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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에 조성택 교수 - 불교신문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에 조성택 교수 - 불교신문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에 조성택 교수
 엄태규 기자 승인 2011.10.31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문제’…12월22일 시상식
불교학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계간지 <불교평론>이 수여하는 ‘올해의 논문상’ 수상자에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선정됐다.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심사위원회는 오늘(10월31일)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문제 -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관한 비판’ 주제 논문을 올해의 논문상 수상 논문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올해의 논문상에 선정된 논문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민족문화 연구> 53호에 게재된 논문으로, 근대불교사를 친일 대 민족주의의 이분법적 구도로만 기술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민족주의적 역사기술 방식에 대한 성찰과 반론을 담고 있다.

심사위원회는 “조성택 교수의 논문을 새로운 시대 상황에 걸맞은 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고민으로 평가했다”면서 “올해의 논문으로 선정함으로써 근대불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기술에 대해 성찰하고, 불교의 보편적 자비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조성택 교수는 “수상 논문은 근대불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문제의식과 학술적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불교평론>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이 기쁘고 영광스러우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노작(勞作)을 쓰고자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시상식은 오는 12월22일 오후6시 서울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열리며, 시상식에서 조성택 교수에게 상금 500만원과 상패가 수여될 예정이다.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교가 쇠락해 한국사회가 쇠락하는 것의 고민 있어야...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 우리불교신문 인터넷WTV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교가 쇠락해 한국사회가 쇠락하는 것의 고민 있어야...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 우리불교신문 인터넷WTV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교가 쇠락해 한국사회가 쇠락하는 것의 고민 있어야...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
 

"2500년 역사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야 한다. 내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이유도 있는 길을 가지않고 새롭게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불교는 문명사적으로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며 "현재 한국불교만 어렵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가 없어져도 불교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조교수는 "오늘 토론에 와보니 여전히 '출가자가 준다' '신도가 준다' '교세가 약화된다'등 밥그릇 걱정만 하고 있다"며 "큰 틀에서 한국불교의 상황을 이해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조계종의 ‘민족불교’라는 자기정체성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불교가 처했던 딜레마적 상황의 부산물”이라며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근대화’와 ‘일본불교’를 떼어 놓는 것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와 근대를 함께 결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 있어서 ‘근대’란 곧 일본불교를 매개로 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교수는 “‘대처’의 문제가 핵심적 사안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이다”묘 “당시 한국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혹자들은 ‘대처’의 문제를 일본불교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불교의 한 근대적 모습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처의 문제를 두고 근대한국불교의 대표적 개혁주의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었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근대불교사를 통해서 ‘근대화’와 ‘정체성 확립’의 두 가지 과제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었지만,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도 없었다”며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고 강조했다.
조교수는 “식민지라는 상황 하에서 대립적 관계로 설정된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문제가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과정이 곧 현 조계종단의 성격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며 “비구승만으로 구성 된 소수파에서는 당시의 ‘반일정서’를 등에 업고 왜색불교 추방이라는 미명하에 다수파를 종단에서 몰아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대처불교가 곧 일본불교이며 非佛法이요 佛法을 훼손하는 불교라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당시 소수파 비구승들의 신념이기도 하였다”며 “ 그들은 일본불교로부터 구별되는 한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곧 석존 이래의 정통 불법을 유지하는 것이며 1600년 '민족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불교의 또 다른 주요 과제인 불교근대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조교수는 “결론적으로 ‘한국적 정체성’과 ‘근대적 유용성’의 두 과제가 민족불교 대 왜색불교의 구도로 왜곡·변질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은 전통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정통 불법의 수호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며 “이 과정에서 근대적 유용성을 모색하던 한국 근대불교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은 친일과 민족, 혹은 파계 대처와 청정 비구의 대립적 구도 하에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글쓴날 : [11-01-2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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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교수 “한국불교, 대승불교 맞나?”

 조성택 교수 “한국불교, 대승불교 맞나?”

POSTED ON 2013-06-03 BY 대한불교진흥원

조성택 교수 “한국불교, 대승불교 맞나?”
우리는선우 토요법석서 ‘서양인이 불교 매료된 이유’ 주제 특강

2013년 06월 01일 (토) 17:50:53 조현성 기자 cetana@gmail.com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고 하는데 조계종이 과연 대승불교인지 궁금하다. <금강경>에서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는데, 한국불교는 그렇지 못하다.”

조성택 교수(고려대·우리는선우 이사장)는 1일 서울 장충동 우리함께빌딩에서 열린 우리는 선우 6월 토요법석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조 교수는 ‘서양인이 불교에 매료된 이유’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서양인이 불교에 매료된 까닭을 석가모니 부처가 보여준 혁명 같던 요소들로 설명했다.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도 서구전통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불교적 요소에서 서구인들은 인류 미래의 기원을 발견했다는 설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오라’ 할 때 석가모니는 출가 강조”

조 교수는 서양문학 최초문학으로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본보기로 들며 강연을 시작했다.

조 교수는 “기원전 8~9세기 그리스신화를 재구성한 <오딧세이>는 귀향·귀환을 주제로 읽혀진다”며 “당시 왜 귀향·귀환이 강조됐는지는 그때부터 인류가 농사를 짓거나 항해를 항거나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구조가 성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시는 각자가 집을 나가 재화를 만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고 했다.

조 교수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을 자아가 집에 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오딧세이’가 칼립소가 제안한 불사(不死)를 거절하면서까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은 자아 찾기 위함이라는 해석이다.

이어 “그러나 기원전 5~6세기 석가모니 부처는 자아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며 “잉여생산물이 생겨 밖에서 벌어들인 재화를 집안에 축적하는 삶이 윤택해진 시기에 부처님이 집을 나가라고 한 것은 (재화를) 축적하는 것 자체가 욕망의 근원이고 고통의 뿌리가 되는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반복된다. 석가모니의 출가 독려와 같은 움직임이 1960년 미국에서는 히피운동으로 재현됐다”고 했다.

조 교수는 “최근 젊은이들은 국경을 초월해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삶을 꾸리는 유목민적 인 삶(nomad culture)을 살고 있다”며 “모바일폰도 그 본보기이다. 집전화와 달리 고정된 장소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조 교수는 “돌아갈 곳 없이 사는 이 시대에 다시 불교가 거론되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라며서도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인도 젊은이를 흉내 내 출가를 했다. 그런데 집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산중에 들어가 자기들끼리 가족(문중)을 새로 만들었고, 문중끼리 싸움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자끼리 가족(문중)을 이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왜 굳이 집단을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인간이 믿지 않으면 神은 죽는다”

조 교수는 3000년간 계속됐던 고대 이집트 문명의 태양신 레(Re)를 언급하며 “사람이 믿지 않으면 신도 죽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종교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불교는 2500여 년, 기독교는 20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이 등장했던 기원전 6세기께는 중국에서는 공자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등 현인이, 중동에서는 선지자들이 등장한 시대였다”며 “인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다 왜 이들의 저술인 ‘고전’을 참조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부처님 출현 의미는 절대자를 인간 속으로 끌어들인 것”

조 교수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의미는 인류 문명 최초로 밖에 있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인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부처님 재세시 바라문교는 절대를 밖에 뒀다. 때문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사제(바라문) 위상이 높았다. 가톨릭도 사제를 통하는 것과 같은 구조라는 설명이다.

밖에 있는 절대를 내 안으로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 우파니샤드 시대였고, 이 시기 범아일여(梵我一如)가 주장됐다. 그러나 밖에 있던 절대는 없애지 못했다. 내 안에 비슷한 것이 있다고만 했다.

조성택 교수는 “외부에만 존재하던 절대를 완전히 외부에서 지운 것이 부처님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지금 불교는 인간 외부에 또 무엇인가를 만들어 냈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불교는 내 안의 것만을 믿는 고급종교의 모습을 갖춘 불교와 외부의 절대를 신앙하는 불교 등 모든 종교형태가 다 들어있다. 이것이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심 갖는 이유의 하나”라고 말했다.

“내 안의 절대 인정하면 ‘연기’는 자연스런 논리”

조 교수는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당시 석가모니 부처의 선언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부처님 탄생계인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본보기로 들며 “석가모니 부처는 인간의 주체성 강조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한 존재이며,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당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었다. 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강조했다”며 “이것이 부처님이 탄생한 이유·의의”라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내 밖의 신을 지워버리고 나면, 내가 해야할 것은 내 행위와 결과간의 도덕적 인과관계를 살펴야한다”며 “밖에 신을 뒀을 경우 도덕은 신과 나의 약속관계이지만 신이 없어지고 나면 내 행위의 선악 여부가 내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업”이라고 설명했다.

“의업(意業) 강조한 종교는 불교가 유일무이”

조 교수는 “어떤 종교도 인간의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업이라고 말한 종교는 없다”며 “ 제사를 지내고 할 것인가는 신업(身業), 어떻게 신을 칭송할 것인가는 구업(口業)이지만, 그 이전에 의업(意業)을 언급한 것은 불교가 최초”라고 말했다.

