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9

알라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알라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이남곡 (지은이) | 휴(休) | 2012-02-15















정가 13,000원
판매가 11,700원 (10%, 1,3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10.0




강의

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우화로 즐기는 장자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좋은마을’ 이남곡의 <논어> 읽기. 논어 전문을 크게 열 가지 범주(탐구, 처세, 정치, 중도, 군자, 품성, 조직, 경제, 인생, 깨달음)로 분류하고, 10장을 다시 세부 주제별로 엮었다. 특히 ‘야마기시 공동체’와 ‘좋은마을’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은 저자의 실천적·대안적 인생 강의와 함께 공자가 당시 사회의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공자의 사상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누구나 인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공자가 말한 인을 단지 품성론이나 윤리론에 가두지 않고 우주 자연계 안에서 진화한 인간이라는 특성을 지닌 생명체가 그 생명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작용이 인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인간의 오랜 노력으로 발전시켜 온 인류 문명이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여러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우주적 생명력을 해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불인不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1장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
無適無莫 義之與比_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學則不固_진정한 위엄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思而不學則殆_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
不如丘之好學也_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폐단
內自省也_어진 사람을 보면 스스로를 살핀다
吾有知乎哉 無知也_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오직 모를 뿐

2장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법
用之則行 舍之則藏_쓰이면 행하고, 안 쓰이면 간직한다
不失人 亦不失言_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법
欲訥於言 而敏於行_말은 더디게, 행동은 민첩하게
管仲之仁_군자와 소인의 차이
和光同塵_세상을 구하고자 지혜를 감추고 속세에서 산다
老者安之 小者懷之_알아주어 등용된다면 무엇을 하려느냐?
事君盡禮人 以爲諂也_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 건 아첨이 아니다

3장 정치는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이다
必也正名_먼저 명名을 바로 세운다
爲政以德_덕으로써 정치를 구현하다
知爲君之難_역할을 즐기는 자와 권력을 즐기는 자
民無信不立_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바로서지 못한다

4장 중도, 조화로운 삶
切問而近思_본질을 묻고 현실을 생각한다
異端 斯害也已_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_불인不仁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을 일으킬 징조다
禮之用 和爲貴_예禮와 화和의 조화가 귀중하다

5장 화합하되 똑같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周而不比_군자는 편파적이지 않다
不念舊惡_지난날의 악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_교만하고 인색하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和而不同_화합하되 똑같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驕而不泰_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다
群而不黨_잘 어울리지만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上達 小人下達_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

6장 널리 은혜를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다
愛之 能勿勞乎_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성장하도록 돕는 데 있다
一以貫之_충忠과 서恕가 있을 뿐이다
克己復禮 天下歸仁_천하가 다 인仁으로 돌아가게 하다
博施濟衆_널리 은혜를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다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_다섯 가지 실천이 인이다

7장 사람들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산다
其愚不可及也_지극한 덕은 칭찬받기가 어렵다
亦不入於室_당堂에는 올라갔지만 실室에는 들지 못하다
先事後得_일을 먼저 하고 성과는 나중으로 미룬다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_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다
苟志於仁矣 無惡也_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이 없다
修己以安百姓_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한다
述而不作_오직 배워서 전할 뿐이다
擇不處仁 焉得知_지혜로운 사람은 인심이 후한 마을을 가려 산다
與共學, 與適道, 與立, 與權_함께 뜻을 세워 실천하다

8장 먼저 먹이고 다음에 가르친다
旣富之敎之_먼저 먹이고 다음에 가르친다
富與貴 不以其道 得之 不處也_정당하지 않은 부귀는 누리지 말라
放於利而行 多怨_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百姓不足 君孰與足_곤궁한 사람은 돕되 넉넉한 사람은 보태주지 않는다
富有 苟美矣_세상에 부는 가졌으되 아름다운 부자는 드물다

9장 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_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마라
切磋琢磨_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함만 못하다
從心所慾不踰矩_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다
好德 如好色_덕德 좋아하기를 미색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益者三樂 損者三樂_유익한 즐거움 세 가지, 해로운 즐거움 세 가지

10장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子不語怪力亂神_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天之未喪斯文也_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아니 하니
毋意, 毋必, 毋固, 毋我_네 가지를 끊고 대자유에 이르다
未知生 焉知死_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






저자 : 이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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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합작과 연정은 시대정신이다>,<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비워야 산다>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45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했다. 중학교까지 함평에서 마치고, 1960년 서울 경기고에 입학했다. 처음 서울 땅을 밟은 그해 겪은 4. 19 혁명으로 시대에 눈뜨기 시작했다. 1963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변혁운동에 나섰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지하운동에 가담했다. 1972년부터 농촌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농촌운동과 함께 교사운동을 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을 전후로 그의 사상은 큰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사상이나 운동론은 이때 그 틀이 형성되었다. 이런 바탕에서 불교사회연구소 등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그 즈음 무아집·무소유·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山岸〕 사상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연찬회에 참석한 게 인연이 되어, 1996년부터 8년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여기에서 그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향해온 새로운 사상, 즉 ‘자본주의와 아집(我執)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여러 면에서 새로운 통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직은 일반화할 수 없는 무소유사회보다는 지금 사람들의 실태로부터 출발하여 더 보편적인 실천을 해보고 싶어, 전북 장수에 자리잡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마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을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 《중용》을 ‘연찬’하고, 서로 자기성찰과 소통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며 내일을 함께 설계하고 있다. ‘마음과 물질이 함께 풍성한 사이좋은 마을’?이것이 장수에서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마을이다.
또한 새로운 운동에 대한 그의 꿈은 전북 익산의 ‘희망연대’에서 젊고 새로운 시민운동가들과 만나게 했다. 그가 2009년에 냈던 《진보를 연찬하다》에 실린 내용들은 야마시기 시절의 경험과 이 단체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일관되게 지향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현상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 자기변혁과 세계변혁이 둘이 아닌 하나로 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라 파악하며,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인문운동가의 길을 가고 있다. 현재 ‘연찬문화연구소’의 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이상사회를 향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던 모험가,
2,500년의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논어》에서 답을 찾다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저자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에 앞장섰고, 1970년부터 농촌 지역에서 8년간 ‘교육실천연구회’ 활동과 같은 교사운동을 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4년간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법륜 스님과 함께 불교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에 대해 사상적·이념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직접 모델사회 실천을 위해 아내 서혜란 여사와 무소유공동체 생활을 시작,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면서 무소유 사회가 아직은 보편적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장수에 정착하여 장류醬類 사업을 하며 보다 보편적인 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몇몇 가까운 벗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서로 소통하며, 지향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과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고 실천하기 위하여 고전을 함께 연찬·강독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이 자리에 《논어》가 선정되었다. 이후 2년 여간 매주 1회 거의 빠짐없이 강독회를 가지면서 공자라는 위대한 인간을 발견하였다.
저자는 젊은 시절 공자에 대해 ‘봉건제와 군주제 그리고 가부장제의 옹호자’로 막연히 거부감을 가진 적도 있었으나 《논어》 연찬을 계속하면서, ‘아집이 없는 자유인, 실사구시의 과학적 인간,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현실참여적 인간 그리고 소통의 달인’으로서 공자를 만나게 되면서 마을공동체 정착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좋은마을’ 이남곡의 실천적·대안적 《논어》 읽기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사는 이치, 교육, 정치, 경제, 처세,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이야기들을 묶었다
이 책은 논어 전문을 크게 열 가지 범주(탐구, 처세, 정치, 중도, 군자, 품성, 조직, 경제, 인생, 깨달음)로 분류하고, 10장을 다시 세부 주제별로 엮었다. 특히 ‘야마기시 공동체’와 ‘좋은마을’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은 저자의 실천적·대안적 인생 강의와 함께 2,500여 년을 경과하면서도 여전히 탁월한 견해로 보이는 공자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공자가 당시 사회의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공자의 사상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누구나 인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공자가 말한 인을 단지 품성론이나 윤리론에 가두지 않고 우주 자연계 안에서 진화한 인간이라는 특성을 지닌 생명체가 그 생명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작용이 인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인간의 오랜 노력으로 발전시켜 온 인류 문명이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여러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우주적 생명력을 해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불인不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 수많은 성현들이 있지만 공자가 그들과 달랐던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현실 속에서, 그것도 당시 주류 사회 속에서 실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상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가 통합되어야 하는 현대적 과제에 많은 영감을 준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의 인생을 비춰 보고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침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몇 가지 메시지
①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
사람들은 보통 상대의 출신, 부모, 고향, 학교 등을 통해 판단하고, 과거의 꼬리표를 붙여 재단한다. 선입견이란 것이 참 무서워서 한 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나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공자는 사람을 평가할 때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반드시 살피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즉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 사람은 틀렸다”라고 비난해도 ‘정말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을 공자는 ‘필찰必察’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필찰은 뭔가 흠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과 아집으로 잘못 판단하기 쉬운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을 살펴볼 때도 중요하다.

②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가 바로 인仁이다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기 쉽다.
지금의 실정을 보면 제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이 뒤처지는 불균형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물론 제도도 계속 발전시켜 가야 하겠지만,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이상 정치 실현의 중심 과제라 하겠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숙제는 의식의 진보이고, 이때 진보 의식이란 공자가 말한 덕을 가리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주변의 흐름이 덕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순리다.
공자는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이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인데,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배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③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
공자는 아집을 경계했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혹시 허물이 있더라도 아집이 없는 사람은 허물을 고칠 수 있지만, 완고한 사람은 허물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완고한 사람의 경우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완고함이 더해질 뿐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 이 문장을 읽다 보면 공자 같은 사상가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말을 했을까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가 대하기 쉬운 사람과 사귀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을 사귈 때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배우려는 자세로 사귀어야 자신의 허물을 지적 받고 그것을 고치기 쉽다. 공자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요즘 “스승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하지 않는 완고한 내 마음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이켜볼 일이다.

④ 쓰이면 행하고, 안 쓰이면 간직한다
세상에 ‘쓰임’을 구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선거든 임용이든 취직이든 창업이든 뜻대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고, 잘 나가다가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령 낙선한 정치인이 ‘이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연예인이 인기가 떨어지면 ‘이제 대중은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깨달아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
이때는 내면으로 돌아가 진실한 힘을 키우는 것, 즉 사지즉장舍之則藏이 필요하다. 실제로 자신의 쓰임새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다.

⑤ 세상을 구하고자 지혜를 감추고 속세에서 산다
장저와 걸익이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공자께서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 있는 곳을 물어보게 하셨다.
이때 장저가 “저 수레에 앉아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하고 묻자, 자로가 대답하였다.
“공구孔丘이십니다.”
“저 사람이 바로 노나라의 공구라는 분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루터쯤은 알고 있을 텐데…….”
자로가 다시 걸익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걸익이 다시 자로에게 “당신은 뉘시오?” 하고 묻자 “중유올시다”라고 대답했다.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은 걸익이 밭가는 일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도도한 물결에 온 천하가 다 휩쓸려 있거늘 이를 누구의 힘으로 바꾸겠소? 당신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인물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해 사는 인물을 따르는 게 어떻겠소?”
자로가 가서 이 말을 전하니 공자께서 길게 탄식하면서 말씀하셨다.
“새나 짐승과는 함께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는 구태여 바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제18편 미자 6장)

마음속에 이상향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 보는 장저나 걸익 같은 사람들의 삶과 공자의 삶이 고금을 통해 대표적이라 하겠다.
공자는 현실과 이상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결합하려 한 점에서 대단히 뛰어난 성현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웃은 장저와 걸익 같은 노자류에도 대립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유유자적하며 사는 것도 좋겠지만, 저 민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심정이 《논어》 전편에 흐르고 있다.
결국 무도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그를 현실 참여로 이끈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주류사회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세상을 바꿔보려는 공자의 보편적이며 현실적 태도가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공자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꿈을 향해 나아가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상향의 로망을 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새로운 사회나 문명을 보편적으로 지향해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 함께, 기존의 주류 사회 안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키워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저자는 공자가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적 현실에 몸을 담근 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그 체제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안 될 줄 알면서도 헛되이 애쓰는 사람’ 또는 ‘벼슬에 목말라 하는 소인배’ 등처럼 때때로 조롱받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한다면 공자의 지혜를 등불 삼아, 누가 오해하고 비판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라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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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1장에서 여러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됴 반드시 살핀다에서 연찬 방식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나에게도 꼭 필요한 방식이였다. 간만에 만나는 생각하는 힘을 키울수 있는 책임.
튼튼이의 여유 ㅣ 2012-03-23 l 공감(1) ㅣ 댓글(0)








총 : 2편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튼튼이의 여유 ㅣ 2012-03-23 ㅣ 공감(0) ㅣ 댓글 (0)


1장 제목이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이다.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이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고, 좋아하면 나도 좋아하고...

예로 인터넷을 물건을 살때도 평이 좋으면 괜찮은가 보다하고 사게 된다.

'살핀다'...어떻게 살펴야 하나?

저자는 공자의 '의'... 무타협을 제기한다.

누가 옳은가?아닌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해야 한다고.



이 책은 공자의 사상을 저자의 식견으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풀어놓은 책이다.



당분간 이 책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너무 반갑다. 생각을,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만나서.

논어, 참된 인간애를 품는 정수 바보 ㅣ 2012-03-07 ㅣ 공감(1) ㅣ 댓글 (0)


논어는 공자 문하에서 남긴 대화집이다. 일부는 공자가 한 말이고 또 일부는 문하생들이 한 말이다. 예수가 남긴 말도 후대가 남겼듯이 논어도 공자시대엔 경(經)이 될 수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이 성전(聖典)이 된 것은 공자 사후의 일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된 것도 그렇다.

