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7

최현민 연구실 > 도겐 연구 > 도겐의 [무불성론]과 [무상불성론]

최현민 연구실 > 도겐 연구 > 도겐의 무상불성론







도겐의 무불성론

Down : 46, 2011-06-01 11:19:02

1) (2) 無常佛性論

2)

3) ① 無常의 의미

4)

무상불성은 무불성과 함께 도겐의 불성이해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다. 김희진은 무상이야말로 도겐의 종교에 있어 알파요 오메가라 칭한다. 따라서 도겐의 무상불성을 살피기 전에 먼저 그의 무상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諸行無常은 원시 불교 이래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 전수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성사상의 발전과 함께 常的인 측면이 불교교리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心性常住論的 불성이해이다. 이러한 불성이해를 바탕으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의 의미를 지닌 ‘불성’이 결합한 것일까? 사실 도겐의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을 초월한 絶對無의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도겐의 불성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도겐은 『정법안장』「山水經」의 서두에서 芙蓉道楷의 말을 인용하여 무상을 설명한다. “푸른 산은 언제나 걷고 있네.” 겉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산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들의 흐름 안에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전우주가 역동성 안에서 도겐이 말한 ‘全機’라는 표현은 이를 잘 보여준다. 全機를 배에 탄 것에 비유하자면, 배밖에 내가 없고 나밖에 배가 없고 하늘, 물, 해안을 비롯한 세계 전체가 배와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배가 곧 生이며 세계 전체가 배의 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一法究盡으로도 표현된다. 一法究盡은 하나의 법 안에 우주 전체가 드러남을 의미한다. ‘꽃 한송이에 온 세계가 피어난다’는 도겐의 표현처럼 하나의 법에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화엄사상과도 일맥상통하나 도겐의 경우는 그보다 더욱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諸惡莫作」에서 “一塵을 아는 것은 전세계를 아는 것이며 一法에 통하는 것은 萬法을 통하는 것이다. 萬法에 통하지 않는 것은 一法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도리에 통철할 때 萬法도 볼 수 있고 一法도 볼 수 있다. 一塵을 배우는 것은 세계 전체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一法究盡의 의미이다. 하나의 달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는 一法究盡은 十方世界 전체를 하나의 眞實人體로 參學하는 것이므로 수행을 떠나선 있을 수 없는 세계이다.

앞서 우리는 도겐의 무상관이 그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 동기였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도의 龍樹 또한 ‘무상을 觀함이 곧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도겐은 이를 『學道用心集』 초두에 언급하고 있다. “보리심의 명칭은 많지만 다만 하나이다. 용수는 다만 세간의 생멸무상을 觀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이름한다. 참으로 무상을 觀하는 것이야말로 보리심이다.” 이와 같이 무상을 관함이 곧 보리심을 관함이라고 본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무상을 觀함이 第一의 用心이다.”

그러나 도겐에게 있어 무상의 의미는 단지 보리심을 일으키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의 수증관 전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修證의 문제는 ‘無常을 觀함’과 직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無常을 觀한다’는 것은 무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깨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성불하기 위해서 좌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좌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무상을 觀함은 곧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無我를 觀하는 것이다.

도겐의 표현을 빌리자면 無我를 觀하는 것은 자신의 身心을 放下하는 것이며 身心을 放下하는 것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집착을 버리는 길이 곧 무상의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집착은 我執과 我慢을 내려놓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身心放下이며 身心脫落이라는 것이다. 도겐은 우리가 身心을 放下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學道해도 깨침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身心을 放下할 때 비로소 우리는 佛의 大海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심탈락은 如淨 아래서 도겐이 깨친 세계이다. 도겐은 이를 無我를 觀하는 것이며 無常을 觀하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이렇게 볼 때 무상을 관함은 단순히 보리심을 발하는 차원을 넘어 깨침의 세계와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무상불성은 도겐의 무상관과 수증관을 관통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5) ② 도겐의 無常佛性
6)
7) ㉠ 도겐의 時間觀
8)

무상불성은 도겐의 시간관 속에 잘 드러난다. 그의 시간관을 잘 보여주는 것은『정법안장』「有時」이다. 도겐은 여기서 “하나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有(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法位에 머문다’라고 표현한다. “알아야 한다. 땔감은 땔감의 法位에 머물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 여기에 前後際斷이 있다.” 前後際斷이란 「現成公案」에 나오는 말로, 도겐의 시간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땔감이 타면 재가 된다. 재는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땔감이 앞이고 재는 뒤라고 해선 안된다. ...전후가 있지만 전후의 흔적은 끊어진 것이다.... 땔감이 재가 된 후에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도 죽은 후 生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生이 死가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은 佛法이 정한 것이다. 그 때문에 不生이라고 한다. 또한 죽음이 生이 될 수 없는 것도 佛說의 규정이다. 그 때문에 이를 不滅이라고 한다. 生도 일시적인 것이며 死도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인과관계로 보기 때문에 “땔감이 변해 재가 된다”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도겐은 땔감이 변해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땔감은 땔감의 때가 있고, 재는 재의 때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땔감은 땔감의 法位가 있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하나의 法位에 존재가 全機現한다는 의미이다. 도겐은 이를 前後際斷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마치 “生은 生의 全機現이고, 死는 死의 全機現”라고 표현한 圜悟克勤(1063-1138)의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도겐은 이러한 前後際斷의 시간을 ‘經歷’이라고 말한다. 有時의 經歷은 삼라만상이 生死 流轉하는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봄은 여름 가을 겨울을 전제로 한 봄이 아니라 ‘봄’ 자체로서 ‘現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봄은 봄의 全機現이고 여름은 여름의 全機現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有時의 도리는 直下當處, 正當恁麽時 또 而今을 떠나선 결코 자각될 수 없다. 이것은 도겐에게 있어 佛道는 결코 정지되어 있는 무엇도, 도착해야 할 무엇도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참된 佛道는 깨침이라는 하나의 정착지가 있어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목적지로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有時現成, 今現成, 有時而今의 의미이다.

이러한 도겐의 시간관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무상은 단순한 시간관이 아니라, 불성의 근거이다. 무상불성설은 초기선종 자료에서는 볼 수 없으나 『景德傳燈錄』5卷, 「江西志徹章」에는 나오고 있다. 『景德傳燈錄』에서 제자 志徹(行娼)이 혜능에게 『涅槃經』에 나오는 佛性常住에 대해 묻는다. 즉 모든 현상은 無常인데, 生滅常無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자 慧能은 “無常이 곧 佛性이다. 有常은 곧 一切善惡諸法의 分別心이다”라고 응한다. 이 때 志徹(行娼)이 “『涅槃經』에서는 佛性이 常이라고 하는데 (6조)和尙께서는 無常이라 하니 이는 경전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즉 行娼은 『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를 들어 ‘如來가 常住하여 變易가 없으므로’ 불성은 常住하지 無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行娼은 常으로서의 불성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行娼에게 6조는 常으로서의 불성관이야말로 禪을 배우려는 자들이 부수어야 할 과제임을 가르친 것이다. 行娼은 자신이 지닌 불성관과 달리 ‘무상이 불성’이라고 설하는 혜능에게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불성은 『열반경』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에 대해 혜능은 ‘무상불성’이라고 답한다. 도겐이 혜능을 古佛이라고 칭송한 것은 혜능의 무상불성론에 있다. 그래서 도겐은 종전에 사람들이 이해해 온 것과 다른 시각에서 혜능을 보고자 한 것이다.

9) ㉡ 도겐이 바라본 慧能
10)
『壇經』이 혜능의 저술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경덕전등록』 이후의 송대 불교계(선종)에서는 『壇經』이 육조혜능의 설법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즉 송대에 들어서면서 혜능은 선불교의 이상화된 조사상으로 정착되어간 것이다. 일본 승려 圓仁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수집한 경전 목록(『入唐求法目錄』)에 보면, 장안에서 『曹溪山 第六祖 慧能大師說 見性頓敎 直了成佛 決定無礙 法寶記壇經』(沙門 法海集)을 입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圓珍(814-891)도 福州, 溫州, 臺州에서 『壇經』을 입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慧能 求法이야기」도 소중한 선문헌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당대에 혜능을 얼마나 중시된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겐은 『정법안장』「四禪比丘」에서 『壇經』이 見性사상을 설하고 있다고 하여 비판하고 있다.

『壇經』에 見性이라는 말이 있어 그 책은 僞書가 되며 佛祖正傳되어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6조의 언어가 아니며 佛祖의 法孫이 이용하지 않는 책이다.

당시 송대불교나 일본불교에서의 『壇經』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이것이 僞書라는
도겐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종래에는 『정법안장』 중에 『壇經』에서 인용한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壇經』과 見性에 관한 비판이 과연 도겐이 한 말인지 의심해 왔다. 그러나 도겐의 저술 속에 나오는 引用語錄을 연구해온 鏡島元隆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법안장』안에는 『壇經』으로부터 인용된 것은 한 문장도 없다. 그러므로 도겐이 한편으로는 『壇經』을 僞書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는 종래의 통설은 (도겐)禪師에 대한 오해이다. 이 통설에 따라 도겐과 『壇經』을 연결시켜 설한 논자는 『정법안장』의 어느 권이 『壇經』의 어느 本과 일치하는지 명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도겐이 六祖에 대해 설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법안장』이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壇經』을 인용했다는 종래의 설을 부정한 鏡島의 연구발표 후 도겐이 『壇經』과 거리를 두고 혜능을 보았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부르거나, 古佛의 古佛이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도겐이 『壇經』을 혜능의 저서로 보았다면 그가 『壇經』의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과 혜능을 古佛로 칭송한 도겐은 서로 상충될 것이다. 즉 그가『壇經』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六祖에게 古佛이라고 한 것은 도겐이『壇經』과는 거리를 둔 혜능상을 설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도겐과 『壇經』 그리고 혜능과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제에 대해 石井修道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도겐은 『壇經』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壇經』을 六祖의 설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壇經』과는 다른 六祖의 像을 만들었다고 본다.

石井의 말처럼 도겐이 혜능像을 새롭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에 대해 石井는 도겐이 『壇經』을 이용하여 혜능像을 만들기는 했으나, 『壇經』에 나오는 견성설과 육조혜능의 연관성을 완전히 없앴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견성사상과는 무관한 혜능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石井는 도겐이 禪을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그 중 하나가 6조의 行狀을 확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혜능의 行狀 속에서 見性說과 거리를 둔 채 새로운 혜능의 모습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壇經』을 보면 見性의 性을 自性淸淨한 性品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곧 불성을 말하며, 그것은 상주불변하는 常의 측면을 갖고 있다.

모든 가르침(萬法)은 모두 자기의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의 마음에서 단번에 진여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가? 『菩薩戒經』에 말씀하기를 ‘우리들의 本願은 원래부터 본성이 청정하다’ 라고. 자신의 마음을 알고 본성을 깨달으면 스스로 佛道를 이룬다. 『淨名經』에 말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달아 본심으로 되돌아간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은 見性의 性을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본 심성상주론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 見性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常으로서의 佛性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혜능을 古佛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혜능이 견성사상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견성은 자성청정심, 본래성불에 대한 자각이다. 다시 말해 대승교의가 지닌 근본적인 믿음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성청정심을 ‘常으로서의 불성’으로 보는 데 있다. 도겐이 비판한 것은 이러한 왜곡된 불성이해에 근거한 견성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정법안장』에서 그린 혜능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도겐은 『정법안장』「行持」권에서 “六祖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老母에게서 성장하여 벌목꾼으로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金剛般若經』의 한 구절을 듣고 老母를 떠나 大法을 구하고자 했다”고 설한 뒤 “이같이 老母의 애정을 끊는 것은 慧可가 팔을 자르고 달마의 제자가 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도겐은 혜능이 老母를 떠난 것은 세속의 恩愛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恩愛의 情을 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도겐은 이어서 “혜능이 弘忍의 會下에 들어가 쉬지 않고 弘忍의 命에 의해 밤낮으로 곡식을 빻는 일을 했고 그 후 홍인에게서 衣鉢을 전수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법을 얻은 후에도 밀을 빻는 일을 계속했고, 스승이 되어 중생제도를 위해 설법할 때에도 돌절구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行持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혜능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혜능의 佛心과 行持임을 알 수 있다.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져준 혜능의 가르침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도겐이 그린 혜능은 제자인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직면하도록 촉구하는 조사의 모습이다. 바로 그러한 혜능의 가르침은 도겐이 말한 無常佛性의 가르침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1) ㉢ 無常佛性
12)
도겐은 6조가 말한 무상불성에 기초하여, 자신의 무상불성관을 펼쳤다.

