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4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다나카 유

소개

야기 세이이치 선생님의 발표 요지는

첫째, 신약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신약성서학)

둘째, 그것을 현대인에게 통하도록 말씀하면 어떻게 될까(종교철학 혹은 철학적 신학)

셋째,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방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실천론)

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저 『창조적 하늘로의 길』, 한층 더 「내 일에 대해」에서 참고문헌으로서 나타낸 야기 선생님의 반세기에 걸친 저작군을 안내해, 상기의 3개의 시점으로부터의 선생님의 일에 대해서 회고 한편, 그것이 미래에 대한 의미를 말했다.

야기 세이이치 선생님(이하 경칭 생략)의 일은 신약 성경의 텍스트 석의를 모체로 하면서 언어/사유 이전의 직접 경험에 몰두하는 종교 철학으로서 전개되었지만, 그 연구 발표의 하나의 중요한 장소 가 동서종교교류학회(The Japan 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였다(1). 불교자와 그리스도자와의 영성 교류와 종교 철학적인 대화를 목표로, 1982년에 설립된 이 학회에 제가 입회한 것은 1985년이었지만, 그 해 의 대회 테마는 「불교와 기독교의 접점」이며, 강연자의 니시타니 계치를 둘러싸고 이틀간에 걸치는 집중 토의가 행해졌다. 니시타니 케이지의 강연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개인·공동체·세계'의 세 가지 관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접점을 고찰할 필요성의 지적이다. 34년의 세월을 경과한 후 다시 니시타니의 말을 회고하고 재인식한 것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세계 종교에 공통되는 종교적 실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경우 특수·보편의 3자를 불가분한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상호매개·상호내재의 구조를 동태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또 하나는, 「친무의 <이쌍사중의 교판> 이후, 일본의 불교자가 <교상판석>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왜인가?」라고 하는 니시타니의 질문이었다. 종교간 대화로 말하는 inclusivism(포괄주의)의 대승불교적 형태로서 「교상판석」이 있어, 단 하나의 선택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진실한 것으로 하면서도, 다른 여러 종파를 단적 허위로 척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를 채택하지 않고, 진실한 가르침으로 이끄는 잠정적인 가르침(방편), 혹은 부분적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는 입장이다. 잡다한 제종교·제종파가 세속화하고 형체로 된 현대에 있어 포괄적인 통합적 진리에 대한 질문에 일본 불교도 다시 한번 돌이켜서는 안 된다는 질문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니시타니는 '심전을 경작한다'는 표현으로 농부가 논을 경작하고 씨앗을 뿌리고 벼의 성장을 지켜 결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인의 마음에 언급됐다. 불교도 한때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외래 종교였지만, 토착민의 종교심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을 섭취하여 일본 문화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보편적인 세계 종교의 '문화 내 개화'라는 문제는 대승 불교에 한하지 않고 기독교에게도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서종교교류학회와 함께 제가 30년 이상에 걸쳐 계속하고 있는 또 다른 학회 활동은 일본 화이트헤드 프로세스 학회이다. 이 학회의 초대 회장인 야마자키 마사이치는 경시, 고마바의 대학원의 비교 철학 연습으로, 오전중에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오후에 도원의 「정법 안장」을 텍스트로 하고 있었다. 야나카 흥젠지의 주직인 동시에 일본철학회 회장이었던 야마자키는, 「수문기」의 교정 주석의 일을 하고 있어 그 「정법 안장」독해는, 임제종이나 조동종이라고 하는 때와 종파 의 구별을 넘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구별을 넘은 보편적인 문명론의 시점으로부터 길을 논하는 것이었다. 야마자키의 칸트 해석 내지 비판도 마찬가지이며, 종래의 일본에서 지배적이었던 강단적인 칸트 해석보다, 존 록으로 시작되는 영국의 경험론의 전통을―평명한 말로 일에 맞춰 라고 말하는 철학이면서도 전통적 권위를 비판하는 근원성을 안에 숨기고 있는 것으로서 평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선·미의 세 가지 가치를 통합하는 칸트의 근본 자세에는 공감을 기억했지만, 칸트 철학 자체는 '단지 이성의 한계' 속에서 에서만 종교를 말하는 점에 종교 철학으로 보는 한 불만이 남았다. 그와 동시에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의 연구로부터 철학으로 전환한 것으로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아프리오리즘은, 그대로의 형태로는, 대단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공의 주관적인 직관 형식과 순수한 오성 개념이 경험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아프리올리한 종합 판단이 가능해져, 그것이 순수 수학과 물리학을 기초로 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그 논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에 개정 불가능한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한 후, 그 인식론적인 근거를 묻는다는 논의가 되었다. 그 때문에, 20세기에 생긴 수학과 물리학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환에, 칸트의 인식론 그대로는 대응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칸트의 논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내장하는 상대성 이론, 비인과적 상관을 내장하는 양자역학, 비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를 주제로 하는 현대 논리학의 현장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

고마바 대학원에서는 나에게 또 하나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비상근 강사로서 가미치 대학에서 동대 고마장에 출강된 栁瀨睦夫의 「과학기초론(양자역학의 관측이론)」의 세미나였다. 이 연습에는, 친숙한 비상근 강사로서 고마바에 출강되고 있던 혼고의 철학과의 야마모토 노부, 그리고 동대 물리학과에서 栁瀨과 동기였던 오모리 장장도 참가해, 원생들과 3명의 선생님 에 의한 백열한 논의가 계속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 되어 회상하면, 과학·철학·종교의 3개의 영역의 교차하는 장소에서 일을 해 온 나는, 다양한 형태로 야마자키 마사이치, 야나세 아츠오 양 선생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해 (2).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분리 불가능한 전체를 테마로 한다는 생각, 양자론과 상대론을 통합하는 (향후) 물리 이론의 기초가 되는 실재 이론은 어떤 일이 되는가, 라는 질문을, 나는 栁瀨 선생님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리학자인 동시에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야나세에는 '신의 원래 과학-숨겨진 실재론'이라는 유저가 있으며, 거기서는 '과학과 기독교 신학'이라는 두 영역을 통합 하는 독자적인 사상이 말해지고 있다.

「숨겨진 실재론」이란, 나의 이해하는 곳에서는, 「숨겨진 신」이―과학・철학・종교(무신론자도 포함한다)의 입장의 차이를 넘어―만 사람들에게 공통의 실재로 있다는 전제하에 과학과 종교의 통합을 목표로 만인에 대해 열린 논의를 하자는 栁瀨의 실재론의 입장의 태도 표명이었다. 거기에서는 「참인가 거짓인가, 중간은 없다」라고 하는 2치의 형식 논리를 넘어,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언어의 애매하지 않고 양의성을 허용해, 모든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생각 가 중요하다. 그리고 栁瀬은 스콜라 철학의 경직된 형식주의를 넘어 이성과 신비 사이에 사려 깊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점으로 돌아가 쇄신된 토마스적 실재론의 철학 ─ 거기서 “초자연은 자연 을 파기하지 않고 완성한다”─를 자기의 철학의 입장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영원과 시간의 중간에 있는 '영재장'으로 파악한 곳에 그 실재론의 특징이 있었다. "하나님의 원래 과학"에는 栁瀬의 자전적인 회상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히로시마의 원폭을 계기로 물리학자로부터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게 된 栁瀬의 프린스턴 오펜하이머와의 교류, 또 쿠바 위기 뒤에 '지상에 평화를'라는 회칙을 낸 요한 23세 교황에 접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요한 23세는 제2바티칸 공회의를 소집하고 전쟁 위기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현대적 쇄신을 시작한 교황이었다. 이어 교황이 된 바울 6세의 '우리 시대에 Nostra aetate'라는 선언은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가톨릭 교회가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종교의 입장을 넘어 모든 지상의 사람들에게 열린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보편의 교회'의 이름에 상당할 것이다.

과학, 예술, 종교의 3개 영역을 통합하는 철학이라고 하면, 그런 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능한가 묻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이름에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했다. 교토 학파의 철학, 특히 장소적 논리에 의해 종교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의 쌍방을 말하는 니시다 기타로, 「실재의 실재적 자각」을 말하는 니시타니 케이지의 「하늘과 즉」의 철학도 그러한 통합을 지향한 것 이다.

추상적 관념을 현실과 어긋나지 않고 항상 직접적인 경험을 거듭하면서 과학, 예술, 종교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 화이트 헤드의 철학은 고마바의 대학원에서의 내 연구 테마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저작을 읽을 때 오카결의 문화와 교육, 학문에 관한 사고방식과 통저하고 공명하는 말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관념을 실존에 선행시키는 독일 관념론의 비판을 통해 그 만년의 철학을 구축했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분별지의 비판이 있다.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에 있어서 명확하고, 의식적인 분별지(clear, conscious discrimination)는 하나의 우유사이다. 그것(분별지)이 우리를 인간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분별지)에 의해 인간이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분별지)은 우리의 인간성의 본질(the essence of our humanity)에 속하지만, 우리의 실존의 우유사(an accident of our existenc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유의 여러분” 원저, 116페이지)

1960년대에 출판된 영국의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의 '종교와 반항인'은 '인간은 종교 없이는 완전무결할 수 없다'는 주제에 썼다. 저작이었다. 그는 이 저작에서 파스칼, 스웨덴 볼리, 뉴먼 추기경, 킬케골 등 종교자나 신비주의자를 논한 후 최종장에서 화이트헤드를 “그 자신의 헤겔과 킬케골을 통합했다. 존재이다”라는 말로 마무리해 최대급의 평가를 주었다. 윌슨은 아카데미즘의 철학자는 아니지만, "실존주의자로서의 화이트 헤드"라는 관점에서 화이트 헤드의 텍스트를 읽은 아마 첫 번째 평자일 것이다. 의식(한 존재)에서 존재(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그 자체) 쪽에서 '의식된 존재'를 사유하는 점에서, 화이트 헤드는 사르트르와 같은 대륙의 실존주의자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철학자라는 윌슨의 통찰은 "실존한다"는 동적 사건 - 그 역사성, 개성, 사회성, 인격성 및 모든 범주의 기초에있는 창조성에 대해 -의 적절한 철학적 해석과 설명이 이루어지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 몸에서 헤겔과 같은 사망 철학자와 키르케골과 같은 실존주의자 모두의 삶을 살린 인물로서의 화이트 헤드는, 니시다 기타로에 시작되는 교토 학파의 철학자들과 함께, 나 자신이 철학 때 항상 참조해야 할 기본적인 철학적 텍스트가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화이트 헤드의 철학은 그 자신에 의해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현재 "유기체"의 말을 피하고 "통합체의 철학"이라는 말로 그의 우주론과 사회 이론을 말하기로 하고 있다. 그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나는 「유기체」라는 말로는, 화이트 헤드가, 본래 말해야 했던 「형이상학적」 함의가 충분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한층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분별지'에 인간적 '본질'을 보면서도 우리의 실존은 인간적 본질보다 일에 앞서 있다는 독특한 의미에서의 '실존주의자'로서의 화이트 헤드의 중요한 일면이 버려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해하는 곳에서는, "갈등 일치"가 통합학의 기본적인 사유 작풍이다. 진리는 객관성인 동시에 주체성이기도 하다. 헤겔인 동시에 킬케골이기도 하다는 것-그야말로 중요하다.

「개체」를 존재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톰으로서 실체화하는 「개별주의」를 비판한 점에서 유기체론을 설득하는 것은 옳지만, 「관계의 제일의성」을 너무 강조하는 '개성'을 관계성의 네트워크로 해체하는 '전체주의'를 설한다면 - 그 경우 '전체 존재'가 스스로를 넘어가는 '무한'으로의 열기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수반 없으면─“개별주의”라고 친숙해지는, 대립 규정의 한쪽만을 증거해 다른 쪽에 어두운 도그마에 낙락할 것이다. 그런데, 「통합체」라는 말은 야기 세이이치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키워드이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새로운 「통합체의 철학」의 구축에 맞추어 논의를 계속하고 싶다.

독일의 카셀에서 야기의 불교적 세계에 개안을 촉구받은 빌리헬름 군델트에게 “나는 좋은 그리스도자가 되기 위해 불교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 있다. 즉 불교와 기독교를 통합하여 양자를 양기하는 제3의 세계 종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라는 「타자」의 전통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그것과 대화함으로써 그리스도자 자신이 , 기독교 속에서 지금까지 자각되지 않았던 자기의 전통의, 지금까지 숨겨져 온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해, 그에 의해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전통의 은사 중에 머물면서도, 그것을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변용되어 새롭게 쇄신된 의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야기 세이이치의 입장에는, 불교와의 대화에 의해 창조적으로 쇄신된 기독교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종교 이후의 현대인의 니히리즘을 「자연체로 게다가 주체적으로」 넘어간다는 부정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대화에 의해 상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한 혼련도 모방도 아니고, 자기의 전통의 창조적 쇄신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우선, 니시타니 케이지의 논문 「하늘과 즉」에서 발견되는 불교적인 법계연기(특히 사물무조)의 설명과 거기에 촉발되어 쓰여진 야기 세이이치의 「프론트 구조의 철학」에 대해 논하고 싶다. 여기서의 논의는, 프론트 구조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인 동시에, 종교간 대화를 의미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니시타니 케이지의 철학적 논란 「하늘과 즉」 및 야기 세이이치 「프론트 구조의 철학」에 전해

니시타니 케이지의 논문 「하늘과 즉」(저작집 13권 111~160페이지)은, 1시가에 있어서의 하늘 2바쇼의 일례(연구의 고찰) 3「문」과 문법 4이사 무리의 로고스 5 사물 무리와 신의 세계 6 근원적인 구상력에 대한 6장으로 이루어진다.

최초의 3장은 직접 경험과 언어의 문제, 특히 시가에 있어서의 말의 사용, 특히 바쇼의 배우사연가의 발구에 있어서의 「절자」―자르는 것에 의해 연결한다―미학적적 고찰을 통하면서, 「말과 무언, 어와 默의 상호 침투 같은 곳을 표현에 가져오는 힘을 포함한다” 일본에서 특히 세련의 극에 이른 언어 예술에 틀림없는 배우 諧連歌의 근저에 있는 말의 작용을 고찰하고 있다. 「비연속의 연속」혹은 「자르는 것에 의해 연결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즉」이라고 하는 논문의 주요한 모티프이다. 그것은 「분별적 지성」의 조작에 의해 언어를 대상화해 「문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원래 <주어진」 것으로서 현성하고 있는 경우, 사실이 원칙적으로, 모든 반성에 앞서 하고, 사실 자신의 「사」로서 체험되는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방향」에 따라서 고찰을 진행해,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구조가 성립하는 이전의 직접 경험의 현장에 있어서 「말이 그 원본 적인 모습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장소를 해명한다. 그곳은 지성뿐만 아니라 정의를 겸비한 인간의, 원본적인 자기 표현의 장소이며, “인간의 숨결, 숨결과 한숨과 한식 등이 말과 함께 전해지는 정의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가의 언어의 작동을 안내해 니시타니는 「이사 무리의 로고스」의 고찰에 옮긴다. 즉, 사실이 주어져 현성하고 있는 본원에서 사실을 말하고자 하면, 말은 언제나 시가 되어, 「문」의 맥락으로서의 로고스(이법)를 나타낸다고 하는 의미로, 시작과 는, 그러한 원본적인 사실을 가능한 한 이사 무리적으로 몰아넣어 표현에 가져오는 영업 만남을 확인한 데다, 니시타니는, 다음으로 화엄 불교의 4번째의 법계 연기인 「사들 무리」 의 고찰로 옮긴다.

이사 무리의 입장은 예술이나 철학에 의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을 획기하지만, 그 입장이 가능성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 한계의 한가운데에 열리는 것이, 「사들 무리」 그런 것, 그리고, 「종교라고 하는 것의 근저에는 사물 무리적인 입장이 포함된다」라고 니시타니가 말하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다.

야기 세이이치 「프런트 구조의 철학」의 시작 부분에서 인용되고 있는 「방을 나누는 벽」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니시타니가 이 일들 무리의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니시타니의 설명 요약

두 영역(A, B)을 구분하는 한계선은 명확한 절단선에 의해 각기 상호 투사를 가능하게 한다. 한계선은 두 방을 나누는 한 장의 판과 비슷하다. 판이 A면을 향하고 있는면 x는 A실의 한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B실을 대표한다. x면은 그 「본질」에 있어서 「A에 나타난 B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B의 표현인 x면은 A실의 일부로서 A실에 소속된다. A에 나타난 한, 「현상」으로서는 A의 것이며, A의 구조 계기이다. 마찬가지의 것은, 그 판이 B실을 향하고 있는 면 y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재단이 접합이기도 한 것

일반적으로 한계라는 것은 재단이 접합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접합은 차별되었지만 상호 투사라든가 상호 침투와 자꾸 부른 것 같은 연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회호성이라는 것

위와 같은 관계의 구조를 니시타니는 '회각적'이라고 부른다. 번갈아 가는 상호 연관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하나는 본질적으로 A에 속하는 것이 B중에 스스로를 우울하다(비추는, 옮긴다)라든지 투사한다든가 하여 현상할 때, 그것이 B 중 A와

, ,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B의 일부로서 현상한다는 것이다.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A 「몸」이 A 「몸」에 스스로를 전달할 때, 그것은 A 「상」이 아니라 B ​​「상」으로 전달된다. 니시타니의 '회호성'이 가지는 분여와 분유의 구조

니시타니의 논의를 검토하기 위해서, 회호성의 설명에 나오는 동사적 표현(분여와 분유)에 주목해, 이 논의를 이하의 4점에 정리한다. (1) A는 스스로를 B에 B상으로 분여(mitteilen)하고, (2) B도 A로부터 그것을 B상으로 분유(teilhaben)한다. (3) 이것이 B로의 자기 전달이라는 A의 「용」이다.

(4) B의 측으로부터 A로의 전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시타니에 의한 상기 도해의 문제점

방의 구획, 또는 벽의 대담에 의한 회호성의 설명에서는, 역동적인 관계(mitteilen/teilhaben이라고 하는 동사가 의미하는 것이라)를 성립시키는 시간성이 버려지고 있는 곳에 문제가 남는다.

이 설명에서는, 2개의 방의 분할이라고 하는 정적인 공간적 이미지에 의거했기 때문에, A의 측의 벽면이, A의 일부로서 별실의 B를 표현한다고 하는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 A의 내부에있는 것은 벽면의 반대편에있는 방 B가 어떤 것인지를 "벽"을 매개로 인식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방 B가 있음을 인식 할 수 없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방 A도 방 B도 "벽에 닫힌 창없는 모나드"가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도입해야 할 일

공간적 이미지에만 의존하는 설명의 문제점은, 분여와 분유를 교대로 행하는 방 A와 방 B를 2개의 주어적 기체로서 말하기 위해, A, B 모두 동사적인 관계성이 성립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어적 실체로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적 설명을 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하늘과 즉"로고스에 도입해야 한다.

둘째, 전면 구조의 역동성

실재성(reality)과 현실태/활동태(actuality)의 구별과 관계

화이트 헤드의 "프로세스와 실제"에서 "프로세스

스는 그 자체가 현실태/활동태이다(the process

is itself the actuality). 여기서 말하는 프로세스는 운동변화(키네시스)와 현실태/활동태를 명확하게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θ권의 논의를 근거로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들어 '보는'이라는 일을 분석하고, '보는' 일이 바로 '보고 있는' 일과 일치하는 것, 완료태가 동시에 활동태인 것 같은 '일자'를 에너게이어라고 불렀다. . 키네시스(운동적화)는 이와는 달리, 과정의 어느 곳을 매우 완료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운동의 종점 내지 목적점(테러스)에 도달했을 때에만 그 운동이 완료된다. 그런데,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프로세스란, 그렇게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

, , , , , , , , , , , , , , ,

, , 이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에너지 게이어론은 '완전성'이라는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된 개념의 의미를 쇄신하는 것이다.

프로세스 신학과 동방 기독교 신학의 통합

찰스 하츠혼을 비롯한 미국의 프로세스 신학자는 안셀무스의 본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으로 친숙한 '완결성의 논리'를 동적으로 쇄신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보다 더 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완전성의 정의를 변경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능가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능가됩니다. 일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 즉 시간적 세계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자신도 거짓말의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더욱 큰 것이 된다는 훌륭한 사고방식을 세웠다(3). 서방교회의 신학적 전통에서는 완전성이 정적으로 파악되므로 이를 '완성된 완전성(perfected perfection)'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적 과정을 중시하는 동방교회의 영성의 전통에서는 '완성되고 있는 완전성(perfecting perfection)'이 강조된다(4).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곳에서는

(1) 화이트헤드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가치 있는 기물로 보려고 해도, 일절의 유한한 「활동적 존재(actual entity)」의 생성의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에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 그리고, (2) 「프로세스가 그대로 에너지 게이어이다」라고 하는 사상의 가장 래디컬한 점은, 「완성된 완전성」이 즉 「완성되고 있는 완전성이다」라고 하는 곳에 요구한다

, 해야 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의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은 그대로 "이미 실현 된 완전한, ,,,,,,,,,,,,,,,,,,,,,,,,, 성" 되는 무결성(자기 초월적인 무결성(,,,,,,,) self-surpassing perfection)을 목표로 하는 다이나미(,,,,,,,,,,),,,,,,,,,,, , , , , , , , , , , 줌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화이트 헤드 "통합체의 철학"에서 프로세스 개념의 근본적인 생각

,,,, 5 상이다.

셋째,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의 장소적 논리

장소론적 사유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에너지 게이어로서의 프로세스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유"의 본성은 그것이 일체의 "생성"을 위한 잠재적인 힘인 것이 속한다. (It belongs to the nature of a “being” that it is a potential for every “becom-

ing')('과정과 실재' 원저, 22페이지)

, , , , , , , , , , , , , , , , , , , , , 통합체의 철학의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이 원리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 과정이 우주의 존재와 모든 "유"를 내재시켜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라는 말은, 대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유(広義の物)를 말하고 있다. 그렇듯이 모든 "유"를 내재시킴으로써 하나의 활동적 존재(actual entity)가 생성된다는 의미를 화이트헤드는 "...에 있어서 현재한다(being present in)" 라는 장소론적인 말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무시할 수 있는 관계를 견인한다면, 모든 활동적 존재는 모든 다른 활동적 존재 내에서 현재한다(every actual entity is present in every other actual entity) 해야 한다. 통합체의 철학(the philosophy of organism)은 이 "다른 존재 안에 현재 한다"는 의미를 해명하는 과제에 종사하는 것이다. (『과정과 실재』 원저, 50페이지)

「상의성의 원리」는, 니시타니 케이지의 「회호성」에 근거하는 법계 인기의 설명, 및 야기 세이이치의 「프론트 구조의 철학」이나 「장소론으로서의 종교 철학」으로 말하는 장소의 논리를, 프로세스 을 그 자체로 에너지 게이어로 간주하는 생성론에 의해, 다이나믹하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성의 과정에서 다른 일체의 유를 내재시키는 "활동적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하는 의미에서의 제일 실체가 아니다. 첫 번째 엔티티는 "다른 어떤 주체 subject 안에 없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안에 현재 한다(be present in)" 대신에 "객체화(objectification)"라는 표현을 선택하게 된다. 즉, "활동적 존재 A가 다른 활동적 존재 B 중에서 현재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활동적 존재 A가 다른 활동적 존재 B 중에서 개체화된다"는 것이다.

