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2

Sunghwan Jo -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지구인문학의 발견 허남진, 조성환, 이우진, 이원진 저

(4) Sunghwan Jo - 제1장 · 지구화 시대의 지구인문학 / 허남진·조성환 1. 지구화의 대두와 지구인문학 2.... | Facebook

제1장 · 지구화 시대의 지구인문학 / 허남진·조성환
1. 지구화의 대두와 지구인문학
2. 한국사상과 지구인문학
제2장 ·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 / 이원진
1. 홍대용의 자전설과 관점주의
2. 라투르의 대지설과 사고전시
제3장 · 지구를 공경하는 종교 / 허남진·이우진
1. 토마스 베리의 지구인문학
2. 지구를 모시는 종교
제4장 · 인류세 시대 존재론의 전환 / 조성환·허남진
1. 애니미즘의 귀환과 퍼슨(person) 존재론
2. 이규보의 사물과 친구 되기
3. 한용운의 님학
제5장 · 지구학적 관점에서 본 먹음·먹힘의 철학 / 허남진·조성환
1. 발 플럼우드의 먹이/죽음론
2. 해월 최시형의 식천/제천론
제6장 · 인류세 시대 지구 담론의 지형도 / 조성환·허남진
1. Globe
2. Earth
3. Gaia
4. Planet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 예스24
YES24.COM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 예스24
한국에서 발신하는 토착적 지구학으로서의 지구인문학의 관점에서, 오늘 인류세의 생태위기와 기후위기 등 복합위기, 다중위기의 시대에 직면한 인류와 지구, 만물이 함께 번영할 수 있는 미래를 모색하기 위하여 우리가 새롭....
All reactions:
You, 박길수, 柳生真 and 20 others
7 comments
Like
Comment
Share

7 comments

Most relevant

  • 조창규
    이제는 지구문제구나ᆢ인류와 생태까지 아우가 폭넓은 지식과 활발한 활동하고 있음에 자랑스럽구나

  • ===

Sunghwan Jo - 일본에서《토착적 근대 연구》 창간호가 나왔다. | Facebook

Sunghwan Jo - 일본에서《토착적 근대 연구》 창간호가 나왔다. | Facebook

onrtespSodly3573001725m84u19c4lMai4 lu2hgh42cc5im1a540tt01f6 



일본에서《토착적 근대 연구》 창간호가 나왔다.




















All reactions:26You, Young Joon Kim, 박길수 and 23 others



0 comments

한인철,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2016

청파교회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2016년 07월 29일작성자 김기석


서클 대화 진행의 증언과 그 비전 2 | 박성용

농촌과 선교 - [117호] 서클 이야기 : 서클 대화 진행의 증언과 그 비전 2 | 박성용
[117호] 서클 이야기 : 서클 대화 진행의 증언과 그 비전 2 | 박성용
훈련원
조회 수 161 추천 수 1 댓글 1

peace_circle.jpg

서클 대화 진행의 증언과 그 비전 2

박성용 /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1. 서클의 조우와 토대 구축기- 2005년~2009년: AVP/HIPP, 그리고 서클 프로세스

각각의 서클 모델이라는 시냇물들이 2020년 현재 하나의 흐름으로 되기까지 한국에서 경험한 서클의 기원을 되돌아가 보면 그 각각에 약간의 관심과 문제의식 그리고 작은 만남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때는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몰랐던 우연적인 조우로 혹은 작은 움직임의 시작으로 여겨진 것들이었다. 목격자이자 비폭력활동가가 된 지금의 나도 그 당시엔 하나의 작은 꿈이나 바램이어서 실재(reality)가 되는 미래에 대해 정확히 무엇이 될지는 몰랐다. 또한 그 작은 실마리의 꿈 이상으로 내 개인의 삶과 단체의 내부외부상황이 모호하고 생존의 비안전성으로 인해 잔뜩 구름이 많이 낀 개인과 단체의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년간의 해외 유학 말기인 2001년 마지막 학기에 9.11사태를 퀘이커 펜들힐에서 가을학기를 보내면서, 그간 유학 외에 미통일운동의 단체인 <자주연합>의 지역활동가로 있었던 나는 퀘이커교도이자 함석헌의 제자였던 해외통일운동의 산 증언자인 이행우 선생님의 도움으로 등록비 없이 펜들힐 센터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9.11사태를 퀘이커교도들이 어떻게 비폭력직접행동과 비폭력 증언활동(witness movement)을 하는지 목격하고, 거기서 1주일에 한 번씩 하는 서클 대화모임을 참관하게 되었다. 이행우 선생과 이미 펜들힐에 왔다 간 정지석 박사와의 인연으로 한국에 오면서 박사과정 마무리가 필요한 정지석 박사가 있던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의 시민사회 실장 자리를 2002년부터 3년간 이어 받게 되었다.

