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3

이미령 박사 저 ‘시시한 인생은 없다’

시시한 인생은 없다 - 이야기로 풀어 쓴 경전 에세이 

이미령 (지은이)담앤북스2020-03-31



268쪽



책소개



자칭, 타칭 경전이야기꾼 이미령이 삶의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 <시시한 인생은 없다>. 2,600년 전 붓다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은 경전에는 삶의 진리, 인생의 깨달음이 담겨 있지만 온통 어려운 말로 쓰인 경전을 찬찬히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윳따 니까야>, <경율이상>, <법구경>, <앙굿따라 니까야>, <숫따니빠따> 등의 경전 속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가만히 음미하고, 곱씹으며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로 풀어냈다.



저자는 인생의 가치, 노력, 진리, 믿음, 깨달음을 경전에서 찾아 독자와 같이 사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모든 인생의 희노애락은 경전에 있다며, 부처님의 말을 들여다보자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자며 말이다.

목차

글을 열며



제1장 가치

잠자다: 욕심과 성냄의 처방전

돈을 벌다: 덧없는 재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법

나이를 먹다: 나이든다는 것의 열다섯 가지 비유

복을 짓다: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기

시작하다: ‘발심’에 담긴 의미



제2장 노력

가난하다: 종교적 가난을 침묵하는 당신에게

부끄러워하다: 나를 망칠 수 있는 마음

부자로 살다: 유혹의 이끌림

노력하다: 노력해야 하는 이유 두 가지

기다리다: 세상에 ‘같음’은 없다

격려하다: 생명을 다시 살게 해 주는 일



제3장 진리

다가가다: 마음을 열게 하다

바라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길

말을 하다: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웃다: 일단 미소 짓고 웃어 보기

걷다: 한 걸음 더하기 한 걸음 더

집에 가다: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제4장 믿음

말을 잘하다: 침묵이 능사는 아니다

행운을 바라다: 행복과 불행은 한몸이다

옷을 입다: 당당하고 아름답게

졸다: 졸음도 수행이라면

절교하다: 모든 이가 친구는 아니다

믿다: 의외의 순간에서 발견한 믿음




제5장 깨달음

비워내다①: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차라리 쉬웠다

비워내다②: 보편적인 번뇌에 빠지지 않기

약속하다: 침묵하면 달라지는 것들

결혼하다: 시시한 인생은 없다

덧없다: 울지 마라, 원래 그런 법이니

울다: 살면서 흘린 눈물은 바다보다 많다



끝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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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8 어차피 덧없는 인생, 덧없는 재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는 것이 부처님 입장입니다.

P. 46 발심이란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깨달음은 단순히 ‘지혜’를 뜻하지 않습니다. 웬만한 성자의 지혜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부처님의 경지인 가장 완전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를 아뇩다라삼약삼보리(위없이 바르고 완벽한 깨달음)라고 부릅니다. 발심은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요, 한 마디로 말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다.  접기

P. 60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는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 종교적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P. 168 부처님은 수도 없이 말씀하십니다. “선업을 지으십시오”라고요. 물론 선업을 짓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악업부터 멈추는 일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선업인지 악업인지 잘 살펴서 그것이 악업이라면 그것부터 멈추어야 하며, 그리고 선업을 지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부처님께서 공통으로 당부하시는 노래인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에도 분명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행하며, 그 마음 스스로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접기

P. 178 『대반열반경』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남자를 ‘가난한 집’이라고 설정한 경전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의 가난은 재물이 아닌,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없기에 아무 것이나 덥석 잡고,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집착합니다. 좋은 점만 보고, 좋게만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나름의 지혜일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면만 보고 가겠다며 굳이 그 이면의 실상에는 눈을 감는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지혜가 없어 가난한 사람은 결국 행운의 이면에 숨어 있는 불행에 덜컥 발목이 잡혀 울부짖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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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미령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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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전공했다. 사람들은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데 경전을 읽어보니 오히려 재밌기만 했다. 그래서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경전 속 이야기를 칼럼으로 쓰거나 강의에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면서 경전번역가에서 경전이야기꾼으로 타이틀을 바꿔 쓰려고 고민 중이다. 동국역경원에서 역경위원으로 일한 경험도 큰 도움이 되었고, 고익진 교수님에게 사사한 것은 더 할 수 없는 값진 보약이었으며, 수많은 사찰에서 불교강의를 하면서 대중과 만나 불교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공부 밑천을 삼고 있다.

2020년 현재는 BBS불교방송에서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하고 있고, 다양한 불교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며 책읽기 모임과 경전 읽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지금까지 쓴 책은 《이미령의 명작 산책》,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붓다 한 말씀》,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등이 있고, 공저로는 《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 《절에 가는 날》 등이 있으며, 동국역경원에서 낸 《대당서역기》, 《직지》를 비롯한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접기

최근작 : <붓다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다>,<시시한 인생은 없다>,<이미령의 명작 산책>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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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삶을 돌아보게 해 주고, 내 하루를 보듬어 주는

경전이야기꾼 이미령의 경전 에세이



“칭찬이 밖에서 주어지는 찬사라면, 격려는 내면에서 힘을 내게 하여 그가 하려는 일을 완성하게 해 줍니다. … 요즘처럼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사람들이 많을 때 이 격려의 한 마디가 갖는 힘은 큽니다.” _본문 중에서



자칭, 타칭 경전이야기꾼 이미령이 삶의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 ??시시한 인생은 없다??. 2,600년 전 붓다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은 경전에는 삶의 진리, 인생의 깨달음이 담겨 있지만 온통 어려운 말로 쓰인 경전을 찬찬히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윳따 니까야』, 『경율이상』, ??법구경??, 『앙굿따라 니까야』, ??숫따니빠따?? 등의 경전 속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가만히 음미하고, 곱씹으며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로 풀어냈다.

저자는 인생의 가치, 노력, 진리, 믿음, 깨달음을 경전에서 찾아 독자와 같이 사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모든 인생의 희노애락은 경전에 있다며, 부처님의 말을 들여다보자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자며 말이다.



“내가 너무 시시한 존재 같아서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숨 쉬기가 두렵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될 때 들여다보는 책



불자로서 경전을 탐독해 봐야겠다는 생각 혹은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지혜를 보려 경전을 읽어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던 독자는 주목해야 한다. 읽고 싶지만 쉽게 읽을 수 없던 경전을 누구보다 쉽고 이상적이게 또 친숙하게 풀어냈다. 일상생활과 나 자신을 집어삼키는 ‘분노’, ‘탐욕’, ‘부끄러움’ 등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경전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부처님은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에게 “분노의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묻어있다”고 이야기한다. 화를 내는 것은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감정의 뿌리에는 결국 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노는 죽이면 슬프지 않다”고 다독인다.

