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1

업 - 위키백과, 카르마 인과(因果)의 연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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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 산스크리트어कर्म 카르마)는 인도계 종교에서의 인과율 개념이다. 원래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서 인과(因果)의 연쇄관계에 놓이는 것이며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기에는 과거 · 현재 · 미래와 같이 잠재적으로 지속하는 일종의 브라만교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의 카스트에 태어난다는 것도 그에 상응하는 전생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 사상은 광범위하게 인도 제종교의 전체 속에 들어 있어서 불교 및 자이나교에서도 특색있는 업설(業說)을 전개하였으나, 인도사상의 정통(正統)인 브라만교나 힌두교에서 가장 강조되었다. 
초월적인 힘이 감득(感得)되어 있으며 흔히 시간(時間: Kala) · 천명(天命: Daiva) · 천성(天性: Svalhava) 등의 말로 표현되고 있다.

각 종교별 윤회[편집]

힌두교[편집]

힌두교에서 카르마는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윤회'를 낳는다. 이러한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카르마는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모든 카르마는 미래의 카르마의 씨앗이 되어 행위의 결과에 따른 그 열매로서의 결실은 기쁨과 슬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카르마는 도덕적 세계의 행위와 반작용의 법칙, 즉 뿌린대로 거두는 업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인간이 이 카르마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은 이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자기의 의식 속에서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 참 자아인 아트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에게 복종하고 선한 카르마를 낳고 나쁜 카르마를 소멸시킴으로써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일단 깨달음의 해탈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카르마는 형성되지 않는다.[1] 그러므로 《마하바라타》에서는 "업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가 없으며 그림자가 형체에 따라다니듯이 업은 서 있는 자의 곁에 서 있고 가는 자의 뒤를 따라가며, 행위하는 자에게 작용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입각한 행위론은 당연히 선업선과(善業善果) · 악업악과(惡業惡果)와 같은 윤리적인 인과의 법칙을 낳게 하였다.

불교[편집]

자이나교[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2020/09/10

希修 혼자 놀기: 같이 놀기만큼이나 중요한 생존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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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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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놀기: 같이 놀기만큼이나 중요한 생존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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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학교에 가면 담임 선생님이 자습을 감독하시다가 교직원 회의를 들어가셨다. 그리고 종이 치면 교직원 회의가 끝나 선생님들이 각자의 반으로 돌아와 아침 조회를 하셨다. 근데 그 조회 종이 울리면 나는 교실 뒷문 밖에 나와 있다가 복도 저끝에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는 순간 "선생니임~!"하며 달려가 안기곤 했다. 자습 시간에 이미 본 선생님인데 또 반가웠던 것이다, ㅋ. 이게 초1때였고, 고교 입학 전까지는 늘상 밖에서 고무줄 같은 거 하며 놀거나 아파트 잔디밭에서 친구랑 수다 떠느라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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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찌 어찌 전업주부로 살게 되고, 특히 둘째가 기저귀를 떼고 나자 갑자기 심신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 (한국에선 심심할 때마다 몇 시간에 걸쳐 동대문 시장 전체를 혼자 좍~ 훑던 나였는데, 미국에선 대도시에 살지 않는한 스트레스 받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월마트 구경밖에 없더라는.)



 죽지는 않을 일로 전신 마취 수술도 한 번 하고. 그래서 그렇게나 싫어하던 운동도 시작하고 (건강 안 좋을 때 운동 시작하니 첫 1년은 오히려 역효과가 느껴졌음.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이런 저런 사교 및 봉사 활동도 몇 년 열심히 하다가.. 내가 쏟는 노력만큼의 보람은 느껴지지 않아서 그 후론 히끼고모리처럼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해뜰 무렵 운동과 명상으로 한 시간, 해질 무렵 또 운동하고 뒷마당에 요가매트 깔고 누워 하늘 바라보며 멍때리기 한 시간,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훨씬 좋아졌다. 타고나기는 전형적인 외향형이지만 후천적으로 조금이나마 내향성을 갖추게 된 것은 물론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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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식료품점 제외 글자 그대로 올스톱 석달에

한국의 거리두기 3단계 수준으로 석달을 지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럴 예정인데,

한국은 거리두기 2~3단계로 3주 보내고서 '코로나 블루'가 기사화되는 것을 보니,

경제 문제로 스트레스 받거나 독거 생활을 하는 상황이 아니면서

단지 사교 생활의 제약 때문에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대인 관계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싶으면서,

당시엔 '실망'으로 느껴졌었지만

집에서 혼자 노는 연습을 미리 해 놓을 수 있게 해 준 이런 저런 경험들도

지나고 보니 모두 유용했구나 싶다.



관심사가 비슷한 분들을 만나게 해 주는 페북에게 특히나 고맙고.. 천성이 외향적이라 이 시기가 힘드신 분들, 관심 갖지 않았던 분야에도 눈을 돌려 새로운 흥미를 찾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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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인종별 자살률 한인이 1위 (2010), 한인 우울증 미국인 평균보다 두 배 (201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96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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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일이 없다… 외롭다… 한인 중년남 우울증 심각 (2016)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60416/98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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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자신과 잘 하고 있지 못하다면 남에게도 잘 할 수 없다. 우리가 혼자 있는 걸 피하려고 하냐면 자기 자신이 꼴 보기 싫기 때문이다." (2018)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033&fbclid=IwAR1ecSPgTX18dfWkzd1NUFLYfA-eTebtgXTKukOPVMRRXsBnEVL2UJvKn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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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50~60% '우울증 경험'…미국인 평균보다 두 배

KOREADAILY.COM

한인 50~60% '우울증 경험'…미국인 평균보다 두 배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인 비율이 여전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LA카운티정신건강국에 따르면 한인 10명 중 5~6명이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인 3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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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50~60% '우울증 경험'…미국인 평균보다 두 배

김형재김형재 기자



온더로드 9월과 노동절, 월 189달러에 만나는 9월 BEST 리스 딜

[LA중앙일보] 발행 2017/01/26 미주판 3면 기사입력 2017/01/25 20:21



사망 100명 당 자살율 최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인 비율이 여전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LA카운티정신건강국에 따르면 한인 10명 중 5~6명이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인 3명 중 1명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비율보다 두 배나 높은 것으로 한인 정신건강 관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LA카운티정신건강국 안정영 소셜워커는 "보통 우울증을 진단할 때 9가지 질문 중 7가지에 해당할 때 의학적으로 우울증 진단을 내린다"면서 "한인 상당수가 의학적인 기준의 우울증에 해당할 때가 많아 주요 관심 집단"이라고 말했다.