2003년인가 그다음 해에 학술진흥재단의 아시아종교분쟁과 평화프로젝트 2년 연구 사업차 필리핀 민다나오에 가서 거기서 3주간의 평화훈련과정에 참여한 한국의 참여자 10여 명 중에 통역자 겸 와있는 이재영(당시, 한국아나뱁티스트소장) 소장과 박수선 선생(평화여성회)외 몇몇이 필리핀의 평화운동을 배우면서 지금의 가해자피해자대화모임에 대한 2년간의 훈련과정에 있었던 것을 우연한 만남으로 알게 되었다. 이 우연한 만남은 2005년 초에 아태교육원을 그만두고 5월부터 비폭력평화물결의 공동대표로 옮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필연적인 네트워크 활동으로 지금까지 동료로서 몇몇 개인 활동가와 단체들의 연대라는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민다나오에서 2년차 학진연구관련 필리핀원주민 방문을 통해 현주민의 서클형 대화의 충격을 받았지만, 펜들힐과 필리핀 원주민의 대화방식이 서클진행방식에 의한 차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깨달은 것은 비폭력 실천의 전략에 대한 몇 년 후의 성찰과 자각을 통한 일이다.


비폭력 실천의 방식 중 사회변화(social change)라는 입장에서 분단조국의 현실에서 당장 내게 다가온 활동은 ‘7.27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라는 약 천여 명의 연인원이 몇 년 동안 지속된 사업이다. 이 운동을 DMZ분단선없는 한강하구에서 유엔사를 괴롭히고 시민의 평화연대를 각성시키는 비폭력직접행동의 운동을 김포, 강화, 인천, 서울, 일산의 5개 도시 시민사회단체들과 종교기관들로 이루어진 10여 개의 단체연합운동이 내가 오기 전년도부터 4년간 전개되었다. 비폭력평화물결은 퀘이커교도인 미국의 비폭력세력단체(NPI, nonviolent peaceforce international)의 데이비드 핫소대표가 그간 미국에 3년간 방문하며 퀘이커교도로 바뀌어져 돌아온 민중신학자 박성준 공동대표가 몇몇 동료와 이미 2002년 북미전쟁 가능성 앞에서 ‘인간방패’라는 방식의 비폭력직접행동의 방식으로 인간안보를 꿈꾸며 만들었다. 이미 박성준 선생은 단체 내에서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평화’라는 방식으로 퀘이커의 영향을 받아 토킹피스로 하는 참여형 서클대화방식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체 내에서 다른 실무자들에게 공유된 것은 아니었다.


네트워크의 방식과 이로 인한 네트워크 리더십을 세우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것은 -이는 물론 나에게도 처음부터 익숙한 방식은 아니었다. 상황이 나를 그쪽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 당시 평화활동가 연차대회를 3년간 준비하고 운영하며 10여 개 평화단체들과의 인연과 그 평화활동가 연차대회를 통해 알게 된 기독교 평화훈련단체들 -개척자,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 평화여성회 등- 그리고 기타 여러 평화운동단체들과의 연대모임꾸리기를 통해 나온 실무적 정황에 의한 것이다. 참여, 같이 숙고하기, 의사결정의 진통 과정을 경험하기, 새로운 기획을 위한 분담, 홍보와 실행 등의 방식을 통해 몇 가지 기획들이 이루어 졌다. 공동대표에서 대표로 위치전환 후부터 한강하구배띄우기 이외에 평화활동가연차대회 만이 아니라 4 훈련단체들과의 기독교평화아카데미, 그리고 여러 단체들과 더불어 요한 갈퉁(평화학자 요한갈퉁은 NPI의 일본지부인 일본비폭력평화세력단체[NPJ]의 교코 대표와의 인연으로 초대되었다)의 TRANSCEND 모델의 훈련워크숍 진행 등이 펼쳐졌다. 이러한 연대단체들과의 훈련워크숍 및 연대활동의 핵심동기는 평화활동가의 지침과 임파워먼트 그리고 상호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왔고, 내가 소속한 단체는 평화운동이라는 전선운동을 지원하는 공급책으로서의 훈련과정과 훈련매뉴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서클에 대한 자각 없는 사전 경험 -펜들힐, 필리핀 민다나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평화단체들과의 과정을 만들어 초대, 참여, 숙의, 결정, 나아가기라는 무의식적인 동아리진행원리를 실무와 네트워크사업에서 진행하고 있었지만, 서클을 의식하고 훈련과정으로 만나는 것은 2006년 대전의 퀘이커교도인 이종희 선생이 독일생활 30년을 접고 한국에 들어와 때마침 독일 친구이자 AVP 진행자인 우테 카스퍼스의 방한과 AVP의 소개워크숍에 대한 제안을 받고서 이다. 나는 당시 이종희 선생 개인도 AVP도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독일 퀘이커단체의 재정지원과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으로 한국에서는 소개되고 있음)의 성격에 대해 듣고서 의심 없이 흔쾌히 2007년 4월에 10개 단체들의 동의를 얻어 첫 공개워크숍과 1일 맛보기 워크숍을 열어 참여자 40여 명의 전원의 동의로써 이 워크숍이 우리 평화활동가들에게 필요한 모델이고 향후 한국에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결정을 얻게 되었다.


