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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5

알라딘: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이도흠 2000

알라딘: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2000-12-13

양장본355쪽

알라딘: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알라딘: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인류의 위기에 대한  | 뉴아카이브 총서 

이도흠 (지은이)자음과모음2015-12-27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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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840쪽145*225mm1150gISBN : 978895443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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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뉴아카이브 총서. 거리의 인문학자 이도흠이 동서양의 차이를 하나로 아우르는 원효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마르크스를 가로지르며 우울한 이 시대의 한복판에 거침없는 직언을 던진다. 자본주의에 물든 '지금, 여기'에 대한 통렬한 시대진단이자 인간다운 삶, 진정한 공동체적 사회를 모색하는 한 사람의 도저한 사유와 글쓰기, 치열한 투쟁의 흔적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고, 이 자본주의의 병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 이론에서 일어난 각각의 문제를 서로의 장점으로 아우르고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인간다운 삶의 구현이 가능하며, 이에 대한 방편으로 원효와 마르크스라는 두 사상가를 과감히 마주 앉히고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총 10장에 걸쳐서 마르크스와 원효를 중심으로 서양의 사상과 이론을 불교와 결합해 인류사회의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의 길을 종합한다. 원효의 화쟁 사상과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여러 사상과 이론을 망라.진단.분석한 다음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개인의 깨달음과 사회변혁을 변증법적인 동시에 대대적으로 종합해 대안을 모색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목차

추천사

머리글



서문

방법



1장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 사회생태론 대(對)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

-인류 공멸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서양의 생태론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과 한계

-씨는 죽어 열매를 낳는다

-깨달음과 세상의 변혁은 하나다



2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학살

: 폭력론·평화론 대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눈부처-차이론

-요한 갈퉁의 평화론과 그 너머

-마르크스의 폭력론과 그 너머

-집단학살의 원인과 동일성의 배제와 폭력

-변동어이의 눈부처-차이론



3장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 소외론 대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눈부처-주체론

-노동의 의미

-현대인의 소외의 양상

-68혁명의 빛과 그림자

-진속불이 통한 눈부처 주체의 공감과 연대



4장 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

: 세계혁명론 대 화쟁의 사회경제학과 눈부처-공동체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축적 방식

-신자유주의 모순의 양상

-개량적 대안에서 마르크스적 대안으로

-세계 체제의 혁신과 눈부처-공동체의 사회경제학



5장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 과학기술주의 비판 대 일심의 체용(體用)론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디스토피아

-신과학운동과 비판

-과학과 정신의 종합

-화쟁의 과학



6장 근대성의 위기

: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대 인언견언(因言遣言)론

-근대성의 모순

-중세성.근대성.탈근대성의 개념 차이

-언어와 진리는 만나지 못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과 대안



7장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 위기

: 변증법적 통일론 대 동아시아 화쟁체제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위기 상황

-한반도·동아시아 평화 체제를 향한 장애 및 대안

-일심이문의 화쟁과 동아시아 화쟁공동체

-변증법적 종합과 화쟁에 의한 7단계 통일 방안



8장 욕망의 과잉

: 욕망 이론 대 화쟁의 마음론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의 풍속도

-자본주의,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과 억압

-유식학과 유물론의 종합, 눈부처 마음

-욕망의 절제와 깨달음의 길



9장 정보화사회의 모순

: 디지털정치경제학 대 순이불순(順而不順)의 공유경제론

-디지털사회의 빛과 그늘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차이

-디지털사회경제학: 정보화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는 화쟁의 디지털사회



10장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

: 재현의 위기론 대 화엄의 현실론

-재현의 위기론의 타당성과 한계

-기호에 물질성을, 텍스트에 맥락을 부여하라

-역사·현실과 허구·환상 사이의 화쟁

-대안의 모색



맺음말



미주

참고한 필자의 논저

인명 색인

용어 색인



접기

책속에서

P. 102 화쟁적 합리성은 연기론에 입각하여 자신과 모든 타자가 영겁의 차이와 반복의 과정에 있음을 깨달아 자기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타자와 나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 나와 타자가 서로 작용하고 역동적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의지처(依支處)로 삼고 있음을 깨달아 그를 살려 나를 살리기 위하여, 내 안에 자연과 타자가 있고 자연과 타자 안에 내가 있음을 느끼고서 서로를 닮기 위하여, 내 앞의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비판하면서 자연과 생명과 소통하고 어울리는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한다.  접기

P. 173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이는 물론 그 형상이 부처의 모습과 닮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여기에 필자는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눈부처는 상대방을 만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눈을 마주치며 하나가 되고자 할 때만 보인다. 이는 내 모습 속에 숨어 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나보다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눈부처는 타인 안의 부처이자 내 안의 부처다.  접기

P. 254~255 공포에 맞서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진정으로 소외를 극복하려면, 대중은 눈부처-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눈부처-주체는 타자와 무한한 연관 속에서 차이와 가유(假有)로서 주체를 형성하는 자다. 그는 주체로서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를 추구함은 물론,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노동과 실천을 통해 이에 적응하거나 맞서면서 자기를 실현하고 수행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적극적 자유 또한 구현한다. 하지만 눈부처-주체는 이에 머물지 않고 동일성의 사유를 뛰어넘어 타자 속에서 불성을 발견하여 그를 부처로 만들고, 그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는 자다.  접기

P. 263 자본주의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착취에 기대어 끝없이 경쟁하면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는 거대한 괴물이다. 인간의 사물화와 계급 갈등, 소외, 대부분의 범죄의 근본 동인이면서도 이 체제가 유지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윤에 대한 열망이 개인의 차원에서는 열심히 일하게 하고 자본과 국가 차원에서는 기술개발, 성장과 발전에 투자하고 인력과 능력을 집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본들이 권력과 이윤을 독점하고 더 많은 이득을 얻는 방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대중 또한 돈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자신의 화폐와 부를 늘릴 수 있다는 환상에 취하여, 더 좋은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하여 타인과 다투듯 경쟁하여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온통 투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접기

