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요섭 박사가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가 보내준 박사학위 논문 ‘김지하의 사회사상 연구-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학과 체계이론을 경유하여’를 줄쳐가면서 읽고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을 질문하였다.
특히 루만의 여러 용어들이 생소하게 느껴졌었는데, 예를 들면 ‘역설의 은폐’라던가 ‘작동적 폐쇄’ 같은 말들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았었는데 어제 주 박사의 설명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역설의 은폐’ 같은 말은 내가 이미 다른 용어들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기도 해서 그 뜻이 잘 들어왔다. 어제 주 박사에게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앞으로의 활동에서는 그 용어들을 해설해주기를 요청했다.
사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다른 용어를 사용할 때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인식 작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는 루만이 사용하는 ‘구별’이라는 말이 쑥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난해한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평이한 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와 비슷하게 ‘태초에 구별이 있었다’라는 말이 논문을 다 읽으면서 들어왔다.
말씀 이전과 구별 이전의 세계는 마치 빅뱅 이전의 우주와 같이 앞으로도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를 계속하게 할 테마일 것이다.
주 박사의 구공존이(求空存異)는 요즘 내가 ‘사회적 명상’으로 제기하고 있는 테마들(분절⓵→무분절→분절②)과 통하는 면이 있어서 즐거운 대화를 가졌다.
인류의 의미 있는 역사 전개는 ‘구별’로부터 시작한다.
그 구별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진영’이다.
그 진영은 계급일수도 있고, 신분일수도 있고, 성(性)일 수도 있고, 종족이나 민족이나 국가일수도 있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구별’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재구별’의 연속 과정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구별’은 바뀌지 않고, 낡은 구별로 진영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것은 현실과 맞지 않아서 퇴행적일 수밖에 없고 역사를 전진시키지 못한다.
‘구별’이 없어지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 ‘진영’ 또한 존재한다.
세계가 진화한다는 것은 그 진영이 변화된 현실에 맞게 ‘재구별’된 바탕에 서서 상호 관계(대립·갈등·협력·보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진화 또는 진보의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 ‘진영’이 두 개로 나뉘는 것으로부터 대단히 다양한 다수의 ‘진영’으로 된다는 것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진영으로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다수(多數)의 진영에 속한다.
어떤 영역에서는 나는 그대와 같은 진영에 속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나는 그대와 다른 진영에 속한다.
우리의 꽉 막힌 정치 현실을 열어갈 정치담론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 박사는 거대한 ‘보편이론가’ 루만과 거대한 ‘이야기꾼’ 김지하의 융합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아무쪼록 그의 담론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를 바라고 응원한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문명에 대한 요구가 대단히 크다.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창조적 담론이 반드시 요청된다.
그 ‘담론’의 수준 만큼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큰 정치를 하려면 큰 ‘담론’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주 박사와 우리의 현실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체적인 판단의 다름이 있음을 서로 감지하지만, 그것이 대화를 불유쾌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름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다름’을 오히려 풍성하게 살려갈 수 있는 정도의 ‘담론’이라야 새로운 정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어제 학(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도 함께.
고맙다.
그리고 바둑을 두 판 두었는데, 새삼 상수(上手)가 어떤 것이가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두 점 이상은 놓아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재미로 맞둔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