六祖가 제자인 行娼에게 말한다. “無常이 곧 불성이다. 有常은 곧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다. 소위 六祖가 말한 無常은 外道二乘에게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二乘外道의 鼻祖鼻末(祖先에서 末流에 이르기까지)이 무상을 말한다고 해도 그들(二乘外道)이 무상을 究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상은 스스로 무상을 說하며,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며, 무상이 무상을 證하기에 모두 무상인 것이다.” 지금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得道하는 자는 곧 자신을 드러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성이다. 또한 긴 法身을 드러내거나 혹은 짧은 法身을 드러내서 스스로 자신과 남을 위해서 佛法을 설한 것이다. 늘 聖인 것도 無常이고 늘 凡인 것도 無常이다. 늘 凡이거나, 늘 聖인 것은 불성의 드러남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어리석은 생각과 좁은 사고방식을 지닌 자이다.... 이런 견지에서 6조는 “무상이 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도겐은 “無常은 佛性이며 有常은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라고 한 혜능의 말을 언급하면서 다른 종교사상이나 聲聞, 緣覺 등 二乘外道의 祖先부터 末流에 이르기까지 모두 常으로서의 불성을 지녔기에 6조의 무상불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불성을 영원한 것으로 아는 이들은 無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二乘外道들도 무상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六祖의 무상과 外道의 무상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6조는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說하고 行하고 證한다”고 한다.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은 無常이며 無我인 우리가 無常을 행하고 證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無常이고 無我이므로 우리에 의해 설해지는 것 또한 무상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무상이 무상을 설한다는 것은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설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無常인 우리가 無常을 行하고 깨달아가기에 무상이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이다.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행하고 증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상을 살 때 가능하다. 지금 여기를 무상을 깨치기 위한 수단의 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生의 전기현, 死의 전기현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불성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무상은 불성’이라는 것에 이어 나오는 ‘常은 未轉’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석존께서 법륜을 돌려 법을 전하듯 正法은 佛祖에 의해 轉해지는 것인데, 常으로서의 불성은 轉해진 佛法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佛法正傳을 중시한 도겐 입장에서 볼 때 佛祖에게 전해지지 않은 常으로서의 불성은 진정한 佛法이라 할 수 없다.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佛祖를 통해 轉해진 것이며 無常佛性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轉法輪으로서의 불성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도겐이 무상불성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불성은 고정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佛에서 佛에로, 祖師에서 祖師에로 전해져 正傳佛法이라는 것이다.

도겐의 수증관을 이루는 두 축 중 하나는 正法인 좌선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겐은 무상불성 역시 이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무상불성은 불성의 현성뿐 아니라 正傳불법의 의미까지 보여줌으로써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
 도겐의 불성론.pdf (472.0K), 

Down : 44, 
2011-06-01 


가. 2. 도겐의 無佛性論

나.

1) (1) 無佛性

2)

3) ① 4조와 5조를 통해 본 無佛性과 修證의 관계

4)

도겐은 悉有佛性에 이어 無佛性에 대해 말한다. 無佛性은 마치 무신론과 유신론관계처럼 有佛性의 대립개념인 ‘불성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도겐이 말한 무불성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종래에는 무불성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무불성이 유불성과 상반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有無를 초월한 絶對無로 해석해 왔다. 김희진은 絶對無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나 무불성을 '구체적인 실재를 초월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다시 말해 무불성이 지닌 초월적 힘이 존재의 특수성에 고착화됨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有無를 초월한 입장에서 ‘悉有佛性’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존재에 불성이 드러남을 표현한 것이라면,  ‘無佛性’은 그 존재에 고착화함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무불성’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有無를 초월한 絶對無나 유불성을 초월한다는 것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고찰하기 위해 4, 5조의 문답에 나오는 무불성에 관해 살펴보자.

五祖 大滿禪師는 黃梅人이다. 아비없이 태어나서 童兒로서 道를 얻었다. 松을 재배하는 자가 되었다. 처음에 蘄州 西山에 살면서 松을 재배하는 자가 되어서 西山에서 松을 재배하다가 4祖를 만났다. 4祖는 “나는 너에게 法을 전하고자 하지만 너는 나이가 너무 많다. 만일 네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 때까지 나는 너를 기다릴 것이다.” 5祖는 周氏家 여자의 태를 빌려 다시 태어났다. 그는 하구에 버려졌다. 그가  神物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7일간 아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를 데려와 키웠다. 7세에 이르러 童子가 되었을 때 黃梅路上에서 4祖 大医禪師를 만났다. 4祖가 그를 보았을 때 그의 骨相은 寄秀하고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4祖는 “너의 姓은 무엇이냐?(汝何姓)”고 물었다. 답하기를 “姓은 있으나 常姓은 아닙니다(姓卽有 不是常姓).”

다시 (4祖가) “姓이 무엇이냐(是何姓)”라고 묻자 5祖는 “불성입니다(是佛性)”라고 답한다. 4祖가 “너는 불성이 없다(汝無佛性)”라고 하자, 5조는 “佛性은 空이므로 無라고 한 것은 옳습니다(佛性空故 所以言無)”라고 답했다. 이에 4조는 그의 法器를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삼아 후에 그에게 정법안장을 전했다. 그는 黃梅東山에 머물면서 크게 玄風을 떨쳤다. 

4조가 5조에게 ‘너의 姓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5조는 나의 姓은 ‘佛性’이라고 답한다. 4조는 개별적인 姓을 물었는데 5조는 개별적인 ‘姓’의 의미를 넘어 보편적인 ‘(佛)性’으로 응한 것이다. 그러자 4조는 다시 “너는 무불성이다”라고 답한다. 무슨 의미인가? 이는 보편적인 (佛)性으로 답한 5조에게 또 다른 도전을 던진 것이다. 4조가 말한 무불성은 중국선종이 피어나는 시기에 있었던 차별사상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는 姓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 따라서 姓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아는 것이다. 이같은 신분적 차별사상을 전제로 할 때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부모없이 태어난 5조에게 “너는 불성이 없다”고 한 4조의 말은 5조의 출신을 무시하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5조는 “불성은 空이므로 無”라고 응하여 空의 입장에서 무불성을 해석한다. 도겐은 이러한 4, 5조의 문답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한다. 그럼 먼저 4조가 물은 ‘汝何姓’에 대한 도겐의 해석부터 살펴보자.
조사가 말한 의미를 參究할 때 4조가 “너의 姓은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은 그 宗旨가 있다. 〔『傳燈錄』의 問答에서는〕 옛날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何國人)’라고 물으면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답하고, ‘어떤 姓인가(何姓)’라고 물으면 ‘어떤 姓’이라고 답했다. 그 때에는 姓이 무엇인지를 묻고 확인한 후에 법을 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六祖가 제자 南嶽懷讓에게 보여준〕“나도 이와 같고 너도 또한 이와 같다(吾亦如是 汝亦如是)”라는 말이 그것이다..... 4조가 말한 “당신은 무슨 姓이냐(是何姓)”에서 ‘何는 是이며 是는 何이고 그것이 곧 姓’인 것이다. 무엇(何)이라고 묻는 것이 是이며 是라고 하는 것이 何이다. 姓은 是이며 何이다. 이것은 쑥탕(蒿湯)이나 茶湯을 끊이는 것같은 日常茶飯의 생활 안에 偏在해 있다.

4조가 “당신은 무슨 姓이냐?(是何姓)”고 물은 것은 단순히 개체를 가리키는 이름의 姓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是何姓의 ‘是, 何, 姓’ 각각을 독립적으로 보아 是는 곧 何이고 何는 곧 是이며, 姓은 是이고 何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도겐의 해석은 ‘是, 何, 姓’ 각각을 모두 現成하는 불성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何라고 묻고 是라고 답할 때, ‘是’인 불성과 ‘何’인 불성이 顯現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四祖가 ‘姓이 무엇이냐(是何姓)’고 물었을 때 五祖는 ‘불성이다(是佛性)’라고 답했다. 종래에는 4조가 개별적인 姓을 물었을 때, 5조가 佛性으로 답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姓’에서 ‘性(佛性)’에로 돌려 놓았다고 해석했다. 즉 5조는 각자의 개별적 姓의 관점에서 보편적 佛性에로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겐은 무불성을 통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를 넘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해 왔다. 다음은 도겐의 무불성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한다.

이 宗旨는 是는 佛性이라는 것이다. 何이기 때문에 佛이 되는 것이다. 是는 何姓일 뿐임을 究取해야 한다. 是는 이미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 즉 是는 何이며, 佛이라고 해도 〔그런 불성마저도〕脫落하고 透脫할 때 반드시 姓이 된다. 그 姓氏가 (5조의 경우는) 바로 周인 것이다.

도겐이 是佛性을 “是는 佛性이다. 何이므로 佛이다”라고 하거나 “是는 모두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종래에는 常으로서의 존재방식을 넘어선 불성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해왔다. 즉 何이건, 是이건, 姓이건, 佛이건 간에 고착하는 곳에서는 불성이 현성할 수 없으므로 도겐은 그 모든 것에서의 透脫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是는 이미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고 말한 의미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무불성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常이라는 불성의 고착화로부터 초월하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도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증의 차원에서 이를 해석한다.

4조는 말한다. 너는 無佛性이다. 이는 너는 (다른) 누가 아니라 너는 너일 뿐이지만 無佛性으로서 開示한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時節의 無佛性인지를 알고 배워야 한다. 覺者로서의 無佛性인가, 覺者가 佛向上한 無佛性인가,... 佛性成佛時 無佛性인가, 보리심을 발한 때(發心한 때) 無佛性인지를 묻고 말해야 한다. (禪院에 있는 하나의) 露柱에게도 물어보자. 露柱에게도 묻지 않으면 안된다. 佛性에게도 묻지 않으면 안된다.

도겐은 4조가 말한 汝無佛性을 ‘너는 불성이 없다’로 해석하지 않고 ‘무불성’을 한 단어로 보아 ‘너는 무불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도겐은 이 때의 무불성이 覺者로서의 무불성인지, 覺者가 佛向上한 무불성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修證 안에서만 무불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은 그 뒤에 도겐이 말한 무불성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20년, 30년 아니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參究해야 한다고 역설함에서 입증된다.

이와 같이 도겐이 말한 무불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修證의 세계를 떠나서 이해될 수 없음을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다. 無佛性의 세계는 우리가 發心하여 수행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세계라는 자각이야말로 도겐이 말하려는 무불성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열쇄가 된다.

도겐은 佛性成佛時 無佛性인지, 發心時 無佛性인지 묻고 있다. 이것은 發心할 때의 무불성이나, 修行할 때의 무불성, 成佛할 때의 무불성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를 묻는 것이다. 도겐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行持道環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발심한 후 수행하고 그 후에 보리를 얻어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경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심의 때나 수행, 보리, 열반의 때가 각각 불성이 現成하는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佛性成佛時 無佛性’이나 ‘發心時 無佛性’ 모두 불성의 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의 무불성 역시 修證의 관점에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修證의 관점에서 무불성을 본다면 앞서 살펴본 有佛性과 무불성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도겐은 무불성이 유불성보다 우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도겐은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5조와 6조의 무불성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5) ② 5조와 6조의 無佛性과 作佛의 관계

作佛은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敎信에 바탕을 두고 성불하기 위해 닦는 수행을 말한다. 그렇다면 ‘본래 부처’라는 중국선종의 祖信의 관점에서, 작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무불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5조와 6조 간의 문답은 작불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第6祖 曹谿山 大鑑禪師가 黃梅山에 처음으로 갔을 때
5조; 너는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6조; 嶺南人입니다.
5조; 와서 무엇을 찾고자 하느냐?
6조; 作佛을 바라고 있습니다.
5조; 영남인무불성인데 어떻게 作佛하겠는가?

이것의 출처는 『壇經』인데 거기서는 5조가 6조에게 “영남에서 왔다면 너는 오랑캐가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꾸짖는 것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5조가 “너는 영남인이기 때문에 불성이 없는데 어떻게 作佛할 수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혹독하게 6조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6조는 자신을 무시하는 5조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야 남쪽과 북쪽이 다르겠지만 불성에도 남북이 있겠습니까? 나의 오랑캐몸과 大師의 몸이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불성이야 무슨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응한다.

 이러한 6조의 응답에 대해서 종래에는 “弘忍과 같은 蘄州 黃梅縣 出身의 북쪽 사람과 혜능과 같은 廣東省 新州 出身의 남쪽 사람은 구별할 수 있으나, 인간의 근원인 불성은 남북과 같은 차별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왔다. 즉 물질적인 육체는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虛融한 空이므로 남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것을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불성이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의 의미로 해석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영남인무불성에 대한 해석이다. 종래에는 이를 ‘영남인은 불성이 없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도겐은 ‘영남인무불성’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보고 있다.

‘영남인무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남인은 불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영남인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남인무불성’일 뿐이다.

이러한 도겐의 해석에 대해 종래에는 4조와 5조의 무불성과 같이 ‘영남인무불성’에서 無의 의미는 佛性의 有無가 아니라 유무를 초월한 절대무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도겐이 ‘嶺南人無佛性’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영남인무불성 자체를 佛性의 現成으로 보려는 것이다. 이는 영남인이 그 자체로 ‘무불성으로서의 불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영남인을 ‘무불성으로서의 불성’이라고 본 도겐은  “영남인무불성인데 어떻게 作佛하겠는가?” 또한 종전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종래에는 본래부처라는 祖信에 근거하여 불성을 이해해 왔으므로 다만 이를 자각하면 된다고 말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성을 종자로 보아 마치 씨앗이 자라듯이 수행을 통해 점차 부처가 된다는 작불 개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조가 작불을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6조가 말한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六祖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 이 말을 들어서 그 句의 뜻을 공부해야 한다. 南北에 대한 말을 바로 존재 그 자체(赤心)의 現成에 비추어 고찰해야 한다. 六祖가 道得한 句는 宗旨가 있다. 이른바 사람은 作佛해도 불성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은 一隅의 搆得이 있다.

六祖가 말한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은 남북이 없다’는 것을 거듭거듭(再三撈摝) 參學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撈波子)에 力量이 있어야만 한다. 六祖가 말한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말을 조용히 拈放(참학공부)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말한다. “인간에게는 일정한 공간(質礙)이 있어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虛融해서 남북의 논지가 미칠 수 없다.” (이것이) 六祖가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이 邪解를 벗어버리고 곧 바로 參學해야 한다.

