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8

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
202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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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원
심효원은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전(前)영화사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동(同)대학 매체와예술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있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경험과 감각을 넘어서는 포스트인간중심주의가 가능한지 살피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인류세의 비가시성」(2021), 「희토류와 전자폐기물에 대한 미디어 유물론 연구」(2021) 주요 공저서로는 『교차 2호: 물질의 삶』(2022), 『21세기 사상의 최전선』(2020) 등이 있다. 유시 파리카, T.J. 디모스, 에드워드 샹컨 등의 글을 한국어로 옮겼다.
기술 미디어와 습관적 지각으로부터의 탈피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 고유의 특징을 전면화하는 것은 인간의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곤 했다. 여기서 습관적 지각은 “[사진·영화 카메라의] 렌즈만이 사물에서 습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내 지각을 감싸고 있는 모든 정신적 때를 벗긴다”1는 20세기 중반의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말을 차용한 표현이다. 바쟁은 사물의 외연을 이미지로 복제하는 카메라가 지닌 기술 미디어적 속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기에 작동 양상이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비록 바쟁의 논의는 영화를 포함한 사진 기술 미디어를 특정하고 있지만, 그의 전제는 각 시대에 주류였던 기술 미디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당대 사람의 지각의 근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예술 전반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기술 미디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작동 원리를 짚을 수 있는데, 하나는 기술 미디어가 대상의 어떤 특성을 그 장치의 고유한 방식으로 데이터화한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데이터가 대상의 특성 일부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장치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 장치적 특성이 드러내는 양상은 인간의 감각, 인지 방식을 거친 그것과 다르고, 그래서 다른 각도에서 대상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의 의미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정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üll)의 ‘환경세계(Umwelt)’ 개념처럼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은 생리학적으로도 지각 기관이 협응할 수 있는 선에서 외재적 세계와 공명할 수 있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를 정의한 적 있었듯 그동안 기술 미디어는 지각·감각의 능력들을 보완하거나 없는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순수한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닉과 테크놀로지가 언제나 결합되어있었던 인간의 기술 미디어 문화의 특수성이다.2

기술 미디어의 이러한 역할은 동시대 예술에서 어떤 시의적인 특정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이 명명한 ‘초객체(hyperobject)’처럼, 많은 경우 기후 온난화처럼 시공간적 규모와 양상이 인간 인지와 감각의 능력을 넘어서는, 우리에게 닥친 거대한 상황, 환경, 조건들을 그려보기 위한 시도의 일환에 있다. 모턴은 2010년 『생태적 사유(The Ecological Thought)』에서 초객체가 “스티로폼이나 플루토늄처럼 생각 불가능한(unthinkable) 시간 규모로 존재하는 것이며 (…) 이것은 우리의 제한되고 고정되어있으며 자기지향적인 틀을 와해시킨다.”3고 처음 명명하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동명의 책에서 그 개념을 생소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묘사하는데,4 여기에는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 생태계의 총체적인 종말이 우려되는 가운데, 생각하고 보고 행동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불안감과 공포를 느꼈으면 한다는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5 한편 인간의 한계로 인해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포는 유진 새커(Eugene Thacker)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In The Dust Of This Planet)』에서의 전면적인 주제이기도 하며, 그는 그 경험적 불가능성을 동시대의 몰인간적 신비주의로서 설명한다. 새커는 이를 불교적인 ‘공(空)’, 즉 텅 빔이라고 말하지만, 그 속성은 아무것도 없음의 허무함이 아니라 인간의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드러낼 수 없는 와해된 기반에 가깝다. 이러한 시의적 상황에서 초객체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인류세나 지구 행성과 관련한 것들을 논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리고 고유의 방식으로 형상이나 수치를 제시하는 기술 미디어의 작동을 전면화하는 방법론이 초객체적 주제와 결부된 인류세적 예술로서의 한 가지 경향이 되었다. 이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려 한다.

