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붓다의 옛길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조성택 교수

붓다의 옛길
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조성택 교수 | 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실론섬 2015. 3. 2. 14:05http://blog.daum.net/gikoship/15781835

----

[화쟁문화아카데미(대표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2015 종교포럼을 시작했다. 조성택 대표는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개신교), 김근수 소장(해방신학연구소, 가톨릭) 등과 올 한 해 동안 이야기 마당을 펼친다. 이들이 여는 이야기 마당, 2015년 포럼의 이름은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 경계너머, 지금여기’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가 기조연설을,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이 사회자를 맡는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종교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응답해왔고, 응답할 수 있을까? 각 종교 전통에 몸담고 있는 대표적 지성인 조성택, 김진호, 김근수 세 사람이 만나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참석자와도 소통한다. 

종교포럼은 2월부터 11월까지 총 9회에 걸쳐 진행된다. 각각 ‘무엇이 걱정인가?’ ‘경계너머’ ‘지금여기’라는 세 개의 큰 틀을 가지고 오늘날 주류종교가 처한 문제, 종교 간 소통과 다원주의, 그리고 한국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논의한다. 

1회 종교포럼은 ‘무엇이 걱정인가’라는 큰 주제 속에 조성택 교수가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를 문제로 지적하고, 이에 대한 이웃종교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불교닷컴>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종교포럼을 연말까지 강연 원고와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0. 들어가는 말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볼 필요가 때로 있다. 안에서는 전도(全圖)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늘 사회적 ‘상식’일 수는 없지만 때로는 상식의 눈으로 종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불교에서 때로 깨달음이 ‘다반사’(茶飯事)임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하지만 그 ‘예사로움’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깨달음을 더욱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전통 밖에서 그리고 상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생각해보자. 우선 깨달음은 ‘신념’이 아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또는 사회가 통상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해체하는 일이다. 주어진 의미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소위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타당성 여부는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일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은 요컨대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만약 깨달음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일이 있다면, 혹은 외쳐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 깨달음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회자되는 깨달음이란, 스스로 나서서 ‘깨달음은 좋은 것’이라고 외쳐야만 하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난맥상의 한 중심에는 ‘깨달음’의 문제가 있다. 요컨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거의 교과서적 지식처럼 불교계 내외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동양종교, 특히 불교가 겪게 되는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문제다. 전자의 문제가 ‘도인불교’(道人佛敎)라는 말로 요약된다면 근대유럽의 식민주의가 야기하는 후자의 문제는 ‘불교는 체험의 종교’ 혹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잘못된 명제일 것이다.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깨달음 지상주의(至上主義)’ 혹은 ‘도인불교’의 폐해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편의 논문과 시사적인 글을 통해 언급해왔다. 따라서 오늘 발제에서는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을 전제로 이러한 현상의 또 다른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활발한 토론을 위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대략적인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졸고 “도인불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불교”를 이 글의 말미에 별첨하고자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별첨의 글을 먼저 읽는 것이 본 발제의 요지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일견 그렇다. 

불교는 불(佛), 즉 ‘깨달은 자’(ssk. Buddha, Awakened)의 가르침이다. 불교전통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ssk. anuttarā samyaksaṃbodhi,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깨달음은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특권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또한 스승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교의 삼보(三寶)를 이루는 법(法)과 승(僧) 또한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이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공동체로 여겨진다. 



불교사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불교사는 곧 깨달음에 관한 해석의 역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현생(現生)이 아니라 먼 훗날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未來)의 일로 수정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수행주체가 등장했지만 보살의 원어(原語), ‘보디-사트바’(깨달음-존재)가 의미하는바, 깨달음은 여전히 대승불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하여 선불교를 낳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불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위에서 약술한 내용들은 오늘날 한국불교인들이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이며 불교계 바깥의 지식·교양인들 수준에서도 상식적인 불교관이다. 불교를 깨달음 전승의 역사라 믿고 깨달음을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이러한 불교관이 ‘교과서적’ 지식처럼 된 데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19세기 후반 시작된 유럽의 근대불교학이다. 당시 유럽학자들의 문헌학적 연구에 의해 재구성된 불교의 모습이 가장 정통적인, 본래의 ‘오리지날불교’(origianl Buddhism, 근본불교)로 간주되고, 그들이 당시 근대 동양에서 목격하고 있던 동시대의 불교는 그것에 비추어 무언가 모자라고 일종의 ‘타락한’ 형태의 불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양의 불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양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전통을 스스로 폐기하거나 바꾸어 갔다.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일종의 계몽적인 ‘철학’이었으며 그 철학은 바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깨달음을 영어로 ‘enlightenment’(lit. 계몽)라고 번역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편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본은 대승불교와 함께 그들의 ‘젠’(zen, 禪)을 동양정신의 정수로서 서양에 소개하였다.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 (D.T. Suzuki, 1870-1966)가 대표적 인물이다. D.T. 스즈키는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원이자 ‘과학적 종교’(scientific religion)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폴 캐러스(Paul Carus)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후원과 도움 하에 서구문화를 익히는 한편 (일본)불교를 서구에 소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D.T. 스즈키는 현상학과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연구에 힘입어 그들의 용어로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선불교 전통을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인 어떤 ‘체험’[혹은 ‘경험’]으로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일종의 ‘순수경험’(pure experience)이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담론적 신앙’(discursive faith)과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을 ‘발명’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유한 D.T. 스즈키의 선불교 해석은 그 영향이 단지 서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일제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스즈키류’ 혹은 ‘스즈키 아류’가 한국 선불교 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명법스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확하다. 



조선역사와 문화에 가해진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불교는 일본의 역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였으며 “선을 낭만화시킴으로써 서양의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사이에” 두었던 스즈키의 해석은 대부분의 한국 선불교 담론에서 반복되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 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 출재가를 막론하고 또 직접 수행을 직하든 하지 않든 간에 - 근기나 수행의 방식을 따지거나 우선순위를 논할 뿐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고 불교의 중심이며 요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의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인 것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니라 수행의 ‘걸림돌’로 여기진다. “선방에서 몇 철을 수행해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세속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불자들이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켜보고 관전평을 하는 ‘관중’이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깨달았다더라” 혹은 “못 깨달았다더라” “A 스님 보다 B 스님의 깨달음이 더 크다” 등등의 관전평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음을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의 문제는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신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이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의 초월적인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소위 큰 스님의 말씀일수록 그런 기대감이 더 두드러진다.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고대한다. 불행한 일이다. 일상적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2. ‘깨달음’이라고 하는 오만과 편견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사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을 거의 전적으로 어떤 특수한 심적 체험으로 환원해버린 것은 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온 영향이다.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로버트 지멜로(Robert Gimello)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이 의미하는 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즉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그것에 이르는 수단과 결코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목적이거나 깨달음의 실현이 수행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의] 실현과 수행이 일체(unity)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혹은 수행이 [깨달음의] 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깨달음을 전적으로 자발적이고(autonomous) 자체발생적이며(self-generated), 그리고 완전히 선험적인(transcendent) 체험으로만 여기려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주의(注意)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실제로 이 점은 [불교적] 깨달음을 일종의 ‘체험’ - 순수경험, 종교적 체험 혹은 신비적 체험 등 - 으로 이해하는, 근대적이며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을 차단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불교전통에서 ‘깨달음’(覺, ssk. bodhi)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가 체득하였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發菩提心, ssk. bodhicittotpada)으로서의 '‘깨달음’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와 같이 시각(始覺)의 네 단계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음이 있다. 요컨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으며, 시각(始覺)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불교교학 전통에서는 깨달음(bodhi)을, 보리분법(菩提分法, ssk. bodhipakṣa dharma) 즉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설명하고 있다. 보리분법이 의미하는바 깨달음이란 수행의 최종적 정점만이 아니라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최근 오강남 교수와 성해영 교수는 두 사람의 대담을 책으로 엮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를 펴내어 한국의 종교계와 학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표층종교와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심층종교를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근저에는 ‘체험’, 특히 궁극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 사람의 합치된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한국종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동양종교에도 전문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하는 나의 입장에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종교에는 특히 불교와 같이 수행이 시스템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종교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 있을 수 있으며, 때로 그것이 수행의 진전과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Zen Mind, Beginner’s Mind[선심초심(禪心初心)] 서문에서 종교학자 휴스튼 스미스(Huston Smith)가 인용하고 있는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5-1971) 선사와의 대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미스 교수가 선사에게 왜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는지를 묻자, 스즈키 순류 선사는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에서 강조해야할 부분은 아니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종교에 있어 체험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특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체험, 그것도 확철대오의 깨달음만이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적(私的)인 신념이나 신앙관(belief system)에서가 아니라 공적(公的)인 제도적 종교에서 ‘체험’만이 유일무이한 표준이자 진리를 판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적인 오만(domatic pride)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다. 



