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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8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 스님의하루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 스님의하루


스님의하루
2020.1.9. 인도성지순례 7일째 (바이샬리)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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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마지막 여정은 영축산에서 시작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끝이 납니다. 순례자들도 어제 영축산에 이어 오늘은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새벽 5시,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인도성지순례를 할 때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새벽에 이동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번 순례기간에는 안개가 짙지 않아서 비교적 순조롭게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캄캄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순례자들은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오전 7시쯤, 파트나를 지났습니다.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이렇게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너른 강의 이쪽과 저쪽은 마하트마 간디 다리로 이어져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에 도착했습니다. 다리 길이가 11km 정도 됩니다. 인도에서 제일 긴 다리입니다. ”

바다 같은 강 위로 붉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순례자들은 고요히 일출을 맞이했습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곳, 원후봉밀터

예상보다 이른 9시에 바이샬리 원후봉밀터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에도 아쇼카왕이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원후봉밀터로 들어가는 길에도 구걸하는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따라왔습니다.





순례자들은 가사를 입고 합장하고 석가모니불을 외며 탑을 돌았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한 줄로 탑을 돈 후 탑을 바라보며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 끝에 스님은 세계 평화를 발원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을 가며 갈등이 증폭되고 전쟁의 위험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세계 모든 인류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인류가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좋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결과 자연이 파괴되고 이상고온현상으로 지구 곳곳에서 갖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호주에 이상고온으로 산불이 여기저기 일어나 많은 생명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어리석음을 깊이 참회하오니 하루 속히 산불이 진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순례자들도 함께 마음을 모아 발원했습니다. 발원을 하며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부처님의 마음을 따라봅니다. 예불을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명상을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합니다. 편안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해서 숨을 쉬나 안 쉬나 확인을 해봅니다.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갈 때는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은 알아서 들쑥날쑥 하니까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 오구나 알아차리듯이.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올라서 호흡을 놓치기 쉬워요. 몸뚱이는 인도에 있는데 생각은 한국에 있는 집 생각, 남편 생각, 자식 생각, 애인 생각, 커피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생각이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지 말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면 됩니다. 편안하게 합니다.”





속사정은 몰라도 원후봉밀터를 바라보며 명상하는 순례자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고요했습니다. 이렇게 정진을 마친 후 스님은 바이샬리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 Vaisali






“바이샬리는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조각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장면입니다.






바이샬리에 남은 유적은 많지 않지만,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무척 많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7가지는 알아야 해요. 밥 먹고 할까요?”

“네.” (모두 웃음)

새벽 5시에 출발해 10시가 되도록 아직 식사를 안했습니다. 스님이 묻자 순례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슬쩍 이리 건드리고 저리 건드려보면 맨날 넘어가요.(모두 웃음) 제가 밥 먹고 공부하게 생겼어요, 공부하고 밥 먹게 생겼어요?”(모두 웃음)





스님은 바로 바이샬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바이샬리는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입니다. 또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 자등명 법등명의 법문을 설해주신 곳,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00년 후에 제2결집이 이뤄진 곳,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바이샬리(Vaishali, 毗舍離)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곳이 최초의 여성 출가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Varanasi)에서 설법하실 때 최초로 다섯 비구(比丘, bhikkhu)가 출가했고 곧이어 야사(耶舍, Yasa)도 출가했지만, 이는 모두 남자 출가수행자입니다. 그리고 야사의 아버지 구리가 장자(俱梨迦長者)가 교화를 받고 재가수행자, 다시 말해 세상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출가수행자도 재가수행자도 남자가 먼저 나왔어요. 그 다음에 구리가 장자의 부인과 며느리, 즉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가 재가수행자가 되면서 여자 재가수행자가 나왔습니다.
여성 해방의 효시, 오백 여인의 출가


그런데 여자 출가수행자는 아직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 출가수행자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어요. 마치 조선 시대에는 공주라 하더라도 과거 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남자는 천민이라도 간혹이긴 하지만 출가수행자가 나왔습니다. 우파리(德波羅, 우바리) 같은 경우가 그래요. 우파리는 부처님이 성도(成道) 후 6년째 되던 해에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迦毘羅衛城)에 오셨을 때, 자기가 모시는 왕자들이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서 출가했습니다. 그렇게 남자의 경우는 천민이라도 출가할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도 남자는 천민이라 해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임금에게 잘 보이든지 하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럴 수 없었어요.


역사 속에서 최대의 차별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신분 차별이고, 다른 하나는 성 차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흑인 차별과 같은 인종 차별은 없었지만, 종을 두는 신분 차별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신분 차별과 성 차별이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 수행자는 나올 수가 없었어요. 사회 시스템 자체가 여자 수행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돌아가신 후에 부처님의 어머니가 혼자 되셨어요. 당시 관습에 따르면 그런 경우 해당 여성의 주인은 당연히 아들이 되는데, 아들도 출가해 버리고 없으니 어머니는 혼자가 되신 거예요.


그런데 이분은 부처님의 새어머니예요.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摩耶夫人, Mahamaya)은 부처님을 낳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고, 마야부인의 막내 동생이자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 부인이 와서 새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낳은 부처님의 동생 난다(Nanda, 難陀)도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집안은 남자가 모두 없어진 거예요. 부처님의 아내도 마찬가지 처지였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편은 출가했고, 아들인 라훌라(Rahula, 羅喉羅)도 출가해 버리니 집안에 남자가 없어졌어요.


당시 인도에서는 남자가 없는 여자는 주인이 없다고 해서 누구든지 잡아갈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에도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주인이 있었습니다. 삼종지도라고 해서 어릴 때는 아버지가 주인이고, 결혼하면 남편이 주인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었어요. 호주제는 집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제도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이 호주제가 2005년에 폐지됐으니 없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서양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가서 사위에게 딸을 넘겨주는 것도 주인을 바꾸는 의식입니다. 쇠전에 가서 소 사면서 돈 주고 쇠고삐 받아오는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에요. (모두 웃음) 이걸 좋다고 서양식 결혼식을 자꾸 흉내 내는데, 적어도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는 그렇게 안 해요. 마주 보고 절을 합니다. 어쨌든 그런 시스템에서는 여성에게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했어요. 여성이 출가하면 주인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여성의 출가는 거의 이루어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이처럼 주인이 없어진 여성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 등 석가족 내에 이런 분들이 500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은 출가한 집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이 500명의 여인들이 출가하겠다고 부처님께 찾아왔지만 부처님이 모두 거절하셨어요. 여인들을 대표해서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청을 하였지만 부처님은 모두 거절하셨어요. 보통 세 번 부탁하면 들어주는 게 당시의 문화인데, 부처님이 세 번 다 거절하신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그리고는 부처님은 이곳 바이샬리로 와버렸어요. 그런데 여자들도 대단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모두 바이샬리까지 따라왔어요. 여자들이 유행(遊行)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몰골이 형편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또 부처님께 청을 했지만 부처님은 이번에도 다 거절하셨어요.


거절당한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울고 나가는 모습을 아난다가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여자는 수행 정진하면 해탈할 수 없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부처님이 대답하셨어요.


‘여자도 해탈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성 차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난다는 ‘그런데 왜 출가를 허락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면서 부처님 어머니의 공덕을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의 어떤 남자도 엄마 젖을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듯이 어머니의 공덕을 쭉 이야기하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어린 나를 키우느라고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나서 그 여인들에게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출가는 허락하셨지만 거기에 여덟 가지 조건을 붙이셨어요. 이것을 팔경법(八敬法)이라고 합니다. 그 여덟 가지 조건을 지킨다면 출가를 허락하겠다는 부처님 말씀을 아난다가 전했더니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집니다.


당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여자가 최초로 남자 없이 자기 이름을 갖게 됐다는 뜻입니다. 비구니(比丘尼, bhikkhuni)가 된다는 것은 ‘아무개의 소유’라는 말이 없어지고 그냥 자기의 이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여성의 출가는 단순히 ‘비구니가 됐다’는 뜻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남자 없이 여자가 자기 이름을 갖게 됐다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 해방의 효시, 첫 번째 여성 해방입니다. 그래서 이곳 바이샬리에는 여성 해방의 첫출발을 기념하는 탑을 세워야 해요.




남방불교에 비구니 제도가 없는 이유


남방불교에서는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을 때 비구니 제도를 없애버렸습니다. 없앨 때 아난존자를 핑계 삼았습니다. 결정은 부처님이 하셨는데 아난존자 핑계를 댔어요. 인도의 전통에는 여자는 다섯 가지가 될 수 없다는 오불가설(五不可說)이 있었는데, 이 세속의 오불가설에 따라 비구니제도를 폐지한 거예요. 그러면서 아난존자에게 허물을 덮어씌운 겁니다.


‘부처님이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아난존자가 눈물을 흘리고 애걸복걸해서 법이 아닌데도 허용이 된 것이다. 원래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면 허용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아난존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구니 제도를 폐지해 버렸어요. 그래서 현재 남방불교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넌(Nun)’이라고 해서 머리 깎고 하얀 옷을 입고 다니며 수행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이 여성들은 가사를 수할 권리가 없어서 비구들 앞에서 강의도 못해요. 재가신자인 여교수가 불교를 전공하면 강의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넌(Nun)이 되면 강의를 못하니까 모순이죠. IT든 역사학이든, 어제까지 비구들 앞에서 강의하던 전문 학자라도 넌(Nun)이 되면 팔경법에 따라 그 순간부터 강의를 못하는 거예요.






최초로 여성의 출가가 이뤄진 바이샬리는 참으로 성스러운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의 비구니 스님들에게 이것은 단순히 비구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상 엄청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고 얘기하면서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하나 지으라고 권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비구니 스님들이 여기에 절을 지어서 남방불교권에 있는 여성들에게 비구니 수계를 한다면, 거부반응이 좀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여성 출가를 허락하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다들 자기 살기 바빠서 어렵다는 반응이었어요.


