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6

슬픈 진실…"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슬픈 진실…"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슬픈 진실…"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도련님의 시대 ①] 흉포한 근대와 불안한 개인
2011년 후쿠시마 사고 후에 이웃 나라 일본을 보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손꼽히는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죠.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꼼수에 장단을 맞추며 군사 대국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합니다. 거품 경제의 후과로 발생한 장기 불황은 20년 넘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죠. 이런 상황을 앞장서 극복해야 할 일본의 정치는 그 자체로 제거해야 할 적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진짜 힘이었던 풀뿌리 시민 사회마저 급속히 활력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100년 전과 겹칩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때 발 빠르게 서구를 좇으며 일본 자체를 ‘개조’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유산, 대중의 권리, 개인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되었죠. 하지만 이런 개조는 정작 엉뚱한 결과로 귀결되었습니다. 러일 전쟁(1904년), 한일 병탄(1910년)을 거치며 일본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파괴하는 ‘괴물’이 되었죠.
 
다니구치 지로와 세키카와 나쓰오의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이 시대를 다룬 독특한 만화입니다. 일본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의 창작 과정을 모티프로 한 이 만화는 '괴물'이 아닌 다른 일본을 꿈꿨던 그 시대 일본 '도련님'들의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뇌는 지금 일본의 현실과 맞닿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현재를 성찰하도록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도련님'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프레시안>은 이 <도련님의 시대>를 같이 읽자고 제안하며, 먼저 읽은 몇 분의 독후감을 소개합니다. 문학평론가 박슬기 한림대학교 교수가 첫 번째 주자입니다.  
 
▲ <도련님의 시대>(전5권,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흉포한 근대와 불안한 개인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도련님>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춘원 이광수는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떠났다. 그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가 1905년 8월경이었으니, 11월의 을사조약 체결을 일본에서 지켜본 셈이다.
 
유학생들은 모여 을사조약에 대해 논의했으나 "결국 '나가 죽자'는 의논보다 공부를 계속하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자는 의견이 승하여서 아무 결론도 없이 흩어졌다."('나의 고백', <이광수 전집> 7권(삼중당 펴냄, 1972년))라고 춘원은 적고 있다. 유학생들의 비분강개가 모자랐던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10대 중후반이었던 유학생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을 착착 진행했고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융희' 연호는 '메이지' 연호로 대체된다.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던 유학생들은 돌아와 근대적 지식을 전파하고 실력을 키우자는 운동을 펼쳤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으나 일본과 같은 근대화를 이루면 일본과 대등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열띤 계몽의 시대는 3.1 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끝난다. 일부는 만주로, 상해로 갔고 일부는 남아 문학과 예술의 나라로 도피했다. 유학생들의 비분강개와 체념의 현장 위로 소세키의 독백이 불길하게 드리운다. 
 
"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시대라는 것에 질 수밖에." (<도련님의 시대>, 1권 224쪽)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도련님의 시대>의 배경은 1905년 러일 전쟁 직후에서 1910년 한일 병합 직후까지다. 일본은 총력전을 펼쳐 전쟁에 승리했으나 얻은 것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부채와 끝없는 인플레이션이 남았다. 일본을 이끌었던 국가와 개인의 일체감은 무너졌으나, 일본은 동요하는 개인들을 제압하면서 군국주의적 확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불안한 시대"의 풍경에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끼여 있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이토 조선 통감 사임"이나 "데라우치 육상의 조선 통감 겸임" 같은 기사들은 스쳐 지나가는 단편들에 불과하지만, 이야말로 이 시대의 일본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그것은 러일 전쟁 이후에 노골화된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적 확대가 명료한 현실적 사실로 드러나는 장면이며 일본의 개인들이 휩싸여 있었던 막연한 불안감과 억눌림의 원인이 이 현실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련님'은 메이지 30년대 말의 일본 청년들이기도 하지만 조선 청년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러한 흉포한 얼굴을 한 근대, 칼을 든 근대에 마주친 나약한 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련님의 시대> 1부는 전체 5부작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도쿄 경시청 이쥬인 가게아키와 메이지 대학 학생 오타 주자부로가 유도 대회 결승에서 맞붙는 일화가 중심이 된다. 메이지 42년(1909년)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장례식으로 시작한 2부는 모리 오가이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 온 메이지 21년(1888년)으로 돌아간다. 결혼을 약속하고 자신을 따라 홀로 일본으로 온 독일 여성 엘리스를 결국 돌려보내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부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기의 완성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히라쓰카 하루코에 감명을 받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자신의 완성과 예술의 문제를 고뇌한다. 4부에서는 고토쿠 슈스이를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폭탄을 만들어 천황을 암살하려던 계획을 어설프게 세웠을 뿐인데, 모든 불온한 자들을 제거하려던 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관련자들의 절반을 사형에 처하는 대역 사건을 일으킨다. 5부에서는 대역 사건 이후 소세키가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주요 인물들을 만나면서 시대와 개인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다룬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것은 국가의 발전을 개인의 발전으로 믿었던 시대가 끝나고, 전 방위적으로 압박해 오는 군국주의에 절망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청년들의 자기 고민이다. 모리 오가이는 개인의 사랑과 국가/가문의 결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국가와 가문을 선택했다. 그것이 좀 더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리 린타로'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리 오가이'로서 <무희>를 쓰며 군의총감이자 메이지 군인으로서의 자신과 개인을 분리시켜 살았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끊임없는 가족의 독촉에 시달리고 생활력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그 압박감 속에서 단카(短歌)를 읊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단순한 생활고가 아니라 러일 전쟁 이후의 일본 사회 전체가 당면했던 시대폐색이라는 분위기 그 자체였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자신, 유흥에 돈과 인생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깊은 비애가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시대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대역 사건의 결과를 보고 이렇게 적었다.
 
 
"이와 같은 시대폐색의 현상에 대해 우리 중 가장 급진적인 무리가 어떤 방면으로 그 '자기'를 주장하는지. 한 몸을 던져 이 폐색을 부수려고 했던 테러리스트들…. 내게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도련님의 시대>, 5권 273쪽)
 
국가에 맞설 수 있는 길은 테러밖에 없다는 것, 그것만이 도련님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길이었다. 사정은 조선 청년들에게도 같았다. 안중근 역시 자기 한 몸을 던져 이 시대의 폐색을 부수려 했다. 다만 한 개인으로서 그는 테러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까닭이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쫓아가고 싶었던 서양/근대는 쫓아가려는 자들의 존재의 토대조차 흔들어 놓았다. 이쥬인 가게아키의 입을 빌어 끊임없이 드러나듯, 일본의 군국주의 확대는 또한 구미 열강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일단 확보하는 것, 곧 서양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한편으로 자유로운 사적 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배워온 곳이기도 했다. 
 
2부의 첫머리와 3부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장례식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러시아에서 돌아오던 중 기선에서, 인도양 한 가운데서 죽었다. 인도양의 저쪽 편에 근대로서의 서양이 있었고, 이쪽 편에 파시즘으로 치달아가는 일본이, 그에 지쳐가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서양은 추구하면 할수록 자기의 열등감만을 환기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일은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를 재편하는 상황 속에서는, 그리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가는 한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전근대적인 세계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1910년대의 계몽의 열기가 지나가고, 만세의 실패로 인해 국권 회복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 조선 청년들의 내면을 지배한 것도 이런 무기력과 우울함이었다. 일본의 신문물을 배워서 실력을 키우는 일을 계속해 봐야 결코 일본과 동등해질 수는 없다. 문제는 실력의 부족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세전>의 주인공 "스물두 셋쯤 된 책상도련님인" 이인화는 깊은 환멸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마주친 조선의 미개한 풍습이나 얼뜬 조선인을 이용하는 일본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다. 파시즘의 일상화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개인들이 빠져 있는 깊은 무기력함 때문이다. 
 
1910년대에 일본에서 유학했던 세대, <창조>와 <백조> 세대는 망설임 없이 예술의 세계로 달려갔다. 현실에 대한 환멸과 그에 따른 비애 속에서 꿈은 오직 그 안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현실의 압박에 의해 파괴된다. 소월은 1920년대 말 고향 정주로 돌아가 신문 배급소를 운영했다. 거의 걷히지 않는 신문 대금을 받으러 다니며 그 용지에 마치 낙서처럼 시를 썼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이상적인 것은 늘 어떤 낙차 속에서만, 지금 여기에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만 감각된다. 아름다운 엘리스는 개인의 사랑과 자유가 있는 서양 근대의 상징이지만 그녀가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만이 강화된다. 조선의 유학생들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서 내려 경부 철도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오면서 발견한 것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낙차였다. 이상적인 것을 실현하려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을 실현하고 그러한 국가를 만들려던 개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근대로부터 배웠으나 근대 자체가 제국주의였기 때문이다. 
 