그 경우, B의 내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에 다르지 않은 A의 개체적 존재가, 「프론트 구조의 철학」으로 말하는, 「B의 내인 A의 프론트」이며, 「하늘과 즉」 의 회호성의 로고스로 말한다면, 「B상으로 전달된 A의 몸」이며, 그 자기 전달의 작용(분여/분유)이, 화이트 헤드의 말하는 objectification에 해당한다 그럴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전달 내지 자기양여의 작용은 어떤 종류의 관계인가. 「생성의 프로세스」가 「다른 일체의 유를 안에 포함시켜 성립한다」라고 하는 경우, 거기서 말해지는 관계는 어떠한 종류의 관계인가.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미국의 프로세스 신학자에 의해 "프로세스와 관계성의 철학(process-relational philosophy)"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관계와는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해명하지 않으면 미안해.

외부적으로 내부적이고 내부적으로 외부적인 관계의 논리

(the logic of relatedness)

외적 관계설과 내적 관계설의 두 가지 입장을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여기서의 요점은 관계의 본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 실재론과 관념론이라는 인식론에 있어서 두 개의 대립하는 입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관계에 앞선다는 사고방식, 즉 일체의 관계 빼고 본질적인 속성에 의해 실체가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관계라는 것을 실체에 있어서 외적이라고 생각하는 실재론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나무를 우리가 보는 경우, 그 나무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외부 관계를 전제한다. 상식은 소박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물리학의 관찰 가능량(observable)-위치·운동량 등이 관찰자(observer) 없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실재론도 또한 관찰 대상과 의 관계를 외부적인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와 관련하여 관계항은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실재성이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내적 관계설이다. 내적 관계설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고, 어떤 논리학에 의해서 그것을 표현하는지에 차이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의를 간략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지각되고 있는 것이다 esse est percipi = to be is to be perceived '라는 버클리 흐름의 관념론의 정식을 취한다면, 그 입장은 지각을 내적 관계로 포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버클리는 외적 세계에 있는 물질적 실체를 부정했지만, 그 논리는 지각이라는 관계를 정신에 있어서의 내적인 관계로서 파악한 것에 요구된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하나의 주어에 하나의 술어를 귀속시키는 명제를 특권시한 것을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실체와 속성을 제일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관계를 부대성으로 삼는 존재론에 대한 길을 열었기 때문에 다항관계와 다중량화의 논리를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셀과 화이트 헤드에 공통적 인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의 포인트입니다.

러셀은 인식론에 있어서는 내적 관계설에 입각하는 브래들리의 절대적 관념론과는 정반대의 입장, 즉 전면적인 외적 관계설의 입장을 채용하여 관념론을 논박하려고 했다.

러셀의 신실재론은 소박실재론도 아니고, 소입자를 궁극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과학적인 실재론도 아니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명제의 주어를 실체화하는 '물건의 아토미즘'이 아니라 개개의 요소 명제에 의해 기술되는 개개의 사실 그 자체를 아톰으로 하는 '사물의 아토미즘'으로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으로 정식화된 '사물의 아토미즘'은 '부정적 사실(negative fact)'을 사실로 보는 점에서 실증주의자가 의거하는 긍정적인 사실 와는 일선을 그렸지만, 「사」의 여러가지 아톰 상호의 내적인 관계성은 완전히 버려진 것이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라이프니츠적인 형용을 한다면 '창문이 없는 원자적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개별의 「사」가 어떻게 하여 생성하는가 하는 역동적 고찰도, 또 그 생성에 있어서 다른 「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는 활기찬 관계성의 사실에 관한 고찰도 버려지고 있다 (6).

그렇다면 "프로세스와 관계의 철학(process-relational philosophy)"이라고도 특징지어지는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관계에 대해 내적 관계설, 외적 관계설의 어느 견지를 취하고 있었을까.

화이트헤드의 '프로세스 철학'의 관계설의 한 특징은 동일한 관계가 관계항 중 하나에 대해서는 외부적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이라는 생각을 채용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이 독특한 관계설로부터, 예를 들어 버클리류의 「존재한다고는 지각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관념론의 도그마로 전제가 되고 있는 지각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자. 나 앞에 하나의 나무가 보인다. 있을 때, 존재하는 곳에서 그 나무를 보는 나에게, 객체(object)로서의 그 나무의 존재는 주체(subject)로서의 나에게 내적이며, 나의 세계(그 때, “세계는 나의 세계 이다”)에 사는 것이고, 그 나무를 떠난 나의 세계도, 나 자신도 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므로, 나에게 보여지는 관계는 그 주체에 있어서는 외적(external)이고 우유적(accidental)이다. 인식론에 있어서의 실재론과 관념론과의 「대립의 일치」를 표현하는 하나의 길이, 이와 같이 동일한 관계를, 외적으로 해 내적, 내적으로 해 외적이라고 보는 관계설에 의해 열린다 되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외적/내적이라는 이중성을 가지는 관계설을 「기상」의 경험에 적용해 보자. 만약 내적 관계설을 철저히 하면 과거와는 상상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자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고, 이른바 과거와는 「과거의 현재」, 즉 생각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의 장소적 논리에서는, 과거는 완결된 실재성을 가지지만 따라서 현재 내적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양해는 일상생활의 전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작위로 바꿀 수 없는 것이 거기에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우리의 작위를 넘은 과거의 실재성에 의해 우리의 현재의 행위와 제작이 뒷받침되고 그 의미로 완결된 과거가 우리의 현재의 활동 속에 내재하고 살아 과거로 일한다는 것이 우리의 과거의 이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 신약성경의 장소론적 신학에 대한 성찰

야기 세이이치 씨는, 「신약 성경에 있어서의 장소론」(동서 종교 연구 제5호 2006년)에서, 신약 성서에 있어서의 장소론적 신학을 내포하는 개소로서, 전부 21의 대표적인 텍스트군 를 들고 있다. 그 중 주요한 것에, 나의 입장(7)으로부터 코멘트를 더하고 싶다.

따로 물보다 오르는 겨자도, 天さけゆき, 鴿(하토)처럼 자신에게 내리는 것을 간과. 가다가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다 『뭐 아는 내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 나나를 기뻐한다』(마가 1장 10~11절(8))

(댓글) 예수님의 세탁 장면. 일본어 번역에서는 장소론적 함의는 명확하지 않지만,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의 ἐν σοὶ에 장소론적 함의가 있어, 「무슨 안에서 我悦る(in you I was well pleased)」가 직역. 성령을 받은 예수의 공생의 시작을 나타내는 수세의 그림은 태서의 종교화의 주제로서 반복적으로 그려졌지만, 장소론적 해석에서는 예수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각' (객관화된) 표현이며, 부자의 상호 내재/감응이라는 직접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어 원문의 시제는 아오리스트였고, 일회한 시간과 곳에 생기게 되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원 사실이나 원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먹이면,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또 그들을 우리 손보다 빼앗는 사람 아라지. 그들을 내게로 급히고 우리 아버지는 일체의 것보다 크면 누구에게도 아버지의 손보다는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어』(요한 10장 28~30절(9))

(코멘트) 「우리와 아버지는 하나가 된다」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란, 장소론적인 석의에서는, 「예수와 아버지가 역사에 있어서 하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하나'를 '실체적인 하나'라고 유대인들은 풀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삼는' 모욕 때문에 예수를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시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는 <신들>이라고 불렸다”이기 때문에, 하물며 “하나님에 의해 성별된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불편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한다.

이 인용은 사람이 사는 「창조적 하늘」의 「장」으로서의 「아버지」, 그 「장소」(개별의 1회 한정의 「때」와 「곳」)에 있어서, 그 사람이 「텐부 과의 작용적 일을 살아, 「아버지」도 또 그 사람에 있어서 「천의」의 실현을 기뻐한다(εὐδόκησα)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장」 「장소」 「작용적 일」 「 상호내재/감응이라는 성경의 장소론적 해석이 적용되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나의 아버지에 있고 아버지의 나에게 거주하는 것을 믿지 않는가? 우리 여의 등에 있어 불언은, 자신에 의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우리에게 있어 어업을 행하여 급급해. (요한 14장 10절(0))

(코멘트) 히브리어로는, 「신」을 나타내는 말에, (1) 안심·신뢰를 연상시키는 바타하(bāṭaḥ)와 (2) 견고·확실을 암시하는 아만(āman)의 2어가 자주 사용된다 . (1)은 70인역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희망"을 나타내는 "엘피스", 신뢰를 나타내는 "페포이테시스"가 주어지고, (2)는 "신앙"을 나타내는 "피스티스", "진리"를 나타내는 「아레테이아」가 꼽힌다.

신약성경에서는 (2)의 인식에 관계가 있는 ‘신앙’이라는 말이 주도적인 위치를 갖게 되지만, ‘신’이 가진 위의 두 가지 측면은 이어지고 있다. 즉, (1) 지성스러운 신에게 전 인격을 던져 귀의하는 신뢰와 (2) 말이나 징을 단서로 하여 불가시의 현실에 다가가는 이성의 행보이다.

히브리인에 대한 서신(11장 1~2절)의 “신앙은 원하는 곳을 확신하고, 보지 않는 것을 진실로 하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세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지고, 보이는 것의 현(明るく)의 것보다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피스티스)'이 '신'이 가진 두 측면을 통합하고 '證(あかし)'과 '悟(사토)'를 초래하는 자임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신앙'이 '보이는 세계' 속의 '겁쟁이'에 불과하며 '마치(에피스테이메)'에 이르기 위한 학문의 길 준비단계라고 하는 플라토니즘과는 다른 믿음 이해이다. 또, 플라토니즘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상」이지만, 성경의 장소적 신학에서는, 「보이는 것의 현(다시) 루루물보다 성립되지 않는 것」, 즉 「현 전하는 아이디어(불가시의 실물)」도 포함하여 「루루물 φαινομένων」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 것이 신앙에 의해 깨달을 것이다. 단순히 '사상한다'가 아니라 '창조한다'는 것이 플라톤주의와 성서신학을 분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디, 우리 여덟들을 사랑하게 하자 서로 사랑하라. 사람 그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之보다 큰 사랑은 없다. 여의등 만약 내가 목숨을 걸면, 우리친구. 지금부터 나아라 등을 종 나라고 하지 않고, 나는 주인이 이루는 일을 모른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 아버지에게 부끄러워하고 범한 것을 너희에게 알려야 한다(요한 15장 12~15절(b))

(코멘트) 예수님의 이시메 서명(ἐντολὴ)이란 여기서는 "우리를 사랑하자 서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그 "사랑(ἀγάπη)"은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강조하는 가장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공허'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일(self-emptying)'에 의한 '사랑의 충만'으로 포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 됨으로써, 지상의 군주의 노예의 가시에서 자유로워진 신도들이 더욱 진행되어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의 역사”에 살려 하고 있는 것을 자각했을 때에, 더 이상 「나( 종)」로서 뿐만이 아니라 「친구」라고도 불리고 있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5.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신의 편재성'과 '작용적 1'에 관한 장소론적 성찰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일부 제8문제 제1항의 이론 박론(sed contra)으로,

물건의 일, 거기에 반드시 그 자체가 있다 (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그러므로 이사야서 26장 12절 “주여, 우리의 행위는 모두 우리에게 있어서 여의가 된 낫다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c)e)”를 인용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물에 존재한다 (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물이 존재하는 한을 통해 하나님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각 방법에 따라 그 사물에 현재 하고 있어야 한다(quandiu igitur res habet esse, tandiu oportet quod Deus adsit ei , secundum modum quo esse habet)”, 그리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있어도 그 가장 안속한 것, 무엇보다 더 깊게 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Esse autem est illud quod est magis intimum cuilibet, et quod profundius omnibus inest)

부터,

, , , , , , , , , , , , , , 하나님은 모든 사물에 속하며 깊게 그 안 안에 있다 (,,,,,)이어야 한다 (Unde oportet quod Deus sit in omnibus rebus, et intime)

라고 결론한다.

또한 제8문제 제2항에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열거한 후 예레미야서 23장 24절의 “나는 천지를 채우는(caelum et terram ego impleo)”를 인용한 후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있다”고 결론한다. 다만, 하나님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해도 그 장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공간적인 장소를 점유하면 반드시 다른 사물을 배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모든 장소에 있거나 모든 장소를 채운다고 하는 경우, 그러한 방식으로 편재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어떤 장소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힘」, 즉 「사물의 공간적 위치를 규정하는 힘」을 주는 것이 신이라는 의미에서 그 장소에 내재하는 것이다 . 게다가 「장소에 놓여 있는 사물(locata)」도 「어떤 사물」인 한, 그 「존재」를 주고 있는 것도 신이기 때문에, 「공간적 장소」와 「공간에 있는 사물」 양쪽 모두 그 존재와 힘을 부여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떠한 장소에도 어떠한 사물에도 편재한다"는 취지의 논의를 토마스는 수행하고 있다. 6, '작용적 1'의 장소 론적 철저 - 신과 인간의

주체적인 「능작의 동일성」

니시타니 케이지는 엑하르트의 본래의 입장을 범신론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만한 해석을 감행하고 있다.

엑하르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합일의 입장

,,,,,,,,,,,,,,,,,,,,. 절대적으로 두 가지가 주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 , , , , , , , ,, 범신론에는 걸리는 절대의 둘도 없고, 절대의 일도 있을 수 없다...순한 일은, 그것을 볼 수 없다. 단지 주체적인 '생'이라든지 '작용'이라든지의 하나로서만 살아 있고 능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능작적인 합일에 있어서, 자유가 어떠한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깊게 포착되고, 또한 가장 깊고 가장 눈부신 자유, 무저한 자유로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가장 자유로운 자유는 가장 필연적인 필연과 함께 파악된다. 왜냐하면 만유의 창조와 생성은 하나님의 자의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고차의 필연성을 포함한 신적 생명의 발동 때문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만물의 차별을 없애는 것으로, 만유를 지배하는 필연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에서는 자유도 생각할 수 없다(d).

니시타니의 '능작적 합일'은 '주객 합일'이 아니라 '주주 합일' 즉 '노에시스적 합일'이다. 이 의미에서의 「주체적 합일」을 범신론으로부터 판별하는 니시타니의 논의는, 「무의 자각적 한정」의 기독교론 이후의 니시다 기타로의 종교 철학, 즉 「절대의 하나」와 「개별적 다 의 모순적 자기 동일, 역대응, 장소적 논리에 의한 「인격」과 「역사적 신체」의 위치설정 등의 과제를 앞둔 니시다의 사색과 함께 참조되어야 할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장소론적 사색의 잘 나타나고 있는 텍스트로서, 「몸 속에 있는 사람을 아레레미타마에」(Populoeius qui in te est, miserereberis)라는 호세아서 144 「자(아하레미) 슬픔 기도의 인용으로 시작되는 독일어 설교를 고찰하자(f). 가장 뛰어난 학자들에 의하면, 지성은 (모든 것을) 벗겨내고, 신을 덮기 위해서, 신 자체인 순수한 본질 존재로서. 지성인식은 진리와 선성을 돌파(durchbrechen), 순수한 본질 존재로 돌진하며, 이름도 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신을 포착한다고 한다. 지성인식도 사랑도 연결하지는 않는다고. 사랑은 하나님이 선한 것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받지만, 만약 하나님이 선성이라는 이름을 잃으면 사랑은 결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사랑은 모피, 즉 의상을 입은 신을 포착한다. 이런 것은 지성은 하지 않는다. 지성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알려진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닥 없이 바다 속에 포착하는 것은 결코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두 가지, 지성인식과 사랑보다 자비(아하레미) 쪽이 위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곳에서 자비를 행하신다(g).

에크하르트가 '이탈'과 '돌파'에 의해 신성의 근저까지 극복하려고 하는 지성인식을 '사랑'을 이기는 것으로서 설명해 온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뛰어난 지성에 의한 인식에도 이기는 ‘일’로 ‘자비(Barmherzicheit)’를 꼽고 있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이탈로 인한 지성인식의 철저함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성도문의 극한 때인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지성인식을 넘은 하나님의 역사로서 '자비(아하레미)'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아마 전례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주여, 아하레미타마에」란, 최초로 노래되는 성가[키리에]이다. '말의 전례'에서 읽히는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의 비원, '자비의 복음'이라고도 불려온 루카의 '평화 가운데(vade in pace)'라는 파견의 말 ,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사랑에 있는 자는 하느님께 계시고 하나님도 그에게 거주하”라는 요한 제1서 4~16절을 인용한 후, “영혼은 그 근저에 그런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혜택에 의하여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비(아하레미)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설교를 맺고 있다.

그런데 자연 본성적인 사랑과 미사 전례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자비(아하레미)'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서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니글렌이 비판한 토마스의 '신학대전'의 사랑에 관한 논의를 가이드로 고찰하고 싶다. 토마스에 있어서는 자연 본성적인 사랑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다. 즉,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사랑이 근본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부자연스럽다고 하는 관점이 남아 있다는 것이 비판 의 포인트였다.

실제로 『신학대전』 제2부 26문 제3항에서 토마스는 「사랑의 순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사랑하는 근거의 전체는 하나님이 인간의 선의 전체라는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사랑하는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순서에 대해 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 다음에 가장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니글렌은 토마스 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애론에 의해 기독교적인 이웃 사랑을 기초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가페'에 기초를 두는 기독교적인 이웃 사랑에 '엘로스 모티프'가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미즘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니글렌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쿠와하라 나오토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의 '사랑'과 '정의(h)''로 토마스의 입장에 비해 인간론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토마스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애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밟아 성경과 성전에 입각하는 독자적인 '우애론'을 세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없는 성경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제일의로 세운 다음,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선의 전체를 분별하는 이웃사랑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다음 에 「자기 사랑」을 긍정적으로 파악해, 그것을 범형으로서 이웃을 「자기와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가 「사랑」의 순서 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은총(초자연)은 자연을 파기하지 않고 완성시킨다」라고 하는 것이 토마스 자신의 기본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자연 본성적인 자기 사랑도, 결코 파기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신 사랑에서 긍정된다는 것이 토미스트 측에서 니글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미니코회의 토미스트의 전통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계승한 에크하르트의 경우는 어떨까. 앞서 인용한 '자비(아하레미)를 지성과 사랑에 맞는 일로 하는 설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이웃사랑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애에 의해 기초로 한다고 말하는 논의를 복음서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전거로 논쟁을 비판하고 있다. Eckhart는 이웃을 "자

, , , , ,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한다 "

,,,,,,,,,

자신과 같고, 또 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

, , , , , , , 이웃사랑과 자기애의 동등성 혹은 오히려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i). 이처럼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것이 차별을 넘은 하나의 능작의 주체가 되는 곳에, 에크하르트의 장소론적인 「일」에 철저한 실천적 사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이웃사랑에 있어서의 「능작의 동일성」은 자기의 선을 제일로 생각하는 「사랑」보다 높고, 「이탈」과 「돌파」에 의해 신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지성인식조차 무한히 미치지 않는 「무저의 바다의 깊이」를 가진다는 것이 이 설교의 취지일 것이다.

일곱, 성체 친교의 천영에 관한 성찰

일본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미사의 성체배령의 천영으로

사제 :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교제 가운데 전능하신 아버지인 당신에게

회중: 모든 존경과 영광은 세상에 이르기까지.

를 갖고 있다. 라틴어 전례에서는 일본어 전례에서 세 번 반복되는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ipse( self = 자기 자신)인 것, 또 '성령의 교제'란 in unidad Spiritus Sancti(성령의 일치에서)로 있다는 것을주의하고 싶습니다.

라틴어 전례: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Est tibi Deo Patri omnipotenti, in unidad Spiritus Sancti

Omnis honor et gloria per omnia sæcula sæculorum

일본어 전례에서는, 영어 전례와 같이 Through him, and with him, and in him 과 ipse 를 평판인 3인칭 단수의 대명사로서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지만, 그 근저 소성 의 파기」와 상대성 이론과의 관계가 제 2 논문의 주제로

Ipse를 단순히 「그」라고 번역하고, 「그에 의해, 그와 함께, 그 안에」라고 번역해 버리면, 「그리스도에 의한」구제 행위도, 동반자 혹은 친구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도, 「 내면 그리스도'도 자기 자신과는 무연한 '타인사'에 울린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하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를 '에 의해' '함께' '안에'의 3어로 표현함으로써 감사의 제례의 성체배령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심 적인 위치가 명료하다. 또한 "성령의 교제(communio)"는에 있는 것은 "성령의 일성" 즉 "사랑의 일의 일성"이다(j).



1 강연자:니시타니 케이지, 응답자:다마기 야스시로, 오노데라 공, 사회자:야기 세이이치의 이 제4회 동서 종교 교류 학회(1985년)의 강연과 질의는, 다음해의 「대승선」 잡지에 게재되었지만, 그 전자판이 남산 대학 종교 문화 연구소의 웹 사이트 http://nirc.

nanzan-.ac.jp/en/publications/jjsbcs/에서 열람 가능

2 내가 『과학기초론연구』에 발표한 최초의 논문은 「아인슈타인 포들스키 로젠의 논의와 벨의 정리─양자론에서의 분리 불가능성」(Vol.19 No.3), 두 번째 논문 는 "아인슈타인 포들스키 로젠의 상관관계와 상대성 이론"(vol. 19, No. 4)이었다. 이는 당시 화제가 되었던 벨의 부등식의 반증이라는 실험적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둘러싼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점에 결착을 붙인 것이 아니라 “국소적 실재 의 분리 불가능성"이라는 것이 나의 제1 논문의 주제, 그리고 "국이 있었다. 둘 다 불확정성 원리의 실재론적 해석과 양자역학적 원거리 상관-비인과적 상관의 해석 을 주제로 하고 있다.

