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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 상 하 井筒 俊彦, 仁子 寿晴: 수피즘과 노장 사상

Amazon.co.jp: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 上 (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 : 井筒 俊彦, 仁子 寿晴: Japanese Books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 上 
(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 Tankobon Hardcover – May 29, 2019
by 井筒 俊彦 (著), 仁子 寿晴 (翻訳)
4.8 out of 5 stars 5 ratings



▼『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堂々完結!
▼世界に井筒の名を知らしめた主著、待望の邦訳
▼東洋における二大叡智――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の真髄を解き明かす、比較哲学的考察。

日本語著作の空白の時代を埋める最重要著作――『井筒俊彦全集』と併せて、井筒思想の全貌が明らかになる。
上巻は、イスラーム神秘哲学の頂点、イブン・アラビーの存在論

【目次】

はじめに


第一部 イブン・アラビー

第一章 夢と現実(リアリティー)
第二章 絶対性の状態にある絶対者
第三章 人間の自己知
第四章 形而上の収斂と現象における拡散
第五章 形而上学的混乱
第六章 絶対者の影
第七章 神の名
第八章 アッラーと主
第九章 存在論的な慈しみ
第十章 生命の水
第十一章 絶対者の自己顕現
第十二章 恒常原型
第十三章 創造
第十四章 ミクロコスモスとしての人間
第十五章 個としての完全人間
第十六章 使徒・預言者・聖者
第十七章 完全人間のもつ不思議な力


訳 注
イブン・アラビー引用索引
人名・著作名索引
事項索引

416 pages
Product description

出版社からのコメント
【書評】
読売新聞 2019年12月22日(13面)「文化面・本よみうり堂」「読書委員が選ぶ「2019年の3冊」」で、山内志朗氏(倫理学者・慶応大教授)に本書を挙げていただきました。
週刊読書人 2019年12月13日「2019年の収穫」アンケートで、佐々木力氏に本書を挙げていただきました。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世界に井筒の名を知らしめた主著、待望の邦訳。東洋における二大叡智の真髄を解き明かす。上巻は、イスラーム神秘哲学の頂点、イブン・アラビーの存在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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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tails

Publisher ‏ : ‎ 慶應義塾大学出版会 (May 29, 2019)
Publication date ‏ : ‎ May 29, 2019
Language ‏ : ‎ Japanese
Tankobon Hardcover ‏ : ‎ 416 pages
Customer reviews
4.8 out of 5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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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reviews 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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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ーメンマン

5.0 out of 5 stars きみはどの陣営だ?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15, 2019
Verified Purchase
なぜ神秘主義者たちは現象世界の象徴的性格を解き明かそうとするのか、その質問に答えようと思う。
この世界には何か重要なことが隠れている、そう気が付いたならばきみは神秘主義者である。スーフィズムでは死後に魂はバルザフ(=冥界)で自分が死んだことも気が付かないままに現実的な夢を見るとされる。だから夢と現実の区別が重要であり、ここがバルザフ(=冥界)であると気が付かなければそのまま地獄に引きずり込まれてしまう。
それでは、どうすればここがバルザフ(=冥界)かどうかが分かるのだろうか。
荘子にはその境目を見つけ出そうとする精神的な努力が伝わる。そして、スーフィズムでは現在の世界がバルザフ(=冥界)とするからイスラム教である。つまり,スンニ派やシーア派は現世に惑わされていてここがバルザフ(=冥界)であることを認めようとしないからイスラム教ではない。
それでは、この神秘的な世界に何が起ころうとしているというのだろうか。
スーフィズムをやれば分かることだが、太陽系はアンドロメダ銀河に属している。そのアンドロメダ銀河は天の川銀河を併合しようとしていて、衝突のときに太陽系はアンドロメダ銀河に戻る算段になっている。その過程でさんかく座銀河も併合する段取りをつけて、アンドロメダ超銀河団を成立させようとしている。しかし、おとめ座超銀河団を成立させようとする銀河団はそれを阻止しようとする。Wikipediaのマニ教の解説の通り、魂は壮大な宇宙の戦いに参画している。
どの陣営が有利に宇宙の戦いを進めているのかは神秘に属することなので言えないが、自分の魂が属する銀河の優劣が精神の起伏に影響するので心を研ぎ澄ませば分かるだろう。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は実に奥深い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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ゆっぴ

5.0 out of 5 stars すごいことになる!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10, 2021
Verified Purchase
この本は(百人中)二人しか読まないでしょうね!・・・
悪いけど・・・
でもねぇ、その二人は、凄いことになる!!!
多分、何万人にも影響しちゃうでしょうね!
全くとんでもない...

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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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멘만
별 5개 만점에 5.0 너는 어떤 진영이야?
2019년 9월 15일에 일본에서 작성함
확인된 구매
왜 신비주의자들은 현상 세계의 상징적 성격을 풀어내려고 하는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이 세계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 그렇게 깨달았다면 기미는 신비주의자이다. 수피즘에서는 사후에 영혼은 발자프(=명계)에서 자신이 죽은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현실적인 꿈을 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의 구별이 중요하고, 여기가 발자프(=명계)라고 깨닫지 못하면 그대로 지옥에 끌려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여기가 발자프(=명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
장자에게는 그 경계를 찾아내려는 정신적인 노력이 전해진다. 
그리고 수피즘에서는 현재의 세계가 발자프(=명계)로 하기 때문에 이슬람교이다. 
즉, 수니파나 시아파는 현세에 속이고 있고 여기가 발자프(=명계)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신비한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일까.

수피즘을 하면 알 수 있지만 태양계는 안드로메다 은하에 속한다. 그 안드로메다 은하는 은하수 은하를 병합하려고 하고 있고, 충돌시에 태양계는 안드로메다 은하로 돌아가는 산단이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어리석은 자리 은하도 병합하는 단서를 붙여 안드로메다 초은하단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처녀자리 초은하단을 성립시키려는 은하단은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Wikipedia의 마니교의 해설대로, 영혼은 장엄한 우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어느 진영이 유리하게 우주의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가는 신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영혼이 속하는 은하의 우열이 정신의 기복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마음을 갈라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피즘과 노장 사상은 실로 깊은 것이다.

덜 읽기
4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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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은 노자와 장자의 존재론, 이슬람 신비 철학과의 비교 철학적 고찰.
이통 의미론의 전개를 해명하는 역자 해설 첨부.

【목차】

제2부 노자와 장자 제

1장 노자와 장자 제
2장 신화 창작으로부터 형이상학에
제3 장 주의에 대항하여 

제7장 길 
제8장 중묘의 문 
제9장 결정론과 자유 
제10장 가치의 완전한 역전 
제11장 완전 인간 
제12장 정치적 인간

제3부 결론 ―비교 고량 제

1장 방법론적 예비 고찰
제2장 인간의 내부 변용
제3장 실의 본연의 다층 구조
제4장 본질과 존재
제5장 존재의 자기 전개

번역 주
해설
도덕경』『장자』 인용 색인
인명・저작명 색인
사항 색인
36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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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댓글

【서평】요미우리 신문 2019년 12월 22일(13면) “문화면·책 요미우리도” “독서 위원이 선택하는 “2019년의 3권””으로, 야마우치 시로씨(윤리학자·경응대 교수)에 이 책을 들었습니다. 주간 독서인 2019년 12월 13일 “2019년의 수확” 앙케이트에서, 사사키 력씨에게 본서를 들었습니다.

내용(「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이통 도요 철학」의 원점을 이루는, 장대한 시도. 일본어 저작의 공백의 시대를 메우는 가장 중요한 저작, 당당히 간행. 하권은, 노자와 장자의 존재론, 이슬람 신비 철학과의 비교 철학적 고찰, 이통 의미론의 전개를 해명하는 번역가 해설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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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세부 정보
Publisher ‏ : ‎게이오 대학교 출판회 (May 29, 2019)
발행일 ‏ : ‎ 2019년 5월 29일
언어 ‏ : ‎ 일본어
탱크탑 ‏ @Tankong_bot : ‎ 3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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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멘만
별 5개 만점에 5.0 절대 영도가 광속도로 전해질 때 무중력 공간이 성립
2019년 11월 22일에 일본에서 작성함
확인된 구매
왜 우주공간은 무중력인가, 그 신비를 풀어 놓으면 절대 영도가 공간 내부에서 광속으로 전달되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직감에 근거한 진실을 현대과학은 진실로 한다 수 없습니다.
노인이든 장인이라도 하나의 진실을 바꿔 말할 수 밖에 없지만, 노자의 어느 부분이 장자의 어느 부분에서 바꿔 놓여 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존재성'과 같은 과학적 접근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
공간 내부에서 무중력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절대 영도가 광속도로 전달되어야 하지만, 그 전달속도가 광속도보다 빠르더라도 무중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노자의 문자수와 장자의 문자수와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인을 위한 것이고, 노자의 제1장의 '현지마타 현중묘문'이 그대로 적용되는 양서이다.
2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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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원의 사람
별 5개 만점에 5.0 번역이 훌륭합니다.
2020년 12월 27일에 일본에서 작성함
확인된 구매
노장 사상을 존재의 신비 체험에 기초한 존재론으로 파악하고 장마다 주요 개념을 정리하고 알기 쉽게 논하고 있다. 내용도 물론, 번역이 훌륭하다.
4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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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의미의 깊이 - 동양 사상으로 본 언어, 언어 철학 이즈쓰 도시히코

알라딘: 의미의 깊이



의미의 깊이 - 동양 사상으로 본 언어, 언어 철학 
이즈쓰 도시히코 (지은이),이종철 (옮긴이)민음사2004-04-25
원제 : Meaning Language (1985년)


정가
14,000원

절판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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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 확인일 : 201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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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슬람 철학과 동양 철학 분야의 석학, 언어학자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의 저서. 일반 언어학의 표층주의를 비판하며 '심층 의미론' 을 주장한다. 이 책에는 철학과 종교 텍스트를 언어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여덟 개의 글이 실렸다. 

유식(唯識), 화엄 철학, 자크 데리다의 에르리튀르론, 이슬람 시아파의 순교정신,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 흥법 대사의 구카이(空海)사상, 장자의 혼동 사상 속에서 의미의 심층을 찾아낸다.


목차


1부
1. 인간 존재의 현대적 상황과 동양 철학
2. 문화와 언어 아라야식 - 이문화 간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2부
3. 데리다 속의 유대인
4. 쓰기 -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론에 대해

3부
5. 시아파 이슬람 - 시아적 순교자 의식의 유래와 그 연극성
6. 수피즘과 언어 철학

7. 의미 분절 이론과 구카이 - 진언 밀교의 언어 철학적 가능성
8. 혼돈 - 무와 유 사이

지은이 후기 - 동양 철학에서 언어의 문제
옮긴이 후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즈쓰 도시히코 (井筒俊彦)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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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대학에서 니시와키 준자부로를 사사했고, 언어학자로서 출발해 그리스 신비사상사, 러시아 문학 등을 강의하는 한편, 『아라비아 사상사』, 『신비철학』, 『아라비아어 입문』 등 초기 대표작을 간행했다. 1949년부터 시작된 연속 강의 「언어학 개론」을 바탕으로 1956년 『언어와 주술』(영문 저작)을 발표했고, 이 책 덕분에 로만 야콥슨의 추천을 받아 록펠러재단 펠로로서 1959년부터 중근동, 구미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1959년 코란의 윤리적 용어 구조를 밝힌 『의미의 구조』(영문)를 발행했다. 1960년대부터 맥길대학과 이란 왕립철학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연구와 강연, 집필 활동에 종사했으며, 『코란에서의 신과 인간』, 『이슬람 신학에서의 믿음의 구조』, 『수피즘과 노장사상』 등 영문 저작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1967~82년에 거의 매년 스위스 에라노스 회의에서 노장사상과 선 · 유교 등 동양철학에 대해 강연했으며, 일본에 귀국한 뒤로 해외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일본어로 저술하기로 결심하고 『의식과 본질』, 『의미의 깊이』, 『코스모스와 안티코스모스』, 『초월의 언어』 등 대표작을 발표했다. 1993년 자택에서 서거했다. 접기


최근작 : <이슬람 문화>,<의식과 본질>,<이슬람> … 총 49종 (모두보기)

이종철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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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불교철학) 전공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인도철학·불교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불교사상과 인도 불교사상의 비교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The Tibetan Text of the Vy?khy?yukti of Vasubandhu-Critically edited from the Cone, Derge, Narthang and Peking editions-(Tokyo, 2001), 『世親思想の硏究-釋軌論(Vy?khy?yukti)を中心として-』(Tokyo, 2001), 『중국불경의 탄생』(2008), 『구사론 계품·근품·파아품-신도 영혼도 없는 삶』(2015), 『몽어노걸대 연구』(공저, 2018), 『金剛經 多言語板本』(2018)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圓測 『解深密經疏』 <無自性相品>>,<圓測 『解深密經疏』 <地波羅蜜多品>>,<원측 해심밀경소 분별유가품 - 한장교감 표점 교정본> … 총 1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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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손맛] 2007년 8월



이즈쓰 도시히코는 한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스무명의 천재를 합쳐 놓은 사람이라는 말은 과장이라 하더라도, 분명 동과 서를 회통하는 사유의 힘이 있는 보기 드문 사람으로 보인다. 
원래 이슬람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로 유명한 사람인데, 영어나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희랍어, 라틴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언어에 대한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학자들이 직접 접하기 힘든 텍스트들을 중력장처럼 끌어당기는 솜씨가 대단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의미의 깊이>에서는 '언어 아라야식'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신조어 같은데, 이렇게 불교 유식을 언어학적으로 끌어오는가 하면, 데리다, 이슬람, 수피즘 그리고 진언 밀교가 하나의 장(場)에서 이색적인 스침을 시도한다. 

원래 이 책은 오래전에 <동양철학의 심층분석>이란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다. 
지금은 읽어버려서 없지만, 기억해 보건대 번역이 거칠었던 것 같다. 

다행히 이렇게 세련된 표지를 입고 다시 나타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책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회통의 축을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돌아가니까,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호기심을 앞세운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 한 권을 발견해서 이 페이퍼에 덧붙인다. <의식과 본질>이란 책인데, 일본에 이즈쓰 도시히코 전집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계속 더 나오길 기대해 본다. 특히 불교 관련 책이 나오면 더 좋을 것 같다.(2013년 9월 덧붙임)







2022/04/15

3] 이달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이달호 소장 수원화성연구소(

Ⅰ 서언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2. 인간 이종만 Ⅲ ‘대동공동체’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2. 대동광산중앙조합    3. ‘대동공동체’의 해체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Ⅴ 이종만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

2. 이준열

3. 김창준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Ⅵ 북에서의 활동

1. 조국통일운동

2.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 


Ⅶ 결언


===


I. 서 언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에)) 대한 지칭은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평양, ,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등 실로 다양하다 그를.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남쪽에서는 일제 말 기의 ‘친일 행적 이’ 문제되기도 하였다. )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의 일부분만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 나 미화한다면 이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 평가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인물에 대 한 평가는 전 생애를 대상으로 해야 하며 특히 인생 말년 삶의 궤적, 즉 관 뚜껑을 덮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과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족자본가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말년에 선택한 북행과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세,  번째는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로 올라가 새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이다.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방기중교수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 

 

이종만선생의 일제시기의 여러 사업체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대동, 출판사 대동, 농촌사 대동공전,  등을 통칭 ‘대동콘체른’, ‘대동사업체’로 부르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대동공동체’라고 칭하겠다. 왜냐하면 위 사업체와 기관 중 이익을 창출하 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뿐이었다 이종만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 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일제시기 대동광업 주 을( ) 근간으로 벌인 광산조합 설립, 농촌이 상향 건설,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청년교육운동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출판운동 을 벌이다가 북으로 올라가 조국통일운동과 지하자원개발과 채취공업에 초석을 놓은 민족자본가 이종만선생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요자료는 일제시기에 신문 전면에 ‘대동공동체’에 대해 기사화한 『매일신보』 1937 년 6월 12일자, 19일자 자료와 1939년도 6월 1일에 발행한 잡지 『삼천리 의』 「이종만 씨 사업관 에서」 그의 사상 사업관 계, , 획 등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동체’의 설 립 과정에 대해서는 전무이사 이준열의 자서전 『송강소사 가』 있고 당시 신문 『동아일 보』 『, 조선일보』 등이 참고가 된다. 

