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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 불교저널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 불교저널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


2009년 11월 22일 (일) 21:12:05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고불총림 백양사 ‘야단법석-깨달음의 길을 찾는다’에서 세 번째 법주로 나선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각묵 스님은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강연을 통해 “불교의 목적을 행복의 실현(離苦得樂)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위해 초기불교에서는 ‘온·처·계·근·제·연’를 교학체계로 삼았고 ‘37보리분법’을 통해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보았다.

불교교학은 ‘온·처·계·근·제·연’



▲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각묵 스님.
각묵 스님은 “불교 교학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온·처·계·근·제·연’이라고 즉답할 수 있어야 한다”며 “불교 교학의 이론체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행복에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 있다. 스님들의 출가 이유가 궁극적 행복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온’이다”라고 했다. 스님은 “‘나’를 오온(색수상행식)으로 해체해 보면 무상과 고, 무아가 보인다”며 “무상 고, 무아를 봐야 해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각묵 스님은 “세계란 무엇인가? 를 알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12처 18계”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란 의문에 부처님의 답은 고·집·멸·도 사성제이고, 괴로움의 구체적 가르침이 12연기이다.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가 곧 12연기이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교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37보리분법의 수행이 있어야 깨달음은 실현된다”고 해석했다.

“행복하려면 봉사하는 삶 살아야”

각묵 스님은 먼저 《디가 니까야》 <사문과경>을 인용해 “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 여의고 행복의 실현”이라며 “부처님은 금생의 행복은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기술로 세상에 기여하고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이 같은 말은 금생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의 존재론적 욕망의 사용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각묵 스님은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혀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봉사하는 삶은 지계와 보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각묵 스님은 “《숫따니빠따》<마하망갈라경>에는 ‘많이 배움’ ‘기술’ ‘규율’ ‘잘 공부지음’ ‘보시’ ‘공덕을 쌓음’ 등을 금생의 행복의 조건으로 본다”며 “이는 보시, 지계,학문, 기술”이라고 말했다.

각묵 스님은 “내생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를 강조했다”면서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재가자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보시와 지계에 충실해야 내생의 행복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궁극적 행복은 곧 열반이고 깨달음으로 이는 불교만의 고귀한 가르침”이며 “이는 계정혜 삼학을 갖추어야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궁극적 행복 실현은 개념적인 존재를 해체해서 법으로 환원해 보아야 하며,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온·처·계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을 부처님은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기불전은 분명히 팔정도가 도라고 밝히고 있다. 명확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부처님은 팔정도를 실현함으로써 깨달았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라며 깨달음의 내용이 우리 곁에 있음을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이어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 가운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무상 고 무아의 통찰을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라며 “주석서들은 한결같이 염오를 강한 위빠사나로, 이욕은 도로, 해탈은 과로, 구경해탈지는 반조의 지혜로 설명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
“부처님은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

각묵 스님은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라고 규정했다. 스님은 “초기 불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라며 《상윳따 니까야》<천 명이 넘음경>과 주석서를 인용 , “부처님은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을 말하셨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무상 고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면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써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개념적 존재나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며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으로 해체해서 그 중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 하나의 무상 고 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파사나)”이라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이날 강연을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 문제를 이처럼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었다.

장성 백양사=서현욱 기자

[요약] 각묵 스님 질의 응답

문: 고기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 부처님도 걸식을 하실 때 고기를 드시지 않았나.
각묵 스님: 부처님은 삼정육은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탁발을 하던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본다면, 살아 있는 생명을 직접 죽여 먹는 것은 불자로서 적절하지 않겠지만 남이 잡은 것을 먹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채식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나라 상황에서 쉽지 않으므로 삼정육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신이다.

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하며 ‘수’를 느낌이라고 했다. 저는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몸과 주관적인 기억의 조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기억이라는 부분은 다뤄지지 않고 있다.

각묵 스님: 상좌부 아비달마에서는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면 기억은 모두 법으로 심리현상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경험한 심리현상이 지금에 일어날 때 기억이라고 한다. 상좌부에서는 무엇인가 기억되는 현상은 심리현상이고, 그것을 지금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마음챙김으로 본다.

문: 어제 질문 중에 윤회에 대해 논의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윤회가 사상적 체계를 가지고 있나?
각묵 스님: 윤회는 불교 이전에도 있었고 인도에서는 삼사라라는 용어로 설명됐다. 부처님께서도 초기경전 도처에서 윤회를 말하고 있다. 윤회를 설명하는 방법이 다르다. 힌두교는 자아의 윤회로 설명한다. 힌두교에서는 자아라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있어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굳이 얘기하자면 무아의 윤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찰나와 상속으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한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바로 그 다음 찰나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상속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찰나 찰나의 흐름을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오온의 찰나 생 찰나 멸의 흐름을 윤회라고 초기불교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문: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하고 과학은 진화했다고 한다. 불교는 어떻게 보나?
각묵 스님: 초기불교에서는 무시무종으로 설명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범망경에서 보면 전생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삼매에서 어느 시점까지만 보지 그 이전은 알 수 없다. 중생은 무시무종이지만 아라한은 금생에서 멸하게 되면 끝이 있다.

