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호 목사님 (1919-2012)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종교에 대한 사색김흥호 목사님 (1919-2012) 이야기 당포 ・ 2018. 12. 4.
김흥호 목사님 이야기
다석 유영모(柳永模) 선생님 현재 김흥호 목사님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구도자인 김흥호 목사는 유교, 도교, 불교를 모두 넓은 품에 안은 ‘기독교 도인’이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양의 전통 종교를 섭렵한 개신교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의 제자였다. 그의 영향을 깊게 받아 기독교적 입장에서 타 종교를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1965년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일요강연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교, 서양철학까지 다양한 경전과 고전을 넘나드는 ‘연경반(硏經班)’이었다.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연경반 강연은 2009년 12월 ‘마지막 수업’까지 무려 45년간 이어졌다. 여기에는 수십 년간 참석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김 목사는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기독교 목사였다. 평양고보,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고,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교목실장,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35세 때인 54년 김 목사에게 닥친 ‘시간제단(時間際斷)’ 체험, 즉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인은 신앙인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기독교든 불교든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활활 타는 스타일은 기독교로, 맑고 청정한 상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교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체험은 깊게 들어가면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확신이 있어 가능한 말이다. 불교 경전을 강의하는 이유에 대해 “기독교보다 불교가 이론적으로 잘 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사명을 갖고 태어나는데,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사명은 가르치는 일이라는 자각에 따라 강연을 하고 책을 썼다. 특히 55년간 일일일식(一日一食), 하루에 한 끼씩만 먹으며 강연에 매달린 이력은 유명하다.
<김흥호 목사가 남긴 말>
• 동양인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體) 받아 하나님의 도를 체득하는 것이다. 체득이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동양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체득의 종교이다. 율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복음은 체득이지 체득이 아니면 복음은 지식에 불과하다.” (설교집 <영원을 사는 사람> 중)
• “진리를 깨달아야 인간이 된다.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아직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성인(聖人)의 특징은 자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 힘으로 무아가 되면 그것은 유아(有我)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교의 생로병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김흥호 목사연구모임 ‘현재학회’ www. hyunjae. org에서 발췌)
• “한 끼 먹는다는 것은 한 번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먹는다. 그런 뜻이다. 일식이 영식(靈食)이 돼야 한다. 한 번 먹는다는 것에 매달리면 율법주의가 된다.” (숭실대 교수신앙 수양회 강연 중)
• 일반적으로 불경은 석가 사후 400년 내지 500년만에 나왔다. 석가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그 당시 글 잘 쓰는 사람들, 사상가들이 그것을 문학적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든 것이다. ‘논어’는 제자와 스승이 질의응답을 한 내용이다. 그런데 불경은 석가가 죽은 지 500년 후에 제자들이 문학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러니까 불경은 하나의 작품이지 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경전이 많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성서에서 예수님은 늘 하느님의 나라를 말했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어떠하다고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세계는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가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의 요한계시록 같은 것도 모두 문학작품이지 사실은 아니다. <화엄경>은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더 다르게 말하면 인격의 이야기요. 더 다르게 말하자면 이것의 나의 이야기다. 내가 인격이지 나를 떠나서 어디에 인격이 있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내 인격 속에서 느꼈을 때 <화엄경>이 이해되는 것이지 내 속에서 그 인격을 느끼지 못하면 <화엄경>이라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김흥호 목사님은 도인이자 철학자. 35세 때 주역(周易)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이다. 하루 한 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김흥호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 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었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돼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했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돼 돌아왔다.
“自性을 보았는가?”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松永)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Butler University)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해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돼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했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사상(三才思想)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일좌(一坐) 일인(一仁) 일식(一食) 일언(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다석일지(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해 기록했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난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했다.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 일언생사통(一言生死通)
일좌천지통(一坐天地通) 일인유무통(一仁有無通)
그는 스승 다석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해 일일일생(一日一生)의 삶을 살고 갔다. 봄인 새벽에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여름인 낮에는 열심히 일하며, 가을인 저녁에는 한 끼 식사를, 겨울인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하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했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ㆍ불ㆍ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단단무위자연성(斷斷無爲自然聲) -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즉심여구토성불(卽心如龜兎成佛) -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삼위부활영일체(三位復活靈一體) -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천원지방중용인(天圓地方中庸仁) - 하늘과 땅의 진리는 중용지간에게서 구현된다.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했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ㆍ불ㆍ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 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다석 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일원다교(一元多敎)라고나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김흥호의 말이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에고(ego-자아)를 죽이는 것이잖아요. 기독교의 ‘날 버려라’, 불교의 고집멸도(苦潗滅道), 공자의 극기(克己), 노자의 무사(無私)가 다 에고를 죽이라는 말인데, 나는 천안농장에서 어지간히 그 연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려면 에고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에고는 거짓 나죠. 그게 죽는 자리에 ‘참나’가 들어서는 겁니다. 천안역 앞에서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거지가 천사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손이 하늘나라 시민증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손을 내밀면 천국시민이고 외면하면 아닌 거죠. 김용옥은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면서 큰 가르침을 얻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스승 유영모와 제자 박영호의 신관이다. 보수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어느 종교든 결국 다 같다는 것이니 다원주의니 혼합종교니 하며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종교계 내부에서도 서서히 그들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시켜 놓으신 분이 다석 선생님이죠.”