그는 “(의업이 강조되는 까닭에) 마음의 업을 해결하는 마음수행이 중요하게 됐다”며 “불교가 기존 인도 명상이 다른 것은 선정과 지혜의 결합에 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무속에는 지혜가 없어 윤리적이지 못한 것”이라며 “명상(수행)은 지혜와 결합돼야만 불교인으로서, 스님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언어가 갖는 권위 경계했는데…”

조성택 교수는 “부처님은 자신의 비언어적 체험을 언어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했다.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 제자를 찾아갔다. 불교 이전과 이후에 어떤 종교에서도 제자를 찾아다니는 종교는 없었다“고 했다.

“당시 인도에서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된 것이 중요한 내용을 의미했을 정도로 권위가 컸지만 부처님은 자신의 말씀이 범어로 기록되는 것만을 강조하지 않았다”며 “이는 언어의 권위를 타파했던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언어의 권위를 부정했던 부처님과 달리)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한자 영어에 집착하고 있지 않느냐”며 “이는 한자 영어를 특권화시킨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부처님이 당시 범어가 아닌 현지어를 강조한 것은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인식했던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며 “우리가 당연시하는 이런 점들이 서양인들에게는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기사 이어집니다)
<기사 제공 = 불교닷컴>

붓다의 옛길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조성택 교수

붓다의 옛길
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조성택 교수 | 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실론섬 2015. 3. 2. 14:05http://blog.daum.net/gikoship/1578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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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문화아카데미(대표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2015 종교포럼을 시작했다. 조성택 대표는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개신교), 김근수 소장(해방신학연구소, 가톨릭) 등과 올 한 해 동안 이야기 마당을 펼친다. 이들이 여는 이야기 마당, 2015년 포럼의 이름은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 경계너머, 지금여기’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가 기조연설을,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이 사회자를 맡는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종교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응답해왔고, 응답할 수 있을까? 각 종교 전통에 몸담고 있는 대표적 지성인 조성택, 김진호, 김근수 세 사람이 만나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참석자와도 소통한다. 

종교포럼은 2월부터 11월까지 총 9회에 걸쳐 진행된다. 각각 ‘무엇이 걱정인가?’ ‘경계너머’ ‘지금여기’라는 세 개의 큰 틀을 가지고 오늘날 주류종교가 처한 문제, 종교 간 소통과 다원주의, 그리고 한국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논의한다. 

1회 종교포럼은 ‘무엇이 걱정인가’라는 큰 주제 속에 조성택 교수가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를 문제로 지적하고, 이에 대한 이웃종교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불교닷컴>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종교포럼을 연말까지 강연 원고와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0. 들어가는 말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볼 필요가 때로 있다. 안에서는 전도(全圖)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늘 사회적 ‘상식’일 수는 없지만 때로는 상식의 눈으로 종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불교에서 때로 깨달음이 ‘다반사’(茶飯事)임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하지만 그 ‘예사로움’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깨달음을 더욱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전통 밖에서 그리고 상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생각해보자. 우선 깨달음은 ‘신념’이 아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또는 사회가 통상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해체하는 일이다. 주어진 의미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소위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타당성 여부는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일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은 요컨대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만약 깨달음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일이 있다면, 혹은 외쳐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 깨달음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회자되는 깨달음이란, 스스로 나서서 ‘깨달음은 좋은 것’이라고 외쳐야만 하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난맥상의 한 중심에는 ‘깨달음’의 문제가 있다. 요컨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거의 교과서적 지식처럼 불교계 내외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동양종교, 특히 불교가 겪게 되는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문제다. 전자의 문제가 ‘도인불교’(道人佛敎)라는 말로 요약된다면 근대유럽의 식민주의가 야기하는 후자의 문제는 ‘불교는 체험의 종교’ 혹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잘못된 명제일 것이다.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깨달음 지상주의(至上主義)’ 혹은 ‘도인불교’의 폐해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편의 논문과 시사적인 글을 통해 언급해왔다. 따라서 오늘 발제에서는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을 전제로 이러한 현상의 또 다른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활발한 토론을 위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대략적인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졸고 “도인불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불교”를 이 글의 말미에 별첨하고자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별첨의 글을 먼저 읽는 것이 본 발제의 요지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일견 그렇다. 

불교는 불(佛), 즉 ‘깨달은 자’(ssk. Buddha, Awakened)의 가르침이다. 불교전통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ssk. anuttarā samyaksaṃbodhi,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깨달음은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특권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또한 스승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교의 삼보(三寶)를 이루는 법(法)과 승(僧) 또한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이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공동체로 여겨진다. 



불교사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불교사는 곧 깨달음에 관한 해석의 역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현생(現生)이 아니라 먼 훗날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未來)의 일로 수정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수행주체가 등장했지만 보살의 원어(原語), ‘보디-사트바’(깨달음-존재)가 의미하는바, 깨달음은 여전히 대승불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하여 선불교를 낳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불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위에서 약술한 내용들은 오늘날 한국불교인들이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이며 불교계 바깥의 지식·교양인들 수준에서도 상식적인 불교관이다. 불교를 깨달음 전승의 역사라 믿고 깨달음을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이러한 불교관이 ‘교과서적’ 지식처럼 된 데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19세기 후반 시작된 유럽의 근대불교학이다. 당시 유럽학자들의 문헌학적 연구에 의해 재구성된 불교의 모습이 가장 정통적인, 본래의 ‘오리지날불교’(origianl Buddhism, 근본불교)로 간주되고, 그들이 당시 근대 동양에서 목격하고 있던 동시대의 불교는 그것에 비추어 무언가 모자라고 일종의 ‘타락한’ 형태의 불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양의 불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양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전통을 스스로 폐기하거나 바꾸어 갔다.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일종의 계몽적인 ‘철학’이었으며 그 철학은 바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깨달음을 영어로 ‘enlightenment’(lit. 계몽)라고 번역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편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본은 대승불교와 함께 그들의 ‘젠’(zen, 禪)을 동양정신의 정수로서 서양에 소개하였다.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 (D.T. Suzuki, 1870-1966)가 대표적 인물이다. D.T. 스즈키는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원이자 ‘과학적 종교’(scientific religion)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폴 캐러스(Paul Carus)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후원과 도움 하에 서구문화를 익히는 한편 (일본)불교를 서구에 소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D.T. 스즈키는 현상학과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연구에 힘입어 그들의 용어로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선불교 전통을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인 어떤 ‘체험’[혹은 ‘경험’]으로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일종의 ‘순수경험’(pure experience)이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담론적 신앙’(discursive faith)과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을 ‘발명’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유한 D.T. 스즈키의 선불교 해석은 그 영향이 단지 서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일제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스즈키류’ 혹은 ‘스즈키 아류’가 한국 선불교 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명법스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확하다. 



조선역사와 문화에 가해진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불교는 일본의 역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였으며 “선을 낭만화시킴으로써 서양의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사이에” 두었던 스즈키의 해석은 대부분의 한국 선불교 담론에서 반복되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 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 출재가를 막론하고 또 직접 수행을 직하든 하지 않든 간에 - 근기나 수행의 방식을 따지거나 우선순위를 논할 뿐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고 불교의 중심이며 요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의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인 것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니라 수행의 ‘걸림돌’로 여기진다. “선방에서 몇 철을 수행해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세속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불자들이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켜보고 관전평을 하는 ‘관중’이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깨달았다더라” 혹은 “못 깨달았다더라” “A 스님 보다 B 스님의 깨달음이 더 크다” 등등의 관전평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음을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의 문제는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신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이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의 초월적인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소위 큰 스님의 말씀일수록 그런 기대감이 더 두드러진다.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고대한다. 불행한 일이다. 일상적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2. ‘깨달음’이라고 하는 오만과 편견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사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을 거의 전적으로 어떤 특수한 심적 체험으로 환원해버린 것은 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온 영향이다.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로버트 지멜로(Robert Gimello)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이 의미하는 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즉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그것에 이르는 수단과 결코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목적이거나 깨달음의 실현이 수행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의] 실현과 수행이 일체(unity)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혹은 수행이 [깨달음의] 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깨달음을 전적으로 자발적이고(autonomous) 자체발생적이며(self-generated), 그리고 완전히 선험적인(transcendent) 체험으로만 여기려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주의(注意)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실제로 이 점은 [불교적] 깨달음을 일종의 ‘체험’ - 순수경험, 종교적 체험 혹은 신비적 체험 등 - 으로 이해하는, 근대적이며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을 차단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불교전통에서 ‘깨달음’(覺, ssk. bodhi)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가 체득하였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發菩提心, ssk. bodhicittotpada)으로서의 '‘깨달음’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와 같이 시각(始覺)의 네 단계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음이 있다. 요컨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으며, 시각(始覺)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불교교학 전통에서는 깨달음(bodhi)을, 보리분법(菩提分法, ssk. bodhipakṣa dharma) 즉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설명하고 있다. 보리분법이 의미하는바 깨달음이란 수행의 최종적 정점만이 아니라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최근 오강남 교수와 성해영 교수는 두 사람의 대담을 책으로 엮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를 펴내어 한국의 종교계와 학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표층종교와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심층종교를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근저에는 ‘체험’, 특히 궁극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 사람의 합치된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한국종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동양종교에도 전문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하는 나의 입장에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종교에는 특히 불교와 같이 수행이 시스템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종교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 있을 수 있으며, 때로 그것이 수행의 진전과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Zen Mind, Beginner’s Mind[선심초심(禪心初心)] 서문에서 종교학자 휴스튼 스미스(Huston Smith)가 인용하고 있는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5-1971) 선사와의 대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미스 교수가 선사에게 왜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는지를 묻자, 스즈키 순류 선사는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에서 강조해야할 부분은 아니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종교에 있어 체험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특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체험, 그것도 확철대오의 깨달음만이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적(私的)인 신념이나 신앙관(belief system)에서가 아니라 공적(公的)인 제도적 종교에서 ‘체험’만이 유일무이한 표준이자 진리를 판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적인 오만(domatic pride)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다. 