원래 재소자 임파워먼트 훈련 프로그램 진행과 그것의 가치를 일상에서 실현하는 AVP진행자커뮤니티형성(55개 국가에서 진행)을 위해 한국에서 시작된 AVP는 청소년훈련과 학교에서의 교사의 지원을 위해 본 단체의 사업으로 AVP와 연관된 모델인 HIPP(Help Increase Peace Program; 한국에서는 ‘청소년평화지킴이’로 소개됨)의 가능성을 2007년부터 산돌학교 등을 통해 확인하며 한국의 학교상황에 대한 적응을 모색하게 되었다(HIPP의 본격적인 진행자과정은 2009년부터 광명에서 광명교육연대와 네트워크 사업으로 첫 시작을 하게 된다.).


서클은 간단하지만 의식의 깊이에 자리 잡기까지에는 원래 낯선 문화와 진행방식이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만나는 작업은 서클 프로세스에 대한 삼선재단의 지원에 의한 연구에 의한 결과이다. 이는 2000년 하반기에 사회감수성학습(SEL; Social & Emotional Learning)의 2년간의 연구 그리고 이후 평화감수성 훈련의 AVP의 긍정적인 영향 하에 서클 자체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인 서클 프로세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클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긍정성을 갖게 되었고, 확신에는 불충분하지만 이제 서서히 서클로 하는 대화진행방식에 대한 이 연구와 AVP/HIPP의 경험을 통해서이다.

