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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2

8]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 -이원진*

 8]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홍대용의 자전설과 자법어물(資法於物), 라투르의 가이아설과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이원진*

26)

요약문   역사적으로 보면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

다. 갈릴레오 사건에서 보듯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 때 사회 전체 구조가 공격받았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변화를 맞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를 예상치 못한 방식 으로 바꿔놨고 또 한 차례 사회 구조가 전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구에 대한 관계 재설정을 통해 만물의 사 회정치적 질서를 혁신시킨 두 명의 사상가를 검토한다. 바로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 1783)과 지구 용어 대신 가이아 2.0 이론을 내놓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치생태학자인 브루노 라투르(Bru no Latour, 1947~)다. 홍대용은 김석문에게 받아들인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 바탕으로, 당시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 논쟁인 인물성동론(사람과 동물은 본성이 같다)과 성범심동론(성인과 범인은 마음이 같다)을 접합해 천시(天視)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 시로서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홍대용은 체용의 원리가 아닌 분합의 원리로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계열의 존재 구도를 수평적 구도로 전환코자 했다. 체용의 원리는 전체성의 사고를 촉발하지만 분합의 원리는 수평적이며 부분적인 작은 연결을 가능케 한다. 그는「의산문답」에서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는 관윤 자의 말을 인용해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고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의 관점을 제시한다. 사물이나 동물 등의 비인간이 인간의 배경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성을 갖고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는 인간을 천시한다는 서술은 오늘날의 신유물론적 입장에서 본 존재론적 평등론을 선취하고 있다. 이는 향후 동학의 경물(敬物) 사상의 원천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에 영향을 미쳐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 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중국과 이민족이 모두 하나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 화는 당시 시대의 사람과 자연의 연결망을 변혁하는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예측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는 지구의 움직임을 관찰해 얻은 시선과 관점의 ‘차이’의 발견으로 인한 전체성의 해체와 ‘부분’적 연결의 발견 이다. 한편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는 온전한 전체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부분 으로서도 충족적인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요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 로,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향하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인류세를 맞아 방향을 상실한 인류가 새 로운 공간 개념으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

 

*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CZ)’ 공간에서 새로운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의 지구를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생물 수프와 같은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간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 작품화 하는 민감성 높은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공간이다. 그는 이런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 등을 통해 우리 가 새로운 생명을 정의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정치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사상가의 지 구적 관점 전환은 동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 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 (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 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 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 계를 생략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 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 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 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를 보여준다. 이 두 사건의 비교는 인류가 과연 어떤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준다. 

차 례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Ⅲ. 맺음말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인물성동론, 성범심동론, 인물균으로의 이동 -

2021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낯선 흑백 영상이 관객을 맞는다. 을씨 년스런 제주 바람과 파도, 쉬지 않고 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솔숲이 병렬 스크린에 각각 투사된 다. 거기서 우리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며 남긴 ‘세한도’(국 보 제180호)를 만나기 전 그가 느꼈을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 교감을 7분 간 경험한다. ‘세한의 시 간(Winter Time)’이라는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의 작품은 당시 세한도 를 그린 김정희가 느낀 나무와의 연결망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한편 국악그룹 ‘이날치 밴드’는 최근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의뢰로 자신의 수궁가 앨범의 ‘의사줌치’를 개사해 후쿠시마 오염수 137만톤이 바다에 방류된 사실을 알리는 2분짜리 동영상 ‘후쿠시마 의사줌치 feat. 그린피스’를 만들었다. 이날치밴드는 <범내려온다>라는 한국 17세기 판소리 수궁가를 힙하게 개작한 한국관광 공사 홍보영상으로 2020년 전세계 2억뷰를 넘기는 쾌거를 달성한 밴드다. 이 그룹과 합작하는 앰 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무용수들은 후쿠시마 뒷산의 토끼가 돼서 바다와 함께 신음하는 지구 행위 자들의 막춤을 흥과 한의 몸짓에 담아낸다.

현대 문화현상은 이미 인간과 접하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의 재구축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손잡고 공동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다시 소환하는 문화적 원형은 한국의 전통문화다. 세한도가 그렇고, 판소리 수궁가가 그렇다. 한국의 전통에서 어 떤 요소가 특별하길래 21세기 인류세의 시대가 참조하고 있는 걸까. 오늘날 인류학이나 신유물론 전통에서 논해지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에 대한 동등한 연결은 어쩌면 조선에서 논해진 인물성동이 론에서 이미 배태했던 생각이 아닐까. 이렇게 연원을 이어가다 보면 인물성동론을 발전시킨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을 비롯한 북학파가 결국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없앤 인물균, 인물무분의 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판 존재론적 평등론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균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던 홍대용은 어떤 전환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1.  김석문의 지구적 전환과 중국중심주의의 해체 홍대용이 전개한 사상의 핵심은 인물중심주의의 극복인 ‘인물균(人物均) 사상’ 그리고 중화중 심주의의 극복인 ‘화이일야(華夷一也)론’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지전설’과 ‘무 한우주론’이라는 독특한 과학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각각 북학파의 심성론과 정치외교론, 과학론으로 발전된다. 홍대용의 과학, 철학, 사회 사상이 하나의 세계관 내에서 기존의 편협한 중 심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동등성을 일관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홍대용이 낙론계 속에서도 자 유분방하게 학술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의 충격에서 회복되긴 했어도 내적으로는 더욱 심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청 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자리 잡으며 북벌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청나라의 눈부신 문화 발전은 조 선의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또 대내적으로는 상업 발전을 통해 중인층이 크게 성장하 고 있었다. 조선 사회를 주름잡던 화이관(夷狄觀)이나 신분제 등의 기존 틀이 차츰 균열되어간 것 이다. 홍대용의 사상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발전된 천문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 다음 절에서는 홍대용 사상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지구적 전환을 통해 과학의 사회화, 가치도 덕의 자연화가 일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의미가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즉 홍대용을 통해 자연과 사회의 양분법이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그 이전까지 유지하던 성리학적 가치 개념인 性, 理, 本然, 純善 등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만물을 기의 자발적 이합취산을 통해 생겨나는 존재로 말하게 된다. 또 기의 응취로 생겨난 땅을 살아있는 활물로 말 하며 만물을 낳고 천리를 부여하던 천의 역할을 땅으로 옮긴다.2)

이 중에서 먼저 과학지식의 변화를 살펴보자. 홍대용 이전에 지전설을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김 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의 우주론은 김석문이 40세에 작성한 역학도해(易學圖解)에 그 림과 글로 상세히 정리돼 있다. 조선의 역학사에는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역학도설(易學圖

說), 선우협(鮮于浹, 1588∼1653)의 역학도설, 김석문의 역학도해 등 ‘도설(圖說)’ 의 전통이 있다. 그 중 김석문의 역학도해는 역학이 인간사만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포괄 하는 원리임을 도상으로 표상함으로써 역학의 범위와 내용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장 재와 소옹 등을 통해 얻은 전통 우주관에 더해 중국을 통해 수입된 서양 과학, 특히 티코 브라헤T ycho Brahe의 천문학적 지식을 결합하며 독자적인 점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홍대용의 스승이었던 김원행의 또다른 제자인 이재 황윤석(黃胤錫)은 김석문이 ‘지전론(地轉論)’을 전개했 다고 요약한다.3) 또 연암 박지원은 김석문의 우주관이 ‘삼대환부공설(三大丸浮空說)’이 핵심이라 고 강조하는데, 이는 “해·달·지구, 커다란 세 둥근 것이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이다.4)

장재(張載)는 “지구가 틀을 탄다”고 했고, 역지(曆指)에서는 “기(氣)와 화(火)가 하나 의 구(球) 를 이룬다”고 했다. 기화(氣火) 안에 있는 지구가 그것을 타고 있는데, 그것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와 함께 하나의 체(體)를 이룬다. 그러므로 지구 위의 하늘은 밖은 움직이고 안은 고요 하니, 지구가 비록 돈다고 하더라도 구름이 가고 새가 날며 물건을 던지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땅에서 조금만 위일지라도 모두 기가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왼쪽으로 도는 하늘만이 구름이 가고 새가 날고 물건을 던지는 것을 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이것은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는 것 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5)

그가 인식했던 하늘과 땅은 달랐다. 전통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정지해 있다는 ‘천동지정(天動地靜)’, 땅을 중심으로 우주의 외곽으 로 갈수록 점점 더 운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외질중지(外疾中遲)’였으나 그는 전통적 사유를 전 복했다. 대신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로 교체한 이후, 모든 천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한다 는 ‘우선설’, 지구가 1년에 366회 회전한다는 ‘지전설’, 우주는 동정이 없는 가장 외곽의 태극 천으로부터 중심부의 지구로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진다는 ‘외지중질(外遲中疾)’의 우주론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김석문은 서양의 지구설을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재해석해 조선 후기 우주 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홍대용은 분명 천문론과 우주론에서 김석문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전설’

 

2) 곽혜성, 「담헌 홍대용의 탈성리학적 사상의 형성-이기심성론에 따른 물의 담론 변화를 중심으로」, 철학 사상문화29호, 2019, 18쪽.

3) 頤齋集권6, 「書金大谷錫文易學圖解後」 참조. 

4)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1780년(정조 4) 중국 학인들과 대화 중에 김석문의 ‘삼대환부공설’을 소개한 다. 그는 “둥근 땅덩어리가 해‧달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떠 있다는 설은 김석문이 처음이고, 지구가 자전

한다는 설은 홍대용이 처음”이라고 했다.(열하일기, 「太學留館錄」 8월 13일) 5) 역학도해, 「總解」

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다,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논쟁인 인물성동론 을 접합해 천시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시로서 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김석문에게서 이뤄졌던 지구적 전환이 홍대용에게서 와서 정치생태적 전환에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던 역사를 예외없이 예증한 것이다. 인물균 사상의 파급 력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 에 영향을 미치며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화이일야’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 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화는 당시 시대의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함께 추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세종 때부터 추구됐던 조선만의 독자적 시간 에 대한 추구로 인해 중국과 차이나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던 차에, 지구자전설이 입증되 면서 이들 북학파에게 더 이상 전체성이나 통일성, 불변의 중심성 등이 의미없어졌다. 바야흐로 차 이의 존재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위계서열화된 가치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홍대용의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 지구는 스스로 돈다는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 우주 의 끝은 알 수 없다는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 중 앞의 2개 이론은 앞서 김석문도 제시한 것을 응 용한 것이나, 우주무한론은 홍대용만의 독창적인 주장이다. 기존의 이론틀에 매몰되기보다 새로운 관점주의를 펼침으로써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무한 우주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대수학·기하학 등 수학 전반을 정리한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고, 자신의 집에 ‘농수각 (籠水閣)’이라는 실험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해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홍대용의 자신감은 이런 실험실로부터 나온 실제적인 데이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2. 홍대용의 심성론, 정치외교론, 그리고 과학담론 그 중에서도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이 모든 지식들이 소개된 단편 소설로, 하늘의 입장에서 보

면 사람과 사물이 동등하다는 인물균 사상이 특징적으로 잘 소개, 제시돼 있는 대표적 저작이다.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그와 관련된 지구 존재자들의 관계를 뒤바꿔놓는다. 그것은 곧 사회 질 서의 혁명이다. 의산문답에서는 물(物)이 모두 57번 나오는데, 이 중에 인과 물이 합해서가 아니 라 별도로 논해지는 단락이 42번이다. 그만큼 사람으로부터 물이 별도의 존재자로 각광받아 등장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물의 존재론’을 본격화한 사상서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전환은 심성론에서부터 이어진다. 이는 인간과 사물은 구별 없이 모두 같은 성을 갖고 있다는 낙론계열의 ‘인물성동론’의 학풍 변화로부터 시작됐다.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의 호락논쟁(湖洛論爭) 중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관한 담론이었