이 글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1회 종교포럼에서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오만과 편견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강연 원고 전문이다.  화쟁문화아카데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좋아요공감
공유하기글 요소
실론섬2015.03.02 17:16 신고 수정/삭제 답글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보면 라훌라 스님의 글이 있습니다. 맨 끝에 가면 "왜 출가를 하는가" 에 대해서 남방권의 시각을 쓴 글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남방권은 "내가 아라한 될려고 출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들도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깨닫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고 한다면 이미 출가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띠 수행을 왜 하는지요. 아라한 될려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찰나생 찰나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 마음수행이 깊어지고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집착이 줄고 탐진치 삼독심이 줄어 듭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몸을 따라오듯 자비심도 증장합니다. 그런 바탕이 결국 스스로를 아라한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기차표도 사지 않았는데 벌써 기차타고 가거나 또는 목적지에 도착한냥 말하는 것은 .. 비극일 뿐입니다.
┗실론섬2015.03.02 17:23 신고 수정/삭제
정말로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붓다께서 생각했다면 1250명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에게 전법과 설법등의 모든 것을 맡겨두고 그 자신은 물좋고 공기좋은 곳에서 유유자작하며 세월을 보내다 입멸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붓다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붓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45년간이라는 긴긴 세월을 출가도 못하고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중생들의 삶속에서 살았습니다. 붓다의 일생이 우리에게 불교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나만큼 행복을 바라는 사람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붓다의 삼대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안녕하라, 편안하라...
장원경2015.03.18 09:32 수정/삭제 답글
"또 생각하는구나."
제 블로그에 한번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jaychang2014
5개 첨부파일을 시간있으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첨부파일에 문제가 있으면, 문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 불교포커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 불교포커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여수령 기자승인 2013.05.03 17:19댓글 0글씨키우기글씨줄이기메일보내기인쇄하기페이스북트위터구글카카오스토리
제4회 원효학술상 수상자로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가 선정됐다.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김규칠)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는 3일 열린 회의에서 교수부문 우수상에 조성택 교수(저서『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비전임교수 부문 우수상에 김재영 동방불교대학 교수(저서『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와 김영일 동국대 BK21 연구교수(논문「원효의 화쟁논법 연구」), 학생부문 은상에 연세대대학원 박사과정의 송진섭씨(「대승불교 윤리이론이 지닌 정형적 형식에 대한 고찰」)를 각각 선정했다.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공고 이후 2월 28일까지 응모된 총 24편의 저서와 논문을 대상으로 2차례 걸쳐 심사를 진행했다”며 “조성택 교수의 저술은 고대 인도에서 근대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용과 해석과 관련된 역사적 문제들을 일관된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8일 오후 4시30분 서울 마포구 다보빌딩 3층 법당에서 열린다.

원효학술상 대한불교진흥원이 불교사상의 현대적 조명과 한국철학의 세계화를 주도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알라딘: [전자책] 인생교과서 부처

알라딘: [전자책] 인생교과서 부처

[eBook] 인생교과서 부처 - 마음을 깨닫는 자가 곧 부처다  |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 인생교과서 2 epub 
김홍근,미산,조성택 (지은이)21세기북스2015-07-28 


인생교과서 부처


전자책 미리 읽기
종이책
15,000원 13,500원 (마일리지750원) 
---
불교철학 주간 6위|Sales Point : 185 
 9.2 100자평(1)리뷰(11)
---
종이책 페이지수 408쪽, 약 18.2만자, 약 4.7만 단어

책소개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 인생교과서' 시리즈 2권. 진리를 찾아 떠난 성자, 부처에게 묻고 싶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 36가지.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부처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에 흔히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흔히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부처가 활동했던 기원전 5~6세기는 축의 시대의 한 정점이었다. 당시 인도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새로운 사유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는 사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방황과 모색의 시기였다. 부처의 등장은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

목차
이 책을 읽기 전에
발간사
서문

1부 삶과 죽음

01 삶이란 무엇인가?
― 인생은 곧 수행이다 ㆍ 조성택
―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라 ㆍ 미산 스님
― 마음을 깨달은 자가 곧 부처다 ㆍ 김홍근

02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은 욕망의 ‘성취’가 아닌 ‘감소’에서 ㆍ 조성택
― 일상의 삶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라 ㆍ 미산 스님
― 우리 존재 자체가 행복이다 ㆍ 김홍근

03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는가?
― 영원한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ㆍ 조성택
04 세계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는 연기법 ㆍ 조성택

05 괴로움은 왜 생기는가?
― 무명,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ㆍ 김홍근

06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물거품과 같다 ㆍ 김홍근

07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는가?
― 마음이 사라지면 경계도 사라진다 ㆍ 김홍근

08 죽음이란 무엇인가?
―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필연적 과정 ㆍ 조성택
― 열반에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ㆍ 미산 스님
― 죽음이란 본래 없다 ㆍ 김홍근

09 정토는 어디에 있는가?
― 깨끗한 마음이 곧 정토다 ㆍ 김홍근

10 진리란 무엇인가?
―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다 ㆍ 조성택

2부 나와 우리

11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자유’이며 자율적 존재다 ㆍ 조성택
― ‘나’는 고정불변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ㆍ 미산 스님
― 미혹한 자성은 중생, 깨달은 자성이 부처 ㆍ 김홍근

12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도덕적 책임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 ㆍ 조성택

13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자각 없이 하는 일은 소외된 노동일 뿐 ㆍ 조성택
― 지혜롭게 함께 나누며 사는 중도적 삶 ㆍ 미산 스님
― 평상심을 가진 사람은 일과 하나가 된다 ㆍ 김홍근

14 좋은 친구란 무엇인가?
―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조건 ㆍ 미산 스님

15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가?
― 원활한 소통을 위한 7가지 방법 ㆍ 미산 스님

16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 나를 비추는 거울, ‘이웃’ ㆍ 조성택
― 수행의 목표는 이웃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 ㆍ 미산 스님
― 개인과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마음 ㆍ 김홍근

17 자유란 무엇인가?
― 구름이 요동쳐도 허공은 언제나 비어 있다 ㆍ 김홍근

18 나눔이란 무엇인가?
― 채움과 비움이 자유로울 때 열리는 행복의 문 ㆍ 미산 스님

3부 생각과 행동

19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적절한 표현’을 갖춘 감정의 교류 ㆍ 조성택
―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도구 ㆍ 미산 스님
― 양변에 치우치지 않은 절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ㆍ 김홍근