서클 프로세스에 대해 의식적으로 단체 내에서 밖으로 소개할 필요성을 지닌 도화선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파동으로 인한 열심히 활동하던 한 촛불집회단체의 내부갈등에 대해 간단한 서클진행 대화방식의 도입부터가 시작점-아마도 2009년-이 된다(참고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 촛불집회 이후 평화통일단체들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특히 통일단체들의 보이지 않는 굿바이의 현실이 너무 컸다. 이 시절에 통일단체는 1/3로 축소되어 명망가 높은 대표가 있는 단체를 제외하고는 다 사라졌다.) 안전한 공간, 초대, 참여, 돌아가는 리더십, 센터피스와 토킹피스 등에 관한 서클개념들이 대화진행의 작동원리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관찰은 기독교평화아카데미 3년간의 네트워크형 평화훈련 과정에 있어 소수의 참여자가 모여 어렵게 훈련과정을 진행하여 의미 있는 활동가를 키워냈지만, AVP/HIPP 그리고 서클 프로세스 등은 일반 대중의 손쉬운 서클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내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경로로 서클 진행자로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AVP, HIPP를 만나서 혹은 단체 내부의 평화교육팀의 활동을 통해 서클을 만남을 통해 진행자로 활동가로 서는 일들이 매우 높아졌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현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서클이 기존의 활동가에게 신념과 열정을 강화시키거나 일반인에게 동기부여와 새로운 활동가로 서게 하는 확률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집중과 헌신이 나와 소속단체의 미션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비폭력평화물결에서 활동하던 초기 2005-2009년간은 유네스코·아태교육원이 시민사회 실장직에서 얻은 국내 평화단체들과의 연결, 그리고 평화의 배 띄우기, 평화활동가연차대회, AVP 등의 네트워크 사업 등을 통해 나와 소속단체의 자기 정체성과 방향 재정 위의 기간이자 서클이 단체에 수육(incarnate)이 되는 초기 시기였다. 이에 대해 다른 두 사건이 신념에 대한 전환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서클 프로세스의 중요성만 아니라 단체가 박성준 공동대표의 리더십이 떠난 단체 내 회원 활동 급격한 감소와 이명박 정권의 촛불단체들에 대한 집중적인 고사 작전을 통해 평화통일단체들이 사라지거나 어려움에 부닥쳐 2009년부터는 본 단체의 존재 가능성이 불투명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불길한 징조 앞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4월에 13개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조지 레이키의 비폭력직접교육(nonviolent direct education)워크숍 4박 5일을 치렀고, 2008년 가을부터 네트워크 사업으로 준비하여 2009년 가을까지 진행된 비폭력세계행진이라는 칠레에서 시작하여 북미 유럽 그리고 아시아를 거쳐 다시 남미로 가는 국제연대 활동을 치렀다. 이 두 사업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생존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과 결핍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얻었다는 점이다. 단체 내 전직 공동대표로 인해 모여든 후원자들의 떠남과 단체의 활동위축과 외부의 이명박 정권의 평화통일단체의 지원사업 중단의 시작이 주는 부정적인 충격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조지 레이키의 민중의 지혜와 열성을 끌어내는 방식과 비폭력 행동의 다른 방식으로서 사회 방어(social defense)와 제3자개입(TPNI; third party's nonviolent intervention)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처음 접했고, 20여 단체들과 아무런 재정 없이 시작된 <세계비폭력행진>의 국제연대를 무사히 치러 내면서 자원과 재정의 결핍의 시작에도 불구하고 활동의 풍성함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드는 민중에 대한 의존과 과정의 형성단계에 대한 중요성을 처음으로 이해하거나 그 중요성의 씨앗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었다. 네트워크는 매우 중요한 ‘자원(resources)’이었고, 돌파를 위한 힘이 되었으며, 이들을 결합하는 '진정성 있는 문제의식'의 공유야말로 이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앞으로 가게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단순히 신념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훈련이나 과정적 수단을 통해 발휘된다는 직접교육론(pedagogy of direct education)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비폭력대행진의 네트워크 사업이 끝나자마자 비폭력 훈련에 대해 집중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그간 알고 있었던 한국 NBC 센터의 캐서린 한 대표와 회복적 정의운동의 흐름에 대해 그동안 계속 들려주었던 이재영 소장을 2009년 11월 29일 보증금을 까먹어가며 버티고 있던 우리 단체의 가장 가난했던 공간인 서대문 영천시장의 2층의 사무실에 초대해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역사적 모임이 바로 ‘회복적정의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의 출발이다. 그동안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무엇이 새롭게 징조로 펼쳐지는 지를 공유하고, 훈련기관의 공통의 특성을 통해 무엇이 가능한지 협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재영 선생의 그간의 회복적 정의 운동의 공헌에 눈여겨보아 왔고, NVC의 시민사회에서의 대화 운동의 가능성 그리고 AVP와 HIPP가 갖는 재소자들과 청소년들에게 줄 수 있는 갈등과 폭력에 대한 임파워먼트 훈련에 대한 각각의 모델이 결합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대사업으로서 ‘회복적 정의’에 대한 공동의 사업추진을 확인한 첫 모임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부터 평화여성회 내 갈등해결센터의 박수선 대표 등의 몇 단체들(광명교육연대, 나중에는 좋은교사운동 등)을 더 초대하여 본격적으로 ‘회복적정의시민사회네트워크’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게 되었고 향후 여러 일들이 펼쳐져 나가는 시원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는 허공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여러 활동사업을 통한 신뢰와 우정에 의한 관계망이 형성되면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각자의 진실이 서로 엮여서(weaving) 새롭게 출범된 모임이고, 나는 이것이 각자의 작은 진정성으로 출발했지만 이 모임이 향후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줄은 그 당시에는 꿈에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Prev [117호] 순례의 길 생명의 길 54 : 귀농운동과 만나다! (4) | 차흥도[117호] 제주에서 불어온 향기 : 당근 밭에서 | 유지은 Next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인권운동가 서준식 2003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 사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10년 전 기독교세계관학교에서 만난 인권운동가 서준식
기자명 김세준  승인 2003.03.15 


무심코 정리하던 서랍에서 테이프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그 테이프는 10여 년 전 기독교세계관학교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논하였던 것을 녹음한 테이프 중 하나였다.