문: 초기불교와 조계종의 선불교는 깨달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각묵 스님: 저는 견성성불을 무아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책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책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됨을 우리는 성이라고 이해한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견성성불의 성을 무상 고 무아의 근본 성질을 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문: 초기불교에서는 아미타경의 입장을 어떻게 보나?
각묵 스님: 정토삼경에 나오는 정토, 극락세계를 초기불교에서도 설명해낼 수 있다고 본다. 초기경에는 천상세계를 많이 얘기한다. 욕계천상은 공덕을 지어 태어나는 곳이다. 그 위를 색계천상이라고 하는데 공덕과 계율만으로 태어나는 곳이 아니라 삼매를 닦아야 한다. 정거천은 삼매를 닦고 불한과를 얻은 성자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북방에서 말하는 극락세계는 바로 이 정거천, 넓게 보면 색계천상까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 대승불교에서는 자성불성이 공이고 연기라고 설명하는데, 스님은 자성불성을 무상 고 무아라고 설명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각묵 스님: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다. 대승의 흐름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중 불성을 말하는 것은 여래장 계열이다. 유식에도 불성의 개념 나타나지 않는다. 여래장 중 대표적인 것이 화엄경 능엄경 능가경 등인데 여기서 불성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 아비담마 유식은 법의 체계이고, 여래장은 믿음의 체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래장은 믿음을 중시한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근원적인 믿음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일심 여래장 등을 말한 것인데, 이를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무아와 연기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본인의 마음이다.

문: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고 있다. 팔정도의 길을 강조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각묵 스님: 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바른 견해다. 바른 생각은 대표적으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고자 하는 사유를 들고 있다. 바른 말은 망어 기어 등을 하지 않는 것이고, 바른 행위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생계수단은 세상에 해가 되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간화선은 팔정도 중 정명 즉 바른 마음 챙김에 해당하는 것이다. 화두를 든다고 바른 견해, 바른 사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듯 각자 수행을 하면서도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

문: 불교의 대중화를 말하셨다. 교학의 대중화도 중요하겠지만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각묵 스님: 결론적으로는 아직 저도 고민 중이다. 불교 안에서조차 깨달음 해탈에 대해 이야기를 못 하고 있다. 불교 안에서부터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사유한 후 전 국민에게 확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해체해서 보자는 것이다. 해체해서 보면 무상 무아가 보이고 이를 통해 깨달음이 실현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도법 스님: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만들어진 수행, 깨달음의 상, 부처님의 상을 알아야 한다. 이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신비화, 과장되어 있다. 신비화되어진 깨달음, 수행이 있다고 전제하고 접근한다면 갈등과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레사수녀는 약자를 위해 인생 전부를 바쳐 헌신했다. 그러나 그분이 쓴 글을 보면 자신의 삶이 늘 암흑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둘로 나눠보면 하나는 어딘가 거룩한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깨달음의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月刊 海印 2005 실상사 화림원 각묵 스님

月刊 海印



실상사 화림원 각묵 스님이전 게시물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김영옥2005년 12월 286호

