에 보내는 수고쯤은 당연히 감수해야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어차피 우리 앞에는 채취냐 내핍이냐, 오염이냐 가난이냐 하는 암울한 대안만 남아 있다고 자포자기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이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오미 클라인,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16: 45-46)

여기에는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연과 세상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에 기반한 삶의 태도와 생활방식도 포함된다. 현재의 글로벌 세계경제질서가 기후변화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아니다. 이미 인류는 1700년대 말부터 석탄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도 생태계 파괴를 자행했다.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권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관념의 모험』에서 지적한 대로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곤 하는 관념이 있어왔다. 그 관념은 그로 인한 피해자들조차도 그러한 관념을 공유할 위험이 있다.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인식되는 관념뿐 아니라 인식되지 못하는 관념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적 서사가 달라져야 하기에 문명적 수준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적 위기의 근원 역시 “자연은 무한하고 통제와 지배가 가능한 대상이고 인류는 자연을 지배할 권리와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우리들의 관념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이 기존 사회, 경제 모델의 기저를 이루는 논리적 가정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내재한 가치 체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에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문명적 수준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는 자연관과 세계관을 넘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시스템에 대한 상상과 전망이 필요하다.



자연의 경제와 인간의 경제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라 부르는 개념은 지질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면서 언급한 “상호 연관된 종들의 얽힌 복합체”에서 유래한다. 다윈은 동물과 식물을 “복합적 관계의 그물에 의해 함께 묶여진 존재”로 규정했고, 에른스트 해켈은 훗날 다윈이 생존경쟁의 조건(들)이라 부른 동식물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들에 대한 연구”를 생태학이라 이름 붙였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의 영어 표기와 발음은 서로 닮았다. 실제로 다윈은 생명체의 생존과 생활을 위한 활동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경제”라는 표현을 『종의 기원』 여러 곳에서 직접 사용한다. 그는 “자연의 경제”를 생물학적 개인, 종과 환경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썼고, 이를 반영해서 해켈 역시 생태학을 “자연의 경제에 관한 지식의 본질”이라 정의했다. 다윈이 자연을 “경제”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은 아닐 수 있지만 자연과 경제 사이의 연관과 유사성을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Hardy-Vallée, Benoit, “The Economy of Nature: A Brief Introduction”, y, http://naturalrationality.blogspot.com/search?q=Darwin, 2007)

지구가 제공하는 자연의 경제 내에 인간의 경제가 하위체계로 존재하고 있음은 불변의 사실이다. 생산, 분배와 소비 등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은 변환된 에너지를 이용해서 물질이나 비물질적 재화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경제 시스템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유입되어 경제활동에 사용되고 이후 폐기물 형태로 자연 생태계로 배출되는 것을 자원흐름(through-put)이라 한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이 같은 자원흐름의 과정을 매개로 자연 생태계 안에 배태되어 있다. (조영탁,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 생태경제학의 기획』, 2013)

그러므로 생태와 경제는 시스템으로나 순환으로나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의 순환은 생태계의 순환체계 안에 포함되어 진행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구 생물권의 존재에 무관심하며 생태계의 순환에 무지하고 경제순환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한다. 생태와 경제의 다양한 연관 속 상호작용과 그 효과를 외부성이라는 개념 안에 집어넣은 다음 경제분석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예외적인 경우 아주 제한된 방식으로 그 효과를 고려할 뿐이다. 더욱이 토양이나 기후, 생물다양성 등 지구 생물권의 대치할 수 없는 역할은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로 인류가 먹는 농작물의 70%는 식물이 열매를 맺도록 꽃가루 운반자 역할을 하는 꿀벌의 도움으로만 경작이 가능하지만 경제학자들 중 다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 생각, 2014)

