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천부경.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천부경. Show all posts

2023/05/23

생명이야기 - 최치원 - 풍류(風流) - 접화군생

생명이야기 - 풍류(風流)

생명이야기

[살림의 말들] 풍류(風流)


우리는 ‘풍류’하면, 일반적으로 고구려나 부여 등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단오나 가을걷이에 함께 모여(國中大會) 사흘 낮밤을 무리지어 음주가무(群聚飮酒歌舞)했다거나 선비들이 산천경계(山川境界)의 풍광(風光)을 완상(玩賞)하면서 탁주 한 잔 걸치고 시 한 수 읊는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들 머리에는 풍류하면 잘 ‘노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 노는 것’속에 생명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 춤을 생명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 채희완 선생님과 인디언 문화 속에서 현대문명의 대안을 찾고 있는 서정록 선생님의 글 속에서 확인해 봅니다.



생명원리와 가치는 한국고대사상의 한 상징인 풍류도(風流道)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풍류도는 화랑도(花郞道)와 맞닿아 있으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시원적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풍류도의 내용을 가장 적확하게 전해 주는 것으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의 글이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핵심은 ‘접화군생’에 있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 우주만물, 흙, 물, 바람, 공기, 티끌까지도 마음 깊이 가까이 사귀어 감동, 감화, 교화시키고 진화까지 시켜서 서로 완성되고 해방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의는 보이는 것만을 규명해 보려고 했던 과학 체계의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과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라고 하는 차원,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이들이 동시에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학문 체계의 요구이기도 하다. 특히 ‘비과학적인 것의 과학화’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접화군생을 사람 사이의 문제로 좁혀 보면 
  • 한 사람의 개체적 삶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닥치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된다. 
  • 말하자면 한사람의 개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 이는 개인이 지닌 무한한 창조적 개성이 계발되고 확산되는 것과 함께 인간해방, 노동해방, 사회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실현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 개인과 집단이 유기적이고 교호적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를 협동적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생명사상의 사회적 기초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특히 집단 속에 깔묻혀 갈 수밖에 없는 오늘의 대중 사회에서 창조적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제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새삼 중요한 문화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 채희완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 중에서



아침에 동녘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라.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맞아 보라. 시름에 잠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스치는 바람을 기억해 보라. 길가에 핀 풀 한 송이가 피워낸 꽃을 보라. 푸른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을 보라.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라. 그리고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밤하늘에 뜬 달과 별들을 보라. 그 해와 그 달과 그 바람과 비를 그저 단순한 물질덩어리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신성함이 내재해 있다. 해와 달도 신성하다. 바람도 신성하고, 비도 신성하다. 벌레도 신성하고, 풀 한 포기도 신성하고, 돌멩이 하나도 신성하다.



우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나의 숨에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숨결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에는 나의 숨결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동식물은 물론 바위도, 해도 달도 숨을 쉰다. 그리고 숨을 쉬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된다. 물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에 나뉘어 들어가 있는 물은 언젠가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무수한 생명으로 그 모습을 바꾸며 돌고 돈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은 하나다. 바람이 하나이듯이. 또 우리의 말과 행위는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세계의 ‘그물망’을 샤마니즘에서는 영혼으로 푼다. 그리고 그 영혼의 울림과 떨림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이라 하니, 그것이 바로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요, 그 근본원리를 말한 것이 ‘접화군생(接化群生)’인 것이다.



접화군생이란 무엇인가?



바람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 없다. 비가 없으면 식물은 자랄 수 없다. 물이 없어도 그렇고, 변화와 움직임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바람, 흐름, 결, 즉 풍류가 있기에 뭇 생명이 나고 자라는 것이다. 힘겨우면 힘겨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모두들 이 세상의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만나고, 서로를 공경하고, 서로의 존재를 섞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영혼을 가진 뭇 생명들이 나고 산다는 접화군생이다.