종전에는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육체라는 공간(質礙)이 있어 남북의 구별이 있으나 불성은 虛融하여 남북의 구별이 없다”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해석은 六祖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본다. 도겐은 어떤 관점에서 이를 잘못되었다고 보았을까?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말에는 ‘불성은 상주불변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성은 상주불변하므로 남북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사람은 作佛해도 불성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一隅의 搆得이 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搆得이란 본래 會得, 合點, 了解, 契當의 뜻으로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도겐은 搆得 앞에 一隅를 써서 이를 ‘하나의 한계’라는 뜻으로 보았다. 즉 본래성불의 관점에서는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나, 도겐은 여기에 일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작불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려는 도겐의 의도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작불에 대한 도겐의 새로운 해석은 무엇인가?

종래에는 “사람은 作佛해도 佛性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견지에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불성은 본래 주어져 있으므로 수행을 수단으로 깨침을 얻고자 하는 작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작불에 대한 견해는 본래성불이라는 祖信에 바탕을 둔 수증관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祖信에 근거해서 볼 때 좌선을 수단으로 삼아 성불한다는 作佛 개념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6조가 말한 것처럼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를 ‘一隅의 構得’으로 보아 그 안에 한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도겐은 ‘作佛’ 또한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는다. 도겐에게 있어 작불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대로 본래부처라는 祖信에 근거한 수증관에서는 수행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은 수행의 관점에서 自性定慧와 隨相定慧를 구별한다. 隨相定慧의 定은 수행자가 그때 그때 직면하는 相과 事로서의 번뇌에 꾸준히 대처해 나가는 삼매(samādhi)이며, 慧는 諸法 하나 하나에 대하여 미혹됨이 없이 그 空을 觀하는 般若(prajnā)를 의미한다. 지눌에 의하면, 隨相定慧의 修는 北宗이나 기타 방편적 가르침들에서 행하는 修의 길로서 最上乘禪이 아니다.

반면, 自性定慧는 자신의 본성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定과 慧를 의미한다. 이것은 眞心의 體가 지니는 두 측면인 寂과 知, 定과 慧를 가리킨다. 따라서 自性定慧를 닦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心性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닦는 것이므로 ‘修 아닌 修’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作佛行은 隨相定慧의 修이다. 도겐의 작불해석은 隨相定慧에 근거한 작불개념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겐은 어떤 관점에서 作佛을 새롭게 보고자 했는가? 그것을 파악하려면 먼저 도겐이 말한 時節因緣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도겐은 『大般涅槃經』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성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時節因緣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시기가 到來하면 불성은 現前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기가 도래하면’의 의미는 ‘불성이 現前할 시기가 나중에 도래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게 보면 불성은 우리 안에서 점차 자란 후에 드러나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도겐은 ‘시기가 도래하면’을 미래형으로 보지 않고 ‘시기가 도래해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지금 여기’에 현성하는 것이므로 성불은 ‘지금, 여기’에 드러나는 불성의 현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성불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성불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도겐은 『정법안장』「柏樹子」에서 “불성은 成佛 이후의 장엄이며 成佛과 同生同參하는 불성이다. 柏樹는 불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불성과 成佛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불성은 성불과 더불어 드러나지 성불과 동떨어진 어떤 실재가 아니다. 도겐이 말한 작불과 불성의 관계는 이러한 성불과 불성의 관계에서 제대로 이해된다.

 “불성의 도리는 성불보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으며 불성은 반드시 성불과 동참한다”고 도겐은 말한다. 이와 같이 불성이 성불과 동참한다는 것은 도겐의 수증관인 ‘證 위의 修’일 때 가능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불이 먼저이고 불성이 뒤가 되든지, 불성이 먼저이고 성불이 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불이 불성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도겐의 불성은 결코 선언적 차원에서의 불성내재론이 아님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불성을 수증의 문제와 연관지어 보려는 도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불성내재론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도겐의 불성론은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라는 6조의 견해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불성을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볼 때, 즉 불성이 완성된 형태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다고 볼 때, 불성을 완성하기 위해 행하는 수행인 작불 행위는 敎門의 믿음에 바탕을 둔 수행이 된다. 따라서 6조는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敎門의 믿음에 근거한 불성론과 수증론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에도 一隅의 搆得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불성은 역시 작불한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도겐은 6조가 비판한 성불하기 위해 닦는 작불행을 다시 긍정한 것일까?

배발생적 불성론을 비판한 점에서 이미 도겐이 성불을 위한 닦음으로서의 작불을 비판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성은 작불한다’는 의미는 불성이 작불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불의 자리가 곧 불성이 드러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에 一隅의 搆得이 있다’는 것은 작불이 성불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작불 그 자체가 성불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도겐에게 있어 작불로서의 좌선은 종래의 해석처럼 성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불과 동참하는 의미의 좌선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작불의 좌선을 성불의 좌선과 동일시하는 것은 ‘證은 修에 卽하여 드러나며 修를 떠나서 證을 말할 수 없다’는 本證妙修의 수증관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겐은 작불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중생의 입장에서도 도겐이 말한 것과 같이 作佛을 이해할 수 있을까? 중생이 행하는 수행도 도겐이 말한 작불의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론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불성이 4조에서 5조를 거쳐 6조에 전해졌다는 사실은 무불성이 바로 佛祖에서 佛祖에로 正傳되어온 正法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불성」권에서 도겐이 무불성을 正傳佛法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③ 正傳佛法으로서의 無佛性
7)

도겐은 齊安國師의 일체중생실유불성과 潙山의 일체중생무불성을 비교하여 양자 중 일체중생무불성이 더욱 佛道에 성숙한 것으로 평가한다. 齊安國師는 馬祖의 法嗣이며 大潙는 馬祖의 法孫인데 오히려 孫 쪽이 스승보다 佛道에 숙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무불성이 유불성보다 우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불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실유불성이지 무불성이 아니기 때문에 무불성의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도겐은 “見佛聞法(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최초에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일체중생무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見佛聞法(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최초에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중생무불성이다. 선지식이나 경전을 통해 배워서 기뻐해야 할 것은 중생무불성이다. 일체중생무불성을 듣고 깨닫는데 있어 參飽하지 않으면 불성을 아직 見聞覺知하지 못한 것이다. 六祖가 오로지 作佛을 바라기에 五祖는 그가 잘 作佛하는 것외 다른 말이나 善巧는 없다. 다만 영남인무불성인 것이다. 無佛性의 말과 소리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作佛의 똑바른 길임을. 그러므로 無佛性의 正當恁麽時가 곧 作佛이 된다. 無佛性을 아직 보거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자는 아직 作佛하지 않은 자이다.

도겐은 ‘일체중생무불성’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일체중생무불성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無佛性의 正當恁麽時가 곧 작불이 된다”는 도겐의 표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正當恁麽時는 좌선의 때이면서 동시에 깨침의 때이다. 따라서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라 하면 무불성으로서 좌선하는 때이면서 동시에 깨침의 때를 의미한다. 도겐은 바로 이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를 作佛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를 作佛이라고 한 것은 作佛 역시 깨침의 行임을 의미한다.

도겐이 작불을 ‘깨침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는 것은 ‘修는 證을 떠날 수 없고 동시에 證은 修를 떠날 수 없다’는 본증묘수의 관점에서 수증을 보기 때문이다. 도겐이 무불성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작불에 대한 그의 해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작불 이외에도 도겐이 새롭게 재해석한 것 중에 ‘罣礙’라는 표현이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에서 罣礙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도겐은 괘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4, 5조의 문답과 관련하여 罣礙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4조, 5조의 문답인 무불성의 道得, 그 罣礙의 力量을 지닌 一隅를 받아서 迦葉佛 및 석가모니불의 諸佛이 作佛하고 轉法함에 ‘실유불성’이라고 말할 역량이 있다. 悉有의 有는 無無의 無를 통해 법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무불성의 얘기는 4조와 5조(의 室)로부터 듣게 된다. 이 때 六祖정도의 사람이라면 이 無佛性의 말을 功夫해야 한다. “有無의 無는 그만 두고 불성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이 불성인지 물어야 한다. 지금의 사람들도 불성을 물을 때 불성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불성의 有無의 뜻을 묻는다. 이것은 경솔(倉卒)한 일이다. 모든 無의 無는 無佛性의 無에서 배워야 한다.

도겐은 4조와 5조의 無佛性을 ‘罣礙의 力量’이라고 말한다. 罣礙란 ‘방해한다’는 의미이므로 보통 보리심을 방해하는 번뇌나 갈등, 망상의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즉 우리는 흔히 깨침의 길에서 이는 장애요인이기에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왔다. 마치 장애물로 인해 물이 흐를 수 없듯이 마음 안에도 罣礙로 인해 종교적 생명이 차단되어 흐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罣礙야말로 4조가 5조에게 불법을 전수해 준 하나의 힘으로 보았다. 어떻게 괘애가 그런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까?

종래에는 도겐이 말한 ‘괘애의 역량’에 대해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한정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해석해 왔다. 마치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성이 석존으로부터 가섭존자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전해져온 것과 같이, 불변적이고 영원한 불성이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罣礙의 力量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괘애의 역량은 영원과 지금, 불변과 변천의 양면을 이어주는 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불성’을 영원하고 불변적인 ‘常’으로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원불변한 불성이 있어 그것이 역사 속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도겐은 처음부터 불성을 상주불변하다는 견해를 철저하게 비판해 왔으므로 罣礙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이 해석해 온 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즉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단순한 선언적 차원에서 불성을 이해한 것이 이러한 해석을 낳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왜 무불성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무불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성을 선언적 차원에서 우리 안에 내재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불성’이 ‘좌선’을 통해 드러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겐은 무불성의 의미를 알려면 佛道에 參入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도겐에게 있어 ‘佛道에 參入’함은 곧 좌선수행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좌선수행을 통해 드러난 불성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괘애의 역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괘애의 역량이란 영원불변한 불성이 한정된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의미라기보다, 佛祖가 佛祖에게 불법을 전수해준 하나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괘애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도겐의 표현으로 ‘葛藤’을 들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葛藤」에서 “갈등이야말로 佛法이어서 갈등을 지니고 갈등을 자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석가모니불이 정법안장을 전한 자는 靈山會에서 가섭대사 뿐이다. 그로부터 28대를 거쳐 보리달마에 이르렀다. .....聖者들은 갈등의 근원을 잘라내는 參學을 지향한다고 말하지 갈등을 갖고 갈등을 잘라내는 것을 參學하지 않는다. 〔그들은〕갈등을 갖고 갈등을 휘감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더구나 어떻게 불법이 갈등으로부터 갈등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알겠는가? 이와 같이 불법을 받는 것이 갈등임을 아는 이는 없다. 그런 말을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없다. 더더군다나 몸으로 實證한 자는 얼마나 있겠는가?     

葛藤의 葛이나 藤는 덩굴풀로서 禪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속박하는 것, 文字言說 또는 번뇌로 이해되기도 하나, 도겐에게서는 正法이 스승에게서부터 제자에게로 직접 전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갈등에 대한 도겐의 깨침은 如淨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天童如淨 古佛은 “덩굴의 덩굴손이 덩굴을 감는다”고 설한 적이 있다. 如淨으로부터 갈등의 불법에 대해서 배운 도겐은 “이같은 설법은 지금까지 古今에서 보고 들은 적이 없다. (如淨)古佛이 처음으로 이를 보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도겐은 “덩굴풀(胡廬)의 덩굴이 덩굴을 감는 것은 佛祖가 佛祖를 參究해서 佛祖가 佛祖를 實證하고 契合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以心傳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갈등을 佛法傳受의 의미로 해석하여 佛法을 전수받는 것은 곧 갈등을 전수받는 것이라고 본다. 釋尊이 點華하여 전한 것이 곧 갈등이며, 가섭이 이를 받아서 破顔微笑한 것이 바로 皮肉骨髓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佛祖의 갈등이야말로 ‘皮肉骨髓의 命脈’라고 말한 것이다.

 도겐은 「갈등」권에서 달마의 피육골수를 종전과는 달리 해석한다. 종래에는 이를 피육골수의 高低나 深淺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달마의 피육골수를 통한 불법전수에서 골수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피육골수 각각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각 존재의 형태가 바로 불성의 완전한 究盡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도겐에게 있어 피육골수는 모두 불성의 顯現일 뿐이다. 즉 骨髓가 가장 깊은 것도 아니고, 皮膚가 가장 낮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겐은 단순히 피육골수가 佛性의 顯現에 머무르지 않고, 달마가 자신의 皮(吾皮), 肉(吾肉), 骨(吾骨), 髓(吾髓)로서의 正法을 제자들에게 주었음에 주목한다.

 이와 같이 달마가 자신의 皮, 肉, 骨, 髓 각각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볼 때 皮肉骨髓는 모두 불법전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는 “佛祖의 갈등이야말로 皮肉骨髓의 命脈”이라고 한 도겐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피육골수처럼 갈등도 佛道嗣法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도겐은 갈등을 끊어버릴 번뇌가 아니라 佛法의 세계로 나아갈 佛道嗣法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즉 도겐은 정법의 전수를 갈등의 전수로 해석한 것이다.