이 글은 그 테이프를 녹취한 것이다. 이 테이프에는 내가 경실련 기독교청년학생협의회 대표로 있던 시절, 감옥에서 17년간 비전향장기수로 출소하여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서준식과의 대화가 들어 있다. 서준식은 재일교포 2세로,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인 1971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처음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형량이 늘어나면서 17년간 감옥에서 보내고 1988년 출소하게 된다.

당시 복음주의 계열에서 기독교학문연구회의 한 교수를, 진보쪽에서 민중신학자인 임태수 교수(현 호서대 구약학), 박성준 선생(목사이자 현 퀘이커교도), 그리고 유물론자인 서준식을 초청해서 강좌를 개최하였다. 테이프를 다시 돌리며, 오늘날에도 이 대화는 시기적으로 적절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신앙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서준식은 당시 유명한 유서대필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수배된 강기훈의 무죄를 주장하며 동시에 유서대필의 허구적 조작을 밝히기 위해 강연하였다. 그 말미에 그의 사상의 한 자락인 '유물론과 신앙'이란 대목의 대화가 있었다 이 글은 그 당시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

김세준 서준식 선생님의 서간문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델로 쓴 [금단의 땅]이라는 소설을 보면, 휴머니즘과 민족주의가 선생님의 세계관적인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모인 청년들은 특별히 기독청년학생들인데, 저희가 갖고 있는 세계관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이 다른지 혹은 선생님께서 평소 생활이나 삶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주된 가치 기준이란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서준식 저는 20대에 휴머니즘과 과학사상에 심취했습니다. 저는 20대에 마르크스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우리 나라에는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종로2가에 종로서적 있죠?! 그 종로서적 전체 크기가 이 방만한 크기였습니다. 그때 거기에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고 그냥 거기에 이만한 공간에 문학서적·관광서적·잡지, 그런 것들이 전부다 있는 거죠. 사회과학코너라고 해서 서가가 하나 있는데, 거기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그런 사회과학서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학개론이라든가 하는 대학 교과서가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60년대 말, 70년쯤까지는 우리 나라에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근데 그런 속에서 있으면서도 저는 사회과학서적을 그 당시 대학생들 수준치고는 아마 가장 선진적인 책을 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방학 때 일본에 가서 지냈기 때문에, 일본에 가서 같은 값이면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책을 보자,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책은 학기 때 가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는 생각으로 골라서 보다 보니까 그 당시 우리 나라 기준에서 저는 불온서적만 보고 방학 때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라던가 [경제학 비판]이라던가 엥겔스의 [반듀링론] 뭐 그런 것들을 쭉 보게 됩니다. 필수적인 사회과학서적인 것들을. 근데 그것을 읽게 된 동기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도 읽으려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에는 얼마든지 지천에 깔려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읽게 된 것은, 아까 맨 처음 강의를 시작하면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우리 나라에 와서 굉장히 비참한 동포들의 모습, 이런 것들에 충격을 받고, 또 어떤 민족적인 감성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달라진 거죠. 아까 제 말로는 사회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꾸만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 책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서간집이 저의 사상이라…. 저는 제 사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나의 주장'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옥중에서 법원에 제출하기 위해서 쓴 건데, 거기에 제 주장의 알맹이를 민족주의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건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민족에 대한 사랑이나 그 감성만 가지고 무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라야 합니다. 저는 과학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사상에 심취했습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굉장한 딜레마에 휩싸인 거죠. 과학을 가지고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대로 해결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는, 그리고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축적되지 않는, 구체적인 사랑이 축적되지 않는 사상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은 그 회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에 쫓겨 사고의 진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일에 쫓겨 가지고 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저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빠서 이런 논쟁을 할 시간이 없다” 할 때가 저는 대단히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구체적인 일에 열심히 몰두를 하면 회의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일이 쌓여 가는 과정에서 뭔가 세상을 보는 눈이 성숙되어가고, 그리고 사람이 일한 것이 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천적으로 쌓아지는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사상을 형성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저는 그런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사상 혹은 생각에 녹아 있는 어떤 알맹이가 뭐냐 하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3-4년까지만 해도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대답을 했겠는데요. 지금은 그렇게 대답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바빠서 그저 최소한 먹고 살 것만 털어놓고 이 열심히 이것(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 속에서 뭔가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이 그런 경험의 축적 속에서 방향이 수정되어갈지도 모르고 혹은 더 성숙되어갈지도 모른다, 하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기독교세계관학교인데요. 저는 중요한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먼 데를 바라보지 않고 가까운 일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잘못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먼 데를 바라보는데 가까운 일을 열심히 하게 되면 먼 데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회의는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하고 저하고 생각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물론 신앙은 다릅니다. 그러나 저는 입장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 사상이 다른 사람, 신앙이 다른 사람과도 얼마든지 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 공감을 느끼느냐 하면,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 구체적인 하나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하나의 일에 대하여 분개할 줄 알고 구체적인 하나의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하고도 사상이 다르고 신앙이 다른 사람하고도 동질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렇습니다. 오늘 어떤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할 자신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했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다고 이해해주십시오.