이러한 풍류의 삶 속에서는 일상과 종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곧 일상이 종교요 기도이다. 한마디로 일상 속에 신성함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극히 고귀해지는 순간이다. 이를 가리켜 최치원 선생은 ‘포함삼교(包含三敎)’라 하였으니, 이 땅에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들의 도(道)를 다 포함하는 아름다운 삶이 있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과 부족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침묵을 사랑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같으니” 그 안에 이미 유불선이 다 들어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고운(孤雲) 선생의 위의 말에는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그 아름다운 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 서정록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 이 글은 채희완의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과 서정록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두 자료 모두 <우리의 오래된 미래>, 모심과 살림 연구소 자료집, 2003)에서 풍류에 관한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

====

https://m.cafe.daum.net/seojinam/dCs5/145?listURI=%2Fseojinam%2FdCs5



최치원, 풍류(風流)란 접화군생(接化群生)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2.10.20


우리 전통사상에서 자유분방은 특이하지만 추앙받는 삶의 덕목이었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가 지나치게 형식화된 규칙이나 절차에 얽매이면 그 사회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삶의 멋과 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했다. 왕만 홀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백성이 함께 즐거워야 한다고. ‘여민락(與民樂)’이 좋은 정치인 것이다. 민중이 절로 흥이 나려면 지도자가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딱딱한 절차와 규정에 얽매이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삶의 원리인 풍류를 아는 지도자야말로 착하고 어진 백성(百姓)을 살리는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 출신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은 고조선의 전통사상에서 바람처럼 흐르는 멋과 흥, 신명이 나는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 선생은 이를 풍류도(風流道)라고 명명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생은 『난랑비서문(鸞碑序文)』에서 밝히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三敎: 유,불,선)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孔子)의 뜻이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지(宗旨)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최치원 선생에게 풍류란 방탕한 ‘주색잡기’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선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풍류도는 이기적 유아(唯我)주의도 아니며, 군중심리로 획일화된 전체주의도 아니다. 도리어 풍류도는 개체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휘가 공동체의 발전과 화합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선생은 풍류의 핵심 원리를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고 표현한다. “군생(群生)에 접(接)하여 화(化)한다.” 즉 “만물과 접하면서 교화한다(조화된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 풍류는 이기적인 충동에 휩싸여 무책임한 태도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방탕과는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의 자유로움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얻어진다. 이렇듯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가 뭇 생명과 만나 서로 신나는 품격으로 변모하는 것 이‘접화군생’의 진정한 뜻이며 풍류의 원리인 것이다.



글: 김성우 (철학저술가) 참조


[사자성어] 접화군생(接化群生) - 시니어신문

[사자성어] 접화군생(接化群生) - 시니어신문



[사자성어] 접화군생(接化群生)
이상만 전 성균관도덕부흥운동본부장
승인 2017.08.19




‘외딴 구름’, ‘바다 같은 구름’은 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의 호(號)다. 한자로 孤雲(고운)과 海雲(해운)이다. 같은 경주(慶州)가 본관인 조선 말기 최제우 선생의 호는 ‘물 같은 구름’으로 水雲(수운)이다. 선현의 이름이나 호를 함부로 운운(云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나 뭔가 공통점이 있음에 나름대로 느낌을 적어 본다.

고운 선생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접화군생(接化群生)’을 말씀하였고, 수운 선생은 동학(東學)운동의 창시자로 ‘접주(接主)’ 제도를 처음 폈다. 두 선현이 시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 운(雲)’자를 같이 쓰고 ‘사귈 접(接)’ 자를 중시하여 시대고(時代苦)를 겪는 백성의 삶을 위해 몸소 가까이 다가가서 실천궁행했다는 점이 똑같다.



접화군생(接化群生), 요즘 인물(人物)과 사귀고 모임에 생기를 불어넣고 삽니까?

종래의 인물 하면 대개 역사적 주요 인물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현재 살고 있는 인간과 사물(事物)을 합해서 말한다. 사물에는 동물과 식물과 광물이 모두 포함된 개념이다. 그만큼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다변화하여 폭과 깊이가 다양하여 포괄적인 양상을 띤다. 한 예로 사람과 같이 사는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이 저변 확산되어 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체가 늘어날 정도로 세상사가 변모되었다.

여기에도 경제적 영향이 미쳐 경기가 불황이거나 개인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학대를 하거나 내다 버리는 일이 증가한다. 이에 비하면 그나마 늙은 부모를 모시기 어렵다고 요양원에 맡기는 것은 마지막 양심의 발로이다. 늙은 부모가 건강하고 가진 재산이 있으면 접촉(接觸)을 자주 하지만 반대로 병들고 가난하면 자식들이 서로 접근(接近)을 꺼리는 것이 요즘 일반적인 세태가 되었다.

‘사귈 접(接)’자는 ‘손 수(扌)’변에 ‘처녀여자 첩(妾)’자의 합자로 “처녀여자에게 가까이하여 교제하는 뜻”이 있다. 접(接)자는 원래 이성(異性) 간의 접촉으로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담긴 문자이다. 이처럼 접화(接化)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포함한 만물을 사랑의 감정으로 가까이 하여 이치(理致)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홍익인간이 되어 만백성이 무리 지어 잘 살도록 하는 것이 군생(群生)이다.

