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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4

Namgok Lee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못해도) 마음에 부자유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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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tgSphoSnsosread  ·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논어 첫 편 첫 장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못해도) 마음에 부자유가 없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대강 그런 뜻일 것이다.
 그 책의 편집이야 제자들이 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 말이 첫 장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공자가 그만큼 스스로도 벗어나기 쉽지 않은 테마였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공자가 한참 활동할 때, 많은 제자들이 함께 했지만, 안회(顔回) 정도가 지기(知己)로 표현되는 그의 지적 정신적 외로움이 논어 곳곳에 나타나곤 한다.

사후(死後)에 유학 또는 유교라는 큰 흐름이 조성되었지만, 그것은 공자의 사상이나 뜻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어서 판타지 드라마에서 보듯 그가 어디선가 살아있다면 그의 외로움은 여전할 것이다.

이 말의 앞에는 잘 알려진 두 문구(文句)가 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學)과 습(習)이 기쁜 것이다.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해야 맛볼 수 있는 것이 이 기쁨이다.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과의 사귐, 지기와의 교류가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다음에
 ‘인부지이불온’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 나에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그 기쁨과 즐거움에 어둡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뿌리 깊은 함정을 경계하는 심정이다.
진정한 자립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사이의 틈이다.

특히 사상 이론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이 있다.

어떤 틀로 단정하거나 고정하는 것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게 모르게 자신의 다른  틀로 단정하고 고정하며 재단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인류는 저 축(軸)의 시대의 선각자들의 깨달음에 아직도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 깨달음의 바탕은 나에게는 하나로 보인다.

 어떤 틀로 고정해서 종교 내지는 학파로 되어 서로 공격 비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선각자들의 깨달음과 실천으로부터 어긋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알게 모르게 어떤 공감대 (특히 무엇에 반대하는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 쉽다)를 형성하고 서로를 알아주는 패거리 속에서 안주하려는 함정을 경계하는 말로 들린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은 어떤 틀로 고정되기가 정말로 쉽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제 문득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틀로 다른 틀(사실은 틀이 아닐지도 모르는)을 비난하는 것을 읽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돌아보는 새벽 단상이다.

2021/04/04

홍진표의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 시대에 돌아보는 서양 근대철학,

Namgok Lee
43 m ·



홍진표의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 시대에 돌아보는 서양 근대철학,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를 일독(一讀)했다.

요즘 집중력이 떨어져 1주일 정도에 읽을 생각이었는데, 3일 만에 읽었다.
교양 수준에서 철학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에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말이 ‘철학 공부 굳이 하지 말라’ 였다.

서양 근대철학의 중심 과제들이었던 경험론과 합리론, 관념론과 실재론,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과 복잡한 뒤섞임 등에 대해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는 식으로 여러 사상 이론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이 함께 다룬 영역들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철학의 물음을 과학이 답하는’ 방식으로, 지금 시대의 사람이라면 그 이름도 유명한 철학자들(데카르트,로크, 흄, 칸트,스피노자, 헤겔, 마르크스 등)의 이론이나 사상을 머리 아프게 ‘굳이 공부하지 말라’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하지 않아도 좋으려면 이 책을 한번 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교양 수준이라고 말은 했지만, 부록에 그가 참조한 책만 해도 65권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집중한 노고에 편승하여 쉽게 ‘굳이 어렵게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과학(자연과학에서 점차 심리과학까지 확장)과 철학과 종교가 함께 섞인 테마들에 대해서, 많은 신비(神祕)들이 과학의 발전으로 베일을 벗었다.
그러나 과학이 벗긴 베일은 광대한 우주에서 보면 아직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해진 것은 이제 과학이라는 창구(窓口)를 거쳐야 우주 자연 인간의 신비에 옳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머릿글에서 이야기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철학은 ‘주로 서양 철학을 말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을 제외한 철학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운동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의 삶이 물질적 결핍, 사회 제도의 억압, 인간의 특징인 관념 안에 존재하는 부자유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런 취지와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 철학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한다면, 도덕이라는 말이 갖는 규범적 강제성이나 의무성을 넘어서는 것이 과제라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축의 시대에 출현한 인간 정신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열어간 세계는 근대 철학이 부딪친 함정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전히 또 앞으로도 AI 시대에도 우리들이 석가나 공자 예수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다.
미래의 종교는 아마도 우주 진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관념계에 내재하는 부자유로부터 해방을 돕는 역할이 그 존재 의의가 될 것이다.
요즘은 인류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 사태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되어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명전환은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현재의 정치 사회 경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과도기적 혼돈을 넘어서야 하는 것은 살아남아 번영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로 되고 있다.