3 Charles Hartshone, The Logic of Perfecti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62.

4 시미즈 미츠오, 「웨슬리의 구제론」, 교문관, 2002년, 삼삼 페이지 참조. 화이트헤드의 '통합체의 철학'이 존 새끼로 대표되는 감리교 신학자에게 수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쪽도 동방 기독교의 영성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이펙터시스(자기초월적인 사랑)나 '만들지 못하는 에너지게이어'라는 동방신학의 에너지게이어론과의 깊이관계를 지적한 저서로는 George A. Maloney, SJ, A theology of Uncreated

Energies,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78 참조

5 니시타니 케이지의 「하늘과 즉」에는 「현성한다」라고 하는 표현이 다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성'을 동사화하여 사용하는 용법은 길가의 '정법안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정법 안장」의 요인 색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도모토에서는 「무」나 「하늘」과 같은 부정적 언론보다 「현성한다」라고 하는 긍정적인 동사 표현이 압도적으로 중요 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성'이란 현대 중국어에서도 그렇지만 '기성'과 같은 의미이며, 그 동사 표현에의 전용은 길에 고유한 것이다. 즉, 「현성」을 「현성한다」라는 동사 표현과 하나로 함으로써, 수행을 깨달음(증)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증상의 수」를 함의하는 「수증 일등」의 수도론 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6 이 외적 관계설은 러셀의 제자였던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논리 철학 논고에 따르면, 개별 요소 명제로 기술 된 사태는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요소 명제의 진리값의 함수로서 표현되는 복합 명제는, 토토로지와 모순을 들여다보고, 모두는 우연성의 지배하는 일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요소 명제의 구체적 사례를 비트겐슈타인은 하나로 들 수 없었다. 그것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아톰이 다른 아톰과 어떠한 내적 관계를 갖지 않는 이상, 각 아톰의 상호 교류 또는 상호 침투라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개의 아톰이 어떠한 것인지, 그 아톰의 성립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논리철학 논고'가 반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도그마에 아직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엄청 지적되어 왔지만, '일의 아토미즘'이라는 도그마도 아톰 상호의 인과적 독립성을 독단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점에서, 악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빠져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7 나는 '보편의 교회'에 보존된 '문자화 이전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 입장에서는 '전통'에서 분리하여 '성경'을 단순한 책으로 '읽는다'가 아니라 교회의 '전례' 속에서 '말씀을 듣고' 교대로 '말씀', '신앙선언'하는 것 , 「성체를 배령」하고 「천영한다」라고 하는 언어 행위의 「일의 장소」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장소론적 석의」를 시도하고 싶다. 「말의 전례」에 참가하는 그리스도자가 직접 경험하는 「말씀」이 가지는 시간적인 원실성(원역사성)을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

8 Mark.1:10–11, καὶ εὐθὺς ἀναβαίνων ἐκ τοῦ ὕδατος εἶδεν σχιζομένους τοὺς οὐραν αὡς περιστερὰν καταβαῖνον εἰς αὐτόν. καὶ φωνὴ (ἐγένετο) ἐκ τῶν οὐραν῱ ὁ ἀγαπητός,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

9 John 1:28–30, κἀγὼ δίδωμι αὐτοῖ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χειρός μου. ὁ πατήρ μου ὃ δέδωκέν μοι πάντων μεῖζο δύναται ἁρπάζειν ἐκ τῆς χειρὸς τοῦ πατρός.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0 John 14:10 οὐ πιστεύεις ὅτι ἐ감마 λέγω ὑμῖν ἀπ' ἐμαυτοῦ οὐ λαλῶ: ὁ δὲ πατὴρ ἐν ἐμοὶ μένων ποιεῖ τὰ

a Heb 11:1–4, Ἔστιν δὲ πίστις ἐλπιζομένων ὑπόστασις, 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 οὐ βλεπομένν ἐμαρτυρήθησαν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Πίστει νοοῦμεν κατηρτίσθαι τοὺς αἰῶ νας ομένων τὸ βλεπόμενον γεγονέναι.

b John15:12-15: 12αὕτη ἐστὶν ἡ ἐντολὴ ἡ ἐμή, ἵνα ἀγαπᾶτε ἀλλήλους καθὼς ἠς ονα ταύτης ἀγάπην οὐδεὶς ἔχει ἵνα τις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θῇ ὑπὲρ τῶο φ ῖς φίλοι μού ἐστε, ἐὰν ποιῆτε ἃ ἐγὼ ἐντέλλομαι ὑμῖν 15 οὐκέτι λέγω ὑμᾶς δούλους, ὅτι ὁ δοῦλος οὐκ οἶδεν τί ποιεῖ αὐτοῦ ὁ εἴρηκα φίλους, ὅτι πάντα ἃ ἤκουσα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ἐγνώρισα ὑμῖν.

c 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Sed Deus operatur in omnibus, secundum illud Isaiae XXVI,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e. 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d 니시타니 계지 34페이지

e 나 자신은 「합일」이라는 용어보다 「능작의 동일」이라고 하는 말 쪽이 일에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합일」이란, 2개로 나뉘어진 자가 하나에 합한다는 의미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f Meister Eckhart, Deutsche Werke, Bd. 1, Predigt 7.

g Ich spriche: über disiu beidiu, bekantnisse und minne, ist barmherzicheit; dâ würket got barmherzicheit in dem hœhsten und in dem lûtersten, daz got gewürken mac.

h 쿠와하라 나오토미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의 『사랑』과 『정의』』(2005 지천서원) 종장 433쪽 참조.

i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의 동등성 혹은 오히려 동일성(plena aequalitas sive parilitas aut potius identitas dilectionis sui et proximi)”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텍스트의 상세한 분석이 마츠다 미카 “에크하르트의 이웃사랑 논」(중세 사상 연구 xlvii, 2005)에 있다.

j 타키자와 카츠미는 칼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을 안내하고, 신인의 제일의 접촉과 제2의 접촉을 구별하여 「불가분・불가동・불가역」의 신인 관계를 기초로 한다 '신인학'을 구상했다. 야기 세이이치씨의 장소론적 신학에서는, 「가미와 함께 있습니다」의 「와 함께」보다, 신인의 상호 내재를 설득하는 「가운데」가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례의 말은 '함께'(공동체성), '가운데'(내면성 내지 개인성) 및 '에 의해'(비가역성)을 분리하지 않고 한숨에 말하며, '성령의 일성 속 그러므로, 즉 사랑의 하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자의 공동체의 형성으로 향하고 '여호'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세상에 이르기까지' 천영하는 역동적인 신인관계를 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타나카 · 유타카

토의Ⅳ

응답자·사회 금 승철

가미치 대학 명예 교수

다나카 프론트 구조라는 개념에 저는 매우 끌렸습니다. 야기 선생님의 기호 표현에 관해서는, 먼저

2002년의 동서종교 교류학회에서 이야기가 되었을 때는, 나 자신이 수학을 거짓말하고 전공하고 있었으므로, 조금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야기 선생님은 신약 성경의 시대에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코이네 그리스어의 텍스트의 해석과 연결해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야기 선생님의 기호 표현은 기호 논리학과 비슷하지만, 일종의 상징 형식 - 심볼릭 양식 -으로 말한 것이며, 하나 하나의 진술문에 0 하나의 진리값을 맞추는 명제 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야기 선생님의 장소론의 상징화는 표현언어의 상징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의의가 인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기호화해 버리면, 무언가 그것으로 대언하거나 옮겨놓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되어 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듣는 사람에게 주어 버리는 위험성 입니다. 요컨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기호를 사용하는 것에 의해 가려지기 때문에, 기호를 사용하면, 그 기호에 대해서 한층 더 설명을 하는 불필요한 사태가 생기기 위해, 한없이 기호가 상징하고 있다 사물 자체로부터 우리의 관심이 어긋나 버릴 것입니다. 역시 도식적 기호보다 살아있는 말이 일하고 있는 현장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은 야기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말했는데, 프론트라는 말을 말할 때, 나는 「전위」라든가 「주변」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프론트에 가서 경계를 향하는 구조가 기독교적인 진리의 실천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불교의 말을 항상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임제록 안에, 혼자 있는 劫를 논하고, 도중에 있어 집을 떠나지 않고. 그리고, 집을 떠나 도중에 존재하지 않고. 나는 그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만, 요컨대, 내면의 자기의 세계에 닫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질적인 타인의 프런트에 나간다고 하는 「행인의 정신」이야말로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중요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야기 선생님의 프런트 구조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굳이입니다. 이웃이란 누구를 특히 이 굳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이굴에 호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직접 호소하는 예수의 말씀의 하나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교의 정통파인 '우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종파의 벽을 넘어 프런트에 간다는 곳을 야기 선생님의 프런트 구조라는 개념에 또 하나 내가 덧붙이고 싶은 곳입니다.

즉, 프런트에는 「주변」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경계가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는 독특한 그리스어입니다. 플라톤이나 그리스 비극의 그리스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네요. 그러면 히브리어법이 매우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적인 히브리어도 아니고, 그리스어도 아니고, 성경 독자적인 그리스어입니다만. 그러나 근대 루터 번역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라든지 영어의 귀정 번역은 거의 그 직역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근대 성경에 영향을 받은 국민문화라는 것을 낳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문어역 성경의 번역자는 일본의 고전에 잘 통하고 있어, 영령의 역사라는 것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 번역은 살아있는 영이 가득한 말이지요. 현대의 산문어역은 알기 쉬움을 주체로 해 버렸기 때문에, 근대인의 해석이 들어 버린다. 안도 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문서의 당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말령의 역사를 느낍니다. 전후의 교육을 받은 현대의 일본인에게는 상식이며, 통념인 것이, 3백년 전, 400년 전의 일본인에게는 결코 통념이 아니었다. 즉, 통념은 그러한 때와 장소라는 것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념을 통해 뭔가 거기에 보편적인 것이 항상 표현된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저는 기독교 신화나 이야기라는 것을 사실이 아닌 단순한 방편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 방편에 의해 현대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이 반대로 비추어져 비평되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서 처음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직접적인 것, 살아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미래에 가려면 저는 퇴보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퇴보와 진보라는 것이 하나이다. 그 하나인 곳을 나는 길을 따라 운보라고 부르고 싶다. 아오야마 상운보, 석녀 야성아(아오야마는 항상 운보하고, 우선 여자가 매일 밤 아이를 낳는다)라는 정법 안구라야마 수경의 말은, 저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기독교 해석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노령인데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이상으로, 낳지 않고 여자, 이제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이 실은 어둠 밤 속에서 아이를 낳고 있다고. 그것은 역시, 에크하르트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영혼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라고 하는, 그 경험이군요.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나 방편 이상의 것이 있어, 나는 역시 그러한 말에 엄청난 액츄어리티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방편이라고 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므로, 합리화해 그것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군요.

금 감사합니다. 뭔가 질문있는 분이 계시면 부탁하고 싶습니다.

모리 교토 산업 대학의 숲입니다. 매우 감명 깊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말의 문제」라고 하는 것으로, 야기 선생님은 언어를 3개의 것에 비교, 구별되고 있는 이야기로, 그것은 그것으로 매우 명확한,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다나카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하나는 종교언어라고 한다면 성경의 말과 신학의 말 사이에는 상당한 낙차가 있지 않거나 , 종교 언어와 동시에, 나는, 역시 형이상학 언어라고 할까. 철학적인지, 형이상학적인 언어라든가, 그것은 가볍게 볼 수 없다. 니시다의 「장소」의 논리는, 엄청난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고, 「주어」라고 할까, 「주체」를 너무 가볍게는 볼 수 없다. 역시, 유럽의 형이상학, ​​혹은 신학, 독일 관념론을 합쳐도, 「주어」의 무게는 상당한 것이 있어, 조금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범신론의 문제도, 쉘링 따위는 자유론의 전반을 사용해 계속 말하는군요. Pantheismus라고 하기 때문에, Allles ist Gott(일체는 신이다)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Gott ist alles(신은 일절이다)이라고. 이것도 굉장히, 주어의 위치와 술어의 위치는 역시 불가역으로, 그렇게 간단하게는,

"장소"가 될 수 없어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성경의 근본 메시지가 있지만,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혹은 말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큰 의미가 있는가.

사실,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성경의 말과, 여기에서 나오는 신학의 말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낙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은, 더 말하면, 바울의 그리스어는 매우 소박한 그리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예수도 그리스어를 말하고 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군요. 이것은 모두 번역어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이 전부 그리스어가 되는 것 자체 속에 이미 이미 큰 전환이 있는 것이며, 모두 역시 그것은 해석이지요. 말해 보면. 그러면 성경의 말까지 포함하여 한 번 더 무언가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야기 선생님의 하나의 착안인, 말 이전의 곳까지 다시 한번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그러한 시도도 아무래도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이야기는 매우 특히 카톨릭의 전례입니까, 그들을 포함해서 아니, 대단하다고 생각해 들었습니다만, 여기에, 역시 굉장히, 말의 낙차 같은 것이 상당히 있는 것은 아니다 걸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역시, 니시다의 장소론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의 언어를 뒤집은 곳이 있어. 조금 그것도, 즉, 그래서 니시다의 무의 장소라고 할까, 이런 생각과, 야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장소론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꽤 내용이 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다만, 그러한 점 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좋은지, 조금, 선생님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우선, 타나카 선생님으로부터.

다나카 니시다는 미치모토와 나란히, 나의 좌우의 책입니다만, 언제 읽어도 새로운 발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니시다의 경우라면, 그는 자신이 쓴 것을 「악전 투쟁의 토큐먼트」등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만, 무엇을 둘러싸고 악전 투쟁하고 있었는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는 한, 니시다를 읽는 것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로, 모르면서도 몇번 읽어도 발견이 있는 서적이고, 도모토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미치모토는 선문답이 무리회화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면, 하거나 얼굴에 말하는 너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있다. 언어를 넘은 것을 어디까지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요구해 가는 살아있는 언어 사용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중에서는,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넘어 항상 새로운 언어 표현을 요구해 가는 것이 니시다입니다. 예를 들면, 니시다는 「절대무」라는 말을 있을 때부터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숲 그렇네요.

다나카 그러나 「절대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장소적 논리는 남을 것입니다. 만년의 니시다가 스즈키 오오졸에게 향한 서한 속에서, 오오오츠가 말하는 흔히 즉비의 논리로부터, 역사적 세계와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취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기 선생님의 책에서도, 인격적인 언어와 장소론적인 언어가, 처음에는 무언가 대립하는 형태로 쓰여졌지만, 점점, 끝쪽에 가까워짐에 따라, 역시 인격이라는 말 의 재검토에 의해, 장소론적인 사고로부터, 우리가 보통 인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거기로부터 다시 말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니시다가 마지막으로 목표로 한 것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숲 저는 성경의 말과 신학의 말 사이에 역시 큰 격차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말씀했습니다. 그것을 만약 내가 아는 한 선 쪽에서 말한다면 역시 '선문답의 실내의 말'이라는 것은 일반 기술언어나 종교언어와는 다르다. 「표현 언어」라고 하는 테두리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만. 이 표현 언어라고 하는 것도 편리한 말입니다만, 나는 니시다 철학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표현을 너무 일반화해 사용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있습니다.

다만, 가장 알기 쉽게 말하면, 실내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바쇼가 사용하는 하이쿠의 말이에요. 거기에 자신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것 같은 언어는 모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나」가 들어가면 무, 그러니까, 무아의 논리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선생님의 말씀으로 말하면 바쇼라든지, 혹은 문예에 가까운 것 같은. 즉, 별로 자신은 하이쿠 만들기라든가, 그러한 예술성이 있다든가,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보통의, 일상의 수다의 말도 아니면, 개념적인 말도 아니고, 뭔가, 역시 조금 바뀌고 있어요. 거기는, 나는 아마, 성경 안의 말도, 그러한 개념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인가 조금.

그래서 잘 말할 수 없어요. 특히 선문답의 말은 독특하고, 이 사이에, 순식간에,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만, 역시, 그것을 단순한 표현언어라든지, 그런 것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게 할 때 성경과 신학, 그것은 성경 안에 신학 A도 B도 C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학이라고 할 때의 말은 이미 이미 형이상학, ​​혹은 철학의 언어가 아닌가, 는 어떻다는 것을, 매우 고집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다나카 저는 철학 이전에 한번 되돌아가서 철학의 부정을 통해 철학이 어디서 성립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신학의 경우에도 신학이라는 교리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그것이 경험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그러니까, 신학 이전, 그리고 철학 이전부터 사색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후기 타나라나 니시다에 공통되는 사색의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니시다의 경우, 최초의 「선의 연구」로 직감적으로는 모두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재적으로 말이죠.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하는가? 그 언어 표현을 둘러싼 악전 고투는 평생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네요.

그러므로 그 문제는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문제이며, 나의 경우는 사실 니시다를 기독교의 맥락에서 읽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니시다 이해보다는, 니시다 자신이 문제로 하고 있는 일을 기독교도로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까. 그리고 그는 역시 프런트에서 사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른바 최전선에서, 철학의 현장에서 악전 고투하고 있는 그 노력으로부터 배우고 싶어서, 니시다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네요. 니시다와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것은 축소 재생산이기 때문에. 「견사와 싸우면 사의 반덕을 줄이지 않고」라는 선의 말이 있네요. 이 말은, 학문의 한없이 탐구를 촉구하는 정신에 통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고, 종교의 근본에 다니는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반복 반복하면, 그것은 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형태 있는 것을 낳는 것 같은, 근원적인 일에 눈을 뜨는 것이 근본과 같이 생각합니다.

타나베 논집에, 니시다·타나베 기념 강연회에서 이야기한 것을 쓸 예정이 있습니다만, 타나베의 경우도, 니시다를 비판하는 것을 통해, 니시다가 문제로 하고 있던 것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려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느 쪽이라든가 니시다 쪽이, 자신의 체험에 딱 맞기 때문에, 타나베의 개념적인 사고보다 니시다 쪽에 매료되고 있습니다만.

모리 타나 씨는 거의 전부 오해군요.

다나카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리 타나 씨는 상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무」란, 그런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역시 타나베입니다. 그것은, 「무의 장소」 쪽이 적확해요. 왜냐하면, 「보는 사람 없어서 본다」라고 하는, 주체가 아니고 「주체로부터 장소로의 전환」이, 니시다에 있어서 일어났어요. 그것을, 또 한번 절대무라고 하는, 절대적인 원리 같게 해 말했다고 하는 것은, 타나베씨의 굉장히 큰 책임입니다.

대부분, 그래서 타나 씨를 읽으면 개념으로, 전부, 긴 긴 문장이지만, 하나 읽으면 전부 알고 버려요. 아무것도 재미있지 않다. 나중에, 뒤따라 네요. 거기서, 뭔가 새로운 발견이라든지, 새로운 파토스라든지, 그러한 것을 너무 느낄 수 없다. 그 대신 연구만은 본격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틈이 없다. 그것은 대단하고, 우리 선생님도 모두 타나 씨의 제자였기 때문에, 너무 타나 씨의 욕을 말할 수 없었다.

다나카 우선, 니시다의 문제라는 것을, 역시 타나는 전후라고 하는 그 시대에서, 패전을 경험한 후에 썼습니다. 니시다가 구약 성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본이 망국의 위기에 있다는 것은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구약의 예언서를 다시 읽고 그가 거기에 매우 움직였다는 것은 일기 속에 명확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타나베는 패전이 현실화했을 때, 니시다가 이미 보고 있던 일을, 타나베 자신의 말로 말하려고 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야기 아직 너무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즉, 성경의 말과 그 다음 신학의 말은 다르지 않을까. 물론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성서학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은 각 문서에 대해,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서 쓴 것인가를 연구하는 부문과, 그 다음, 성경의 텍스트 하나 하나에 대해서 해설을 해 나간다. 석의가 된다. 그것과 함께 신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신약성경이 포함하는 신학적 사상(제 개념의 명확화와 질서화)을 꺼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리모리 그렇네요.

야기 네. 그래서 처음부터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과, 모르는 채로 말하면 바울 자신이 한 명의 신학자로, 신학적인 언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예를 들면, 진짜는 말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하나님의 아이가 나타나서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만, 더 이상 나는 죽어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그와 매우 비슷한 말로, 좀 더 직접적인 말이지,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빛나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었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뭐야? 그대로 읽고 알 수 있다고 하면 무리겠지요. 다른가요?

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요컨대 성경을 읽어도 그것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아요.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알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작업이 무슨 일인가라고 하면, 지금 말한 것 같은 시대사라든지, 하나하나의 개념의 성립사의 연구라든지, 문장의 석의라든지, 그리고 나서 신학적인 사상, 여러가지 면에 걸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자신은 성경의 말과 다르다는 것은 우에다 씨가 좋고 직접 경험에서 제1차적인 말과 그것을 해석하고 말해 가는 말과는 다르다고. 그렇지만, 또 원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역시 추상도가 다르기 때문에.

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야기 물론 다릅니다.

모리 그러니까, 현대로부터 보고, 얼마나 불합리하거나, 모르는 것이라도, 역시, 우선 깊은 의미는 모르더라도, 아무리 엉망이든, 자의적인 의미는, 일단은 받을 수 있네요.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녀석만이라도. 그 의미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역시, 선의 공안 따위는 더 심해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야기 같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리 아니, 공안은 해석이 아니에요. 역시, 모르는 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야기 해석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해석이라는 것은.

모리 아니, 하지만 그것은 설명이 아니에요.

야기 물론. 설명은 아니지만 같은 근원에서



나온 더 알기 쉬운 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 있어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숲 그렇습니다. 입니다.

야기 말 위에 타고 온 것만의 해석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말로는 물론 다르지만,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보다 정당한 근원에서 나오고, 그 근원을 보다 분절한 형태

확실히 가리키는 의미에서는 현대에는 역시 필연적으로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난

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근원 언어입니다, 그것을 신학이라고 하는가, 철학이라고 말하는지, 무엇이라고 말하십시오.

괜찮지 만. 신약신학의 말이라고 생각해 우에다씨가 말하고 있다. 근원어만으로 좋다고 하기 때문에. 와 버리니까. 오히려, 확실히 그것만의 즉, 내 해석의 방법, 분들에게 썼습니다. 생각합니다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를 단서로 해, 모네. 하지만, 역시 그것을 안심했는데, 그 말이 나온 근원에 접해, 아, 이쪽인가 , 우리는 어떻게 발달한 언어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에 통하는 말로 다시 쓴다고. 그것이 석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와 운과만으로 비교하라고 하거나, 신약신학이라면,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내가 왔어. 다른 분들로부터 볼 수 있으면, 코데라자와 야기 선생님의 회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꽤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만. 선생님, 듣고 싶었습니다만, 최근에는, 367년에, 콘스탄틴의 뒤, 교회의 회의에서 이 성전이 선택되네요. 그래서 배제된 복음이네요, 예를 들면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베드로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마그다라의 마리아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그러한 것이 최근, 매우 토론되고. 특히 저는 토마스의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를 들어 제자를 향해 자신을 믿지 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알고라든지군요. 마지막은, 모두 예수가 되라든가, 불교로 말하는 부처가 된다고. 예수님이 되라든가, 그러한 말을 토마스 따위는 매우 말하고 있는 것으로, 로마 교회가 싫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매우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는 선생님이 말하는 것처럼 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십니까. 그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각합니다만, 선생님의 의견은,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야기 토마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는 전혀 예수와 다르니까.

테라자와 그렇습니까?