이 글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1회 종교포럼에서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오만과 편견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강연 원고 전문이다.  화쟁문화아카데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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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섬2015.03.02 17:16 신고 수정/삭제 답글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보면 라훌라 스님의 글이 있습니다. 맨 끝에 가면 "왜 출가를 하는가" 에 대해서 남방권의 시각을 쓴 글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남방권은 "내가 아라한 될려고 출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들도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깨닫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고 한다면 이미 출가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띠 수행을 왜 하는지요. 아라한 될려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찰나생 찰나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 마음수행이 깊어지고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집착이 줄고 탐진치 삼독심이 줄어 듭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몸을 따라오듯 자비심도 증장합니다. 그런 바탕이 결국 스스로를 아라한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기차표도 사지 않았는데 벌써 기차타고 가거나 또는 목적지에 도착한냥 말하는 것은 .. 비극일 뿐입니다.
┗실론섬2015.03.02 17:23 신고 수정/삭제
정말로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붓다께서 생각했다면 1250명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에게 전법과 설법등의 모든 것을 맡겨두고 그 자신은 물좋고 공기좋은 곳에서 유유자작하며 세월을 보내다 입멸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붓다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붓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45년간이라는 긴긴 세월을 출가도 못하고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중생들의 삶속에서 살았습니다. 붓다의 일생이 우리에게 불교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나만큼 행복을 바라는 사람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붓다의 삼대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안녕하라, 편안하라...
장원경2015.03.18 09:32 수정/삭제 답글
"또 생각하는구나."
제 블로그에 한번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jaychang2014
5개 첨부파일을 시간있으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첨부파일에 문제가 있으면, 문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 불교포커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 불교포커스

원효학술상 수상자에 조성택 교수
여수령 기자승인 2013.05.03 17:19댓글 0글씨키우기글씨줄이기메일보내기인쇄하기페이스북트위터구글카카오스토리
제4회 원효학술상 수상자로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가 선정됐다.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김규칠)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는 3일 열린 회의에서 교수부문 우수상에 조성택 교수(저서『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비전임교수 부문 우수상에 김재영 동방불교대학 교수(저서『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와 김영일 동국대 BK21 연구교수(논문「원효의 화쟁논법 연구」), 학생부문 은상에 연세대대학원 박사과정의 송진섭씨(「대승불교 윤리이론이 지닌 정형적 형식에 대한 고찰」)를 각각 선정했다.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공고 이후 2월 28일까지 응모된 총 24편의 저서와 논문을 대상으로 2차례 걸쳐 심사를 진행했다”며 “조성택 교수의 저술은 고대 인도에서 근대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용과 해석과 관련된 역사적 문제들을 일관된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8일 오후 4시30분 서울 마포구 다보빌딩 3층 법당에서 열린다.

원효학술상 대한불교진흥원이 불교사상의 현대적 조명과 한국철학의 세계화를 주도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알라딘: [전자책] 인생교과서 부처

알라딘: [전자책] 인생교과서 부처

[eBook] 인생교과서 부처 - 마음을 깨닫는 자가 곧 부처다  |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 인생교과서 2 epub 
김홍근,미산,조성택 (지은이)21세기북스2015-07-28 


인생교과서 부처


전자책 미리 읽기
종이책
15,000원 13,500원 (마일리지7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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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 주간 6위|Sales Point : 185 
 9.2 100자평(1)리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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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08쪽, 약 18.2만자, 약 4.7만 단어

책소개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 인생교과서' 시리즈 2권. 진리를 찾아 떠난 성자, 부처에게 묻고 싶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 36가지.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부처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에 흔히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흔히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부처가 활동했던 기원전 5~6세기는 축의 시대의 한 정점이었다. 당시 인도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새로운 사유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는 사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방황과 모색의 시기였다. 부처의 등장은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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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 책을 읽기 전에
발간사
서문

1부 삶과 죽음

01 삶이란 무엇인가?
― 인생은 곧 수행이다 ㆍ 조성택
―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라 ㆍ 미산 스님
― 마음을 깨달은 자가 곧 부처다 ㆍ 김홍근

02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은 욕망의 ‘성취’가 아닌 ‘감소’에서 ㆍ 조성택
― 일상의 삶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라 ㆍ 미산 스님
― 우리 존재 자체가 행복이다 ㆍ 김홍근

03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는가?
― 영원한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ㆍ 조성택
04 세계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는 연기법 ㆍ 조성택

05 괴로움은 왜 생기는가?
― 무명,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ㆍ 김홍근

06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물거품과 같다 ㆍ 김홍근

07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는가?
― 마음이 사라지면 경계도 사라진다 ㆍ 김홍근

08 죽음이란 무엇인가?
―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필연적 과정 ㆍ 조성택
― 열반에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ㆍ 미산 스님
― 죽음이란 본래 없다 ㆍ 김홍근

09 정토는 어디에 있는가?
― 깨끗한 마음이 곧 정토다 ㆍ 김홍근

10 진리란 무엇인가?
―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다 ㆍ 조성택

2부 나와 우리

11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자유’이며 자율적 존재다 ㆍ 조성택
― ‘나’는 고정불변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ㆍ 미산 스님
― 미혹한 자성은 중생, 깨달은 자성이 부처 ㆍ 김홍근

12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도덕적 책임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 ㆍ 조성택

13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자각 없이 하는 일은 소외된 노동일 뿐 ㆍ 조성택
― 지혜롭게 함께 나누며 사는 중도적 삶 ㆍ 미산 스님
― 평상심을 가진 사람은 일과 하나가 된다 ㆍ 김홍근

14 좋은 친구란 무엇인가?
―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조건 ㆍ 미산 스님

15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가?
― 원활한 소통을 위한 7가지 방법 ㆍ 미산 스님

16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 나를 비추는 거울, ‘이웃’ ㆍ 조성택
― 수행의 목표는 이웃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 ㆍ 미산 스님
― 개인과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마음 ㆍ 김홍근

17 자유란 무엇인가?
― 구름이 요동쳐도 허공은 언제나 비어 있다 ㆍ 김홍근

18 나눔이란 무엇인가?
― 채움과 비움이 자유로울 때 열리는 행복의 문 ㆍ 미산 스님

3부 생각과 행동

19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적절한 표현’을 갖춘 감정의 교류 ㆍ 조성택
―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도구 ㆍ 미산 스님
― 양변에 치우치지 않은 절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ㆍ 김홍근

20 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 어떤 일에도 동요치 않는 담담한 마음을 가지는 것 ㆍ 미산 스님
― 꿈에서 깨어, 무심에서 일어나는 생각 ㆍ 김홍근

21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거둬들여 성찰하라 ㆍ 미산 스님
― 구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아는 것과 같다 ㆍ 김홍근

22 올바른 노력은 무엇을 뜻하는가?
― 정진, 최선의 노력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려는 결정심 ㆍ 미산 스님

23 수용과 인욕이란 무엇인가?
―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 ㆍ 미산 스님

24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 누구에게나 있는 이 평상심이 진리다 ㆍ 김홍근

25 무소득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을 버려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ㆍ 김홍근

26 절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 불행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ㆍ 조성택
― 과거의 아픔과 화해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_미산 스님
― 생각에서 벗어나면 절망도 사라진다 ㆍ 김홍근

27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 죄인은 없다, 죄가 있을 뿐이다 ㆍ 조성택
― 자기 자신에게 화해하고 참회하는 것 ㆍ 미산 스님
― 본심을 깨달아서 ‘무명’을 ‘명’으로 바꾸는 것 ㆍ 김홍근

