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알라딘: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홍사성



알라딘: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홍사성 (지은이)불교시대사2009-05-28

















































정가
25,000원
판매가
22,500원 (10%, 2,500원 할인)

9.7100자평(4)리뷰(2)


559쪽
160*230mm
839g
책소개
'아함부 경전'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삶에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알맹이들을 간추려 엮은 책이다. 부처님의 생애에서부터 기본적인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뽑아서 정리하였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부처님의 생애
제2장 인과응보
제3장 행복과 평화
제4장 자비와 공덕
제5장 올바른 생활
제6장 노력과 정진
제7장 나눔과 선행
제8장 포교와 설법
제9장 반성과 참회
제10장 겸손과 양보, 그리고 인욕
제11장 수행의 길
제12장 마음 닦기
제13장 청정한 삶
제14장 사색과 성찰
제15장 부처님의 가르침


책속에서



느낌이란 어떤 상태에 대해 즐거움과 괴로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면 근심이 생긴다. 예를 들어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즐거운 듯하지만 그 즐거움을 잃을까 걱정이 되고, 맛이 없는 음식을 먹고 괴로운 느낌이 되면 그런 느낌이 계속될까 걱정이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언제 괴로움이 찾아올까 걱정을 하게 된다. - 517쪽

대왕은 알아야 합니다. 꿈이나 허깨비, 물거품이나 눈덩이 같이 아무리 붙들어놓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유한한 것이 무한하기를 바라는 것, 사라질 것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늙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늙지 않기를 바라는 것, 병들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병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 520쪽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홍사성 (지은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불교신문 주필, 불교평론 주간, 불교TV 제작국장, 불교방송 방송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계의 불교>, <불교입문>, <불교상식백과> 등이 있다.


최근작 : <나도 부처님 될래요>,<정법 천하를 기다리며>,<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 총 13종 (모두보기)


9.7




글자배열과 크기도 적당하고 가독성이 좋아 기분좋게 읽을 수 있다. 싯다르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감격이 너무나 감사하다
우왕 2013-11-02 공감 (0) 댓글 (0)




글씨도 또박또박 가독성도 좋고 글자도 큼직큼직해서 ㅋㅋㅋ 나중에 조카들이나 어르신께 선물해도 좋을 거 같아요~! 환상적인 내용의 동화책보다 이런 책을 어린이들이 읽으면 가치관 형성에 좋을 것 같아요~!
최미순 2015-12-05 공감 (0) 댓글 (0)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요지를 잘 정리해서 알기쉽게 되어 있어요. 배송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책의 내용과 배송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나무와 바람 2016-11-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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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마음 속이 번잡고 힘들 때가 있다. 모든 고통은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고 수련하고 훈련해야 한다. 불교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이 책이 가장 불교의 원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짧고 쉽고 재미있어서 읽기 수월하다. 읽고 또 읽어도 좋을 책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몸소 행함이다.
^♡^ 2012-12-16 공감(1) 댓글(0)





가볍게 읽을 불교 입문서로 추천~

방대한 아함경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다보니 읽는 내내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분들에게는 한 번 읽고 넘어가길 추천드립니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예비 불자들은 성경처럼 불교의 정수를 한 권에 담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불교의 방대한 철학체계와 평생을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한 권에 담아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겠으나, 부처님의 원음을 들으며 전반적인 부처님의 생각과 이 후 진행된 불교의 흐름을 이해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쫓아갈 수 있게끔 안내를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함경을 한권으로 묶은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타는목마름으로 2014-03-16 공감(0) 댓글(0)

希修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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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6 hrs ·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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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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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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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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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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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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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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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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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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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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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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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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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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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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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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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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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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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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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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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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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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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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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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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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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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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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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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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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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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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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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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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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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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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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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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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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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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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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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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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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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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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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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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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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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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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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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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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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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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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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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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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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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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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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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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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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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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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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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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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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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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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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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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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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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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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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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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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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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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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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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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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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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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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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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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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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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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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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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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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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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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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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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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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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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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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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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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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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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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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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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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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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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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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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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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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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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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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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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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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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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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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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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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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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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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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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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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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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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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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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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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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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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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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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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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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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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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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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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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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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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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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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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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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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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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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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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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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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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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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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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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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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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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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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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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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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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한국 분교 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산 가야사 주지.
http://www.rip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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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댓글들도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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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希修

Sejin Pak 참고하실 만한 글 몇개 올려 드리겠습니다.