20 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 어떤 일에도 동요치 않는 담담한 마음을 가지는 것 ㆍ 미산 스님
― 꿈에서 깨어, 무심에서 일어나는 생각 ㆍ 김홍근

21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거둬들여 성찰하라 ㆍ 미산 스님
― 구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아는 것과 같다 ㆍ 김홍근

22 올바른 노력은 무엇을 뜻하는가?
― 정진, 최선의 노력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려는 결정심 ㆍ 미산 스님

23 수용과 인욕이란 무엇인가?
―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 ㆍ 미산 스님

24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 누구에게나 있는 이 평상심이 진리다 ㆍ 김홍근

25 무소득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을 버려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ㆍ 김홍근

26 절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 불행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ㆍ 조성택
― 과거의 아픔과 화해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_미산 스님
― 생각에서 벗어나면 절망도 사라진다 ㆍ 김홍근

27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 죄인은 없다, 죄가 있을 뿐이다 ㆍ 조성택
― 자기 자신에게 화해하고 참회하는 것 ㆍ 미산 스님
― 본심을 깨달아서 ‘무명’을 ‘명’으로 바꾸는 것 ㆍ 김홍근

4부 신과 종교

28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 신이 아닌 가르침과 진리에 대한 믿음 ㆍ 조성택
― 믿음을 통한 자유의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라 ㆍ 미산 스님
―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다면 마음속의 갈등은 없다 ㆍ 김홍근

29 자비란 무엇인가?
― 자비심, 가장 근원적인 종교적 감성 ㆍ 조성택
―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 ㆍ 미산 스님

30 화두란 무엇인가?
― 스승의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는 효과적인 마음공부 ㆍ 김홍근

31 출가란 무엇인가?
― 비범한 결단이 아닌 ‘일상의 선택’이라야 ㆍ 조성택

32 싯타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 하늘과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다 ㆍ 조성택

33 불교의 사회참여는 왜 필요한가?
― 불교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 ㆍ 조성택

34 금욕은 여전히 지켜야 하는 계율인가?
― 시대의 흐름에 맞게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간 ㆍ 조성택

35 붓다는 왜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 세상을 향한 깊은 이해와 고요의 힘을 깨달은 붓다 ㆍ 미산 스님

36 서구 사회는 왜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가?
― 21세기 새로운 대안문명으로서의 불교 ㆍ 조성택

---
책속에서
흔히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그것은 곧 나 자신과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 책이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15쪽

후회와 회한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신음...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홍근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보르헤스 문학 전기』 등의 저서를 펴냈다. 귀국 후 류달영 서울대 명예교수와 구상 시인이 합심하여 설립한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하였다. 오랜 사회교육 경험을 통해 상대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실감하고 안국선원 수불 스님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하였다. 지금은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한국전통 마음공부법인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연구 정진하고 있다.
최근작 : <인생교과서 부처>,<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선화> … 총 13종 (모두보기)
미산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1972년 백양사로 출가한 이래 봉암사와 백양사 운문선원 등에서 간화선 수행을 했으며, 인도와 미얀마에서 초기불교 선수행을 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했으며,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연구하여 인도 뿌나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옥스퍼드대학교 동양학부에서 「남방불교의 찰나설의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상도선원 선원장을 맡고 있으며, 현대인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명상을 계발하여 누구나 일상에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저서와 공저로는 『행복』 『자비』 『마음』 『인생교과서-부처』, 역서로는 『호흡이 주는 선물』 『일상에서의 호흡명상, 숨』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큰글자책)>,<참여와 명상, 그 하나됨을 위한 여정>,<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 총 15종 (모두보기)
조성택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
하다』가 있다.
최근작 :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지금, 한국의 종교>,<어떻게 살 것인가> … 총 1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진리를 찾아 떠난 성자, 부처에게 묻고 싶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 36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품게 된다. 이러한 고민들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에게 묻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인생교과서 부처』(21세기북스 펴냄)는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부처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에 흔히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흔히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부처가 활동했던 기원전 5~6세기는 축의 시대의 한 정점이었다. 당시 인도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새로운 사유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는 사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방황과 모색의 시기였다. 부처의 등장은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부처가 바라본 인생이란 무엇이며 그가 인생에 대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부처에게 배우는 깨달음의 길
마음을 깨닫는 자가 곧 부처다!
우리의 인생은 행복보다는 고통의 시간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온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생명체의 삶은 고해다”라고 말한다. 부처는 고통스러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원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인생은 곧 수행’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마음의 변화 가능성과 그 구체적 방법을 설명하는 데 있다. 수행을 통해 얻는 지혜는 ‘나’와 ‘세계’에 대한 바른 통찰, 즉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세계 이해를 의미한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나는 ‘나’ 아닌 모든 것과 관련된 존재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나’라고 착각하지만, 부처가 말하는 ‘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고 완성되어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나와 함께 하는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고 수행을 통해 나와 이웃의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 부처가 생각한 삶의 참된 의미이다. 부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진리의 평범함이다. 죽음에 관한 부처의 가르침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 죽음의 극복을 위한 부활의 메시지도 영생의 약속도 없다. 부처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통해 이를 실증했다.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평범한 가르침인 ‘죽음의 보편성’일 것이다.

같은 질문, 다른 해석!
불교관이 다른 세 저자가 펼쳐내는 통찰의 향연
이 책은 삶과 죽음, 나와 우리, 생각과 행동, 신과 종교라는 4개의 키워드와 36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부처의 깨달음을 살펴보고, 2부는 ‘나는 누구인가’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중심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부처의 생각을 알아본다. 3부는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절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등 부처가 말하는 실천적 대안을 짚어보고, 4부는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싯다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등 종교학적 차원에서 불교를 심층 깊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대한민국 대표 지성들의 글을 한 자리에 모았기 때문에,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해석을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 중 한 질문에 세 저자가 답한 경우도 있고, 두 저자 혹은 한 저자가 답한 경우도 있다. 대승불교를 전공한 조성택 저자는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부처와 불교를 다루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초기 불교를 전공한 학승인 미산 스님은 실천적 맥락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설명하며, 오랜 참선 수행을 바탕으로 간화선을 대중화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활동을 펼치는 저자 김홍근은 선불교적 입장에서 글을 풀어냈다. 마치 물이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시공간에 따라 부처의 ‘말씀’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는 점이 불교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변주 속에서도 변치 않고 유지되는 하나의 실천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의 실천이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이 책을 통해 부처가 남기고 간 정신을 되새겨보고, 스스로 인생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북플 bookple
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
내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이 아직 없습니다.
마니아 읽고 싶어요 (6) 읽고 있어요 (0) 읽었어요 (18) 
이 책 어때요?
구매자
분포
0% 10대 0%
8.1% 20대 2.7%
10.8% 30대 5.4%
10.8% 40대 21.6%
8.1% 50대 27.0%
0% 60대 5.4%
여성 남성
평점
분포
    9.2
    58.3%
    41.7%
    0%
    0%
    0%
100자평
    
 
등록
카테고리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1)
전체 (1)
공감순 
     
부처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여유와 즐거움을 갖고 읽을 수 있을듯...  구매
ypkim215 2019-04-22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구매자 (0)
전체 (11)
리뷰쓰기
공감순 
     
내가 곧 부처다 새창으로 보기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불교와 기독교 중에 굳이 선택을 하라고 하면, 언제나 불교였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세계의 존재유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교회에 다니라는 사람이나 피켓을 들고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에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위해를 가하는 삶을 살지 않는 "착한"사람은 천국을 간다면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을텐데, 굳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인 반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였기에 둘 중에서는 불교를 선호했다. 하지만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지, 삶과 죽음, 행복은 무엇인지, 신을 믿을 필요가 있는지의 공통질문에 현자들이 답을 해주는 인생교과서 중 부처를 택했다. 