다. 이 이론은 낙론계의 학자인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박윤원에서 홍대용, 박지원을 거쳐 박제가, 이덕무, 서형수 등으로 계승되는 학풍이다. 그 중에서도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수학했던 홍대 용은 물성에 주목하고, 물성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제시했다. 그는 인물성 담론에서 추 론된 인성과 물성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에 머물지 않고, 중화와 이적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의 준거로도 확장한다. 이 이행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홍대용의 심성론이 드러난 그의 초 기 저작 「심성문(心性問)」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홍대용은 리를 통해 인과 물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낙론의 인물성동론의 입장과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사람은 사람의 이(理)가 있고 물(物)은 물의 이(理)가 있다. 이른바 이(理)란 것은 인(仁)일 따름이다. 천(天)에 있어서는 이(理)라 하고, 물(物)에 있어서는 성(性)이라 한다. 천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고, 물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한다. 그 실은 하나이다. 초목(草木)도 전혀 지 각(知覺)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비와 이슬이 내리고 싹이 틈은 측은(惻隱)의 마음이고, 서리와 눈이 내리고 지엽(枝葉)이 떨어짐은 수오(羞惡)의 마음이다. 인(仁)은 곧 의(義)이고 의(義)는 곧 인(仁)이 다. 이(理)라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호리(毫釐)의 미(微)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요, 천지(天地)의 대 (大)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다. 보탤 수 없이 크고 덜 수 없이 작으니, 그 지극함인저. 초목(草木)의 이(理)는 곧 금수(禽獸)의 이(理)이고, 금수의 이(理)는 곧 사람의 이(理)이고, 사람의 이(理)는 곧 하 늘의 이(理)이니, 이(理)라는 것은 인(仁)과 의(義)일 따름이다. 호랑(虎狼)의 인(仁)과 봉의(蜂蟻)의 의(義)는 그 나타나는 곳에 따라 말함이다. 그 성(性)으로 말하면 호랑(虎狼)이 어찌 인에만 그치며, 봉의(蜂蟻)가 어찌 의에만 그치랴? 호랑(虎狼)의 부자(父子)는 인이고 이 인(仁)을 행하는 소이(所以) 는 의(義)이며, 봉의(蜂蟻)의 군신(君臣)은 의이고 이의를 발(發)하는 소이는 인이다.7)

하지만 바로 이후 저작인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 가면 홍대용의 물에 대한 논의는 「심성문(心性問)」과 사뭇 달라진다. 성에 대한 논의를 심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성인이나 범인의 마 음이 모두가 똑같다는 ‘성범심동설(聖凡心同說)’을 물에까지 연장시키고 있다. 특히 심의 영함에 있어서 물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범심론(汎心論)적 특성까지 보이고 있다. 

사람과 물의 마음이 그 과연 같지 않은가? 또 심(心)이란 것은 신명(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는 물로

 

7) “人有人之理 物有物之理 所謂理者 仁而已矣 在天曰理 在物曰性 在天曰元亨利貞 在物曰仁義禮智 其實一也 草木不可謂全無知覺 雨露旣零 萌芽發生者 惻隱之心也 霜雪旣降 枝葉搖落者 羞惡之心也 仁卽義義卽仁理也者 一而已矣 毫釐之微 只此仁義也 天地之大 只此仁義也 大而不加 小而不减 至矣乎 草木之理 卽禽獸之理 禽獸之理 卽人之理 人之理 卽天之理 理也者 仁與義而已矣 虎狼之仁 蜂蟻之義 從其發見處言也 言其性 則虎狼豈止於仁 蜂蟻豈止於義乎 虎狼之父子仁也 而所以行此仁者義也 蜂蟻之君臣義也 而所以發此義者仁也.”, 湛軒書 內集 1卷, 「心性問」

서 형상(形狀)도 없고 성취(聲臭)도 없다. 같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떨어지고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완전하고 어떻게 이즈러지는 것인가? 한 번 같지 않음이 있으면 이 마음이 기를 따라 체를 변(變)하니 영(靈)함이 일정한 근거가 없다. 일정한 근거가 없으면 지자(智者)는 우자(愚者)에 대해 서, 현자(賢者)는 불초자(不肖者)에 대해서 모두 같지 않을지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러므로 이르되 우(愚)는 기(氣)에 국한되고 물(物)은 질(質)에 국한되나 심(心)의 영함은 한가지라 한다. 기(氣)는 변 할 수 있어도 질(質)은 변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람과 물(物)의 다름이다.8)

홍대용은 여기서 물의 영함이 사람과 같은 것을 넘어 더 뛰어날 때가 있음을 오히려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홍대용의 사상은 물(物)에 대해 기존의 낙론과는 다른 접근으로 나아가기 시 작한다. 

이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일이 있되, 범[虎]은 반드시 자식을 사랑하고, 사람은 충성치 않는 일이 있지만 벌[蜂]은 반드시 임금을 공경하고, 사람은 음란함이 있되, 비둘기는 반드시 남녀간 분별이 있으며, 사람은 무턱대고 하는 일이 있되, 기러기는 반드시 때를 기다린다. 기린의 인(仁)함과 거북 의 영(靈)함과 나무의 연리(連理)와 풀의 야합(夜合)함이 비 오면 기뻐하고 서리 오면 시드니, 이 모 두 그 마음이 영(靈)한 것인가, 영하지 않은 것인가? 영하지 않다면 모르겠으나, 영하다 하면 사람에 비하여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혹 더 뛰어나다.9)

사물의 가치에 대한 존중은 향후 홍대용이 북경의 연행 경험 이후 집필한 의산문답에서 인간 이 자신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물로부터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이라는 관점으로 확장된 다. 인물성동론을 넘어, 물(物)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상호부조적이며 오히려 인간보다 낫기에 인 간이 차마 두려워하게 되는(경외하는) 측면을 보다 과감하게 말하게 된 것이다. 홍대용의 이런 관 점은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聖人師萬物)’는 관윤자에서 인용한 것10)이지만 그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신유물론자인 로지 브라이도티가 하고 있는 기존의 동물과 인간간의 경계인 조에(zoe)와 비오스(bios)의 경계를 타파하 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홍대용이 허자(虛者)라는 화자를 통해 검토했던 인물간의 경계는 비 오스를 넘어 조에의 생명력을 논하려는 브라이도티의 의견을 먼저 선취한 것이다. 

홍대용의 물론의 특징 중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과 물의 상호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성은 홍대용이 사람과 사물의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대한 검토를 거쳐 ‘인물균’에 이르

 

8)“人物之心 其果不同乎 且心者 神明不測之物也 無形狀無聲臭 雖欲不同 何離何合何完何缺 一有不同 是心逐氣變體 靈無定本 旣無定本 則智之於愚 賢之於不肖 皆不同也 此豈理也歟 故曰 愚局於氣 物局於質 心之靈則一也 氣可變而質不可變 此人物之殊也.”, 湛軒書 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9)“今夫人有不慈而虎必愛子 人有不忠而蜂必敬君 人有淫奔而鳩必有別 人有冥行而鴈必候時 麟之仁也 龜之靈也 樹之連理 草之夜合 雨而喜 霜而憔悴 此其心靈乎不靈乎 謂之不靈則已 謂之靈則方之於人 非惟不異而或過之.”, 湛軒書 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10)“關尹子曰, ”聖人師蜂立君臣, 師蜘蛛立網罟, 師拱鼠制禮, 師戰蟻置兵, 衆人師賢人, 賢人師聖人, 聖人師萬

物. 惟聖人同物, 所以無我.”,  關尹子, 「三極」

는 과정에서 인물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인물무분(人物無分)의 상태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발상이 었다. 상호성은 연결망을 뜻한다. 인과 물이 연결된 관계요, 서로 배워서 (침투하여) 생래적 결여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의산문답은 ‘인물무분’이라는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후 에 박지원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구별할 수 없다는 인물막변(人物莫辯)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물성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실옹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을 ‘하늘의 시점’이라고 했다. 하늘의 시점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을 주장할 때 각기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이 인물무분의 중요한 두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점이라 함은 기 존의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관점을 총괄하고 새로운 관점 차이를 도입하는 브라이도티식 조 에중심주의다.  

실옹이 고개를 들어 웃고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이구나 . 오륜과 오사는 사람의 예의고, 무리 지어 다니면서 나누어 먹는 것은 짐승의 예의고 , 덤불로 피어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다. 사람의 시점에서 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물은 천하지만 물의 시점에서 사람을 보면 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고 , 하늘의 시점에서 보면 인과 물이 균등하다.11)

지혜가 없으므로 오히려 속이지 않고, 깨달음이 없으니 오히려 꾸미지 않는다. 그러니 물이 사람보 다 귀한 것이다.…봉황은 천 길을 날고 용은 하늘에 있으며, 시초와 기장은 귀신과 통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재목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무리와 비교하면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한가? …대도를 해치는 것으로 자랑하는 마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 하게 여기는 이유는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 때문이다.12)

그래서 옛사람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지[資法於物] 않은 적이 없었다. 군신 간의 의식은 벌에서 취하고 , 전쟁할 때의 진법 은 개미에게서 취하 고 예절의 제도는 들다람쥐에게서 취하고 그물의 설치는 거미에게서 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고 한다 . 지금 당신은 어찌 하늘의 시점으로 물을 보지 않고 사 람의 시점으로 물을 보는가?”13)

홍대용의‘자법어물(資法於物)’과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聖人師萬物)’란 논의는 만물의 우 위성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특히 지구 생명의 입장을 서로 돕는 공생의 입장으로 봤다 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수직적, 위계적으로 변질됐던 성리학적 체용의 구조를 분합의 구조로 바 꿔 수평적 인식전환을 시도했다는 의미도 있다. 인현정은 여기서 홍대용이 적용하고 있는 ‘분합 (分合)’의 원리를 주목한다. “홍대용은 체용 구도가 아니라 분합의 구도로 전환했다”고 말하면 서다.14) 그는 홍대용의 분합구조는 리기에 대한 새로운 재편을 낳는다고 보고 있다. 애초 송대 신

 

11) “實翁仰首而笑曰, ‘爾誠人也.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 義也. 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12) “夫無慧故無詐, 無覺故無爲. 然則物貴於人, 亦遠矣.”, “且鳳翔千仞, 龍飛在天, 蓍鬯通神, 松栢需材. 比之人類, 何貴何賤?”“夫大道之害, 莫甚於矜心. 人之所以貴人而賤物, 矜心之本也.”

13)“是以古人之澤民御世, 未嘗不資法於物. 君臣之儀, 盖取諸蜂. 兵陣之法, 盖取諸蟻. 禮節之制, 盖取諸 拱鼠. 網罟之設, 盖取諸蜘蛛. 故曰, ‘聖人師萬物.’ 今爾曷不以天視物, 而猶以人視物也.”

유학자들이 요청한 체용구도는 사실상 리와 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였으나, 언어적 한계에 부딪 힌다. 예컨대 기존의 체용(體用)구조 속에서는 인의예지 중 ‘체’ 해당하는 인의 기준이 선재(先在)되어 ‘인’은 용(用)의 세계에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도체(道體)가 된다. 하지만 분합 구조 엔 그런 선후와 위계성이 없다. 체용이 수직구도에 결부됐다면 분합구조는 훨씬 더 수평구조 속에 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인현정은 홍대용이 四書問辯가운데 「中庸問議」에서 중용12·1 3장에 대한 설명한 대목을 제시한다.

생각건대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은’하다”라는 말에서 ‘은’은 ‘좁은 것[微]’와 ‘작은 것[小]’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의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천지에 대한 유감스러운 바’는 費다”라는 말에서 ‘비’는 ‘넓은 것[廣]’과 ‘큰 것[大]’을 의미한다 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큰 것을 말한다’와 ‘작은 것을 말한다’는 비·은의 뜻을 다시금 해석 하는 까닭이 됩니다. 대개 합해서 말하는 것은 넓고 또 크게 되어 ‘비’라고 말합니다. 나눠서 말 하는 것은 좁고 또 작게 되어 ‘은’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차이는 나누고 합하는 ‘분합(分合)’에 있지 ‘체용(體用)’에 있지 않습니다. 15)

인현정은 이 분합의 구도가 홍대용의 인물성동론과 논리적으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는 분석한 다. 18세기는 기존의 체용관으로 담아내기엔 용(用)의 세계, 상(象)의 세계 너무 확장됐기에 홍대용 은 새로운 분합의 수평적 틀로 물(物)을 통한 치지 영역을 넓히려고 했다. 의복과 음식, 혼천의와 악기 등 인간의 개별 사물들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기존 질서의 해체는 과학적 세계관의 발전 을 견인한다. 실제 홍대용은 향후 북학파와 백과전서의 학파에도 영향을 미치며 향후 미술 화풍에 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16) 또 과학지식의 발달은 전체적으로 중인층의 성장을 가져온다. 이는 후기 조선사회에서 문학, 미술 등의 예술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창협이 금강산 봉우리를 보고 쓴 시는 하나하나 춤추며 날아갈 듯하다던지, 구름에서 나와 치달린다고 하는 등, 사물을 인간의 위치 와 대등하게 바라보고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물리(物理) 파악의 관물론적(觀物論的) 시도 다. 그 절정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인데, 이 그림의 금강산은 정선 개인의 한정된 체험적 시각 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새가 날아 보듯 다시점으로 형성된 회화적 진경의 공간을 구성해낸 것이

다. 또 박지원의 호질 등에 동물 우화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여러 가지 기담에서 나오는 핍박받던 기이한 존재의 향연을 부활시킨다. 홍대용의 인물균 사상 또한 지구에 대한 지식의 결과물로 생긴 결과다. 즉 지구가 돌고 돌며, 관점이 바뀌어 천시(하늘)의 관점에 이르면, 그것은 지구는 만물에 동등한 위치와 연결망을 부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람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에 이르려는 노력, 사물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현식은 이런 홍대용의 화법을 

 

14) 인현정, 「홍대용의 정치철학과 물학(物學)의 관계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17.