P. 321 이제 진보는 디지털사회에 맞게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계급의식, 연대 정신과 동지애, 이타적 협력을 바탕으로 투쟁심과 따뜻하고 인간적 품성을 겸비한 진보로 거듭나야 하며, 종파주의를 극복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담대한 진보가 되어야 한다. 대다수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노동조합, 농민조직, 민중의 집, 협동조합, 인문교실, 대안학교를 하나로 아우르는 지역의 코뮌을 건설하고 진보지역네트워크를 구성하여야 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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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필자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충만한 인문학자이자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싸워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에 기반을 두고 대중의 눈부처-주체로의 등장과, 탐욕과 착취의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새로운 코뮌적 공동체로의 이행을 모색한다. 진보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성찰해보길 바라는 모든 분께 일독을 권한다. - 김세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 글묵(책)은 ‘말뜸’이다. 말을 하되 온몸으로 하는 말, 다시 말해 문제의 제기요, 해결이다. 이 글묵은 ‘길내(과학)’의 샘이다. 원효와 마르크스, 두 사상가를 마주 앉히되 둘이 걸치고 있는 모든 것, 사상과 이론뿐이랴, 권위와 명예, 품새까지 홀랑 벗겨 신자유주의의 폭학과 만행에 정면으로 부대끼게 했다. 이 글묵은 ‘한내’다. 일꾼들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이 모여서 큰 흘떼(강)를 일구는, 이 우주를 이르는.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 책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당면한 절실한 주제를 매우 성실하고 포괄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다. 학문이 현실 문제를 도외시하고 다만 순수한 이론적 탐색에 머물러 있을 것이란 편견을 송두리째 깨는 이론적 작업이 이 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글을 위한 글을 쓰지 않는다. 현장으로 달려가 아파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면서 이를 성찰하고 이론적 작업을 거쳐 글을 쓴다. 그의 글에는 부족함이 있을지언정 거짓이나 꾸밈은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은 믿을 수 있다. 나는 남김없이, 또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한다. 이제는 한계에 이른 이 시대를 넘어설 새로운 사유의 계기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신승환

정의와 평화를 향한 이도흠 교수의 신념과 열정은 금생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국문학자이며 불교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이론과 실천의 종합을 꾀하며 ‘거리의 인문학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인간이 한낱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환경재앙과 경제공황의 유령이 출몰하는 이 위기의 시대에 저자는 이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통해 한 줄기 푸른 희망의 바람을 풀어놓는다. - 박경준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불교학과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이도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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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민교협 상임의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기호학회 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재임 중. 지은 책으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이 있다.

수상 : 2016년 유심작품상

최근작 : <과학기술 글쓰기>,<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교사 인문학> … 총 28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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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NASA 과학자 아빠가 들려주는 우주생물학>,<스토리 답사 여행>,<각도와 비례를 알면 나도 마술사>등 총 1,319종

대표분야 : 청소년 소설 6위 (브랜드 지수 196,391점), 초등 한국사 13위 (브랜드 지수 21,446점), 학습법 20위 (브랜드 지수 7,926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거리의 인문학자 이도흠,

동서양의 차이를 하나로 아우르는 ‘원효’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마르크스’를 가로지르며

우울한 이 시대의 한복판에 거침없는 직언을 던지다!



★ 책 소개

자본주의에 물든 ‘지금, 여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시대진단, 새로운 대안의 패러다임



‘거리의 인문학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불리며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며 싸워온 한양대 국문학과 이도흠 교수. 그동안 4대강사업 반대운동, 희망버스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운동, 세월호 참사 등 한국 교수 가운데 집회와 투쟁 현장에 가장 많이 참여하며 한국 사회 변혁에 앞장서온 이도흠 교수가 오랜 세월간의 고민과 현장에서의 투쟁을 아로새긴 신간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모음, 뉴아카이브 총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물든 ‘지금, 여기’에 대한 통렬한 시대진단이자 인간다운 삶, 진정한 공동체적 사회를 모색하는 한 사람의 도저한 사유와 글쓰기, 치열한 투쟁의 흔적이다.

책의 부제인 ‘인류의 위기에 대한’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고, 이 자본주의의 병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 이론에서 일어난 각각의 문제를 서로의 장점으로 아우르고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인간다운 삶의 구현이 가능하며, 이에 대한 방편으로 원효와 마르크스라는 두 사상가를 과감히 마주 앉히고 대화를 시도한다. 일견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두 사상가의 대화를 저자가 시도한 까닭은,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서양 이론이 지닌 실체론과 이분법, 동일성의 문제를 불교의 연기론과 퍼지(fuzzy)식 논리, 차이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그릇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고, 관념론에 치우쳐 과학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불교의 문제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과 방법론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와 서양 이론을 통해 유심론과 유물론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통해 결국 저자는 ‘서로가 깊은 연관을 맺고서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조건이 되고 영향을 미치고 의지하며 서로를 만들어주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로서의 삶, ‘타인을 생성시키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기 안의 인간다운 본성을 형성하는 눈부처-주체’로서의 삶을 살기를 제안하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 자본주의의 해체는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그 믿음을 실제로 이루어가려는 노력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는 인류에게 닥친 전 지구적 위기를 더는 부정하거나 망각할 경우 희망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인류 및 한국 사회의 핵심 위기에 관한 10개의 주제를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과 학살’ ‘인간성의 상실과 외의 심화’ ‘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근대성의 위기’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 위기’ ‘욕망의 과잉’ ‘정보화사회의 모순’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원효의 화쟁 사상과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여러 사상과 이론을 망라.진단.분석한 다음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개인의 깨달음과 사회변혁을 변증법적인 동시에 대대적(對待的)으로 종합해 대안을 모색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다시금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진보란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을 것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고 우리 공동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삶의 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자본주의의 해체 없이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1장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사회생태론 대(對)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에서는 38퍼센트의 생물이 멸종 위기에 있는 환경위기의 실상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안인 서양의 생태론과 마르크스의 자연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전자에 우월권을 주는 서양의 폭력적 이분법의 패러다임에서는 홍수를 막기 위해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맞서서 댐을 쌓는 방식의 대안을 제시하며, 이는 물이 흐르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것을 막아 오염시킨다. 반면에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에서는 댐을 헐어버리고 강의 유역을 넓혀 실개천을 조성하고 숲을 만든다. 씨와 열매 각각은 공(空)하지만 씨가 자신을 죽여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신을 썩혀 씨를 생성하듯, 실제로 함양의 태수였던 최치원이 위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한 함양의 숲, 상림(上林)은 물이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가 물을 품어주는 방식으로 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맑게 흐르게 했다. 이처럼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에 따라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화쟁의 생태론을 펼치면서 마르크스를 생태론적으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를 종합한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한다.



2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학살: 폭력론 · 평화론 대(對)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눈부처-차이론」에서는 요한 갈퉁의 평화론과 마르크스의 폭력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폭력과 집단학살의 원인이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순전한 생각 없음’이나 스탠리 밀그램이 지적한 ‘상황과 권위에 대한 복종’만이 아니라 타자를 배제해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데서 비롯함을 밝힌다. 나아가 원효의 변동어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 찰나의 순간에도 나의 호흡으로 대기가 변하고 그 대기가 동시에 나와 타인의 몸으로 들어가서 몸을 변화시키듯, 인간 존재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조건이 되고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로서 눈부처-주체임을 제시하며 동일성으로 회귀하지 않는 눈부처-차이를 통한 공존의 철학,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 구조적 폭력의 제거를 통한 적극적 평화 등의 대안을 펼친다.



