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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1

한국SGI 문학부,‘법화경’展 단체 관람 < 포토뉴스 < 포토뉴스 < 포토·영상 < 기사본문 - 대한일보

한국SGI 문학부,‘법화경’展 단체 관람 < 포토뉴스 < 포토뉴스 < 포토·영상 < 기사본문 - 대한일보



한국SGI 문학부,‘법화경’展 단체 관람
기자명 대한일보
입력 2016.10.02
 

장르별 40여 작가 10월 부원회 참석
<김용화부장을 포함한 문학부원들이 국내 처음 열린 '법화경전' 관람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은희시인이 10월 부원회의 사회를 맡았다.>
<최연지작가>
<박말순작가>
<문학부의 전반기 활동보고를 하고 있는 김용화문학부장>

2일 오후 구로구 본부동 대회의실 및 글로리홀

‘사제불이,이체동심,스승의 魂을 계승하는 문학부’를 기치로 구성된 ‘한국SGI 문학부’는 10월 부원회 겸 국내 첫 전시되는 ‘법화경展’을 관람했다.

2일 서울 구로구 공원로54 소재 한국SGI 본부 9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원회에는 국내외 40여명의 장르별 작가들이 참석,자리를 빛냈다.

법화경전 관람에 앞서 열린 10월 부원회의 식전행사는 ‘머나먼 법화경의 여정’이란 주제아래 영상물 시청으로 시작됐다.

이어 최연지-강영작가는 21세기를 평화와 공생의 세계로 만드는 새로운 지표를 찾아 ‘정신의 여행’을 떠난 이케다 다이사쿠(SGI회장)-로케시 찬드라박사(인도문화국제아카데미 이사장)의 역저 ‘동양철학을 말한다’ 독후감을 발표했다.
<강영 작가>
<김경재 작가>
<정다운시인은 즉흥 시낭송을 선사해 갈채를 받았다.>
<브라질에서 참석한 해외 회원도 소개됐다.>

뒤이어 박말순 시인은 ‘법화경전’의 도슨트로 활동하면서 느낀 후일담을, 김경재 작가의 법화경전 개막식 참석 소감과 결의발표에 이어 정다운 시인의 시낭송이 발표돼 갈채를 받았다.

부원회를 뒤로 ‘법화경(The Lotus Sutra)’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국내 최초의 <법화경-평화와 공생의 메시지>전(이하 <법화경전>)을 단체로 관람했다.

“과거 2000년 동안 실크로드를 따라 수많은 민족에게 전파돼온 ‘법화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한 사람이 지닌 위대한 존엄성을 깨닫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라'는 법화경의 메시지가 인류가 나아가야할 평화와 공생의 길에 큰 밑거름이 됐으면 합니다“

고결하고 격조어린 ‘법화경’展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한 바, 첫째는 ‘만물공생의 사상’ 둘째는 ‘영원한 것을 향한 탐구’ 셋째는 ‘평화창출을 위한 행동’으로 정의했다.

이는 인류, 민족, 성별, 직업, 문화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불지견’이 갖춰져 自他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열수 있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성’을 나타냈다.

이어 ‘영원한 것을 향한 탐구’편에는 ‘구원의 부처’는 구원의 법(다르마)과 일체이자, 우주 근원의 리듬에 살아가는 부처라고 설명했다.

특히, 수량품을 들어 생사유전의 현실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현실세계에 출현하는 ‘구원의 부처’의 영원성이 나타났다고 설파했다.

셋째는 영원한 우주생명에서 출현한 지용보살과 약왕품 이하 각 품에 나오는 여러 보살을 ‘평화창출을 위한 행동’의 주체자로 묘사하고 있다.

즉, 불성의 내재와 현재화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성에 바탕을 둔 공생 공존사상이고 나아가 보살들의 활약을 통해 인류의 평화를 창출하는 ‘세계시민’상을 제시한 경전으로 설명됐다.

이목을 끈 도슨트의 첫 소개는 석존(Buddha)에 대한 불교의 탄생을 뒤로 인간의 생로병사와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떠났다는 대목으로 시작됐다.

석존은 인생의 교육자이자 인간 지도의 달인으로 민중을 교화하며, 80세로 접어들어 마지막 여행을 통해 전도를 위해 걸은 거리만도 350km에 이른다.

석존의 가르침은 입(암송)에서 입으로 전승된데서 연유된다고 도슨트는 부연 했다.

또한 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구마라습(KumaraJiva)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을 오가며,‘묘법연화경’을 번역하는 동안 500여명이 함께 진행했다고 소개했다.

근세로 접어들어 일본의 니치렌(Nichiren) 대성인 친필, 10개 언어의 법화경, 한국법화경 사본,창가학회 법화경 사본, 세계 연구기관의 문물 등을 통해 법화경의 전파 여정을 패널로 담아냈다.