논어는 세상을 사는 정치과 교육, 문화와 경영까지도 담고 있다. 논어를 정치학, 기업경영, 학문의 교본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논어의 근본 바탕은 사람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남곡 선생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은 그걸 일깨운다.

"성인이 되는 길을 나와 다른 세상의 일로만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한자로 '성聖'을 풀어 보면 耳와 呈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耳를 뜻으로 삼고 정呈을 소리로 삼고 있다. 즉 소통에 막힘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인은 못 되어도 소통의 달인은 한 번 쯤 도전해 볼만하지 않을까. 소통疏通은 인간이 개인화 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화두다. 가정에서부터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소통이 절실한 시대라 하겠다."(320쪽)

이는 논어 제 9편 자한 4장을 풀어가면서 한 이야기다. 이른바 '공인'(公人)을 이야기함인데, 공인이란 단순히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익과 욕망을 넘어선 인간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소아(小我)의 존재론적인 자아를 넘어 대아(大我)의 관계론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을 주창했고, 참된 소통의 삶을 추구했고, 아집이 없는 대자유인으로 산 까닭 말이다. 물론 시절이 수상하던 춘추전국 시대였으니 무턱대고 무아(無我)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오직 실천적인 언행을 내세웠다.

어쩌면 그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젊은 시절 이남곡이 공자를 보수 우익의 원조로 여긴 것 말이다. 함평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던 가운데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옛 시절의 고전 해설들이 시대 정권을 보좌하는 시녀역할을 자처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사회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전북 장수로 귀농한 그는 논어를 달리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치학이나 기업경영 혹은 학문의 교본이라는 시각을 벗어나 참된 인간애를 품고 있는 게 논어의 정수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를 모두 품고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논어 제 2편 위정 14장을 읽어가면서 참된 군자(君子) 상을 밝혀주고 있다. 이른바 무고정(無固定)의 사람, 무아집(無我執)의 인격으로 결코 편파적이지 않고 보편성을 추구하며 그것을 실언하는 인간을 일컫는다. 그것이 주이불비(周而不比)이자 군이불당(群而不黨)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총선과 대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야말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이룰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곡남 선생은 주이불비(周而不比)의 정신을 살려 개인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을 좇기보다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당부한다. 그것이 곧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치이자, 우리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진일보 할 수 있는 계기이며, 그것만이 사람을 참되게 사랑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논어의 관점으로 우리시대의 양극화 해소 방안도 내 놓는다. 물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나름대로 시각차를 보이지만 중요한 건 현실성 있는 재정대책이다. 이에 대해 그는 '관중의 인(仁)'으로 그 해법을 찾는다. 이른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불리할지라도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 놓는 것 말이다. 다만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는 '합리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공자 사후 2,500년이 지난 오늘이다. 물질과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누가 뭐래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전쟁이 도사리고 있고, 환경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고, 양극화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남곡 선생이 재해석한 논어를 통해 참된 인간애의 정수를 길어 올리길 바란다.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
小山 哲司
内村鑑三

内村鑑三
     本日の私の話のタイトルは、去る8月に開かれた三愛講座の主題である三つの愛、即ち、「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をお借りしました。8月には三愛精神に沿った学びを致しましたが、三愛精神自体については余り触れられませんでしたので、一年の締めくくりでもあるクリスマスの時期に三愛精神の歴史を辿り、三愛精神の過去、現在、そして未来を展望してみたいと思います。副題を「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としましたが、これは日本における三愛精神は内村鑑三の「デンマルク国の話」を出発点としており、しかも、今から90年近くも前に語られ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今に生き、そして、未来に命を保つ話であると考えるからです。
     この「デンマルク国の話」は、明治44年(1911年)1月22日に柏木の今井館で行われた講演をまとめたものであり、「信仰と樹木とをもって国を救いし話」というサブタイトルが付けられております。その粗筋は、ドイツ、オーストリアとの戦争に敗れてシュレスウィヒとホルスタインの2州を奪われたデンマークの復興を願う工兵士官ダルガスが、デンマークの領土の半分以上を占めるユトランドに植林を行って沃土となし、外に失った国土を内に求めようとする苦心を描いたもの。ダルガスの苦心の結果、ユトランドの荒野には樅の木が繁り、木材が収穫できるようになったばかりか、気候自体が大きく変化して、良き田園となったのです。
     1911年に内村が今井館で行っ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その年の「聖書之研究」第136号に掲載され、内村は、それ以後も1924年に「木を植えよ」を「国民新聞」に発表し、さらに、「西洋の模範国 デンマルクに就て」を同新聞に発表するなど、デンマークに対する高い評価と強い関心を示していきます。やがて「デンマルク国の話」は小中学校の教科書にも掲載され、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て参りますが、国民一般に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点で、内村の著作としては「後世への最大遺物」と並んで双璧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こうした内村の影響力と当時のトルストイの流行とによって、「理想の農業国 デンマーク」ブームが起きて参ります。
     ところで、内村の札幌農学校時代の友人に渡瀬寅次郎(1859~1926)という人物がおりました。渡瀬寅次郎は静岡県沼津市の出身で、内村よりも1年早く第一回生として札幌農学校に入学し、クラーク博士の薫陶を受けてキリスト教を信じる様になります。卒業後は、まず北海道開拓史として官界に入り、次いで教育界に身を転じ、明治19年(1886年)には旧制水戸中学校(現在の茨城県立水戸第一高等学校)の校長として水戸に赴任しております。明治21年(1888年)には茨城県立師範学校の校長に転じ、明治22年(1889年)にその職を辞した後は、活動の場を実業界に転じて「東京興農園」という種苗の販売会社を設立します。東京を中心にしながら札幌や信州上田に農園を作り、また、静岡県の沼津に柑橘園を作ります。やがて、千葉県、埼玉県、山梨県などの各地に採種場を設けていきますので、農業分野の実業家としては成功した人物であったといえるでしょう。
     大正15年(1926年)に渡瀬が亡くなったとき、内村鑑三は札幌時代の旧友を代表して次のような追悼の言葉を述べております。
              「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
     我等の旧き友の一人なる渡瀬寅次郎君は永き眠につかれました。悲しみに堪へません。
      (中  略)
     渡瀬君の霊魂は天にまします神の懐に帰りました。しかしながら君のこの世における事業はまだ完成されません。神を信ずる者の事業は自分のための事業ではありません。国のため、人類のため、神のための事業であります。そして君はよくこのことを解してゐられたと承つてをります。丁抹(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てる農学校を起こしたいとは、君の年来の志望であつたと承ります。もし君がなほ十年生存せられたならば、この理想が君の直接の監督の下に実現したらうと思ひます。しかしながら、このことなくして逝かれしは、残念至極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尊ぶべき理想は実現を見ずして已むべきではありません。その実行の責任は今や御遺族とわれら友人の上に落ちているのであります。
     日本はたしかにかかる農学校を必要とします。基督教を基礎とするものでありますから、これを日本政府の設立に待つことは出来ません。これは渡瀬君の如き人物を待って初めて実現さるゝものであります。もし丁抹の農聖グルントウイツヒの精神がわれらの旧友渡瀬寅次郎君の名によって、わが日本に実現するにいたりますならば、君は天上の祝福を得しと同時に、地上の栄光を得らるゝものであると思ひます。私は旧札幌農学校の同士を代表し、こゝに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の希望を述べます。これ亡き君に対し、君の遺族と友人とが尽くすべき最大の義務であると信じます。
      (内村鑑三全集第30巻(岩波書店 1982年 P183~185)
     この追悼の言葉で触れたように、渡瀬寅次郎は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った農学校を作ることを望んでおりました。渡瀬が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を建設することを思い立った経緯については、当時、デンマークから帰国した直後のデンマーク研究家平林広人(1886~1986)が、「デンマルク」(文化書房 昭和3年発行)の中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山形縣自治講習所長として十年の貴い経験を有し、再度丁抹に遊び欧州各地の農村教育を視察された、吾人の先輩加藤完治氏は、石黒忠篤氏、山崎延吉氏、井上準之助氏、及び小平權一氏その他の知己、同情者によりて組織された日本国民高等学校協會によりて茨城縣支部に我國最初の高等學校を創立し、昭和二年の春既に開校しておられ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
     然るに大正十五年四月丁抹訪日飛行機の歓迎準備講演として、著者(平林)の東京放送局に於てせる「丁抹の文化について」と題せる放送を、病床に在って聴取し共鳴せられたる故渡瀬寅次郎氏の遺志によって更に一つの国民高等學校が生まれることになつてゐる。(「デンマルク」121~2P)
     これによれば、平林の講演をラジオで聞いた渡瀬が感銘を受け、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を思い立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また、平林の伝記「祖父 平林広人」(私家版 岩淵文人著 P113)によれば、銀座教会の今井三郎牧師によって内村を紹介された平林が、デンマーク流の国民高等学校が日本にも欲しいと語ったところ、内村は賛成したばかりか、積極的な援助を約束して、平林を渡瀬に紹介したとされています。多分、渡瀬は平林に直接会った上で、放送も聞いたのでしょう。なぜデンマークかという点では、内村鑑三が「デンマルク国の話」で火をつけた、当時のデンマークブームがあったこと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
     こうして、「デンマルク国の話」から15年経った大正時代の末に、内村はデンマークへの関心を深め、渡瀬の遺志を受けて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に乗り出して行きます。
     ところで、内村は渡瀬寅次郎の追悼の言葉を「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と題し、「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述べました。このグルントウイツヒがどの様な人物であり、彼が建設したとされる国民高等学校はどのような学校であったのでしょうか?このことについて、簡単に紹介しておきたいと思います。
     内村がグルントウイツヒと表記した人物は、ニコライ・F・S・グルントヴィ(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のことです。グルントヴィは、牧師の家庭に生まれ、父の跡を継いで牧師になりますが、当時のデンマークの儀礼化したキリスト教会を批判し、「主の言葉はなぜその家(教会)から消えうせてしまったか」という説教集を出版して教会勢力からの非難を浴びます。教会との論争の中で、彼のキリスト教理解は次第に変貌を遂げ、やがては、キリスト教の真理、キリストの言葉は、教会に集う無学だが敬虔な信徒の間によみがえるという理解に至り、これに共感した農民たちが、デンマーク国教会の改革運動に乗り出していきま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農民たちの台頭を楽観的に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農民たちの実力が高まったとしても、彼等の声が国政に反映され、農民とそれ以外の人々(ブルジョアジーなど)との平等が達成されることが必要であり、それが出来なければ、民主主義は一転して衆愚政治になってしまう。そして、衆愚政治とさせないためには、国民の多数を占める民衆(農民)が高いレベルの学問を身に付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た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自分の理想とする学校の姿を本にまとめ「生のための学校」として世に出します。それによれば、グルントヴィはイギリス留学中にケンブリッジで経験したカレッジをモデルとした学校を考えていたようです。教師と学生が寝食を共にし、親密に生きた言葉によって語り合う中で、それぞれの生が生き生きとしたものとなり、生への期待を喚起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ここで、「生きた言葉」で語り合うと申しましたが、グルントヴィの念頭には、死んだ言葉、死んだ学問の代表としてラテン語学校がありました。グルントヴィ自身は、こうした古典語の素養の豊かな人物でありましたが、かつて通ったラテン語学校での体験が、彼にこうした思いを抱かせたのです。そこでは権威主義的な教師によって無味乾燥な詰め込みの勉強が強いられ、学校の雰囲気自体も窒息しそうなものであって、このラテン語学校のことをグルントヴィは「すべてが人をだめにし、怠惰にさせ、腐らせるもの」と表現しております。グルントヴィの理想が「生のための学校」であれば、さしずめ彼が体験したラテン語学校は「死の学校」とでもいうべき存在であったのでしょう。もし、現在の日本の学校を見たら彼は何というでしょうか?
     「生きた言葉」で語り合い、それぞれの生を深めて行くことが目的であれば、そこに資格や試験、単位などが入り込む余地はないとグルントヴィは考えました。彼によれば、試験とは「年長者が、若者の経験の範囲では答えられず、ただ他人の言葉を繰り返すことで答えとするに過ぎないような質問で、若者を苦しめるもの」なのです。こうした「受験制度」の帰結がどうなるのかを、彼は、150年以上も前に見抜いていたことになります。また、職業訓練を導入することも認め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それは、生のためではなく、利益のためだからです。
     資格も得られず、試験も単位もない学校が、果たして存在できるのでしょうか?受験という目的があるからこそ子どもたちは机に向かい、学力を身に付けて行く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グルントヴィは、学校のシステムは試験に基づくべきではなく、「全ての賢明な学校のシステムは、絶えざる啓発に基づく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ます。こうした啓発は、試験制度では押し殺されてしまう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自分の理想の学校を「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と名付けました。英語では「Folk high school」と表記しますが、日本語に直せば「国民高等学校」とでもいうのでしょうか。こ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44年に最初の学校が作られ、その後、グルントヴィに共鳴する人々によってデンマーク各地に展開されて行きます。
     黎明期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運営は、農村青年の生活に合わせて、冬の6ヶ月を男子学生、夏の3ヶ月を女子学生という学期構成を取り、原則として全寮制として教師も学生と寝食を共にしました。
     当初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才以上の青年を対象としておりましたが、やがて、それ以下の年齢の子どもたちを対象としたフリースコーレ(小学校に相当)が1856年に作られます。フリースコーレを設立したクリステン・コルという人物は、子どもの教育は親と教師がするものであり、国家が介入してはならないと主張して次のように言います。
    「子どもは国家に属するのではなく、親に属するのだ。だから両親は、子どもの一時期に責任があるのではなく、その全ての精神的な成長に渡って、責任があると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
     やがて、フリースコーレと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間をつなぐ、エフタースコーレという中学校に相当する学校が設立され、現在の体制の原型ができ上がって参ります。
    2へ続く