3장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소외론 대(對)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눈부처-주체론」에서는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물화와 소외의 원인과 양상을 분석하고 이의 대안이었던 마르크스의 노동이론, 혁명론과 68혁명의 사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진화생물학과 인류학, 인지과학을 종합해 인간이 이기와 이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타인에게서 빼앗아 소유하려는 동시에 거울신경체계(mirror neuron system)를 통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순적 존재임을 밝히고, 진속불이론을 재해석,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를 자유롭게 하는 순간에 진정으로 자유를 완성하는 개인들의 연합에 의한 코뮌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4장 「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 세계혁명론 대(對) 화쟁의 사회경제학과 눈부처-공동체론」에서는 1퍼센트가 전체 부의 20퍼센트를 독점하면서 불평등을 심화하고 민주주의마저 해체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마르크스는 물론 피케티와 스티글리츠 등의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거대 이윤의 원천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독점이기에 공정한 시장이나 윤리적 자본주의란 불가능한 유토피아다. M(자본)-C(상품 생산)-M'(잉여가치 착취를 통해 축적된 자본)에서 M-C축에서는 희망버스와 같은 노동거부로, C-M'축에서는 욕망의 자발적 절제에 의한 소비의 최소화로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실천이 필요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쉽지 않다. 불교의 노동관과 호혜적 교환에 바탕을 둔 화쟁의 사회경제학을 정립하고, 정과 한의 신명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두레 공동체를 계승하고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를 종합, 타자와 연대하면서 세계의 부조리와 불의에 저항하는 눈부처주체들이 공동생산하고 정의롭게 분배하면서 개인의 이기심도 충족하는 눈부처공동체를 지역 곳곳에 세우고 나아가 세계공화국을 건설한다.



5장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과학기술주의 비판 대(對) 일심(一心)의 체용(體用)론」에서는 미신과 주술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던 과학이 현대사회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을 비판함과 아울러 이의 대안이었던 신과학의 사이비성과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양자물리학과 진화생물학, 인류학을 바탕으로 우주의 창조와 생명의 진화, 인류의 형성에 신이 관여한 흔적이 없으며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히면서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계신 신의 의미를 따져보고, 과학과 정신을 종합한다. 원전마피아 등 과학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해체하고 과학의 윤리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진리가 작용과 운동을 통해 드러나면서 현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감추고, 현상이 다시 진리를 품는 작용과 현상과 진리 사이의 관계망을 밝히면서 석굴암처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엔트로피가 제로에 가까운 새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6장 「근대성의 위기: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대(對) 인언견언(因言遣言)론」에서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틀에서 중세성과 근대성, 탈근대성의 개념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고, 환경위기, 소외의 심화, 이성중심주의 등 근대성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이론의 오류와 한계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소쉬르, 퍼스 등의 기호학과 불교의 언어관을 비교하면서 언어의 공성(空性)에 대해 따져본 다음 마르크스와 원효를 종합해 ‘지금 여기에서’ 진리를 확정하고 이를 향해 실천하는 길, 텍스트와 기표에 맥락과 역사를 부여하고,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소통적인 합리성을 추구하고, 주체의 동일성의 폭력을 넘어서서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하면서도 타자와 상생하는 길을 모색한다. 예술적 차원에서는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반영상과 프리즘처럼 굴절하는 굴절상의 화쟁을 추구한다.



7장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 위기: 변증법적 통일론 대(對) 동아시아 화쟁체제론」에서는 먼저 통일의 장애와 극복책에 대해 따져본다. 남북 대결과 핵위기는 6자회담에서 핵과 평화협정을 맞바꾸어 한반도 평화 체제를 세우는 것으로, 점증하는 민족주의 및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문제는 각국이 동일성에서 화쟁의 공존공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권력의 비대칭과 미국의 개입 문제는 구조적 폭력을 해소하는 적극적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모순의 심화는 동아시아 시민과 서발턴(하위주체)의 연대를 바탕으로 화쟁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으로 극복한다. 남북한의 통일은 자주, 평화, 정의와 복지, 인권과 생명 중시, 민주주의의 대원칙 아래 7단계의 통일방안을 실천한다. 곧, ① 남북의 통일을 위한 최소 합의를 하고, ②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③ 남한과 북한 사이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며, ④ 남북한의 시민을 대표로 하는 ‘화쟁코리아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북에 자본주의 마을과 정당, 남에 공산주의 마을과 정당을 세워 서로 대대적으로 회통하는 화쟁 코리아를 건설하며, ⑤ 남북의 국가연합을 하고, ⑥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전환하고, ⑦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룩한다.



8장 「욕망의 과잉: 욕망이론 대(對) 화쟁의 마음론」에서는 프로이트와 라캉을 바탕으로 인간과 본능, 욕망, 욕동의 관계를 살피고, 마르크스와 들뢰즈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욕망의 흐름과 탐욕이 증대된 원인과 양상을 살핀다. 정신과 육체, 유심론과 유물론, 더 나아가 불교의 유식학과 마르크시즘, 정신분석학, 인지과학, 진화생물학을 한데 종합하여, 우주기원종자와 생명기원종자, 인류기원종자 등 여러 종자들과 기억인자들이 알라야식에서 마나스식, 전육식을 오고 가며 뇌의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통하여 발현하며 마음을 작동하는 원리를 밝힌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윤리적 당위일 뿐이고 인류학과 생물학을 종합하여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확대하려는 본능을 지향하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이자 사회를 형성하여 타자와 협력하면서 공존을 모색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에게 선의 종자만 발아하여 선의 꽃밭을 만들고 악의 종자는 발아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8가지-① 노동과 생산의 분배를 정의롭고 공평하게 관장하는 체제 ② 타자에 대한 공감, ③ 의미의 창조, ④ 사회 시스템과 제도, 문화 ⑤ 문화, 타자의 시선 및 행위, ⑥ 수행, ⑦ 공감협력 교육을 비롯한 집단학습, ⑧ 법과 규약-이다.