586세대에 속하고 특히 정치 분야에서 활동해온 저자가 철학 공부를 집중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정치운동을 위해서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평소부터 우리 정치 운동이 인문운동과 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자의 이런 노력이 그런 방향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아무쪼록 퇴영적이고 비생산적인 편가름의 정치, 낡아서 쓸모없게된 관념이나 정서가 발목을 잡는 정치에서 벗어나 문명전환의 새로운 정치, 상생과 연합의 정치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의 맨 끝에 쓴 내용이다.
“AI 시대를 전망하면서 인류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하는 철학을 기대한다. 인류의 진로와 시대정신에 관한 논의는 개별과학의 범위를 벗어난 마지막 남은 철학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AI와 관련해서 바둑을 예로 들었다.
사람은 AI에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둑에 대한 흥미를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둑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AI와 인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어쩌면 바둑이 실생활에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바둑을 즐겨 보는 편이다.
언제 홍 선생과 수담(手談)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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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시대에 돌아보는 서양근대철학,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

책소개

철학비전공자인 저자가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괄한 책이다. 책은 철학계의 성역에 과감히 도전한다. 과학의 발전 속에서 철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가감 없이 논하며 일부 철학의 무용론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전문가들은 기존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거장들의 철학에 대해 ‘가치가 없다’는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목차
프롤로그

1. 기원을 찾아서-철학과 근대문명
1.1. 철학이란 무엇인가?
1.2. 철학의 시작
1.3. 철학의 가치와 난해함
1.4. 근대문명과 근대사상

2. 한 발은 중세, 한 발은 근대-데카르트
2.1. 고대의 유산에서 과학의 근대로
2.2. 데카르트 자연관의 한계
2.3. 영혼, 신, 코키토
2.4. 데카르트는 근대인이었나

3. ‘마음’은 없다-정신, 감각, 뇌
3.1. 마음은 어디에?
3.2. 보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3.3.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정신과 감각

4.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나-경험론 대 합리론
4.1. 근대이전의 인식론
4.2. 근대적 인식론의 전개
4.3. 합리론과 경험론의 쟁점

5.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칸트
5.1. 인식론의 종합 시도
5.2. 칸트의 도덕철학

6. 세계는 실재하는가-물질과 정신
6.1. 관념론 대 실재론
6.2. 유물론의 등장

7. 관념론의 극단-스피노자, 헤겔
7.1. 두 얼굴의 스피노자
7.2. 관념론의 완성자 헤겔

8. 유물론의 반격-마르크스주의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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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 책에서는 근대철학의 쟁점들에 대해 현재 시점의 지식수준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평가들을 제시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과거에 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철학이 아니라 역사공부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때 그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이 오늘날 어떤 ‘지식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데 중점을 둘 것이다. 한편 검증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모호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우선 오히려 철학전문가들은 이런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철학 거장들의 이론이 가치가 없다는 수준의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려울 것이다. 유튜브의 <플라톤 아카데미>채널에서 한국의 칸트 권위자인 두 명의 철학교수가 놀랍게도 일반인들에게 <순수이성비판> 읽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체 물리학자가 일반인에게 오래전 폐기된 천동설의 경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읽어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강단의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과학적 기준에 따른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자기부정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유튜브에는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이라는 채널이 있다. 여기에 김상환 철학교수의 ‘왜 칸트인가’의 철학 강의와, 최영기 수학교수의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의 수학강의가 있는데 뚜렷하고 흥미로운 대비가 된다. 
김교수는 칸트의 철학을 소개하는데 주력하는데 개념어의 난무와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과연 이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의가 그렇듯이 이 강의도 칸트 철학이 지금 우리의 지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반면 최교수는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유클리드기하학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칸트 추종자들의 공격을 의식하여 그 발표를 유보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가 보편적 진리라고 전제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으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은 칸트철학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례는 우리가 칸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어떤 방법이 더 좋은지 잘 알려주고 있다.