전북 남원시 실상사, 일주문 대신에 절 대문 구실을 하고 있는 사천왕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들은 텅 비어 있다. 절과 너른 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봉우리, 소설도 입동도 되기 전, 아니 서리도 내리기 전에 눈 모자를 하얗게 뒤집어쓰곤 하는 저 봉우리, 경상과 호남의 경계도 산 이름 하나로 허물어버리고, 수다한 봉우리와 계곡과 개울을 품되, 첫 시작은 모두 하나임을 선언하고 마는 산, 평지 사찰인 이곳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실상사 큰절에 있는 화엄학림은 개혁불사 이후로 1995년에 개설된 조계종 최초의 전문교육기관이다. 승가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사람들에게만 수강 자격이 주어지는 곳, 두 해의 과정을 끝내면 교수 아사리(강사 자격증)가 주어지는 이곳을 졸업한 학인들은 지난해 8기에 이르기까지 일흔 명쯤 된다. 《중론》, 《유식》, 화엄사상사, 화엄 본경, 그리고 《화엄현담》 등을 공부하는 본 수업말고도, 초기 불교, 팔리어, 아비담마 불교, 한문 등의 특강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지는 이곳 학림은 한 해에 두 달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 주일에 나흘 수업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수업 중에 사제간의 의견 나누기에는 격의가 없다.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문들, 그러나 작금의 한국불교가 풀어야 할 ‘교육 부재’라는 문제점은, 문제 의식을 함께 촉발시켜 가면서 격렬한 공부 과정을 거쳐 배출되는 스님들이 강단에 서게 될 즈음에는 적잖은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화엄학림 강사 중 한 분인 각묵 스님은 확신한다.
현재 학림의 강사 스님은 넷, 그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화엄 본경 수업을 ‘의무적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본 《유식》을 강의하고 있는 각묵 스님은 화엄이 전공은 아니지만 수업이 ‘재미있다’. 인도에서 십 년 동안 유학하면서 그가 연찬해온 초기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데나, 상치되는 점을 짚어주면서, 또한 자신도 학인들과 ‘함께’ 배우기 때문이다. 각묵 스님이 큰절에서 천천한 걸음으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화림원을 처소로 삼은 것은 2003년 3월부터이다. 학인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함께 배우는 일의 즐거움이 없지 않지만 그가 금생에 해마치고 싶은 일, 그래서 ‘일의 순번’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당시에 쓰셨던 언어인 팔리어로 적힌 경·율·논 삼장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해 내는 일이다.
칠십년대 중반쯤에 출판물로써 그 징조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던 초기 불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대학 재학 시절 대불련과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던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은 미미한 것이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 안정된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 없어져버린 그로서는 선방의 좌복 위에 앉으려는 마음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모친을 사별한 그의 아린 마음에서 비롯된 삶에 관한 작지 않은 물음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대학 시절에 만난, 구척 키만큼 뿜어내는 기가 엄청났던 스님, 버릴 수 있는 것 다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대답한 그를 향해 벼락처럼 내린 할, 저놈 갖다 묻어버려라! 마조의 할로 백장의 귀가 사흘 동안 들리지 않았다더니, 사흘 동안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일을 몸소 겪으면서 그는 출가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7대 장손의 처지로 뜻을 세우기가 쉽지 않더니, 수련대회에서 사흘 용맹정진 끝에 천배 절을 하고 우물가에서 지쳐 쓰러졌다가, 눈을 뜬 순간에 홀연히 정리가 되었더라 했다.
《선문염송》 수준의 책까지 섭렵해버린 뒤이기도 했지만, 강원 과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방 선원에서 참구하는 세월은 7년, 나름대로 애썼던 시간들이었다. 새벽잠을 이기려고 오후는 불식하고, 주린 배를 물로 채우다 말고 조석으로 백팔배로 몸을 이기려던 시절, 뼈만 남은 그때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20kg쯤 몸무게가 늘어난 지금의 그를 못 알아 본다.
인도행도 ‘수좌식’으로 결정한 일이라며 그는 오늘 웃었다. 마지막 선방, 칠불암에서 결제중이었는데 한 달 보름이나 외국 망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외국행, 푸나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 인도로 떠난 것이 89년이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철학을 전공, 박사 과정을 마치는 동안에 팔리어와 프라크리트어를 익혔다. 인도의 고문헌에 관한 폭넓은 섭렵도 이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엎드려 절하면서 올린 기도는 ‘이생에서 팔리어 삼장을 완역할 수 있게 해주십사’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도로 끝나지 않고,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역경을 위한 방대한 자료 저장도 함께 병행했으니, 지금 그의 컴퓨터에는 경전 주석서만도 일백오십 권 정도, 그리고 20만 단어를 자신이 뽑아 담은, 사전 여덟 권 분량의 자료가 입력되어 있다. (그는 요즘도 국내에서 역경 일에 전념할 형편이 못 된다고 판단이 되면 이 자료가 담긴 노트북 하나만 가지고 외국으로 ‘피신’을 간다)
그가 산문 안팎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1년에 《금강경 역해》(부제: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 분석 및 주해)를 출간하고 난 뒤부터였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싣되, 그의 주관적 과목 나누기(이것도 경전 해석의 관점이 된다)와 함께, 구마라습의 의역과 현장의 직역을 일일이 대조시키면서 역해해 낸 그의 역작물은 경전 연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겨울, 이 책을 교재로 삼아, 그는 논주로서 사부대중 대상의 동안거 간경看經 결제를 이끌면서 논의를 심화시켰다. 참선이 아닌 간경식 결제 형식도 그러했거니와, 승속이 함께 결제에 동참하는 일도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었다. 40명의 스님들, 그리고 일천삼백 명쯤의 일반인이 참여, 한겨울 시린 지리산 자락을 후끈 달구었던 법석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무아’로서, 실체화될 어떤 것도 상정할 수 없다. ‘실체’란 없으며, 그저 인연의 조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는 곧 연기이다. 《금강경》이 설파하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다. 주인공도, 여래장, 불성, 진아, 참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불생불멸의 생명 자리가 따로 있다고 믿는 힌두의 믿음과 다를 것이 없다. ‘공空’을 꿰뚫어보는 것이 ‘반야’이며, 이는 허무가 아니라 ‘연기’인 것이다.”