9장 「정보화사회의 모순: 디지털정치경제학 대(對) 순이불순(順而不順)의 공유경제론」에서는 정보화사회에 대해 정치, 경제, 사회문화영역으로 나누어 정보의 공유와 집단지성을 통한 민주화와 세계화 등 밝은 면과 정보격차, 혼란, 제국주의화, 전체주의화 등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통찰한다. 마르크스를 바탕으로 정보재의 가치 문제를 분석하고 디지털 지대는 등가교환이지만, 포털의 경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처럼 네티즌의 쏠림에 의하여 독점적 성격을 갖기에 부등가교환으로 전환하며, 초기에는 기술혁신에 의하여 초과이윤이 발생한 것이기에 평등교환이지만, 점차 이 부분은 희미해지고 네티즌의 접속에 의해 초과이윤이 발생하기에 불평등교환으로 전환함을 밝힌다. 아울러,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제로와 공유 경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는 순이불순의 원리와 집단지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잉여가치의 착취와 노동의 소외가 없는 화쟁의 공유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10장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 재현의 위기론 대(對) 화엄의 현실론」에서는 복사본이 원본을 대체하고 소설과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대중이 영화나 광고를 흉내내어 현실을 구성하고 가상성과 현실이 공존하고 이미지와 기표가 의미를 대체하는 디지털 사회의 재현의 위기론(the crisis of representation)의 타당성과 한계에 대하여 사회문화, 기호학, 철학, 예술의 영역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기호와 텍스트에 물질성과 맥락을 부여하고 권력의 해석지배에 저항하는 길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화엄사상을 매개로 현실과 환상, 역사와 현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화쟁을 이루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매트릭스적 실존 속에서 상상계, 상징계, 현실, 이데올로기 및 각종 환상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거짓과 허상을 밝혀내고 주체적인 현실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저자 이도흠은 이렇게 총 10장에 걸쳐서 마르크스와 원효를 중심으로 서양의 사상과 이론을 불교와 결합해 인류사회의 위기를 분석하고 「맺음말」에서 대안의 길을 종합한다. 이 작업을 통해 저자가 내린 결론은 크게 세 가지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고 자본주의의 해체 없이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앞으로 50년 안에 이윤율의 저하, 재생에너지, 집단 지성과 공유경제, 지역 공동체와 협동조합 등 새로운 흐름과 대중의 운동에 의해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가 들어설 것이다. 이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거듭남과 깨달음,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타자와 연대하여 그를 행복하게 하는 적극적 자유(for freedom)를 종합한 눈부처주체에 의한 화쟁의 세계 체제다.



★ 이 책의 특징과 장점

1. 새로운 패러다임과 구체적인 대안 제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포스트모던 철학을 넘어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도 마르크스와 서양의 이론을 적용,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2. 이질적인 마르크스와 불교의 종합

마르크스와 원효의 원전을 꼼꼼하게 해석해 인류와 한국 사회의 위기를 분석하고 종합한다. 저자는 개인의 변화와 세계의 변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초역사적이고 관념적인 불교에는 마르크스와 서양이론을 통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틀과 방법론, 역사성과 사회성을 결합한다. 그리고 마르크시즘에는 불교의 이분법과 실체론을 넘어선 중도와 연기의 패러다임을 입히고 일심을 지향하도록 한다.



3. 여러 학문의 융복합은 물론 최근의 세계 학계의 성과를 회통함

동양과 서양, 문학과 철학, 역사만이 아니라 진화생물학, 인류학, 인지과학, 양자물리학, 사회학 분야의 2014~2015년의 세계 학계의 최근의 성과를 수용해 하나로 회통하고 있다.



4.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통한 분석

진보진영의 논의가 대개 당위적이고 선언적인데, 국내외 연구소, 국제기구의 보고서와 국내외 신문에 실린 최근의 구체적인 통계와 수치,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한 후에 진단하고 평가하면서 대안을 제시한다.



5. 난해한 사상을 쉽게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하면서도 웅숭깊게 함

원효와 마르크스는 물론, 들뢰즈, 데리다, 라캉 등 난해한 사상과 이론을 장황하지 않은 범위에서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하며 자신의 생각을 담아 종합하고 있다.



6. 현장과 책상머리의 종합

인문학이 ‘지금, 여기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저자는 투쟁 현장과 책상을 오고 가며 직접 몸으로 겪은 현실과 이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이론을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종합했기에 현장성이 있으면서도 일반화하며 보편적 설득력을 담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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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다.

긍정의 기대는 크지 않다.

화쟁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멸망 이후를 대비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너무 단순한 생각 아닌가.

화쟁위원회가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에게 했던 짓으로 이 책의 허구는 드러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구매

마른하늘날벼락 2016-08-1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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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사랑방 - 심상 론(心相論)

사랑방 - 심상 론(心相論)



심상 론(心相論)

김길호



심상론(心相論)





관상 법(觀相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의 판단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심상은 무엇인가요? 심상은 마음을 쓰는 태도를 말합니다. 일찍이 관상학의 원조(元祖) 마의선생(麻衣先生)은 사람의 운명을 판단함에 있어 먼저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을 보기 전에 그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만상(萬相)이 불여심상(不如心相)」이기 때문입니다. 일만 가지의 상이 제아무리 좋아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상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곧 육체를 운전하는 주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석가도 화엄경에서 “일체가 유심조(一切有心造)”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모든 업(業)을 짓고 선악을 만들어 가는 주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행위에 대해 가장 많이 강조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형상(形相) 이전에 마음이 먼저 생겼으며 따라서 그 마음은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마음의 행위에 따라 미추(美醜)가 하나의 형상이 되어 외적(外的)인 상(相)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릇 인간에게 있어 밖으로 드러나는 고결한 인품과 천박한 인품 역시 모두 마음의 소산(所産)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잘 닦아서 심상을 좋게 쓰게 되면 그 행위가 음덕(陰德)이 되어 자연히 몸과 얼굴에 스미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드려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사람의 운명 역시 점차 행운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무형(無形)이므로 안에 숨어서 밖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형상만이 유형이므로 겉으로 나타날 뿐이지요.



분명히 사람의 형상은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상은 무형의 심경(心鏡)에 의해서 비춰지는 겉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드시 유형은 무형에 의해서 수시로 변화하는 상(相)인 까닭에 늘 수신(修身)과 공덕(功德) 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이란 자기의 심상에 의해서 골격과 기색(氣色), 수염과 머리카락, 눈썹과 피부, 눈빛(眼色)까지도 심덕(心德)의 유무에 따라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은 있으나 상이 없으면 형상은 밖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없어지면 형상도 자연히 마음 따라 멸(滅)해지는 셈이지요.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겉모습은 비록 짐승 같았으나 평소 심상을 잘 갈고 닦았기에 그 모두가 덕인(德人)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의 겉모습이 얼핏 보기엔 사람같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짐승보다 못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어 파렴치한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질고 착하지 못한 것의 모든 차이점은 이 겉모습(外樣)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사람의 마음하나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 과학자 ․ 수학자인 데카르트(R. Decartes 1596-1650)는 이 심상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는「남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얼굴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는 나쁜 마음은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남을 증오 하는 감정이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양의 동 서를 막론하고 마음이 아름다워야 좋은 얼굴을 갖는 것은 진리인 걳 같습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때의 있었던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흐린 날씨에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이었습니다.



서당의 훈장은 출타를 하고, 학동들은 좋아라하고 뛰어 놉니다. 그때 한 역술가(觀相家)가 비를 피하여 서당의 마루에 걸터앉습니다. 그 술객은 배운 것이 역술이라 학동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들의 관상을 보아줍니다.



