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7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조성환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기자명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입력 2021.11.26

공공학/ 공공철학

우리가 지구상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 에드가 모랭, 『지구는 우리의 조국』 -

위험의 지구화
1990년을 전후로 서양 학계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제목이나 본문에 ‘지구(Earth)’라는 말이 들어간 학술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1988)이나 제임스 콜론의 『우리 시대를 위한 지구이야기』(1990), 에드가 모랭의 『지구는 우리의 조국』(1993)이나 데이비드 오어의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1994) 등이 그것이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서양 인문학자들의 관심이 ‘국가’에서 ‘지구’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편의상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90년 전후에 ‘지구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당시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 됐지만, 그만큼 위험도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는 국경을 넘어 온 나라와 전 지역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의 지구화’라고 했다.

생태적인 위기의식은 공포와 히스테리로 분출되면서 (…)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공동운명은 인간, 동물, 식물 사이의 한계마저도 지양하는 세계시민적인(코스모폴리탄) 일상 의식을 각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이 사회를 구축하고 (…) 전 〈지구적 위험〉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셈이다.
- 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거름, 2000, 81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

여기에서 울리히 벡은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험’이 역설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지역사회나 국가사회를 넘어선 ‘지구사회’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사회나 지구공동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을 생각하면 낯선 얘기도 아니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구소외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이듬해에 “인간들이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지구소외(Earth alienation)’이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돼 있는 우리는 마치 외부, 즉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지상에서 (…) 행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 근대 자연과학 발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 근대 과학의 기호가 됐다. (…) 근대수학은 인간을 지구에 묶인 경험의 한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식능력을 유한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20, 373~376쪽 -

여기에서 아렌트는 ‘근대성’의 본질을 ‘지구학’의 관점에서 포착해 내고 있다. 즉 근대라는 시기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지구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줬지만, 거꾸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의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에 의한 ‘천인불화天人不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구와의 조화를 지향하던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H. 로렌스의 우주상실
아렌트 이전에도 비슷한 통찰을 한 사상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D.H 로렌스(1885~1930)이다. 로렌스는 1931년에 간행된 『계시록(Apocalpse)』에서 “현대인들은 우주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마도 우리와 이교도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우주(cosmos)에 대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맺는 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점이 다 개인적이다. 경관과 하늘,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달콤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는 우리의 개인성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우주는 경관이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우주는 살아 있었다.〉 인간은 우주와 함께 ‘살았으며’ 우주를 자신보다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김명복 옮김, 『로렌스의 묵시록』, 나남출판, 1998, 51~52쪽 -

로렌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우주는 더 이상 경이로운 세계도 신비한 세계도 아니다. 전통 시대 사람들처럼 우주와 교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단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자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우주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롭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다. 그들은 우주(cosmos)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우주적 삶(cosmic life)〉이다.
- 『로렌스의 묵시록』, 59쪽 -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멋들어진 생명체였으며, 사람들은 그 생명체로부터 힘과 영광을 끌어내어, 그것에 경의와 영광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그 관계를 깨어지고 (…) 태양은 이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돼 버렸다. (…) 우주와의 교감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우주를 잃었다.
- 『로렌스의 묵시록』, 53~54쪽 -

여기에서 로렌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주상실’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아렌트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듯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을 말했듯이, 로렌스는 현대인들의 “우주와 함께 하지 않는 불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렌스는 우주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되찾는 것이고,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이다. 태양은 커다란 심장이고, 그 진동들은 우리의 핏줄을 관통한다. 달은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신경중추이고, 우리의 떨림은 거기에서 온다.
- 『로렌스의 묵시록』, 57쪽 -

내가 지구의 일부임을 나의 발은 안다. (…) 나의 개인주의는 실로 환상이다. 나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비유기적인 관계, 특히 돈과 관련된 관계들을 파괴하고, 그리고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류와 민족과 가족과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 『로렌스의 묵시록』, 235쪽 -

로렌스에 의하면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물체’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태양의 열을 받아 몸을 덥히고, 달의 빛을 따라 밤길을 거닌다. ‘혼자 산다’고 하는 ‘개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우주와 ‘함께’ 살고 있다. 이 ‘함께’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로렌스나 아렌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구소외와 천인분리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가가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가톨릭 신부인 베리는 로렌스나 아렌트가 그랬듯이, 근대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 원시 장엄의 현시로서 우주는 궁극적인 전거로 인식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긴밀한 제휴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존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 그 시기에 우주란 의미의 세계였고, 사회 질서, 경제적 생존, 질병 치유의 근본적인 틀이었다. (…) 그러나 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와 더불어 살고 있지 않다.
- 이영숙 옮김,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9~30쪽 -

문제는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가 우주를 주체들의 영적 교섭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의 집합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여기에서 베리는, 로렌스가 그랬듯이 “현대인들이 우주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주체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치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그랬듯이, 베리 역시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를 양육하고 인도하고 치유해준 행성 지구. 그러나 산업에 의한 착취가 이뤄졌던 지난 2세기 동안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남용했던 행성 지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9쪽 -

지구를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치유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지구를 대하자는 제안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존재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천지天地가 만물의 부모”라고 했듯이, 토마스 베리도 지구를 인간의 부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어우러지는 지구공동체
지구가 만물의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 부모에서 나온 친척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친교親交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울리히 벡이 ‘위험의 지구화’에 의한 ‘지구사회’ 개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베리는 정반대로 ‘친교의 지구화’를 통한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로서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돼 있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지구는 지금보다 인간과 더 친밀한 존재였다. 동물과 인간은 〈친척관계〉였다.
- 『위대한 과업』, 40쪽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것은 〈지구의 구성원들〉이며, 실상 그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지구공동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 존엄성, 자생성自生性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
- 『위대한 과업』, 17쪽-

지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동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구가 인간의 집이고 만물이 인간의 동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베리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의 지구문명론
울리히 벡이 ‘지구사회’를, 그리고 토마스 베리가 ‘지구공동체’를 강조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1921~)은 ‘지구문명(Planetary Civil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지구문명’ 개념은 ‘지구시대’(Planetary Era)나 ‘지구의식(Planetary Consciousness)’과 더불어 모랭의 지구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다.

먼저 ‘지구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탐험에 의해 “지구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류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활동”해 “지구의 일부분들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5세기 무렵에 해당하고, 이 시기의 주체는 서부유럽의 국가들이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 시기에 상응한다.

지구시대는 인류에게 ‘지구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싹트게 해준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 하나의 ‘지구인’이자 동일한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식’을 고조시킨 것은 ‘지구적 문제들(problems of a global nature)’의 출현이다. 지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지구에 대한 의식도 발전됐다(이상, 『지구는 우리의 조국』, 49~51쪽). 울리히 벡식으로 말하면 “지구적 위기”가 지구 의식을 고조시킨 것이다.