설령 부처님 당시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안 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허용을 해야 할 텐데, 부처님 당시에 허용했던 것을 오히려 지금은 허용하지 않으니까 더 문제입니다. 제가 예전에 스리랑카 원로 스님에게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스리랑카 불교가 한국 불교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세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첫째, 불교가 환경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 불교가 평화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셋째, 여성 출가를 허용해야 한다.






그랬더니 환경 문제는 수용하고, 평화 문제는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스리랑카는 민족주의로 인해 타밀족(Tamils)과 전쟁 중인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여성 출가 문제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한국과 다르다. 우리의 전통 안에서도 여성들이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현재 동남아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교육을 받고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만약 불교의 이런 성 차별적인 면모가 계속 유지되면, 이처럼 교육받은 여성들이 YMCA 같은 기독교 계열 기관으로 가서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올바른 시각을 갖기가 참 어렵습니다. 밖에서 보면 문제가 보이지만 그 안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요.


저는 출가를 강조하는 편은 아닙니다. 지금 정토회는 승려가 되고 안 되고를 넘어서서 누구나 다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안 하고는 논쟁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차별이 있으니 없애라는 거예요. 그러나 현재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의 출가 문제가 아직도 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이유






부처님이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성이라고 해서 육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남자에 의지해 살아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까르마(Karma, 業)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출가를 허용한다고 해서 까르마가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바이샬리까지 스스로 결단을 하고 왔다는 게 출가를 허용하는 하나의 큰 동기가 됐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준비를 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둘째, 바이샬리라는 도시가 당시 인도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는 겁니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보수적인 텍사스(Texas)주의 댈러스(Dallas)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면 저항이 거세겠지만, 미국 안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도시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면 저항이 덜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 안에서도 그것이 수용될만한 진보적인 도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보수적인 도시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가장 진보적인 도시가 바이샬리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셨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여성의 출가 생활에는 부작용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여성들은 그러기가 어려웠어요. 남자는 혼자서 벌거벗다시피 하고 나무 밑에 앉아있어도 늑대한테 물려죽을 염려는 있을지언정 사람한테 잡혀갈 일은 없잖아요. 그런데 여성들은 벌거벗고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주인이 없는 여자라고 해서 다른 남자들이 잡아가거나 성폭행을 했습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여성들이 수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실제로 지금 여러분도 그래요. 해탈을 하려면 수행정진을 할 때 일체의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여성들은 성적인 문제에 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보니 해탈의 길에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초기 비구니들의 성폭행 사건이 굉장히 많았어요. 기록에 보면 초기 비구니들이 그런 어려움을 얼마나 장하게 극복했는지가 나옵니다. 어떤 비구니가 앉아서 정진하는데 웬 남자가 와서 유혹을 했어요. ‘당신의 눈이 너무 아름답소’라고 말을 붙이니 손가락을 넣어 자기 눈을 빼서는 ‘가져가세요’ 하고 줬다는 기록이 있어요. 눈을 빼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성적인 흥분이 생길 리가 없죠. 이처럼 하나의 눈을 잃으면서까지 자기정진을 밀고 나간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떤 기록에 보면 여자가 혼자서 정진하는데 그 여자를 사모했던 남자가 밤에 찾아와 성폭행을 해서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비구들끼리 둘러앉아 성폭행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성폭행이라 해도 성관계를 했으니 쾌감을 느꼈을까, 안 느꼈을까?’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니 성폭행을 당한 비구니가 얼마나 상처가 컸겠어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결국 계율을 어긴 게 아니냐’ 하는 게 비구들의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계율을 어기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비구들도 잠잠해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당시에는 출가한 비구니들이라 해도 사회적 통념에 따른 ‘주인’이 있다고 내세워야 현실적으로 보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를 비구 교단에 예속시킬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 조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비구니 제도가 허용됐다는 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봐야 해요. 물론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한 성 차별에 들어가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기준에서 보지 말고 그것이 발생할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문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출가는 여성 해방의 효시라고 할 만한 대사건이었어요. 우리 순례단에는 특히 여성 불자들이 많으니까 이런 불법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경전 독송까지 마치고 오전 12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으로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30분 동안 자유롭게 원후봉밀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순례자들은 조별로, 혹은 혼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유시간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모이자 스님은 인도에서 순례를 할 때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 온갖 일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불평은 그만하시고 이런저런 일들에 웃으면서 다닐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토회 인도성지순례는 뷔페식 여행이거든요. 배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그냥 가고, 중간 중간에 꼭 봐야 할 것은 무조건 가되 나머지는 일정에 차질이 없으면 가고, 차질이 있으면 안 가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제띠안(Jethian, 杖林)에서 도보 순례를 하면 한나절이 없어지잖아요. 원래는 어제 제띠안에서 도보 순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보드가야에서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에 제띠안까지 걷기는 좀 힘들 것 같았어요. 제띠안을 걷게 되면 칠엽굴(七葉窟, Sattapanni) 가는 일정이 오늘 아침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오늘 일정이 여유가 없어지게 되거든요.
인도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방법


인도 성지순례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곳 바이샬리에 숙박 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지역 전체에 숙소가 하나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방이 6개인가 7개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한 침대에 두세 명이 올라가서 함께 자다가 침대가 무너지기도 했어요. (모두 웃음)






차량 두 대로 순례를 왔는데, 한 차의 사람들은 숙소 안에서 자고, 다른 한 차의 사람들은 처마 밑에서 잔 적도 있습니다. 동네에서 멍석을 빌려와서 깔고 잔 적도 있어요. 지금은 숙소가 많이 생겨서 450여 명이 모두 잘 수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30년 동안 엄청나게 깨끗해지고 변화한 겁니다. 처음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거 같지만, 30년 동안 성지순례를 진행한 제가 볼 때는 천지개벽한 수준이에요. 여러분은 ’개벽한 수준이 이 정도면 그전에는 어땠을까‘ 할 텐데, 사실 그전에도 사람 사는 것은 비슷했어요. (모두 웃음)






제가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유는 먹는 것, 입는 것, 일정을 일일이 따지다 보면 인도 여행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저 안 굶고 먹기만 하면 된다. 그저 눈만 붙이면 된다. 그저 가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여행을 하면 인도만큼 편안하고 재미있는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 가서 여러분을 그렇게 환영해 주는 사람을 만나겠어요? (모두 웃음)


이곳 인도는 어디를 가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릭샤 가져와서 타라고 하죠, 물건 가져와서 사라고 하죠, 여러분을 왕처럼 대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배짱 튕기면서 ‘안 사!’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안 사!’ 하는 말을 자주 하니까 어느 날은 장사꾼 한 명이 염주를 가져와서 저한테 대놓고 ‘안 사? 안 사?’ 이래요. (모두 웃음)






인도에 와서 여러분 모두 환영을 많이 받았잖아요. 어디를 가도 아이들이 환영해주죠. 환영비로 10루피만 줘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손도 잡아주고, 산에 올라갈 때도 옆에서 잡아주고, 여왕처럼 대우해줍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이 그런 환영을 받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귀찮아해요. 그러지 말고 환영을 마음껏 받으세요.”

“네!”


“마음을 즐겁게 가지고 여행을 하세요. 스님도 처음부터 즐겁게 여행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처음 인도에 왔을 때는 저도 ‘아이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성지라는 것에 좀 집착했던 것 같아요. 저는 성지에서 엄청난 마음을 내서 절을 하려고 하는데, 인도 사람들이 옆에 와서 계속 돈을 달라는 거예요. 절을 할 여유도 없이 옆에서 계속 ‘박시시(Baksheesh)’하고 졸라댑니다. (모두 웃음)






그리고 향냄새가 얼마나 고약합니까? 가뜩이나 독한 향을 한 움큼씩 불을 붙여서 옆에 갖다 놓으니 숨도 못 쉬겠더라고요.


이것은 문화가 달라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처음엔 짜증도 내고 귀찮게도 생각했는데, 매년 오다 보면 이곳은 우리 성질대로 한다고 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냥 현지에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질 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


그렇다고 현지 사정에 전적으로 맞추면 여행이 뒤죽박죽됩니다. 개인 여행은 괜찮지만 단체 여행에서는 문제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스케줄을 한국식으로 정확하게 세우고 한국식으로 진행해요. 그러는 한편, 현지에서 차가 고장 나거나 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되 그것을 문제 삼고 성질내지 않습니다. 성질내봐야 득 될 것이 없거든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일정을 조절해보니까,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일정을 하루만 더 늘리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운전기사에게 빨리 가자는 독촉을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시간이 늦어지면 운전기사 옆에 붙어서 계속 ‘빨리 가자’ 했는데, 제가 인도에서 교통사고를 한 번 당하고 나서는 빨리 가자는 소리를 안 합니다.


한 번은 사람들을 델리로 보내 놓고 빈 버스를 타고 밤에 돌아왔어요. 차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앞차와 충돌 사고가 났어요. 앞좌석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쳐서 머리가 깨지고 피가 줄줄 났습니다. 그때는 밤이라 깜깜하니까 피인 줄 모르고 ‘왜 얼굴에 땀이 나나’ 하면서 닦았는데, 나중에 불을 켜고 보니까 피였습니다. 그 경험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서두르면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는구나. 그러니 기사에게 독촉해서는 안 되겠다. 기사 본인의 수준대로 운전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그래서 전체 일정을 원래 일정에서 하루 더 늘린 거예요. 처음에는 13박 14일로 다니다가 나중에 15박 16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박 17일로 다닙니다. 일정을 하루 늦추는 대신 운전 기사를 독촉하지 않고 그냥 운전기사가 가는 대로 갑니다. 안전이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이런저런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는 여행이 인도 성지순례입니다. 이제 절반 정도 여행을 했으니까, 나머지 절반은 앞의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이어가보시면 좋겠습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원후봉밀터를 나서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바이샬리 진신사리탑터

진신사리탑터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세 걸음을 걷고 반 배하며 탑으로 나아갔습니다. 430여명이 모두 탑을 에워쌀 때까지 정근이 계속 되었습니다.