「너는 장차 커서 관리가 되겠다. 너는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겠다. 너는 장사를 하되 크게 성공하여 거상(巨商)이 되겠다.」 등등, 그런데 유독 범증엄에게는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범증엄이 역술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장차커서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범증엄이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마찬 가지였습니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역술가는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걸어 들녘을 지나는데 들 가운데 성황당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황당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립니다. 궁금하여 성황당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성황당 안에는 어떤 어린 아이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저는 장차 커서 경세가(經世家)가 되여 치국안민(治國安民)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제가 장차 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차선책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라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단히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애처롭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죽기를 각오한 처절한 기도는 몇 시각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서당에서 관상을 보아주었던 범증엄 이라는 학동이었습니다. 역술가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하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학동을 불렀습니다.



“관상이 불여심상(觀相 不如心相)이라! 관상이 마음의 상만 못하다. 다시 말하면 심상이 불여용심(心相不如 庸心)인 것이다. 너의 마음의 상이 관상을 능가한다. 너는 앞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하 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가 바로 전국시대 때 유명한 재상 범증엄 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상이 심상만 같지 못하고, 심상이 덕 상만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덕 상도 바로 용심(庸心 : 用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용심이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바로 써야 덕 상도 만들고 심상도 만들며, 관상도 좋아지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잘 쓰는 공부! 마음을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그르지도 않게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우리 마음공부 잘 하여 좋은 상을 만들어 갑시다. 그것이 바로 심상 론일 것입니다.

마음 공부방 > 즉설문답 >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마음 공부방 > 즉설문답 >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작성일 : 12-05-24 21:00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33 

지금 삼학수행 11개 과목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삼학수행의 정기훈련법이 11가지로 나누어있다보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할지 길이 막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의 일상생활하기도 빠듯한데 거기에다 수행이라는 명목 하에 11개 과목을 하나하나 챙기려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예비교무 시절에는 주어진 시간에 시키는 것만을 따라하니 흉내는 내었지만 교도들을 교화하면서 그 바쁜 와중에 자신의 삶까지 스스로 돌보아야하니 정말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가자들이 그러할진대 재가교도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소태산 그 분께서 익산 총부에 주석하고 계실 때는 재가출가를 불문하고 여름 한철 겨울 한철 하선과 동선을 통하여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전통이 사라진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수행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습니다, 좌선이야 시간을 내서 하기는 한다지만 생활에 쫓기다보면 설교를 준비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냥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일과로 하루를 끝내고 맙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처해있으면서 치열하게 신앙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자니 시간과 정성이 부족하고 그러자고 앞으로 더 나아가자니 꽉 막힌 은산철벽에 갇혀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깨달음의 길을 포기하고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일상적인 삶과 생활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당연히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자신뿐만 아니라 원불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죠. 살긴 살아가는데 열정과 희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연히 교화가 정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교단의 현실이 됩니다. 교화자 스스로 구도자로서의 열정과 열망이 지극하다면 그는 생명에너지가 충만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그 열정과 열망은 당연히 그 자신을 넘어 주변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자신의 집 안에 갇혀 나올 수 없으니 그는 정체할 수밖에 없고 에너지는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교단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태산 그 분께서 이루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슴깊이 받아들이면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일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필연적인 과제입니다. 원기 100년 안에 그 기반이 닦이고 그 기반을 통하여 이웃과 사회로 전이되어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세워나가지 못한다면 소태산 그 분의 비전과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삼학 수행을 11개 과목으로 정리해놓고 그 방법들을 제시해놓았지만

실질적으로 삼학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고자하는 목적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바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것입니다!

집착심은 고통의 근원이며

스스로를 구속시켜나가는 원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난후

최초로 밝히신 가르침이 바로 집착을 벗어버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苦集滅道! (고집멸도)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그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팔정도를 닦아라!』



『세상은 無常한 것이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無常한 것이기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諸法無我 제법무아)

그를 깨닫지 못하고

그 무엇엔가 집착되어있으므로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음이니! (一切皆苦 일체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涅槃寂靜 열반적정)』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며 작업을 취사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마음을 맑히고 마음을 밝히며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궁극은, 불교적 세계가 표방하는 중생 구원의 실질적인 과제는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함을 비롯한 반야, 금강, 화엄, 법화의 세계는 바로 마음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집착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집착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리고 그 집착을 넘어서면 또 어떠한 세계가 전개되어지는지를 밝혀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마음공부의 표준, 즉 삼학 수행의 표준은 집착심을 어떻게 제거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좌선의 일미를 이야기하고 염불의 공덕을 자랑한다면 그가 하는 좌선과 염불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능력을 더 내세움으로서 그는 깨달음에 더 멀어지고 맙니다.



정신 수양, 즉 마음을 크게 쉼으로서 定을 기르고 빈 마음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정 간에 불리선법이 될 수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홀로 좌선하고 있을 때 - 그것도 적적성성한 선의 일미를 맛보고 있을 때를 기준으로 - 그리고 상대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마음의 청정함을 느끼고 희열에 차 있다가 경계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고 어두워지며 감정의 기폭에 휩쓸려 마음의 근원을 잃어버린다면 그의 수양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적적성성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혼란스러우면 앉아있어도 오히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는 것이 훨씬 편하지요. 그러니 수양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젖어 수십 년을 앉아있는다 해도 그는 마음의 한 자락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포기를 하고 말기도 합니다.

정신수양 즉 定을 함양하는 공부는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데 있습니다.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신 수양을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경계를 만나 요동을 치고 혼란스러운 것은 마음을 흔드는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無明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無明의 시원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홀연연기라 말합니다. 홀연히 그 어디에선가 집착을 부르는 그 어리석은 마음이 나타났다고 말이죠. 제가 위에 밝혀놓은 <마음의 원리> 장을 참조하시면 그 집착의 시원이 되는 無明이 어디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났는지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정신 수양의 요지는 바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시간이 나서 조용한 곳에 머물러 좌선을 할 때는 마음을 비움에 그 표준을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나는 無者 화두를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無는 없다는 無가 아니라 비워져있음을 마음의 눈으로 통찰해나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은 상대할 그 어떤 대상이 없기에 몸의 감각기관이 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며 육근이 쉬어짐으로 해서 마음의 비워져있음을 통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앉아 있다고 해서, 감각기관이 교류할 수 있는 그 대상 사라졌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마저 쉬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의 작용들로 인하여 잠재의식 안에 가두어져있던 대상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들은 몸이 쉼으로 해서 더욱 더 요동을 치기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심상을 일으켜내서는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바로 집중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죠. 그 집중의 방법이 호흡이 되었건 관찰이 되었건 화두가 되었건 관계없이 그 심상의 요란함을 지워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염불도 흩어지고 산란한 마음들을 묶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좌선과 염불을 11개 과목 중 정신 수양을 위한 과목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좌선은 앉아만 있다고 해서 더 깊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집착심이 얼마나 제거가 되었는가에 따라 좌선의 깊이도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집착심은 내려놓지도 못하면서 좌선의 일미를 맛보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좌선의 깊이는 그 집착심의 무게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런데 집착심은 혼자 있을 때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즉 어떤 대상을 통하여 그 집착심은 드러납니다. 몸과 마음이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마음의 파장이 일어납니다. 그 파장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고통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며 자신도 억제할 수 없이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를 깊이 관찰해보면 그 과정을 통하여 마음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처럼 마음의 실질적인 움직임들을 살펴나갈 수 있는 것이죠.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예전에 스님들이 홀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하다가 탁발을 하러 시장에 내려가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 깊은 마음의 흐름들을 깨닫기 위해섭니다. 똑 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자신이 대하고 있는 관계와 그 일들과 그 상황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들을 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 집착심을 제거해야한다는 그 강력한 목적성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러한 기회는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실질적인 것은 집착심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들을 통해서 그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면 그는 언젠가 자신에게 드러났던 그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 간 불리선법인 무시선 무처선은 매우 훌륭한 소태산 그 분의 마음 훈련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일일시시로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와 일과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고 그를 통하여 집착심을 제거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생활선이자 정신수양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정좌하여 마음을 비우고 마음의 근원성을 통찰하며 마음이 일을 당해서는 마음의 작용과 그 흐름들을 인식하고 마음의 본질, 즉 그 허상을 통찰해나아가라!