기술적 유형 1: 초객체를 가시화하는 데이터 시각화
첫째, 데이터 시각화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추이나 변화 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에 용이한 기법이다. 일례로 건축가 에이드리언 라후드(Adrian Lahoud)의 〈기후 범죄(Climate Crimes)〉(2018)6는 전 지구적 규모로 기후 관련 데이터를 시각화한 영상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3세계’가 쇄신된 동시대 용어로서의 ‘남반구(the Global South)’의 기후가 미국, 유럽, 중국 등의 국가가 포함된 ‘북반구(the Global North)’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 인과성을 시각화한다. 그에 따라 남반구에서 특히 취약한 가뭄, 홍수 등의 기후 재난이 국지적 현상이 아니며 전 지구적인 연쇄적인 흐름에 의한 결과임을 암시한다. 북반구로부터 남반구로 내려오는 대기 이동이 파란색과 빨간색의 상징적인 색깔 대비를 통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한편 데이터 예술가 한윤정의 〈더 퓨처 이즈 레드〉(2021)는 지난 8년간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자연적인 화재와 기후 변화와의 관계를 데이터 시각화로 제시한 미디어 기반 설치작품이다.7 작품의 일부로서 모니터 패널에는 한반도 전체 지도가 비추어지고, 지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역 위에는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빨간 원 모양의 표식이 띄워져 있다. 그 앞에 마련된 장치를 통해 수용자가 그 지역들의 정보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상호작용식이다. 마지막으로 건축가 에얄 와이즈먼(Eyal Weizman)이 주도하는 골드스미스 대학 산하 프로젝트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8를 언급할 수 있다. 웹사이트, 전시 기반 등의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포렌식 아키텍처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위계적 폭력을 조사하고 수집한 영상 푸티지, 사건 경위, 지역 및 공간 정보를 데이터 시각화로 구현한다. 여기에는 전통적 지도처럼 수평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보다 수직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3D 모델링뿐 아니라 데이터 마이닝, 원격 탐지, 패턴 분석 등의 동시대 기술이 적용되어있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사례들이 폭로하고자 하는 기후 재해나 위계적 폭력 같은 것들은 ‘폭로’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언론이나 대중매체에서 범람하고 산재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나아가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것에는 최신 동시대 시각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광범위한 대상·현상 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규모 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 공개출처정보(open source intelligence, OSINT), 즉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오픈소스들을 주요 원데이터로 삼아서 분명한 맥락으로 시각화했다는 것, 수용자들이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도록 그래픽 표식과 색깔 등으로 강조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작업들을 포함한 데이터 시각화의 예술적 사례들은 습관적인 지각의 각성적 계기일 뿐 아니라, 보다 폭넓은 층을 상대로 널리 알릴 수 있는 교육물로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데이터 시각화는 다루기에 매우 까다로운 파르마콘이다. 예술사가 T.J. 디모스(T.J. Demos)가 글로바이아(Globaïa)의 최초의 인류세 교육 포털 웹사이트를 비판했던 것도 이 점 때문이었다.9 예술과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사진이었고 데이터 시각 도구를 통해 그림이 된 그곳의 디지털 합성 이미지들이 왜곡과 은폐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라온 전 지구적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용이하게 들어오도록 규모를 축소한 시각 기술에 기반하여, 나사 홈페이지나 구글어스 같은 곳에서 촬영된 실사 이미지를 가공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행성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보조해주고, 디지털적 근본은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서 취합한 데이터들을 하나로 조합하기에 최적화되어있다.

디모스는 이러한 규모 축소가 환경 재난에 연루된 행위자들, 특히 기업의 산업적 활동과 국가의 의무까지 축소시켜 버리고, 디지털 합성은 그 이미지가 최종물이 되는 전 과정에서 개입된 주체의 존재를 지워버린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논의는 더 폭넓게는 니콜라스 미르조에프(Nicholas Mirzoeff)가 말하는, 어떤 잠재적인 것을 명확하게 그려 보이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시각화’로 수렴된다. 미르조에프는 시각화가 군사적 맥락으로 문헌에 처음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것이 지금까지 군사/국가/기업에서의 위계/권위의 유지 수단으로 기능해왔음을 지적했던 것이다.10 시각화의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데이터 시각화는 디지털의 통합적인 구성력으로 강도 높은 맥락화가 가능할뿐더러, 맥락을 구성하는 주체의 직접 발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와 수치를 경유하여 전달된다는 면에서 수용자에게 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감추려는 의도와 폭로하려는 의도 둘 다에서 유용하게 쓰이며, 이렇게 겉보기에 중립적인 이러한 이미지들의 보이지 않는 뒤편에는 이해관계와 권력 문제와 관련한 주체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기술적 유형 2: 기술에서의 비가시성 전면화
두 번째 유형으로 인간의 가시적 범위에 잘 맞도록 가공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시대 기술 미디어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비가시성을 전면화하는 방법론을 들 수 있다.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s)’와 ‘가동적 맹목(operational blindness)’ 개념이 그러한 경향을 비춘다. 그것들은 21세기에 들어서서 기술의 시각화가 인간 본위의 시각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먼저, 가동적 이미지는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가 처음 명명했고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동하는 일부로서의 이미지”11 라고 정의 내렸던 개념이다. 이미지란, 라틴어로 유령을 의미하는 이마고(imago)라는 어원을 탐색했던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12를 포함해서 죽음 극복이라는 인간의 오래된 희구에 이미지의 존재 의미를 두었던 이들에게는 어떤 실물의 재현을 전제로 한다. 그 관점에서라면 이미지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존재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파로키는 1920년대 미국에서는 인간이 촬영할 수 없는 카메라 구도를 팬텀샷(phantom shot)이라고 불렀다면서 전쟁에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폭탄의 시점샷으로부터 동시대 기술 이미지의 특징을 도출했다. 그에게 유령적인 것이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무인 처리하는 기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파로키는 세상을 구현하지 않게 된 기술 이미지의 예술적 실천으로서 2채널 설치작품 〈눈/기계〉(Eye/Machine, 2001–2003)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전쟁(1991년 걸프전)과 산업에서의 자동 이미지 프로세싱을 다루고 있다.

한편 약 십여 년 뒤 지리학적 미디어 작가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은 짧은 시간 안에 기술이 변화하여 인간과는 무관한 기계적 시각의 양상이 한층 더 달라졌기에 가동적 이미지의 의미가 구시대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드론의 자동화 패턴 인식 시스템 같은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품질 관리 시스템, 자동 번호판 인식기, 상점의 동선 추적 시스템 등 일상으로 광범위하게 침투했다. 페글렌은 아래 인용에서처럼 파로키의 〈눈/기계〉에서 화살표 같은 그래픽 표식들과 강조하는 색깔들은, 첫 번째 유형에서 인간 본위적으로 가공되었고,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목적을 지닌 그것들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한다.