제2전시실에는 둔황 막고굴 85굴 재현, 둔황 막고굴 소개, 법화경의 메시지, 법화칠비 등을 통해 불경보살의 실천을 소개하며, 메시지展의 대미를 장식했다.
<제2전시실 앞에서 단체관람을 마친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구에서 올라온 박말순작가와 가족들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관람을 끝내고 휴게공간에서 일부 문학부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문학부의 여류 작가들>

앞서 21일, 한국SGI 글로리홀 특별전시장에서 열린 ‘법화경전’ 개막식에는 인도문화국제아카데미의 이사장 로케시 찬드라 박사와 동양철학연구소의 가와다 요이치 소장, 한국SGI의 김인수 이사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법화경의 ‘만인존엄’이란 인간주의 사상이 울려 퍼지기를 희망했다.

로케시 찬드라 박사는 특별강연을 통해“법화경은 우리 내면의 큰 바다만큼 깊다”는 테마로 한 강연에서 인도와 한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불교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법화경전의 추진위원장을 맡은 이수성 전 총리는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따뜻한 배려와 격려의 마음이 넘치는 사회”라며 "국내 첫 전시를 계기로 희망이 넘치는 한국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인수 한국SGI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법화경전은 ‘세계 평화’와 ‘인류사회의 지속적인 번영’을 목표로 세계의 지성들이 지혜를 기울여 만든 결과"라고 소개했다.

김 이사장은 또,“불안정한 세계 정세와 현실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대하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더욱 큰 공생과 행복의 꽃이 세계에 활짝 필 것”이라고 전했다.

기념비적인 ‘법화경전’은 법화경이 널리 유포된 역사와 현대적 의의를 패널로 소개하며, 둔황막고굴에 그려진 법화경을 모티브로 한 벽화, 세계 연구기관에서 보내온 법화경 관련 문물, 한국 법화경(사본) 등 150여 점이 전시됐다.

패널 이외에도 구마라습의 일생을 애니메이션으로 상영하는 영상실과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어린이 전시실, 포토존 등이 설치돼 다양하게 전시를 즐길 수 있다.

한편, 법화경전 전시는 중앙일보, 동양철학연구소, 한국SGI가 공동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서울특별시, 주한인도대사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고문서연구소, 둔황연구원, 인도문화국제아카데미, 한국예총, 한국기자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가 후원했다.
<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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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 불교닷컴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 불교닷컴



HOME 오피니언 칼럼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김춘호
승인 2013.10.15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1.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⑤지난 강좌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가마쿠라 신불교의 여러 조사들 중에서 호넨(法然)과 신란(親鸞)은 정토신앙, 에이사이(榮西)와 도겐(道元)은 선사상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호넨은 종토종, 신란은 정토진종, 에이사이는 임제종, 도겐은 조동종의 종조가 된다. 이번 강좌에서 살펴볼 니치렌(日蓮:1222-1282)은 철저한 《법화경(法華經)》 신앙자로서 일련종(日蓮宗)의 종조이다.



니치렌은 1222년 아와노쿠니 나가사군(安房国長狭郡, 현재의 치바켄 카모가와시)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계나 유년시절의 성장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고, 12세에 인근의 기요미즈야마(清水山)의 세이초지(清澄寺)로 들어가 도우젠보우(道善房)를 스승으로 수학한다. 당시 세이초지는 천태종의 유력 산악 사찰로서 법화경 신앙을 비롯한 정토, 밀교 등을 겸수하는 도량이었다고 한다.

16세 되던 1238년 출가하여 제쇼우보우(是生房) 렌쵸(蓮長)라는 법명을 얻는다. 그리고 1242년 세이초지에서 내려와 교토의 히에이잔(比叡山)으로 유학한다. 이때부터 1253년 세이초지로 다시 돌아가 법화경의 전도를 선언할 때까지 약 12년간 교토와 나라의 사원들을 돌며 당대의 고승들을 찾아 수학한다.



▲ 니치렌(日蓮). (사진:http://ja.wikipedia.org/wiki/)
천태종 소속의 젊은 승려 니치렌이 경험한 당시 불교계는 세속화에 찌들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기성종단의 무기력함과 염불만을 주장하며 민중을 현혹시키는 정토교의 융성이었다. 이를 바로잡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민중들을 위해 니치렌이 찾은 해답은 부처님의 정법인 법화신앙의 부흥이었다.



1253년 세이초지로 돌아온 니치렌은 4월 28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향해 ‘남묘호렌겟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외우고 법화경의 전도를 선언한다. 현재 일련종(日蓮宗)에서는 이날을 입교개종(立敎開宗)일로 기념하고 있기도 한데, 법화경신앙의 선양과 더불어 정토신앙을 강하게 거부하는 그의 행보가 공식적으로 이날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니치렌(日蓮)으로 개명한다.

1254년 니치렌은 당시 정치적 수도 가마쿠라(鎌倉)에서 본격적인 홍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1257년 8월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가마쿠라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거기에 홍수와 질병, 기근이 뒤따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는다.

법화경 신앙자 니치렌의 눈에는 그러한 천재지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일본이 정토신앙이라는 사법(邪法)에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여 정토신앙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위정자들이 법화경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외국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즉, 니치렌은 정토교에 대한 강한 배척은 물론 위정자들의 종교적 책임을 함께 묻는 것이었다.