이처럼 저자는 사람들의 내면, 그 내면의 시시함에 주목했다.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그로 인해 인생마저 시시해 지고 있는 현시대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붓다의 메시지를 한 번 만나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은 2,600년 전 부처님의 이야기

오늘날의 위로가 되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은 또 중생을 늘 격려했던 분이기도 하다.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고무시켰다”는 문장이 수많은 경전에 나오기도 한다. 스스로의 잘못에 너그럽지 못하고, 잘못을 두려워하며 어리석음에 떠는 사람들에게 법문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 법문을 들은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에 기쁨과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세상에 깔린 시시한 감정, 진부한 하루, 짙은 혐오, 갈등하는 마음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서로를 돌본다.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도, 아닌 사람도 인생의 지혜를 갈구하는 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세생생 살아가는 세상의 진리를 붓다의 메시지가 녹아 있는 경전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불교에서 익히 들어온 보시, 수행, 발심 등의 의미를 일상적인 삶과 관련지어 현실적 지침이 될 수 있게 알려주고,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어찌 살면 좋을지 부처님이 행하신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알게 해준다. 저자는 자신의 소개대로 이 시대의 진정한 ‘경전 이야기꾼‘이다.  구매

picturebook 2020-04-14 공감 (0) 댓글 (0)

   

[불교명상] 스물 아홉 편의 붓다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편리해져 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힘들다고 합니다. 내가 너무 시시한 존재 같아서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숨 쉬기가 두렵다고들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붓다의 메세지를 한 번 만나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글을 열며' 중에서

스물 아홉 편의 붓다 이야기

이 책의 저자 이미령은 번역가, 책 칼럼니스트로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전공했으며,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불교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경전 속 이야기를 칼럼으로 쓰거나 강의에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면서 경전번역가에서 경전이야기꾼으로 타이틀을 바꿔 쓰려고 고민 중이다. 동국역경원에서 역경위원으로 일한 경험과 수많은 사찰에서 불교강의를 하면서 대중과 만나 불교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공부 밑천으로 삼고 있다.

현재는 BBS불교방송에서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하고 있고, 다양한 불교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며 책읽기 모임과 경전 읽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이미령의 명작 산책>,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붓다 한 말씀>,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등이 있고, 공저로는 <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 <절에 가는 날> 등이 있으며, 동국역경원에서 낸 <대당서역기>, <직지>를 비롯한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2,600년 전 붓다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은 경전에는 삶의 진리, 인생의 깨달음이 담겨 있지만 온통 어려운 말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읽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저자는 <상윳따 니까야>, <경율이상>, <법구경>, <앙굿따라 니까야>, <숫따니빠따>등의 경전 속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우리들에게 인생의 가치, 노력, 진리, 믿음, 깨달음 등 총 5장에 걸쳐 이를 소개하고 있다.


가치

부처님은 재가불자在家佛者에게 가난을 칭송하거나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지런히 땀 흘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권한다. 이렇게 살면 자신이 떳떳하게 살아오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이로 인해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된다. 나아가 가정을 여유있게 꾸려 나가면 이로 인해 또 행복을 느낄 것이며, 재물의 여유로움으로 다음 생까지 챙긴다면 행복은 세 곱절이 될 것이다.

어차피 덧없는 인생, 덧없는 재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는 것이 부처님 입장입니다. (26쪽)


발심發心이란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때의 깨달음은 단순히 '지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웬만한 성자의 지혜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부처님의 경지인 가장 완전한 깨달음을 말한다. 부처님 지혜를 아뇩다라삼약삼보리(위없이 바르고 완벽한 깨달음)라고 부르는데, 발심은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자,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한다는 뜻이다.

노력

불교는 심오한 진리를 말하며 해탈의 경지를 일러준다. 물론 이 경지는 웬만한 수양으로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해탈의 경지에 아예 관심을 갖지 않고 그동안 세속에서 살아온 방식을 최선이라고 여긴다. 초기경전 <앙굿따라 니까야>에선 이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분간하라고 촉구한다.


문제는 사람이 선업만 짓고 살 수 없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통사람들이 악업을 지은 뒤의 행동에 대해 지적을 하고 있다. 즉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을 질책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며 새롭게 선업을 지으면 된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는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 종교적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60쪽)







진리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이 원만구족하신 분이다. 원만이란 '완벽하다'라는 뜻이며, 구족具足이란 말은 '갖추었다'라는 뜻이므로 원만구족이란 '완벽하게 갖추었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을 완벽하게 다 갖추신 분이다. 방편이란 사람들이 깨달음의 경지로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가르킨다. 좋은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출요경出曜經>은 법구경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경전에서 게송과 비유를 가려 뽑아 주제별로 정리한 경전인데, 제12권의 이야기를 여기서 소개해 본다. 옛날 사위성에 최승崔勝이라는 장자가 살았는데, 그는 엄청난 부자로 코끼리와 말 등 많은 동물과 창고엔 금은보화가 넘쳤다. 그런데, 너무나 인색해서 절대로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베푸는 법이 없었다.







반면 부처님은 형편이 부족한 이웃들에게 보시를 하면서 공덕을 쌓기를 권한다. 이에 그에게 다섯 가지 보시를 가르쳐준다. 첫 번째 보시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일, 두 번째 보시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않는 일, 세 번째 보시는 그릇된 이성 관계를 멈추는 일, 네 번째 보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일, 다섯 번째 보시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과 같은 것에 빠지지 않는 일임을 교화하자 최승장자는 부처님께 고마움의 표시로 난생 처음 고품질의 천을 공양하겠다는 발심을 했다.







이처럼 많이 가진 자일수록 더욱 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본능이 발동하기 마련인데, 부처님은 탐욕스런 부자를 교화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다. 사실 그대로 일개워줌으로써 최승장자는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 그동안 꽁꽁 닫았던 탐욕의 문을 열고 스스로 보시에 나설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믿음



부처님은 수도 없이 말씀하신다. "선업을 지으십시오"라고 말이다. 물론 선업을 짓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악업부터 멈추는 일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선업인지 악업인지 잘 살펴서 그것이 악업이라면 그것부터 멈추어야 하며, 그리고 선업을 지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일곱 부처님께서 공통으로 당부하시는 노래인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에도 분명히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행하며, 그 마음 스스로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대승경정인 <대반열반경>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남자를 '가난한 집'이라고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의 가난은 재물이 아닌,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지혜가 없으므로 아무 것이나 덥석 잡고,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집착한다. 좋은 점만 보고, 좋게만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나름의 지혜일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난하다'고 말한다. 좋은 면만 보고 가겠다며 굳이 그 이면의 실상에는 눈을 감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지혜가 없어 가난한 사람은 결국 행운의 이면에 숨어 있는 불행에 덜컥 발목이 잡혀 울부짖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깨달음







"그대의 도움으로 나 석거모니는 세상의 교화를 마치고 반열반에 드니,



이제 그대의 시간이다. 쉬지 말고 정진하라. 곧 아라한을 이룰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한마음으로 모셔온 제자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라한이란 경지는 당시 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였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벗어 버린, 훌륭한 성자의 경지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누구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정진한다. 그런데, 부처님을 모시는 일 때문에 이에 뒤쳐진 제자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아난다 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아라한이라는 해탈열반의 경지를 조용히 미뤄왔다. 수많은 도반들이 자신보다 앞서 높은 경지에 속속 이르지만 그는 여전히 낮은 자리에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부처님을 모셨다. 부처님은 그런 제자에게 마지막 선물인 수기授記를 주셨다.