-서문중에서  접기

근대철학의 내용 대부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기준에서 보면 조잡하거나 심지어 터무니없다. 근대철학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때’를 기준으로 그 생각이 과거보다 진일보한 면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비전문가들에게는 현재 학문의 기준으로 ‘여전히 유효한’ 내용이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근대철학의 가치 평가는 오늘의 기준에서 그들의 생각의 ‘가치’를 알려는 실용적 요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정 철학자를 숭배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론 가운데 여전히 믿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현대의 우리가 가져야 할 합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당시 그들이 왜 알지 못했는지 비웃거나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가졌던 의문에 대해 과학이 어떤 답을 내렸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접기

데카르트는 인류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지적 자산을 축적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길을 잘못 들었다. 특히 신에 의존한 인식론의 전개를 보면, 데카르트는 아직까지 중세에 머물러 있거나 잘 봐줘야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에 위치했다고 보인다. 데카르트의 과오는 다행히 뉴턴과 로크 등에 의해 빨리 교정될 수 있었다.

인간의 감각기관에 대한 불신이 관념론의 시초로 보인다. 착시와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면서 인간에게 보이는 것들은 허상이고 우리의 관념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발상에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외부에 실재하는 것 같은 세계가 실은 우리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현실의 공포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우리 눈앞의 모습이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 것이다. 이때 꿈이 이런 사고에 빠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것 같다. 과학시대 이전에 꿈은 모든 문명권에서 예외 없이 사람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나오는 꿈은 영생하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주었고 미래를 알려주는 신비한 기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지금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혹시 꿈일지 모른다는 회의를 했고, 장자는 유명한 ‘나비의 꿈’에서 유사한 의심을 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관념이듯이 현실세계도 관념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이다. 버클리 또한 ‘대화’에서 필로누스의 입을 빌려 꿈에서는 외부대상이 없이도 지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관념론의 근거로 들고 있다.  접기

헤겔의 이성은 더 이상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창조자가 된다. 정신자체가 운동을 하고 세계를 창조한다는 망상의 단계로 나가버린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사실이나 논리의 영역을 모두 벗어나 종교와 유사한 믿음의 영역에 놓여있다. 포퍼는 진리탐구에서 단순성과 명백함의 추구는 지성인의 의무이며 명증성의 결여는 죄악이며 과장은 범죄라고 규정했다. 헤겔은 그 반과학적 성격을 볼 때 근대에 속하지 않는다. 헤겔은 정신의 운동으로 세계의 원리를 설명해내겠다는 과욕을 부렸고 결국 실패하였다. 플라톤 이래로 근본원리를 발견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망에 빠진 철학자들 중 헤겔은 관념론의 계보로는 최후의 사람으로 보인다.