15) “妄意可知可能者隱也, 隱者, 微也小也. 聖人之不知不能與天地之所憾者費也, 費者廣也大也. 所謂語大語小者, 所以重釋費隱之義, 其曰造端乎夫婦者, 隱也, 其曰察乎天地者, 費也. 所以申言君子之道而結章首費隱二字之義也. 盖合而言, 其廣且大則曰費也. 分而言, 其微且小則曰隱也. 其言之異, 在於分合而不在於體用也.”,  湛軒書 四書問辯, 中庸問疑. 

16) 이현경, 「정선 <금강전도>의 구도와 시점에 대한 역사ㆍ사회적 고찰」, 예술학, 2:2, 2006.

“허자는 위계적 관계 인식을 표상하고 실옹은 영향 관계적 인식을 표상한다.”고 설명한다. )   당시 18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인물성동이론’과 ‘성범인심동이(聖凡人心同異)’ 논쟁이 함께 

진행됐다. 이 중 홍대용은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설을 주장했기에, 성인론이 만들어내는 수직적 질 서를 동론과 공존시키려 했다면 왕으로부터 하층민까지, 청나라나 명나라나 모두 동일한 ‘사람’ 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체용일원’이란 개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체용개념만을 위계적이고 도식적으로 적용했다는 모순에 물들어있어 이를 쇄신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홍대 용은 체용이 아닌 ‘분합’ 구도를 적용해 관습적 체용 구도의 부조리한 적용을 비판하고, 확장되 고 변화된 현실을 드러내려 했다. 

인물무분은 인과 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의산 문답에서 허자는 끊임없이 인과 물의 관계를 분리된 관계요, 배타적 관계라고 믿지만, 실옹은 인 과 물의 관계를 연결된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요, 보완적 관계라고 믿는다. 이 관점은 인과 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차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허자는 물의 결여만 이야기했지만 실옹은 물 의 결여만이 아니라 인간의 결여도 이야기했다. 허자는 인간우월성을 말했지만 실옹은 인과 물 모 두 우월하다고 말했다. 실옹은 인과 물이 서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공생 관계라고 지적 한다. 서로 다툰며 경쟁하고 배운다는 뜻이다. 인과 물의 대등성은 하늘에서 보는 구조적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런 구조적 관점은 인물론을 넘어 자연론, 역사 담론, 현실 담론까지 이어진다. 각 담론은 병렬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물성 담론이 청나라 담론을 위한 복선이기도 하

다. 실옹이 인물성 담론을 전개하면서 이런 개념을 추론하고 그것을 각 담론에 적용시키려고 한 의도가 있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자가 화들짝 크게 깨닫고, 또 절하고 나와 말했다. “인과 물은 구분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 었으니, 인과 물의 탄생의 뿌리에 대해서 묻고 싶다.” 실옹이 말했다. “좋구나, 질문이여! 그렇지 만 인과 물의 탄생은 자연에 근원한 것이니, 내가 먼저 자연의 실정을 말하겠다.”… 허자가 말했

다. “자연의 형상과 정황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으니, 마지막으로 인과 물의 근원, 고금의 변화, 중화와 이적의 구분에 대해서 듣고 싶다.”

이 부분은 인물론 단락과 자연론 단락의 연결 부분이다. 허자는 인과 물의 구분이 없는 관계라

는 것을 깨우치고 난 후 인과 물의 생명 기원에 관해 배우기를 요청하고 실옹이 이에 동의한다. 이것은 두 담론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하려는 실옹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론 단락 과 역사 현실 단락의 연결 부분에서도 역사담론과 현실 담론 역시 동일한 대도로 설명하려는 의도 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홍대용은 구조적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천을 리나 태극이 아닌 ‘자연천(自然天)’의 의

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게 천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가치가 아닌 사실의 관점에서 인과 물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이 천은 그가 농수각이라는 실험실에서 직접 관찰하며 얻어낸 과학적 천이다. 의산문답은 이렇게 기존의 도덕, 가치 중심으로 인과 물을 통합해서 보던 전체론적 사고를 벗어나 인과 물의 사실적 차이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홍대용은 여기서 인과 물을 무조건 합일적 관점에서 보던 보편원리를 약화시킨다. 인간중심적 가치를 물에 투사하는 시선 자 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성문(心性問)」에서나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서 여 전히 동물의 영함이나 동물의 인간보다 뛰어남을 논하면서 성리학에서 규정하는 예의 즉 인간중심 적 가치의 틀 안에서 머물렀던 것에 비해 의산문답이 일진보한 측면이다.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그림1> 지구(우라노스)를 짊어진 

아틀라스  

<그림2> 어린 예수를 업은 St.Christopher  

<그림3> Master of Messkirke in

 Basel의 St.Christopher

1.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 라투르의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 합성과 재구축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

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인류세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온전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Science)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해보자고 권한다. 2010년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지구에 대한 대안적 어휘 설 정은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기존의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로 전환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지구의 접두어를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바꾸는 전환이다. 그는 지구를 geo-라는 객관적 땅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간지러워하고 인간 세계에 침입해 복수 하는 gaia-로 형상화하는 게 인류세를 맞은 인류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설명한다. 또 globe는 멀 리서 태연하고 초월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어감이 느껴지는 반면, terrestrial는 천상계의 초 월로부터 단절된 떠나올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삶의 조건이자 터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단일한 전체성을 지닌 ‘유니버스(universe)’에서 여러 코스모스 들의 정치적 경쟁, 즉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렇게 브루노 라투르는 끊임없이 지구를 다른 관점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그가 지구 대신 제시

하는 가이아 이론은 특히 엄마와 같이 보살펴주는 여신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침입하고, 매우 거친 자연이다. 또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이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 다. 

라투르는 2011년 런던의 프랑스 인스티튜트 강연 ‘가이아를 기다리며. 예술과 정치를 통해서 공동 세계를 합성하기’ )에서 이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의 대표적인 도구를 예술과 정치의 도구와 연결함으로써 생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시도한다. 19세기까지 인간 은 숭고한 ‘자연’의 장관에 무력하고, 압도당하며, 전적으로 지배당하는 느낌을 가져왔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자연(나이아가라 폭포, 남극의 얼음)이 동일하게 영속하지 못함을 느낀

다. 칸트가 말한 우리 안의 도덕 법칙에 대한 숙고와 우리 밖의 자연의 무고한 힘들에 대한 숙고 사이의 오랜 균형은 이제 뒤집어지고 있다. 라투르의 과학사회학(STS) )와 행위자 연결망 이론(AN T)는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이론화 작업이다. 지구 분과학문들, 장비, 매개자, 과학적 연결망들이 확대되면서 이제 지구는 구체(globe) 즉 공 모양이 아니라, 데이터 점들이 수집되고 모형수립자들 에게 다시 전송되는 기지들과 믿음직하게 안전한 연결망들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척도 모형(scal e model) 즉 여태까지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며, 복잡한 조립체들 가운데 하나인 태피스트리가 된 다. 이 태피스트리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서 이 안으로 매듭과 노드를 엮어내며 조정, 모형화, 재해 석할 수 있고, 그래서 이 태피스트리는 놀랍도록 강하다. 인류세의 역사에서 이런 느린 태피스트리 엮기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기후과학자도 이제 지구를 직접 측정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가 능한 대안은 아주 작은 실험실 현장의 국소적 모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작업을 표준화하고 조정 하는 것뿐이다. 이제 한쪽편에서 지구에 대한 전지구적으로 완전하고 전체적인 시야로부터 득을 보는 과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제한된 국소적인" 시야를 가진 가련한 보통시민들이 있는 시대 는 지났다. 오로지 부분적인 시야들이 있을 뿐이다. 생태적으로 고무된 활동가가 충분히 전지구적 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명목 아래 시민에게 창피를 주려는 노력은 쓸모없다. 이제 아무도 지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고 아무도 초월적인 견지에서 생태계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자, 시민, 농 부, 생태학자, 지렁이가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 즉 지구는 관찰자가 사물들 "전체"를 보기 위해 이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관점에서 포괄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함께 합성 되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자들의 조립체이다. 

현재 인류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에게 이런 조립 작업이 특히 필수적이다. 모든 조립 체에는 중간 매개자들이 필요한데 위성, 센서, 수학 공식, 그리고 기후 모형은 물론 국민국가, 비정 부 기구, 의식, 도덕, 책임감도 포함돼야 한다. 이런 조립체는 "과학적 논쟁들의 지도 그리기"라 부 르는 여러 행위자의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라투르는 합성(composition)이란 개념을 쓴다. 과 학 논쟁은 회피할 게 아니라 매 행위자마다 합성돼야 하며 예를 들어, 대기 난류의 역할, 그 다음 구름 역할, 다음 농업 역할, 다음 플랑크톤 역할 등이 연쇄하며 기후를 모형화하면서 매번 참된 지 구 극장을 만들어간다. 여기서 사실과 의견은 이미 뒤섞여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뒤섞일 것이 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정치 세계를 분리시키는 게 아니라 뒤얽힌 우주론들의 상 대적인 무게를 새로운 도량형 코스모그램(cosmogram)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이제 논쟁적이고 과학 적인 여러 우주들을 서로 비교하고 겨루게 하자. 그게 정치다. 

라투르는 이런 식의 용어와 인식 전환을 통해 인류세를 맞이한 지구가 서서히 기존의 역사적 지 구에서 공간 중심의 지구로 이동해야 함을 말한다. 이런 전환의 일환으로 라투르는 인류가 코로나 를 맞은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CZ)’이라는 국소 공간을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의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작품화하는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를 하는 공간이다. 사고 전시는 ‘사고 실험(thoug ht experiment)’에 대비되는 말이다. 사고 실험이 사물의 실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시 나리오가 어떻게 동작할지 생각하는 선험적 방법이라면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는 관찰이 나 실험이라는 경험적 방법을 통한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으로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생명 을 기술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담는다. 이 공간에서는 예술가들과 과 학자들 사회학자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또 학제 간 협동을 통해 임계영역에 대한 합동 탐구를 진행한다. 생태적 다양성이 깨진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임계영역에서 빨리 발 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기민함을 통해 인류세의 대처능력을 높일 수 있다. 어차피 지구 전체 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전부 파악하는 과학자는 이제 불가능함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브루노 라투르는 여러 강연과 저작에서 자신의 지구 철학을 설파하는 데 있어서 종종 독일 철학 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구체 이론을 극찬한다. 특히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디자인 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에 매료됐다고 강조한다. 라투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피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이론은 지구에 대한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 그가 구체 (Globe)의 시대로 말한 17~20세기 말까지 ‘유니버스(universe)’라 불리는 모든 요소 사이에는 연 속성과 통일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이 시점을 기해 ‘한정된 코스모스’(restricted cosmos)에서 ‘무한한 유니버스’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인간 밖 모든 것 즉 땅, 공기, 달, 행성들, 은하수, 그리 고 빅뱅에까지 모든 것이 동일한 물질적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또는 "갈릴레 오적" 혁명은 그렇게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슬로터 다이크는 유니버스가 아니라 멀티-코스모스, 코스모폴리틱스, 즉 버블 또는 거품으로서의 지구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단 하나의 천상의 지구라는 유니버스는 이제 없으며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으 로 자기의 조그만 거품으로서의 지구에 머물고 있다. ) 슬로터다이크는 세계가 이런 관점에서 세 가지 세계화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묘사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 우주론에 의해 촉발된 형이상학적 인 변화로 이 세계는 미시구체(microsphere)다. 두 번째는 16세기의 세계적인 항해 탐사로 시작된 국제적인 것으로 이 세계는 거시구체(macrosphere)다.  이 시기가 유니버스의 시대다. 세 번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지방적인 ‘거품’인데, 이 세계는 다구체(plural spheres)이다. 거품처럼 여 러 개의 구체가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협력한다. 