의학적 기준의 우울증 항목은

▶슬프고 울고 싶은 감정 

▶평소 흥미를 느꼈던 활동 관심 저하 

▶체중 및 식욕 변화 

▶과한 수면 또는 불면증 

▶무기력증 

▶자존감 저하 및 잦은 죄책감 

▶사고력 및 집중력 감퇴 

▶자살 등 죽음 관심 

▶삶의 의욕 상실이다.





안정영 소셜워커는 "위 항목에서 5가지 이상 증상이 2주가 넘도록 계속되면 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우울증을 겪으면 주변에 도움을 적극 요청하고 초기에 치료해야 자살 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LA카운티정신건강국은 우울증을 방치하면 자살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한인 우울증 환자 대부분은 마음의 병을 드러내길 꺼려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실제 2010년 사망자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인종별 사망자 100명당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인이 4.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당시 인종별 자살자 비율은 백인은 1.7% 흑인 0.8%, 원주민 3.2%, 중국계 1.6%, 인도계 2.5%, 베트남 2.0%로 각각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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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Dohee Kim

난 요즘 유튜브와 구글놀이한다. 시간가는 줄 몰라.

 · Reply · 4 h

希修

유투브 개미지옥 ㅎㅎ. 웃고 싶을 때는 최양락, 탁재훈, 신현준, 정준호, 박휘순, 김신영으로 검색해 보렴. ^^

 · Reply · 4 h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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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전통 문화가 가족/집단주의적이고, 가급적 동포들과 가까이 살거나 자주 교류하며, 이민자이자 유색 인종으로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다른 아시아계와 마찬가지인데도 유독 한인들의 우울증 비율이 훨씬 높은 건 걱정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네요...

 · Reply · 49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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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소설가, “좀 더 가난해도 좋고 더 고독해도 좋은데, 끝내 명랑하자”
 김상훈 기자 승인 2018.04.17


강연 중인 권여선 작가 <사진 = 김상훈 기자>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광명도서관이 제54회 도서관주간을 맞아 전시, 어린이 인형극, 캐리커처 이벤트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15일 도서관 강당에서 권여선 작가의 초청 강연회가 개최됐다. 

권여선 작가는 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으며,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작품 세계로 주목받았다. 제15회 오영수문학상, 제32회 이상 문학상,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제18회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최근 단편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선보인 바 있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없음을 즐기는 법 - 결핍과 고독”으로, 권여선 작가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생각한 결핍과 고독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 둘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좀 더 가난해도 좋고 좀 더 고독해도 좋은데, 끝내 명랑하자”

권여선 작가는 결핍을 물질적, 경제적 결핍으로, 고독을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있는 것,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상태로 정의하고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40대가 된 후 결핍과 고독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는 권 작가는 “일반적으로 결핍과 고독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 보편적인 조건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평생 함께 가는 조건이기에 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려 한다.”며 스스로에게 “더 가난해져도 괜찮다, 더 고독해져도 괜찮다”고 주문을 건다고 밝혔다.  

“좀 더 가난해도 좋고 좀 더 고독해도 좋은데, 끝내 명랑하자”를 삶의 화두이자 목표로 두고 있다는 권여선 작가는 고독과 결핍이 부정적인 상태가 아닐 수 있다고 강연을 풀어나갔다. 


마이크를 잡은 권여선 작가 <사진 = 김상훈 기자>
권여선 작가는 “돈은 없어도 고독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시다. 가족, 지인, 종교 활동, SNS 등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나는 별로 고독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일견 맞는 말이지만 끊임없이 고독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고 화두를 제기했다.  

권 작가는 “관계를 잘 맺는 것과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며 관계에 종속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라고 말했다. “관계를 맺을 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외롭지 않은 게 아니라 더 외로운 것이며,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외롭다”는 말이 적확하게 외로움을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한 권 작가는 고독과 외로움을 분리해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독은 “자발적으로 혼자 있고 싶은 상태, 혼자 있으며 고요한 상태를 즐기는 감정”이며, 외로움은 “자발적이지 않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혼자 있는 상태, 타의적으로 버림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고독이 긍정적일 수 있다고 말한 권여선 작가는 이어 결핍에 대해 이야기했다. “극빈과 빈곤의 상태를 벗어난다면 재산이 불어나도 행복감이 팍팍 불어나지는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조사의 신빙성을 떠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고 밝힌 권 작가는 “극빈의 상태가 아니라면 그 다음 욕망하는 것은 주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외부로부터 욕망을 자극받아 끊임없이 소비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한 상태가 관계 맺기마저도 자본적으로 이뤄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권 작가는 “더 가난해져도 된다는 말은 뭔가 악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해주는 게 좋다.”며 “더 가난해져도 괜찮고 나는 잘 할 수 있다, 더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에게 결핍의 그늘을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극빈과 빈곤의 상황, 결핍에서 벗어났다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관계 맺기다. 권여선 작가는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좋냐 나쁘냐를 따라 행복감이 생긴다.”며 “돈으로 매개된 관계,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각자 떠드는 관계, 남에게 보여주기만 하는 관계 모두 진심이 아니라 의미 없이 맺어진 관계이며, 이런 관계가 아무리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권여선 작가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이 바로 고독하기라고 말했다. 외로움과는 다른 상태인 고독을 통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언제 기쁜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인간관계를 맺어가기 시작하는데, “자기가 자신과 잘 하고 있지 못하다면 남에게도 잘 할 수 없다.”며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하면 안 된다. 우리가 혼자 있는 걸 피하려고 하냐면 자기 자신이 꼴 보기 싫기 때문이다. 자기와 잘 지내는 사람은 혼자 있어도 충만하다.”고 덧붙였다. 


광명 시민들이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
이날 강연에서 권여선 작가는 자신이 느꼈던 결핍과 고독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지 시민들에게 이야기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서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권 작가는 “책을 읽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면서 동시에 영혼이 나올 수 있는 방식.”이며 “독서란 혼자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한 권 작가는 이 ‘의미화 과정’이 “우리가 어떤 불행이나 절망에 빠졌을 때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엄청난 훈련이 되어준다.”며 책읽기를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광명 시민 6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됐으며, 작가 특강 이후에는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작가와의 대화, 사인회 순으로 이어졌다. 한편 광명도서관은 도서관 주간을 맞아 4월 25일에는 "토끼마을 노래자랑" 인형극을 광명도서관 강당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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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 네이버 블로그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오늘 들어가기 冒頭(모두) 강의는 

正名(정명)과 正命(정명)의 차이입니다.

正名(정명)과 正命(정명),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지요.


효자로도 유명한 曾子(증자)가 병으로 누웠습니다.

증자의 제자 樂正子春(악정자춘)이 병상 가까이 앉았고 아들인 曾元(증원)과 曾中(증중)이 먼 발치에 앉아 모셨으며 시중드는 童子(동자)가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갑자기 동자가 말합니다.