日本における農民高等学校(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歴史



日本における農民高等学校(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歴史


日本における農民高等学校(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歴史 (2006. 5. 3. 一部訂正)
 

1. グルントヴィを日本へ紹介した人物

 デンマークの哲学者・詩人・宗教家であるグルントヴィが1844年に創立した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日本でも大正時代から昭和初期にかけて、「国民高等学校」と訳され、全国に設立された。フォルケというのは単に国民ではなく民衆のことであり、当時のデンマークにあっては即ち「農民」を指していた。グルントヴィは、国家を資本家ではなく民衆である農民が主体的に担うべきであると考え、そのためには農民にも高度な教育が必要であるとし、成人になった農業後継者が冬の6ヶ月寝食を共に学び、また夏の3ヶ月は農村女子を受け入れる学校を設立した。デンマークでは、各地にこのような学校が続々と生まれ、これらの学校の卒業生たちによって、農業(特に酪農)を主体とした自立した民主国家となることに成功した。絶対主義天皇制時代であった日本において、わずかにデモクラシーが光を浴びた大正時代、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を視察した内村鑑三(札幌農学校2期生でクラーク博士の下クリスチャンとなり、無教会キリスト教を創始した)が「デンマルク国の話」(1911、現在も岩波文庫で読める)を著し、東大の農業経済学者であった那須皓(しろし)がホルマン「国民高等学校と農村文明」を翻訳(1913)するなど、デンマーク・ブームが起こる。この、内村鑑三や那須皓の働きかけにより、各地に日本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が生まれることになる。


2.日本において農民高等学校を創立した主体

  この時期、日本において生まれた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には、大きく分けると3つの流れがあった。1つ目は、プロテスタント主流派の日本基督教会の牧師らによるもので、教会などの施設を間借りして期間限定で開講され、30年代には全国各地で活発に開催された。日本に農民組合や農業協同組合を作る大きな力ともなったが、のちに農民へのキリスト教伝道ということが中心に変質していくと共に、力を失っていく。2つ目は、内村鑑三の弟子ら無教会派によるもので、これも大きな広がりは見せなかったが、山形の独立学園高校を始め、全国にいくつかこの流れの全寮制高校が存続している。3つ目は、この時代の皇道主義的農本主義によるもので、当初クリスチャンで古神道に改宗した加藤完治らによって担われ、のちに全国に広がり、特に満州開拓には数万人の青少年を送り出し、シベリア抑留などの悲劇を生む。傀儡政権下の満州国下でも多数の国民高等学校が設立されたが、すべて数年から十数年で敗戦と共に消えた。しかし、全国で何校かは、農業専門学校として形を変え継続している。


3.プロテスタント教会による農民対象の学校

 明治以降の日本は、天皇を中心とする地主と資本家により国家が担われていた。明治政府により地主を教育する機関として設立されたのが札幌や駒場の農学校であり、のちに旧帝大の農学部となる。それに対して、実際の農業を担っている小作・自作を教育するための学校としてデンマーク式の農民高等学校を作ろうと最初に努力したのは、キリスト教の牧師たちであった。その最初のものは、1913年に福島県小高教会を使って開かれた「農民高等学校」であろう。ここの杉山名元治郎牧師は、全国に名の知られた賀川豊彦牧師らと共に1922年、日本農民組合を結成し、初代組合長ともなる。組合本部は賀川の自宅であり、理事、評議員の大半はクリスチャンであった。その後、賀川は農村伝道団を組織し、組合運動より教化運動に力を注ぐようになる。1924年には、群馬県渋川教会を会場に、栗原陽太郎牧師により国民高等学校が設立され、「渋川民衆高等学校」と称した。他にも全国でこのような学校が作られ、ピーク時の35年には全国120の教会で農民対象の学校が開かれたが、これらは期間限定で開催されたもので、常設と言えるのは次の4つであろう。
 「日本農民福音学校」:兵庫県の賀川豊彦宅を会場に開かれ、杉山元治郎らも教師となり1927年から42年まで続いた。なお賀川は、キリスト教社会主義者の安部磯雄らと日本協同組合学校を33年に設立し、日本における農協、生協、健康保険組合などの基礎を作った。「武蔵野農民福音学校」:東京世田谷区祖師谷に、賀川の弟子である藤崎盛一により33年に設立され、大戦中一時中断したが、戦後再開して55年まで続いた。「豊島農民福音学校」:香川県豊島(てしま)に藤崎盛一が、賀川の提唱した立体農業を実践するために48年設立し、立体農業研究所も併設し、77年まで続いた。これら農民福音学校での講義は、一般的な農学的課目の他、立体農業(今で言う有機農業)、キリスト教関連、セツルメント論等であった。「利府農民福音学校」:35年に宮城県利府村で斉藤久吉牧師により始められ、「聖農学園」として66年まで続き、「利府農村センター」に働きが引き継がれた。また、ここで農業を学んだ後に岩手大で獣医学を修め岩手県山形村で牧師となった角谷晋次により「岩手三愛山村塾」が開かれた。
  なお、武蔵野農民福音学校内には、1938年に基督教農村文化研究所が作られ、戦時下では満州開拓基督教村構想など、国策にも協力した。戦後48年に農村教化研究所に改組され、51年に農村伝道神学校と改称した。日本基督教団では、全国に農村伝道センターというものも配置し、全国5か所の大センターと、60か所の地方センターが設置された。地方センターのうち「道北センター」(北海道名寄市)、「会津センター」(福島県高田市)、「関西農村センター」(兵庫県河西市)の3か所が現在まで存続し、農民に対する教育活動などを行っている。会津には立体農業を目指す立農会もある。また、農村伝道神学校による東南アジアの農村支援活動から発展した「アジア学院」が、73年栃木県西那須野に設立され、有機農業による自立を支援する活動がされている。
 この他に、酪農学園大学から始まった「三愛塾」と、「YMCA農村青年塾」という現在も続く2つの活動がある。これはいずれも、樋浦誠の尽力によるものである。酪農学園(北海道江別市野幌)は、北海道製酪販売組合(後の雪印乳業)と共に、デンマーク式の酪農の理想を北海道でも実現させようとした黒澤酉蔵により、1933年に「北海道酪農義塾」として始まった。ちなみに黒澤酉蔵は、国会議員を辞め栃木県谷中村で農民と共に命をかけて農地を守る闘いをしたキリスト者(正式に洗礼は受けなかった)である田中正造に、弟子入りしている。戦中に「機農学園」として皇道農本主義に基づく教育を行った反省に基づき、戦後49年に「酪農学園大学」としてキリスト教とデンマークの三愛主義を基本とした学園として再出発するのに伴い、初代学長として岐阜大学農学部から迎えられたのが樋浦誠(北大農学部卒業のクリスチャン)である。樋浦は、大学で学べない農村青年にも大学を開放し、50年から大学の長期休暇を利用した講習の他、道内十数か所、さらに全国各地でも三愛塾というものを開き、多くの講師がこれに協力した。現在でも、北海道の道北センター(名寄)、瀬棚、上富良野などで、三愛塾が継続されている。酪農学園にあった、酪農科全寮制の「機農高校」は、91年に女子高の三愛高校と合併して「とわの森三愛高校」となったが、従来通り酪農科は全寮制で存続している。
   一方のYMCA農村青年塾であるが、55年に「YMCA日本農村青年塾」が東京小金井で樋浦誠によって始められ、その後、静岡県御殿場のYMCA東山荘に場所を移して現在まで継続している。YMCAは、プロテスタント系超教派のキリスト教青年会のことだが、農村YMCAが日本で最初にできたのは1907年で、福島県長岡村(現伊達町)の長岡基督教青年会である。23年には長岡蚕業学校のキリスト教教師であった遠藤修司により長岡農村YMCAが作られ、31年からは農村青年向けの「YMCA冬季学校」も、長岡教会を会場に開かれている。


4.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等による国民高等学校ほか

  1915年、「山形県立自治講習所」が、内村鑑三の弟子だった藤井武の奔走によって設立される。所長には、日本デンマークと呼ばれ農業先進地として注目を浴びていた愛知県安城市の「愛知県立安城農林学校」(現安城農業高校、1901年創立、日本のグルントヴィとも称された山崎延吉が初代校長)に務めていた加藤完治が招かれた。彼は熱心なクリスチャンであったが、古神道に転向して、後に日本国民高等学校を設立し、天皇主義的農本主義の推進役となる。無教会派は、内村鑑三以来、絶対的反戦平和主義、反天皇制というスタンスであり、この学校は無教会派の流れに属するものとはならず、33年には「山形県立国民高等学校」に改編された。
   1929年、札幌農学校1期生で、旧制水戸中学校校長を務めた後に東京興農園を設立した渡瀬寅次郎の遺志を継いで、静岡県沼津市久連(くづら)に「興農学園」が設立された。設立準備には、内村鑑三や新渡戸稲造や佐藤昌介、宮部金吾など札幌農学校時代のクリスチャンらが協力し、初代校長は平林廣人、その後大谷英一と、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が校長を務めた。33年には「久連国民高等学校」と改称し、農村YMCAの冬季講座も開かれた。これは農業者対象の専門学校であったが、43年に閉鎖されてしまった。
   雪深い山形県小国を、欧米のキリスト教に毒されない無教会派の伝道拠点として評価した内村鑑三の意志を継ぎ、1934年に内村の弟子で東大物理学科出身の鈴木弼美が創立した「基督教独立学校」は、戦時中、鈴木が戦争と天皇制に反対して獄中に拘束されるなどの危機を乗り越え、戦後は無教会派の矢内原忠雄(のち東大総長)の弟子であった村山道雄山形県知事らの尽力により、48年に文部省認定の「基督教独立学園高校」となった。普通科高校ながら、部活動に農作業を取り入れ、食事の大半を自らの農場で自給し、自ら調理して食べる生活を現在でも維持している。同じように無教会派の全寮制高校として、61年に農村女子を対象にした「向中野学園高校」が盛岡に設立されている。ここは1933年に「盛岡生活学校」として始まり、55年に農村生活研究所を設立(88年に廃止)、61年に農村家庭科高校で発足し、98年に「盛岡スコーレ高校」と改称して総合学科となり、01年に共学となった。また、西日本にも独立学園と同じような学校が欲しいという要求で、1988年に高橋三郎により「キリスト教愛真高校」が島根県江津市に設立された。
  2003年に101歳の天寿を全うして亡くなった沖縄伊江島の平和運動家、阿波根昌鴻も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であり、南米で10年ほど移民 として過ごした後、伊江島に帰ってデンマーク式農民学校 建設を志し奔走する。だが建設中の学校は沖縄戦 で失われ、一人息子も戦死。敗戦後、伊江島の土地の大半が米軍に強制接収された際、反対運動の先頭に立ち、日本政府との賃貸借を拒否し続け、農地を守るための非暴力闘争を死ぬまで続けた。
 また、やはり熱心な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で、愛と協同による農村社会確立による日本再生を願い、1945年愛農会を設立した小谷純一により、農業を担う人材育成を目的として54年、三重県青山町に創立された「愛農学園農業高校」がある(58年までは「愛農根本道場」と称していた)。愛農学園高校では、有機農業が必修科目となっており、稲作・畑作・果樹・酪農・養豚・養鶏・山林と複合経営で農業の全てを学べる。また、愛農学園設立に協力した無教会派の小山源吾も、長野県諏訪で三愛教育振興会を設立し、「三愛講座」を各地で開いている。
  韓国にも、内村鑑三の流れを汲む無教会派キリスト教に基づき、自然農法を教える「プルム農業高等技術学校」があり、小谷の愛農会と同じように、元敬善が正農会という農民組織を韓国に広めた。以上挙げた無教会派の高校は、いずれも1学年30名足らずの少人数全寮制で、姉妹校の関係にある。
   以下では、日本基督教団と無教会派以外のキリスト教による、類似の学校についても列挙してみよう。93年に山梨県須玉町(現北杜市)に西條隆繁により創立された「キリスト教自然学園高校」(2004年に「基督自然学園高校」に改称)は、少人数全寮制で(現在は通学コース、通信制もある)礼拝、労作などの日課を設けているが、無教会派ではなく、社会的な視点や農業という視点もないようで、どちらかというとフリースクール的なもののようである。
   有機農法による自然食に力を入れているセブンスデー・アドベンチスト(土曜日に礼拝を行うキリスト教の新興一派)は、77年千葉県にある「日本三育学院」(1926年創立)に大学・短大を残し、全寮制の中高一貫校を環境の良い広島県大和町に移して「広島三育学院」を開校し、農業や炊事などの労作教育にも力をいれているようである。
   私の所属する聖公会(英国教会系、立教大学や聖路加国際病院など社会施設が多い)には、山梨県清里(現北杜市)にKEEP協会(清里教育体験プロジエクトの頭文字)というものがある。これは、アメリカの宣教師で戦後の疲弊した日本の農村社会を復興させることに力を注いだポール・ラッシュにより、48年設立された。38年に作られた清泉寮を中心にして、酪農による理想的な農村コミュニティーのモデルを目指し、48年に聖アンデレ教会、50年に聖ルカ診療所(95年廃止)、57年に聖ヨハネ保育園、63年に地元の農業青年向けに「清里農業学校」を開校した。この農業学校は76年で廃止されてしまったが、84年にネイチャーセンターが開設、2000年に「キープ自然学校」が開校し、青少年や一般市民を対象に、自然体験や農業(特に酪農)体験学習を行っている。
   カトリック教会においては、修道院において自給自足農業を連綿と続けてきた歴史があるが、農業教育への関わりは少ない。全寮制高校としては鹿児島や函館のラサール高校のようにエリート養成のボーディング・スクールだけであり、女子高といえば良家のお嬢様学校というところである。唯一の例外とも言えるのが、1929年に伊藤静江によって創立された「大和学園高校」(73年に聖セシリア女子高校に改称)で、従来の良妻賢母型の女子教育の概念を覆し、土に親しみ自然に触れることで神の摂理を理解させうようというものだった。45年には、従来無かった女子の農業専門学校である「大和女子農芸専門学校」を設立したが、50年に「大和女子農芸家政短大」となり、現在は「聖セシリア女子短大」となり保育科のみとなっている。
  また、札幌のスミス女学院(現北星学園大)に学び新渡戸稲造の薦めで米国に留学した河井道子が、1929年に東京世田谷区に設立した「恵泉女学園」も、現在は中高大学まで擁する学園に発展しているが、キリスト教とともに園芸を柱の一つにしている。土に親しむ園芸は、人間らしく生きることができ、環境を美しく整える女性に適した職業であると考えた河井道子は45年、神奈川県伊勢原市に「恵泉女子農芸専門学校」を設立し、50年には「恵泉女学園園芸短期大学」となり、長期に農村女性を育てて来たが、2005年ついに閉鎖された。