 

북에서의 활동은 이종만선생이 서거한지 7년이 지난 후인 1984년 『로동신문』 전면에 그의 일생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소재로 한 백보흠의 소설「천암산 이」 참고 된다 다만.  90세인 1974년 본인이 쓴 수기는 찾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이후의 활동과 입북 후 조국통일운 동과 자주적 새사회 건설에 이바지한 행적까지 조명해야 인간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 과 그의 실천운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의 완결성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대동(大同)이라는 것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네 의견을 경사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를 대동이라고 하니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禹) 임금이 천하를 아홉 가지 원칙으로 다스린 결과 온 나라가 화합하게 되는 것을 가르킨다.3)

  

공자는 예(禮)를 잘 운용하면 대동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즉, 천하 사람들이 자 기 집안만을 위하므로 각자 자기 친족만을 친하게 대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며, 재화는 자신의 소유로 삼고, 역역(力役)은 남의 힘을 빌리며, 성곽과 해자로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회보다는 대문을 열고 놓고 닫지 않는 사회를 ‘대동사회 라고’ 한 것이 다. 

 

공자는 주역의 13번째에 ‘천화동인(天火同人)괘를, 14번째에 ‘화천대유(火天大有)’괘를 놓았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것이 동인(同人)이요, 대유(大有)로서 대동(大同)하 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유. , 즉 내 소유가 사회의 소유이며 화합과 평등을 이루는 공 동의 대유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모여 안심하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대 동사회(大同社會)라고 한 것이다.4) 그리하여 조선시대 ‘대동법’(大同法)도 ‘모두 고르게 하려는 뜻“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3)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5월 24일 ; 24년 1월 1일.

4) 대산 김석진 대산주역강의, 『 』1, 한길사, 1999.

명칭이다. 1,000여 명이 숙청된 1589년 선조( 22) 기축옥사에서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 정여립도 그가 조직한 단체를 ’대동계‘(大同契)라 했는데 따라서 ”대동 이’ 란 의미는 불온한 생각을 가진 불, 온한 단체라는 의미로 전화되었다. 

1945년 8.15 이후에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서」 대동사상의 전 모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대동주의 표어 

1. ‘나 라고’ 말자 오직 ‘우리 라고’ 하자 1. 일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일하자. 

1.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1. 내가 만든 물건은 동포가 쓸 물건.

1. 살고자 하는 일인가 일하고자. 사는 목숨이지.

대동교학회 세령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을 기함.

2. 교육제도 산업제도를 혁신하여 교장 즉 직장, 직장 즉 교장으로 하야  실물교육의 실현.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과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진보와 원융화합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기.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하기를 기함.

여기서 주목할 단어들은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 여 과학으로 인류의 진보’,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등이다. 

 

이는 이종만선생이 추구했던 불타의 자비(慈悲), 공자의 인의(仁義), 야소 기( 독교 의) 박애(博愛), 이 셋을 인류평화의 요체로 보고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본 것이다.       

2. 인간 이종만 

“제 고향은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라는 반농반어의 포구입니다.”

“옛날 병사가 있어 그들의 전횡이란 실로 언어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저 그들은 특수한 소위 양반이라는 초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고 있 었습니다.”

“매일같이 무도한 행동과 언사를 보고 들으며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을 찾던 저의 가슴에는 차츰 어떻게 하면 고향 식구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할까 하는 분 노와 이상이 싹트고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위에 비극 참극한 농촌생활에서 그 저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철없는 젊은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서울 에 가자 거기에 가면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하여 가산 

일부를 팔아 여비를 겨우 장만 목선을 타고 상경한 것이 스무살 되던 겨울이었습니 다.”5)

 

20세의 나이에 고향 울산을 떠나게 된 계기는 해안지방의 수병사로 추정되는 관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다 그의.  언급대로 ‘언어도단’의 학정에 분개하고 어떻 게 하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서울로 오게 된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 ‘농림주식회사 라는’ 것을 세웠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경남 울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후 가세는 영락하여 그가 경험한 직업 은 어업, 농업 무, 역상 학교,  교원 등 “세상 각양(各樣) 직업은 아니한 것이 별로 없 다 고” 회고하고 있다. 즉 7전 8기 또는 28전 29기의 인생 등이 이종만 선생 앞에 붙 는 상징어인 것이다.   

 

1923년에 세운 중등과정 비인가 고학생을 위한 ‘고학당’을 운영할 때 고학생들과 함 께 석탄을 배달하고 석탄 값을 지불치 못하면 부인의 패물을 차압당하는 일이 비일비 재하였는데 부인은 이를 참고 내조하였다는 일화 광부에, 게 임금을 주려고 꾼 돈으로 50원에 팔려가는 15세 소녀를 70원을 주고 구출한 일화 등 몸소 실천하고 불의를 보 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광산을 운영할 때 광부를 만나면 먼저 “안녕하십니까 얼마나 수고하십니까”라고 정중 히 인사하고 항상, “갱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까, 갱부 자신에게 어떤 괴로움이나 생기지 아니 하였나”, “종업원 전체의 가정에 무슨 불만 불화나,  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에 노심초사하였다.  

  

경성부 누하정 17번지 집은 대광주의 집 같지 않아 두옥문전이고 기차를 탈 때 2등 표를 사주면 부인이나 소아나 노인 또는 병자를 자기 자리에 앉히는 일6) 등 질소검 박한 생활과 약한자를 위한 실천활동이 비일비재하였다. 

 

5) 『동아일보』 1940년 4월 3일.  

6) 『매일신보』 1937년 6월 19일.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은 발달된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만큼 보수가 있 어야 한다 그. 래서 각인의 능률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야 한다 는.” 신념을 갖고 있었

다. 당시 신문에 기사화된 이종만선생의 성격은 중후인자(重厚仁慈)로 표현되고 있다. ‘중 은’ 담력과 신념을 말하고, ‘후’란 인고포용의 덕을 지닌 인자한 성격이라는 것이 다.7)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불경과 성경을 탐독하여 감화 받았다고 하며 “농촌의 무지와 

빈곤”을 타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기로 하였다고 한다.8)   

 

다음은 대동광업 주( ), 대동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인 이종만의 사업관과 인생철학에 대해 『삼천리 에서』 인터뷰한 1939년 장문의 자료기사이다.

 

“남들은 李鍾萬씨를 마치 朝鮮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르며 엇든 이는 천만 장자의 몸이면서 다 찌저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소 굴속에 드러가 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 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밧 貧民窟에 나타나 100원 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도라온다 하여 「海王星」에 나타나는 몬테 크리스트 백작 모 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백만장자 천만장자인,  그의 소박한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상은 “관후유복(寬厚裕福)한 장자풍(長者風)의 거인(巨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  체격도 장대하고 생김새도 후덕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기자가 광업을 택한 이유를 묻자 

“지하에 뭇긴 보물을 즉 하느님이 주신 보물을 그렇게 악착한 수단, 말하자면 제도만 잘 꾸민다면 광부를 착취(搾取)하지 않고라도 악을 쓰지 않고라도 파내일 수 있으며 그 파내인 것은 국가 사회에 둘도 없는 보물이 되어 선용(善用)만 한다면 온 인류의 행복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니까 나의 이상과 성격에 가장 마저요.……나는 단언(斷言) 합니다. 돈을 위하여 이 이상 더 추구하지 않겠어요 나의.  염원(念願)은 「로스차일드」 나 카네기 되는 데에 있지 않어요.” 그의 이상은 돈을 위하여 백만장자 되는데 있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자가 

“장안(長安) 부자 처노코 처첩(妻妾) 거느리지 않은 이 드물고 또 부자 소리 듯는 이 면 의례 阿房宮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그리고는 美衣美食하는 것이 통례인데 

 

7)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8)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선생만은 불과 수천원 되는 조고만한 집에 게시고 寵妾햇단 말 못 들었고 남들처럼 

美酒美衣하시지도 않으니 선생의 인생의 樂은 어데에 있음니까.” 라고 질문하자

 

“나의 樂 道은 를 닥는 데 있소이다 라고.” 답하며 “좋은 經典을 十讀 百讀 하는 사이 에 옛 성현의 교훈이 저절로 알려저요 그분들의.  하신 자최의 萬分一이라도 닥거볼려 고 생각하는 점이외다 나의.  書架에는 經書가 노여있어요 그것은.  녯 성현의 이것을,  기회있는 대로 보면서 吾日三省吾身 하는 부즈런으로 이 세상에 아못조록 도음되는 몸으로서 지내려 생각하여요.……釋迦께서는 환락의 王城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 리고 人世의 번뇌를 해결코저 중생을 구제하시려 몸소 그 艱難의 修道를 하시지 안 엇슴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슲음과 쓰라림을 다만 조곰이라도 구하는 몸이 되어지이다 하고 염원하는 길에 섯슴니다.……성인은 다 숭배 함니다 기. 독께서는 제 손소 십자가 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저의 원수까지 용서하실 것을 말슴하였서요 나도.  내 몸이 낫 즌 것을 常時 생각하여 아모조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사라 갈 길을 찻는 使徒가 되려해요.……論語도 깊이 읽슴니다. 孔夫子께서 늙으실 때까지 

轍環天下하시며 세상에 道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고 애씀니

다 라.” 며 

 다 같이 잘 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다고 마무리 한다. 즉 불교 기, 독교 유교, 등을 모두 아우르는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더나아가 장래 철같은 조직체가 완성되면 “돈 버는 일에서 아주 떠나서 교육사업같은 人世의 英材를 양육하는 일에 일생의 힘을 다 바치려 한다”며 미래의 꿈은 공과대학, 농과대학 광산과대학, 등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말하고 있다. 9)

이종만선생은 1945년 8.15 후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독립신 보 를』 운영하다가 강제 폐간된 후 강원도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을 권고하는 이승만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더 나아가 미군이 실시한 ‘적산불하 는’ 산업파괴라며 “독립정부수립이 되지 못하여 산 업보호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중대 원인이다 라” 며 8.15 후 직장을 사수하여온 종 업원 근로자 대중의 복리를 위한 시책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며 협동조합 국가를 지향‘10)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 『삼천리 제 권』 1 제 호7 「이종만씨 사업관」, 1939년 6월 1일.

10) 『공업신문』 1947년 5월 6일자.

Ⅲ. ‘대동공동체 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1934년 영평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1936년에 이르러 상당한 영업이익을 올리 고 그해에 조선 최고의 장진광산 개발권을 확보했다 영평광산에는.  광부가 650명 직, 원은 경성고공 출신 7명을 포함하여 모두 62명이었으며 광구면적은 5백만 평이었다. 이 영평광산을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는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했 다.  

 

마침 전무 송강 이준열도 7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7년 3월에 만기 출소한 시점이었 다 송강은.  대동광업 주 에( ) 참여하게 된 사연을 그의 자전적 글 『송강소사 에서』 다음 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중외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경영난을 겪고 있으니 신문사 이사로 취임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정중히 거절하였다. ……며칠 

뒤 남호 이종만 선생이 찾아와 영평광산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며 함께 일할 것을 제

안하였다.”11)

이종만 자신이 도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동광업 주 는( ) 1937년 6월 6일 천향원 별장에서 창립총회를 완료하고 장진광산개발 을 주목적으로 기타 일반 광업관계 업무 경영을 목적으로 자본금 300만원으로 창립 되었다.

 

장진광산은 구한국 당시 보성학교 창립자인 이용익 등이 경영하던 국영광산이었는데 등록 출원구는 400여개, 4억여평에 달하였다. 특히 종업원에게도 공로에 의해 주식을 분양할 계획이었다.

 

사장은 이종만 전무,  이준열 상무,  겸 장진사업소장 이영조 상무, 겸 경리과장 정현모, 총무과정 이성환 광무과장,  민정기 상임,  감사역 허헌, 이훈구 등이었다.12)

 

본점 주소는 경성부 견지정 111이고 주식수 60,000, 주주수 114명, 대주주는 이종만

(48,371), 이영조(5,000) 이준열(1,000) 등이었다.13) 

  

 

11) 『송강소사』 59쪽.

12) 『매일신보』1937년 6월 9일.

13)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39년판 동아경제시보사), .

이후 자료에는 광무과장에 김용암과 검사역에 김진우가 보이는데 김용암은 당시 사회 주의자로 이준열전무의 경성고공 후배였다. 

 

한편 평북 자성군 이평면 장토면 자성면, ,  소재 850,700평에 광업권을 설정하였고 ) 금광은 전 조선에 수십 처에 있었고 철광 매장량 1억만 톤짜리가 평안북도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년산 1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2. 대동광산중앙조합

대동광업 주 가( ) 여타 다른 기업체와는 전혀 다른 점은 광주와 광산노동자가 이익을 공 동으로 분배한다는 목표였다. 또한 일하는 사람에게는 보수를 풍부하게 할 계획이었 다.   

 

이러한 정신에 기초하여 노자협조의 표본이 될 만한 이익공동분배의 기관을 조직하였 으니 이것이 대동광산중앙조합과 그 하부조직인 지방조합이다 지방조합은.  함평조합, 초산조합, 태천조합 등이었고 계획 중인 조합으로는 자성조합 의성조합 동, , 흥조합 등 이었다. 즉 대동광산중앙조합이 그 산하에 각 지방 조합을 나누어 조직한다는 방침이 었다. 이 조합에서 군소광산에 대한 융자를 행하여 이로부터 수입의 일부를 기금에 충당하여 다시 조합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대동광산중앙조합의 이사진은 이사장 이종만 상무이사,  이준열 이성환 이사, ,  정현모, 이영조 민정기 이종찬 상무감사, , ,  허헌, 감사 이훈구 등이었다. 

 

조합원은 광주와 일반종업원,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 것이 특징이고 이익분배도 자본 가와 노동자가 고루 한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자영광.  창설정신은 노동자 종업원,  자체 가 직접 광산의 경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근본정신은 

1. 인간은 자주적 정신에 의하여 각자가 서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 사업과 일체가 되어 일하면 인간 이상의 최고 능률을 발휘할 수 있다.