야기 응. 조금 전의 다나카 씨의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가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말해 버렸을 뿐이겠지만. 자주 있는 것입니다만,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의 말을 역사의 예수의 말이라고 하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하겠지요.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는, 그건 예수가 아니고, 타키자와씨의 말로 말하면, 「가미와 함께 있습니다」. 내 말로 말하면 "통합 작용". 그것이 한 사람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건 역사의 예수와는 전혀 다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가 하면, 역시 부활 이해에까지 돌아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우선 그러한 구별을 한 후에. 역시, 그러한 구별을 무엇으로 한다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예수의 말 속에서도, 이것은 예수가 정말로 말했다고 생각되는 말과, 그 후, 나중에 교회가 말한 말이 아무것도 있는 것 같다고. 그것은 백% 확실히는 모르지만, 대부분은 구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중에서도 아무래도 예수님께 정말 예수님이 말한 것 같다는 것을, 굉장히 줄어 버리지만, 예수님의 말로 여겨지고 있는 것의 2, 30%가 되어 버리지만, 더 적다 지도 모른다. 그것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감각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이라고 하고, 조금 전 마가 복음서의 말을 끌었지만, 나는 다나카 씨를 전혀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렇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만, 저것은 전설의 말로. 즉 하늘에서 목소리가 났고, 당신은 우리 사랑하는 아이, 당신은 기뻐한다는 것이 있었지만, 하늘에서 목소리가 났다는 누가 듣고 누가 기록했습니까? 정말 하늘에서 목소리가 있었나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예수 위에 머물렀다고. 그것도 마가는 예수 안에 들어갔다고 쓰고 있어. 그런데 누가와 마태에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쓰고 있다(마태 3·16, 누가 3·22). 장소 론적으로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기뻐했다는, 그것도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그런 목소리가 되고, 누가 그것을 듣고, 누가 기록했다는 이야기가 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라져 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예수라 할 때는 역사의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생각되는 말을 적어도 중심에 둔다. 그러면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예요. 그것이 한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있는 말이며, 저것을 예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가지 않기 때문이군요. 다나카 씨가 말하고자 한 것 자신은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저로서 걸리는 점은 그런 점입니다.

다나카 아니. 저도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는 편집, 복음서기가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이자 복음 서기인 요한 자신의 직접 경험, 종교 경험이 없으면 그 예수의 말은 쓰지 않았다. 그래서 결코 그것은.

야기 요한은 누구일지도 모른다.

다나카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는, 다양한 전승이, 나는 전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왜 가톨릭 테제를 소중히 하는가 하면 프로테스탄트의 구약에는 성전으로 채용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솔로몬의 지혜』, 그리고 『집회의 책』. 이것은 『벤 시라의 지혜』라고 합니다만, 이 두 사람은 가톨릭 교회의 전승 속에서 굉장히 소중해져 온 것입니다.

야기 그렇네요.

다나카 그리고, 아마 전례로 인용되는 것이 매우 많고, 이 둘을 빼면, 예를 들면 데카르트도 모르고.

야기 아우구스티누스 어쩐지, 잘 인용하고 있어요.

다나카 중세 철학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토마스 복음서도 매우 좋아해요. 그래서 저에게는 이단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야기 아니, 소중하다고 하면 역사 연구상에서는 중요합니다만.

다나카 모두 소중히 하고 싶다. 그래서.

야기 아니, 그것과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수의 말인지 아닌지 하는 이야기와 사상사 위에서 소중한가 소중한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는 다르네요.

다나카 그러나 물론 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전례 속에서 그것을 통합할 때에는, 그것은 역시 하나의 말, 전례의 데이터로서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통합하는가 하는 미래를 향해 읽혀지고 있어요 . 그러므로 반드시 시적 사실이 어땠다고 하는 것은, 나로부터 말하면 그 탐구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성서학의 레벨, 연구 단계에 따라 바뀌는 것이고, 진보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야기 전체로서는 이제 그다지 변하지 않네요.

다나카 그래서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전례에서 그것을 미래를 향해 통합하고 있는 그 일도 저는 귀중한 동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기 그것은 교회의 일이며 또 다른 문제.

타나카 그렇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성서학의 사적 예수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다양한 견해라는 것을 통합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기 아까의 숲씨의 문제에 바꾸면, 언어는 확실히 여러가지 레벨이 있어요. 같지 않다. 역시 그것은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그 점은 말씀하신대로. 다만, 각각의 기능으로서의, 각각의 독특한 의미는 있다고, 그러한 것. 그리고, 니시다와의, 뭔가, 나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똑같이 하자니 전혀 생각한 적이 없네요.

다만, 스스로 하고 있으면 닮아 버렸다고 한다. 나의 본심을 말하자, 직접 경험이라는 곳에서 시작되어, 자각에 나타난 것을 말로 해왔다면 닮아 버렸다는 것이 나의 감상으로. 예를 들어, 니시다를 사류로 승화하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니시다와 내가 말하는 것, 공통점은 있겠지만,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예를 들어, 나는 예수님이 신이라는 궁극의 장소와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통합작용의 장소를 구별한다. 장소는 일하는 장소이며, 일이 실현되는 곳이 「장소」(인격), 「신」과 사람과의 관계는 「작용적 일」. 그렇지만, 매우 울려 퍼진다고 할까, 니시다가 말하는 것이 울린다고 하는, 그것은 있어요.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세하게 말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만두겠지만, 확실히 다르겠다고 말하면, 확실히 다르다. 처음부터 동일하게 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금 이미 7분 정도 예정보다 지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세션이기도 하고, 이것만은 아무래도 야기 선생님에게 묻고 싶다고 하는 분이 계시면, 한명 두 명은 좋은가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지금의 타나카 선생님의 발표를 근거로 해, 혹은 그것과 다른 각도로.

이시이 아까의 모리 선생님과의 교환으로, 말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 거기로부터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는 말에 되돌아 가는 것이, 하나, 야기 선생님이 생각되고 있는 모델이라고 하는 것 같은 그래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나, 이번에 새롭게 공동역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번역되어, 그 외부 모니터 같은 일을 했습니다만, 그 번역이라고 하는, 식전 같은 것으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 성전에서 비교했을 경우, 굉장히 번역의 역사를 거쳐 일본어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문어역에서 구어역, 그리고 30년마다 개역되어 간다고 한다. 왜, 기독교라고 할까, 성경은 번역되어 가는가 하는 것은, 아마 하나, 공동체성이라고 하는 것에도 관련되어 온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야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번역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근원으로 돌아와 그 공동체 안에서 알 수 있는 말에 되돌아 가겠다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만, 번역이나 혹은 석의 한다는, 나는 일단 개신교이므로, 게다가 루터파이므로, 비교적 설교가 소중해져 온다고 할까, 거기를 기둥으로 하고, 종교 개혁으로 나온 곳을 소지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 석의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성경의 근원적인 말로 돌아가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쪽을, 야기 선생님의 생각을 묻는다면 생각합니다.

지금 폭포 그것과 관련하여, 관련이 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

금 그럼, 또 하나. 질문을 정리해 선생님이 대답해 주시면.

이마타키 방금 전에 모리 선생님이 비판된, 타나베 철학에 있어서의 종의 논리. 그래서, 이것은 방편. 방편을 어떻게, 저해체가 아니라 살릴 것인가라는 의미로, 타나베 철학의 의의를, 반대로 나는, 오늘의 스가와라 선생님과 타나카 선생님의 발표로부터, 무언가 시사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만. 야기 선생님 자신의, 타나베 철학에 있어서의 종의 논리의 평가를 한다.

야기 상당히 다른 문제입니다. 우선, 시작하는 쪽으로부터, 번역은 키리시탄의 시대부터 시작해 하고 있습니다만, 제 느낌으로는, 아무리 번역했다고 좋은 번역이라면 일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 둘째,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공동 번역을 만든 것이 문제가 하나. 뭔가 하면, 교리는 성경의 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대입니다. 교리에 맞게 성경을 번역하기도 한다.

금 그것도 있습니다.

야기 농담이 아니야. 그만두고 싶어. 그럼 또.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번역하고 있어. 예를 들어, 고린도 성경의 4장의 4절에, 나는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그런 말이 있다. 심판은 주로 맡긴다고. 심판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는 것을, “나는 나를 생략해 부지런한 일은 없지만”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슈노이다(σύνοιδα)라고 합니다. 슈노이다라고 하는 것은 함께 아는 것으로, 양심과 자각과 양쪽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어가 그렇고, 라틴어도 그렇다 (conscio, conscientia).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각 쪽이에요. 나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고, 좋았던 것이 나빴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말하고 있네요. 그것을 양심 쪽에 버리는 것이니까, "나는 자신을 빼놓고 부적절한 곳은 없다"고 번역해 버렸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며 심판은 모두 그리스도께 맡겼다는 다음 말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런 중요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

그럼, 타나베 모토입니까? 田邊元의, 개와 종과 종류의 상호 매개, 절대 매개라는 논리이지만, 그 논리 자체는 매우 흥미가 있고,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통합체에는, 개와, 그 다음 통일과, 그런 다음 통합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종(통일)의 면이 매우 강해지면, 개가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그것이 종류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가 비슷하다.

그런데, 어디가 결정적으로 다른가 하면, 적어도 전후까지의 田邊이지만, 국가가 류가 되어 버린다. 국가가 신격화되는군요. 그러므로, 그의 국가론에서는, 국가가 보살의 나라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내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것은 류가 아니고 씨네요. 종류라는 것은 말해 보면 인류이니까요. 국가를 종류로 두면 그것이 신성화된다고 할까. 그게 내가 그의 결정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금 그냥 6시에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네 번째 세션을 마칩니다. 정말 고마워요.

八木誠一氏の思想 「統合体の哲学」のあらたなる構築に向けて

 八木誠一氏の思想

「統合体の哲学」のあらたなる構築に向けて

田中 裕

はじめに

八木誠一先生のご発表の要旨は

一、 新約聖書は何を語っているか(新約聖書学)

二、 それを現代人に通じるように言い表したらどうなるか(宗教哲学あるいは哲学的神学)

三、 新約聖書が示すあり方に到達するためにはどうしたらよいか(実践論)

の三部分からなる。最近著『創造的空への道』、さらに「私の仕事について」で参考文献として示された八木先生の半世紀にわたる著作群を手引きとして、上記の三つの視点からの先生のお仕事について回顧しつつ、それが将来に対して有する意義を語られた。

八木誠一先生(以下敬称省略)のお仕事は、新約聖書のテキスト釈義を母体としつつ、言語 / 思惟以前の直接経験にねざす宗教哲学として展開されたが、その研究発表の一つの重要な場が、東西宗教交流学会(The Japan 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であった(1)。 仏教者とキリスト者との霊性交流と宗教哲学的な対話をめざして、一九八二年に設立されたこの学会に私が入会したのは一九八五年であったが、その年の大会テーマは「仏教とキリスト教の接点」であり、講演者の西谷啓治を囲んで二日間にわたる集中討議がおこなわれた。西谷啓治の講演でいまでも鮮明に記憶に残っているものがいくつかある。

一つは「個人・共同体・世界」の三つの視点から仏教とキリスト教の接点を考察する必要性の指摘である。三十四年の歳月を経過した後で改めて西谷の言葉を回顧して再認識したことは、仏教とキリスト教という二つの世界宗教に共通する宗教的実存の構造を分析する場合、個別・特殊・普遍の三者を不可分な統一をなすものとして、それらの相互媒介・相互内在の構造を動態論的に考察する事の重要性であった。

もう一つは、「親鸞の〈二双四重の教判〉以後、日本の仏教者が〈教相判釈〉をしなくなったのはなぜか?」という西谷の問であった。宗教間対話で云うinclusivism(包括主義)の大乗仏教的形態として「教相判釈」があり、ただ一つの選択された自らの宗教的立場を真実なるものとしつつも、他の諸宗派を端的な虚偽として斥ける排他主義(exclusivism)を採択せずに、真実なる教えに導く暫定的な教え(方便)、あるいは部分的に真理を証する教えとして位置づける立場である。雑多な諸宗教・諸宗派が世俗化し形骸と化した現代にあって、包括的な統合的真理への問いに、日本仏教ももう一度立ち返るべきではないかとの問いかけがそこにあったと思う。

更に、西谷は「心田を耕す」という表現で、農夫が田を耕し、種子を蒔き、稲の成長を見守り結実を待つこころで仏教を受容した日本人の心に言及された。仏教もかつてはキリスト教と同じように外来の宗教であったが、土着の民の宗教心を排除せずにそれらを摂取し、日本文化の形成に大きく貢献した。普遍的な世界宗教の「文化内開化」という問題は、大乗仏教に限らずキリスト教にとっても大切な問題であ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東西宗教交流学会とともに私が三十年以上にわたって続けているもう一つの学会活動は、日本ホワイトヘッド・プロセス学会である。この学会の初代会長の山崎正一は當時、駒場の大学院の比較哲学演習で、午前中にカントの『純粋理性批判』、午後に道元の『正法眼蔵』をテキストにしていた。谷中興禅寺の住職であると同時に日本哲学会会長でもあった山崎は、「随聞記」の校訂注釈の仕事をしており、その『正法眼蔵』読解は、臨済宗や曹洞宗というごとき宗派の区別を越えるだけでなく、さらに東洋と西洋の思想的区別を越えた普遍的な文明論の視点から道元を論ずるものであった。山崎のカント解釈ないし批判も同様であって、従来の日本で支配的であった講壇的なカント解釈よりも、ジョン・ロックに始まる英国の経験論の伝統を―平明な言葉で事柄に即して語る哲学でありながらも伝統的権威を批判する根源性を内に秘めているものとして―評価するものであった。

私は、「人間とは何か?」という問いに真・善・美の三つの価値を統合するカントの根本姿勢には共感を覚えたが、カント哲学そのものは「単なる理性の限界」のなかでのみ宗教を語る点に、宗教哲学として見る限りは不満が残った。それと同時に、数学や理論物理学の研究から哲学に転じたものとして、カントの純粋理性批判のア・プリオリズムは、そのままの形では、とうてい受け入れら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時空の主観的な直観形式と純粋悟性概念が経験世界を構成するが故に、ア・プリオリな総合判断が可能となり、それが純粋数学と物理学を基礎づけるとカントは述べた。その議論はユークリッド幾何学とニュートン物理学、そしてアリストテレスの形式論理学に改訂不可能な普遍妥当性を認めた上で、その認識論的な根拠を問うという議論になっていた。そのため、二十世紀に生じた数学と物理学のパラダイムの根本的な変換に、カントの認識論そのままでは対応できないように思われたのである。カントの議論は、非ユークリッド幾何学を内蔵する相対性理論、非因果的相関を内蔵する量子力学、非アリストテレス的論理を主題とする現代論理学の現場から見直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たのである。

駒場の大学院では、私にとってもうひとつ大事な出会いがあった。それは非常勤講師として上智大学から東大駒場に出講された栁瀨睦夫の「科学基礎論(量子力学の観測理論)」のセミナーであった。この演習には、おなじく非常勤講師として駒場に出講されていた本郷の哲学科の山本信、そして東大物理学科で栁瀨と同期だった大森荘蔵も参加し、院生達と三人の先生方による白熱した議論が続いたのを覚えている。今になって回想すると、科学・哲学・宗教の三つの領域の交差する場所で仕事をしてきた私は、様々な形で山崎正一、柳瀬睦夫両先生の影響を受けていたことを実感している(2)。

「実在とはなにか」、と言う根本的な問いを回避せずに、分離不可能な全体をテーマにするという考え方、量子論と相対論を統合する(将来の)物理理論の基礎となる実在論はどのようなのとなるか、という問いかけを、私は、栁瀨先生と共有していました。物理学者であると同時にカトリックの司祭でもあった柳瀬には『神のもとの科学―隠された実在論』という遺著があり、そこでは「科学とキリスト教神学」という二つの領域を統合する独自の思想が語られている。

「隠された実在論」とは、私の理解するところでは、「隠れたる神」が―科学・哲学・宗教(無神論者も含む)の立場の違いを超えて―万人にとって共通の実在であるという前提のもとに、科学と宗教の統合をめざして万人に対して開かれた議論をしようという栁瀨の実在論の立場の態度表明であった。そこでは「真か偽か、中間はない」という二値の形式論理を越えて、日常生活に於ける言語の曖昧さないし両義性を許容し、全ての他者と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共同体をめざす考え方が重視されている。そして、栁瀬は、スコラ哲学の硬直した形式主義を越えて、理性と神秘の間にたって思惟したトマス・アクイナスの原点に還って、刷新されたトマス的実在論の哲学─そこでは「超自然は自然を破棄せずに完成する」─を自己の哲学の立場としていた。とくに、宇宙に於ける人間の位置を、永遠と時間の中間にある「永在場」と捉えたところにその実在論の特徴があった。『神のもとの科学』には栁瀬の自伝的な回想も含まれているが、そのなかでも広島の原爆をきっかけとして物理学者からカトリック司祭の道を歩むようになった栁瀬のプリンストンでのオッペンハイマーとの交流、またキューバ危機の後に「地上に平和を」という回勅を出したヨハネ 23 世教皇に触れている箇所がある。ヨハネ二三世は第二バチカン公会議を招集され、戦争の危機の時代に於けるカトリック教会の現代的刷新を開始した教皇であった。次いで教皇となったパウロ六世の「我々の時代に Nostra aetate」という宣言はユダヤ教、イスラム教、ヒンズー教、仏教と云った諸宗教の垣根を越えてカトリック教会が宗教間対話の重要性を認めるきっかけとなった。このような諸宗教の立場を越えてすべての地上の人々に開かれた教会こそが、まことに「普遍の教会」の名に相応しいだろう。

科学、藝術、宗教の三つの領域を統合するような哲学というと、そんなものが現代に於いて可能かと問われるかもしれないが、私にとってはそれこそが哲学の名に価するように思われた。京都学派の哲学、とくに場所的論理によって宗教的世界観と現代科学の双方を語る西田幾多郎、「実在の実在的自覚」をいう西谷啓治の「空と即」の哲学もそういう統合を志向したものである。

抽象的観念を現実と取り違えることなく、常に直接経験にたちかえりつつ科学、藝術、宗教のすべての文化的活動を統合することをめざしたホワイトヘッドの哲学は、駒場の大学院での私の研究テーマになったが、それは、彼の著作を読んだときに、岡潔の文化と教育、学問に関する考え方と通底し共鳴し合う言葉がそこにあることに気づいたからでもあった。ホワイトヘッドはまさしく観念を実存に先行させるドイツ観念論の批判を通して、その晩年の哲学を構築したが、そこには次のような分別知の批判がある。

人間の実存(human existence)にとって明晰で、意識的な分別知(clear, conscious discrimination)はひとつの偶有事である。それ(分別知)が我々を人間的にする。しかし、それ(分別知)によって人間が実存するのではない。それ(分別知)は我々の人間性の本質(the essence of our humanity)に属するが、我々の実存の偶有事(an accident of our existence) に過ぎないのである。(「思惟の諸様態」原著、一一六頁)

一九六〇年代に出版された英国の文芸批評家、コリン・ウィルソンの「宗教と反抗人」は、「人間は宗教無くしては完全無欠ではあり得ない」というテーマのもとに書かれた著作であった。彼は、この著作の中で、パスカル、スウェデンボリ、ニューマン枢機卿、キルケゴール、のような宗教者ないし神秘主義者を論じた後で、最終章でホワイトヘッドを「彼自身のヘーゲルとキルケゴールを統合した存在である」ということばで締めくくり、最大級の評価を与えた。ウイルソンはアカデミズムの哲学者ではないが、「実存主義者としてのホワイトヘッド」という観点からホワイトヘッドのテキストを読んだおそらく最初の評者である。意識(された存在)から存在(そのもの)を思惟するのではなく、存在(そのもの)のほうから「意識された存在」を思惟する点で、ホワイトヘッドはサルトルのような大陸の実存主義者よりもはるかに興味深い哲学者であるというウイルソンの洞察は、「実存する」という動的な出来事─ その歴史性、個性、社会性、人格性、そしてすべての範疇の基底にある創造性について─の適切なる哲学的な解釈と説明が行われるならば、基本的に正しいと私は考えている。

一身に於てヘーゲルのような思辨哲学者と、キルケゴールのような実存主義者の両方の生を活きた人物としてのホワイトヘッドは、西田幾多郎に始まる京都学派の哲学者達と共に、私自身が哲学する時に、常に参照すべき基本的な哲学的テキストとなり現在に至っている。

ホワイトヘッドの哲学は、彼自身によって「有機体の哲学」と呼ばれたが、私は、現在では「有機体」の語を避けて「統合体の哲学」という言葉で彼の宇宙論と社会論を語ることにしている。それには様々な理由があるが、ひとつには「有機体」という語では、ホワイトヘッドが、本来云わねばならなかった「形而上学的」含意が十分に表現されないからであり、さらに根本的に云えば、前述のように、「分別知」に人間的「本質」をみとめつつも、我々の実存は人間的本質よりも事柄において先であるという、独特な意味での「実存主義者」としてのホワイトヘッドの重要な一面が捨象されることに気づいたからである。 私の理解するところでは、「対立の一致」が統合学の基本的な思惟様式である。真理は客観性であると同時に主体性でもある。ヘーゲルであると同時にキルケゴールでもあるということーそれこそが肝要である。

「個」を、存在するために他者を必要としないアトムとして実体化する「個別主義」を批判した点に於いて有機体論を説くことは正しいが、「関係の第一義性」を強調するあまり、「個性」を関係性のネットワークに解体する「全体主義」を説くならば─その場合、「全体存在」が自らを越えていく「無限」への開けへの適切なる理解が伴わなければ─「個別主義」とおなじく、対立規定の一方のみを証して他方に暗いドグマに顛落するであろう。さて、「統合体」という言葉は八木誠一の思想を理解する上でのキーワードでもあるので、以下では、あらたなる「統合体の哲学」の構築にむけて議論を続けたい。

ドイツのカッセルで八木の仏教的世界への開眼を促されたヴィリヘルム・グンデルトに「私は良きキリスト者となるために仏教を学んでいる」という言葉がある。つまり仏教とキリスト教を統合して、両者を揚棄する第三の世界宗教を求めるという如きことではなく、仏教という「他者」の伝統と真摯に向き合い,それと対話することによって、キリスト者自身が、キリスト教の中でこれまで自覚されてこなかった自己の伝統の、これまで隠されてきた大切な意味を再発見し、それによってあくまでもキリスト教の伝統の賜物のうちにとどまりつつも、それを創造的かつ主体的に変容して、新たに刷新された意味でキリスト者として生きる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であろう。

八木誠一の立場には、仏教との対話によって創造的に刷新されたキリスト教を感じると共に、宗教以後の現代人のニヒリズムを「自然体でしかも主体的に」越えていくという兩面が見いだされる。

このように、対話によって相手から影響を受けると云うとき、それが単なる混淆でも模倣でもなく、自己の伝統の創造的刷新となることはいかにして可能であるか、という問題を考えるために、まず、西谷啓治の論文「空と即」に見いだされる仏教的な法界縁起(特に事々無碍)の説明と、それに触発されて書かれた八木誠一の「フロント構造の哲学」について論じたい。ここでの議論は、フロント構造という考え方が、統合体の哲学にとって重要な論点であると同時に、宗教間対話を意味づけるキーワードでも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

一、西谷啓治の哲学的論攷「空と即」および 八木誠一「フロント構造の哲学」に寄せて

西谷啓治の論文「空と即」(著作集一三巻一一一~一六〇頁)は、一 詩歌に於ける空 二  芭蕉からの一例(連句の考察)三「文」と文法  四 理事無礙のロゴス 五 事々無礙と信の世界 六 根源的な構想力について の六章からなる。