가동적 이미지는 점점 더 그저 인간에게 이질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비가시적이다. 돌이켜보면, 파로키의 〈눈/기계〉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파로키의 영화는 실질적으로 가동적 이미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판독 가능하도록 설정된 가동적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기계에게는 궤적을 계산하거나 움직이는 몸체, 객체들을 인식하기 위해 자글거리는 비디오 푸티지에서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노란색 화살표, 녹색 박스 모양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이점을 위한 것, 그러니까 인간에게 기계가 보는 방식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졌다.13

그런데 페글렌이 보였던 문제의식과 그가 감지한 시대적 변화는 최근 마크 한센(Mark B.N. Hansen)의 ‘가동적 맹목(operational blindness)’ 개념과 더 적절히 부합한다. ‘가동적 이미지’가 기술을 여전히 가시적인 이미지의 영역에서 논의한 것이라면, ‘가동적 맹목’은 그것이 완전히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한센은 “인간 의식이 온전히 접근할 수 없는 인지 체계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14이라고 정의한다. 근대의 렌즈 기반 기술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확장했다면 21세기의 기술에는 인간 본위적 방식과는 다른 고유의 지각 방법이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기술 미디어가 가동하는 순간에 직접 경험될 수 없으나, 이로 인해 미래에 일련의 정신적인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용어를 차용해 정신적 개체화라고도 수식되기도 하는 가동적 맹목 개념에서 강조되는 것은 기술의 작동과 인간의 지각 사이의 필연적인 시간적 간극이다. 그 예증으로서 20세기 전후의 에티엔 쥘 마레(Étienne-Jules Marey)의 연쇄사진(chronophotography)기술이, 동시대의 〈소노라 패스 위 아홉 개의 정찰 위성(Nine Reconnaissance Satellites over the Sonora Pass)〉(2008)을 포함한 페글렌의 작품들이 거론된다. 기술 미디어는 우리의 지각과 일치하지 않는 기계적인 지각을 제공함으로써 경험 불가능한 인간 지각을 자각하고 일어난 상황에 사후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여기에 속하는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보다 그러한 잠재성을 생성하는 기술 미디어의 가동 그 자체다.

예술적 수단으로서의 동시대 기술 미디어
위에서 초객체적인 것을 인간의 지각과 감각 범위에 들어오도록 가공하는 데이터 시각화와, 이미지 처리 기술에서의 비시각성을 강조하는 시각화로 나누어 동시대 예술의 경향을 살펴보았다. 전자가 이해하기 쉬운 정보 전달과 강력한 각성을 꾀할 수 있지만 그만큼 조작적 이미지에 대한 위험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한편 후자는 기술의 비본위적 성질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되었음을 것을 강조하고, 그중에서도 ‘가동적 이미지’, ‘가동적 맹목’은 기술 자체가 초객체적인 것이 되어버린 동시대적 경향을 가리킨다. 이 두 갈래의 유형은 서로 대비되는 듯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현시대에는 기술 미디어에서 대상의 정확한 재현이나 현실의 객관적인 전달의 목표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기술 미디어가 그러한 목표의 수단이었을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최종적으로 재현, 현실, 객관성에 함의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와 그 무근본성을 발견하는 데 가닿는다. 그에 따라 시각기술과 시각성에 대한 동시대적 경향과 논제는, 인간 인식과 감각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인류세 예술의 실천과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나아간다. 동시대 시각예술은 인류세라는 주제와 기술 미디어라는 수단의 두 가지의 초객체를 동시에 다루는 까다롭고 어려운 과업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 초반에 언급했듯이 기술 미디어는 대상의 일부를 가시화하지만, 매개되는 고유의 장치적 특성으로 그렇게 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이미지에는 프레임 속 대상의 특성과 기술 가동적인 특성이 불가분으로 얽혀있으며, 둘 다 우리가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불가능하기에 그 결합으로부터 각각의 성질을 분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답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명확성에 중점을 둔다면 기술 미디어의 이미지나 수치 등의 특정 시각적 형태와 특정 객체의 성질을 등치 시키는 실수를 부지불식간에 저지르기 쉬워진다. 인간의 통계학적 연구에서 종 모양의 가우스 곡선과 그 측정의 정확성에 골몰하다가 도표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평균인간(homme moyen)’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19세기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를 그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15

분별이란, 그 동기가 인류의 뒤늦은 자기반성이든, 태커나 모턴이 말했던 공포든, 멸종 위기에 놓인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존본능이든 관계없이, 어떤 성질을 정확하게 밝히고 파악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오래된 이분법적 앎이라는 습관이다. 그러나 인류세적 상황에서는 어떤 것을 더 알아야 하기보다는 저 너머의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의식적인 실천이 더 중요하다. 어쩌면 과거에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다뤄졌던 것들이 지금 가장 실질적인 층위에서, 초미의 실천적 문제로 돌아와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시대의 여러 사상적 실험들이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저쪽 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층위와 각도에서 강조하고 있다. 퀑텡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권리상 불가능한 세계[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지 사실상 [언제든지 과학의 관계로 발전될 여지가 있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16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듯, 어떤 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저 너머의 것들을 언젠가 우리가 파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잠재적인 상태로서 대하는 또 다른 인간중심주의일 수 있다.