예전엔 각 지역에서 사랑의 선각자들이 나와 유교, 불교, 도교가 성행하여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추구하고 문화와 문명을 창조하여 접화군생으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순조롭지 않았던 것은 일부 독선적 정치권력자의 출현으로 이웃을 침략하여 지배하려는 과욕을 부렸고, 그러한 독재정치 과정에서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걷고, 내부적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등 갑질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곤경에 처하고 희생되자 선비와 농민 등이 분연히 일어나 민란을 일으켜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돈의 악순환이 생겼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앞으로도 좋은 정치인은 국민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접화군생하는 인물이어야 함을 확실히 하고, 진정으로 가장 국민의 심부름을 담당할 사랑의 화신이 될 만한 국회의원 후보나 대표자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문명의 이기가 국민 개개인의 손 안에 있다. 접속(接續)만 잘하면 좋은 정보와 진리를 깨닫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야말로 국민주권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선성선현(先聖先賢)의 말씀을 본보기 삼아서 공적인 국민주권을 행사하느냐, 사사로운 자의에 의해서 행사하느냐에 달렸다. 이 점에서 만인의 진리인 뿌리 의식을 강조하고 접화군생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괴물 짐승사회로 변질된다는 우려와 동시에 그에 대한 방관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신라 말기에 이미 고운 최치원 선생은 이점을 꿰뚫고 “난랑비서문”에 우리나라에 “풍류(風流)”라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유불선(儒佛仙) 3교를 포함하였다고 밝혔다. 당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와 천재적 경륜을 발휘했으나 출신 성분으로 인해 차별을 받자 스스로 지방 태수를 자원하여 민정을 살피고 접화군생의 삶을 살았다. 마침내 산천을 돌며 자연 속에서 진리의 풍류를 즐기다가 묘향산 석벽의 녹도문(鹿圖文) 천부경(天符經)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에 대한 진의를 전도하기 위해서 한자로 번역해서 후대에 전파했다.

이후 후삼국의 전란을 겪고 고려 왕조가 섰으나 외침의 고난 속에서 전전긍긍하다가 조선이 서면서 대륙의 간섭을 받으며 천부경은 금서로 지정되는 수난을 겪고 몇몇 선각자의 품에서 품으로 비밀리에 전해왔다.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조선 말기에 수운 최제우 선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동학(東學)운동의 선구자의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백성을 만나 설교를 하여 지역별 대표인 접주(接主)를 두고 상고시대로부터 전해 온 한겨레의 영혼(靈魂)과 얼과 넋을 계몽하여 “사람이 곧 한울”이라 하여 민족의 단결과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는 분명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사상을 계승한 징표이며 장차 우리 민족이 전승해 나아갈 주체적 방향이라 하겠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성균관 문묘(文廟)와 전국 234개 향교 문묘에 위패가 모셔 있는 대표 유학자이며 정치가이며 사상가로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수행자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을 창시하여 접주(接主)제도를 펼쳐 우리 민족사상사에 큰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고운 최치원 선생의 공덕을 직간접으로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결국에는 천손민족의 후예인 우리가 분발하여 하느님 말씀인 천부경(天符經) 정신을 재조명하고 인간이 하나 되는 길을 열어감[開闢]으로써 비로소 인류화평(人類和平)의 초석이 다져지리라 전망된다.

Philo Kalia | 몰트만의 하나님 사상은 생동감이 넘친다.

Philo Kalia | Facebook: Philo Kalia ·

Philo Kalia

*신학독서회 후기
몰트만의 하나님 사상은 실제적이고 생생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고갈되고 목마른 생명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하며 생명력을 마시면서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생명의 하나님을 밝히 펼치는 저자의 정열에 감염되고 지성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더라도 독자가 처한 상황과 자세에 따라 전혀 감동이 오지 않을 수 있다.