여기서 거품은 브루노 라투르의 ‘임계영역’과도 비슷한 이미지로 상상된다. 거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구의 국소적인 매우 얇은 막 또는 스킨인데 그 위에서 공생이 이뤄지고 있는 지대다. 생물권은 바로 여기서 형성되고 그래서 인간은 단지 이 지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깊숙이 함께 얽혀들어 있다. 라투르는 이곳의 과학실험이 사고실험이 아니라 사고전시(실험이 과학자들만 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면 전시는 예술과 정치, 과학과의 융합을 떠올리게 한다)라며 모든 학제간 연 구자들이 함께 모여 결과를 전시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이아 안에서의 행위자 네트워크의 현장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라투르는 그래서 자신의 역사성은 공간성으로 흡수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철학은 공간철학 (가이아정치학, Gaiapolitics)이라는 더 이상한 형태가 동반된 지리정치학)의 특이한 형태로 흡수되고 있다” )는 게 라투르의 진단이다.  

이제 로봇과 소수 사이보그 우주인들은 공상과학영화처럼 저 너머로 갈 수 있지만, 나머지 인류 는 "부패와 타락의 소굴", 또는 위험과 원치 않는 결과들로 가득 찬 곳이 된 옛날 코스모스에 여 전히 묶여있다. 이제 우리는 지상계에서 넘어갈 수도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우리가 초월 적 관점(View from Nowhere)을 취하지 않고서는 지상계에 숭고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유니버스에서 코스모스로 이동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연속성과 통일성이 없어진 더 이상 자연의 숭고가 불가능해진 지상계로서의 우주다. 여기서의 우주론은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말한대로 더 이 상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거품들의 정치다. 이사벨 스텐저스는 이를 코스모폴리틱스이라고 말한다. 이런 코스모스로의 이동을 라투르는 “우리는 탈근대적(postmodern)한 게 아니라 탈자연적(postnat ural)이다”고 말한다. 라투르는 그간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기에 탈근대적이 라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새로운 코스모폴리텍 시대에 가이아는 더 이상 자연과 비슷하지 않다. 가이아는 인간의 곤경에 무심하다. 가이아는 어머니 자연이나 여신처럼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가이아는 인간의 행위에 민감하지만 우리의 복지를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가이아는 우리를 제거해 박살내 고 소멸시키며 ‘복수’한다. 가이아는 자연의 수호자 역할을 하기엔 너무 연약하며, 어머니라기엔 우리의 운명에 너무 무관심하고, 여신이라기엔 거래와 희생으로 달랠 수 없는 너무 까다로운 캐릭 터다. 가이아는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모성의 대지가 아니다. 

 

<그림4>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홈트리나무(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의 등장나무) 

위의 사진은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2009)에서 나비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홈트리 나무는 '영혼의 나무'이며, 판도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연결하는 여신,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나무다. 에이와는 나비족 언어로 '모든 이를 안는다'라는 뜻이다. 나비족의 정신적 계보는 모계신화 를 바탕으로 어머니 자연(nature mother)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여신 에이와는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일체(통일성)를 유지하며 주인공 네이티리의 어머니 차히크는 나비족을 위해 에이와 여신의 신명을 받는 무당이자 여제사장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가이아 2.0은 이와는 반대다. 라투르에 의하면 가이아는 우연적인 양과 음의 사이 버네틱한 고리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런 고리들이 항상 훨씬 더 얽혀 있는 복잡한 양과 음의 새로 운 고리들을 위한 조건들을 조장하는,  전적으로 돌발적인 결과를 차례로 낳는 일은 그냥 일어난

다. 어떤 목적도, 어떤 섭리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관해서 걱정할 필요는 말은 아니다. 곤경에 빠진 자는 실은 가이아가 아니라 우리다. 인류세라는 수수께끼는 희한한 뫼비우스 의 띠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그녀를 위협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녀를 포괄하고 있는 듯 보이 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녀 밖으로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에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를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가이아가 흥미로운 건 여기에 통일성이 전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유니버스(최소한 지상계 부분)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이제 인류가 하나의 통일된 행위주체가 아닌 것처럼 가이아도 하나의 연속적 행위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가이 아도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서로간의 대칭은 완벽하다. 라투르는 “우리 속의 가이아 또는 가이아 속의 우리, 즉 이런 기묘한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씩 합성되는 일만 남았다.” 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는 것(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등)들을 구분하려고 노 력하는 대신, 이런 핵심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자. 당신이 조립하고 있는 것은 어떤 세계인가? 여러 분은 어떤 존재자들과 함께 살기를 제안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거대 석유회사, 담배 제조업체, 반 낙태주의자들, 창조론자들, 공화당원들, 그리고 소수의 인간과 소수의 자연물로 이뤄진 노드 사이 의 연결은 부엽토(humus), 인도적인(humane), 인간성 또는 인문학(humanities) 사이를 연결하는 것 만큼 흥미롭다. 지구인들은 죽어서 되돌아갈 흙과 먼지(부엽토)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인문학’도 이제는 지구과학이 돼야 한다. 라투르는 이런 기조에서 2010년부터 과학적, 정치적, 예술적 표상이 라는 삼중의 작업으로 전문적인 예술가, 과학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시앙스포 주관으로 "정치 예술 (political arts)"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해왔고 2020년부터는 그 훈련을 임계영역에서 국소적 지구로서 ‘사고 전시’하는 중이다. 

현재 우리가 가이아의 어깨—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어깨—에 매우 무거운 짐을 서로 올려 놓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거래를 할 만하다. 가이아와 우리의 운명은 매우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코 스모스에 파묻어 들어가 있는 아기 그리스도를 짊어지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의 아이콘<그림3>이 딱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라투르는 성 크리스토퍼의 그림은 과도한 짐을 짊어진 아틀라스<그림 1>보다 인류에게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서 크로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를 메고 가다"는 뜻이다. 크로스토퍼

는 여행자의 수호성인이다. <그림2>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리던 크리스토퍼는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고 선언한 이교도 거인이었다. 어느날 조그만 어린이를 메고 강을 건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며 건널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고 중얼거리자, 그 어린이가 말했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 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술 그리스도다". 

 가이아는 전 세계인 아기 예수며, 우리는 그 가이아를 어깨에 멘 크로스토퍼다. 그림에서 보면 

크리스토퍼와 예수는 지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뫼비우스처럼 얽혀있다. 크리스토퍼는 예수의 어깨 에 예수는 크리스토퍼의 어깨에 서로 기대고 있듯, 우리는 가이아의 어깨에, 가이아는 우리의 어깨 에 지운 짐을 통해 서로의 운명이 연결돼 있다. 

2. 브루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2.0’ 세계는 코로나로 모든 것이 무너진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기후변화와 바이러스의 출현 모두 인 간 활동에 따른 결과지만 폐쇄 앞에서 ‘글로벌’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팬데믹 속에 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미터법 도량형을 따르는 공간, 즉 실체 가 위치하는 곳이 아니라 갈등과 법, 기술 등의 총체적 요소가 벡터화된 곳이다.

라투르는 2017년 강연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Why Gaia is not a God of Totalit y)’에서 “만일 당신이 무관심한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지오’라면, 경계에서 일어 나는 굉음의 부딪힘을 목격하며 그 안에 있는 상황을 ‘가이아’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3) 이는다운 투 어스(2017)에서 또 다른 표현으로 중복돼서 설명하기도 한다. ‘지구(the Glob e)’는 외부자의 시선 즉 인간 문제에 무관심할 정도로 멀리서 사물을 파악하지만, ‘대지(The Ter restrial)’는 같은 사물을 가까이서, 인간의 매사에 매우 내밀하고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면서 관 찰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영향을 회복하고, 재방향설정하는 데 필수적인 메타포이자 민감성인 

‘알고자 하는 욕망(libido sciendi)’이다.”(14장) 여기서도 전체가 아닌 ‘부분’이 강조된다. ‘부 분’에 대한 논의는 메릴린 스트래선의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는 부분하면 바로 ‘전체’를 떠올리는 ‘메레오그래피mereography’란 개념 대신 생물학 용어인 ‘부분할部分割’ 즉  ‘메로 그래피merography’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서, 그것으로서 전체로 회수되지 않는 부분을 논한 다. 스트래선 역시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문제시하고, 세계에 대한 앎을 완 결적으로 닫는 게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행위를 중시한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 다.24)

 라투르의 ‘대지(The Terrestrial)’는 단지 인간이 거주하는 환경이나 배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 지구가 안정적일 때 사람들은 영토를 소유가능하다고 생각 하고 땅 위에서 자신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영토 자체가 인간과 맞서고, 인간 생활에 관여한다. 라투르는 생태학이 ‘대지’를 엄밀히 정의내리지 못한 결과, 19세기 이후의 사 회 투쟁에서 발생한 변화의 정치적 동력을 생태로까지 끌어내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이런 라투르 의 대지 이론은 신유물론자 로지 브라이도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 휴먼에서 대지로서의 정치적 행위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주체(subject)를 인간과 우 리의 유전자적 이웃인 동물과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횡단체(a transversal entity)로 시각화(형상화) 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차크라바르티와 나는 지구중심적 관점(g

 

23)“오늘날 러브룩이 말한대로, 가이아는 복수를 한다. 그의 ‘복수하는-가이아(Gaia-The-Vengeful)’란 구절 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마굴리스가 말한다. “생명은 행성 수준의 현상이며, 지구는 적어도 30억년동 안 살아왔다. 내가 볼 때 인간이 살아있는 지구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능 력은 없으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우리를 돌보는 것이 다. 혼란에 빠진 지구를 올바로 이끌라거나 병든 지구를 치유하라는 우리의 주제넘은 도덕적 명령일 뿐이

다. 우리는 오히려 자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202-203쪽) 그리니 처음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를 스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가이아를 전체성의 신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신 또는 다른 전체성, 다른 구성물, 차라리 다른 ‘가이아-‘퇴비(compost)’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복합적인 비선형적 커플링은 부분적으로만 일관된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론적이지 않은 연결만을 추구하고 있 다. (라투르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

24) 차은정,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메릴린 스트래선”, 《경향신 문》, 2019년 9월 24일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2401031612000001.

eo-centred perspectives), 생물학적 행위자에서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s)로의 인간의 위치 변화가 주체성과 공동체 개념 모두에서 재구성을 요청한다고 결론짓는다.”25)

그녀는 이를 통해 ‘지구-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결국 포스트휴먼-되기는 공유된, 세계 영토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연계 의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그 공간은 도시적 공간, 사회적, 정신적, 생태적, 지구행성적 공간일수도 있다. 포스트휴 먼 이론에서 주체는 비인간(동물, 식물, 바이러스) 관계들의 관계망에 완전히 잠겨있고, 내재돼 있 는 횡단적 존재다. 자아는 사실 공통의 생활공간 안에 있는 이동 가능한 배치이며, 주체가 결코 장 악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하고(never masters nor possesses) 단지 늘 하나의 공동체, 묶음, 집단, 무리 로 거주하고 횡단만 하는(merely inhabits, crosses) 것이다. 

생기론의 이 비본질적 유형은 합리적 의식의 오만한 기세를 꺾는다. 합리적 의식은 수직적 초월 행 위기는커녕 급진적 내재성에 접지하는 운동으로 재설정되고 하강한다. 의식은 자아를 세상으로 펼 치는 행위면서 세상을 안으로 접어들이는 행위다. 의식이 사실은 자신의 환경과 관계맺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인지 양태라면 어쩔 것인가?