김세준 선생님께서는 앞에서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어떤 인간적 예수의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구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었거든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하나고, 또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예수상과 우리가 기존의 보이는 교회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수상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예수상.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어떤 정체성을 더욱 살필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준식 김세준 씨의 질문은 말하자면 젠장맞을 욕심이라는 겁니다.(웃음) 엄청난 욕심을 부리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되었는지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다음 번에 강의를 하시게 될 박성준(당시 목사, 현재 퀘이커 교도) 선생님과 제가 굉장히 친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장은 제가 잘 이해 못 합니다. 그분보다도 어쩌면 제가 더 신앙적입니다. 그분은 신앙은 제가 뭐 깊이 그분의 사상을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생활의 문화다' 그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은 생활의 문화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신앙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물론적인 유물론자였다가 유물론에 대해 회의를 느낀 이유,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제가 공부하고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 속에 인간애, 바로 이웃에 있는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다뤄주는 장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남성적인 기질만 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왜 남성적이냐 하면, 어떤 섬세한 부분이 없는 겁니다. 섬세한 부분이 없고 과학적으로 딱딱 들어맞으면서 다이나믹하게 다이나믹하게 빨리 전개되는 사랑입니다. 사회변혁사상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리고 또 아주 철학적으로도 그런 성격을 갖고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이 쌓이지 않으면 그런 사회변혁사상이라는 것이 뭔가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마르크스처럼 지적인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기 때문에 아마 그럴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생각 안 했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남긴 서간집이라던가 그런 것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이 그런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서 저 자신의 성격으로 봐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라가면 저 자신이 큰일 나겠다 싶었기 때문에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다만 단지 이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된다고 생각을 했나하면요, 간단하게 설명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사회적인 조건이 성숙되는 시기에 인간은 사회를 변혁시킵니다. 사회구조의 질이 달라지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 또 새로워진 질의 사회를 끌어당깁니다. 인간이. 근데 또 쭉 살다보니까 또 어떤 성숙된 조건에 의해서 다시 사회를 변혁시킵니다. 다시 인간이 또 새로운 사회를 당깁니다. 인간이 어떤 사회를 당길 때마다 인간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이라는 것은 인간을 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전제이지 의식이 전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유물론에는. 아주 통속적으로 이야기해서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 하는 것이 유물론의 사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환경이 아닌 인간이 의식적으로 노력해 가지고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볼 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주위의 환경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세의 농경사회에는 농경사회적인 삶의 의식구조가 있고 행동양식이 있고, 그런 것들이 지금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가령 예를 들어서 제가 고민했던 것은 이기주의의 문제입니다. 사회주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고도로 도덕적인 사람이라야만 그 속에서 적응할 수 있고 지탱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면 안 되는데, 욕심 부리면 안 되는데, 욕심을 부리면 사회주의적인 체제가 무너집니다. 그것은 요즘 동부라던가 소련 중국 그런데서 자꾸만 무너지는 것, 그것을 봐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없어질 수 있는가? 그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버릴 수 있다, 다만 제로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변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변하는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도 변하지만, 그러나 노력에 의해서 변하는 부분은 미미한 부분이다. 사회 구조가 변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의 정도가 변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통속적으로 중세 농경사회에 사는 사람의 이기심과 그리고 지금 고도로 발달된 이 산업문명에 사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비교해봐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또 산골 인심과 도시 인심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기심이 제로가 될 것인가, 이기심이 사회가 변하면 어느 정도 속도로 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올 수 있는가, 그런 문제가 의문스러울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분명히 마르크스의 문제, 변혁이론을 지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충족된 조건 속에서 인간이 사회를 변혁시킨다. 인간이 그 속에 담기면 과거에 있던 인간과 다른 인간이 됩니다. 조금이지만,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지만. 그리고 또 인간이 사회변혁을 합니다. 사회에 스스로 변혁하는 사회에 스스로 담기면, 담기고 또 오래 동안 가면 인간이 또 변합니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거쳐 가지고 이 땅의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기본적으로는 지지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지하면서도 불안한 겁니다. 그런 이론만 믿고 거기에 덮어놓고 따라가기가 불안한 겁니다. 말하자면 아까부터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바로 이웃에 있는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쌓아가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이론만 따라가다가는 나 자신이 뭔가 무서운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시각에서 저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예수는 사람이냐 신의 아들이냐 하는 문제는 저도 워낙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지만 그러나 적어도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상대화해야 한다. 겸손이라던가 이웃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한때 바로 저의 옆에 있는 사람을 왜 이렇게 미워해야 하는가, 왜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같이 아껴야 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요, 제 경우에는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들을 저는 그렇게 썩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이거 뭐 고해성사처럼 되어버렸네요(웃음). 왜 그러냐면요,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들은 거의 다 저하고 세대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장기수들입니다. 30년, 40년을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사회주의자가 됐거나 아니면 해방 직후에 사회주의자가 됐거나 전쟁의 와중에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회주의자가 된 시기는 스탈린 시기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은 저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 같은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사회주의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상황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도, 바로 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미움이 앞섰을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랬을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만약에 전쟁 때 살았으면 말입니다. 그런 분들하고 정서가 안 맞고, 안 맞는 과정에서 굉장히 고민을 했고, 그런 분들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리고 무의식 대중, 교도소에서 무의식 대중은 누구냐, 교도소에서 무의식 대중은 말단 간수와 그리고 청소를 하러 왔다갔다하는 잡범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간수들은 우리에게 해코지를 합니다. 