1.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보수를 준 것이니 어떤 개인이 사취할 것 이 아니라……실제에 형성하고 조직하고 실천하는데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1.종업원이 주식을 가질 수 있고 2. 종업원간 이외에는 매매 양도 입질을 못하고 3. 공로 있는 자에게는 퇴직 후에도 주식을 소지할 수 있으며 4. 특별 한 공로 종업원의 상속인이 아니면 상속 증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6) 정리하면 광 주와 광부들이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다는 획기적 사회주의적 ‘공동체’실험이라고 보 여 지는 것이다.  

 

3. ‘대동공동체 의’ 해체

대동공동체가 해체될 시점의 상황을 보면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나 라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 헌병 경, 찰, 감옥과 같은 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증 강하여 우리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조선을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 로 대, 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켰다. 

민족자본가란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하지 않고 그와 모순관계에 있으며 자기 경리의 자 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토착자본가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민족자본가들은 자본가의 절대다수를 이룬다.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 민족 자본가들은 외래제국주의자들의 억제정책이 여러 가지 형 태로 감행되는 조건에서 자기 자본에 기초한 경리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관련된다. 민족자본가들은 외래독점자본가 들 때문에 우선 경제의 중요부문에 자본을 투자하지 못하며 원료원천과 상품판매시장 을 빼앗긴다 그들은.  예속자본가들과는 달리 식민지통치당국이 강요하는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 하며 여러 가지 경제적 압력과 통제를 받게 된다 경영. 규모로 보아도 그 절대다수는 중소기업을 대표하며 부차적인 경제분야에서 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언제 나 파산 당할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종만 선생이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일제침략자들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이르러 이른바 ‘문화통치 의’ 간판마저 던져버리고 공공연한 파쇼적 폭압을 감행하는 데로 넘어갔다 그것은.  이 시기 일제가 동아시아의 ‘맹주 가’ 되려는 야망 밑에 대륙침략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심각한 경제공황의 늪으로 빠져든 시기였다. 특히 일본군 국주의 세력은 1931년 9월에 무력으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했다 심각한.  농업공황을 동반한 1929~1933년 세계경제공황은 식민지 조선에도 대지주로의 토지집중과 농민 몰락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로부터 1930년대 전반기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수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로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 실시의 두 번째 단계는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후부터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 8월 패망까지이다. 일제는 이 시기 조선에서 산업부문을 중요성에 따라 1, 2, 3부류로 나누고 설비와 자 금을 투자하도록 하였다.

 

1940년에 조선에서 새로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5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102 개(40.3%), 일본인회사는 125개(49.4%)였다. ‘기업허가령’이 적용된 이후인 1942년에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1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75개(35.2%), 일본인회사는 

131개(61.5%)였다. 

 

같은 기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자본금 규모를 보면 1940년에 전체 량 3,699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이 566만 1,000원(15.3%), 일본인회사의 자본금이 2,930만 6,000원(79.2%)이었다. 그러나 1942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총자본금 8,181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은 606만 7,000원(7.4%), 일본인회사의 자 본금 7,209만원(88.1%)이었다.

  

그러니까 300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된 대동광업 주 은( ) 조선인회사와 비교해서는 큰 규모였지만 일본인회사와 비교하면 소규모에 불과하였다.   

 

1939년 말에 겸이포제철소에서 일본인 노동자에게는 하루 2원 13전의 임금을 주었다 면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65전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6명의 식구가 좁쌀죽을 먹으며 겨우 목숨을 유지할 정도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산금정책이 종언을 고했고 산금정책 폐지는 ‘대동공동체’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해체 시기는 1942년 9월경으로 추정한

다. ) 따라서 ‘대동공동체’는 식민지상황, 군국주의 일제에 대한 국제정세나 본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미흡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동공동체’는 자본과 노동자의 노자협조적 관점이 아니라 기업단위의 대동사회를 위 한 협동 공동체 실현을 위한 실험이었으며 북에서의 활동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 기 위한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하며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성 속에서 애국적 민족자본 가라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재단법인 대동농촌사의 사업계획 발표식이 1937년 6월 16일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발표된 계획을 보면 

이종만씨 기부에 의한 50만원으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 설립 남중북서,  각지에 적당 한 장소를 선택하여 집단농지를 구입하여 본 재단의 기본재산을 구성함. 2. 본 재단 법인이 소유하는 집단농지는 그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케 함 

3. 본 재단법인은 경작자로부터 년 수익의 3할에 당하는 대동농촌건설 의무금을 납입 시켜서 순차적으로 집단농지를 구입하고 자급 및 기타 대동농촌건설에 필요한 자금에 충당함. 단 의무금 부담은 30개년 이내로 하고 완전한 자작농이 되게 함과 동시에 본 재단법인의 조직체에 참여케 함 그리하여. 경직지의 소유 명의는 영구히 본 재단법인 이 보유하여 매매 저당 등에 인한 토지겸병의 폐해를 방지하여 자작농의 생활 안정을 영구히 보장함.

당시 임원은 이사장 이종만 전무이사,  이훈구 상무이사,  정현모 이사,  이성환 이영조, , 감사 허헌, 김창준, 김여식 등이었다. 또한 산하 농촌으로 대동울산농촌, 대동문산농

촌, 대동평원농촌, 대동영흥농촌, 대동농사원 등을 계획하고 있었다. (매일신보 

37.06.19) 

 

집단농장 내에는 자치적 조직을 통하여 식량의 충실 부, 채의 정리 가계의,  합리화 자, 작자급, 협동공조 문화진, 흥, 위생교통의 시설 조성정비 등으로 모범농촌의 구체적 현 실화를 기하고자 하였다.18)

 

또한 이종만 개인 소유 토지 157만평에 대해서도 당년부터 단연 소작료를 3할씩만 증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연천에 25만평으로 53호 평남,  평원군에 

24만평 소작인수 41호 함남,   영흥군에 108만평, 153호 합계 157만평에 254인 이었

다. 매명(賣名)적 동기가 아니라 이론적 근거는 “최근 조선농촌의 우울상은  소작료의 과중한 부담에 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자기의 경작지에 애착을 갖지 못하고 생산활 동을 저하시켜 토지가 피폐해 진 것 다는” 것이다.  

토지의 피폐는 소작인의 피폐로 될 뿐만 아니라 지주의 손실로 더 나아가 사회의 중 대손실로 보아야 한다 토. 질을 향상하는 의미에서도 소작료를 내릴 필요가 있다 소. 작 료를 3할 받는 것은 수지상으로 보아서도 지주에게 손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은 5할이 기준이다. 조선인끼리 서로 돕고 살아가지 못할 것이 있는가. 나는 30년 동안 3할 씩 소작료를 징수하다가 30년 후에는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돌려주

기로 결심하였다 소유. 권도 양여할 예정이다.”19)

 

그는 3 7․ 제 실행 후 30년 후 무상분배를 확언하고 있다.    

 

18) 『매일신보』 1937년 6월 12일.

19) 『동아일보』 1937년 8월 16일.

일제강점기에서도 농민들은 봉건적 착취구조에 얽매어 있었다. 이 ‘병작반수 제도의’ 타파는 지식인나 일반 농민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불문율’이었다. 

지주와 소작농간의 생산량 분배방식 봉건조선에서도 병작반수 제도가 일반적이었고 세금문제까지 논구해 보면 6:4까지 올라가는 열악한 구조였다 대동. 농촌사의 3 7․ 제의 시행은 해방 후 북에서의 1945년 가을에 전국적으로 벌인 3 7․ 제 투쟁보다 시기적으 로도 앞서고 지주가 앞장섰다는 데서 매우 선진적이고 혁명적 실천이었다는데 그 의 미가 크다 더.  나아가 30년 후 농토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하겠다는 구상은 북에서 

1946년 3월에 이루어진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 같은 수준의 획기적인 조치 였다.    

   

더 나아가 3할의 소작료로 타 지방의 땅을 매입하여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여 제2, 제 3의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농토의 집단농지화와 30년 후에는 경작자에게 경작권을 부여하려는 이상농촌건설이라는 사회주의적 실험이었다고 보여 진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1) 민족교육운동

이종만선생의 기본 방침은 교육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농촌의 중견청년을 양 성하기 위한 대동농사원의 설립, 광산에는 광부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세워 ‘직장 

즉 교실 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20) 

 

소작인의 소작료 30%를 기금으로 농장 교장 시험장을 가진 대동농사원을 설립하고 

청년들을 선발하여 농도의 수련과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농촌지도자로 양성한다는 것 이다.21)

이종만선생은 고향을 위하여 1만 5천원으로 보통학교설립, 1만원으로 울산갑종농업학

교 설립, 2천원을 대현면에 기부하였다.22)

 

함남 정평군 문산읍 문흥리에 있던 영평금광을 매각한 이후에도 이 지역에 노동야학 교를  설치하고 평강에는 사설학교를 문산면에,  또다시 영평학교를 설치하여 지난 26 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동 면민일동의 발기로 이종만선생의 송덕비를 세우고 제막

식에는 1만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23) 

 

 

20)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21) 『조선일보』1937년 6월 17일. 22) 『동아일보』1937년 7월 25일. 23) 『매일신보』1937년 10월 3일.

이러한 미담이 세상에 전해지자 진주의 하영진씨가 20만원의 토지권리증을 갖고 찾아 와 적당한 교육기관을 만들 것을 이종만에게 위촉, ‘남우학원 을’ 설립하고 하영진씨가 의뢰한 소학교 6학년 정도의 2년제 직업학교를 설립해 목공, 이발, 기계 등에 관한 

기술과목과 실습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동 학원 전속으로 위생기관을 만들 기도 하였다. ) 

 

이외에도 장진의 삼포(三浦)의 인구가 약 5천명인데 아동교육기관이 없어 대지 3,000 여 평과 현금 1만원으로 소학교를 설립하였으며   ) 남우학원 재단 10만원을 경성 광 희문 배화여학교에 기부하였다.26)

 제대로 된 학교 건립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인수였다. 

 

평양 숭실학교 인수에 120만원을 출자하여 교명을 대동공업전문학교로 바꾸고 학과, 는 문과와 농과를 폐지하고 광산과와,  기계과 2과를 설치하고, 3년제로 학생을 모집 하여 1938년 4월 1일 각과 40명 합 80명을 모집하여 7월 초에 개교했다.27)

 

평남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 이면균씨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만든 이종만씨의 여러 가 지 사회사업에 감동되어 그의 소유 금은광 대덕광산 경영을 이종만선생에게 증여하였 다 이종만선생은.  이를 경영해 25만원을 마련, 그 반을 성천중학교기성회에 이면균씨 명의로 기부하였다. ) 2) 출판활동

이종만선생은 대동출판사를 설립하여 월간 『농업조선 과』 『광업조선 의』 2대 잡지를 간 행하였다 광산과.  농촌에 배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이원조 주간과 홍기무 등 유능한 사람들이 모였고 한, 편으로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각종 인쇄물 신문 서적, ,  등 수 만권을 매입 출판하였다.     

 

대동출판사 주 는( ) 1937년 9월 15일 대표자 이종만으로 도서의 출판 및 판매, 기타 도 서 인쇄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위해 자본금 10만원으로 본점은 경성부 종로 3정목 47-1에서 설립되었다. 

 

중역 이사로는 이성환 이준열 정현모 이관구, , , 감사 임영호 한 장경 등이었다. ) 대 동출판사 1대 사장에는 이종만, 2대에 송강 이준열 감사는, 허헌 등이었다.

 

관련 인물도 시기별로 변화를 보이는데 주식회사 대동출판사의 취체역으로 이관구, 주간대리 이원조, 출판부장 김용규 등이 관여하였으며 이원조(1909-1955) )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이육사의 동생이다. 

 

『농업조선 은』 월간지로 1938년 1월 1일에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 주간은 이성환, 편집은 장원준이었으며 1942년 등기에는 이준렬, 정현모 이관구 이성환 김, , , 창하 김, 창준 등이 이사로 관여하였다.32)

Ⅴ. 이종만 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1885.7.6-1951.8.17)

허헌선생은 이종만선생과의 교유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종만 선생과 나이도 같을 뿐만 아니라 대동광업주식회사 상근 감사로 대동공공체의 경영을 위해 동고동락한 동지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종만 선생이 일제시기 민족적 양심과 애국 적 지조를 지킨 업적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에게 소개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종만선생이 허헌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가족과 함께 사글셋방을 전전하던 시기 우연히 허헌 변호사 집 사랑채에 사글세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허헌선생은 중 견변호사 겸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다. 집세가 밀려도 독촉하거나 나가라거나 불쾌한 기색도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이종만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33)

허헌선생은 정치활동가, 법률가 교, 육자로서 동경 명치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변호 사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서 보성학교 교원, 변호사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사로 나섰으며, 그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7년 일 본에 의하여 이른바 ‘제1차 공산당사건’에 기소된 공산당원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부 터 그는 조선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로 명망이 높아졌다. 

김책(1903-1951) )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을 자진하여 무료로 변호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단죄하고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법정투쟁을 벌렸다.

 

1927년 《신간회》 조직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어   조선의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을 이룩하고 반일애국역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노 력하였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도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보천보전투에서 커 다란 고무를 받고 김일성주석이  조직 영도한 항일무장투쟁 자료들을 수 집하여 인민들 에게 소개 선전하였으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애국적인 지하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게 여러 번 체포 투옥되었으며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다. 

 

8.15후 김일성주석의  친서와 접견을 받은 후 남조선신민당,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지니고 조국통일방 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1948년 9월부터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의 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의 중임을 맡고 새 조국 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 민족의 융성번영과 후대교육을 위하여 헌신분투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그의 딸 허정숙(1908.7.16.-1991.6.5.)은 1927년 일본에 유학 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1929년부터 반일지하투쟁에 참가한 후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 후 1948년 9월 문화선전상, 1957년 1월 사법상, 1946년 8월부터 당 중앙위원, 1948 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1978.8-1991.6)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이종만선생의 북행과 김일성주석과의 만남은 허헌선생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2. 송강 이준열(1896∼1982) 1)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은 1923년 개교한 고학당(苦學堂) 시절부터 시작된다 고학. 당은 교명에 명시되어 있듯이 고학생들을 위한 배움의 전당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명 칭이다. 고학당의 교장은 송강 이준열이었고 이종만선생은 고학당의 후원회 간사로 

 

재을 주도하였고 김일성을 항일 빨치산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조선. 인민군의 최고 지휘관의 한사람이 었고 내각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혁명열사릉에 묻혀있다.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송강 이준열은 소위 ‘조선공산당 5차사건 당’ 수로 1929년 6월 체포되어 1936 년 12월 출옥했다. 근 7년 6개월의 만기 출옥이었다. 몸은 엉망이 되었고 집에서 쉬 고 있을 때 남호 이종만선생과 고학당 1회 졸업생 이학종(李學鐘)35)이 찾아와 송강에 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다.   

