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5

자신을 소중히

 

자신을 소중히

3 M.Y.

그것은 완벽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장은 나를 구했다.

저는 가족과 친구, 학습 교사 등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의지할 수 있어 기쁘고 영광스러웠고, 지난 한 해 동안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뭔가를 요청하는 경우, 나는 더 많은 것을 반환해야, 나는 항상 완벽해야한다, 나는 종종 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나는 최근까지 학교에 갈 수 없습니다.

그 때, 그는 말했다, "당신은 완벽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단어를 만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벽해야 합니다. 부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 느낌이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으며, 결국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 때, 주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최종 결과에 관계없이 행복보다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의미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내 친구만큼 완벽하지 않다, 나는 많은 고통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완벽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기사라고 생각하기 위해이 느낌의 이야기를 작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직면. 생각하는 동안, 당신은 모든 종류의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꿈을  이룰 수 있으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완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나 자신을 받아 들일 것이고, 나는 완벽하지 않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다.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기 위해, 당신은 먼저 자신을 돌봐해야합니다.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원하면, 당신은 행복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나 자신을 소중히 할 것이다. 나는 가족과 친구를 돌볼 수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되고 싶어요.

静思 セイシ



静思 セイシ
静かに思うこと。心を落ち着かせて考えること。
  沈思・黙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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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tion
靜思 (정사) 고요히 생각함

Amazon.co.jp: 静思のすすめ (文春新書): 大谷 徹奘: 本

Amazon.co.jp: 静思のすすめ (文春新書): 大谷 徹奘: 本
静思のすすめ (文春新書) (Japanese) Paperback Shinsho – August 20, 2010
by 大谷 徹奘 (著)
4.3 out of 5 stars    7 ratings
186 pages
文藝春秋
Publication date August 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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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の心を動かす説法で人気の薬師寺の僧侶があなたの悩みを明るくときほぐす。元ヤンチャ坊主が試行錯誤の末に掴んだ「静思」とは?


Product description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強すぎる我と人間関係に悩んだ末に、お経の中にある「静思」という言葉に出会い、私は変った―。幸せへの鍵は「静思」にある。聞けば誰もが幸せになれる説法が大評判、薬師寺の人気僧侶による、生老病死さまざまな悩みへの処方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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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大谷/徹奘
1963年、東京都江東区に生まれる。芝学園高等学校在学中、17歳の時、薬師寺の故・高田好胤管主に師事、僧侶となる。龍谷大学文学部仏教学科卒業。同大学院修士課程修了。現在、薬師寺執事(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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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2 in Introduction to Ethics
#23,077 in Self-Esteem (Japanes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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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カスタマー
5.0 out of 5 stars とても分りやすい内容に助けられました。毎日の心の持ち方が良くなったので、仕事を含めて色々な取り組みに充実感を感じています。
Reviewed in Japan on January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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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が安定して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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ガラ
5.0 out of 5 stars 常に手に届くところに置いています。
Reviewed in Japan on March 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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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ょうど読み始めたときに人間関係でトラブルがあり、この本に助けられました。わかりやすい言葉で素直に自分の事に置き換えて読む事ができました。是非たくさんの方に呼んでいただきたい一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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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ッキー岡村
4.0 out of 5 stars まあまあでした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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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紙に多少の汚れはありましたが、中身は全く問題ありません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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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
5.0 out of 5 stars 挫折、困難、全ての悩みに当たっている人に
Reviewed in Japan on August 31, 2010
分かりやすい等身大の説法で大人気の薬師寺の僧侶大谷徹奘さんの最新刊。
死について、欲についてこんな考えにたどり着いて段階を経て解決していったんだと理解でき、
読んでいる自分自身の考えが活性化しグルグル動く。

この一冊の本の中で自分自身も迷いに突入し、大いに悩み、そして迷いを解決していく。
全てを見つめる静思(じょうし)という思考法、静かに状況やキーワードを哲学していくプロセス。
釈迦から2500年続く人類共通の悩みを解決する教えを自分の過去の悩みの変遷を隠すことなく偉ぶることなく
露骨に書き記すことで多くの人の悩みの解決に極めて人間臭いチャレンジをしている本。

挫折や悔しいこと、ひどい目にあった人、困難にぶち当たっている人など大きな悩みにさらされている人にお勧め。
生きていくのになんとなく辛い、生きにくいと感じている人にも特にお勧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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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茶
5.0 out of 5 stars 良かったです
Reviewed in Japan on October 25, 2017
人間関係で悩み、どうしても気持ちが前に向かない時に購入しました。良い本に出会えた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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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교회, 설득과 감화로 영향 미쳐라” - 기독신문

“보수교회, 설득과 감화로 영향 미쳐라” - 기독신문

“보수교회, 설득과 감화로 영향 미쳐라”
신국원 교수 “감정적 집단행동 자제하고 화해의 사신 되어야”
 노충헌 기자  승인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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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가 ‘복음과 문화’를 주제로 정기논문발표회를 진행하고 있다. 총신대신대원 강웅산 교수(왼쪽 두번째)가 논평을 하고 있다.
 복음주의조직신학회 ‘복음과 문화’ 논문발표회

국론분열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교계마저 다시 이념갈등 현상에 빠져 있는 가운데 교회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화해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권문상 교수)는 11월 19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복음과 문화’를 주제로 제38차 정기논문발표회를 개최했다. ‘한국교회의 선진화:보수와 진보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 신국원 교수(총신대 명예, 웨신대 초빙)는 “민주화 이래 사회가 진보로 기우는 가운데 교회는 대체로 보수성향을 견지해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면서 “이 비판은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보수의 약점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주의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신 교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입장이 처음부터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다”면서 “초기 한국교회는 개화의 주역으로 사회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기 한국교회는 근본주의 양향하에서 신앙은 보수적이었으나 삶의 비전에 있어서 다른 종교와 사회단체에 비해 앞서 있었다”면서 한국교회가 사회적 보수성을 띄게 된 것은 주로 일제 말의 핍박과 군사정권의 억압에 적응하는 과정 때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최근에는 교회가 다시 사회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심지어는 시위도 불사하며 민감히 대응하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교회 문제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나 사립학교법 같은 일련의 정치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불만과 위기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국원 교수가 보수기독교회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계를 이끌 인재양성에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국원 교수가 보수기독교회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계를 이끌 인재양성에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 교수는 “오늘의 사회적 경향은 팽팽한 이념대립과 문화충돌이 벌어지고 있으며, 민주사회에서는 신앙과 세계관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교회는 위기감에서나 감정적으로 집단 행동을 하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현재의 갈등 상황 속에서 교회가 우선 취해야 할 자세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편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회개와 회복의 방법을 찾는 것이며 공적 영역에서의 위상과 역할을 재고하려는 것이다.

신 교수는 “보수신앙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지키는 면에 특징이 있었다”면서 보수교회는 역사적으로 사회문제에 직접 참여하기 보다 신앙의 차원에서 도덕적인 감화나 설득과 호소를 통해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신 교수는 보수신앙이 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진보진영의 보수진영에 대한 지나친 비판도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 교수는 “분명히 보수성은 시대 정신에 대한 충분하고 효과적인 반성과 대응을 저해하지만 이는 단순한 약점이 아니다”면서 “보수성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우선적으로 주시하여 상황에 치우치는 진보신학에 대해 변증적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적 교회는 역사와 전통, 보수적 신학의 시대적 필요성과 역할을 기억하고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 성격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넘어서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문화적 갈등이 고조되기 때문”이라면서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자는 것은 단지 중립지대에 서거나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 아니다”면서 “오히려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 교수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길이란 교회가 일치에 힘쓰고, 현 상황을 영적 전쟁이란 관점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하며,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며, 열린 대화의 자세를 견지하고, 사회와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끌 인재를 길러내는 것라고 가르쳤다. 신 교수는 19세기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룩했던 개혁을 모델로 가리키며 당시 교회는 다원적 학교를 인정하는 교육제도를 만들었고 다원적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송체계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네덜란드 교회는 다른 진영과의 연대를 가능하게 했고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개혁주의자들이 스스로가 지닐 수 있는 영향력보다 훨씬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개혁주의는 변혁을 지향하지만 일방적인 대립과 충돌을 일삼을 수 없다”면서 “대립보다는 화해의 사신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고 다시한번 강조했다.

한편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직면한 한국 기독교,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정승원 교수(총신대)는 “종교다원주의는 형이상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근거없는 인위적 합리화에 불과하다”면서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은 우리에게 참 신앙에 대한 검증을 요청하며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일관적으로 근거 있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카르투지오 수도회:고독과 침묵의 문화’를 주제로 강연한 정원래 교수(총신대)는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침묵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성경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등의 자세를 취했는데 이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단지 말로서 죄를 짓는 것을 피하는 수준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고 제시했다.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1084년 브루노에 의해 창설되었고 1170년 공인되었으며 서방교회의 전통에 속해 침묵과 고독을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양태로 여겼다. 이밖에 논문발표회에서는 황돈형 박사(서울중앙신학교)가 ‘복음과 문화의 관계성-문화적 현상인 인간의 과제로서 하나님의 형상’, 박태수 박사(성서대)가 ‘과정신학의 신론과 열린신학의 신론 연구’를 주제로 발제했다.

"마음 움직이고 감화 주는 기사가 종단 발전 이끈다" - 불교신문

"마음 움직이고 감화 주는 기사가 종단 발전 이끈다" - 불교신문


"마음 움직이고 감화 주는 기사가 종단 발전 이끈다"

장영섭 기자
승인 2020.01.13 

‘2020 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집’
특별인터뷰 / 조계종 교육원장 진우스님

종단 출범에 크게 기여하고
불교 대소사 신속 정확히 보도
부처님의 가르침 올바로 전하는
포교지로서의 역할 충실히 수행

변화하는 미디어환경에 대응해
다양하고 참신한 매체 발굴해야
진심어린 기사로 독자 마음 얻으면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것


본지 창간 60주년을 맞아 종단의 주요지도자 스님들이 축하를 전하는 가운데 조계종 교육원장 진우스님도 힘을 실어줬다. 1월9일 교육원장 집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교육원장 진우스님은 “사람의 나이로 치면 60년은 환갑이며 이제는 어른이라는 뜻”이라며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갖췄으니 그에 걸맞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특히 2019년 불교신문 사장으로 일하기도 한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는 포교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물질문명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정신적 고갈을 바로잡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 해달라고 당부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사가 종단과 불교신문을 발전으로 이끌 것”이라고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교육원장 진우스님은 1월9일 "불교신문이 불교를 알리는 법사와 불교를 발전시키는 첨병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종단이 발행하는 불교신문이 올해로 창간 60주년을 맞았습니다. 교육원장 스님의 축하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불교신문 창간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60년은 환갑입니다. 곧 일생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갖췄으니 그에 걸맞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60년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의 위대한 법음(法音)을 전파하는 역할을 맡아온 불교신문입니다. 앞으로도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주길 당부합니다. 불교신문이 그동안 쌓아올린 위상에 걸맞게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스님이 직접 불교신문 사장으로 일하셨기에 창간 60주년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올 듯합니다. 불교신문은 어떤 신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불교신문은 우리 종단이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에 만들어져 종단의 태동에 크나큰 역할을 했습니다. 종단의 대소사를 궁금해 하는 스님과 불자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소식을 전달하는 뉴스메이커입니다. 또한 일반언론과는 달리 불교를 널리 알리는 포교지라는 차별성을 갖기도 합니다. 그 어떤 포교사나 포교당에 비하지 못할 만큼 포교에 크게 이바지해왔습니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불교를 알리는 길잡이가 되었고 불자들에게는 신심을 더욱 고양시키는 전법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곧 불교신문은 뉴스와 포교, 두 가지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앞으로도 이 두 가지 분야의 성취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불교신문이 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단도 불교신문도 미래불교를 열어야 할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신문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 묻고 싶습니다.