제자의 깨달음을 예고하는 것을 수기라고 한다. 여전히 공부해야 할 것이 남아 있어서 인간적 정리에 흐느껴 우는 제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건네는 그 든든한 위로, 이런 제자의 눈물과 이런 스승의 선물이 있는 곳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스물 아홉 편의 경전 이야기







책은 총 29가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한다. 어느 한 편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을 소중한 이야기이다. 책을 늘 곁에 두기를 권한다.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 뜻을 되새긴다면 나 자신을 위한 더 없이 좋은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모든 이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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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0-04-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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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인생은 없다[서평] 
<시시한 인생은 없다>는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불교경전을 체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 낸 경전 에세이다. 저자는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전공하였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경전이 자신에게는 재밌게 느껴진다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경전 속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 경전 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이력 중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고익진 교수님에게 사사'라는 것이다. 과거 도올 선생이 고익진 교수를 최고의 불교학자로 소개 했는데 그때 고익진 교수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고익진 교수가 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도 소개되었는데 그 책을 읽어보고 싶어 찾았으나 오래전에 절판되어 읽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실력있는 스승에게 배운 작가라니 뭔가 더 기대 되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소위 바이블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글고 딱딱하고 말도 어렵고 어떨 때는 허풍도 이런 허풍이 있나 싶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된다. 이는 성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경이든, 성경이든 '강해', '이해' 라는 꼬리가 달린 주석집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런 책 조차도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이 책은 여러 경전에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피부에 와닿는 교훈들을 '채집'해 놓았다. 그래서 저자는 일반인들이 '만만하게'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책이 주는 교훈만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또 이미 불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 지라도 새삼 반짝이는 일깨움을 느껴 볼 수 있는 책이다. 좋은 책, 좋은 글은 볼 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이 책을 읽으며 인용된 경전을 세어 보았다. 상윳따 니까야, 디가 니까야, 숫따니빠따, 맛지마 니까야, 살레야카 숫따, 앙굿따라 니까야, 법구경, 대반열반경, 불설마하가섭도빈모경, 대방등대집경, 증일아함경, 승가나찰소집경, 본생경(자타카), 불본행집경, 출요경, 잡보장경, 부사의광보살소설경, 불설이수경, 수행본기경... 여기에 적지 않은 경들도 더 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출저가 되는 경전을 직접 찾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저 중 <대반열반경>은 제목 그대로 열반, 부처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경전인데, 죽음 앞에선 한 성인과 그 옆을 지키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대반열반경>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다른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이젠 내용을 좀 살펴보자.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에서 '탐욕이란 것은 거창하고 값비싼 것을 바라는 욕심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는 마음, 무엇이든 채워 넣으려는 마음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욕심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만 생각하기 쉽지만 '버리지 못하는 마음 또한 욕심'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다못해 이미 문닫아버린 동네 치킨집의 쿠폰도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더라는 이야기는 나를 뜨끔하게 했다. 나도 뭔가를 잘 버리질 못한다. 최근들어 집 안의 불필요한 짐을 줄이고 단조롭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도 그런 가치에 동의하여 불필요한 것들은 나눠주고 쓰임새가 없는 것들을 버리려고도 하지만, 참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에서도 적용된다. 마음 속에 꿈쳐둔 원망, 서운함, 분노, 미움 같은 것들도 '미니멀라이즈'되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물질)부터 하나씩 비워내는 연습을 해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번뇌)도 하나씩 비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의 깨달음 이야기도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서 난다를 혹 아난다와 헷갈리면 안된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출가하여 십대 제자 중 한사람이 되었으며, 55세의 부처님이 80세 열반에 들기까지 곁에서 시자로 모신 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반열반경>에서도 등장한다. 불교경전의 시작은 항상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내(아)가 들었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아난다'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아난다가 아니라 '난다'라는 스님의 이야기인데, 난다는 부처님의 이복동생이다. 참고로 밝히면 부처님의 이복형제를 포함해서 사촌형제들까지 형제랑 형제는 시점만 다르지 다 출가한다. 그는 천상의 선녀가 내새에 그가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속물 수행자'였다. 하지만 어느날 지옥에서도 그를 위해 불가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충격을 받는다. 현세에 지은 복으로 죽어 천상에 태어나지만 좋은 복이 다하고 나면 다시 지옥에서 태어나 지은 죄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날 것만 생각했지 그 복이 소진되면 지옥에 갈 것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고 유한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책에 실려있는 공덕천과 흑암천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쾌락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공덕천과 괴로움과 불행을 상징하는 흑암천은 늘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 동전의 앞면만 취하고 뒷면은 버릴 수 없듯이 항상 행과 불행은 함께 하는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에서 곧 괴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즐거움이 다하면 곧 괴로움이 올 것임을 알면 좋은 일 앞에서도 오만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나쁜 일 앞에서도 슬픔에 빠져 허우덕 거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안 만이 영원한 행복 가져다 주는 열쇠가 된다.


화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가 화가 맛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이와 관련하여 '분노의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묻어 있습니다'라고 하셨단다. 화를 낼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이 쉽고 당장 시원하다.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꿀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결과는 후회와 손해로 돌아온다. 이것이 독인 것이다. 꿀과 독은 우리를 중독시킨다. 화를 내는 것을 꿀이 묻어 있지만 뿌리엔 독이 있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 재치있으면서도 공감간다. 그리고 분노를 죽이면 슬프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분노든 슬픔이든 그 뿌리는 뜻대로 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도 자연히 해결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성자의 일곱가지 재물(칠성재)과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일곱가지(무재칠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경전에는 마음의 작용과 삶의 이치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현실적인 이야기도 담겨있다.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가 졸음에 빠지자 부처님이 졸음을 이기는 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잡생각에 빠지면 졸음이 온다며 잡념을 버리라는 말씀이나 세수하고 귀를 지압하고 걸으라는 현실적인 팁도 나온다. 그 중에서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라는 충고는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또한 말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바른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실이고 진실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유익하고 듣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때가 아니면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때라는 것이 언제이냐는 생각이 들텐데, 이 부분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바로 그 때란 '듣는 사람이 들으려고 할 때,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일 때'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제 때'를 위한 기다림이 없다면 무용을 넘어 손해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래, 잊지말자.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때에 맞는 말을 해야하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 사이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라 유혹에 대한 절제가 어렵더라는 말도 공감간다. 어떤 선택을 할 때 나름 잘 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치고 결국에는 나에게도 불이익이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습관이란 참으로 무섭다. 또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렇게 후회해놓고 과거에 어리석은 선택을 똑같이 하곤 한다. 그렇기 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을 막고 유혹에 절제하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가 참선, 명상일 것이다. 여기서도 경전에 실린 참선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참선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참선으로 온갖 잡념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했지만 흔히 사람들은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참선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선후가 바뀐 것이다. 참선을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참선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화법이 마음에 든다. 조금 확대해 볼까. 사람들은 흔히들 종교에 대해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어리석음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즉 그러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그리되는 것이다.