5부에서 소세키는 대역 사건 판결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의 의미로 문부성의 박사 학위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관의 신세를 지지 않겠네. 대학의 신세를 지지 않겠네. 그냥 나쓰메 긴노스케로 이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우연히 태어난 이 세상에 머무를 심산이야." (<도련님의 시대>, 5권 289쪽)
 
이것은 얼핏 무책임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냥 나쓰메 긴노스케"라는 존재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흉포한 근대에 마주친 개인들이 서 있는 자신의 토대이자,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유지해야만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말의 근대는 얼굴과 형태를 바꿔 우리에게도 도래해 있다. 우리는 그들의 고뇌 속에 우리의 고뇌를 비추어 본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도련님들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해법도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의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 시대의 개인으로서 자기의 시대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박슬기 교수는 한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도련님의 시대> 주요 등장인물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나쓰메 소세키 : 일본 문학사에서 최고의 국민 작가로 칭송되는 소설가.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산시로>, <마음>, <그 후> 등을 남겼다. 도쿄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 후 국비 유학생으로 런던에서 2년간 유학했다. 귀국 후 제일고등학교, 도쿄 대학에서 강의했다. 서른여덟 살에 쓴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호응을 얻으면서 전업 소설가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교직을 떠나 아사히신문사에 소설 기자로 입사해 잇달아 작품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지위를 굳혔다. 영문학자이면서 서구를 싫어했고 문학적 야심보다는 유학 시절 얻은 신경증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을 창작했다.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후타바테이 시메이 : 도쿄 외국어 대학 러시아학과를 중퇴했다. 언문일치체를 처음으로 시도한 소설 <뜬구름>을 썼으며 러시아 문학에 경도되어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번역하는 등 근대 일본 문학을 선도했다. 아사히신문사 특파원으로 러시아에 갔다가 폐병이 심해져서 귀국 도중 병사했다. <그 모습> <평범(平凡)>의 소설을 썼고 <짝사랑> <광인일기> 등을 번역했다. 후타바테이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도련님의 시대> 2권에서 그의 청년 시절, 모리 오가이와 독일 여인 엘리스 바이게르트와의 인연 등이 다뤄진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모리 오가이 : 군의관으로 육군성의 명을 받아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귀국해 육군대학 교관을 거쳐 군의총감, 의무국장을 지냈다. 유학 시절 독일 여성과의 연애담을 바탕으로 <무희>를 썼으며 <기러기>, <아베 일족>, <산쇼다유>, 등의 소설을 남겼다. <도련님의 시대> 2권의 주인공으로, 국가와 가문에 대한 의무와 독일 유학 시절 만난 엘리스 바이게르트와의 사랑을 두고 갈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이시카와 다쿠보쿠 : 생활 감정을 살린 서정적인 작품을 남겨 일본의 국민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중학교를 중퇴했지만 독서로 다양한 문학을 섭렵했다. 1905년에 첫 시집 <동경(あこがれ)>을 발표했고 도쿄에 정착한 후에는 아사히신문 교정사원 겸 편집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낭비벽이 심해 생활이 늘 곤궁했는데 로마자로 쓴 일기에 당시 생활상과 복잡한 감개가 잘 기록되어 있다. 일본 고유시 형태인 단카의 거장으로 1910년 처녀 단카집 <한 줌의 모래>를 냈다. 소설도 썼지만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다. 대역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면서 급속히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었다. 가난으로 고생하다가 스물여섯에 병으로 요절했는데 사후에 단카집 <슬픈 장난감>(1912년)이 출판되었다. <도련님의 시대> 3권에서 그의 낭비벽과 불안정하고 박약한 자아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고토쿠 슈스이 :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 천황 암살 모의 사건인 '대역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간노 스가코를 포함한 다른 11명의 사회주의자와 함께 처형당했다. 10대부터 자유 민권 사상에 관심을 갖고 나카에 조민의 제자가 되었고 만조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중 러일전쟁 비전론을 주장하며 퇴사하여 동료들과 주간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아시아에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크로포트킨의 사성적 영향과 반년 간의 미국 생활을 통해 무정부주의로 변모했으며 직접 행동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안중근을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도련님의 시대> 4권에는 안중근의 휘호가 담긴 부채를 유품으로 남기는 모습이 등장한다. 
 
ⓒNatsuo Sekikawa·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간노 스가코 : 타고난 미인은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남자들을 굴복시키는 팜므파탈로 그려진다. 대역 사건으로 처형당한 12명의 사회주의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계모의 책략으로 강간당하는 등의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신문 기자가 되어 모루신보에서 만난 연하의 사회주의자 아라하타 간손과 결혼했다. 적기 사건에 연루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풀려난 후에는 고토쿠 슈스이와 <자유사상>을 창간하여 적기 사건을 규탄하고자 했다. 간손이 수감된 동안 부인이 있는 고토쿠 슈스이와 연인 관계가 되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6869?no=126869&fbclid=IwAR0Nl1ly-0QohuCcwuWnnXmujtbLNpFUqnVEmNFVikWyjIlGryTFmaU63Ts#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20/09/14

[뉴스파워] 윤회는 가짜다?!

[뉴스파워] 윤회는 가짜다?!



윤회는 가짜다?!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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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기사입력 2018-06-20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 석가가 힌두교적 윤회사상을 거부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i] 이런 면에서 석가는 힌두교의 종교개혁자임이 분명하다.[ii]왜냐하면 힌두교의 자연 신들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힌두교의 영혼사상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온갖 힌두교의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들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윤회사상이다. 석가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영혼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에게 있어 윤회는 단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휴스톤 스미드는 석가의 이러한 무아론적 윤회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영혼의 단독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윤회설을 믿기는 하였지만 당시 브라만교도들이 믿는대로의 윤회설을 믿지 않았다. 그는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가 보는바 윤회설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등불을 켜서 그 불을 또 다른 등불에 옮기고 또 옮긴다고 하자. 그때 맨 마지막에 옮겨진 불꽃은 틀림없이 처음의 그 불꽃과는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그와같이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체의 영혼은 그것으로 그치고 다만 한 등불이 다른 등잔에게 불씨의 역할을 하여 주는 것과 같이 다른 또 하나의 존재의 원인이 되어주며 원인-결과의 유대를 가질 따름이다...... 결국 윤회과정에 있어서 부처는 물체설을 부인한다. 물체설을 부인하는 까닭은 삼라만상의 생성 윤회과정에 있어서 물체는 유한되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1]







전통 힌두교의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윤회설은 업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운명의 주체가 바로 신이다.  하지만 석가의 상징적인 윤회설은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윤회설이다. 그러기에 운명의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석가는 인간 스스로 운명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가르친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그의 저서 <인간붓다, 그위대한삶과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고 결정된다면 누가 악한 일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해도 그것으로 과보를 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어떠한 의지도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즉 모든 행위가 신에 의한 것이라면 악행을 해도 그것은 신이 시켜서 한 일이지 인간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숙작인론이란 인간이 받는 현재의 모든 고락은 과거 전생 업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우파니샤드나 자이나교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의 모든 것이 전생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면 모든 행위는 자기 의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을 필요도 없으며, 또한 인간이 스스로 수행한다든가 노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의 행동도 전생에 규정된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써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무인무연론은 모든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며, 인과란 인간이 지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숙명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주체 의지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어떠한 인과 원칙도 없이 단지 우연한 사건의 나열이라면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사고나 행위가 단지 우연이라면 인간에게는 올바른 목적을 갖고 수행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 가지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것이 신의 의지이든, 전생 업의 결과이든, 우연한 사건이든 간에 그러한 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한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나 전생의 업 또는 물질적인 여러 요소의 결합에 의한 사건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 사상의 참 뜻이 있다 하겠습니다.[2]







휴스톤 스미드도 석가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가모니는 윤회설로서 카르마의 교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모든 사물이나 생명체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원인과 결과의 생성 과정가운데서도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는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수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







이제 석가가 힌두교의 유아론적 윤회설을 부정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석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석가가 그 모든 숙명적인 업보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는 무슨 말일까? 이는 석가가 말하는 해탈은 바로 반윤회(실제로 윤회는 없다는 주장)를 통한 탈윤회(윤회의 올무에서 벗어남)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윤회가 허구내지는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윤회를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 모든 고통과 짐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윤회라는 말은 거칠다. 한마디로 ‘윤회는 없다’는 것으로 ‘반(反)’은 ‘무(無)’’의 뜻을 갖는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윤회와 상치시키기 위해 이 말을 쓰는 것인데, ‘윤회설과 윤회를 부정하는 입장’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명제로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는 윤회는 무아론과 모순된다.’….. 윤회설을 긍정하면서 신분제도에 신음하는 인도인을 구원할 방도는 없다. 윤회설은 내운명에 대한 지나친 수긍으로 앞으로 나가기 어렵다. 숙명론은 수행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불교의 교리와 자칫하면 부딪힌다. 내 죄를 씻는 것은 내 몫이다. 반윤회는 윤회가 우리가 벗어버릴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탈(脫)’윤회야말로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석존은 탈윤회를 통해 우리가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4]