" 대부의 삿자리군요"

제자 악정자춘이 말합니다.

"그쳐라!"

증자가 혼미한 가운데서도 그 말을 듣고 "아아~"하고 탄식합니다.

제자 악정자춘이나 아들들은 그 동자가 한 말을 알았을 것임에도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나서느냐'하는 식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다시 동자가 

"아름답고 곱습니다. 대부의 싯자리군요" 합니다. 



실은 증자가 깔고 누웠던 삿자리는 대부가 증자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노나라의 최고 실권자이잔 고관인 대부 계손이 선물한 삿자리는 함부로 깔고 누울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마치 임금이 잉어를 선물하면 삶아 먹는 것이 아니라 기르듯이 선물받은 주군의 물건은 가보로 그저 간직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증자가 병이나 위독하자 제자들이 그를 곱고 푹신한 대부가 선물한 삿자리에 뉘었던 듯 싶습니다. 



증자는 동자의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그렇구나 이것은 대부 계손이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元(원)아! 이 삿자리를 얼른 바꾸어라!"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증원이 

"아버님 병환이 위중하시어 지금 바꿀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내일 아침에 바꾸겠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증자는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함이 저 동자만도 못하구나, 
군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德(덕)으로 하지만
 細人(세인-소인이라는 말)은 남을 사랑하기를 姑息之策(고식지책)으로 한다. 
내가 어느것을 택하겠느냐? 
나는 바른 이름을 얻고(정명) 바른 죽음을 얻겠다(정명). 
그것을 원할 뿐이다."



하는 수 없이 삿자리를 바꾸어 눕히자 증자는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대부가 아니면서 대부의 삿자리를 사용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안 증자는 즉시 예를 택하여 바름 이름을 얻고 바른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증자의 한 말의 요지는 
군자는 잘못을 알았을 때는 즉시 그것을 고치지만 
소인을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에도 구차히 당장 면피하려는 고식지책(姑息之策)을 쓴다는 점입니다. 

고식지책, 또는 고식지계는 " 잠시 모면하는 일시적인 계책이라는 뜻으로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 임시방편이나 당장에 편안한 것을 취하는 꾀나 방법을 말합니다.

이 용어에 대한 좀 나은 고전해설은 《시자(尸子)》에 "은나라 紂(주)왕이 장노의 말을 버리고 부녀자나 아이의 말만 사용하였다[紂棄老之言而用故息之語]"라는 구절에 유래하는데 증자는 병이 위중한 경각의 즈음에서도 예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즉시 시정하므로 소인들의 고식지책과는 다름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현실의 정치나 기업의 문화에서 우리는 영정치원(寧靜致遠-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음)한 정책이나 지과필개(知過必改-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함)하는 정신이 꼭 필요한 현실이라고 봅니다. 

*시자(尸子)-尸佼(시교-기원전 390년—기원전 330년의 전국시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도가적 사상가 )가 찬한 책.


[출처]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작성자 고은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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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들 때문에 믿음이 흔들려요... 2012.07.12.

차이
⑤ 정명(正命)-올바른 생활. 곧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내 손으로 일해서 생계을 유지함
⑥ 정정진... 정명(正名) ⑷ 덕스러운 힘을 나타내는 덕(德) ⑸ 행실의 기준이 되는 예(禮) 

===


정명(正命)  마음 밭   
2015. 10. 6. 10:31
https://blog.naver.com/jys0655/220500804539


정 명(正名) [?]

정명(正命)의 반대인 사명(邪命)이란 ?

팔정도의 다섯번째 덕목인 정명은 '바른생활'로 많이 번역된다.



바른 직업을 택하고 바르게 일을 하여 생계와 생활을 올바로 꾸려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이를 확대하면 의(衣), 식(食), 주(住) 속의 생활, 곧 옷차림, 식사예절, 수면운동
휴식중에 대한 바른 생활태도 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이 정명의 핵심을 한마디로 꼬집으면 '목숨명(命)' 하에 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나의 생명'이다.
천만금을 준다 한들 목숨을 이어줄 사람은 결코 없다.
정명은 바로 가장 귀한 나의 목숨을 올바로 유지하다는 가르침이다.

올바른 직업과 생활관을 통하여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나의 생명력을 살려가는 삶이 아니라 죽이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눈앞에 이익에 사로잡혀 그릇 된 길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생명력을 죽여가는 사람들,
그들을 부처님께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하셨다.


사명(邪命)은 정명(正命)의 반대이다.
사명에 따르지 않으면 정명의 바른 길로 들어서서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려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대사십경(大四十經)에서 이에 관해 말씀하셨다.

사명(邪命)이 무엇인가?
사기, 공갈, 점복(占卜) 등을 업으로 삼거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 사명(邪命)이다.
이러한 삿된 생활법을 버리고 바른일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정명(正命)이라 한다.
이 가르침 가운데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 사명(邪命)'이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길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이익을 추구하다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보인다.
명품을 즐기다가 카드을 긁었고 카드 빛을 막기 위하여 '쉽게 돈을 벌겠지' 하는 생각으로
롬싸롱의 접대부로 나갔다가 돈은 커녕 더 큰 빛에 몸도 마음도 망가 뜨려 버린 여대생
이야기를 집중하는 TV , 그녀들은 '죽고 싶을 뿐' 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 누가 그녀을 '죽고 싶은' 상태로 몰아 넣었는가 ?
그것은 남이 아니다.

​지나친 욕구 충족, 지나친 이익 추구가 원흉이다.
명품을 가지고 싶어하고 명품을 지니는 것을 누가 나쁜 짓이라 하냐 ?
욕망을 못이겨 갚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채 신용카드를 사용했고 카드 빛을 감당할 수 없자
'쉽게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롬싸롱을 찾아간 것이 결정적인 화근 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는 이를 냉철하게 꼬집고 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란다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하게 되고,
어리석는 마음이 요동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헤손 되느리라.
사화가 자본주위에 물이 들수록 분에 넘치게 이익을 바라는 이들이 많아진다.
쉽게 돈을 벌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한탕주위로 떼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그와 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물론 본에 넘치는 이익에 눈이 멀어 가진 돈과 몸과 마음을 내 맡기면 특별한 요행수가 없는 한 결과는 뻔하다.

​스스로를 실패의 구렁텅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 뿐이다.
왜, 냉정하게 생각하면 어떠한 결과가 돌아 온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는 일에
왜, 불나비가 불에 뛰어들듯이 하는가 ?

​치심(癡心) : 곧, 어리석움 때문이다.
'나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리석움 때문이다.