탑을 참배한 후 한쪽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유골인 사리를 모신 탑터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그 중에 이 곳은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세운 사리탑의 터입니다. 사리 용기는 파트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 곳은 탑 터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떠올리며 예불 공양을 드린 후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원후봉밀터와 진신사리탑터 두 곳을 둘러보고 바이샬리 왕궁터로 향했습니다.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너른 공터에 다함께 둘러앉았습니다.






“오늘은 보름이에요. 왕궁터에서 달밤을 보내려고 계획했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달은 보기 어렵겠어요. 그래서 지금 한 시간 정도 여유를 즐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하겠습니다. 누가 나와서 대중을 즐겁게 해보세요.”





사람들은 지체없이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을에 사는 인도인들이 하나둘 모여 순례자들을 구경했습니다.





인도인 활동가들도 인도 노래를 부르고 방송인 김병조님은 왕궁터에 꼭 알맞은 노래 ‘황성옛터’를 한자락 불러주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점차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순례자들은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조별로 나누기를 하며 오늘 하루도 돌아보았습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는 여정을 따라가봅니다.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의 마지막 이별을 기념하여 세운 케사리아 탑, 춘다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궈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2021/10/05

동양의 전통적 건강관 음양오행설과 오운육기설

동양의 전통적 건강관 음양오행설과 오운육기설 : 네이버 블로그

동양의 전통적 건강관 음양오행설과 오운육기설
E 크리에이터 양성희 ・ 2021. 8. 11.

음양오행설과 오운육기설(五運六氣說)

동양의학이 경험의학으로 집대성되어 기록으로 체계화된 것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이다. 구체적으로 중국의학은 ≪황제내경 黃帝內經≫·≪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 그리고 ≪상한론 傷寒論≫이 집대성됨으로써 골격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중국의학의 병인론 내지 건강관은 음양오행설 내지 오운육기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

먼저 음양설은 ≪황제내경≫·≪소문 素問≫·≪금궤진언론 金匱眞言論≫에 따르면, “사람의 음양은 밖이 양, 안이 음이 된다. 사람 몸의 음양은 배(背)가 양이 되고 복(腹)이 음이 되며, 장부(臟腑)는 장이 음이 되고 부가 양이 된다.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 등의 오장이 음이 되고, 담(膽)·위(胃)·대장(大腸)·소장(小腸)·방광(膀胱)·삼초(三焦)의 육부가 모두 양이 된다. 배가 양이 되므로 양 중의 양이 심이요, 양 중의 음이 폐이다. 복이 음이 되므로, 음 중의 음이 신이며, 음 중의 양이 간이며, 음 중의 지음(至陰)이 비이다.”
이 같이 사람의 오장육부를 그 위치에 따라 이론적으로 음양의 체계에 부합시켰고, 그 위치를 해부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운육기설 또는 오행육기설(五行六氣說)은 본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과,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의 육기에 의하여 사람 몸의 각 부분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말한다.

원래 음양의 뜻은 매우 복잡하다. 
문자가 시작된 근본 뜻에 의하면, 양이란 산에 해가 돋아오르는 것이고, 음은 그 해의 그림자를 표시한 것으로서 양은 광명, 음은 어두운 암영의 뜻을 나타내는 이원적 변화를 가리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천(天)은 양, 지(地)는 음이고, 해는 양, 달은 음이며, 낮은 양, 밤은 음이요, 남자는 양, 여자는 음으로 해석하고, 전(前)과 좌(左)는 양, 후(後)와 우(右)는 음이 되는 음양이원(陰陽二元)의 대립적 관계로 설명한 것이다.

사람은 16세에 이르면 음양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생식력이 왕성해지지만 48세부터는 양기(陽氣)가 쇠퇴하기 시작해서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생기는데, 양이 승(勝)하면 양병(陽病)이 일어나고 음이 승하면 음병(陰病)이 일어난다. 양기가 과도하면 신체는 땀을 낼 수 없어서 더워지지만 이와는 반대로 음기가 과도하면 신체가 냉각하여 땀이 난다는 등 인간의 건강과 질병의 발생이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조화와 부조화에서 일어난다는 음양이기설을 주장하였다.
이 음양이원론은 ≪주역≫의 8괘(卦) 가운데 양과 음의 조화에서 변화되는 우주만물의 음양이 지닌 대립적 관계로 추리하는 자연철학적 사고에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다. 이 음양이기설은 후한(後漢) 때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에서 병증(病症)이 진전된 것을 양증(陽症), 후퇴한 것을 음증(陰症)이라 하고, 양증을 다시 삼양(三陽), 즉 태양병(太陽病)·양명병(陽明病)·소양병(少陽病)으로 나누고, 음증을 태음병(太陰病)·궐음병(厥陰病)·소음병(少陰病) 등 3음으로 나누어 질병의 병증을 설명한 바 있다.

음양이기설과 더불어 오행설 역시 전통적인 건강관 내지 병인론과 밀접한 관계를 지녀 왔다. 원래 수·화·금·목·토의 오행은 자연현상을 그 순서에 따라 5원소로서 배열한 것인데, ≪내경≫·≪소문≫에서는 오행의 순서를 목·화·토·금·수로 바꾸고, 이것을 다시 오장인 간은 목, 심은 화, 비는 토, 폐는 금, 신은 수에 대응시키고, 다시 오기(五氣)·오방(五方)·오미(五味)·오색(五色)·오음(五音)·오규(五窺)·오지(五志) 등으로 우리의 자연 내지 생리현상에 배합시켰다.

오행설은 동양의학의 이론체계 내지 건강관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배열은 오장 자체의 생리적 기능이나 병리적 원리에 근거하기보다 당시의 자연철학적인 오행설에 유추하여 배합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심(心)이 화(火)이고, 신(腎)이 수(水)라는 해석은 과학적 의학의 견지에서도 수긍할 만한 해석이라 하겠다.

오행설은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305∼240년)에 이르러 추연(鄒衍)의 오행사상에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이론을 도입시키게 된다. 상생관계는 수생목(水生木)·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가 되고, 상극관계는 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된다.

이에 따라 천지의 음양과 같이 우리 인간의 건강도 상생상극의 이론에 따라 그 조화가 이루어졌을 때 건강이 유지되고, 흐트러졌을 때 반대로 질병이 생겨난다는 오행부조화의 병인론과 오행조화에 따른 건강론이 제창되게 된다.

Unsplash음양오행설은 유교의 인성(人性)과 천리(天理)에 관한 성리설(性理說)과도 관계를 맺어 왔다. ≪성리대전性理大全≫ 태극도(太極圖)에 보면, 태극이 동하면 양을 만들고 정하면 음을 만드는데, 그 본연의 체(體)는 태극이라고 하였다. 태극은 음양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음양에 의한 그 본체를 태극이라고 하며, 양이 통해서 음과 합하며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만든다고 하였다.

따라서 천지간에 오직 음양오행이 있을 뿐이며, 사람에서는 남·여로 대응되고 선·악과 강(剛)·유(柔)로 대비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은 수·화·금·목·토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음양오행설은 한의방(韓醫方)에서는 더욱 융성하게 전개되어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의 이론을 덧붙여 건강과 질병현상을 설명하였다.

음양오행설과 함께 오운육기설이 발전되어 오운의 운행에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있을 때, 또는 육기의 오르고 내림에 차이가 생길 때 질병이 일어난다고 해석되었다. 유온서(劉溫舒)의 ≪운기론 運氣論≫에서 보면 오운은 목·화·토·금·수의 오행의 기(氣)이고, 육기는 초(初)·이(二)·삼(三)·사(四)·오(五)·종(終)의 육절차서 (六節次序)의 기라고 되어 있다.

원래 인간의 몸에는 오행이 갖추어져 있고 음양이 뿌리박혀 있지만, 천·지·기에 따라 오운육기가 제각기 이에 상응하여야 건강을 유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인 유하간(劉河間)·장자화(張子和)·이동원(李東垣)·주단계(朱丹溪) 등의 의학자들에 의하여 이와 같은 이론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을 보는 병리이론이나 건강관에는 거의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마치 히포크라테스의 사액체설이 19세기까지 서양의학의 건강관 내지병인론을 지배하여 왔던 것과 비슷하게 이어져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강 [健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10/03

유동식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나’라는 물음 끝에 다시 던져진 질문

알라딘: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나’라는 물음 끝에 다시 던져진 질문  |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신용하,유동식,이기동,조한혜정,진중권,한명기,김동길,권수영 (지은이)
21세기북스2016-05-02

252쪽

책소개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한 강연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역사, 사회, 종교, 미학, 사상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8인의 학자들은 다각적인 시선으로 나를 넘어 ‘우리’에 대한 물음에 답해갔다. 그리고 2016년 그 강연이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로 재탄생했다.

제1부에서는 진중권, 권수영, 이기동, 유동식 교수가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 속에 감춰진 힘이 무엇인지를, 제2부에서는 조한혜정, 한명기, 신용하, 김동길 교수가 세계 속 한국의 역사를 통해 세계 권력의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자화자찬과 비관적인 수치로만 점철된 자기비하에서 벗어나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국인 그 본연에 대한 물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주의, 화병, 뿌리 사상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국인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정서를 통해 한국 사회에 숨겨져 있는 저력을, 세계와 한국의 관계 역사를 통해 앞으로의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한다.