“현대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달하는 사회이다 보니 정신적인 가치에 귀를 기울이거나 거기에 의탁하려는 생각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종교인구가 점점 감소하고 그에 비례해 국민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결국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에 반비례해 야기된 정신적 고갈을 바로잡아주고 채워주는 것이 불교신문의 과제이겠습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기도를 강조한다는 식의 막연한 방법으로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는 정교한 포교를 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며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 불교신문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부처님 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불교인구는 자연스레 늘어나고 불교의 사회적 위상도 높아질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은 불교신문 종사자들에게도 요구됩니다. 아울러 종이신문이 미디어환경에서 점점 퇴락하는 시점입니다. 부처님 법음을 더 다양하게 전할 수 있는 적극 개발하고 확보해야 합니다.”

지난해 제8대 교육원장에 취임해 승가교육의 백년대계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교육원장으로서 그리고 있는 교육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불교의 미래는 승가교육에 있습니다. 교육이 잘 돼야만 교육을 잘 받는 이들이 사람을 온전하게 설득하고 감화할 수 있는 법입니다. 승가교육은 미래불교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간 전임 교육원장 스님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종단의 승가교육 체계는 자리를 완연히 잡았습니다. 하지만 출가자 감소와 급변하는 사회라는 현실 앞에서 거기에 부응하는 교육환경을 새롭게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교육내용을 현대에 맞게 조정해 현대를 살아가는 스님들의 전법능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재구성할 계획입니다. 교육기관의 재조정도 염두하고 있는데 물론 섣불리 답을 내지는 않습니다. 이해당사자를 비롯한 어려 종도들의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절차를 충분히 밟은 뒤에 가장 현명한 답을 도출해낼 것입니다.”

교육원장으로서 일선 교직자 스님들과 학인 스님들에 대한 당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처음 출가를 할 때 누구나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출가 동기도 각양각색입니다. 곧 초심자들에게는 부처님 중심의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열린 종교인 불교에는 다양한 생각과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중심에 마땅히 신심(信心) 이 있어야 합니다. 일선에서 열심히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교직자 스님들 부디 ‘신심’에 입각해 교육하며 학인들로 하여금 삼보에 대한 경외심으로 갖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자에게 신심이 있어야 학인에게도 신심이 나게 마련입니다.

학인들도 신심을 키우는 일이 스스로에게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재가자로 살아오면서는 끊임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탐욕으로 인해 고통에 빠져드는 악순환을 범해왔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고 출가한 이상, 탐진치 삼독(三毒)을 끊어내 악순환에서 벗어나겠다는 수행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교리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탐진치를 일으키는 마음에 대한 직시이고 신심을 증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욕망에 지배되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신심만 있으면 해탈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종도와 국민들에게 불교신문을 권하는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불교신문은 사람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는 기사를 써야 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사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이들을 피안의 세계로 이끌겠다는 원력을 가질 수 있다면, 경영의 현실적인 어려움 같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입니다. 구성원들 스스로가 신심을 갖고 불교를 믿으면 더 많은 독자들이 불교신문을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종단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불교를 알리는 법사와 불교를 발전시키는 첨병의 역할에 매진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불교신문3550호/2020년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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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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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16-01-20 02:45 조회6,1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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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아르쥬나의 고민
 
 
드리타라슈트라 말하기를
 
1. 산쟈야여, 올바름의 들, 쿠루 들에 내 사람들과 판두의 아들들은 싸움을 하려고 모였다. 그들은 어찌하고 있느냐?
 
산쟈야(Sanjaya) 드리 타라슈트라(Dhritarashtra) 왕의 마부.
올바름의 들(Dharma-kshetra) 다르마(dharma)는 매우 넓은 뜻을 가지는 말이다. 불법(佛法)이라 할 때의 법(法)은 그것을 뜻으로 옮긴 것이고, 달마대사(達磨大師)라 할 때의 달마(達磨)는 음으로 옮긴 것으로 영어로는 법(Law) 혹은 의무(duty)라 번역한다. 종교, 도덕에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올바른 일이다.
쿠루 들(Kury-kshetra) 본래 이것이 그 지명, 델히(Deli) 부근의 넓은 평원, 옛날의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이다. 지금 여기서 전쟁을 하게 되는 쿠루족(Kauravas)과 판두족(Pandavas)의 조상인 쿠루가 그곳을 개척하고는 그들을 쿠루 들이라 불렀다. 크쉐트라(Kshetra)는 들이라는 뜻과 행동의 무대, 거룩한 지역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샤타파다 브라마나경」(Shatapatha Brahmana)에는 태고 시대부터 거룩한 희생을 드리던 지역으로 나타나 있고,「마하바라타」 (Mahabharata)에서는 타파크쉐트라(Tapah-Kshetra)라 해서 고행 (苦行)을 하던 곳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몸은 선과 악의 영원한 대립의 전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에의 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죄에서 났으므로 죄의 밭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쿠루 들이라 한다. 쿠루족은 악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고, 판두 족은 신의 힘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제 가슴속에 날마다 선악의 두 힘이 싸우고 있는 것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까? — 간디
이 세계가 곧 올바름의 들, 도덕적 싸움의 전쟁터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 싸움이 날마다 시간마다 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가슴속에 있다. 땅에서 하늘로, 고난에서 정신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르마의 길에 있다. 이 세계는 다르마의 들이다. 성자의 훈련소다. 거기서는 거룩한 불길이 꺼질 날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업(karma)을 다 치러 우리의 영(靈)을 닦 아낸다. — 라다크리슈난
「기타」는 역사적인 토론이 아니다. 그것은 형제들 사이의 싸움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두 성질, 곧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의 기록이다. 크리슈나는 우리의 안에 계시어서 언제나 맑은 양심에 속삭여주시는 이 이다. 一간디
「기타」의 목적은 이론을 가르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행의 힘을 주자는 데에 있다. 생활 속에 가를 수 없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론으로써 갈라놓을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여러 가지 의무는 우리의 종교에 대해 일거리와 기회를 마련해준다. 다르마는 세속적인 번영과 정신적인 자유를 다 준다.「기타」는 인간의 내적 생활만을 생각하는 신비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의무나 생활 관계를 허망한 것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정신적 자유를 실현하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온전히 영화(靈化)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전장을 ‘다르마의 들’ 혹은 ‘올바름의 들’이라고 한 것은, 거기 다마를 지켜주시는 주께서 사실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올바름의 들, 곧 쿠루 들’ 이라는 말은 죽음에 의해서 생명의 법칙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르쥬나가 전장에서 보는 환상의 일면은 두려움의 하나님이다. 생명은 싸움이다. 악령에 대한 싸움이다. 창조의 과정은 서로 적대해서 서는 힘의 영원한 긴장 속에 있다. 그 충돌에 의해서 발전은 이루어지고 우주적 목적이 달성된다. 이 세계에는 불완전한 원소 곧 죄악과 비합리적인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행동 곧 다르마에 의해서 변화시켜 아직은 이성(理性)에 대해 불투명한 그 원소를 뚫어 비치는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전쟁은 보응적인 심판인 동시에 또 하나의 훈련이다. 쿠루크쉐트라를 또 타파크쉐트라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은 벌인 동시에 또 인간의 정화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요 또 구주다. 그는 파괴하면서 또 창조하신다. 그는 시바(Shiva)요 또 비슈누(Vishnu)다. ᅳ라다크리슈난
내 사람이란 생각은 아함카라(ahamkara) 때문이다. 그것이 악의 근본이다. 바로 그 이기심 때문에 쿠루족들은 권력을 탐하고 또한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 라다크리슈난
 
 
산자야 말하기를
 
2. 무료다나 왕은 판두족의 무리가 전열(戦列)을 별여섬을 보고 그 스승에게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두료다나(Duryodhana)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맏아들로 판다바스들이 쫓겨나 있는 동안 왕위에 올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돌아오자 본래의 약속대로 영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왕이 그것을 거절했고 화해시키려는 모든 노력들도 다 헛되이 되었으므로 판다바스들은 부득이 전쟁을 하게 됐다.
스승 아차랴(acarya), 경전의 뜻을 통달해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여기 드로나(Drona) 스승은 양쪽 군대에 전쟁하는 법 특히 활쏘기를 가르쳤다.
 
3. 스승님, 저 판두족의 큰 군대를 보십시오. 당신의 어진 제자 드루파다의 아들이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드루파다(Drupada) 드라우파디(Draupadi)의 아버지이므로 판다바스들의 장인이요, 그의 아들 드리슈타줌나(Shrishtadyumna)는 판두군의 총사령이다.
 
4. 거기는 잘난 장수들, 전쟁에서 비마나 아르쥬나와 대등한 자리에 가는 유유다나, 비라타 그리고 큰 전차의 원수인 드루파다가 있습니다.
비마(Bhima) 판두군의 사실상의 총사령이다. 명의는 비록 드리슈타줌나가 가졌지만.
유유다나(Yuyudhana) 크리슈나의 전차를 모는 전사.
비라타(Virata) 마차(Matsya)국의 임금, 판다바스들이 변장하고 떠돌아다닌 때에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했다.
원수 곧 마하라다(Maharatha)라는 칭호는 군인의 최고 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번 싸움에 10만 활량들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준다.
 
5. 드리슈타케투, 체키타나, 카쉬라쟈, 준티보쟈, 푸투지트, 그리고 사람 중의 으뜸인 샤이뱌.
드리슈타케투(Shrishtaketu) 체디스(Chedis)의 왕.
체키타나(Chekitana) 판다바스의 위대한 전사.
카쉬라쟈(Kashiraja) 위대한 전사.
쿤티보쟈(Kuntibhoja) 푸투지트의 형. 판다바스의 세 사람, 곧 유디슈트라와 비마, 아르쥬나의 어머니인 준티(Kunti) 부인을 양녀로 삼았다.
푸루지트(Purujit) 푸루지트와 쿤티보쟈는 형제이지만 가끔 푸투지트 쿤티보쟈라 하여 동일인으로 다루기도 한다.
샤이뱌(Shaibya) 시비(Shibi)족의 족장이요 그 나라의 임금.
 