불교경전을 다룬 것이라, 종교적인 이유로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알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무슨 종교가 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단순히 2500년 전 살았던 한 성인의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인 삶에 대한 지혜만 있을 뿐이다. 어떠한 종교적 강요도, 허황된 사후 세계의 약속도 없다. 대단한 종교적 비밀이나 기복적 횡재를 바라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시시하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던가 돌아보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와 관련된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다. 고백하자면 한번 씩 그런 생각도 든다. 다 뻔한 좋은 말과 바이블에 나오는 명구절을 돌려막기 하듯 채운 내용에 식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나를 돌아보면 대게 내 마음이 뭔가 삐뚤어져 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사람들에게도 예민하게 대하고 생각도 부정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 그랬다. 술은 기쁠 때 마시면 기쁜 맛이나고 슬플 때 마시면 슬픈 맛이 난다고. 이런 책도 그와 같아서 거울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며 혹 기분이 좋지 않거든 책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뭔가 그것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지는 않나 살펴보면 미쳐 몰랐던 중요한 것을 발견할수도 있다. 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사소한 갈등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고 식상하더라도 엄마 잔소리 치고 틀린 말은 없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을 때 더 듣기 싫은 법이다. 여러 경전을 현대인의 이야기로 쉽게 풀어 쓴 이 책을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아보면 어떨까. 우리 각자의 인생은 시시하지 않고 소중하니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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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부시향덕 2020-04-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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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단하다면 이 책에서 힘을 얻으라” - 한국불교신문

 김종만 기자 승인 2020.04.23


이미령 박사 저 ‘시시한 인생은 없다’

나약한 존재들이 내뱉는 한탄에 주목

부처님 메시지 통해 새로운 인식 환기

경전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이미령 박사가 삶의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또 하나의 책을 썼다.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하루를 보듬어주는 책의 표제는 『시시한 인생은 없다』<사진>다.


2천 6백년 전 붓다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은 경전에는 삶의 진리, 인생의 깨달음이 농익어 있지만 온통 어려운 말로 쓰여 있어 경전을 천천히 읽어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이를 감안해 『상윳따 니까야』『경율이상』『법구경』『앙굿따라 니까야』『숫따니빠따』등의 경전 속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가만히 음미하고, 곱씹으며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로 풀어냈다.



“칭찬이 밖에서 주어지는 찬사라면, 격려는 내면에서 힘을 내게 하여 그가 하려는 일을 완성하게 해줍니다.…요즘처럼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사람들이 많을 때 이 격려의 한 마디가 갖는 힘은 큽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저자는 인생의 가치, 노력, 진리, 믿음, 깨달음을 경전에서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책에서도 이들 가치, 노력, 진리, 믿음, 깨달음은 각각 하나의 장으로 구분했다. 모든 인생의 희노애략은 경전에도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자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자며 저자는 독자들을 책 속으로 안내한다.



“내가 너무 시시한 존재 같아서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숨 쉬기가 두렵다고들 합니다.”



저자는 세상의 나약한 존재들이 내뱉는 푸념과 한탄에 주목하며 이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될 때 들여다보기에 딱 맞는 책이다.



또 불자로서 경전을 탐독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경전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주목하면 좋은 안내서 구실을 한다.



무엇보다 경전을 읽고 싶지만 쉽게 읽을 수 없었던 경전을 누구보다 쉽고 이상적이게 또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글을 풀어냈다.



일상생활과 나 자신을 집어 삼키는 ‘분노’, ‘탐욕’, ‘부끄러움’ 등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경전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부처님은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에게 “분노의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묻어 있다”고 이야기 한다. 화를 내는 것은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감정의 뿌리에는 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노는 죽이면 슬프지 않다”고 다독인다.



이처럼 저자는 사람들의 내면, 그 내면의 시시함에 주목했다.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그로 인해 인생마저 시시해 지고 있는 현시대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지금과 다르지 않은 2천 6백년 전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덧 큰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처님은 중생을 늘 격려했던 분이다.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위로와 격려로 대하셨다. 때로는 환희에 찬 감격에 빠질 정도로 고무적인 장면을 만들기도 하셨다. 스스로의 잘못에 너그럽지 못하고, 잘못을 두려워하며 어리석음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법문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셨다.



“아난다 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아라한이라는 해탈열반의 경지를 조용히 미뤄왔습니다. 수많은 도반들이 자신보다 앞서 놓은 경지에 속속 이르지만 그는 여전히 낮은 자리에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제자에게 마지막 선물인 수기를 주셨지요. 제자의 깨달음을 예고하는 것을 수기라고 합니다. 여전히 공부해야 할 것이 남아 있어서 인간적 정리에 흐느껴 우는 제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건네는 그 든든한 위로, 이런 제자의 눈물과 이런 스승의 선물이 있는 곳이 불교입니다.”(본문 p254~255)



붓다의 메시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은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령 저/담앤북스/값 15,000원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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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 이미령 불교평론 [80호] 2019년 12월

불교평론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이미령  cittalm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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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써야 할 글의 제목이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예, 압니다. 많은 분들이 ‘뭐, 이미 다 알고 있는 건데. 빤한 이야기 새삼 다시 읽을 게 있을까?’라고 생각하리라는 걸 말이지요.

사실 맞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에는 특별한 이론이나 엄숙하고 진지한 수행 같은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구성원인 부모와 자식이 서로 마음을 잘 맞춰서 살면 되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자식이 잘되라고 헌신해야 하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효도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더러 양보하고 희생도 하며 살면 되는 것이고요.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면 된다는 것, 이거 모를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다 보니 가정생활과 관련해서 혹은 가족 구성원 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내용 가운데 뉘앙스가 좀 다른 경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그 말고도 또 다른 내용들이 경전에서 툭툭 나타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번 글은 그런 관점에서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엄마만 기도하면 끝?
“당신 이름으로 등 달았어.”
“네 이름으로 엄마가 보시했어.”



이런 말들 많이 듣고 또 많이들 합니다. 가족 모두가 절에 다닐 필요 뭐 있냐며, 가족 대표로 딱 한 사람만 절에 나가서 기도하고 축원하고 시주하면 된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 맞을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엄마가 아이들 대신해서 기도하고 선업 짓고 수행했나요? 그럼 엄마가 선업을 지었으니 엄마가 복을 받습니다. 자식이 복을 받을 일을 직접 해야 복을 받지요.

바쁜 남편, 일요일이니 낚시라도 가서 기분전환하고, 아내가 대신 방생 가서 물고기를 사서 남편 이름으로 강물에 풀어줬다면? 이것도 간단합니다. 남편이 낚시하러 가서 물고기를 잡고 또 그 고기를 회를 치거나 찌개를 끓여서 먹었다면 살생의 악업을 지은 것이요, 아내는 선업을 지은 것입니다.