빨갱이라고 해서 해코지를 합니다.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간수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간수들이 적이냐 대중이냐 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저는 간수들은 대중이라고 봤습니다. 무의식 대중이라고 봤습니다. 우리가 무의식 대중은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이 없는 대중인데,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해방되고싶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박해를 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저는 이런 사람들을 어디까지나 대중이라고, 마지막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제가 살고 있던 다른 사람들하고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그 같이 사는, 그 징역을 같이 사는 사람,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랑 사람들과 정서가 맞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대중들 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청소하면서 해코지하고 욕이나 하는 그런  잡범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이 부분에서 저는 인간적인 한계, 벽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벽 같은 것을 느끼고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나는 실천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무슨 주의자가 됐든, 이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거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나 자신을 상대화해야 하는데, 나 자신을 상대화할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무언가가 있어야 상대가 되는 거죠. 나 혼자만 있으면 상대화가 될 수 없죠. 그러기 위해서 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은 우리를 상대화해주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신이 없으면 자기가 절대자입니다. 그리고 신이 있으면 신과 비교하면서 자기가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는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앙은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앙도 역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예수는 항상 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화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분명히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다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신앙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것은 유물론적인 것하고, 그러니까 객관주의하고 주의적인 것 주관적인 것, 이것이 절묘하게 예수 속에서 혼재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통속적인 유물론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그 어떤 인간해방운동 속에서의 실존입니다. 하나의, 거의 완벽한 실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모습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를 생각했을 때 예수는 신 때문에 그랬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에게 만약에 신이 없었더라면 예수는 그렇게 절묘한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 없이 반쪽으로 살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굉장히 추상적으로 되었는데요. 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시간도 아깝고 또 구체적으로 설명할 시간도 없습니다. 예수의 어떤 부분이 유물론적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저한테 묻지 마시고 다음 번에 강의하실 박성준 선생님한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고민을 하면서 신앙을 가지려면 유물론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저를 키워준 것이 유물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를 키워주었고 그리고 제가 그 비참한 사회 상황 속에서 그  불행한 사람들, 즉 핍박받고 힘든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동정심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람들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유물론 철학 덕분입니다. 저를 키워준 그 유물론 철학을 지금 내가 신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가 있는가. 이런 문제가 굉장히 고뇌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어떻게 했는가. 유물론도 잡고 신도 잡을 수 있지 않느냐, 신앙도 잡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유물론자도 신앙을 잡을 수가 있을 것 같다는데서 제 사색은 끝났습니다. 이 유물론의 반대개념은 관념론입니다. 그리고 무신론의 반대개념은 유신론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물론으로 있으면서도 신앙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가령 신의 은총이라던가 섭리라던가, 그런 부분은 제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려고 하다하다 안되니까 신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지, 신의 은총이라던가 섭리 그것을 느끼는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것은 느껴봤습니다. 제가 감옥 안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해방신학이라던가 민중신학 같은 그런 계통의 책을 모두 불허 당했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전혀 못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 덕분에 많은 사색을 했다는 것, 가령 예를 들어서 예수복음서를 읽으면서 뭐가 딱 느끼는 거 올 때 “아, 기독교인들은 이런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은 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은총인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는 세리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세리를 왜 사랑해야 합니까. 세리는 여러분께서 알다시피 로마제국의 세금징수인인데, 로마제국의 따까리입니다. 말하자면 하수인입니다. 세리를 유태인이 했다는 말이죠. 근데 그 당시 세리들은 민족반역자 아닙니까? 일제 시대 우리 나라에서 보면 일본순사가 되었던 조선 사람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리가 그런 역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세리를 사랑해야 하느냐 . 아마 그 당시 유태인들 중에는 거의 다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롯당이던가.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정치적인 래디컬적 운동을 시도했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 정치적인 문제가 깨어져 버리면 예수처럼 강하지 못했을 겁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처럼 그 단단한 것을 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쨌든 제롯당은 세리를 증오했을 겁니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 순사나 경찰들을 데려다가 처단했듯이, 그 처단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처단은 아주 악질은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증오를 하면서 처단하는 것과 그리고 우리 뭔가 깊은 역사적인 인식 아래 처단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세리를 사랑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감옥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교도관들, 간수들, 불쌍합니다. 간수들은 항상 우리를 핍박합니다. 우리를 끌어다가 두들겨 패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관련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서대문구치소가 독립문에 있는 데에, 제가 미결 때 거기 살았습니다. 거기서 간수가 아래 위층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야간 근무할 때 심심하니까. 죄수들은 전부 다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고 있지 않은 사람만 아래 위층에서 근무하는 간수가 두 사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죠. 근데 한 간수가 말하기를 다른 간수에게 '자네는 바깥에서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래?' 그랬다구요. 그러니까 '그런 거 뭐라고 묻느냐' 하니까, 그거 물었던 사람이 항상 남편 직업을 사람들이 물어봐서 아주 곤란하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위층에 있는 간수가 뭐라고 그랬냐 하면, 우리 마누라는 누가 남편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아, 법무부에 근무합니다' 그렇게 대답한데요. 그러니까 '법무부에서 어떤 직책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데요. 그러니까 '한 250명 데리고 있습니다'라고 한데요. 거기에 간수들의 애환 같은 것이 그대로 스며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굉장히 불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불쌍하다기보다도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꾸만 이 사람들이 무의식 대중이라는 겁니다