근대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
모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문명은 ‘야만화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야만화된 문명을 다시 문명화해야 하는데(civilizing of civilization), 그것이 바로 ‘지구문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구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랭은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이 ‘근대적’에서 ‘지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분되고 구획화되고 축소된 기계론적이고 분리된 지성은 〈세계의 복합성〉을 깨트려서 분리된 단편들로 만들고, 문제들을 분할하며, 이어져 있는 것을 나누고,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들이 다차원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들의 다차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위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같은 위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문제들이 점점 더 지구적인 것이 되면, 갈수록 그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생각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지구의 복합성〉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맹목적 지성은 분별도 없고 책임감도 없게 돼 버린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27쪽 -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구분 짓고 분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분리된 것들을 서로 잇고, 맥락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적 사고’다. 그러나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이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될 때,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고립될 때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그 부분들과 유리된 전체에 불과할 때 추상적인 것이 돼 버린다. 지구적 복합성의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보낸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31쪽 -

이에 의하면 모랭이 말하는 ‘지구적 사고’란 부분을 무시하고 전체만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도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화엄적 사고’이자 ‘상즉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엄밀히 ‘지구지역적 사고’(glocal thinking)라고 할 수 있다. 지구지역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넘나드는 사고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랭의 지구학은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시민운동의 형태로 부활했다. “오스트리아 평화와 갈등해결 연구센터(Austrian Study Centre for Peace and Conflict Resolution)”에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선언문」(A Manifesto for Planetary Solidarity)을 선포하고 <조국지구 캠페인>(A Campaign to Promote Planetary Awareness)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여 간다면 모랭의 바램대로 인류의 인식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기자명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입력 2021.12.22 17:15  수정 2021.12.22 17: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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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 / 공공철학
행성적 사유(planetary thinking)
행성적 사유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경험에서 시작됐다. 영문학자이자 생태이론가인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게 되면서 생태학적 사유가 시작됐다고 보았다(『The Ecological Thought』). 이렇게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있다는 생태학적 존재 곧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를 구성하고 있다는 행성 시대(planetary era)가 시작됐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지구를 “물리적·생물학적·인류학적 측면이 복합된 총체”로 정의하면서 ‘지구운명공동체(earthly community of destin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공동체도 지구과 운명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20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인식의 발견이었다. 인류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지구에 속해 있으며, 지구 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그는 “지구는 조국(homeland)”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는 지구운명공동체라는 점을 깨닫고 지구를 보존하고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지구는 우리의 조국』, 이재형 옮김, 문예출판사, 1996).

전 지구적 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출현한 것처럼 오늘날 같은 행성적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행성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행성적 사유에 근거해 지구와 인간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존을 모색하기 위한 학문적 전환이 통합생태학이다.

생태학의 흐름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처음 사용한 생태학은 희랍어 ‘오이코스(oikos)’에서 나온 ‘에코(eco)’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가 결합된 용어로 유기체와 자연환경과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생태학은 노르웨이 철학자 아느 네스(Arne Naess)의 심층생태론(deep ecology)과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라는 두 흐름으로 전개됐다. 심층생태학은 생태중심주의, 근본생태론, 영성생태론의 흐름을 포괄한다.

우선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전환을 주장한다. 다양성과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시선에서 인간을 생태계 하나의 종種으로 보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공생적 존재’로 파악한다. 반면 사회생태론은 북친의 영향 아래 성립된 생태주의를 지칭한다. 북친은 사회문제를 무시하고 인간-자연의 측면만으로 생태문제를 바라보는 심층생태론을 비판하면서 생태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의 변화 없이는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박준건, 「생태적 세계관, 생명의 철학」,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엮음, 『인문학과 생태학-생태학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모색』, 백의, 2001, 64~75쪽).
통합생태학으로의 전환
생태학이 생물학적 연구에서 차츰 다양한 학문적 영역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은 생태 위기가 인류 및 지구 행성 자체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면서부터이다. 최근에는 통합생태학(integral ecology)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통합생태학은 세 가지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첫째, 생태 위기에 대한 대응은 다차원적인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둘째, 오늘날 지구와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의 위기 즉 행성 공존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사유를 통해 여러 생태적 지혜를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사고이다. 즉 오늘날의 생태 위기는 단순히 자연환경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정치적 문제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펠릭스 카타리의 생태철학
프랑스 녹색당 창당 멤버였던 지구철학자(geophilosopher)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세 가지 생태학』(윤수종 옮김, 동문선, 2003)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요한 문제로 설정한 환경생태학,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는 사회생태학, 이 세계의 상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연결돼 있다는 마음생태학 등 세 가지 흐름을 도식으로 표현했다. 가타리가 세 가지로 생태학을 분류하고 있지만, 지구적 차원의 생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세 가지 생태학의 작용 영역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생태철학(Écosophie)’은 세 가지 생태학을 통합시키기 위한 개념이다. 가타리는 이렇게 세 가지 생태학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주체성 생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통합생태학은 마음생태학에서 시작한다.

카타리는 네트워크나 공동체 속에서 어떤 특이점이 발생했을 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분자혁명론’과 결부시켜, 마음생태학의 영역을 주체성 혹은 특이성 생산기제로 보고 있다. 마음생태학을 통해 주류 사회와 다른 특이성을 창출시켜, 마치 생태계에서 부분의 변화가 전체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특이성이 출현하게 되면 생태계에 의존하는 자본주의는 고장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신승철, 「환경과 민주주의: 생명위기 시대에서 생태 민주주의 역할- 가타리의 생태학적 구도와 주체성 논의를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5, 2011, 50쪽).

생태지혜의 통합
통합생태학의 두 번째 흐름은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행성적 차원의 생태 위기를 설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이 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과학, 인문학 등 다양한 접근방식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생태학의 통합적 접근을 주장했다.

보프는 생태학을 “관계의 학문이자 관계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기존 살아 있는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된 생물학적 생태학 개념의 전환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면서 생태학을 “살아 있는 존재이든 그렇지 않은 존재이든 모든 존재가 자신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갖는 관계, 상호작용, 대화”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런 생태학 개념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자연과의 관계(환경생태학)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사회생태학, 인간생태학)와 연결된다.

그는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관점에서 생태학을 학제적 학문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생태학적 기본자세를 전체론 또는 통합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주장에 기초해 소외된 사람들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위협받고 있는 행성적 위기사태에서 모든 실천과 지식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다원주의에서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하듯, 생태학을 ‘기술의 길(생태 기술학)’, ‘정치의 길(생태 정치학)’, ‘사회의 길(사회 생태학)’, ‘윤리의 길(생태 윤리학)’, ‘정신의 길(정신 생태학)’, ‘영성의 길(우주적 신비)’ 등 ‘길’로 설명한다.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생태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환경생태학은 사회적 악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즉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과 생태 위기를 연결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생태신학』, 김항섭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3).

여기서 그는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다. 해방신학자인 대니얼 크스티요는 이러한 흐름을 ‘생태해방신학’으로 개념화했다(『생태해방신학』, 안재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 보프의 통합생태학은 생태적 위기가 단순히 생태 위기 문제가 아니라 행성적 차원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담론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가난한 자’와 ‘지구’의 통합적 해방을 위해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다(『생태공명』,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 : 해방신학과 생태학의 통합
주지한 바와 같이, 해방신학과 생태학의 통합을 주장한 보프는 해방신학과 생태 담론 모두 가난의 상처와 지구에 가해지는 약탈이라는 두 상처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해방신학이 생태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생태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다. 즉 가난한 이들과 억압당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생태적 곤경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프는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사회정의)과 인간이 자연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생태정의) 등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를 통합시킨다. 또한 지구도 인류의 진보와 발전모델의 탐욕[지구학살]으로 울부짖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 모두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프의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 해방생태학은 ‘위기의 지구’와 ‘기후위기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통합적으로 해방키기 위한 시도이다(『생태공명』,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그래서 보프가 주장하는 통합적 해방은 인간과 인간, 지구와 인간, 인간과 만물의 평화 곧 ‘지구평화’(Earth Peace)로 개념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관련돼 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통합생태학’을 논의한다.