니치렌의 이러한 입장은 당연히 막부의 노여움은 물론 정토교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일생동안 위정자들의 탄압과 정토신자들의 살해위협이 계속된다. 일련종에서는 이를 법난(法難)이라고 한다.

1260년 8월 정토교의 신자들이 니치렌이 기거하던 초암을 불태우는 사건(松葉谷法難)이 일어난다. 그리고 니치렌의 포교활동은 금지되었고, 1261년 5월 체포되어 현재의 시즈오카켄 이토시(静岡県伊東市)로 유배된다.(伊豆法難)

1264년 유배에서 풀리자 가마쿠라에서 포교활동을 재개하지만, 같은 해 11월 정토교 신자 도우조카게노부(東条景信)의 습격을 받아 제자 2명을 잃고, 니치렌 자신도 왼팔과 미간에 상처를 입는다.(小松原法難)






▲ 카나가와켄 후지자와시(神奈川県藤沢市) 류코우지(龍口寺). 류코우법난(龍口法難)당시 니치렌의 처형장에 세우진 사찰(사진::http://ja.wikipedia.org/wiki/)
그런데 1268년 그의 예견이 적중한다. 몽고가 항복과 입조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니치렌은 법화경 신앙으로의 귀의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되고, 몽고와의 결사항쟁을 결정한 막부는 1271년 니치렌과 그의 제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려 한다. 그러나 형장에서 광명이 빛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결국 니치렌은 현재의 니이가타켄 사도(新潟県佐渡)로 유배된다.(龍口法難)



사도에서의 약 3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니치렌은 《개목초(開目抄)》,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 법화만다라(法華蔓茶羅) 등을 완성한다. 특히 《개목초》에서는 수난을 당하는 것이야 말로 말법시대를 사는 법화경신자로서의 증거라고 하여 계속되는 법난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던 교단과 신자들의 동요를 달래고 있으며, 스스로를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응현(應現)’이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 일본의 기둥이 될 것이며, 내 일본의 눈이 될 것이며, 내 일본의 배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니치렌의 삼대서원(三大誓願)이 유명하기도 하다.

1274년 봄, 유배에서 풀려난 니치렌은 막부에 소환되어 몽고침입을 재차 예언하였고, 실재로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몽고가 침입하지만, 법화경에 귀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후 니치렌은 현재의 야마나시켄 미노부산(山梨県身延山)에 쿠온지(久遠寺)를 개산하고 그곳에 머물며 제자들과 신자들의 지도에 전념한다. 그리고 1282년 10월, 제자 6인(日昭, 日朗, 日興, 日向, 日頂, 日持)을 후계자로 세우고 향년 61세로 입적한다.



▲ 야마나시켄(山梨県) 쿠온지(久遠寺) (사진:http://ja.wikipedia.org/wiki/)
니치렌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법화경》 신앙이라는 점이다. 특히 그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남묘호렌겟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唱題) 것만으로도 성불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법화경이야 말로 석존 깨달음의 참 모습을 전하는 경전으로 가장 수승하며, 니치렌 스스로가 법화경의 유포를 석존으로부터 부촉 받은 상행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철저한 법화경 신자요 전도사인 것이다.



일생동안 계속되었던 권력으로부터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 사람의 법화경 신앙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통한 중생구제와 불국토 건설을 꿈꾸었던 니치렌은 가마쿠라시대가 낳은 또 하나 거성이었다. 현재, 니치렌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 단체로는 불교종단으로서 일련종(日蓮宗)을 비롯하여 신자조직인 창가학회(創價學會), 정치조직인 공명당(公明黨) 등이 유명하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CRS NEWS 2017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CRS NEWS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5/30 [08:43]

창립의 배경과 일본 패망후의 급신장







니와노 릿쿄(庭野日敬)가 1940년대 개조한 일본 신종교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는 일련종에서 파생되었으나, 일련정종, 창가학회 등과는 전혀 다른 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立正佼成會는 1940년 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일본사회가 패배주의로 위축되어 있던 시절 급성장한 신종교 중의 하나다. 회원 3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5년 말에는 36만세대, 1970년에 1백만을 헤아리는 부침을 겪었다. 개조(開祖)인 니와노 릿쿄는 세계 종교간대화와 화합을 위해 힘썼으며 그 노력으로 세계종교인평화회의가 만들어지고 이후 종교간 교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국에는 1978년 문공부에 종교활동을 한 후 미미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2천여 세대의 회원이 있다. 일본 신흥종교 입정교성회의 탄생과 부침, 홯동 그리고 한국의 상황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마치 이슬람 사원과 같은立正佼成会(입정교성회) 대성당의 모습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창립의 배경과 일본 패망후의 급신장

입정교성회은 재가불교 교단으로 가정이나 직장,지역사회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마음을 닦고 사회의 일원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재가종단으로 가정마다 보전(寶前)이라고 부르는 불단이 있다. 보전은 집안에서 가장 청결한 곳에 모시며 정면 중앙에는 「본존」우측에 「개조·법조의 법호」좌측에 「총계명·택지인연계명」을 안치한다. 본존 앞에는 밥,물,차,꽃,과자,과일을 올린다. 아침,저녁으로 보전을 향해 독경공양을 한다. 기도제목으로 아침에는 새로운 서원을 세우고, 저녁에는 하루를 마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각 가정마다 있는 보전은 가족 모두의 귀의처의 역할을 한다.