동시대 기술 미디어가 예술적 실천에서 무엇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지를 한센의 논의를 참고해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기술이 인간과 분리된 독자적인 능력으로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재설정할 수 있는 전개체(pre-individual)적 역량일 것이다. 그에게는 맹목이 인간을 감각적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며, 지각 못하는 영역으로 확장시켜 인간을 변화시키도록 촉진하는 개체초월화(transindividuation)와 더 맞닿은 동시대 기술 미디어의 매개적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시대 미디어 기술의 가동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과 기술의 짝지음을 ‘기술적 대상’의 형상을 넘어서서 재개념화해야 한다.”17 확실히 인간중심주의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돌이켜보고 자각할 수 있는 여러 방편으로 사례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는 중요한 목표로 보인다. 기술 미디어를 기존의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나는 창조적 수단으로 삼는 것이 이러한 시도에 합류하는 시의적인 방법론이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는 ‘제작’입니다.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1945)」,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194. ↩

존 더럼 피터스, 『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옮김(서울: 컬처룩. 2018), 135-140 참조. ↩

Timothy Morton, The Ecological Though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19, 130-135 참조. ↩

다음의 책 참조.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한편 가장 최근의 저서인 『저주체 인간 되기에 관하여』(Hyposubjects: On Becoming Human)를 통해 인류세의 고유종으로서 ‘저주체(hyposubject)’라는 개념을 제시 및 탐구 중이다. 저주체의 특징은 ‘transcendental(초월적)’인 것과는 반대말인 ‘subscendent(하부적)’이라는 또 다른 신조어로 묘사되는데, 이는 다양한 개별존재들이 지닌 외재적인 활동 양태를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류세라는 거대한 규모로 압도될 수 있는 존재의 다양한 면면들을 희석하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 논의를 세부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저주체들은 그동안 초객체의 영향 하에 대부분 있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Timothy Morton and Dominic Boyer, Hyposubjects: On Becoming Human (London: Open Humanities Press, 2021). ↩

Laura Hudson, “At the End of the World, It’s Hyperobjects All the Way Down,” Wired, 2021. 11. 16, https://www.wired.com/story/timothy-morton-hyperobjects-all-the-way-down/. ↩

Victoria and Albert Museum, “The Future Starts Here project focus | Adrian Lahoud: Climate Crimes,” https://youtu.be/Rn8o7zLIUCc. ↩

Yoon Chung Han, “The Future is Red,” http://yoonchunghan.com/portfolio/the_future_is_red.html. ↩

Forensic Architecture 웹사이트, https://forensic-architecture.org. ↩

다음 책의 1장 “Welcome to the Anthropocene!” 참조. T.J. Demos, Against the Anthropocene: Visual Culture and Environment Today (Berlin: Sternberg Press, 2017). ↩

Nicholas Mirzoeff, “Visualizing the Anthropocene,” Public Culture 26(2) (2014), 216. ↩

Harun Farocki, “Phantom Images,” Public 29 (2004), 17, https://public.journals.yorku.ca/index.php/public/article/view/30354. ↩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서울: 시각과 언어, 1994), 21. ↩

Trevor Paglen, “Operational Images,” e-flux, Issue 59 (November 2014), https://www.e-flux.com/journal/59/61130/operational-images/. ↩

마크 B.N. 한센, 「트레버 페글렌의 현상기술적 미학」, 『기계비전』, 박신희 외 옮김(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9, 24. ↩

케틀레는 인간의 특성을 양적 측량으로 수치화한 데이터를 복수로 비교함으로써 유의미한 관계를 도출하고자 했던 19세기 벨기에 통계학자다. 당시 체중과 신체의 비율을 수치화한 케틀레 지수(Quetelet index)가 현재 BMI(Body Mass Index)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그는 가우스와 라플라스의 천문학적 측정 방식을 사회와 인간에 처음 적용했고, 언뜻 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생물학적·사회적 특질에서도 어떤 집단적 인과성을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집중했다. 평균인간까지 가 닿은 오차이론 관련한 그의 시도와 당대 통계학적 맥락에 대해서는 다음의 국내 논문을 참조할 것. 조재근, 「19세기 중반 오차와 정규분포의 역사」, 『CSAM』 15권 5호 (2008.09): 737-752. ↩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엄태연 옮김(서울: 이학사, 2017), 11. ↩

Mark B. N. Hansen, “Technics, Transindividuation, & 21st-Century Media,” SubStance, Volume 41, Number 3 (2012), 51. ↩

 (출처: 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

Humankind by Timothy Morton review – no more leftist defeatism, everything is connected

Book of the dayPhilosophy books

Review

A bracing book from the fashionably wild thinker embraces anarchist and Buddhist ideas in an argument for solidarity with all that exists



Stuart JeffriesWed 23 Aug 2017


In 2015, Cecil the lion was shot with an arrow by a big-game hunting American called Walter Palmer. Facebook and Twitter erupted in outrage against the insouciant dentist, UN resolutions were passed, Palmer was stalked and his extradition to face charges in Zimbabwe demanded.

Timothy Morton takes Palmer’s flash-mob shaming as a hopeful sign. We may be living in dark times – the epoch he and other radical thinkers call the Anthropocene, in which our species has committed ecological devastation, presided over the sixth mass extinction event (animal populations across the planet have decreased by as much as 80% since 1900) and got our degraded kicks by offing lovely lions. But, in a dialectical twist, humans are becoming so aware of what we’ve done that we are now capable of bringing about change.