6. 강한 유다마뉴, 용감한 우타마우쟈, 그리고 또 수바드라의 아들, 드라우파디의 아들들, 그들은 다 큰 장수들입니다.
유다마뉴(Yudhamanyu) 위대한 전사.
우타마우쟈(Uttamauja) 위대한 전사.
수바드라(Subhadra) 아르쥬나의 둘째 부인, 아들은 아비마뉴(Abhimanyu)
드라우파디 다섯 판다바스에게서 각각 한 아들을 낳았다.
 
7. 두번 난 이 중의 가장 높으신 이여, 또 내 군대되 우두머리들, 곧 우리 중 가장 잘난 것들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그 이름들을 불러드릴 것입니다.
두번 난 이 중의 가장 높으신 이(dvijottama) 사람은 우선 자연의 아들로 나지만 참 사람이 되려면 다시 정신의 아들로 나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거기 있다. 자라 정신적으로 어른이 됐다 인정되면 그 표적으로 거룩한 실(sacred thread)을 받는다. 그것은 배꼽 줄을 의미한다.
 
8. 어르신부터 시작해서, 비슈마와 카르나와 싸움을 하면 언제나 이기는 크리파, 아슈바타만과 비카르나와 그리고 소마다 타의 아들.
어르신 드로나를 가리킴.
비슈마(Bhishma) 글자 그대로는 무섭다는 뜻. 일생 독신을 지키겠다는 무서운 맹세를 하고 자기의 배 다른 동생의 아들들과 또 그들의 아들을. 곧 판다바스와 카우라바스들을 길러낸 늙은 성자 장수이다.
카르나(Karna) 쿤티 부인이 결혼하기 전에 낳은, 판다바스 중 세 사람 유디슈트라, 비마, 아르쥬나와 배다른 형제가 된 사람.
크리파(Kripa) 드로나의 이종 사촌.
아슈바타만(Ashvattaman) 드로나의 아들.
비카르나(Vikarna) 두료다나의 동생.
소마다타(Somadatta) 바히카스여(Bahikas) 왕. 그 아들 이름은 소마다티(Somadatti)이다.
이 모든 이름들을 부른 것은 이것이 동족 사이의 싸움일 뿐 아니라 또 전인도의 싸움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9. 그리고 그 밖에도 많은 용사들이 가지가지의 무기로 몸을 갖추고 싸움에 능숙한 사람들인데 이제 바야흐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10. 비슈마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이 군대는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마가 이끄는 저들의 저 군대는 한이 있습니다.
‘한이 없다’(aparyaptam)와 절 끝에 오는 ‘한이 있다’(paryaptam)를 라다크리슈난과 간디는 각각 다르게 번역하는데 (라다크리슈난은 unlimited, limited로 간디는 inadequate로 번역한다) 그러면 뜻이 서로 반대가 된다. 그 밖의 번역들도 역자에 따라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로 갈려 있다. 즉 어느 군대를 강하다고 어느 군대를 약하다고 보느냐가 서로 반대가 된다. 라다크리슈난같이 하면 카우라바스가 강하고 판다바스가 약한 것이 되고, 간디같이 하면 판다바스가 강하고 카우라바스가 약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때의 사실로 하면 두료다나 편이 훨씬 강했으니 라다크리슈난 번역이 옳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두료다나 왕이 자기 부하들보고 다음 절에서 하는 말, 주의해서 잘 지키라고 하는 말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간 뜻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취할 수 있다. 한이 있다 한이 없다로도 할 수 있고, 부족하다 족하다로도, 당해낼 수 없다 당해낼 수 있다로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로도 할 수 있다.
 
11.그러니 너희 모두는 다 제 자리에 굳게 서서 제 직분을 지켜 오직 비슈마를 지키라.
 
12.그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 쿠루족의 늙은이 곧 그의 영웅 적인 할아버지는 사자같이 크게 부르짖고 그의 소라나팔을 불었습니다.
쿠루족의 늙은이 비슈마를 가리킴.
 
13. 그러자 소라나팔과 큰 북과 심벌즈와 트럼펫이 일시에 울려 무서운 소리를 냈습니다.
 
14. 그때에 마다바와 판다바는 흰 말을 메운 큰 전차 위에 서서 그 하늘 나팔을 불었습니다.
마다바(Madhava) 크리 슈나를 가리 키 는 말.
판다바(Pandava) 곧 아르쥬나.
힌두교나 불교문헌에서는 언제나 전차는 정신·물리적 탈 물건을 의미한다. 그 말은 감각이고 고삐는 그것을 부림이지만 차부 곧 그것을 이 끌어가는 이는 영 혹은 자아 곧 아트만(atman)이다. 차부인 크리슈나는 우리 속에 계시는 영이시다. — 라다크리슈난
 
15.크리슈나는 그의 판차야냐를 불고, 아르쥬나는 그의 데바다타를 불고, 승냥의 밥집을 가지는 사나운 비바는 그의 큰 나팔 파운드라를 불었습니다.
판차야냐(panchajanya) 소라나팔의 일종.
데바다타(devadatta) 소라나팔의 일종.
파문드라(paundra) 큰 나팔.
이것은 싸움이 곧 붙을 것을 의미한다.
 
16. 쿤티의 아들 유디슈트라 왕은 그의 아난타비쟈야를 불고 나클라와 사하데바는 그들의 수호샤와 마니 무슈파카를 불고,
아난타비자야(anantavijaya) 소라나팔.
수호샤(sughosha) 소라나팔.
마식푸슈파카(manipushpaka) 소라나팔.
유디슈트라, 비마, 아르쥬나는 판두 왕외 첫째 왕비 준티 부인이 낳 은 아들들이고, 나쿨라(Nakula), 사하데바(Sahadeva)는 둘째 왕비 마드리(Madri)의 소생이다.
 
17. 큰 활을 쏘는 카쉬 왕과 큰 장수 쉬칸디와 드리슈타줌나와 비라타와 이길 자 없는 사차키.
카쉬(Kashi) 바라나시의 왕.
쉬칸디(Shikhandi) 위대한 전사.
사챠키(Satyaki) 유유다나.
 
18. 드라우파디의 아들 드루파다, 그리고 억센 팔 가진 수바드라의 아들, 이 모든 이들이 다 제 나팔을불었습니다. 오, 대왕이시여.
 
19. 그 넋을 잃게 하는 소리가 하늘 땅을 뒤흔들고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의 간담이 떨어지게 했습니다.
 
20. 그러자, 저 잔나비 기를 세우는 판두의 아들은 드리타라 슈트라의 아들들이 싸움의 진을 벌이고 서서 화살이 바야흐로 날려 하는 것을 보자 그 활을 든 다음,
잔나비 기 아르쥬나의 기에는 잔나비 신을 섬기는 하누만(Hanuman)의 형상이 그려 있다. 그것은 몸 바쳐 섬김, 정결, 용맹의 화신이다.
판두의 아들 아르쥬나.
 
21. 오, 대왕이시여, 그는 흐리쉬케샤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아츄타여, 내 차를 두 군대 사이에 세웁소서!”
흐리쉬케샤(Hrishikesha) 머리털 거슬린 주님이란 뜻, 곧 크리슈나.
아츄타(Acyuta) 움직임 없으심의 님이여 하는 뜻, 현재 차부로 있는 크리슈나.
그 밖에 크리슈나에 대한 이름으로 마두수다나(Madhusudana, 악마 마두를 죽 이시는 이), 아리수다나(Arisudana,대적을 죽이시는 이), 고빈다(Govinda, 목자, 혹은 깨달음을 주시는 이), 바수데바(Vasudeva, 바수스의 아들), 야다바(Yadava, 야두의 자손), 케샤바(Keshava, 아름다운 머리털을 가진 이), 마다바(라크슈미의 남편), 흐리쉬케샤(감각의 주), 쟈나르다나(인간 해방자)가 있다.
 
22.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싸움을 하려고 섰는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이 싸움에서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23. 나는 저 모진 마음 먹은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이 바라는 것을 성취해주려고 싸움에 열이 나서 모여 있는 저 사람들을 좀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싸움이 이제 붙으려는 바로 그날 아침 유디슈트라는 비슈마가 쌓아놓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진지를 보고 겁이 나서 떨며 아르쥬나를 보고 말했다. “이러한 군대에 맞서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 아르쥬나는 그 형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옛날 시를 인용해서 대답했다.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대적을 정복하는 것은 힘이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참과 자비와 경건과 덕으로야만 된다. 승리는 크리슈나가 있는 곳에야 있을 수 있다. 승리는 그의 한 속성이다. 또 마찬가지로 겸비도 그렇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재계하고 두르가(Durga) 앞에 승리를 간구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르쥬나는 전차에서 내려 노래를 부르면서 여신을 찬양했다. 그 믿음을 가상히 여겨 여신은 아르쥬나를 축복해 주었다. “오, 판두의 아들아, 너는 네 대적을 즉시로 부술 것이다. 너는 나라야나(Narayana) 자신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의 사람인 아르쥬나는 자기 할 일의 뜻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의 스승이 옆에 계심과 그 거룩한 생각이 그를 도와 그로 하여금 자기가 맞서 싸우려는 그 대적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요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는 정의를 지키고 무법한 포악을 누르기 위해 사회의 유대를 끊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땅 위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합작으로야 된다. 인간은 창조의 협력자다. — 라다크리슈난
 
24. 그렇게 구다케샤가 말하는 것을 듣고, 오 바라타시여, 흐리쉬케샤는 이 세상에 그 이상 없는 전차를 두 군대 사이에 세우고,
구다케샤(Gudakesha) 머리카락이 많으신 이. 아르쥬나를 가리킴.
바라타(Bharata) 드리타라슈트라불 가리킴.
 
25. 비슈마와 드로나와 모든 높은 이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파르다여, 쿠루족들이 여기 모여 있습니다.”
파르다(Parth) 프리다 부인의 아들, 곧 아르쥬나.
 
26. 아르쥬나는 거기 양쪽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스승들과 백숙부들과 형제들, 아들들, 손자들, 동무들이 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7. 그리고 장인들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 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28. 쿤티의 아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사로잡혀 슬픔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내 사람들이 진을 벌이고 서서 서로 싸우려는 것을 보았을 때, 오, 크리슈나여,
 
29. 내 사지는 맥이 풀리고, 입은 타 마르고, 몸서리치고 머리털이 곤두섰습니다.
 
30. 간디바는 내 손에서 떨어지고 내 살갗에는 불이 일고 몸을 버티고 섰을 수 없고, 내 마음은 비틀거렸습니다.
간디바(Gandiva) 인드라 신의 하늘에서 아르쥬나에게 선물로 내려준 활의 이름.
 
31. 불길한 징조가 내다뵈고 오, 케샤바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친족과 싸움해 죽이고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를 가리킴.
‘징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르쥬나의 정신이 약해지고 흔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32. 크리슈나님,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 크리슈나여, 즐거움인들 생명인들 무엇이겠습니까?
 