4부 신과 종교

28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 신이 아닌 가르침과 진리에 대한 믿음 ㆍ 조성택
― 믿음을 통한 자유의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라 ㆍ 미산 스님
―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다면 마음속의 갈등은 없다 ㆍ 김홍근

29 자비란 무엇인가?
― 자비심, 가장 근원적인 종교적 감성 ㆍ 조성택
―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 ㆍ 미산 스님

30 화두란 무엇인가?
― 스승의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는 효과적인 마음공부 ㆍ 김홍근

31 출가란 무엇인가?
― 비범한 결단이 아닌 ‘일상의 선택’이라야 ㆍ 조성택

32 싯타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 하늘과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다 ㆍ 조성택

33 불교의 사회참여는 왜 필요한가?
― 불교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 ㆍ 조성택

34 금욕은 여전히 지켜야 하는 계율인가?
― 시대의 흐름에 맞게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간 ㆍ 조성택

35 붓다는 왜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 세상을 향한 깊은 이해와 고요의 힘을 깨달은 붓다 ㆍ 미산 스님

36 서구 사회는 왜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가?
― 21세기 새로운 대안문명으로서의 불교 ㆍ 조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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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흔히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그것은 곧 나 자신과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 책이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15쪽

후회와 회한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신음...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홍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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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보르헤스 문학 전기』 등의 저서를 펴냈다. 귀국 후 류달영 서울대 명예교수와 구상 시인이 합심하여 설립한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하였다. 오랜 사회교육 경험을 통해 상대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실감하고 안국선원 수불 스님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하였다. 지금은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한국전통 마음공부법인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연구 정진하고 있다.
최근작 : <인생교과서 부처>,<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선화> … 총 13종 (모두보기)
미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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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백양사로 출가한 이래 봉암사와 백양사 운문선원 등에서 간화선 수행을 했으며, 인도와 미얀마에서 초기불교 선수행을 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했으며,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연구하여 인도 뿌나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옥스퍼드대학교 동양학부에서 「남방불교의 찰나설의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상도선원 선원장을 맡고 있으며, 현대인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명상을 계발하여 누구나 일상에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저서와 공저로는 『행복』 『자비』 『마음』 『인생교과서-부처』, 역서로는 『호흡이 주는 선물』 『일상에서의 호흡명상, 숨』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큰글자책)>,<참여와 명상, 그 하나됨을 위한 여정>,<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 총 15종 (모두보기)
조성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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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
하다』가 있다.
최근작 :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지금, 한국의 종교>,<어떻게 살 것인가> … 총 1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진리를 찾아 떠난 성자, 부처에게 묻고 싶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 36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품게 된다. 이러한 고민들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에게 묻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인생교과서 부처』(21세기북스 펴냄)는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부처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에 흔히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흔히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부처가 활동했던 기원전 5~6세기는 축의 시대의 한 정점이었다. 당시 인도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새로운 사유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는 사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방황과 모색의 시기였다. 부처의 등장은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부처가 바라본 인생이란 무엇이며 그가 인생에 대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부처에게 배우는 깨달음의 길
마음을 깨닫는 자가 곧 부처다!
우리의 인생은 행복보다는 고통의 시간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온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생명체의 삶은 고해다”라고 말한다. 부처는 고통스러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원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인생은 곧 수행’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마음의 변화 가능성과 그 구체적 방법을 설명하는 데 있다. 수행을 통해 얻는 지혜는 ‘나’와 ‘세계’에 대한 바른 통찰, 즉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세계 이해를 의미한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나는 ‘나’ 아닌 모든 것과 관련된 존재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나’라고 착각하지만, 부처가 말하는 ‘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고 완성되어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나와 함께 하는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고 수행을 통해 나와 이웃의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 부처가 생각한 삶의 참된 의미이다. 부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진리의 평범함이다. 죽음에 관한 부처의 가르침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 죽음의 극복을 위한 부활의 메시지도 영생의 약속도 없다. 부처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통해 이를 실증했다.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평범한 가르침인 ‘죽음의 보편성’일 것이다.

같은 질문, 다른 해석!
불교관이 다른 세 저자가 펼쳐내는 통찰의 향연
이 책은 삶과 죽음, 나와 우리, 생각과 행동, 신과 종교라는 4개의 키워드와 36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부처의 깨달음을 살펴보고, 2부는 ‘나는 누구인가’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중심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부처의 생각을 알아본다. 3부는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절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등 부처가 말하는 실천적 대안을 짚어보고, 4부는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싯다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등 종교학적 차원에서 불교를 심층 깊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대한민국 대표 지성들의 글을 한 자리에 모았기 때문에,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해석을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 중 한 질문에 세 저자가 답한 경우도 있고, 두 저자 혹은 한 저자가 답한 경우도 있다. 대승불교를 전공한 조성택 저자는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부처와 불교를 다루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초기 불교를 전공한 학승인 미산 스님은 실천적 맥락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설명하며, 오랜 참선 수행을 바탕으로 간화선을 대중화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활동을 펼치는 저자 김홍근은 선불교적 입장에서 글을 풀어냈다. 마치 물이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시공간에 따라 부처의 ‘말씀’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는 점이 불교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변주 속에서도 변치 않고 유지되는 하나의 실천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의 실천이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이 책을 통해 부처가 남기고 간 정신을 되새겨보고, 스스로 인생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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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여유와 즐거움을 갖고 읽을 수 있을듯...  구매
ypkim215 2019-04-2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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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부처다 새창으로 보기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불교와 기독교 중에 굳이 선택을 하라고 하면, 언제나 불교였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세계의 존재유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교회에 다니라는 사람이나 피켓을 들고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에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위해를 가하는 삶을 살지 않는 "착한"사람은 천국을 간다면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을텐데, 굳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인 반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였기에 둘 중에서는 불교를 선호했다. 하지만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지, 삶과 죽음, 행복은 무엇인지, 신을 믿을 필요가 있는지의 공통질문에 현자들이 답을 해주는 인생교과서 중 부처를 택했다. 




신세계를 보는 듯 했다. 번지르르한 말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나면 보통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여서다. 하지만 보면서 납득하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되기를 바라는 내가 있었다. '영원'이라는 말이 유한하다고도 하고 무한하다고도 한다. 여기서 유한은 존재가 소멸되는 것. 즉, 육체가 없음을 말한다. 흔히 생각하는 죽음이다. 반면, 무한은 마음이다. 그 사람의 육체가 없어질지라도 마음이 남아있는 한 무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아마도 죽음 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이지만 않는다면 시키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말은 극적효과를 노린 대사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죽고 싶지 않고,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진시황제도 불노불사의 약을 찾았고, 생명의 근원이라는 처녀의 피로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게 아닌가. 이런 육체의 삶을 나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고, 내가 마음임을 깨닫는 것이 불교다. 내가 책을 읽고 이해한 내용은 이렇다. 육체는 마음이 잠시 머무르는 그릇일 뿐이다. 마음은 절대적이며 영원하기에 죽고 사는 것이 없다. 그러니 깨닫는 자에게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없다. 마음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괴로운 이유를 말했는데, 나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추가 없으면 미도 없다. 빈곤이 없으면 부도 없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과 일맥상통했다. 구분짓지 않으면, 남과 비교할 일도 시기할 일도 없다. 깨달은 사람에게 남은 곧 나이다. 그러니 구분지을 일이 없다. 악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기적이라 하고,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고 본성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사람마다 그 범위가 다른데, 수행을 통해 확대할 수 있다. 불교는 본성을 선과 악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한다. 그 행위에 깃들은 마음이 문제이지 사람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이 밖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르침도 잊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 등. 이것은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불교는 열려있는 종교다. 어떤 토속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것과 융합할 수 있다. 진리가 하나라고 하지도 않고, 무엇이 진리라 정의하지도 않는다. 내가 유일신이니 나만 믿으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길잡이지 부처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다. 서양에서는 요즘 불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과 유연함이 있고, 타 종교를 믿고 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런 점이 어떤 종교보다 좋았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해 수행으로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깨달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수한 부처. 나는 영원한 존재이며, 이를 깨달아야 한다는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 수천년이 지나도 부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부처가 알려주는 그가 깨달은 것을 접하다 보니, 문득 인생교과서 예수가 생각났다. 나는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기독교의 일부만을 보고 예수의 삶을. 그의 사상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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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메 2015-07-1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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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교과서 부처 새창으로 보기
평소 불교에 대해서 관심은 많았지만, '부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인생교과서 부처>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에게 묻고 싶은 인생의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 대표 학자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인생교과서 부처>는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조성택님, 현재 상도선원 선언장과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수행불교과 실천불교를 뿌리내리는 일에 정진하고 있는 미산스님, 안국선원 수불 스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하였으며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한국전통 마음공부법인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연구 정진하고 있는 김홍근님이라는 3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저자들이 들려주는 인생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도록 도와주어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1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는가,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괴로움은 왜 생기는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정토는 어디에 있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2부 나와 우리라는 주제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바르게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친구란 무엇인가,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눔이란 무엇인가, 3부 생각과 행동이라는 주제로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올바른 노력은 무엇을 뜻하는가, 수용과 인욕이란 무엇인가,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무소득이란 무엇인가, 절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4부 신과 종교라는 주제로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자비란 무엇인가, 화두란 무엇인가, 출가란 무엇인가, 싯타르타는 왜 집을 떠났는가, 불교의 사회참여는 왜 필요한가, 금욕은 여전히 지켜야 하는 계율인가, 붓다는 왜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서구 사회는 왜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저자들의 답으로 이어지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는 참된 삶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한다. 인생은 곧 수행이며, 마음을 깨달은 자가 부처다.