이것이 바로 정신 수양의 요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연구의 목적은 집착심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깊이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을 넘어서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사랑에 눈이 먼 사람들은 오직 그녀 그이만이 관심의 대상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그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일과 사물의 이치나 세상사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죠. 집착하는 대상에만 관심을 둔다면 실은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나가는 그러한 존재요소들과 그 변화에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변화와 존재의 실상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원리를 알 수가 없기에 그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반적인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사리연구는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존재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지만 이 또한 그 길을 찾아내지 못하면 마음의 주변을 빙빙 돌 뿐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과 이치는 바로 마음에 관한 일과 이치를 말합니다. 물론 주어진 세계 - 즉 우주와 지구와 생명과 역사등 - 를 관찰하고 비교 분석하고 깊이 연구해나감으로서 지혜를 터득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자칫 마음의 근원을 벗어나면 그가 아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영혼의 자유로움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앎에 묶이고 그 앎에 집착하기에 권위와 권력적 속성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터득하고 통찰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집착심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집착심의 일어나고 사라져가는 그 전 과정을 깊이깊이 통찰해나가는 일이 바로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 아무리 경전을 외우고 의두와 성리에 밝다고 해도 그 몸과 마음의 원리에 의해서 드러나는 그 집착의 전 과정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없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앎이 칼날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어둠 속에 묻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앎이 오히려 집착의 원인이 되어 질 수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일과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작용을 깊이 세밀하게 통찰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 그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해있으며 또 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그의 경험과 체험은 그를 원하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해본 길이기에 다른 이들의 상태를 이해하고 온전히 바라봐 줄 수 있으며 그를 통하여 올바른 안내를 해줄 수 있습니다.

사리연구는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공부입니다. 이는 경전의 뜻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경전의 의미는 그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깊이와 차원을 달리 하기 때문에 그 경전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더욱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아야합니다. 그냥 믿고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그것이 교조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크게 낭패할 일입니다. 수행자는 더욱 더 깊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감으로서 또 다른 깊이와 폭으로 자신의 의식을 확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의 의미도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묶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는 자칫 길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쌓아올린 장벽에 갇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리연구, 즉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앎과 행위를 비쳐 보아야합니다.



끊임없이

왜?

왜 그러한 것인가?

나의 앎이 진실한 것인가?

나는 근원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운가?

살려주는 마음으로 살았는가?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무시선 무처선을 어떠한 심법이며 행법일까?

등등

끊임없는 회의와 물음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앎과 행위들을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무턱대고 믿고 따르는 일이 무척이나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혹으로부터, 맹신으로부터, 자기적 체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진정한 깨달음을 행하기 위하여 멈추어질 수가 없는 구도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나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앎, 즉 지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두발로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그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비로소 주변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일과 이치에 눈이 떠집니다.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만큼 세상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인위적인 앎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지혜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무엇엔가 집착해 있음으로서

관심은 당연히 그 집착의 정도만큼 그 대상에 기울어질 것이고

그에게 보여지는 세계 또한 그 만큼 밖에 열려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만큼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올바른 지혜는 집착을 벗어버림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 상태를 온전히 통찰해냄으로서 존재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존재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리연구의 올바른 수행방법인 것입니다.



작업취사는 실질적인 행위에 관한 수행을 말하며 그 역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합니다.

원불교 정전에 『작업이란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하였습니다.

육근 즉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자칫 정의를 사회적 혹은 역사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작업취사의 요지는 그 목적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작업취사는 마음의 근원을 밝혀나가는 수행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정의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이나 역사적 관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필요합니다. 그 기준을 올바르게 세워놓지 못하면 자기적 견해에 따라 정의는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근원성을 찾아나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삼학을 이야기하고 그의 수행을 말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곧 집착심을 놓아버림으로서 드러나지는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착심은 이기심을 낳습니다.

이기심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며 따라서 관계는 언제나 마찰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둘 사이에 일어나는 파장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 둘은 서로서로 충돌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정의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정의란 이기심을 버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연민의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서나 드러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바로 집착심을 내려놓고

그 집착심을 내려놓음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를 바라봄으로서, 세계를 포용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기심을 내려놓음으로서 관계를 사랑과 자비로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이기심의 원천은 자기 집착이며 이러한 자기 집착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라는 삼독심을 관계 속에서 발현하게 합니다. 불의, 즉 올바르지 못한 행위의 원천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는 그리 어려운 공부가 아닙니다.

즉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발견하고 그를 발견하면 즉시 내려놓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집착심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발견했다하더라도 쉽게 놓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의지와 열망과 열정은 필수불가결한 준비과정입니다.

나는 꼭 내 존재의 끝을 보고 말리라!

나는 부처를 꼭 이루고 말리라!

나는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주인이 되어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 가정을 세상에서 낙원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어떤 나름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마치 죽음의 경계에서도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그 의지의 산악인들처럼!

그러한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애초에 삼학 수행은 그 올바른 길을 걸어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쌓아놓게 되고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쪽으로 나아가다보면 그는 마음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등반가에게 희열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 속에 세상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오감으로 신비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자기 성취의 기쁨을 만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공부나 삼학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존재 세계의 실상을 스스로 경험해나감으로서 보여지는 세계의 신비로움과 조화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에게는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마찰과 충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삼학수행을 실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바로 내가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의 표준은 생활 속에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나가면서 옳은 것은(德) 취하고 이기심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가 걸리거나 막히는 것이 있으면 깊이깊이 탐구하여 왜 그러한 것인지를 깨닫고 어떻게 구속된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탐구하면서 그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면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인 마음을 취하면 됩니다.

작업취사의 요점은 바로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불의를 제거하는 일은 근원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는 일입니다.

바로 그 뿌리인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면

나와 너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하나의 마음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줌으로서

관계는 따뜻함으로 서로를 살려주게 됩니다.