생태 위기가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 곧 그들의 예술과 시,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괴한 모든 것을 바로잡게 하는 생태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어떠한 학문 분야나 지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와 그 고유 언어도 포함됩니다.
- 『찬미받으소서』 63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5 -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의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종교생태학을 포함한 다양한 생태지혜를 수렴해 생태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한다. 이렇게 교황은 생태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산업문명이 어떻게 지구를 착취했고, 불평등을 초래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통합생태학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 위기의 근원을 ‘기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에서 찾았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다른 시각, 사고방식, 정책, 교육, 생활방식, 영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찬미받으소서』 63항).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학의 사유가 확인된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회칙은 “모든 것은 관련돼 있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환경위기와 사회위기가 별개의 위기가 아닌 환경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복합적 위기에 당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통합생태론의 성찰을 제안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환경은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생태문제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회기능, 경제, 행태, 유형, 현실 이해 방식에 대한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찬미받으소서』 139항).

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 『찬미받으소서』 49항 -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프와 동일하게 가난한 이들과 지구의 취약함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그에게 지구를 소외시키고 약탈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것(생태적 불평등)은 분리된 것이 아닌 긴밀하게 연결된 위기이다. 그래서 생태 위기와 사회 위기는 분리된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복합적 위기로 인식된다. 따라서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환경, 경제, 사회, 문화 나아가

한국의 생명학과 생명운동
한국의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는 생명운동이다. ‘환경’문제를 사회문제로 간주하고 생명의 살림이라는 이념적 차원에서 운동화한 것으로, 근대 산업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해 인간과 생태 곧 모든 생명의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한살림”은 대표적인 한국 생명운동단체이다. ‘한살림’은 ‘모든 생명을 함께 살린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산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룬다’, ‘모든 생명은 유기적 연관 속에서 더불어 무한하게 공생한다’는 등을 의미한다(이상국, 「한살림운동이란?」. 『도시와 빈곤』. 통권 19호. 1995). 『한살림선언』(1989)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이며,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고,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라는 문구는 보프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학적 사유를 연상시킨다.

김지하는 한국 생명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지하는 1980년대부터 생명학과 그에 기반한 생명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생명이 위태롭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심각히 오염돼 있다. 그것을 먹어야 하는 인간 생명도 위태롭다”라고 지구적 위기를 진단하고 죽임에서 살림의 문명으로의 전환을 주장했다(『생명과 평화의 길』. 문학과지성사, 2005). 김지하는 지구적 생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태학, 동학, 풍수학 등이 상호 보완적으로 통합해야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생명학’을 모색했다.

그는 ‘환경’은 모든 생명계를 인간의 병풍 혹은 무대장치로 보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관점이며, 무기물도 자기 조직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생명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생명계와 무생명계를 구분하는 생태학 역시 분명한 한계를 지고 있다고 비판한다(『생명학 1-생명사상이란 무엇인가』. 화남, 2008). 지구와 우주 전체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질서에 대한 근원적 인식에 기초한 생태학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전일적 사유를 통해 생태학이 변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주창한 ‘생명학’ 혹은 ‘우주생명학’은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종합학[통합생태학]이다.

지구평화운동으로서 생명평화 운동
생명운동은 평화사상과 만나면서 ‘생명평화운동’으로 확장된다. 생명운동이 ‘생명평화운동’이라는 보다 넓은 사회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평화’ 개념은 2000년 10월 21일 조계사에서 진행된 ‘새만금농성선포식’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여기서 ‘생명평화’는 생명과 평화의 합성어가 아닌 ‘생명의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임은경, 「“80년대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지금은 환경운동” - ‘생명평화’라는 용어와 ‘삼보일배’를 처음 만든 소설가 최성각」. 『월간말』 11월호, 2007). 그래서 ‘생명평화’에는 지구, 인간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본격적인 생명평화운동은 ‘지리산 살리기운동’이 모태가 된 2003년에 시작된 ‘생명평화결사운동’이다. 「생명평화서약문」을 통해 지구평화로서 생명평화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생명평화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모든 생명, 모든 존재 사이의 대립과 갈등, 억압과 차별을 씻어내고,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다정하게 어울려 사는 길이며, 저마다 생명의 기운을 가득 채워 스스로를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 『생명평화서약문』 -

‘생명평화’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모든 생명의 평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평화 즉 지구평화론이다. 개신교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한 김용복은 평화운동은 생명운동의 출발이고 생명운동은 평화운동의 포괄적 지평이라고 주장하면서,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평화운동은 인간 생명에만 한정돼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평화와 자연의 평화를 통합시킨 생명평화운동을 제창한다(「평화운동은 생명운동이다」, 『YMCA생명평화운동구상』, 한국YMCA전국연맹 생명평화센터, 2007).

우리가 꿈꾸는 생명평화의 삶은 모든 생명이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세상이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생명평화마중물 <창립 취지서> -

위의 인용문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생명평화 운동가인 문규현 신부가 2004년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과 평화운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한 ‘생명평화마중물’의 <창립취지서>의 내용이다. 모든 것이 생명이고, 이러한 생명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평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생명학과 생명평화운동은 생명을 행성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면서 지구공동체의 공생을 위한 지구평화학이며 지구평화운동이다.

최근 인류세는 지질학, 생물학, 기후학, 지구시스템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횡단하면서 성찰되고 있다. 인류세는 단순히 지질학적, 기후학적 문제가 아닌 인간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세는 지구의 고통,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성적 사유와 함께 지구와 지구생명체들과의 적절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재성찰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통합생태학의 의의가 있다.

※ 이글은 필자의 「통합생태학의 지구적 전개」(『한국종교』 50, 2021)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webmaster@thepub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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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기본소득에 관한 신학과 사회과학의 대화

알라딘: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 기본소득에 관한 신학과 사회과학의 대화 
정미현,강원돈,곽호철,김유준,김회권,야닉 판데르보흐트,전강수,정용한 (지은이)새물결플러스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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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본소득의 본래적 취지와 의미를 충분히 살피고,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가 이 주제에 이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신학적·실천적 측면 모두에서 차분하게 접근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쓰였다. 이를 위해 총 여덟 명의 국내외 전문 학자들이 기본소득에 관하여 수행한 신학과 사회과학의 학제간 연구 결과를 담았다. 2017년 WCRC에서 종교 개혁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개혁 신학자로 꼽힌 정미현을 필두로 성서학, 교회사학, 기독교윤리학 분야의 국내 신학자들과 경제학자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는 벨기에 학자 야닉 판데르보흐트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필진이 꽉 찬 내용을 보장한다.

먼저 성서학 분야에서는 구약신학자 김회권이 기본소득 제도의 정당성을 자연법과 구약성서 토지정의법이라는 두 가지 토대에서 찾는다. 또한 신약학자 정용한이 성서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기본소득의 반대 근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구절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교회사의 맥락에서 김유준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경제사상에서 기본소득 개념을 유추하고 그것을 희년 사상의 맥락에서 연구한다. 기독교윤리학자 곽호철은 성서 기저에 흐르는 핵심 가르침이 약자를 향한 근원적 관심이라는 것, 교회 전통에서도 부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도록 강조해왔다는 것을 지적하며 기본소득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목차
머리말

Ⅰ. 서론
1. 연구 목적과 범위
2. 연구 방법 및 선행 연구와의 비교

Ⅱ. 기본소득에 관한 성서적 근거와 함의
1. 기본소득의 두 토대: 자연법과 구약성서, 김회권
2. 기본소득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살후 3:10)을 위한 성찰, 정용한