의식이 이 생명, 이 조에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우리를 움직이는 비인격적 힘에 대한 처 방전을 끝까지 찾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포스트휴먼 사유는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세계도 아니고 의인화된(anthropomorphic) 세계도 아니며 지정학적(geo-political)이고 생태지혜적 (ecosophical)이며 조에중심적(zoe-centred) 세계 안에서 우리가 몸담는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줄 방법이다. 

브라이도티나 라투르의 이론은 기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행위가 

아니라 급진적 내재성으로 접지하고 안으로 접어드는 행동이다. 그래서 라투르의 지구 안 임계영 역의 실험은 의미있다. 브라이도티는 심층생태학을 주창하는 아르네 네스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 아 가설에 대해 그것이 총체성을 되살리고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신성한 유기체로 보는 개념으로 복 귀하는 이론이라며 거부한다. 그녀 생각에 네스와 러브록의 전체론적 접근과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구성주의적 이원론은 문제적인데, 이들은 지구를 산업화에, 자연을 문화에, 환경을 사회 에 대립시킨 후 자연 질서의 편을 들기 때문에 소비주의와 기술관료적 이성과 기술문화를 과도하 게 고발한다. 그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이분법, 즉 자연과 인공(기성품) 사이의 범주적 분리를 재기입하기 때문이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디자인이 없었던 초기 시절에 제임스 러브룩과 린 마굴리스이 처음으로 

제시한 가이아 가설(1979)은 그간 지구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촉발시켜왔지만 브라이도티가 본 이 들의 이론은 한계를 갖는다. 대신 그녀는 “지구와 지구 타자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브라이도 티, 변신, 491쪽)시키며 포스트휴먼 즉 ‘지구-되기'에 대한 들뢰즈적 요청을 재확인한다. 인간중 심주의적 습관의 결과가 지구를 전지구적 환경 위기로 몰고 가버린 현재 인류세의 시대에, 브라이 도티는 주체성이라는 관념을 인간, 비인간 그리고 지구 전체를 포함하는 횡단적 존재자로서 다시 

 

25)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108쪽.

표현하기를 제안한다. 지구를 횡단하는 모든 존재는 모든 종에 공통적인 비인간적 생성력과 활력 으로 간주되는 ‘조에(zoe)’의 생명체다.26) 브라이도티는 지구행성적 관점으로의 탈-인간중심주의적 선회는 ‘인간’의 동물-되기와는 전혀 

다른 규모의 개념적 지진이라며 지구를 중심에 두는 주체는 어떤 모습일까를 묻는다. 

문제는 브라이도티의 말대로 심층생태적 가이아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라면 라투르는 왜 하필 지 금, 지구 라는 용어 대신 심층생태적 가이아를 다시 왜 소환하는 것일까. 그가 진화생물학자 린 마 굴리스(Lynn Margulis)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기 때문이다. 마굴리스의 공생설은 인간만이 지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함께 서로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그녀는공생자 행성 에서 공생자로서의 지구에 대해서 말한다. 공생자로서 가이아에서 만물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점차 더 현대적으로 변해 사물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와서는 ‘세속 가이아(secular Gaia)’(Facing Gaia, 2013) 이론으로 프랑스 철학자 이자벨 스텐저스 (Isabelle Stengers)의 ‘침입자 가이아(Gaia the Intruder)’ 이론으로 인류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

이아 형상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라투르와 스텐저스는 기후 변화가 더 이상 진행되기 전 인류가 벌 수 있는 시간을 위한 거울로서 가이아의 모습을 활용한다. 클락(2017)은 러브룩과의 오래된 공 조 속에서도 마굴리스만의 독특한 상호침투적인 ‘자기 생성적 가이아(autopoietic Gaia)’ 이론은 비전체론적이고, 이질적이지만 일관된 가이아 개념에 대한 스텐저스와 라투르가 추구하는 인류세 시대의 정치적 의사소통방식에 효과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27) 아마도 알려져 있 는 가장 간단한 자기생성적 개체가 박테리아 세포라면, 가장 큰 자기생성적 개체는 가이아일 것이 다. 세포와 가이아는 생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가이아 안 시스템은 생물과 비생물의 협력에서 비롯 되며 그래서 전통적 사회과학적 구분을 무너뜨린다. 

라투르의 가이아는 지구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보살펴주는 자애

로운 어머니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광포하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의 항상성을 회복불가능한 정도까지 몰고 가는 순간, 과거 공룡 등 다른 생명체들을 멸종시켰던 무자비한 가이아가 깨어난다. 세속적 가이아는 새로운 형태 의 지구중심주의를 갖고 온다. (Latour, 2013 :64)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명기에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 서구 세계의 우주 개념의 중심에서 지구를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쫒아냈음을 기억한

다. 이제 가이아 이론은 지구의 우주 중심성을 다시 인정하는 신지구중심주의를 세속적 방식으로 

 

26)“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2017)는 지구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차크

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global thinking)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조성환⋅허남진, [공공학-공공철학] 학 문의 지구적 전환, <더퍼블릭뉴스>, 2021년 1월 15일,http://www.thepub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 no=16788. 여기서 조성환⋅허남진은 조에중심주의적 생명체에 대한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을 소개한다. 조 에중심주의는 라투르, 차크라바르티, 브라이도티, 등의 신유물론 학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이론이 되어가 고 있다. 

27) Bruce Clarke, Rethinking Gaia: Stengers, Latour, Marguli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4(4) 3–26, 2017.

불러온다. “위에서 보았을 때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큰 수프와 같다.” 가이아 안에서 일어나 고 있는 미생물의 이동성은 ‘애니매이션’이다. 보이지 않는 캐릭터는 가이아의 행성 외피를 통 해 퍼지는 무수하고 무한한 미생물의 복합 기관이다. 파스퇴르의 경우 효모없이는 발효하지 못하 며 이 과정이 맥주, 포도주, 식초를 만들어내듯, 가이아 안에서도 공기, 물, 불, 흙을 휘젓는 유기체 안에서 미생물이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가이아의 생물 정치 속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또는 인 지적 지구 생물권 내에서 수평적 관계로 돌아왔다. 

이자벨 스텐저스는 재난적 시대에서: 다가오는 야만주의에 대항하기(In Catastrophic Times : R

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2015)에서 인류를 초월한 가이아의 행성적 자율성에 주목한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의 추출적 활동이 가이아를 자극하고 현재의 예측할 수 없고 빠르게 진화하는 '침입' 모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폭주하는 인간의 자원 추출에 대항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비인간은 참지 못하고 있다. 스텐저스가 말하는 가이아는 현대 인간 활동을 협박하고 저항한다. ‘가이아는 간질간질(Gaia is ticklish)하다’고 정체 불명의 목소리가 선언한다. “우리는 가이아의 참을성에 의 존하고 있다. 참지 못함을 조심하라”(2011:164) 이 가이아는 코스모폴리티컬한 비유며, 생태적 폭 력에 대한 저항의 개념 자원이다. 스텐저스는 “가이아의 이름을 지정하고 다가오는 재난을 침입 으로 특성화시키는 것은 실용적인 이유에서다”며 “이름을 짓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가이아는 콘 크리트 속의 지구가 아니며, 생활하고, 고군분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원이다. “가이아는 우리 의 목적에 무신한 힘들의 간지러워하는 집합체다.”

 여기서 라투르의 ‘애니메이션 가이아’와 스텐저스의 ‘간지러워하는 힘의 집합체인 가이아’ 는 순전한 물질적 역동성과 민감성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수사학이다. 간지러워하는 가이아는 발 작을 일으키기 쉬우며 고통스러워한다. 인류세 시대의 가이아는 우리의 행동에 민감해하며, 우리도 그에 대응해 ‘조심스럽고 민감해져야 한다.’ 

3. 임계영역에서의 사고 전시를 통한 주체의 지구-되기 라투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 상황을 ‘신기후 체제’로 명명하면서 생태 적 위기 뿐 아니라 정치문화사, 관점의 윤리적, 인식론적 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학자들 은 예전에 지구정치에 대해 논할 때는 물질이나 영토에 대한 점유를 위한 국가간의 싸움이었다. 오늘날 지구정치는 거주할 수 있는 땅 자체에 대한 정의에 대한 전쟁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전 체성이 아닌 부분적 연결, 국소적인 영역인 임계영역(크리티컬 존)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만 으로도 새로운 비평의 근거가 생긴다. "임계 영역(Critical Zone)"이라는 용어는 지구 과학에서 따온 것으로 생명이 생성되는 표면인 지구의 생화학적이고 깨지기 쉬운 층을 설명한다. 라투르에 의해 이 용어는 지구 역사상 전례 없는, 살아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관계로 확장됐다. 

그 점에서 브루노 라투르는 임계영역에서의 지도그리기를 시도한다. 그는 “인류세의 싸움은 국 제지질학회 같은 관료주의 내에서 복잡한 결정을 통한 해결도 필요로 하지만, 각 임계 영역이 인 간의 이미지를 강력한 지구형태변형적 힘으로 제공하여 우리에게 지형학의 새로운 이미지 즉 지형 학적 인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나 칭의 “폐허 속에 살다(living in the ruins)”라는 표현을 빌려와, 세한도처럼 늘 영속하기에 숭고한 자연이 아닌 포스트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류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지구이미지를 강조한다.28)

그가 보기에 첫 번째 지구(Globe)는 우주에서 바라본 유명한 푸른 행성의 이미지다. 그러나 임계 

영역에서 본 두 번째 지구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작고 연약하며 평형과는 거리가 멀다. (‘임계 (critical)’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기도 하다). 지구는 외부적이며 영속적이고 단일하게 전체적인 ‘지구로만’ 간주되는 게 아니라 내부적이며, 논란 많고 다층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얽혀있

는 존재태(intermingling entities)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간지러운 피부다. 라투르는 이런 이미지의 대조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탈착 가능한 장신구처럼 지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지구인 형제자매(the Earthlings), 지구에 뿌리내린 존재들(the Earthbound), 인류세의 부모자식들은 자연(nature)에서 태어나 상징과 사회의 세계에서 졸업하는 게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 지 우리의 모든 삶을 퓌시스(physis), 즉 우리가 꿈에서도 절대로 빠져나오거나 탈출할 수 없는 그 런 퓌시스 한가운데서 보낸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구 ‘위’가 아니라 지구 ‘안’에 있다는 의미다. 

라투르가 자꾸 차크라바르티와 함께 논의를 기존의 전통적 역사철학에서 공간적이고 지구(지리)

정치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계의 발견자들은 이제 공약가능하지 않은 여러 행성으로 흩어졌다. 라투르는 세계World도 글로브Globe도 지구Earth도, 글 로벌Global도 아닌, 가이아(Gaia), 또는 대지적(Terrestrial)라는 단어로 이를 대체하고자 한다.  

임계 영역에서는 비인간 및 인간 행위자의 네트워크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하수 슬러지 과정에 서 여러 노드는 인간의 미생물 군집과 다양한 종류의 해양 및 육상 서식지가 포함된다. 임계 영역 은 우리의 서식지일 뿐 아니라 더 나은 비인간 동거를 위한 접촉 구역(contact zones)이다. 

예술가들의 전시 공간은 헤게모니 지식 형성의 해체, 변형 및 이동을 위한 잠재적 공간으로 기 능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술가 크리스티나 그루버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거주 하고 일하는 예술가이자 담수 생태학자이다. 그녀는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일하면서 우리 세 계를 형성하는 사회 현상을 다룬다. 지난 몇 년간 물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사였는데, 지구상의 모든 존재자가 공통적으로 가진 요소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Water Bodies>에서 강은 물벼룩이나 철갑 상어와 같은 원시 물고기와 같이 그 안에 사는 모든 유기체와 생물 모두를 의미한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에 그루버는 과학적으로 무한한 관계와 그 주기를 돌보며 연구한다. 그 는 팟캐스트에서 예술가와 함께 미시시피의 무인 늪지대와 다뉴브 해역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나누며 인간이 풍경에 미치는 영향과 지구 표면의 모양을 조사한다. 

 

28) Bruno Latour, “Is Geo-logy the new umbrella for all the sciences? Hints for a neo-Humboldtian university”, the Cornell University, 25th October 2016.