"붓다가 과거나 미래에 붙잡혀 있지 말고 '현재에 깨어서 살아라'라고 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보다 깊이 자상히 보기 위해서 현재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보다 확실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 '다시 태어남이 없음'과 마지막 죽는 순간에까지 유지되는 '깨어 있음', 이 두가지가 깨달은 자가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삶과 죽음의 불가분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깨달음이요, 붓다가 선언한 불사의 진정한 의미이다."라고 글귀가 인상적이다. 죽음의 극복이란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문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죽음의 문제는 '출가->깨달음->전법->열반'에 이르는 붓다의 전 생애에 걸쳐 중요한 종교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우선 죽음은 젊은 싯다르타가 집을 떠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의 출가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여든 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불사를 성취한 붓다조차 육신의 노쇠는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의 열린 진리관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라는 점이 돋보인다.



"불교사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몸소 실천해온 역사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수레'라고 표현했다.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며 사람들을 진리의 '피안'으로 운반하는 '탈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수레의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자신의 수레만이 진리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열린 진리관은 오늘날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첫 걸음은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고 현명한 이와 존경받을 만한 덕성과 수행을 갖춘 이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붓다는 <최상의 행복경>에서 말한다. <육방예경>에서 좋은 친구는 다음과 같은 덕복을 갖춘 사람이라고 전하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밖으론 담담하여 집착하지 않고 안으론 따뜻하고 온후한 사람, 본인 앞에서는 바른 충고를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칭찬하는 사람, 병들어 실의에 빠져 있거나 권력에 짓눌려 두려워할 때 용기를 주는 사람, 비록 친구가 가난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항상 그를 위해 이익 되게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관리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숨겨주고 뒤에서 그 일을 해결해주며, 병들었을 때 그를 보살펴주고, 친구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고, 친구가 죽은 다음에도 그 집안을 보살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불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언어 행위란 곧 말하는 사람의 선한 의도, 내용의 유익함 그리고 듣는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적절한 표현'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바람직한 언어 행위란 무엇인지를 묻는 하세나디왕에게 붓다는 (의도가) 선해야 하며, 분노가 없어야 하며, 행복을 가져오는 언어 행위라고 충고한다. 이어서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해가 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선을 키우고 불선을 줄이는 언어 행위"를 해야 함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대표 지성에게 듣는 <인생교과서 부처>를 통해 인생의 다양한 문제의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부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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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짱 2015-07-2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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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왜 우리 시대 필요한가 새창으로 보기


부처에서 나는 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이전의 또 다른 내가 만들어낸 삶은 아닐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우리는 가는 걸까. 수많은 삶과 죽음의 질문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오늘 하루의 삶의 마감을 하면서 나의 하루는 어떠한 삶이었는가. 나를 이롭게 하고 상대를 이롭게 하는 그런 삶이었는가 반성한다. 내가 내 것만을 갖기 위해, 상대의 가진 것을 내가 갖기 위해 나는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한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삶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을 전한다. 불교는 우리 민족 종교 중 하나다. 뿌리 깊은 종교인 불교의 핵심을 알려주는 질문 36가지를 통해서 삶을 찾아가는 여행길을 보여준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길, 행복의 조건 등에서부터 우리의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것들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또한 답을 함께 찾아간다. 



"붓다에게 있어서 괴로움과 불행은 삶을 근원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삶에 대한 처절한 절망이 없이는 불행의 원인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불행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탐진치에 빠져 지혜롭지 못한 삶을 살았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자비롭게 베풀며 조화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주는 교훈일 것이다."-297페이지.



끊임없는 욕망, 만족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 지금의 모습을 사랑하고 소비지상주의적이고 과시적인 삶의 모습을 탈피하여 보다 인간으로서 기본 심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책, 인생 교과서 부처는 복잡하고 현란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고민하고 번뇌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분별심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탐욕과 질시의 사회에서 우리가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다 같이 무너지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수'에 이어, 인생 교과서 두 번째 시리즈로 만들어진 인생 교과서 부처는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부처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만 않으면 알 듯한데, 막상 생각해보면 깜깜하다. 확 통하느냐, 꽉 막히느냐? 눈앞에 환히 드러나느냐, 깜깜하냐?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통하면 우주가 자기 몸이 되고 불생불멸이 되지만, 깜깜하면 나고 죽는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르는 사람을 '눈 뜬 봉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매 페이지마다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질문을 꺼내놓고 묻는다, 우리는 제대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하나 채워가보자, 삶은 유한하기에 더없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것을 놓지 말아야 할 일이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삶이라면 우리 삶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마음의 복잡함을 제거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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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jan 2015-07-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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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생교과서 부처 새창으로 보기
[서평] 인생교과서 부처 [조성택, 미산, 김홍근 저 / 21세기북스]

 

이번에 21세기북스 출판사에서 <인생교과서>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인생교과서>는 2010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현자 19인의 삶과 철학을 대한민국 각계의 대표 학자들이 풀어낸 책이다. <인생교과서> 시리즈는 부처, 공자, 무함마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간디, 데카르트, 니체, 칸드, 베토벤,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등 총 1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번에는 예수, 부처, 공자, 무함마드 이렇게 4권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이야기 할 책인 <인생교과서> 2권은 부처 편인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후, U.C 버클리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성택 교수와 백양사에서 수계한 이래 전통 교학과 수행에 전념했고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공부한 후 더 넓은 현대불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미산 스님, 그리고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류달영 서울대 명예교수와 구상 시인이 합심하여 설립한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오랜 사회교육 경험을 통해 상대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실감하고 안국선원 수불 스님의 지도하에 참선수행에 몰두한 김홍근이 함께 부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을 잘 사유하고 관찰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온통 물들어 있다.

마음이 번뇌롭기 때문에 중생이 번뇌롭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이 청정해지느니라.

비유하면 화사나 화사의 제자가 깨끗한 종이 위에 다양한 색상으로 갖가지 형상을 마음대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 (P. 248) 


 

세상에는 참 많은 불교인들이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데 나는 딱히 믿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는 물론 부처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부처가 대단한 인물임은 알기에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접해보고 싶었다. 이번에도 역시 부처에게 묻고 싶은 36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그에 대한 답을 하며 부처의 깨달음을 보여준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생각해보게 되는 삶과 죽음, 삶과 죽음, 나와 우리, 그리고 생각과 행동, 신과 종교라는 4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부처에게 삶과 행복,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 깨달음, 정토, 진리, 인간, 노동, 좋은 친구,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자유, 나눔, 수용과 인욕, 평상심, 무소득,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 자비, 출가, 금욕 등 인간의 여러 고민들을 질문하고 부처의 대답을 통해 불교적 해결을 접할 수 있다.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경험을 근거하고 있는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 흔히 부처님, 석가모니, 붓다 등 다양하게 불리는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성자로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라는 의미의 여래, 존칭으로서의 세존, 석존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부처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면 그는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여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운명이었는데, 29살에 고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불타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붓다가 된 싯다르타가 바라본 인생은 무엇이며 그가 깨달은 것은 과연 무엇일지 부처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데 과연 부처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부처라 하면 예수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종교 관련 이야기가 따라붙기 마련이라 아무래도 어렵고 복잡할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책은 부처님의 좋은 말씀들은 물론, 각 주제에 맞는 여러가지 시들도 보여주면서 설명을 잘 해석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각각의 주제에 따라 불교의 사상을 굉장히 유익하게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딱히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문학적 성찰을 위해 읽어보면 너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같은 주제의 36개 질문들을 역사 속의 열아홉 위인들에게 던져 각자 추구하는 그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앞으로 출간될 책들도 너무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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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천사 2015-07-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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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교과서 02. 부처 새창으로 보기



이 인생교과서 시리즈 중에 무함마드와 함께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 바로 이 부처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산다는 것" 자체에 힘들어하던 시절에 나는 불교에 무던히도 기댔었다

그렇다고 내가 절에 다닌다거나 종교로서의 불교에 집중한 것이 아닌 나에게 불교는 공부의 한 가지였다

손목에 염주를 차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무교이고 어느 신이건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건방지기 그지없는 무신론자일 것이다

내 손목의 염주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때면 괘나 유용하다

 

이런 나이지만 굳이 종교로서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불교를 고를 것이다

불교는 자신 수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기독교" 에서 말하는 "신을 믿는 행위" 자체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인해 구원??  불교식으로 말하면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본 역사나 싯다르타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책이나 그의 제자에 대한 책도 탁닛한 스님이나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이나 일본의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 등 유명 스님들이 쓴 책들도 즐겨 읽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불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느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여전히 공부 중이라고밖에 대답을 할 수 없다

이 책도 내게는 그런 불교 공부의 하나이다

앞서 읽었던 무함마드나 예수에서 보았던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에 대한 부처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나 평상심이나 무소득 등의 불교만이 지닌 특수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불교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은 곧 수행' 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며, 바람직한 인간상이란 바로 '호모 메디타티오'., 즉 '수행하는 인간'이다.