Ⅲ. 기본소득에 관한 역사적·윤리적·여성신학적 고찰
1. 루터와 칼뱅의 경제사상으로 보는 기본소득: 희년 사상을 중심으로, 김유준
2. 기독교윤리의 시각에서 본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방향성: 타자윤리학을 중심으로, 곽호철
3. 기본소득 논의에 대한 여성신학적 성찰, 정미현

IV. 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사회윤리적 제안과 사회과학적 고찰
1. 생태학적 지향의 기본소득에 관한 사회윤리적 구상: 국민경제 수준의 소득 분배 계획에 바탕을 두고서, 강원돈
2. 좌우파 기본소득 모델과 변동형 기본소득제, 전강수
3. 아웃사이더 친화적인 정책?: 부분적 기본소득과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화 완화, 야닉 판데르보흐트

Ⅵ. 결론: 연구 성과 요약과 제언

부록: 설문조사와 해설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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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소득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 플랫폼 자본주의가 소수에게 천문학적 이윤을 몰아주고 다수는 빈곤과 사회적 박탈로 몰아가는 이 시대에,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유용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 기본소득이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고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와 공론화 조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기독교계에서 아직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본 연구는 이론적인 연구만이 아니라 설문조사를 통하여 기본소득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인식과 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자…한다
_I. 서론  접기
이처럼 국민 기본소득은 자연법과 성서 모두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선천적으로 노동 능력이 충분하지 못하게 태어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주는 장애 수당, 아예 일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대한민국 핵심 구성원인 아이와 청소년에게 실시하는 공교육 혜택, 실업자에게 주는 실업 수당 등 보편 복지 제도는 구약성서의 땅 신학이나 자연법적 땅 이해에서 나오는 토지 소출 향유 사상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_II-1. 기본소득의 두 토대(김회권)  접기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조장해 노동 의욕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으며,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낭비라는 시각이 있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이러한 근거들의 유효성을 검증하고 논의할 기회와 토론의 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게으른 자이며 게으른 자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과연 데살로니가후서 3:10의 진의일까? 이 본문을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
_II-2. 기본소득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성찰(정용한)  접기
루터는 토지를 매매하는 것이 돈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면서 토지를 담보로 지대 수익을 노리는 행위를 하는 당대의 거상들을 고리대금업자, 강도들, 도둑들이라고 표현했다. 지대는 그 특성상 본인이 땀 흘려 수고한 결과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이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에게만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 되고, 공동체 모두가 지대 수익을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토지 불로소득을 금지해야 한다는 레위기의 희년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_III-1. 루터와 칼뱅의 경제사상으로 보는 기본소득(김유준)  접기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청하는 타자윤리학은 기본소득에서 수혜자의 범위와 더불어 수혜자의 자유에 대해서도 깊은 논의를 요청한다. 기본소득 논의에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자유와 경제의 역설적 관계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유네스코 UN 인권 보고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해방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반면 경제적 자유의 조직은 일시적이더라도 기한을 정할 수 없는 도덕적 인간의 노예화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_III-2. 기독교윤리의 시각에서 본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방향성(곽호철)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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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 정책이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려면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데 대한 근거와 그 필요성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이 책에는 기본소득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사회과학적 필요성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는 선물을 주셨다. 토지, 공기, 햇빛, 바람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 우리 모두의 공유부다. 따라서 그로부터 나오는 소득은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소득의 성서적 근거다. 기본소득은 생태적 전환, 경제 민주주의, 불평등 축소를 위한 수단이 된다. 이것이 기본소득의 사회과학적 필요성이다. - 강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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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은 유교적 전통 사회의 근면 정신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기계화를 넘어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서 인간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플랫폼에 종속된 각 노동자의 현실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촌 소작농에서 도시 공장 노동자로 전직한 산업혁명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다. 반면 부의 양극화, 남북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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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 자유와 재산이 전제된 지평에서 불안하게 대변되는 나의 권리 추구는, 인간 존재론에 대한 깊고도 깊어야 할 우리의 담론을 고작 자본주의에서의 ‘소유권’이라는 상자에 가두어버렸다. 하나님,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포함된 자연 간의 관계성이 말라버린 가운데,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되어버린 노동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다. 이 메마른 토양에서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모두에게 실질적인 자유’라는 푯대는 얼마나 아득한가. 그 간극에서 기본소득은 생산과 소비의 다만 안전한 순환을 위한 도구로, 또 누군가에게는 부의 축적과 에고이즘적 자유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또 정치적 소수에 의해 점령되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며 길을 잃는 것만 같다. 이 슬픈 간극을 인간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과 공동체성을 전제한 생명 중심의 인간 담론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애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준 저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신학과 정치·경제학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진 저자들의 고민과 논의가 지혜의 샘물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흐르길 소망해본다. - 이승윤 (중앙대학교 부교수)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소득을 보장하자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그 이름만큼이나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이 기본소득이 왜 정당한지 그리고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이론과 이념을 넘어 현실의 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특히 그러하다.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의 향연에 참여하려는 귀한 시도다. 만물의 삶이 위협받는 이 시대에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기독교가, 마찬가지로 모두의 삶을 뒷받침하고자 하는 기본소득과 만났을 때 어떤 성찰과 전망이 나오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 안효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일은 성도와 교회의 신앙적 과제다. 자본의 이윤율 제고(提高)를 위한 비정규직 확대, 무인 공장의 증가 그리고 AI의 급속한 도입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생산 방식의 핵심은 인건비의 큰 감소다. 2008년 금융 자본주의의 파산을 극복하려는 인지 자본의 전략은 결국 잉여 인간의 대량 생산이다. 이는 소득 불평등과 노동 소외의 문제를 넘어 절대 빈곤과 노동 배제로 몰아가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인간 사냥이 아닐까? 이 책은 이런 위기 하에서 하나님이 사회 속에 위임하신 교회와 국가가 신앙과 정책으로 포옹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새 이정표다. - 양순철 (기독교기본소득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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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미현 (지은이)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독문학과와 동대학원 기독교학과(조직신학 석사)를 졸업하고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하나의 여성 신학 이야기』, 『체코 신학의 지형도』,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Liberation and Reconciliation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으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 『기본소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위한 제안』 등을 번역·출간하였다.
최근작 :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체코 신학의 지형도> … 총 17종 (모두보기)

강원돈 (지은이) 
한신대학교 신학부 은퇴교수/대우교수.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Bachelor of Theology) 및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Th. M.)하고 독일 루르대학교 개신교신학부에서 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생태학적 노동 개념을 규명하여 경제윤리의 근거를 새롭게 설정함: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친화성을 갖는 노동을 형성하는 데 고려할 규준들과 준칙들에 대한 해명”이다. 『물(物)의 신학-실천과 유물론에 굳게 선 신학의 모색』, 『살림의 경제』, 『인간과 노동』, 『지구화 시대의 사회윤리』, 『사... 더보기
최근작 :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목회>,<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2> … 총 15종 (모두보기)

곽호철 (지은이)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조교수
연세대학교 신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세인트폴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실낙원에서 복낙원으로의 귀환: 인공지능과 노동, 그리고 기본소득」, 『한국 교회 건축과 공공성』, 『신앙과 인권』 등의 논문, 저서, 번역서가 있다.
최근작 :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 총 2종 (모두보기)

김유준 (지은이)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칼빈의 경제사상”으로 교회사 석사학위(Th. M.)를,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으로 교회사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 현재는 은진교회에서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희년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담임 목회를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한신대학교, 호서대학교, 세계사이버대학,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목회신학대학 등에서 교회사 강의를 해 왔고, 강의를 시작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연세대학교 우수 강사상과 최우수 강사상을 수상했다.
한국교회사학회, 한... 더보기
최근작 :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내 인생의 한 구절>,<희년> … 총 8종 (모두보기)