라투르가 차크라바르티, 도나 헤러웨이, 이사벨 스텐저스, 피터 바이벨 등의 학자와 예술가와 작 가들과 함께 참여하고 칼스루에 대학이 주관하는 이 ZKM 예술 및 미디어 센터의 2020 전시는 기 후 변화에 직면한 세계의 방향 감각 상실을 묘사한다. 전시도록에 실린 텍스트와 500여개의 삽화 는 인간이 착륙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을 탐구한다. 임계 영역이든, 가이아든, 대지의(terrestrial)이 든 뭐라 부르던 간에, 지구 안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을 향한 재설계된 지정학적 갈등과 도구 를 찾는다. 이 “생각 전시”는 새로운 기후 체제를 탐구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을 열어준다. 

 

Ⅲ.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조선의 홍대용과 프랑스의 브루노 라투르란 두 사상가의 지구적 관점 전환은 동

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사회 질서의 혁명이 이어졌다.  갈릴레오 사건을 볼 때 과 학자들이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때 사회의 전체 구조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꼈 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신기후체제’라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격변 한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 스스로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밀어 붙였고 다시 한번, 사 회의 전체 조직이 전복됐다. 우주 질서를 흔들면 정치 질서도 흔들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 는 땅은 두 가지 다른 정의를 갖는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권리를 얻는 주권 국가라는 땅 이외에 거주하고, 숨쉬는 땅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땅은 지구 또는 초월적 관점에서 보는 “푸른 대리석” 이 아니라 일련의 부분적이고 국소적인 그래서 거칠고 불연속적인 임계 영역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주체의 지구-되기며, 다른 이질적 존재자를 만나는 민감성 그리고 공생성이다. 

홍대용은 리와 태극의 전체성의 하늘이 가진 위계적 관점을 벗어나 자연천의 관점에서(天視)  본 

시점으로, 인간보다 더 우월할 수 있는 비인간을 상정하며 그 상호관계망에 대해 논했다. 이는 브 루노라투르가 크리티컬 존에서 얇은 피부에서 생물권이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서로를 스승삼아 배우는 그런 생태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 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 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계를 생략했다 는 특징이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 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 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과학으로,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거품 즉 다중구체로

이것이 브루노의 목표다. 라투르의 가이아를 마주하며Facing Gaia(2013)는 책은 라투르가 페터 슬로터다이크(2013)에게 헌사한 책인데, 라투르는 그곳에서 페터가 제시한 인간 면역의 수정궁을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얽힌 루프에 대한 높은 민감도 없이는 면역학이 불가능하다. '미미한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거나 대 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파멸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 루프를 중단, 삭제, 배경, 감소, 약화, 거부, 모 호화, 연결 해제하는 사람들은 무감각한 정도를 넘어 범죄자다. 우리의 우주적 결합이 일어나는 가 이아 중심에서, 우리는 시스템의 얽힘(systemic entanglements)에 예민한 생물 정치적 동물이 되야 한다. 이 새로운 가이아 담론의 모습이야말로 가이아 존재의 직관에 적합한 행성의 상상력을 배양 한다. 

참고문헌

關尹子

湛軒書

역학도해 열하일기

곽혜성,「담헌 홍대용의 탈성리학적 사상의 형성-이기심성론에 따른 물의 담론 변화를 중심으로」, 철학사상문

화 29호, 2019, 18쪽

로지 브라이도티,포스트휴먼, 이경란 옮김, 아카넷, 2017 인현정, 「홍대용의 정치철학과 물학(物學)의 관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이현경, 「정선 <금강전도>의 구도와 시점에 대한 역사ㆍ사회적 고찰」, 예술학, 2:2, 2006 이현식, 「홍대용 醫山問答 人物論 단락의 구조와 의미」, 태동고전연구 35집, 2015 조성환⋅허남진, “[공공학-공공철학] 학문의 지구적 전환”, 더퍼블릭뉴스, 2021년 1월 15일, http://www.thep ub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88. 

차은정,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메릴린 스트래선”, 경향신문, 2019

년 9월 24일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2401031612000001

중앙일보 2020.11.30., 프랑스인이 재해석한 14m 세한도 “무인도 같은 고독에 공감”, 강혜란 기자, 

https://news.joins.com/article/23933555

브루노 라투르 영문 홈페이지 http://www.bruno-latour.fr

브뤼노 라투르:가이아를 기다리며”, 김효진 역, ‘사물의 풍경’ 블로그(https://blog.daum.net/nanomat/137)

Bruce Clarke, Rethinking Gaia: Stengers, Latour, Marguli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4(4) 3–26, 2017

Bruno Latour, Facing Gaia, 2013

Bruno Latour, ‘Waiting for Gaia. Composing the common world through arts and politics’, A lecture at the French Institute, London, November 2011 for the launching of SPEAP(the Sciences Po program in arts & politics). 

Bruno Latour, “Is Geo-logy the new umbrella for all the sciences? Hints for a neo-Humboldtian university”, the Cornell University, 25th October 2016

Bruno Latour, “Why Gaia is not a God of Totality”, 2017

Bruno Latour&Peter Sloterdijk, Cohabitating in the Globalised World: Peter Sloterdijk’s Global Foams and Bruno Latour’s Cosmopolitics,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2009, volume 27

Isabelle Stengers, In Catastrophic Times : R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2015

 


7]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7]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15)

요약문   중국을 찾아온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서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이 수용된 것 은 17세기의 일이었다. 이후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이익(李瀷, 1681-1763)・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 이 땅이 하루에 한 번씩 돈다는 자전설(自轉說)을 수용했다. 그리고 최한기(崔漢綺, 1803-1877)에 이르러 지 구설, 자전설과 더불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일괄적으로 소개했다. 최한기는 단지 새로운 서양 천 문학적 지식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그 학설들을 몸소 증험한 사실을 매우 중시하고 “카노가 비로소 지구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은 바로 천지의 개벽이다.”(嘉奴, 始圜地球. 是乃天地之開闢也. 神氣通 권1,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라고 말했다. 카노(엘카노라고도 함)는 탐험대장인 마젤란이 죽은 후 살아남은 선원들을 이끌고 스페인까지 돌아온 선장이다. 최한기는 카노들이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증험했을 뿐만 아 니라, 그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것으로 동서의 항로가 개척되고 진귀한 물건과 기계, 지식, 교법까 지 오고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카노의 지구일주로 지리학적 가설이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의해 지구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역사적 의미까지 꿰뚫어본 것이다. 최한기가 1857년에 엮은 지구전요(地球典要)는 천문학과 지리학과 해양학,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위치, 산물, 문화풍속 등을 소 개한 책이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학 서적이 아니라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 세계가 있으며, 그 태양과 지구의 활동에 의해 인간사회도 국가도 문화도 종교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최한기의 기학적(氣學的) 세계관에서는 ‘기(氣)’가 우주 천지에 빈틈없이 가득 차 있고, 그 기 는 끊임없이 활동운화(活動運化)하고 있다. 해도 달도 지구도 모두 그 기 속의 하나의 사물이다. 그에 의하 면 “무릇 사람이 지구 표면에서 공생(共生)하면서, (해와 달과 지구가) 뱅뱅 도는 것에 의지하고, 기화(氣化) 를 타면서 평생을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夫人共生於地球之面. 資旋轉而乘氣化. 以度平生. 古今無異. 地球典要 序) 인간이란 항상 운화하는 기의 은혜를 받으면서 지구 표면에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지구운화 내 공존재(地球運化內共存在)’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환경에 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의 도래, 즉 ‘인류세(人類世)’가 거론되는 오늘날, 인간을 ‘지구운화 안’에서 ‘더불어 사는’ 존재로 본 최한기의 인간관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다 시 생각하게 만든다. 주제어 : 최한기, 기학, 지구전요, 운화, 지구운화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차 례

Ⅰ. 머리말

Ⅱ. 최한기의 지구개벽(地球開闢)

Ⅲ. 최한기의 신기(神氣)적 세계관

Ⅳ.‘기화(氣化)’‘운화(運化)’를 따르는 인간

Ⅴ. 서양근대과학의 자연관과 그것이 가져온 지구의 위기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조선에서‘지구(地球)’가, 다시 말하면 땅이 둥글다는 사실이 인식된 것은 중국에 입국한 예수 회 선교사들이 소개한 지구설이 전래된 17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이어서 김석문(金錫文, 1658-173 5),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이 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돈다는 자전설(自轉說)을 언급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1857(丁巳)년에 엮은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지구설, 지전설, 지동설을 총체적으로 소개했다.

최한기는 이 지구전요에서 프톨레마이오스[多祿畝], 티코 브라헤[的谷], 메르센[瑪爾象], 코페르 니쿠스[歌白尼]의 천체모델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앞의 세 모델은 지구가 움직이지(자전하지) 않았 으나 오직 코페르니쿠스만은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근본에 두고, 천체 운동의 계산이 잘 부합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최한기에게 그것은 단지 서구에서 중국을 경유해서 전래된 최신의 천문학설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구가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 사람 이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고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한 것이 아주 중대한 역사 적・사상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는 최한기의 지구 인식과 지구에 사는 인간에 대한 생 각,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최한기의 지구개벽(地球開闢)

최한기는 인류가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옴으로써“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증험한 것 은 인류의 인식 지평과 행동 범위를 넓히는 역사적 획을 긋는‘천지의 개벽’으로 보았다.

 

대개 천하가 두루 통하게 된 것은 대명(大明)의 홍치(弘治)년간에 유럽 서쪽 바닷가의 포르트갈인 카노[嘉奴](또는 엘카노; Juan Sebastián Elcano, 1476-1526)가 비로소 한 바퀴 돌았는데 이것은 바로 천지의 개벽(開闢)이다.1)

명나라 정덕(正德) 연간의 포르투갈 사람[葡萄牙人], 이름은 카노[嘉奴]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서 청 하고 5척의 배로 출발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서쪽 땅에 일러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돌아온 날 왕은 은으로 주조한 작은 지구 위에“비로소 땅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자가 바로 이 카노로다!”라는 글 자를 세긴 것을 하사해 주었다. 지금은 바닷길에 더욱 익숙해지면서 서양의 배가 동쪽에서 서쪽으 로 가거나, 혹은 서쪽을 지나서 동쪽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데 불과 8, 9개월간밖에 걸 리지 않는다. 즉 전 지구를 두루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앞사람이 길을 개척한 공로인 것이다.2)

여기서 엘카노가 돌아온 연대 등에 약간의 착오가 있지만3) 카노의 지구 일주를 최한기가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본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가? 최한기에 의하면 그 이후부터 배가 바다를 두루 오가게 되면서 사신들과 상인들이 번갈아 보내졌고, 진귀한 물산이나 편리한 기계, 문화와 사상, 종교 등이 널리 전파되면서 그것들이 모두‘성내(城內)의 젖’이 되었기 때문이다.4) 다시 말하면 최한기는 카노의 지구 일주를 지구화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그 이후 동서의 항로가 열리면서 통 상, 외교, 문화 등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세계가 풍요로워진 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Ⅲ. 최한기의 신기(神氣)적 세계관

최한기는 인류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지구’─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것 을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크나큰 의의가 있는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1837년

 

1)“盖天下之周通, 粤在大明弘治年間. 歐羅巴西海隅, 布路亞國人, 嘉奴, 始圜地球, 是乃天地之開闢也”,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2)“明正德年間, 葡萄牙人, 名嘉奴者, 稟請發船五隻. 東行旋續, 至西圜而返. 返之日, 王賜以銀鑄小地球上刻字云始圜地而旋者其嘉奴乎. 今則海道益習, 洋船自東往西, 或由西返東圜地而返. 計不過八九月之間, 卽可周行全地. 皆前人開創之功也.”, 地球典要 권1, 「海陸分界」 

3) 카노(엘카노)가 3년간의 항해 끝에 출발지로 돌아온 것은 1522년 9월이므로 명나라 嘉靖 원년이며, 弘治 (1488-1505)도 아니고 正德(1506-1521)도 아니다. 또 엘카노는 스페인의 바스크인이었는데 당초의 탐험대 총사령관이자 포르트갈인인 마젤란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지구전요에서 카노의 지구일주를 정 덕 년간으로 기술한 것도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죽은 연도(1521년 4월 21일, 正德16년)와 혼동해서 전해진 가능성도 있다.

4)“自玆以後, 商舶遍行, 使价遞傳, 物産珍異, 器械便利, 傳播遐邇, 禮俗敎文, 爲播越傳說者, 所附演, 無非城內之乳也.”,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에 쓴 신기통(神氣通)에서 천지의 이치가 밝혀지면 인사(人事)가 이에 따라 밝혀진다고 주장했다.