그로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면서 겪어야 했던 지독한 충격 속에서도 접지 못한 간화선에 대한 애정이었다. 간화선이야말로 ‘무전제’의 수행이고, ‘무전제’는 바로 ‘무아’라는 초기 불교의 근본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그래서 최상승의 수행법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도그마이다. 간화선이 동북의 전통에 맞는, 팔정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수행 테크닉이듯, 비파사나 또한 구경 열반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니, 실은 자신에게는 그런 구분조차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의 관심은 부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말의 문제, 결국 뜻을 전하는 말의 문제였다. 그는 그 답을 ‘초기 불교’라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팔정도 가운데서도 수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념正念’을 이해함에 있어, 그는 ‘마음 챙김(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적고 있거니와, 한국불교 간화선이 화두를 들되, 면밀하고, 세밀하고, 정밀하고, 엄밀하고, 그리고 간절하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주객을 초월하고 있지는 않은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 자신도 역경을 하는 사람으로서 구마라습이나 현장에 대한 놀라움은 금할 수 없지만, 잘못 옮겨놓거나,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의도’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여긴다. 5세기에 구마라습이, 7세기에 현장이 정착시킨 한문은 현재의 이해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역 경전이란 결국 2차 자료일 뿐이다.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원전을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한역의 오류와, 그 오류를 답습한 우리의 역사까지 객관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작업은 1600년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중국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 자주 불교를 실현할 기회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다. 그는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역경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가 세운 원력의 내용인 바, 팔리어 삼장을 제대로 역출해 내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은 어떤 것일까. 언어학적 이해나 소양, 그리고 아비담마와 이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주석서를 섭렵한 뒤에 얻을 수 있는 경에 대한 안목 등을 꼽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역경의 소양과 깊은 이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를 지금 여기 내 삶에 적용시켜 해탈 열반을 실현하리라는 원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삼장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불사의 메시지는 바르게 읽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이어 말한다.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이 아닐까보냐.
그가 지도 법사로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은 그에게 아비담마의 의미를 다시금 깨우치게 한 소중한 도반인 대림 스님이 이끌고 있는 곳이다. (대림 스님은 남방 불교 부동의 준거, 번역하기 까다롭고 어렵기로 정평이 난 《청정도론》을 번역해 행원문화상 역경상을 받았다) 그가 사문의 몸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홍법과 포교의 뜻은 책으로뿐만이 아니라, 회원 수효가 이천 명이 넘는 곳, 월 회비로 후원금을 내는 회원 수도 적지 않다는 인터넷 까페(다음, 초기불전연구원)를 통하여 열정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초기 불교와 아비담마에 관한 한 다른 어느 사이트보다도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고 자부하는 곳이다.
그에게 한 해에 여섯 달은 다른 어떤 일과도 타협할 수 없는 역경 작업 시간이다. 한참 일에 매달릴 때는 열 시간쯤 사분정근 하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을 한다. 여섯 시간 잠을 자도 나머지 여덟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알고, 포행도 하고 그런다. 열 시간 작업, 눈에는 알 수 없는 흰 반점까지 생겼지만 뭐 괜찮겠죠, 그러면서 하하 웃는 그는 그간 《금강경 역해》를 비롯, 《아비담마 길라잡이》(공역),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대념처경과 그 주석서)를 세상에 내놓았고, 올해가 가기 전에 《디가 니까야》(장부)도 책으로 나오게 된다.
여름내 화림원 맑은 흙벽을 붙잡고 기어올라간 아기 담장이들, 이 늦가을 잎은 다 지고, 잎맥만 바닷가 새 발자국처럼 애잔히 남아 있다. 서쪽 하늘에 낮게 떠올랐던 개밥바라기가 큰절로 내려가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그를 반짝, 하고 맞아주었다. 별의 눈빛이 한결 서늘해졌다. 가을이 또 그렇게 지나가나보았다. 팔리어 삼장을 한글로 완역해 내는 것말고도, 주요 팔리어 주석서, 그리고 《아비담마》, 《중관》, <유식》 등을 비롯한 주요 산스크리트 불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초기 불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도 주요 고전도 번역해보고 싶어하는 각묵 스님, 바람맞이 언덕에서 눈부신 등불처럼 저를 켜들었던 은행나무 잎도 다 지고 만 줄을 알아챌 겨를이나 있으신지.