신세계를 보는 듯 했다. 번지르르한 말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나면 보통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여서다. 하지만 보면서 납득하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되기를 바라는 내가 있었다. '영원'이라는 말이 유한하다고도 하고 무한하다고도 한다. 여기서 유한은 존재가 소멸되는 것. 즉, 육체가 없음을 말한다. 흔히 생각하는 죽음이다. 반면, 무한은 마음이다. 그 사람의 육체가 없어질지라도 마음이 남아있는 한 무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아마도 죽음 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이지만 않는다면 시키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말은 극적효과를 노린 대사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죽고 싶지 않고,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진시황제도 불노불사의 약을 찾았고, 생명의 근원이라는 처녀의 피로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게 아닌가. 이런 육체의 삶을 나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고, 내가 마음임을 깨닫는 것이 불교다. 내가 책을 읽고 이해한 내용은 이렇다. 육체는 마음이 잠시 머무르는 그릇일 뿐이다. 마음은 절대적이며 영원하기에 죽고 사는 것이 없다. 그러니 깨닫는 자에게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없다. 마음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괴로운 이유를 말했는데, 나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추가 없으면 미도 없다. 빈곤이 없으면 부도 없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과 일맥상통했다. 구분짓지 않으면, 남과 비교할 일도 시기할 일도 없다. 깨달은 사람에게 남은 곧 나이다. 그러니 구분지을 일이 없다. 악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기적이라 하고,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고 본성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사람마다 그 범위가 다른데, 수행을 통해 확대할 수 있다. 불교는 본성을 선과 악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한다. 그 행위에 깃들은 마음이 문제이지 사람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이 밖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르침도 잊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 등. 이것은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불교는 열려있는 종교다. 어떤 토속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것과 융합할 수 있다. 진리가 하나라고 하지도 않고, 무엇이 진리라 정의하지도 않는다. 내가 유일신이니 나만 믿으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길잡이지 부처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다. 서양에서는 요즘 불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과 유연함이 있고, 타 종교를 믿고 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런 점이 어떤 종교보다 좋았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해 수행으로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깨달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수한 부처. 나는 영원한 존재이며, 이를 깨달아야 한다는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 수천년이 지나도 부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부처가 알려주는 그가 깨달은 것을 접하다 보니, 문득 인생교과서 예수가 생각났다. 나는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기독교의 일부만을 보고 예수의 삶을. 그의 사상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하고.

- 접기
유메 2015-07-16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인생교과서 부처 새창으로 보기
평소 불교에 대해서 관심은 많았지만, '부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인생교과서 부처>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에게 묻고 싶은 인생의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 대표 학자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인생교과서 부처>는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조성택님, 현재 상도선원 선언장과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수행불교과 실천불교를 뿌리내리는 일에 정진하고 있는 미산스님, 안국선원 수불 스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하였으며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한국전통 마음공부법인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연구 정진하고 있는 김홍근님이라는 3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저자들이 들려주는 인생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도록 도와주어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1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는가,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괴로움은 왜 생기는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정토는 어디에 있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2부 나와 우리라는 주제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친구란 무엇인가,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눔이란 무엇인가, 3부 생각과 행동이라는 주제로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올바른 노력은 무엇을 뜻하는가, 수용과 인욕이란 무엇인가,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무소득이란 무엇인가, 절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4부 신과 종교라는 주제로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자비란 무엇인가, 화두란 무엇인가, 출가란 무엇인가, 싯타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불교의 사회참여는 왜 필요한가, 금욕은 여전히 지켜야 하는 계율인가, 붓다는 왜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서구 사회는 왜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저자들의 답으로 이어지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는 참된 삶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한다. 인생은 곧 수행이며, 마음을 깨달은 자가 부처다.



"붓다가 과거나 미래에 붙잡혀 있지 말고 '현재에 깨어서 살아라'라고 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보다 깊이 자상히 보기 위해서 현재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보다 확실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 '다시 태어남이 없음'과 마지막 죽는 순간에까지 유지되는 '깨어 있음', 이 두가지가 깨달은 자가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삶과 죽음의 불가분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깨달음이요, 붓다가 선언한 불사의 진정한 의미이다."라고 글귀가 인상적이다. 죽음의 극복이란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문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죽음의 문제는 '출가->깨달음->전법->열반'에 이르는 붓다의 전 생애에 걸쳐 중요한 종교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우선 죽음은 젊은 싯다르타가 집을 떠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의 출가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여든 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불사를 성취한 붓다조차 육신의 노쇠는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의 열린 진리관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라는 점이 돋보인다.



"불교사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몸소 실천해온 역사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수레'라고 표현했다.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며 사람들을 진리의 '피안'으로 운반하는 '탈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수레의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자신의 수레만이 진리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열린 진리관은 오늘날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첫 걸음은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고 현명한 이와 존경받을 만한 덕성과 수행을 갖춘 이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붓다는 <최상의 행복경>에서 말한다. <육방예경>에서 좋은 친구는 다음과 같은 덕복을 갖춘 사람이라고 전하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밖으론 담담하여 집착하지 않고 안으론 따뜻하고 온후한 사람, 본인 앞에서는 바른 충고를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칭찬하는 사람, 병들어 실의에 빠져 있거나 권력에 짓눌려 두려워할 때 용기를 주는 사람, 비록 친구가 가난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항상 그를 위해 이익 되게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관리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숨겨주고 뒤에서 그 일을 해결해주며, 병들었을 때 그를 보살펴주고, 친구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고, 친구가 죽은 다음에도 그 집안을 보살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불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언어 행위란 곧 말하는 사람의 선한 의도, 내용의 유익함 그리고 듣는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적절한 표현'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바람직한 언어 행위란 무엇인지를 묻는 하세나디왕에게 붓다는 (의도가) 선해야 하며, 분노가 없어야 하며, 행복을 가져오는 언어 행위라고 충고한다. 이어서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해가 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선을 키우고 불선을 줄이는 언어 행위"를 해야 함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대표 지성에게 듣는 <인생교과서 부처>를 통해 인생의 다양한 문제의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부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겠다. 

- 접기
리코짱 2015-07-20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깨달음, 왜 우리 시대 필요한가 새창으로 보기


부처에서 나는 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이전의 또 다른 내가 만들어낸 삶은 아닐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우리는 가는 걸까. 수많은 삶과 죽음의 질문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오늘 하루의 삶의 마감을 하면서 나의 하루는 어떠한 삶이었는가. 나를 이롭게 하고 상대를 이롭게 하는 그런 삶이었는가 반성한다. 내가 내 것만을 갖기 위해, 상대의 가진 것을 내가 갖기 위해 나는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한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삶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을 전한다. 불교는 우리 민족 종교 중 하나다. 뿌리 깊은 종교인 불교의 핵심을 알려주는 질문 36가지를 통해서 삶을 찾아가는 여행길을 보여준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길, 행복의 조건 등에서부터 우리의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것들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또한 답을 함께 찾아간다. 



"붓다에게 있어서 괴로움과 불행은 삶을 근원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삶에 대한 처절한 절망이 없이는 불행의 원인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불행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탐진치에 빠져 지혜롭지 못한 삶을 살았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자비롭게 베풀며 조화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주는 교훈일 것이다."-297페이지.