김용호 목사의 저서에는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한 아홉 권, <장자>를 해설한 10여 권, <주역강해> <화엄경강해>, <법화경강해>, <원각경강해> 요한복음 강해집 <빛, 힘, 숨> 전 5권 설교집 <사람 삶 사랑>, <하루를 사는 사람>, <영원을 사는 사람> 등이 있다. <화엄경 강해>는 불교경전 중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화엄경> 80권에 대한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 <화엄경 강해> 3권으로 출간된 책이다. <화엄경 강해>는 3년여에 걸친 김흥호 목사의 강의를 그대로 우리말로 풀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읽기도 쉽고 이해도 쉬워 처음으로 <화엄경>을 접하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화엄경강해> 서문에서 김흥호 목사는 "부처님은 자신을 안 사람이다. 노자도, 공자도, 예수님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들의 경전을 읽는 것은 그 속에서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김 목사가 동서양의 경전과 종교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것은 '종교와 종파, 철학과 학파를 초월해 개개인이 내면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눈 뜬 사람'으로 표현한다. 진리에 눈 뜬 사람이란 뜻이란다. "불교에선 ‘피안(彼岸)’이라 하고, 기독교에선 ‘하늘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김흥호 목사께서는 학자답게 ‘이상세계’라고 말한다. 이상세계는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세계다. 눈 뜬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이상세계요. 눈 뜬 사람이 되기 위해선 눈 뜬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원각경 강해>는 불교경전 중에서 중국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원각경>에 대한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 <원각경강해>로 출간된 책이다. 원각(圓覺)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이다. 원(圓)은 대(大)와 같으며, 각(覺)은 학(學)이다. 또한 원각(圓覺)을 중용(中庸)이라 번역하면 원(圓)을 중(中)으로 각(覺)을 용(庸)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원각(圓覺)을 도덕(道德)으로 본다. 원(圓)이 도(道)이며, 각(覺)이 덕(德)이다. 모든 종교나 철학은 다른 종교나 학문을 수용해야 살지 그렇지 못하면 죽고 만다. 중국의 종밀(圭峯宗密, 780~841)이란 선사가 선과 화엄의 대가가 돼 유교와 도교를 다시 연구해 재해석하여 불교 속에 유교와 도교를 다 수용함으로써 결국 당나라를 불교 일색으로 만들었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이며, 오산학교의 교육자이기도 했던 다석 유영모는 우리말과 글로 철학을 했던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1959년 <노자(老子)>를 순수 우리말로 완역하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노장사상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독파했다. 특히 그는 유ㆍ불ㆍ선(儒佛仙)이 살아있는 한반도의 토양 위에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한국적 기독교’를 연구한 비교종교학 연구가이자 수행적 실천가였다. 유영모에 의해 수용된 기독교 사상은 자연에 대한 우주론과 ‘무(無)’ ‘공(空)’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 동양적 사상과 결합됐다. 때문에 제의적이며, 도그마적이고, 종말론적 인식을 담고 있던 서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와 석가가 말한 ‘니르바나’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얼 사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재해석한다. 때문에 그가 보는 기독교는 한 개인이 그것을 수용하는 의미를 넘어서 그 땅과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 제국주의적 기독교가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고, 다른 모든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 제국주의적 기독교가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고, 다른 모든 문화는 ‘주변 문화’로 간주되며, 계몽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유영모는 그 속에서도 토착신앙과 기독교의 결합을 고민하며 독자적인 종교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기독교 내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종교나 각종 사회문제 등 기독교 밖의 문제는 등한시하거나 배타적 태도로 일관하는 2016년 대한민국 종교 현실에서 다시금 그를 떠올려 보게 된다. - 안혜숙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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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성경 넘나드는 道人목사 김흥호
김홍근
입력2006-07-28 10:21:00
https://shindonga.donga.com/people/article/all/13/100826/1
목사이기 이전에 도인이자 철학자. 35세때 주역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
하루 한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노스승의 悟道頌(오도송).