33. 우리가 권세를 원하는 것도, 향락과 쾌락을 원하는 것도 그들 때문인데, 그 사람들이 여기 생명과 재산을 내던지고 싸움을 하겠다고 섰습니다.
 
34. 스승들,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아들들, 손자들까지 그리고 백숙부들, 장인들, 내외종형제들, 그 밖의 여러 친척들,
 
35. 그들을 내가 즉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들 손에 죽을지언정. 오, 마두를 멸하시는 이여, 삼계의 왕권을 준다해도 나는 못합니다. 하물며 이 티끌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겠습니까?
마두를 열하시는 이 크리슈나.
삼계 「베다」에서 말하는 천계(天界), 지계(地界), 기계(氣界), 혹은 천계. 지계, 음부(陰府), 또 혹은 인계(人界), 신계(神界), 반신계(半神界).
 
36. 오, 쟈나르다나, 이들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을 죽이고 무슨 쾌락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비록 흉악범이기는 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쟈나르다나(Janardana) 크리슈나의 명칭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시는 이.
아르쥬나는 사회 일반적으로 하는 도덕이나 풍속에 따라 할 뿐이지 자기 개인적인 참에 대한 확신으로 하는 것이 못된다. 그는 이러한 외적도 덕의 상징을 죽이고 내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가 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때까지 그의 인생을 지도해주었던 전날의 스승들을 죽여버려야 한다. 아르쥬나는 아직 유식한 이기주의(enlightened selfishness)의 테두리 안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대적이 아무리 침략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된다. 죄를 앙가품하기 위해 또 하나의 죄를 지어서는 아니된다. “다른 사람의 노(怒)를 노하지 않음으로써 정복하라. 악을 행하는 자를 성스러움으로써 정복하라. 구두쇠를 선물로 정복하라. 그리고 거짓을 참으로 정복 하라.” — 라다크리슈난
 
37. 그러므로 우리의 친족인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 마다바여, 우리가 제 친족들을 죽이면서 참말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38. 비록 그들의 마음이 탐욕에 미치고, 가족을 멸망시키는 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친구를 배반하는 것을 죄로 생각지 않았다 하더라도,
 
39. 어찌 우리가 이 죄에서 돌이킬 줄을 몰라서 되겠습니까? 오, 쟈나르다나, 가족을 파괴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는 이 우리가 말입니다.
아르쥬나가 걱정하는 것은 ‘한 가족’ 혹은 여러 가족의 멸망이 아니라 동족이 서로 죽임으로 인해 오는 ‘가족제도’의 멸망이다. 헨리 드럼먼드(Henry Drummond)는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족이란 진화의 한 걸작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세계의 도덕과 사회 발달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힘의 발전소요 저장의 보고이다. 가족은 몇 세기만이 아니라 수천 년을 살아온 것이다. 시간이 이것을 퇴색시키지 못했고 최근의 예술이 그 위에 개량을 더한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떤 천재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어떤 종교도 이보다 더 성스러운 것을 찾아 내지 못했다.”
「기타」의 저자에게도 가족은 분명히 이러한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40. 가족이 파괴되면 예로부터 항상 있어온 가족도덕이 없어지고, 그 도덕이 쇠퇴되면 가족의 전규범이 무법에 빠지게 됩니다.
전쟁은 우리를 가정환경에서 뺏아가버리고, 인간의 성숙된 의지와 경험의 짬인 사회 전통에서 우리를 뿌리뽑아버린다. — 라다크리슈난
 
41. 그리고 무법이 판을 치게 될 때, 오, 크리슈나여, 가족의 여자들은 타락하고, 여자가 타락되면 계급은 혼란에 빠집니다.
계급(varna) 보통 영어로 카스트(caste)라 하는 것. 후대에 와서는 그것이 너무 고정되어 사회 발달을 방해하게 됐고 피해가 많아서 간디도 그 제도 타파에 힘을 썼지만, 본래 그때 사회로서는 안전과 발전을 유지해가기 위한 가장 어진 제도로 알고 그것을 지켰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타락된 계급제도와「기타」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계급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42. 이 혼란은 그 가족의 파괴자와 가족을 다 같이 지옥에 떨어뜨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의 혼은 떡과 물의 제사가 끊어짐으로써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떡과 물 제사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혼이 살아 있기 위해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것을 바쳤다. 그것이 제사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지켜졌던 의식이다.
 
43. 이 가족 파괴자들의 죄로 인해 바르나가 혼란에 빠져 부족 가족의 영원한 법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44. 우리는 전해오는 말을 듣습니다. 오, 쟈나르다나, 가족 도덕이 망해버린 집 사람은 지옥에 빠집니다.
 
45. 아, 왕권의 복락을 탐해서 동족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죄를 지으려고 결심한 것입니까?
 
46. 차라리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나를 전쟁마당에서 때려서 내가 아무 반항함도 없이 무기를 든 것도 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산쟈야 말하기를
 
47.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쥬나는 전쟁마당에서 활과 살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전차 안에 주저앉아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르쥬나의 말은 고뇌와 사랑에서 나온다. 그의 마음은 두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는 태고부터 사람이 분투해온 것처럼 자기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 자기가 무엇이며 자기 동료는 무엇이며 자기가 놓여 있는 이 우주의 참 성격은 무엇인지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전쟁 때문에 오는 육체적 고통과 물질적 불행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인생의 주목적은 물질적 행복의 추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생애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거기 일어나는 늙음, 쇠약. 죽음, 이런 것 때문에 그 구경의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상을 위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르쥬나는 전쟁의 턱 밑에 다가선 때에 용기를 잃고 세속적인 생각에 쓸려 전쟁을 회피 할 생각을 했다.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르쥬나는 아직도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가르치기를 행동의 뿌리를 욕망에 두지 않는 살림을 해야 한다 하고, 니슈카마 카르마(nishkama-karma) 곧 욕망 없는 행동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아르쥬나의 어려움은 영원히 반복되는 고난을 연극화해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은 고상한 생활의 문턱에서 속세의 소란한 소리를 듣고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환상이 떠나지 않고 매달려 있어 놓지 못하는 법이다. 그는 자기의 근본이 거룩한 조상에게서 나온 것을 잊고 자기 개체에 집착해서 서로 얼크러지는 세상 힘에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정신세계에 눈이 뜨여 그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지는 의무를 받아들이기 전에 이기심, 어리석음의 대적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리하여 자기중심의 에고(ego)의 깜깜한 무지를 정복해야 한다. 영성(靈性)을 떠난 인간은 그것을 도로 찾지 않으면 아니된다. 여기 그려진 것은 인간 영혼의 진화 모습이다. 거기는 시간 공간의 제한이 없다. 그 싸움은 인간의 혼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벌어진다. —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Upanishad), 절대의 학문, 요가의 경전,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의 제 1장, 아르쥬나의 고민 편이다.
 
 

바가바드 기타 | 함석헌

번역물 1 페이지 | 바보새함석헌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154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744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680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826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78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764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4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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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51 조회1,2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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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디는 그것을 늘 끊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마다「기타」를 읽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공부할 때 이것을 외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 붙여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글이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나는 젊어서 서양 사람의 책을 읽노라면 그 속에「기타」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뭔지 내용은 모르지만 흔히 그것을 소개하기를 “기독교의 신약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글인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것은 나의 독서 범위가 좁고 열심이 적었던 때문이지만 또 어디서 곧 찾아볼 수 있으리만큼 소개해준 사람이 없던 탓도 있습니다. 불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몇 천 년 불교신앙의 역사를 가지면서 왜 그것을 몰랐는지, 알고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만 숨겨두었던가?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 소리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던들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그를 찾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항상 더럽힘을 당해서 하나님입니다. 더럽혀도 더럽혀도, 수정에 흙물을 끼얹은 듯,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데 하나님의 하나 된 점이 있습니다.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천하고 못나고 악한 것도 부르고 들어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진리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가 한 권 끼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꼴 이냐? 하고 책망하겠지만 그런 줄 스스로도 알면서 나는 이것을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성자만 전도하란 법 없습니다, 망나니도 해야지. 그래서 바울이 한숨 쉬며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참으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 하지만 어쨌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니 좋다고 그랬습니다. 꿀은 옥단지에 담아도 꿀이요 깨진 바가지 쪽에 담아서 더럽고 다 흘러빠져도, 그래서 단 한 방울이 남아도 꿀이 꿀인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완전히 변질 말살 왜곡 은폐할이만큼 타락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경험해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비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 「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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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작성자 바보새 14-05-27 12:17 조회1,8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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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기타」와「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라고 한다. 그 맨 첨의 원형대로는 2만 4천 절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차차 늘어서 나중에는 10만 절에 이르게 됐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단일한 작품이 아니고 여러 개의 이야기가 모여서 된 것이다. 그 중심 되는 제목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인도 옛날의 바라타 대왕족의 이야기다. 마하(maha)란 크다는 뜻이다.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판두(Pandu) 왕이 죽은 다음 그 자리를 그 동생 되는 드리타라슈트라(Dhritarashtra)가 이어 들어서서 판두의 다섯 왕자, 즉 판다바스(Pandavas)들을 거두어 자기의 일백 왕자들과 함께 양육하게 됐다. 그들이 차차 자라 어른이 되자 판다바스들은 그 경건심과 영웅적인 인격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됐다. 그러자 드리타라슈트라의 맏아들 두료다나(Duryodhana)는 샘을 일으켜 그들을 죽일 계획을 하게 됐다.
무료다나는 계책을 꾸며서 한 멀리 있는 성에 궁궐을 짓고는 판다바스들을 초청해서 어떤 종교적 명절 동안을 그 안에서 지내게 했다. 그 궁궐은 아주 불붙기 쉬운 자료로 지어졌으므로 두료다나의 부하들은 손쉽게 거기 불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궁궐은 다 타 재가 됐지만 판다바스들과 그들의 어머니 쿤티(Kunti) 왕비는 마침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 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두료다나는 그들이 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에서 브라만(Brahman)족처럼 변장을 하고 지내는 동안 가지가지의 고난을 겪었고 모험을 했다. 어떤 날 그 근처의 국왕이 자기 딸을 위해 사위를 고르는 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 뽑히려면 굉장히 강한 활을 당기어 밟아서 아주 조그만 과녁을 맞혀야 한다고 했다. 판다바스들은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변장한 모습으로 그 성에 갔다.
지망자가 전인도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두료다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시험에 모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다 떨어져나가고 맨 나중에 판다바스의 셋째인 아르쥬나(Arjuna)가 일어나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그 활을 꾸부려 밟아가지고 그 과녁을 맞혔다. 공주 드라우파디(Draupadi) 는 그에게 승리의 화관을 씌웠다. 그러나 거기 모였던 왕자들은 겉보기 에 미천하고 무사답지 못한 브라만 사람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크리슈나(Krishna)가 두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하고 아르쥬나가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득을 시키지 않았던들, 마치 율리시즈 이야기 모양으로 큰 싸움이 일어날 형세였다. 크리슈나는 판다바스의 사촌이면서도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은 아닌 사람이었다.
5형제는 드라우파디를 데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는 쿤티게로 나가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 우린 아주 놀라운 보배를 얻어왔어요” 했다. 쿤티는 “얘들아, 부디 똑같이 나눠가져야 해”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한 처녀가 아닌가. 그래 어쩔 줄을 모르며 부르짖었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어머니의 말은 그 아들들에게는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우파디는 그 다섯 형제들과 다 같이 결혼을 하게 됐다.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아들들은 이제 판다바스들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강한 임금과 결탁을 하게 된 것을 알았다. 두료다나는 그 국토를 다 차지하려고 했지만 드리타라슈트라가 어질게도 그 숙부 비슈마(Bhishma)의 조언을 들어 그 5형제를 오라 청하여 왕국의 절반을 갈라주기로 했다. 그리해서 왕국을 둘로 갈랐는데 판다바스들은 쟈무나(Jamuna) 강 유역에 있는 가장 나쁜 황무지를 가지게 됐다. 그들은 그것을 개척하여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고 맏형 유디슈트라(Yudhishtra)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제 5형제는 승리와 영광의 시대를 맞게 되는 반면 두료다나는 그들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됐다. 그는 샘 끝에 또 다른 흉계를 꾸며 그들을 해하려 했다. 경건하고 점쟎은 유디슈트라 왕이지만 한 가지 위험한 약점이 있었는데, 노름을 좋아했다. 그래 두료다나는 그를 보고 아주 꾀많고 사기꾼인 사쿠니(Sakuni)와 같이 골패를 치자고 도전을 했다. 그러면 왕은 체면에 걸려 승낙 아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패를 쳤는데 사쿠니가 협잡을 했기 때문에 왕은 매번 져서, 전재산을 대다가, 왕국을 대다가. 나중엔 자기의 모든 형제, 드라우파디, 자기 자신까지 대서 다 졌다. 마침내 그들은 다 무료다나의 노예가 되어 원수 갚음으로 하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게 됐다. 나중에 드리타라슈트라가 견디다 못해 나서서 중재를 해서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고 왕국을 돌려받게 됐다.
그렇지만 무료다나는 끝내 그 아버지에게 졸라서 또다시 골패를 한번 치는 허락을 얻었다. 지는 사람은 제 왕국을 내놓고 산림 속에 은거하여 12년을 지내야하고 그 다음 1년은 성내에서 살되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들키면 그 유배의 기간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유디슈트라는 이번 내기에도 졌다. 그래서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그 불행을 복으로 살려 그동안에 정신적으로 수련을 하며 많은 영웅적 행동을 쌓았다.
 