교성회의 창립자 니와노 릿쿄(庭野日敬)는 1906년 11월 15일 신갈현 산촌 마을인 중어소군 십일련 대자관소에서 중농의 차남으로 태어나, 3대가 같은 집에 사는 대가족 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조상숭배의 예절과 가족상호간의 생활태도 등을 배웠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17세되던 1924년 동경으로 올라와 연료상을 하던 석원숙태랑(石原淑太郞)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부터 그는 온갖 종교신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 처음 만난 집 주인 석원은 아국신덕사(石原은 我國信德社)라 하는 칠신신앙과 육요를 접합한 역학으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집단에 다니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석원으로 부터 역술을 접하게 된다. 그 뒤 1931년 11월에는 그의 장녀가 중이염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근처에 살던 천구불동존(天狗不動尊)을 모시면서 수험도의 가지기도를 행하는 산복 강목매야(山伏 綱木梅野)를 찾아가 기도를 받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의 영술에 감동을 받은 정야(庭野)는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강목의 기도소에서 수험도의 수행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수행(水行), 살물(殺物)을 끊고, 화식을 중단하는 등의 수행을 결행한 끝에 반년정도 지나서는 사범을 대신하여 지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다. 수험도의 수행을 마친 그는 아국신덕사(我國信德社)에서 익힌 점술을 사용하여 모여드는 상담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영술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는 불동강을 열어 장사는 팽개친 채 산복(山伏)으로서의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런 그의 행적을 보다 못한 산복 강목(山伏 綱木)이 찾아와 두가지 일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고민에 빠져 성명학을 하던 소림성고(小林晟高)가 운영하던 대일본홍우회을 찾아가 상담하게 된다. 오히려 小林은 山伏의 일이란 훨씬 과학적임을 설득하여 그는 다시 성명감정을 가계운영과 함께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역학, 성명학, 수험도의 부동수행(不動修行) 등을 전전하던 그에게 일대 전기가 된 것은 그의 차녀가 뇌막염에 걸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이웃에 살던 영우회 신자인 반총(飯塚)이라하는 산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찾아와 영우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마침 반총(飯塚)의 권유를 받은 뒤 일주일만에 차녀가 고열이 나면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즉시 가까운 경응병원(慶應病院)에 달려가 진찰을 하니 기면성 뇌막염으로 손쓸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낭패에 빠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딸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산파가 가르쳐준 영우회 사지부 신정법좌를 지도하고 있던 신정조신(新井助信)을 찾아갔다. 신정으로 부터 선조공양과 총계명에 대해 들은 그는 즉시 영우회에 들어가 총계명을 하고 선조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차츰 차녀의 병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1주일 정도 지나자 거의 완쾌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영우회에 대해 크게 신뢰를 가짐과 동시에 특히 지부에서 행하는 신정(新井)의 법화경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 당시의 감회를 정야는 이렇게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이야 말로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아무리 그것에 대해 흠을 잡아보려 해도 흠 잡을 데가 없었을 뿐 아니라, 광대무변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원하는 완전 무결한 구수강으로 느껴졌다. 마음도 육체도 사회도 무엇이든지 남김없이 다 감싸는 것이다. 정말로 엄청난 놀라움이었다. 솟구치는 피처럼 신선한 감동이었다.

스스로 일생의 스승이라 부르는 신정(新井)과의 만남은 법화경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신정의 법화경 강의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리, 풍부한 인생경험이나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풀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입회 7개월만에 부지부장이 된 니쯔키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여 그들을 인도할 목적으로 우유상으로 전업했다. 이 인도생활 중에 1936년 그는 중요한 신앙동지인 장소묘교(長沼妙佼)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에는 빙과를 팔고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파는 「기옥옥(埼玉屋)」의 여주인으로 그 당시는 자식을 잃고 자신도 만성 자궁내막염으로 고생하고 있던 터였다. 인도활동으로 그녀를 만난 정야는 그녀에게 선조공양을 올릴 것을 권하면서 영우회에 들어 오도록 권유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천리교를 믿고 있던 그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정야의 인도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일단 會에 들어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그녀가 정야를 따라 모임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계명을 내놓아도 좀체로 관심을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정야가 장소(長沼)의 선조대대의 계명을 모아 과거장에 써넣는 계명을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달 아침 불가사의하게도 그녀의 복통이 가라앉고 출혈도 멈추었다고 한다. 이 신비체험을 한 뒤 그녀는 영우회의 선조공양을 믿게 되고 신정지부의 회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입회 후 그녀는 신정에게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정의 부인으로 부터 신을 불러내는 영능술을 익히게 된다.