“며칠 후 남호선생이 와서 영평행 영평광산 을( ) 또 말하고 양복을 사주며……그분 애정 과 성의에 탄복하여 금산으로 같이 갔다. 금광 구경은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건강이 많이 나아져 오후에 서로 술도 들고 낮에는 산보도 하면서 10일간 있는 동안에 남호 선생과 같이 한방을 쓰면서 지냈다 남호선생은.  진정으로 광산을 팔어 돈이 입수되면 내가 혼자 쓰지 않고 생활비 제하고는 사업기금 전부를 송강선생에게 드릴테니 무슨 사업이든지 생각대로 하자고 아침저녁으로 되풀이 말하였다. 10일 후에 서울 집에 가 서 좀 생각하여 보고 대답하기로 하였다. ……총독부에서 못하는 민족적 사업을 하자 고 남호 선생의 승낙을 얻어 정현모씨와 동반하여 어느 회사 상무와 연락이 되어 일 사분란하게 매도가 완결되었다.”36)

150만원의 매도금액을 종자로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이 급속히 추진되면서 남호 이종 만선생과 송강 이준열은 의기투합하여 구상하였던 ‘대동공동체’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37년 5월 12일 경성 남산정 남산동( ) 천진루 여관에서 열린 대동광업 주( ) 창립기자 회견 후 신문에 실린 송강 이준열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문고문단’ 이준열은 전무요 광산조합의 상무이사이다 사실에.  있어서 모든 계획의 종합정리와 모든 기능의 유도향상을 도모하는 기술적 존재, 각종사업의 이상과 실제 를 잘 조화시키는 지도자이다 경성공업학교에서.  배우고 이종만씨와 함께 경성 동대 문 밖에서 고학생을 위하여 고학당을 경영 중국으로,  도망, 영어의 몸으로 활동 중지. 그가 활동의 무대로 다시 등장.”37)

위 글은 대동광업주식회사가 설립되는 날 『매일신보 에』 난 이준열 전무에 대한 인물 평이다 모. 든 계획의 종합 정리와 구상의 실제 기획자라는 내용이다. 

2) 3 1․ 운동 주도

 

35) 1928년 고학당을 우등으로 졸업 고학당. 학생 정관진 김태, 래 등과 1928년 (조선학생) 혁명당을 조직, 후에 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 1931년에 징역 4년 언도 동아일보. ( , 1931.5.12.) 36) 『송강소사』 60쪽. 

37) 『매일신보』 1937.06.12.

이준열의 원적은 충남 아산군 탕정면 갈산리 157번지로 서울에서 독립운동 당시 주 소는 경성부 숭인동 176번지였다 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온양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로 와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 후에( 경기고 등학교 로) 개명하였는데 1914년 10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후에 서울공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준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시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 3학년생으 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준열은.  2월 28일 공업전문학교 실습실에서 경성공업전문학 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 등 6개 학교가 동시에 동맹휴학하기로 하였다는 것과 3 1․ 운동 거사 계획을 후배 들에게 알리고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1, 2학년 학생들을 비밀리에 조직 동원하였다.

  

이후 이준열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도피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21 년 9월 텐진(天津)총영사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2’에 의하면 잡지 발간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 5년제 중학교 과정 ‘고학당 설립’ 

고학당은 이준열에 의해서 1923년 5월 1일 설립되어 1931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가지 8년간 존속하였다 교. 명 ‘고학당(苦學堂)’은 고학생을 위한 배움의 전 당이라는 뜻이다 고학. 당은 당시 학비가 없어 진학을 못하는 고학생들을 위한 비인가 5년제 중등학교였다 학비는.  무료였으며 남녀공학제를 실시하고 학생자치체에 의해서 재학생들이 서무 교무 이발소 기, , , 숙사 식, 당, 인쇄소 등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준열은 교장으로 학교를 총괄하였고 선생으로서 동경유학생과 공전 동창생들이 결합 하였으며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교과목으로는 우리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의 필요 성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파격적인 ‘대안학교 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천도교의 권동진 )선생의 배려로 천도교당 구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시작하 였지만 1925년에는 숭인동에 약 300평 규모의 학교부지도 마련하였다 이.  당시 이종 만 선생 김, 창준 목사 등이 함께 난관을 풀어나갔고 이들은 후에 ‘대동공동체’의 구성 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착공한지 1년 만에 완성된 교사에는 4개의 교실, 3개의 기숙사 이발소 사무실 인, , , 쇄소 취사장,  등이 완비되었으며 약 300명의 학생이 재학 하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시위가 서울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서 가교역할을 하였다 고학. 당 내에 결성된 ‘학생전위동맹’ 구성원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고학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학생전위동맹 의 실체가 폭로되고 고학당의 재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후 고학당을 중심으로 ‘제2차 전위동맹’을 결성하여 일제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투쟁하였으나 이들도 1930년 3월에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고학당’은 일제에 의해 1931년 7월 강제 폐쇄 당했다. 

4) 신간회 활동 및  서울파 ‘조선공산당 후계조직’ 사건으로 8년간 투옥  

  

이준열은 1924년 조선노동교육회 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 키고자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 인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에 헌신하였다. 

 

서울파‘ 조선공산당’후계조직을 1919년 1월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되고 1929년 6월 12일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1년 징역 7년이 확정 판결되어 대전감옥으 로 이송되어 1936년 12월 만기 출소하였다. 

5) 해방 후  활동

이준열은 1936년 대전감옥을 출소하면서 ‘고학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광산업에 종사 하던 이종만선생의 보살핌으로 함경도 영평에서 요양한 후, 이종만선생의 권유로 대 동광업주식회사 전무, 대동출판사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당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자금 제공은 물론 학비 및 생활비 등을 제공하였다. 

  

이후 1945년 8 15․ 해방 후인 8월 25일에는 당시 공업기술 관계 단체를 총망라하여 공업기술연맹 이사장직을 역임하여 해방된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에 매진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10월 결성된 조선전재기술자협회의 고문, 10월 5일 결성된 조선광업회 위원 장, 1946년 10월 19일 건국공업박람회 회장, 1947년 3월 15일 조선문화협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새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5 후 그가 바라본 국내 정세는 첫 번째 “자주독립국가의 득”에 있다고 보고 급한 것은 “공장 광산,  등 중요한 기관을 자주 경영하는 것” )이었다.  그는 조선공업기술 연맹 이사장으로 공업신문사,  주필은 김용암이었다 모. 두 ‘대동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이준열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이영(1889.4.1.-1960.8.13)으로 서울파의 영수였다 일. 제시기 속칭 서울공산당 사건으로 4년간 투옥 후 1932년 출옥하였다.40) 역시 북으로 올라가 1953년 12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57년 9월부터는 조 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으로 사업하였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3. 김창준(1890∼1959)

 

‘대동공동체’의 하나인 대동출판사 주 에( ) 이영조 등과 함께 이사로 이름이 올라있다. 대동출판사 주 는( ) 사장이 이종만선생으로 자본금 10만원을 출자하여 출판업을 전문으 로 하는 인쇄업종으로 경성부 서울( ) 견지정(견지동) 111번지에 소재하고 있었다.     

김창준은 평양부 대찰리 106번지가 본적지이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 업하고 중국 상해에 있는 그리스도교 아시아총회의 조선그리스도교감리회 대표 서울,  종로중앙교회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 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발기한 33 인중 한사람으로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 다. 

1924년 5월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가렛트 선교학원에 유학하였다. 

 

8. 15후 서울장안의 종교인들로 국제교화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세력을 규합하는 운동 에 나섰다. 1947년 2월 그리스도교내 애국적 양심을 가진 60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서울의 천도교당에서 남조선그리스도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으로 선출되었 다.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에 도착했으 며 김일성위원장과 상봉하였다. 그 후 평안남북도 일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그리스 도교도 연맹에 묶어세우는 사업을 잘하여 그 80%이상의 교인들을 동맹에 망라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9년 2월 내각직속 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 부서기장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으로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는 세계평화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으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상임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조국통일상을 수 여받았다. 묘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대동광업 주 상무 대동( ) , 농촌사 상무이사 대동, 출판사 이사였던 정현모는 경북안동 지 주의 아들로  일찍이 조대 법과에서 배우고, 각종 회사를 조직 운영, 언론기관에도 종사, 신간회안동지회 부회장 )을 역임하였으며 귀공자 타입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에 이승만 정권에서 경북도지사에 임명되었 다.42) 

 

이훈구 박사는 동경에서 다년간 농학을 전공 농학사로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군정기인 1946년 1월 농무국장에 취임하였다. ) 

이관구(李寬求)는 대동광업 주 감사 대동( ) , 농촌사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 제시기 상공업과 협동조합운동의 저명 인사였다. 그가 강연한 내용들은 “빈농본위의 협동조합운동과 지도자 훈련기관의 설치” ), “신간회의 역사적 사명” ), “조선상공업 의 추세” ), “미곡경제와 농촌경제”  ) 등이었고 해방 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지냈 다. 

대동광업 주( ) 광무과장이었던 민정기(閔正基)는 공학을 전공하고 총독부에 기사로 다 년간 활약하다가 관계에서 나와 한때 평북 신연금산을 통해 능률을 발휘하여 자영광 산도 경영하였다 그는.  대동광업 주 에서( ) 유일한 기술적 최고 기획가였다.48)

대동광업 주( )  총무과장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이사였던 이성환은 『농업조선 의』 주간 이었다 대동. 농촌사에도 관여했다. 1920년대에는 조선농촌문제의 태두라고 불렸고 전 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 이성환은 1930년대 초반에는 조선농민사 중앙이사장으 로 활동하면서 농촌문제의 대가였다. 

 1940년대에 적극적 친일 행위를 벌여 “지원병일색-청년아 분기하라” 등의 글이 있 으며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 해방 후 반민특위에 친일파로 체포되었으나 4 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Ⅵ. 북에서의 활동52) 1. 조국통일운동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열사들과 당 및 국가 무, 력부문의 일꾼들과 과학 교, 육, 보건, 문 학예술, 출판보도부문 등 여러 부문의 공로 있는 일꾼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애국렬사릉 입구에는 ‘애국렬사릉’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 대문이 웅장하게 세워져있으 며 대문을 지나서 묘비구역 안에는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 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이라는” 글발이 부각되어 있다.

묘비구역 안에는 애국렬사별로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에는 돌사진을 새겨 붙였다.

남쪽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0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에 올라있는 이종만(1885∼ 1977) 선생은 1885년생으로 해방 후 1949년 6월에 북으로 올라가 활동하다 지금 현 재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종만 선생의 묘비에 적힌 대로 ‘조국전 선 의장 에’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보여 진다.  

 

북행 후 그의 행적 중 동판에 새겨진 ‘사회주의 건설’과 ‘나라의 통일위업 을’ 위해 투 쟁한 것이 바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이종만 선생이 북으로 올라간 날짜는 1949년 6월이었다. 64세의 노구의 몸이었다.  

남북조선 71개 정당 사회단체 참석 하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1949년 6 월 25일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개막되었다. 704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정각 오후 3시 시작된 대회는 김일성 김, 두봉, 허헌, 박헌영 김, 책, 홍명희 최용, 건, 김달현 등을 비롯하여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입장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일 화이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주석은 참가자들을 살피면서 이종만 선생을 주석단으로 올라 올 것을 요청하였다.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자 김일성주석은 큰소리로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 가운데 이종만 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라고” 말했다. 순간 얼결에 몸을 일으킨 이종만 선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 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그는 주석단으로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참가자들에게 이종만 선생을 소개하고 자신의 곁에 앉도록 배려하 였다. 결성 준비위원장 김두봉의 사회로 주석단으로 41명이 선출되었다. 

그 중에는 남조선노동당을 대표하여 허헌, 조선산업 건설협의회 위원장 이종만 남조, 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김창준도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일제시기 대동광업주식회사 시 기의 동료였다.

이종만 선생은 27명의 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으로도 선거되었다.54) 뿐만 아니라 김일 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특별히 개별 면담을 하고 담화하였다 그.  내용은 살펴보면,

“남조선실업계에서 명망 있는 이종만 선생을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연로. 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 건설협의회 대표로 평양에 와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이.  이번에 ‘미제와 이승만 괴뢰 도당’의 온갖 방해 책동 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것은 훌륭한 애국적 거사입니 다. 

나는 오늘 선생을 처음 만나지만 허헌 선생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날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 양심과 애국적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지하자원 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후대 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기 여해왔습니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는 수많은 애국적 기업가들이 우리의 건국노선을 적극 받들고 민족 산업의 발전과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사업에 적극 참여하기 바라며 앞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55)

이종만 선생은 통일애국의 기치아래 민족대단결을 실현한 역사적인 민족적 회합이었 던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들의 연석회의에 참가하라고 보 낸 초청장을 받고도 평양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었다. 4월 남북 연석회의에는 자주 통일을 지향하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북 15개 남,  40개 해외,  1개) 1,000 여만 명의 성원을 대표하는 695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런데.  이 연석회의에 참 가하였던 김구 선생의 간곡한 권유로 북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북행뿐만 아니라 북에 그대로 남아 활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북에서 

 

54) 『로동신문』, 1949. 6.29.

55) 1949년 6월 25일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강조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가족들을.  남에 두고 단신으로 북행한 것은 “가족의 행복이나 안위의 소아보다 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대아 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해방 후 북에서는 일부 일꾼들은 해방 전에 공부한 기술자들을 새조국건설에 적극 참 가시킬 대신 유산계급이라느니 일제에, 게 복무하였다느니 하면서 그들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와 같이 취급하였다. 그리고 어떤 지방에서는 국영공장, 기업소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기술자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내보내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 위원장은 서울에 있던 자연과학부문의 지식인들과 사회과학부문 의 지식인 수십 명에게 위촉장을 보내어 북으로 들어오게 한 바 있었다.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 기대의원선거가2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최고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때 그는 73살이었다 지난. 날 백만장자이던 남조선 출 신의 민족자본가가 대의원이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특별한 배려였으며 신임이었다. 그는 90세인 1974 봄에 쓴 「수기 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가슴속에 조선민족의 더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야이시 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한다 나는.  이 길이야말로 나라의 통일독 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 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이.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 다.”56)

그는 조국전선 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해방 45돌을 기념하는 1990년에 조국통일 상을 수상하였다. 

2. 지하자원 개발의 선구적 역할

1977년 1월 18일 이종만 선생의 서거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리종만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 지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해방. 전 리종만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놈과는 담을 쌓고 있었 으며 민족과 량심과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리종만선생은 남조선에서 미 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하였습니다 리종만선. 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라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라고 평가하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정무원에서 맡아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비용으로 하였다. 

 

56) 『노동신문 민족대』, 단합의 길에서, 1984. 12.10.      

그는 1949년 6월에 북으로 온 뒤 김일성 위원장과도 만나 지하자원 개발에 대한 간 곡한 기여를 부탁받았다. 

“…… 선생은 민족경제를 부흥 발전시키는 사업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지하자원에 대한 조예가 깊고 광산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는 만큼 우 리나라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새로운 광맥을 찾아 내고 광산들을 개발하는 사업에 힘써주어야 하겠습니다. “57)

그렇지만 1950년 전쟁으로 사업에 매진하지는 못하였다. 3년 전쟁은 1953년 7월 27 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됐다 전. 쟁 과정에서 모든 공업시설과 농지가 폐허가 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다음날인 7월 28일 김일성 수상은 라디오 연설에서 “모든 것 을 민주기지 강화를 위한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에로!”란 구호를 전후복구의 원칙 으로 제시하였다. 

전쟁 시기 김일석 주석의 특별한 배려로 중국 길림성에 피해있던 이종만 선생은 1954년 정초에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1954년 2월 중순 어느 날 김일성주석은 승용차 를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다. 책상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전후복구건설과 관련하여 의논할 것이 있어서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전후. 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됩니다 일본. 놈들이 도망가면서 좀 있던 공장과 광산을 다 마 사버렸습니다 해방.  후 우리 로동계급이 건설해 놓은 것도 미국놈들이 또 마사버렸습 니다 자재와.  원료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동이 필요합니다.”