한번은 그들이 방랑을 해서 다니는 동안 목이 말라 죽게 되는 지경을 당했다. 막내동생 나클라(Nakula)를 시켜 물을 찾아보라 했다. 그는 찾다가 호수를 하나 발견했는데 맑기가 수정 같았다. 엎드려 마시려 하자 소리가 하나 들려오는데 “가만있어,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대답을 해. 그런 다음 마셔라” 했다. 그러나 나쿨라는 너무 목이 타 죽을 지경이므로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곧 죽어버렸다. 그 손위 형 사하데바(Sahadeva)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가 역시 그 호수를 발견하고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모양으로 해서 4형제가 다 죽었다.
맨 나중 유디슈트라 차례가 왔다. 그는 그 시체들을 보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때에 그 목소리가 말하기를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그러면 내가 네 슬픔과 목마름을 다 고쳐줄 것이다” 했다. 그가 얼굴을 돌이켰을 때 그는 의무와 덕의 화신인 다르마(Dharma)가 한 마리 학의 형상으로 자기 옆에 선 것을 보았다.
그 학은 물었다.
“천당에 올라가는 길은 무엇이냐?”
“진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올바른 행실로입니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정복해야 하느냐?”
“자기 마음입니다."
“사람은 언제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
“허영심이 없을 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모든 것 중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자기 둘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한 사람도 제 죽을 것을 믿는 사람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참 종교에 이를 수 있느냐?
“토론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경전에 의해서도, 교리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유익이 없습니다. 종교에 이르는 길은 성인들이 밟아간 그 길입니다.”
 
다르마는 흐뭇이 여겨 자신을 유디슈트라에게 나타낸 다음 4형제를 살려주었다.
유배의 기한이 다 된 다음 유디슈트라는 그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두료다나는 거절했다. 유디슈트라는 자기를 위해서 다만 한 부락과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각각 한 부락씩이면 만족하겠다고 했지만 탐욕에 정신이 빠진 두료다나는 그것조차도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왕실의 장로들이 중재에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인근의 왕국들도 그 싸움에 말려들기 시작해 나중에는 전인도에 미치게 되었다. 양쪽이 다 크리슈나의 도움을 원했지만 크리슈나는 양쪽에 대해 꼭 같은 조건을 내놓고 택하라고 했다. “내 친족 브리슈니스(Vrishnis) 사람들 모두의 도움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 하나만이든지. 그러나 나는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두료다나는 브리슈니스를 택했고 아르쥬나는 크리슈나 자신을 자기의 차부로 택했다.
싸움을 하게 된 곳은 유명한 순례지인 쿠루크쉐트라(Kuru-kshetra) 들이었다.「바가바드기타」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는 여기서 바로 전쟁이 맞붙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은 18일 동안 계속됐고, 두료다나가 전사하고 승리가 온전히 판다바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후 유디슈트라는 인도의 완전한 통치자가 되어 36년간을 다스렸다.
 
이 얘기는 드라우파디와 판다바스가 하나님이 계신 히말라야에 순례를 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 도중에서 왕비와 네 형제가 다 죽는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가진 채 천당에 올라가기에 넉넉하리만큼 온전히 순결치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자 왕인 유디슈트라만이 자기의 충성스런 개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이 천당에 다다랐을 때 모든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는 그를 보고 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유디슈트라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자기도 천당 밖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자기를 믿어주었고 즐겨 자기를 보호해주었던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거친 들에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끈질긴 토론 끝에 마침내 개와 임금이 다 허락되어 함께 들어갔다. 그러자 그 개가 바로 다르마로 나타났다. 이것이 유디슈트라의 정신적 위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 다음 하나 더 있다. 왕이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에는 그의 죽은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동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인드라는 그를 데리고 한 음산하고 끔찍한 곳으로 갔다. 바로 지옥구덩이다. 유디슈트라는 “저도 여기 있을랍니다. 제게는 그들이 있는 여기가 곧 천당입니다” 했다. 그때에 그 암흑과 끔찍한 것은 사라졌다. 유디슈트라와 다른 판다바스들은 그 나타나 뵈는 지옥과 천당을 지나 참 하나님의 사심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곧 영생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힌두 종교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다. 말하자면 인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긴 세월을 두고 인도의 정신적 문화적 지적 정치적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다. 인도의 사상가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타」의 연대는 보통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이것이 본래는「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이것이 편집 된 것이 그 서사시보다 후라는 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독립적으로 있었던 듯하다.「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쟈야(Sanjaya), 아르쥬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성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쉐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쟈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크리슈나소(Krishna)님은 인도의 그리스도라 부름받는다. 사실「바가바드 기타」와 그 밖에 관계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생애와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의 사이에는 놀랄이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 양쪽이 다 전설과 사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는「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을 맛보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적 진리를 찾기 위해「기타」나 산상수훈을 읽는 독자에게 역사적인 크리슈나나 역사적인 예수가 정말 존재했든지 말았든지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기타」의 주된 문제는 크리슈나 개인에게는 있지 않다. 그러나 브라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구경(究竟)의 실재 그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말할 때 어떤 때는 하나의 개인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신 자신으로서 말을 한다.
 
나는 브라만이다.
이 몸 안에 있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니
꺼질 날이 없느니라.
나는 진리요
영원한 즐거움이다.
 
아르쥬나도 크리슈나에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어서 두 가지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택해서 섬기는 비슈누(Vishnu)의 거룩한 화신이다. 아르쥬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자비로운 무지에 의해 그것을 잊어버린다. 사실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한 것은 크리슈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계속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거룩한 환상을 본 다음 아르쥬나는 우주의 주를 자기가 “친구요 죽을 수밖에 없는 같은 동류로” 대접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엎디어 용서를 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곧 가셔버린다. 다시 그는 잊어버린다. 우리는 예수의 변화의 환상을 보고 난 다음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오직 한번 말할 뿐이다. 사실로「기타」전편의 이야기는 다 그의 시작하는 한 마디 질문에 대한 산쟈야의 대답이다.
 
「기타」의 우주론
다른 모든 힌두교의 문헌과 마찬가지로「기타」도 분명하게 짜인 체계적인 우주론 위에 서 있다. 이 우주론의 홀로 하나인 중심적인 참 것을 브라만(Brahman)이라 부른다. 곧 실재자이다. 브라만은 총체적인 신성(神性)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우파니샤드」(Upanishad)는 브라만을 존재요 지식이요 지극한 즐거움(existence, knowledge, bliss)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성(屬性)은 아니다. 브라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브라만은 존재 그 자체다. 브라만은 어진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절대적인 지식이요 절대적인 즐거움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방법은 “브라만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해서 나중에 현상적인 우주 전체가 다 없어지고 오직 브라만이 홀로 남게 되는 일일 것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체, 모든 물체 속에 다 있다. 신성은 사람 속에도, 쥐 속에도, 돌 속, 번개 속에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의 브라만은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다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조금도 어떤 다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또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그는 모든 거룩한 성격 곧 사랑, 자비, 정결, 정의, 지식, 참을 가지고 있다.
 