最初の三章は直接経験と言語の問題、とくに詩歌におけることばの使用、とくに芭蕉の俳諧連歌の発句に於ける「切れ字」―切ることによって繋げるー美学的考察を通じつつ、「言と無言、語と默の相互浸透といったところを表現にもたらす力を含む」日本においてとくに洗練の極に達した言語芸術にほかならぬ俳諧連歌の根底にある言葉の働きを考察している。「非連続の連続」あるいは「切ることによって繋げる」ということは「空と即」という論文の主要なるモチーフである。それは「分別的知性」の操作によって言語を対象化して「文法」を語るのではなく、「事実がそもそも〈与えられた〉ものとして現成している場、事実が原本的に、あらゆる反省に先立って、事実自身の「事」として体験されるその現場に帰るという方向」に沿って考察を進め、論理的ないし文法的な構造が成立する以前の直接経験の現場に於いて「言葉がその原本的な姿において自らを示す」場所を解明する。そこは、知性のみならず情意をもそなえた人間の、原本的な自己表現の場であり、「人間の息づかい、息込みや吐息や溜息などが言葉と共に伝わる情意の場でもある。

このような詩歌の言語のはたらきを手引きとして、西谷は「理事無礙のロゴス」の考察に移る。すなわち、事実が与えられて現成している本源のところで事実を言い表そうとすれば、言葉はおのずから詩になり、「文」の脈絡としてのロゴス(理法)を示すと言う意味で、詩作とは、そういう原本的な事実をできるだけ理事無礙的に突き詰めて表現にもたらす営み出逢ったことを確認したうえで、西谷は、次に華厳仏教の四番目の法界縁起である「事々無礙」の考察に移る。

理事無礙の立場は藝術や哲学による語りを可能ならしめる地平を画するが、その立場が可能性の限界に直面したとき、その限界のかなたに開かれるのが、「事々無礙」であること、そして、「宗教というものの根底には事々無礙的な立場が含まれる」と西谷が述べているところに注目したい。

八木誠一「フロント構造の哲学」の冒頭で引用されている「部屋を仕切る壁」が登場するのが、まさに西谷がこの事々無礙の何たるかを説明している箇所である。

西谷の説明の要約

二つの領域A、Bを仕切る限界線は、明確な切断線によって却って相互投射を可能にする。限界線は二つの部屋を仕切る一枚の板に似ている。板がA面に向かっている面xはA室の限界を表示するものとしてB室を代表する。x面はその「本質」において「Aに現れたBの表現」であるといえる。しかし同時にBの表現であるx面はA室の一部としてA室に所属する。Aに現れた限り、「現象」としてはAのものであり、Aの構造契機である。同様なことはその板がB室に向いている面yについてもいえる。…… 裁断が接合でもあること

一般に限界ということには、裁断が接合でもあるという意味が含まれている。そしてその接合は差別されたものの相互投射とか相互浸透とさきに呼んだような聯関として成りたつのである。

回互性ということ

上のような関係の構造を西谷は「回互(えご)的」と呼ぶ。回互的な相互聯関の場合に重要なことは、一つには本質的にAに属するものがBのうちに自らをうつす(映す、移す)とか投射するとかして現象する時、それがBのうちでAと

、、して現象するのではなく、Bの一部として現象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言い方を変えれば、A「体」がA「体」へ自らを伝達するとき、それはA「相」においてではなくB「相」で伝達される。西谷の云う「回互性」のもつ分与と分有の構造

西谷の議論を検討するために、回互性の説明に出てくる動詞的表現(分与と分有)に着目し、この議論をを以下の四点に整理する。(1)Aは自らをBへB相で分与(mitteilen)し、(2)BもAからそれをB相で分有(teilhaben)する。(3)これがBへの自己伝達というAの「用」である。

(4)Bの側からのAへの伝達においても同様である。

西谷による上記の図解の問題点

部屋の仕切り、ないし壁の譬えによる回互性の説明では、力動的な関係(mitteilen/teilhabenという動詞の意味することがら)を成立させる時間性が捨象されているところに問題が残る。

この説明では、二つの部屋の仕切りという静的な空間的イメージに依拠したために、Aの側の壁面が、Aの一部として別室のBを表現するという事態が説明できていない。Aの内部にいるものは、壁面のむこう側の部屋Bが如何なるものであるかを「壁」を媒介として認識することは出来ず、それどころか部屋 B があることさえ認識できないであろう。この図解では、部屋Aも部屋 B も「壁に閉ざされた窓なきモナド」になってしまうことが問題である。

時間というあらたなる次元を導入すべき事

空間的イメージだけに依拠する説明の問題点とは、分与と分有を交互に行う部屋Aと部屋Bを二つの主語的基体として語るために、A、Bともに、動詞的な関係性が成立する以前にすでに存在している主語的実体として扱われていることである。空間的イメージに依拠した静的な説明を動的に理解するために、時間という新たなる次元を「空と即」のロゴスに導入しなければならない。

二、フロント構造のダイナミズム

実在性(reality)と現実態/活動態(actuality) の区別と関係

ホワイトヘッドの『プロセスと実在』でいう「プロセ

ス」とは、それ自身が現実態/活動態である(the process 

is itself the actuality)。ここでいうプロセスは、運動変化(キネーシス)と現実態/活動態を明確に区別したアリストテレスの形而上学θ巻の議論を踏まえて語っている。アリストテレスは、たとえば「見る」という働きを分析して、「見た」ことが直ちに「見ている」ことと合致すること、完了態が同時に活動態であるような「働き」をエネルゲイアと呼んだ。キネーシス(運動變化)はこれとは違って、過程のどの箇所をとっても完了ということがあり得ず、運動の終点ないし目的点(テロス)に達したときにのみその運動が完了する。ところで、ホワイトヘッドが言うプロセスとは、そのように目的に達するまでの「過程」を意味するの

、、、、、、、、、、、、、、、、、、、、、ではなく、完了態と活動態がひとつであるようなエネルゲ

、、イアそのものを意味するのである。このエネルゲイア論は、「完全性」という中世のキリスト教神学で使用された概念の意味を刷新するものである。

プロセス神学と東方キリスト教神学の統合

チャールズ・ハーツホーンをはじめとする米国のプロセス神学者は、アンセルムスの本体論的な神の存在証明でおなじみの「完全性の論理」を動的に刷新しようとした。彼等は、「それよりも大いなるものが存在しないもの」という完全性の定義を変更し、「神は神以外の如何なるものによっても凌駕されることはないが、神は神自身によって凌駕されることが可能である」という考え方、すなわち時間的世界の影響を受けて、神自身も嘗ての自己自身を乗り越えて、さらに大いなるものとなるというあたらしい考え方をしめした(3)。西方教会の神学的伝統では、完全性は静的に把握されるので、これを「完成された完全性(perfected perfection)」と特徴付けることが出来よう。これに対して、動的プロセスを重視する東方教会の霊性の伝統では、「完成しつつある完全性(perfecting perfection)」が強調される(4)。 

しかし、私の理解するところでは、

(1)ホワイトヘッドが神について語っていることは、いかに価値なきものにみえようとも、一切の有限なる「活動的存在(actual entity)」の生成のプロセスにもそのままあてはまるということ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して、(2)「プロセスがそのままエネルゲイアである」という思想のもっともラディカルな点は、「完成された完全性」が即ち「完成しつつある完全性である」という所に求めら

、れなければならない

、、、、、、、、、、、、、、、、、、 、、、、、、完全性を永遠に実現できない理想として、我々の一歩一、、、、、、、、、、、、、、、、、、、、、、、 、、歩の努力目標となるという考え方を根本的に転換し、我々、、、、、、、、、、、 、、、、 、、、、、、、、、の一歩一歩のプロセスが、そのまま「既に実現された完全、 、、、 、、、、、、、、、、、、、、、、 、、、性」を含み、なおかつそれが常に新たなる完全性(自己超 越的な完全性(、、、、、、)self-surpassing perfection)を目指すダイナミ(、、、、、、、、、)、、、、、、、、、、、、、 、、、、、、、、、、、、ズムを形成すると考えること、これこそがホワイトヘッド、 、、、、、、 、、、、、、、、、、、、、、、、、の「統合体の哲学」におけるプロセスの概念の根本的な思

、、、、5 想である。

三、「統合体の哲学」に於ける場所的論理

場所論的思惟は、ホワイトヘッドの哲学においても中心的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それは、彼のエネルゲイアとしてのプロセス論では、次のように定式化されている。

「有」の本性には、それが一切の「生成」のための潜在的な力であることが属している。(It belongs to the nature of a “being” that it is a potential for every “becom-

ing’)(「過程と実在」原著、二二頁)

、、、、、、 、、、、、、、、、、、、、、、、、、、、、、、、、これは「相依性の原理(the principle of relativity)」と呼ばれ、『統合体の哲学』のもっとも根本的かつ普遍的な原理である。この原理は、現実的存在の生成のプロセスが、宇宙のありとあらゆる「有」を内在させて成立することを示している。「有」という言葉は、対象的に語ることのできる全ての有(広義の物)をさしている。そのように、あらゆる「有」を内在させることによって、一個の活動的存在(actual entity)が生成するということの意味を、ホワイトヘッドは「・・・に於いて現在する(being present in)」という場所論的な言い方で次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

我々は、関連の度合いを、また無視しうる関連を斟酌するならば、あらゆる活動的存在は、あらゆる他の活動的存在の内に現在する(every actual entity is present in every other actual entity)と云わなければならない。統合体の哲学(the philosophy of organism)は、この「他の存在の内に現在する」ということの意味を解明するという課題に従事するものである。」(『過程と実在』原著、五〇頁)

「相依性の原理」は、西谷啓治の「回互性」にもとづく法界縁起の説明、及び八木誠一の「フロント構造の哲学」や「場所論としての宗教哲学」でいう場所の論理を、プロセスをそれ自体エネルゲイアとみなす生成論によって、ダイナミックに語ったものということができよう。

ところで、生成のプロセスに於いて他の一切の有を内在させる「活動的存在」はアリストテレスの云う意味での第一実体ではない。第一実体は「他の如何なる主体 subject の内にない」ことによって規定されているからである。それゆえに、ホワイトヘッドは、「・・・の内に現在する(be present in)」という代わりに、「客体化(objectification)」という表現を選ぶようになる。すなわち「活動的存在Aが他の活動的存在Bのうちに現在する」と言う代わりに、「活動的存在Aが他の活動的存在Bのうちに客体化される」というのである。

その場合、Bの内的なる構成要素の一つに他ならぬAの客体的存在が、「フロント構造の哲学」で云う、「Bの内なるAのフロント」であり、「空と即」の回互性のロゴスで云うならば、「B相のもとで伝達されたAの体」であり、その自己伝達のはたらき(分与/分有)が、ホワイトヘッドの云うobjectification に該当するであろう。

ここで、読者は次のような疑問を呈するかも知れない。ここでいう自己伝達ないし自己譲与のはたらきは如何なる種類の関係なのか。「生成のプロセス」が「他の一切の有を内に含んで成立する」という場合、そこで云われる関係は如何なる種類の関係なのか。 ホワイトヘッドの哲学は、米国のプロセス神学者によって、「プロセスと関係性の哲学(process-relational philosophy」と呼ばれることがあるが、そこでいう関係とはどういう種類のものであるかを解明しなければなるまい。

外的にして内的、内的にして外的なる関係の論理

(the logic of relatedness)

外的関係説と内的関係説の二つの立場を対比することから始めよう。ここでの要点は、関係の本性を論理的に分析するということが、実在論と観念論という認識論に於ける二つの対立する立場と深く関わっているという事である。

実体は関係に先立つという考え方、すなわち一切の関係抜きで本質的な属性によって実体が定義できると考える立場は、関係というものを実体にとって外的と考える実在論の立場である。

たとえば一本の樹木を我々が見る場合、その樹木は我々によって観察されることとは独立に実在すると考えるならば、その人は、外的関係を前提している。常識は素朴実在論の立場をとるものであるが、物理学の観察可能量(observable)―位置・運動量などーが観察者(observer)なしに実在すると考える科学的実在論も又、観察対象との関係を外的な関係として捉えていると言って良かろう。

これにたいして、関係項は、関係とは独立には実在性を持たないと言う考え方が、内的関係説である。内的関係説には様々なバージョンがあり、また如何なる論理学によってそれを表現するかには異同があるが、ここでは議論を簡略化するために「あるとは知覚されてあることであるesse est percipi = to be is to be perceived」というバークレー流の観念論の定式をとりあげるならば、その立場は、知覚を内的関係として捉えていたことになるだろう。バークリーは、外的世界にある物質的実体を否定したが、その論理は、知覚という関係を、精神に於ける内的な関係として捉えたことに求められる。

ラッセルは、アリストテレス論理学が一つの主語に一つの述語を帰属させる命題を特権視したことを批判した。アリストテレス論理学は、実体と属性を第一義的な存在と考え、関係を付帯性におとしめる存在論への道を開いたために多項関係と多重量化の論理を扱うことが出来なかったからである。これは、ラッセルとホワイトヘッドに共通するアリストテレス批判のポイントである。

ラッセルは、認識論においては、内的関係説に立脚するブラドレーの絶対的観念論とは正反対の立場、すなわち、全面的な外的関係説の立場を採用し、観念論を論駁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

ラッセルの新実在論は、素朴実在論でもなければ、素粒子を究極的な実在と考える科学的な実在論でもなかったことは注意すべきであろう。それは、命題の主語を実体化する「物のアトミズム」ではなく、個々の要素命題によって記述される個々の事実そのものをアトムとする「事のアトミズム」として展開されたからである。ラッセルによって「論理的原子論の哲学」として定式化された「事のアトミズム」は、「否定的事実(negative fact)」をも事実と見做す点で、実証主義者が依拠するポジティブな事実とは一線を画したが、「事」の諸々のアトム相互の内的な関係性は完全に捨象されたのである。

ラッセルの云う「論理的原子論」は、ライプニッツ的な形容をするならば「窓を持たぬ原子的事実」に依拠するものであった。そのために、個々の「事」が如何にして生成するかという力動的考察も、またその生成において他の「事」と如何に関係するかという活きた関係性の事実にかんする考察も捨象されているのである(6)。

それでは、「プロセスと関係の哲学(process-relational philosophy)」とも特徴付けられるホワイトヘッドの場合は、関係について内的関係説、外的関係説のどちらの見地をとっていたのであろうか。

ホワイトヘッドの「プロセスの哲学」の関係説の一つの特徴は、同一の関係が、関係項の一方にとっては外的であるが、それと同時に他方にとっては内的であるという考え方を採用しているという事である。

この独特の関係説から、たとえばバークレー流の「存在するとは知覚されてあることである」という観念論のドグマで前提となっている知覚経験をどのように説明できるか見てみよう。私の前に一本の樹木が見える。有る時、有る場でその樹木を見る私にとって、客体(object) としてのその樹木の存在は主体(subject)としての私にとって内的であり、私の世界(そのとき、「世界は私の世界である」)に住まうのであって、その樹木を離れた私の世界も、私自身もまた存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ある。しかしながら、その樹木の側からすれば、それ自体が私と同じく主体なのであって、私に見られるという関係は、その主体にとっては外的(external)かつ偶有的(accidental)である。認識論に於ける実在論と観念論との「対立の一致」を表現する一つの道が、このように同一の関係を、外的にして内的、内的にして外的とみる関係説によって開かれることに注意したい。

外的 / 内的という二重性を持つ関係説を、「想起」の経験に適用してみよう。もし内的関係説を徹底すれば、過去とは想起されたこと以外の何ものでもない。過去自体というものは実在せず、いわゆる過去とは「過去の現在」、すなわち想起にほかならないのである、しかし、「統合体の哲学」における場所的論理では、過去は完結した実在性を持つが故に、現在において内的関係を持つ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過去は変えることが出来ない」という了解は日常生活の前提でもある。我々の作為で変えることの出来ないものがそこに確かに存在する。しかし、まさにそのような我々の作為を越えた過去の実在性によって、我々の現在の行為と制作が支えられ、その意味で完結した過去が、私たちの現在の活動の中に内在し、活きた過去として働くということが、我々の過去の了解の中に含まれているのである。

四、新約聖書の場所論的神学についての省察

八木誠一氏は、「新約聖書における場所論」(東西宗教研究第五号二〇〇六年)で、新約聖書における場所論的神学を内包する個所として、全部で二一の代表的なテキスト群を挙げている。そのなかの主要なものに、私の立場(7)からコメントを加えたい。

かくて水より上るをりしも、天さけゆき、、鴿(はと)のごとく己に降るを見給ふ。かつ天より聲出づ『なん ぢは我が愛しむ子なり、我なんぢを悦ぶ』(マルコ一章一〇~一一節(8))

(コメント)イエスの受洗の場面。日本語訳では場所論的含意は明確ではないが、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の ἐν σοὶに場所論的含意があり、「なんぢの内で我悦ぶ(in you I was well pleased)」が直訳。聖霊を受けたイエスの公生涯の始まりを示す受洗の図像は、泰西の宗教画の主題として繰返し描かれたが、場所論的解釈では、イエスの「天父の子」としての「自覚」の(客観化された)表現であり、父子の相互の内在 / 感応という直接経験に由来する。ギリシャ語原文の時制はアオリストであって、一回限りの時と所に生起する出来事を物語るものであった。この出来事を原事実ないし原歴史と云うことができよう。

我かれらに永遠の生命を與ふれば、彼らは永遠に亡ぶることなく、又かれらを我が手より奪ふ者あらじ。彼らを我にあたへ給ひし我が父は、一切のものよりも大なれば、誰にても父の御手よりは奪ふこと能はず。我と父とは一つなり』(ヨハネ一〇章二八~三〇節(9))

(コメント)「我と父とは一つなり」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とは、場所論的な釈義では、「イエスと父とが働きに於いて一である」という意味である。この「一」を「実体的な一」とユダヤ人達は解したために、彼らは「人間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自らを神とする」冒瀆の故にイエスを殺害しようとした。しかしながら、旧約聖書の時代から「神の言葉を伝達する者は〈神々〉と呼ばれていた」のであるから、まして「神によって聖別されたものを神と呼ぶことに何の不都合もない」とイエスは云う。

この引用は、人が生きる「創造的空」の「場」としての「天父」、その「場所」(個別の一回限りの「とき」と「ところ」)において、その人が「天父との作用的一」を生き、「天父」もまたその人に於いて「天意」の実現を悦ぶ(εὐδόκησα)ということを示すものであり、「場」「場所」「作用的一」「相互内在/感応という聖書の場所論的解釈の適用される重要なテキストである。

我の父に居り、父の我に居給ふことを信ぜぬか。わが汝等にいふ言は、己によりて語るにあらず、父われ に在して御業をおこなひ給ふなり。(ヨハネ一四章一〇節(0))

(コメント)ヘブライ語では、「信」を表す言葉に、(1)安心・信頼を連想させるバータハ(bāṭaḥ)と(2)堅固・確実を暗示するアーマン(āman)との二語がよく用いられる。(1)は七〇人訳聖書のギリシャ語訳では「希望」を表す「エルピス」、信頼を表す「ペポイテーシス」が宛てられ、(2)は「信仰」を表す「ピスティス」、「真理」を表す「アレーテイア」があてられる。

新約聖書では、(2)の認識に関係のある「信仰」という言葉が主導的な位置をしめるようになるが、「信」のもつ上記の二つの側面は引き継がれている。すなわち、(1)至誠なる神に全人格を投じて帰依する信頼と(2)言葉や徴を手がかりとして不可視の現実に近づいてゆく理性の歩みである。

ヘブライ人への書翰(一一章一~二節)の、「信仰は望むところを確信し、見ぬものを真(まこと)実とするなり。古(いにし)への人は之によりて證(あかし)せられたり。信仰によりて我らはもろもろの世界の神の言(ことば)にて造られ、見ゆるものの顕(あらは)るる物より成らざるを悟るa」 は、このような「信仰(ピスティス)」が「信」のもつ二側面を統合し、「證(あかし)」と「悟(さと)り」をもたらす者であることが明確に示されている。これは「信仰」が、「見える世界」の中の「臆見(ドクサ)」に過ぎず、「真智(エピステーメ)」に至るための学問の道の準備段階であるとするプラトニズムとは異なる信仰理解である。また、プラトニズムでは、「見えるもの」は「見えないもの」の「像」であるが、聖書の場所的神学では、「見ゆるものの顕(あらは)るる物より成らざる」こと、すなわち「現前するイデア(不可視の実物)」も含めて「るる物φαινομένων」に由来するものではないことが、信仰によって悟られるのである。単に「写像する」のではなく「創造する」ことがプラトン主義と聖書神学を分かつといえよう。

わがは是なり、わが汝らを愛せしごとく互に相愛せよ。人その友のために己の生命を棄つる、之より 大なる愛はなし。汝等もし我が命ずる事をおこなはば、我が友なり。今よりのち我なんぢらをしもべ僕といは ず、僕は主人のなす事を知らざるなり。 我なんぢらを友と呼べり、我が父に聽きし凡てのことを汝らに 知らせたればなり(ヨハネ十五章十二~一五節(b))

(コメント)イエスの いましめ誡命(ἐντολὴ)とは、ここでは「わが汝らを愛せしごとく互に相愛せよ」ということであるが、その「愛(ἀγάπη)」はキリストのケノーシスを強調する最初期のキリスト者の信仰宣言に由来するものである。ここでは、「空」は「空虚」の意味ではなく、「自己を空ずる働き(self-emptying)」による「愛の充溢」として捉えられている。「イエス・キリストの僕(しもべ)(奴隷)」となることによって、地上の君主の奴隷の軛から自由になった信徒達が、さらに進んで、「キリストのケノーシスの働き」に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自覚したときに、もはや「僕(しもべ)」としてだけではなく「友」とも呼ばれていることに注意したい。 

五、トマス・アクィナスの『神学大全』の「神の遍在性」と「作用的一」にかんする場所論的省察

トマスは『神学大全』第一部の第八問題第一項 の異論駁論(sed contra)で、

ものの働くところ、そこに必ずそのものはある(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とのべたあとで、イザヤ書二六章一二節「主よ、我々の行いはすべて我々に於いて汝のなしたもうたところである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c)e)」を引用し、故に神はすべての事物に於いて存在している(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と主張する。そして、

事物が存在している限りを通じて、神は、その事物が存在を有しているそれぞれの仕方に従って、その事物に現在している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quandiu igitur res habet esse, tandiu oportet quod Deus adsit ei, secundum modum quo esse habet)」こと、そして「存在と云うことは、何ものにあってもその最も内奥的なるもの、何よりもより深く内在するものといわねければならぬ(Esse autem est illud quod est magis intimum cuilibet, et quod profundius omnibus inest)

から、

、、、、、、、、、、、 、、、、、神はすべての事物に於いてあり、しかも深くその内奥にある(、、、、)のでなくてはならぬ(Unde oportet quod Deus sit in omnibus rebus, et intime)

と結論する。

更に第八問題第二項 では、神の遍在性を否定する異論を列挙した後、エレミヤ書二三章二四節の「我は天地を満たす(caelum et terram ego impleo)」を引用した後で、神は「すべての場所に於いてある」と結論する。ただし、神がすべての場所においてあるといっても、その場所にすでに存在している事物を排除するわけではない。事物が空間的な場所を占有すれば、必ず他の事物を排除するものであるが、神があらゆる場所においてあるとか、あらゆる場所を満たすと言う場合、そのような仕方で遍在するのではない。そうではなくて、ある場所自身の「存在」とその「存在の力」、すなわち「事物の空間的位置を規定する力」を与えるものが神であるという意味で、その場所に内在するのである。さらに、「場所におかれてある事物(locata)」も「ある事物」であるかぎり、その「存在」を与えているのも神であるから、「空間的場所」と「空間にある事物」の双方ともに、その存在と力を付与している神に由来するものである。従って、「神はいかなる場所にも、いかなる事物にも遍在する」という趣旨の議論をトマスは遂行している。六、「作用的一」の場所論的徹底ー神と人間の