1. 생명력.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모든 고갈된 생명을 소생(蘇生)하게 하는 분이다. 사실 하나님은 주린 모든 생명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려고 가까이 다가간다. 하나님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하나님이요 디오니소스적 생명의 하나님이다.
몰트만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생명의 상호 내재, 상호 내주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맛보는 기쁨은, 곧 인간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살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 살 때 ‘살림’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내어주는 공간 안에서 더부살이, 기숙이나 하숙 살이 등, 남의 집살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을 짓고 살면서 풍성한 살림을 누린다. 하나님의 거주(Einwohnung)는 인간의 영혼과 몸을 뚫고 들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의 의미이다.
‘생명’의 하나님이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로써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힘이라면, ‘생활’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며, ‘살림’은 생활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인문적 행위이다.(조성환) 생명이 약동하는 살림살이로서의 생활은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맛보는 기쁨이며 동시에 인간 ‘안’에서 하느님이 누리시는 기쁨이기도 하다.
몰트만은 “살아 있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 개념을 전제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형성된 몸의 운동과 영혼의 부동의 이원론을 비판한다. 성서의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불변(immutabilitas)하거나 수단 당하지 않는(impassibilitas) 하나님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움직이는 동자’로서 경험한다. 신의 자기 움직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과 영원, 시간과 영원은 결코 반대 현상이 아니며 서로 적대하며 배제하지도 않는다.

2. 시간과 영원. 이러한 시간과 영원의 이해로부터 몰트만은 영원하신 하나님은 곧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거처이고 곤궁할 때 쉼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 무상한 시간의 한가운데 임재하셔서 인간이 몸담아 거처하도록 안전한 너르고 열린 공간이 되어 주신다. 그분의 임재 속에 영원과 시간은 더 이상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인 하나님의 살림집에서 시간은 영원으로 위상변화를 한다. 이처럼 몰트만은 영원을 삶의 체험을 통해 설명한다.
주님, 당신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 당신의 영원무궁한 영이 만물에 있나이다(지혜서 11:24-12:1)
생명긍정의 최고 형태는 삶을 즐기는 일이다. 생명을 즐긴다는 말은 삶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살림’이 생명이 뛰놀고 사랑이 넘치며 자기가 살아 있는 생활이라면, 탄식과 환난과 곤고함, 억압과 곤궁과 굴종은 생명이 위축되고 자유를 빼앗긴 노예살이의 삶, 곧 反생명적 삶, 생명성의 부정이다. ‘살이’는 ‘살림‘이 위축되고 억눌린 삶의 형태다, 고생살이, 시집살이, 처가살이 등의 삶의 표현들이 잘 보여준다.
3.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롬 4:17)이다. 따라서 삶 가운데서도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일반적 지혜는 살아 있는 신앙에는 맞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 안에 부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생명이 태어나 죽어 다시 생명으로 흡입되어 무한한 생명이 되면 비로소 무한한 생명이 유한한 생명 속에 나타난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움직이는 것은 바로 생명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최고의 형식이다.”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생명이다.
생명이 최고로 생동하는 모습은 가장 깊은 곳에서의 타율과 소외, 주체가 상실되고 마비된 인성과 의식을 극복하고 자신의 모습을 재정립하는 자생(自生)이다. 헤겔의 말처럼 영의 삶이란 “죽음을 두려워하고 폐허에서 순수하게 자신을 보존하려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걸머지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해내는 삶”이다. 횔더린은 “화해는 싸움 한 복판에서 이루어지고, 갈라진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말로 영원한 생명력을 표현했다. 한국인은 영원한 생명력의 사상적 동력을 ’하늘‘에서 찾았다. 하늘(종교)은 열과 빛의 원천이며, 인문(人文)을 만나면 열은 문화의 힘이 되고 빛은 예술의 색채가 된다.







All reactions:71Taechang Kim and 70 others


9 comments




Philo Kalia



Taechang Kim

땅 속으로 파 드는 힘과 동시에
하늘 위로 치솟는 힘이 수직으로 작동하는 생명력인데 특히
땅속으로 뿌리뻗는 식물적 생명력과 하늘 위로 뻗어 오르는
인간적 생명력이 역방향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相反相生하고 한편 수평으로 개체생명체사이를 연결 단절 경합시킴
으로서 진화의 힘으로 작동하는(역시 상반상생하는) 것이 동물적 생명력의 특징이라는
생명파악이 한 사상 한 철학적
생명관의 일면입니다. 수직 수평 양지평으로 천지인 상관연동하는 생명력을 천부경에서
는 "人中天地一" 이라고 압축
표현하고 있습니다.