Morton sets out a political programme of liberating humans from the “patriarchal, hierarchical, heteronormative possibility space” that has constrained our species ever since our ancestors started farming in Mesopotamia 400 generations ago. It was then, he asserts, that humans started hubristically carving up the biosphere. Ever since, he contends, our very thinking has become rapaciously binary. Consider the Platonic distinction between body and soul. Consider Descartes’ implicit suggestion that other animals are furry robots. Consider what Dostoevsky saw when he visited Joseph Paxton’s Crystal Palace: he found in it a metaphor for western civilisation, an immune system that brought the world’s most diverting flora, fauna and industrial products under one roof, while whatever remained outside (war, genocide, slavery, unpleasant tropical diseases, human waste, expendable life forms) dwindled into irrelevance.

We have airbrushed out the historical disaster Morton calls “the Severing”, a name that gives his argument a voguish Game of Thrones-like vibe. “The Severing,” he explains, “is a catastrophe: an event that does not take place ‘at’ a certain ‘point’ in linear time, but a wave that ripples out in many dimensions, and in whose wake we are caught.” The severing resembles the central trauma of Philip Pullman’s His Dark Materials novels. In that imagined world, children each have their daemons – until, that is, organised religion (evil Nicole Kidman in the film adaptation The Golden Compass) brutally severs the symbiotic pair in order to subjugate humanity. For Morton, our task is to become haunted beings again, possessed by a spectral sense of our connectedness to everything on this planet.
Cecil the lion in Hwange national park, Zimbabwe. Photograph: Reuters

How might we do that? Morton here attempts to retool Marxism to accommodate oppressed non-humans. Tough gig: Marx’s thought is, you’d think, hopelessly anthropocentric, a philosophical artefact of the Severing. Morton demurs. His book is about adding “modes of anarchist thought back into Marxism, like the new medical therapy that consists of injecting fecal matter into another’s ailing guts”.


His fecal shock therapy sometimes seems like a quack cure, but one disarming aspect of Morton is his hopefulness. He loathes the smug leftist defeatism of his academic colleagues – their sense that capitalism won, that Earth is done, and all that remains is for self-serving professors to ringfence their critiques of neoliberalism and ecological ruination inside intellectual cordons sanitaires. In the Anthropocene, he realises, everyone is implicated. Even theory professors don’t have clean hands.

Against defeatism, he pits hope. The size and scope of the outrage over Cecil’s killing was, he argues, very different from, say, the Save the Whale protests of the 1970s. “The year 2015 was when a very large number of humans figured out they had more in common with a lion than a dentist,” he claims.

Without wishing to sound pre-fecally defeatist, though, I’m doubtful. I don’t think the reaction to Cecil’s killing suggests we have anything significant in common with lions. Rather, the flash-mob shaming might well be thought of as projected self-loathing premised on realising that Palmer is the barbarous flipside to what we call human civilisation.


'A reckoning for our species': the philosopher prophet of the Anthropo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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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is earlier book Dark Ecology Morton was on to something like this. He reflected that in Ridley Scott’s dystopian thriller Blade Runner, the protagonist Rick Deckard (Harrison Ford) comes to suspect he might be the enemy he has been ordered to hunt down. Humanity in the Anthropocene is like Deckard: we realise with – ideally, revolution-catalysing – horror that we are the problem.


There’s another possibility Morton too quickly dismisses. Zambia’s tourism minister Jean Kapata had a point when she suggested the reaction to Cecil’s slaying showed westerners care more about African animals than African humans. No matter. We should, Morton argues in this exasperating, beguiling, intellectually reckless and restless book, have solidarity with non-humans – not just with charismatic megafauna such as Cecil, but algae, cutlery, rocks. This follows from his adherence to object-oriented ontology, the argument that nothing has privileged status and philosophers exist equally with Xboxes and excrement.

That’s right – excrement. Even the stuff we throw away demands our solidarity. “The waste products in Earth’s crust are also the human in this expanded, spectral sense,” Morton writes. “One’s garbage doesn’t go ‘away’ – it just goes somewhere else.” Good point, though I’d like him to argue that point in front of those living through the second month of Birmingham’s refuse collectors’ strike this summer.

Morton’s garbage is like Freud’s return of the repressed, in that it comes back to bite us in the philosophical ass: what we excrete remains part of us, as do the plastic bottles on landfill sites we thought we’d got rid of. Even more chasteningly, he insists that humans are not just composed of stardust (as Joni Mitchell once suggested), but of viruses, rubbish and bacteria. One-third of baby milk, for instance, is not digestible by the baby; rather it feeds the bacteria that coats the intestines with “immunity-bestowing film”.

But how can we have solidarity with non-humans? One way, Morton suggests, is to abandon the anthropocentric idea that thinking is the leading communication mode. “Brushing against, licking or irradiating are ask access modes as valid (or as invalid ) as thinking,” he writes. If he really wants solidarity with Cecil and algae, he should publish – somehow! – an edition of Humankind that can be accessed by licking, floating through, brushing against.
‘Like Harrison Ford’s Deckard in Ridley Scott’s Blade Runner we realise with horror that we are the problem.’ Photograph: Sportsphoto Ltd/Allstar


Morton, wonderfully, doesn’t balk at the nutty repercussions of his interdependence thesis (what he calls “implosive holism”). He asks at the outset: “Am I simply a vehicle for numerous bacteria that inhabit my microbiome? Or are they hosting me?” In what he calls the symbiotic real, it’s not clear who is host and who parasite. All this recalls how Montaigne thought himself out of anthropocentrism with his remark: “When I am playing with my cat, how do I know she is not playing with me?”