역세(歷世)의 경험으로 저명해진 것에 이르러서는 역법의 이치와 지구보다 큰 것은 없다. 천지의 이 치가 점차 밝혀지면 인사(人事)가 이에 따라 밝혀지는 길이 있다. 즉 이것이 천인(天人)의 신기(神氣)이다. 만약 역법의 이치와 지구가 점차 해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인도(人道)가 더욱 밝아지는 것 과 상관없다면 이것은 하늘은 저절로 하늘이 되고, 땅은 저절로 땅이 되며 사람은 저절로 사람이 되어서 서로 상관이 없게 된다.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천・지・인・물은 곧 한 신기의 조화(造化)이

다. 천지의 이치가 점차 밝혀지면서부터 기설(氣說)이 점차 발전되고, 하늘・땅・사람・사물은 갈수록 증험하고 시험할 길이 있게 된다. 사람은 구규(九竅) )와 지체(肢體)를 갖춤으로써 하늘・땅・사람・사 물의 기를 통한다. (……) 만약 신기가 통하는 것에 말미암지 않고서 도(道)를 말함이 이와 같다면 이것은 근거 없는 말이고 사람을 속이는 짓이다. ) 

최한기에게 천지와 인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은 바로‘천인(天人)의 신기(神氣)’를 밝히는 것이 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을 단순한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세계관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왜 냐하면 최한기는 천(자연)에는 사물의 천리가 있고, 인(인간)에는 인간의 천리가 있다고 보고 사물 과 인간의 이치를 다르게 보았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과 사물에 대해 그 천리(天理)를 가리켜 논한다면 모두 하늘[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천

(人天)이란 사람에 있는 천리이고, 물천(物天)이란 사물에 있는 천리이다.  ) 

이렇게 최한기는 사람의 천리(인천)과 사물의 천리(물천)를 구별했지만 둘을 갈라놓은 채 놓아두

지는 않았다. 물천과 인천, 즉 천지자연과 인간세상이 차등이 다르다고 보고, 그러면서도 그것은 신기(神氣)의‘운화(運化)’라는 축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회나 공동체를 가리키는‘통민운화(統民運化)’라는 영역을 일신운화(一身運化), 즉 인간 

개체와 대기운화(大氣運化), 즉 천지만물 사이를 매개하는 영역으로 설정했다. 

통민운화(統民運化)는 기학(氣學)의 추뉴(樞紐)가 된다. 통민운화를 준거해야 진퇴하는 바가 있게 되 고, 대기운화(大氣運化 또는 天地運化, 一氣運化)는 통민운화에 통달해야 그릇된 바가 없게 된다. 만약에 일신운화가 통민운화에 준거하지 않으면 인도(人道)를 제우고 정치와 교화[政敎]를 행할 수 없으며, 대기운화가 통민운화에 통달하지 않으면 표준을 세우고 범위를 정할 수 없다.8)

최한기는 대기운화・통민운화・일신운화를 통틀어서 삼등운화(三等運化)라고 불렀다. 그 규모로 보

면 대기운화가 가장 크고, 일신운화는 가장 작고, 통민운화는 그 중간이다. 그리고 이 셋을 기의 본성인‘활동운화(活動運化)’가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최한기는 지구전요를 편찬하면서 천문학, 자연학, 인문지리학의 지식을 기(氣)철학에 의

해 하나의 체계로 종합시키려 했다.

땅(지구)은 우주[宇內]에 있으면서 행성들이 뱅뱅 도는 것과 연계해서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온전해 지고, 기화(氣化)는 역법이 지구에서 제대로 일어나게 한다. 옛날부토 지구를 논한 책들은 각국의 영토[疆域]・풍토・물산・인민・정체[政]・풍속[俗]・역사[沿革] 같은 것들을 많이 말했으나 지구의 전체 운화(全體運化)는 오직 지구도설(地球圖說)만이 간략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지구전요) 첫 권으 로 채록(採錄)한다.10)

지구도설은 프랑스인 선교사 베누아(Michel Benoit, 중국명: 蔣友仁)가 지은 지구도설(地球圖說)(1799년)을 가리킨다. 이 책은 천주교회에서 금서가 막 해제된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을 재빨 리 중국에 소개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각국의 지리학에 관한 내용은 지구도설 범례(凡例)에서 주로 해국도지(海國圖志)(魏源 

엮음, 초판1843)와 영환지략(瀛環志略) 청 서계여(徐繼畬) 엮음(1849)에서 채록했으나, 다만 일본에 관한 기술이 둘 다 너무 소략한 것이 많기 때문에 해유록(海游錄)(조선 신유한申維翰 지음)에서 취하고 보태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지구전요 권11 「해론(海論)」에서는 서양의 선박과 해양생물의 소개와 조석, 바닷물이 짠 이

유에 대해 논하고, 「중서동이(中西同異)」에서는 서양과 중국의 별자리를 비교하고 중국에 전래된 서역(西域; 인도 및 이슬람)역법과 서양 역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양의 알 파벳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26자모는 흩어지면 무궁(無窮)하고 합치면 유한(有限)하며 그 용(用) 은 헤아릴 수 없으나 삼척동자(三尺童子)도 학습할 수 있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26자에 의지 해서 자세하게 논한다. )” 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어서 지구전요 12권에서는 「전후기년표(前後紀年表)」에서 서기[敎門紀年]와 중국 제왕의 재위기년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양회교문변(洋回敎文辨)」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그것을 중국에 소개한 주요 서적에 대해 비판적으로 소 개하고 있다. 또 각국의 역사와 문화도 모두 기화로 본 최한기는 지구전요 서문에서 기화(氣化)와 인간과의 관계를‘사문(四門)’으로 제시했다. 

대개 천인(天人)의 도(道)에는 다 기괄(氣括)이 있으니 어찌 맥락이 없겠는가? 지구운화(地球運化)는 행성들[諸曜]이 서로 비치는 것[照應]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사는 도리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운화 (運化)로 말미암아 기화의 사문(四門)으로 나눠서 배정한 (항목이) 생기게 된다. 항목[門]에도 각각 조목이 짜여 있고 우내(宇內) 각국의 역사의 자취를 이룬다. 이것을 읽는 자는 기화를 보고 인도를 세우며 인도를 행하면 인도가 정해진다. (하지만) 지구 표면[球面]에만 치우쳐 통달하고 기화를 보 지 못하고 지도를 말하고 인도를 생각하면 인도가 정해지지 않으니 지구 표면에 치우쳐 통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2)

여기서 최한기는‘기화’와‘인도’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인도를 제대로 세우고 실행하자면 지

구 표면에 대해서만 편협하게 통달해서도 안 되고, 인도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사문(四門)’ 즉 네 가지 항목의 내용은‘기화생성문(氣化生成門)’,‘순기화지제구문 (順氣化之諸具門)’,‘도기화지통법문(導氣化之通法門)’,‘氣化經歷門(기화경력문)’의 네 가지이다. 먼저‘기화생성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이 이루어낸 국토・기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순기화지제구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

문화와 주된 산업을 가리킨다. 

이어서‘도시화지통법문’은 인간의 기화기 통하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기화경력문’은 천인의 기화가 겪어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

외식민지 등을 가리킨다. 地球典要의 四門(항목) 

범주 氣化生成門 順氣化之諸具門 導氣化之通法門 氣化經歷門

내용 천지의 기화=자연환 경이 이루어낸 국토・기 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 천지의 기화=자연환 경에 순응해서 살아가 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 문화와 주된 산업 인간의 기화기 통하 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

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 도들 천인의 기화가 겪어

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외식민지 등

항목 疆域, 山水, 風氣, 人民(戶口, 容貌), 物産. 衣食, 宮城(都), 文字, 

歷 農(業), 商(市埔, 旗

號), 工, 器用(錢, 礮, 船, 財, 田賦). 政(王, 官, 用人) 敎, 學, 禮(樂, 葬), 刑禁(法, 兵), 俗尙(外道, 鬼神), 使聘(程途). 各部(島), 沿革.

 

12)“盖天人之道, 儘有氣括, 豈無脈絡. 地球運化, 由諸曜之照應, 而成人生道理, 由地球之運化, 而生排定氣化之四門. 門各有條織, 成宇內各國之史蹟. 讀之者, 見氣化而立人道行人道ㅡ 則人道定. 而可偏達于球面, 不見氣化而淡人道思人道. 則人道未定, 不可偏達于球面.”, 地球典要 序. 

Ⅳ.‘기화(氣化)’‘운화(運化)’를 따르는 인간

이 네 가지 항목들에 모두‘기화(氣化)’의 두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도 자연의 기후풍토

와 인간사회가 모두‘기’의 작용임을 잘 나타나 있다. 

활동하는 운화의 기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차고 천지의 정액(精液)과 인물(人物)의 호흡이 되는 것이 니, 조화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신령(神靈)이 이로 인해서 생긴다. 온 세상의 생령(生靈)들은 모두 이 활동운화의 기를 얻어서 활동하는 운화의 형체를 이룬 것이니, 비록 이 기와 서로 떨어지려 한 들 떨어질 수 있겠는가? 기화인도교(氣化人道敎)는 바로 옛날의 이른바 천인교(天人敎)이다. 옛날에 는 기화를 잘 알지 못해서 그것을 천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기이다.13)

기화인도교란 말 그대로‘기화’와‘인도’의 둘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다. 그가 말하는‘인

도’의 주된 내용은 윤리도덕과 사회질서[倫綱政敎], 생업[士農商工], 상식[日用常行] 등이다. 이에 대해‘기화’는 우주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의 조화, 변화, 활동이며 천체의 운행부터 기후변 화, 풍토 등 온갖 자연현상, 심지어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생리에게까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래서 기화와 인간은 결코 대등한 관계일 수 없다. 

최한기는 또한“운화의 기가 항상 (우리 몸속에) 스며들어 적시고 있는 것은 마치 어머니 뱃속에

서 태아가 어머니에서 자양(滋養)을 받아가면서 날마다 몸을 키우고 있는 것과 같다14)”고 말했다. 사람은 (그리고 만물도) 대기운화에 의지하고 그 혜택을 받고 사는 존재로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술도 대기운화(大氣運化) 즉 우주천지의 신기에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다. 사람이 만드는 도구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그 물건은 대기운화에서 나온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지고 대기운화의 기세를 본뜬 것일 뿐이다. 

기괄(機括)을 작동시켜서 기의 힘을 유통시키는 것도, 사물의 모양과 소리와 빛을 모방하는 것도 장 인(匠人)의 숙련된 솜씨가 금속이나 목재나 물과 불을 가지고 제작하는 속에서 기를 체득한 것이 다.15) 

사람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은 그의 솜씨가 기의 흐름・성질을 잘  따랐을[承順] 따 름이라는 것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원래 사람은 자기가 몰라도 일신운화(一身運化)가 는 대기운화

 

13)“活動運化之氣, 充牣兩間, 爲天地之精液, 人物之呴游, 造化由此而生, 神靈緣此而發, 四海生靈, 得此活動, 運化之氣, 以成活動. 運化之身, 雖欲與此氣相離, 其可得乎, 氣化人道之敎. 卽古所謂天人敎也, 古者氣化未暢, 故惟謂之天, 而其實則氣也.”,  人政 권8, 敎人門, 「氣化人道敎」 

14)“運化之氣. 常漬洽焉. 便是胎中之兒. 藉母精液. 有日日之滋養.”,  人政 권12, 敎人門, 「身運化爲本」 

15)“人造之器. 雖極巧妙. 必因大氣運化之材. 又效大氣運化之勢. 機括運動. 氣力流通. 摹傚物象聲色自然. 是乃工匠之鍊熟. 得氣於金木水火制作之中也.”, 人政 권13, 敎人門, 「巧妙生於氣」 

(大氣運化)를 따라서 운화한다. 다만 그것을 모르면 망령될 수 있다. 또 그것을 알고 있어도 역시 일신운화는 대기운화를 따라서 운화하는데 그것을 알고 있으면 능히 그것을 받들어 따를(承順) 수 있고, 또 그 방법을 남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결국 최한기에 의하면 사람은 원래 대기운화에서 마치 태아가 어머니에서 영양을 공급받고 몸을 

키우듯 기를 공급받고 살고 있다. 물건을 만드는 장인도 기에서 재료를 받고, 그 솜씨도 대기운화 를 잘 본받아서 따르는 것으로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와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로 최한기가 강조한 것이‘효(孝)’였다.