 “갈등의 종자에 脫體의 力量이 있어 갈등이 휘감겨 붙은 가지나 잎, 꽃, 열매가 回互, 不回互함으로써 佛祖現成하고 公案現成한다.” 갈등을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佛法의 의미로 본다는 것은 作佛이나 罣礙에 대한 도겐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도겐이 작불을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로 봄으로써 작불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작불을 본증묘수의 관점에서 봄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겐의 견해는 종전의 좌선관과 차이를 보이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전에는 좌선을 깨달음의 수단으로 간주해 왔는데 도겐은 좌선 자체를 證으로 보았기 때문에 작불 또한 ‘證 위의 修’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종래에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온 作佛과 罣礙마저도 무불성을 통해 證上의 修로 수용함을 보여줌으로써 종래 실유불성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일체중생무불성이 일체중생실유불성보다 佛道에 더욱 성숙하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무불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유불성의 의미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무불성과 유불성을 함께 한 趙州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8) ④ 趙州의 有, 無佛性을 통해 드러난 本證妙修

趙州從諗(778-897)하면 狗子無佛性을 떠올리게 된다.『趙州錄』에 의하면 수행승이 “위로는 諸佛에,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조주는 ‘개는 業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趙州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할 때 그 없다(無)는 의미는 有無의 無를 말한 것이 아니라, 번뇌와 業識에 빠져 있는 수행자에게 業識에 빠져 있으면 불성이 드러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有無라는 망상에 빠져 있으면 佛性의 現成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도겐은 『學道用心集』에서  ‘禪僧이 행할 바(禪僧の行履の事)’를 설명하면서 趙州無佛性을 언급한다.

趙州에게 어느 僧이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趙州는 ‘없다’고 답한다. 無字에 대해서 理知分別해 보아도 알 수 없다....身心은 무엇이고, 수행(行李)은 무엇이며, 生死는 무엇이고, 佛法은 무엇인가, 世法은 무엇이며, 山河大地, 사람, 동물, 가옥은 무엇인가. 결국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렇게 차례차례 반성해 가면 자연히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이라는 두 개의 相이 없어진다. 이 차별의 相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지는 인간으로서는 실증할 수가 없다.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는 자가 수없이 많다. 參禪하는 學徒들이여, 조금 미혹되거나 완전히 미혹되더라도 뒷걸음질치거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오직 수행할 뿐이다. 

도겐은 참선수행을 一生의 大事로 본다. 이는 수행의 비결은 다름 아닌 ‘끊임없이 수행해 가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佛道수행을 계속해가고자 하는 마음과 각오가 필요하다.

 만일 깨침의 경지에 집착해서 거기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행을 잊은 퇴보일 뿐이라고 도겐은 경고한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마저 내려놓고 그저 수행할 뿐이다. 이것이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이다. 趙州가 無佛性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 역시 도겐이 『學道用心集』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행의 지침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趙州는 狗子無佛性만이 아니라 狗子有佛性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趙州는 有佛性과 無佛性을 모두 말했지만 『無門關』에는 狗子無佛性만 나오고 狗子有佛性은 언급하지 않는다. 왜 『無門關』에서는 조주가 말한 유불성은 삭제하고 무불성만 다루었을까? 그것은 宋代에 들어서 『無門關』이래로, 有보다 無를 더 중시하는 풍토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有를 버리고 無를 택하는 것이 더 높은 경지로 보는 분위기가 宋代에 만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永明延壽(904-975)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卽心是佛은 表詮으로써 그 현상을 그대로 표시하고 自心을 몸소 증명하여 뚜렷하게 見性하는 것이다. 非心非佛은 遮詮으로써 어그러짐을 보호하여 틀림을 막고 의심을 떨치고 집착을 파하고자 함이다. ...마음도 부처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非心非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학자들은 이미 혜안도 없을 뿐만 아니라 多聞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말에만 치우쳐 분명하고 뚜렷한 이치를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表詮보다 遮詮을 중시하고, 有보다 無를 택하고 부정의 표현을 더 중시하는 宋代의 분위기에 대해서 延壽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無門關』에서 무불성만을 다룬 것도  宋代에 表詮보다 遮詮을 중시하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편견 속에서 無는 형이상학적으로 초월화되거나 절대화되어갔고, 그리하여 有無를 떠난 絶對無로 탈바꿈해 가는 경향을 보였다. 趙州는 상대의 이러한 경향성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일생동안 無를 絶對無의 차원으로 보는 경향을 부수려고 한 것이다. 절대나 초월이라는 관념이 고개를 드는 순간, 趙州禪과는 멀어진다는 이런 이유에서이다.

조주 당시에 ‘북쪽은 趙州, 남쪽에는 雪峰(823-908)’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남북이 서로 다른 선종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조주는 당시 설봉교단에 대해 선문답의 모범답안을 외워서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선문답을 판에 박힌 것처럼 외는 선사들에게서는 본래 선문답이 지닌 생명이 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覺을 중시하는 당시 경향에 대해서도 조주는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기에 조주는 무불성만이 아니라 유불성도 말한 것이다. 그럼 趙州가 狗子無佛性뿐 아니라 狗子有佛性을 말한 것에 대해 도겐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조주에게 한 사람의 僧이 물었다.“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물음은 僧이 趙州를 상대로 문답한 것이다. 이같이 불성에 관한 문답은 佛祖의 日常茶飯事인 것이다. 조주는 말한다. ‘있다.’ 이 有는 經論의 학자가 말하는 有도, 〔小乘의〕 說一體有部가 말한 有도 아니다. 나아가서 佛有를 배워야 한다. 佛有가 곧 趙州有이며 趙州有가 개의 有이며 개의 有가 佛性有인 것이다. 僧은 말한다. “개가 이미 불성이라면 왜 가죽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이 승이 말한 것은 今有인지 古有인지 旣有인지를 물은 것이다. .....旣有는 개 가죽 안에 들어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개가죽 속으로 들어가는 行履, 헛되이 佛道를 밟음에서 벗어나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승려는 자신이 알고 있던 불성개념을 갖고 조주에게 개의 불성에 대해 묻는다. 이에 趙州는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도겐은 조주가 말한 ‘有’는 經論의 학자나 上座佛敎의 說一體有部에서 말한 有가 아니라 ‘佛道의 有’라고 해석한다. 즉 조주가 말한 ‘有佛性의 有’는 불성의 有라는 것이다. 개 안에도 불성이 顯現한다는 것이다.

승려는 “개는 이미 불성인데(旣有) 왜 불성이 개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여기서 도겐은 趙州가 말한 有는 今有(시간 안에 실재하는 有)나, 古有(고래부터 있던 본래의 有), 旣有(이미 존재하는 有)가 아니라, 개가죽 속으로 들어가는 行履, 즉 修證의 실천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조주가 무불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불성에서도 禪僧의 行履 즉 수행의 자리에서 비로소 불성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유불성이든, 무불성이든 불성의 참뜻을 알려거든 ‘수행하라’는 메시지가 도겐의 조주의 유불성, 무불성 풀이 안에 함축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조주의 유불성과 무불성을 통해 불성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유불성이든, 무불성이든 불성은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바로 도겐이 말하려는 핵심주제이다. 즉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수행의 삶을 사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불하기 위해 수행함이 아니라 그저 항구히 수행하는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을 드러내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作佛이나 罣礙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도겐이 作佛이나 罣礙를 새롭게 해석한 것도 성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작불과 괘애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불과 괘애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그가 종전의 상주불변하는 불성관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상주불변하는 불성관에서 부정되어오던 작불과 괘애가 새롭게 재해석된 것은 바로 수증의 관점에서 불성을 보고자 한 도겐의 불성관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불성과 관련한 도겐의 修證論은 그의 無常觀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도겐의 無常佛性論이다.


===




============
최현민 연구실
====


Total 23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23 도겐의 생태영성2009.6월강좌 관리자 10-25 647

22 도겐의 생태영성2009.6월강좌 관리자 10-25 598

21 한국종교학회-2009.2.27 관리자 10-25 1275

20 동국대학교 일본불교연구소 학술세미나 발표논문 2010… 관리자 10-25 1580

19 正身端坐(지관타좌) 관리자 10-25 1335

18 道元의 只管打坐와 그 의미 2010.10 관리자 10-25 1018

17 용수의 신현불성 관리자 10-25 761

16 석존에서 도겐까지 관리자 10-25 837

15 생태위기극복의 동반자로서의 불교와 그리스도교한국… 관리자 10-25 746

14 도원의 불성관과 수증관 영문초록-종교연구2009 관리자 10-25 631

13 도겐의_불성이해서설 관리자 10-25 641

12 도겐의 정법안장과 불성권 관리자 10-25 2184

11 도겐의 입송당시 중국선종사상 관리자 10-25 750

10 도겐의 실유불성론 관리자 10-25 1085

9 도겐의 수증관이 지닌 독특성 관리자 10-25 995

8 도겐의 수증관의 역사적 배경 관리자 10-25 952

7 道元의 佛性理解 序說 관리자 10-25 994

6 도겐의 불성이해서설(동국대학교 한국불교학 결집대회… 관리자 10-25 736

5 도겐의 무상불성론 관리자 10-25 906

4 도겐의 무불성론 관리자 10-25 816


3 도겐의 구도여정 관리자 10-25 1205

2 도겐 연구사의 비판적 고찰 관리자 10-25 718

1 가마꾸라신불교의 창시자들과 도겐

====


Total 25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 제8장 4. 일본개신교의 시작 2 관리자 09-05 639

24 제8장 4. 일본 개신교의 시작 관리자 09-05 647

23 제8장 3. 2) 정통그리스도교 신학과 자유신학 3) 한국… 관리자 09-05 724

22 제8장 3. 일본그리스도교와 천황제 관리자 09-05 608

21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관리자 09-05 668

20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드러… 관리자 09-05 757

19 제8장 2.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732

18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768

17 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관리자 09-05 637

16 제5장 고학과 국학 관리자 06-30 920

15 제4장 일본유교 - 에도시대의 주자학, 에도시대의 양… 관리자 06-30 1778

14 제3장 일본불교 5. 에도불교 관리자 06-30 986

13 제3장 일본불교 4. 무로마치불교 관리자 06-30 1249

12 제3장 일본불교 3. 가마쿠라 불교 관리자 06-30 1974

11 제3장 일본불교 2. 헤이안 불교 관리자 06-30 971

10 제3장 일본불교 1. 나라불교 관리자 06-30 813


9 제2장. 신도2 관리자 01-10 1325

8 제2장. 신도 1 관리자 12-20 775

7 제1장. 일본인의 무종교성-2 관리자 12-20 1211

6 제1장. 일본인의 무종교성-1 관리자 12-20 794

5 일본종교(2008.2 수업계획서) 관리자 10-25 846

4 일본인들의 죽음이해 관리자 10-25 1414

3 일본그리스도교자료 관리자 10-25 1055

2 신불습합 관리자 10-25 3145

1 고대 일본인의 죽음관


===
 일본종교(2008.2 수업계획서) 글자 확대 글자 축소
 WRITER:  관리자  (118.♡.103.201) DATE : 10-10-25  READ : 846
수 업 계 획 서
                            (2008년. 2학기)
 
과목명 : 일본종교의 이해                              담당교수 : 최현민
학  점 : 3학점
수강대상 : 1-4학년                              수업시간 : 화목 16:30-17:45
----------------------------------------------------------------
1. 교과 목표
  일본의 신도사상에서부터 불교, 및 16세기부터 동진한 서학사상의 전래의 고찰을 통해 일본종교의 전반적인 이해를 고찰한다. 또한 현대 일본의 종교상황을 신종교와 연관지어 살펴보고  동아문화권을 함께 형성하는 중국과 한국과의 사상적 비교고찰도 시도한다.

2. 수업방법
  가. 강의 : 80%      토론과 발표 : 20%

3. 교과개요 및 내용
가. 교과 개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교  수  내  용                수업 방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일본인의  종교성
2                일본의 신도사상 1
3                일본의 신도사상 2
4                일본의 고대불교 Ⅰ(나라불교)
5                일본의 고대불교 Ⅱ(헤이안불교)
6                일본의 중세불교Ⅰ (가마꾸라불교)
7                일본의 중세불교 Ⅱ (가마꾸라불교)
8                일본의 근세불교 (에도불교)             
9                일본의 기독교 Ⅰ
10              일본의 기독교  Ⅱ
11              현대 일본 신종교
12              현대 일본 신신종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 교과내용
1.    무종교성의 실체
2.    무종교성의 역사
3.    신사의 신앙으로서의 신도--신도의례(마츠리)
4.    신화의 전승으로서의 신도
5.    가미신앙으로서의 신도
6.    신불습합론
7.    국가신도
8.    나라(奈良)불교
9.    헤이안(平安)불교 1
10.  헤이안(平安)불교 2
11.  가마꾸라(鎌倉)불교 1
12.  가마꾸라불교 2
13.  가마꾸라불교 3
14.  에도불교 1
15.  에도불교 2
16.  일본의 기독교 전래 및 탄압
17.  소설 침묵 발표 및 분석
18.  일본 기독교단과 천황제와의 대결
19.  일본기독교와 한국 기독교 비교
20.  현대일본신종교 1
21.  현대일본신종교 2
22.  현대일본신신종교 및 종합

4. 교 재
1) 일본종교개관

아마 도시마로, 정형 역,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예문서원, 2000
박규태,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제이앤씨, 2005.
무라카미 시게요시, 『일본의 종교』, 최길성 역, 예진, 1993.
미토 마사히데, 엄석인 역, 『사상으로 보는 일본문화사』, 예문서원, 2003.
나가오 다케시, 『일본사상이야기 40』, 박규태 역, 2002.
이에나가 사부로, 이영 역, 『일본문화사』, 까치, 1999.
석전일량, 성해준 역, 『일본사상사개론』 J&C, 2003

2) 일본불교

서영애, 『일본문화와 불교』, 동아대학교출판부, 2003
와다나베 쇼오꼬오, 『일본불교』, 이영자 역, 경서원, 1987.
『일본불교사』, 이영자 역, 민족사, 1988.
柳田聖山, 『선과 일본문화』, 불광출판부, 1995.
한보광, 『일본선의 역사』, 여래장, 2001.