업이란 누구를 대신해서 지어주고 또 누구 덕분에 과보를 받는 그런 게 아닙니다. 《법구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게송을 한번 음미해보지요.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은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는 것은 몸과 입으로 짓는 악업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 괴로움이 따른다는 것은 악업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말합니다.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르니, 마치 소가 수레를 끌고 갈 때 수레바퀴는 소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지요. 괴로운 과보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 원인인 행위(악업)를 따릅니다. 그러니 악업을 짓고서 괴로운 과보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음이요, 자기는 선업 짓지 않고 악업을 지으면서 다른 이의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를 함께 누리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어리석음입니다. 업을 지으면 과보가 따르니, 과보가 이 사람 저 사람 알아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행위(업)에 결과가 무르익어 과보가 따를 뿐이지요. 남편이나 자식이 즐거운 과보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선업은 남편이 혹은 자식이 지어야 합니다. 엄마가 아내가 대표로 선업을 지었다고 해서 우리 집은 잘 될 것으로 생각하는 건 정말 불교식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저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누이의 대화도 있잖습니까?

큰스님인 지눌 스님을 찾아온 누이, 그런데 누이에게 수행하고 선업도 지으라고 지눌 스님이 아무리 말해도 누이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뿐하게 넘겨버리지요.

“동기가 큰스님인데 뭐 나까지 수행하고 복 지을 필요 있나요? 난 스님 바짓가랑이만 붙잡을 테요. 스님 극락 가면 나도 가겠죠.”

그때 행자가 밥상을 들여왔습니다. 밥때가 되었으니 배도 슬슬 고팠는데, 밥상에는 달랑 스님 밥 한 그릇만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지눌 스님, 모처럼 자신을 찾아온 누이에게 ‘밥 먹었냐?’ ‘한 입 들어봐라’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혼자서만 냠냠 맛나게 먹고 그릇을 싹 비웠지요.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던 누이는 화가 발칵 나서 말했다지요.

“어찌 밥 한 숟가락 먹어보란 말도 없이 혼자서 다 먹습니까?”

지눌 스님, 태연하게 되물었다지요?

“아니, 누이는 배가 안 부릅니까? 난 한 그릇 다 먹었더니 배가 부릅니다. 내 배가 부르니 누이도 배불러야 하지 않나요?”

배가 고프면 자기가 밥을 먹어야 합니다. 남이 아무리 먹어도 내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복을 짓는 일도 그렇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선업을 지어야 하지요. 내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식’이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아내가 혹은 남편이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고 시주했다고요? 남이 대신 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복을 짓고 자신의 수행을 하고, 남편은 자신의 복을 짓고 자신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이런 내용을 봤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언젠가 길가 어느 나무 아래 앉아 휴식을 취하고 계실 때 일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장자들과 그의 아내들이 부처님에게 다가와 절을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지요.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장자들이여, 결혼생활에 네 종류가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남자와 보잘것없는 여자의 결혼생활, 보잘것없는 남자와 가치 있는 여자의 결혼생활, 가치 있는 남자와 보잘것없는 여자의 결혼생활, 가치 있는 남자와 가치 있는 여자의 결혼생활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가치 있거나 보잘것없다고 나누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으며, 그릇된 성관계를 맺고, 거짓말하고, 술을 마셔 취하고, 계를 지키지 않고, 성품이 악하며, 인색한 마음을 지녔고, 수행자를 비난하고 비방한다면’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와 정반대로 행동하면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겠지요.

이 내용에서 남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남편과 아내에게 각각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편이 훌륭하면 아내가 덤으로 복을 받는다거나, 반대로 아내가 훌륭해서 그 덕을 남편이 본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남편이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해서 아내까지 덩달아 그리되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그렇다고 해서 남편까지 ‘부부니까’ 하며 넘어가지는 않는 것이 부처님이 바라보는 부부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설령 부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선업을 지어서 즐거운 과보를 받을 때 부부니까 그 즐거운 환경에서 함께 살아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즐거움은 선업을 지은 당사자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부의 연은 어떻게 맺어지는가

불교는 사실 세속을 벗어나 구도자의 길을 걷기를 권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일들, 세상 사람들과의 인연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진정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하고, 배우자와 관계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 초기불교 입장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인 가족관계를 깨어야 한다는 점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경전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수행을 하는 데에 ‘나 홀로’는 쉽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이성(異性)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고요?

당장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주 오래전 전생 이야기(증일아함경 제11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술(超術)이라는 청년 바라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승 정광부처님에게 나아갈 때 자신의 간절하고 환희에 찬 구도심을 표할 공양물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 선미(善美)가 다섯 송이 연꽃을 건네줄 테니 그 대신 장차 자신과 세세생생 부부의 연을 맺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청년은 ‘나는 어느 생에 태어나더라도 음욕을 여의고 수행을 할 신분이므로 그 약속을 지켜줄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런 구도심도 충분히 이해하고 도울 테니 염려하지 말라’며 꽃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해서 이 여인과 청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아주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지만 수메다와 수미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이 전생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야소다라의 인연 이야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팔천송반야경》에서는 살타파륜 보살과 장자의 딸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스승인 담무갈 보살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은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슬픔에 빠진 살타파륜 보살에게 장자의 딸이 다가와 자기 재산을 기꺼이 넘겨주면서 함께 스승에게 나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지요.

이 두 이야기를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부의 인연이 새삼스럽습니다. 흔히들 말하지요.

“어휴, 전생에 웬수가 부부로 만난다더니…….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혹은 아내로) 맞았을까?”라고요.

하지만 불교에서의 부부 인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경전 내용을 보자면 오히려 한 사람의 구도행을 아름답게 완성시켜 줄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배우자라는 말이 됩니다. 또한 세간에서 부부 인연은 전생에 5백 겁(혹은 5백 생)의 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야소다라가 그렇게 연꽃으로 처음 인연을 맺어 그 후로 5백 생을 부부로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부부는 이런 지극한 인연으로 맺어진 ‘도반’입니다. 그러니 내 수행을 도와줄 배우자가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행여 배우자가 너무나 실망스럽다고 해도 그 속에서 내가 바르고 선량하고 이로운 업(선업)을 짓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저 참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나와 배우자와 자식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현실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망스럽고 원망스러운 배우자가 뜻밖에도 내 마음공부를 돕고 지혜를 키우도록 도와주는 아주 고마운 도반인 셈이 됩니다. 불교는 부부 인연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부모 따로 자식 따로

소제목이 너무 삭막하고 각박한가요?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런 뉘앙스의 내용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번에는 부모와 자식을 얼마나 개별적인 인격체로 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경입니다.

옛날 어떤 남자가 나이 60이 되어 늦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를 두었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 참 사랑스러웠습니다. 아주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영특하고 말솜씨도 빼어났지요.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이 이러하니 그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소중한 외아들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리더니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잃은 늙은 아버지는 제정신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더니 기어코 저승의 염라대왕에게까지 찾아가고 말았지요. 산 넘고 물 건너 물어물어 간신히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 늙은 아버지는 엎드려 애원했습니다.

“다 늙어 자식 하나를 두었고, 그 자식 크는 걸 보는 낙으로 이때껏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일곱 살이 되자 느닷없이 제 곁을 떠나서 지금 저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염라대왕이시여, 모쪼록 은혜를 베푸셔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죽은 이를 이승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늙은 아버지가 하도 간청하니 염라대왕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대 마음 참으로 갸륵하오. 그대의 어린 아들이 지금 동쪽 동산에서 놀고 있으니 직접 가서 데리고 가시오.”