5.非キリスト教系の国民高等学校と農業専門学校

 ホルマンの「国民高等学校と農村文明」を翻訳した那須皓らが呼びかけて国民高等学校協会が結成され、1926年、茨城県宍戸町(現支部町)に「日本国民高等学校」が設立された。山形自治講習所の所長だった加藤完治が校長、農業報国連盟理事長や全国農業会会長も務めた石黒忠篤が理事長となった。皇道主義的農本主義に基づいており、後に水戸市に移転し「満蒙開拓青少年義勇軍訓練所」というものものしい名称に改変され、満州へ数万人の青少年を送り込んだ。加藤完治は戦犯になることを免れ、戦後46年に白河報徳開拓農業組合長となり、53年に「日本高等国民学校」と改名して国民高等学校を再開し、これは現在も「日本農業実践学校」として継続している。
 国民高等学校協会により、他にも全国でいくつかの国民高等学校が設立され、宮澤賢治も1926年に花巻農学校内に設置された「岩手国民高等学校」の教師に採用され、農民芸術論などを教えた。宮沢賢治は、ここでトルストイや、モリス、ラスキンなどのキリスト教社会主義的=自由主義的アナキズムと言える思想も紹介しているのだが、一方では当時満州開拓を推進する思想的母体ともなった皇道主義日蓮系の田中智学が主宰する国柱会の熱心な会員でもあった。理想的に語られ過ぎている宮澤賢治の思想について、この点についてはもっと検証する必要があるだろう。しかし、この学校を辞して宮澤賢治が自ら農民となり創設した「羅須地人協会」では、農民対象に生物学や音楽なども講義しており、こちらは本物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であったと言えるかも知れない。しかし、これは2年間しか続かなかった。
   この時代に国民高等学校として全国に作られた学校は、デンマークのように農民が主体となるものではなく、あくまでも国家全体主義的な理想に向かって対外侵略的に機能したため、あのような戦争の悲劇を生んでしまった。敗戦によって占領軍が強制的に農地解放を行うまで、農民=小作が自由であることなどなかったし、小作争議などは徹底弾圧されて、地主や資本家の横暴に対して、農民と労働者との共闘が進むこともほとんどなかった。戦後、棚からぼたもちで自作農となった農民は、資本家や米国と利害を一致させる道を選んで、保守化する。農業だけでは食べていけなくても、兼業化することで労働者並かそれ以上の生活水準は保てるような道を選んだのだ。そうして戦後も農民は、本当の意味では、自立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
  さて、戦前の話に戻すと、国民高等学校の他にも、農民道場の類や海外殖民のために農業者を育成する学校が全国各地に作られている。北海道では1930年に栗林元二郎により「八紘学園」(札幌市月寒)が設立され、北海道帝国大学初代総長を務めた佐藤昌介が学園長となった。39年からは満州開拓に多くの青年を送り出したが、八紘学園卒業生は、敗戦後も住民から丁重な扱いを受けたという。現在でも「北海道農業専門学校」と称し、安い授業料で農業を学べる私立学校として人気がある。
  国内植民地である北海道に設立された札幌農学校で、クラークの薫陶を受けた内村、佐藤、新渡戸らは、アメリカの植民地政策を学んでいる。特に、新渡戸やその弟子であった東大の矢内原は、植民地学が専門であった。もっとも、新渡戸はクエーカー教徒、矢内原も無教会派と、絶対平和主義をとるキリスト教の非主流派に属しており、当時の侵略政策には批判的で、キリスト教主流派が国策に協力した時代にあっても、常に戦争に反対したリベラリストであったと言えるが、時代を変える力は持てなかった。その時代の限界ということもあるかもしれないが、根本的な考え方にも欠点があ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農業後継者育成を目的とした学校は、現在では公立の農業大学校(東京は独立行政法人=元国立)が各都道府県にほぼ一つずつあり、農業高校はさらに多数あるが、私立の農業専門学校は少ない。上述2つの他には、45年に創立された「鯉渕学園農業学芸専門学校」が水戸市にあるが、ここは4年制で修業年限が2年の大学校より長く、大学農学部と同程度の教育が受けられ、有機農業の講座もある。長野県にある「八ヶ岳中央農業実践大学校」は、38年に農村更正協会によって「八ヶ岳中央修練農場」として設立され、当協会は37年から学生義勇軍を組織して、全国で開墾などにあたったが、44年には学徒動員などで休止に至っている。現在では、全国から新規就農希望者なども多く入学する学校となっている。


6.その他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

 酪農学園大学で酪農を学び、在学中にデンマーク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に留学した河村正人が、北海道瀬棚の山林を開拓して酪農を始めて20年目の1990年に「瀬棚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を開校し、毎年10数名の生徒を全国から受け入れ、酪農を中心とした寮生活をスタッフと共に行っていた。しかし、さらなる簡素生活を目指し、新たな魂のフォルケを作るべく、今年の3月で閉校した。もう一つ、さらに小規模であるが山形県小国の独立学園の近隣に「小国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がある。ここも農作業をカリキュラムに取り入れ、農産物の販売を重要な資金源の一つとしている。ここは独立学園出身の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である武義和が、桐朋学園大学で音楽を学んだ後、自由の森学園高校、愛農学園高校、独立学園高校などの教師を経て、ノルウェーの音楽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でスタッフとして研修し、2000年に開校した。
   農業にこだわらず、教育方針として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精神を生かそうとした人物としては、東海大学創立者の松前重義や、玉川大学創立者の小原國芳があるが、いずれも現在では総合大学となり、本来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とは、かけ離れている。松前重義は、青年期に内村鑑三に教えを受け、デンマーク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に留学した後、1937年「望星学塾」を設立したが、その後だんだんと学校が大きくなり、現在では日本第2の巨大な私立大学となった。「玉川学園」も、1929年創立当時は、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的な全寮制の自給自足的な学校であったらしいが、今では農学部や教育学部が有名なところに、いくらかその名残を残していると言えるくらいだろうか。
   私は、瀬棚の河村氏が作ったような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を、この余市にも作りたいと思っている。農民オーケストラに参加してくれたこともある河村氏から以前、私もぜひ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を作るべきだと言われた時には、まだその気はなかったのだが、今はその夢がふくらむばかりである。そして、農業を基盤とした生活を元に、芸術を生み出す学校にしたい。最終的な目標は、適正規模の自給的なコミュニティーである。だから、学校を大きなものにはするつもりはないし、学校を作ること自体が、最終目的なのではない。


<参考文献>

清水 満 「生のための学校~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世界」 (新評論 1993初版、1996改定)
星野正興 「日本の農村社会とキリスト教」  (日本基督教団出版局 2005)
小山哲司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 (『水戸無教会』78号 2000)
渡辺兵衛 「三愛塾運動と農村伝道(北海道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運動)」(『福音と社会』(農村伝道神学校 紀要)第23号 1998)
「基督教独立学園年表 前史1899~1947、学園史1948~2000」 (基督教独立学園 2002)
<2006.5.3.訂正箇所>

2. 当初クリスチャンだった加藤完治→当初クリスチャンで古神道に改宗した加藤完治
3. 51年に農村伝道神学校を併設→51年に農村伝道神学校に改称
  黒沢酉蔵は、茨城県牛久で国会議員を辞め農民と共に命をかけて農地を守る闘いをしたキリスト者、田中正造にも弟子入りしている。→黒澤酉蔵は、国会議員を辞め栃木県谷中村で農民と共に命をかけて農地を守る闘いをしたキリスト者(正式に洗礼は受けなかった)である田中正造に、弟子入りしている。
   戦後49年に、「酪農学園大学」として発足するのに伴い、初代学長として岐阜大学農学部から迎えられたのが樋浦誠である。→戦中に「機農学園」として皇道農本主義に基づく教育を行った反省に基づき、戦後49年に「酪農学園大学」としてキリスト教とデンマークの三愛主義を基本とした学園として再出発するのに伴い、初代学長として岐阜大学農学部から迎えられたのが樋浦誠(北大農学部卒業のクリスチャン)である。
 「YMCA日本農村塾」→「YMCA日本農村青年塾」
4. 「九連国民高等学校」→「久連国民高等学校」
6. 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を名乗るフリースクールは、他にも全国数か所あるようだが、単発的なものもあるし、農業を主体としていたところは、瀬棚の他にはなかった。→もう一つ、さらに小規模であるが山形県小国の独立学園の近隣に「小国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がある。ここも農作業をカリキュラムに取り入れ、農産物の販売を重要な資金源の一つとしている。ここは独立学園出身の無教会派クリスチャンである武義和が、桐朋学園大学で音楽を学んだ後、自由の森学園高校、愛農学園高校、独立学園高校などの教師を経て、ノルウェーの音楽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でスタッフとして研修し、2000年に開校した。
参考文献に追加→渡辺兵衛 「三愛塾運動と農村伝道(北海道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運動)」 (『福音と社会』(農村伝道神学校 紀要)第23号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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榎本 恵  主幹牧師の部屋                           



朝にはどうか、詩篇143;8 2014.1.24掲載

アシュラムって何だ? 2014.1.24掲載

言の内に命があった。命は人間を照らす光であった。 ヨハネ1;4 2013.12.19掲載


実に、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間にある。 ルカ17:21  2013.12.19掲載

北米・ブラジル・台湾 伝道旅行(6)  2013.12.19掲載 

北米・ブラジル・台湾 伝道旅行(5)  2013.12.19掲載 

悲しんではならない。主を喜び祝うことこそ、あなたたちの力の源である。 ネヘミヤ8:10

2013.10.19掲載

北米・ブラジル・台湾 伝道旅行(4)  2013.10.19掲載 

北米・ブラジル・台湾 伝道旅行(3)  2013.10.19掲載 

恐れるな。語り続けよ。黙っているな。わたしがあなたと共にいる。2013.7.13掲載

北米・ブラジル・台湾 伝道旅行(2)  2013.6.14掲載

天から雨を  2013.6.14掲載

みことば 2013.6.14掲載

イエスは主なり。− 主権回復の日記念式典に問う – 2013.6.14掲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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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の内に命があった。命は人間を照らす光であった。 ヨハネ1;4