이종만 선생은 “장군님 문제없습니다 동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라고” 답하고 해방 전 대동광업주식회사를 경영할 때 북부일대의 정형과 학성산 일대에 20만 톤의 동광석이 매장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석은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 군을 불러 오늘부터 리종만선생을 중공업성 고문으로 임명하니 주택과 의복 그리고 보살필 식모, 승용차 등을 잘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4월에 일이 벌어졌다 학성산.  조사결과 거의 가망이 없었다 이종만선생은.  뜻 밖의 결과에 번민하기 시작했다 함께.  갔던 기술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부 에서는 나를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같이 학성산에 갔다온 지질탐사 관리국의 책임일군으로부터 학성산 조사결과를 받았다. 김일성주석은 방안을 거닐면

 

57)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1949년 6월 25일.

서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 …없단 말이지…”하고 되뇌었다 그리고는.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 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리종만.  선생은 학성산의 20만 톤을 위해서 필요한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리종만 선생을 믿은 것은 학성산의 동광석 때문이 아니라 그 선 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양심입니다. …그 선생을 적극 도와주어야 하겠습니 다. … 우리나라의 광산과 유용광물의 분포상태를 다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그 선생 에게 젊은 기술자들을 붙여서 그 사업을 추진시켜야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실화에 바탕하여 북에서는 2009년 ‘김일성동지’탄생 100돌을 기념하는 단 편소설집 『거창한 흐름 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 이종만선생을 실제 소재로 한 단편이 백보흠 )의 「천암산 이다」 . 이종만선생의 오류와 실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김 일성 수상의 믿음 김일성수상의,  마음은 이득이 있으면 사람을 써먹고 이득이 없으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적 양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손잡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만 선생이 지목했던 학성산에서는 구리 광맥을 찾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 에 그 주변 지역에서 결국 구리광맥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3월 5일 청년광산’ 이다 이곳에서는.  구리, 금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나 베어링 등 특수강을 만들 때 쓰 이는 몰리브덴도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대부분.  노천광 형태여서 이용가치가 아주 높 았다. 2010년 9월 초 김정일 위원장은 이 광산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여기는 선군시

대에 태어난 인민의 무릉도원이고 공산주의 선경이며 리상촌”이라고 최상의 만족을 

표하였다. )  

이러한 그는 어느 날 내각청사에 찾아가 한 책임일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품속에 깊이 간수했던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지난날에 경영하던 대 동광업주식회사 청사를 공화국정부에 넘겨준다는 ‘양도증서’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종만 선생은 몸과 마음이 한결 젊어진 듯 열정에 넘쳐 사업 에 더욱 힘썼다 그는.  젊은 기술자들을 이끌고 북방의 추위와 눈길도 헤치고 비바람 과 무더위도 이겨가며 답사의 길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은 해방 전에 탐사 한 흔적을 남겨둔 곳을 죄다 답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그는 여러 전망성 있는 유 용광물매장지들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개발이 되고 채굴이 되는 경우에 투 자를 적게 하고 수송을 헐하게 할 수 있는 조사 자료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광업성 고문으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Ⅶ. 결언

1937년에 설립한 대동공동체는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주), 대동공전 등이었다 여기에서.  이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기업은 대동광업 주( ) 뿐이었다. 물론 대동광업조합은 지금까지의 자본과 노동이 만난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 즉 조합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이래 식민지 조선에서 처 음으로 실험해 본 방식이었다. 

또한 대동농촌사 역시 유상으로 매입한 농토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3 7․ 제로 소작료 를 받고 30년 후에는 무상 분배계획을 갖고 있었다 물론.  소유는 30년 동안 개인소유 로 돌리지 않고 대동농촌사에 두었다 이러한.  3 7․ 제의 시행은 5천 년 역사에서 처음 시행해 본 실험으로 이 방식이 오히려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켜 생산력을 증대 시킨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실험은 3할의 소작료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종 만선생과 간부들의 새로운 방식의 농촌이상향 건설을 위한 사업이었다.  

조합 내에 조합원들과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둔 것은 민족교육운동 역시 새로운 인 재를 키우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배우고 동고동락의 기풍 속에서 기업을 키우겠다 는 ‘대동사상 의’ 발현이었다. 숭실전문을 인수하여 대동공전을 설립한 것 역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겠다는 원대한 꿈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대동공동체’의 실험은 5-6년에 그쳤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차별 하에 있 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운 침략과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산 금정책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건이 아니라도 일제는 이러한 이 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그대로 수수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활동과 운동이 가능했던 조건은 이종만 선생이 평소 지니고 있던 애국적이 고 민족적 사고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함께한 대동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이종만.  선생 이 교유한 인물의 주요한 특징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기, , 독교계 과학기술자, 까지 아우르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유교 불교 기, , 독교를 아우르는 이타적 삶을 지향하였다. 

특히 이종만 선생을 비롯해서 허헌, 김창준 등 그와 ‘대동공동체’를 이끌었던 인물들 은 해방 후 북으로 가서 북의 새 사회 건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남쪽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우리민족이 살길은 미군정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반민족적 적산불하 등이 아니며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 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토론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에” 대한 토론문

신수식 남( 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안녕하십니까? 남호 이종만 선생 기념사업회 추모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 드리 며 포럼 토론자로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은)) 발제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 평양 애국열 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친일파 등 보는 관점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평가받 고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 전부를 대상으로 해 야 하며 어느 특정한 일부분만을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나 미화해서 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평가에 빠져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 다. 

본 발제문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 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종만 선생이 말년에 선택한 월북행위와 이와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 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종만 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셋째,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 로 올라가 새로운 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 등입니다. 

본문에서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연세대 학교 방기중 교수의 연구, 즉 1937년 6월 창립되어 1943년경까지 합법적 공간에서 전개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이 1920, 30년대 비타협적 민중적 성향의 사회교육운동이나 농민적 입장의 경제자립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진보적 민족주의 자와 일부 사회주의자가 결집하여 전개한 목적의식적 실천 활동이며 또한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 민주국가 건설을 지향한 사회민주주의 내지 수정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지향한 중간파 경제사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종만 선생의 일제강점기 여러 사업체인 대동광업 (주),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대동농촌사, 대동공전 등은 ‘대동공동 체’이며 그 이유는 이 사업체와 기관 가운데 이익을 창출하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 뿐이었고 이종만 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 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 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발제자가 강조하고 있는 이종만 선생의 민족자본가로서 가졌던 대동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대동공동체 실현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본 토 론자는 역사적 사실을 통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일부 동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가 남호 이종만 선생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을 통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 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본 발제문에서 주요 자료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친일잡지 삼천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토론자는 이러한 자료들이 과연 객관적인 관점에서 민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로 강조한다고 해서 의혹과 비판적인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둘째, 민족자본가로서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민족자본은 민족경제, 즉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에 자 신의 기반을 갖는 자본이다. 따라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 자본이나 그 대 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으로 규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자본의 정치적 자세에 따라 민족자본, 예속자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는 당시 일제 강점기에 강력하게 조선의 민족자본 생성 성장을,  방해하고 저지했습니다 조선. 에 민족자본이 진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조달 제, 품판매, 금융 등 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는 경쟁적 산업자본이어야 하며 소규모 이 하의 자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큰 규모의 대동광업 주 가( ) 과연 일제의 비호 없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민족자본으로서의 이러한 조건에 부합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대동공동체와 내선일체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민족자본가의 긍정적 인 측면과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측면으로 나뉩니다 물론.  인간의 세상사에서는 악과 선의 양분으로 분리해서 전적으로 어느 한쪽 편의 평가를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 강점기의 표어인 내선일체와 연관성입니다. 즉, 이종 만 선생이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행위를 여러 영역에서 했다는 사실에서 그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종만 선생의 친일행위 관련 주요 내용입니다.

1) 친일단체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 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②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 유( 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③1940년에 는 '대화숙야'( 마토주쿠)이라는 친일교화책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 고 사상과,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 국단 발기인,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친일언론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1월 1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 보 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 는' "무운이 오래 되기를 기원한다 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②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 에> 지원병 격려 글 지원병과- 혈한애의 인 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 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 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 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

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3)창시개명, 月城鍾萬(츠키시로 쇼마)

4)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지원 ①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위문품 등을 보냈 다. ②1937년 7월 북지 황( 군) 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탁했다. ③1938년 10월 정주경 찰서에 황군위문금 1,000원 기부했다. ④1939년 7월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이종만 선생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보적 개념이며 농업발전을 위한 출 판운동, 청년교육운동 등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  토론자 는 자료를 분석하면서 이종만 선생께서 진정으로 대동사상의 대동공동체를 실천해 보 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넷째, 북한에서의 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입니다 북한에서.  이종만 선생의 활동에 대 해서도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선생의 주요활동을 조국통일운동,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에서 대동사상과 그의 실천운 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은 항일영웅, 광산 기술자 필요성이 있었고 또 해방 이후 북한의 주요 인물들과 과거 교유관계가 강했다 는 사실에서 북한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발제자의 보는 시각이 북한에서 인정받았기에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 든 것이 차별하에 있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 운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의 이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방해 하고 저지하는 상황에서 대동사람들과 함께 이종만 선생의 애국적이고 민족적 사고에 기인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종만.  사상을 유교 기, 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이타 적 삶에서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렇다면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사회주의사회 건 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특히?  이종만 선생은 1974년 수기에서 북한의 독재자며 신적 존재인 영도자 김일성을 극찬했다는 사실에 서 민족주의자 대동사상 대동공동, , 체 구성 그,  실천자로서 진정한 의미를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토론자는 이종만 선생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 해 정의될 수 있도록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료를 바탕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감사합니다.

<신수식 박사 프로필>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박사 전 경희대학교) 외래교수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광주여자대학교 외래교수     KC대학교 외래교수 등 현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해외동포언론사협회 사무총장 

<발제문>


2022/03/31

박석 2010 |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 이남곡

장수좋은마을 |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 Daum 카페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이남곡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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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석 교수가 보내주신 논문을 옮긴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공자와 노자는 西周時代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과도기이자 혼돈기였던 春秋時代 말기의 사상가들로서, 그들로부터 나온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春秋戰國時代에 성행하였던 여러 사상들을 누르고 후대 중국 사상의 양대 축이 되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측면도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하면서 중국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는 생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공자가 노자보다 연하이고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당시 현자로 소문이 난 노자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 주로 도가계열의 저서에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우화들이 많이 보이고 있지만 유가계열의 전적에도 공자가 노자에게 禮를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노자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인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에서도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고 믿을만하기 때문에 삶의 흐름과 사상적 변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노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나마 신빙성이 부족하여 역대이래로 제가의 설이 분분하다. 「老莊申韓列傳」에 수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심지어 노자라는 인물 자체의 실존성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老莊申韓列傳」에 나타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기록은 그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노자와 공자의 삶의 태도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의 핵심 내용은 필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和光同塵’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和光同塵’은 ‘和其光, 同其塵’의 줄임말로서 『老子』의 4장1)과 56장2)에 등장하는 구절이다.3)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역대로 다양한 설이 있지만 대체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서 수도를 통하여 얻어진 깨달음의 빛 내지 덕성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는 도덕경에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노자 수양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서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4)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의 삶 자체가 ‘화광동진’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는 깊은 수도를 통하여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체득하는 경지에 올랐고 아울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깨달음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고 은자의 길을 택하여 문명 밖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떠나기 전에 남겨놓은 5000여자의 책 한 권과 후대에 전해진 모호한 전설을 통해서만 그의 삶과 깨달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노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사상가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를 곱씹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흥미롭게도 공자의 삶과 깨달음에도 ‘화광동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재해석해볼 때 공자가 노자보다 더 철저하게 ‘화광동진’을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고 본다.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인지, 또한 공자가 정말 노자로부터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수용하였는지는 규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화광동진’을 매개로 해서 두 위대한 사상적 거인의 삶과 깨달음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老子와 孔子의 만남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는 고사는 『史記』의 「孔子世家」, 「老莊申韓列傳」, 「仲尼弟子列傳」에 나타나고 있고, 『莊子』중에 8조목의 관련 자료가 있고, 『呂氏春秋』의 「當染」편에도 나타나고 있고, 『禮記』의 「曾子問」편에도 4측의 자료가 나타나고 있고,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가의 저서인 『韓詩外傳』과 『孔子家語』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가장 높은 것은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이다.

「老莊申韓列傳」에 의하면 노자는 楚나라 苦縣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李氏’이고, 이름은 ‘耳’이고, 자는 ‘聃’이다. 주나라의 守藏室의 관리를 지냈는데 일찍이 공자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만년에 주나라가 쇠퇴하자 關을 떠나 은둔하려고 하였는데 關令 尹喜의 부탁으로 道와 德에 관련된 글 5000여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마천은 이어서 공자와 동시대 사람인 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음을 밝히고 있고 공자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인 太史儋 또한 노자일지도 모른다는 설을 부가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외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李耳 대신에 老聃이 주로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후대 노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혼동이 있었다.

이미 위진시대부터 노자의 설에 대한 이설이 등장하였고 고증학이 유행한 청대에 이르러서는 엄밀한 문헌고증을 통해서 노자와 노자의 저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특히 20세기 초 희의주의적 학풍이 유행하였을 때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설을 부정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 전국시대 후기의 사람이라고 주장하였고 『노자』라는 책도 전국시대 중기 내지는 후기, 심지어 한대 초에 지어졌다고 주장하였다.5) 만약 노자가 공자보다 후대에 생존하였던 사람이라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성립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 西漢 초기의 고분인 馬王堆에서 帛書本 『노자』가 출토되고 특히 90년대에 郭店에서 전국시대 초나라 고분에서 竹簡本 『노자』가 출토되면서 노자에 대한 담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고증에 의하면 竹簡本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중기인데 당시 서적의 유통속도를 고려해 보면 『노자』가 널리 유행하여 副葬品으로 쓰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아 노자의 생존연대와 『노자』의 성립시기의 하한선은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노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저서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6) 근래에 나온 노자에 대한 주요한 저서들은 대개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서 노자를 李耳라고 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해 老聃이 와전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7) 이에 따라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이 논문의 목적은 엄밀한 고증을 통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임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은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고 실제로 오랜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문화적 상징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필자는 특히「老莊申韓列傳」에 기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제기된 ‘화광동진’의 사상이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문을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물었다. 노자는 말하였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하였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텅 빈 듯이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하였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고,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고,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8)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禮’였다. 천하가 혼란해진 근본원인을 예의 붕괴로 보았고 주공이 세웠던 예를 회복함으로써 천하를 구하고자 하였던 공자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恒常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써는 지금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에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때를 얻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때를 얻지 못하면 포의로 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노자의 생각으로는 당시는 천하의 도가 무너지는 시기로서 이러한 시기에는 마땅히 물러나 포의지사로서 은둔의 길을 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노자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시기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구제하기에 앞장서야 할 시기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노나라에서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시기 판단에 대해서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지만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본 관점에 대해서는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만년에는 정치적 포부를 버리고 조용히 제자들의 양성에만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맹자에게 이어져 “궁할 때는 혼자 자신이라도 선하게 해야 하고 영달할 때는 천하를 두루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9)라는 말을 낳았던 것이다. 진퇴의 처세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양자를 융합한 삶의 모형을 취한 사람들이 많다.