AI가 등장하면서 정신은 물질 중에서도 유기체에서만 파생될 수 있다는 논리도 수정되어야 한다. 유기체가 아닌 컴퓨터도 물질을 잘 결합시키고 전기라는 에너지를 공급하면 유기체의 뇌에서만 가능했던 정보의 수집과 전달, 연산이라는 지적활동을 할 수 있다. 특히 AI는 학습과 판단이라는 창조활동의 단계로 나가고 있다. 지능은 정신활동의 핵심이라서 무생물도 정신활동이 가능하다는 예상은 이제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AI시대에는 정신을 신비화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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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홍진표 (지은이) 

1963년생으로 광주 인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정치학과를 중퇴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부장,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사상이론지 <시대정신> 편집인을 지냈다. 현재 사)시대정신 상임이사로 있다.
최근작 :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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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철학비전공자인 저자가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괄한 책이다. 책은 철학계의 성역에 과감히 도전한다. 과학의 발전 속에서 철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가감 없이 논하며 일부 철학의 무용론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전문가들은 기존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거장들의 철학에 대해 ‘가치가 없다’는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책은 고대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등 주요한 문제의식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단락된다고 보고,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서양철학사의 핵심을 간추려서 제공하는데 주력한다.

2021/03/26

Namgok Lee ‘우사정(우리사회정의)’ 도대체 정의가 무엇입니까 협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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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3nti FeiSlbrpguoaonrcnsioolyig 2rl0edf19oeo  · 
어제 ‘우사정(우리사회정의)’ 모임에 다녀왔다.
이 모임은 “요즘 모두 정의, 정의하는데 도대체 정의가 무엇입니까?”
“요즘처럼 주구장창 정의를 외치는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포악한가?”라는 물음을 가진 사람들이 작년 2월부터 시작한 모임이다.
나도 도법 스님과 조성택 교수와의 인연으로 이 모임에 참가하였다.

어제는 함돈균 교수의 발제가 있었고,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이 있었다.
내가 공자의 말을 논어에서 자주 인용하다보니까 나를 ‘유학자’로 소개해서 그 소개는 빼달라고  했다.

나는 인문운동가로서 다만 공자의 시대를 넘어 들리는 지혜를 소개할 뿐, 유학을 비롯한 동양 고전들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고, 60이 넘어 논어와 공자를 접하면서 크게 감동한 것에 불과하다.

어제도 ‘정의’와 관련하여 공자의 말을 소개했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린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함이 없이 출발한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좇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다.

‘이것이 정의’라고 자기 생각을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이것이 정의’라고 단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이나 시세영합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인간 의식의 진화가 필요하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이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사회의 정체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지향해야할 목표의 하나가 '협치국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인문적 토대를 위해 미미하나마 역할을 하는 것이 인문운동가의 길이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들이다.
어제를 돌아보며, 아침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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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재경
선생님.
감사합니다.
 · Reply · 2 y
김경일
정의란 이미 틀지워 진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안이 생겼을 때
원래 없는 텅빈 양심에 의지하여 일의 형세를 두루 보고 판단한 생각같은 거 아닐까요?
정의를 실체화하면 꼭 이단논쟁이 일어남을 봅니다.
 · Reply · 2 y · Edited
박재명
김경일 고정된 것을 넘어서 오늘 지금 시대에 가장 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 Reply · 2 y · Edited
김경일
박재명 감사합니다
다만
범부는 텅빈 양심이 가려있어서 최적의 대안을 내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냈다해도 다시 그것에 갇힌다면
성인은 텅빈 양심에 바탕해서 사태를 파악하므로 최적의 방안을 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묶이지도 않는 것이 다른 듯 합니다
 · Reply · 2 y · Edited
박재명
김경일 최적의 길이라고 생각해도 살피고 논의하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봐도 될 듯합니다만...
 · Reply · 2 y · Edited
김경일
동감입니다
 · Reply · 2 y

조성택 교수의 “소통적 정의(Communicative Justice), 화쟁” 한국의 원죄(原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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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fStS23 epitMaorhcha 2dnsuhu019osroedf  · 
어제 서울 ‘정의 연구모임’에 다녀 왔다.
새벽 5시 집을 나서 집에 돌아온 시간이 오후 5시였다.
역시 나에겐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가는 것은 벗님들과의 만남과 정의 연찬에 대한 끌림이 있어서다.