希修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기억력이 비교적 좋다고 소문난 이들 약 5백여명이 부처님 사후 모여 서로가 기억하는 부처님과의 일화를 대조, 기억이 일치되는 부분을 운문형식으로 확정하여 노래처럼 부르며 전파합니다. (글로 남기면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 등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어서요.) 이런 결집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3차 결집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까지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면, 영역본으로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그 긴긴 텍스트를 수천 명이 동시에 순서대로도 외우고, 맨 뒷단어에서부터 거꾸로도 외우고, 한 단어씩 건너 뒤면서도 앞뒤로 외우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존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문자로 기억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다른 판본들의 내용이 거의 완벽히 일치하게 됩니다.
암튼, 경전의 성립과정이 이렇다 보니, 경전의 내용도 제자들이 결집하여 기억을 기술한 그대로입니다. "이러저러한 날 이러저러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누구누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했고,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이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무수한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작하여 기록하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읽는 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구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불교발전의 역사를 모르면 엄청 헷갈리고 엉뚱한 삽질을 하게 됩니다.)
위의 2.2. 단락은 대승경전의 이 integrity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대승경전 중에도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많습니다만, 그 자체로 철학이라 볼 수는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C4%81li_Canon
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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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āli Canon - WikipediaPāli Canon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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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불교를 공부하시다 보면 차차 느끼시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양 자체도 워낙 방대하고, 그 내용도 상당한 지적능력, 특히 메타인지가 있어야만 이해와 실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며 공덕을 쌓으면 언젠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받고 태어나게 된다고 애초에는 생각했었습니다. 초기불교는 말하자면,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켰듯, 인간이 그렇게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코딩방법에 대한 매뉴얼이라고 저는 비유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엘리트 아니면 그럼 일반 대중은 들러리냐?"면서 일반 대중을 위한 대승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한 온갖 희석, 윤색, 창작들이 생겨나고, 그래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겐 어려우니 "대중은 보시만 하면 그 보시받은 사람이 깨달아 해탈할 때 보시했던 사람도 그 등에 업혀 free ride로 함께 해탈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구세주를 통한 구원의 종교'로 변질되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고서 "우리는 대중도 함께 데려가는 자비로운 大乘이고, 초기불교는 째째하게 혼자만 해탈하겠다는 小乘"이라고 폄하하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은, 나조차 너를 도와줄 수 없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네 자신의 수행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르침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부처님 본인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히, 대승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인도의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기에, 그들이 이미 젖어 있었던 proto 힌두교 사상이 자연스레 대승에 배어듭니다. 그리고 동북아로 와서는 도교, 유교, 토착신앙, 무속신앙 등이 모두 혼합되구요. 현재 한국의 99.9%의 사찰들에서는 제사상에 가격표를 붙여 가며 장사를 하고 있으니, 초기경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은 상좌불교를 '소승'이라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와 의식/의례에 대한 집착을 나무라는 부처님의 모습이 초기경전에는 나오거든요.) 다행히 최근엔 한국에서도 초기불교를 지향하는 스님들이 한 두 분씩 늘어나고 있지만요..
Sejin Pak



希修

여러 주장들 중의 하나.. 불교는 애초에 '기복이나 대중 위로/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기보다 각 개개인을 위한 수양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HGc3JgvOg&list=PLpnKGM1FbJm6dnBBinOfd07k__h6fN2fb&index=2&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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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정운복의 아침시평 15]
정운복 칼럼니스트 jwb11@hanmail.net
등록 2017.09.05 11:04:14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이 있으니 그것을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탐냄(貪, 탐), 성냄(嗔, 진) 어리석음(痴, 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불가에서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탐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고

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 불쾌의 감정이며

치는 지적인 번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냄이란 무언가를 가지거나 차지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즐겁거나 매혹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하게 되지요.