노자는 이어서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노자의 ‘화광동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노자의 “大成若缺, 大盈若沖, 大巧若拙.” 구절의 뜻과 서로 부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10) 이미 필자의 여러 논문에서 밝혔듯이 ‘대교약졸’은 ‘화광동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하였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 18세, 31세, 34세, 42세, 46세, 51세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준 것으로 볼 때 아마도 30대 전후로 보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11) ‘無爲淸靜’과 ‘少私寡欲’의 수양을 주장하는 노자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선배로서 어지러운 천하를 구하겠다는 의지와 신념에 찬 젊은 공자의 모습을 보고 우려가 되는 마음에서 진지한 충고를 하였을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노자를 용이라고 칭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공자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공자에 대한 노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도가계열의 후인들이 지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공자가 노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 자체가 도가계열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도 많다. 그렇지만 일단 본고에서는 겸손한 공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노자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은 예에 대한 답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세와 수양에 관련된 내용이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 수양의 핵심은 ‘화광동진’에 있고 공자와의 대화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중간 단락의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보인다.”는 부분도 그렇지만 앞부분의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와 재주를 안으로 감추고 살아가라는 이야기로서 결국 빛을 안으로 감추고 먼지와 더불어 살아가라는 뜻이다. 뒷부분의 교만한 기운과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뜻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을 버리라는 말은 양생과 수심에 관련된 것인데 그 지향점 또한 ‘화광동진’에 있다. 그러면 ‘화광동진’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풀이해보고 그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과 깨달음에서 ‘화광동진’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 ‘和光同塵’에 대한 새로운 해석

‘和光同塵’은 4장에서는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56장에서는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있다. 이 모두는 수양과 관련이 있는 구절들이다. ‘塞兌閉門’은 많은 주석가들이 감각적 쾌락을 막고 욕망을 끊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고 ‘挫銳解紛’은 마음의 날카롭고 얽힌 부분을 정리하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높은 경지인12) ‘화광동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지혜의 빛을 안으로 거두고 다시 범속함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河上公本에는 각각의 구에 대해 “비록 홀로 보는 밝음이 있어도 마땅히 어두운 듯이 하고 빛으로써 사람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리와 함께 하고 먼지와 같이 해야지 스스로 특별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12)라고 하고 있다. ‘和其光’을 지혜의 빛을 감추는 것으로 보고 있고 ‘同其塵’은 범인과 동화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宋代의 蘇轍은 보다 깊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사람이 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성인이 능히 그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그 날카로움을 꺾는 것은 망령됨에 빠질 것을 두려워함이다. 얽힘을 푸는 것은 외물에 얽히게 될까봐 두려워함이다. 망령됨에 빠지지 않고 외물에 얽히지 않게 되면 외부의 근심은 이미 사라지고 빛이 생길 것이다. 그런 뒤에 그것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빛은 지극히 순결한 것이고 먼지는 지극히 잡된 것이다. 비록 먼지라 할지라도 동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人莫不有道也, 而聖人能全之. 挫其銳, 恐其流於妄也. 解其紛, 恐其與物搆也. 不流於妄, 不搆於物, 外患已去, 而光生焉. 又從而和之, 恐其與物異也. 光至潔也. 塵至雜也. 雖塵無所不同, 恐其弃萬物也.)13)




소철의 관점에서는 빛이란 단순한 지혜의 빛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으나 성인만이 온전하게 밝힐 수 있는 깨달음의 빛이요 성스러움의 빛이다. 범인들이 그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망령됨에 빠져 있거나 외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거하면 내면의 빛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다시 그 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지극히 순결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잡된 티끌과 동화가 되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광동진’에는 회귀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수양의 과정에 들어가기 전의 처음의 상태는 범속함이다. 이것은 아직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한 단계이다. 수양을 거쳐서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렇게 될 때 일반적인 범속함과는 전혀 다른 성스러움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고 속세와 하나가 되는 ‘和其光 同其塵’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원래의 범속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귀는 아니다. ‘화광동진’ 이후의 범속함은 당연히 처음의 범속함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표면적으로는 범속해보지만 속으로는 깨달음의 빛이 감추어져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을 하면서도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나선형적 회귀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에서 나선형적 회귀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일차적 의미는 감추기이다. 얕은 성스러움을 넘어서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감추기가 노자의 수양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도덕경 곳곳에서 이 감추기를 다른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하고도 무지할 수 있는가?”14),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킨다.”15) 등의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에 통달하는 큰 지혜를 얻고 수컷의 강건함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감추고 무지한 듯이 보이고 유약한 듯이 보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의 修道와 修德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의 나선형적 회귀가 단순히 감추기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대립되는 양극성을 통합한다는 의미도 있다.

소철의 주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빛과 티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다. 하나는 지극한 성스러움과 고결함의 상징이고, 하나는 지극한 범속함과 잡됨의 상징이다. 또한 빛은 본체의 세계 내지는 초월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고, 먼지는 현상의 세계 내지는 범속한 일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철저하게 대립된다.

범인들은 대부분 범속한 일상의 세계에서 잡된 욕망의 포로가 되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이에 비해 수도자들은 성스러운 초월의 세계에 심취하여 일상의 현실을 무시하기가 쉽다. 수도의 과정으로 볼 때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범속함과 잡됨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서는 분명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대립적인 양자를 통합하는 것이 더욱 깊고 원숙한 성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노자가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다시 범속함과 잡됨과 동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결국 성스러움과 속됨의 대립적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여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고 싶다.

감추기와 통합은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만 찬찬히 뜯어보아도 그것이 감추기와 통합의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광’이라는 말은 성스러움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는 것이므로 당연히 감추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비해 ‘동진’은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범속한 세계와 동화되는 것이므로 성과 속의 통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스러움의 빛이 밖으로 강하게 발산되면 범속함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숭배하거나 경계심을 가지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출 수 있을 때 비로소 범속함과도 동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화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동진’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 만약 동진을 단순히 겉으로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으로만 정의한다면 ‘화광’과 ‘동진’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빛을 감추는 것 자체가 바로 먼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진정한 ‘동진’이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동진’이 이루어지려면 단순히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범인과 어울리는 단계를 넘어서 진정으로 범인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소통과 교류가 없는 것을 어찌 ‘同化’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통과 교류라는 요소를 고려하여 ‘동진’을 정의하는 경우 ‘화광’과 ‘동진’은 동의어가 아니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고 범인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필자는 ‘화광동진’을 ‘화광’의 단계와 ‘동진’의 단계 둘로 나누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기 단계는 깨달음의 빛을 감추는 ‘화광’에 중심을 두고 있는 단계이다. ‘화광’에 초점을 맞춘 대표적인 유형은 바로 은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자는 그냥 현실에 불만을 품고 은둔해서 지내고 있는 보통의 은자가 아니라 속으로 깊은 지혜와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되 그것을 감추고 살아가는 은자를 말한다. 노자 당시에 이미 덕과 지혜를 갖춘 은자들이 많이 있었고 『논어』에도 공자에게 충고하는 은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은자들 중에서도 감추기에 더욱 급급하여 아예 인간세상을 떠나 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범인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다.

‘화광’의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성스러움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범인들 속에서 어울려서 티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 성과 속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범속함을 수용할 뿐 여전히 성스러움과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거나 내면의 심원한 세계에 도취하여 범인들과는 깊게 소통하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심리적 거리를 두고 동정을 할 뿐 더불어 진정으로 그 아픔을 공감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육신이 산속에 있든 저자거리에 있든지 간에 마음은 여전히 홀로 고원한 성스러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동진’의 단계에 이르러야 몸만 범속한 세상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고 마음 또한 범속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론 자신의 성스러움을 과시하거나 우월자의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게 된다.

그런데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범속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직시하며 이를 변혁하려고 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개개인의 범속한 일상의 삶은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 사회의 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진정으로 성과 속을 통합하려고 한다면 표피의 일상에서 심층의 일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그러므로 범속한 일상성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문명의 성격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회와 문명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진’이 더욱 확장된 규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

노자와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서주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와 예악제도가 와해되어가던 시기였다. 노자와 공자는 모두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비록 생애의 노정과 사상적 성향은 달랐지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내놓았다는 면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먼저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보도록 하자.

사실 사마천의 노자의 생평에 대한 기록은 워낙 소략하기 전체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주나라의 수장실의 관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수장실의 관리를 지내면서 책을 가까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금의 역사와 문물제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어떤 이는 대략 5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주나라 왕실에서 일어났던 정변으로 인해 왕실 도서관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16),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노자 당시에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배계층에서 물러나서 초야에 머물면서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을 하였던 은자의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微子」편에 등장하는 接與, 長沮, 桀溺, 荷蓧丈人 등이 그러한 무리들이다. 이러한 은자들의 무리가 후대 도가학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고 은자들 중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노자가 그들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은 단순히 현실비판의 은둔자의 사상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우주본체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다룬 정치사상,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양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 수양과 처세론, 그리고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까지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분명히 정신적 수양을 통하여 심오한 내적 체험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虛靜의 극치 속에서 감각과 개념의 세계를 넘어서는 본체의 세계에 다가갔던 것으로 보인다.17)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화광’의 지혜를 체득하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진’을 심화시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노자의 글 속에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문명비판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은 물론 노자 자신이 수장실의 관리를 지낸 최고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초월적 세계, 본체의 세계에만 경도되었다면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자의 계승자라고 불리는 莊子만 해도 노자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구만리 상공을 나는 大鵬과 같이 현실을 멀리 초월해서 物外의 세계에서 逍遙遊를 즐기는 데에 있다. 물론 『장자』 속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류가 아니다. 장자 사상의 주류는 역시 초월적 대자유에 있다.

불교 중에서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종의 선사들 또한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성속 양자를 통합하려고 하였다.18) 그러나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매우 중요한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우리의 일상성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 구조의 문제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의 소통이 단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아직 감추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노자의 ‘화광동진’은 이후에 노자를 추종하였던 도가계열의 사상가나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토착화를 추구하였던 선사들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문명에 대한 그의 주장들이 현실 속에서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관념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관념상으로는 분명히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통합보다는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현실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은자의 삶에 머물렀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학문을 간략하게 총평하면서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스스로 감추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일로 삼았다.”19)라고 언급하였는데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감추기에 지나치게 치중하였기에 노자의 생애는 이미 사마천 당시에도 모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가서는 여러 가지 전설과 범벅이 되어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제시한 현실문명에 대한 처방 또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법가가 극성을 부린 뒤 휴식기를 필요로 하였던 한대 초에 잠시 받아들여졌고 유가사상이 관학이 된 뒤부터는 현실정치에서 별로 활용될 수가 없었다. 주로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았을 뿐이다. 이것은 바로 노자가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키는 단계까지 나갔지만 실제 현실의 삶에 있어서는 ‘화광’에 머무름으로 인해 나타난 한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노자의 ‘화광동진’은 미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공자를 살펴보자. 우선 공자 또한 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의 경지와 덕성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기를 좋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논어』의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叔孫武叔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子貢이 공자보다 현명합니다.”라고 말하였다. 子服景伯이 자공에게 알려주자 자공이 말하였다. “궁궐의 담에 비유하자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적기 때문에 손숙무숙의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20)




당시 일반 사람들 중에는 공자의 도와 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보다는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자공은 황송해하며 스승을 변론하였다.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공자 또한 ‘화광’을 잘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워본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 새 뒤에 있다.”21)라고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감추기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동진’을 제대로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논어』「미자」편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진’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한 공자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혼자 편안하게 은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새나 짐승과 무리지어 함께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올바른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22)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한 평생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명적 대안은 노자처럼 현실과 괴리된 주관적 직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과 결합된 실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후대 중국문명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동진’의 극치라고 보고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먼저 내면의 빛을 체득한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런 내면의 빛을 체득하지 못하였다면 세상 속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없다.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러한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현실개혁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전통적으로 도가나 불가에서는 공자의 깨달음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에는 구도와 종교의 세계에서 추구하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정치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초월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눈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 속의 공자에 대한 우화를 보아도 대부분 공자를 폄하하고 있고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도 공자를 폄하한 사람이 많다. 晩唐五代의 雲門禪師는 일찍이 “고인도 오히려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사문에게 있어서이랴! 아침저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크게 노력하고 진중하기를 노력하시오.”23)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자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속인으로 폄하한 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도가나 불가에서 공자의 도를 폄하한 것은 그들의 도에 대한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초월적인 측면에 경도되어 공자 속에 있는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을 볼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좀 더 깊게 바라보면 공자의 깨달음과 삶 속에는 분명 초월적 성스러움의 요소가 있다. 다만 감추어져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Fingarette은 공자의 가르침은 모세, 예수, 부처, 노자, 혹은 우파니샤드 교사들의 그것과는 달리 신비적 요소가 거의 없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무미건조한 도덕주의적 가르침 같지만 자세히 보면 주술적 힘(magic power)에 대한 신뢰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고, 공자는 의례를 통하여 인간존재의 본질인 성스러움을 고양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24) 일리가 있는 학설이다. 그러나 필자에 관점에서는 공자의 성스러움은 단순히 의례를 통해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의 과정과 깨달음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生而知之’가 아니라 ‘學而知之’라고 하였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내지는 성인을 가리키고, ‘학이지지’란 배움을 통한 꾸준한 노력으로 성스러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하였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25)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好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好學’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통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26)라고 말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하였다. 비록 점진적인 구도의 연속이었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하늘의 명을 알게 되었다는 오십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우주의 주재가가 거하는 곳으로 여겨졌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 내지는 구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중국문명의 발전과정을 보면 殷代 이전에는 巫俗的 성격이 강한 神本主義에서 周初에 이르러서 점차 人文化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신본주의 문명에서 인문적 성격의 문명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역시 춘추시대 말기라고 볼 수 있고 공자는 그 전환기에서 인문화로 나아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공자 당시에는 하늘에 대한 관념도 점차 인문화 되기는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하늘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윤리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성함이 남아있었고 공자의 하늘에 대한 여러 언급들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27)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천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 수양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근래 학자 李冬君도 공자의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술하면서 ‘불혹’까지는 군자의 단계이고 ‘지천명’이후부터 성인의 단계에 들었다고 보고 있다.28)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다 宋나라에서 桓魋에 의해 생명의 위험에 처하였는데 그때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와 같은 자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29)”라고 말했고, 匡 지방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도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고자 한다면 뒤에 태어난 내가 이 예악제도에 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데 광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30)라고 말했다.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천명을 확실히 자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육십에는 ‘耳順’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순’이라는 말은 실로 모호한 말이어서 제설이 분분하였는데 대체로 역대의 주요한 주석가들은 말을 듣고 그 뜻을 깊게 이해한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31) 아마도 ‘지천명’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李冬君도 ‘이순’은 ‘지천명’을 체화하는 과정으로서 말없이 천명에 따르고 동화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32)