늙은 아비는 허겁지겁 아들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은 슬픔에 휩싸인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들을 와락 껴안으며 아버지가 흐느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나는 밤낮으로 너만 생각하느라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 너는 이런 아비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이나 하고 있니?”

그런데 뜻밖에 그 어린 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말했습니다.

“미련한 이 노인은 아무 이치도 모르는구려. 잠깐 동안 몸을 의탁한 나를 아들이라 부르는구려. 부질없는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떠나시오. 나는 지금 이 세간에 내 부모가 따로 있거늘 황당하게 만나자마자 왜 껴안는 것이오.”

저승까지 찾아가 염라대왕에게 죽은 아들을 도로 이승으로 데려가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문전박대를 받고 더 서럽게 흐느끼며 결국 부처님을 찾았고 부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떠나 곧 다른 곳에서 몸을 받는다. 부모와 처자의 인연으로 모여 사는 것은 마치 여관의 나그네가 아침에 일어나면 이내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거늘 어리석고 미혹하여 얽매어 집착하고 있구나. 그것을 자기 소유라 생각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도 근본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면 생사에 빠져 끝없이 헤매고 말 뿐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은정(恩情)과 애욕에 탐착하지 않고 그 괴로움을 깨달아 그 원인[習]을 버리며 부지런히 법과 계율을 닦아 마침내 생사를 끝내게 된다.”(《법구비유경》 제3권)

가족을 가리켜서 여인숙에 모였다가 아침이면 뿔뿔이 흩어지는 객에 비유한 이 내용, 어떠신가요? 자식은 부모 소유가 아니라고 이렇게나 딱 잘라 말하는 부처님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 부처님 맞아?’ 싶을 정도입니다. 너무 냉정한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요? 낳았으니 온 정성을 다해서 길러야겠지만 자식은 자식의 삶이 있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겠지요.

《담마빠다》에서는 아예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어리석은 자는/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자기 자신조차도 제 것이 아닌데/ 어찌 아들을, 재산을 제 것이라 여기는가.


‘자식을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쳤다’고 말하는 부모를 많이 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자식을 위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자식을 통해서 내 욕심을, 내 소망을, 내 성공과 성취를 바라며 한 일이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일입니다. ‘내’ 자식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은 여러 경전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넌 네 삶을 살아라. 난 내 길을 가련다.’라며 자기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내 품 안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 하겠지요.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저 유명한 《싱갈라까에게 주는 가르침의 경》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악함에서 지켜준다. 둘째, 선(善)에 들어가게 한다. 셋째, 기술을 가르쳐준다. 넷째, 어울리는 짝을 찾아준다. 다섯째, 적당한 때에 재산을 물려준다.”

‘사악함에서 지켜준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부적 같은 것을 써준다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악한 일 즉 악업을 짓지 않도록 일러주고 일깨우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업을 짓도록 일러줍니다. 이 내용을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바로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일’과 ‘선업을 짓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간혹 학교에서 그릇된 일을 한 아이 때문에 교사의 호출을 받은 부모 중에서 자기 자식만큼은 구김살 없이 자라게 하고 싶다며 오히려 자식을 적극 변호한다는 말을 간간이 듣습니다. 자식이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이 분명하고 피해를 입은 남의 자식이 버젓이 있음에도 ‘너는 공부만 해.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라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악업을 지은 자식을 이렇게 감싸는 것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과 다음 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과연 그 부모는 정말 자식을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부모가 자식을 선업으로 인도하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 내용은 수행자들이 재가 신자에게 해야 할 의무에도 들어 있습니다. 법답게 수행하는 이들은 재가자들에게 늘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짓도록 권해야 한다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사항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세상을 먼저 살아봤고 살아가고 있는 어른으로서 자식에게는 정신적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여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행자가 재가자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살아가니까요. 결국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남에게 꿀리지 말고 떵떵거리며 살도록 해주는 것보다 먼저 자식이 자신과 세상을 위해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밤낮으로 자식 잘되기를 빌고 또 비는 우리의 부모님들이시여, 당신들은 정녕 무엇을 빌고 계십니까? 자식이 험한 일 당하지 않고 그저 꽃길만 걷기를 불보살님에게 비셨나요? 하지만 설령 부모님의 그 간절한 기도에 감응하여 불보살님이 그 자식에게 가피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자식이 그 가피를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어쩌시렵니까? 정말 자식이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면 자식이 그럴 자격을 갖추도록 비는 것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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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행복을 바란다면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린 어떤 어머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인도 땅, 신분제도가 아주 엄격한 그 땅에서 죄인의 목을 베는 일은 천한 신분인 찬달라 출신들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했지요. 어느 날, 큰 죄를 지은 죄수의 목을 베어야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망나니인 찬달라 한 사람이 죄수의 목 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비록 신분이 낮아 임금의 명을 따르고 있지만, 내 마음은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목을 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벌레 한 마리도 해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왕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명을 어기다니요. 그것도 천민 주제에 말입니다. 왕은 그 망나니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만약 저 죄인의 목을 치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망나니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놓았습니다. 왕은 그를 죽인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동생을 불러냈습니다. 인도 사회에서는 직업도 세습인지라 동생 역시 망나니 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역시 형과 똑같은 말을 하며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다시 그의 동생을 불렀고, 또 그의 동생을 불렀고…….

애초 죽임을 당한 망나니에게는 동생이 여섯 명 있었는데 다섯 명의 동생이 이렇게 처참하게 최후를 맞았고 급기야 어린 막냇동생이 왕에게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어린 그 역시 형들처럼 차라리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은 소리쳤지요.

“저 어린 망나니 녀석의 목을 쳐라!”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비극을 맞은 형제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막내아들을 감싸 안으며 제발 목숨을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간절하게 애원하자 왕은 오히려 그 모습이 의아했습니다.

“그대는 앞의 여섯 자식이 처형을 당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아들들은 남의 자식이라도 된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막내아들 일에는 왜 그리 호들갑을 떨며 살리려고 애쓰는가?”

그러자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앞서 목숨을 잃은 아들 여섯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제 마음에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범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생명이 위태롭다고 느끼면 나쁜 생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처럼 간절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 범부는 목숨에 애착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나쁜 생각에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 아들의 목숨만은 구해주십시오.”(《대장엄론경》)

왕은 어머니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이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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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머니의 모습에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을 파악하기에 아주 좋은 경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야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의 무엇을 걱정해야 하겠느냐고 경전에서 묻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식을 대신해서 아플 수도 없고 자식을 대신해서 늙어갈 수도 없고 자식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도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해서 너를 행복하게 살게 해줬다’라고 말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부모의 희생으로 마련해준 그 행복을 자식은 정말 ‘행복하다!’라고 여길까요?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만, 그게 자식이 바라는 행복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이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 차원의 행복 수준이겠지요.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의 무엇을 걱정해야 할까요? 잘 먹고 잘사는 걸 걱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식이 어떤 순간에라도 그릇된 생각을 품을까 그걸 염려하고 걱정해야 한다는 걸 이 경에서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식과 부모는 어떤 관계인가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는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었다면야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는 바람에 사람으로서 느껴야 할 행복과 보람을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며 자랐어도 알차게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젊은이도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하고 세상에 선한 힘을 미치는 경우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렇다면 금수저 집안이든 흙수저 집안이든 그것도 부모 탓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정말 중요하겠지요.