그 후 정야(庭野)와 묘교(妙佼)는 짝을 이루어 많은 회원을 인도하면서 지부내에서 일정한 권위를 쌓아간다. 그러던 중, 1938년 1월 7일 열린 「영우회 전국지부장회의」가 열려 니와노도 신정과 함께 그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는 영우회의 발전전략을 위해 논의하기 위한 취지도 있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35년 이후 잦아지는 교단 분립을 막고 교단본부의 지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 회의 모습을 기록한 성회측 자료에 의하면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소곡희미(小谷喜美) 회장이 갑자기 일어나 “자네들은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신자인 주제에 (법화경)설교 따위를 늘어 놓는다 하는데 어떻게된 일인가?”고 하면서 “법화경을 강의하던 시대는 끝났어. 그 따위 짓을 하는 것은 악마야.”라고 질타했다 한다. 이에 정야와 함께 참석하고 있던 신정은 화가 나 자리를 떠 버리고 다음날 아침 정야는 묘교와 상의하고, 석원숙태랑, 신정조신(石原淑太郞, 新井助信)과도 상의하여 영우회로 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1939년 3월 5일 개조(니와노 릿쿄)와 협조(나가누마 미요꼬)는 「대일본입정교성회」를 결성하고 본부는 니쯔키요의 가게 이충에 두고 회장에 국주회원인 촌산일이(村山日裏)를 옹립한다. 이 때 회원은 불과 3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정야는 이미 익히고 있던 성명감정이나 방위감정원을 국주회 회원이었던 촌산일이(村山日裏)에게서 배운 성명학과 기학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상담자들의 상담에 웅하고, 또 국주회의 법화경론을 배워 법화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꾸준히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요꼬는 신정부인에게서 배워 둔 영술이 더 발전되어 엑스타시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으며, 이것을 통한 영감지도로 또한 신자를 확보해 나갔다. 차츰 고정 신자가 확보되면서 니츠키요는 주로 법화경의 교의 연마에 전념하고, 미요꼬는 신자들의 교화 육성을 맡게 된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교세를 넓혀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1941년에는 신자수가 1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미요꼬의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현재 교단 본부가 있는 화전본련(和田本堜)에 1942년 5월 7일 본부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니츠키요도 그때까지 경영하고 있던 우유배달업을 중단하고 본부로 이주하여 종교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기의 순탄한 발전은 1943년 3월 미요꼬의 영감지도가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삼병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는 구류사건으로 약간의 시련을 겪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촌산회장이 물러나고 지부장 반 정도가 회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회장에 니츠키요가 취임하고 미요꼬는 부회장을 맡아 회를 이끌게 된다.

종전과 더불어 종교법인령이 공포되면서 나타난 이른바 신종교의 러시아워에는 「대일본입정교성회」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1945년 회원 세대수가 1,277세대에 이르렀던 교세는 이듬 해에는 3,242, 1947년은 9,542세대로 늘어나게 된다. 1948년에는 명칭도 「입정교성회」로 바꾸고 1950년 10월 1일자로 종교법인으로 등록한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법화경 신봉 ‘한국 SGI’ 부처님 오신 날 나라사랑 대축제 2005 한겨레

법화경 신봉 ‘한국 에스지아이’ 부처님 오신 날 나라사랑 대축제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법화경 신봉 ‘한국 에스지아이’ 부처님 오신 날 나라사랑 대축제

등록 :200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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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스지아이’(한국창가학회·이사장 여상락)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15일 오후 2시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005 나라사랑 대축제’를 연다. 주최 쪽이 예상하는 참가인원은 10만여명.

‘희망을 만들어요’란 슬로건을 내걸고 열리는 이 축제엔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씨가 총감독한 800명의 사물 매스게임을 시작으로 340명의 화려한 무용과 150인조 마칭밴드의 연주가 이어진다.

또 국악 실내악단 슬기둥의 공연, 인순이와 쥬얼리가 함께 하는 희망콘서트 등이 진행된다.

특히 주최 쪽이 직접 독도를 방문해 촬영한 영상이 상영되며, 2만명이 참여하는 ‘독도는 우리 땅’ 카드섹션도 연출된다.

북한 식량난 해소를 위한 기금과 불우어린이 돕기 기금도 전달될 예정이다.

에스지아이는 묘법연화경(법화경)을 신봉하는 불교 신도단체로, ‘남묘호랭게쿄’(나무묘법연화경의 일본어 발음)를 독송하며, 세계 190개국에 2천여만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일본 공명당의 뿌리이기도 하며, 일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이 단체는 일본 우익파들의 독도 망언 등을 계속 비판해왔다. 이케다 에스지아이 회장(사진)은 독도 망언으로 들끓던 1998년 9월28일 충남 부여군에서 한 한 연설에도 “섬나라 일본이 백제로부터 받은 문화의 은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백제가 없이 일본 문화의 발전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며 “그런데도 일본이란 오만한 나라는 큰 역사상의 은혜를 원수로 갚아 두렵다”고 말했다. 그는 “사악한 망은의 무리와 결단코 맞서 싸우는 용기가 불길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SGI의 공공윤리 교육연구 - 金容煥 2017

한국 SGI의 공공윤리 교육연구 - 학지사ㆍ교보문고 스콜라

한국 SGI의 공공윤리 교육연구
An Educational Study on the Public-common Ethics of Korean SGI

金容煥(Kim Yong Hwan)  한국종교교육학회 종교교육학연구 제53권 등재여부 : KCI등재 2017.02 55 - 76 (22 pages)
인문학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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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목차
 