목차
1부 개인의 의식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

한국적 인간, 호모 코레아니쿠스 / 진중권
한국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산업화 시대의 한국인, 기계화된 신체 구조
한국적 근대화의 한계
정보화 사회, 한국인의 자화상
한국인의 정서 구조

왜 우리는 뚜껑이 자주 열릴까 / 권수영
감정의 양면성, 원심력과 구심력
문화적 해석에서 오는 감정의 차이
한국인의 문화적 신드롬
관계에 중독된 한국인
분노 감정이 보내는 신호

한국인의 정서와 한마음 사상 / 이기동
보이지 않는 뿌리를 중시하는 민족
물질 시대에서 마음을 챙기는 시대로
한국적 정서의 장점과 단점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
한마음이 가져다주는 신바람의 기적
죽음, 새로운 성장이며 희망

한국인, 진선미를 추구하는 풍류도인 / 유동식
동방의 등불
고대 부족국가들의 제천도의식
풍류도와 한국인의 미의식
한국 다원 종교 문화의 구조
한국 문화도
한민족은 자랑스러운 풍류도인

2부 민족의 역사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 / 조한혜정
초고속 압축 성장의 빛과 그림자
인류에게 닥친 전 지구적 위기
대한민국 사회의 그늘
공존의 사회로 가는 길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과 연대

G2 시대에 다시 보는 조선의 국제관계 / 한명기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숙명
14세기 후반, 원명 교체와 한반도
왜구의 도발과 임진왜란
잘못된 외교 정책이 부른 참사, 병자호란
중국의 굴기, 한국이 나아갈 길은?

자주독립과 영토주권의 상징, 독도 / 신용하
우리나라 역사에 드러난 증거
일본 고문헌에 드러난 증거
문헌에 담긴 엄연한 진실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
광복과 독도 영토주권의 회복

세계사를 통해 본 한국인 / 김동길
한국인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불교
공자가 말하는 인생의 가르침
공자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의 위인들
오랜 역사를 지닌 삶의 터전, 한반도
우리 민족의 특별한 사명

접기
책속에서
P. 11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이 이루어낸 성취와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본 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접근하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P. 20 남북한의 산업화는 근대화보다는 ‘군대화’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산업화 시대에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의 유형은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산업 전사’입니다. 외화 벌이에 힘쓰는 수출 역군이 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반공 전사’입니다.
P. 34 우리가 즐겨하던 짝짓기 게임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집단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떼어내야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한국인의 집단 이기주의가 이 게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P. 52~53 정신과 의사들의 필독서 가운데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입니다. 1994년 이 통계 편람에 등재된 한국인만의 문화적 신드롬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특유증후군으로 등재된 ‘화병(hwa-byung)’입니다.  접기
P. 59 분노란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입니다. 어쩌면 분노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한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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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신용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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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1961)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1964)와 사회학 박사(1975)를 받았음. 서울대학교 교수(1965~2003)를 정년퇴임한 후, 한양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울산대학교 석좌교수(2003~2018)를 거쳐서,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2003~현재)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2012~현재)으로 있음. 『독립협회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신간회의 독립운동』, 『한국근대사회사연구』, 『한국의 독도영유권 연구』,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저서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왜 서번트 리더십인가>,<도산 안창호 평전>,<독도 영토주권의 실증적 연구 (하)> … 총 92종 (모두보기)
유동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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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학 교수를 역임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일본 국학원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문화사를 규명하는 작업을 통해 풍류 신학이라는 한민족만의 독자적인 사상을 정립했다. 저서로는 『한국 종교와 기독교』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한국신학의 광맥』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 『풍류도와 예술신학』 『신학과 예술의 만남』 『제3시대와 요한복음』 등이 있다.
최근작 :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제3시대와 요한복음>,<화가목사 이연호 평전> … 총 20종 (모두보기)
이기동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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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유학과와 동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교수로 유교문화연구소장과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20년 가까이 동양철학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강설’이라는 알기 쉬운 오늘날의 언어로 옮긴 끝에 2007년 ‘사서삼경강설’ 시리즈(전 6권)를 상재했다.
《동양 삼국의 주자학》, 《이색-한국 성리학의 원천》, 《이또오 진사이》, 《공자》, 《노자》, 《장자》 등의 동양 사상서와 《하늘의 뜻을 묻다-이기동 교수의 쉽게 풀어쓴 주역》, 《한마음의 나라 한국》, 《장자, 진리를 찾아가는 길》 등의 교양서를 비롯해 다수의 저·역서가 있다. 접기
최근작 : <환단고기>,<나의 서원 나의 유학>,<열 살 전에,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라> … 총 60종 (모두보기)
조한혜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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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1980년대에는 ‘또하나의문화’와 함께 여성주의 공론의 장을 열었으며, 1990년대에는 ‘하자센터’를 설립해 대안교육의 장을 여는 데 참여했다. 『탈식민지 시대의 글 읽기와 삶 읽기』,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외 많은 책을 썼다.
최근작 :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큰글자도서]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 >,<선망국의 시간> … 총 47종 (모두보기)
진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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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비평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귀국 후 각종 토론과 방송에서 사회 비판 평론가로서 활동하면서 중앙대학교와 동양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학 오딧세이』『춤추는 죽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천천히 그림읽기』『시칠리아의 암소』『페니스 파시즘』『폭력과 상스러움』『앙겔루스 노부스』『레퀴엠』『빨간 바이러스』『조이한·진중권의 천천히 그림 읽기』『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춤추는 죽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첩첩상식』『호모 코레아니쿠스』『한국인 들여다보기』『서양미술사』『컴퓨터 예술의 탄생』『진중권의 이매진Imagine』『미디어아트』『교수대 위의 까치』『정재승+진중권 크로스(공저)』『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공저)』『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원희룡이 말하다>,<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편 (리커버판)>,<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리커버판)> … 총 178종 (모두보기)
SNS : http://twitter.com/unheim
한명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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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첫 책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로 2014년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접기
최근작 :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최명길 평전>,<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총 40종 (모두보기)
김동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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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평남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광복 직전 평양고보를, 분단 후 월남하여 연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유학 가서 인디애나주립 에번스빌대학을 거쳐 보스턴대학에서 링컨 연구(ABRAHAM LINCOLN : AN ORIENTAL INTER PRETATION)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이후 말과 글로 사회적으론 자유, 국민 개인적으론 사랑이 지닌 가치의 지고함 설파에 신명을 걸었다.
문학, 역사, 철학에 정통한 ‘문사철 삼절’이자 ‘언행일치 선비정신’의 화신이다.
100여 권의 저서를 펴냈고, 2020년 현 연세대 명예교수, 전 단국대 석좌교수이다. 접기
최근작 : <청춘이여 주저하지 말라>,<백년의 사람들>,<내 마음의 노래> … 총 20종 (모두보기)
권수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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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과 교수이자 상담?코칭지원센터 소장으로서, 매년 6천 회 이상의 상담 및 코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미국 보스톤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와 심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겸 연합신학대학원장이며, 한국상담서비스네트워크 이사장, 한국가족문화상담협회 회장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미국 및 유럽의 저명학술지에 다수의 학술논문을 게재하였으며, EBS <여러육아고민상담소>에 고정 출연하며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에게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과 기업 리더십 강연을 통해 대중과도 활발하게 소통 중이다. 저서로는 『치유하는 인간』,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나쁜 감정은 나쁘지 않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 『프로이트와 종교』 등이 있다.
아이들의 마음과 부모와의 관계를 꾸준히 연구하며 부모의 공감을 받지 못한 아이는 누구와도 가슴을 나누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아이가 행복하고 자존감 높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정서와 심리를 건강하게 비추는 거울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며, 거울부모가 되기 위한 실질적 기술을 이 책에서 소개한다. 접기
최근작 : <아이 마음이 이런 줄 알았더라면>,<치유하는 인간>,<부부.가족상담 핸드북> … 총 3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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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인은 왜 자주 뚜껑이 열릴까?
힌국인을 이해하는 8가지 인문학적 고찰

인문학, 나를 넘어 우리를 고민하다

지난 2013년부터 3년에 걸쳐 개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답을 인문학에서 찾아낸 플라톤 아카데미의 대중 강연이 이제 공동체의 영역으로 그 시선을 확장했다. 2015년 가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한 강연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역사, 사회, 종교, 미학, 사상 등 각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은 다각적인 시선으로 나를 넘어 ‘우리’에 대한 물음에 답해갔다. 그리고 2016년, 그 화제의 강연이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로 재탄생했다.
제1부에서는 진중권, 권수영, 이기동, 유동식 교수가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 속에 감춰진 힘이 무엇인지를, 제2부에서는 조한혜정, 한명기, 신용하, 김동길 교수가 세계 속 한국의 역사를 통해 세계 권력의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자화자찬과 비관적인 수치로만 점철된 자기비하에서 벗어나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한국인 그 본연에 대한 물음에서 찾았다. 이는 인문학이 자기 성찰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영역으로 뛰어든 첫 시도이며, 인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모습이다.

자기 성찰을 넘어 공동체 영역으로,
사회와 만난 인문학

인문학이 개인에게 던진 본질적인 물음.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2013년부터 3년에 걸쳐 10만 명을 열광시킨 플라톤 아카데미의 대중 강연과 이를 묶어낸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개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답을 인문학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2015년 가을, 인문학이 ‘우리’에게 던진 또 하나의 질문.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한 강연을 엮은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각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은 다각적인 시선으로 우리에 대한 물음에 답해간다.
헬조선, 수저계급론, 각자도생… 더욱 자극적으로 변모해가는 자조적인 사회 비판은 답을 구하려는 노력 대신 포기의 행복만을 남겼으며, 우리는 희미한 희망을 좇기보다 찰나의 행복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에『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국인 그 본연에 대한 물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주의, 화병, 뿌리 사상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국인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정서를 통해 한국 사회에 숨겨져 있는 저력을, 세계와 한국의 관계 역사를 통해 앞으로의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한다. 이는 인문학이 자기 성찰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영역으로 뛰어든 첫 시도이며, 인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모습이다.