다음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줍니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 사위성에서 탁발을 하시다가 어느 공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하고 품에 안았습니다. 아이는 비록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전생에 수없이 수행을 이어온 터라 그 몸에서는 상서로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아이를 안아 들자 하늘의 제석천이 천상의 옷 한 벌을 아이에게 내주었지요. 이 아이는 부처님을 따라 사위성에 탁발을 나갔다가 어느 가정집에 들어갑니다. 그 가정집의 안주인은 아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바로 자신이 낳아서 버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머니에게는 허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내가 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금생에 어머니 배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복전이시니, 나를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부끄러워 마시고 서둘러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어머니는 커다란 이익을 얻으실 것이니, 나를 회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리의 안내자이신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공덕이 있을 것인지를 여쭈십시오.”

아이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게 이런 뜻밖의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제석천에게 부탁해서 천상의 꽃이나 옷가지 등 뭐든 달라고 합니다. 그걸 어머니에게 주어서 부처님에게 나아갈 때 공양 올리도록 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경은 아이의 이름을 따서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라 합니다.

경의 내용이 너무나 종교적이라서 현실의 모자관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주인공인 버려진 아이는 예사 사람이 아니라 수도 없이 수행을 많이 해와 금생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큰 깨달음을 얻게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불행하게 인생을 시작하고 끝까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와는 너무나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자칫 자식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친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만 같고, 자식에게는 모든 불행은 다 네 탓이니 부모 원망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이 경에서는 부모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불교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모는 한 생명을 세상으로 불러내어 이웃과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게 했고, 나아가 그 아이가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떤 절망적이고 극악한 환경에서라도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한 부모는 큰 공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경에서 보듯이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부모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닌 것이지요. 자식은 제 몫의 삶을 살려고 태어났고, 부모는 그 한 생명에게 삶의 단초를 제공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서 자식이 자기 몫의 삶을 힘차고 보람차게 살도록 하기 위해 바르게 교육하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자식은 자식 나름으로, ‘이 모든 게 엄마 아빠 탓이야!’라며 부모 탓을 하지 않고, 낳아주셔서 그저 고마울 뿐이고, 제 몫의 삶을 살아갈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해야 하겠지요.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 탓에 노력하는 데도 제대로 된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을 부모나 기성세대에게만 미루지 말고 스스로가 두 팔을 걷고 나서야겠지요. 그래야 나는 내 몸을 빌려 태어나는 내 자식에게 정의로운 세상을 펼쳐 보여줄 수가 있으니까요.

부사의광보살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장차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환경에 놓여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보살행을 실천해서 장차 부처가 될 바탕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말이 됩니다. 내 삶을 그렇게 가꿔가고 주변의  힘든 이들에게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그런 보살을 이 세상에 낳은 또 한 사람의 보살입니다.


다음 생에도 한 가족으로 만나려면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부부로 아주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나꿀라 아버지(나꿀라삐따)와 나꿀라 어머니(나꿀라마따)입니다. 이 부부는 금실 좋기로 소문났습니다. 늘그막엔 부처님 계신 절에 와서 온종일을 머물다 갈 정도로 독실한 불자 부부입니다. 어느 날 이 노부부가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주 어려서 부부의 연을 맺어 이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도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고 다음 생에도 부부로 맺어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아직 해탈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반드시 번뇌를 다 털어버리고 윤회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초기불교 입장으로서는 대답하기가 곤혹스러울 질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질문도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고 다음 생에도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싶은 범부의 소망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부가 이번 생에도 죽을 때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고, 다음 생에도 그렇게 되고 싶다면 네 가지를 함께해야 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는 함께 계를 지켜야 합니다. 셋째는 함께 보시해야 합니다. 넷째는 함께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같은 믿음과 같은 지계, 같은 보시와 같은 지혜를 지니면 부부는 이번 생에도 해로하고 다음 생에도 부부로서 함께 지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네 가지 항목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에 더 끌립니다. 부부 중에 어느 한쪽만이 이 네 가지를 실천한다면 부부로서의 인연은 이번 생으로 끝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의 배우자와 이번 생도 해로하고 다음 생에도 그렇게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이 네 가지를 지금부터라도 실천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단, 두 사람이 꼭 함께해야 한다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부부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내 자식들과 다음 생에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자식들 역시 부모와 똑같이 이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경을 음미해보면 좀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가족은 끼리끼리 같은 업을 짓고 같은 습을 익힌 자들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번 생에 한 가족으로 만났겠지요.

불교는 어떤 가정을 꿈꾸는가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보려니 어렵습니다. 가정이야말로 낱낱 개개인의 현실 삶이 출발하는 터전이고, 개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시작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 민낯을 드러내는 곳이 가정일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챙기기 위해 악업도 망설이지 않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내 가족부터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압니다. 나만,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행복해야 내 가족도 행복하고, 내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그러자면 나의 행복은 곧 세상의 행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너무 논리가 비약한 것 아니냐고 힐난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 가족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말라는 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행복하라고 권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행복하도록 노력하라고 일러주고, 우리가 행복하면 함께 기뻐해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남 보란 듯 떵떵거리는 행복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누군가의 몫에서 가져온 것이고, 누군가의 양보와 손해를 부릅니다. 그건 진짜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그렇게 말합니다. 누군가의 손해와 불행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그런 행복 말고, 오롯하게 흠 없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 하겠지요. 세속에서는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가 진짜 행복이요, 출세간의 길에서는 해탈열반이 바로 그 진짜 행복입니다. 그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고 진짜 행복을 이루는 데 혼자 힘으로 부족하니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진짜 행복해지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을 떠나 어디에서 이만큼 마음이 잘 맞는 도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순도순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고 누리고 좋은 일도 하게 해주는 곳이 가정입니다.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주 오래전 전생에 야소다라를 만나 성불의 수기를 받은 것처럼, 그리고 이번 생에 싯다르타가 성을 나와 수행하여 성불했을 때 야소다라와 라훌라가 더불어 출가 수행하여 도를 이룬 것처럼 가정은 그런 곳이라고 불교는 보고 있습니다.

가족은 내 업장이자 애물단지이자 빚쟁이나 원수 덩어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장차의 부처님들이 수행을 완성하기 위해 아내로 남편으로 자식으로 한 울타리 안에서 깃들어 살고 있는 곳이지요. 이렇게 가족에 대한 관점을 바꿔보면 뜻밖에 쉬워집니다.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가꿔갈 수 있는지 자명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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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 칼럼니스트. 동국역경원 작업에 동참하고, 사찰에서 다양한 경전 강의와 불교입문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붓다 한 말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등과, 공저로 《불교입문》 《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행복의 발견-에세이로 읽는 반야심경》 《경전의 성립과 전개》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0호] 2012년 02월 17일 (금)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윤회론 해악 허점

 윤회론 해악 허점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7.03.21 18:10
  •  댓글 22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43.