스웨덴의 환경학자 요한 록스트롬이 제시한 후 UN 리우환경회의 등을 통해 수용된 행성한계는 1)기후변화, 2)해양의 산성화, 3)오존 고갈, 4)질소 순환, 5)물 사용, 6)토지 이용 변화, 7)생물다양성 손실, 8)에어로졸 증가, 9)물질 오염 등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Rockström et al., 『Bankrupting Nature: Denying Our Planetary Boundaries』, Kindle Edition, 2013) 행성한계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유한한 생태계에 속해 있고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 자원의 소비가 생물계의 수용 능력, 즉 지구의 생태용량 한계를 넘어 변곡점에 이르면 지구 시스템의 회복력이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경제 시스템이 사용하는 “자원흐름의 규모”가 커지고 “자원흐름의 독성”이 강할수록 자연 생태계의 부담과 피해는 커진다. 지금은 자원흐름의 규모가 자연 생태계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려는 상황이고 자원흐름에서의 “감량화”와 “탈독성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조영탁, 위의 책, 2013: 349)

그럼에도 경제학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아마도 언젠가 우리의 미래세대는 생태와 경제가 하나의 동일한 과정임에도 당시 세대가 왜 그렇게 생태와 경제의 연관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놀라움과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간극을 연결하고 단절을 메우는 새로운 경제학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이 “유한의 세계에서 기하급수적인 경제성장이 끝없이 계속될 것으로 믿는 자는 미치광이이거나 또는 경제학자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거의 주목 받지 않았다. 생태학에서 다루는 에너지 흐름과 물질순환을 경제학에서의 경제순환에 명시적으로 도입하고 연결하려는 시도가 생태경제학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학의 가장 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Costanza Robert, Herman Daly, Richard Norgaard et. al., 『An Introduction to Ecological Economics』, St. Lucie Press, 1997)

생태학과 경제학의 통합, 생태와 경제의 통합은 당위적 차원의 필요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현상유지는 더 이상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닌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턴 보고서(『Stern Review: The Economics of Climate Change』, 2006.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영국의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이 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로, 기후변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환경과 경제가 상충하는 의제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았다)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경제, 사회적 행태가 지속되면 20세기 전반기 공황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규모의 파괴적 영향이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른 온갖 위험과 효과를 전부 고려하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비용으로 매년 인류 전체 GDP의 5~20%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또한 앞으로 10~20년의 시기가 이후 21세기 후반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고, 지금 행동에 나선다면 최악의 효과를 피하기 위한 비용은 매년 전체 GDP의 1% 정도이므로 비용 대비 편익이라는 경제적 고려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피크오일, 즉 화석에너지 시대의 임박한 종언 또한 현상 유지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님을 말해준다.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탄소배출의 한계점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만, 그러한 한계가 없다면 우리는 원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비록 전환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지닌 성찰과 적응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Mary Berry, 『A Conversation Between Wendell Berry and Wes Jackson』, Kindle Edition, 2017)

제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고 “노동의 종말”과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화되는 상황도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프란츠 알트가 강조한 대로 고용 없는 성장과 생태 위기는 우리가 조망할 수 있는 시간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이자 동시 해결이 모색돼야 할 문제이다. 알트는 재생에너지로 전환함으로써 생겨나는 일자리는 낡은 에너지원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없어지는 일자리의 5배에 달하며, 앞으로 에너지 전환만큼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박진희 옮김, 양문, 2004: 15, 82)





생태적 전환과 사회적 경제

생태적 전환을 위한 대안적 경제의 단위 요소들은 당위와 윤리의 차원에서 이미 실행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현실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실험의 사례들과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에서 협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경제가 주목 받고 성장하는 동시에,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대규모 자원의 집중과 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와는 다른 대안경제를 시도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성장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대표적 사례인 독일의 경우, 체르노빌원전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은 독일 남서부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 650명이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민간기업에 대항해서 1986년 시작한 재생에너지 사용 캠페인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로부터 25년후 독일에서는 지역사회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에너지 협동조합이 활발하게 결성되어 2011년말 현재 439개가 되었다. (Osha Gray Davidson, 『Clean Break: The Story of Germany’s Energy Transformation and What Americans Can Learn from It』, Kindle Edition, 2012) 에너지 협동조합 설립 성과로 독일에서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의 47%가 시민들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태양열, 풍력, 바이오매스 등으로 구성되는 재생전기의 65%가 개인이나 협동조합, 지역공동체 소유로 운영된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깨끗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아니라 기업이 지배하는 집중된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소규모의 분산적이고 분권화된 사회로의 사회경제적 전환이다. (Arne Jungiohann, Craig Morris, “Germany Shows It Is Worth Fighting for Energy Democracy”, Resilience.org, June 22, 2017)