과거와 오늘을 관통하는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미래를 논하다

역사, 사회, 종교, 미학, 사상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8인의 학자들이 한국인의 미래를 위해 대중들과 마주 앉았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몸으로 겪은 원로 학자들의 생생한 체험은 한국인의 과거와 오늘을 관통하며 독자를 역사적 장소로 인도한다.
제1부에서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 속에 감춰진 힘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한국적 인간을 ‘호모 코레아니쿠스’로 명명한 미학자 진중권, ‘분노’라는 키워드로 한국인의 관계 심리를 규명한 종교학자 권수영, 한국인만의 독특한 한마음 사상을 탐구한 동양철학자 이기동, 평생의 연구로 도달한 풍류 신학을 통해 한국 문화를 해석한 원로 종교학자 유동식을 통해 객관적인 한국인을 마주한다.
제2부에서는 세계 속 한국의 역사를 통해 세계 권력의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도 압축 근대화의 역사를 통해 앞으로의 삶의 방식을 고민한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조선의 국제 관계사를 통해 오늘날 한중일 관계에 필요한 교훈을 찾아낸 역사학자 한명기, 독도 영유권에 대한 지난한 분쟁 과정을 통해 영토 주권을 주장한 사회학자 신용하, 세계사를 통해 태평양 시대에 한국의 미래를 고민한 역사학자 김동길은 격변의 세계 속에서 한국인이 위치해야 할 지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게 해준다.
인문학이 ‘나’라는 물음 끝에 ‘우리’를 고민하는 이유는 우리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희망을 찾는 첫 걸음이며 이때 인문학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접기

평점분포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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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인이다 라는 정념에서 한 걸음 떨어진 시각에서 봤을 때 훨씬 더 좋았을 법하다. 에세이 대부분이 성기게 짜여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진중권의 하비투스와 조한혜정의 새로운 심리학적 접근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지루한 느낌. 휙휙 넘겼다.  구매
서종현 2016-09-3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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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기가 점점 더 두려워지는 근본 원인인 한국인의 본성을 깨우쳐준 책. 이제는 대책을 논할 때이다. 모두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  구매
인생책을찾아서 2016-06-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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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감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새창으로 보기
 

        【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권수영 외 / 21세기북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감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본다. 나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나’의 존재감도 있겠지만, 이미 내 안에 자리 잡은 성품이나 성격도 있다. 그것을 본래의 ‘기질’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태생적 또는 문화적 코드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한국, 한국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의 공저자 8인과 함께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다. 책은 두 파트로 구성되었다. 「개인의 의식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와 「민족의 역사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이다. 권수영(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왜 우리는 뚜껑이 자주 열릴까?’ 묻고 있다. 최근 일간지 사회면에선 ‘분노 범죄’, ‘보복 운전’ 등의 단어들을 매우 자주 접한다. ‘주차문제’, ‘층간 소음’문제도 만만치 않다. ‘분노조절 장애’ 환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다. 권수영 교수는 한국인에게 왜 이런 분노 심리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한국인의 관계 심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분노는 내면의 관계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표출되는 이상 신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 내면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분노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한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관계 욕구가 큰 만큼,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 내면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 그러다보니 엉뚱한데서 뚜껑이 열린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는 상대방에게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대화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 뿌리를 중시하는 민족”이다. 이기동(성균관대학교 유학 동양학부)교수의 말이다. 대나무 그림 하나에도 깊은 뜻이 담긴다. 서구와 일본의 대나무 그림과 한국의 대나무 그림을 비교한다. 서구와 일본의 대나무 그림은 뿌리를 무시한 채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한국인의 대나무 그림은 땅이 있고, 뿌리까지 그려져 있다. 한국인의 정서는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등의 마음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표현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을 안 해도 내 마음을 네가 알고, 네 마음도 내가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아직도 족보를 만들고, 유지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뿐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마음 챙기기를 좋아했던 민족입니다. 물질 시대가 가고 다시 마음을 챙기는 시대가 오면 단연 한국인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누가 한국을 더 잘 아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명기(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G2 시대에 다시 보는 조선의 국제관계」를 통해 민족의 역사에서 한국인을 다시 들여다본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한반도의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분열된 내부를 통합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역사와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할 줄 아는 양식과 혜안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600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의 해양이나 대륙에서 힘의 교체, 즉 파워 시프트(힘의 이동 또는 권력 이행)가 생겨나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위기에 직면했고, 그 위기는 거의 백발백중 전쟁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이 점차 쇠락하는 기미를 보이고 중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한반도를 긴장시키는 새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명기 교수는 우리처럼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나라의 지도자나 국민들은 대단히 전략적이고 기민하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당할 수밖에 없다고 염려한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대전쟁 직전 한반도의 지배층은 전략적이지도 못했고, 외부 정세에도 어두웠으며, 내부의 정쟁이나 부정부패에 휘말려 안팎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지금은 어떤가?

 

 

이 책의 다른 필진으로는 진중권(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김동길(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신용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유동식(前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조한혜정(연세대학교 명예교수)등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클로테르 라파이유는 『컬처 코드(culture code)』에서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일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를 ‘컬처 코드’로 설명했다. 이 코드는 각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경험한 문화를 통해 획득되며, 따라서 어린 시절을 어떤 문화 속에서 보내느냐에 따라 코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를 파악하는 것은 내가 속한 문화, 토양을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를 알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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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6-05-12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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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새창으로 보기
<한국인, 누구인가>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우리 한국인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강연이 책으로 출간된 것 입니다. 예전에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인문학 강연을 시작될 때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찾기위해 인문학을 한다는 생각과 함께 시작된 것이 기억나는데, 이제는 그 사고의 폭이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인 '한국인'으로 넓혀진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여덟 분 교수님들의 글이 실려있는데, 제 생각에는 진중권 교수님과 조한혜정 교수님의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바쁘신 분들이 이 책을 읽으신다면 우선적으로 이 두 분의 글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진중권 교수님의 글은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를 분석하는 내용인데,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이루는 단계에서는 전 인구층에서 유일하게 기계와 접한 경험을 가진 군인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의 유형은 '산업전사', '반공 전사'였는데, 이러한 인재상은 아직까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면서 정치, 문화면에서도 전근대적으로 남겨진 상태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한국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21세기 정보화 시개에 적합하지 못한 사고체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진중권 교수가 지적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정서구조)은 국가주의, (천박한) 시장 만능주의, 위계질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구별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개인주의와 여럿이 함께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며 약한 자를 도울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와 함께 추가적으로 이야기된 한국인의 정서구조는 '과잉 감정'인데, 이 점은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흔히들 '냄비근성'이라 불리는 전 근대화적 사고방식이지만, 이 점은 정보화 사회에 들어오면서 감성 마케팅, 감성 노동 등의 새로운 방향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고, 독재 정권과 싸워가며 민주주의를 쟁취한 근본이기도 하여, 어떤 부분을 보존하고 어떤 부분을 절제할 것인 지 철저히 분석하여야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권수영 교수님과 이기동 교수님도 진중권 교수님과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했는데, 사용된 용어 등에서 약간 혼돈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진중권 교수님의 글을 먼저 읽어서 중심을 잡은 후 다른 글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고, 그 밖의 글들은 다른 매체에서도 많이 접하여 이 리뷰에서는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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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2016-05-30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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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역사,정치,사회,종교 등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관심이 갔던 건 역사와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한국,한국인의 모습입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한국의 모습은 바로 강대국에 의해 둘러싸여있는 한반도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중동의 화약고라고 부르지만 한반도 또한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되었던 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파워 시프트.즉 힘의 이동이 있을때면 한반도는 언제나 위기 상태였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나라가 바뀔때면 항상 한반도에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과 그걸 막아냈던 이성계,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유린되었던 임진왜란, 광해군과 인조 때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 시기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청일전쟁,러일 전쟁 또한 한반도에 큰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여기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과거와 똑같은 일이 다시 생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외교 정책이며 우리 스스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과거 인조가 저질렀던 무능한 외교전술을 보여주면 우리나라는 또다시 전쟁에 휩쓸려 위기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한국인의 모습은 바로 분노사회입니다.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게 되는 잔인한 범죄들..그 범죄의 원인은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하였기 때문이며, 과거에 경제성장을 위해 추진했던 정책들이 사회 구성원의 불균형을 가속화시켰던 것입니다. 성장을 중요시하면서 기업에 특혜를 주었던 정책으로 인하여 복지 예산은 여전히 미흡하며 사회적인 갈등으로 이어집니다.그리고 우리 사회의 노령화,저출산, 저성장, 과잉학력,고용없는 성장의 원인이 됩니다.이러한 사회적인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여짐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한 사람의 생명을 쉽게 생각합니다. 나만 죽을 순 없지라는 풍토가 우리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의 관계중독이며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함으로서 큰 범죄가 연달아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범죄 자체를 차단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수 있었으며 해결책 또한 알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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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6-06-0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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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이 책은?

 

저자가 여덟 명이다. 그 면면을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용하, 역사가 보인다. 권수영, 심리학이 보인다. 진중권,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그의 촌철살인적인 펜의 힘이 보일 것 같다. 유동식, 이기동, 조한혜정, 한명기, 거기에 덧붙여 김동길, 물론 요즈음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무언가 들을만한 이야기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두 가지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 부는 ‘개인의 의식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이고, 2부는 ‘민족의 역사에서 한국인을 발견하다’이다.