김회권 (지은이) 
서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 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일산두레교회 개척담임목사, 가향교회 개척목사를 역임했다.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이사야 I』(대한기독교서회),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 2, 3, 4』,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복있는사람)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복있는사람)의 책임 감수를 맡았으며, 현대성서주석 시리즈 중 『신명기』, 『... 더보기
최근작 : <자비 경제학>,<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쉼이 있는 교육> … 총 107종 (모두보기)

야닉 판데르보흐트 (지은이) 

벨기에 루뱅 대학교 정치경제학 교수
벨기에 브뤼셀 생-루이 대학교 정치과학 교수, 루뱅 가톨릭대학교 객원교수이자 생-루이 대학교 정치과학 연구 센터 연구원이며 「기본소득 연구」의 부편집장이다. 관심 연구 분야는 비교정치, 비교사회정책, 비교사회역사, 실업과 빈곤, 노동조합, 기본소득이다. 7권의 책을 공저했고 2000년 이후 약 50여 건의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하고 있다.
최근작 :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전강수 (지은이) 
전강수는 경제학자다. 하지만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며 낙수효과를 외치는 여느 경제학자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다고 시장을 부정하고 정부의 무조건적 개입만을 주장하는 쪽도 아니다. 시장을 시장답게,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들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농민과 열심히 사업하는 기업가·자영업자가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정의롭고 효율적이라 믿는 사람이다. 시장을 시장답게,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토지제도를 정의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또한 현재 한국 경제가 심각한 불평등과 불안정... 더보기
최근작 : <[큰글씨책] 부동산 공화국 경제사>,<세상을 고치는 경제 의사들>,<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 총 25종 (모두보기)

정용한 (지은이) 
연세대학교(Th.B)와 미국 예일 대학교(M.Div.와 S.T.M.)에서 공부하였고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at Berkeley)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지대학교와 한남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지금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부교수(신약학) 및 교목으로 재직 중이다. 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성경 주석 『골로새서』와 “A Postcolonial Reading of the Great Commission (Matt. 28:16–20) with a Korean Myth,” Theology Today(2015) 외 다수의 학술 ... 더보기
최근작 :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바울서신 대조연구>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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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기본소득론은 여러 면에서 최근 가장 뜨거운 주제다. 당장 2022년 대선에서 다뤄지는 현안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안 중 하나로도 논의된다. 이는 기독교계에서도 먼 이야기가 아니다. 대다수가 불안정 노동과 가난으로 내몰리는 이 시대에 성서의 희년 사상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제3의 길, 즉 자본은 사유하되 인간의 노력과 상관이 없는 토지는 공유함을 기초로 하는 ‘지공주의’를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의 일부로도 기본소득론이 거론되어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본소득론은 아직 실현된 사례가 극히 적고 특히 국내에선 좌우 진영의 정치 슬로건에 머무는 단계다 보니, 교회 안팎으로 추상적인 이념 논쟁에 빠지거나 대중 영합적인 현금 살포 정책이라는 이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기본소득의 본래적 취지와 의미를 충분히 살피고,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가 이 주제에 이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신학적·실천적 측면 모두에서 차분하게 접근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쓰였다. 이를 위해 총 여덟 명의 국내외 전문 학자들이 기본소득에 관하여 수행한 신학과 사회과학의 학제간 연구 결과를 담았다. 2017년 WCRC에서 종교 개혁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개혁 신학자로 꼽힌 정미현을 필두로 성서학, 교회사학, 기독교윤리학 분야의 국내 신학자들과 경제학자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는 벨기에 학자 야닉 판데르보흐트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필진이 꽉 찬 내용을 보장한다.
먼저 성서학 분야에서는 구약신학자 김회권이 기본소득 제도의 정당성을 자연법과 구약성서 토지정의법이라는 두 가지 토대에서 찾는다. 또한 신약학자 정용한이 성서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기본소득의 반대 근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구절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교회사의 맥락에서 김유준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경제사상에서 기본소득 개념을 유추하고 그것을 희년 사상의 맥락에서 연구한다. 기독교윤리학자 곽호철은 성서 기저에 흐르는 핵심 가르침이 약자를 향한 근원적 관심이라는 것, 교회 전통에서도 부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도록 강조해왔다는 것을 지적하며 기본소득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조직신학자이자 여성신학자인 정미현은 기본소득 담론이 개혁주의적 기독교 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여성신학과 젠더 정의 관점에서도 기본소득이 가져올 순기능을 지지할 수 있음을 밝힌다. 기독교윤리학자 강원돈은 생태계 위기 현실을 강조하며 생태계 보전과 기본소득을 통합하기 위한 생태학적 소득 분배를 기획한다. 경제학자 전강수는 기본소득 모델을 좌파, 우파, 정통파로 나누어 검토하고 각 모델이 한국의 기본소득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21세기 기본소득』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야닉 판데르보흐트는 기본소득을 제도화하는 현실적 방법으로서 부분적 기본소득에서 점점 그 수준을 높여가는 방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의 기본소득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이 책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10명 중 9명이 교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거나 그것을 두고 토론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기본소득의 본래적 취지와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물론, 국내 기본소득 관련 공약인 이재명의 기본소득, 오세훈의 안심소득, 유승민의 공정소득, 추미애의 지대 개혁 공약이 어떤 것인지를 기본소득론의 거시적인 맥락 속에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성서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유의해야 할지를 성찰해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이 교회와 그 너머에서까지 건전하고 유익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밑바탕이 될 것을 확신한다. 접기

2022/03/16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휴심정조현이만난사람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등록 :2022-03-15
조현 기자 사진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9)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상


탄허학 박사 1호인 문광 스님.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 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아홉번째 멘토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인 문광(51) 스님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 ‘코로나19’의 극성도 새벽의 징조일 수 있다. 한민족이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듯이. 잠자는 나무와 꽃들을 깨우는 꽃샘추위와 함께 비가 촉촉하게 내린 14일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문광 스님을 만났다. 자신이 근무하는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달려 나온 문광 스님이 봄바람처럼 맞는다.

그는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학·석사, 동국대 선학과와 불교학과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를 거친 불교학자이자 국학자이다. 통광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아 경허-한암-탄허-통광으로 이어지는 전통 강맥을 이었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혜암 스님이 열반하기 전 마지막 시봉자였던 그는 참선 수행에 매진한 수좌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설법하는 문광 스님. 문광 스님 제공

그뿐이 아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퇴계학파인 유학자 부친에게서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힌 그는 또래에서 드물게 일찍이 유(학)·불·도(학)의 경전들을 쉽게 섭렵할 수 있었다. 그가 유·불·도뿐 아니라 주역·정역·성경까지 통달했던 탄허(1913~1983) 스님을 사숙(私淑·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한 것은 그 박람강기(博覽强記·동서고금의 책을 널리 읽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함)와 통섭에서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탄허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탄허학 박사 1호인 그는 <탄허선사 사교회통사상>에 이어 최근에도 <탄허학>(조계종 출판사 펴냄)과 <탄허사상특강>(도서출판 교림 펴냄)을 동시에 출간했다. 탄허 스님은 한국전쟁 이후 강원도 산골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를 이끌면서도 불교 역사상 전무한 역경과 저술 작업을 통해 초인적 성과를 이룬 인물이다. 탄허 스님은 새벽 1~2시쯤 일어나 신선법과 참선으로 하루를 열었다고 한다.