‘이순’에 대해서는 대부분 ‘지천명’의 결과 내지는 심화로 바라보고 있는데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順’이라는 말은 따른다는 뜻이다. 그것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면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려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타인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고 문명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순’은 자신의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 놓는 경지로서 ‘화광동진’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와 외의 조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란 내면의 욕구, 신념, 의지 나아가 깨달음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내면의 깨달음은 외면의 현실세계와 충돌한다. 노자의 경우만 해도 결국 내면의 깨달음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은자의 길을 택하였다. 공자는 깨달음 이후에도 세상과의 소통을 원하였고 만년에 눈을 감기 전에는 내면의 깨달음과 외면의 현실을 서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공자의 가르침 속에 내면의 성스러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의 체득마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대 공자의 가르침에서 본원적 성스러움이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던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이 ‘화광’을 통하여 그것을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이 예악제도와 문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가히 들을 수 있지만 선생님이 타고난 본성이나 하늘의 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다.”33)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빛은 말없는 가운데 삶에 묻어나왔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깊은 깨달음 없이 단순히 정치사상이나 윤리 도덕만을 가르쳤다면 제자들로부터 그렇게 성인으로까지 추앙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자는 구도의 새로운 차원, 성스러움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에는 소수의 제자들 외에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헌신적인 계승자들에 의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차 확산되었고 마침내 중국 문명의 주류가 되었다. 李冬君은 중국 문명의 긴 흐름을 夏殷周의 ‘神化’, 殷周之際에서 시작되어 공자에 이르러 완성되어 19세기말까지 계속된 ‘聖化’,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公民化’, 삼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는 ‘성화’란 성인이 주체가 되는 문화라는 뜻으로 공자는 ‘下學上達’로써 성화의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하였으며 공자의 성화는 이후 계승자들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결국 중국문명의 주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34) 일리가 있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은 실로 근대서구의 문명이 침투하기 전까지 중국문명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사회의 혼란을 틈타 유교는 점차 쇠퇴하고 도교와 불교가 크게 흥성하였다. 특히 인도에서 수입된 불교는 중국인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종교적 성스러움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이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인도적 성스러움의 강렬한 빛에 깊게 심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화광동진’의 영향으로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는 선종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는 유교가 다시 사상계의 주류를 찾게 되었다. 일상적 범속함에서 초월적 성스러움으로 갔다가 다시 일상적 범속함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송명대의 신유학이 단순히 범속함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신유학은 불교로부터는 심성론과 수양론을 대폭적으로 수용하였고, 도교로부터는 우주론을 보완하여 천근한 일상사에서 심원한 본체의 세계, 본성의 세계에 이르는 종합적인 학문체계를 건립하였다. 범과 성의 새로운 통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스러움을 안으로 감추고 표면적으로는 ‘日用之間’을 적극 제창하였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화광동진’을 터득한 유교 측으로 돌아갔다. 중국사상사의 거대한 흐름 자체가 ‘화광동진’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5. 맺는 말

‘화광동진’은 노자의 수양론 중의 한 부분이다. 물론 『노자』의 많은 구절이 그러하듯이 이 또한 노자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전승되어오던 금언이나 격언들을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내용으로 볼 때 아마도 은둔 사상가들 사이에 내려오던 금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또한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였기 때문에 노자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광동진’의 일차적 의미는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천착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 속에는 성스러움의 감추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더욱 심화된 단계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자는 분명히 ‘화광동진’을 중시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지만 궁극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다. 오히려 공자가 ‘화광동진’의 심층적 의미를 체득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많다. 그리고 노자라는 인물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자 당시에 죽간본 『노자』를 쓴 은둔 사상가 내지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은둔 사상가들은 존재하였을 것이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던 공자가 그들로부터 ‘화광동진’의 사상에 대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르침을 받았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삶과 깨달음 속에도 ‘화광동진’의 사상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사상이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강조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공자의 사상이 초월적인 세계보다는 일상의 세계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들은 모두 ‘화광동진’과 많은 관계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적인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사상이 만개하였던 인도나 유럽 내지 아랍문명권과는 달리 중국문명권에서는 현실적 실용성을 강조한 정치사상이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또한 ‘화광동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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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노자 수양의 삼 단계」, 중국문화학회, 『중국학논총』18집, 2004.12.




<中文提要>

孔子和老子是春秋末期的偉大的思想家. 西漢初的史家司馬遷在<老子列傳>中記載了孔子曾向老子問禮的故事. 歷代以來很多學者對司馬遷的記錄表示懷疑, 其實對老子其人和其書的問題至今未能達到一致的見解. 但最近不少學者依據馬王堆帛書本和郭店楚簡本的發掘主張司馬遷的記錄是可靠的. 不論孔子向老子問禮的故事是否史實, 這個故事給我們很多啓發.

我認爲老子對孔子的忠告的主旨就在於作爲老子修養論的樞紐的‘和光同塵’, 因而擬以‘和光同塵’的觀點比較一下他們的生平和悟境. ‘和光同塵’的意思是把修道以後發露的神聖的光芒隱藏起來, 與那些塵俗的人和世界相同. 其基本意義在於聖俗的調和. 我認爲同塵有兩個層次. 第一個是表面上的同塵. 雖然講究跟塵俗的人和世界相同, 可是沒有溝通和交流. 第二個深層的同塵是能够跟塵俗的人和世界進行溝通和交流的階段, 這才可以說是達到聖俗的調和.

從『老子』裏面的許多句子我們可以推測老子體會到作爲宇宙本體的道, 可是他沒有離開塵世, 對於當時的社會情況表示了較大的關心, 提出了救濟混世的方法, 這說明他推究聖俗的調和. 從這方面來看, 老子與力求逍遙遊於物外世界的莊子截然不同. 可惜的是他不能達到現實生活中的實踐, 究竟以隱者留了名. 孔子則不一樣. 從『論語․子張』中的“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來看, 我們可以知道孔子也能够把修道以後發露的光芒隱藏起來, 因此除了他的弟子以外當時一般人不能推測孔子的悟境有多深. 但是他的特點不在於‘和光’, 而在於‘同塵’. 他不但提出救濟混世的方法, 而且在現實生活中不斷地努力實踐他的理想. 這可以說是眞正的‘和光同塵’.




주제어 : ‘和光同塵’, 修養論, 悟境, 神聖, 塵俗, 聖俗的調和

1) “道盅, 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2)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3) 『老子』는 판본에 따라 자구의 차이가 많고 특히 근래에 발굴된 帛書本은 通行本과 순서가 다르고 竹簡本은 내용의 편차도 심하다. 여기서는 통행본 가운데서 河上公本을 저본으로 한다.




4) 이에 대해서는 박석, 「老子 修養의 삼 단계」(韓國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18집) 참조.




5) 노자와 『노자』의 연대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 대해서는 熊鐵基 등,『中國老學史』,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1-20쪽 참조.




6) 熊鐵基 등, 『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512-3쪽;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9-10쪽 참조.




7) 熊鐵基 등,『中國老學史』(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熊鐵基 등,『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등의 저서에서 모두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에서도 공자가 만났던 노자는 바로 老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죽간본 『老子』의 저자와 백서본 『老子』의 저자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전자의 저자가 老聃이고 후자의 저자는 太史儋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8) “予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于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吾知其能飛, 魚吾知其能游, 獸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網,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也.” 司馬遷, 『史記․列傳』卷63 「老子韓非列傳」 北京: 中華書局, 1985




9)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孟子』, 「盡心下」




10)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 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 519쪽 참조.




11) 차주환, 『공자-그 신화를 밝힌다』, 서울: 솔출판사, 1998, 79-89쪽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대략 34세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13) 帛書本이나 竹簡本에 의하면 通行本과는 달리 56장에서는 ‘和光同塵’이 挫銳解紛 앞에 나온다. 대신 4장에서는 통행본과 마찬가지로 ‘和光同塵’이 挫銳解紛의 뒤에 위치한다. 죽간본은 4장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수양론의 관점에서 볼 때 순서에 상관없이 ‘和光同塵’이 보다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박석, 「老子 修養의 삼단계」, 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 제18집, 379-401쪽 참조.




12) “言雖有獨見之明, 當如闇昧, 不當以曜亂人也. 當與衆庶同坵塵, 不當自別殊.” 王卡, 『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 14쪽




13) 焦竑, 『老子翼』, 『四部要籍注疏叢刊․老子』, 北京: 中華書局, 1998, 1229쪽




14) “明白四達, 能無知乎.” 『老子』10장.




15) “知其雄, 守其雌” 『老子』28장.




16)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 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54-5쪽 참조.




17) 『老子』의 1장, 14장, 16장, 25장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18) 박석, 「‘和光同塵’이 선종 깨달음에 미친 영향」, 상명대 어문학연구소, 『어문학연구』8집, 1999 참조.




19) “老子脩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史記』권63 「老莊申韓列傳」




20)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 『論語』「子張」




21)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論語』「子罕」




22)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論語』, 「微子」




23) “古人尙道朝聞道夕死可矣, 況我沙門. 日夕合履踐個什麽事, 大須努力, 努力珍重.” 道原,『景德傳燈錄』卷19, 中國電子佛典協會, 『大正新脩大藏經』51冊.




24) Herbert Fingarette, 노인숙 역, 『공자입니다 성스러운 속인』, 서울: 일선기획, 1990, 21-41쪽 참조.




25)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




26)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論語』, 「爲政」




27) 林存光, 『歷史上的孔子形象』, 濟南: 齊魯書社, 2004, 12-29쪽 참조.




28)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49-51쪽 참조.




29)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論語』「述而」




30)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論語』「子罕」




31)『論語正義』에서는 鄭玄의 말을 인용하여 “聞其言而知其微旨”라고 풀이하였고 朱熹는 『四書集註』에서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32) 李冬君, 위의 책, 50쪽.




33)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論語』 「公冶長」




34)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참조.

2022/03/25

알라딘: [전자책]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 돼요? - 소학으로 배우는 어린이 예의범절


알라딘: [전자책]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 돼요? - 인성이 바른 어린이 01



[eBook]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 돼요?
- 소학으로 배우는 어린이 예의범절 | 인성이 바른 어린이 1
최영갑 (지은이),김명진 (그림)풀빛2012-12-26




































9.2 100자평(2)리뷰(8)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 돼요? - 인성이 바른 어린이 01
구매가 7,000원


종이책 페이지수 160쪽,
책소개

조선 시대 어린이들의 필독서 「소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어린이 예의범절 학습서이다. 사회가 점점 핵가족화 되면서 과거 대가족 울타리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던 예의범절 교육을 접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쉽고 재미있고 또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아이들은 책 속 주인공들과 함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또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게 된다.

방 한 가운데 앉은 아이에게,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아이에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아이에게,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부모님이 시킨 일을 귀찮다며 미루는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행동을 지적하기보다 왜 그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지 질문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책을 통해 아이들은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도 배우게 된다. 또한 인격이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 꼭 필요한 좋은 습관을 기르는 법 등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목차


저자의 말 4
들어가는 말 10

1장 입교

사람의 도리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18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22

배움의 법칙
진정한 공부법 24
놀 때도 열심, 공부할 때도 열심 28
착한 것을 보면 꼭 따라해 보기 31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34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36

학문의 시작
효도는 학문의 시작 40
한 번 배움, 한번의 실천 43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46

진정한 지식인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진짜 지식인 48
작은 약속도 소중히 52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56

2장 명륜

자식의 도리
효도, 어떻게 할까? 60
효도의 시작은 걱정하는 마음 64
작고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67
얼굴 뵙고 인사하기 69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72

임금과 신하의 의리
정몽주의 일편단심 74
의로운 임금, 충성스런 신하 78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사람 79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84

남녀의 역할
남자가 하는 일과 여자가 하는 일은 왜 다를까? 86
서로 존중하기 90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93

어른과 아이의 질서
자리 양보 꼭 해야 돼요? 94
타인을 먼저 배려하기 96
어른보다 조금 뒤에서 걸어요 98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02

친구사이에 믿음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될래요 104
욕하는 나쁜 친구, 욕 안 하는 좋은 친구 106
엄마 아빠 자랑하는 친구, 바보! 108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14

3장 경신

마음 다스리기
공부의 시작은 마음 다스리기 118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은 일 122
숟가락 먼저 들면 안 돼! 125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30

올바른 행동
예의의 시작은 얼굴과 말 132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용 134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40

옷차림
어떤 옷이 날개일까? 142
가장 멋진 옷 144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50

음식에 대한 예절
함께 하는 식탁, 행복한 식사 152
음식을 욕심내는 사람, 지혜를 욕심내는 사람 154
더 배우기 / 한자 풀이 / 사자 소학 배우기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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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럼, 동물처럼 살지 않으려고 조상들은 무엇을 가르쳤어요?”
정의가 말했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구나. 옛날 사람들도 너희처럼 교육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바로 오륜이라고 하는 것이야.”
“오륜이요? 그게 뭔데요?”
지혜가 물었습니다.
“오륜은 한자로‘다섯 오五’와‘인륜 륜倫’이라는 글자를 합해서‘오륜五倫’이라고 한단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라는 뜻이지.”
“예, 그럼 앞에서 맹자가 한 말이 바로 오륜이군요?”
지혜가 말했습니다.
“맞아, 지혜가 할아버지 말을 아주 잘 들었구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고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간단다. 내 생각만 하면서 내 맘대로 하며 산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 수도 있단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 바로 오륜이라는 것이지.” 접기
“나도 그 마음은 이해한단다. 어른들이 잠을 줄이라고 하는 이유는 잠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야. 게으른 사람은 결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힘들단다. 옛 사람들은‘숙흥야매夙興夜寐’라고 했어요. 일찍 숙夙, 일어날 흥興, 밤 야夜, 잠잘 매寐라고 쓰는데,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잔다는 뜻이지. 조상들은 항상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학문에 전념했단다.”
“할아버지, 저는 제가 원하는 꿈이 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기를래요.”
정의가 말했습니다.
“그래, 장하구나. 이제 마음을 먹었으니, 실천하는 것만 남았구나. 지혜는 어떠니? 할 수 있겠어?”
“히히, 네. 저도 해 볼래요.”
“잘 됐구나. 그런 마음이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할아비는 너희가 잘 하리라 믿어요.”
지혜와 정의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허둥지둥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접기
할아버지는 지혜와 정의에게 부자유친父子有親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부자유친이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란다. 한자의 의미는 아비 부父, 아들 자子, 있을 유有, 친할 친親으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뜻이야. 너희도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말은 자주 들어 봤을 거야. 효도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것이란다. 부모님은 너희에게 사랑을 베풀고 항상 보살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부모의 도리란다. 오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부자유친’이란다.”
…(중략)…
“그것도 좋지. 이제 효도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겠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항상 몸도 조심하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혜와 정의가 함께 대답했습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최영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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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유교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동양철학과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겸임교수, 한국유경편찬센터 편찬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 교육원장과 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장을 맡고 있으며 (재)성균관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청춘성어》 《군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이야기》 《공자와 맹자의 도덕철학》 《성학십도: 열 가지 그림으로 읽는 성리학》 《성학집요: 교양으로 읽는 율곡 성리학》 《회남자: 생각의 어우러짐에 관한 지식의 총서》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 돼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논어》 《대학?중용》 《주희집주 맹자》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큰글자책] 사자논어 100선 >,<하늘이 내린 다섯 효자 이야기>,<동양철학이야기> … 총 31종 (모두보기)

김명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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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지금은 화가 및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린이 저작권 교실』, 『내일 또 만나』, 『백퍼센트 창의력 깨우기』, 『지구반 환경문집』, 『은행털이 가족』, 『박치기 여왕 곱분이』 등 여러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람답게 사는 법 따로 있나요?
성균관 선생님이 들려주는
어린이 좋은 습관 이야기!