​왜 어리석다고 하는가 ?
그렇게 괴겠끔 되어 있는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뿌린 결실 거두고 한것만큼 돌아온다는 세상사의 기본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치심(癡心은 달리 무명심(無明心)이려고 하는데 무명심 밝음이 없는 어두운 마음이다.
어둡기 때문에 갈 길을 볼 수가 없고, 길을 보지못하기 때문에 어둠속에서 방황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수많은 고초를 격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 : 이것을 우리는 이기심(利己心) 이라고 하며
이 이기심은 잠깐동안 우리를 만족 시켜준다.

​그 넘치는 이익이 '나'의 마음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 되면 분수에 넘치는 이익을 추구하는
그 이기심이 '나'를 어둠속에 가두워 버린다.


이기심을 진하게 가질수록 밝은 빛을 차단하는 막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움, '난'의 밝지 못함을 상징하는 이기심 껍질이 단단해지면 딴딴할 수록 남과의
분리감이 강해지고 분리감이 커지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이나 사회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며, 두려움이 심해지면 대인 기피증 뿐만 아니라,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무의식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또한 지나친 이익추구와 이기심에 사무친 삶은 정신적인면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굳고 경직되게 만든다.

이기심으로 인해 육체의 여러부분에 긴장감이 생겨나고 몸 전체는 위축이 된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생명 에너지가 크게 줄어들어 알 수 없는 병을 부르고
수명까지도 좌지 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사명(邪命)의 길을 택하게 되면
그 사명(邪命)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갖가지 문제를 일으켜 '나'를 살리는 생활이 아닌
'나'를 죽이는 생활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실로 인생살이에 있어 이익은 올만큼 오는 것이다.
일도할 만큼할 만큼 할 수 있고 이익도 한 만큼 나오는 법이다.

'나'의 마음가짐과 노력에 맞게 이익이 다가오는 법이다.
바란다고, 욕심부린다고 일을 많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이익이 많이 다가오지를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탐하면 번뇌만 커질 뿐이다.
일단 이익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해 보라 이익이 아니라 번뇌가 '나'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치심이나 이기심이 끊임 없이 의견을 내어 '나'로 하여금 좋아하고 싫어하고 주측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불평하는 각종 번뇌물을 가득 불러 일으켜 놓는다.

정령 번뇌에 휩쌓여 사는 생활보다 더 비참한 삶이 어디에 있는가 ?
지나친 '이익추구'라는 첫 번째 번뇌가 수많은 번뇌를 일으켜 결국은 우리를 번뇌속에서 죽어가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 : 그리고 이것이 '나'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사명(邪命)의 속성이라는 것을 깊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정명(正命)
|작성자 장명등

알라딘: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알라딘: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하야시 노리코 (지은이),정수윤 (옮긴이)

정은문고 2020-08-10

원제 : 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 60年の記憶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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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역사, 재일교포 북송 60년.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간 일본인 아내를 취재한 포토 다큐멘터리.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이뤄진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일본에서는 ‘귀환’, 한국에서는 ‘북송’이라고 불리는 귀국사업에 남편과 동행했다가 고령이 된 지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 정치적 긴장으로 일본 방문은 불가능해졌고, 잊힌 존재로 정체성은 분열되었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보도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희망을 품고 살까. 6년 동안 열한 번 진행한 방북 취재로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 반세기의 기억을 잇는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프롤로그

1장. 원산에 사는 어머니와 딸: 1961년, 규슈를 떠나다

2장. 긴박한 상황 아래서: ‘화성-14’ 핵실험의 해에

3장. 아카시아의 추억: 홋카이도부터 배 속의 아이와 함께

4장. 최후의 잔류 일본인: 가족과 생이별, 조선의 아이로

5장. 닿을 수 없는 고향: 감동의 일본인 아내들

에필로그



책속에서



P. 4~6 한국의 독자들에게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진행된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약 9만 3,000명이 일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이래 재일조선인의 수는 급증하여 1945년 종전 당시 2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들도 교육을 받기 위해 또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거나, 광산 노동자로 징용되어 강제로 끌려온 재일 1세 아니면 그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의 완전실업률은 일본인의 약 8배에 달했고, 그들은 빈곤과 민족 차별 등 고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작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사업’이었습니다. 몇 년 안에 일본을 오갈 수 있게 되리라고 믿은 일본인 아내들은 니가타항에서 북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후로 60년이 흐른 지금, 일본인 아내들은 바다 건너에서 아이와 손자 손녀를 기르고 남편을 돌보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처음 방북한 것은 20대 때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저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을 떠났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 시절 젊은 일본인 아내들이 시대에 휘둘리면서도 일본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의지로 인생의 길을 모색하고 개척한 점에 깊이 공감해 오늘까지 취재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반도 정세가 긴장과 완화를 반복하던 2013년 이후 열한 번의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고령이 된 그녀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각지의 고향도 찾아가고 여러 개인의 기억을 조금씩 이어가며, 지금을 살아가는 만년의 일본인 아내 모습을 담았습니다. 



P. 37~38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하는 귀국사업이 진행됐다. 주최는 북한과 일본적십자사. 이 사업으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넌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은 약 9만 3,000명이다. 그중 일본인 아내와 그 자녀 등 일본 국적 소지자는 약 6,800명, 일본 국적 일본인 아내는 약 1,830명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재일조선인 남편과 결혼해 국적을 조선으로 바꾼 일본인 여성도 있을 터라, 실제로 일본인 아내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열한 차례 방북했고 주로 일본인 아내를 취재해왔다.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을 강제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패전하기까지 일본에는 조선인이 급증했다. 1911년 겨우 2,500명이 조금 넘던 재일조선인이 1945년 패전 때는 약 20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조선총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 통계편람 쇼와56년판』, 공안조사청, 1981). 그 이유는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인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탄광과 군수공장 등 노동 징용이나 징병으로 전쟁 중 동원된 경우, 유학 등 다양하다.

내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도 일본에 온 재일 1세 혹은 그들의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다. 이 시기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 대부분은 한반도 남쪽, 오늘날 한국 출신으로 알려졌다. 



P. 96~97 평양에 사는 일본인 아내



옛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순치보거唇?輔車라 불렀다고 한다. 입술과 치아처럼 관계가 밀접해서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될 사이라는 뜻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침략 등 어느 시기 그 관계가 무너진 적도 있었지만, 에도시대에는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해 문화와 학문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정한론’, 1910년 한국합병에 의해 이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전으로부터 3년 뒤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한반도 북측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일본인이 지금 이 나라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의 끝에는 일정하게 고정된 나라의 이미지가 상을 맺는다. 일본인을 납치한 ‘기분 나쁜’ 나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반복하는 나라. 이 나라 이미지의 원천은 이 나라가 탄생한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미디어 보도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한편 일찍이 식민지 시대의 기억은 잊히고 있다. 