主體的な「能作の同一性」

西谷啓治は、エックハルトの本来の立場を汎神論と区別して、次のような注目すべき解釈を敢行している。

エックハルトの立場はあくまでも主體的な合一の立場

、、、、、、、、、 、、、、、、、、、、である。絶対に二なるものが、主體的に一なるがゆえ

、、、、、、、、、、、、、、、に絶対に一となり得るという立場である。汎神論にはかかる絶対の二もなく、絶対の一もありえない...純なる一は、それ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ただ主體的な「生」とか「作用」とかの一としてのみ、生きかつ能作し得るのみである。また、かかる能作的な合一に於いて、自由が如何なる立場にもまして最も深く捉えられ、また最も深いそして最も眞實なる自由、無底的なる自由として捉へられ得るのである。しかもその最も自由なる自由は、もっとも必然的なる必然と共に捉えられる。何となれば、万有の創造と生成は、神の恣意ではなくして、前述の如き高次の必然性を含む神的生命の発動によるからである......然るに汎神論の立場では反対に、神と万物との差別を消すことによって、万有を支配する必然は単に表面的なものとなる。しかし、そのような立場からは自由も考えられない(d)。

西谷の云う「能作的合一」とは、「主客合一」ではなく、「主主合一」すなわち「ノエシス的合一」である。この意味での「主體的合一」を汎神論から峻別する西谷の議論は、『無の自覚的限定』のキリスト教論以後の西田幾多郎の宗教哲学、すなわち「絶対の一」と「個別的多」との矛盾的自己同一、逆対応、場所的論理による「人格」と「歴史的身体」の位置づけなどの課題をまえにした西田の思索と共に参照されるべきであろう(e)。

エックハルトの場所論的思索の良く現れているテキストとして、「御身のうちにいる人をあはれみたまへ」(Populoeius qui in te est, miserereberis)というホセア書一四四「慈(あはれみ)悲の祈り」の引用から始まるドイツ語説教を考察しよう(f)。最も優れた学者達に拠れば、知性は(すべてのものを)剥ぎ取り、神を覆い為しに、神自体である純粋な本質存在として。知性認識は真理と善性を突破し(durchbrechen)、純粋な本質存在に突進し、名前もないあらわな姿で、ありのままに神を捉えるという。知性認識も愛も結びつけることはないと。愛は、神が善いものである限り、神自身を受け取るが、もし神が善性という名を失うならば、愛は決してそれ以上には進まない。愛は毛皮、つまり衣装を纏った神を捉える。こういうことは知性はしない。知性は神を、神が自分に知られているものとして捉える。が、神を底なしの海のうちに捉えることは決してない。私が言いたいのは、この二つのもの、知性認識と愛よりも慈悲(あはれみ)のほうが上にあることである。神は、働くことができる最高の、もっとも純粋なところで慈悲(あはれみ)を行うのである(g)。

エックハルトが「離脱」と「突破」によって神性の根底まで極めようとする知性認識を「愛」に勝るものとして説いてきたことは良く知られているが、ここではそのような優れた知性による認識にも勝る「働き」として「慈悲(あはれみ)(Barmherzicheit)」を挙げていることに注意したい。離脱によって知性認識の徹底とは、仏教的に云えば聖道門の極みのごときものであろうが、ここでは、そのような知性認識をも越えた神の働きとして「慈悲(あはれみ)」が語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

この説教は、おそらく典礼で実際に為されたものと推測できるが、「主よ、あはれみたまへ」とは、最初に歌われる聖歌〔キリエ〕である。「言葉の典礼」で読まれる旧約の預言者ホセアの悲願、「慈(あはれみ)悲の福音」とも呼ばれてきたルカ傳の「平和のうちへ行け(vade in pace)」という派遣の言葉、「神は愛なり、愛に居る者は神に居り、神もまた彼に居給ふ」というヨハネ第一書四~一六節を引用した後で、「魂はその根底に於いてどのようなものか、誰も知らない。これについて知ることができるのは、超自然的な恩恵によらねばならない。そこにおいて神は慈悲(あはれみ)をおこなうのである」と説教を結んでいる。

ところで、自然本性的な愛と、ミサ典礼で語られる如き「超自然的な慈悲(あはれみ)」との違いは何であるのだろうか。ここで、「アガペーとエロース」でニーグレンが批判したトマスの『神学大全』の愛にかんする議論を手引きとして考察したい。トマスに於いては自然本性的な愛は決して破棄されはしない。言い換えれば「他者を自己の如く愛する」といっても、自己愛が根本であって、自己を愛する以上に他者を愛することを不自然なものとみる観点が残っているというのが批判のポイントであった。

実際、『神学大全』第二部二六問第三項で、トマスは、「愛の順序」について次のように云う。

「神が各人にとって愛する根拠の全体であるのは、神が人間の善の全体であるということによってであろう。というのも、ありえないことであるが、神が人間の善ではないと仮定するならば、人間にとって愛する理由はないであろう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愛の順序について云うならば、人間は神の次にもっとも自分自身を愛するということ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ニーグレンは、トマスがアリストテレスの友愛論によってキリスト教的な隣人愛を基礎づけようとしたために「アガペー」に基礎をおくキリスト教的な隣人愛に「エロース・モチーフ」が残存しているというのである。これに対して、トミズムの伝統を尊重する立場からニーグレンにたいして様々な反論が出されている。たとえば、桑原直巳は『トマス・アクィナスにおける「愛」と「正義(h)」』で、トマスの立場にたつ人間論をむしろ肯定的に捉えている。トマスは決してアリストテレスの友愛論をそのまま受容したわけではなく、アリストテレスを踏み越えて、聖書と聖伝に立脚する独自の「友愛論」をたてたのである。アリストテレスにはない聖書的な神への愛を第一義にたてた上で、それを根拠として人間の善の全体を分有する隣人愛を基礎づけたのであるから、神への愛の次に「自己愛」を肯定的に捉え、それを範型として隣人を「自己と同じように隣人を愛する」のが「愛」の順序の上で自然なのであると云う。 要するに、「恩寵(超自然)は自然を破棄せずに完成させる」というのがトマス自身の基本的な思想であるから、自然本性的な自己愛も、決して破棄はされずに最終的には神愛において肯定されるというのが、トミストの側からのニーグレンへの一つの答えとなるであろう。

それでは、ドミニコ会のトミストの伝統を独自の仕方で継承したエックハルトの場合はどうであろうか。前に引用した「慈悲(あはれみ)を知性と愛にまさる働きとする説教」でも明らかなように、彼は隣人愛をアリストテレス的な友愛によって基礎づけると云う議論を、福音書やアウグスチヌスを典拠として議論を批判している。 エックハルトは隣人を「自

、、、、、己と同じように愛する」と解するトマスとは違って、福音書の隣人愛とは「(神を有し、神を愛する者は)隣人を自

、、、 、、、、、

己自身と等しく、また等しい仕方で愛する」と解した上で、

、、、 、、、隣人愛と自己愛の同等性あるいはむしろ同一性を主張するのである(i)。このように愛される者と愛するものが差別を越えた一つの能作の主体となるところに、エックハルトの場所論的な「一」に徹底した実践的思索が良くあらわれている。そのような隣人愛における「能作の同一性」は自己の善を第一に考える「愛」よりも高く、「離脱」と「突破」によって神性を極めようとする知性認識ですら無限に及ばない「無底の海の深さ」をもつというのがこの説教の趣旨であろう。

七、聖体拝領の頌栄に関する省察

日本のカトリック教会では、ミサの聖体拝領の頌栄として

司祭: キリスト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キリストの内に聖霊の交わりの中で、全能の父であるあなたに、

会衆: すべての誉れと栄光は世々に至るまで。

をとなえている。ラテン語典礼では、日本語典礼で三度繰り返される「キリスト」に該当する部分はipse( self =自己自身) であること、また「聖霊の交わり」とはin unitate Spiritus Sancti(聖霊の一致において)であることに注意したい。

ラテン語典礼: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Est tibi Deo Patri omnipotenti, in unitate Spiritus Sancti

 Omnis honor et gloria per omnia sæcula sæculorum

日本語典礼では、英語典礼のように Through him, and with him, and in him とipse を平板な三人称単数の代名詞として翻訳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思うが如何であろうか。

キリスト者の共同体を形成する原動力であるが、その根底 所性の破棄」と相対性理論との関係が私の第二論文の主題で

Ipse を単に「彼」と訳して、「彼によって、彼と共に、彼の中に」と訳してしまうと、「キリストによる」救済行為も、同伴者あるいは友として「我らと共にいるキリスト」も、「内なるキリスト」も、自己自身とは無縁な「他人事」に響く。「キリスト」の名を三度繰り返し、キリストと人間との関係を、「によって」「と共に」「の内に」の三語で表現することで、感謝の祭儀の聖体拝領に於けるキリストの中心的な位置が明瞭となっている。また「聖霊の交わり(communio)」はにあるものは「聖霊の一性」すなわち「愛の働きの一性」である(j)。

1 講演者:西谷啓治、応答者:玉城康四郎、小野寺功、司会者:八木誠一のこの第四回東西宗教交流学会(一九八五年)の講演と質疑は、翌年の「大乗禅」誌に掲載されたが、その電子版が南山大学宗教文化研究所のwebサイトhttp://nirc.

nanzan-.ac.jp/en/publications/jjsbcs/ で閲覧可能

2 私が『科学基礎論研究』に発表した最初の論文は「アインシュタイン・ポドルスキー・ローゼンの議論とベルの定理─量子論における分離不可能性」(Vol.19 No.3)、二番目の論文は「アインシュタイン・ポドルスキー・ローゼンの相関と相対性理論」(vol. 19, No. 4)であった。これは、当時話題となっていたベルの不等式の反証という実験的事実が意味するものは、量子力学の完全性をめぐるボーアとアインシュタインの論争点に決着をつけたものではなく、「局所的実在の分離不可能性」であるというのが私の第一論文の主題、そして「局あった。どちらも不確定性原理の実在論的解釈と量子力学的遠距離相関ー非因果的相関の解釈を主題としている。

3 Charles Hartshone, The Logic of Perfecti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62.

4 清水光雄、「ウエスレーの救済論」、教文館、二〇〇二年、三三頁参照。ホワイトヘッドの「統合体の哲学」が、ジョン・カブに代表されるメソジストの神学者に受容されたことは偶然ではない。どちらにも東方キリスト教の霊性的伝統が受け継がれているからである。ホワイトヘッドの思想と、エペクタシス(自己超越的な愛)や「つくられざるエネルゲイア」という東方神学のエネルゲイア論との深き関連を指摘した著書としては、George A. Maloney, S.J., A theology of Uncreated 

Energies,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78 参照

5 西谷啓治の「空と即」には「現成する」という表現が多用されている。このように「現成」を動詞化して使う用法は道元の「正法眼蔵」に由来するものである。「正法眼蔵」の要語索引を見ればわかるように、道元においては「無」や「空」のような否定的言辞よりも「現成する」という肯定的な動詞表現が圧倒的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しかし、「現成」とは現代中国語でもそうであるが「既成」と同じ意味であって、その動詞表現への転用は、道元に固有のものである。すなわち、「現成」を「現成する」という動詞表現と一つにすることによって、修行を悟り(証)の手段とみずに「証上の修」を含意する「修証一等」の修道論が成立しているのである。

6 この外的関係説はラッセルの弟子であった(前期の)ヴィットゲンシュタインにも受け継がれている。論理哲学論考によれば、個々の要素命題で記述される事態は相互に独立であって、互いに影響を及ぼすことはあり得ない。要素命題の真理値の函数として表現される複合命題は、トートロジーと矛盾をのぞいて、すべては偶然性の支配する事柄の表現となる。しかしながら、要素命題の具體的事例をヴィットゲンシュタインは一つとしてあげ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それには当然の理由があると考えるべきだろう。一つのアトムが他のアトムといかなる内的関係を持たない以上、諸々のアトムの相互交流ないし相互浸透ということがあり得ないのであるから、個々のアトムが如何なるものであるか、そのアトムの成立については何も語れないからである。すなわち。「論理哲学論考」が、反形而上学という形而上学的ドグマにいまだ束縛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は縷々指摘されてきたことであるが、「事のアトミズム」というドグマもまた、アトム相互の因果的独立性を独断的に仮定している点で、悪しき意味での形而上学に陥っていたと云わ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7 私は、「普遍の教会」に保存された「文字化以前の伝統」を尊重する立場に立つ。その立場では、「伝統」から切り離して「聖書」を単なる書物として「読む」のではなく、教会の「典礼」の中で、「言葉を聴き」交互に「語り」、「信仰宣言」すること、「聖体を拝領」し「頌栄する」といった言語行為の「働きの場」で成り立つ信仰の「場所論的釈義」を試みたい。「言葉の典礼」に参加するキリスト者が直接に経験する「みことば」のもつ時間的な原事実性(原歴史性)を幾分なりとも解明できれば幸甚である。

8 Mark.1:10–11, καὶ εὐθὺς ἀναβαίνων ἐκ τοῦ ὕδατος εἶδεν σχιζομένους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καὶ τὸ πνεῦμα ὡς περιστερὰν καταβαῖνον εἰς αὐτόν. καὶ φωνὴ (ἐγένετο) ἐκ τῶν οὐρανῶν: σὺ εἶ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

9 John 1:28–30,  κἀγὼ δίδωμι αὐτοῖ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χειρός μου. ὁ πατήρ μου ὃ δέδωκέν μοι πάντων μεῖζόν ἐστιν, καὶ 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ἁρπάζειν ἐκ τῆς χειρὸς τοῦ πατρός.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0 John 14:10 οὐ πιστεύεις ὅτι ἐγὼ ἐν τῷ πατρὶ καὶ ὁ πατὴρ ἐν ἐμοί ἐστιν; τὰ ῥήματα ἃ ἐγὼ λέγω ὑμῖν ἀπ' ἐμαυτοῦ οὐ λαλῶ: ὁ δὲ πατὴρ ἐν ἐμοὶ μένων ποιεῖ τὰ ἔργα αὐτοῦ.

a Heb 11:1–4,  Ἔστιν δὲ πίστις ἐλπιζομένων ὑπόστασις, 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 οὐ βλεπομένων.  ἐν ταύτῃ γὰρ ἐμαρτυρήθησαν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Πίστει νοοῦμεν κατηρτίσθαι τοὺς αἰῶνας ῥήματι θεοῦ, εἰς τὸ μὴ ἐκ φαινομένων τὸ βλεπόμενον γεγονέναι.

b John15:12-15: 12αὕτη ἐστὶν ἡ ἐντολὴ ἡ ἐμή, ἵνα ἀγαπᾶτε ἀλλήλους καθὼς ἠγάπησα ὑμᾶς: 13 μείζονα ταύτης ἀγάπην οὐδεὶς ἔχει ἵνα τις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θῇ ὑπὲρ τῶν φίλων αὐτοῦ. 14 ὑμεῖς φίλοι μού ἐστε, ἐὰν ποιῆτε ἃ ἐγὼ ἐντέλλομαι ὑμῖν. 15 οὐκέτι λέγω ὑμᾶς δούλους, ὅτι ὁ δοῦλος οὐκ οἶδεν τί ποιεῖ αὐτοῦ ὁ κύριος: ὑμᾶς δὲ εἴρηκα φίλους, ὅτι πάντα ἃ ἤκουσα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ἐγνώρισα ὑμῖν.

c 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Sed Deus operatur in omnibus, secundum illud Isaiae XXVI,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e. 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d 西谷啓治著作集第七巻『神と絶対無』34頁

e 私自身は「合一」という用語よりも「能作の同一」という言い方のほうが事柄に即していると考える。「合一」とは、二つに分かれた者が一つに合するという意味が残存するからである。

f Meister Eckhart, Deutsche Werke, Bd. 1, Predigt 7. 

g Ich spriche: über disiu beidiu, bekantnisse und minne, ist barmherzicheit; dâ würket got barmherzicheit in dem hœhsten und in dem lûtersten, daz got gewürken mac.

h 桑原直巳『トマス・アクィナスにおける「愛」と「正義」』(2005 地泉書院)終章433頁参照。

i 「自己を愛することと他者を愛することの同等性あるいはむしろ同一性(plena aequalitas sive parilitas aut potius identitas dilectionis sui et proximi)」についてのエックハルトのテキストの詳細な分析が松田美佳『エックハルトの隣人愛論』(中世思想研究xlvii, 2005 )にある。

j 滝沢克己はカールバルトの教会教義学の和解論を手引きとして、神人の第一義の接触と第二義の接触を区別して「不可分・不可同・不可逆」の神人関係を基礎とする「神人学」を構想した。八木誠一氏の場所論的神学では、「神我らと共にいます」の「と共に」よりも、神人の相互内在を説く「のうちに」が重視されている。しかし、典礼の言葉は、「と共に」(共同体性)、「のうちに」(内面性ないし個人性)および「によって」(不可逆性)を切り離さずに一息に述べ、「聖霊の一性の中で、すなわち愛の一なる働きのなかで」キリスト者の共同体の形成へと向い、「汝」と呼びかける父を「世々に至るまで」頌栄するダイナミックな神人関係を統合的に表現している。

たなか・ゆたか 

討議Ⅳ 

応答者・司 会 金 承哲

上智大学名誉教授

田中 フロント構造という概念にわたしは非常に惹かれました。八木先生の記号表現に関しては、最初に

2002年の東西宗教交流学会でお話になったときは、わたし自身が数学を嘗て専攻していましたので、ちょっと抵抗がありました。今回は八木先生は新約聖書の時代に実際に使われていたコイネーギリシャ語のテキストの解釈と結びつけてお話になったので、大変よく分かりました。ですから、わたしは、以前使用されていた八木先生の記号表現は記号論理学に似てるけれども、一種の象徴形式― シンボリックフォルム―で語られたものであって、一つ一つの陳述文に 0 か 1 かの真理値を振り当てる命題論理学とは全然違う種類のものであると考えています。従って八木先生の場所論の記号化は表現言語の象徴的理解が得られる意義が認められると思います。

ただ、今でも私の言いたいことは、記号化してしまうと、何かそれで代言したり置きかえたりすることによって、すべてが説明されてしまうかのような印象を聞く人に与えてしまうという危険性です。要するに、説明できないものがあるということが、記号を使うことによって覆い隠されるので、記号を使うと、その記号についてさらに説明をするという余計な事態が生じるために、限りなく記号が象徴している事柄自体からわたしたちの関心がずれてしまうでしょう。やはり、図式的記号よりも、生きた言葉が働いている現場のほうが大事だろうと思いました。

それから、もう一つは、これは八木先生と個人的にお話ししたんですけれども、フロントという言葉をいう場合に、わたしは「前衛」とか「周辺」というような意味もあるように思う。フロントに行く、境界に赴くという構造が、キリスト教的な真理の実践の中には含ま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わたしは、仏教の言葉を常にキリスト教的に理解するので、誤解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臨済録の中に、一人有り劫を論じて、途中にあって家舎を離れず。それから、家舎を離れて途中に在らずと。僕はあの言葉が非常に好きなんですが、要するに、内なる自己の世界に閉ざされるのではなくて、常に異質な他者のフロントに出かけるという「行人の精神」こそがキリスト教でも仏教でも大切であると思っています。

八木先生のフロント構造は、さまざまに解釈できますが、わたしが一番好きなのは、善きサマリア人の譬えです。隣人とは誰のことかを特にこの譬えは難しい理屈に訴える必要は全くなくて、あらゆる人の心に直接訴えるイエスの言葉の一つです。サマリア人は、ユダヤ教の正統派の「我ら」の中には入らない。その宗派の壁を越えてフロントに行くというところを八木先生のフロント構造という概念にもう一つわたしがつけ加えたいところです。

つまり、フロントには「周辺」という意味がある。その境界こそが新しい中心になり得ると。たとえば新約聖書のギリシャ語というのは独特なギリシャ語です。プラトンやギリシャ悲劇のギリシャ語に比べれば、はるかにシンプルな構造を持っていますね。それから、ヘブライ語法が非常に入っていますから、ある意味では伝統的なヘブライ語でもない、ギリシャ語でもない、聖書独自のギリシャ語なんですけれども。しかし、近代のルター訳のドイツ語訳聖書とか、英語の欽定訳はほぼその直訳です。それが新しい、近代の聖書に影響された国民文化というものを生み出す力も持っていた。

日本の場合でも文語訳聖書の翻訳者は日本の古典によく通じており、言霊の働きというものを身につけていました。あの翻訳は生きた、霊に満ちた言葉なんですね。現代の散文語訳は、わかりやすさを主体にしてしまったために、近代人の解釈が入ってしまう。安土桃山時代に日本に入ってきたキリスト教の文書の当時の日本語訳についても言霊の働きを感じます。戦後の教育を受けた現代の日本人にとって常識であり、通念であることが、三百年前、四百年前の日本人にとっては決して通念ではなかった。つまり、通念はそういった時と場所というものによって大きく制約されていいます。

しかし、その通念を通じて、何かそこに普遍的なるものが常に表現されるということがあると思います。逆に言えば、わたしはキリスト教の神話とか物語というものを事実ではない単なる方便とは見ないです。まさに、その方便によって、現代のわたしたちが持っている通念が逆に照らし出されて、批評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作業を通じて、はじめてわたしたちが、現在当たり前だと思っていることが決して直接的なるもの、生きた現実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

だから、未来に行くためには、わたしは退歩も必要だと思います。進歩ばかり考えているのではなくて、退歩と進歩ということが一つである。その一つであるところをわたしは道元に倣って運歩と呼びたい。青山常運歩、石女夜性児(青山は常に運歩し、うまず女が毎夜子供を産む)という正法眼蔵山水経の言葉は、わたしは本当にすばらしいと思います。わたしのキリスト教解釈では、アブラハムの妻が老齢なのに子供を産んだという物語以上に、産まず女、もう子供を産めなくなった人が実は闇夜のなかで子供を産んでいると。それはやはり、エックハルト的に考えれば、わたしたちの魂の中における神の子の誕生という、その経験ですね。それは、単なる物語とか方便以上のものがあって、わたしは、やはりそういう言葉に物凄いアクチュアリティを感じます。だから、単なる方便だなどとは全然違う物語りなので、合理化してそれで済ませられるようなものだとは全く思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

金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何かご質問ある方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らお願いしたいのですが。

森 京都産業大学の森でございます。非常に感銘深く、お話を伺いました。ただ、「言葉の問題」ということで、八木先生は言語を三つのものに比較、区別されての話で、それはそれで非常に明確な、大事なご指摘だと思います。きょうの田中先生のお話を伺って改めて思うのは、一つは、もし宗教言語ということを言うならば、聖書の言葉と神学の言葉の間には、相当な落差があるんじゃないか、あるいは、宗教言語と同時に、僕は、やはり形而上学言語というか。哲学的なというか、形而上学的な言語というか、それは軽く見られない。西田の「場所」の論理は、物凄い苦闘の中で出てきたのであって、「主語」というか、「主体」を余り軽くは見られない。やはり、ヨーロッパの形而上学、あるいは神学、ドイツ観念論なんかをふまえても、「主語」の重みは相当なものがあって、ちょっとやそっとじゃ動かない。