김흥호(金興浩·81)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본질은 ‘나를 보고 나를 아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며, 외적으로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힘이다. 불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법보시(法布施)라고 하지만, 김교수도 평생을 강의하는 데 바쳤다. 한국 정신계의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붕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풍경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渾身似球掛虛空 혼신을 다해 허공에 매달려
一等爲他談般若 오로지 이웃을 위해 말씀을 전하네
東風西風南北風 동에서, 서에서, 남북에서 불어올 때마다
滴了滴了滴滴了 딸랑 딸랑 딸딸랑 (여정의 풍영시, 한글 번역은 필자)
그리고 그 고요한 풍경 소리의 여운은 잎이 다 떨어져(樹凋葉落) 발가벗고 서서 늦가을 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채(體露金風),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빨간 홍시로 연결된다. 언젠가 젊었을 때 그가 쓴 아래의 글은 이제 팔순 고개를 넘은 그에게 그대로 자화상(自畵像) 같아 보인다.
지붕 위에 감이 새빨갛다. 다 익은 것이다(盡性).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仁)이라고 한다. 자기 속알(德)을 가진 사람이요, 지붕 위에 높이 달려 있는 감처럼 하늘 나라를 가진 사람이다. 사랑의 단물이 가득 차고 지혜의 햇빛이 반짝이는 높은 가지의 감알, 그것이 어진 사람이다. 완성되어 있는 사람, 성숙해 익은 사람, 된 사람, 다한 사람, 개성을 가진 사람, 있는 곳이 그대로 참인 사람(立處皆眞), 언제나 한가롭고(心無事) 어떤 일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事無心),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 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平常心), 더 준비할 것이 없는 사람(無爲),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命) 말이 쏟아져 나오고(道)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인이라고 한다. 인은 된 사람이다. (‘생각없는 생각’, 김흥호, 솔刊, p.16)
어질 ‘인(仁)’은 ‘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알의 감에 성숙한 인격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 글은 목사인 그가 가슴속에 담고 있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그 감은 자신을 인간의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그러나 “김흥호 교수의 글은 그 글이 그대로 그 사람임을 나는 믿습니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되어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온다.
“自性을 보았는가?”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같은 학교의 이효재, 이남덕 교수 등과 동양고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 특강을 했는데, 교목(校牧)이 된 후 강의원고를 풀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2년간 개인월간지 ‘사색’을 발행한다. 그 잡지의 권두언을 읽던 변선환은 그 글이 ‘김흥호라는 한 한국인의 마음에 비친 그리스도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하여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흥호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품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본가가 있던 고향 대동강 두로도(豆老島)에 돌아오면 마을 교회에서는 14살에 불과한 그를 평양고보생 인텔리라 하여 설교를 시켰다. 독립지도자로 활동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김흥호가 10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당신이 세운 교회의 강단에 섰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설교를 하는 진땀나는 경험을 한 김흥호는 그 뒤 틈날 때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기록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 강단에 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평양 남사현 교회에서 이윤영, 이완식, 홍기주, 홍기횡, 최근필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 ‘나가자!’를 듣고 깊이 감동받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남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는 내심 무척 괴로워한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흥호의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으로 세 차례의 굴곡을 겪는다. 먼저 10대 후반에는 당시 식민지 체제하에서 의기소침해진 한국인들을 고무하기 위해 크게 유행하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강의를 듣고 신앙적으로 새로 눈뜨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 선생들의 전집을 탐독하면서 기존 부흥회식 기독교, 즉 ‘유(有)교회적 입장’에서 양심에 따른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無)교회적 입장’으로 옮긴다. 이 입장은 후에 다석 유영모를 만나면서 유와 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가온(中)교회적 입장’으로 승화된다. 그는 다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릴 때부터 품어온 문제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를 풀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그는 정인보 선생을 찾아가 선생의 소개로 국학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을 한 후 철학개론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나이 많은 학생 중에는 ‘주역’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고 해서 동양철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먼저 정인보 선생에게서 양명학을 배운 뒤, 이광수를 찾아간다.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고당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유영모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시계 같은 분’으로 부르며 외경하고 있었다(당시 함석헌은 4학년생이었다). 춘원은 김흥호에게 다석을 추천했고, 정인보 선생도 다석에게 찾아가라고 권했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三才)사상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一坐 一仁 一食 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하여 기록하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란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하였다.