P. 106~107 이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2015년 10월, 나는 평양 시내에 사는 후쿠시마 아이즈 출신 일본인 여성 나라 키리코 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 키리코 씨는 “아! 내 조국 분이 오셨구나”라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일본어가 유창한 아들과 함께 오래전 앨범을 보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잘 웃는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았다. “다음엔 봄에 올 테니 그때 취재하게 해주세요. 가능하면 사진도요. 다시 만납시다” 하고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헤어지는 현관 앞에서 키리코 씨는 “기념으로 가져가세요”라며 희고 붉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반년 후 평양을 다시 방문했을 때, 키리코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국 내게는 그녀의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리코 씨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옅어진다. 만약을 위해 사진 한 장이라도 찍을까 했는데, 당시에는 아직 이 나라에서 막 취재를 시작한 참이라 ‘만약을 위해’라는 어설픈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건 그만두었다. 쓸데없이 진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키리코 씨의 사진을 찍지 못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지금은 자연스레 대화를 하지만 그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취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키리코 씨의 죽음으로 통감했다. 



P. 111~112 안내인 이 씨와의 솔직한 대화



“남조선에 가본 적 있어?”

갑자기 이 씨가 물었다.

“응, 있어. 서울엔 친구도 있고.”

“남쪽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여기 사람들하고 똑같아.”

이 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와 언어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같은 조선 민족이니까.”



나도 질문을 했다.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

열차에서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 씨는 창밖을 바라보더니 다시 내 쪽을 보며 대답했다.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하지만…… 많은 조선인이 일본을 싫어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일본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내가 안내했던 일본인들은 단 한 사람도 내게 기분 나쁜 인상을 심어준 적이 없거든.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발랐어. 너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 나라와 나라가 만나면 그게 어렵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응, 잘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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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7월에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어떻게 생각해?”

그의 솔직한 질문에 놀랐다.

“음…… 그땐 나도 평양에 있었는데…….”

미사일 발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국제사회 움직임까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묻는 걸까 싶어 고민하는데, 그는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미국이 남조선과 군사훈련을 하지 않으면 미사일을 쏘는 일도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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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하야시 노리코 (林典子(寫眞家)) (지은이)



사진작가. 1983년생. 미국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분쟁평화구축학을 전공하던 2006년 여름에 서아프리카의 감비아공화국을 방문했다. 2주간의 체류 계획을 바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보도사진가로서 ‘젠더’와 ‘장소와 개인의 기억’을 테마로 각지에서 취재를 진행해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주간지 『뉴스위크』, 영국 문예지 『그란타』, 일본판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사진과 기사를 기고했다. 프랑스국제포토저널리즘페스티벌 비자뿌르리마쥬Visa Pour L’lmage에서 보도사진 특집부문 금상(2013), 전미보도사진가협회 보도사진공모전NPPA Best of Photojournalism에서 현대사회 문제부문 1위(2014)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사진집 『키르기스의 유괴결혼』과 『야즈디의 기도』, 포토 다큐멘터리 『인간의 존엄: 지금, 이 세계의 끝에서』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 총 2종 (모두보기)



정수윤 (옮긴이)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문학연구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자이 오사무 전집 『만년』, 『신햄릿』, 『판도라의 상자』, 『인간실격』,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미야자와 겐지 『봄과 아수라』, 나가이 가후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이노우에 히사시 『아버지와 살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모기소녀> … 총 4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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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열한 번의 방북 취재로 감춰진 기억 60년을 잇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가타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싣고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된 후 일본에서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이름으로 약 9만 3,000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대규모 인구가 이주한 것은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선택당한 것일까?

1956년 2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적십자회담에서 북한에 남은 잔류 일본인의 귀국 문제와 재일조선인의 귀국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1959년 12월 14일, 제1차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 실시되었다. 북한 측은 재일 교포의 북한 귀국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최초의 민족 대이동으로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남한이 고향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귀국사업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귀국, 한국에서는 북송이라 불리는 귀환사업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들



“오래 살았어. 죽은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었어. 북한 사람들은 친절했고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어.”

북한에 살고 있는 일본인 아내들은 20대에 찍은 결혼 기념사진을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전부 가족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젊을 때 만난 조선인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매우 깊다. 그들은 북한의 각지로 흩어져 저마다의 삶을 살았지만, 대부분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 저자가 만난 9명의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선택(조선으로의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유감인 것은, 일본에의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되지 않은 것뿐이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로 취급된다

국적, 민족, 분단의 디아스포라



일본에서 북한으로의 귀국사업은 한국인들에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뉴스로 나오긴 했어도 귀국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960년대 남북한 관계는 꽁꽁 얼어붙은 상황이었기에 서로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우리는 피해국이라는 입장에 서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에 대한 관심은 더더구나 없었다. 북한과 일본 간의 귀국사업도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의 산물로서 이미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북송’은 일본 정부의 추방 정책과 북한 정부의 정치 목적이 야합한 산물이라며 그 추진을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북한을 선택한 사람들은 현재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다. 정치학을 전공한 사진작가인 저자는 일본인 아내들의 삶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다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이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취급될 것이라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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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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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그들은 왜 3년후에 돌아오겠다고 했을까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들은 3년 후에는 북한과 일본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되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일본인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어느 일본인 여성은 말한다. 북한으로 가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3년 후에 돌아올게"하며 이해를 시켰다는 여성도 있다. (42쪽)



일본인 사진작가 하야시 노리코의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정수윤 옮김, 정은문고)에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이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뤄진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에서 재일동포 배우자(주로 남편)를 따라간 일본인 배우자는 1830명 가량이다. 그런데 북으로 갈 당시에 영영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여긴 이는 없었다. '길어야 3년 정도 지나면 북한과 일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리라. 북한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서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 43명의 고향방문단을 빼고는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간혹 일본의 가족, 친척들이 북에 와서 상봉한 사례는 있다)



왜 그들은 '3년 후'를 기대했을까. 이 숫자가 그냥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조선총련 쪽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북일 당국간에 적어도 민간교류는 보장하는 방침을 갖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 분위기가 총련을 통해 북송자들에게 전해진 것일까. 당시 상황이 궁금해진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니 북한은 1954년부터 북일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었다. 1955년 북한의 남일 외무상은 대일관계에 관한 성명을 발표해 일본에 공식적인 국교정상화 제안을 했다. 북일간 접근은 속도를 내면서 일본 국회의원 대표단이 1955년 10월 방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국교정상화와 제 현안 타결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북한에 잔류해 있는 일본인들의 귀국과 재일조선인의 귀국문제를 둘러싼 공식 교섭이 시작됐다. 무역부문에서는 일본에 일조무역회사가 설립됐고, 북일간에 민간무역협정(1957)이 체결되기도 했다.