브라만은 절대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이 창조했다거나 파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지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이슈바라, 곧 브라만이 자기의 능력과 하나가 된 분이다. 이렇게 말함은 반드시 이원론(二元論)은 아니다. 브라만의 능력을 브라만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불의 열을 불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과 한가지다. 그러나 철학적 분석이 우리를 그 놀라운 신비 속에 더 들어가게 하지는 못한다. 이슈바라란 생각은 인간의 지능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브라만은 성자들에 의해 도달된 초의식적인 지경에서 체험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지경을 사마디(samadhi) 혹은 신과의 합일(合ᅳ)이라고 한다.「바가바드기타」안에는 이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식별(識別), 정신적 훈련, 명상에 의해서 바깥 세계와의 감관(感官)의 접촉이 온전히 끊어질 때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거기 아트만, 곧 속에 와 계시는 신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모든 신비로운 수양의 하는 방법이요 이날까지 모든 진실한 종교에 의해 가르쳐져온 것이다.
힌두교는 더 나가서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라 부른다. 브라마는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표시하고 비슈누는 지지(支持)를, 시바는 분해(分解)를 표시 한다. 시바를 흔히는 파괴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 우주가 파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브라만의 영원한 능력 밑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 영원한 과정은 가능성과 나타남의 두 시대를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다. 그 돌아가는 바퀴의 끝, 혹은 칼파(Kalpa)가 오면 우주는 분해되어 풀어져 가능성의 시대, 곧 씨의 상태로 들어가서 다음 창조를 기다리게 된다.「기 타」8장에는 이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이 나타남의 시대를 ‘브라마의 낮’이라 부르고 가능성의 시대를 ‘브라마의 밤’이라 불렀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 바퀴에 속해 있는 모든 산 물건들은 다음에 오는 우주 낮, 우주 밤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나고 또다시 풀어진다. 그러나 이 풀어짐을 결코 신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 산 물건은 다만 자기를 내보냈던 브라만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타나는 때가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그 명칭은 서로 왔다갔다한다.「기 타」에 의하면 이슈바라는 언제나 그가 인간 속에 나고 싶을 때는 프라크리티에서 자기를 위한 몸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으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프라크리티의 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신의 화신이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이다. 사람도 프라크리티와 연합한 아트만이다. 그러나 사람은 프라크리티에 눌려서 미혹(迷惑)되어가지고 자기는 아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트만과 연합한다는 것은 그 미혹을 벗어버리는 일이며 살고 죽음의 길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해탈한 사람은 다시 날 수가 없다. 그는 벌써 프라크리티의 세력 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화신은 절대 그 세력에 속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유자재로 우주에 들고 난다.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거룩한 자를 건지기 위해
죄인의 죄를 멸하기 위해
정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 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그때에 성들은 가지가지로 서로 다른 마음과 물체에 따라 이루 헬 수 없는 종류의 배합을 이루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성격은 심령적 물질적 세계에 나오는 그들의 소산물에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성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가령 예 든다면 선성은 햇빛 속에서 우세하고 동성은 폭발하는 화산 속에서, 암성은 화강암덩이 속에서 우세하다.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어떤 때는 이 성이, 어떤 때는 저 성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낼 수가 있다. 우리는 동성을 배양함에 따라 암성을 이겨낼 수 있고, 선성을 배양함에 따라 동성을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지만 구경의 지경은, 선성까지도 초월해서, 성의 위로 성의 저쪽인 아트만에 이르는 일이다.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①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②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③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 대 (五大)라는 지 (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그 체계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표와 같다.
 
                                           프라크리티
 
                                              마하트
 
                                              부디
 
                                            아함카라
 
1.마나스                          2.감각의 5관,행동의 5기                          3. 5탄마트라-5대
 
우리는 물론 현대의 서양 과학의 가설을 인도의 세계 그림에다 억지로 맞추려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둘 사이에 어떤 서로 합하는 점이 있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될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물론 절대적인 실재의 관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은 브라만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신비주의자들의 초의식에 대한 주장을 확인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하는 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조사해볼 만한 기술을 가진 것이 없다. 당신들이 브라만을 아노라고 할 때는 당신들은 과학 세계 밖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프라크리티와 성을 생각해본다면 과학과 베단타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도 역시 일원론적인 우주를 분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화학적인 원소들의 각각 다른 결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소들은 같은 단원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시종일관 이 세계와 하나요 가장 먼 별과도 하나다.
 
과학은 마음과 물질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서나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는 아직은 돌 속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는 그것은 아직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진화의 어느 섬에서 생명이 들어갔다는, 어느 점에서 인격이 갑자기 태아나 유아 속에 생기게 됐다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게 말하기를 진화는 완전히 영속적인 것이요 또 일반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이상이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요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방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적 사명은, 마치 콜룸부스가 알 수 없는 서쪽을 향해 항해를 했듯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가는 일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한다면 인간의 사명은 환경과 자기의 관계에 대한 보다 더 큰 지식을 얻어서 그것을 점점 더 잘 통제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 그 환경이란 자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쥬나와 과학자는 둘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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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 | 함석헌 Ch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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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 퀘이커 300년- 5. 감화
페이지 정보작성자 바보새 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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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화

감화는 퀘이커 예배에서 중요하나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론으로 나 실지로나 완전한 침묵의 예배는 말이 나오는 예배와 마찬가지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한마디라도 말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마음을 내놓은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리처드 조르단은 그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감상은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으로 영감에서 나오지 않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말없는 모임 편을 좋게 봅니다. 그러나 경험이 보여주는 바로는 오랫동안 감화가 매우 적거나 도무지 없는 모임은 오는 사람도 줄고 힘이 없어집니다. 모임 중에 어떤 사람은 감화를 별로 필요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을 찾는 것은 개인으로도 하지만 또 단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가는 길에서 훨씬 앞선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이 모이는 데서 힘도 얻고 용기도 나게 됩니다.

저자는 일본서 선불교의 참선에 참여하곤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모임은 사람이 많아서 선방 안에 몇 줄씩 줄을 지어 앉는데, 거기에 완전한 침묵이 있었습니다. 흡사히 친우들의 모임 같으나 거기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교통이 전혀 없었습니다. 각 개인은 혼자서 진리와 실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상자는 이따금 방을 나가서 노사, 즉 스님을 만나는 수가 있고, 그러면 그는 어떤 지도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명상자는 다시 명상으로 돌아갑니다. 이 스님이 퀘이커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지만 전도상 필요한 것을 해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정신적 지도자는 그것과도 또 다른 방식으로 골방에서 혼자 정신적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을 돕고 지도합니다.

친우들 사이에 있는 전도자는 선교의 지도자나 가톨릭의 지도자와는 다롭니다. 그는 예배하는 무리의 직접 대변자로 말을 합니다. 그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모임 가운데 임해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표함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 전기의 힘이 어느 점에 올라가면 극에서 극으로 불꽃이 왔다갔다하게 되듯이 모임 전체의 영적 힘이 점점 올라가서 어느 점에 이르면 침묵의 경계선을 깨뜨리고 말이 나오게 됩니다. 퀘이커의 감화에는 제일인칭단수 대명사가 나오는 일은 별로 없고, 말하는 사람이 더 널리 일반적인 진리를 밝히게 되지 않는 한 자기 개인적인 체험을 말하는 일도 없습니다. 찰즈 램(Carles Lamb)이 어떤 퀘이커 전도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퀘이커의 전도의 원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예배자들이 주를 우러르기 위해 침묵 중에 같이 앉았을 때 그중의 누가 생각 가운데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말할 의무가 있고, 또 다하고 나면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그 긴급성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는 증거입니다. 어떤 생각이 올 때에 이상한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오게 되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말하라고 하시는 표적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어떤 때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나 그밖에 또 다른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겸손한 기다림을 통해서 ‘고요하고 가는 소리’를 듣게 됐다면 그는 부름이 있을 때에 알아듣는 능력을 점점 더 충실하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근원에서 오는 말은, 가령 예한다면 자기의 힘이나 지식을 자랑 하자는 생각 혹은 단순히 억제하지 못해 하는 것 같은 말은 아무리 거짓 꾸민 모양을 하고 오더라도 곧 알아보고 물리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는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모임에 유익이 되겠나 아니 되겠나를 아는 법입니다. 이따금은 참 근원에서 오면서도 모임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페닝톤이 주의하여 말한 것같이 ‘집에서 먹을 빵으로’, 즉 받은 사람이 가만히 지켜두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친우 일기에서 보면 말을 하기 전에 마음이 무겁고 불안을 느끼는 일 이 종종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될수록 엄숙한 침묵을 깨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의 결단으로 그러한 중대한 책임을 지려 한다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인 듯이 제 눈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전혀 자기 것만이 아니고 자기를 부르신 거룩하신 주의 것이라고 깨닫게 될 때, 그가 만일 신실한 사람이라면, 그 요구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퀘이커 일기 중에는 그 부르심에 복종한 뒤에 오는 온전한 평화의 느낌에 대해 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늘 화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은 아주 존경받는 친우들도 불안감과 ‘인도해주심을 벗어났다’는 느낌에 주저앉는 수가 있습니다. 존 울만이 처음으로 모임에서 말을 하고 난 때의 체험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그후 매우 오래 있다가야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 흔치는 않으나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친우들이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듣기를 기대하고 모였는데 말할 수 없어 속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침묵 속에 앉았다’고 좁 스코트의 일기에 종종 적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 못하는 것이 옳은 때가 있습니다. 리처드 조르단은 “나는 끝내 그 모임 속에 잠잠히 앉았었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조바심을 치고 있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을 않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라 고 했습니다.

퀘이커들의 감화의 목적은 강단에서 하는 설교의 목적과는 다릅니다. 강단에서 하는 설교의 주목적은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는 듣는 사람에게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 내세에만 관심을 두었던 구식의 구원론은 오늘날은 종종 현세 생활을 위한 사회적 구원론으로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교육적인 설교가 친우모임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놓은 데서만 하게 됩니다. 진정 예언자적인 능력을 가지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교훈적인 것은 엄숙히 주님을 우러르는 가운데 적당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종교사, 교리 실천에 관한 보다 더 자세한 가르침은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친우회에서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예배모임보다는 강좌에서 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조지 폭스는 말하기를 퀘이커의 전도 목적은 “사람들을 모든 설교가 끝나는데까지 이끌어 가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페닝톤은 또 그리스도의 전도자의 할 큰일은 양심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도록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설교가 헤매이는 마음을 한데 모으게 하는 명상의 제목을 줄 수는 있지만 설교하는 사람은 듣는 자가 자기에게 의지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가톨릭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지도서에 보면 지도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책임을 지거나 너무 자세한 지도를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경고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까지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영적 지도자는……여기서 주로 활등하시고 영혼의 참 지도자가 되시는 이는 성령이란 것,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들을 돌보기를 쉬지 않고, 그들이 유익을 얻고, 될수록 빨리 가장 좋은 길을 얻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게으름 없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네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영혼들을 신앙의 원리와 하 나님의 법에 의하여 인도하는 기구일 뿐인 것을……그러므로 저들의 목적은 저들에게 좋게 저희 마음대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언은 퀘이커 모임의 말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말입니다. 전도자는 성령의 기계입니다. 그 성령은 자기 속에만 아니라 듣는 자의 속에도 있습니다. 그가 만일 그 중심 되는 그이에게 가까이 있기만 하다면 그는 거기서 나가는 바퀴살을 따라 누구에게도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의 감화에는 어떤 규칙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인도하십니다. 대체로 그 하는 말은 진리에 대해 단순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요, 변론을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은 듣는 사람이 각별한 토론이 필요없이 받아들일 만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미술가가 제 그림을, 시인이 제 시를 아무 이유 캘 것 없이 그대로 받아주기를 바라고 내놓듯이, 그렇듯이 말하는 사람도 그저 제 속에 있는 빛이 남의 속에도 있는 빛에 응답할 것을 믿고 제 감화를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생명은 그 의지를 움직이지만 그 의지가 변론에 의하여 강요당하게 되면 설혹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 움직임은 완전히 제 안에서 우러나서 한 것이 못됩니다.