제 이야기는, 무의식 대중이라고 생각한 이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간수들에 대한 측은함이 뭔가 가슴에 와 닿을 때, 이 때 저는 예수가 세리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던 뜻을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같은, 비슷한 뜻일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느낌 딱 올 때 이럴 때, 말단 간수들에게 얼마나 잘해줘야 하는가 새삼 깨닫게 되고, 그런 때 뭔가 제가 한 사람의 사회운동가로서 조금 성장했다 하는 느낌이 오고, 이런 것들이 따뜻한 교도소 운동마당을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운동마당에서 이런 사실을 홀연히 느꼈을 때 '아, 이거 은총이다' 하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은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니까 은총이 뭔지 배운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를 많이 배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누가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들, 이러한 차이들에 대해 사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일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가령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고, 마가복음에서는 그런 건 없고,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예수가 어느 말을 했는가?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했던 말이 옳은가 누가복음에서 한 말이 옳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마태복음에서는 산꼭대기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은 편지를 통해 복음을 썼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냥 신앙이니까 그냥 믿어버리면 된다는 생각, 저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는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자기가 뭔가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앙으로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 실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 이런 문제를 알려고 하는데, 머리로만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 그리고 신앙의 경험, 역사적 경험, 사회적 경험, 그런 것들을 가져다가 전력으로 그 안에 투입해야 합니다. 복음서 속에 나 같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 것인가? 예수가 만약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야기했겠는가? 그런 것을 알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은 제가 살아온 모든 지금까지 살아온 45년간을 축적한 치열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외쳤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도소에 있을 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무조건 뭔가 덮어놓고 '나는 이 사람들 편이 되고 싶다' 하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뭔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들을 볼 때 이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덮어놓고 이 사람들 편이 되고 싶다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할 필요 없고 또 두서도 없으니까. 너무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김세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리스도인이 되실 것 같습니다.

서준식 김세준 씨는 아직도 꿈에서 못 깨어나는군요.(모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