Philo Kalia

Taechang Kim 한사상 생명이해를 요약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






몰트만 신학 새롭게 읽기 
신옥수 (지은이) 새물결플러스 2015-09-04
정가
16,000원
판매가


9.3
100자평 3편




책소개
국내에 몰트만 신학을 소개하고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온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옥수 교수의 첫 번째 저술. 몰트만의 폭넓은 조직신학적 지평 전반을 꿰뚫는 구조적 특징으로서 만유재신론적 비전을 포착하고 이를 그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로 삼아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현대 조직신학 논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놓인 주제들에 관해 몰트만의 사상과 그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보다 균형 있는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전대미문의 위기를 몰고 오는 현대적 상황에 맞서 교회와 신학의 사회정치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현실적 이슈들과 개방적으로 대화했던 몰트만의 작업은, 윤리적.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한 한국교회의 오늘에 대한 분석과 내일을 위한 개혁 방향에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

목차
차례
머리말
제1장 몰트만 신학 방법론의 구조와 특성
제2장 몰트만의 신론
제3장 몰트만의 “하나님의 고난가능성” 이해
제4장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제5장 몰트만의 창조 이해에 나타난 “하나님의 케노시스
제6장 몰트만의 성령론
제7장 몰트만의 “우주적 성령”
제8장 몰트만의 구원론
제9장 몰트만의 교회론
제10장 몰트만의 우주적 종말론
제11장 몰트만 신학에 나타난 만유재신론적 비전
제12장 한국에서 몰트만의 수용과 이해
접기






책속에서


그동안 몰트만 신학의 구조와 성격에 관한 연구들은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그가 제시한 획기적인 신학적 통찰과 독특한 대안적 사고 는 새로운 화두가 되어 활발한 신학적 토의의 물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표는 60여 년에 걸친 몰트만의 신학 여정에 적잖은 사상의 전이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 전체 를 꿰뚫는 일관된 주제와 핵심적인 성격이 있음을 발견하여 이를 그의 주 저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만유재신론의 비전이 몰트만 신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몰트만 신학의 구조와 성격 및 방향을 만유재신론적 비전(panentheistic vision)으로 규정하고 이를 짜임새 있게 분석함으로써 그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시도한다. 특히 그의 삼위일체론적, 자원하는, 종말론적(trinitarian, voluntary, eschatological) 만유재신론의 비전을 몰트만 신학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로 삼는다. 이는 신론, 삼위일체론, 창조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의 폭넓은 지평을 꿰뚫는 예리한 시각을 제공해준다. (머리말 중에서)


몰트만의 다양하고 창의적이며 건설적 특성을 지닌 신학 방법은 현대신학 논의에 지대한 공헌을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와 신학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미래신학의 형성을 위해 유용한 통찰과 방향을 제시해준다. 비록 개념적 불명료성, 논리적 정합성의 결여, 논리적 집중성의 약화 등이 적잖게 발견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몰트만이 끊임없이 추구한 수용적?비판적 대화를 통한 독창적 대안의 제시라는 신학함의 자세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시대와 사상과의 지속적 대화 못지않게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을 통한 영감 있는 통찰력과 직관 속에서 우러나온 다양한 제안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그의 신학적 특성이 흠뻑 녹아들어 있는 신학 방법론은 오늘과 미래의 교회와 신학을 위해 활기찬 비전과 전망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제1장 중에서)


몰트만은 성서적 내러티브에 비추어 특히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재정의한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유일한 전능성은 고난당하는 사랑의 전능한 능력이다.…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본질이다.” 몰트만의 견해와 일치하여 카스퍼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의 계시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모순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성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고쳐 쓴다. “하나님은 이런 겸비 안에서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런 내어줌 속에서보다 더 영광스럽지 않다. 하나님은 이런 무력함 속에서보다 더 능력이 크지 않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성에서보다 더 신적이지 않다.” 이렇게 몰트만의 신론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전능성은 그분의 사랑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된다. 그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은 자기희생적 사랑의 전능성 안에서 계시된다. (제3장 중에서)


케노시스 사고에 관한 논의는 20세기 후반 이후 신학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 중 하나다. 여러 현대신학자와 과학자들이 이런 간학문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 중 몰트만은 창조의 케노시스 신학의 위대한 주창자라 할 수 있다. 창조에 관한 몰트만의 케노시스 사고는 유대교 및 현대과학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는 창조를 하나님의 자발적 자기제한의 사랑의 행동으로 본다. 이런 자기낮추심의 사고는 고전적 유신론과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동시에 여러 이점을 보존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고전적 유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하나님 안으로 가져온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현대신학 논의를 위해 하나님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일관되게 제안한다. 과정신학의 만유 재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긍정하면서도 고전적 유신론을 넘어서서 계속적 창조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창조를 과학적 지식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개방적 체계로 말한다. 또한 자발적 자기비움의 행동으로서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주장은 고전적 유신론의 전능성이나 주권성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견해에 도전한다. 또한 이것은 세계 안에서의 악과 고난이라는 당혹스런 질문에 대한 좀 더 만족스러운 응답을 제공한다. (제5장 중에서)