たとえば、汎神論の問題も、シェリングなんかは自由論の前半を使ってずっと言うんですね。 Pantheismusというから、Alles ist Gott(一切は神である)になるけど、そうじゃなくて、Gott ist alles(神は一切である)だと。これも物凄く、主語の位置と述語の位置はやはり不可逆で、そんな簡単には、

「場所」にはなれないんですよね。そうしますと、「神は愛である」という聖書の根本メッセージがあるけれども、「愛は神である」とは言えない。あるいは、言うことは許されない面があると思います。そこにどんな大きな意味があるのか。

本当は、何ていうんですかね。そう思うと、この聖書の言葉と、ここから出てくる神学の言葉との間には相当なギャップが、落差があるんじゃないのか。あるいは、もっと言えば、パウロのギリシャ語は非常に素朴なギリシャ語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けれども、イエスもギリシャ語をしゃべってる形になるわけですよね。これはみんな翻訳語ですよね。イエスはギリシャ語はしゃべらなかった。そうだとすると、イエスの言葉が全部ギリシャ語になってること自体の中に、もう既に大きな転換があるわけであって、すべて、やはりそれは解釈ですよね。言ってみれば。そうすると、聖書の言葉まで含めて、もう一回何か、受け止め直す必要がある。

そんな意味で言うと、八木先生の一つの着眼である、言葉以前のところまでもう一回戻って出直すみたいな、そういう試みもどうしても必要なのかもしれませんけども。それにしても、きょうのお話は非常に、特にカトリックの典礼ですか、それらを含めて、いや、すごいなと思って聞いたんですけれども、ここに、やはり物凄く、言葉の落差みたいなものが随分あるんじゃないかって。これをどう考えたらいいのか。やはり、西田の場所論というのは哲学の言語をひっくり返したところがあって。ちょっとそれも、つまり、だから西田の無の場所というか、こういう考え方と、八木先生がおっしゃるその場所論ということが、僕は、かなり中身が違うような気がしてならんのですけれども、そういう点をどんなふうに考えたらいいか、ちょっと、先生方のご意見を伺いたいと思います。まず、田中先生から。

田中 西田は道元と並んで、私の座右の書なのですが、いつ読んでも新しい発見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これで分かったという気がしないですね。西田の場合ですと、彼は自分の書いたものを「悪戦苦闘のトキュメント」などと呼んだこともありましたが、何をめぐって悪戦苦闘していたのかを共有していない限り、西田を読むということはできないと思います。その意味で、分からないながらも何度読んでも発見がある書物だし、道元も、わたしはそうだと思います。だから道元は禅問答が無理会話だなどとは決して言わない。言語で表現できないと、したり顔に言うお前自身が分か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言語を越えたものをあくまでも言語で表現することを求めて行く生きた言語使用がそこにあると思います。哲学者の中では、そのように過去の自分を越えて常に新しい言語表現を求めていったのが西田でしょう。たとえば、西田は「絶対無」という言葉をあるときから使わなくなります。

森 そうですね。

田中 しかし、「絶対無」という言葉は使わなくなっても、場所的論理は残るわけでしょう。晩年の西田が鈴木大拙に宛てた書簡のなかで、大拙の言う般若即非の論理から、歴史的世界と人格について語りたいという趣旨のことを言っています。八木先生のご本でも、人格的な言語と場所論的な言語が、最初のうちは何か対立するような形で書かれていたけれども、だんだん、終わりのほうに近づくにつれて、やっぱり人格という言葉の捉え直しによって、場所論的な思考から、わたしたちがふつうに人格的に表現しているものを、そこから語り直すということを試みておられます。西田が最後に目指したのはそれだと思います。

森 わたしは、聖書の言葉と神学の言葉の間に、やはり大きなギャップがあるんじゃないかと申し上げました。それをもし、わたしが知る限りの禅のほうで言うならば、やはり、「禅問答の室内の言葉」というのは、一般の記述言語や、あるいは宗教言語とは異なる。「表現言語」というような枠に入るかもしれませんが。この、表現言語というのも便利な言い方ですけど、僕は西田哲学の「表現」ということにこだわるので、表現を余り一般化して使いたくない気持ちがあります。

ただ、一番わかりやすく言えば、室内の言語というのは、まさに芭蕉が使うような俳句の言葉なんですよ。そこに自分の意識がちょっとでも入ったような言語はみんな落とされるわけです。だから、まさに「我」が入れば無、だから、無我の論理が許されるわけで、それは先生の言い方で言えば芭蕉とか、あるいは文芸に近いような。つまり、別に自分は俳句つくるとか、そういう芸術性があるとか、そんなことは関係ないですよ。だけども、ふつうの、日常のおしゃべりの言葉でもなければ、概念的な言葉でもなく、何か、やっぱりちょっと変わってるんですよね。そこは、僕は恐らく、聖書の中の言葉も、そういう概念性を許さない、そして、何かもうちょっと。

だから、うまく言えないんですよ。特に禅問答の言葉は独特であって、この間に、ぱっという間に、あっという間に終わってしまうわけですけれども、やはり、それを単なる表現言語とか、そんなもので言える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そうしたときに、聖書と神学、それは、聖書の中に神学AもBもC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けれども、神学といったときの言葉は、もう既に形而上学、あるいは哲学の言語じゃないかという、そこら辺はどうなんだということを、非常にこだわりたい気持ちがします。

田中 わたしは哲学以前に一度立ち返って、哲学の否定を介して、哲学がどこから成立するかを考えてみたい。神学の場合でも、神学という教義から物事を説明するのではなくて教義が一体どこから出てくるのかという、それが経験されてなければ、それは生きた言葉になり得ないと思いますね。だから、神学以前、それから哲学以前から思索するというのは、これは後期田邊とか西田に共通する思索の態度だったと思います。ただ、西田の場合、最初の『善の研究』で直感的にはすべて出てると思います。潜在的にはね。だけれども、それをいかに的確に表現するか。その言語表現をめぐる悪戦苦闘は生涯続いていたと思いますね。

ですから、その問題は我々にとっても生きた問題だし、わたしの場合は、実は西田をキリスト教の文脈で読みます。これは、正しい西田理解というよりは、西田自身が問題にしている事柄をキリスト教徒としてどんなふうに受けとめるか。そして、彼はやはりフロントで思索してると思うので、いわば最前線で、哲学の現場で悪戦苦闘しているその努力から学びたいのであって、西田と同じ言葉を繰り返したくはないんですね。西田と同じ言葉を繰り返せば、それは縮小再生産ですから。「見師と斉しければ師の半徳を減ず」という禅の言葉がありますね。この言葉は、学問の限りなき探求を促す精神に通じる言葉でもあるし、それから、宗教の根本に通ずる言葉でもあると思います。つまり、繰り返し反復すれば、それは形なきものというのを忘れるわけですから、そういう形あるものを生み出すような、根源的な働きに目覚めるということのほうが根本のように思います。

田邊論集に、西田・田邊記念講演会でお話ししたことを書く予定があるのですが、田辺の場合も、西田を批判することを通じて、西田が問題にしていたことを自分の言葉で語ろうとしていたのだと思います。わたしはどちらかといえば西田のほうが、自分の体験にぴったりしますので、田辺の概念的な思考よりも西田のほうに惹かれていますが。

森 田邊さんはほとんど全部誤解ですね。

田中 いえ、そこまで考えてないです。

森 田邊さんは相当に問題的だと思います。「絶対無」なんて、ああいう「概念」をつくり出したのは、やっぱり田邊です。それは、「無の場所」のほうが的確なんですよ。だって、「見る者なくして見る」という、主体じゃなくて「主体から場所への転換」が、西田において起こったんですよ。それを、もう一回絶対無という、絶対的な原理みたいにして言い出したというのは、田邊さんの物凄く大きな責任です。

ほとんど、だから田邊さんを読んだら概念で、全部、長い長い文章だけど、一つ読めば全部わかってしまいますよ。何も面白くない。後からの、後づけなんですよね。そこで、何か新しい発見とか、新しいパトスとか、そういうものを余り感じられない。そのかわりに、研究だけは本格的だから、もう隙がない。それはすごいし、僕らの先生も、みんな田邊さんの弟子だったから、余り田邊さんの悪口を言えなかった。

田中 とりあえず、西田の問題というのを、やっぱり田邊は戦後というあの時代で、敗戦を経験した後で書きました。西田が旧約聖書に関心を持ったのは、日本が亡国の危機にあるということはもうはっきりわかっていましたからね。だから、改めて旧約の預言書を読み直して、彼がそれに非常に動かされたということは、日記の中に明確に出ているわけです。田邊は敗戦が現実化したときに、西田が既に見ていた事柄を、田邊自身の言葉で語ろうとしたとわたしは思います。

八木 まだ余りまとまってないんですけれども。つまり、聖書の言葉と、それから神学の言葉は違うんじゃないかと。もちろん違うんですよ。たとえば、聖書学というのがありまして、それは各文書について、誰がいつ何のために書いたのかということを研究する部門と、それから、聖書のテキスト一つ一つについて解説をしていく。釈義がされる。それと並んで、神学というのがあるので。それは、新約聖書が含んでいる神学的な思想(諸概念の明確化と秩序づけ)を取り出すという作業なので。

森 そうですね。

八木 はい。だから、最初から同じわけがないので。た

でも、それを解釈するのと、わからないまま言葉 とえばパウロ自身が一人の神学者で、神学的な言語を既に使ってるんだけれども、それは、たとえば、本当は言葉にならない、わたしのうちに神の子が現れて、それはキリストだというわけですけど、もはやわたしは死んでキリストが生きてるんだとか。それと非常に似た言葉で、もっと直接的なね、わたしたちの心の中で神が輝いて、キリストの御顔を照らし出したというような、そういう言葉があるので。一体これは何なんですか。そのまま読んでわかれといったって無理でしょう。違いますか。

ただ、そこで問題になるのは、要するに聖書を読んでもそれがわかるというものじゃないんですよ。そうでしょう。聖書がわかるためには、わからせる作業が必要なので。その作業が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と、今言ったような時代史とか、一つ一つの概念の成立史の研究だとか、文の釈義だとか、それから神学的な思想、いろんな面にわたってやらなくちゃいけない。それ自身は、聖書の言葉から違っているというのは、上田さんがよく、直接経験から第一次的なという言葉と、それを解釈して述べていく言葉とは違うんだと。だけど、またもとへ戻らなきゃいけないんだということを言っておられるじゃないですか。ああいうふうに、やはり抽象度が違うので。

を受けとめるのは、またちょっと違うと思います。

八木 もちろん違います。

森 だから、現代から見て、どれだけ不合理だったり、わけのわからんものであっても、やはり、まず深い意味はわからなくても、どれだけとんちんかんであれ、字義的な意味は、一応は受け取れますよね。今、先生がおっしゃったやつだけでも。その意味がどうなるか、それはやはり、禅の公案なんかはもっとひどいですよ。わけわからん。

八木 同じことがあると思いますよ。

森 いやいや、公案は解釈じゃないんですよ。やはり、わからんまま受けとめないと。

八木 解釈というのは言葉がどこから出てきたのかわかるということなんです。僕が言ってる解釈というのは。

森 いや、でもそれは説明じゃないんですよ。

八木 もちろん。説明じゃないけれども、同じ根源から

 

出てきたもっとわかりやすい言葉というのがある れは違うじゃないかとおっしゃる方がきっといるんですよ。 だろうと思うけれども、僕自身はそうやってるん森 それはそうです。 です。

八木 言葉の上に乗っかっただけの解釈じゃなくて、同 だから、それは言葉としてもちろん違うんだけれども、どこから出てきたかということをより正じ根源から出てきて、その根源をより分節した形

確に指し示すという意味では、現代にはやはり必で言い表す言語というのがあるはずなので。僕は

要だと思うので。それがなければ、根源語ですね、それを神学というか、哲学というか、何だと言っ

てもいいけれどもね。新約神学の言葉だと思って 上田さんが言ってる。根源語だけでいいというこるので。 とになっちゃうから。むしろ、確かにそれだけのつまり、僕の解釈のやり方、方々に書きました ほうがわかりやすいというか、手がかりになるこけれども、それはある言葉を直接にほかの言葉に とがあるということは、僕もそう思いますけれど移すのではなくて、一つの言葉を手がかりとして、 もね。だけど、やっぱりそれをほっといたんじゃ、その言葉が出てきた根源にふれて、ああ、ここか たとえばほかの思想との比較や対話をする場合にら出てきたんだなとわかったら、その根源を、我々 は、どうしたって発達した言語表現が必要なのでに通じる言葉で書き直すんだと。それが釈義であ す。でなければ、アとウンとだけで比べろというり、新約神学であると、僕はそういうふうに言っ のは無理だからね。そういうことなんです。

てるしやってきた。ほかの方から見られたら、こ 寺沢 八木先生の回答をお聞きしたいんです。話がちょ

 

っと違った話になるんですけどね。先生、お聞きしたかったんですが、最近は、三六七年に、コンスタンティヌスの後、教会の会議でこの聖典が選ばれますよね。それで排除された福音ですね、たとえばトマスによる福音書とか、ペテロによる福音書とか、マグダラのマリアによる福音書とか、そういうものが最近、非常にディスカッションされて。特にわたしは、トマスによる福音書を読んでみますと、たとえばイエスが弟子に向かって、自分を信じるな。わたしを理解するためにはまずおのれ自身を知れとかですね。最後は、みんなイエスになれとか、仏教で言う仏になると。イエスになれとか、そういう言葉をトマスなんかは非常に言ってるわけで、ローマ教会が嫌いだという理由がよくわかるんですけど。非常に、トマスによる福音書は、先生の言うように働きの神といいますかね。それと非常に似てるようにも思うんですが、先生のご意見は、トマスによる福音書はどう思っていらっしゃいますか。

八木 トマス福音書が言ってるイエスって全然イエスと違うから。

寺沢 そうですか。

八木 うん。さっきの田中さんのお話とも関係するんですけれども、田中さんがそう思ってらっしゃるわけじゃなくて、ただそう言っちゃっただけなんだろうけれども。よくあることですが、たとえば、ヨハネ福音書の言葉を歴史のイエスの言葉というふうに平気で言うんですよね。それは、僕たちにはとてもできないことなんです。ヨハネ福音書のイエスは、あれはイエスじゃなくて、滝沢さんの言葉で言えば、「神我と共にいます」。僕の言葉で言えば「統合作用」。それが一人の人間として話してるのでね。あれは、歴史のイエスとは全然違うんですわ。どうしてそんなことができたかというと、やっぱり復活理解にまで戻ってこなきゃならないんだと僕は思いますけれども。

とにかく、まずそういう区別をした上でね。やっぱり、そういう区別を何でするんだということになるかもしれない。イエスの言葉の中でも、これはイエスが本当に言ったと思われる言葉と、それから、後で教会が語らせた言葉とがどうもあるらしいと。それは百%確実にはわからないけれども、大体は区別できるんですよ。それで、我々はその中から、どうもこれはイエスに、本当にイエスが語ったことらしいというのを、うんと減っちゃうけど、イエスの言葉とされているものの二、三〇%になっちゃうけど、もっと少ないかもしれない。それをもとにしてイエスを言ってるので。

だから、我々の感覚から言うと、イエスの言葉といったって、さっきもマルコ福音書の言葉を引かれましたけれども、僕は田中さんのことを全然非難してるんじゃなくて、我々はこうなんだというふうに言いたいんですけれども、あれは伝説の言葉でね。つまり、天から声がして、あなたは我が愛する子、あなたは喜ぶというのがありましたけど、天から声がしたという、誰が聞いて誰が記録したんですか。本当に天から声がしたんですか。聖霊がハトのように下ってきてイエスの上にとまったと。それも、マルコはイエスの中に入ったと書いてあるんだよ。ところが、ルカとマタイでは、イエスの頭の上にとまったと書いてある(マタイ三・一六、ルカ三・二二)。場所論的には全然意味が違うんですよね。

だから、あなたのことを喜んだという、それも歴史的に、どこからそんな声がして、誰がそれを聞いて、誰が記録したんだという話になると、それはそう簡単に歴史的な事実だと言えなくなってしまうんでね。だから我々は、やっぱりイエスというときには、歴史のイエスが言ったんだと思われる言葉を少なくとも中心に置く。そうすると、ヨハネ福音書のイエスの言葉というのは、あれは、つまり霊なるキリストですよ。それが一人の人間になっちゃって語ってる言葉であって、あれをイエスの言葉というわけには全然いかないのでですね。田中さんが言われようとしたこと自身は、非常に貴重だと思うけれども、ちょっと、僕としてひっかかる点はそういう点です。

田中 いえいえ。わたしも、たとえばヨハネ福音書は、編集、福音書記がいるわけでしょう。編集者であり、福音書記であるヨハネ自身の直接経験、宗教経験がなければ、あのイエスの言葉は書かなかった。だから、決してそれは。

八木 ヨハネって誰だかもわからない。

田中 史的イエスとかいうことを言うときには、さまざまな伝承が、わたしは全部大切だと思います。それで、わたしがなぜカトリックのテーゼを大事にするかというと、プロテスタントの旧約には聖典として採用されなかったもの、たとえば『ソロモンの知恵』、それから『集会の書』。これは『ベン・シラの知恵』といいますけど、この二人はカトリック教会の伝承の中で物凄く大事にされてきたわけです。

八木 そうですね。

田中 そして、恐らく典礼で引用されることが非常に多いし、この二つを抜きにしたら、たとえばデカルトもわからないし。

八木 アウグスティヌスなんかもね、よく引用してますよ。

田中 中世哲学も、アウグスティヌスもわからないです。それで、わたしはトマス福音書も非常に好きですよ。それで、わたしにとっては、異端であろうと何であろうとすべてが大事なんです。

八木 いや、大事といったら歴史研究の上では大事なんですけども。

田中 すべて大切にしたい。それでね。

八木 いや、それと話が違うんです。イエスの言葉かどうかという話と、思想史の上で大事か大事じゃないかという話は違うんだよね。

田中 しかし、もちろん史的イエスに対する研究もとても大事であると思いますけれどもね。しかし、典礼の中でそれを統合するときには、それはやはり一つの言葉、典礼のデータとして、そして、そこからわたしたちがそれをどのようにして統合するかという未来に向けて読まれてるんですよ。だから、必ずしも詩的事実がどうだったというのは、わたしから言えばその探求も大事だけれども、それはその時代の聖書学のレベル、研究段階によって変わるものだし、進歩ということが当然あると思います。

八木 全体としてはもうあんまり変わってないですね。

田中 だから、すべてそれは大事なんだけれども、しかし、典礼において、それを未来に向けて統合している、その働きもわたしは貴重な動向だと思います。

八木 それは教会の働きであって別問題。

田中 そうですか。だから、決して聖書学の史的イエスに関する実証的な研究を無視してるわけじゃないけれども、違う、さまざまな見方というものを統合する働き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八木 さっきの森さんの問題にかえると、言語って確かにいろんなレベルがあるんですよ。同じじゃない。やはりそれは区別して考えなきゃいけないということと。その点はおっしゃる通り。ただ、それぞれの機能としての、それぞれの独特の意味はあるんだと、そういうこと。それから、西田との、何か、僕とは違うとおっしゃってる。僕は最初から同じにしようなんて全然思ったことはないですね。

ただ、自分でやってたら似てきちゃったという。僕の本心を言いますとね、直接経験というところから始まって、自覚に現れてきたことを言葉にしてきたら似てきちゃったというのが僕の感想でね。たとえば、西田を僕流に昇華しようなんて思ったことはないので。だから、西田と僕の言ってること、共通点はあるだろうけれども、同じだとは思えないですね。たとえば、僕はイエスが神といった究極の場と、その中にある、イエスが神の国といった統合作用の場を区別する。場ははたらきの場で、はたらきが実現するところが「場所」(人格)、「神」と人との関係は「作用的一」。でも、非常に響き合うというか、西田が言ってることが響くという、それはあるんですよ。これは非常に大事ですよね。詳しく言うと時間がかかるからやめておきますけれども、確かに違うだろうとおっしゃれば、確かに違う。最初から同じにしようと思ったことはない。

金 既に七分ほど予定より過ぎておりますが、最後のセッションでもあり、これだけはどうしても八木先生に伺いたいという方がいらっしゃれば、お一人かお二人は良いかと思うのですがいかがでしょうか。今の田中先生のご発表を踏まえて、あるいはそれと別の角度で。

石井 さっきの森先生とのやりとりで、言葉が出てきた根源に帰って、そこからほかの人もわかる言葉に置きかえていくというのが、一つ、八木先生が考えられているモデルというようなことで。

それというのは、わたし、今度新しく共同訳聖書というのが翻訳されて、その外部モニターみたいな仕事をしたんですけれども、その翻訳ということ、式典みたいなもので、聖書というのは、ほかの宗教の聖典から比べた場合、物凄く翻訳の歴史を経てきて、日本語に翻訳されたとしても、それが文語訳から口語訳、そして三〇年ごとに改訳されていくという。なぜ、キリスト教というか、聖書は翻訳されていくかというのは、恐らく一つ、共同体性ということにもかかわってくると思うんですけれども。

これは八木先生がおっしゃっているような、翻訳をするというのは、同時にその根源に立ち返って、その共同体の中でわかる言葉に置きかえていくという営みだと思うんですが、翻訳や、あるいは釈義をするという、わたしは一応プロテスタントなので、しかもルター派なので、割と説教が大事になってくるというか、そこを柱にして、宗教改革で出てきたところを素地としているんですけれども、その、釈義をするということそのものが聖書の根源的な言葉に帰ってというようなところもあると思います。そこら辺を、八木先生のお考えをお伺いできればと思います。

今滝 それとの関連で、関連になるかわからないですけれども。済みません、先生。お話。

金 じゃあ、もう一つ。質問をまとめて先生が答えていただければ。

今滝 先ほど森先生が批判された、田邊哲学における種の論理。だから、これは方便。方便をどう、阻害体ではなくて生かすのかという意味で、田邊哲学の意義を、逆に僕は、きょうの菅原先生と田中先生の発表から、何か示唆を受けたように思ったんですけれども。八木先生自身の、田邊哲学における種の論理の評価をもし。

八木 随分違う問題です。まず、はじめのほうから、翻訳はキリシタンの時代から始まってやってるんですけど、僕の感じでは、いくら翻訳したっていい訳なら事柄がわかるってもんじゃないですよ。それが一。第二、プロテスタントとカトリックとの共同訳をつくったのが、問題が一つ。何かというと、教義は聖書の言葉に基づいているというんだけど、逆なんだよ。教義に合うように聖書を訳したりしている。

金 それもありますよね。

八木 冗談じゃないんだよ。やめてもらいたいよ。それからもう一つ。パウロが何言ってるのかわからない人が翻訳してるんだよ。たとえばね、コリント聖書の四章の四節に、わたしは自分を裁かないと。そういう言葉がある。裁きは主に委ねるってね。裁かないと書いてあるのを、「わたしはわたしを省みてやましいことはないけれども」と訳してる。それで、シュノイダ(σύνοιδα)と言うんです。シュノイダというのは一緒に知るということで、良心と自覚と両方の意味があるんです。ギリシャ語がそうだし、ラテン語もそう(conscio, conscientia)。パウロが言っているのは自覚のほうなんですよ。わたしはもう、自分の心を見つめて、よかったの悪かったのと判断するのはやめたと言ってるんですね。それを、良心のほうにとっちゃうものだから、「わたしは自分自身を省みてやましいところはない」と訳しちゃった。そうすると、わたしは、もう自分を裁かない、裁きはすべてキリストに任せたという、次の言葉と矛盾してるじゃないですか。そういう重要な箇所がたくさんあるんですよ。

それから、田邊元ですか。田邊元の、個と種と類の相互媒介、絶対媒介という論理なんだけど、その論理自体は非常に興味があるし、それから、僕の言っている統合体には、個と、それから統一と、それから統合という三つの要素があるわけでね。それに似てるんですよ。種(統一)の面が非常に強くなると、個がそこから自由になって、新しい共同体をつくる、それが類だといってる。そこが似ているの。

ところが、どこが決定的に違うかというと、少なくとも戦後までの田邊なんだけど、国家が類になっちゃう。国家が神格化されるんですね。だから、彼の国家論では、国家が菩薩の国になっちゃう。それが僕は間違いだと思うんです。国家というのは類じゃなくて種ですよね。類というのは、言ってみれば人類なのでね。国家を類と置くと、それが神聖化されるというかな。それが、僕は彼の決定的な間違いだったと思ってます。

金 ちょうど六時になりました。それでは、これをもちまして第四セッションを終わらせていただきます。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Taking Allah as Our Rabb - Understand Al-Qur'an Academy

Taking Allah as Our Rabb - Understand Al-Qur'an Academy

inspirationRabb

by http://semal.org/web/ Raiiq Ridwan

Allah mentions a very special group of people in Surah Fussilat. These people don’t just say “we believe in Allah”—they say that their Rabb is Allah. 