 早いもので、これで今年最後のアシュラム誌の瞑想となった。今年1月の最初のみ言葉が、「あなたは命の道を教えてくださいます」(詩篇16;1)で、最後が、このヨハネ1章4節の「言の内に命があった」である。今年のアシュラムの瞑想は、命で始まり命で終わる。もちろんそれは、年の瀬に今年も無事に過ごすことができてよかったと一年を振り返るような命ではない。そうではなく、たとえ今この世の命が尽きたとしても、決して絶えることのない永遠の命のことだ。
 「初めに言があった」という有名な一節をもって始まるヨハネ福音書の独特でしかも難解な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譚。この「言(ロゴス)」が、私たち人間が使う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手段としての「言葉」や自分の意思を伝達する方法としての「言葉」とは異なるものを意味することは、もうお分かりだろう。神の言、命の言、それはあらゆるものを創造し、混沌の中に秩序をもたらし、闇に打ち勝ち光を放つ。死に勝利し、永遠の命を約束する。それは神とともにあるもの、最初からあるもの、言であり、命であり、光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ご自身のことなのだ。
 ヨハネ福音書の中で、イエスは度々「永遠の命とはなにか」について語る。ファリサイ派の老議員ニコデモと(3;1ー21)、井戸の前でサマリヤの女と(4;1ー42)、ベトサダの癒しの業のあとユダヤ人たちと(5;19ー30)、そしてペテロと弟子たちと。イエスは何度も、永遠の命をお示しになる。そして、十字架を前にした最後の祈りの中でこう祈るのだ。「永遠の命とは、唯一のまことの神であられるあなたと、あなたのお遣わしにな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です。」(17’2)と。しかし、神を知り、イエスを知ることとは一体なんなのだろうか。それはただその難解な言葉の意味を理解することではない。どんなに神学を学んでも、註解書を読み漁っても、高名な牧師の説教に耳を傾けても、永遠の命を知ることはできない。「あなたたちは聖書の中に永遠の命があると考えて、聖書を研究している。ところが、聖書はわたしについて証しをするものだ。それなのに、あなたたちは、命を得るためにわたしのところへ来ようとしない。」(5;39ー40)そうなのだ、キリストは、いつも永遠の命を得るようにと私たちを招く。キリストはどこでも、永遠の命を知らせようと私たちを光照らす。「あなたは命の道を教えてくださいます」と詩人が喜び唱ったように、私たちはこの永遠の命の道を教え示してくださるキリストのもとへ行くほか、それを知る術はないのだ。アシュラムとは、まさにこのキリストを知り、神を知り、静かにその元へと日々向かうことなのである。
 今年の年頭アシュラムでご奉仕いただいた角谷晋次牧師は、その著書「新渡戸稲造とクエーカリズム」の中で、新渡戸稲造の祈りとアシュラムの祈りの共通点を上げ、次のようにアシュラムを評価してくださっている。「アシュラムと新渡戸稲造博士の「黙思」の共通点を述べます。その第一は、知識や註解書にたよって聖書を読むのでなく、静かに聖霊の導きをひたすら受けて、聖霊の力で聖書を読む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新渡戸稲造博士は自分の良心において、聖書のみ言葉を「神の言葉」として真実に受け止めておられました。これはアシュラムでは、「静聴」の時間として、各自が沈黙の時間を守って実施しています。」
 友よ、今年も終わり、また気がつけば、新しい年もいつの間にか終わってしまうだろう。私たちの肉なる命は、存外短いものである。だから友よ、今度こそ、あの言の中に、光の中に、命の中に飛び込んで行こうよ。それこそが、私たちが永遠の命を知ることなのだ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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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の内に命があった。命は人間を照らす光であった。 ヨハネ1;4




 早いもので、これで今年最後のアシュラム誌の瞑想となった。今年1月の最初のみ言葉が、「あなたは命の道を教えてくださいます」(詩篇16;1)で、最後が、このヨハネ1章4節の「言の内に命があった」である。今年のアシュラムの瞑想は、命で始まり命で終わる。もちろんそれは、年の瀬に今年も無事に過ごすことができてよかったと一年を振り返るような命ではない。そうではなく、たとえ今この世の命が尽きたとしても、決して絶えることのない永遠の命のことだ。
 「初めに言があった」という有名な一節をもって始まるヨハネ福音書の独特でしかも難解な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譚。この「言(ロゴス)」が、私たち人間が使う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手段としての「言葉」や自分の意思を伝達する方法としての「言葉」とは異なるものを意味することは、もうお分かりだろう。神の言、命の言、それはあらゆるものを創造し、混沌の中に秩序をもたらし、闇に打ち勝ち光を放つ。死に勝利し、永遠の命を約束する。それは神とともにあるもの、最初からあるもの、言であり、命であり、光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ご自身のことなのだ。
 ヨハネ福音書の中で、イエスは度々「永遠の命とはなにか」について語る。ファリサイ派の老議員ニコデモと(3;1ー21)、井戸の前でサマリヤの女と(4;1ー42)、ベトサダの癒しの業のあとユダヤ人たちと(5;19ー30)、そしてペテロと弟子たちと。イエスは何度も、永遠の命をお示しになる。そして、十字架を前にした最後の祈りの中でこう祈るのだ。「永遠の命とは、唯一のまことの神であられるあなたと、あなたのお遣わしにな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です。」(17’2)と。しかし、神を知り、イエスを知ることとは一体なんなのだろうか。それはただその難解な言葉の意味を理解することではない。どんなに神学を学んでも、註解書を読み漁っても、高名な牧師の説教に耳を傾けても、永遠の命を知ることはできない。「あなたたちは聖書の中に永遠の命があると考えて、聖書を研究している。ところが、聖書はわたしについて証しをするものだ。それなのに、あなたたちは、命を得るためにわたしのところへ来ようとしない。」(5;39ー40)そうなのだ、キリストは、いつも永遠の命を得るようにと私たちを招く。キリストはどこでも、永遠の命を知らせようと私たちを光照らす。「あなたは命の道を教えてくださいます」と詩人が喜び唱ったように、私たちはこの永遠の命の道を教え示してくださるキリストのもとへ行くほか、それを知る術はないのだ。アシュラムとは、まさにこのキリストを知り、神を知り、静かにその元へと日々向かうことなのである。
 今年の年頭アシュラムでご奉仕いただいた角谷晋次牧師は、その著書「新渡戸稲造とクエーカリズム」の中で、新渡戸稲造の祈りとアシュラムの祈りの共通点を上げ、次のようにアシュラムを評価してくださっている。「アシュラムと新渡戸稲造博士の「黙思」の共通点を述べます。その第一は、知識や註解書にたよって聖書を読むのでなく、静かに聖霊の導きをひたすら受けて、聖霊の力で聖書を読む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新渡戸稲造博士は自分の良心において、聖書のみ言葉を「神の言葉」として真実に受け止めておられました。これはアシュラムでは、「静聴」の時間として、各自が沈黙の時間を守って実施しています。」
 友よ、今年も終わり、また気がつけば、新しい年もいつの間にか終わってしまうだろう。私たちの肉なる命は、存外短いものである。だから友よ、今度こそ、あの言の中に、光の中に、命の中に飛び込んで行こうよ。それこそが、私たちが永遠の命を知ることなのだから。













2016/10/28

新渡戸文化学園



新渡戸文化学園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 四季会 冬のセミナー

 寒さはいっこうにやわらぎませんが、皆様にはいかがお過ごしでしょうか。
 今年は新渡戸稲造博士没後149年で、来年はいよいよ没後150年を迎えます。そういう節目の年を迎えるのにあたって、新渡戸博士の業績を見つめなおすのはいかがでしょう。
 冬のセミナーを、下記のとおり開催いたします。皆様お誘い合わせのうえ、ぜひご参加くださいますようご案内申しあげます。




- 概要 -
主 催:財団法人新渡戸基金
日 時:2011年2月22日(火)午前10時より12時まで
会 場:第2 産業会館 4階会議室

講 師:角谷晋次氏(新渡戸稲造研究家、元盛岡大学教授、牧師)
内 容:「新渡戸稲造の成人女子教育」
参加費:1,000円(資料代、通信費、お茶代など)
申込み:2月17日(木)までにFAX、お電話、Eメールでお願いします。

〈お申込、お問合せ先〉(財)新渡戸基金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係
〒020-0024 岩手県盛岡市菜園1-4-10-6階
TEL 019-654-3279  FAX 019-652-4213 IP電話 050-3007-8120
          E-mail : fund@nitobe.com

★今年度は角谷先生にすべての講座を担当していただいておりますが、冬のセミナーをもって最後になりますので、セミナー修了後、角谷先生を囲む昼食会を予定しております。
 参加ご希望の方は合わせてお申し込み下さい。



〈角谷先生を囲む昼食会〉
時 間:12:15~1:30
会 場:「銀河離宮」(予定)第2 産業会館 1階

参加費:1,000円(食事代)
申込み:セミナーと合わせてFAX、お電話、Eメールでお願い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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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までの動き


2016年(平成28年)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19日
特別展「紙芝居で振り返る 新渡戸稲造からの贈り物」ご案内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春のセミナー)ご案内 5月11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セミナー)ご案内 2月 6日
2015年(平成27年)
「生誕の地盛岡で新渡戸稲造・武士道精神を学ぶ」ご案内
もりおか啄木・賢治青春館「新渡戸稲造の青春」展ご案内
新渡戸稲造先生命日祭ご案内 10月15日
新渡戸菊キックオフシンポジウムご案内 10月16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28日
岩手めんこいテレビ・BSフジ「新渡戸稲造の台湾」
特別展:稲造と昌介 ~札幌農學校時代~ ご案内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春のセミナー)ご案内 6月 3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セミナー)ご案内 2月 3日
2014年(平成26年)
パンフレット「新渡戸稲造入門」ご案内
盛岡タイムス様のご厚意により全文をPDFでご覧頂けます。
・新渡戸稲造入門・表紙A(PDF)
・新渡戸稲造入門・表紙Bのみ(PDF)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秋のセミナー)ご案内 12月3日
2013年(平成25年)
新渡戸稲造を知っていますか-世界が尊敬した真の国際人 ご案内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春のセミナー)ご案内 5月25日
藤井茂さん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セミナー)ご案内 2月8日
2012年(平成24年)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秋のセミナー)ご案内 12月14日
共同企画展「新渡戸氏と花巻」太田時敏(ときとし)ご案内
学園の各所でクリスマス
第9回 お茶の水アカデミアシンポジウムのご案内 11月22日
第1回もりおか武士道サミットのご案内 12月15日
新渡戸稲造博士生誕150年祭のご案内 8月31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30日
新渡戸先生生誕150年
先人記念館企画展「新渡戸稲造のおくりもの」ご案内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春のセミナー)ご案内 5月25日
イルカさんが学園に来ました。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セミナー)ご案内 2月 8日
2011年(平成23年)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秋のセミナー)ご案内11月 9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24日
新渡戸国際塾 公開講演ご案内 6月26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春のセミナー)ご案内 4月23日
札幌市時計台、新渡戸稲造が森本厚吉のために書いた額 2月 23日
特別展「日露戦争に見る武士道」ご案内 2月 15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セミナー)ご案内 2月 4日
2010年(平成22年)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秋のセミナー)ご案内 11月30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31日
『一〇〇年前の女の子』(講談社) 船曳由美著
「郵便資料でかえりみる札幌農学校」-スタンプショー2010-
北海道大学附属図書館・企画展示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冬の会)ご案内 2月 1日
2009年(平成21年)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秋のセミナー)ご案内10月1日
ニトベ・フレンズセミナー(夏のセミナー)ご案内 8月 3日
東京女子経済専門学校 昭和20年度卒業式が昭和53年に 6月30日
雑誌 東京人 7月号 6月12日
思い出のメニュー 新渡戸博士と共に 5月16日
講演会:新渡戸稲造と「武士道」 1月15日
2008年(平成20年)
新渡戸先生の揮毫「学如登山」と「Boys, be ambitious!」写真追加 10月30日
新渡戸稲造命日前夜祭「新渡戸稲造と渋沢栄一」 10月14日
講座「新渡戸塾-国際的な視野から社会に貢献できるリーダーを育てる」 8月 8日
講演「がん哲学と新渡戸稲造~日本肝臓論~」 8月8日
企画展「聞書き 安野の新渡戸物語」 7月10日
新渡戸先生の揮毫「学如登山」と「Boys, be ambitious!」 7月 8日
軽井沢高原文庫・有島武郎・特別展のお知らせ 6月30日
十和田市立新渡戸記念館・特別展のお知らせ 6月10日
新渡戸の洋食を食べる会=ユニオン・イズ・パワーの集い 5月16日
徳富蘇峰記念館に新渡戸稲造書簡が3件あります 5月10日
武士道の志に生きる山形市議-2 4月19日
2007年(平成19年)
講演会:癌哲学と新渡戸稲造 11月10日
「もう一人の太平洋の橋 新渡戸稲造の妻 メリーの生涯」 7月 1日~11月25日
花巻新渡戸記念館(岩手県花巻市)で平成19年度企画展として開催
「新渡戸・南原賞」授賞式 6月4日
新渡戸稲造の足跡をたどる台湾視察旅行 5月27日~31日
武士道の志に生きる山形市議 5月26日
新渡戸の洋食を食べる会=ユニオン・イズ・パワーの集い 5月16日
新渡戸が食した夕食「思い出のメニュー 新渡戸博士と共に」
『幼き日の思い出』の出版を祝し加藤武子さんを励ます会 2月 3日
『幼き日の思い出』の出版(新聞記事)
2006年(平成18年)
新渡戸稲造博士命日前夜祭・懸賞論文授賞式

YMCA全人教育研究会(仮称)第5回研究会--一私学の全人教育の理想と取り組み
異種各討議 90分3本勝負 会計学者 vs. 武士道
もりおかワイズメンズクラブ 設立総会講演
洋食の会 新渡戸稲造も食したメニュー
「日本初の女性弁護士 中田正子」展
2005年(平成17年)
新渡戸稲造博士命日前夜祭 記念講演会
北東北・日本アメリカ協会 講演会
2004年(平成16年)
札幌時計台/新渡戸稲造展
2001年(平成13年)
「日本人の心」継承へ大学連携
1999年(平成11年)
新渡戸書簡(岩手日報)
(新聞記事)

平成25年度の秋山財団賞、新渡戸・南原賞、研究助成、ネットワーク形成事業助成 - 秋山記念生命科学振興財団

平成25年度の秋山財団賞、新渡戸・南原賞、研究助成、ネットワーク形成事業助成 - 秋山記念生命科学振興財団

平成25年度の秋山財団賞、新渡戸・南原賞、研究助成、ネットワーク形成事業助成 - 秋山記念生命科学振興財団




新渡戸稲造と南原繁が取り組んだ国際平和活動と若い世代に対する教育実践の精神に学び、それを受け継ぎ、次世代の育成に貢献された方を顕彰します。特に平和活動と教育実践に取り組む次世代に対する支援を充実させていきます。


受賞者

角谷 晋次(カドヤ シンジ)氏(75歳)