어쩌면 석가가 전통 힌두교가 주장하는 윤회설의 미신적인 요소들, 특별히 사람이 짐승으로 환생한다는 주장들을 전적으로 부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석가가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힌두교 윤회설이 어느 정도로 미신적일까? <우빠니샤드>에 나타나는 윤회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윤회세계에 들어가는 존재들은 마을에 사는 속인들로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올리고 보시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은 뒤 화장을 하면, 그들은 화장불의 연기속으로 들어간다. 그 연기에서 밤으로, 밤에서 어두운 15일(보름 다음 날부터 그믐 날까지)로, 어두운 15일에서 태양이 남쪽을 향해 내려가는 여섯 달로 간다. 그들은 여섯 달로부터 조상들의 세계로, 조상들의 세계에서 소마의 왕인 달로 간다. 달에 도착하면 그들은 신들의 음식이 된다. 거기서 신들은 이 음식을 먹는다. 죽은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선행이 고갈될 때까지 거기에 머문다. 이 단계가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들은 달에서 허공 속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허공에서 공기 속으로, 공기에서 비 속으로, 비에서 땅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면 그들은 땅 위에 쌀, 보리, 풀, 나무, 깨, 콩이 되어 나타난다. 남자가 쌀과 보리 등을 음식으로 먹고 정액을 여자에게 사정해 줌으로서 다시 삶으로 되돌아온다. 좋은 행동을 한 자들은 좋은 생을 얻게 된다. 그들은 브라흐만, 끄샤뜨리아, 바이샤로 태어난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한 자들은 나쁜 생을 받게 되는데, 개, 돼지, 천민으로 태어난다.[5]







인간이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론은 윤회론을 옹호하는 사람들 조차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베이치 교수는 비록 윤회론을 확신하는 철학자이지만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윤회론의 내용은 거부한다. 그는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윤회론을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베이치 교수는 주장한다,







윤회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들에서는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가능성이 거의 배제됩니다. 윤회는 최소한 3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전해진, 아주 오래된 관념입니다. 그 동안 이 관념은 종종 원시적, 민중적 믿음과 뒤엉키곤 했지요. 예컨대 인간은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난다는 식이지요…..이것은 아이들에게 도덕적 행동을 가르치고 성인들을 교화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윤회론과 어긋나는 점이 많습니다.[6]   







사실 힌두교도들은 현세의 부귀를 전생에 의한 보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세의 고난을 내세의 보상을 받기 위한 기회로 여긴다. 그러기에 각자의 신분에 만족하며 법[iii]에 따라 선한 행위를 쌓아야 한다. 이러한 힌두교의 윤회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분제도를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지키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iv]하지만 석가는 사회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윤회설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즉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는 숙명적 윤회설을 거부한 것이다. 그 대신에 사람들로 하여금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극제로서만 윤회설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힌두교의 미신적인 윤회설을 부정하였다. 이를 위해 석가는 먼저 힌두교가 있다고 주장하는 영혼이라는 무형적인 물체를 부정한다. 그리고 힌두교의 미신적인 윤회설을 대체하기 위한 좀 더 합리적인 윤회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사후세계나 업보에 얽매여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대중들의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선한 삶을 독려하고 악한 삶을 멀리하라는 윤리적인 자극이나 경고로서만 윤회설을 활용하였던 것이다.[7]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길 원했다. 또한 그 개척된 운명의 결과까지도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력적인 구원을 가르친 것이다.[v] 이는 철저히 신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라는 것이다. 즉 인본주의적 구원을 가르친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숲속에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듯,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39)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 적의가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42)







그렇다면 왜 석가는 힌두교의 숙명적 윤회설을 하나의 도덕적 윤회설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석가가 힌두교의 내세관, 즉 힌두교가 주장하는 사후세계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내세관을 가진 것이다.  니르바나, 즉 극락의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서 믿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극락에 관한 석가의 설명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 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 부른다.[8]







석가가 극락의 존재를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와 사후세계는 서로 원인과 결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혼의 실체를 믿지 않는 석가의 무아론과도 같은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무신론적 내세관은 힌두교와 기독교의 유신론적인 내세관과는 정반대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윤회(힌두교)가 종교라면 연기(불교)는 철학이다. 윤회(힌두교)가 신화라면 연기(불교)는 과학이다. 윤회에는 절대자가 있지만 연기에는 절대자가 없다. 윤회는 신의 이름으로, 연기는 도덕의 이름으로 움직인다. 윤회는 나도 모르는 것에 책임이 지워지고, 연기는 내가 알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 윤회는 힌두교의 것이고, 연기는 불교의 것이다. 힌두교는 윤회하는 내가 있어야 하지만, 불교는 연기하기 때문에 나란 없다. 윤회는 고정된 나를 전제하고, 연기는 나의 실체를 부정한다. 싯다르타는 연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으로 힌두교의 윤회를 대체한다.[9]







결론적으로 석가의 내세관은 윤회를 부정하는 반윤회 사상이다. 즉 석가는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내세관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베이치는 주장한다, “유물론은 아예 영적 세계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윤회론이 들어 설 여지가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석가의 인생관은 무신론적 유물론에 가까운 것이고, 이는 영적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사상에는 힌두교적 윤회론이나 기독교적 천국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만일 불자나 수행자가 윤회를 부정한다면 해탈을 얻기 위한 이생에서의 그 모든 고행이나 수행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행이나 거룩한 삶의 목적이 윤회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회도 없는데 왜 헛수고를 하는가라는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윤회가 없는 세상이라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바로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사라진다. 그래서 자살 행위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사후세계나 천국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고 허무하다면 이러한 현실을 도피하면 된다. 즉 자살하면 된다. 아니면 반대로 세상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될 것인가. 쾌락이나 범죄도 모두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사후세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믿는다. 그러기에 한번 뿐인 우리의 삶을 아주 소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살아가야 한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4)





















[1]세계의 종교들, 86-87.



[2]법륜,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서울: 정토출판, 2010 개정판), 34.



[3] Ibid, 86.



[4]윤회와 반윤회, 60.



[5]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61-63쪽에서  A형 윤회에 대하여 요약 편집함.



[6]윤회의 본질, 101.



[7]윤회와 반윤회, 45.



[8]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79쪽에서 간접 인용.



[9]윤회와 반윤회, 54-55.





[i]토마스 하트먼과 마트 젤먼은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힌두교에서는 우리안에 영혼이라는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목샤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편 불교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포함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것을 깨우침으로써 니르바나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종교 산책, 53. 불교의 무아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자기자신을 부정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하지만 무아설은 또한 아트만, 즉 영혼이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는 아트만, 즉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힌두교의 유아설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아설에 대해 이태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아설은 아(我) 즉 아트만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후에 4법인중 제법무아로 정리되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된다. 아트만이 없다는 것은 우파니샤드에서 보듯 윤회의 주체 또는 인간의 심신을 총체적으로 통괄하는 내적 본질이나 주재자와 같은 존재로서의 아트만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트만에 의해 심신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신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서로 관계하여 우리의 삶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원리를 붓다는 연기라고 표현하고 일체의 존재는 연기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아트만과 같은 절대적인 실체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아트만이란 개념은 윤회의 주체로서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 무아설과 같이 아트만이 없다면 죽은 후에도 아트만은 없어야 한다. 붓다는 영혼으로서의 아트만과 같은 존재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인도철학산책, 91-93. 이런 면에서 영혼의 존재가 없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윤회설의 주체인 영혼의 실체를 부정하게 되어 결국에는 윤회설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석가모니가 무신론적 철학을 견지하면서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영혼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극히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석가모니는 영혼이 인간의 실체를 무엇으로 보았을까? 석가모니는 인간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로 보았고, 이러한 심신 복합체로서의 인간은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물질, 감정, 인지, 타고난 체질이나 성향, 의식 등이 하나로 뭉쳐서 정신적이면서도 육체적인 복합체를 이루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신은 어느 날 분해되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Y. Masih, A Comparative Study of Religion, 222.



그렇다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석가모니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중도의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유물론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은 인간의 죽음은 그 모든 육체와 정신의 소멸로 끝장이 난다고 믿지만, 전통 브라만교 신앙을 소유한 유신론자들은 사후에도 살아 남아서 생존하는 영혼이 있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두양극적인 입장을 거부하였는데, 유신론자들의 입장을 거부한 이유는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고, 유물론자들의 입장을 거부한 이유는 만일 사후의 심판이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해이나 무질서 상태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아노미 상황이 초래될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이었다. Ibid, 230.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윤회설을 견지할때 어떠한 논리로 전개했을까? 윤회는 하나의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복합체로서의 개체(Individuality)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생을 거듭할 때마다 그 개체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체가 전생의 그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석가모니의 대답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체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새롭게 태어난 그 개체가 전생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복합적 개체로서의 자아가 윤회의 끊임없는 속박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기에 상당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심신의 복합적 개체는 하나의 경험적 자아로서 이해되어지고, 그로인해 출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동일한 요소들을 그대로 지닐 수도 있고 동시에 어느 정도 변화되어진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패턴의 윤회의 체인이 지속되는 한, 각 순간마다 각 개체가 지닌 책임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촛불이 다른 촛불을 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의 촛대에 있는 촛불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촛대에 불을 전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Ibid. 여기에서 필자는 윤회설에 대한 석가모니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추론하게된다.