수행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며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페이지 : 25
 

 

나와 함께하는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고 자애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참된 삶의 의미라고 붓다는 말한다.
페이지 : 33
 

 

마음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고, 마음의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 곧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페이지 : 34
 

 

깨달은 사람에게 실재는 오직 아음뿐이며, 상대적인 삶과 죽음은 단지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일시적인 양상일뿐이다.
페이지 : 37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페이지 :  39
 

아마 이 말이 불교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곳곳에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멋있는 글귀들이 가득하다

그동안 불교에 대해 그리고 부처에 대해 괘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진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세 권도 좋았지만 읽지 못한 공자 편도 그리고 앞으로 나올 많은 책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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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피스 2015-08-0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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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마음 디톡스' 콘퍼런스 특강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화쟁적 태도로 여러 개의 '옳음'을 인정해야 공존 가능"

글 명지예 기자  2019-07-26URL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글자 크게글자 작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불화를 겪기도 한다. 골치 아픈 언쟁을 피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갈등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정한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가피한 사회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조성택 교수, '마음 디톡스 -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 특강

조선뉴스프레스 '마음건강 길'이 24일 개최한 <마음 디톡스,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에서 조성택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조 교수는 '화쟁과 경청의 가족문화'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차이를 분명히 이해할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작품, 영화, 책 등을 사례로 들며 갈등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로 '화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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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성택 교수의 강연 요약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나 공론의 과정은 없고 늘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논쟁만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 안에서 한국 문제만 생각해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울광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양분해서 싸우고 있다.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기 위해 120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비숍이 본 한국인, 국경 밖과 안의 모습이 달랐다

1831년에 태어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인이다. 이분은 영국 왕실의 친척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한국에는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총 네 번 방문했다. 청일전쟁부터 아관파천이 있었던 시기로, 한국이 아주 혼란했던 때다. 그는 한국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했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제목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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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은 한국 국경 안과 밖에서 만난 한국인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특히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에게선 국경 안의 한국인에게서 본 ‘풀죽은 모습’ 대신 ‘주체성과 독립심’을 발견한다. 그는 한국인이 정직한 정부를 만난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비숍이 당시 우려했던 대로 그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사의 아픔을 겪은 후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정치적 발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 시점에서 봤을 때 과연 우리의 성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족끼리의 우애가 어떤 나라보다 긴밀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큰 연봉을 포기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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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어 폭력, 정신적 폭력이 난무하는 적대적 관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은 개인의 수양과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하나로 관통된다는 것이지 나와 우리 가족이 잘된다고 우리 사회가 잘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나와 가족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만연해 있다. 지금은 서로가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있는 것이다. 태극기는 촛불을, 촛불은 태극기를 혐오한다. ‘한 쪽을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15년 동안 유학을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미국 학부형들도 많이 만났다. 그 때 느낀 것은 미국의 개인들은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 교육 자체도 도덕을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교육은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개개인 면모를 보면 어떤 나라보다도 개인적 도덕성은 뛰어나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인간들이 모여 사회는 대단히 비도덕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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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한 학회에 다녀왔다. 주제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였다. 그곳에 모인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결론은 “좋은 사회 없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였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현재 80%가 대졸인 세계적인 고학력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회 전체는 몰지성적이다. 4대강 댐을 부수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에서 무엇이 우리 사회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 없다. 그저 부수자, 말자 두 문제만 갖고 이야기한다.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논의도 없이 양자택일 속에서만 머문다.

버락 오바마의 현답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 지 물어야 한다" 

2007년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그가 무슬림인지, 미국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이라크 전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물었다. 그때 오바마의 답변은 “이라크 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이라고 답한다. 기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다면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할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인가"라고 묻는다. 어려운 질문에 오바마는 “질문이 틀렸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대단히 훌륭한 답변이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의해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늘 모색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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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사건의 일면이 아닌 전면을 보는 능력이다. 확신과 확실함은 다르다. 나의 확신은 내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하느냐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대화를 할 때 ‘자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내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태도다. 나와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의 말도 ‘옳다’고 생각하고 듣는 것이다. ‘왜 옳을까?’ 생각하며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플라톤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 진정한 대화"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나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만 진정한 대화"라고 말했다. 타인과의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고, 고민하면서 나의 지평이 넓어진다. 자신만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생각의 성에서 나와야 한다. 나도 자식과 이야기하다보면 처음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너지고 내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나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참여 다원주의다. 나와 다른 삶에 대해 “너는 너 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산다"는 똘레랑스(관용)적 태도와 다르다. 끊임없이 서로 묻고 답하며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생각이 다르면 삶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적대적인 대립 대신 경쟁적 대립의 태도다. 진지한 질문과 대답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화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되, 평화롭게 다투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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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쇼몽>(1950)
한 사건을 똑같이 겪고도 각자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다. 영화 <라쇼몽>은 이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사무라이, 사무라이의 부인, 산적, 나무꾼이 등장한다. 산적은 사무라이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다. 나무꾼은 이 사건을 목격한다. 영화는 이것을 4명의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각각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가 범인인지 모를 정도다. 누구 한 명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한 사실에 대해 복수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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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2010)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것은 늘 옳음과 옳음의 충돌이다.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10만부가 넘게 팔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사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묻는 책이다. 책의 핵심 ‘선(善)과 선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이다. 각 언론이 자신이 정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정론이라고 할 수 없다. 정론은 독자의 독서 능력, 즉 모색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고민해 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의 과정이고, 옳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복수의 옮음을 인정하는 사례로 독일의 보이텔스바허 협약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만들면서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교과서를 만들 때 ‘논쟁적인 주제는 논쟁적으로 남겨둔다’는 원칙을 만든다. 관용과 개방성으로 학생들이 정론을 찾아가게끔 길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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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지하게 듣는' 경청

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허점을 발견하려고 듣는 것은 ‘매복형 경청’이지 진정한 경청이 아니다. 진지한 대화란 4살짜리 아이가 그림을 그려왔을 때 그 그림에 대해 아이에게 이것 저것 질문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까지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사회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에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이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쟁적 성찰이다. 이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의감이 아닌 ‘많은 옮음’들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옮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관점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의 경험은 각자 다르며, 그른 것 없이 모두가 옳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통해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붓다빅퀘스천 1 조성택 교수, 월간 불광 500호 기념강연 붓다 빅 퀘스천. 이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월간 불광 500호 기념강연 붓다 빅 퀘스천. 이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행사갤러리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행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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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

동영상 둘러보기_https://www.youtube.com/watch?v=-BIAfhRzuMw



조성택 교수_고려대학교 철학과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하다』가 있다.

조성택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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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편집]

고려대 철학과 교수이다.

1.1. 상세[편집]

1957년생이며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고려대 철학과 불교관련 교수이며 고려대학교 77학번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부처 붓다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불광연구원 편집위원 한국철학회 편집이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2. 강의들[편집]


2. 사건/논란[편집]

2.1. 돈암동 살인사건[편집]
한 때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신분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피해자인 고 이해령씨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으며 사건직전에서도 마지막 피해자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해령 시신이 발견된 미분양 아파트의 부동산 거래에 관련된걸로 보이는 인물이며 피해자 유서가 갖는 의문점들 그리고 진술의 불일치성으로 인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결국 DNA가 일치하지않았기 때문에 용의자 선상에 제외되었다. 그것이알고싶다에선 범인사실이나 사건 몇 부분에 부인했다.