所属役職

学校法人 盛岡キリスト教学園 理事長、盛岡仙北町教会 牧師



受賞理由 

角谷晋次氏は、大学時代に内村鑑三の著作に学び、岩手県山形村(現久慈市)で伝道を始め、同地で1970年「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の三愛精神に基づく岩手三愛山村塾を開講し、毎年4泊5日で同塾を開催し、主宰している。開設から43年が経過した本年夏は、新渡戸基金と共催で、「世界の平和と新渡戸稲造の生涯」をテーマに開催する。

また、同氏は、新渡戸基金評議員、新渡戸基金維持会監事などを務めながら、新渡戸基金のフレンズ・セミナーで講師を務めるなど、新渡戸稲造の精神を広く伝えている。

著書、論文に「新渡戸稲造における修養」、「新渡戸稲造とクエーカリズム」「ペンシルヴァニア州におけるフレンド派」、「新渡戸稲造におけるキリスト教精神」など、多数を執筆した。

2016/10/25

かたつむり・つれづ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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隣人エクハルト・ハーンさん - かたつむり・つれづれ



隣人エクハルト・ハーンさん - かたつむり・つれづれ




隣人エクハルト・ハーンさん
2014-05-31 14:46:36 |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暮らし


(一)遠い国の隣人

隣人といったら"近所の人"という意味だけど、エクハルト・ハーン

さんはドイツのベルリンで住んでいる。近所とは言えない。

70歳をこえて、一人暮らし。一人息子が近くに暮らしている。

ドイツというのは、ずいぶん離れた近所だ。





循環共生社会システム研究所(KIESS)の内藤正明氏の

友人であり、学問的なつながりがあった。

ハーンさんとは7年前ぐらいから、内藤さんの縁で日本に

やってきたとき、出会いができた。



4年ほど前から、来日すると、先ず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鈴鹿に

落ち着いて、それから全国各地に講演に出かける流れが

できてきた。



ハーンさんと気楽に呼んでいる。でも、どう呼ぶのかいいのか

迷うときもある。

講演の案内には、ハーン博士とかドルトムント大学名誉教授と

肩書きがつく。

ハーンさんは、20代から都市生態学の研究をし、環境調和型の

都市の再生のプロジェクトなどにも関わってきた。

国際的な研究機会にも参加してきている。

今はドルトムント大学で、ドイツの内外を問わず、環境調和型

の都市計画や再生の実務に当たっている人たち向けに

インターネットによる講座も受け持っている。

若き人材育成にも楽しそうに取り組んでいる。そんなに感じる。



ハーンさんは日本語は話さない。

ドイツ語と英語。英語は簡潔でシンプルで発音は聞きやすいが

それでも英語が堪能でないぼくらは、ちょっと込み入った会話を

するのは、難しい。

アズワンに暮らしながら、KIESSの活動をしている片山弘子さんが

通訳をしてくれている。



通訳があるから、通じ合っているかといえば、ちょっと

もどかしいところもある。コトバでなく、通じ合っていると

感じるときもある。



ハーンさんにとって、あたらしい発見があると、満面に笑みをうかべて

「やあー、それはおもしろい!」と子どものように感動する。

世間話のような場面でも、相手の話には、じっと耳を傾け、話が終わる

まで聞き取ろうとする。ハーンさんの気さくな人柄が現われている。




     (二)”ハートセンタ”ーとヨット転覆

今年は5月14日朝、セントレアに着いた。

北川道雄さんと片山弘子さんの二人がフェリーで来るハーンさんを

迎えに津なぎさ港に行った。



その夜、コミュニテイハウス江口宅で食事をしながら、一年ぶりの

旧交を温めた。



「何が驚いたって、弘子さんが北川さんと結婚したというのにびっくり

するやら嬉しいやら」とハーンさん。

ハーンさんの話を聞いていると、熟年の「結婚」ということもあるが、

弘子さんの変わりぶりに、何かを感じているようだった。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にある、”ハートセンター”、これが大きかった

んだね。コミュニテイで”こころ”を大事にする仕組みがあるという

のが分かった。素晴らしい」

鈴鹿に向かう車中で、弘子さんが”ハートセンター”(アズワンでは

コミュニテイCOCOROセンターと呼んでいる)で話を聞いてもらい

ながら、結婚にまでいたった経過を聞いているらしかった。

ハーンさんは、来日して各地を回るときは弘子さんが通訳と

して同行することが多かった。

ハーンさんとして、弘子さんの内面に迷いのようなものがある

のを感じていたんだろうか。

すっかり晴れ晴れとした弘子さんを目の前にして、弘子さん

個人のこの一年の変わり映えとともに、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と

いうものどんなものかに関心が向いたようだった。




「一年で変わったといえば、ぼくの場合、息子と話ができる

ようになったんだ」とその顛末を語ってくれた。嬉しそうだった。

ハーンさんは、若いときからヨットに乗ってきた。ヨットに息子を

誘ったら、「行く」というのでバルト海に出たのはいいが、嵐に

遭い、島の近くでヨットが転覆。

たまたま島から見ていた人がいて、危ういところを救助された。

「冷たい海で息子と生死のあいだを彷徨った」

ハーンさんと息子さんのあいだに、それまでどんなドラマが

あったか、分からない。それぞれの内面世界で氷解するもの

があったのか・・・

こんなしっとりと胸の内を明かしてくれたハーンさんは初めて

だった。





    (三)来年は息子と訪ねたい

鈴鹿で一泊した翌日、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の見学をした。

ハーンさんを迎えて、アズワン見学は恒例の行事になっている。

今回の見学では、”ハートセンター”というような仕組みを

暮らしの中に根付かしているコミュニテイがどんな背景のもとに

営まれているか、そこを知りたいと焦点がはっきりしているよう

だった。

小野雅司さんがサイエンズ研究所のリーフレットを見せながら、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イの社会的なベースの説明をした。






○サイエンズ研究所・・・本来の人間性の探究・社会構成の探究。

   やってみて、どうか。本来の目的から外れていないか観察・

   検討・研究・検証。

○サイエンズスクール・・・一人ひとりが自分の内面を観察して、

   自分の中にある本来の人間性に気づき、人生の目的を

   知り、そういう自分として日々の暮らしやコミュニテイを

   営んでいったら、どんな社会が現われてくるか。

   人と人の間柄がやさしく、シンプルになっていかないか。

 ○コミュニテイ・・・一人ひとりが幸福に成り合っていき易い仕組み・

    運営を研究所の研究成果をそれぞれの自由意志で汲み取り

    ながら、日々の暮らし、産業活動、文化活動など営んでいく。

    最近では、コミュニテイオフィス・ファミリー・贈り合いの

    コミュニテイストアが一人ひとりの間で息づいて、きつつある。








ハーンさんはときどき質問しながら、じっと聞き取ろうとしていた。

「すばらしい!」と感嘆の声。

「来年は息子といっしょにアズワンを訪ねたい」とハーンさん。

アズワンの仕組みについて、これまで説明してこなかったわけ

ではない。

今回はハーンさんの心の奥のほうに響いたように見えた。



    (四)セイリングシップモデル

ハーンさんと出会ったはじめから、これからの人類の進むべき

方向について、「タンカー」と「ヨット」の画像を示して、どっちに

向かっていくのでしょう、と問いかけをしていた。



5月24日にあったHUB Kyoto & KESS主催の「Community

Makes SusutenableScietyーー鈴鹿で、ドイツで、そして私たち」

フォーラムでも、ハーンさんはこの観点から切り出していた。

ハーンさんは「セイリングシップモデル」と表現して、未来の

都市の姿が今に現われている先進的な事例を丁寧に紹介して

くれた。

「セイリングシップモデル」の要点は

  ・人間性 

  ・人間と自然との関係 

  ・人と人との関係

だという。

都市生態学とか都市空間の再生とか、ハーンさんが長年

取り組んできた研究は、机上の理論にとどまらず、実際に

ドイツ各地で起きてきたまちづくりプロジェクトに、行政・

市民とともに、話し合い、理解しあって、その実現に努力して

きている。



そのときのハーンさんの心している核心のようなものが

そのコトバのなかにあるのではないか。



   (五)集合住宅暮らしの行方

「ドイツでは市民の手で、未来にむかっての都市空間の外観は

見通しがよくなってきています。ただ、心の面を取り上げている

コミュニテイの活動は見当たりません。アズワンさんがこれからの

モデルに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講演の最後に、そんなことを付け加えることがあった。



帰国前日、コミュニテイハウス江口宅で送り出し晩ごはんを

食べながら、日本滞在のよもやま話に花が咲いた。



「夕方の温泉は最高だった!」と第一声。

「ハーンさん、温泉好きなの。2時間、平気で入っている」

と弘子さん。






「温泉に行く前に、オフィスとファミリーの話をじっくり聞けた。

ファミリーが一つの経済でいとなまれる仕組み。すばらしい。

先進的だし、人間性に適っている。」とハーンさん。

その話合いに参加していないので、内容は分からないが、

ハーンさんの中では、これまで研究してきたことの、その先が

さらにはっきり見えてきている、そんな喜びがあるようだった。

これは、ぼくの感想。




「ドイツで集合住宅のプロジェクトにかかわってきている」

とハーンさん。

「日本では、江戸期にあった長屋みたいなもの?」

「200人が住める規模の住宅というイメージ」

「マンションみたいな?」

「その建設をする前から、それを出資して、作ろうとする住民が

先ずいる。その人たちが、どんな住宅にするか、それぞれが

描いていることを出し合いながら、それぞれの願いが実現

できるように設計・建設していく」

「そこの人たちで、人間関係でトラブルはないのだろうか?」

「まだ、出来てから7年ぐらいで、一応自分たちで作ってきた

というのがあるので、問題はないようだ。でも、この先は、

分からない。観察してるんだあ」とハーンさんが、ニッコリ。

ぼくらも、聞いて和やかな気持ちに・・・。






日本にもコレクテイブハウスという試みがある。

先ずそういう仕組みや施設があり、そこを希望する

人たちが入居して、個人や家族の自由をベースに

コミュニテイの暮らしを営めるという。

人と人が規則や取り決め、当番制などが無くて、円滑に

社会生活が営めるか。とても面白い社会実験だろう。





実をいうとハーンさんの都市生態学や空間計画の研究と

アズワンの「やさしい社会の試み」が何処で接点ができる

のだろう、とこの数年、思い続けてきた。

今回、なにか手がかりが出来たんではないか。

いま、ブラジルにいるスイス・ドイツ生まれの人たちが

ポルトガル語に訳してある「やさしい社会」の本を

ドイツ語に訳して、ハーンさんに贈る計画が進んでいる。

「やあ、楽しみだ」ハーンさんの弁。

エコロジーと歴史にもとづく地域デザイン




エコロジーと歴史にもとづく地域デザイン



プロローグ

 21世紀は「環境の時代」といわれる。だが例えば、実際の東京を見ると、大規模開発のプロジェクトが続々と実現し、高層ビルが建ち並ぶ風景が出現している。一方、地方の多くの町では、田園を潰し市街地がますます外へ虫食い的に広がる一方、本来、歴史の厚みがあり魅力的だった都心部が寂れ、元気がない。今、日本の都市づくりはどこを目指すべきなのか。
 
 それを根本から問うべく、本書が企画された。その基をなすのは、法政大学主催の国際シンポジウム「エコロジーと歴史に基づく地域デザインへの挑戦」(2003年6月7、8日の2日間にわたって市ヶ谷キャンパスで行われた)である。参加した講師、コメンテーター全員に、シンポジウムでの討論の成果を踏まえ、今回の出版を目的として新たに原稿を執筆していただいて、この本が生まれた。

 工業化を推進した20世紀が科学技術力と経済力にものをいわせ、エネルギーを大量消費し、海辺や山河の自然を破壊し、効率と機能性を追求する非人間的な都市空間を生み出してきたのに対し、「環境の時代」における地域づくりは、〈エコロジー〉と〈歴史〉の視点に立って、その場所の環境・文化資源を生かし、真にサステイナブルな方向を目指す必要がある。その理念と手法を世界的な広がりの中で比較・展望するのが本書の目的である。



 過去を振り返るなら、世界のどの地域にも、生態系を生かし、歴史を蓄積した魅力的な都市の風景がつくられてきた。川沿いや海岸の水辺に、また丘陵の頂や斜面に、あるいはその裾の里に、地形や自然環境を生かし、地元で調達できる建築材料を用いて、それぞれに特徴のある生活空間と都市の風景を形成してきた。京都や江戸東京をはじめとする日本の都市では、とりわけ、豊富な地下水が都市づくりに生かされ、湧水が産業・経済活動ばかりか、信仰や文化を育むのにも重要な役割を果たしてきた。都市はエコロジーの体系を十分に踏まえて発展し、独自の歴史を重ねてきた。

 しかし、科学技術力と経済力にものいわせた近代の巨大開発は、都市における環境のバランスと文化的アイデンティティの喪失をもたらした。都市は歴史と文化を象徴する中心を失って空洞化し、またかつて存在した都市と田園の明確な境界線を喪失して、捉え所のない状況を呈してきた。都市の内部を流れていた河川、運河を埋め水辺を喪失したのは、何も日本だけではない。例えば、イタリアを代表するミラノ、ボローニャ、パドヴァなど、魅力ある都市でも、実は同じ経験をした。自動車等、陸の交通への対応もあったが、当時の衛生思想によるところが大きい。ヨーロッパでは、こうした近代的な開発、改造のもたらす問題について1960年代に自覚され、都市の近代の歩みを批判的に捉え直す動きへとつながった。