석가모니는 애초에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윤회설 자체도 부정하려고 하였는데, 당시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유신론과 윤회설을 정면으로 맞설 수가 없기에 신의 존재에 관하여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영혼의 존재만을 부정하는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윤회설은 겉으로만 인정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현실적인 타협을 할 수 밖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 즉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상황들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와 종교를 장악하고 있는 브라만교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유신론과 유아론을 믿으면서 카스트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윤회설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이나 비판은 너무나 커다란 반작용을 감내해야 하기에 석가모니로서는 중도적인 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유무를 가려달라고 물어볼 때는 침묵으로 답하였고, 단지 유아론만을 부정하면서 무아론을주장하므로 브라만교와 자신의 변별력을 확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윤회설은 당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와 이어져 있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에 석가모니로서도 함부로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비록 무아설로 윤회설의 근간은 무너뜨렸다고 하더라도 윤회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천민들이 일어나 카스트제도를 무너뜨리고 폭동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해이 현상이 벌어지게 되기에 석가모니로서는 윤회설의 겉모양은 유지해야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폭동이 일어나거나 석가모니가 위험한 사상을 유포한다고 하여 브라만들이나 정치나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제거해 버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ii]토마스 하트먼과 마트 젤먼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힌두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새로운 종교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석가모니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굴레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세계종교 산책, 54.



Peter Harvey는 석가모니가 종교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부처 석가모니의 시대에 대부분의 브라만들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하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고 살았다. 그 방법들로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베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그리고 희생제사를 드리거나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브라만의 일부는 가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지만, 다른 브라만들은 부유하고 거만하여 방자한 삶을 살았다. 이들 브라만들은 왕들이나 귀족들이 바치는 아주 크고, 값이 나가는 희생제물의 피흘리는 제사를 통해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민간 신앙차원에서 브라만교는 마법과 주술에 기초한 제의들을 포함하였고, 브라만교 이전에 성행하였던 정령숭배(애니미즘)조차도 의심할 것없이 병행하였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



11. 니니안 스마트는 그의 저서 <세계의 종교>에서 석가모니 당시의 브라만 문화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도문명 전체에서 가장 항구적으로 지속된 요소는 브라만 문화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자처하면서 굉장한 특권을 누렸다....... 브라만 가운데에는 의례를 집전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인도인들은 소나 그 밖의 값진 물건으로 희생제물을 장만하는 제주(祭主)에게는 번영과 성공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또한 브라만의 제의전통은 태초부터 영원한 권위, 즉 최고의 성스러운 소리를 듣고 세베다의 찬송집을 편찬한 현인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한다... ... 브라만은 신성한 찬송과 성스러운 언어를 전문으로 하고, 또한 왕과 왕자및 보통 사람들을 위한 길고 복잡한 의례를 집전할 수 있는 이들로, 인도종교를 창조한 주된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 부르는 것도 대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을 가리킬 정도이다.”니니안 스마트, 윤원철역, 세계의 종교 (서울: 도서출판예경, 2004), 75-76.



니니안 스마트에 의하면, 이러한 브라만교에 강력한 도전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바로 떠돌아다니며 금욕을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라는 거대한 사회계층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사문이라 불리는 떠돌이 수행자들은 이러한 카스트라는 신분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일상의 사회적 의무를 초월한 존재들로 자신들을 생각했다. 이들이 이미 집과 가족을 떠나 출가한 상태이었기에 그 모든 고리(세금과같은각종의무)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브라만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관여하였기에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사문이 많이 등장하여 존경을 받으면서 브라만들과 쌍벽을 이루는 권위를 부여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아리아인들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델리주변이 이런 종교의 발상지였고,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바라나시와 파트나 같은 신흥도시들이 성장했다. 강력한 왕국과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안정되면서 새로운 상인계급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새로운 종교운동, 특히 불교에 이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Ibid, 71, 75, 80-81.





김은수 교수도 불교는 인도의 계급제도와 브라만교의 다신교적 신앙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발생되었다고 주



장한다. 석가모니를 비롯한 사문들은 브라만교가 만사형통으로 여겨왔던 자연신들에 대한 제사의 한계를 깨달



아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제시하며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실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은수, 비교종교학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31-132. Martin Forward에 의하면, 불교는 하나의 급진적인 종교개혁이다. 불교는 힌두교의 신앙 속에서 자라나 힌두교 신앙과 반응하면서 결국에는 힌두교 신앙의 문제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신분제도에 반발하고,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힌두교의 명상적 수행에 반발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지나친 고행과 금욕에 반발하여 불교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석가모니가 힌두교의 업보개념과 윤회설을 받아들인 면에서 힌두교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힌두교의 근간인 초월적 신의 존재와 아트만, 즉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 면에서 볼 때에는 과격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종교개혁임에는 틀림이 없다. Martin Forward, Religion: A Beginner's Guide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2006 South Asian Edition), 65-66.



다신교적 유신론의 전통적인 브라만교가 인도사회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에 무신론적인 불교의 출현은 인도의 전통문화에 충격 그 자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불교의 무아설은 그동안 유아설을 주장해온 힌두교 철학에 커다란 충격과 함께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태승 교수는 불교가 태동시에 인도철학과 종교에 미친 그 영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비정통 철학가운데 불교는 특히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윤리,도덕적인면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다. 무아설로 대표되는 불교의 기본철학은 베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사상에 대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유물론과 달리 체계적인 교학을 가진 불교가 무아설을 주장하는 것은 전통 철학에 가히 충격이었다.



그리고 불교의 교세가 커짐에 따라 무아설은 체계적인 교학을 바탕으로 기존의 철학사상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교리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철학적 개념은 인도철학을 정통파와 비정통파 즉 유파와 무파로 구분지어 끊임없는 논쟁과 대립 구도를 낳게 하였다. 따라서 인도에서 불교의 역사는 기존의 전통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힌두 철학과의 끊임없는 논쟁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인도철학산책, 89-90.         



[iii]다르마(산스크리트어: Dharma)는 법(法)으로 번역된다. 이때 '법'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에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기도 하며 모든 생명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질을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말하는 다르마는 석가모니가 발견한 진리를 말한다.





peter Harvey에 의하면,  “불교는 그 오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하나로 통합되며, 자비심이 많아지게 되고 결국에는 헛된 망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수 많은 가르침들을 사용해 왔다고 한다. 헛된 망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집착하게 하고, 그 집착은 그 집착하는 사람과 또한 그 집착하는 사람이 교류하는 사람들조차도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집착, 그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져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하나로 통합되어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승화되다가 결국에서 그 모든 헛된 망상과 집착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가이드를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다르마는 부처나 부처들에 의해 발견된 영원한 진리들 내지는 전 우주적 법과 질서(원리)를 의미하는데, 불교는 본질적으로 이 다르마를 이해하고, 실천하여서 결국에 다르마를 실현하는 것이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 우주의 법과 질서로서의 다르마는 부처로서 석가모니가 깨닫거나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었던 진리인데, 다르마는 역사적으로 아주 유일하고도 독특한 현상으로 간주되어진다.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는 다르마의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라 재발견자이고, 석가모니 이전에도 다른 부처들이 이미 발견하였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마의 재발견,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석가모니의 역할에 역사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발견한 다르마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온전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완벽해서 아주 드문 다르마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즉 누구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가 발견한 구원의 진리는 보편적이고도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J. A. Dinoia, O. P., "Pluralist Theology of Religions: Pluralistic or Non-Pluralistic?" in Christian Uniqueness Reconsidered: The Myth of a Pluralistic Theology of Religions, edited by Gavin D'Costa (Maryknoll: Orbis, 1990), 119-20.     





[iv]힌두교에서는 이러한 윤회의 교의를 부정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정당한 과보를 받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벌어들이게 된다는 도덕적 법칙을 부정 또는 무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v]석가모니의 구원관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바로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신을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바로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종교간의대화, 145쪽에서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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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윤회는 불교적인가

 이재형 국장 승인 2019.02.25

.

이달 초 출간된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가 서점가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대형서점에서 불교분야의 상위권에 링크돼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윤회 문제를 초기경전에 근거해 세계의 구조, 업과 윤회의 관계, 죽음 직전의 모습과 재생연결, 윤회의 원리와 구조, 무아인데 윤회하는 이유 등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다음 세상에 좋은 곳에 태어났으면 하는 불자들에게도 그렇지만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본질이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무아론이기에 윤회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논쟁과 해석이 끊이질 않는다.