즉 북송사업은 195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북일 교류 무드' 속에서 추진됐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귀국사업'으로 가족을 따라 북으로 간 일본인 배우자들이 3년쯤 지나면 일본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을 법 하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동북아 정세는 미일안보조약 체결, 한일 국교정상화, 중소분쟁 등으로 경직되기 시작했고, 이 영향으로 북일관계도 후퇴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들의 북한 체제 부적응 등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귀국사업'은 당초 예상과는 다른 형태로 변질돼 갔다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북송이 북일관계의 또다른 질곡이 돼버린 것이다.



2013년부터 2018년 11월까지 북한을 11번 방문해 이들의 삶을 기록한 저자는 "일본인 아내들의 삶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다"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취급될 것"이라고 했다. 저자의 말대로 60년째 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와 표정, 분위기를 선입견없이 담아내려 애쓴 흔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 추가.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 하나하나의 인생은 평등하고 둘도 없는 것임을 취재를 통해 강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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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 2020-08-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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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ォト・ドキュメンタリー 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 60年の記憶 (岩波新書)

by林 典子



Customer reviews

3.4 out of 5 stars





美しい夏

TOP 500 REVIEWER

4.0 out of 5 stars志の高い、感動的な本と思うが、気になる点あり。

Reviewed in Japan on June 27, 2019



6年の歳月と11回の訪朝取材でまとめられた、8人の日本人妻と1人の戦後残留日本人女性からの聞き取り記録である。日本人妻とは、在日朝鮮人の帰国事業で夫に同行した日本人女性である。

第1章・・1927年生まれの元山在住の日本人妻。その後死去。娘(帰国時8歳)と孫も取材に登場。娘の出番が多い。日本では宮崎在住の弟に取材。

第2章・・1934年生まれの平壌在住の日本人妻。その後死去。高校時代の写真(87頁)は映画スター並みの美少女。この章はほかの話が多く、彼女の出番は多くない。子孫の登場もない。

第3章・・1939年生まれの元山在住の日本人妻。この人も大学生時代の美しい写真が載る。

一時帰国体験あり。同居の長女が出るが、その描写、発言はない。日本での取材は京都在住の夫の兄。

第4章・・1933年生まれの咸興在住の残留日本人女性(12歳で残留)。終戦前と苛酷な終戦後避難と戦後の長い記憶。同居の孫が一緒に写真に写り、少し話す。

第5章・・1942年生まれの咸興在住の日本人妻。元看護婦。1967年の帰国船。次男と同居するが、次男は出ず。著者による、日本の能登での家族探しが少し長い。



このほかに4人の日本人妻が、2章、4章、5章、あとがきに登場する。2人は故人。

あとがき・・「彼女たち一人ひとりの個人的な思いや人生を知ろうとする」作者の姿勢等。



私的感想

〇間違いなく、多大な労力と時間をつぎ込んだ力作である。聞き取られた内容は感動的で、作者の志も高い。

〇印象的なシーンも多い。第1章の自分の名前の説明。第2章のストーカーまがいの出会い。第3章の別れの母の言葉と日本語で歌う「この道」、第4章の売れなかったリンゴ、第5章の能登での家族探し。

〇気になる点はいくつかあるが、一つだけあげると、登場する日本人妻達がそれぞれ違っていても、次の点で似ていることである。ー、長生きしている。二、亡くなった夫は優しい人だった。三、夫の家族も、ほかの人たちも親切だった。四、北朝鮮帰国後、比較的順調な人生を過ごしてきた。五、子供、孫に恵まれ、皆優しく、その介護等を受けている。五、半世紀以上前の選択(朝鮮半島出身者との結婚、その後の帰国)は後悔していない。残念なのは、日本への自由な往来が実現していないこと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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くくくくままま

TOP 500 REVIEWER

4.0 out of 5 stars 異国に渡った女性たちの生の証を刻みつけようとする。

Reviewed in Japan on July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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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九四五年の終戦直後、引き揚げの際に家族と生き別れて、その後をこの国で生きてきた残留日本人の女性(p.47)」1名と、「帰国事業(p.20)」―「一九五九年一二月から八四年七月にかけ、日本に暮らす朝鮮半島にルーツを持つ人々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移住」するために進められた―で北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数人を、いくたびか訪問・取材した書。ドキュメンタリーとあるが、対象となる女性たちを描写する文章だけでなく、著者の思いを綴る部分も少なくなくフォト・エッセイというおもむきもある。

 北朝鮮報道について「ジャーナリストの多くは……ここで生きる人々の人生を……単純に白か黒かで伝えようとしているように思う」が「ついそうした誘惑に駆られそうになっても、できるだけ抑えようとしてきた(p.245)」と著者は記す。その思いが、告発するでもなく、お涙頂戴になるでもなく、称えるわけでもない抑制された文章からよく伝わってくる。著者は、社会と時代の流れに翻弄され、しかしその中で生き抜いてきた女性たちの生きた証を文章に刻みつけようとしたのだろう。

 本書は「帰国事業」を解説する書ではないが、それでも知らないこと、驚くことが多かった。私は『キューポラのある街』でこの事業についてはじめて知ったのだが、少なくとも私が『キューポラのある街』を読んだ70年代には、「帰国事業」への、あるいは北朝鮮の政治体制への肯定的な評価はすでに消えかけていたように思う。そういえば、1970年前後を舞台とする「焼肉ドラゴン」にも、北朝鮮を地上の楽園のように考えるのは間違っているというようなセリフがあったな。それでも、この事業は、なんと1984年まで四半世紀も続いていたというのだ。

 本書には、1960年春に両親が「帰国事業」で渡航し、その年の秋に生まれた人も登場する。生まれが私と数か月しか違わない。この人の人生は、私の人生であってもおかしくなかったのだと思いつつ読む。

 同著者の『人間の尊厳』に比べると写真のインパクトは小さいが、それでも皺だらけの女性たちのポートレートは美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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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いい親父

TOP 100 REVIEWER

5.0 out of 5 stars 北朝鮮の日本人妻、確かに大きな問題ですね!!