Morton, British-born professor of English at Rice University in Texas, is a fashionable thinker, the Montaigne of the Anthropocene – so much so that he was recently honoured with an appearance in Private Eye’s Pseuds Corner. True, he’s anathematised by philosophy departments for the wild thinking that makes him attractive to artworld hipsters such as Björk, Olafur Eliasson, Hans Ulrich Obrist and Philippe Parreno. And yes, he may be a hypocrite (he racked up 350,000 air miles last year while hectoring us non-non-humans on our ecological crimes). But his developing anarchic communism is bracing. Here he heretically argues that consumerism, far from marking humanity’s spiritual ruination (that default critique of our fate under late capitalism beloved of Frankfurt School miseryboots), might help promote ecological awareness, since it involves allowing ourselves to be haunted by things so that we can become the spectral humans he yearns us to be.
Morton's wild thinking has attracted Björk, Olafur Eliasson, Hans Ulrich Obrist and Philippe Parreno

Here too he suggests we scrap the concept of “nature” and reclaim the upper scales of ecological coexistence, rather than – as the blurb deliriously has it – let agrochemical company “Monsanto and cryogenically suspended billionaires define them and own them”. You don’t have to holiday at Center Parcs to realise that “nature” is a hyperreal simulation devised to blind us to the “agrilogistic” rape of the Earth, but it might help you get inside Morton’s mindset.

He is hardly the only philosopher to attempt to overcome anthropocentrism. Jeremy Bentham once devised an empathy test: “The question is not Can they reason?, nor Can they talk?, but Can they suffer?” Can rocks suffer? Frankly I don’t know. Maybe I should ask my bowel bacteria. What I do know is that for Morton that kind of test is anathema in his quest for solidarity with non-humans, since such utilitarianism is too mired in agrilogistic liberal economics to serve as revolutionary ally.

Instead, he borrows from Russian anarchist Peter Kropotkin the idea of “mutual aid” to flesh out of what he calls towards the end of the book “kindness”. Kropotkin detected kinship between how ants and beetles bury their dead and how working-class Russians co-operated. All act not out of empathy, but from something more basic which Morton describes as “the zero-degree cheapest coexistence mode, something you rely on when all else fails”. If this is kindness, Tim, it’s not kindness as I’ve hitherto known it.


Morton’s kindness is to do with being permeated by other beings, in recognising there is no inside-outside binary. The new human he yearns for passively allows him or herself to be infected by the healing solidarity of non-humans.

I struggle, too, with his theory of passivity with which he ends the book. He calls it “rocking”, and it derives from his reflections on Buddhism. “This theory of action has to do with a highly necessary queering of the theistic categories of active versus passive.” Rocking involves a quivering awareness of the interconnectedness of everything. We may think – in our heteronormative, hierarchical way – that rocks are inert, but really if we allowed ourselves to, we might realise that even rocks, well, rock. Morton isn’t talking about mindfulness – which he, I think rightly, takes as a lie to keep willing subjects working at being calm and thus keeping capitalism’s foot on our collective throat – but about a pleasantly mystic sensual communion with all that is.

How does passive rocking help bring about communism? Should we throw rocks at our oppressors or refrain from doing so because it would hurt their (the rocks’) feelings? I don’t know. I’m doubtful too whether Morton’s ardent book is sufficient to the moment in which any communism is outsmarted (maybe that should be outstupided) by Trump’s neoliberalism. But that’s probably because I’m hobbled by the very mindset Morton here excoriates, namely “retweeting the agricultural age religion that is gumming up our ways of imagining a different future”. Sorry for doing that, professor.

Humankind is published by Verso. To order a copy for £14.44 (RRP £16.99) go to guardianbookshop.com or call 0330 333 6846. Phone orders min. p&p of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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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 별업, 공업 - Google 검색

연기론, 별업, 공업 - Google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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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업 뜻: 중생이 각기 다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개별적인 업(業).

wordrow.kr
https://wordrow.kr › 사전


별업: 중생이 각기 다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개별적인 업(業). ... 노 메이크업, 이십일 세기 사대 신산업, 오위업, 유기 화학 공업, 죽염 산업, 도시가스 사업, ...


테라와다의 관점에서 본 공업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https://blog.naver.com › dlpul1010


2018. 1. 3. — 고 주장한다.12) 남궁선은 불교에서 업 이론은 연기(緣起, ... 
그래서 이 말은 공업(共業)과 반대되는 개인의 업 즉 별업(別業)을 가리킨다. 하.


[아뢰야연기론(阿賴耶緣起論)] 윤회의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eunjeoksa.or.kr
http://www.eunjeoksa.or.kr › ...



2006. 3. 14. — 아무튼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 가운데 별업(別業)은 자신만이 수용하고, 공업(共業 :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과보를 받는 업)은 다른 ...


hyunbulnews.com
http://www.hyunbulnews.com › ... › 함께가요 강의실







2012. 12. 1. — 역사는 곧 연기…통합적 이해 필요 별업·공업 서로 영향주며 업 축적 습기 때문에 방향 전환 어려워 원효 “악업의 장애 참회로 제거”.