 현재까지 유명 강연 및 언론을 통해 노출되고 있으며 교수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2020/10/21

불교평론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 이홍구

불교평론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 이홍구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이홍구  dagamsa27@hanmail.net
1. 머리말

   
이홍구
동국대 강의교수

현대 한국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크게 3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제1기에 해당하는 박경준의 논쟁은 대승불교 흥기 배경과 인도와 중국, 근대 일본의 대승(大乘) 불설·비불설론 논쟁의 대두와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과 저술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대승경전관의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2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흐름은 김용표가 〈법보신문〉 647호에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제2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에 대한 논쟁, 대승불교의 기복신앙, 대승 위경설에 대한 관점 차이,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 한국불교의 정체성 등이었다. 제2기 논쟁에서 홍사성, 마성 스님, 조준호, 전재성 등은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으며 김용표, 진현종, 김성철, 주명철 등은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나름대로 대승불교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논쟁의 주제가 너무나 큰 담론이고 논쟁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의 부재와 논쟁의 장이 교계 주간지라는 제약적인 한계로 더 큰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셋째, 제3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은 권오민이 〈법보신문〉 1008호에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탓”이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법성[진실]에 의지할 것을 전제로,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제3기 권오민이 촉발한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정법 기준에 대한 논쟁, 불설·비불설에 대한 관점 논쟁, 제 부파불교의 불설·비불설 논쟁, 대·소승 간의 불설·비불설 문제,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논쟁 등이었다.

권오민이 아함과 니까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주장에 대해 친설론을 가지고 반대하는 마성, 전재성, 황순일 등과 앞의 관점과는 별개의 입장에서 논평하는 조성택, 조인숙, 안성두, 이영철 등의 의미 있는 글들이 있었다. 이 논쟁과 논평은 불교학계에서 보기 드문 이변의 논쟁이었으며, 학자의 범위를 넘어 불교 일반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권오민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문의 본래 여러 주제와는 상관없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친설·비친설론으로 변질되어 종파적 입장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1기부터 3기까지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이 결국은 21세기의 새로운 교판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역할을 위해 필요한 접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주제, 범위, 방법 등에 많은 구체적 접근이 결여된 것이 아쉽다. 즉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의 핵심은 첫째, 불설·비불설 논쟁에서 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 교학과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에 대해 불교 신행의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1)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고래로 불교의 제 경론을 그 뜻이 불완전한 것[不了義]과 완전한 것[了義], 은밀한 것[密義]과 분명한 것[顯了], 나아가 방편설(方便說)과 구경설(究竟說) 등으로 분별하게 되었고 급기야 후자로 해석된 경전에 근거하여 불교교파나 종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불교사상사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이러한 불설·비불설의 문제의 흐름에 대해 김호성은 반복사관(反復史觀), 퇴보사관(退步史觀), 발달사관(發達史觀)으로 분류한다.

즉 퇴보사관은 초기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발달사관은 대승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반복사관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동등한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종파적 견해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마성 스님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퇴보사관적 관점에서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이다.”라고 한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성 스님의 이와 같은 관점에 대해 김성철은 발달사관적 입장에서 “대승불전이 설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리는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과 같은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퇴보사관이나 발달사관과는 달리 권오민은 “대·소승 경전 또한 모두 불설을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으로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하면서 문헌적 사료와 경전 형성의 역사적 한계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오민의 이러한 주장은 반복사관적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3가지 다른 관점에 대해 제1기부터 제3기까지의 학문적 접근방법을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경전해석학적 접근, 양 접근으로 구분하기가 애매한 경우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이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근대불교학적 관점으로 합리주의(rationalism) 사상과 실증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2)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까야 또한 비불설이라고 하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라 보면서,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오민은 마성 스님의 비평을 학문보다 상식에 기댄 것이라 비판하면서 아함과 니까야에 대해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상좌부에 대한 정통성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마성 스님의 주장에 대해 상좌부가 전승한 니까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은 사대주의라고 논평했다.

전재성은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을 토대로 아함과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로서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라고 논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권오민은 전재성의 논리 근거인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고층/신층의 문제를 서로 개입시키는 것은 전혀 엉뚱하다고 보았다. 뒤이어 황순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제를 놓고,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권오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지만 양 경전은 편찬 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 전통에서 왜 전문 암송 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다양성의 시대에 법성의 획일적 사유, 교조적 획일화, 믿음의 한계 등에 대해 지적하며 현대의 새로운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3)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

〈법보신문〉 648호에서 홍사성은 김용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대승의 다신적 신앙은 불설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김용표의 주장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대승불교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셋째는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 시대에 제시된 관음·정토·지장·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뒤이어 〈법보신문〉 649호에서 진현종은 부처님 친설 고집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초기불교의 이성-합리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성 스님은 역사적 붓다를 외면하면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대승불교의 포용과 관용성 때문에 순수불교가 갈수록 희석되고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는 한국불교는 타락한 대승불교라고 지적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해 ‘대승 옷 입은 힌두교’라고까지 신랄하게 지적했다.

김성철은 홍사성과 마성 스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기복-다불 사상도 엄연한 불교이고, 초기불교의 논리가 대승으로 귀결되었으며, 대기설법 정신이 새 사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 보았다. 조준호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 대승이 아니며, 기복을 대승이라고 보는 김성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고, 기복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다만 기복에서 작복으로 지향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전재성은 대승경전이 무상, 고, 무아의 니까야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정신을 계승한다고 보면서 대승을 비불교로 보는 것은 역사·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주명철은 대승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석존 정신에 충실한 재해석이라고 전제하고 대승유신론의 폄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대승의 여래 또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김호성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과거7불’의 존재를 소개하고, 이러한 ‘과거7불’ 사상은 고타마 붓다라는 일불(一佛)에서만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의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3.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

1)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부정하고, 상좌부 아가마와 니까야만이 친설이자 정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승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두 가지 전개 방향을 설명한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는 앞에서 설명했고,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 반해 현대학자들의 경전해석학에서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에서 발로하였지만, 그 가르침을 각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 온 노력의 역사적 총체로 보는 관점이다. 먼저, 박경준은 친설론과 정법론에 대해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을 토대로 종파와 교판적 관점을 벗어난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붓다보다도 진리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경전의 권위는 ‘붓다의 직설(直說)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대승열반경》에서는 “사람과 말과 식(識)과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과 뜻[義]과 지혜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친설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법론의 의미에 대해 사람[人]의 종파적 입장이 아니고 불법 자체의 관점, 말[語]의 언어적 입장이 아니라 의미론적 관점, 식별적 입장이 아니라 지혜의 관점, 불료의적 입장이 아니라 요의(了義)로 판단된 경의 진실의(眞實義) 관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권오민은 불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는 원래 4대교법이었지만 그들은 여기에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이다”는 말을 더하여 수정하였고 나중에 다시 이를 근거로 “4의[依: 人·語·識·不了義]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에 의지하라”를 추가하였다고 설명했다. 즉 이 4가지를 통합하여 갖춘 것이 법성을 갖춘 것으로 불설 편찬의 근거는 불설이 아니라 법성이라고 하였다.

2)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이후로 승가와 재가는 시대에 따라 불교 신행의 정체성 내지 이상적인 신행 행태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대·소승의 유부, 경량부(성실론), 중관, 유식 계통의 논서가 표면의 학설은 달리하였지만 불설의 정의에 관한 한 정확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먼저 신행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확고한 이해의 기반 위에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한 적극적인 대응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신행활동을 강조하는 종단의 소아적인 발상이나 이익집단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들의 신행생활은 타파되어야 한다. 결국 불교 학문을 토대로 하는 신행 시스템 구축은 불교 고래의 그리고 불교 본연의 자리이타 지향적인 교리를 구현하는 자발적인 믿음과 수행을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학자 가운데 한 명인 김용표는 대승경전의 본성에 대한 해석학적 탐색을 기초로 하여 현대 불교를 위한 창조적 대승해석학의 방향을 사상의 역사성 문제, 경전적 진리의 상황과 맥락적 진리(contextual truth) 성격, 무한히 열린 자유로운 해석 정신[불의 四種釋義]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특히, 진리란 세간의 전통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간 언어의 형태로 나타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론의 해석도 언제나 현대 서양해석학에서 말하는 선이해(先理解)와 일련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에 조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호성은 대승경전에는 신화적·설화적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성적인 초기경전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로 반박하였다.