주변의 끌리는 현상을 마주하면 자신도 모르게 탐냄에 물들게 됩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아서도 안 되는 것이라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은 탐냄과 성냄과 그리고 어리석음(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성냄은 일을 그르치는 단초입니다.

성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성내어도 성냄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보복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귀신은 부적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만들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노력과 배움, 이것 없이는 인생을 밝힐 수 없다.“



“탐진치”는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근거하는 개념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이 외형에 있지 아니하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마음을 잘 갈고 닦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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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 - 경향신문

[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 - 경향신문



[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노응근 | 논설위원

입력 : 2012.05.27

오늘 석가모니 탄신일을 맞아 부처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번쯤 새겨볼 만하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석가탄신일 봉축 법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와 갈등은 탐진치(貪瞋痴)가 원인”이라면서 “탐진치를 떨쳐버리고 개개인이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탐진치에서 ‘탐’이란 탐욕, ‘진’이란 성냄, ‘치’란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부처는 탐진치가 삶과 죽음을 포함해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오죽했으면 불가에서는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고 부를까.

부처는 우리가 탐진치에서 벗어난 상태를 얘기했다. 열반이요, 해탈이다. 부처는 인간의 탐냄과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열반이라고 했다. 진제 스님의 법어에서 유추하면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기심이 녹아 없어지면서 참나가 드러난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감각적 차원을 뛰어넘어 더없는 행복과 희열이 찾아온 상태, 너와 나가 구별없이 하나인 전체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열반이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출가자도 아닌 보통 사람이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실천한 수행 방법을 따르면 된다.

부처가 한 말을 그대로 기록한 불교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 방편으로 계율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계율 중 몸과 입, 마음을 단속하라는 십선계(十善戒)가 있다. 탐진치를 버리는 것 외에 살생과 도둑질, 간음, 거짓말, 이간질, 험담,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을 더한 것이다. 일상사에 매여 정신없이 살기 바쁜 우리로서는 감히 십선계를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자신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선 시작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쉬운 계율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도 어렵게 느껴진다면 가까운 절이나 선원을 찾아 도움을 받으면 된다. 경기 양평에 있는 순일선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마음에 쌓인 탐진치의 찌꺼기를 걷어낼 수 있게 도와준다. ‘탐진치는 자신은 물론 남까지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부처님오신날이 됐으면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5272055435#csidx4e61b5a450dcf3c9cd39f6577939463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HOME  2019 연재모음  강병균의 불교와 수학



42. 탐진치

 강병균 교수

승인 2019.11.12



육체의 고통은 탐진치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수학의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

불교도 독보적 분류체계 특징



육체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

생명체는 업을 타고나는 존재



수학의 장점이자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이다. 불교는 분류의 학문이라 부를 정도로 독보적인 분류 체계를 자랑한다. 분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해당한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으로 칭송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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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탐진치(貪瞋痴)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이를 극복하면 고통을 벗어난 걸로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에는 육체적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신적 고통만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고통은 탐진치를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부처님도 요통·두통·이질 등을 앓고 치료받으신 기록이 있다. 법륜성왕(法輪聖王)의 붕어(崩御)의 직접적인 원인은 상한 음식(돼지고기 또는 버섯)으로 인한 설사(혈변)였다.



탐(貪)은 행(行 의지)에 해당한다. 욕망 추구에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瞋)은 수(受 감정)에 해당한다. 감정에는 반드시 호·오·중(好惡中)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치(痴)에는 ‘상과 식’(想·識 생각과 기억)이 작용한다. 



지식과 생각이 부족하면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무아를 이해하고 깨달으려면, 지식과 생각(사유)이 필요하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성능과 데이터에 해당한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데이터가 없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데이터가 불량하면 결과도 불량하고, 데이터가 틀리면 결과도 틀리게 된다. 종이가 아무리 좋아도 생선을 싸면 생선 비린내를 풍길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간을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으로 보는데, 행(行)이 탐에, 수(受)가 진에, 상(想)과 식(識)이 치에 해당한다. 오온에서 비롯된 병의 원인을 탐진치로 진단한 것이고, 그걸 고치는 치료법으로 계정혜 삼학과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 중 정어·정업·정명은 계에, 정정진·정념·정정은 정에, 정견·정사유는 혜에 대응된다.