끊임없는 욕망, 만족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 지금의 모습을 사랑하고 소비지상주의적이고 과시적인 삶의 모습을 탈피하여 보다 인간으로서 기본 심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책, 인생 교과서 부처는 복잡하고 현란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고민하고 번뇌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분별심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탐욕과 질시의 사회에서 우리가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다 같이 무너지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수'에 이어, 인생 교과서 두 번째 시리즈로 만들어진 인생 교과서 부처는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부처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만 않으면 알 듯한데, 막상 생각해보면 깜깜하다. 확 통하느냐, 꽉 막히느냐? 눈앞에 환히 드러나느냐, 깜깜하냐?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통하면 우주가 자기 몸이 되고 불생불멸이 되지만, 깜깜하면 나고 죽는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르는 사람을 '눈 뜬 봉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매 페이지마다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질문을 꺼내놓고 묻는다, 우리는 제대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하나 채워가보자, 삶은 유한하기에 더없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것을 놓지 말아야 할 일이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삶이라면 우리 삶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마음의 복잡함을 제거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도록 하자. 



- 접기
jumjan 2015-07-28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서평] 인생교과서 부처 새창으로 보기
[서평] 인생교과서 부처 [조성택, 미산, 김홍근 저 / 21세기북스]

 

이번에 21세기북스 출판사에서 <인생교과서>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인생교과서>는 2010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현자 19인의 삶과 철학을 대한민국 각계의 대표 학자들이 풀어낸 책이다. <인생교과서> 시리즈는 부처, 공자, 무함마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간디, 데카르트, 니체, 칸드, 베토벤,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등 총 1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번에는 예수, 부처, 공자, 무함마드 이렇게 4권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이야기 할 책인 <인생교과서> 2권은 부처 편인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후, U.C 버클리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성택 교수와 백양사에서 수계한 이래 전통 교학과 수행에 전념했고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공부한 후 더 넓은 현대불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미산 스님, 그리고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류달영 서울대 명예교수와 구상 시인이 합심하여 설립한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오랜 사회교육 경험을 통해 상대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실감하고 안국선원 수불 스님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한 김홍근이 함께 부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을 잘 사유하고 관찰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온통 물들어 있다.

마음이 번뇌롭기 때문에 중생이 번뇌롭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이 청정해지느니라.

비유하면 화사나 화사의 제자가 깨끗한 종이 위에 다양한 색상으로 갖가지 형상을 마음대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 (P. 248) 


 

세상에는 참 많은 불교인들이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데 나는 딱히 믿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는 물론 부처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부처가 대단한 인물임은 알기에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접해보고 싶었다. 이번에도 역시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그에 대한 답을 하며 부처의 깨달음을 보여준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생각해보게 되는 삶과 죽음, 삶과 죽음, 나와 우리, 그리고 생각과 행동, 신과 종교라는 4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부처에게 삶과 행복,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 깨달음, 정토, 진리, 인간, 노동, 좋은 친구,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자유, 나눔, 수용과 인욕, 평상심, 무소득,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 자비, 출가, 금욕 등 인간의 여러 고민들을 질문하고 부처의 대답을 통해 불교적 해결을 접할 수 있다.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을 근거하고 있는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흔히 부처님, 석가모니, 붓다 등 다양하게 불리는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성자로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라는 의미의 여래, 존칭으로서의 세존, 석존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부처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면 그는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여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운명이었는데, 29살에 고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불타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붓다가 된 싯다르타가 바라본 인생은 무엇이며 그가 깨달은 것은 과연 무엇일지 부처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데 과연 부처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부처라 하면 예수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종교 관련 이야기가 따라붙기 마련이라 아무래도 어렵고 복잡할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책은 부처님의 좋은 말씀들은 물론, 각 주제에 맞는 여러가지 시들도 보여주면서 설명을 잘 해석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각각의 주제에 따라 불교의 사상을 굉장히 유익하게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딱히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문학적 성찰을 위해 읽어보면 너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같은 주제의 36개 질문들을 역사 속의 열아홉 위인들에게 던져 각자 추구하는 그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앞으로 출간될 책들도 너무너무 기대된다. 

- 접기
o천사 2015-07-28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인생교과서 02. 부처 새창으로 보기



이 인생교과서 시리즈 중에 무함마드와 함께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 바로 이 부처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산다는 것" 자체에 힘들어하던 시절에 나는 불교에 무던히도 기댔었다

그렇다고 내가 절에 다닌다거나 종교로서의 불교에 집중한 것이 아닌 나에게 불교는 공부의 한 가지였다

손목에 염주를 차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무교이고 어느 신이건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건방지기 그지없는 무신론자일 것이다

내 손목의 염주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때면 괘나 유용하다

 

이런 나이지만 굳이 종교로서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불교를 고를 것이다

불교는 자신 수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기독교" 에서 말하는 "신을 믿는 행위" 자체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인해 구원??  불교식으로 말하면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본 역사나 싯다르타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책이나 그의 제자에 대한 책도 탁닛한 스님이나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이나 일본의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 등 유명 스님들이 쓴 책들도 즐겨 읽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불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느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여전히 공부 중이라고밖에 대답을 할 수 없다

이 책도 내게는 그런 불교 공부의 하나이다

앞서 읽었던 무함마드나 예수에서 보았던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에 대한 부처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나 평상심이나 무소득 등의 불교만이 지닌 특수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불교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은 곧 수행' 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며, 바람직한 인간상이란 바로 '호모 메디타티오'., 즉 '수행하는 인간'이다.

수행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며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페이지 : 25
 

 

나와 함께하는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고 자애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참된 삶의 의미라고 붓다는 말한다.
페이지 : 33
 

 

마음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고, 마음의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 곧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페이지 : 34
 

 

깨달은 사람에게 실재는 오직 아음뿐이며, 상대적인 삶과 죽음은 단지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일시적인 양상일뿐이다.
페이지 : 37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페이지 :  39
 

아마 이 말이 불교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곳곳에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멋있는 글귀들이 가득하다

그동안 불교에 대해 그리고 부처에 대해 괘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진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세 권도 좋았지만 읽지 못한 공자 편도 그리고 앞으로 나올 많은 책들도 기대된다

 

 



- 접기
에르피스 2015-08-07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마음 디톡스' 콘퍼런스 특강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화쟁적 태도로 여러 개의 '옳음'을 인정해야 공존 가능"

글 명지예 기자  2019-07-26URL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글자 크게글자 작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불화를 겪기도 한다. 골치 아픈 언쟁을 피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갈등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정한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가피한 사회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조성택 교수, '마음 디톡스 -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 특강

조선뉴스프레스 '마음건강 길'이 24일 개최한 <마음 디톡스,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에서 조성택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조 교수는 '화쟁과 경청의 가족문화'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차이를 분명히 이해할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작품, 영화, 책 등을 사례로 들며 갈등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로 '화쟁'을 강조했다.

IMG_0919.JPG

ADVERTISING

다음은 조성택 교수의 강연 요약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나 공론의 과정은 없고 늘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논쟁만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 안에서 한국 문제만 생각해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울광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양분해서 싸우고 있다.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기 위해 120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비숍이 본 한국인, 국경 밖과 안의 모습이 달랐다

1831년에 태어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인이다. 이분은 영국 왕실의 친척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한국에는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총 네 번 방문했다. 청일전쟁부터 아관파천이 있었던 시기로, 한국이 아주 혼란했던 때다. 그는 한국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했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제목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냈다.

IMG_0920.JPG

비숍은 한국 국경 안과 밖에서 만난 한국인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특히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에게선 국경 안의 한국인에게서 본 ‘풀죽은 모습’ 대신 ‘주체성과 독립심’을 발견한다. 그는 한국인이 정직한 정부를 만난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비숍이 당시 우려했던 대로 그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사의 아픔을 겪은 후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정치적 발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 시점에서 봤을 때 과연 우리의 성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족끼리의 우애가 어떤 나라보다 긴밀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큰 연봉을 포기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곤 한다.