Reviewed in Japan on July 8, 2019

 北朝鮮と日本の間には、多数の問題点が存在しています。

 その内世間の耳目を集めるのは、やはり、原爆、ミサイル、

 そして拉致被害者問題ということになるのだろうと思います。

 しかし、帰国事業で彼の地にわたった日本人妻・・・少しは日本人夫もおられるそうです・・・、

 残留日本人についても関心を払ってもい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本書は、11回にわたる北朝鮮訪問で、日本人妻9名、残留日本人1人についての

 現地の様子、北朝鮮に行くことになった経緯、現在の心境などをまとめたルポ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日本人妻については、自分の意志で反対を押し切り、北朝鮮へ行ったのだから、

 とやかく言うことはないという人も多いともいます。

 しかし、彼女たちは、 祖国と自由に行き来できると信じて、北朝鮮へ渡ったと思うのですが、

 その思いは、ほとんどかなえられずに現在に至っているのです。

 ましてや残留孤児の場合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おまけに彼女たちには残された時間がほとんどないのです!

 拉致被害者問題とともに、政府はこのような現況をよく認識してもらいたいものです。

 なお、本文中に、ミサイル発射時、そして、原爆実験の現地での様子が書かれていて、

 これも非常に興味深いと思います。

 また、時折挟み込まれているカラー・フォト、木がほとんど生えていないはげ山、

 現地のさびれた様子、一方高層ビルが立ち並ぶ平壌、

 このアンバランスさが北朝鮮のいまを象徴しているんでしょう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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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本虫がさまよう

TOP 500 REVIEWER

4.0 out of 5 stars 取材の限界はあるけど、この本に出てくる日本人妻たちの母国や北に行くのに反対した亡き両親たちへの思い自体には嘘はなく、感涙モノといえよう。その点は高く評価したい。

Reviewed in Japan on July 31, 2019

林典子氏の『フォト・ドキュメンタリー 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60年の記憶』 (岩波新書)を読んだ。



(こんな内容)→1959年から84年まで行われた在日朝鮮人らの「帰国事業」.夫に同行し,高齢となった今もなお北朝鮮に暮らす「日本人妻」たちは,現地で何を考え,何を望んでいるのか.望郷の念,離ればなれとなった親族への思い――.この6年間に11回の訪朝取材を重ね,彼女たちに寄り添い,半世紀余りの記憶を紡ぐ.写真多数.



この人の本は以前、 『人間の尊厳 いま、この世界の片隅で  フォト・ドキュメンタリー』 (岩波新書)というのを読んだことがあるが、まっとうなレポートだった。



それはさておき、共産圏の人権問題には「鈍感」になりがちな岩波新書ではあるが、林さんのこの本は比較的真っ当なレポートだった。



もちろん、北朝鮮の現地を何度も訪れたとはいえ、いずれも、当局の「監視員」(案内人?)がそばにいての取材であるから「限界」もあるかもしれないし、寺尾五郎の北朝鮮ヨイショ本に触れつつも、まともな関貴星さんの本などは紹介していないといった説明不足などもある。朝鮮戦争が北朝鮮の侵攻によって始まった簡単な事実(主語)も明記はしていない。ことさら、朝鮮人に優しくしてもらって助けられたと強調する人ばかり……。



それはそれとして、やはり帰国運動に巻き込まれて、北朝鮮に在日の夫と共についていった日本人妻がどのように暮らしているかはあまりにも日本に伝わってきていない。これはすべては人道的措置をしない北朝鮮政権の横暴が原因である。少なくも日本国籍を所有している日本人妻は、帰国しようと思えば自由にできるはずなのに、それを容認しないのは非人道的というしかない。



この本でも、一時帰国を許された模範的な日本人妻が出てくる。こういう人たちは、一時帰国した時も、模範的な回答をするしかなかっただろうが……。



それはそれとして、何度も北朝鮮を訪れ、複数回のやりとりをし、彼女たちのかつて住んでいた日本の場所を訪れたり、親族と面談したり、可能な限り、日本人妻の「思い」を伝えようと努力したことは行間からも読み取ることが可能だ。



とはいえ、脱北した在日や日本人妻なども少数だがいる。その人たちの「証言」も忘れてはなるまい。どちらかといえば、そうした人々の証言のほうが生々しく、現実の姿をより的確に指摘しているともいえようか。



斉藤博子氏の『北朝鮮に嫁いで四十年 ある脱北日本人妻の手記』 (草思社)を読む限り、「日本人妻」にも「格差」があるということになろうか。



前川惠司氏の『夢見た祖国は地獄だった』 (高木書房)にも、斉藤博子さんやさまざまな帰国者や脱北した人々の「証言」が出てくる。



「帰国者の中でも、朝総連の幹部の家族や大資産を上納した一家などは、平壌、元山、新義州などの大都会に落ち着き先が決まった。たいした資産もなく、ただ『地上の楽園』と言う宣伝を真に受けた李相峰一家は、清津から九十五・五キロ離れた中朝国境の町、会寧近くの炭鉱の村で暮らすように指示された」



李さん(仮名・後に脱北)は、帰国する前に日本に残った兄から「総連の宣伝どおりだったら褒めて、手紙に書いてくれ。そうしたら自分も帰る。ウソだったら切手の裏に書いてくれ」と言われていた。「検閲」があるからだ。



すると、李さんは切手の裏に「村からの外出の自由なし、兄さんはここへくるべからず…の妹さんもこないよう…」と記して手紙を出したという。



その実物が本書69頁に収録されている。これは是非見るべきだ。こんな手段を通じて辛うじて悲劇から逃れることが可能だったのだ……。さすがの共産主義者も切手の裏まで「検閲」するのを忘れたわけだ!



何かの本だったか、笑い話だったか、北に戻って、地獄だったら青いペンで、天国だったら黒いペンで手紙を書くように示し合わせたところ、黒文字で、ここは天国、物不足もない、満ち足りている云々と記した手紙が日本に届いたそうな。ただ、最後に、「物は十分だが、あいにくと青ペンがない」と記してあったとか?



まぁ、そういった赤裸々な現実は、林さんの本には残念ながら(?)出てこないが、それはそれとして、林さんの本に出てくる日本人妻たちの母国や北に行くのに反対した亡き両親たちへの思い自体には嘘はなく、感涙モノといえよう。その点は高く評価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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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カスタマー

3.0 out of 5 stars 上辺だけ……でも、読んだ価値あり

Reviewed in Japan on July 27, 2019

正直、深く掘り下げない、といえば、厳しいかもしれないが、今ひとつ、人物たちが迫ってこないというか、肉迫してくるものがない。

あと、ここに出て来る人たちは、なんとなく(当時の)中流ぐらいの人たちで、もっと知るべきことがあるような人たちの意見は聞こえてこないような。でも、逆に考えてみれば、普通の家庭で大事に育てられ、高い教育を受けた女性が全てを捨てて移住したのだから、その決意は大変だったはず。

不満はあるけれど、読んだのは無駄では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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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ALL OF FAMETOP 10 REVIEWERVINE VOICE