종교적인 체험을 해부하는 분석적인 감화는 마치 식물 동물의 해부와 같아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의 생명을 직접적인 직감으로 알듯이 우리는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알 수 있습니다. 분석은 독특한 과학적인 가치를 가지지만 마치 불길이 이 석탄덩이에서 저 석탄덩이로 뛰어가듯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성령은 진리를 스스로 제 안에 통일을 가지는 하나의 산 것으로 옹근 채로 파악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마치 여러 종류의 새들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는 조류학자들의 모임 안에 정말 어떤 진귀한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을 때에 일어날 그 일과 비슷합니다.
친우들의 모임에서 하는 감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아무도 모임에 올 때 미리 말해야겠다든지 그런 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비유를 빌어서 한다면 우리의 종교는 샘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지 물웅덩이에서 길어먹는 것이어서는 아니됩니다. 감화는 그 모임의 생명에서 신선하게 순수하게 솟아올라야 합니다. 비유를 바꾸어 말한다면, 싹이 트기 전에 적당한 조건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씨를 일찍 뿌려 두어야 합니다. 나중에는 감화로까지 자라서 말로 발표되어 나오는 그 관심거리는 아마 어떤 때, 일상 잡무를 하고 있는 동안 혹은 혼자 물러가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하는 동안에 마음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익어서 이제 말할 때가 왔다고 분명히 느껴지는 때까지 그것을 잘 간수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메리 잉글랜드(Mary England)라는 18세기의 한 친우가 이런 꿈을 꾼 일이 있습니다. 물동이를 샘에 넣어 물을 길어서 곧 가지고 가려 하니 물이 다 쏟아져나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엔 동이를 한참 물속에 담갔다가 천천히 했더니 물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는 모임에서 말하자는 생각이 났을 때, 너무 서둘러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감화 말이 있은 다음에는 침묵이 계속되므로 듣는 사람들 자신들이 더 이어서 생각할 기회가 있습니다. 친우모임에서 하는 말은 있는 말을 다 한다기보다는 함축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모호할 수까지도 있습니다. 정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처럼 줄을 그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의식하는 사상의 수평선을 넘은 황무지의 어둑한 변자리에 있습니다. 영계의 말은 상징적이요, 그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자신을 뛰어넘어 모든 존재의 밑바닥을 가리키는 부호들입니다. 어떤 때는 그 영의 음성은 전혀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숨으로 겨우 발표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침묵밖에 없는 수가 있습니다.

퀘이커 모임에서 하는 말은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분명히 종교적인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학에서, 한 좌표 안에서 동그라미인 것이 다른 좌표 안에서는 길죽 동그라미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배경 안에서는 이렇게 뵈는 것이 종교 적인 범주 안에서는 매우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됩니다.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차이는 곱고 미움과 선하고 악한 사이의 차이와 같이 아마 말로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입니다.
종교적인 발언으로는 틀에 박힌 도덕의 말보다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의 영 안에 살라고 단순히 외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 영 안에 사는 사람은 자연히 역사적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하여 계시는 것을 진실히 체험한다면, 모든 말이 다 그의 영에 잘 들어맞은 것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인격과 사업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과 말을 한다면 그 하는 모든 말이 그 사람에게 맞도록 되는 법입니다. 누가 말했듯이 아무리 가시덤불을 뒤진다 해도, 불붙는 가시덤불을 뒤질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식의 설교는 퀘이커의 전형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영혼을 완전한 데로 인도하는 것은, 선을 즐겨함으로써 되지, 악을 무서워함으로써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티븐 그렐레트(Stephen Grellet)에 대하여 월리엄 앨린슨(William Allinson)은 말하기를 그의 감화는 설득력이 있고 예언자적이요 권면적인 동시에 엄숙하고, 박력있고, 경고적이었다고 했습니다. 빛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죄를 드러냄입니다. 누구나 장애물이 그 빛을 가리어서 생기는 그 깜깜한 그림자를 지적하기를 서슴어서는 아니됩니다.
죄악의 무서운 실제를 깨닫고, 그 결과로 오는 겸손과 의지하는 느낌이야말로 새로남의 첫걸음입니다. 그것 없이 정신적 여행의 출발은 아니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언제까지 그 캄캄한 속에만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예배모임의 목적은 그 암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암흑을 이기는 빛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그 목적으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요, 사람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 생명만이 그 목적에 도달하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로 든 조지 폭스가 병들고 마음에 많은 괴로움을 가졌던 크롬웰의 딸 클레이폴 부인(Lady Claypole)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유혹과 정신 빠짐과 어지러움을 그 빛이 드러내어 보여주더라도 그 유혹, 어지러움, 타락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보다 그것을 드러낸 그 빛을 보십시오. 그것은 아래로 죄, 타락, 헤매임만 들여다보면 거기 삼키워 버리지만 그것을 드러내준 그 빛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그것을 넘어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서간 1: 488)

예배모임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말은 기도입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기도의 영이 자기를 통하여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 모임의 입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의 기도의 말은 ‘내’가 아니고 ‘우리’ 입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대개 침묵 중에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기도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일이요, 친밀한 것이기 때문에 들리는 말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실치 못하고 형식적인 것 같아서 그것을 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올리는 참된 기도처럼 모임 전체를 힘있게 돕는 것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는 능히 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감사를 느낍니다.

예배모임에서 말을 하라는 명령은 교육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늙은 이, 젊은이, 남자, 여자,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300년 동안의 퀘이커 역사는 말하는 은혜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밖에 또 다른 무슨 임명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지 폭스의 젊은 시절의 ‘열림’은 그에게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서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초기의 퀘이커 전도자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시대의 사도나 예언자들도 그러 했습니다. 초대의 친우들은 누구보다도 더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에던버러, 애버딘 대학 학자들에게 가장 혹독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친우들이 전도의 선결 조건으로서 학문의 지위를 낮게 보는 것에 분개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을 줄도 모른다고 비웃음을 받았을 때 친우들은 조지 폭스가 한 것처럼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원어입니다……거룩하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님의 성질 속으로 인도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서간 249:1667)

친우들이 남자나 여자나 인생활동을 위하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설립한, 유지하고 있는 학교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교육은 정신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로 전도하는 데 그것이 절대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맨 처음부터 퀘이커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이 감화를 말했습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친우들은 다만 그 결과를 지적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바클레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날에 정말 많은 영혼들을 여자들의 감화를 통하여 회개시켰고, 또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위로하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실지 체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교훈은(고린도 전서 14:34) 같은 서간 안에 있는, 예언할 때에 여자들의 머리 수건에 관하여 한 교훈의 말과 비추어서 읽었습니다.(고린도 전서 11:5,13) 여자들의 전도하는 지위를 두둔하기 위하여 친우들이 매양 쓰곤 한 성경 귀절은 오순절에 베드로가 인용한 선지자 요엘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내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과 딸들이 예언을 하리라.”(사도행전 2:17)
폭스는 말하기를 남녀의 불평등은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나, 그리스도의 회복으로 말미암아……이제는 타락 전과 같이……그들은 서로 돕는 자입니다.(서간 291)
전도의 책임을 특별히 준비하여 대표로 세운 개인, 혹은 몇 사람에 두지 않고 모임 전체에다 두는 방법은 분명히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퀘이커 모임에서의 전도는 이날까지 문제였고 앞으로 계속 문제일 것입니다. 체험도 옅고 가장 높은 동기에 이르지도 못하여 전도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유라는 틈을 타가지고 나옵니다. 조지 폭스는 ‘조마조마 한, 토라진, 덤비는, 안절부절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서간 131) 어떤 사람은 모임이 종교적 성질의 것이라는 점도 모르고, 주를 우러르기 위한 모임보다도 토론회나 강연회에나 알맞을 만한 말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분명 은혜를 받았으나 지금은 이미 그것을 잃어버린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사람들이 말에 너무 의지하게 됩니다.
수아 에반즈(Joshua Evans)는 그 일기에서 말합니다.

요즘은 우리 모임에 전에 목사였던 네 사람의 친우가 나왔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시절이 가물 때에 우리는 비가 올까 하고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구름은 많아도 비는 조금밖에 아니 오는 때가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여러 설교자가 정면석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들만 바라보고 정말 영혼의 주교는 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망하는 때가 많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 어떤 씨는 굳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땅이 굳어진 것은 씨를 뿌리느라고 너무 밟고 오르내려서 그럴 것입니다.
친우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적당치 않다 생각되는 것도, 적어도 자기에게는 그렇더라도, 그런 것도 많이 들어 버릇해야 합니다. 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애를 쓰면서 길을 못 찾고 있는 설교자를 존경하여 참는 그 자체가 벌써 값있는 훈련입니다. 만일 잘못된 감화 때문에 모임이 잘못되고 있는 경우라면, 모임의 각 분자들은 모임의 질의 일부분은 자기와 자기의 충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친우들의 모임은 데모크라시와 마찬가지로 통제 대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친우들의 모임은 잘 짜인 표준에 의하여 진행되도록 제정되어 있는 교회의 예배보다는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낮게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프로그램 없이 자발적으로 하는 감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이 직업적 프로그램으로 되는 설교는 아마 마찬가지로 또 다른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성직과 평신도의 차별은 교회의 통일을 돕지 못합니다. 평신도 편에 책임이 없는 것은 영의 자람을 돕지 못합니다.
설교를 미리미리 준비하는 일은, 바클레가 말하는 ‘두루 찾아 주워 모은 것’(변호론 352) 혹은 조지 폭스가 말하는 ‘머리로 짜낸 고린내나는 것’(서간275: 1669)이 돼버리고 말수 있습니다. 친우들은 이것을 어떤 때는 ‘물마른 방아질’이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예배자의 생활과 연구에서 새로이 솟아날 때에 그것은 더 생기가 있습니다. 퀘이커 모임에서 깊은 깨달음의 반짝하는 불꽃에 따라 나오는 한마디 말이 길다란 설교보다 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직업 전도자들이 보수를 받는다고 친우들이 비난하던 것은 이제는 그쳤습니다. 사실 그들이 넉넉하지도 못한 보수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진실한 소감의 발표로 되는 그의 설교까지도 억울하게 그 효과의 감소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는 또 다른 약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가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고요한 시간이 너무도 없는 때가 많습니다.

순서 없이 모임을 하려면 거기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퀘이커의 전역사 과정을 통해서 장로를 세움으로써 어느 정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장로의 주요한 책임은 모임에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친우모임의 자유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는 후에보다도 초기에 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운동이 아직 유동적이요, 조직이 잘 짜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운동이 무엇을 목표하는지 매우 부분적으로밖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기 관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원 명부의 제도가 서기도 전에 친우들은 제명 성명을 하지 않으면 아니됐었습니다.
친우회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모임에서 감화를 자주 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 충고를 하고 서로 도와왔습니다. 이러한 감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친우들의 월회, 사계회, 연회는 모임의 정신생활의 실력을 길러내는 데 많은 힘을 썼습니다. 이것이 정말 ‘예언자의 학교’였습니다. 차차 시일이 감에 따라 친우들은, 이렇게 자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도 그러하거니와 또 청중으로부터도 비평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음에 보는 1714년 필라델피아 연회의 의사록은 이러한 모임들의 중요한 변화가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임은 설교자의 모임을 현재 가지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가지려는 월회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친우를 지명하여 선교자들 모임에 같이 참석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 주의할 것은 그 뽑히는 친우는 근신 견실한 친우일 것.