불교 '신종코로나' 대응, 행사 연기 등 분주
http://www.hyunbulnews.com › 종합 › 사회ㆍNGO




2020. 2. 4. — 원행 스님은 “업이라는 것은 별업이 있고 공업이 있는데 혼자 짓는 게 있고 여럿이 짓는 게 있다. 공업으로 바이러스 등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주필칼럼]공업(共業)과 별업(別業) < 시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kbulgyonews.com
http://www.kbulgyonews.com › 오피니언 › 시론



2020. 2. 17. —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이다. 공업은 '저마다 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인과응보를 받는 일'을 말한다.
누락된 검색어: 연기론, ‎| 다음 정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연기론,


무여열반과 단멸론 - 불교닷컴


bulkyo21.com
http://www.bulkyo21.com › news › articleView


2014. 11. 10. — 공업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업의 작동은 공업과 별업의 연기작용(緣起作用)이다. 더 넓게는 유정세간업(有情世間業 생명계의 업)과 기세간업(機世間 ...


붓다가 오늘의 한국 중생에게 던지는 말 - 뉴데일리


newdaily.co.kr
https://www.newdaily.co.kr › data › html › 2017/12/23




2017. 12. 23. — 불교의 진리는 한마디로 연기의 진리, 즉 연기법(緣起法)이라 할 수 있다. ... 공업에 상대되는 개념은 물론 '별업(別業)'또는 '불공업(不共業)'이다.


실상사의 "작은" 그러나 "큰" 승려 - 참여연대 -


peoplepower21.org
http://www.peoplepower21.org › Magazine



2002. 1. 1. —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모든 존재는 상대적인 의존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우주 만유에 ... 공업에 대한 별업의 관계를 좀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Sejin Pak - [건강과 행복의 과학] 내장과 행복이 무슨 상관? <배가 말해주는 직관> --- 이전의 글에서... | Facebook

[건강과 행복의 과학] 내장과 행복이 무슨 상관? <배가 말해주는 직관> --- 이전의 글에서... | Facebook

[건강과 행복의 과학] 내장과 행복이 무슨 상관? <배가 말해주는 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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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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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행복의 과학>이라는 온라인 강좌의 제6강에서 <내장과 행복>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이야기는 우선 <내장과 뇌>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1990년에 와서 내장에 있는 균이 <좋은 균>도 있고, <나쁜 균>도 있다는 인식이 시작되어 <좋은 균 상품> 마저 개발되고 책도 나오고 했지만, <내장의 균>이라는 인식은 <장내 미생물군 microbiota>라는 인식에는 아직 못 미치고 있었다.
- <장내 미생물군 microbiota>이라는 것은 인간의 몸안에 특히 내장안에 균이 살아있는데 좋은 균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수많은 여러 종류의 <미생물군>이 함께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조직체와 같은 존재로 있다는 이해이다. 이 조직체는 일종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뇌와도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 안에 들어있지만, 인간의 의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움직이는데, 인간이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까지 알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에도 <배로 안다>는 표현이 있는데, 과학적이지는 아니나 이제야 점점 밝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배로 안다>는 것은 머리보다 빨리 직관적으로 뭔가를 안다는 이야기이다.
- 그런데 인간의 몸에서는 뇌와 내장 <장내미생물군>사이에 소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Gut-Microbiota axis (일어로는 脳腸相関 뇌장 상관)이라고 부르는데 내장의 이런 기능에 대해 알게된 것은 지난 몇년 사이에 미국에서 시작했고, 그 후에 일본에도 알려젔으나, 물론 미국 만큼은 아니다.
- <내장과 행복>이라는 말은 <내장이 편해야 행복하다>는 내장을 지능이 없는 신체 부분으로 생각하고 그 부분의 상태가 좋으면 (배속이 편하면) 나도 편하다는 정도의 이해가 아니고, <내장의 기분>을 이해하고, 그 기분에 마추어 주여야 <나>도 행복하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자 될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뇌>와 뇌화학이 가저오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는 <나>라는 것은 <두뇌의 나> 만이 아니라 <내장의 나>라는 것이 있으니 이 둘의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같으다. 그런데 아직까지 ,마음의 나>에 대해서는 나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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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나오는 글과 비데오가 <뇌장상관>에 대하여 짧게 잘 설명을 하는데, 영문글로도 있어서 한국어로 구글 번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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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을 믿으세요: 뇌-장 연결이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2021년 10월 1일 게시됨 출처 BrainFacts/SfN
뇌와 장 사이의 양방향 통신은 식사를 소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이상을 수행합니다. 직관적인 의사 결정과 같은 더 높은 인지 기능도 지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직감적인 결정"은 옵션을 신중하게 고려할 시간이 없을 때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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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뇌인지 영상 공모전 영상입니다 .
Aline Ivy Salillas가 제작했습니다.
BrainFacts/SFN에서 제공하는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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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을 믿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직감을 찾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뇌와 장 사이의 양방향 통신 덕분에 직관적인 의사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중추 및 말초 신경계 외에도 우리 몸에는 식도에서 직장까지 약 1억 개의 뉴런을 포함하는 장 신경계가 있습니다. 장의 뉴런은 장 감각을 생성하는 경로를 제공하며 감각 신호를 뇌와 척수로 전송하여 이러한 감각에 작용합니다. 소화관 내벽에는 신경족 세포라고 하는 구심성 뉴런과 연결되는 장내분비 세포가 있으며, 이 세포는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복부에서 뇌로 이어지는 미주 신경을 통해 소화관에서 뇌간으로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 결과 뇌 장축(brain gut axis)이라고 하는 뇌와 장 사이의 양방향 통신이 이루어집니다.
뇌 장 축 (The brain gut axis)은 우리의 소화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기 부여와 직관적인 의사 결정과 같은 더 높은 인지 기능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제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내수용성 (interoception), 즉 신체의 내부 상태를 감지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전두엽 피질에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합니다. 이러한 내수용 신호는 우리 환경에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불행하게도, 뇌 돌출 네트워크의 중앙 허브인 섬 피질 (the insular cortex, the central hub of the brain salience network )에 의해 이러한 신호의 단편만이 우리의 의식으로 전달됩니다. 돌출 네트워크의 임무는 이러한 내부 수용 신호를 필터링하고 처리하여 의식적인 인식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호는 불편함과 고통을 수반하는 우리의 직감을 생성합니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피하고 싶은 직감을 경험했거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즉시 많은 옵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화한 이후로 우리의 직감은 이미 생존 본능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직감은 우리의 조상이 포식자나 천연 독에 접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계하는 방법과 같은 생존 유형 시나리오에서 빠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선택을 평가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의 직감을 신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한 연구에서는 감정 기반 의사 결정의 이점을 조사하여 참가자에게 각각 고유한 기능 세트가 있는 4대의 가상 자동차를 제시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자신의 감정이나 각 옵션에 대해 언급된 기능에 따라 최고의 자동차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바탕으로 기능보다는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복잡한 결정에 대한 선택의 질을 높였습니다.
우리의 직감은 또한 금융 거래와 같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우리의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금융 거래자와 비거래자의 내수용 능력을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직감이 강한 트레이더가 의사 결정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나타내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트레이더가 거래 분야에서 더 성공적임을 시사합니다.
직감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복잡할 수 있지만 결정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위험한 시간 제약 환경에서 더 나은 선택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두뇌-장 연결은 우리의 직관과 의사 결정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차를 고를지 결정할 때 수많은 복잡한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우리의 직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를 직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에 유의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결정의 합리적인 세부 사항을 고려해야 하지만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이러한 세부 사항을 과도하게 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직감을 위해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우리의 직감을 맡기는 것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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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종교신학강연 20230624