그러니 한국인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한국인인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편집되어 있다.

 

한국인, 그 모습은?

 

개인을 이야기 하는 것은 쉬워도 한국인 전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고 김동길 박사는 말한다. (223쪽)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일을 이 책의 앞부분인 1 부, ‘개인의 의식에서 한국인을 벌견하다’에서 해 내고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진중권과 권수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진중권 교수는 한국인을 ‘하비투스’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비투스는 정신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것을 말한다. 사고방식, 행동방식, 감정구조, 이 세가지를 묶어서 하비투스라 한다.

 

권수영 교수는 ‘분노’라는 키워드로 한국인의 관계 심리를 규명하고 있는데, 그는 분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분노는 내면에 있는 관계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표출되는 이상신호다. 따라서 그 이상신호에 잘 반응하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밑줄 긋고 새겨야 할 말들

 

<한국인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생각이 없으므로 의견도 없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논의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226쪽)

 

다시 이 책은?

 

이 책은 사계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여덟 명이 '한국인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쓴 책인데, 바로 거기에 약간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즉 한명 한 명이 쓴 글은 제각기 다 일리가 있는데, 그 글 전체를 일관하는 그 어떤 것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거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생각 같아서는 여덟분 중의 누군가 발제자가 되어 이 여덟 편의 글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몇 마디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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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yoh 2016-05-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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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나’라는 물음 끝에 다시 던져진 질문 새창으로 보기






같은 땅에 태어났어도 그들이 보이는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싶을 때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정이 많다고 한다. 정이 많기 때문에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으로 치우치기도 한다. 그래서 쉽게 분노감정을 표출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감정이 지배적이라 서로 모르는 사이여도 금새 친해지기도 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한이 많은 민족이기도 하다. 그만큼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왔고 누구에게 하소연 할 길 없이 힘없는 민초들은 희생양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삼면이 바다인 지형에서 살고 사계절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기후조건이라 적응력이 뛰어나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태생적 근원을 찾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순간순간 공감도 많이 되었고 8가지 인문학적인 고찰과 각 분야의 지성인들이 분석한 걸 보면 또 나는 영락없는 한국인임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월드컵 때 온 거리로 뛰쳐나가 목 놓아 응원하고 골을 넣었을 때 모르는 사람끼리 얼싸안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독 국가끼리 맞붙는 시합에서 보이는 남다른 애국심은 국민이 서로 똘똘 뭉치는 힘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족 내에서 부모님과 친척들로 예절 교육을 받고 학교에서도 동급생끼리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몸 안으로 내재화된 것이다. 이렇게 주변 환경으로부터 한국 문화를 학습받고 어울려지내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만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나간다. 우린 오랫동안 공동체를 갖고 있었다. 경사스런 일이든 힘든 일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었고 연대감을 형성시키는 지역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과 근대화로 인해 점점 공동체는 무너지고 지역 이기주의와 천민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서로 나누고 지낸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한국인의 생활습관과 습성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짧은 시기에 강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다보니 많은 부작용을 낳고 보신주의와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아마 조선시대의 한국인과 지금의 한국인은 많이 다를 것이다. 시대적 조류는 민족성에도 큰 영향을 주고 대를 이어 학습되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한국인에 관한 많은 책들에서도 지적되었지만 질서의식, 법 준수는 아직도 선진국으로 가기엔 걸림돌이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끊임없는 부패를 낳고 도덕과 양심을 희미하게 가린다. 



이 책은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 다각도로 파고든 의미있는 책이었다. 정치, 역사, 교육, 사회, 종교를 아우르며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씌여져서 재미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인이 있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다뤘고 한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타 민족에게 배타성을 띄는 위험한 요소임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짧은 시기에 이만큼의 경제성장을 이뤘음에도 정당한 룰이 깨진 상황에서 구축되었기에 앞으로도 그 휴유증과 악순환의 고리는 한동안 이어질 것 같다. 지금 세대가 한국인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더 좋은 국가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헬조선이 아닌 21세기를 이끌어갈 국가로 거듭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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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지기 2016-05-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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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등록 :2021-01-20 08:15수정 :2021-02-18 09:17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이가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환의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의 혜안을 얻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다섯번째 멘토는 풍류신학의 창시자 유동식(99) 교수다.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유동식 교수는 황해도 평산 남천에서 태어나 연희전문대를 거쳐 일본 도쿄 동부신학교에 유학 중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감신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어 감신대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그는 한국 나이로 100살이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연세대 옆 단독주택에서 홀로 산다. 부인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가 4년간의 암 투병 끝에 2004년 별세했으니, 사실상 20년 넘게 홀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며 산 셈이다. 그런데도 초인종을 누르자 2층에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손수 열어줬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운동 삼아 직접 나온다고 한다. ‘원활한 대화와 인터뷰가 가능할까’라는 염려를 일거에 날리고, 무려 3시간 동안 질문에 자세히 답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기독교인에게는 교회라는 공간을 넘어 참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 전통의 얼을 풍류도로 보고 풍류신학을 연 그는 케이팝의 원류를 풍류도라고 본다. 그는 “춤과 노래와 예술혼인 풍류도를 마음껏 발현하라”고 젊은 세대를 격려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줬던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영어로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 ‘동방의 등불’은 풍류도를 오늘에 알린 최치원이 썼던 말이라고 했다. 다음은 유동식 교수와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왜 풍류도에 천착하게 됐나.

“일제시대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등의식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됐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유학을 가보니까, 나는 4대째 기독교 모태신앙인데도 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들과는 달랐다. 그러다가 일본의 석학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한국과 예술>이란 책을 봤다. 명치유신때 영국에 유학했다가 육로로 돌아오면서 문화 예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년에 걸쳐 일본에 돌아갔던 그는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감탄해 무려 7번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일본이 문화적으로는 절대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시대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 우리 전통을 찾다가 <삼국사기>에 나온 최치원의 난랑비문에서 풍류도를 보고, ‘아, 이게 우리민족의 얼’이구나 생각했다.”





유동식 교수가 우리 전통의 얼과 통하는 풍류신학을 형상화해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풍류도를 왜 우리 민족의 얼로 보는가.

“고운 최치원이 12세 때 당나라 유학을 떠나 과거까지 급제하고 17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너무 어려서 가서 신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유불도를 다 익히고 와보니 신라에 그것이 다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 실로 이는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 모든 중생과 접해 인간화 한다”고 했다. 중국에도 풍류라는 말은 있지만 그것이 도가 된 건 한국뿐이다. 풍류는 멋이다. 그건 서양의 미의식과는 다르다. 한국인은 특유의 미의식이 있어서 인생을 멋있게 살라고 한다. 유불도를 다 통달해야 나오는 멋이다. 그게 한국인의 얼이다.”



-풍류도와 기독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우리나라의 종교를 살펴보니, 불교 천년, 유교 5백년. 다 중국에서 왔다. 그 뿌리를 캐다보니 무교가 있었다. 나는 무속이라고 하지않고 무교라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보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봄, 가을에 여러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게 나온다. 그들의 노래가 무교인(무당)을 통해 전해온게 700여가지나 된다. 난 박사학위를 그 무교로 했다. 무당박사다. 그래서 이단으로 많이 몰렸다. 그런데 이제 풍류신학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때는 그걸 알아야 우리의 얼을 찾겠더라. 불교, 유교도 풍류도를 통해 재해석돼 한국불교, 한국유교가 된것이다. 기독교도 풍류도로 해석되어야 한국인의 마음에 더 깊게 와닿게 된다. 사람 의식은 일이백년에 쉽게 바뀌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풍류도를 언급한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이 사용한 ‘동방의 등불’이란 말을 어떻게 타고르가 사용했을까.

“1922년 3.1운동 여파로 한국인들이 침울하던 때, 당시 동경에는 한인 유학생 400명이 있었다. 이 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다.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여서 한국의 3.1운동에 강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헐버트가 1905년에 낸 <한국역사>라는 영어 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논문 등을 통해 타고르도 한국 문화와 예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와이엠시에이에 조선인유학생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타고르를 초대했더니 타고르가 와주고 가면서 그 ‘등방의 등불’이란 시를 적어 건네 줬다고 한다. (영어로 시 전문을 외운 뒤). 일제시대 일본은 일등국민이라고 하고, 우릴 멸시해서 얼마나 심한 열등의식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그 땐 영어도 잘 못했지만,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방의 등불만은 다 외웠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의해 속국이 되어도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이 되어 우리 말도 마음대로 못쓰고, 성씨도 못쓰게 한 건 일제시대밖에 없다. 지금 아무리 시대가 힘드니, 나쁘니 해도, 그 멸시를 당한 왜정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 때는 도저히 당당할 수가 없었다. 어떤 세상도 왜정시대보다는 낫다.”



-한국 풍류도와 일본 무사도의 비교했는데요. 어떻게 다른가?