여기에는 색(色)에 대한 질병, 즉 육체적 질병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불경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기도나 제사를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타종교가 믿음의 대가로 질병의 치유를 약속하는 것에 비해 놀라운 자세이다. 타종교의 교주들과 달리 부처는 타인의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지 않았다. 자신도 몸이 아프면 정직하게 치료를 받았다. 이에 비해 타종교 교주들은 병을 숨기고 치료 받은 사실도 숨겼다. 현대에도 사이비교주들은 추종자들에게 치병을 약속하면서도 자신은 병에 걸려 병원을 드나들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다 큰 병원에 입원해 온갖 연명장치를 달고 연명하다가 의식을 잃고 한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불교는 색신(色身 육체)을 업(業)으로 본다. (진화론적인 업, 즉 진화과정에서 쌓인 업으로 볼 수도 있다.) 업이 해소되지 않는 한 영원히 다시 태어나는 걸로 본다. 정신적인 업이 해소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색신으로 인한 병에 더이상 걸리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는 걸로 본다. 이걸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진(瞋 분노 증오)은 자신이 일으키는 진뿐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진도 있다. 그 진이 내게 돌아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탐과 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가 연기법이라면, 탐진치에는 내가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연기법(interdependent origination)에 의하면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시공과 환경에 따라 생멸변화한다. 따라서 나의 탐진치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하며, 타인의 탐진치 역시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한다. 생명체가 시대와 장소와 환경이 주는 영향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면 거의 백 프로 기독교인이 되고, 회교 국가에 태어나면 회교도가 되고, 페르시아에 태어나면 배화교도가 되고, 태국 스리랑카 등 불교국가에 태어나면 불교도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도 시공간과 환경의 업이다.) 이는 시공업(時空業) 또는 움벨트(umbelt) 업이라 부를 만하다.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업일지 모른다. 실존주의 철학의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性存在)’란 이런 업을 타고나는 존재를 이른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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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밀린다팡하』(해제)



삼독[三毒]



삼독이란 탐욕(貪慾, lobha)과 진에(瞋恚, dosa)와 우치(愚癡, moha)를 가리킨다.

​탐욕은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을 말하고,

​진에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이며, 마지막으로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우치는 모든 번뇌의 원천인 무명(avidya), 혹은 근본무명과는 구별된다.

​삼독과 근본무명은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되므로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탐진치로 통칭된다.



삼독은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전생의 괴로움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적이지만, 이러한 번뇌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은 결국 자아에 대한 도착된 견해[我見 혹은 我相]와 그 사견에 대한 집착이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는 아상을 중심으로 생성, 발전하기 때문이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모든 번뇌의 서식처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수행의 근본이며,

​불교가 지혜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문>

"모든 유위법의 평정(平靜)이며, 모든 번뇌를 버리는 것이며, 갈애의 지멸(止滅)이 열반이다."(SN Ⅰ, 136)



"오, 비구들이여, 무위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의 소멸이며, 진에(瞋恚)의 소멸이며, 우치(愚癡)의 지멸이다. ···"(SN Ⅳ, 359)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인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존재하고자 하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워졌을 때, '자유로워졌다'라는 앎이 있고, '윤회는 끝났다. 청정한 범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해 마쳤고, 이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라고 그는 안다."(MN Ⅰ, 279)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밀린다팡하』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 삼독

말 그대로 세 가지 독을 말하는데, 삼독은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이다.

삼독은 삼불선근(三不善根)·삼구(三垢)·삼화(三火)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삼독은 세 가지 즉 - 탐욕·진에(瞋 : 분노·노여움)·우치(愚癡) - 로서 흔히 '탐·진·치'라 한다.

​탐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

​진은 탐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 혐오· 불쾌 등의 감정을 말한다.