 이찬수 종교신학강연 20230624

종교신학의 배경

다원주의적 인식론의 출현

  • 종교신학의 등장
  •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
  • 종교다원주의
    • Karl Rahner 진실한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다.
      그리스도의 은총론을 신론 수준으로 확대하면서
      신학적 정체성과 타종교 포용성을 동시에 추구
  • 종교신학의 한계
    •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진리나 실천이나 수행보다,
    • 명제적 진술을 통해 포착하고 표현하려고 시도
    • -> 교리와 신조 중심으로 발전
    • 교리와 신조에 동의하는 행위를 신앙으로 간주
    •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기준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는 경향
    • 종교신학은 이런 배경의 연장 분위기
    • 동양, 한국에는 도그마 중심의 전통 거의 없어
    • 종교불학? 종교유학 종교도학? 거의 불가능한 구조
    • 종교신학은 기독교 교리/신조와 다른 종교의 교리/신조와의 비교를 전제
    • 배타주의는 물론 포용주의/다원주의도 다른 종교의 교리, 언어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엇비슷


  • 종교신학의 근본문제

  • 모두 객체
    • 모든 객체는 그저 무수한 객체들과 함께 실존하여 행위
    • 세계는 주체중심이 아닌 객체지향적일 때, 그 존재성을 확보
    • 사물도 인간에 인해 이닉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그냥 거기에 있다.
    • 인간도 그 객체들과 함께 있음으로 존재한는 하나의 객체
    • 지구도 하나이 객체, 미생물도 객체, 신학도 객체, 불교도 객체, 세계는 객체들의 상호 연결


  • 모두가 객체이다.
    • 종교는 객체이고 신학은 주체인가?
    • 종교는 정적이고, 신한은 동적인가?
    • 그렇게 보아온 것이 지금까지 종교신학의 주류
    • 그러나 종교 (가령 불교학)를 주체로 보면 신학은 객체
    • 서로가 주체로만 보면 갈등
    • 모두가 서로에게 객체라는 인식이 필요
    • eg 객체지향 존재론 object oriented ontology의 통찰 수용 필요

  • 객체지향론 존재론
    • Graham Harman
    • 객체는 인간에 의해 다 파악되지 않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나 그것이 다른 사물들에 행하는 효과들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
  • Timothy Morten 이러한 객체를 초객체(hyperobject)라고 명명
  • 모든 객체는 다른 객체와 연결되며 지구 전체로 이어있는 매우 거대한 사물 시야에 다 안들어와.
  • cf 불교의 연기론, 별업, 공업
    • 외파적 전체론 explosive holism
    • 내파적 전체론 implosive holism
비교신학
  • 종교신학의 미래
  • 객체지향적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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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Rahner 진실한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다.
그리스도의 은총론을 신론 수준으로 확대하면서
신학적 정체성과 타종교 포용성을 동시에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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