포용하고 품어주고 살려냄으로서 관계는 아름답게 꽃이 핍니다.

내가 대하고 있는 일과 그 사람 사이에서

품어주는 마음

포용하는 마음

살려내는 마음이 아니거든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깊이 통찰해 보아야합니다.

왜 그러한 마음이 되지를 못하는가를 깊이깊이 바라본다면

당신은 당신이 볼 수 없었던 그 무명의 어두운 마음들, 즉 자신이 인식할 수 없었던 집착심의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하다보면 어느새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 따사로운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삼학 수행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 셋은 하나의 공부 과정이며

그 하나의 과정 속에

그 셋이 다 함께 합니다.

정기훈련법에 나타난 삼학수행 11개 과목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들이 아니며

충분한 시간을 내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그 기본적인 토대를 구축해나갈 수 있는 훈련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처해있는 삶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치열할 생존경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먹고 산다는 자체가 가진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달픈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지켜내지 못하면 가족은 자칫 해체될지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살아나가는 이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가득합니다. 치열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교도님들은 이렇듯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 가족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아가는 구도자들이 치열하게 수행해나가지 못하고 그들의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줄 수 없다면 그 빚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구도의 끝은 결국 사랑과 자비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삼학 수행의 끝 역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구도자가 생활 속에서 그 마음을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욱 깊이 통찰해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내가 관계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나누기 위하여 구도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무언가를 향해서 수직적으로 나아가 지혜의 빛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는 수평적인 나눔의 길입니다.

구도의 끝은 그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지혜는 결국 사랑과 자비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며

사랑과 자비의 길은 결국 지혜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지혜 없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또한 따뜻함이 없는 지혜는 지혜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가두어놓은 앎은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심을 내려놓는 그 모든 작업들!

그 일을 그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작업이 어떤 종교, 어떤 영적 그룹들 사이에 일어나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더 좋은 길이라고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나는 과연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유롭고 따뜻한 마음들이 서로 전해질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할 것입니다!

2020/10/01

알라딘: 선의 나침반



알라딘: 선의 나침반

선의 나침반 -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숭산 (지은이),현각 (엮은이),허문명 (옮긴이)김영사201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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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484쪽
148*210mm
678g
ISBN : 9788934939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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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진리의 안내자 숭산 대선사의 30여 년간의 설법을 제자 현각 스님이 집대성한 지혜와 깨달음의 정수! 따뜻하고 자애로우면서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숭산 스님의 파격적인 법문은 딱딱한 불교가 아닌, 재미있고 쉬운 불교로 우리를 안내한다.

참나를 깨닫고 중생을 교화하는 불교의 목적에서부터,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로 이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까지! 쉽고 재미있게, 그러나 핵심을 관통하는 숭산 스님의 말씀은 연기법과 삼법인, 사성제와 팔정도, 육바라밀행 등 불교교리의 핵심 가르침을 설명하고,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등 경전에 담긴 불법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목차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불교
불교의 목적
불교의 분류
불교의 구성

2. 소승불교
소승불교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
연기
십이연기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삼학

3. 대승불교
대승불교
금강경
반야심경
대열반경
법화경
화엄경
법성게
업과 윤회
카르마
육바라밀행

4. 선불교
선불교
선의 분류
최상승선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고칙공안
좌선
대오
참구법
선의 3요소
선 정진
선원
어떤 것이 불성인가
세 가지 물건
여여한 경지
돌이켜보라
인생 길
보는 자가 여래다
어느 곳으로 가는가
도솔삼관
있는 그대로 부처다

'오직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
10개의 공안
광우병과 나침반
옮긴이의 말
접기

책속에서
부처님은 본성을 찾는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최초의 인물이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올바른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변호사, 의사, 택시 기사, 학생 혹은 누구누구의 남편, 아내, 딸, 아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바깥의 모습일 뿐이다.
이제 우리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참 삶을 살아야 한다. 진정한 삶이란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까지도 고통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본성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죽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올바른 삶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책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도 우리 자신의 본성을 모른다면 소용이 없다. 본성을 찾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 수행이다.
바른 수행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 참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질문을 깊이 하게 되면 모든 생각이 끊어지고 생각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오직 모를 뿐’을 깨달아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라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고 다른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눈뜸’이다.
이 책의 제목을 왜 ‘선의 나침반’이라고 지었는가? 부처님은 우리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들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나고, 우리의 욕망과 집착 때문에 우리는 고해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산스크리트로 이것을 ‘삼사라(samsara, 輪回)’라고 부른다. 돌고 돌고 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지혜(prajna)의 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배에는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나침반이 필요하다. _저자의 말 중에서  접기
‘오직 모를 뿐…….’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 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불교 역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참 나를 깨닫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참 나를 얻을 때 우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실용, 實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한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불국토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8만 4천 경전이나 성경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찾지 못한다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이해와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눈감고 죽는 순간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_본문 중에서  접기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벽은 하얗다. 밖에 개가 짖는다. 우리 마음은 크고 둥근 거울 같다. 오로지 비추고 비추고 비추기만 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 즉 여여(如如, truth like-this)이다.
그러나 진리를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도울 수 없다. 물론 우주처럼 맑은 거울 같은 마음을 가져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춰야 한다. 깨끗한 거울 같은 마음에 붉은 공을 비추면 붉은 것이 비춰진다. 하얀 공을 비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단지 같이 배고파하면 되는가. 슬픈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저 같이 슬퍼하면 되는가. 단순히 진리를 비추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좀더 완벽한 답이 필요하다. _본문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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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0년 5월 15일 지성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숭산 (지은이)

숭산 큰스님은 서양에서 가르침을 편 독보적인 한국 선사다. 1927년 평안남도 순천 태생으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동국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 참된 진리를 구하기 위해 1947년에 충남 마곡사로 출가하였고 행원(行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9년 당시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던 고봉 대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와 숭산(崇山)이라는 당호(幢號)를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祖師)가 되었다.
1966년 일본 도쿄에 홍법원을 세우는 것으로 첫 해외 포교가 시작되었다. 이후 1969년에 홍콩에 선원을 설립하였고, 1972년 영어 한마디 모른 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큰스님은 일부러 한국 사람들이 없는 곳에 정착해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프로비던스의 브라운대학을 비롯하여,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큰스님은 모여드는 제자들을 위해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선원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이 책 《부처가 부처를 묻다(Dropping Ashes on the Buddha)》가 바로 이 시절의 큰스님 법문과 제자들과 나눈 문답, 서신 등을 엮은 것이다.
큰스님의 해외 포교는 1974년 캐나다 토론토 선원, 1978년 폴란드 선원, 1980년 영국 런던 선원, 1983년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1985년 프랑스 파리 선원 개설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한국 불교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졌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불교, 문화, 역사,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7년 큰스님의 지도 하에 제1차 ‘세계 일화대회(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가 개최되었고, 매 3년마다 전 세계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각 국에서 개최된다.
전 세계 36개 국에 120여 개 선원(禪院)을 설립하신 숭산 큰스님은 2004년 11월 30일 서울 화계사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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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부처가 부처를 묻다>,<선의 나침반>,<천강에 비친 달> … 총 6종 (모두보기)

현각 (엮은이)

미국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교를 나와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0년 숭산 스님(1927~2004)을 만나 출가했다. 출가 이후 한국 선원에서 30여 차례에 걸쳐 안거했으며,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화계사 국제선원장을 지내고, 2009년 독일 뮌헨에 불이선원(不二禪院)을 여는 등 유럽에 한국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써오고 있다. 대표 저서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가 있다.