탐과 진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번뇌라면 치는 지적인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치는 사제(四諦)나 연기(緣起) 등 불교에 대한 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명(無明)과 관련이 있다.

​세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참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는데, 이 삼독은 인간의 청정함을 해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삼독은 인간의 숱한 번뇌를 압축한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이 삼독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보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탐, 진, 치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탐욕심을 버려서 청정심을 기르고, 성낸 마음을 없애 밝은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한 마음, 평화롭고 자비한 마음, 지혜롭고 밝은 마음이 우리의 본래의 마음임을 알고 삼독을 극복하여야 한다.



2) 삼학



삼학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3가지 수행 방법을 말한다. 삼학을 삼승학(三勝學)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이를 줄여서 계·정·혜라고도 한다. 계·정·혜는 수행의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기도 한데, 계는 의지, 정은 감정, 혜는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계, 정, 혜가 융합하여 이상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루어서 완전한 인격이 형성된다.

계는 악을 행하지 않고 참선을 하는 계율(戒律)을 말하고, 정은 마음을 차분히 하여 정신을 맑게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혜는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얻어가는 지혜를 가리킨다.

삼학은 불교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다. 점진적으로 얕은 분야에서 시작을 해서 깊은 분야로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과 지식 또는 말로 행해지는 나쁜 행위를 방지하고 덕을 행하는 계학과, 선정을 수행하여 마음의 흔들림 없는 고요하고 평안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정학, 마음속 고통 없이 평온함에서 진리를 얻는 혜학이 그것이다. 계·정·혜로 불리는 삼학은 서로 보완적으로 불교의 수행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진리를 얻는 과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삼학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청서출판)



출처 시공 불교사전 | 삼독









번뇌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다고 보아 이를 3가지 독(三毒)이라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인식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문을 통해 항상 흐르는 번뇌에 의해 마음은 산란되고 갈등을 느낀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 경전에서는 이 번뇌의 다른 표현으로 미혹함·잠듦·물듦·흐름·얽매임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근본번뇌와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게으름·불신·경망스러움·교만 등 20가지 정도의 수번뇌가 있으며, 결국 불교의 이상은 이러한 번뇌를 극복함으로써 평온한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번뇌 종류가 수없이 많음을 팔만사천번뇌라 하며 6가지 감각을 중심으로 삼세에 걸친 3가지 선택지로서 계산한 108번뇌는 보다 철학적으로 정리된 번뇌로서 알려져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라 하여 번뇌의 성품이 비었음을 깨우치는 것이 번뇌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의 첩경임을 설명하며, 수많은 번뇌 가운데서 깨우치는 대승적 해결로서 초기 불교에서의 번뇌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와 이의 세세한 대치보다는 마음의 걸림 없음을 통해 보살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뇌 [煩惱] (두산백과)





삼독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개설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를 의미한다.

줄여서 탐·진·치라고도 하며,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



내용  탐욕은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자기의 뜻에 맞는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5욕(五慾)이라고 하여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니라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 탐욕이라고 한다.

한편, 여자가 가지는 욕망으로는 색욕·형모욕(形貌慾: 얼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위의욕(威儀慾: 옷치장에 관한 욕망)·자태욕(姿態慾: 아름다운 몸매에 관한 욕망)·언어욕(言語慾: 아름다운 음성에 대한 욕망)·세활욕(細滑慾: 피부의 윤기에 대한 욕망) 등 6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진에는 분노하는 것으로서, 산목숨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에 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진에는 수행을 하는 데 가장 큰 허물이 되는 것이며,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우치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으로서,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치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삼독은 모두 ‘나[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나’ 스스로에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그 우치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독은 중생을 생사의 윤회 속으로 빠뜨리는 근원이 되고,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삼독을 제거하면 곧 고(苦)를 떠나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삼독을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는

바른 견해(正見)·바른 생각(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동(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인식(正念)·바른 정신(正定)의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의 올바른 수행법)와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을 들고 있다.

즉, 계로써 탐욕을 다스리고, 정으로써 진에를 다스리며, 혜로써 어리석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