몰트만의 교회론은 정체성과 현실관련성의 위기에 처한 현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의 윤리적.공적 기능의 상실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영성의 사사화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반기독교적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올바른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신학적 논의와 이에 기초한 올바른 실천이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제9장의 연구에서는 몰트만의 교회론이 한국교회가 이런 비판과 도전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현실을 변혁하는 교회로 새롭게 거듭나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주역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밝혔다.
몰트만은 교회론에서 여러 중요한 통찰과 안목을 제공하고 있다. 즉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 및 교회의 관련성에 대한 물음이다. 몰트만의 교회론에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종말론적 교회의 긴장감이 스며들어 있다. 또한 몰트만은 위기의 시대에 수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의 새로운 방향 설정에 관한 물음에 직면하여 진지하게 응답하며 더 나아가 대안을 모색한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해 요청되는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의 작업은 교회의 자기성찰과 개혁을 위한 중요한 자료와 전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사역의 방향을 재정위(re-orientation)하며 자기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제9장 중에서)
---
저자 소개
지은이: 신옥수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나의 하나님은 슈퍼울트라 ‘을’>,<장신신학의 어제와 오늘>,<대화 하는 신학> … 총 9종 (모두보기)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옥천에서 자랐으며 대전여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전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B.A.)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마쳤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를 거쳐, 풀러 신학교에서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에게서 박사학위 논문 지도를 받아, 철학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지난 20년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교회를 섬기는 신학의 실천적 과제에 역점을 두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현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섬기면서, 신학생뿐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가까이 다가가는 알기 쉬운 신학 저서들을 기도로 준비하며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새롭게 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저서로는 『몰트만 신학 새롭게 읽기』(새물결플러스), 『대화하는 신학』(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등이 있으며, 스탠리 그렌츠의 『조직신학-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CH북스), 제프리 브로밀리의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개관』(CH북스), 다니엘 밀리오리의 『기독교조직신학개론-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공역, 새물결플러스)을 우리말로 옮겼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몰트만 신학 새롭게 읽기』는 국내에서 몰트만 신학을 깊이 있게 소개하고 창의적인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온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옥수 교수의 첫 번째 저술이다.
저자는 몰트만의 폭넓은 조직신학적 지평 전반을 꿰뚫는 구조적 특징으로서 만유재신론적 비전(panentheistic vision)을 포착하고 이를 그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로 삼아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자원하는, 종말론적(trinitarian, voluntary, eschatological) 만유재신론의 비전을 신론, 삼위일체론, 창조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종말론 등 조직신학의 전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그의 작업이 전통적 신학에 창의적으로 기여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현대 조직신학 논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놓인 주제들 즉 “하나님의 고난가능성”, “하나님의 케노시스”, “사회적 삼위일체론”, “우주적 성령”, “우주적 종말론”, “만유구원론” 등에 관해 몰트만의 사상과 그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보다 균형 있는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몰트만의 신학이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지점은 그의 교회론이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전대미문의 위기를 몰고 오는 현대적 상황에 맞서, 교회와 신학의 사회정치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현실적 이슈들과 개방적으로 대화했던 몰트만의 작업은, 윤리적·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한 한국교회의 오늘에 대한 분석과 내일을 위한 개혁 방향에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도전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동시에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는 몰트만의 신학 사상과, 그것을 정리하고 해석해서 한국의 상황 안에 이식하는 저자의 기획이 한국교회와 신학에 양질의 자양분과 실천적 동력을 제공하리라고 기대된다.
-----


카테고리
현재 0/280byte (한글 140자 이내)
스포일러 포함
등록
구매자 (3)
전체 (3)


hiphop99dan 2015-10-27
메뉴
전반적으로 정리가 잘되어있습니다. 좀 깊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장이 술술 읽히진 않았습니다만, (만유재신론이니, 우주적 그리스도니, 통전적 성령론 등의 개념이 익숙치 않아서ㅎㅎ) 몰트만 신학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공감 (1) 댓글 (0)



민방위의편지 2022-03-28
메뉴
어떤 목사님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근데 정말 괜찮은 책이었다. 예상 외로 좋았음.
공감 (0) 댓글 (0)



아침열기 2022-06-22
메뉴
주제에 따른 내용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몰트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도움이 됩니다.
공감 (0)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