2020/10/16

불선근 三不善根- 위키백과, Three poisons, 三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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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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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6도윤회도(六道輪廻圖, bhavacakra):
  • 제1층, 즉 가운데의 축은 불선근 즉 3독을 나타낸다.
  • 제2층은 을 나타낸다.
  • 제3층은 6도를 나타낸다.
  • 제4층은 12연기를 나타낸다.
  • 윤회의 수레바퀴를 꽉 붙들고 있는 괴물은 실체가 없는 것, 즉 무상···무아인 것에 대한 집착, 즉 근본무명을 나타낸다.
  • 윤회의 수레바퀴 왼쪽 위에 있는 은 6도윤회로부터 벗어난 상태, 즉 열반, 즉 깨달음을 나타낸다.
  • 을 가리키고 있는 붓다는 6도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불선근(不善根)은 3계 중 욕계의 (貪) · (瞋) · (癡)의 3가지 번뇌 또는 번뇌성의 마음작용(심소법)을 말한다.[1] 불선근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도 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욕전탐(欲纏貪: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탐, 욕계에 속한 탐, 욕계의 탐)과 (瞋: 진 즉 유정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은 오직 욕계에만 있음[2][3][4])과 욕전무명(欲纏無明: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무명, 욕계에 속한 무명, 욕계의 무명)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 하며, 각각을 
탐불선근(貪不善根) · 
진불선근(瞋不善根) · 
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부른다.[5][6] 
즉 탐불선근은 3계의 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만을 가리키며, 진불선근의 경우 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4] 진불선근은  그 자체를 가리키며, 치불선근은 3계의 무명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무명만을 가리킨다.
또한, 불선근(不善根)은 3독(三毒), 3화(三火) 또는 3구(三垢)라고도 한다. 그리고  ·  · 를 탐욕(貪欲) · 진에(瞋恚) · 우치(愚癡)라고도 하며, (淫) · (怒) · (癡)라고도 하며, 또는 (欲) · (瞋) ·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1][7][8]

성유식론》에 따르면, 불선근을 끊기 위해서는 공통 대치법(對治法)과 개별 대치법을 둘 다 사용해야 하는데, 공통 대치법이란 오직 선혜(善慧), 즉 (善)의 상태의 (慧, 지혜)로써  ·  ·  모두를 대치(對治)하는 것을 말하고, 개별 대치법이란 에 대해서는 무탐(無貪)으로써, 에 대해서는 무진(無瞋)으로써, 에 대해서는 무치(無癡)로써 대치한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貪)을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탐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하며, (瞋)을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진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하며, (癡)를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치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이다.[9][10]

3불선근[편집]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모든 불선(不善), 즉 (惡)을 생기게 하고 북돋우는 근본이 되므로 '불선(不善)의 뿌리[根]'라는 뜻에서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한다.[1] 또한, (貪) · (瞋) · (癡)의 마음작용은 6식(六識: 8식 중 전5근과 제6의식)과 상응하고, 분류시 번뇌에 포함되며, (惡)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한다.[9][10]

3독[편집]

불교에서는 번뇌는 중생으로 하여금 '출세간의 선의 마음[出世善心]'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에서 번뇌를 이라고도 하는데,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이러한 작용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3독(三毒)이라고도 한다.[7][11]
또한 윤회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여 '(苦)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 즉 3계에 속박된 상태'로 중생을 묶어 놓고 있으며 이 속박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3독(三毒)이라고도 한다.[7][11]
此三毒。通攝三界一切煩惱。一切煩惱。能害眾生。其猶毒蛇。亦如毒龍。是故就喻說名為毒。名義如是。


이 3독(三毒)은 3계(三界)의 모든 번뇌를 통섭한다. 그리고 모든 번뇌는 능히 중생을 해치는데, 그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와 같으며 또한 독룡(毒龍)과 같다. 이러한 이유로 비유로써 독(毒)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독의 명칭의 뜻은 이와 같다.
— 《대승의장(大乘義章)》, 제5권. 한문본

3화[편집]

3불선근 또는 3독, 즉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건물에 불이 나면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善)을 무너지게 한다는 뜻에서 3화(三火: 문자 그대로는 '3가지 불')라고도 한다.[7][8]

3구[편집]

또한, 3불선근 또는 3독, 즉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중생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능히 더럽히는 3가지  또는 더러움이라는 뜻에서 3구(三垢)라고도 한다.[7][8]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곽철환 (2003).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 네이버 지식백과.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955(27-453), T.1558(29-1).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대승오온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618(17-637), T.1612(31-848).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운허. 동국역경원 편집, 편집. 《불교 사전》.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K.614, T.1585). 《성유식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614(17-510), T.1585(31-1).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星雲.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2,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성유식론(成唯識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585,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각주[편집]