IMG_0925.JPG

우리는 언어 폭력, 정신적 폭력이 난무하는 적대적 관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은 개인의 수양과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하나로 관통된다는 것이지 나와 우리 가족이 잘된다고 우리 사회가 잘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나와 가족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만연해 있다. 지금은 서로가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있는 것이다. 태극기는 촛불을, 촛불은 태극기를 혐오한다. ‘한 쪽을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15년 동안 유학을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미국 학부형들도 많이 만났다. 그 때 느낀 것은 미국의 개인들은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 교육 자체도 도덕을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교육은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개개인 면모를 보면 어떤 나라보다도 개인적 도덕성은 뛰어나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인간들이 모여 사회는 대단히 비도덕적으로 변했다.

IMG_0953 (1).JPG

최근 미국의 한 학회에 다녀왔다. 주제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였다. 그곳에 모인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결론은 “좋은 사회 없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였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현재 80%가 대졸인 세계적인 고학력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회 전체는 몰지성적이다. 4대강 댐을 부수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에서 무엇이 우리 사회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 없다. 그저 부수자, 말자 두 문제만 갖고 이야기한다.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논의도 없이 양자택일 속에서만 머문다.

버락 오바마의 현답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 지 물어야 한다" 

2007년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그가 무슬림인지, 미국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이라크 전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물었다. 그때 오바마의 답변은 “이라크 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이라고 답한다. 기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다면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할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인가"라고 묻는다. 어려운 질문에 오바마는 “질문이 틀렸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대단히 훌륭한 답변이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의해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늘 모색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해야 한다.

IMG_0964.JPG

지혜란 사건의 일면이 아닌 전면을 보는 능력이다. 확신과 확실함은 다르다. 나의 확신은 내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하느냐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대화를 할 때 ‘자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내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태도다. 나와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의 말도 ‘옳다’고 생각하고 듣는 것이다. ‘왜 옳을까?’ 생각하며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플라톤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 진정한 대화"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나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만 진정한 대화"라고 말했다. 타인과의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고, 고민하면서 나의 지평이 넓어진다. 자신만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생각의 성에서 나와야 한다. 나도 자식과 이야기하다보면 처음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너지고 내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나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참여 다원주의다. 나와 다른 삶에 대해 “너는 너 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산다"는 똘레랑스(관용)적 태도와 다르다. 끊임없이 서로 묻고 답하며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생각이 다르면 삶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적대적인 대립 대신 경쟁적 대립의 태도다. 진지한 질문과 대답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화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되, 평화롭게 다투자는 것이다.

그림1.jpg
영화 <라쇼몽>(1950)
한 사건을 똑같이 겪고도 각자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다. 영화 <라쇼몽>은 이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사무라이, 사무라이의 부인, 산적, 나무꾼이 등장한다. 산적은 사무라이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다. 나무꾼은 이 사건을 목격한다. 영화는 이것을 4명의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각각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가 범인인지 모를 정도다. 누구 한 명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한 사실에 대해 복수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무엇인가.PNG
<정의란 무엇인가>(2010)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것은 늘 옳음과 옳음의 충돌이다.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10만부가 넘게 팔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사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묻는 책이다. 책의 핵심 ‘선(善)과 선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이다. 각 언론이 자신이 정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정론이라고 할 수 없다. 정론은 독자의 독서 능력, 즉 모색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고민해 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의 과정이고, 옳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복수의 옮음을 인정하는 사례로 독일의 보이텔스바허 협약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만들면서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교과서를 만들 때 ‘논쟁적인 주제는 논쟁적으로 남겨둔다’는 원칙을 만든다. 관용과 개방성으로 학생들이 정론을 찾아가게끔 길을 만든 것이다.

IMG_0998.JPG

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지하게 듣는' 경청

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허점을 발견하려고 듣는 것은 ‘매복형 경청’이지 진정한 경청이 아니다. 진지한 대화란 4살짜리 아이가 그림을 그려왔을 때 그 그림에 대해 아이에게 이것 저것 질문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까지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사회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에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이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쟁적 성찰이다. 이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의감이 아닌 ‘많은 옮음’들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옮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관점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의 경험은 각자 다르며, 그른 것 없이 모두가 옳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통해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1부)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1부)

붓다빅퀘스천 1 조성택 교수, 월간 불광 500호 기념강연 붓다 빅 퀘스천. 이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월간 불광 500호 기념강연 붓다 빅 퀘스천. 이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행사갤러리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행사갤러리
수정지우기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

동영상 둘러보기_https://www.youtube.com/watch?v=-BIAfhRzuMw



조성택 교수_고려대학교 철학과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하다』가 있다.

조성택 - 나무위키

조성택 - 나무위키

조성택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편집]

고려대 철학과 교수이다.

1.1. 상세[편집]

1957년생이며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고려대 철학과 불교관련 교수이며 고려대학교 77학번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부처 붓다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불광연구원 편집위원 한국철학회 편집이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2. 강의들[편집]


2. 사건/논란[편집]

2.1. 돈암동 살인사건[편집]
한 때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신분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피해자인 고 이해령씨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으며 사건직전에서도 마지막 피해자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해령 시신이 발견된 미분양 아파트의 부동산 거래에 관련된걸로 보이는 인물이며 피해자 유서가 갖는 의문점들 그리고 진술의 불일치성으로 인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결국 DNA가 일치하지않았기 때문에 용의자 선상에 제외되었다. 그것이알고싶다에선 범인사실이나 사건 몇 부분에 부인했다.

 현재까지 유명 강연 및 언론을 통해 노출되고 있으며 교수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연찬문화연구소 |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Daum 카페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남곡추천 0조회 1420.06.18 05:00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진보와 자유에 대한 근본적 통찰

 

나는 과거의 진보가 사회적‧ 물적‧ 제도적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바탕이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물질적 부가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절차나 제도로서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의 진보’ 즉 ‘의식‧문화의 진보’가 사회적 진보를 견인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슨 ‘의식(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류(流)의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대적 비중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중심민주주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 대세(大勢)다.
그 모순에 대항해서 사회주의가 출현했지만, 실패했다.
개인의 해방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자기 이익추구의 자유가 핵심으로 된다.
이른바 자기중심적인 소인(小人)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력의 근원이다.
관념적이고 이중적이며 전근대사회의 지배논리로 작동한 허위의식인 이른바 군자(君子)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인(小人)의 질서다.
자기중심성과 이익추구를 보통 사람의 속성으로 인정하고, 침범을 막는 규범과 계약 등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신의 고도한 행위능력 때문에 자신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것이 요청된다.

핵전쟁의 위험과 기후 환경의 격변 등이 그 절박함을 나타낸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질이 다른 자유를 추구하는 이른바 군자(君子)의 보편적 출현을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다.

 

이제는 개개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아마도 ‘자기 혁명’을 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시대인지 모르겠다.

목숨을 거는 비장한 결단이 아니라,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이 이 혁명의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거룩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한 즐거운 과정으로 되는 것이 이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어떤 성인(聖人)보다도 공자의 사상은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상력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과학적으로 인간의 현실, 특히 의식(意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간이 진화할 목표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人間像)으로 표현하였다.

군자(君子)라는 용어는 원래는 특정한 지배적 신분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공자는 이 말을 일정한 인격과 정신적 성숙을 기준으로 신분계층과 관계없이 사용하였다.

이 자체가 엄격한 신분계급사회에서는 조용하면서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그러나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라는 단어는 그 동안의 여러 왜곡과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현대 감각에 맞는 용어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자주적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1)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주체적’ ‘자주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립(自立)의 의미가 중요하게 포함된다.