최근작 : <선의 나침반>,<부처를 쏴라>,<공부하다 죽어라> … 총 13종 (모두보기)

허문명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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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를 거쳐 오피니언팀장과 국제부장을 지냈다. 오피니언팀장으로 일할 때 ‘김지하와 그의 시대’ 시리즈를 연재해 책으로 묶었으며, 국제부장으로 재직하며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의 현장 취재를 기획·연재했다.

사실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져 잘 통합되지 않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분단(전쟁을 포함해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통일 한국’을 향해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통합된 역사관을 정립해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절실함이 있다. 그런 때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집필했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삶의 나침반 1,2>를 펴냈으며, 번역서로 <선의 나침반>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의 일본, 일본의 한국>,<김지하와 그의 시대>,<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 총 14종 (모두보기)
허문명(옮긴이)의 말
큰스님의 쉽고 친절하면서도 직접적인 설명은, 불교 공부가 어려운 한자로 가득한 경전 공부가 아니라 참선 수행이라는 마음 공부를 통해 삶을 혁명적으로 아름답게 바꾸는,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길잡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출판사 소개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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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햅틱스>,<물질의 물리학>,<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등 총 1,256종
대표분야 : 요리만화 1위 (브랜드 지수 360,088점), 사회/역사/철학 1위 (브랜드 지수 701,611점), 과학 2위 (브랜드 지수 439,91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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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을 한글판으로 옮기며 주객이 바뀐 책, 하버드 출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마그리트 2010-06-2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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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나침반-숭산 지음, 현각 엮음




온전히 현각스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숭산 지음, 현각 엮음"이었다.



숭산스님이 교사였다면 분명 일목요연 아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싶다.



불교의 목적 :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불교의 분류 :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禪)불교

불교의 구성 : 불(佛), 법(法), 승(僧)



불교의 목적, 분류, 구성이라는 큰 테두리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각각 부분으로의 세부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상당히 훌륭한 교과서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일까?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왜 더욱더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양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수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동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도구들이 나오기 시작햇다.

수백, 수천만 동물들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세계에서 매일

도살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갖고있으므로 섞여 있으면 좋지 않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살지,

다은 종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

그들은 자기 종들끼리만 몰려 다니고

다른 종이 공격해 오면 떼거지로 반격한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 세계도 이와 비슷해지고 있다.

(...)

자기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에는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프다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몸은 비록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의식의 일부는 이미 동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툰 대신

고양이와는 아주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의 말머리에 나오는 이 글들을 보고 참으로 공감했다.



잔디조차 산 생물이라 밟지 못하며, 바퀴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육식을 아주



즐긴다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때로 자신의 가치관들이 추호의 의심없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지만, 다른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숭산 스님과 현각 스님을 보며,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란 생각에,



그 스승을 따라 들어 온 나라를 등져야 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싶어 무척 안타깝지만,



현각 스님께 훌륭한 스승이 계시었 듯, 그 또한 어디서든 훌륭한 스승으로 자리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 책을 기분 좋게 덮는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써 '오직 모를 뿐..

....'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 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소승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이 덧없는 고통의 바다임을 먼저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그 고통의 세계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일단 생각이 일어나면 삶과 죽음

이라는 상대적 세계가 나온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끊어 상대적 세계에서 영원

불멸의 절대적 세계, 즉 열반을 얻어야 한다.

(...) 이에 비해 대승불교는 공(空), 즉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

끝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시작한다. 소승불교가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공,

열반의 세계에서 끝난다면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종착점인 공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 대승불교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보고 그런

다음 이생에서 다음 생, 또 다음 생, ..... 계속 삶을 이어가는 동안 어떻게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도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순간순간 내 삶은 오로지

중생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선(禪)불교는 무엇인가?

선은 결코 절대니, 상대니 하는 것을 운운하지 않는다. 허무의 세계니. 진리의 세계니, 완전한

세계니 하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선 수행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직접적으

로 마음을 탐구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을 통한 배움에 강조

를 두지 않는다. 단지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선 수행은 바로 이 순간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선의 가르침은 항상

우리가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르는 곳으로 돌아온다. 한 순간이 전부이다. 한 순

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탕!(죽비 치는 소리)>



*진정한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사마디',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 다시 말해 불은 순수한 마음이고, 법은 맑은 마음이며, 승은 순간

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

(一切三寶)라고 부른다. (...) 맑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 이것이 '평상심'이다.



*불교는 어떤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도 공하다.

'원죄'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돈이 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쫓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에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정업(正業)'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正命),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참된 수행, 다시 말해 정정(正定)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변한다. (...)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

과 마음의 모든 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 번

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 참 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빵을 주면 된다. 단지 '......할' 뿐

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공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 단지 하나

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뭔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 하는 마음

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뭔가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100% 그냥 하는 것이다. 말은 중요

하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싶으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노력하는 마음이다. 오직 노력하고 실

천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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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6-08-1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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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불교로 직행하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이다.




말그대로 선종 불교로 안내하는 불교 입문서다. 독자에게 선종 불교를 소개하기 위해서 초기불교부터 선종불교까지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핵심 개념을 추려서 챕터로 삼고, 각 챕터마다 개념에 대한 설명과 구체적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설명하는 방식이 다소 유쾌하다. 선종 불교 특유의 재치도 있지만, 도중에 문자를 뛰어넘지만 넘지 않는 표시들, "탕", "할", "하하하"가 많이 나온다. 만약 저자가 이모티콘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모티콘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처음에는 생소하지만, 읽을 수록 호탕한 대선사의 앞에서 설법을 받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의 단점도 있다. 바로 관점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개념에 대해 선불교적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선불교 조차, 숭산 대선사의 관점에서 "오직 모를뿐"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불교를 "있는 그대로", "여여즉여"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 말고 다른 불교 교리서를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선불교 입장에서는 이 책도 방편일 뿐이다. 주관이든 객관이든, 실체, 실상, 실용만 깨우치면 무슨 상관이랴. 마지막 공안마저 읽고 나면, 언어의 무용을 깨달을 것이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독자는 "평상심"이라는 언어를 얻게 될 것이다. 평상심을 얻기 위해서는 말과 책을 덮고 나와 세계를 읽을 준비를 해야 한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