  1. ↑ 이동:   星雲,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
    "不善根:  梵語 akuśala-mūla。三界諸煩惱之中,欲界五部有三種不善之根,即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此三煩惱,其性唯不善,能生起、資養一切不善之法,故稱不善根。據大毘婆沙論卷一一二載,三煩惱具有五義,故獨立為不善根。五義即:(一)通於五部,(二)遍在六識,(三)是隨眠性,(四)能起粗惡之身業、語業,(五)作斷善根牢強加行。〔增一阿含經卷十三、俱舍論卷十六、大毘婆沙論卷四十七、入阿毘達磨論卷上、順正理論卷四十一〕"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295DTITLEA4A3B5BDAEDA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295DTITLEA4A3B5BDAEDA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p. T31n1612_p0849a07. 진(瞋)
    "云何為瞋。謂於有情樂作損害為性。"
  3.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p. 4 / 24. 진(瞋)
    "어떤 것이 진(瞋)인가. 이를테면 유정(有情)들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
  4. ↑ 이동:  星雲, "". 2013년 2월 14일에 확인
    "瞋: 梵語 pratigha 或 dvesa,巴利語 patigha 或 dosa 。又作瞋恚、瞋怒、恚、怒。音譯作醍鞞沙。心所(心的作用)之名。為三毒之一。係指對有情(生存之物)怨恨之精神作用。於俱舍宗屬不定地法之一,於唯識宗屬煩惱法之一。據俱舍論卷十六、成唯識論卷六所載,對違背己情之有情生起憎恚,使身心熱惱,不得平安之精神作用,名為瞋。又忿、恨、惱、嫉、害等隨煩惱,皆以瞋之部分為體,是為六根本煩惱(或十隨眠)之一。以其不屬推察尋求之性質(見),作用遲鈍,故為五鈍使之一。與貪、癡兩者,共稱為三毒(三不善根)。亦屬五蓋、十惡之一。
     瞋唯屬欲界所繫之煩惱,於色界、無色界則無。貪乃從喜愛之對境所起,反之,瞋則從違逆(不順心)之對境所起。瞋,為修學佛道上最大之障害,經論中常誡之,如大智度論卷十四(大二五‧一六七中):「瞋恚其咎最深,三毒之中,無重此者;九十八使中,此為最堅;諸心病中,第一難治。」「無瞋」即對境不起害心,為對治瞋之精神作用,屬俱舍宗十大善地法之一、唯識宗善心所之一,與無貪、無癡共稱三善根,又為四無量心中之慈無量心之體。〔雜阿含經卷二十七、卷二十八、悲華經卷六、大毘婆沙論卷二十七、卷三十四、卷四十四、卷四十八、顯揚聖教論卷一、順正理論卷四十、阿毘達磨藏顯宗論卷二十五、俱舍論光記卷十六、成唯識論述記卷六末〕"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078DTITLEBDQ 瞋]". 2013년 2월 1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5.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p. T31n1612_p0849a20 - T31n1612_p0849a22. 3불선근(三不善根)
    "復二種。所謂俱生分別所起。又欲纏貪瞋及欲纏無明。名三不善根。謂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
  6.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p. 5 / 12. 3불선근(三不善根)
    "또 욕계에 매인 탐과 진, 그리고 욕계에 매인 무명을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하니, 탐(貪)불선근과 진(瞋)불선근과 치(癡)불선근을 말한다."
  7. ↑ 이동:     星雲,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
    "三毒: 指貪欲、瞋恚、愚癡(又稱貪瞋癡、淫怒癡、欲瞋無明)三種煩惱。又作三火、三垢。一切煩惱本通稱為毒,然此三種煩惱通攝三界,係毒害眾生出世善心中之最甚者,能令有情長劫受苦而不得出離,故特稱三毒。此三毒又為身、口、意等三惡行之根源,故亦稱三不善根,為根本煩惱之首。"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8. ↑ 이동:   星雲, "三垢".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
  9.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21 - T31n1585_p0030a23. 불선근(不善根). 인용 오류: 잘못된 <ref>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0a21 T31n1585_p0030a21 - T31n1585_p0030a23]. 불선근(不善根)"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0.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K.614, T.1585, 제6권. p. 291 / 583. 불선근(不善根).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91 291 / 583]. 불선근(不善根)"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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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poi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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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ree poisons are represented in the center of the wheel of life as a pig, a bird, and a snake.

The three poisons (Sanskrit: triviṣa; Tibetan: dug gsum) or the three unwholesome roots (Sanskrit: akuśala-mūla; Pāli: akusala-mūla), in Buddhism, refer to the three root kleshasMoha (delusion, confusion), Raga (greed, sensual attachment), and Dvesha (aversion, hate).[1][2] These three poisons are considered to be three afflictions or character flaws innate in a being, the root of Taṇhā (craving), and thus in part the cause of Dukkha (suffering, pain, unsatisfactoriness) and rebirths.[1][3]

The three poisons are symbolically drawn at the center of Buddhist Bhavachakra artwork, with rooster, snake and pig, representing greed, ill will and delusion respectively.[4][5]

Brief description[edit]