남에게 굴종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집이 강하거나 자기주장을 여간해서 꺾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는 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착각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怒)가 나는 경우가 많다.

노(怒)는 노예(奴隸)의 마음(心)이 합성된 단어다.

다른 사람의 생각 때문에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심하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자주성을 뺏기는 상태다.


2) 단정(斷定)하지 않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4편)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인문운동이 최전선(最前線)이 되는 것도 이것이 최대의 테마로 되기 때문이다.

단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사람으로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단정은 도덕적으로 하자(瑕疵)가 있는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전혀 근거 없는 반(反)과학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연재 첫 장에서 상세히 이야기한바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1편)

 

무겁다는 것은 중심(重心)이 잡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래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忠)과 신(信)을 바탕으로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나 권력을 앞세운 권위주의(權威主義)와는 질이 다른 것이다.

학즉불고(學則不固)야말로 진정한 권위의 바로미터다.

‘배워도 완고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탐구할수록 더 유연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언제든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고칠 수 있는 자유인이며,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풍요로운 인간이며, 흔들리지 않음과 유연함이 조화된 진취적인 인간인 것이다.


3) 기쁨이 동력인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편)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6편)

 

배우는 것과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쁨(說)이며, 진실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즐거움(樂)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 이 모두가 기쁨이 바탕인 것이다.

군자(君子)를 움직이게 하는 바탕은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작가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케 한다.

“소명(召命)이란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허기(虛飢)가 만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 특히 현대의 사회운동의 동력(動力)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감이나 변치 않는 강고한 신념체계’가 아니라 내면의 기쁨이라야 지속적이고 진실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많은 NGO 단체나 시민운동 등에서 활동가는 보이지 않고 실무자만 보인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운동의 동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 안회를 평한 다음 구절은 이 시대의 진취적 운동가나 참다운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핵심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공자 말하기를, “어질구나, 회(回)여! 한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산다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回)는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구나!

어질구나, 회여!“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4) 보편적 인간-편을 가르지 않는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子曰 君子 不器 (2편)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보편적이되 편벽하지 않고, 소인은 편벽하여 보편적이지 않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2편)

 

그릇(器)은 고정되어 있어서 용도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한가지로 고정되어 기물적(器物的) 인간으로 되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오히려 어떤 그릇도 채울 수 있는 무고정(無固定)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위정(爲政)과 관련해서 보면 만일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가 기물적 인간으로 된다면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실무적 능력을 무시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완고함이나 배타성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불기(不器)는 주이불비(周而不比)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려는 보통의 경향을 넘어설 때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고, 개인의 이익이 높은 가치로 보호되는 현대에서 이러한 인간상을 지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명력이 여러 가지로 억압되던 시대에는 그 개인의 생명력을 해방하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된다. 따라서 오늘 날의 개인주의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필수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되면 오히려 생명력을 훼손하는 결과로 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반(反)하게 된다.

개인주의를 경과하고 있는 현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공자의 시대보다도 훨씬 이 주이불비(周而不比)라는 테마와 직면하고 있다고 본다.

누구하고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이익 또는 진리가 어디 있는가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13-26)

 

비교감, 우열감, 상하감으로부터 자유로우면 태이불교(泰而不驕)가 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이것들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교만(驕慢)은 비굴(卑屈)의 쌍둥이 형제인 것이다.

특히 경쟁과 비교, 우열을 수직화하는 사회가 넘어서어야할 인간화의 가장 큰 테마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15-21)

 

군자의 사회성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군자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소인의 자만심은 아집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집과 아집이 만나면 다투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집이 없는 사람을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가장 당당한 사람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라는 고정된 견해가 없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구명하려 는 태도는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편을 가르지 않는다.

소인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파당을 만든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상대편이 사라지면 같은 편 안에서 다시 편이 갈라진다.

작게는 개별적 삶에서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이 반복되어 왔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끊임없이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그 길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조건이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어 왔지만 그런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공자의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바탕에는 공자의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긍이부쟁矜而不爭은 태이불교泰而不驕와 통하고, 군이부당群而不黨은 주이불비周而不比와 통한다.

 

 

5)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4편)

<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君子 上達 小人 下達>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하여 만물의 영장으로 된 것은 그 지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거대한 문명을 일으키고 반면에 인류존속 그 자체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그 바탕에는 이 인간의 지능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가장 좋게 수행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지능을 통해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스스로의 제도를 개혁하여 자유나 평등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자연과의 모순이나 사회적, 국가적 갈등이 그 가공할 능력 때문에 엄청난 위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인간의 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능력 즉 인간의 지능을 더욱 고도화(高度化)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외부 즉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한 그 능력과 조화되도록 스스로의 내부를 변혁하는데 그 지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출현 자체가 하나의 비약이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비약, 즉 의식혁명을 예상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과거 성현이라 알려진 분들은 모두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그 근본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하신 분들이다.

공자도 그 한 분이시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君子)라는 인간상은 바로 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전형이다.

인간이 그 지능의 사용을 어떤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군자(君子)는 상달(上達)하고 소인(小人)은 하달(下達)한다는 이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지향을 뚜렷이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중심성 속에 머무르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의 자기중심성과는 다르게 인간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피해를 주게 된다. 이것이 소인의 하달(下達)이다.

이 피해의 정도는 그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도 지금의 폐해는 더 심각한 것이다. 이제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군자의 상달(上達)은 인류 진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이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가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진화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되는 시대로 된 것이다.

(佛家에서는 중생에서 보살로의 진화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공자를 비롯한 성인이 제시한 길이 인류보편의 과제로 되고 있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6) 사이좋음의 바탕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편)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실상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 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사이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집이 없으면 사람과 사이가 좋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좋아함을 받는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쪽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인 화합의 길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불선자(不善者)는 미워하게 된다.


공자도 이것을 지적한다. 즉 그 화(和)가 불선(不善)을 받아들이거나 타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子貢 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7)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한 인간

 

<공자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아니한 사람을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4-17)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쉬운 말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된다. 어진 사람을 보면 흠이 없나 찾으려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배울 스승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공자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배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이나 오만이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얕보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인간으로서 진보는 어렵다.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았을 때 비난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만 잘 보면 그 싫어하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內自省)고 한 것이다.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없다면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심정과는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서 용인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남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내 안에도 그런 요소가 없나 살펴보는 삶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인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그 직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무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증자 말하기를, “군자는 생각함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曾子曰 君子 思不出其位>

 

이 말들도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나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오용될 소지는 있지만, 그 본 뜻은 먼저 자신의 일에 충심(忠心)을 다하라는 의미로 읽히면 좋을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이 옳은 것처럼 착각하는 얍삭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8) 꾸준히 진화하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뜻이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함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 분수를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그대로 들리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2-4)

 

자율적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데 이렇게도 성숙의 단계를 밝히고 있는 성현이 있었을까 하는 감동을 맛본다.

열 다섯이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 시작할 나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이 때부터 본인들이 선택하기 시작한다.

서른이면 자립하는 나이다.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함이 있다.

그리고 50이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나이다.

졸저(拙著)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에서는 지천명을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말하였는데, 그 후 논어를 더 자주 접하고, 인문운동의 도구로 많이 활용하다보니까, 이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자 사상의 바탕을 볼 때, ‘진리를 알았다’라는 해석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분수(또는 소명)를 깨달았다라고 보는 것이 공자의 뜻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순(耳順)은 아집을 넘어서는 것이다.

누구의 어떤 말도 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단계가 되면 자유인으로서 인격의 완성을 이처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극대화하는 풍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멋대로의 세계'로 되는 경우가 많아 결국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만나게 되면 심한 부자유를 느끼게 되어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구의 질이 바뀌는 것이다.