초기불교 수행법을 전하는 제따와나선원장 일묵 스님은 책 서두에서 “윤회를 믿지 않는 불자가 의외로 많다. 심지어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불교학자나 스님들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윤회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아는 것이고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이다”라며 윤회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묵 스님이 언급하듯 불교계에서 윤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흐름은 꽤 일찍부터 있어왔다. 그 배경에는 윤회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함께 불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분석이 이뤄진 영향이 적지 않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고 히라카와 아키라(1915~2002) 박사는 “석존의 불교는 윤회사상을 인정해야만 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물론 윤회사상과 모순되는 것은 없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것은, 생존이 윤회적이라면 그 윤회의 생존으로부터 해탈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윤회사상을 적극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었다”며 윤회가 불교의 핵심 사상이 아님을 시사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윤회론은 인도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해 본격화된 비(非)바라문적인 문화의 소산이다. 그런 윤회론이 인도문화에서 주류로 정착된 것은 철저한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를 윤회론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서다.



초기불교의 윤회사상을 잘 드러나는 ‘자타카’에서 붓다의 본생으로 제시된 547생들 간에는 전생과 후생의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불교의 윤회론 목적이 보살행의 강조와 연관됐다는 분석이 있다. 정암 스님은 ‘문학 사학 철학’(통권 9호, 2007년)에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는 윤회론이라면 그 윤회론적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며 “이것은 붓다에게 있어서 수용된 윤회론이 인도문화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고려한 방편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윤회론에 있어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윤회론의 실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상통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윤회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학자는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다. 그는 2008년 ‘윤회와 반윤회-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라는 저술을 통해 ‘윤회는 신분차별을 공고히 하는 힌두교 것이고 불교는 이를 비판하고 극복한 것이므로 반윤회’라고 말한다. 힌두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하고 현생의 내가 다음생의 나를 규정한다고 하여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有我]을 주장하므로, 불교에서처럼 나라는 것을 부정하면 윤회의 근본이 무너진다. 이것이 곧 윤회의 근본인 자아를 부정한 무아의 깨달음, 즉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재형 국장

팔만대장경에는 윤회론을 옹호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내용과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렇기에 윤회를 부정하면 불자가 아니라거나 반대로 윤회를 인정하면 힌두교도라는 주장은 과격하다. 그 같은 주장이 한쪽으로 쏠릴 경우 불교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측면을 크게 상실할 수 있다. 오히려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불교의 핵심사상에 부합하면서도 비불자도 긍정할 수 있는 현대적인 윤회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다.



mitra@beopbo.com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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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더보기

불교의 믿음은 '지혜가 있는 믿음' 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부터 수용하고

차츰 지혜와 선정을 개발하다보면

윤회와 인과, 무아와 공성에 대해 실증적으로

알게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그리고 믿음이 없다하여도 단순히 교학적인

추론만 해보더라도 윤회를 부정하고는 불교의

핵심인 인과, 연기법, 사성제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상좌부, 대승 막론하고 어느

부파에서건 강조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또한 실제 많은 수행자들이 숙명통의 경지를 체득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알 수있는 드러난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답글쓰기4 0

나그네 2019-03-04 21:06:37더보기

그런데,



일묵비구의 "무아의 윤회설,'

그 견해는

진정 모순된 설이다.



만약,

그 대목이 경전상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 설은,

붓다의 정설이 아니다.



무아의 경지란,

중생의 근본을 초탈한 경지이며,

불교수행의 궁극처인 Nirvana의 경지이며,

유위를 초탈한 무위의 경지이며

중생근본의 해탈 경지 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지를 체득한자가

이제 남은 중생 삶을 마치면 돌아갈 본지이다.



헌데,

"무아의 윤회"를 거론하며

무아의 해석을 "일묵비구"식으로 왜곡해석하려는 것인가?

분명한 답을 해야할 것이다.

----. .

답글쓰기4 3

동의어렵죠 2019-02-27 12:31:02더보기

지금도 왕권불교는 남방불교 대부분 지역이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에 벌써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벗어났나고 봅니다.

답글쓰기3 1

보리 2019-02-25 20:49:42더보기

부처님은 출생이 브라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브라만을 결정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집배층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불설도 무시하실건가요? 절대왕권사회에서는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지배층의 입맛에따라 왜곡되었습니다. 오늘날같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무아만을 논하다 막행막식하여 반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깨달음과는 더욱 멀어지며 대중에게 지탄받는 부작용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답글쓰기3 0

보리 2019-02-25 20:06:43더보기

힌두교와 불교는 윤회의 주체가 다릅니다. 힌두교는 영원불변한 아트만이라 하지만 불교는 끊임없이 변하는 의식의 흐름이라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불교는 현생의 업도 중요시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업 뿐만 아니라 현생에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사에 의거한다면 정세근교수님 말씀은 불설을 면밀히 고찰하지 않은 주장같아 보입니다

답글쓰기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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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윤회는 부처님 가르침인가요


승인 2005.05.07 10:01
호수 152




갈애.무명 있으면 윤회는 계속돼 상응부 등 경전 ‘오도송’서도 언급Q: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A: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고 부릅니다.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입니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입니다.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법구경 153-154)는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vikaa)’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합니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습니다.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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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윤회와 반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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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반윤회 - 그대는 힌두교인가, 불도교인가?  | 충북대학교 인문.사회연구총서 6 

정세근 (지은이)충북대학교출판부(CBNUPRESS)2013-01-18초판출간 2008년







윤회와 반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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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쪽150*225mm730gISBN : 978897295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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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장 불평등에 대하여



제1장 말에서 뜻으로 가는 길



제2장 힌두교의 신



제3장 인도의 3대 종교개혁



제4장 불교의 발전과 쇠퇴



제5장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



제7장 윤회를 넘어서



부록1 간디와 인도에 대한 15가지 물음



부록2 추천의 글



부록3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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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세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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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철학과 교수. 국립대만대 박사.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상담학회, 한국공자학회, 한국서예학회, 율곡학회 등의 이사 그리고 한국철학회 부회장으로 남북철학자대회와 인문진흥위원장 일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쌍둥이 책인『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읽는『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서예 이론의 결정판인 『광예주쌍집』(상,하)을 해제와 도판을 넣어 번역했고, 중국어로는 대만 학생서국에서 『장자기화론』(莊子氣化論,중국철학총간34)을 냈다. 학술원과 문화부의 우수학술도서로 다수 선정되었으며, 공저를 포함하여 30여 권의책과 1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국내외에서 60회 이상 학술발표를 했고,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등단한 미술평론가다.

국가온라인공개강좌인KMOOC에서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세계종교 기행’(무료강의, Englishcaption)을 진행하고 있으며, 칼럼으로 수년간 연재한 ‘인문학으로 세상읽기’에 이어<교수신문>에 ‘철학자의 가벼움’(지상 및 모바일)을 매주 연재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철학으로 비판하다>,<도가철학과 위진현학>,<노장철학과 현대사상>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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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슬슬 문득문득, 그리고 언젠가는 점점 삶의 이런 저런 의미를 더 찾기 시작할 자슥들에게 전해주는 손가락에 꼽는 몇권의 책중의 하나다. 곁에 두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진지하게 읽게 될 날이 올거라고 했다.  구매

알라딘(최란)은 댓글농단을 멈춰라 2018-11-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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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믿을까 말까? - 현대불교신문

윤회, 믿을까 말까? - 현대불교신문





윤회, 믿을까 말까?

이일야
승인 2020.01.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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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해의 길 29

언젠가 출가의 연을 맺은 벗이 전생의 내 모습이 보인다며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전생에 내가 티베트의 학승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놀랍기도 했지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벗의 말처럼 내가 전생에 승려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는 검증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문제라 할 것이다.

업과 윤회가 불교의 고유 사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불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고유 신앙이다. 그들은 착하게 살면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에 태어난다는 지극히 소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그들의 신앙을 수용하여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부파불교에 이르러 업과 윤회는 하나의 학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된다는 윤회설은 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업이라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윤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파불교에 이르면 전생과 내생이 실제로 있다고 보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세계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부파에서는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와 삶을 영위하는 기간인 본유(本有), 삶을 마치는 순간인 사유(死有), 그리고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를 설정하였다.