윤회론을 믿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 지금의 기억이 까마득히 지워질, 다음 생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말로는 윤회론을 믿는다 해도, 무의식적으로는 무시한다. 죽을 때 기억이 다 사라진다면 새로 태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윤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사나, 윤회를 믿는 사람들은 이생에 복을 쌓아 내생에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회개혁에는 별로 또는 전혀 흥미가 없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필요를 못 느낀다. 영원한 게임규칙인 '윤회와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윤회를 통해 실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세월 동안 무한히 윤회하는 동안, 선업만 쌓으면 어떤 규칙하에서건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왕정을 민주정으로 고치지 않더라도, 선행을 쌓아 다음 생에 왕이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될 일이다. 왕정하에서 인구의 40프로가 노비신세가 되더라도(조선이 그랬다), 그건 제도의 탓이 아니라 노비가 된 자들의 전생의 악업이 문제이다. 제도는 그들이 지은 악업을 해소할 수 없으므로, 제도를 고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노비제도하에서 고생함으로써 그들의 악업이 해소되므로, 노비제도는 좋은 제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비인간적인 일이 벌어져도, 다 당하는 사람 탓이다. 다 그 사람이 전생에 지은 업 탓이다. 그러므로 제도를 고칠 일이 아니다. 제도를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전생의 업을 씻기는커녕, 오히려 새 업만 더 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벌주려고 내리는 질병과 벼락을 방해한다면서, 백신과 피뢰침 발명을 반대한 것과 같다.

당신이 전생에 죽도록 노력해서 가축 신분을 탈출해서 지금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이 게으르고 염세적인 것은 그래서일 수 있다. 전생만 기억할 수 있다면, 부지런하고 낙천적으로 변할 것이다. 전생에 노력해서 금생에 복을 받았으므로, 금생에 노력해서 내생에 더 멋진 생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 매사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이 될 것이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내생으로의 윤회를 믿는 국가들은 활력이 없고 침체되어 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예를 들어도 소용없다. 당신을 포함한 99.9999999프로의 사람들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이 내생에 현생을 기억할 확률은 자동차 사고를 당해 죽을 확률보다 십만 배나 작다. 후생에 동물로 태어나면 문자 그대로 '0'이다. 대다수 동물은, 일 년 전 일은 고사하고, 한 달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의 수는 인간의 수보다 조 배는 많다. 사고로 죽을까봐 두려워 자동차 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불교신도들이 스님들이 아무리 겁을 줘도 윤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이해가 간다. 자동차 사고사보다 십만 배나 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즉 내생에 현생을 기억하는 일을, 어떻게 두려워하겠는가? 살인범이 감옥에 가는 대신 10년간 마취형을 당하고 10년 만에 깨어날 때 늙기는커녕 오히려 더 젊어진다면, 이건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다. 사람이 벌을 받고 지렁이로 태어나는 게 이런 일에 해당한다.)

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보라. 과학은 발달하지 못하고 점술·풍수·사주·미신·부적·점성술 등 온갖 사이비가 판을 친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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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2
해주 2017-04-22 14:29:26
윤회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께서 "육도윤회"를 가르치셨는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십이연기론이 이미 윤회설을 품고 있는데 기존 인도종교들에서 이미 회자되던 윤회론을 여섯가지 세계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가시면서 가르쳤겠느냐는 의문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불교의 윤회설이 초기에는 아수라가 없는 "오도윤회"로 설명되다가 나중에 "육도윤회"로 발전되었다는 점도 저를 의아하게 합니다.

물론 쌍윳타 니까야 등 초기경전부터 부처님께서 전생얘기를 하시는 가운데 윤회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전이나 대승경전이 모두 불멸 300-500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육도윤회설"은 불교 교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보다 체계화를 거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정도의 생각입니다.
 

그렇게공부&책을 많이보신분이? 2017-03-27 06:46:27
부처님께서 제세시에 직접 육도윤회를 가르쳐셨는지는 불명확 하지만?
,,
~~~
부처님은 진정으로 무수히 많이 강조하시면서 말씀 하시었는데도
그것을 안보셨는지 아님?
어느 가르침을 믿고?부처님 제자로써 그리 말하셔도 되는지?
진정 궁금 합니다만?

어느 부처님 가르침을 보시었고 교리는 무엇이라 보시는지?
불교공부를 ?어느 경전을 보셨는지?
~~
부처님 바른법의 경전 내용에는 이런게 두루 너무나도 많이 있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핵심 교리는 바로
인연법 & 윤회론 이라고

~~

따라서 인연법&윤회법은 불가분의 관계로써
부처님 가르침 교리의 뼈대 즉 중심 핵심이자
대부분 전체 가르침 교리가 됩니다
~~
이것을 빼고 불교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의 경전 대부분에는

하늘등 천상 이야기 인간세상 이야기 지옥이야기
축생 아귀 아수라등의 이야기가 많이 설명 하시면서
경각심과 복덕등 만드는 수행과 교훈등도 함께 설명 하시었죠

부처님은 그래서 무상 무아 일체고의 육도윤회 세계인
이생에서 받은 사람 몸 또 받기 힘드니

현생에서 부지런히 수행하여 복밭을 만들고
착한 선업의 인연과를 만들어 라는게 가르침
 

해주 2017-03-27 02:10:07
강교수님의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읽은 독자로서
강교수님이 부정하시는 윤회는 힌두교식 윤회 즉 변치 않는 나,
또는 자기동일성이 유지되는 영혼같은 나, 소위 Atman의 윤회인
걸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B.C 6세기 우파니샤드식 윤회관은
부처님의 무상, 무아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니까 당연히
불교의 윤회관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제세시에 직접 육도윤회를 가르쳐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불교에서의 윤회는 변치 않는 영혼의 윤회가 아니라 no-self의 윤회,
무아(Anatta)의 윤회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재육화 reincarnation)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명색(名色)이 업력에 따라 재탄생(rebirth)된다는 윤회를 가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뿐만 아니라 수상행식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의 영역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런데 강교수님이 윤회론을 사회개혁론과 결부시켜 윤회론을 전적으로
부정하신 것은 좀 지나친 주장인 것 같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인
慈悲喜捨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전생의 업 때문에 저렇게 되었으니 동정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
할 수 있을까요?
윤회론을 업에 의한 운명결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불교도가 있을 수
있지만 인과응보 가르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제도개혁에 반기를 들게 할까요? 저는 불교의 윤회론과 현실
사회의 개혁론이 상호배반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힌두교 윤회론은 부정하지만 객관적 검증을 거친 극소수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신기한 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행위, 선업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굳이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각의 반대가 환각인가요 2017-03-26 17:49:20
그렇다면 각이 없으신 님의 비불교 견해들이 환각일 겁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불자들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낮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강교수님처럼.

윤회를 믿지 않으면 불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중생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정으로는 윤회를 보지 못한답니다. 부처님 말씀이시니 잘 살피기 바랍니다.
 

희한한 분이시네요 2017-03-26 17:33:16
유전은 생식에 의해 부모의 DNA가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부모의 신구의 선업-불선업이 DNA 속에 담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그 후손이 부모의 선업의 과보 또는 불선업의 과보를 겪게 된다는 말인가요?
또 나의 행복과 불행은 부모의 선업과 불선업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렁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