“교토 동지사대학 창립자 니즈마 주기 때마다.외국석학들을 불러 특강을 시키는데, 100주기 때 특강 강사로 나를 초청했다. 그 때 무사도와 풍류도를 주제로 3일간 강의를 했다. 일본인들의 상징은 칼과 거울이다. 그들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다. 그들은 생선도 날것 그대로 사시미로 먹는다.. 자연 그대로를 음미한다. 그러나 우린 그게 아니다. 우린 있는 걸 몽땅 넣어 비벼먹는다. 복장도 일인들은 바지를 안입고 남녀가 다 치마를 입었다. 해양족들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같은 기마민족들은 바지에 댓잎을 묶는다. 우리처럼 소고기를 많이 먹는 민족도 없다. 말 타던 북방민족의 특성이다. 야생 사냥을 하던 이들이어서 우리만 쇠젖가락을 쓴다. 이웃 민족들은 다 나무젖가락을 쓰는데도 말이다. 옛날엔 담배 쌈지에 칼을 꼿고 다녔다. 사냥하던 전통이 있어서 그랬다. 일본 도쿄대학 교수가 한때 일본인도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 그 설을 막았다. 왜냐면 기마민족설에 따르면 한국민이 월등한게 드러나고 일본인이 열등민족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기마민족의 원시 종교가 바로 무교다. 기마민족은 동서남북 땅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보고 다니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믿는다. 그게 유일신자에겐 하나님이다. 일본사람들은 하느님이란 말이 없다. 천황을 신으로 믿으니까. 유대민족도 유목민의 후손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원시 종교인 하느님 신앙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불랙핑크, 이날치밴드에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몇년 전 홍콩의 대학에서 강의해달라고 했을 때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파키스탄까지 밖에 못왔지만 싸이는 말춤으로 세계를 정복했다고 했다. 한민족은 아세아의 독특한 민족이다. 중국이 주변국을 다 먹었다. 위구르족은 종교도 이슬람이고 민족도 전혀 다른데 그곳까지 다 합쳤다. 그런데 조그만 한국은 못합친다. 합쳐지지가 않는다. 그들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풍류도에 세계가 열광하는 것을 보라. 이제 왜정시대 살았던 우리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기 죽을 게 없다. 우리 얼인 풍류의 춤과 노래와 예술로 마음껏 뽐내보라. 그것이 우리 민족의 최고 장점이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동양에서 가장 크게 꽃피운 것은 고대에 하늘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고대의 무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연결되나.

“무속은 3가지를 빈다. 첫째는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제적거리를 하고, 이어 부자 되게 해달라고 대감거리를 하고, 평화롭게 해달라고 성주거리를 한다. 그것이 열두거리의 핵심이다. 오늘날 교회도 오래 살고 부자 되고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빈다. 그러나 그런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무속과 다를게 없다. 그런 것을 넘어서 그걸 극복하고 다른 차원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게 종교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너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서로 사랑하고 살자는게 기독교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전통 종교와 문화를 미신시하는데, 이를 어떻게 보나

“하나님은 한 문화, 한 언어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불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유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도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이사야만 예언자가 아니고. 그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나라를 더 풍요롭게 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뭐니뭐니해도 문화적인 현대화다. 선교사들이 들어오자마자 배제, 이화, 배화 등 학교를 세웠기에 한국이 근대화의 첫걸음을 걸었다. 그들이 전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않고 교육과 자선사업을 하고 나중에 홀트가 와서는 고아들까지 돌보았다. 우리의 바탕에 깔린 어려움을 해소해준게 기독교인들이다. 한국 근대화화는 기독교와 뗄래야 뗄수가 없다.”



-신학적으로 영향 받은 인물은

“내 신학의 조상은 불투만이다. 불투만. 그의 ‘케리그마와 비신화화’를 처음으로 번역했다. 유럽에 있을 때 그 댁에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영의 세계를 믿는데, 그것을 표현하려면 이 세상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영의 세계를 이 세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신화라고 한다. 희랍신화는 자기들 영적인 세계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면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을 해석해야한다는게 불트만은 비신화화라고 했다. 가령 죽으면 천당간다고 하면 저 하늘에 천당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천당은 영의 세계다. 복음을 학문적으로 눈 뜨게 한 것이 불투만 교수다. 그 다음에는 문화신학자인 폴틸리히의 영향을 받았다.”





유동식 교수가 젊은 시절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영향 받은 한국인은 없었나.

“해방 후 학병에서 돌아왔는데 신학교가 다 문을 닫았다. 감신대가 겨우 문을 열었는데, 일본인들이 다 가고나니 교수들이 없었다. 겨우 변홍규 박사 같은 몇 분이 가르쳤다. 다른 분들 강의는 일본에서 강의듣던데 비하면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종로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일요강좌가 있었다. 주 강사가 유영모, 함석헌이었다. 그 강의가 오후 1시부터 시작하니,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점심도 안먹고 그리 달려갔다. 유영모는 독특한 용어를 써서 잘 못알아들었지만 함석헌은 달변에다가 한국사를 전공해서 한국적인 기독교 해석을 했다. 그 때 신학생들 치고 함석헌 영향을 받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윤동주 시인과도 인연이 있었나.

“연희전문 다닐때 같은 기숙사에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의가 바르고 점잖은 신사였디. 사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원이 좀 달랐다. 일찍 깨달은 사람이다. 시의 세계에서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 신앙 세계를 깨달은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학생인데 도사였다. 그러니 일반사람들과 막 사귀지않았다. 그 세계에 통해야지 사귈 수 있었을테니까.”



-화엄경의 사사무애 법계 등의 불교 이해 등을 책에서도 언급했는데, 어떻게 불교를 공부했나

“해방 후 감리교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 이재각이란 룸메이트와 함께 이름있는 외래 강사들을 쫓아다녔다. 그때는 교수들이 시원치않으니, 이름있는 강사들을 서울시내 전역으로 쫓아다녀 듣는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 때 기독교의 함석헌처럼 뛰어난 이가 불교에서 탄허스님이었다. 탄허스님이 젊었을 때였는데 장자 강의를 했다. 남산 아래 사립대학에서 겨울방학에 하루에 두시간씩 했다. 추운 겨울에 강의하는 사람도 용코, 듣는 사람들도 용했다. 학생들이 교파를 막론하고 지식에 굶주려 있을 때라서 낮에 와이엠시에이의 함석헌 강의에 우르르 몰려가고, 밤엔 탄허의 장자강의에 우르르 몰려갔다. 함선생도 기독교지만 동양 고전 통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탄허도 성경을 다 알고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아 서양 기독교만 있는게 아니구나’나라는 걸 알았다. 그 때부터 점점 뿌리를 캐다가 한국 종교사를 안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장자를 강의하면서 화엄학을 자주 이야기했다. 우린 불행한 세대임에도 그렇게 다른 종교와 사상도 더불어 배워 회통할 수 있는 세대였다. 그게 큰 특징이다. 동양학 강의를 듣는게 성서를 보는 눈에 트는데 큰 도움이 됐다. 영원한 하나님이 진리인 이(理)법계라면, 생활은 사(事)법계다. 영원한 하나님 말씀이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를 모르면 성육신과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이해못한다. 동양학자들이 포착한 도의 극치에 가면 다 통한다. 그게 삼교를 다 포함한다는 풍류도다. 풍류도를 표현한게 예술이다. 외래 종교 사상만 배운 최치원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같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우리 얼인 풍류도의 눈으로 유불도를 봤는데, 나는 풍류도의 눈으로 기독교를 보려고 했다. 그게 풍류신학이다.”



-소금이란 호는 무슨 뜻인가.

“원래는 호가 소석이었다. 힌돌이란 뜻이다. 전주 남문밖교회 고득순 목사가 지어줬다. 결혼식날을 잡아놨는데 한국전쟁이 터져서 천사원을 설립한 목사인 장인이 안방에서 주례를 해서 그냥 식을 올렸다. 그리고 난리통에 전주에 내려갔다. 고 목사님은 전주의 10대 한학자중 한분이었다. 사서삼경과 성경을 다 외우신 분이었다. 그 분이 소석이란 호를 지어줬는데, 힌돌은 묵시록에 나온 그리스도란 뜻이다. 예수님 발바닥도 못따라가는 내겐 너무 짐스러웠다. 그런데 도연명이 시를 읽다보고, 1년 사시사철 술에 취해 사는 도연명의 호 소금이 마음에 들어서 칠순부터 호를 소금으로 했다. 소금은 거문고는 거문고인데 줄을 달기 전의 거문고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제 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내게 걸맞는 호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목사 안수를 받지않았나.

=한국전쟁 때 서울이 수복된 뒤 전주에서 돌아와 배화학교 교목으로 가야하는데, 목사가 아니니 종교주임을 했다. 감리교는 예전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금주 서약을 했다. 그런데 군에서 2년간 술을 많이 마셔서 버릇이 됐다. 지금도 여기에 맨 포도주잖아.그러나 과음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술 마신다고 죄 될게 없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목사 안수를 포기했다. 감신대 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도 룸메이트하고 술도 마시고, 감리교신학교인 미국 보스턴신학교에서도 보니 학생들이 몰래 술을 다 마시고는 있었다. 지금은 안수 때 금주 규정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그때는 그런 규정이 있어서, 술을 못끊을 것 같아서 나를 속일 수 없어 안수를 안받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의미는

“나는 평생 연세대교회를 다녔는데, 주일날마다 교회 모이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이다. 코로나로 이게 중단돼 버렸다. 그래서 코로나를 마귀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니, 현대판 마귀 아니냐. 일요일날 천안에 사는 아들이 오면 함께 성경 한장 읽고 예배 드린다. 공동체 예배를 회복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지금 고난은 참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건성으로 신앙했다. 그런데 남의 소리 듣고 감동 받는 것도 좋지만, 각자의 신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거다. 가령 교회에서 무슨 소리인줄도 모르고 주기도문을 외운 사람이 혼자서 한글자 한글자 생각하게 될수 있다.”



-건강 비결은.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자주 묻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시니 사는 것이다. 가난한 왜정시대에 학병 끌려가 죽을뻔했고, 한국전쟁때도 죽을 뻔 한 것을 살려주신 구원의 역사에 감사한다. 1남1녀를 뒀는데, 딸은 일찌기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먼저 세상을 떴고, 천안에서 건축업을 하며 사는 아들이 한주일에 한번씩 먹을 걸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30분 하고, 기도를 한 뒤에 생식을 두유에 타서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아침 8시가 된다. 평생 그렇게 산다”





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100세신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저사람(부인)이 암 4년을 앓고 세상을 뜨면서 19개의 시를 썼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내다보면서 쓴 19번째 시가 ‘제3의 생일’이다. ‘육체로 태어나게 해준 생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번째는 세례를 받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나한테는 아주 감동이다. 죽음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을 생일로 본거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외로움은 어떻게 극복하나.