5.0 out of 5 stars 日本人妻に寄り添う真摯な姿勢が全編を貫いています

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22, 2019

文章の上手さや分かりやすさが本書の質を高めていました。フォト・ドキュメンタリーとありますが、掲載写真は決して多くありません。それでいて、厳選された写真一つ一つから被写体の日本人妻の経てきた人生の足跡が如実に伝わってくるような見事なポートレイト(カラー写真)ばかりでした。



日本人妻の方へのレスペクトが根底にあり、肉親のように寄り添い、お里帰りのように訪朝する姿勢から林典子さんのジャーナリストとしての真摯な思いが強く伝わってきました。



「『行かないで』と、小さな声が聞こえた。握り続ける手の力はとても強く、多喜子さんのことを思い出す度に、このときの右手の感触が自然とよみがえってくる。(17p)」の文章も肉親との別れの一こまのような情景が浮かびます。

前のページで、若き日の朝鮮人の夫との渡航寸前の記念写真を持つ多喜子さんの写真から、より一層この言葉の重みが感じられました。



1959年12月14日からスタートし、「1984年7月まで続いた帰国事業。187回の船で約9万3000人が日本から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へ渡った。(28p)」と書かれています。

大昔、映画『キューポラのある街』でこの帰国事業のことを知りました。

「地上の楽園」という欺瞞を当時のマスコミも左翼も知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が、それがこの日本人妻の背景にあるわけで、罪深い帰国事業でした。



読了後、奥付の経歴を拝見してとても驚きました。若い写真家ですが、受賞歴の凄さは一目瞭然です。素晴らしい活躍ぶりが伝わってきました。

文章も写真も歴史ある岩波新書のラインナップに上るのに相応しい内容だったと高く評価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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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CHO

5.0 out of 5 stars 愛と望郷の物語

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26, 2019

北朝鮮各地に住む日本人女性の家庭に入り込み取材を重ねたフォト・ドキュメンタリーです。

60年前の若く聡明な日本人女性とステキな朝鮮人の彼氏が周囲の反対を押し切って海を渡ってしまうという情熱には驚かされました。

彼氏を看取った後でも彼女たち日本人妻は今日まで地域に根付いて生きてきたのですね。こういうロマンチックな生き方もあるのだと考えさせられました。インタビューする著者の心の動きまで記述がなされているので好感が持てるアッパレな一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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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ナフ - Wikipedia

ケナフ - Wikipedia



ケナフ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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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ナフ
Hibiscus cannabinus0.jpg
分類
:植物界 Plantae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双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亜綱:ビワモドキ亜綱 Dilleniidae
:アオイ目 Malvales
:アオイ科 Malvaceae
:フヨウ属 Hibiscus
:ケナフ H. cannabinus
学名
Hibiscus cannabinus
L.
英名
Kenaf
Ambari Hemp
Decan Hemp
ケナフ (Kenaf, 学名:Hibiscus cannabinus) は、アフリカ原産のアオイ科フヨウ属植物、またこれから得られる繊維をいう。洋麻アンバリ麻ボンベイ麻ともいう。

分布[編集]

アフリカが原産地とされる[1]
アジア、オーストラリア、北アメリカに移入分布する[1]。日本では全国に帰化している[1]

特徴[編集]

一年草であるが、稀に多年草となる。生長は非常に早く、だいたい100日から125日で成熟し、高さ 1.5-3.5m 、の直径 1-2cm になる。あまり分岐せず、木質の基部をもつ。は長さ 10-15cm で、に近い部分につくものは 3-7片に深裂するが、先端に近いものはほとんどきれこまず槍形になる。は直径 8-15cm ほどで、色は白・黄色・紫がある。白や黄色、紫花の花は、中心部分は暗紫色となる。果実は直径 2cm ほどの蒴果で、中に数個の種子を持つ。

栽培と用途[編集]

ケナフは繊維を目的として、インドバングラデシュタイアフリカの一部、ヨーロッパの東南部などで古くから栽培されてきた。茎からは2種類の繊維が採れ、外側の層からは目の粗いものが、中心部分からは目の細かいものが得られる。栽培品種は約200種ほどが知られ、黄麻(コウマ、ジュート)の代用繊維としても多く使用されている。
成長が速く、収穫できる繊維も多いため、木材パルプの代替資源として2000年頃から注目を浴びるようになった。「木材使用量を低減し、森林伐採が防止でき、環境によい」と評価され、日本各地の小中学校総合的な学習の時間における環境学習として栽培されているほか、ケナフ製の名刺ナプキンが使用されるようになった。
一方、茎に鋭いとげがあって加工に手間がかかること、地面の養分を吸い上げる力が強く連作障害があること、強い繁殖力を持つことなどの問題点もあり、セイタカアワダチソウなどのように一度野外に定着すると駆除が困難になることを危惧する声もある(ただしケナフは宿根草ではなく、セイダカアワダチソウなどと比べ種子の散布力も劣り、日本国内の植生に深刻な影響を与えたとの報告は今のところない)。また、ケナフは草であるため木材に比べ腐敗しやすく、製紙などの原料として長期に保存するには難しいという問題もある。
なお、ケナフは成長力が大きく成長時に二酸化炭素を吸収することから、それだけで地球温暖化対策につながるかのようにとらえて学校園などで栽培をする例もあるが、成長して刈り取ったケナフを焼却してしまえば、せっかく固定した炭素もふたたび環境中に戻ってしまうので、低炭素化への貢献は全くなかったことになる。 ケナフを製紙原料などに利用し、(育てるのにコストと時間のかかる)木材の消費をそのぶん削減できて初めて、そのことをもって低炭素化に貢献したと言えるのであることに留意するべきである。
케나프는 성장 가능성이 커서 성장시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그냥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이어질 것처럼 생각하고 학교 정원 등에서 재배를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장하고 수확 한 케나프를 소각 해 버리면 모처럼 고정 탄소도 다시 환경에 돌아 버리므로, 저탄소 화에 기여는 전혀 없다는 것이 된다

葉はアサの葉と間違えるほどよく似ているが、陶酔成分は一切ない。 その外観がアサの葉に酷似する事から、学名のヒビスクス・カンナビヌスと名付けられた。カンナビヌスとはアサの学名である。

関連項目[編集]

参考文献[編集]

  1. a b c ケナフ 国立環境研究所 侵入生物DB


케나프에 대해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지구를 구하는"이란 말이 나오는데는 없고, 일어 위키페디아 백과사전에는 관계된 부분에 부정적인 말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분의 구글 한역:    
 [케나프는 성장 가능성이 커서 성장시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그냥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이어질 것처럼 생각하고 학교 정원 등에서 재배를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장하고 수확 한 케나프를 소각 해 버리면 모처럼 고정 탄소도 다시 환경에 돌아 버리므로, 저탄소 화에 기여는 전혀 없다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