개념 충만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우리 아이 예의바른 어린이로 키우는, 소학

조선 시대 어린이들의 필독서였던《소학》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정보로 가득하다.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는 《소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어린이 예의범절 학습서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 대학교 유교 문화 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려준다. 사회가 점점 핵가족화 되면서 과거 대가족 울타리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던 예의범절 교육을 접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쉽고 재미있고 또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크게는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친구사이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인간의 도리부터 일상생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교정해 주는 꼭 필요한 학습서가 될 것이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일이란 무엇일까?
오륜을 실천하는 우리가 진짜 리더!

《숟가락을 먼저 들면 왜 안돼요?》는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를 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구성되었다. 이야기 속에는 옛날 사람들의 재미있는 일화도 있고 또 옛 성인들의 명언과 지혜가 가득하다. 방 한 가운데 앉은 아이에게,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아이에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아이에게,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부모님이 시킨 일을 귀찮다며 미루는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행동을 지적하기보다 왜 그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지 질문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은 책 속 주인공들과 함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또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게 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말과 행동거지에 주의하며 살아왔다. 과거에는 집안의 어른을 통해 자연스럽게 예의범절을 습득해 왔지만, 핵가족화가 되면서 예의범절 교육이 부족해지고 말았다. 인성 교육 보다는 학과 수업이 더 중요시 되다 보니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기 보다는 남의 것을 탐내서라도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진정한 리더는 타인을 호령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숟가락을 먼저 들면 왜 안돼요?》를 통해 아이들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도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인격이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 꼭 필요한 좋은 습관을 기르는 법 등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논어》부터《맹자》까지, 고전으로 배우는 어린이 좋은 습관!

《소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어》, 《예기》, 《맹자》 등 옛 성인들의 주옥과 같은 명언들이 가득하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제자 유자징이 만든 이 책으로 효와 경을 중심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내용과 군자가 되기 위한 교훈을 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 사대부의 자제들은 여덟 살이 되면 반드시《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의 본문은 소학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충실이 풀어냈고, 단락 말미마다 ‘더 배우기’ 코너를 마련해 소학의 원문을 한자로 공부할 수 있도록 꾸몄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학에는 공자와 맹자 등 옛 성인들의 명언이 담겨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려운 고전을 쉽게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자 급수 시험을 준비하며 단어로 한자를 외웠던 아이들에게 한자를 문장으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문장으로 한자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중국어의 어순이라든가 구성을 익히게 될 것이다.
매 단원 끝에는 사자소학을 첨가해서 아이들에게 사자성어를 공부하도록 준비했다.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는 자라나는 꿈나무인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예의와 겸손함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소학》은 과거 조상들이 어렸을 때 배우던 책이므로 오늘날에 적용하기 힘든 내용이 많습니다. 따라서 모든 내용을 그래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소학》의 내용이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므로 큰 줄기를 먼저 알고 오늘날에 맞는 내용을 잘 섭취해야 합니다.
- '소학, 어떻게 읽어야 할까?' 중에서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맑고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환영받게 될 것입니다. 옛날 선비들이 공부를 하는 목적도 나쁜 것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중략)…
이 책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잊고 지내던 습관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해 줄 것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접기


평점
분포

9.2




아이 보여주려 샀다가 제가 읽기 바빴던 책입니다. 정말 재밌고 좋은 책 추천합니다
chiaraa 2015-04-04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소학으로 풀어낸 예의범절


요즘 아이들 예의범절에 대해 잘 배우지 못하는게 사실이지요.

우리 지원이만 해도 외동으로 귀하게(?) 자라다 보니 예의범절보다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책에 더욱 관심이 갔어요.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큰것 먹겠다고 덤비고,,자신이 해야할 일을 남에게 미루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모르고, 어른들이 오셔도 인사도 잘 안하는 등 고쳐야 할 점이 너무 많거든요.

아이의 잘못된 부분을 늘 지적하는 것보다..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이책을 보게 되었지요.

예의범절은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법의 심판을 받거나 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기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요.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친구사이에 신의를 지키는 등 소학에 기초를 둔 인간의 도리를 담고 있어

아이들이 배워야할 내용으로 가득하네요.

처음 책을 접했을땐 생각보다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는데,

소학이 무엇인지에서 부터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소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아이들에게 생소한 소학의 문장을 한자 그대로 적어놓아 어렵게 느꼈던 부분도

문장의 해석과 한자풀이가 나와 있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소학의 가르침과 한자도 배울 수 있는 깊이있는 학습이 될 수 있었구요.

크게 입교, 명륜, 경신 세가지 주제로 나누어 사람의 도리와 학문하는 마음자세,자식의 도리,임금과 신하의 의리, 남녀의 역할,

어른과 아이의 질서, 친구사이의 믿음, 마음 다스리기, 올바른 행동, 옷차림, 음식에 대한 예절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지혜와 정의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요.

재밌는 일화속에 옛 성인들의 명언과 지혜가 가득 담겨 있네요.

잘못된 아이의 행동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것이 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인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이책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좋은 습관, 사람의 도리,학습하는 태도, 겸손함 등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예의 범절에 대해 배울 수 있네요.

초등 친구들이 읽어보면 좋을 내용이라 꼭 읽어보길 권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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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호떡 2011-09-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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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



공공장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을 보면 때로는 버릇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아이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딸부잣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유독 엄하신 아빠덕에 다리 한번 제대로 뻗질 못했던 기억이 있다. 밥먹을 때에도 아빠의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그런것인지 아빠는 예의범절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일까 나 역시도 우리 아이들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다. 밥먹을때부터 인사에 이르기까지 어쩜 내가 어렸을때 배웠던 대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 딸들이이런 나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서 항상 갈등을 빚는다.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 는 소학으로 배우는 어린이 예의범절에관한 책이다. 나의 백마디 말보다 이 한권으로 우리 아이들이 읽고 조금이나마 깨닫기 바라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 딸들인지라. 소학은 우리 조상들이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나면 그 다음에 배웠던 책으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소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간답게 살라는 것이다'라고 한다. 소학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내편의 '입교'(교육의 원칙과 방법을 설명해준다), '명륜'(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인 오륜에 대해 설명해준다), '경신'(자기 자신의 몸을 공경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준다)을 소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학하면 으례 어렵고 딱딱한 것이기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다가서는 이 책의 구성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단지 아이들을 위한 책이기보다는 두고두고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그리고 이 기회를 더불어 아이들이 한자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책의 중간중간에 '더 배우기' 와 '한자풀이' 그리고 '사자 소학 배우기'가 있어 앞의 내용에 대한 정리를 해줄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자에도 많이 노출이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가 될 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족한 인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가정에서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Tip을 얻을수 있어 좋았다. 동방예의지국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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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지 2011-09-2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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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으로 배우는 어린이 예의 범절


예전에는 대가족이 함께 살았기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많았지만 요즘은 핵가족 중심의 생활을 하기에 많이 간소화됨을 알 수가 있지요. 저희 집 역시 부부와 형제들만 있기에 가급적이면 격식이나 형식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편안하게 생활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편한 것들이 다른 어르신들을 만날 때는 조금 걸림돌이 됨을 알기에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어 보았답니다. 우리 옛 조상들은 소학이라는 책을 통해 가장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실천했는데요, 소학하면 왼지 고리타분하면서도 어려운 듯 느껴지지만 이 책은 지금의 아이들이 알기 쉽도록 소학을 풀었답니다. 소학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내편은 입교, 명륜, 경신, 계교로 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교육의 원칙과 방법,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자신의 몸을 공경하게 만드는 방법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중국의 고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증명하고 있지요. 이책은 내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고, 용어 자체가 조금은 딱딱해서 지례 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내용은 아이들의 일상을 통해 할아버지가 소학과 접목시켜 설명을 하고 있기에 이러한 어려운 용어는 모르더라고 그 뜻만 알면 될 것 같아요. 소학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예절과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담겨 있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성인들이 함께 읽어도 좋다고 하니 더욱 진진하게 읽게 되더라고요. 친구사이의 관계나 음식이나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너무나 개성을 중시하고 개인주의 적이다 못해 이기적이기까지 한 요즘의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커서 어떤 사회인으로 될지 걱정이 앞서기에 지금 자연스럽게 이야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야기와 관련해서 이것이 소학의 어느 부분에 해당이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었기에 새로운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한자가 나오니 더럭 겁이 나기도 하지만 조금씩 한자풀이나 사자 소학을 읽다 보면 마음을 다스림과 동시에 한자 공부도 함께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네요.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변함이 없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인데요, ‘소학’하면 왠지 옛날의 것이라는 생각에 거리감을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읽고 나니 신선하면서도 지금 현실에 맞게 잘 적용만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바른 인성과 올바른 습관을 가진 건강한 아이들로 성장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속으로만 알고 실천을 못하는 그런 배움이 아닌 실천방법까지 알려주는 소학... 나이와 상관없이 한번 정도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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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밀리 2011-09-2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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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왜 먼저들면 안돼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세월이 빠르게 변했다하여 기본조차 무시하고 사는 세상.

공익광고에서 " 이건 기본이잖아요?" 하며 말하던 문구가 생각이 난다. 아이들에게 예의를 지키라며 말로는 떠들면서 정작 어른들이 실행에 옮기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 책을 통해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예의범절을 지키는, 기본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보자. 책속엔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사는 가족이 보인다. 할아버지에게 소학으로 지혜와 정의는 하나하나 예의범절을 배우게 된다. 할아버지 말씀에 삐뚤어지게 대답하지 않고 가르쳐 주시는데로 실천에 옮겨보려하는 모습이 참 의젓해보인다.

소학에는 옛사람들이 태어나서 처음 익히는 책이였다. 바로 사람이 지켜야 하는 기본예절과 부모를 친해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가 중심이 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내용중에는 변한 세월만큼 지금의 실정에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사람사는 세상은 모두 똑같다 하지 않았던가? 기본 예의범절은 크게 벗어난 것이 없다. 단지 무시하고 살뿐이지.

할아버지의 가르침뒤에 소학의 문구와 한자풀이와 사자소학이 들어있다.

다행히 저학년무렵 아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쳐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잊지않고 내용을 알고있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배우게 된 사자소학이지만 정말 잘 배우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세상의 때가 덜 묻어나서 약삭빠름이 덜해 손해도 보지만 6학년인 아들의 예의범절은 주변에서도 칭찬이 늘어진다. 오히려 어쩔땐 내가 미안할 정도로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내 아들이지만 뿌듯함이 느낀다.





損人利己(손인이기)면 남을 해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면



終是自害(종시자해)니라 마침내 자신을 해치게 된다.



禍福無門(화복무문)하야 재앙과 복은 특정한 문이 없어



惟人所召(유인소소)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들인 것이다.





소학에는 내편과 외편이 있다고 한다.



내편에는 입교, 명륜, 경신, 계고로 되어있다. 입교편은 교육의 원칙과 방법, 명륜편은 사람이 지켜야하는 다섯가지 도리인 오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경신편은 자기 자신의 몸을 공경하는 방법, 계고편은 중국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입교, 명륜, 경신을 증명하는 방법이 들어있다.





長者慈幼(장자자유)하고 어른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幼者敬長(유자경장)하라.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라.



長者之前(장자지전)엔 어른의 앞에서는



進退必恭(진퇴필공)하라. 나아가고 물러날 땐 반드시 공손히 하라.





예의범절은 어렵지 않은 것이였다. 모든 예의는 인사법부터 시작이였다.



고개만 까딱하는 아이, 소리로만 인사하는 아이....



우리 모두 유치원 아이들이 하는 인사법을 다시한번 익혀보면 어떨까?





友其正人(우기정인)이면 올바른 사람과 벗하면



我亦自正(아약자정)이요. 나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從遊邪人(종유사인)이면 나쁜 사람을 따라서 놀면



我亦自邪(아역자사)니라. 나도 저절로 나쁜 사람이 된다.





우리는 무슨일이 일어나면 남 핑계를 먼저하고만다. 나 자신부터 올바르게 행동하고 친구를 따르게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자식을 키움에 얼마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는지를 다시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초등학교 정규과정에 한자를 배운다 들었다. 일반 시험을 위한 한자보다는 사자소학을 익히게했슴하는 바램이다.



소학을 꼭 배우지 않더라고 이제부터는 우리모두 기본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보자.



숟가락 왜 먼저들면 안돼는지 이제 우리 아이들은 알것이다.



아빠가 앉으실때까지 기다리고 숟가락 드는 모습을 본 다음에 숟가락 드는 모습이 마냥 이뻐보인다.



" 엄마! 맛있는 음식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아이가 짠것처럼 모두 입을 모아 큰소리를 외친다. 그날 우리집 밥상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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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30 2011-09-1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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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왜 먼저들면 안돼요?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숟가락 왜 먼저들면 왜 안돼요?는 어린이들에게 예의 범절을 가르쳐주는 어린이 소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요즘 아이들은 핵가족화가 많이 되어있어서 그런지 어른들을 공경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른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혼자 먼저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밥을 다 먹고나서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아이들과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엄마가 일하다가 심부름을 시키거나 한다면 기분 좋게 그 일을 하는 어린이들도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한 가정에 아이들이 1~2명씩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오냐오냐하면서 응석받이로 아이들을 키워

더욱 버릇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싶은데요~

숟가락 먼저 들면 왜 안돼요는 이러한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의 범절을 초등학생인 지혜와 정의에게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방식으로 많은 그림들을 통해 재미있게 알려주는 소학 책입니다.

소학이라서 그런지 한자가 많이 나와 처음 보았을 때는 헉.. 하고 놀라기도 했어요..

사실 하랑천사도 한자에는 엄청 약하거든요~

하지만 한자로 된 구절이 나오면서 동시에 급수별로 한자를 나누어 음과 뜻을 풀이하고 있어서

오히려 한자공부가 되면서 예의범절도 익힐 수 있어 더욱 좋은 것 같습니다.

하랑천사가 한자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한자어를 아이들이 아는게 좋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서 문제의 뜻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그러한 아이들의 경우, 대부분이 한자에 대해 무지하더라구요~

한자어를 잘 알면 사자성어나 글을 읽을 때 단어 뜻을 유추하기가 훨씬 쉬워서

아이들의 독서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한자어와 더불어서 옛날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보다 쉽게 알려주는 책!!

요즘에 인성 교육이 한창인데요~ 꼭 학교에만 교육을 의존하기 보다는 집에서 이런 책을 통해서

아이들의 인성이 바람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건 어떨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봉이 김선달, 이황, 이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시대 위인들도 모두 공부를 했다는 소학..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공부했던 내용이라고 하면서 알려주면

아이들이 더 뿌듯해하지 않을까요?

미국 사회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개인주의 풍토가 만연해져 이제는 이기주의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때, 유교의 옛 정신을 받아들여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옛말이 다시 우리나라의 타이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기게 하는 책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어른들이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게 당연하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아이,

어른이 식사를 하시기 전까지 기다릴줄 아는 아이,

올바른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아이..

이러한 아이들도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들이 더욱 노력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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