문광 스님도 참선에 연구에 강연까지 눈코 뜰 새 없어 보이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는 선가(禪家)의 보물이라는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선문염송 요칙>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도 늘 아침에 통기법(通氣法)이라는 몸 푸는 체조 같은 것을 하고 바로 좌선을 한다. 그것이 바쁜 일상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가는 건강 비결이다. 통기법과 좌선을 하루도 끊김 없이 이어온 지 6000일이 넘었다고 한다. 햇수로 16년이 넘은 셈이다. 그는 “운동이든 수행이든 한꺼번에 많이 하는 것보다 이처럼 끊기지 않게 습관을 들이는 게 가장 좋다”며 직접 지은 신조어인 ‘최귀연공’(最貴連功·끊기지 않고 단련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을 늘 불자들에게 강조한다.

특히 그는 스트레스 해소와 정서 안정을 위해 선(禪)을 최고의 비법으로 제시한다. 미래에 대한 예지와 예언으로 미래학의 지평을 연 탄허 스님이 “변화무쌍한 미래엔 변화 자체보다 두렵고 놀라서 해를 입는 사람이 더 많다”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참선을 권유한 것과 같다. 일문일답이다.





# 근심·걱정·스트레스가 없는 마음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선(禪)과 명상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에게 왜 선이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선은 생각이 끊어진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선과 명상을 하면 본래 일 없는 무사(無事)하고 평화로운 자리로 들어가서 스트레스를 떠날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 ‘심체리념’(心體離念)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원래 생각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근심과 불안의 실체는 본래 없는 것이니 자꾸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정신수양법과 마음관리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한국이란 땅은 수행하러 태어나는 곳인 것 같다. 불교 수행은 삶에 깊이 녹아 있고, 도교 또한 국선도 등 마음 닦는 법이 이어져오고, 유교의 정좌법(靜坐法)도 있다. 유교의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원리는 ‘마음을 일념으로 해서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으로, 유불선(儒佛仙)의 원리가 동일하다. 일례로, 퇴계의 ‘중화탕’(中和蕩)은 한국 유학의 심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생각에 삿됨이 없는 ‘사무사’(思無邪), 선행을 실천하는 ‘행호사’(行好事),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막기심’(莫欺心), 시기 질투하지 않는 ‘막질투’(莫嫉妬), 탐욕을 경계하는 ‘계탐’(戒貪) 등 30가지 약재를 함께 달여서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중용의 마음이 최고의 약이라는 은유인데 멋지지 않은가.”



―한국 사상의 해답을 탄허학에서 찾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원효에서 탄허까지 내려오는 회통의 정신은 한국학의 중요한 특질이다.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 도교, 기독교를 회통한 탄허학을 21세기 한국학의 새 지평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특징인 융복합과 융섭의 경향이다.”





# 탄허 스님이 미래 예지는 힘든 세상을 살아낼 중생들을 위한 연민의 발로

―통상 불교 고승들은 역을 점치는 것이라며 멀리했는데, 왜 탄허 스님은 주역과 정역을 중시하고, 미래를 예지했나?

“중국의 근대철학자 모종삼은 <중국 철학의 특질>에서 동양사상의 핵심을 역학의 ‘우환의식’으로 보았다. 중생들에 대한 연민심의 발로였다. 힘든 세상이 온다는 것을 법력으로 알았으니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야 할지 미리 알려주고 싶었던 보살정신에서다. 역학의 예지는 성현의 무심(無心)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미래학이 많다. 미륵불이라든지, 관음·지장보살에게 중생제도의 사명을 준 것도 미래예지였다. 삿된 욕심에서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과는 경지가 다른 것이다.”



―탄허 스님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역학적 정치사상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본 까닭은?

“동양이 정신적이라면 서양은 물질적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물질과 소유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물질은 삶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 역학은 그 중심을 항상 마음과 정신으로 설명한다. 동양 고대의 정치사상은 바로 인간의 마음과 정신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심학적 정치사상이기 때문에 결국 물질적 풍요가 충족되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동양의 정치사상을 말했던 것이다.”



―탄허 스님은 지구의 미래, 갈등이 어떻게 될 것으로 보았는가?

“동양과 서양, 좌파와 우파의 갈등은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북극과 남극은 있어도 동극과 서극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중요한 기점이 된다고 했다. 한국의 통일은 지구적으로 볼 때에도 큰 사건이라고 했다. 인간의 문제보다도 기후위기, 지진, 화산 같은 지구 자체의 격변과 변화를 많이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말고 참선하라는 것이다. 선업을 짓고 남을 도우면서 말이다.”



문광 스님이 사숙한 탄허 스님. <한겨레> 자료사진


# 세계인을 사로잡은 한류 드라마는 영웅이 아니라 바른 마음을 가진 개개인이 주인공

―한류 영화와 드라마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데, 어떤 점이 어필한다고 보나?

“미드(미국 드라마)는 영웅이 나와서 해결한다. 히어로물이 대세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엔 그런 영웅 대신 깨어 있는 개개인이 있다. 인간의 근본 마음을 가진 상식적인 휴머니즘의 ‘마음’이 바로 한국 장르의 특징이다. 심학(心學)이다. <오징어 게임>도 그렇고 <지금 우리 학교는>이라는 좀비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얘기하고 있다. ‘최고의 영웅은 바른 마음 아니겠어?’라는 질문을 세계에 던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누구나 존중하라는 거다. 결국 불교의 불성과 유교의 심성이 한류의 기저라고 볼 수 있겠다. 배트맨, 슈퍼맨 같은 초능력적인 ‘맨’(man)이 아니라 그냥 ‘휴먼’(human)이라는 보통의 ‘맨’이 영웅인 것이다. 왜 영웅인가? 근본 마음, 순수한 심성이 있으면 영웅인 것이다. 그래서 감동이 있고 정(情)이 있다. 한국적 신파가 단순한 신파로 끝나지 않고 세계적인 신파로 엄청나게 세련된 방식으로 문화화되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관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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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교·사상·철학을 결론 맺을 땅은 우리나라

등록 :2022-03-16 
조현 기자 사진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9)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하

문광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 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아홉번째 멘토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인 문광(51) 스님이다.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상’에서 이어짐.

―탄허 스님이 30~40년 동안 평생 <천부경>을 연구한 노인에게 가서 현토를 배우고, 천부경을 주역에 앞선 역의 원조라고도 한 이유는?

“<천부경>은 81자로 된 역학의 축소판인데, 그것이 단군시대이니 중국의 요 임금 때라고 보면 중국의 <주역>보다 <천부경>이 앞서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의 고대사 문헌을 많이 없애고서 실증사학이라 하여 증거가 없으니 거론하지 말라는 식의 식민사관 때문에 <천부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그러한 일본인의 생각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해볼 때 고대역사에 대해서 우리처럼 무기력한 경우가 없다. 조그마한 근거만 나와도 정사(正史)로 공론화하는 중·일에 비해 과한 자기폄하다. 탄허 스님이 <천부경>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러한 민족적 자긍심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읽어보면 <천부경>이 얼마나 위대한 문헌인지 알 수 있다. <주역>의 종주국도 한국이라고 탄허 스님이 말했다. 중국은 없는 역사를 만들고, 일본은 엄연한 역사를 속이는데 한국은 버젓이 있는 역사도 챙기지 못한다. 스님도 그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탄허 스님이 인도와 동남아 등 불교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 인터뷰에서 ‘한국 불교는 세계의 중심이며, 한국이 세계 불교의 종주국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불교의 진수인 불교 교리와 선 사상을 그 어느 나라보다 제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서다. 특히 고려대장경의 보유만으로도 한국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인도에 범어로 된 대장경이 나란다대학의 화재로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 티베트대장경 역시 수적으로 적으니 세계에서 우리가 보유한 한문 대장경이 최상의 불교 원전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전통을 말살했고, 일본은 대처를 해서 삼보 가운데 승보가 무너졌다. 탄허 스님은 늘 한국의 모든 전통과 문화를 긍정했고, 국민들이 자존감을 갖기를 바랐다.”