3) 신도

村岡典嗣, 『일본신도사』, 박규태 역, 예문서원, 1998.
J. B 노스, 『세계 종교사』, 윤이흠 역, 1988.
 
4) 그리스도교

사와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대한기독교서회, 1995.
도히 아키오, 『일본기독교의 사론적 이해』, 서정민 역,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1993.
김승혜, 『동아시아 종교전통과 그리스도교의 만남』, 영성생활, 1999.
윤이흠 외, 『한국인의 종교』, 문덕사, 1994.(일본기독교와 비교)
古屋安雄 , 『日本神學史』, 요르단사, 1991

6) 현대일본종교

시마조노 스스무, 박규태, 『현대일본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1997.

====

도겐의 悉有佛性論 임기영불교연구소

시산회(詩山會)
도겐의 悉有佛性論 | 여래장 사상
도봉별곡 2021. 8. 8. 
http://blog.daum.net/yc012175/15948222


도겐의 悉有佛性論


[출처] 도겐의 悉有佛性論|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가.
1) (1) 悉有로서의 佛性

앞서 말했듯이 ‘불성’사상은 대승교의의 기본전제로서 동아시아 불교를 이해하는데 핵심적 주제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불성의 의미는 佛陀의 본성, 깨침 그 자체의 성질, 미완성으로부터 佛이 될만한 성질, 佛이 될 가능성으로 알려져 왔다. ‘佛性’에서 ‘性’은 본래 ‘dhātu’를 말하는데 이는 놓인 장소, 기반, 토대라는 의미이다.

교의상으로는 種族, 種姓(gotra), 因(hetu)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불성은 佛種 혹은 佛種姓이라는 佛이 지닌 속성으로 이해해왔다. 이같은 本性論적인 불성사상은 如來藏사상과 함께 중국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물론 불성의 이해에 본성론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三論學의 대성자인 吉藏(549-623)은 『涅槃經』 번역 후 隨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던 불성사상에서 11개 학설을 뽑아 이를 비판한 후 三論學的 眼目과 논리로 中道가 正因佛性이 된다고 주장하거나 산천초목도 成佛할 수 있음(草木成佛)을 불교사상 처음 밝혀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불성이해는 본성론적인 측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도겐 당시 일본불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본성론적인 불성이해는 성불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그것은 본래성불이라는 대승적 믿음과 중생의 실존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불과 관련된 불성론은 『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종래에는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혹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로 해석해 왔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불성 해석에서 불성은 如來藏과 동일시하는 견해가 생겨났다.

如來藏에 해당하는 인도의 원어는 tathāgata―gārbha로 胎 즉 ‘모친의 배 속’이라는 의미로 여래를 낳아주는 자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胎와 같은 생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藏을 사용했다. 이렇듯 여래장은 ‘모든 중생이 여래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볼 때 중생이 여래를 포섭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중생과 여래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如來藏은 중생이 안에 부처를 품고 있음과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 혹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원인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이와 같이 여래장사상은 일체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불성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전통적으로는 불성을 佛이 될 수 있는 힘이나 능력, 가능성으로 보아왔다. 여기서 불성의 ‘佛’은 覺과 같은 의미로 “衆生은 佛의 활동 혹은 깨닫는 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불성이 내재함을 의미하므로 ‘불성내재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것이 중국불교, 더 나아가서 그 맥을 같이 하는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해온 불성론이다.

그러나 도겐의 불성이해는 이와 다르다. 그는『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서 ‘悉有佛性’ 부분을 ‘悉有는 佛性이다’라고 해석하여 ‘悉有로서의 佛性論’을 펼쳤다. 여기서 悉有라는 용어는 도겐이 만든 造語이다. 중국문법에 의하면 도겐의 독법은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도겐은 왜 새로운 독해방식을 택하여 실유불성을 ‘悉有는 불성’이라고 해석한 것일까? 이러한 해석은 그가 품었던 대의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도겐의 문제의식이었던 천태본각사상은 『열반경』에 나오는 “一切衆生은 불성이 있으며 如來는 常住하며 變異가 없다(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 有無變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불성을 불변하는 ‘常으로서 불성’을 보는 것에 대해 도겐은 의문을 품었다. 만일 불성이 常住不變하고 우리가 본래부처라면 왜 굳이 수행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다. 도겐은 이 문제의식을 갖고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 有無變異’를 “모두(一切)가 衆生이고, 모든 것(悉有)이 불성이다. 如來는 常住하며 有無이며 變易한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불성은 여래장사상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여래장사상에서 씨나 태아와 같은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불성사상에서도 마치 우리 안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불성은 有情에게만 있으며 ‘유정’이 지닌 잠재성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자칫 인간중심적이고 생물중심적 태도를 지닐 위험이 있다. 

도겐은 불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론을 비판했다. 김희진은 도겐이 불성에 대한 ‘심리적’인 개념을 ‘우주적’인 개념으로 변형시켜 불성을 眞如(tathatā)나 法性(dharmatā)과 동일시했다고 본다. 따라서 일체중생실유불성은 ‘모든 존재 내에 불성이 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성에 내재한다’는 의미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불성을 심성론적으로 이해해온 기존의 불성이해를 초월하고자 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성론을 넘어서 전우주론적 차원에서 불성을 이해하려는 도겐의 종교세계는 다음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三界는 다만 一心일 뿐이다. 心외에 다른 법은 없다. 心과 佛과 衆生, 이 셋은 차별이 없다.” 여기서 도겐이 말한 三界唯心은 起信論的 唯心論과는 다르다. 『기신론』에서는 “唯是一心 故名眞如”라고 하여 眞如와 心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즉『기신론』은 존재론과 의식론을 깊은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에서 의식론으로 변모해 간 것도 아니고, 의식론적 성찰에서 존재론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식론과 존재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신론』에서 말하는 존재 개념에는 의식성이 깊이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기신론』은 인간적이고 주체적이면서 실존적이고 情意的인 존재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마음을 의식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無情까지 포함한 삼라만상을 마음으로 보고자 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유인가? 도겐에게 있어 有情은 無情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본래 六道를 살아가는 중생이며 전우주의 몸을 의미한다. 즉 유정은 본래 우주의 힘과 조건들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정도 유정 개념 안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유정을 단순히 어원학적 의미에서만 새롭게 해석하기보다 이를 통해 불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佛道에서 말한 모든 중생은, 마음을 지닌 자는 모두 중생이다. (그것은) 마음이 곧 중생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無心의) 것도 중생이다. 그것은 중생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두 중생이고 중생은 모두 유불성이다. 草木國土는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다.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 日月星辰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

도겐은 草木國土와 日月星辰까지 포함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를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므로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불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단어를 새롭게 정의내린 것이라기보다 인간중심적이고 생물중심적인 사유를 넘어선 도겐의 견해를 드러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우리는 도겐의 불성관이 종래의 유정중심적인 불성론을 넘어선 있음을 볼 수 있다. 悉有에 관한 도겐의 설명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도겐은 悉有와 동의어로 衆生, 有情, 群生, 群類를 들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悉有를 衆生이나 有情과 동격으로 본 것이다. 즉 삼라만상의 중생은 모두 有情이고 悉有이며, 이러한 悉有가 바로 佛性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이러한 개념들을 새롭게 정의한 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 먼저 그는 ‘一切衆生悉有佛性’을 六祖 慧能이 南嶽(677-744)에게 물었던 ‘是什麽物恁麽來(무엇이 이와 같이 하여 왔는가)’와 연관지어 해석하고 있다.

釋迦牟尼佛께서는 말씀하신 “一切衆生悉有佛性” 그 宗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떤 물건이 왔느냐’(是什麽物恁麽來)고 말한 것이며 〔불교를 포괄하여 그 근원을 제시한 대설법인〕 轉法輪이다.

여기서 도겐은 『涅槃經』의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 즉 “어떤 것이 이와 같이 왔느냐?”라는 ‘祖語’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是什麽物恁麽來는 慧能과 南嶽이 처음 對面했을 때 스승인 慧能이 南嶽을 향해서 “너는 누구냐? 어떻게 왔느냐?”라고 묻는 일종의 화두이다. 바꿔 말하면 본래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고 답하는 인생의 決着이 달린 결정적인 물음이다. 南嶽은 혜능으로부터 이 화두를 받고 8년간 이것과 씨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南嶽이 혜능에게 건네준 화두와 비견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도겐은 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是什麽物恁麽來’라는 禪問答을 서두에 꺼낸 것일까?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이라는 祖語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是什麽物恁麽來는 단순한 객관적 명제이거나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주체적 사항을 묻는 말이다. 도겐은 일체중생실유불성을 是什麽物恁麽來로 설명함으로써, 불성이 모든 존재 내에 내재한다는 단순한 선언적 차원에서의 견해를 뛰어넘어, 이를 실존적 차원 즉 修證의 문제와 연관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혹은〔悉有를〕 衆生이라고도 하고 有情, 群生, 群類라고도 한다. 悉有의 말은 衆生이며 群有이다. 즉 悉有는 佛性인 것이다. 悉有의 一悉을 중생이라고 한다. 正當恁麽時는 중생의 內外 혹은 불성의 悉有이다. 單傳하는 皮肉骨髓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너가 나의 피육골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불성이 悉有라고 하는 有는 有無의 有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悉有는 佛語이며 佛舌이며 佛祖의 눈동자(眼晴)이며 禪僧의 眞面目(衲僧鼻孔)이다.

위에서 도겐은 實有의 一悉을 중생이라 표현한다. 悉有의 一悉란 悉有 중 구체적인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구체적인 각 중생에게 불성이 드러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표현 안에는 (깨친 자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중생이 불성의 顯現 자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도겐이 말한 중생, 즉 존재하는 각각이 불성의 완전한 究盡이라고 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修의 차원을 배제한 체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다만 선언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천태본각사상이 지닌 수행무용론에 빠질 수 있다. 도겐이 천태본각사상을 비판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앞서 살펴본 불성내재론 또한 선언적 입장에서 불성을 이해하고 있다. 물론 불성내재론은 수행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씨앗이 자라듯 불성이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 성장해 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도겐은 불성내재론이나 불성현재론적 측면에서의 왜곡된 불성이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성을 수행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해석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실유는 불성’이라는 이면에는 불성을 修證과 직결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그의 원의가 내포되어 있다. 도겐이 중생을 實有의 一悉로서 설명한 것도 이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바로 도겐이 자주 쓴 ‘正當恁麽時’도 깊은 연관이 있다. 正當恁麽時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때’라는 의미로, 도겐은 75권 『정법안장』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말이 깨침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75권 『정법안장』에 나오는 正當恁麽時의 의미는 압도적으로 ‘佛이 된다’라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75권 『정법안장』에서 나온 正當恁麽時 중 깨침과 관련된 것은 24개가 넘는다. 예를 들면 ‘佛身心現成의 正當恁麽時’(「洗淨」), ‘正當恁麽時 佛祖作佛하며 說法하고 說佛한다’(「看經」) ‘無佛性의 正當恁麽時 즉 作佛된다’(「佛性」) “大悟가 되며 그 正當恁麽時”(「大悟」) “作佛의 正當恁麽時”(「坐禪箴」), “得道의 正當恁麽時”(「畵餠」) “佛祖에 친하게 자기를 面授하는 正當恁麽時”(「面授」), “重生成佛의 正當恁麽時”(「三昧王三昧」)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正當恁麽時는 도겐이 修證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正當恁麽時는 佛性이 現成하는 때이면서 동시에 只管打坐의 때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도겐은 지관타좌의 때인 正當恁麽時가 바로 佛性의 悉有라고 설한다. 이는 도겐이 불성을 수행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원의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도겐은 단순히 ‘실유는 중생이고 유정이며 그것이 곧 불성이고 각 존재 하나하나가 불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증의 관점에서 불성을 보고자 한다. 이것은 도겐이 단순히 유정이나 불성 개념을 확대하려는 것이 아니며, 각 존재 자체가 불성의 顯現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불성의 현현이 수증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悉有로서의 불성을 打坐의 전제없이 ‘모든 것은 불성’이라 해석한다면, 중생의 모습 그대로를 불성으로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도겐이 천태본각사상과 관련하여 의문을 품었던 바로 그 문제가 아닌가?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의 불성론에서 수증의 문제를 간과해 버린다면 크게 오해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기존의 전통종학에서는 ‘悉有로서의 佛性’을 좌선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보다 ‘悉有의 참된 실태가 그대로 佛性’이라고 해석해왔다. 즉 그들은 悉有佛性에 대한 자각을 다만 불성의 현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물론 전통종학자들도 只管打坐를 도겐사상의 핵심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도 지관타좌를 하면 그것이 바로 불성의 현현이라고 해석한다. 중생의 지관타좌나 깨친 자의 지관타좌나 아무런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전통종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생의 좌선행과 覺者의 좌선행은 어떠한 차이가 없는 것인가? 과연 이것이 도겐이 말한 지관타좌인가?