윤회와 관련해서 중유라는 과정이 주목된다. 이는 사람이 죽은 후 살면서 행한 선업과 악업을 계산하는 시간인데, 보통 10일에서 49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49재(齋)를 지내는 모습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 사람의 전체 삶이 평가되고 그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육도윤회(六道輪廻), 즉 지옥과 아귀, 축생, 수라, 인간계, 천계가 바로 그것이다. 살아서 선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도 선한 결과를 받고 현생에 악한 행위를 하면 내생에도 악한 결과를 받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윤회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믿게 되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전생의 업이나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삶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또 다른 형태의 숙명론일 뿐이다. 언젠가 개신교로 개종한 한 불자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힘든 일이 있으면 절에 가서 상담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말이 상처가 되어 불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개종까지 했다고 한다. 윤회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가져온 결과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언제부턴가 윤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힌두교의 산물인 업과 윤회사상을 불교에서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윤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붓다가 강조한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이를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칫 붓다가 부정한 영원불변하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을 오히려 윤회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윤회와 관련해서 죽음 이후의 문제는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이를 실존적으로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속으로 우리는 매 순간 윤회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은 이미 금수와 아귀, 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깊은 명상 속에서 고요를 느낄 때 그곳은 천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윤회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 상징으로 해석하면 불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불교는 무조건적 믿음에 철학적 메스를 가하는 합리적 종교다. 윤회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다. 그리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일야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서현욱 기자
승인 2016.10.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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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테너스’ 토크콘서트.ⓒ불교닷컴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는 ‘참나’와 ‘윤회’를 크게 비판했다. 강 교수는 불교계 큰 스님들이 말하는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통해 “참나불교와 윤회불교는 환망공상(幻妄空想)이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즈’ 토크콘서트에서 “스님들이 자주 언급해 온 ‘참나’와 ‘윤회’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하지만 다수의 청중들은 강 교수가 힌두교의 윤회를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통적인 불교 교리를 배운 청중들은 강병균 교수의 과학적 불교교리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부 청중은 ‘참나’ ‘윤회’ 등 교리 논쟁 보다 현실문제에 불자들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에서 벌어진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한다. 첫째 인신 공격의 오류다. 논점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다. 그 사람의 주장이 있는데 다른 허수아비가 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토론해 달라.

고명선(문예출판사) : 여래장불교와 대승기신론 자체를 비판 바람이 불고 있다. 대승기신론 안에 참나 찾는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선불교가 그런 식으로 간 것 아니냐 문제 제기하는 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원효를 위대한 성인으로 대접한다. 원효는 여래장불교로 전체 불교 통합한 분이다. 대승기신론과 여래장불교 자체를 비판하면 원효까지 비판하는 셈이다. 일반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너무 큰 문제다. 세 교수님이 여래장 그 자체, 원효까지도 비판해야 한국불교가 훌륭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인지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대승기신론은 이원구조가 문제”

강병균(포항공대 교수) :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칼럼을 <불교닷컴>에 썼다. 보기 바란다. 과거 사람을 밟지 않으면 진보가 없다. 과거 사람을 밟는 것은 밟히는 사람도 굉장히 즐거워 할 것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봉불살불(逢佛殺佛)’했는데 어찌 ‘봉조살조(逢祖殺祖)’가 안 되겠는가. ‘봉원효살원효(逢元曉殺元曉)’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대승기신론은 진여라는 것과 생멸심이라는 이원구조가 문제다. 진여가 오염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이론으로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이원 구조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이원구조면 부처님 무아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진화론이 이야기하는 의식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렁이에게도 진여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승기신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논서다. 당시 열악한 과학이나 인문사회 수준으로 볼 때 놀라운 서적이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는 위대한 이론이지만 현재 와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당시는 아주 훌륭했지만 지금은 조금 부족하다.




우희종(서울대 교수) : 여러 층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한가 묻고 싶다. 원효 부정이 가슴 아플 정도라면 사실 여래장사상 이런 거 있나 없나, 참나니 이런 거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할 때 여래장 사상이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불교학자들에게만 중요할 수 있다. 여래장이나 원효의 일심이나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 손가락이 좋은 손가락이냐, 나쁜 손가락이냐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여래장이라든지 초기 연기설을 볼 때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 맞나 틀리나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하다. 옳다 그르다 이전에, 원효를 부정하느냐 아니냐 이전에 여래장, 일심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가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 말씀 실천하는데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만수(동국대 교수) : 힘든 시기 나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했다. 명상 기간은 평화로웠는데, 명상이 끝나거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큰 변화가 없다. 명상하는 나와 일상 속의 나는 분리되는 존재인가? 강 교수 말씀에 명상 단계가 높아지면 일상 명상의 나가 통일되는 어떤 것을 말씀했다고 생각한다. 생활하는 삶과 명상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일상 속에서 벗어난 나와 둘이 어떻게 만나 통합되는지 말씀해 달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혜로 관조해야”

강병균 : 우리 속담에 ‘선정만 닦다가는 멍청한 중 늙은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앉아서 묵조선을 한다든지 해서 마음의 고요함만 닦으면 완전히 고요하다. 그러다 경계를 만나면 당장 흐트러진다. 그래서 그걸 굉장히 경계를 하는 거다. 그런데 진리는 항상 드러나 있고 간단하다. 그래서 계(戒)·정(定)·혜(慧)를 얘기한다. 계·정·혜 순서로 얘기한다. 혜가 마지막 순서다. 불교를 인도종교에서 분류할 때 지혜의 종교라 해서 즈나나 요가라고 분류한다. 지혜가 선정을 닦은 거 외에 지혜가 개입되면 절대 그런 일 없다. 비근한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고민이 있고 괴로운 순간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에 내가 마음을 두면서 걱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상당히 경감이 되고 사라지고 그런다. 지혜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하면, 단지 지로서가 아니라 관으로서 관조를 하면 그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 진각종 호당 정사가 수행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불교닷컴

호당 정사(진각종) : 논제가 ‘한국불교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이다. 과학 전공 교수들인데 불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보는 것인가, 과학적 차원에서 보는가? 또 하나 아까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인도 말씀했지만 사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한 인연론이다. 인이 있다고 해도 이를 도울 연이 없다면 세상 모든 만물이 성장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이, 지식이 한쪽에 치우친 특수한 시대에서는 스님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지금은 지식이 보편화되고 지식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승단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속인들이 출가인들을 보면서 진정한 우리들의 인연을 깨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 정치나 종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시대적 인연이 악인 많으면 악인이 지도자 된다. 선인이 많으면 선인이 지도자 된다. 그것이 시절의 인연이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가 속가에서 출가를 바라보는 관점도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강 교수 말씀 중에도 일체유심조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보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잘못된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도덕적인 걸 보충할 수 있는 스승인 게 아닌가 한다. 잘못된 승려를 보면서우리들이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병기 : 명상하는 나와 일상생활의 나가 분리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듣고 싶었다.

“대중을 통해 내가 끼우치는 것”

호당 정사 :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을 떠나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간 떠나 출세간 말씀한 것도 아니다. 산을 보려면 들로 나가야 한다. 들을 보려면 산으로 가야 하다. 중생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 출가라는 방편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생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이 깨침 아닌가. 그것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그릇, 내 크기만큼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르게 아는 게 깨침이라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명상을 할 때 나의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되지 않으면 관념 이상의 가르침 속에 빠져서 가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진각종은 정사 전수가 마주보고 불사를 본다. 왜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깨침은 내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것이 자기를 깨치는데 가장 좋다. 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연이 부부다. 그러면 흔히 내 반쪽이라고 하는 아내를 쳐다보고 남편이 깨치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깨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는 교수님을 통해 나를 깨치는 것이고, 교수님은 대중을 통해 깨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생활 속 명상, 깨침을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정모경 : 강병균 교수님 책(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잘 읽었다. 책 중에 자아가 없다는 증거로 사람을 두 쪽으로 자른다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명해 달라.

강병균 : 사람에게 좌뇌 우뇌 둘이 있다. 둘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뇌와 우뇌가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좌뇌는 언어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걸 자르면 의식 분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상태에서 좌뇌와 우뇌에 다른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면 그 의식이 둘로 갈라진다. 인간이라는 것은 최소 두 개 의식의 공화국이다. 인간 마음속에는 의식이 많다. 의식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수많은 마음을 관장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지혜를 수련하면 그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번뇌를 이길 수 있지 않나. 한만수 교수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다.

임상실험 결과를 보면 어릴 적이든 선천적이든 한쪽 뇌 없는 사람은 잘 산다. 그러나 나이 들어 한쪽 뇌가 없어지면 힘들어한다. 그런 면에서 좌뇌와 우뇌가 독립적으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좌뇌와 우뇌를 딱 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생물학계 석학 교수에게 물어봤는데 그도 대답을 못했다. 내가 볼 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면 독립된 두 개의 사람이 나타난다. 마치 지렁이를 둘로 나누면 두 마리의 지렁이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참나는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참나는 둘로 갈라졌나?’, ‘영혼이 둘로 갈라질 수 있나’라는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영혼이 둘로 갈라질 일도, 참나가 둘로 갈라질 일도 없다. 왜냐면 참나나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환망공상(幻妄空想)이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고 해야만 좌뇌 우뇌 분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중층구조 논의를 동일 층위에 두면 혼란”

우희종 : 좌뇌와 우뇌를 나눴을 때 두 개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감각기간에 의해 형성된 의식, 안이비설신의와 모든 현상의 근간인 형태, 사랑도 칼로 찌르는 사랑도 사랑이고 아카페적 사랑도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보고 듣거나 하는 의식이 참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만 어느 층위에서 그것을 얘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 토론처럼 다양한 중층구조 논의를 서로 동일 층위에 놓고 이야기하면 혼란스럽고 알아듣기 힘들다. 하나의 질문에도 담겨 있는 중층 논의구조를 이해하면 논의하기 쉬울 것이다.