 今、世界各地で、近代の都市開発への反省に立ち、歴史と生態系を大切にしながら持続可能で、かつ個性豊かな地域づくりを実現することが大きな課題となっている。近年、よく耳にする「都市再生」という言葉も、本来はそう位置づけられるべきであろう。経済再活性化の切り札として、もっぱらこの言葉が使われるわが国の状況からは早く脱したい。

 また、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が進むほど、実は逆に、それぞれの地域の個性、文化的なアイデンティティがますます強く求め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る。



 本書のねらいは、まず、〈エコロジー〉と〈歴史〉の結合にある。この二つのキーワードを結ぶ発想は、実はこれまで、日本のみならず海外にもあまりなかった。今の学問や技術は、専門ごとに分断され、力をもてないでいるのだ。

 特に、日本では、〈エコロジー〉と〈歴史〉を一緒に考えることは、従来あまりなかった試みといえよう。関西の人々にとっては、都市の歴史が長いだけに、生活環境を考えると自ずとそこに歴史的なセンスが入ってくるという感覚もあるようだが、特に、東京を中
心とする関東では、歴史的に物事を考えようという発想は乏しい。

 ランドスケープの歴史は従来からあるし、環境史という新たなジャンルへの挑戦も生まれつつあるが、まだ明確な姿は見えていない。建築史の領域からの都市史に関する研究はだいぶ活発になっているが、エコロジーの視点となると、まだまだ弱いと言わざるを得ない。逆に、エコロジーを専門とする方々には、地域の歴史、都市の歴史にもっと関心をもっていただければと日頃から思ってきた。

 実際のまちづくりや地域づくりにおいては、学問の世界ほどの垣根はないかもしれないが、それでも、歴史的な町並みの保存再生の分野とエコロジーの視点に立った地域再生の活動との間の交流は、まだ不十分に見える。いずれのアプローチも、市民、住民にとって、自分の身の回りの価値を発見し、魅力ある地域づくりを目指す点では共通している。歴史的環境からのアプローチと、水・緑、動物や昆虫などの自然生態系の環境からのアプローチとを重ね合わせると、豊かな地域像をより多角的に描けるに違いない。

 自分の身近なところで考えてみたい。私は法政大学の建築学科の中に、「東京のまち研究会」というグループを1977年につくり、以来、東京のまちを主に建築と都市の歴史の観点からフィールド調査してきた。古い建物ばかりか、敷地、街区の歴史性、道や坂のでき方、宗教空間の立地などを調べるのがベースだが、地形とか緑の分布にも大いに関心をもち、やがて産業や文化を育んだ都心の川や掘割の存在の重要性をも視野に入れて研究してきた。しかし、自然河川、地下水、湧水などの視点にまで深い関心を向け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一方、本書の筆者の一人であり、法政大学で「建築生態学」を講ずる建築家、神谷博氏は、ライフワークとして、東京のエコロジーの調査研究に取り組み、地下水、湧水や川の生態系に関する研究で大きな成果を挙げてきた。その神谷氏と、やはり法政大学建築学科で教鞭をとり、地元の小金井を中心に武蔵野の地域研究を行う永瀬克己氏らと一緒に、2年前に、進士五十八氏、石川幹子氏、小倉紀雄氏、倉田直道氏など、他大学の方々にも呼びかけて「東京再生研究会」を設立し、今〈エコロジー〉と〈歴史〉を重ねながら、東京研究を精力的に進めている。実際にやってみると、立場は違うとはいえ、お互いの発想、アプローチには共通性が大きいことを知って、驚かされたのである。

 我々をこのような方向に導いてくれたのは実は、法政大学建築学科で長年、教鞭をとられた河原一郎氏であった。若い頃、イタリア、スウェーデンで学び、実務の経験を積んだ建築家、河原氏は1970年代から一貫して、東京の特質を歴史と生態学から捉え、その成果を都市づくりに生かすべきことを、いくつものケーススタディを通じて示し、多くの提言をされてきた。大きな視野からの壮大なビジョンをもった河原氏の魅力溢れる研究成果が、著書『地球環境と東京─歴史的都市の生態学的再生をめざして』(筑摩書房、2001年)に集大成されたのを受けて、まさにこうした21世紀にとっての重要課題について、我々の世代が、さらに深く掘り下げ、発展的に取り組んでいこうと考えるようになった。〈エコロジー〉と〈歴史〉を結びつける発想に立つ本書は、このような経緯の中から生まれたと言える。



 もう一つの本書の特徴は、ヨーロッパ、アメリカ、アジア、そして日本の専門家が一堂に会し、〈西〉と〈東〉の知を融合させる試みにチャレンジする、という点にある。

 環境観や歴史観には、欧米とアジア・日本で大きな違いがあり、互いの経験から学び合うことができるのに、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時代といわれる今も、地域や国を越えた交流は案外乏しい。

 今、都市・環境の領域で日本が世界に向けて主導権をもつ意義は大きい。近年の欧米のエコロジーに基づく都市計画には、人間中心に自然を支配・征服し管理してきた西欧の考え方を反省し、自然と共に生きる存在として人間を見る日本・東洋の世界観から学ぼうとする発想が見られる。実際、4年前に日本国際賞を受賞し、来日したアメリカ人の都市計画家、イアン・L・マクハーグ氏は、まさにそうした日本やアジアの自然観、環境観から得た大きな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もとに、生態学的都市計画の分野を切り開き、先駆的な役割を果たした『デザイン・ウィズ・ネーチャー』(下河辺淳・川瀬篤美総括監訳、集文社、1994年、原著は1969年刊行)を著したのである。その後、惜しくも亡くなられた彼が残したこの著作は、今後の日本でこそもっと読まれてほしい本である。今回のシンポジウムでドイツよりお招きした、本書の著者の一人、エクハルト・ハーン氏も、かつて中国の都市、地域に入り込み、調査研究をした経験からエコロジカル・プランニングの発想を得たという。

 他方、都市や地域での歴史、環境、文化を尊重し、経済優先の開発を抑制するヨーロッパの成熟社会から、日本やアジアが学ぶことは多い。豊かな時代を迎えたはずの日本なのに、いまだ経済開発のために、歴史的に価値のある建築や都市の貴重な緑はどんどん失われているのが現状である。斜面緑地等での大規模なマンション開発で、湧水、地下水に大きなダメージが及ぶということが後を絶たない。開発のまさに途上にあるアジアの諸都市では、経済活動の競争力をつけながらも、持続的な発展をいかに実現するか、大きな問題を抱えている。それだけに、ヨーロッパにおける、社会的公正を欠く利益追求型の大規模開発を厳しく制御する一方で、時代を切り開く創造性に満ちた質の高い都市づくりや地域づくりを次々に展開する知恵と技術の豊かな蓄積は、とりわけ成熟社会を迎えた今の日本の我々には大いに参考になる。

 このような意図のもと、本書は、異なる文化背景をもつ世界の西と東の知恵や技術を交流、融合させる試みとして編まれているのである。

 その意味でも、ヨーロッパ、アメリカとアジアの専門家とともに、東京を比較の視点から論ずることに大きな価値があると考える。この点も本書の大きな特徴となっている。

 10年ほど前、デンマークのコペンハーゲンで開かれた、ヨーロッパの日本研究者の学会におけるアーバン・セッションで、「東京は21世紀の都市モデルか? アンチモデルか?」という刺激的な議論がなされたことがある。ヨーロッパの人々も、次の時代の都市イメージを切り開くのに、日本から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大いに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物
語っていた。

 東京は、ここでのテーマである〈エコロジー〉と〈歴史〉の視点から見ると、様々な特徴をもち、豊かな可能性を秘めていると言える。東京は、まさにヴェネツィアと同様、「水の都」であった。永井荷風も、東京徘徊の名エッセイ『日和下駄』の中で、水の風景を描写し、多様な川、水辺、湧水が東京の環境をいかに豊かにしているかを論じている。実際、本書を執筆いただいた外国人の方々も、シンポジウムでの東京滞在の間に、小舟による東京の水路巡りを堪能し、本来水と密接に結びついて形成されたこの都市独特の在り方に大きな関心をもったようだ。

 こうした資源を生かし、うまく育て、ハイテク都市、先端都市と組み合わせて環境を再生すれば、西欧モデルとは異なるユニークな魅力ある都市空間を実現できる可能性が確かにあるだろう。

 シンポジウムが行われた法政大学市ヶ谷キャンパスのすぐ近くに、歴史が現代にうまく生かされた代表例、神楽坂の町がある。外国人筆者の方々も、夕方、この界隈を徘徊し、石畳の路地に面した雰囲気のある店で食事を楽しんだ。

 最近の『週刊現代』の調査では、住んでみたい町として、関東では神楽坂が一番に挙がった。便利でいて、風情豊かな落ち着いた雰囲気に包まれた町の佇まいに引かれる人が多いという。もともと、料亭や待合の並ぶ花柳界の町で、石畳の迷宮が不思議な魅力を醸し出している。最近では、その路地的な雰囲気やスケール観を壊さずに、新しい趣向の洒落た店も増え、若者や女性にも開かれた界隈になっている。

 ここには、懐かしさや粋な遊び心だけでなく、もっと普遍性をもつ現代的な価値がある。地形も道も変化に富み、多彩な機能、活動が詰まった神楽坂は、仕事場としても最高の環境を提供してくれるのだ。ベンチャービジネスの小さめのオフィスも多いという。歴史がたっぷり感じられるいいスケールの変化に富んだ場所が、今の文化をつくりだすというのは何とも素敵な話だ。ようやく日本も成熟した社会になった、と言いたいところだが、実は問題もある。この地域にも、その人気が高まるほど、高層マンションによる環境破壊が増えるという難しい状況がある。



 本書では特に、水の都市、臨海部の環境、そして内陸の河川流域や湧水など、近代の都市開発でダメージを受け続けた「水の環境」の復権に向けた議論にこだわっている。東京の失われた水辺空間を再生するシナリオを描くためにも、まずはヴェネツィア、中国江南の水郷都市、バンコクという世界に名高い「水の都」との比較考察が行われる。世界を代表するこれらの都市から専門家が一堂に会し、真正面から比較研究に取り組むというのは、
これまでにない初めての試みである。

 ヴェネツィアについては、水との共生を実現し、水害から守り、独自の豊かなイメージをもつ「水の都」をつくりあげたその形成の諸相について、ヨーロッパを代表する都市史研究者のD・カラビ氏が論じている。その歴史の重みを背負ったヴェネツィアが、新たな時代に向けて、都心居住のための快適な集合住宅を供給し、交通インフラの導入を探るなど、真の「都市再生」に努力する姿を、都市計画が専門で、ウォーターフロント問題の第一人者R・ブルットメッソ氏が描き出している。

 続いて、人々の暮らしと密接に結びつき、生き生きと使われ続けるアジアの水辺空間の魅力と環境上の諸問題が論じられる。中国江南には、水を制御しつつ、水と実に近しい町の形態とライフスタイルが長い歴史の中で確立した。中国における歴史都市再生の分野を精力的に切り開いてきた阮儀三氏は、こうした水の町を対象に、モータリゼーションの問題、近代に向けての住宅改善などを視野に入れつつ、保存再生をいかに実現するかが問われていることを論ずる。一方のバンコクは、歴史的にもより水との直接的な共生を実現してきた都市であり、陸の価値を重視する近代化の中で、いかにその「水の都市」としての魅力、アイデンティティを大切にした都市づくりに取り組むか、大きな岐路に立たされている。そう論ずるのは、タイきっての都市研究および地域計画の理論家、S・タダニティ氏である。

 東京の水辺空間の破壊と再生については陣内が論じているが、外国人筆者の論考はどれも、本来「水の都市」だったこの東京の再生を考えるのに、大きな示唆を与えてくれるものばかりである。

 同時に比較の視点から、やや歴史は新しいが、すでに水辺都市の形成、そして衰退から再生へ豊富な経験をもつアメリカの事例が取り上げられ、時代を切り開くプロジェクトが紹介されている。東海岸のウォーターフロント再生の分野に精通する神田駿氏が論ずる、ボストンの古い町を分断していた高速道路を地下に埋めて人間の手に取り戻す「Big Dig」と呼ばれる都市再生のプロジェクトに関する話は、東京でも日本橋の上を走る高速道路を撤去する可能性が十分あることを示し、我々を勇気づけてくれる。一方、西海岸の湾を望むサンフランシスコの環境に配慮した質の高いウォーターフロント開発については、その事情に詳しい都市計画家、倉田直道氏が報告する。

 東京は、「水の都市」であると同時に、山の手から武蔵野の郊外にかけて、本来は、湧水に恵まれ、多くの中小河川や上水がめぐる緑に包まれたエコ・シティであった。開発からそれを守り、また再生するための道筋が神谷博氏によって示される。それと発想を一にするのが、ベルリンを中心にEU全体でエコロジカルな都市再生の分野で活躍するE・ハーン氏の論考であり、環境に負荷を与えず、水と緑を取り込んで魅力溢れる地域の住環境を創出するドイツのエコロジカル・プランニングの実践は示唆に富む。一方、イタリアの歴史都市の保存・再生の第一人者、P・ファリーニ氏は、旧市街の外側に広がる歴史的田園地域におけるアクティブな保存の理念と計画手法を取り上げ、歴史とエコロジーを尊重する今日の最も進んだ地域づくりの考え方を示している。