참고문헌
 
해당 권호 수록 논문
국문초록

‘불온한 왜색종교’로 이 땅에 들어온 창가학회는 오늘날의 한국 SGI로 성장하다. 
독자적인 재가신도중심 종교단체로서 성장하면서 전통적인 불교승려 집단과 결별하다. 
한국 SGI의 종교교 육은 종교윤리의 실천교육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념삼천의 우주론과 입정안국의 공공실천에서 사 심(私心)을 공심(公心)으로 전환하는 십계호구의 법리를 제시하다. 
또한 삼대비법의 존재론과 자 행화타의 공공실천에서 공사공매(公私共媒)가 가능한 제목창제 법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일생성불 의 인간론과 광선유포의 공공행복의 실천에서 이체동심(異體同心)의 법리를 나타냈다. 언급한 세 가지의 법리는 『법화경』에 그 연원을 둔다. 
따라서 한국 SGI 교학은 일본의 ‘니치렌 불법(日蓮 佛法)’에 근거하되, 『법화경』의 대승불교의 천태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공공윤리 실천을 지향한 다. 

이는 붓다가 중생에게 성불종자를 내리는 ‘하종(下種)’의 성격으로 하화중생을 목적으로 ‘하종 익(下種益)’의 방편을 다양하게 구사하다. 
먼저 일념삼천의 우주론과 입정안국의 공공윤리 실천에서 사(私)를 살려서 공(公)의 불계를 지 향함으로 ‘활사개공’의 공공윤리 가치를 실천한다. 개체생명을 살려서 우주생명과 활연관통하는 입 정안국의 실천에서 평화를 구현하고 생명화합을 선도한다. 

또한 한국 SGI는 삼대비법 존재론과 자행화타의 공공실천에서 공과 사를 이어주고 매개하는 공사공매의 공공윤리 가치를 실천한다. 특 히 삼대비법의 존재론을 통해 말법중생 전면구제의 비요(秘要)를 전개함으로 본문의 본존(本尊)&#8901; 제목(題目)&#8901;계단(戒壇)은 삼원구조의 양상을 나타낸다. 

『법화경』을 토대로 만인성불 목표의 ‘남묘 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봉창함으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을 이어주고 매개하여 성상원융(性相 圓融)을 목표로 제시한다. 일생성불의 인간론과 광선유포의 공공실천에서 행복공창(幸福共創)의 공 공윤리 가치를 실천한다. 

한국 SGI는 ‘우주신인론 성’에 입각하여 인권개선과 세계평화에 앞장 서며 개인적 기복보다 사회적 공공성에 관심을 표명하다.

영문초록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on the public-common ethics of Korean SGI. The Korean SGI is a kind of Buddhism which was transmitted from Japan in 1960’s. Korean SGI is originally a buddhist religion but it has been debated as not Korean religion, pseudo buddhism and political organization. In Korean society, the Korean SGI has persisted to grow while the labeled ‘the other of Japanese religion.’ In the period of global citizenship of 21st century, the Korean SGI has created the Life-respect Buddhism, People-reconciliation Buddhism and Modern Buddhism. The mentality of ‘the other of Japanese religion’ has changed to the pursuit of publicity among different belief systems. Firstly. The Korean SGI is a new religious organization. The correlative linkage between three thousand in one idea and the public practice of comfortable people by the building of the right have contributed to activating the private to opening the public through life respect. It is an essential issue of public-common ethics. Secondly, The correlative linkage between three secrets of buddhist law including chanting of Lotus Sutra’s title and the public practice of benefit to others has contributed to mediation the private with the public through life reconciliation. Thirdly, The correlative linkage between fulfilling buddha’s nature in one lifetime and wide spreading the dharma benefit in the world has contributed to fulfilling the public-common happiness through life saving. The conviviality is considered to be the attitude of sharing goods and happiness with other people. It has been considered to be the ultimate end of public-common ethics. This article on the basis of Public-common ethics of Korean SGI, would examine the social publicity and the evaluation of a certain new religion in contemporary society. We can say that it is the discursive morphology of Public-common ethic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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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tion the private with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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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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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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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특징4. 관련 문서

성덕도
聖德道
설립년도
1952년
분류
경상북도 지역의 향토 종교
신앙 대상
특별한 신앙 대상이 있지 않음(자성반성(自性反省), 미신타파(迷信打破), 문맹퇴치(文盲退治), 도덕정신(道德精神)을 실천 덕목으로 하여 도덕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이 있음)[1]
창교주
김옥재(金沃載), 도학주(都鶴姝)
도종(성도사)
옥양지(玉良智) 홍광연(洪光連)선생[2]
본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길 106-60번지[3][4]
공식 사이트
https://www.seongdeokdo.org
신자 숫자

1. 개요[편집]

1952년 5월 27일(음력)에 김옥재(金沃載)와 도학수(都鶴姝) 가 대구광역시에서 공동으로 창설한 대구•경북지역의 향토 종교로, 본부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있다. 본부 위치 소개