제레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 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제4차 산업혁명’ 논의와는 달리, 경제산업구조 재편과 고용전략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에너지 분산과 사회권력의 분산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파워 투 더 피플(시민에게 권력을 넘기는)” 기획임을 강조한다. 지역과 공동체가 기반이 될 때 보다 수평적이고 분권화된 정치시스템과 보다 분산된 공동체, 협동조합 등의 사회적 경제를 지탱하는 에너지 시스템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스 잭슨 또한 로컬을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라 말하며, 로컬푸드 운동 역시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시스템에 필요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Wes Jackson, “Toward an Ignorance-based Worldview”, Bill Vitek and Wes Jackson, 『The Virtues of Ignorance: Complexity, Sustainability, and the Limits of Knowledge』, Kindle Edition, 2018)

제레미 리프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에너지 체계의 결합을 통해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고 선언한다. 그는 『한계비용 제로 사회』(안진환 옮김, 민음사, 2014)에서 공유경제 확산과 확대의 기술적, 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성과로 만들어진 커뮤니케이션, 에너지, 물류인터넷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신경네트워크는 거의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의 한계비용을 거의 0으로 수렴되게 함으로써 자유재와 풍요로운 자원(제한된 자원이 아닌!)을 보편적인 상황으로 만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배분에서의 시장 영역과 이윤 창출 영역을 축소시키고 글로벌 공유자원의 영역을 급격히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협력적 공유사회”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 경제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대안적 경제의 다른 이름이다. 주거, 돌봄, 재생에너지, 도시농업과 도농교류, 보육, 의료, 온라인 오픈 플랫폼과 쉐어웨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출현하고 성장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유경제, 공동부엌, 지역재단, 전환마을 등이 그 형태들이다. 여기에 사회적 금융, 크라우드 펀딩, 지역화폐, 대안화폐, P2P 대출, 타임 뱅크, 크레딧 유니온, 윤리적인 은행 등 새로운 금융 거래 형태들이 협력적 공유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이 같은 사회적 경제의 구성요소들을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와 구별되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핵심 경제단위로 제시하고 있으며, ILO(국제노동기구)는 이미 10여년전 “생태적, 사회적, 공동체적 목표가 하나로 수렴되는, 지속 가능한 사회발전 모델”로서 사회적 경제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

인간은 자신이 빅뱅으로 창조된 우주의 일부로서 최소한 두 번 초신성을 통해 재활용된 우주먼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우주적 기원에 대한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주와 우리의 관계이며,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이 청지기 역할이라 표현했던(Mary Berry, 위의 책, 2017), 지구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인 인간의 책임 있는 역할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제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구원할 위치에 있다. (찰스 버치∙존 캅, 『생명의 해방: 세포부터 공동체까지』, 양재섭∙구미정 옮김, 2010:132)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너무 늦지만 않다면 그것은 인류 출현 이래 인류가 행한 가장 위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사물과 세상, 자연을 인식해온 방법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무한성장” 이란 관념이 갖는 반생태적, 반우주론적 함의를 돌아보고, “생태적 인간(Homo Eologicus)”을 향한 문화적 진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생태위기는 우리가 익숙한 사회, 우리가 익숙한 문명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산업사회, 산업문명의 전환은 실로 지난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명칭이 무엇이든 핵심은 생태문명, 생태친화적 문명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는 지구의 수용능력 안에서 운용되는 생태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무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의 대신 경제생활의 목적과 가치가 반영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과 경제조직, 새로운 경제주체를 만들어내고 경제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와 유∙무형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재생에너지와 농업, 교통과 휴먼서비스를 중심으로 분권화된 지역들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 생태계의 구축이 될 것이다.




정건화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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