 また、それぞれの論考の後には、様々な専門分野の方々から、コメントを寄せてもらっている。分量は短いが、示唆に富む指摘、考え方が続々と登場する。

 〈エコロジー〉と〈歴史〉のキーワードを中心に、色々な分野の専門家が会し、〈学際的な研究交流〉の中で本書が成立しているのが、おわかりいただけると思う。同時に、世界各地から第一線で活躍する方々が集まり、異なる地域相互の〈比較研究〉にチャレンジしているところに本書の特徴があるのだ。

 本書の外国人筆者たちが、シンポジウムを終えるにあたり、豊かな資源や素材に恵まれた東京の将来に大いに期待したい、と口々に発言していたのが心に残っている。シンポジウムが実施された2003年は折しも、江戸開府400年にあたる。まさに江戸の遺産を生かし、新たな東京のまちづくりへと発想を大きく転換させるのにふさわしい時代に我々はいるのである。

2004年5月
陣内秀信















20151027環境先進国ドイツに学ぶ持続可能な社会のヒント どこでもGAIA〜地球に暮らす



20151027環境先進国ドイツに学ぶ持続可能な社会のヒント どこでもGAIA〜地球に暮らす

20151027環境先進国ドイツに学ぶ持続可能な社会のヒント
20151027環境先進国ドイツに学ぶ持続可能な社会のヒント
ベルリンのエクハルト・ハーン博士に、ドイツの再生可能エネルギーの取り組みや、
ベルリンで行われている「新しい都市・街、ご近所づくり」の事例などをお聞きしました。
世界のあちこちで、町の住民がつながって町を緑豊かにしている事例が増えてきているんなだな、と実感しました。
会場には、学芸大の学生や他の大学生も多く、熱心に聞い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
ハーン博士をつないだ、アズワン鈴鹿の弘子さんと小野さんもいらっしゃって、久しぶりに会えて嬉しかったです。
TT小金井のみなさん、つながりの杜Enのみなさんが用意してくださったご馳走が、嬉しかったです。
ご飯をみんなで食べることって、大好きです。

*****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と毎年交流している独ドルトムント大学都市生態学教授の
エクハルト・ハーン博士をお招きして
、学芸大 環境教育研究センター主催で、
講演会を開催します。

〇2015年度 環境教育セミナー
――環境先進国ドイツに学ぶ持続可能な社会のヒント
主催:東京学芸大学 環境教育研究センター
 環境先進国ドイツでは、昔から住民自らが「まちづくり」を担ってきました。
東日本大震災を契機として、日本でもエネルギーや食糧等を地域で生み出し、
ネットワーク化を進めて行こうという動きが活発化しています。
 今回は、環境先進国ドイツのエクハルト・ハーン博士をお招きし、ドイツで
行われている持続可能なまちづくりの先進事例を、日本からは三重県鈴鹿市と
東京都小金井市で実践されているコミュニティづくりの実践事例をご紹介いた
だきます。
 本セミナーを通して、大きな転機を迎えた私たちの暮らしを、足元から見つ
め直し、自分たちで持続可能な社会を産み出していくためのヒントを探ってい
きたいと思います。
・日時  2015年10月27日(火)15:00~17:30
・会場  東京学芸大学 環境教育研究センター 多目的室
・対象  一般の方(参加申込不要) 参加費:無料 問合せ:042-329-7665
・講演1 ドルトムント大学 エクハルト・ハーン博士
・講演2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 小野雅司氏・片山弘子氏
・講演3 トランジションタウン小金井 梶間陽一氏

詳しくは  http://www.u-gakugei.ac.jp/news/2015/09/201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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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イツから来日されたハーン博士のお話を伺って : Visioning

イツから来日されたハーン博士のお話を伺って : Visioning
2012年 06月 21日


ドイツから来日されたハーン博士のお話を伺って

ドイツから来日されたエクハルト・ハーン博士から
ドイツやヨーロッパのエコタウン事情を伺う機会がありました。

写真の建物は、太陽に合わせて360℃動く建物だそうです。

「見た目はあんまり格好良くないかもしれないけど、最先端技術の組合せだけでなく、自然とダイレクトに繋がる、自然に対して人間の感覚を内面から引き出すようにも考えられていて、僕が好きな建物なんだ」と紹介してくださってました。

その考え方は、モーラの家設計時に私たちも留意した点だったので共感を覚えた次第です。

再生エネルギーへ移行し始めたドイツを中心に、各地でのエネルギーシフトの事例を紹介している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第4の革命』を見た後に、ドイツで出来たこと(原発廃止路線の政策)が、あれほどの事故があった日本でなぜ未だに出来ないんだ、と思っていました。

しかしドイツでも40年に渡る反原発運動があって、市民が闘いの末に勝ち取った政策だったということをおっしゃってました。世論が自然エネルギーに動いたのは大体3年ぐらい前で、それまでは大企業・商業主義が根強かったと。

何十年にもわたる市民運動での闘いあっての結果だったんですね。

そのことは伺って、日本はこれから、というか今まさに渦中なんだろうな、と思いました。私たちはホントに重要な時期にいるんだという自覚を改めて持ちました。

こういった本で、内容が日本バージョンになってヨーロッパで出版されることを目指したいです。

박범신 - 나무위키

박범신 - 나무위키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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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희롱 논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소설가1946년 8월 24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고는 한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1973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여름의 잔해'로 등단했다. 대표작으로는 '겨울환상', '소금', '겨울 강 하늬바람' ,'더러운 책상'[1]등이 있다. 1995년부터 명지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지냈으며, 2007년에는 한국방송공사 이사장까지 맡았다. 현재는 상명대학교 국어교육학과와 대학원 소설창작학과에서 석좌교수로 지내며 후학을 양성 중이다.

최근에 갈망 3부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을 발표하였는데, 세 작품 모두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했다. 네이버에 연재했던 촐라체의 경우는 누적 방문 100만을 돌파하였고, 은교는 영화화되어 여러 의미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고산자의 경우도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카카오페이지에 신작 장편소설 <유리> 를 연재하였으며 완결되었다.

16년 10월 20일, 방송작가, 여성팬 등을 성희롱, 성추행했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2. 성희롱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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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관련 글 국민일보 기사

2016년 10월 20일 트위터에 박범신 작가를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작가가 방송작가, 팬, 자신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편집자였으며, 작가의 수필을 편집했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은교(영화) 촬영 당시, 작가가 여성 팬과 방송작가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늙은 은교' '젊은 은교' 등의 표현으로 자신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밝혔다. 심지어 은교를 연기한 배우에게도 '은교는 남자를 알아야 한다.'며 성 경험 여부에 대해 묻다가 제지 당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지금은 편집 쪽에 몸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발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고은 팬들은 분노하는 중. 또한 은교 여주인공을 고사했던 박민지 쪽은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

논란이 불거진 후 작가는 트위터에 '스탕달이 그랬듯 살았고 썼고 사랑했다.' '나이 든 내 죄이다. 누군가 상처 받았으면 미안하다.'라는 내용의 사과를 올렸다. 사과문의 어투는 '해요~'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다. 이후 '나이 든 죄'라는 표현을 지운 글을 다시 올렸으나, 그럼에도 비판 여론이 지속되자 글을 내렸다. 현재 '나로 인해 기분이 불쾌했다면 내 불찰이다.' 라며 계속 사과의 태도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건의 진의가 왜곡됐다고 항변하고 있다. 손을 만진 적은 있으나 허벅지를 쓰다듬는 추행은 하지 않았다고. 또한 '은교'의 의미는 '갈망의 대상'일 뿐, 성적인 대상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후 편집자의 글에서 피해자로 언급된 방송작가가 SNS에 글을 남겼다. '성추행으로 느낄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이템을 위해 성추행을 참는 사람으로 몰려 모욕감을 느낀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원문 해당 페이지는 현재 삭제된 상태인데 이유는 알 수 없다. 현재는 해당 방송작가의 글에 대해서 최초 폭로자의 피드백이 나온 상태이다.

현재 작가의 주장과 전직 편집자의 주장 중 어느 쪽도 확실하지 못하다. 교차 증언이나 물증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은 삼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후 방송작가말고도 술자리에 있었던 여성팬도 박범신이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했고, 이를 전직 편집자가 반박하자 재반박했다. 이들은 자신들은 성추행으로 느끼지 않았는데 제3자인 전직 여성 출판인이 자신들이 성추행당한 것으로 단정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여성 출판인이 재차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음을 밝히자 여성 방송작가는 성추행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이 더 큰 피해를 당한다는(2차가해) 취지의 말을 하면서 이들을 비판했다. 다만 아직 이들말고 다른 여성 동석인들은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2016년 10월 23일 네이버-뉴스1 '성희롱 논란' 박범신 술자리 동석자들 '성추행은 없었다'

박범신 작가 페이스북 사과문 과 반응 | 취미정보게시판 | 루리웹 모바일

박범신 작가 페이스북 사과문 과 반응 | 취미정보게시판 | 루리웹 모바일

박범신 작가 페이스북 사과문 과 반응
이나ds | 추천 2 | 조회 4290 일시 2016.10.23125.188.***.***

원본출처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276736505710981&id=100001239314731&pnref=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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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로 인해~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어요.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고 있는 나날이에요.팩트의 진실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또 다른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래요. 내 가족~친구-지인~동료작가들~날 사랑해준 모든 독자들께도 사과드려요. 나는 얼마나 많은 결함을 지닌 인간인가, 그런 맘이에요.생애를 통해 나로인해~맘 다친 모든 분들께도 아울러 사과드려요.본의는 그것이 아니란 말조차 부끄러워 못 드려요. 부디, 나의 철모르는-뜨거운 생에 대한 갈망을 접으면서 드리는 진정한 맘으로 받아주세요.






















댓글 | 총 14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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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노벨문학상 못 받는 건 역시 수준미달이라서 못 받는 거였음
★샤우드★ | 220.89.***.*** | 16.10.23 15:08
1 35

BEST
음 메갈작가 쉴드 치던 짹짹이 그대로 옮겨놓은거 같네요 서브컬쳐랑 순문학이랑 작가와 팬관계가 놀랍도록 닮아 있네요
토쓰 | 112.150.***.*** | 16.10.23 15:17
1 29

BEST
정몽주니어 의문의 1승 할 댓글들이 많이 보이네
수미래 | 125.137.***.*** | 16.10.23 15:07
1 15

BEST
안 좋은 기억 지우시고 < ㅋㅋㅋㅋ 웃고 간다 진심
수미래 | 125.137.***.*** | 16.10.23 15:07
1 15

BEST
작가들이 트위터에다가 4과문쓰는거 아무래도 지가 잘했건 잘못했건 듣고싶은말만 트위터에서 해줘서 그런듯 아이고 ㅜㅜ 우리자까님 ㅜㅜ 이래주는데도 반론하나없는게 트위터니 이런 답정너만 보고싶다면 트위터가 최고지
망사표콘돔 | 211.36.***.*** | 16.10.2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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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니어 의문의 1승 할 댓글들이 많이 보이네
수미래 | 125.137.***.*** | 16.10.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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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

수미래
안 좋은 기억 지우시고 < ㅋㅋㅋㅋ 웃고 간다 진심
수미래 | 125.137.***.*** | 16.10.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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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

노벨문학상 못 받는 건 역시 수준미달이라서 못 받는 거였음
★샤우드★ | 220.89.***.*** | 16.10.2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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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5

★샤우드★
님 팩트폭력 자제욧...!
코사인 | 183.101.***.*** | 16.10.2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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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무슨 노래 부르나? '~'가 엄청 들어가네
조잘 | 211.36.***.*** | 16.10.2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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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평소에 병맛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자들이 오히려 이런 사태때 정상이라는거 ㅋㅋㅋ
Maria- | 1.221.***.*** | 16.10.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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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작가들이 트위터에다가 4과문쓰는거 아무래도 지가 잘했건 잘못했건 듣고싶은말만 트위터에서 해줘서 그런듯 아이고 ㅜㅜ 우리자까님 ㅜㅜ 이래주는데도 반론하나없는게 트위터니 이런 답정너만 보고싶다면 트위터가 최고지
망사표콘돔 | 211.36.***.*** | 16.10.2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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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

음 메갈작가 쉴드 치던 짹짹이 그대로 옮겨놓은거 같네요 서브컬쳐랑 순문학이랑 작가와 팬관계가 놀랍도록 닮아 있네요
토쓰 | 112.150.***.*** | 16.10.2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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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9

토쓰
사실 말이 순수문학이지, 마이너리티라는 점에서는 그냥 서브컬쳐잖아요.
포광의 메시아 | 222.101.***.*** | 16.10.2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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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의 진실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다 내가 한 짓이라고 인정한 적 없다. 나의 철모르는-뜨거운 생에 대한 갈망을: 철없고 발정나서 한 짓이니 넘어가달라.
맥모닝먹고옴 | 61.74.***.*** | 16.10.2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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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6

한국인 수준에 딱 맞는 문학인^^
새드스틱디자이어 | 124.254.***.*** | 16.10.2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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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존나 답답하네 이게 한국인의 정인가? 잘못해도 부둥부둥하는게
튜르리 | 220.85.***.*** | 16.10.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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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저딴 글을 사과문이라고 싸갈기는게 이 나라 문인이라니, 내가 이제 앞으로 한국 문학을 보나 봐라.
만렙대위아무로 | 121.124.***.*** | 16.10.2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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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저새끼들은 헬조선 운운할 자격 없음. 남의.인생에.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길 악마짓을 비판하기는 커녕 옹호하는데.지옥에 살 사람들이 아니면 무엇이랴
Co2QQQ | 110.47.***.*** | 16.10.23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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