① 연기이므로 허(虛)이고 실(實)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가공의 형식-예술적 형식-을 통해서 더욱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보인다는 점에서 대승경전은 미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詩) 〈그림자 극〉을 통해서 말해보았다. ②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현실의 이야기는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가공의 이야기는 불변의 것으로서 더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와 실이 서로 역전될 수 있음을 다시 시 〈드라마〉와 〈극락에서 온 메일〉을 통해서 중송(重頌)해 보았다. 시로 말한 것 역시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즉 대승경전의 신화적/설화적 가공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는 실로 초기경전의 교설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인해서 그 세계는 실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3)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

원래 경(經)의 원어(原語)인 Sūtra는 동사 siv 또는 sīv(꿰매다의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실, 끈, 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위로는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꿰고[貴穿] 아래로는 중생(의 고통과 미망)을 거둔다는[攝持] 것이 경의 ‘근본 기능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상류층의 언어인 베다(Veda)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족어(民族語)로 전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초기불교가 친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언어 인식과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되어 중생들의 개아적 언어 인식과 한없는 거리와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법[진리]을 자각게 하려고 했을 뿐이지 자신의 말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박경준은 “본래가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고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 오기도 한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하여,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호성은 철학적, 해석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4가지 다른 관점에서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를 논증하고 있다. 첫째, 초기경전은 저자가 있고 대승경전은 저자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저자의 표기에 의해서 저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유명사를 실체의 드러남으로 바라보는 미망일 뿐이며, 초기경전의 내용 즉 연기의 관점에 서게 되면 고유명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둘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대승경전을 제작해서 후대에 많은 평지풍파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이데거-가다머 사제(師弟)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보르헤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를 살펴봄으로써 전 주장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함/니까야를 똑같이 베낀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공간의 컨텍스트가 반영되어서 이해될 수밖에 없으므로, 아함/니까야와는 다른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다르게 이해된 의미의 생성을 문자화(文字化)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의 제작은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셋째, 대승경전을 불설이라 칭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보르헤스의 또 다른 소설 〈틀뢴, 우크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전거로 내세워 “모든 책은 익명이며, 오직 한 사람의 저술”이라는 점을 말하였다. 넷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스스로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붓다의 권위를 빌려서 그 책의 권위를 넓히고 자설(自說)을 좀 더 쉽게 널리 펼치기 위한 사욕(私慾)에서였다는 주장에 대해 심성사적(心性史的) 방법론과 ‘정황증거’를 가지고 논박하였다.

4.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

1)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

앞에서 언급했던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화엄에서는 언어인식적 관점으로 3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첫째, 법(法)과 의(義)에서 법 자체의 언어론과 의미론적 입장에 대해 상입(相入)의 무아론적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무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중문(中門)의 상호포섭적 관계로 능구(能具)와 소구(所具)처럼 명칭[名稱: 言說]과 내포[內包: 意義] 간의 상호 주관적인 관계[否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무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상호 경합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의의를 가지고 언설을 삼으므로 언설이 의의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언설이 언설이 아니다. 내포도 언설로써 의의를 삼으므로 의의가 언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의의가 의의가 아니다.
둘째, 지(智)와 요의(了義)에서 지란 자신의 아뢰야식에 의거한 알음알이를 지양하고 지혜로 보는 개인적 깨달음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하면 요의는 깨달음 자체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 상즉(相卽)의 중도론적(中道論的)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언어적 표현과 깨달음의 중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즉문(卽門)의 상호 환원적 관계로 근본[根本: 깨달음]과 지말[枝末: 언어] 간의 상즉인 관계[肯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중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근본과 지말의 상호 협력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지말은 오증(悟證)된 의의(意義)가 언어에 속한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설명한 것이다. 근본도 언설이 오증(悟證)의 표상(表象)에 속한 것으로 작용하면서도 늘 고요하고, 설명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언어 매개를 통한 자비 실행이 교분(敎分)의 입장이라면, 언어가 단절되고 증득해서 얻는 경지가 증분(證分)의 입장이다. 하지만 증분의 침묵은 중생에게 들리지 않고, 교분의 언어는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의 의미를 담고 표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제불보살의 대자비 본원력의 바탕이 되는 부주중도적(不住中道的) 언어는 중생들의 눈높이에 따라 침묵과 언어가 공존하는 언어표현이다. 즉 연기분과 증분의 관계에서 언어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가 드러난 것이 부주중도의 언어인식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가 친설이고, 대승불교가 불법이라고 하면 친설은 일(一)이자 증분, 법설은 다(多)이자 교분이 되어 상입상즉의 원융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

2) 학제간 연구와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현시대까지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소승과 대승, 상종(相宗)과 성종(性宗), 교종과 선종 등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거나 다만 어느 일방에 의한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방편(方便)과 구경(究竟)의 관계로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서로 간의 허심탄회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권 자체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방법도 좋겠지만, 초기불교의 가치와 대승불교 및 대승경전관 및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논쟁의 방향 설정을 위해 학제간 연구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학제간 연구에는 다양한 분과가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화엄원융의 3가지 언어인식적 관점을 바탕으로 3가지 접근을 제안한다. 첫째, 4대교법 가운데 법과 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심리언어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인지과학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신경·심리언어학의 접근법에서는 1968년 초개인심리학 이전의 서양철학과 서구심리학의 개아를 강화하는 언어인식의 심리언어학적 의미를 평가한다. 그리고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 제공을 위해 유식불교의 12연기 언어인식 메커니즘과 무아의 정문훈습을 통한 제8식의 변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아와 무아의 의식 및 무의식의 관점에서 언어인식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성과 한계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둘째, 4대교법 가운데 지와 요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통합적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통합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는 서양과학의 심리학과 동양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불교학의 만남이자 진정한 융합을 시도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통합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각 층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한국불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접근할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즉 인간존재의 구성 요소인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1차원적 상호침투의 이질적 등계층의 홀로그래프적 언어인식, 다차원적 상호침투의 홀로키적 온우주론의 언어인식, 절대정신 등이 중요한 테마이다. 1차원적 상호침투는 화엄의 상입, 다차원적 상호침투는 상즉, 절대정신은 법성과의 비교고찰이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4대교법을 아우르는 법성의 현시대적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집단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과학철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왜냐하면 현시대에 경험주의적 과학지상주의자와 유물론적 실증주의자의 전통 경험과학적 진리관이 일반인들을 혼미하게 오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 정체성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제간 연구 가운데 하나인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ofscience)은 과학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철학과 과학을 대비해 생각해볼 때 몇 가지 점에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

3)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필요성 제기

오늘날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에 대한 통합시각을 제안하고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개념 설정을 위해 신행(信行)의 의미를 교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고, 신행의 관점에서 교학을 평가할 수도 있으며, 양쪽 모두 동등한 가치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서 제기되는 ‘신행’ 관련 논의의 틀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서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의 속성으로 야기되는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에 대한 불교 신행의 역할과 역량 정립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유용한 접근이 문화(심리)학이 될 수 있다. 원래 문화학이 발생한 의의는 개별 학문들로부터 나온 개별사건들을 다시각적 관점에서 네트워킹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는 초과학적 프로그램으로 학문들 간, 학문과 실천 간을 연결하는 지평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문화학의 한 범주로서 ‘믿음과 실천’의 연구목적은 ‘문화적 지향’의 인문철학으로서 불교학에서 자신의 학문영역과 이론적 태도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전체’ 속에서 ‘믿음과 실천’의 의미를 추구하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을 위한 방향타의 구실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란 좁은 의미로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불교란 “석존을 개조로 하여 열반 혹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최고 구극의 가치 또는 목적으로 하고, 그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문화의 종합적 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문화로써 존재하고 문화로써 표현되며, 문화로써 기능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불교문화’라는 프리즘은 현대 신행생활의 기본방향으로 첫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자리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개인수행 및 정신건강의 측면과 종교 의례문화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그리고 둘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이타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사회적·역사적·철학적·교육적·예술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여기서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정신수양과 종교적 행위의 특수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며,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사회실천 행위의 보편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5. 맺음말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 역사학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철학적, 해석학적, 종교체험과 신행적 접근 등을 통한 선행연구들이 있었다. 대승불교(경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의 논쟁을 주제별로 보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불설·비불설,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개념 정의와 범위 설정, 초기경전과 대승경전과의 관계, 대승불교(경전)가 지녀야 할 가치와 속성 및 기능, 존재론·인식론·실천론 등의 다각적 관점들이 있었다. 시기별로 보면 대승불교 정체성 주요 논쟁의 제1기에는 대승 불설·비불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의방향 제시, 제2기에는 대승불교의 비불교적 요소에 대한 관점 차이, 제3기에는 상좌부의 아가마와 니까야 친설 여부가 주요 쟁점이었다.

이 글에서는 3기에 걸쳐 펼쳐진 이러한 논쟁에 대해 2장,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서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3장,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에서는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의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합적 접근에서는 첫째,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화엄의 언어인식을 기저로 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원융적 시각을 제공하였다. 둘째,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을 보조적 활용하여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확인을 제안하였다. 셋째,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제공을 위해 문화학과 문화심리학의 활용을 통해 불교권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 해결을 제안하였다.

결국, 이 논문은 경전해석학적 접근을 기반으로 하는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을 통해 불교경전이 현대의 다원주의와 통합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정체성과 역할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즉 경전해석학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무분별적 화엄원융의 언어관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인식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의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 문화심리학 등의 접근을 보조로 하는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신대승불교 운동의 방향 모색을 위한 통합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는 더욱 많겠지만, 이 글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은 차후 과제로 남겨둔다. ■

 

이홍구 / 동국대 강의교수. 대구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의상 화엄관행의 연구〉(석사논문) 〈신라 의상의 엄정융회적 신행 연구〉(박사논문) 〈의상계의 엄정융회적(嚴淨融會的) 일승정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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