송재형(용주사 신도비대위 사무총장) : 오늘 기적과 같은 자리가 마련됐다. 15일부터 간화선 대법회를 한다. 간화선이 불교를 새롭게 세계화시켜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참나불교로 나 혼자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종교라 할 수 있는가? 간화선 추구하는 것이 세계 고통 멸할 수 있는 대단한 것인가? 소승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해서 권승이 판치고 조계종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대들보 내려앉고 불타고 있다. 불교는 고통을 없애는 것인데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계율 살아야 변태불교서 본래불교로 돌아갈 것”

박병기 : 경전에 계·정·혜 삼학(三學)이 함께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출발은 계라고 전제하고 있다. 선불교 정착 발전 과정에서 계를 쉽게 무시할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계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한다. 율장은 금서처럼 인식됐다. 한국불교가 본래 불교로, 변태불교에서 본래 불교로 돌아가는 출발점은 계율이 이 시대에게 맞게 살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승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역시 시대에 맞는 계율을 찾아야 하고, 불자들이라면 어떻게든 계를 지켜야 한다. 불자라면서 범계하는 풍토가 일반화돼 있다. 이번에 범계 스님을 대상으로 한 심판의 화살이 재가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자성으로 가야 의미가 될 것이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방 지적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직면한 범계 상황은 심각하다. 그런 것 정리하지 못하는 승단의 자정능력은 문제다.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독화살 중 하나다.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에 대해 질문하는 김영국 연경불교전책연구소장.ⓒ불교닷컴

김영국(연경정책연구소 소장) : 참나란 없다. 윤회가 없다. 큰스님들이 참나나 윤회 이야기를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부처님 경전에 숫하게 이야기하는 게 참나, 윤회 없다는 거다. 큰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방편이 아닌가? 강병균 교수는 그런 부분을 문자에 집착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가. 큰스님들이 진짜 참나 있다, 윤회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회는 ‘종 쇼비니즘’…윤회 진설로 받아들여 문제”

강병균 : 향봉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찾아갔다. 향봉 스님이 “윤회는 방편이다” 하니 성철 스님은 “윤회는 진설이다.” 했다. 성철 스님에게 윤회는 방편설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윤회가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윤회 사례, 학자들 주장을 수집해 책을 냈다. 진제 스님이나 연세 되는, 법랍이 되는 스님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몸뚱이 버리고 저 몸뚱이로 간다’, ‘주인공이 몸뚱이를 떠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몸뚱이가 썩는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확신이다. 이것은 소위 임사 체험과도 관계가 있다. 그분들이 명상을 통해 임사 체험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의식의 장난에 속아 주인공이 자기 몸을 빠져나간다고 망상을 한다. 현대 의학에서 인위적으로 임사체험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임사체험 대가였던 사람, 이를테면 수잔 블랙모어라는 여자가 있다. 마음대로 유체이탈 하던 여자인데,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일 하는 것을 봤는데 사실이냐” 하니 친구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거기서 충격을 받고 그 여자가 임사체험이라는 건 마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회는 큰 스님들에겐 방편이 아니고 진설이다.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chauvinism)’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모든 생명계의 생명체를 흉악한 존재로 만드는 쇼비니즘이다. 백인들이 흑인, 황인종을 열등종족이라 하고, 하나님이 실수로 흑인을 만들었다고 하는 종쇼비니즘에 해당한다. 동물들이 무슨 죄를 짓는가? 토끼가, 사슴, 노루, 참새가 무슨 죄를 짓는가. 죄 짓는 거 없다. 우리는 선업을 쌓지 못하면 토끼, 돼지, 말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실제 인간이 가장 흉악한 존재다. 다 잡아먹는다. 거꾸로 인거 같다. 흉악한 짓을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윤회론이라는 것이 경전에 나와 있다고 부처님의 진설이거니 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불합리한 점을 간과한 점이 있다.

김영국 : 성철 스님이 윤회는 진설이라고 한 법문이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할 때가 1970년대다. 법문 하면서 “윤회가 있더라” 했다. 그 당시 서구에서 애드가 체이시 등의 임사체험이나 환생체험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성철 스님이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셨는가. 알고 있다면 답변해 달라. 내가 볼 때는 티베트불교의 환생이나, 서구의 환생, 임사체험 이런 책을 보고 한 때 경도가 됐을지는 모르겠는데, 실제 내가 아는 성철 스님은 윤횐느 방편이라 생각하셨다. 교수님이 성철 스님의 1970년대 생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강병균 : 성철 스님이 말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성철 스님이 아니더라도 티베트불교에서 윤회는 바뀔 수 없는 진리다. 달라이 라마는 환생신들에게 인가해 주고 그랬다. 스페인 가서 태어난 환생신이 있다. 그 젊은이가 스무 살에 “나를 이런 불교적인 틀에 가둬서 고문하느냐”하며 뛰쳐나와 지금 영화공부 중이다. 그렇듯 윤회라는 것은 환망공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달라이 라마를 너무 신격화해서 그렇다. <불교닷컴> 칼럼에 에드가 케이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 있다. 읽어보셨으면 한다. 전부가 애드가 케이시의 망상이다.

우희종 : 층위가 다른 것을 지금 얘기한다. 또 하나는 깨달았다는 이에게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 이대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깨달았다고 할 때 불교적 지향성, 연기실상에 대한 깨달음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경전에는 헛된 망상이 윤회한다는 표현도 있다. 스님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각 종파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티베트불교가 바라보는 것, 선종에서 바라보는 것 관점이 다르다. 이런 게 섞이게 되면 혼란스럽다. 사랑을 끈끈한 사랑이 사랑이냐, 아카페적인 사랑이 사랑이냐 논의 한다면 층위를 정해놓아야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병기 : 윤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티베트불교이다.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는 분에게 얘기 들어보자.

“윤회 않는 중생에게 윤회 멈추라 했겠나”

김준영 : 티베트 명상을 하고 있지만 간화선도 하고 있다.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있다 없다 이 자리에서 증명 불가하다. 어찌 보면 희론에 가까울 수도 있다. 중요한 신념이 있을 것이고, 신념 속에 체험적으로 깨달음에서 본 것도 녹아 들어갈 것이고, 시대적으로 지금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벗기기 위해 방편으로도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멈추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부처님이 윤회를 멈추는 것 말씀하셨을 때는 분명히 윤회를 인정했기 때문에 말씀하셨지, 윤회하지 않는 중생에게 윤회를 멈추라고 한 것 아닐 것이다.
▲ 강병균 교수에게 질문하는 김준영 씨.ⓒ불교닷컴

조계종이 사랑의 매를 많이 맞는 거 같다. 대한민국 불교를 대표하는 게 조계종이라고 누가 얘기하고 있는가, 불교 지키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이들이 출가자라고 한정돼 있다는 건 어느 법인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세워 놓고 우리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참나, 무아의 반대 개념으로서 유아적 참나인가? 그러면 유아론이 몇 분 선지식, 진제, 송담 그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조사선, 간화선의 기본적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묻고 싶다.

강병균 : 중요한 질문을 했다. 간화선 조사어록을 보면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선불교가 혁명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는, 특히 옛날 스님 법문에는 거의 윤회론이 나온다. 나는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근자에 들어와 유행하는 현재 한국불교의 참나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김준영 : 내 경험으로는 윤회는 사실이고, 윤회는 욕망이 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면 욕망을 쫓아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윤회의 조건이라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여쭙겠다. 달라이 라마 존자가 미국 의학자들과 이야기 하다가 기관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왔을 때 “뇌라는 기관은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아닐까?” 이야기했다. 그때 “그런 가설을 한 번 세워볼 필요가 있다” 해서 그런 가설을 만든 분이 강 교수님이 발표할 때 명상의 효과에서 뇌의 변화를 말씀하실 때 잠깐 언급했던 존 카밧진 교수로 알고 있다.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뇌’라는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근이 안경 만날 때 안식 생긴다”

강병균 : 명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윤회는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명제다.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씩 드리겠다.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다. 내가 빌게이츠인데 당신에게 100억 원을 당장 준다. 단 조건은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기억은 다 잃고 갓난아기 같은 백지 상태로 돌아간다면 수락하겠는가? 여러분은 수락하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림이 즉각 거부한다. 어떤 사람은 “죽는 것과 같다. 난 안한다.” 이런다. 윤회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도 지구상에 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달라이 라마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가 어렸을 때 기억한 거 같은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그 윤회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하는데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거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 마음이 수단으로 쓰는 것이 뇌이지 않은가 하는 것은 정확히 심신이원론이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얘기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안근(眼根)이 안경(眼境)을 만날 때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돼 있다. 안식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근이 안경을 만날 때 안식이 생긴다 한다. 이건 현대과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나온 빛이 우리 망막을 때릴 때 생체전기가 발생한다. 생체 전기가 열심히 달려 우리 시각중추로 가면 본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전기가 열심히 달리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기를 넣어 작동하기 전까지 컴퓨터는 그냥 죽은 물건인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안식이라는 게 미리 우리 두뇌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마음이 뇌를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볼 때 ‘마설(魔說)’이다. 부처님 근본 사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티베트불교를 귀신불교라 부른다. 귀신불교인 티베트불교엔 국가 신탁이 아직도 있다. 티베트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무당 같은 이가 존재한다. 귀신불교 입장에서 영육 이원론을 이야기한다. 영, 마음이 육, 뇌를 움직인다. 불교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는 어긋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방편설로 여래장 충분히 의미 있다”

김준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가 존 카밧진 교수에게 ‘마음이 사용하는 기관으로서 뇌’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에 감사한다. 왜냐면 그래서 탄생된 MBSR이라는 의료명상에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래장사상은 방편설이라 생각하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수행 측면, 실제 공부하는 데서도 그렇고 자기 상대적 대비적으로도 그렇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데 여래장사상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방편설로서 여래장사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강 교수님에게 고맙다.