2. 역사[편집]

성덕도의 역사에 대한 참고 문서(성덕도 공식 사이트의 연혁 페이지)

성덕도를 창시한 월근(月根) 김옥재 도주는 1909년 경남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에서 출생했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여 한학을 수학했던 그는 일찍부터 인생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품었지만 종교활동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는데 젊은 시절 심신의 병고를 겪으면서 구도생활에 뜻을 두게 되었고. 그는 구도과정에서 제주 출신 김봉남을 만나 수행의 큰 인연을 가졌고, 그 후 제방을 주유하면서 고행수도하는 일변 많은 난치자들을 구활하기도 했다. 김옥재는 1952년에 대구로 온 후 달성에서 한 인재를 만나는데, 천지의 음양이치에 따라 구제창생의 대업을 함께 할 법해 도학수로 본 도에서는 법주이면서 법모님으로 추앙한다. 월근의 수행은 천도에 달해 이윽고 “천기운기 돌아오니 도운도가 밝아온다. 마음 찾자 창생들아, 청심에 선화법을 어서 바삐 찾아 보자" 라고 하면서 대도의 진리를 자각하였고, 같은 해 5월 27일 법해와 함께 도덕법을 세우고 공부에 들어가니 이 날을 ‘도덕입법일’이라고 부르며, 이 날이 바로 성덕도가 창시된 날이다.

그 후. 1960년 3월 4일(음력)에는 창시자인 월근(月根) 김옥재 도주가 귀천(사망)하였고, 그 해 10월 29일에는 문교부[5]에서 사단법인 성덕도 교화원 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공식적인 종교 단체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0월 31일에는 대구시 북내동 3번지 소재 부동산을 매입하여 교화원의 본원 원사(본부와 같은 개념)를 마련하게 되었다.

1966년에는 본원을 대구시 중구 인교동 44번지 소재 가옥을 매입하여 이전하였고, 1967년에는 공식적인 단체 명칭을 문교부의 인가를 받은 후 '사단법인 성덕도'로 변경하였다.

1984년에는 퇴임 무의탁 교직자의 생활 보장과 현직 성직자 중 보양이 필요한 분을 위주로 한 복지시설로 보양원을 개설하였고, 1989년에는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으로 본원을 이전하였다.

그 후. 1993년에는 경상북도 영천시 신령면 화남리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수련시설인 성덕수련원[6]을 개원하였고, 그 후. 이곳으로 본원을 이전하였으며, 1997년에는 성덕수련원 근처에 성덕대학교(현 성운대학교)를 설립하였다.[7]

2004년에는 기존 조치원 교화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을 수리하여 교직자 양성 기관인 본원 부설 교육원을 개설하였고, 2011년에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로 본원을 이전하였으며, 2016년에는 성덕수련원이 운영을 종료하였고, 기존 수련원 건물은 교육연구시설 내 성덕도교육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2017년에는 옥양지(玉良智) 홍광연(洪光連)선생이 제5세 성도사로 선출되어 성덕도 대표에 취임하였다.

3. 특징[편집]

여느 종교처럼 신앙하는 특별한 주체가 없고, 자기 자신의 본성을 믿고 수양하는 종교이다. 
또한 성덕도는 유(儒), 불(拂), 선(仙) 삼합법에 따라 각각 성(聖)의 원리는 유(儒)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의 정신은 사람의 도리인 삼강오륜, 인의예지 실천을 중심하고, 
덕(德)의 원리는 불(佛)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의 정신은 인간의 무형인 심령을 맑혀 자성자불(自性自佛)을 찾음에 있으며, 
도 (道)의 이치는 선(仙)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의 의미는 미신을 타파하고 회개하여 선화개악(善化改惡)하는 정도(正道)이며 
나아가 교화 중생 활인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으로 자성반성(自性反省), 미신타파(迷信打破), 문맹퇴치(文盲退治), 도덕정신(道德精神)을 실천 덕목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덕도가 창시된 경상북도 지역은 동학이 창도된 곳으로 사실상 한국의 여러 신흥 종교의 발상지이며, 종교적인 열정이 강해 한 때 10 계통에 34개 단체가 분포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진출을 위한 교단 이전과 교파간의 이합집산 등으로 여러 단체들이 지역을 떠나게 되면서 현재는 이 중 18개[8]의 단체만이 남아있다.

증산교 계통의 삼덕교, 순천도, 청우일신회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 중 하나이며 성덕도라는 종교가 있는지를 모르는 분들도 많다. 더구나 성덕도는 대구경북 지역이 뿌리인 향토 종교이지만 그 뿌리인 대구경북 지역에서조차 이러한 종교가 있는 지를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9]

4. 관련 문서[편집]