어제는 조성택 교수의 “소통적 정의(Communicative Justice), 화쟁”이라는 주제의 발제에 이어 연찬이 이루어졌다.
잘 정리된 발제였고, 나는 거의 동감하였다.
나는 내가 발견한 논어의 공자와 통하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본격적 발제에 앞서 조 교수는 혁명의 시간이 있고, 변혁의 시간이 있는데 지금은 혁명(revolution)의 시기라기보다 변혁(transformation)의 시간이라는 말을 했다.

혁명이 변혁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결국 모든 혁명이 배반되는 역사의 경험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의 경우를 잘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연찬 중에 여러 생각들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특히 원효의 개시개비(皆是皆非)의 화쟁이 악한 세력의 자기합리화로 이용될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대단히 지금의 현실에서 중요한 연찬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 말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우리 현실이 어려운 원죄(原罪)로 
  • ‘일제의 지배’ 
  • ‘한국전쟁’ 
  • ‘독재’의 세 가지를 이야기한데 대해 

중앙일보 양선희 선생의 지적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그 세 가지 이전에 ‘조선조 500년을 지배한 유교(성리학)의 폐단’이 보다 더 원죄(原罪)가 아닌가 하는 취지였다.
나라를 넘겨주고, 동족 간의 전쟁을 하게 만든 그 원죄(原罪)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반성시키거나 참회하게 할 수는 없다.
반성은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

조 교수의 발제문 마지막 문장이다.
“정의로운 싸움을 위해서는 늠름한 적(敵)을 선택해야 하고 적을 늠름하게 대해야 한다”
싸울 때는 적을 잘 골라야 한다는 취지다. 싸우면서 적과 닮아가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다.
내가 덧붙였다.
“지금은 늠름한 적(敵)을 발견하기 힘들다. 내가 먼저 늠름하게 되어, 늠름한 적(敵)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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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최선영
선생님, 원죄의 맥락에서 일제의 지배라는 (일반적인) 표현대신에 '조선의 식민지화'라고 대체하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럽게 여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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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최선영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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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수정
어제 마을활동가 교육에서 "storytelling"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storytelling"의 예로 어느 회사 광고와 광고를 만드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봤습니다.
저는 그 광고를 보는 동안 가슴과 머리가 따로였습니다.
광고의 소재가 아기의탄생여서 가슴 찡함이 있었지만 머리로는 광고의 목적이 돈이라는 생각에 동영상을 보는 동안 농촌마을활동가교육에는 적합하지 않은 동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고, storytelling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라고는 하지만 저는 마을 활동을 하면서 기업적 허구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마을활동에는 사실을 바탕으로한 진실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교육이 끝나고 동료들과 얘기 나누는 자리에서 저의 의견을 말했는데 다른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의 다른 의견을 듣는 동안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문제는 동영상이 아니라 대화에 임하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말로는 의견이라고 했지만 의견으로 포장한 주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연찬'이라는게 있었지~~
'연찬'일상의 대화방식으로 해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아침에 무거운 물음일까봐 조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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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엄수정 솔직한 말이 좋습니다.
주장도 당연히 해야지요.
다만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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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수정
이남곡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자각을 빠트렸습니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명쾌한 답 감사합니다~💐