우희종 : 나는 윤회 유무에 대해 믿지만, 또 믿지 않는다. 개인이 죽어서 나쁜 짓하면 개가 되고 돼지가 된다는 그런 윤회는 믿지 않는다. 방편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한 것처럼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윤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선적 시간 속에서 윤회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한 육근 세계에서 내가 태어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시작과 종(끝)으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 속이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현장에서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육도 윤회를 하고, 몸 또한 이 세계와 열린 상태에서 단 한 순간도 윤회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뇌가 마음이라고 하니까 다양한 개념이 들어와 혼란스럽지만, 예를 들어 손이 물건을 쥔다. 물건을 쥐고 글 쓰는 것이 손이 하는 것인가? 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뇌가 뭐 생각하고 한다는 데 이것 역시 마음, 그 무엇의 표현력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과학적 자세다. 지금의 과학 수단,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또 다른 논의이다. 저에게 그 질문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도 손 자체가 쥐는 게 아니라 뇌가 지시해서 손이 그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물건을 쥐는 것은 아니다. 뇌도 그 무엇에 의해서 변하는 기관일 수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열어놓고 있다.

“강 교수 윤회 비판은 힌두교 윤회 비판”


▲ 강 교수의 윤회불교 비판을 재비판하는 보성 정사(진각종).ⓒ불교닷컴

보성 정사(진각종) : 수행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에서 무아(無我), 아(我)를 알아야 한다. 아를 모르고는 무아를 알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강병균 교수는 참나를 유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진정한 참나는 무아라고 알고 있다. 참나는 무아적인 참나다. 나는 그런 이론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강 교수의 참나에 대한 해석은 유아적인 참나이다. 개념적 정의가 너무 과학적으로 치중돼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하지 않나 비판해 본다.

윤회는 불교 탄생 이전에 브라만에서 나온 단어이고 교리적 체계이다. 강 교수는 윤회라는 것을 불교가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적인 윤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하는데, 불교적 윤회와 힌두교적 윤회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대승불교, 밀교로 넘어오면서 힌두교적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대부분 말씀하신 것이 힌두적인 윤회다. 강 교수의 윤회에 대한 비판은 힌두교적 윤회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강병균 : 정사님 질문이 충격적이다. 첫째는 한국 선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눈이 보느냐. 아니다. 마음이 본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반격을 한다. “눈이 본다면 어떻게 송장은 보지 못하는가?”, “마음이 보는가? 그러면 왜 송장이 보지 못하는가?”, “봉사는 마음이 있는데 왜 보지 못하는가?” 내게는 항상 원칙이 있다. ‘간단한 질문에 답을 못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원칙이다.

서암 전 종정 스님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는 이 주인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존재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히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한국 모든 선사들도 만장일치이다. 참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화해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의식을 네 가지로 나눈다. 각성시 의식, 꿈꿀 때 의식, 숙면시 의식, 투리야 의식 네 가지 이야기하다. 투리야는 브라만의 의식이라고 얘기한다. 참선하면서 자기가 겪는 의식 상태를 참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한국에 힌두교 성자들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하나는 스님들은 청담 스님도 그렇고, 대부분 선사들은 생각은 참나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 참나는 실체다. 결코 방편설,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정확히 자기 몸 끌고 다니는 실체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윤회 말씀하지 않았다니…”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 비판에 혼란스럽다는 한 불자.ⓒ불교닷컴

방명숙(직장인) : 재가자로 혼란스러울 때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그때마다 무한한 생을 달려왔고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했다. 힌두교적이든 대승불교적이든 윤회하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나라는 실체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안하지만 연기법, 존재의 실상이라는 거 뭔가 연결된 연기식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선정 명상의 단계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과 종류가 달랐다는 것인가. 그런 여러 가지를 꿰뚫어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병균 : 부처님이 보통 ‘견명성 오도’했다고 한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됐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밤새 사유하다 새벽이 온 것이다. 깨달음 얻었을 때 그때가 새벽이었다가 맞는 말이다. 초기경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고 나온다. 내가 참나를 찾았다 이런 말은 절대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얘기한 것이 전부 거짓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만약 참나를 깨달았다면 브라만교의 브라흐만을 깨달았다는 것과 같다.

선정 단계 이야기기했는데, 부처님이 처음에 색계 사선정을 버렸다. 그런데 색계 사선정의 특징은 일선에는 심이 있고, 이선에서 사가 있고 이런 식이다. 심사희락정으로 간다. 심사는 사유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나에게 사유력, 정진력, 인내력이 없었으면 나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일주일 동안 버티시며 사유를 하신 결과 나온 게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에 의한 종교이지 참나를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참나가 나왔는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분명히 연기법에 의한 깨달음이다. 연기법에 의한 측면으로 보면 소위 윤회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꼭 자아 정체성이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가 있다. 사실은 부처님 생사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 부처님의 DNA만 복원하면 32상 80종호를 복원할 수 있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유전자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추적을 하면 언젠가는 32상 80종호를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DNA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통도사 사리에는 DNA가 없다.

그리고 무형의 유전자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온 동양, 서양에 퍼져 있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적 사리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사리이지 육체적인 사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전자가, 정신적 유전자가 세상에 퍼진다, 그런 것을 윤회로 해석을 해야지, 좁은 의미의 윤회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윤회는 철저히 개인주의다. 내가 복을 지어서 다음에 좋은 몸을 받겠다는 것이지 내가 좋은 업을 지어서 일체중생이 해탈을 얻겠다가 아니다. 대승불교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설한다. 아무 연 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그것은 내가 윤회를 못하더라도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연자비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윤회라는 것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다.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즉 자기가 하는 행동이 민족, 동양, 인류, 생명계에 얼마나 기여하고 무연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네가 다음에 윤회 한다 안 한다, 네가 고생 안하려면 복을 쌓아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을 크게 폄훼하는 거라 생각한다.

“무아, 윤회 논쟁 지금 무슨 쓸모가 있나”


▲ 이혜숙 금강대 교수는 교리 논쟁 보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불교닷컴

이혜숙(금강대 객원교수) : 유아냐 무아냐, 윤회가 있냐 없냐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윤회를 믿는 사람이면 다르게 사는가, 안 믿으면 또 다르게 사는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어느 법회에 가든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지금 물 맞아 죽은 노인이 있다. 그 일은 윤회를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안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대한민국이 정신 건강이 매우 나빠서 죽고 살기가 날마다 세계 1위인데, 여기 진지한 불자들은 그 아파서 혼자 죽는 그 수행에 대해서 무아며, 혹은 무아가 아니며, 어떻게 하시는 건가. 그거 생각해보자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박병기 : 박광서 교수에게 총평을 듣겠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 총평을 하는 박광서 종자연 상임대표.ⓒ불교닷컴

박광서(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임대표) : 우리가 불교라는 것을 인연으로 만났다면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고, 그것이 사는데 힘이 됐으면 좋겠고, 학술적으로도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섰으면 좋겠다. 더 나가야 간다면 이혜숙 교수의 말처럼 우리들이 여기서 이런들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더 고민해야 한다. 오늘은 좁고 깊게 교리에 대한 논의가 되겠구나 그런 바람 가지고 왔다. 이혜숙 교수 말처럼 큰 바람은 없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끊으면서 자극을 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불교를 믿는가. 나는 왜 불교를 믿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불교공부는 3개월만 하면 끝난다. 그 다음엔 연습하면 된다. 그 다음엔 불교 공부한 것으로 연습해야 한다. 평생 가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에서 연습해야 한다. 그걸 안하고 평생 배우다 내생까지 미루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박병기 :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신행이 기본이다. 신행은 행, 삶, 실천이 중심이다. 과연 우리가 불교적 믿음에서 신행에 충실하고 있는지, 충실하기 위해 교리공부하고 있는지, 교리공부 자체가 독립된 목표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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