―탄허 스님이 주역의 64괘와 불교의 근본 자리가 같다고 한 이유는?

“주역의 64괘와 태극은 불교 <기신론>으로 볼 때 생멸문과 진여문이라는 거다. 만유를 수렴하면 일심(一心)이 되는데 이것이 태극이고, 펼치면 모든 복잡한 생멸문의 괘상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 이치가 같다고 보았다. 스님의 진정한 회통의 저력이 이런 설명에서 나온다고 본다.”



서울 잠실 불광사에서 설법하는 문광 스님. 문광 스님 제공

# 한국 문화는 세계의 단전이어서 세상 사상 철학 종교의 결론을 맺을 것

―한국의 사상 철학 종교 문화는 세상의 사상 철학 종교 문화의 결론을 짓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는 까닭은?

“한국 문화를 ‘단전성(丹田性) 문화’로 설명하고 싶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이 단전이다.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나라라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여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듯이 단전은 그러한 것이고 한국이 바로 그런 요충지이다. 그 특성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다 모여서 정리되고 결론을 내고, 새롭게 다시 퍼져나가도록 시작도 하는 곳이다. 한국은 동북방의 간방인데 만물을 시작하고 만물을 마무리한다는 역학적 의미가 있다. 이것을 저는 ‘단전성 문화’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한다.”

―탄허 스님은 미국이 핑퐁외교로 중국과 수교를 하기도 전에 우리나라와 중국이 통하게 된다며, 제자들에게 중국어를 배우라고 강조한 이유는?

“그것은 정역 8괘에 입각해서 미리 안 것이다. 정역 8괘가 실현되기 전에 문왕 8괘가 완성되는 것인데 문왕 8괘에 진(震)과 태(兌)가 동서를 대표한다. 중국이 미미했을 때에도 이미 중국이 미국만큼이나 성장할 것을 미리 알았고, 중국이 성장하면 당연히 한자문명이 다시 한번 빛을 볼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방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법산 스님에게 중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법산 스님은 대만으로 유학을 다녀오셔서 퇴임시까지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일반적으로는 관상 같은 것은 승가에서 하찮게 보는 술학인데 탄허 스님이 다르게 평한 까닭은?

“‘6신통 가운데 타심통은 불교의 관상학이다’라는 말씀도 했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 부처님의 신통력이었다는 것이다. 공자, 맹자, 노자 모두 각기 사람을 보고 그를 판단하는 고유의 관찰법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해운거사의 <관상학> 책에 쓴 서문에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인 김재규에게 총살 당할 줄 몰랐다는 것은 관상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슬쩍 스쳐 지나치면서 인연이 되기도 하는데 한 눈에 그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제대로 된 인재도 양성할 수 있고 남에게 속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했다. 물론 생각 끊어진 무심자리를 증득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결국 불교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광 스님이 사숙한 탄허 스님. <한겨레> 자료사진

# 이 땅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적 구원관을 폭발시킨 씨앗은 전통적인 미륵신앙

―원효대사의 미륵상생경종요에서는 미륵을 맞이하는데도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가 있다는데, 어떻게 다른가?

“출가해서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 미륵사상이었다. 삼국시대엔 미륵사상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 연구했던 미륵에 관련된 내용들을 이번 <탄허학 연구> 책에 화엄학과 연관하여 많이 수록했다. 그중의 하나가 원효의 미륵사상 해석이었다. 하근기는 미륵이 하생하길 기다리고, 중근기는 미륵이 계신 도솔천으로 10선법을 닦아서 올라가려 하고, 상근기는 <미륵성불경>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이 수행하여 성불해서 미륵처럼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과연 원효는 위대한 한국 사상의 새벽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계는 언젠가 ‘종말’이 오고 ‘심판’이 있는데 이때 예수가 재림하여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특히 우리나라엔 기독교 계통의 ‘종말론’이 등장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는 이런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의 뿌리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의 세계니까 구원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이 해결되지 않는 한 영원한 인류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좀 강한 양상을 보인다. 저는 그것을 한국인의 종교 심리 구조 때문이라고 본다. 미륵하생이 예수재림으로 변한 것이다. 한국엔 ‘구원불인 미륵이 와서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강력한 미륵하생신앙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잠시 유교사회에서 신앙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서학이 들어오면서 예수재림으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패턴은 유사하다. 그래서 ‘한국인의 종교 심리 구조’라는 표현을 써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비티엔> 유튜브 갈무리

# 1700개 화두가 모두 타파되어야 견성

―선가의 보물로 알려진 고려 진각혜심국사의 <선문염송> 해설서를 곧 낼 예정인데, 수많은 조사어록과 비교해 선문염송의 특징이 무엇이고, 가장 깊게 천착한 내용은 무엇인가?

“저는 선 사상에서도 한국학의 관점으로 보았다. 중국에 <전등록> 30권이 있다면 우리에겐 고려 송광사에 진각혜심의 <선문염송> 30권이 있었다. <전등록>에 비교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저는 <선문염송>을 중심으로 조사의 어록을 보았다. 과거 7불이 없고, 경전에서 화두를 뽑아서 불법승 3보를 갖춘 체계를 구성했다. 제가 이 책을 열심히 본 것은 화두참선을 저의 수행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의경전으로 꾸준히 본 것이다. <선문염송> 전체를 본 뒤에 제가 모르겠는 향상구 화두들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었다.”

―스님이 <비티엔>에서 선문염송 1463 화두공안 가운데 16화두의 염과 송을 강의하는데, 그중 14개가 향상구 공안이다. 향상구 공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화두는 모두가 같은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신변사(法身邊事)의 진리가 있고, 법신향상사(法身向上事)의 진리가 있으며, 그 사이에 해당하는 여래선의 경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난해한 공안들이 향상구(向上句)이다. 공부가 처음 열리면 누구나 법신변사가 열리게 된다. 온세상이 한 덩어리이고, 불이(不二)이며, 주객이 끊어지는 체험을 한다. 법신변사의 공안도 모두 동일하지 않다. 경계가 다 다르다. 하지만 법신변사가 완전히 투득되어도 향상구의 화두는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다. 제가 향상구에 막혀서 앞이 캄캄했던 체험을 했기 때문에 <선문염송 요칙>이라는 책을 엮어서 향상구 공안을 중심으로 역해해서 누구나 자신을 점검해볼 수 있도록 하게 된 것이다. 조그마한 진리를 알았다고 공부가 끝났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향상구 공안에 막힘이 하나도 없다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재참(再參)해야 한다.”

―스님도 간화선 수행을 한다고 했는데 스님의 간화선 수행 경험이나 체험은?