이들을 장로(elders)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자의 모임을 ‘선교자’와 장로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자는 ‘찬성’ ‘추천’ 혹은 ‘등록’이 된 때, 즉 모임이 그들의 전도에 공식적으로 동의를 표명했을 때 그 모임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한 선교자들이 다른 모임을 방문하고 싶을 때는, 그 모임이 만일 그 방문을 찬성한다면, 선교자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명한 의사록을 줍니다. 이 의사록이 신임장 혹은 소개장의 역할을 합니다. 대개 장로 한 사람이 그 선교자를 따라 인도자, 원조자, 비평자로서 같이 여행을 합니다.
‘돌봄’ (eldering)은 자유의 원리 위에 놓여 있는 모임에는 없어서는 아니되는 요소입니다. 그 목적은 단체 전체의 자유를 될수록 크게 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될수록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친우모임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조정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개인의 자유와 전체의 자유와의 사이의 조절입니다. 개인이 만일 단체의 구속을 너무 받는다면 그 단체는 개인만이 줄 수 있는, 듣기 거북은 하겠지만, 새로운 진리를 얻을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체 각 개인들의 맘대로 하는 것이 돼버려도 아니됩니다. 그렇게 되면 같이 모이는 원목적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단체나 개인이나 둘 다 진리의 거룩한 빛에 겸손히 복종해서만 제각기 제 할 일을 다할 수 있고 하나로 같이 살 수 있습니다.
‘돌봄’ 이란 말이 충고란 말과 같은 뜻이 돼버렸지만 사실 격려가 필요한때도 많습니다. 친우들의 모임에서 말을 하는 것은 자진하여 지는 책임이기 때문에 겸손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자연히 움츠러들게 됩니다. 젊은 사람이 더욱 그렇습니다. 1723년 필라델피아 연회는 그 의사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모든 자비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 여러 젊은이들에게 산 전도의 거룩한 생을 열어주시었고, 또 지금도 열고 계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자들이나 장로들이 이 젊은이들, 아직 선교에 익숙치 못한 이들 젊은이들에게 자녀들을 길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1765 년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선교자들과 장로들은 선교에 미숙한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서로서로 돌보아주며 최선을 다하기를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고한다. 생명과 능력은 없이 말에만 빠지려는 너무 지나친 분위기들은 눌러주어야 할 것이고, 목소리 몸짓을 꾸며서 하는 것과 그밖에 예배에 해가 될 만한 모든 것에 대하여는 타일러야 할 것이며, 그러면서도 지친사람에게는 적절한 한마디 말을 주어 겸손하고 조심성 있는 여행자를 격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장로 노릇을 참으로 건설적으로 한 좋은 실례를 월리엄 팬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 받은 사람이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큰 모임에서 중요한 감화를 지도적인 친우들이 하려니 하고 일반이 기대하고 있었던 때에 사람들이 이름도 잘 모르는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이라는 청년이 길다랗게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팬이 그 사람에게 말을 했습니다.

오늘 예배의 중요한 일은 네가 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비록 보기에 하나의 관목(灌木)같이 밖에 아니 뵈는 너를 통해서 주어지기는 했지마는, 우리는 즐겨 평안한 마음으로 그 진리에 순종하였다. 또 주님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 러티(John Rutty)는 의사요, 의학책도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더블린 모임의 장로의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영의 일기』에는 많은 짤막짤막한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1796)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여, 제가 만일 영의 집의 잡은 것 중 칼이 될 수 없다면 숫돌로라도 되게 해주옵소서.

장로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쓰시는 기구를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래서 폭스는 이런 충고를 합니다.

친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땅에서 돋아올라오는 연한 식물들 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짓밟고 상하고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월리엄 뮤스버리 (William Dewsbu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은사를 받았거나……찬송이거나 예언이거나 권면이거나간에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네게 명령하는 바이지만, 너는 주의 영을 끄지 말고 네 은사를 하나님의 제단에 가져다놓고, 빛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의 힘으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어라. 그리하여 네 재주가 늘고, 어린것이 자라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아, 서로서로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지극히 연한 숨에도 민첩히 하고, 모두 고쳐주시는 영으로 입혀주심을 입을 때 까지 기다리라.

전도자에게 필요한 모든 조언의 알짬이라고도 할 만한 말을 존 월리엄즈가 했습니다.

시작도 생명으로, 계속도 생명으로, 끝맺음도 생명으로

친우회의 감화는 어떤 때는 예언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물론 어떤 친우도 자기를 예언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감화가 예언이라는 것은 다만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즉 인간적인 아무런 준비 없이 직접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거라고 믿는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 그런 외침은 어떤 때는 예언이 라는 확신을 줍니다. 사무엘 포더길()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감화는 어떤 때는 불길같이 내쏘아서 저 맨 밑바닥의 어둡고 굳은 구렁에까지 뚫고 들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의 심으시는 연한 초목 위에 이슬같이 내리며, 영의 깊은 동정으로 아픔을 같이 나눕니다.

1658년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방문한 조시아 콜(Josiah Coale)에 관해서 역사가 시웰(Sewel)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가 죄악의 세상을 향하여 말할 때는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이 그 얼굴에 나타나고, 그 말은 쇠뭉치와 같고 날카로운 칼 같습니다. 그는 우뢰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또 경건한 혼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때는, 그 입에서 사랑스런 말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옵니다.

신약 교회에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전례라고 퀘이커들은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영의 은사를 그 중요성의 순서에 따라 모조리 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을 고치는 것과,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였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린도전서」12:28,14:1)그러나 기독교사의 제 1세기에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던 예언의 능력은 곧 제사제도 밑에 들게 되었고, 제 2세기에 와서는 전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언주의를 다시 일으키려고 2세기에 일어났던 몬타누스파와 같은 운동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예로부터 있는 그리고 구약성경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극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제사와 예언자와의 싸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제사의 승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까닭 때문입니다. 건전한 교리를 유지해갈 필요와 성례전을 차지하는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의 중요성. 바울이 “예언하는 사람의 영은 그 예언하는 사람에게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4: 32) 한 지 60년도 채 못 돼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제사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장로 곧 후일의 제사는 예언자들의 외침이 무궤도적이고, 혼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혁명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제 1세기 마지막 3분의 1에 기독교가 어떤 발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 전에 히브리 예언자들이 제사세력에 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예언자들이 성직자제도의 경향에 대항했던 것은 있었음직한 일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던 애찬, 즉「고린도 전서」11장에 적혀 있는 모양으로 같이 회식을 하던 것이 차차 의식적이 되고 그것을 위하여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임명되게 되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 예언이 쇠퇴되도록 만든 두 원인, 즉 성례전적인 종교와 정통적인 교리의 커짐은 퀘이커주의 안에는 없었습니다. 성례전이라면 친우회에서는 제사직을 통할 것 없이, 누구나 직접 할 수 있는 내적인 체험으로 해석했습니다. 친우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나 자기 믿는 바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회원이 되는 조건으로 아무런 신앙개조를 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외적 권위로 속박이 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진해 하는 예언적인 감화를 장려하도록 된 예배형식을 유지해왔습니다. 그 결과 예언적인 감화가 친우회 안에서는 교회에서보다 더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종교단체에서 다 그런 것같이 친우회 안에도 제사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친우회에서도 장로가 어떤 제사적인 직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초대 교회에 비하여 그 정도가 낮고 다른 방식으로였지마는 18세기 동안에 장로의 세력은 차차 신장되어갔습니다. 그들의 일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퀘이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형, 곧 규칙적인 생활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퀘이커는 그 말 하는 것, 옷 입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장로 들은 전통의 보호자가 됐고 모든 제사적 경향을 가진 사람이 다 그런 것같이, 그들은 새 진리의 발견보다는 낡은 진리를 보존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퀘이커주의가 이렇듯이 속으로 여무는 시기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요, 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퀘이커 종교는 모임 집과 시장으로부터 가정으로 생활의 모든 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로들은 마침내 너무 지나쳐서 전통에 거슬려서 일어나는 새 생활을 억누르는 데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첫 사반세기, 필라델피아 장로들이 신학 학설에 통제를 가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장로의 권위에 대해 일치된 반항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그러한 분열이 없이 보다 자유로운 양식의 훈련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친우회가 둘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친우회 중에서도 자유롭고 프로그램 없는 예배를 유지해가려는 파 중에서 예언자적인 전도가 쇠하게 된 책임을 장로들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샘을 모든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극력 주의했습니다. 그 쇠약은 주로 모든 종교단체에 나타났던 고도의 지식주의와 세속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고등교육, 특히 대학교육이 더 일반화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자아의식적인, 합리주의적인 인생관이, 흔히 인도주의에 접근하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화에도 지식적인 내용이 늘어갔습니다. 이것은 대체로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따라 영적 내용이 줄어드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식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도우면서 발전할 수 없다는 진정한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 이성과 인간 이상인 영은, 둘다 없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세대도 못되는 동안에, 아무리 일반식이 거슬리고 불합리하더라도 속의 인도에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던 옛날식의 예언자적인 전도가 가장 보수적인 퀘이커 중에서도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다른데에서는 더 일찍 없어졌습니다. 퀘이커 예언자들은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느끼는 대로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하나의 남자나 여자가 다 윌리엄 펜이 조지 폭스를 가리켜 했던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독창이지 누구의 모형이 아니었다.” 그들은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릴 바른 말도 참 사랑 하는 맘으로 했기 때문에, 아무도 성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뜻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속의 모든 갈등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얼굴이 하나님의 화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약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네 분에 넘치는 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군중 심리적으로 되어 있는 현대에서는 그러한 독특한성격의 인물을 내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공장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일정한 틀을 거쳐서 제품을 내고 있습니다. 정신적이거나 기업적이거나 겉에 있는 기구의 세계가 너무 발달됐기 때문에 인간 구경의 목적에 관계되는 궁극의 의미의 깊은 세계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마치 뚫고 들어가 길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하수와도 같습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심하고 있는 전도도 내버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또 사람 서로서로와 연결시킴으로써 해결하려는 그러한 정도로서 깊어지고 강화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휘티어의 소네트「외침」(Utterance)은 예배모임에서 말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직면하는 문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깊은 속의 진리를 더듬는 데 이 불완전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눈멀고 약한 몸으로써 누가 능히 길을 가리키고 앞장을 서며
평범한 말로 진리의 신비를 어찌 풀 수 있느냐?
그러나 네 것은 아닌 어떤 무엇이
그 밑에서는 우리 모든 제도, 신조, 예배, 의식이
꿈밖에 아니 돼버리는 거룩한 뜻의 그림자가
황송하게도 네게 알려지는 때면
너는 숨김없이 외치라, 비록 네 입술에서는
참도 거짓으로, 아름다움도 더러움으로 변해버릴까 두려워
가볍게 입을 열 수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네 의무를 기도의 저울에 달아
네게 주어졌다 믿는 바를 전하라, 그러면 너는 알리라.
그것은 고대하는 밭고랑에 떨어진 한알의 선한 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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