In the Buddhist teachings, the three poisons (of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are the primary causes that keep sentient beings trapped in samsara. These three poisons are said to be the root of all of the other kleshas.[6][7] The three poisons are represented in the hub of the wheel of life as a pig, a bird, and a snake (representing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respectively). As shown in the wheel of life (Sanskrit: bhavacakra), the three poisons lead to the creation of karma, which leads to rebirth in the six realms of samsara.[1][8][9]

Opposite wholesome qualities[edit]

The three wholesome mental factors that are identified as the opposites of the three poisons are:[10][11]

Buddhist path considers these essential for liberation.[10]

Sanskrit/Pali/Tibetan terms and translations[edit]

The three kleshas of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are referred to as the three poisons (Skt. triviṣa; Tibetan: dug gsum) in the Mahayana tradition and as the three unwholesome roots (Pāli, akusala-mūla; Skt. akuśala-mūla ) in the Theravada tradition.

The Sanskrit, Pali, and Tibetan terms for each of the three poisons are as follows:

PoisonSanskrit[12][13]PaliTibetan[12][14]Alternate English translations[12]Skt./Pali/Tib. Synonym[15]
Delusionmohamohagti mugconfusion, bewildermentavidyā (Skt.); avijjā (Pāli); ma rigpa (Tib.)
Attachmentrāgalobha'dod chagsdesire, sensuality, greedn/a
Aversiondveṣadosazhe sdanganger, hatred, hostilityn/a

In the Mahayana tradition moha is identified as a subcategory of avidya. Whereas avidya is defined as a fundamental ignorance, moha is defined as delusion, confusion and incorrect beliefs. In the Theravada tradition, moha and avidya are equivalent terms, but they are used in different contexts; moha is used when referring to mental factors, and avidya is used when referring to the twelve links.[1]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c d Robert E. Buswell Jr.; Donald S. Lopez Jr. (2013).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546, 59, 68. ISBN 978-1-4008-4805-8.
  2. ^ Damien Keown (2004). A Dictionary of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pp. 8, 47, 89, 106, 143. ISBN 978-0-19-157917-2.
  3. ^ David Webster (2005).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Routledge. pp. 100–105, 177, 236. ISBN 978-0-415-34652-8.
  4. ^ David Loy (2003). The Great Awakening: A Buddhist Social Theory. Simon and Schuster. p. 28. ISBN 978-0-86171-366-0.
  5. ^ Guido Freddi (2019). "Bhavacakra and Mindfulness".
  6. ^ Daniel Goleman (2003), pages 106, 111
  7. ^ Khenchen Konchog Gyaltshen (2010), p. 451.
  8. ^ David Webster (2005).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Routledge. pp. 100–105, 177, 236. ISBN 978-0-415-34652-8.
  9. ^ Dalai Lama (1992), p. 4, 42
  10. Jump up to:a b Gethin 1998, p. 81.
  11. ^ Steven M. Emmanuel (2015). A Companion to Buddhist Philosophy. John Wiley & Sons. pp. 435–436. ISBN 978-1-119-14466-3.
  12. Jump up to:a b c Padmakara (1998), p. 336, 414. (from the glossary)
  13. ^ Damien Keown. "akuśala-mūla." A Dictionary of Buddhism. 2004. Encyclopedia.com. (May 29, 2011). http://www.encyclopedia.com/doc/1O108-akualamla.html
  14. ^ Ranjung Yeshe Wiki - Dharma Dictionary. http://rywiki.tsadra.org/index.php/dug_gsum
  15. ^ Damien Keown. "moha." A Dictionary of Buddhism. 2004. Encyclopedia.com. (May 30, 2011). http://www.encyclopedia.com/doc/1O108-moha.html

Sources[edit]

Further reading[edit]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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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毒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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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物に擬せられた三毒(画像中央)。鶏は貪、蛇は瞋、豚は癡の象徴である。

三毒(さんどく)とは、仏教において克服すべきものとされる最も根本的な三つの煩悩、すなわち(とん・じん・ち)を指し、煩悩を毒に例えたものである。

三毒は人間の諸悪・苦しみの根源とされている。ブッダの説いた根本仏教、大乗仏教を通じて広く知られている概念である。例えば、最古の経典と推定される南伝パーリ語のスッタニパータに、を克服すべきことが述べられている[1]。更に中部経典(マッジマ・ニカーヤ majjhima nikāya)においては「三不善根」(skt:akuśala-mūla, pali:akusala-mūla)として記され、3つがまとめて論じられている。三毒(三不善根)は悪の根源であり、それが展開されて十悪となる。

三毒を構成する煩悩[編集]

三毒読み方サンスクリット語パーリ語意味象徴する動物
とんrāga, ラーガlobha, ローパ貪欲(とんよく)ともいう。むさぼり(必要以上に)求める心。一般的な用語では「欲」・「ものおしみ」・「むさぼり」と表現する。
しんdveṣa, ドヴェーシャdosa, ドーサ瞋恚(しんに[注 1])ともいう。怒りの心。「いかり」・「にくしみ」と表現する。
, 痴moha, モーハmoha, モーハ愚癡(ぐち)ともいう。真理に対する無知の心。「おろかさ」と表現する。 [2]