[1] 출처: 성덕도 공식 홈페이지 » 성덕도의 취지[2] 2017년 11월 19일 취임 관련 연혁 참고.[3] 구 평천리 산 1번지[4] 원래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201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5] 현 문화체육관광부[6] 현재는 운영이 중단된 상태이다.[7] 현재는 성덕도 교단과는 별개로 운영되고 있다.[8] 대구광역시 10개, 경상북도 8개[9] 실제로 우리나라는 수도권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발전이 되면서 종교를 비롯한 수 많은 문화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널리 알려지고 잘 나가는 종교가 드물다고 할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4대 종교로 인정받고 있는 원불교를 제외하면 그나마 관광객이 많은 감천문화마을 덕분에 알려진 부산지역의 향토 종교인 태극도, 대전지역에 본부가 있는 동학 계통의 수운교, 그 밖에 금정산 자락의 산성마을[10]에 위치한 유법사를 모태로 하는 대일체불교(大一體佛敎), 조계종 출신 스님이 주지스님이지만 자체적 종파인 만불회를 비롯한 일부 자체적 불교 종파들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향토 종교는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11][10]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일대[11] 더구나. 현재는 각각의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향토기업마저 대기업의 진출 범위 확대로 사라지는(예: 대형 유통업체의 지방 진출 확대로 향토 유통업체들이 폐업하는 등으로) 시대라고 할 수 있어 향토 종교의 경우 향토 기업보다 더욱 더 교세가 약화되는 종교가 대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아주 특별한 경우(그 종교가 현실의 문제점들의 해결에 꼭 필요한 경우 등)가 아니면 TV나 라디오 광고, 거리 홍보 등으로 그 종교의 좋은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신도 수가 늘거나, 교단 재정이 좋아지거나, 그 종교가 대중적인 종교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성덕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덕도(聖德道)는 대한민국의 신흥 민족 종교이다.

역사[편집]

성덕도의 창도[편집]

성덕도(聖德道)는 1952년(壬辰年) 도주(道主) 월근(月根) 김옥재(金沃載) 선생님과 법주(法主) 법해(法海) 도학수(都鶴姝) 선생님께서 민심을 순화(醇化)하며 세도(世道)를 바로잡고, 인류의 지상목표(至上目標)인 자유롭고 평화로운 도덕사회(道德社會)의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창도하신 종교이다.

천지(天地)는 말씀은 없으시나 큰 은혜와 덕으로써 만물을 한 품에 품어 길러주시니, 인간이 대자연의 순환법칙(循環法則) 청정법도(淸靜法度)에 순응(順應)함이 곧 천지도리(天地道理)를 행하는 길이므로, 원형의정 천도지법(元亨義貞 天道之法)을 인의예지 인성지강(仁義禮智 人性之綱)으로 밝혀주시어 사람으로 행할 근본인 삼강오륜 인의예지(三綱五倫 仁義禮智) 도덕을 실천하고, 자성반성(自性反省)으로 인간 악성(惡性)을 고쳐 사람의 천성(天性)인 선령(善靈)을 찾음으로써 인간고애(人間苦埃)에서 벗어나 지상낙원(地上樂園)에서 영원영복(永遠永福)을 누릴 수 있는 대도(大道)를 펴신 것이다.

성덕도의 취지[편집]

성스러운 덕화의 길을 본받아서 인생의 근본인 삼강오륜을 실천하고 마음을 닦아 천성선령(天性善靈)인 자성자불(自性自佛)을 찾고 자성반성으로 회개천선(悔改遷善)하여 대중과 교화화친(敎化和親)하는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자성반성(自性反省), 미신타파(迷信打破), 문맹퇴치(文盲退治), 도덕정신(道德精神)을 실천 덕목으로 삼고 청심주(淸心呪)인 무량청정정방심(無量淸靜正方心)을 독송하여 내 마음을 맑혀 영심을 찾아 자아완성에 정진하며 교화중생(敎化衆生) 활인(活人)함으로써 상생상화(相生相和)의 도덕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성덕도의 창도 배경[편집]

성덕도가 창도된 1952년 전후(戰後) 인류 세계는 인종차별과 사상대립으로 인한 끊임없는 전쟁의 발발로 대량 살상무기가 동원되어 그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생명이 희생 되었다. 사람들은 질병, 빈곤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불신, 이기심, 무절제한 문물과 사조로 야기된 가치관 혼란으로 사회 기강과 도덕심 해이가 만연된 상황이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내환과 외세로 인하여 시작된 격변의 시대를 겪고 나서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고 인심을 순화코자 구세제민의 뜻을 둔 창도주 두 분의 득도의 과정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간고를 만사상(萬事嘗)하시고 이심물문리(以心物文理)로 철(哲)하시니, 우주 대자연의 이치가 오직 사람의 지각 중심에 있음으로 본성인 청정심(淸靜心)을 찾아 자신과 사해동포와 삼라만상이 도덕으로 하나가 되기를 염원했다. 인류가 화목으로 융합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인류사회는 도덕문명을 진보시켜야 물질문화가 발달되고 풍부할 것이며, 물질문화를 앞세우면 도덕문화가 퇴보된다고 하시며 철저한 도덕적 가치관을 정립했다. 과거 물질문명을 앞세우던 시대를 벗어나 이때는 도덕문명 지각으로써 내 할 일 내가 하면 빈곤하지 않고 화목도의로써 다 잘 살 수 있는 도를 펴 놓으신 것이다.


외부 링크[편집]

http://www.seongdeokdo.org/성덕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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