“조계종 제10대 종정이셨던 혜암 스님의 마지막 시봉행자였는데 스님께 ‘만법귀일’ 화두를 받았다. 스님이 입적하기 2달 전의 일이다. 은사 스님께서 한문을 볼 줄 아니 너는 동국대에 가서 경율론을 모두 한번 보라고 했다. 하지만 저는 대학 가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라고 버티다가 결국 스님 뜻을 따라 동국대에 입학을 했다. 대학원 석사를 수료하고 출가해 참선이 하고 싶었는데 동국대 학부를 다니게 되었으니 생식을 하며 독하게 참선했다. 큰스님께 받은 화두를 5년 만인 2006년에 타파하게 되었다. 정말 박살이 나는 특별한 체험이었고 그 뒤에는 교학적으로 잘 모르겠던 교리들이 환해졌다. 지금 유튜브에 올라 있는 화엄사법계라든지 선지(禪旨)들은 그때 터져서 알았던 내용들이다. 그렇게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1년을 지내다가 동국대 백상원 기숙사에 대중공양으로 나눠준 진제 스님의 법어집 <고담녹월>을 보았는데 처음부터 모르는 공안들이 여러개가 이어서 나왔다. 나는 분명히 화두가 타파가 되었는데 왜 이 공안들은 모르겠는지 궁금했다. ‘덕산탁발화’, ‘마조일할’ 이런 공안이었다. 그 뒤에 최고의 선정에 들어가서 향상구 공안이 타파되어야 이 공부가 끝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제 스님을 찾아 뵙고 법거량을 하고 화두를 다시 받아서 봉암사 선원과 해운정사 선원에서 수좌로 정진을 했다. 깊고 깊은 선정에 들지 않으면 향상구 공안은 타파되지 않는다. 1700공안 가운데 단 하나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견성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기본규칙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제36회 2강 생명사상의 흐름2 이돈화를 중심으로

제36회 1강 생명사상의 흐름1 최시형을 중심으로

Sung Deuk Oak [샤머니즘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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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탓인가?]

2016년 11월 그 때 미국 언론사들이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한국 정치와 기독교와 샤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두 거절했다. 한국 정치 부패가 샤머니즘 탓이라는 프레임을 거부했다. 기자가 원하는 기사가 나가면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될 터였다.
그런데 5년이 지나 다시 민주당 측에서 샤머니즘+주술 프레임을 만들었다.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 주장을 싫어하는 페친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말고 지난 6년을 잘 복기해 보기 바란다. 과연 샤머니즘 때문에 한국에 부패가 많고 많을 것인가? 불교면 불교, 기독교면 기독교를 바로 비판하라.
평소 '다른' 종교와 다른 인종과 공존하면서, 심지어 환대까지 하자던 진보측 인사들이, 무속 '주술'을 '틀렸다'고 외치면서 적대적 배척을 외칠 때, 나는 당황했다. 아마도 5년 전에 그 틀로 탄핵까지 갔고 촛불까지 갔으니 다시 써 먹을 카드로 생각했을 것이다. 김건희가 그 자료를 제공했다. 비록 어중간한 기자가 녹음을 한 것이지만.
그들이 평소 말하던 타종교와 타문화와 타인종 간의 다원주의에 바탕한 세계주의 이상은 어디로 가고, 야당 후보 부부를 미신 주술로 살고, 이어서 왜색 무속인 영향 하에 있고, 그 후보를 지지하는 교회가 미신과 주술을 지지한다고 매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구약 성경도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의아했다. 이성과 합리를 내세웠으나, 1860년대 척사위정파 유학과 1930년대 근본주의 기독교도 이성과 합리로 타종교와 타신학을 사악한 이단으로 몰았다.
물론 겉으로는 주술을 치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치는 줄 알았다. 만사가 복합적이다. 아무튼 샤머니즘은 5년마다 장삼오사가 쳐 보는 동네북이 되었다. 건어물만 들면 액막이 굿이라고 하는 은퇴 신학자도 나왔다. 5년 전에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조금만 울렸다. 아마 5년 후에는 써 먹지 않을 것이다.
그냥 부패한 교회, 부패한 정치인을 비판하라. 표절, 주가조작, 공금 횡령 등 바로 공격하는 게 빠르다.
그리고 한국 종교를 좀 더 깊이 공부하고 비판할 것을 비판해야 한다. 21세기는 가볍게 무속을 믿고 점을 치는 자들은 많아도 과거처럼 신봉하는 자들은 적다. 회사가 개업을 하거나 새 프로젝트를 할 때 돼지머리 고사를 지내는 일은 있어도, 무당을 불러 굿은 하지 않는다. 일종의 보험 정도로 고사를 지내지 무속 신앙인은 되지 않는다. 액막이 고사를 보고 그들을 주술에 쩐 회사라고 욕하지는 않는다. 대학생들이 재미로 타로점을 쳤다고 해서 역술인의 영향 하에 사는 것은 아니다.
무속이 더 유행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난 6-5년 전에 그렇게 비판을 했고, 대통령과 최씨가 감옥에 갔는데도 보살집은 성행했다. 그러나 중소 상공업자들이 주 고객이었던 보살집도 그들이 파산하면서 파리를 날리고 있다. '주술'에 쩐 대통령이 나와도 무속은 안 될 것이다. 만신도 팬데믹 코로나 바이러스 귀신은 이기지 못했다.
한국에는 무종교인이 급증하고 있다. 교회가 먼저, 이어서 무속도 장사가 안 된다. 타종교를 공격한다고 자기 종교가 올라가는 게 아니다. 교회의 좌우가 모두 혐오를 부추킨 탓에, 교회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속에 대해서는 여러 글에서 썼으므로 오늘은 아래 화면에 대한 인상 비평만 남긴다.
(덧) 화면에 치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으나, 그건 전통 무교의 역할이고 1987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비지니스를 위한 재수굿이 가장 중요하다. 생존과 기복의 굿이 치유보다 더 중요하고 돈을 버는 주 수입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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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샤머니즘을 욕되게 하지 마라"

[JTBC] 입력 2016-11-0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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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해외 언론들도 최근의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서울의 스벵갈리' 즉, 흑막의 그 주인공을 소설 트릴비에 등장하는 사악한 심령술사에 비유한 보도가 나왔고 '샤머니즘에 빠진 대통령', '초현실적 스캔들' 우리의 낯을 뜨겁게 만드는 외신보도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shaman fortuneteller" 처음 이런 표현을 사용한 매체는 뉴욕타임스였습니다.

최태민 씨와 대통령과의 오랜 관계를 설명해놓은 우리의 언론보도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다는 단어, '샤먼'.

그 샤먼은 다시 무당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돌아왔고 한국은 어느새 샤머니즘의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샤머니즘을 욕되게 하지 마라" 샤머니즘은 한국인의 기저신앙… 즉 영혼을 믿고 복을 비는 마음. 그것이 나쁘고 사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끄러운 것은 샤머니즘을 빙자하여 온갖 악행과 기행을 일삼는 무리들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초현실적인 일들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분명한 욕망, 꿈틀대며 뻗어나간 권력욕과 각자의 이권을 챙기려는 치밀한 셈법이 촘촘히 얽힌 가운데 진행되어 온 '범죄'가 아닌가.

대기업을 향해서 으름장을 놓고 심지어는 일개 성형외과 원장을 위해서 온갖 뒷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수석비서관들. 검찰 압수수색 바로 전날 반환되어 돌아왔다는 수상한 돈들과 느긋한 표정으로 검찰수사에 임했던 그 누군가.

단지 샤머니즘을 갖다 붙이기엔 그 비정상적인 일들은 너무나 치밀하게, 정교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샤머니즘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대권 작가의 칼럼에 따르면 "샤머니즘의 기능은 치유, 해원, 점복 등 인간사의 모든 것.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치유" 라고 했습니다.

전 국민을 불안과 상실에 빠지게 만든 지금의 이 소용돌이…차라리 샤머니즘의 "치유" 기능이라도 빌려와 해원 상생굿 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9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