Namgok Lee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조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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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분노'에 대해 더 연구를 집중해 보시겠다는 고려대 조성택 교수가 던진 일종의 화두.
분노(화)라는 같은 말을 써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8년간 생활했던 무소유사회(야마기시즘) 특강의 목표 첫번째가 '어떤 경우에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였다.
나도 진행을 해 보았지만, 가장 중심적인 테마고, 가장 오래하는 테마고, 어려운 테마였다.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이 '어떤 경우에도'였다.
그 가운데도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가장 많았다.
조 교수의 연구에 기대가 많이 된다.
나도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만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분노가 불의한 사회를 무너뜨리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만,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데는 동력으로 되지 못한다는 것에 유념하고 싶다.
한가지만 더 말한다면,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를 참으면 '화병'에 걸리기 쉽다.
그 보다는 '적정'하게 화를 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일시적 '분노'가 아니라, 지속되는 '사랑'이다.
You, 박정미, 강길모 and 1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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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가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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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저는 요즘 바로 그 적정성이 화두입니다. 적정성이란 무엇인가. 역동적 균형, 중용이라는 것, 군자이시중이란 것, 적정시민, 적정기업, 적정사회란 어떻게 가능한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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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핍으로서 투쟁과 충만으로서 투쟁의 차이, 열등감으로서 분노와 자존감으로서 분노의 차이 등등을 바탕에 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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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건준
       부당한 걸 보고 분노(화)가 일어난 마음의 상태와 불의나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마음의 상태는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정의감은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사랑은 함께 할 수 있는가?
      자녀가 잘 못할 때, 화를 내는 것과 심하게 나무라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등등 검토해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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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곡
       그렇군요. 저두 노동현장을 뛰면서 오래 고민했던 건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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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화)의 적정성 ᆢ화는 나쁜 감정인가. 화도 중요한 감정자산의 하나인가?
    화는 참아야 하는가? 화를 적절히 부려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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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하고 일상적인 큰 테마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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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걷잡을 수 없음'이라는 의미를 다분히 담고 있는 말이라서...
    '분노'라는 '감정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이 이후에 벌어지는 '스스로도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흐름과 그로인한 판단의 error 발생'..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는 이미 '분노'라고 정의하기에는 좀 적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표출방법의 적정성(제어가능)과 사회윤리적 정당성'이...
    담보 된 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아무 문제가 없지않나 싶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저..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의사표시 정도인 셈이죠..
    대상이나 내용에 따라서
    '분노'라는 감정이 적정하거나 정당성을 담보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노'일뿐이죠..
    제가 조성택 교수님의 문제의식이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표현방식의 성숙성이 목표달성의 합법칙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사회윤리적양심과
    역사적 합법칙성(시대정신?)에 맞다고 하더라도 '분노'라는 감정은.. 정당화..되거나..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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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충근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쓰다보니 글이 좀 거칠고 두서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우는 것도 실례인 듯 하구요....ㅠㅜ
      꺼내놓고 싶었던 말은...
      적정하다거나...
      정당하다고...
      이야기 될 수 있는 '분노 또는 분노의 결말(?)'이라는 것이
      있기는 어렵겠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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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그저 화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좀 깊이있게 서로 통해가기란 쉽지않은 상태라고 느껴져서.
    그저 그 본질적인것
    언제 어느것 누구에라도 들어맞는 것을 찿아갈 수있는 상태란? 하고 생각해봤을때.
    화가 나는 또는 화가
    날 수 상태에서는
    정상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개해 갈 수없지않을까요?
    촛불혁명에서 확인했듯이 유리창하나 깨지않고도 나라의 정치의 건강을 회복하려고 해 봤듯이요
    스위스에서 살때 유럽인들은 크게
    받아들이던군요
    세계에 수출할 수있는
    큰 보물이 될듯해요
    나의 앞사람이 여럿을
    해치는걸보고 조금도
    화가나지않은상태에서
    그피해가 않되도록
    스톱시키거나 쳐부수거나했을때 그당사자가 전혀 화가나지않은 상태에서도 두려움없이
    할수있겠다는 심경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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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 분노 그렇지만 그에 집착하지 않음.. 이론상 그렇다고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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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하라 스테판에셀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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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스스로 화 나고 싶을 때 화를 내고, 거두고 싶을 때 거둘 수 있는 것도 좋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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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용에
    희로애락지미발을 中이라하고
    발이개중절을 和라고 하였습니다.
    분노가 일기전 고요함에서 경계를 당하면 분노가 일 때 온전함을 잃지않고 정황을 잘 생각하여 분노를 그 상황에 맞게 행하는 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말이 아니라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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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황에 따라 참을수도 있고 버럭 화를 내서 대의를 세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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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어려운 부분이네요.
    어제도 버럭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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