一食晝夜通 一言生死通
一坐天地通 一仁有無通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斷斷無爲自然聲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卽心如龜兎成佛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三位復活靈一體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天圓地方中庸仁 하늘과 땅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구현된다 (한글 번역은 필자)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 불, 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1970년대에는 난곡 김응섭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1984년 65세로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해 영국으로 가서 재영국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동양고전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과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첫 시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둘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 내용이 동양적 정서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그 동안 강의해온 동양고전은 왕양명의 ‘전습록’ ‘주역’ ‘다석일지’ ‘도덕경’ 등으로 제자들이 구술한 것으로 솔출판사에서 전 30권 분량의 ‘김흥호 전집’으로 발간중이다(현재 6권 발간). ‘견성(見性)한 목사’ 김흥호가 남긴 말은 21세기의 본격적인 종교 교류시대에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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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간다고 믿는것 아냐..." _ (故 김흥호 목사)
출처: [중앙일보] 입력 2007.10.11
새하늘교회 게시판
날짜 : 2015. 07. 26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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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ew-heaven.or.kr/core/mobile/board/board.html?Mode=view&boardID=www40&num=1159
“교회 나간다고 믿는 것 아냐 … 내 안의 악마 짓밟아야 믿는 것”
“예수의 부활이 뭔가. 몸이 다시 살아났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그걸 따져보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의 신학대학원 지하 강당. 일요일 아침인데도 강당은 꽉 찼다. 어림잡아도 100명이 넘었다. 다들 김흥호(88·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목사의 ‘일요 강연-신약성경’을 들으러 온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일요 강연’을 시작한 지는 40년이 넘었다. 올 하반기가 마지막 강연이라고 한다.
김 목사는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영성가이자, 신학자이자, 구도자다. 유(儒)·불(佛)·선(仙)에도 통달한 그를 일부에선 ‘기독교 도인’이라고도 부른다. 강당을 가득 채운 청중의 수준도 만만찮다. 셋 중 하나는 대학교수라고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 편안하게 낮잠을 자겠다고 예수를 믿는 건가. 그건 아니다. 지금은 일을 많이 못하지만, ‘나’도 예수처럼 부활해서, 지금보다 높은 차원이 돼서, 더 많은 일을 해야겠다고 예수를 믿는 거다.”
그의 강연은 차분하고 힘이 넘쳤다. 또 ‘숨결’도 있었다. 그 ‘숨결’은 끊임없이 꿈틀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아서 펄떡거렸다. 7일과 지난달 30일, 이틀에 걸쳐 강의가 끝난 그와 마주 앉았다. 아흔을 내다보는 나이, 청년 못지 않게 정정한 그에게 ‘인간’을 묻고, 또 ‘신’을 물었다.
-예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이다.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나오든, 안 걸어나오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게 미라가 다시 일어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럼 묻겠지.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 바로 ‘내 안’에 살아야 한다. 나는 오늘 강연을 하려고 평택에서 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왔다. 그때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거다. 내가 지금 말을 하고 있지 않나. 이 순간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거다.”
-그럼,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나.
“내 안에 있다.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그걸 매순간 느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아무리 믿지 않으려 해도, 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면 무엇이 달라지나.
“한없는 기쁨이 생긴다 이거지. 거짓말 안 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어 진다 이거지. 조금이라도 여러분을 도와주고 싶어진다 이거지. 뭔지 모를 기운이 내 안에서 계속 뿜어져 나온다 이거지. 나는 그걸 ‘기쁨’이라고 부른다.”
-어릴 적 목사님은 병약했다고 들었다.
“나는 병이 참 많았다. 1년에 두 달은 아파서 학교에 못 갔다. 죽을 고비도 네 번이나 넘겼다. 그러다 35세 되던 해 3월17일 오전 9시5분에 ‘나’를 알게 됐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도 ‘본래적인 자신’을 알라는 얘기다. 그때 내 삶이 바뀌었다. 35세 이전에는 ‘내 힘’으로 살았다. 그러나 35세 이후에는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 그래서 행복하다. 지적인 면, 정적인 면, 행적인 면 모두 말이다.”
-‘나’를 안 그 순간은 어땠나.
“시간제단(時間際斷·시간의 끊어짐)이 일어난다. 35세 전에는 고민이 많았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리 믿으려고 애를 써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시 키에르 케고르, 하이데거 등 실존과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생각은 끊어지지 않았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생각은 끊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35세 때 생각이 ‘딱!’ 끊어졌다. 그때 ‘실존’을 알게 됐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실존’이 이것이구나를 알게 됐다.”