이와 같이 불성의 현현에 대한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도겐의 불성을 해석해온 전통종학의 해석을 佛性顯在論이라 규정한다. 앞서 살펴본 전통종학의 문제점을 상기할 때 도겐의 불성론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佛性顯在論’의 의미와 ‘悉有는 佛性’이 뜻하는 바를 잘 구별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도겐이 불성을 打坐와 연관지어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유로서의 불성’을 통해, 불성을 수증문제로 보려는 도겐의 의도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도겐은 「佛性」권에서 자신의 불성론을 펼치기에 앞서 기존의 불성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 (2) 종래의 불성이해에 대한 도겐의 비판

3)

4) ① 개념으로서의 불성

5)
인간이 만든 관념이나 개념은 존재에 직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붓다가 전하고자 한 진리 역시 불교사 안에서 인간의 언어에 감추어져 왜곡되이 전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불성’이다. 도겐은 관념 속에 갇혀져온 불성의 허울을 벗겨내는데 혼심을 기울렸다. 불성에서 우리는 도겐의 놀라운 필체를 통해 드러나는 불성을 만나게 된다. 먼저 도겐은 ‘실유(悉有)’의 허울부터 벗겨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무엇이 悉有가 아닌가’부터 설한다.

지금 佛性이 悉有라고 할 때의 有는 有無의 有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悉有라는 말은 조금도 始有나 本有, 妙有 등에 드러나지 않으며, 緣有, 妄有에도 드러나지 않으며, 心境性相 등과도 관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곧 衆生悉有의 依正, 業增上力,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도겐은 有無의 有나 始有, 本有, 妙有, 緣有, 妄有와 같은 기존의 개념들에서는 실유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始有나 本有는 불성을 ‘當果’로 볼 때 나오는 표현들이다. 當果佛性은 성불이 장래에 일어난다는 것이기에 불성을 始有로 볼 것인지, 本有로 볼 것인지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열반경』을 번역한 道生은 불성을 始有로 보았으나 그 후 점차 本有의 견해로 기울어져 갔다. 本有란 미래에 成佛된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성불’임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始有나 本有의 문제는 그 후 중국선종의 불성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겐은 「佛性」에서 始有나 本有같은 개념들에서는 불성이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즉 불성은 개념적 논의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하고자 한 悉有로서의 불성이다. 마치 나가르주나가 空思想을 펼칠 때, 모든 개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부정해 갔듯이 도겐도 부정의 방법을 통해 ‘悉有’가 불교사에서 생겨난 개념들을 초월한 세계임을 설하고자 한 것이다.

도겐은 이어서 悉有가 業增上力이나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불성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緣起나 因果의 힘인 業力으로서도, 法爾로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와 같이 도겐은 悉有가 개념 속에 있지 않음을 말함으로써, 불성의 진리가 결코 관념을 통해 드러나지 않음을 설하고자 한 것이다. 즉 우리가 관념에서 자유로와질 때 비로소 悉有로서의 佛性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불성은 바로 주먹을 불끈 쥔 것과 같은 약동하는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佛과 性은 達彼達此이다. 불성은 반드시 悉有이다. 〔왜냐하면〕 悉有가 그대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悉有는 百雜碎(일체의 존재)에 있지 않으며 一條鐵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주먹을 쥐는 것같은 拈拳頭이기 때문이다.

6) ② 佛性內在論 批判

7)
우리는 앞서 도겐이 말한 悉有로서의 불성이 개념적인 悉有 이해와 무관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종래에는 불성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실재로 이해해 왔다. 야마우치 슌유(山內舜雄)은 이를 佛性內在論이라 칭했다.

불성내재론이야말로 불성을 이해하는 중심사상이 되어왔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佛性을 하나의 종자로 보고 씨가 자라나듯이 성장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완전한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단지 번뇌로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번뇌(무명)에서 벗어나면 그대로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는 佛性을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 다른 하나는 이미 완성된 상태(본래부처)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다 불성을 內在하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일치한다. 우선 전자에 대한 도겐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어떤 부류는 말한다. 佛性은 草木의 종자와 같다고. 法雨가 내려 물기를 머금을 때 눈과 줄기가 자라고 가지와 잎이 나고 과실이 생긴다. 과실에는 또 종자가 생겨난다. 이러한 사고는 범부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같이 생각한다고 해도 종자와 꽃과 과실 모두 하나 하나가 절대의 진실임을 參究해야 한다. 과실 안에 종자가 있고 종자 안에 보이지 않아도 종자로부터 뿌리와 줄기가 생겨나 있다. 모여 있는 것이 아닌데 많은 가지가 나와 큰 나무가 된다. 이것은 종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古今에 걸쳐서 진실한 것이다. 凡夫의 견해(가능성으로서의 佛性)을 인정한다고 해도 根莖과 枝葉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佛性이다.

이것은 마치 종자가 싹이 트고 자라 枝葉花果가 되듯 불성을 부처가 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는 견해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행을 통해 깨침으로 나아가는 漸修의 길이다. 즉 이는 우리가 아직 부처가 아니지만 수행을 통해 점차 부처가 된다는 점진적 깨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종자가 자라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와 잎이 생기듯 수행을 통해 점차 불성을 완성해 간다고 보는 이해방식을 배격한다.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훗날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즉 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어가듯 불성은 씨와 같은 깨달음의 잠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겐은 뿌리, 가지, 잎을 일련의 성장과정으로 보지 않고 각각 그 자체를 佛性의 顯現으로 본다.

그래서 도겐은 “종자와 꽃과 과실은 모두 각각 赤心임을 參究해야 한다”고 말한다. 赤心은 존재의 現成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종자와 꽃, 과실이 각각 존재의 現成 그 자체이지, 미완성인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도겐은 “뿌리나 가지, 잎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불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불성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깨달음의 잠재성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불성이 현현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불성이 顯現한다는 견해는 이미 불성이 완성된 상태로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견해를 낳았다. 이것은 바로 心常相滅論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도겐은 여러 곳에서 心常相滅說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심상상멸론과 도겐의 불성이해를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겐의 불성이해는 심상상멸론과 혼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 ③ 心常相滅論 批判

心常相滅論은 心常身滅論으로 인간의 신체는 멸해도 인간 마음의 본체인 心性은 결코 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心常相滅論은 중국불교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玄奘(622-664)의 法相唯識 보급으로 한 때 혼란을 겪은 중국불교계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唯心思想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중 특히 선종은 佛心宗이라고 불리울 만큼 마음을 중시해 왔다. 이같은 경향은 “身是無常 心性是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無常으로, 마음을 常이라고 봄으로써 心性常住的으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아갔다. 도겐이 「佛性」권에서 비판한 心常相滅論은 이러한 중국의 心常相滅論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도겐은 「佛性」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성에 대해서 듣고 많은 학자들은 (불성을) 先尼外道가 주장하는 我로 오해해서 생각해왔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진실한 자기를 만나지 못했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인도의 先尼外道처럼 불성을 우리 안에 ‘상주’하는 무엇으로 이해함을 비판하고 있다. 「辯道話」의 제10문답은 心常相滅論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佛法에는 본래 身心이 하나이며 性과 相이 둘이 아니라고 설한 것은 인도나 중국에서 똑같이 알려진 것이나 결코 여기에 걸려선 안된다. 만일 常住를 설할 경우 萬法이 常住이므로 몸과 마음을 구별해선 안된다. 또 寂滅을 말할 때 모든 것(諸法)이 寂滅이므로 性과 相을 나누어선 안된다. (그런데) 왜 몸이 소멸하고 마음은 常住하는가?..... 生死가 곧 涅槃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생사 외에 열반을 논해선 안된다.....佛法에 心性大總相의 法門이라는 것은 一大法界를 性과 相으로 나누지 않으며 生滅을 논하지 않는다. 보리열반에 이르기까지 心性이 없는 것은 없다. 일체법, 삼라만상이 모두 다만 一心이어서 나뉘는 것이 없다. 이 모든 法門이 모두 평등한 一心이다. 모두가 다르거나 어긋남이 없다. 이것이 곧 佛家의 心性을 이해하고 있는 진상이다. 그런데 이 一法에 身과 마음을 구별해서 생사와 열반을 나누어 보는가?

도겐은 身心一如의 입장에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다. 이는 결국 도겐이 修證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성이 있다. 도겐은 「佛性」권에서 先尼外道를 비판하나, 이는 인도의 先尼外道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당대에 이와 유사한 견해를 지닌 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도겐의 비판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天台本覺法門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겐의 교단에 들어온 달마종 사람들을 대상으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다는 견해, 또 宋代 중국선종을 향한 비판이라는 해석도 있다.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을 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한 袴谷憲昭의 견해는 이러하다.

本覺이란 현상세계를 초월한 근원적 깨침으로 이 깨침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 常住하나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 사이에 현상으로서 변화생멸한다. (중략) 그것은 동시에 心常相滅論을 의미한다.

여기서 袴谷은 心常相滅論에서 말하는 不變하는 마음을 本覺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는 도겐이 본각사상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心常相滅論을 본각사상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이 천태본각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袴谷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당시 천태종 학자들 간에는 切紙의 형태로 쓰여진 문구들이 널리 전승 유포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本無生死論이다. 그 내용 중에는 “一心은 去來함이 없고 生滅도 없으며 본래 常住한다”는 의미가 적혀 있다. 즉 여기서의 一心常住는 심상상멸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달마종의 『法門大綱』에도 靈知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煩惱卽菩提의 입장에서 靈知를 菩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할 때 심상상멸론에 대한 도겐의 비판에는 천태본각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달마종도 포함됨을 알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卽心是佛」에서 인도의 先尼外道의 견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인도에는 外道가 있으니 先尼라 부른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靈知는 環境이나 物과는 달라 歷劫에 常住한다. 지금 현재 있는 모든 환경도 靈知의 측면에서 보면 진실한 것이 아니다. 本性으로부터 緣하여 생겨나서 실제의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모든 실체들〕은 靈知와 같이 상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명암에 상관없이 靈知하므로 靈知라고 말한다. 또 眞我라고도 하고 覺元이라고도 하며 本性이라고도 칭한다.

靈知思想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心常相滅論에 관한 것이며 이는 곧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상상멸론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천태본각사상뿐만 아니라 중국선종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에서 南陽慧忠( ? -775)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南陽慧忠이 당시 중국에 先尼外道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唐의 大證國師 慧忠和尙이 어느 僧에게 물었다.
師; 어디서 오는가?
僧; 남방에서 왔습니다.
師; 남쪽에는 어떤 선지식이 있는가?
僧; 많은 선지식이 있습니다.
師;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僧; 그곳의 선지식들은 당장에서 학인들에게 제시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대들은 이제 모두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성품을 갖추었는데 이 성품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껌벅이게 한다. 가고 옴에 활용되어 온 몸에 두루 편재하므로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알고 다리를 끊으면 다리가 안다. 그러므로 정변지(正徧知)라 한다. 이것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다. 이 몸에는 생멸이 있지만 心性은 시작이 없는 옛부터 일찍이 생멸한 적이 없다. 몸이 생멸한다 함은 용이 뼈를 바꾼 것 같고 뱀이 껍질을 벗은 것 같으며 사람이 헌 집을 나서는 것과 같다. 몸은 이렇듯이 無常하나, 性은 변함이 없다 (常)”고 하였습니다. 남방에서 말씀하신 것이 대략 이렇습니다.
師;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先尼外道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말하 기를 “나의 이 몸에는 하나의 신비한 성품이 있어 이 성품이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가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떠나는데 마치 집에 불이 나면 주인은 나가는 것 같아서 집은 무상하고 주인 은 항상하다”고 한다.