Rabb in most English translations is translated as “Lord,” but that doesn’t completely cover the meaning.

What does it mean for Allah to be our Rabb?

Rabb is the One who creates, sustains, and owns everything in existence. Ustadh Nouman Ali Khan mentions that the most suitable English translation would be Master. So in declaring Allah as Rabb, these people, may Allah make us like them, have implied that they themselves are Allah’s abd (slaves).

Abd is the most honourable title in the Quran for any human being. Allah has honoured prophets by calling them abd, and if that is the case then what about sinners like us? True greatness comes in being a proper slave of Allah, wherein one submits to Allah completely.

Being Steadfast

Allah continues in the same verse, then remained steadfast. It is easy to be a part-time slave of Allah, or to be a proper slave of Allah for a a few days, but true slavery entails being steadfast in obeying Allah, and staying away from what Allah has prohibited.

Angelic Protection and Glad Tidings

Allah continues: on them the angels will descend, saying, “Do not fear, and do not grieve; and be happy with the good news of the Jannah (Paradise) that you had been promised.

Imagine this: you are on your deathbed, and while everyone is crying around you, angels descend upon you tell you that you have nothing to fear and nothing to be sad about. They also give you the glad tidings of Jannah. What more can a Muslim strive for? That is the reward of being a slave of Allah.

Allah continues in the next verse: We have been your guarding friends in the worldly life, and (will remain as such) in the Hereafter. And for you here is whatever your souls desire, and for you here is whatever you call for.

Allah mentions that for those who are truly the slaves of Allah, angels will be their guarding friends in this world and also in the hereafter. Also mentioned is the ultimate pleasure of Jannah— “whatever your souls desire.” Whatever we fantasize about, whatever we dream and wish, in Jannah every one of those dreams and wishes will be fulfilled for the slave of Allah.

In the next verse: A gift of welcome from the Most-forgiving, the Very-Merciful. This is to prevent the ego from taking its place in the picture. Allah mentions that all of this is a welcoming gift from Allah out of His Mercy, not only because of the deeds of the slave.

Many times we read these verses and we think, “Ah, but we are bad people, we are sinners. These gifts are for the best of people, and we would have to be sinless to achieve this rank.” But Allah mentions “the Most-Forgiving, the Very-Merciful” to remind us that even these people make mistakes and sin as well, but Allah forgives them for their unwavering commitment.

The Qualities of Those Who Accept Allah as Rabb

And who is better in speech than he who calls to Allah, and works righteously, and says: “most certainly I am one of the Muslims.”

In the very next ayah, Allah poses a rhetorical question, asking who can be better than these people. And their qualities are that they call to Allah. Then they also do the good deeds themselves and calls themselves Muslims. Those who accept Allah as Rabb are those who combine both dawah and actions at the same time and who call themselves Muslim.

Calling oneself Muslim has two implications: number one is that he doesn’t call to any group or party or sect; rather he calls to Islam, and number two is that he does not place himself on a higher pedestal than other believers out of pride and arrogance. Rather, even though he might be at a different level of Iman, he calls himself Muslim and does not arrogantly look down upon the people.

Allah Teaches Dawah

What then is the way forward for dawah, and what is the first step? Allah Himself makes it clear in the following verse: Good and evil are not equal. Repel (evil) with what is best, and you will see that the one you had mutual enmity with him will turn as if he were a close friend.

More often than not, we get terribly angry when someone attacks Islam or the Prophet sallallahu alayhi wasallam. However, instead of behaving like the hooligans that the media paints us as, we should be more tactful and clever. We must acknowledge the fact that in their position we might have done the same and so we should give everyone the benefit of the doubt.

Had it not been for this principle, Islam would not have been successful in its first generation. The Prophet sallallahu alayhi wasallam and his sahaba employed this method and many hateful people among the Quraysh were won over. Ironically the latter part of the verse mentions that the one who was the enemy will become a friend.

Allah in the next ayah mentions some further qualities one needs to have in order to execute this method: But only those who are steadfast in patience, only those who are blessed with great righteousness, will attain such goodness.

Naturally, the human reaction to the abuse of oneself, one’s belief, or something one holds dear is particularly testing, and hence Allah mentions  being patient. Ibn Kathir commenting on this says, “no one accepts this advice and works according to it, except for those who can be patient in doing so, for it is difficult for people to do.” Also it shows that patience comes with increased righteousness and that the one who does it will attain great good in shaa Allah.

For every good deed one does, Shaytan is there with his attacks. How to fight back?

Allah continues: And if an evil whisper from Shaytan tries to turn you away, then seek refuge in Allah. He is All-Hearing and All-Knowing.

Allah also knows that Shaytan will whisper to us, especially when our dawah doesn’t work to either give up or to get angry, and in those moments Allah asks for another moment of patience and to seek refuge in Allah. What is the point of getting angry? Doesn’t Allah hear what is being said to you, and know what is happening to you? And Hence Allah ends the passage, He is All-Hearing and All-Knowing. 

The Bigger Picture— Al Jannatul Firdaws

Going over so much we might actually forget the larger picture. We might actually give up when we think that we have to be nice to those being bad to us (ouch— that really hurts the ego doesn’t it?) Why not just give it up?

Again, let’s go back to the beginning. Would we not want angels to be our guarding friends in this world and the next? Would we not want to be given glad tidings of Paradise on our deathbed? Do we not want to go to Paradise so that we can fulfil our wildest dreams? Is this not worth taking the trouble for a reward which knows no bounds? Are we then ready to call to Allah, work righteousness, and say “I am one of the Muslims?”

 

Amazon.co.jp: 対談評釈 イエスの言葉/禅の言葉 : 上田 閑照, 八木 誠一: Japanese Books

Amazon.co.jp: 対談評釈 イエスの言葉/禅の言葉 : 上田 閑照, 八木 誠一: Japanese Books




See this image


対談評釈 イエスの言葉/禅の言葉 Tankobon Hardcover – May 27, 2010
by 上田 閑照 (著), 八木 誠一 (著)
5.0 5.0 out of 5 stars 5 ratings

私たちが当面している心と文化の危機、その由来を訪ね突破口を探る。イエス物語を禅の公案として読み、道元が言い止める「言葉を超えた経験」をパウロの「十字架の出来事」に重ねる。新しい次元のリアリティが生成する場所と、自覚する心、両者を媒介しつつその関係を壊しもする言語の作用──宗教の言葉に現代の像を探って。




Print length

288 pages


Product description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イエスの言葉と禅の語録に埋もれている、人を生かす力の源からの呼び声を探して。文化が大きな曲がり角に立っているという、共通の危機意識を土俵として対話する。情報革命とグローバル化が具現する精神の現実―自閉する自我、稀薄なリアリティ。宗教のはじまりにある経験とその自覚に、リアルな生命感への突破口を求め、言語のダイナミックスに、世界を立ち上げる力と、経験を奪う負の力の由来とを突き止める。対話篇「いきいきと生きるために」。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上田/閑照
1926年生まれ。専攻、宗教哲学。京都大学文学部哲学科を卒業後、マールブルク大学に学ぶ。Dr.Phil.取得(マールブルク大学)、文学博士(京都大学)。現在、京都大学名誉教授

八木/誠一
1932年生まれ。専攻、新約聖書神学、宗教哲学。東京大学とゲッチンゲン大学に学ぶ。文学博士(九州大学)、名誉神学博士(スイス、ベルン大学)。現在、東京工業大学名誉教授(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岩波書店 (May 27, 2010)
Publication date ‏ : ‎ May 27, 2010
Language ‏ : ‎ Japanese
Tankobon Hardcover ‏ : ‎ 288 pages
ISBN-10 ‏ : ‎ 4000221809
ISBN-13 ‏ : ‎ 978-4000221801
Dimensions ‏ : ‎ 5.31 x 0.98 x 7.68 inchesAmazon Bestseller: #547,464 in Japanese Books (See Top 100 in Japanese Books)#2,677 in Introduction to ReligionCustomer Reviews:
5.0 5.0 out of 5 stars 5 ratings

Top reviews from Japan

Translate all reviews to English


caritas77

5.0 out of 5 stars 頂上対決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20, 2023

序章 この空虚な世界は、どこから来たのか
直立して我と言う
我ならざるもの
人間がおかしくなる原理
世界の空虚化
世界の見えない二重性
言葉が立ち上げ、言葉が壊す
経験を奪うもの

第一章 我は、我ならずして、我なり
楠の神様
不安の根
自我主義の構造
自己を忘れる
万法に証せられる
迷いの現象学
言語と「我」
純粋経験
私の底に汝があり、汝の底に私がある
私は花だ

第二章 回心と汝 ―― 経験への道
覚とは何か
自覚の現象学
目覚める
神の子の誕生
一と無
おのずから
回心
何かおかしい、何か虚しい
最初の自覚
道を求める
見える
とともに
一体の調べ
自然が自然を自覚している
衆生無辺
「十牛図」の中の回心
共同性の問題
「我と汝」と「一切衆生」

第三章 心の場所
言葉から出て、言葉に出る
イエスは「不立文字」である
イエスの「おのずから」の道
場所と働きと ―― 「作用的一」
バショロジー
表現言語とヴァーチャル・リアリティ
「我」の場所

第四章 天地と人間をつなぐ気流
西田幾多郎の「……において」
なにもない
天地と人間 ―― 二重の「世界」
気流としての言葉
人が神の中に、神が人の中に
神の働き
人の子
覚の人イエス
道 ―― 人々の中へ
転換の方策

第五章 宗教の言葉
宗教の言語とは何か
言葉の力と危険性
言葉が経験を奪う
解脱という経験
言葉によって「開く」
禅の言葉
言葉を超えたもの
言葉が「開け」を照らす
共同的なるものをめぐって
虛語 ―― もう一つの言葉の働き
「カチン/笑い」 ―― 根源的な言葉
根源語と詩との間
禅語の特徴
殺す力
転換の証言

終章 イエスが立つ場/一人が生きる場

対話を終えて 経験・自覚・言葉
「我ならずして」を開く対話 上田閑照
知られざる満月       八木誠一

のうちわけです。

また、諸文書引照箇所一覧
仏道をならふといふは             『正法眼蔵』「現成公案」巻       
自己とは他なし                清沢満之「絶対他力の大道」
自己をはこびて万法を             『正法眼蔵』「現成公案」巻
私は、神に対して生きるために         ガラテヤ人への手紙 二章19-20節
私はキリストが聖霊の力に基づき        ローマ人への手紙 一五章18-19節
赤肉団上に一無位の真人あり          『臨済録』
次いで、世の終わりが来る           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 一五章24節
私が神の御子を異邦人たちのうえに       ガラテヤ人への手紙 一章16節 
「闇から光が輝き出よ」と           コリント人への第二の手紙 四章6節
第八図 人牛倶忘               「十牛図」
第九図 返本還源               「十牛図」
第十図 入鄽垂手(にってんすいしゅ)     「十牛図」
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に        ルカ福音書 一〇章30-36節
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迫し     使徒行伝 九章1-9節
第一図 尋牛                 「十牛図」
第二図 見跡                 「十牛図」
第三図 見牛                 「十牛図」
第四図 得牛                 「十牛図」 
第五図 牧牛                 「十牛図」
第六図 騎牛帰家               「十牛図」
第七図 忘牛存人               「十牛図」
第八図 人牛倶忘               「十牛図」
第九図 返本還源               「十牛図」
第十図 入鄽垂手               「十牛図」
あたたちが知っている通り           マルコ福音書 一〇章42-44章 
菩提心を発すというは             『修証義』第四章「発願利生」  
教外別伝 不立文字
心法無形、十方に通貫す            『臨済録』
三界無法、何処にか心を求めん         『碧巌録』第三十七則 
その神は私たちを新しい契約に         コリント人への第二の手紙 三章6節
「俺たちの父祖はアブラハムだ」        マタイ福音書 三章9-10節
大地がおのずから実を結ぶ           マルコ福音書 四章28節
なぜあなたたちは着物のことで         マタイ福音書 六章28-29章 
「何を食べようか」 ―― 思い煩うな       マタイ福音書 六章31-34章 
うを水をゆくに、ゆけども水のきはなく     『正法眼蔵』「現成公案」巻
但能く縁に随って旧業を消し          『臨済録』
愛する者たちよ                ヨハネの第一の手紙 四章7-8節 
夫れ学般若の菩薩は              『禅宗四分録』「坐禅儀」
遠山無限碧層層                『碧巌録』
好雪片片不落別処               『碧巌録』
為君幾下蒼竜窟                『碧巌録』
話尽山雲海月情                『碧巌録』
十年帰不得忘却来時道             『寒山詩』
神は……あなたがたの中で働き         ピリピ人への手紙 二章13節 
私は自分が欲する善は行わず          ローマ人への手紙 七章19-20章
何を食べようかと……思い煩うのをやめなさい  ルカ福音書 一二章22-23節
カラス……は蒔きもせず、刈りもしない     ルカ福音書 一二章24-28節
汝等諸人……道の為に頭を聚む         『興禅大燈国師遺戒』
無事是れ貴人                 『臨済録』
あなたは殺すことはない            マタイ福音書 五章21、27、33、43節
自性霊妙……名づけて不殺生戒と為す      「無相心地戒(一心戒文)」
物来つて我を照らす              西田幾多郎「知識の客観性について」
物の見えたる光                『三冊子』芭蕉
虚空咲点頭                  『普燈録』
又香厳智閑禅師                『正法眼蔵』「渓声山色」巻
一切誓うな                  マタイ福音書 五章34-35節
あなたがたも……「姦淫するな」と       マタイ福音書 五章27-28節
イエスはオリーブ山に行かれた         ヨハネ福音書 八章1-8節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            マルコ福音書 二章23-28節
パリサイ派の人々と……イエスのもとに集まった マルコ福音書 七章1-15節
洗礼者ヨハネが荒野に現れ           マルコ福音書 一章4-11節  

の引照です。

若い読者は、出典を一々あたってみられるとよろしいでしょう。

漢語は一字をもって表意します。聖書の用語は、ヘブライ語、ギリシア語いずれにしても表音します。漢語の含意をピタリとあてましょう。

八木氏はキリスト教とくにプロテスタントの神学に精通されている方です。当方はカトリックですが、聖書史のあとに、歴史的キリストの考え方も参考に学びましたので、八木氏の表現は、読みやすいと思います。

HelpfulReport
Translate review to English


ぱすと〜る

5.0 out of 5 stars 自分の内奥で、自分を生かす何かReviewed in Japan on April 15, 2020

 「生かされている」と言います。わたしたちは、自分一人の力で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誰かによって、何か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ます。まわりの人びとに支えられています。あるいは、たとえば、会ったことはないけれども農業漁業で食をもたらしてくれる人びとに、わたしたちは生かされています。

 けれども、そのような誰かだけでなく、わたしたちの中にはわたしたちを生かす何かがあります。いのちがあります。わたしたちの内奥には、わたしたちを土や木の人形にとどめず、わたしたちに息をさせ、動かし、考えさせ、感じさせ、愛させ、生かす何かがあります。

 旧約聖書・創世記2:7 「主なる神は、土(アダマ)の塵で人(アダム)を形づくり、その鼻に命の息を吹き入れられた。人はこうして生きる者となった」

 紀元前数世紀のユダヤの人びとは、それを「命の息」と呼びました。

 本書の著者の一人、八木先生によれば、一世紀、イエスはそれを「人の子」あるいは「神の支配(国)」あるいは「聖霊」と呼び、パウロは「キリスト」と呼びました。

 もう一人の著者である上田先生は、「限りない開け」「我は、我ならずして、我」という表現をしました。

 イエスに学んだ者と禅に学んだ者が語り合い聞きあい、イエスに学び、禅に学ぶ消息がこの本には記されています。

 「もし二つの全く独立して成立発展した宗教に基本的一致があれば、それは両教の相対性というよりは、むしろ真理性の証明になると思ったのです」(p.269、八木さん)。

 「異なる登山口では月の見え方が違う」(p.285、八木さん)。

 ぼくはキリスト教の牧師ですが、本書は、仏教を学び資格を持つ方から頂戴したものです。

 この方とは、数年間、キリスト教や仏教の本の読書会を続け、まさに、八木さんの言う真理性の何分の一かを教えていただきました。感謝いたします。

2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Report
Translate review to English


建具屋の半公

5.0 out of 5 stars 上田、八木思想入門Reviewed in Japan on June 11, 2010

 本書は、日本を代表する宗教学者二人による対談だ。上田は禅とエックハルト、八木は新約聖書学の泰斗であることは、おそらく言う必要はないだろう。
 対談は、まず、話題となるテクストが掲げられ、それをめぐってなされる。初めに問題となるテクストが提示されるので、禅あるいは聖書に親しみがない読者にも、なにが問題となっているのかわかりやすい。印象的な文章が紹介されているので、聖書あるいは禅への入門として、本書は役に立つだろう。
 しかし本書は、禅や聖書の入門としてはたらくだけではない。上田、八木それぞれは、独創的な研究で知られる宗教学者であり、本書に収められた対談は、かれら二人の研究への導入としても役に立つのである。その意味からすれば、巻末にでも読書案内のようなものがあってよかったように思われる。上田も八木も多産な学者ゆえに、本書を読んでかれらの考えに興味を抱いても、では次に何を読もうかと思った時に、おそらく、途方にくれるだろう。

11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Report

Amazon.co.jp: 徹底討議 禅とイエス・キリスト : 誠一, 八木, 龍〓@59BC, 秋月: Japanese Books

Amazon.co.jp: 徹底討議 禅とイエス・キリスト : 誠一, 八木, 龍〓@59BC, 秋月: Japanese Books



See this image



Follow the Authors

八木 誠一
Follow

Ryōmin Akizuki
Follow





徹底討議 禅とイエス・キリスト Tankobon Hardcover – December 1, 1989
by 八木 誠一 (著), 秋月 龍〓@59BC (著)
3.9 3.9 out of 5 stars 3 ratings


Customer reviews
3.9 out of 5 stars




caritas77

5.0 out of 5 stars 秋月龍珉氏と八木誠一氏との対話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22, 2023
Verified Purchase
はしがき 八木誠一

Ⅰ 海外における新しい「イエス」研究
「イエス」と「釈迦」/「歴史のイエス」と「歴史の釈迦」/タイセンの『イエス運動の社会学』/「イエスの言葉」は「倫理」ではない/「巡回伝道者」とはどういう人々か/「福音書」の成立/「Q史料」/スウィードラーの『イェシュア』/「倫理」と「宗教」の関係について

Ⅱ 「釈迦」と「イエス」の共通点と相違点
釈迦の出家の動機の二つの解釈/問題は自我の絶対化だった!/「自我」と「律法」の問題/釈迦はどこで見出されるか/「法」による仏教と「人」によるキリスト教/「覚」の宗教と「信」の宗教の裏と表/「涅槃」から「菩提」へ/釈迦は何を悟ったのか/文献解釈の基本問題

Ⅲ あるキリスト教徒の禅仏教体験 
八木の「禅」体験/「愛」と「自我」/グンデルト先生を訪ねる/カッセル車中での「禅」経験/八木自身の経験の解釈/西田哲学の問題/垂直面と水平面

Ⅳ 禅仏教とはどんな宗教か(一) ―― 黄檗の「一心論」 ――
「無心」ということ/「無心」は禅の特色/「以心伝心」ということ/「即心則仏」ということ/「身心一如」ということ/神も仏も「相」だ/直だ「一心」だけを指し示す

Ⅴ 禅仏教とはどんな宗教か(二) ―― 黄檗の「無心論」 ――
「ずばり無心であれ」(直下無心)/「直下」とか「当下」ということ/「応」とは「無心の心」である/「無心の心」とは大乗菩薩の「大悲心」

Ⅵ 宗教言語論の視点から「イエス」と「禅」を語る(一)
イエスの「言葉」はどういう言葉か/言葉の分類とその機能/イエスの言語/イエスの言語表現 ―― 「律法」に関して/イエスの言語表現 ―― 「愛」と「人生」に関して/イエスの言語表現 ―― 「神の国」に関して

Ⅶ 宗教言語論の視点から「イエス」と「禅」を語る(二)
イエスの言語表現と「絶対矛盾的自己同一」/「神の支配」と「西田哲学」について/禅の言葉

Ⅷ ふたたび「イエス」と「禅」について
「自我」と「自己」の区別と統合/「パウロ」における「キリスト」/イエスにおける「信」と「覚」/宗教における「直接性」ということ/直接経験(純粋経験)のこと

Ⅸ 仏教における「覚」の宗教と「信」の宗教について
「覚の宗教」「信の宗教」/廓庵禅師の『十牛図』/仏教における「信の宗教」ということ

Ⅹ 「覚」の宗教と「信」の宗教の統合
「思考」の座と「実存」の座ということ/「〈超個の個〉の超個」と「〈超個の個〉の個」ということ/「覚」と「信」と二つの宗教の発語形態/「覚」の宗教と「信」の信仰の統合

あとがき 秋月龍珉

のうちわけです。

HelpfulReport
Translate review to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