“사람들이 그걸 많이 물어보는데, 난 외로운걸 모른다. 저사람이 갔어도 내가 혼자 있다는 생각이 안든다. 저 사람이 시로 읊었지만 하늘나라에 살아있어서 거기서 여기 들락날락하고, 나는 여기서 거기를 들락날락하니, 혼자 있다는 생긱이 들지않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979519.html#csidx925164f98eb44f7abc30123408f9348

2021/09/28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오늘의책2003-03-10




7.0 100자평(1)리뷰(6)
품절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248쪽

책소개
함석헌은 한국 근대사를 서술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역사, 언론, 종교, 정치와 사회운동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장기려 박사,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원경순 선생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함석헌이 남겼던 말과 글들을 모아 놓은 '명상집'이다. 학문으로서 그의 사상을 파고드는게 아닌, 그의 글 속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명상과 실천'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5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책은 참된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글, 생명과 전체에 대한 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 의식에 관한 글, 편견과 자만에 빠지지 않은 참된 종교와 믿음에 관한 글,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서문

1. 참 찾아 나선 혼
2. 생명의 우주와 하나되어
3. 이 역사에 씨알로 서서
4. 미완성의 하나님
5. 아름다워라, 우리의 삶이여


책속에서



네 맘을 좀더 가라앉혀라. 좀더 속을 들여다보아라, 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숨을 좀더 죽이고 생각을 좀더 고요히 해 보아라.
새벽 밝기 전에 명상의 낚시로 잡은 산 고기가 있는 사람은 종일 피곤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독수리처럼 영원을 향해 올라간다. 그 사람은 낚는 줄도 모르게 많은 영혼을 낚을 것이다. -42쪽 - 이누아
이제 기도해라, 새로 내는 네 맘의 뿌리가 지구의 중심을 뚫도록까지 기도를 끊지 마라, 맘 박기를 쉬지 마라. 네 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 네 가슴 속에서 빛이 환하게 날 때까지 열도를 내리지 마라. 맑아져서 새벽 이슬 같을 때까지. 향기로워서 향기로워서 아침 연못의 연꽃 같을 때까지, 동짓달 밤하늘의 별보다 더 거룩하도록, 그래, 거룩해야 한다. -57쪽 접기 - 이누아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이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85쪽 - 이누아
진리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체험은 몸으로 앎이다. 몸으로 하기 전엔 참이 아니다. 마음이 옹근(통일) 것이 함(행동)이요, 함이 맺힌 것이 몸이다.-196쪽 - 이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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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함석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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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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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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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때 성경말씀 읽기에 빠져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길을 가고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대학 재학 중, 예수전도단(YWAM) DTS를 마치고 대학부 간사를 했다. 신앙 수도공동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이십 대 중반에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생활하며 공부했다.
총신대학,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프랑크프트 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학문인 종교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독일 유학 중, 인도 푸나에 있는 “드 나빌리 칼리지”에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성과 수련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여러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강의했고, <크리스챤 아키데미>에서 근무한 후, 인도선교사로 생활했다. 한국 최초의 도심 속 기독교명상 센터 <예수도원>을 개원했고, 40대 초반 인도를 오가면서 10년을 생활하며 “씨알아쉬람”을 개원했으며, 실롱(Silong)에 있는 마틴 루터 대학에서 연구 방문교수로 생활했다.

(재)밀알복지재단 사목으로 사역했고, 생활수도 공동체인 <예수나무공동체> 꿈꾸고 있다. 현재에는 북한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주로하는 (사)글로벌블레싱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면서 동시에 예수향남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신부와 스님과 함께하는 <삼인삼색> 토크쇼로 KBS <아침마당>, <여유만만> 출연했으며, 현재 SBS 라디오 <시사특공대>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진의 영성시리즈>, <나의 질긴 외로움을 만지시는 이>, <하나님과 내통하라>, <간디와 대화>, <예수공부법> 등 20 여권의 책이 있다,
E-mail : kimsanjin1@naver.com 접기


최근작 :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예수공부법>,<간디와의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 … 총 3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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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단편적인 글 모음으로 보여주기는 무리인듯.
madwife 2015-10-3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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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너 자신을 혁명하라


씨알 함석헌 명상집.

책 제목만 보면 흔히 유행하는 자기계발서 같지만, 내용적으로 깊이가 일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책 내용 중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늘 하늘을 우러러보자`, `닭 울기에 일어나 하루 살림 준비를 하자`,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 말자`,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내 몸 거둠을 내가 하자`,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술, 담배를 마시지 말자`, `산 물건을 죽이지 말자`, `하루 한번 땀을 흘리자`, `시골을 지키자`, `빚을 지지 말자`라는 삶에 대한 조언도 있기에, 자기계발서의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혁명(革命)은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 민중(民衆) 전체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변화를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큰 차이가 있다. 마치,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중에서 일반 서적은 `修身` 측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이 책은 `平天下`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지만, 동양 고전, 성경, 불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책 곳곳에 고전에 대한 인용과 설명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나 같은 초보자들은 초반에 질려 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초반부에 나오는 한 단락이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 무한하다. 그러나 사람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하자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가 가운데(中)를 말했고, 고르게 함(和)를 말했다. 가운데란 여기나 저기가 아니다. 여기면서 저기요 저기면서 여기인 곳이다. 고르게 함이란 함이나 아니 함이 아니라, 하면서 아니 하고 아니 하면서 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노자가 비임(虛)을 말했고 됨(化)을 말했다. 비임이란 있음이나 없음이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음이다. 됨이란 달라짐이나 그대로 있음이 아니다. 달라지면서 그대로 있고 그대로 있으면서 달라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새로남을 보여 주었다. 십자가란 죽음이나 삶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음이다. 새로남이란 육이나 영이 아니다. 육이면서 영이요 영이면서 육이다.
그래서, 석가가 반야(知慧)를 말했고 해탈(解脫)을 말했다. 지혜란 안다 모른다가 아니다. 앎으로 모르고 모름으로 아는 자리다. 해탈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면서 저 세상이요 저 세상이면서 이 세상인 삶이다. (p39)˝

˝사람에게 있어서 자아라, 영혼이라, 아트만이라, 인격이라 하는 것이요, 전체에 있어서는 하늘이라, 하나님이라, 브라만이라, 생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면서 하나요, 아버지면서 아들이요, 절대면서 상대다. 거기 생명의 정신의 한 큰 운동이 있다. (P43)˝

이 책의 장점은 내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새로움 깨달음을 접한다는 감동을 주기에,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라 생각된다.
또한, 많은 인용이 있음에도, 그러한 인용이 저자의 `지식 자랑`이 아닌, 우리에게 `一以貫之(하나로써 꿰뚫음)`하는 친절함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단편적인 명상집이지만, 큰 주제별로 묶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사람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의 뜻(天命)`을 알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스승이 바로 `씨알`이다.
우리는 `씨알(생각함)`을 통해 하늘의 얼을 우리 속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씨알`을 각자의 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씨알이 있다.
씨알을 찾는 것은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찾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서두에 정리한 내용임)

하늘의 전체는 `하나님`이지만, 역사의 전체는 `씨알`이다. 생각을 통해 깨닫게 되면, `나`와 `너`가 다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씨알`이 `하나`되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天心은 民心으로 나타나며, 민심의 표현은 `악에 대한 반항`, `폭력을 쓰지 않는 싸움`, `조직적인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민심의 표현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와 싸워 나가야 한다.

책에 있는 대강의 내용을 정리했는데,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 많이 부족했기에, 놓치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 많이 아쉽다. 이러한 부분은 시간을 두고 더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자신의 선택한 하나의 길을 통해 전체를 보려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던 기쁜 시간이었다.

˝<中庸>에서는 중(中)은 천하지정리(天下之定理)라 했지만 이(理)가 이(理)대로만 있다면 죽은 이(理)다. 중(中)은 필연적으로 발(發)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야 만다. 그러면 벌써 만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곧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지만, 빛이라 할 때 벌써 거기 어두움이 있었다. 싸움은 거기서부터 벌어진다. 힘씀이 필요하다.(P47)˝

˝나는 물론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불교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안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안다. 그것은, 부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예수를 통해서 안다. 영원하신 이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이다. (P81)˝

ps. `인(仁)`에는 한자로 `씨(核)`의 의미도 있는데, 이러한 공자의 `인(仁)`사상과 `씨알사상`도 아마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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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6-14 공감(3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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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사상과 자기 혁명....


이 책은 함석헌 사상을 그가 남긴 글을 따라 재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다.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편향적인 시각없이 오로지 그의 생각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주요내용을 담은 글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위한 책이라고 엮은이가 말한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라는 제목의 말은 함석헌 옹의 씨알사상으로 드러난다. 씨알은 민의 역동적인 생명력이며 그것은 늘 변화한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보다 널리 퍼지며,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욱 크게 산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영원한 존재와의 만남도 현실의 삶에서의 민중의 처지와의 만남도 이루어낸다.

늘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세계와 밖으로 나가는 세계와는 불연속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 세계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위대한 삶들을 만날 때면 늘 그 불연속면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하였다. 그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연속면....

하지만 그 두 삶을 동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서도 꺽이지 않고 좌절되지 않는 내면의 밝은 빛이 있었고, 그 빛은 사회적 현실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꺼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만 했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처럼....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놓아두고, 그가 가진 생명의식과 씨알 사상은 나의 개인사적 관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관심의 한가운데를 뚫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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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3-10-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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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로 노력한다



이누아 2009-08-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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