 

대체로 40대까지는 자신이 자립하고 자신을 확립하는 시기라면, 즉 튼실해지는 시기라면 50부터는 부드러워지는 시기로 보인다.

‘자립’ ‘일관성’과 ‘유연함’이 한 인격 속에서 어떤 단계를 거쳐 성숙하게 조화되는가에 대한 모범을 보이는 것 같다.

결코 옛 이야기가 아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
진보에 대하여

남곡추천 0조회 46818.11.19 10:37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보에 대하여(1)

 

진보는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인류는 ‘자유 확대’의 길을 걸어 왔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계의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유’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적 자유’ ‘의식을 가진 고등생명체인 인간만이 갖는 관념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관념계의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인류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진보의 위기’나 ‘보수의 위기’ 등은 정체성이 애매한 현실 정치권력의 향배에 관한 것일 뿐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것이 위기라면 사실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되는 ‘낡은 것’의 위기일 뿐이다.

 

지금은 좋든 싫든 세계화의 시대다.

자국 안의 모순이 세계의 모순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간다.

전쟁, 양극화,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 현상들 배경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인 의식 사이의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확대를 향한 진화의 길에서 인간의 지적능력은 눈부시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자유를 획득하는데서, 또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고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제도를 진척시키는데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그러한 능력들이 자기중심적 의식과 결합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함으로서 지금의 위기를 낳고 있거나 오래된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종(種)적 위기를 배수진으로 하면서 이제 ‘관념계의 자유(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를 인간 진보의 최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역사가 나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의식체계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부자유의 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유 욕구를 신장하는 길이어야 진정한 것이다.

즉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그 변혁을 이루어가는 것이 미래 혁명의 핵심이다.

물론 국가간 모순이나 계급모순 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모순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진보적 노력과 인간의 의식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운동을 할 때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 없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실사구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운동가들에게는 ‘생활 없이는 발언권 없다’라는 말을 더 보태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100명에 한 명 만 있어도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고, 주위를 사랑하며 주위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전략도 넘어서는 최고의 혁명 전략이다. 아니 혁명 그 자체다.

요즘은 연습장이 넓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협동 생산이나 단순소박한 생태적 삶의 실천, 마을공동체 운동, 기부와 자원봉사 등은 대단히 좋은 연습장으로 되고 있다.

나는 기부와 자원봉사를 자발적인 ‘풀어놓음’으로 부르고 싶다. 풀어놓음으로서 자타가 함께 풍성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단결과 투쟁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연습의 장이 되어야 진실한 것이다.

노동조합 특히 대규모 노동조합이나 공공 노조가 기득권에 머무르거나 조합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 ‧ 노동시간 단축 · 임금이나 연금의 격차해소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도덕성을 발현함으로서 자본과 정부로 하여금 비정규직 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도록 강하게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

투쟁 따로, 새로운 사회 만들기 따로가 아니라, 이것을 큰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부자도 즐겁게 당원이 되고 싶어하는 진보정당이 출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계속)

 

 

 

 

 완고한 진보는 형용모순이다 2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선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화란 물신(物神)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의미와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의 내용이 인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화의 정치’와 ‘시장의 인간화’ 그리고 ‘의식문화혁명’이 서로 삼투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요즘 대선 국면에서 나오는 통합, 연정, 경제민주화, 복지, 정의 등의 잇슈들은 사실 이러한 과정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런 테마들을 앞에서 견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의 세계와도 맞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 과거의 틀들로부터

한 쪽 발만 벗어나고, 다른 발은 과거의 틀에 묶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무슨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심정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정파의 입장을 진보라고 혼동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보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고정된 틀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한 때 어떤 이데올로기나 실천이 유효했다면 그 시대는 그것이 진보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가 바뀌었는데도 낡은 생각이나 정서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닌 것이다.

요즘 ‘완고한 진보’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말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완고는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公義)는 완고하지 않다. 사의(私意)나 사욕(私慾)이 끼어들 때 완고하게 된다.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성숙도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능력이나 덕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새로운 시대의 진보를 위하여 몇가지 말씀을 드려볼까 한다.

 

첫째는 폭력혁명에 대한 미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미련이 이념 뿐만 아니라 정서 속에 남아 있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또 다른 단정(斷定)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세계는 ‘지적 혁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급격하고, 폭력적인 혁명은 아니지만, 인간의 질적 진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혁명의 주체는 ‘지식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과거 시대에 회색분자로 비아냥받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가 아닌 공인(公人)을 말한다.

‘세계가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 그리하여 독점이나 자기의 폭을 넓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 ‘자신의 생각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인입니다.

나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나 계급 · 민족 속에서 이런 지식인 즉 새로운 시대의 혁명 주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주체들이 그 생산과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현상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둘째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위선과 기만에 반대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해서 민주집중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고, 아직도 이념이나 정서 속에 또는 습관이나 관행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민주집중제는 ‘민주’보다는 ‘집중’에 방점이 찍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다. 즉 독재를 낳게 되어 있다.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성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단히 높은 성과다. 이것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진보적 입장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이런 말은 대단히 반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계속)

 

새로운 진보정당 3.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누가 옳은가’하고 토론해서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연찬해서 가급적 전체가 일치한 견해에 도달하는 방식의 ‘연찬민주주의’(적절한 명칭이 없어서 제 임의로 사용합니다. 화백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우선 진보적인 정당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 이것이 문화로 자리잡으면,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우성(優性) 인자이기 때문에 이런 정당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소수당일지 몰라도 정치를 ‘권력쟁탈의 장으로부터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화의 예술로’바꾸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 아무리 ‘통합’과 ‘상생’을 이야기해도 이런 내용이 없으면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무슨 ‘조화’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서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힘이 되어야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다보면 어느덧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될 것이다.

 

셋째 계급투쟁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면서 계급제 사회로 되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그 투쟁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서 역사가 진보해 온 것도 사실의 한 면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초기에 역사발전의 일반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 마르크스다.

그 이후 유물사관과 그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론이 사회진보의 이론적 실천적 지침으로 되어 왔다. 물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론이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이론은 오랫동안 사회변혁의 이론적 실천적 기둥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과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회의 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기 특히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나 그것이 사회변혁의 주된 요인으로 되는 시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다수 민중이 포섭되어 진정한 자주성과 자유로운 정신이 사회구조에 의해 막혀 있을 때는 그것을 투쟁에 의해서 전복하는 것이 진보의 목표가 되고, 실제로 그런 시기도 거쳤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투쟁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상이론들이 검증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않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낡은 사상이론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주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서나 욕망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나 자본가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세계 인류의 지금의 보편적 의식이나 보편적 욕구에 부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에 맞지 않을까?

따라서 지금의 세계 변혁을 위해서는 의식(意識)의 선도성(先導性)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표를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계급의 해방’에서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

물론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은 ‘물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목표에 부분으로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 균형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지만, 물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해도 자영업자의 수가 600만에 가깝다고 듣고 있다.

‘계급투쟁이 곧 진보다’라고 하는 인식이나 정서에서 벗어날 때, 사실의 세계가 보여 오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보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본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보가 목표로 할 수 있는 사회가 현실적으로 무계급사회가 아니고 계급조화사회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는 조화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조화인 것이다. 조화라고 해서 투쟁을 배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 특히 대기업의 탐욕과 독점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 변화를 유도하는 입법과 제도적 장치를 위해서 투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계급조화론은 우리 시대의 경제정의(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바탕에 설 때 진보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계급조화론을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또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길이 무계급사회, 무소유사회라고 하는 인류의 이상향을 향한 현실적 도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궤변이라고 또는 백일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나 자신의 부족한 경험과 사색이지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또 한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애정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드린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의 지평을 열어가시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