南陽慧忠은 남쪽 스승들의 가르침을 先尼外道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당시 남방사람들을 비판했다. 이러한 혜충의 비판은 그들이 ‘몸은 생멸하지만 心性은 생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는 二元論인 先尼外道說的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先尼外道에서는 마음과 육신을 구분하여 용이 뼈를 바꾸고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나, 사람이 古宅을 나와 새로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무상한 신체와는 달리 상주불변하는 불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안에 있는 불성은 모든 것을 見聞覺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南方宗旨에 대한 혜충의 비판은 당시 중국선종의 문제인 心常相滅論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何燕生은 洪州宗에서 말한 ‘心性’이나 荷澤宗의 ‘靈知’ 모두가 상주불변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남양혜충과 동시대를 살았던 宗密(780-840)은『禪源諸詮集都序』에서 홍주종과 하택종을 비교하면서 양자 모두 맑은 구슬(眞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宗密은 홍주종이 眞心의 體 중 변하는 用인 隨緣用만 알고 不變의 用인 自性用을 모른다고 비판했지만, 양자의 차이는 불성론의 차이라기보다 眞心의 用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홍주종은 사람의 모든 행위가 佛性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따로 깨침을 구할 필요가 없고 다만 天眞自然을 자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편 하택종은 空寂한 마음이 靈知이며 이를 자각함이 깨침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南陽慧忠이 비판한 心常相滅論은 중국선종의 불성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도겐 역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는데 이는 천태본각사상과 관련하여 달마종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중국선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함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도겐이 문제삼은 心常相滅論이 당시 일본선종인 임제종과 달마종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근거가 된 중국선종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도겐이 품은 문제의식은 어쩌면 대승불교사상 전체와도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本證이나 本覺, 佛性 그 어느 표현을 쓰더라도, 그것이 사물의 본래 모습이라면 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수행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부처를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의 수증문제는 이런 점에서 도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도겐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9) (3) 妙修 위에서 드러나는 佛性의 顯現
10)
11) ①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 비교
12)
도겐이 말한 ‘悉有는 불성’이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불성이 顯現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수행의 필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松本史朗은 “悉有는 불성이다”는 표현을 전형적인 佛性顯在論이라고 본다. 佛性顯在論은 모든 것이 불성의 드러남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미 불성이 顯現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수행의 필요성이 의문시된다. 그것은 불성현재론이 배발생론처럼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불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으므로, 수행의 필요성이 요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성현재론의 문제점이 바로 대혜가 묵조선을 향해 비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대혜가 비판한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묵조선과 도겐의 수증관이 같다면 대혜의 묵조선 비판은 도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굉지와 도겐사상을 비교해온 종래의 연구는 두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도겐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묵조선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 학자는 石井修道이다. 그는 『정법안장』에 드러난 굉지의 말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근거로 도겐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도겐은 『정법안장』「坐禪箴」에서 굉지의 坐禪箴을 소개한 후 자신의 「坐禪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도겐이 宏智의 「坐禪箴」에 나오는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대상에 접하지 않아도 알고, 경계에 반연하지 않고 비춘다)라는 표현을 ‘不思量而現 不回互而成’으로 고쳐썼다는 점이다. 왜 도겐은 이를 바꾸었을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굉지와 도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石井修道는 宏智의 ‘知와 照’ 부분을 도겐이 ‘現과 成’으로 바꾸어 쓴 것에 대해, 宏智의 知와 照는 道家的 觀照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면, 도겐의 現과 成은 只管打坐를 통해 드러나는 不思量, 不回互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宏智는 坐禪箴을 통해 理法으로서의 觀照의 세계를 드러냈다면, 도겐은 坐禪이 곧 모든 無所悟의 現成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굉지의 표현을 자신의 언어로 바꾼 것은 도겐이 굉지의 선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石井修道는 주장한다. 이 점에서 도겐은 굉지의 선사상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도겐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道元と中國禪思想』을 쓴 何燕生은 石井修道와는 달리 도겐이 오히려 자신의 좌선잠을 서술하기 위해서 宏智의 坐禪箴을 빌려쓴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자신의 좌선관을 표명하기 위해 스스로의 선체험과 깊은 인식을 기초로, 자신의 선사상과 계통이 같은 宏智를 참고하여 자신의 坐禪箴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何燕生은 도겐이 宏智를 如淨과 함께 古佛으로 칭송한 점과 조동종 法脈을 이은 如淨으로부터 배웠다는 점을 들어 도겐이 宏智禪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도겐이 古佛로 칭한 조사들은 도겐이 강조한 行佛과 全一佛法 즉 行의 철저함과 법의 정당성을 지닌 선사였다고 何燕生은 주장한다. 따라서 도겐이 宏智를 古佛로 칭한 것은 단순한 칭송 차원이 아니라, 그를 정법의 전수자로 보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굉지와 도겐이 사상적 연계성이 있는지에 대해, 石井修道는 도겐이 宏智 사상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하여 독자적인 선사상을 구축했다고 해석한 반면, 何燕生은 도겐이 宏智禪을 이은 것으로 해석하여 중국불교의 연계선상에서 도겐사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石井修道가 주장한 것과 같이 도겐사상을 중국불교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 그의 독자성만을 주장한 것이나, 何燕生처럼 도겐이 굉지선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 모두 도겐사상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필자는 도겐사상이 중국불교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도겐은 분명 「坐禪箴」에서 宏智禪師의 ‘坐禪箴’에 대해서 극찬하고 있다.

坐禪箴은 ....宏智禪師 正覺和尙이 選한 그것만이 참된 佛祖에 의한 것으로서 참된 坐禪箴이고 이 坐禪箴만이 佛法界의 表裏를 두루하는 광명이며 고금에 걸친 佛祖 가운데의 佛祖이며 과거불과 미래불도 이 坐禪箴으로 계를 삼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조사들도 이 坐禪箴에 의해서 출현한다.

石井修道는 도겐이 굉지의 좌선잠에서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을 ‘不思量而現 不回互而成’으로 바꾼 것을 들어 도겐사상의 독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굉지도 不思量과 不回互의 사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더라도 何燕生이 주장하듯이 도겐이 굉지사상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해석도 문제가 있다. 물론 何燕生의 주장처럼 도겐이 굉지의 묵조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양자의 수증관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수증관을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도겐의 『永平廣錄』에 보면『宏智錄』제4의 上堂에 나오는 “皓玉無瑕 彫文喪德”를 “皓玉無瑕 琢磨增輝”로 바꾸어 표현한 부분이 나온다. 皓玉無瑕 彫文喪德은 ‘본래 티가 없는 옥에 세공을 가하면 오히려 옥이 지닌 아름다움이 상실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皓玉無瑕의 부분은 같으나 그 뒷부분인 ‘彫文喪德’을 도겐은 ‘琢磨增輝’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굉지가 말한 “皓玉無瑕 彫文喪德”은 本證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겐은 옥에 티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琢磨增輝라 하여 닦고 닦음으로써 점점 옥이 빛을 더하게 된다는 本證 위의 ‘妙修’를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 있어 수행은 단지 本證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本證에 빛을 더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의 수증관 간에 미묘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양자는 본각을 강조한 점에서는 일치하나, 굉지는 ‘다만 본연의 모습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여 수행이 본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 데 반해, 도겐은 ‘닦아서 더욱 빛나게 해야 한다(琢磨增輝)’고 하여 本證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을 비교해 보았다. 굉지는 본연의 모습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좌선이 本證 위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했다면, 도겐은 닦아서 더욱 빛나게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本證과 妙修 간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겐이 묵조선의 수증관을 수용하면서도, 천태본각사상의 수행무용론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의 측면을 보다 부각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本證과 妙修의 역동적 관계야말로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전통종학자들 역시 本證에 치중하여 도겐의 수증관을 해석하여 도겐사상이 지닌 妙修의 측면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굉지와 도겐의 종교세계는 그 배경 및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양자 간에는 분명히 문제의식의 차이가 있었다. 도겐은 천태본각사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묵조선은 무사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수증관이 그 표현양식에 있어 유사성을 지녔어도 이를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즉 양자의 배경이나 문제의식을 배제한 체 양자가 표현하는 수증관만 보고 양자의 사상이 같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13) ② 실유불성을 통한 수행론

14)
비판종학자인 松本은 도겐의 불성론이 존재론적으로는 佛性顯在論이지만, 수행을 강조한 점에서는 불성현재론과 구분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를 佛性修現論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佛性修現論이라 해도 이것 역시 존재론적으로는 불성현재론과 같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수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松本의 주장이다.

따라서 松本은 도겐이 「불성」에서 수행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불성현재론과의 존재론적 유사성 때문에 도겐의 수행론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근거하여 松本은 도겐이 자신의 前期사상 속에 불성현재론적 요소가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만년에 12권『정법안장』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松本의 주장이 도겐의 불성에 대한 바른 이해라 할 수는 없으나, 불성현재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도겐의 불성론에 대한 전통종학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本證의 信에 근거하여 도겐의 수증관을 해석한 전통종학에는 佛性顯在論的 측면이 다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겐이 ‘불성을 悉有’로 해석한 것은 불성현재론처럼 중생의 현재 모습 그대로가 불성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즉하여 드러나는 불성의 現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도겐은 우리가 身心脫落하여 분별의식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불성의 현성을 자각할 수 있다고 본다. 즉 我執으로부터 자유로와졌을 때 비로소 불성의 현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불성의 顯現이 수행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불성을 修證의 문제로 보려는 도겐의 의도는 ‘正當恁麽時’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난다. 正當恁麽時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恁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恁麽는 是什麽物恁麽來에도 나온다. 이같이 是什麽物恁麽來와 正當恁麽時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恁麽’는 北宋 때부터 속어로 사용되어온 것으로 ‘이(와)같이’라는 뜻이다. 도겐은 雲居道膺의 다음 귀절을 들어 恁麽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다. “恁麽事를 얻고자 한다면 恁麽人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恁麽事는 ‘현재 이같이 있는 그대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임마사를 살려면 我執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 바로 그렇게 되려면 ‘지금 여기’를 진정으로 사는 恁麽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現成한다는 의미에서 恁麽의 세계는 우리가 깨침의 세계를 측량하는 일을 그만둘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펼쳐진다. 도겐은 『정법안장』「恁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恁麽는 佛의 척도로 잴 수 없고, 마음의 척도로도 잴 수 없다. 法界의 척도로도 잴 수 없고, 우주의 척도로도 잴 수 없다. 모두가 恁麽人이므로 恁麽事 아님이 없다.

우매한 인간은 역사 안에서 恁麽를 규정하고 측량하려 애써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恁麽는 부처의 척도나 마음의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恁麽를 알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지닌 부처나 마음의 척도, 法界나 우주의 척도를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恁麽란 그 어떤 척도로도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恁麽 속에서 살아가는 길뿐이다. 혜능이 남악에게 물은 “어떤 것이 이와 같이 왔느냐? (是什麽物恁麽來)”는 바로 이러한 恁麽로의 초대이다. 이와 같이 불성의 문제를 고타마 붓다이래 모든 祖師들이 지닌 修證의 관점에서 보고자 함은 도겐이 수증관의 관점에서 불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是什麽物恁麽來’ 외에 ‘轉法輪’이라는 표현에도 잘 드러난다.

일체중생실유불성을 전법륜이라 한 도겐의 표현 속에 붓다가 『涅槃經』을 통해 설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불법전수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도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즉 도겐은 붓다가 처음 자신의 깨침을 다섯 비구에게 설한 初轉法輪 이래 正傳되어온 佛法이 바로 一切衆生悉有佛性이며 이것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것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일체중생실유불성과 是什麽物恁麽來를 같은 맥락에서 봄으로써 불성을 修證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보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혔을 뿐 아니라, 일체중생실유불성을 轉法輪으로 표현하여 修證一等인 佛性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佛法임을 밝히려 한 것이다. 이상에서 도겐은 실유불성론을 통해 불성과 수증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서 역설해 왔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불성론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eBook : Briggs, Robert, Saltoon, Diana: Amazon.com.au: Books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eBook : Briggs, Robert, Saltoon, Diana: Amazon.com.au: Books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Kindle Edition
by Robert Briggs (Author), Diana Saltoon (Author) Format: Kindle Edition


5.0 out of 5 stars 4 ratings



See all formats and editions


Kindle
$19.69Read with Our Free App


An extraordinary love story, Wife Just Let Go are the last words Robert Briggs wrote to his wife before he passed away from Alzheimer’s disease. A publisher, literary agent, and author who deeply felt the influence of the Beat era, Robert never stopped writing. Even in his later stages of Alzheimer’s, Robert was able to share insights into what he called “the power of aging,” and his love of poetry, jazz, and Zen. He continued to write, valiantly, of his younger days and of his stint in the army when he and his platoon witnessed an atomic bomb explosion at Frenchman Flat, Nevada, an experience that forever haunted his imagination. What began as a promise to publish his last works evolved into this duo-memoir. His wife Diana, as his long-time partner and primary caregiver, joined him in this telling, as a way to restore for the reader, and for Robert, the parts of the story he was losing. Her meditative commentary became her solace through her own path of pain and grief as she witnessed the daily, wrenching loss of her husband’s memory, and ultimately his death. Poignantly written yet unflinchingly honest, the book navigates not only the waters of grief and loss, but also the other side of Alzheimer’s: gifts that sustain and inspire loved ones left behind.
Read less



Print length

142 pages
Language

English
Publisher

Robert Briggs Associates
Publication date

11 August 2017
File size

2953 KB










Next page





Kindle Paperwhite
The best device for reading, full stop. Learn more





Product description

Review


"An intimate portrayal of love and loss. Discovering the core of our existence where we find healing, peace, and compassion. For caregivers everywhere, whether dealing with the disease of Alzheimer's, cancer, or any other terminal illness, this book shares deep insight and ways to help with the care of a loved one, family, or friend. Even in the last stages of an illness, there are gifts a patient imparts that continually sustain and inspire loved ones left behind." Kenneth R Pelletier, PhD, MD, Clinical Professor of Medicine, University of California School of Medicine (UCSF), San Francisco, author of Mind as Healer, Mind as Slayer.

"The words 'Zen' and 'Alzheimer's' are seldom paired. Zen, representing supreme awareness, and Alzheimer's, associated with loss of awareness, would seem to have little to do with each other, but just as all opposites dissolve in the truth of non-duality, this volume bears touching testimony to how presence in the now is available at any moment in any state. Part autobiography, part biography of a remarkable man, Robert Briggs, this book is also a dialogue in poetry and an extraordinary love story. It affirms love and life while remaining clear-eyed and honest about the suffering entailed in love and life. Diana Saltoon toward the end of the work states that she found her husband's acceptance and curiosity in the face of his deteriorating condition, "humanly noble and inspiring." This reader found those words a fitting summation of the entire book. Reading this book expands one's experience of what it is to be human in the best sense of the word. " Sonja Arntzen, Professor Emerita, University of Toronto, author of Ikkyū and the Crazy Cloud Anthology and Kagerō Diary.

"This lovely book is, in its entirety, a poem about love. It is about young love, middle-aged love, and love that endures through the profound changes of Alzheimer's and on into the loneliness and mystery of death. It has two authors, two poets, Diana Saltoon, and her "late" husband Robert Briggs. In these pages Robert is quite alive, even as his own memory - but not his sense of humor - fades. Although it is quite interesting to read this touching memoir and to learn about the Beat generation from one who lived it, it is their Zen practice that shines through, and the book's unexpected effect is a warming, spreading radiance in the reader's heart. " Jan Chozen Bays, MD, and co-abbot of Great Vow Zen Monastery in Clakskanie, Oregon, and author of How to Train a Wild Elephant: And Other Adventures in Mindfulness.