-그 ‘실존’이란 무엇인가.
“진실된 존재다. 거짓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게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다. 35세 전의 ‘나’는 거짓 존재였다.”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들었다. ‘1일1식(一日一食)’한 지는 얼마나 됐나.
“올해로 45년이 넘었다. 몸이 약해 사람들은 내게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1일1식’한 뒤로 병이 없어졌다. 오히려 내 안에서 에너지가 샘솟는다.”
-‘1일1식’을 시작한 이유는.
“스승인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도 1일1식을 했다. ‘다석(多夕)’이란 호도 ‘夕(석)+夕(석)+夕(석)=多夕(다석)’해서 ‘하루 세 끼를 한 번(저녁)에 먹는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유영모 선생은 ‘1일1식’하며 하루 10시간씩 강의했다. 그만큼 에너지가 나온다. 다석 선생은 인도의 간디가 ‘1일1식’했다는 얘길 듣고 “비결이구나”라며 시작했다. 석가도 ‘1일1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스승을 따라 ‘1일1식’을 시작했다.”
-목사님은 기독교인이다. 왜 유·불·선을 공부했나.
‘나’를 알기 위해서다. 과거 우리 역사에는 도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었다. 그게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바로 조상의 삶이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의식 속에는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도교도 있다.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서 공부했다.”
-철학과 과학, 예술과 종교도 얘기한다.
“철학을 모르면 ‘나’를 모르고, 과학을 모르면 ‘물질세계’를 모르고, 예술을 모르면 ‘아름다움’을 모르고, 종교를 모르면 ‘생명’을 모른다. 그러니 철학도, 과학도, 예술도, 종교도 알아야 한다. 65세 정도 되니까 할 일이 없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틀린 얘기다.”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욕망은 뭔가.
“식욕과 성욕이다. 그런 욕망이 내 속에 있는 ‘악마’다. 성경에도 ‘악마는 늘 집에 있느니라’란 구절이 있다. 무슨 말인가. 집안 식구가 ‘악마’란 얘기다. 그럼 ‘악마’가 어디에 있겠는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 악마가 있으니, 집안에 있는 악마에도 걸리는 것이다. 내 안에 악마가 없다면, 집안의 악마에도 걸릴 일이 없게 된다.”
-그 악마를 어찌해야 하나.
“교회에 나간다고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다. 바로 내 안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안의 악마를 짓밟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온다. 그래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다. 예수가 누구인가. 자기 속의 악마를 이긴 자다. 그래야만 세상을 이긴 자가 된다.”
-성경에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구절이 있다. ‘거함’의 의미는.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게 마음속에 거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되면 깨닫게 된다. ‘내가 예수님의 생각과 같이 생각해야 하는구나.’ 그러나 그게 내 힘으로 안됨을 알게 된다. 자력(自力)으로 안됨을 말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를 절감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놓아야 한다. 그 순간에 시간이 제단된다. 그렇게 시간이 끊어진다. 그리고 매순간 타력(他力)을 느끼며 살게 된다. 그게 ‘성령의 숨결’이다. 시간제단을 경험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불교에선 ‘돈오돈수(頓悟頓修·깨치면 더이상 닦을 것이 없다)’와 ‘돈오점수(頓悟漸修·깨친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한다)’ 논쟁이 여전하다.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나.
“물론이다. ‘돈수’니 ‘점수’니 하는 건 한가한 얘기다. 헤엄을 쳐서 태평양을 건너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게 자력이고, 그게 점수다. 그럼 ‘돈오’는 뭔가. 헤엄을 치다가 큼지막한 배를 타는 것이다. 배를 탄 세계는 어떤가. 한없이 평화롭고, 한없이 자유롭다. 반면 헤엄을 쳐서 태평양을 건널 때는 어떤가. 늘 공포와 불안, 절망 속에 잠겨 있다. 둘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다가 배를 탔는데 다시 헤엄을 치겠다며 내려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그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왜 간격이 존재하나.
“담벼락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담벼락을 깨야 한다. 그 담벼락이 뭔가. 바로 ‘죄’다. 탐욕과 식욕, 성욕 같은 욕망이 모두 담벼락이다. ‘하나님’과 ‘나’를 막고 있는 담벼락이다. 그걸 치워버려야 ‘하나님’과 ‘나’가 하나가 된다. 그게 바로 율곡(栗谷)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둘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