三毒を懺悔する経文として懺悔偈があり、真言宗・禅宗などでは読経の前に、浄土宗では読経の中で必ず唱えることになっている。

大乗仏教[編集]

大乗仏教でも妙法蓮華経譬喩品第三の、いわゆる「三車火宅のたとえ」に「ブッダは、衆生の生老病死、憂い、悲しみ、苦悩、無知、混乱や三毒から解放する為に三界に姿を現したのだ」と説かれ、三毒などの煩悩を家についた火に喩えている他、般若経華厳経にも記載がある。

存覚が「貪欲を生じ瞋恚(怒り)をおこすことも、そのみなもとをいえば、みな愚痴(愚かさ)よりいでたり」と述べるように、三毒の根源は(愚かさ)であるとされる。

なお、別に三惑ともいうが、後世の天台宗学における三惑(無明惑・見思惑・塵沙惑)を指して呼称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現在は三毒と呼称するのが常となっている。

大乗義章』五に「三毒通じて三界の一切煩悩を摂し、一切煩悩はく衆生を毒すること、それ毒蛇の如く、また毒龍の如し(三毒は三界の一切の煩悩を包んでいる。一切の煩悩が人々を毒するのは、毒ヘビや毒龍のようなものだ)」とある。また『法界次第初門』巻上には「毒は毒を以て義とす。(中略)出世の善心を壊すを以ての故に(三毒の毒とは鴆毒すなわち毒薬の意味である。解脱しようとする善の心を壊してしまうからだ)」とある。

三毒の誤解[編集]

俗に、「妬む、怒る、愚痴る」を「仏教の三毒」として紹介することがあるが、そのような用例は仏典にはなく、誤りである。これらも仏教では煩悩として克服すべきものだと考えられているが、この三つは大局的にはに包摂される煩悩である。また、は日本語での「愚痴をこぼす」ということではなく、もっと根源的な人間の「愚かさ」を表す概念である。チベット密教では「嫉妬」(妬み)は「無明」と「悪見」の二つを併せたものとされる

대승 불교 [편집] 대승 불교에서도 묘법 연화경 비름 제품 셋째, 이른바 '세 자동차 굳게 비유」에 「붓다는 중생의 생로병사, 근심, 슬픔, 고통, 무지, 혼란과 세 독에서 해방하기 위해 에 삼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 説か되어 세 독 등의 번뇌를 집에 붙은 불에 비유하고있는 다른 반야경 · 화엄경에도 기재가있다.存覚이 "욕심을 발생 瞋恚 (분노)를 일으키기도 그 근원을 말하면 다 푸념 (어리 석음)보다 말아하거나"고 언급 한대로, 세 독의 근원은 癡 (어리 석음)이라고되어 한다. 또한, 별도로 三惑이라고도하지만 후세의 천태종 학 세 혹 (무명 혹 ·보고 기대 · 塵沙惑)을 가리키는 호칭하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세 독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과가 있다. "대승 義章"다섯에 ​​"불 선근 통해 삼계의 일체 번뇌를 토시 일체 번뇌는 기능 (잘) 구 중생을 독살, 그것은 독사 같이, 또한 독 드래곤 如し (이상득은 삼계의 일체 번뇌를 감싸고있다. 일체의 번뇌가 사람들을 독살은 독사와 독 도마뱀의 일종이다) "라고한다. 또한 「법계대로 初門 "권상은"독은 鴆毒로써의와 있습니다. (중략) 출세의 선심을 끊는로써에 비추어 (세 독의 독은 鴆毒 즉 독약의 의미이다. 해탈하려고 한 선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버리기 때문이다) "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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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독의 오해 편집 

속칭 "시기하는 분노, 푸념」을 「불교의 세 독 '으로 소개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용례는 불전 아니라 잘못이다. 이들도 불교에서 번뇌로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이 세가지 대국으로 瞋에 포섭되는 번뇌이다. 또한 癡는 일본어로 '푸념'라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 인 인간의 '어리 석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티베트 밀교에서는 "질투"(질투)은 '무명'과 '부정 견」의 두 가지를 합친 것으로된다.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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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釈[編集]

  1. ^ 一般の発音は「しんい」であるが、連声で「しんに」と発音することが多い。

出典[編集]

  1. ^ パーリ仏典スッタニパータ, 1.蛇の章, 10-13, Sri Lanka Tripitaka Project
  2. ^ 第一回高野山大学ラマ教文化調査団報告書 (PDF)”. 高野山大学. p. 21 (1977年). 2017年8月17日閲覧。

関連項目[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