"From the overlapping poetry and prose of Robert and Diana, we gain insight into how the interests they shared throughout their long marriage--prose, poetry, jazz, politics, Japanese tea ceremony, existentialism, and Zen--sustain them. They reach a place where fragments of language and the gestures of everyday life bring them to an understanding of each other that transcends words." Clayton Morgareidge, Professor Emeritus, Lewis and Clark College, author of Demystifying Demons: Rethinking Who and What We Are.

"The authors Diana Saltoon and the late Robert Briggs write a love story through the eyes of poetry, Zen, and the relief from suffering, which is love. Deep bows to this blessed wisdom and compassion and to the authors."Larry Christensen, Ph.D. is the Head Teacher at The Zen Center of Portland and a clinical psychologist in Portland, OR.--This text refers to the paperback edition.
About the Author
Robert Briggs attended Auburn and Columbia Universities and served in the U.S. Army during the Korean War. He became a partner in The San Francisco Book Company in 1972 and in 1973 founded Robert Briggs Associates, a group of West Coast consultants to writers and small publishers. Author and publisher, he created multimedia projects including Jazz and Poetry & Other Reasons, reads accompanied by jazz musicians in performances in Portland, OR He was involved in early West Coast jazz and poetry scenes where he performed in San Francisco's Jazz Cellar. To Briggs, "Jazz is to music, what poetry is to knowing." See www.ruinedtime.com.

Diana Saltoon has traveled extensively, studied yoga, and in the 1970s developed a program that dealt with modern stress. Her interest in Zen led to a study of Chado, The Way of Tea, as a Zen art and received a certificate of Chamei from the Urasenke School in Kyoto, Japan. Diana became a teacher at the Portland Wakai Tea Association in Oregon before moving to New York in 2011. She returned to Portland, Oregon, in 2014. A member of Zen communities in Oregon and New York, Diana continues to give presentations, classes and workshops on the Zen Art of Tea and continues to write. She is affiliated with the Oregon Haiku Society of America as well as the Haiku In English Maui. --This text refers to the paperback edition.


Product details
ASIN ‏ : ‎ B07GFQ7WM9
Publisher ‏ : ‎ Robert Briggs Associates (11 August 2017)
Language ‏ : ‎ English
File size ‏ : ‎ 2953 KB
Text-to-Speech ‏ : ‎ Enabled
Screen Reader ‏ : ‎ Supported
Enhanced typesetting ‏ : ‎ Enabled
X-Ray ‏ : ‎ Not Enabled
Word Wise ‏ : ‎ Enabled
Print length ‏ : ‎ 142 pagesCustomer Reviews:
5.0 out of 5 stars 4 ratings










How would you rate your experience shopping for books on Amazon today?







Very poor
Neutral
Great


Customer reviews
5.0 out of 5 stars
5 out of 5
4 global ratings


5 star 100%
4 star 0% (0%)
0%
3 star 0% (0%)
0%
2 star 0% (0%)
0%
1 star 0% (0%)
0%

How are ratings calculated?

Review this product
Share your thoughts with other customers
Write a customer review

Sponsored



Top reviews

Top reviews from Australia

There are 0 reviews and 0 ratings from Australia


Top reviews from other countries

Mali Gesmundo
5.0 out of 5 stars - I've not completed reading this wonderful book, its so deeply moving and touching to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27 December 2017
Verified Purchase

- I've not completed reading this wonderful book, easy to read, yet so deeply moving and touching, had to stop and think about the many messages, and to realize the creative power and love between the two primary occupants of the story. Reading it, very present time, yet how often do we hear the way certain times in life are to be disguised? Although I have known directly and indirectly about the persons in the book, it reads like poetry, a collage, or a black and white, or sepia film.
- Let us hope the author, Diana Saltoon will continue to produce books as unexpectedly lively, and full of surprises of the human spirit and the colorful life of choice of artistic endeavor.
- Heroic candor with which these two lovers face an unknown chapter of their love story. Rich, perhaps odd to say, it is an adventure story, drama in classic Briggs fashion but really not so if you ever met or knew Briggs. I was left with a thought, could I be present enough to care for another this way and maybe there is such a thing as eternal love...

2 people found this helpfulReport abuse

willm
5.0 out of 5 stars Wife, Just Let Go - a very good but sad read on a topic that has and will touched many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28 September 2017
Verified Purchase

Has anybody not been affected in some way by Alzheimer's Disease in their family? The cause for most Alzheimer's cases is still mostly unknown. How can that be in this day and age of technology and science?
This is a story of a man and a woman I was lucky to know for a short time. He was larger than life and she was sweeter and more supportive than was possible. I remember Robert many times sitting on the edge of a chair fully engaged in a lively discussion sharing his literary expertise with another friend. Always animated, then Alzheimer's . . . and the flame slowly extinguished.
Reading between the lines - Diana wonders - how can this happen to my soulmate of 38 years? We exercised, ate sensible, meditated, lived and loved - why Robert? What do I do now? Fear, emotion, loss are all chronicled here.
Scattered throughout the book are beautiful and poignant poems one can connect with.

Read this book - it is a short insightful journey of remembrances and highlights of Briggs's life before the all consuming disease took him from us.

4 people found this helpfulReport abuse

Janet J Jones
5.0 out of 5 stars As a friend of both of these wonderful people I was so very touched by this collaboration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19 November 2017
Verified Purchase

As a friend of both of these wonderful people I was so very touched by this collaboration. It is Diana who makes this collaboration come to life as her husband is slowly sinking into Alzheimer’s. The book is so touching as we see Diana trying to come to terms with this disease in a man she profoundly loves. The writing by both of them is wondrous to read. Only Robert is listed by Amazon as the author when this book is clearly a collaboration.

2 people found this helpfulReport abuse
See all reviews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by Robert Briggs, Diana Saltoon (Goodreads Author)
 4.11  ·   Rating details ·  9 ratings  ·  5 reviews
An extraordinary love story, Wife Just Let Go are the last words Robert Briggs wrote to his wife before he passed away from Alzheimer's disease. A publisher, literary agent, and author who deeply felt the influence of the Beat era, Robert never stopped writing. Even in his later stages of Alzheimer's, Robert was able to share insights into what he called "the power of aging," and his love of poetry, jazz, and Zen. He continued to write, valiantly, of his younger days and of his stint in the army when he and his platoon witnessed an atomic bomb explosion at Frenchman Flat, Nevada, an experience that forever haunted his imagination. What began as a promise to publish his last works evolved into this duo-memoir. His wife Diana, as his long-time partner and primary caregiver, joined him in this telling, as a way to restore for the reader, and for Robert, the parts of the story he was losing. Her meditative commentary became her solace through her own path of pain and grief as she witnessed the daily, wrenching loss of her husband's memory, and ultimately his death. Poignantly written yet unflinchingly honest, the book navigates not only the waters of grief and loss, but also the other side of Alzheimer's: gifts that sustain and inspire loved ones left behind. (less)
GET A COPY
KoboOnline Stores ▾Book Links ▾
Paperback, 162 pages
Published August 11th 2017 by Robert Briggs Associates
ISBN0931191203  (ISBN13: 9780931191206)
Other Editions (3)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111x148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All Editions | Add a New Edition
...Less DetailEdit Details
FRIEND REVIEWS
Recommend This Book None of your friends have reviewed this book yet.
READER Q&A
Ask the Goodreads community a question about Wife, Just Let Go
54355902. uy100 cr1,0,100,100 
Ask anything about the book
Be the first to ask a question about Wife, Just Let Go

LISTS WITH THIS BOOK
This book is not yet featured on Listopia. Add this book to your favorite list »
COMMUNITY REVIEWS
Showing 1-30
 Average rating4.11  ·  Rating details ·  9 ratings  ·  5 reviews

Search review text


All Languages
More filters | Sort order
Sejin,
Sejin, start your review of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Write a review
Rene Denfeld
Sep 15, 2018Rene Denfeld rated it it was amazing
This is one of those little gems of a book, published by a small press. The authors weave a story of poetry, love, aging and loss. It's real and honest, but also gentle and kind. I loved it. (less)
flag12 likes · Like  · comment · see review
Lauren Sapala
Dec 10, 2017Lauren Sapala rated it it was amazing
For quite a while now, I’ve been interested in death and dying. Specifically, why our society doesn’t talk about it and why so many people are so afraid of it. Of course, I have my moments of fear too—but what I’ve noticed in society at large is that people pretend that death is something that will really never happen to them, and if you experience the death of a loved one, not that many people feel comfortable talking with you about that experience.

Diana Saltoon’s book, Wife, Just Let Go: Zen, Alzheimer’s, and Love, is a rare breath of fresh air in this realm. She not only talks about death and dying, she dives deep into the ocean of fear, unknowing, resistance, and pain to show the reader her journey to acceptance, and ultimately peace, when faced with the terminal illness and decline of her beloved partner, Robert Briggs. But this isn’t just a story about the process of dying and letting go of a loved one, it’s also the story of a life. In this slim but powerful volume, we find memories of Robert’s experiences with the Beat poets in the San Francisco scene in the 1950's, a meeting he had with Eleanor Roosevelt that left an indelible, lifelong impression on him, and his chilling story of witnessing an atomic explosion as part of a US Army experiment.

We also see how Robert and Diana met, fell in love, and accompanied each other on life’s tumultuous path for over three decades.

Wife, Just Let Go took me only a couple of days to read, but it will stay with me for years, I already know that. It’s one of the most beautiful books I’ve read in a long time.
(less)
flag1 like · Like  · 1 comment · see review
Michael Roth
May 14, 2018Michael Roth rated it really liked it
"Diana Saltoon weaves her own poetry with that of her beloved husband Robert Briggs into a chronicle of his and their last years and days of learning about and combatting Alzheimer’s. It was a journey they traveled together without knowing the next steps. The book is masterfully woven with their poetry, notes, thoughts, tenderness and days together into a beautiful mosaic while facing a terrible disease, one that few of us have not been affected by in some way. The author’s use of contrasting images is also engaging; Zen & humanism, male & female, poetry & prose, white space & mindful words are carefully dove-tailed into an exquisite portrait of aging and being present. It’s “Be Here Now” at the juncture of spirit and matter when we know that the now we are familiar with is disappearing.
This is a companion guide to the “36-Hour Day” for people and families dealing with Alzheimer’s. Definitely a worthwhile read." (less)
flagLike  · comment · see review
Doug Wells
Oct 04, 2018Doug Wells rated it liked it
I picked up this book as I thought it might speak directly to me and my own experiences. While I didn't find that, I did find a lovely tribute and a powerful telling of life with and around Alzheimer's. (less)
flagLike  · comment · see review
Margaret
Nov 12, 2017Margaret rated it it was amazing
A couples love shines through even Alzheimer's disease. This is a moving and intimate love story that brings dignity to the Alzheimer's disease process and to death. I enjoyed the writing as much as the stories. Highly recommended. (less)

The Emergence of Buddhist American Literature

https://www.scribd.com/document/513947486/The-Emergence-of-Buddhist-American-Literature-Whalen-Bridge-Storhoff

https://www.scribd.com/document/207433997/The-Emergence-of-Buddhist-American-Literature


Want to Read

Rate this book
1 of 5 stars2 of 5 stars3 of 5 stars4 of 5 stars5 of 5 stars


The Emergence of Buddhist American Literature
(SUNY Series in Buddhism and American Culture)
by
John Whalen-Bridge (Editor)
4.20 · Rating details · 5 ratings · 1 review
The encounter between Buddhism and American literature has been a powerful one for both parties. While Buddhism fueled the Beat movement's resounding critique of the United States as a spiritually dead society, Beat writers and others have shaped how Buddhism has been presented to and perceived by a North American audience. Contributors to this volume explore how Asian influences have been adapted to American desires in literary works and Buddhist poetics, or how Buddhist practices emerge in literary works. Starting with early aesthetic theories of Ernest Fenollosa, made famous but also distorted by Ezra Pound, the book moves on to the countercultural voices associated with the Beat movement and its friends and heirs such as Ginsberg, Kerouac, Snyder, Giorno, Waldman, and Whalen. The volume also considers the work of contemporary American writers of color influenced by Buddhism, such as Maxine Hong Kingston, Charles Johnson, and Lan Cao. An interview with Kingston is included. (less)

Editorial Reviews
Review
“This collection offers an excellent and newly renovated place from which to continue the study of Buddhism in American literature. It will become an essential critical volume.” ― Religion and the Arts

“…signals a significant turn in critical understanding of Buddhism in U.S. literature―one whose methodology emphasizes the groundlessness shared by Buddhism and contemporary literature studies while also grounding itself, necessarily so, in the ways in which Buddhism is shaped by the particularities of history.” ― Beat Studies

“…a thought-provoking analysis of the myriad ways American literature has contributed to our Buddhist practice and vice versa.” ― Tricycle

“…a groundbreaking anthology of critical writings making vital new connections between buddhadharma and American literature…” ― Buddhadharma: The Practitioner’s Quarterly

“This book in your hands is a trove of the best we can do to put the Dharma into words.” ― from the Foreword by Maxine Hong Kingston
About the Author
John Whalen-Bridge is Associate Professor of English at th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He is the coeditor (with Sor-hoon Tan) of Democracy as Culture: Deweyan Pragmatism in a Globalizing World, also published by SUNY Press, and the author of Political Fiction and the American Self.

Gary Storhoff is Associate Professor of English at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 at Stamford and the author of Understanding Charles Johnson.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January 1, 2010)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23, 2014
A excellent review and introduction to Budhism in American literature, which also introduces the main tenants of Buddhist philosophy and thought. The writers and theirs books are reveled as still relevant to today's development of Buddhism in America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