그는 흔히‘효’라고 일컬어지는 것에는 크고 귀한 것과 작고 평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작고 흔한 효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고, 크고 귀한 효는 신기에 섬기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는 효와 하늘을 모시고 섬기는 효는 모두 “아래에게 나쁜 것으로 위를 섬기지 말고, 위에게 마땅한 것으 로 아래로 미쳐야” 한다는‘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고 한다.  ) 여기서‘위’는 대기운화(大氣運化)를 의미하고,‘아래’는 인도(人道)의 효를 의미한다. 부모를 만족시키는 인도의 효를 소홀 히 해서 대기운화에 승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대기운화──자연의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평생토록 받들어 따르는[承順] 것은 하늘과 사람의 운화이고, 자손이 평생토록 승순하는 것 도 또한 하늘과 사람의 운화이다. 따라서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서 효를 찾으면 온갖 선(善), 수많은 덕행은 모두 그 속에 포함된다. 하늘과 사람의 운화를 버리고서 효를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시시 한 풍속이요 겉보기만의 말초적인 예절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 거역하여 효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과 말단이 서로 어긋난 짓이다. 만약 천지와 부모가 태어난 본체(즉 신기)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정(情)이 가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의 비판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 은 불효(不孝)이다. 만약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 승순하는 것을 효와 무관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운화 도 효도도 모두 모른다는 말이 된다.18)

최한기는 하늘과 땅을 섬기는 효에 통달한다는 것은 (흔히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제사지내듯) 향 을 피우고 축문을 낭독하며 절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의 효를 확충시켜서 대기운화를 밝 히고 크고 절실한 덕을 베푸는 것이어야 하늘과 땅을 섬기는 효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지의 공덕을 아직 모르는 백성들을 깨우치고, 법도를 어긋난 자는 지도해서 감화시켜야 한다. 수많은 백 성들이 모두 위대한 천지의 자손임을 알리고, 만사를 잘 처리해서 백성 모두가 위대한 신기의 자 양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큰 효라는 것이다.19)

Ⅴ. 서양근대과학의 자연관과 그것이 가져온 지구의 위기

이와 같은 최한기의 인간관・자연관・기술관은 서양근대과학의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과학사상사 연구자인 이토 슌타로(伊東俊太郞)는 서양근대과학의 두 가지 특징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추진한 자연의 기계론적 비인간화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외친 자연의 조작적 지배라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주장이 아니라 서양의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준비된 것이라 고 설명한다.

고대(그리스)에서는 신・인간・자연을 일체의 것으로 감싸는‘자연(피시스physis)’를 생각했는데, 

중세 기독교 세계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그리스적인 피시스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범자연주의 (汎自然主義)가 무너지고 신과 인간과 자연의 분명한 계층적 구조로 변했다. 거기서는 자연도 인간 도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창조주로서 그것들과 완전히 초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즉 이 셋은 각각 그 상위의 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졌 다. 이제 인간과 자연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가 되었다. 이것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기 계론적(機械論的) 자연관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이토 슌타로는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과학혁명’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 특징을 들었 다. 첫째, 중세까지 전해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상(宇宙像)이 해체되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생기론적 자연관에서 근대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상(自然像)

으로 전환되었다. 셋째,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이 결합되었다.

넷째, 중세에서는 주로 신학자가 피조물로서의 세계 전체를 정합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문제도 다루었다. 이에 대해 과학혁명 이후에는 그런 문제를 세계 전체의 사변적 고찰 과 분리시켜서 하나의 특수한 영역의 특수한 현상에 문제를 한정시키고 실험실에서 실험적 조작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지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근대적‘과학자’가 등장했다.

이상과 같이‘세계상’‘자연관’‘방법’‘담지자’의 네 가지 국면에서‘과학혁명’은 중세에 서 스스로를 구분시키는 새로운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20)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면서 자연과 분 리된 인간은 점차 고대적인 자연관을 탈피하면서 자연을 인간 정신은 자연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19)“又推達於事天事地之孝, 不可以香祝禱祀. 伸萬一之孝, 當明大氣運化敷施之大切德, 民生之不知者, 曉喩而使之知. 違戾者, 指導而感化焉. 億兆生靈, 咸知爲大天地之子孫, 萬事裁御, 皆感乎大神氣滋養.”, 明南樓隨錄 20) 伊藤俊太郞, 近代科学の源流, 東京: 中央公論新社, 2007, pp.344-353 참조.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주 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베이컨과 데카르트이다.

이와 같은 철학에 입각한 서양근대과학은 과연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러한 근대인 의 활동이 마침내 지구환경에 심각한 흔적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산업혁명 초기 대량으로 석탄연 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한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그 이후 150년 동안 점진적으로 증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증했다. 현재 다양한 지표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급격하고 명백한 혼란을 야 기했다.21) 

전 세계적인 경제 성장, 자원 이용, 쓰레기 량과 관련한 장기적인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불 렸고, 이 같은 추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22) 이러한 지구의 상황을 가리켜 과학자들은“우 리는 새로운 지질학적‘세’가 아니라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지구 역사에 초래한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대’, 바로 인류세(Anthropozoic era)에 진입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23) 했다. 그런데 이 인류세는 과연 인류 이외의 종에 대해서 너무나 위협적인 일이기도 했다. 유네스코 

사무국장고문이자 비교문명학자 핫토리 에이지(服部英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실제로 이 혹성에서는 야생이 사라지고 이 지상에 사는 동물(곤충은 제외함)의 총수의 60%가 가축인 것이다. 그리고 36%가 인간이고 야생동물은 4%밖에 남아 있지 않다. 생물 다양성은 이 지구 에 인간이 없었던 경우와 비교하면 천 배의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매일 120종의 종이 사라 져 간다. 과제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근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그러한 인 류의 눈을 뜨게 하듯 거대 대풍, 용오름, 쓰나미, 가뭄, 산불, 대홍수 심지어 신형 바이로스의 탄생 으로 인류에게 보복하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위협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2015년의 파리 협정은 18세기말 산업혁명 전에 비해 더 2도 기온이 상승하면 지구는 작열지옥(灼熱地獄)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기온은 계속 상승하고 있으며 사실은 이미 0.5도밖에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상황으로는 4도 상승마저 예상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조짐 은 이미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진보를 외치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인류는 오랫동안 망각했던 계시록적인 종말이 결코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24)

이와 같이 서양근대 과학문명과 손잡은 자본주의와 현대인의 소비생활이 지구와 생물들에게 엄

청난 환경파괴와 생물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의 변화가 지구온난화와 재해, 전염병 등을 가져옴으로써 인류 스스로도 위협받게 되고 있다. 이제 지구와 자연에 대한 근

 

21)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17쪽.

22) 위의 책, 17쪽.

23) 위의 책, 20쪽; Charles H. Langmuir and wally Broecker, How to Build a Habitable Planet, revised edi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p.645.

24) 服部英二, 地球倫理への旅路 : 力の文明から命の文明へ, 札幌: 北海道大學出版會, 2020, pp.252-253.

본적인 시각의 전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최한기의 자연관과 인간관이 이러한 현대문명의 위기 상황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Ⅵ. 맺음말

‘지구(地球)’ 즉 땅이 둥글다는 설은 중국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양에 소개하고 17세 기 무렵에 조선에도 알리게 되었다. 이후 김석문(金錫文)・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 등이 지구가 하 루에 한 바퀴 돈다는 자전설을 소개하고, 19세기 최한기(崔漢綺)의 지구전요(1835년)가 비로소 지 구설・지동설・지전설을 통틀어서 소개했다. 특히 최한기는 프톨레마이오스[多祿畝], 티코 브라헤[的谷], 메르센[瑪爾象], 코페르니쿠스[歌白尼]의 천체모델을 차례로 소계하면서 오직 코페르니쿠스의 설만이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그 주변을 돈다가 소개하면서 이로 인해 천체 운동의 계산이 잘 부합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최한기는 인류가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와서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역사

적인 큰 획을 그은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카노(엘카노)가 살아남은 마젤란 함대를 이끌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일을‘천지의 개벽’으로 칭찬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지구일주 항해로 인해 동서의 항로가 열리고 지구 전체가 뱃길로 하나로 통하게 되고, 각지 의 산물이나 기계, 문화, 사상 등이 서로 교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사물은 바로 하나의 신기(神氣)의 조화이기 때문에 지구(땅이 둥글다는 것)가 실제로 확인 되고 천지의 이치가 더욱 밝혀지면 이에 따라 인사(人事), 즉 인간세상의 일들도 밝혀지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초기의 저작인 신기통(神氣通)(1836년)에서는 사물의 천리[物天]과 사람의 천리[人天] 을 구별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는 각각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양자를 혼동시 킬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양자는 어떤 공감대──그것이 바로 신기임──가 존재한다고도 보 고 있었다. 그 이후 최한기는 그것을‘운화(運化)’로 밝혔다. 그는 신기의 성질을‘활동운화(活動運化)’로 보고, 우주자연을 대기운화(大氣運化), 인간사회를 통민운화(統民運化), 인간개체를 일신 운화(一身運化)로 구분했다. 그 규모에는 차이가 있고 대기운화가 가장 크고, 통민운화가 그 다음이 고, 일신운화가 가장 작다고 보았다. 

지구전요(1857년)에서는 천문학, 자연학, 인문지리학 등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다르고 있다. 먼 저 태양계의 운행과 태양과 달과 지구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설명했다. 이 어서 지구의 운화로 기화(氣化)의 네 가지 항목[四門]이 생긴다고 하면서 각국의 지리에 대해 소개 했다. 이것은‘기화생성문(氣化生成門)’,‘순기화지제구문(順氣化之諸具門)’,‘도기화지통법문(導氣化之通法門)’,‘氣化經歷門(기화경력문)’의 네 가지인데 먼저‘기화생성문’은 천지의 기화=자 연환경이 이루어낸 국토・기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을 의미한다. 다음으 로‘순기화지제구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문화와 주 된 산업을 가리킨다. 이어서‘도시화지통법문’은 인간의 기화기 통하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기 화경력문’은 천인의 기화가 겪어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외식민지 등을 가 리킨다. 

최한기는 각국의 기후풍토, 문화, 경제, 산품, 정치체제, 종교, 외교 등등 다양한 조목들을 이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지구운화(地球運化)가 나라마다 나름대로의 기후풍토를 낳고, 그 기후풍토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각각 나름대로의 생활문화와 산업을 낳고, 그런 사람들 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라마다 고유의 역사를 엮어간다. 그러한 단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한기는 사람이 천지에 가득 차고 활동운화 하는 신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

다. 지구전요에서 각국에 대한 다양한 조목들을 분류하는 네 가지 항목도 역시 그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만물은 활동운화하는 신기 안에서 만물을 살리는 기의 혜택을 받아서 살고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사람의 기술마저 기괄(機括)을 작동시켜서 기의 힘을 유통시키는 것도, 사물의 모양과 소

리와 빛을 모방하는 것도 장인(匠人)의 숙련된 솜씨가 금속이나 목재나 물과 불을 가지고 제작하는 속에서 기를 체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최한기의 자연관, 인간관, 기술관은 서양과학의 사고방식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관은 신・인간・자연은 모두‘자연(피시스physis)’로 포괄되었다. 그러 나 중세에 와서는 신・인간・자연은 확연히 구별되었다. 자연도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창조 주로서 그것들과 완전히 초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신을 위하여 존 재한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과 자연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 이미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점차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적인 자연 관을 벗어나면서 자연에 대해 인간 정신은 자연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 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을 주도한 것이 바로 베이컨의 기계론과 데카르트의 물신 2원론이다.

그러한 철학에 지탱된 서양근대과학은 오늘날까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환경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산업혁명 초기에 석탄연료의 대량 사용이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란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지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대개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급증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전 세계적인 경제 성 장, 자원 이용, 쓰레기의 양 등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이 생 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지구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 래서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현대를 가리켜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지구역사에 가져온 변화와 버 금가는‘인류세(Anthropozoic era)’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구적 자연관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채 인간 이성이 기계론적 자연을 인식하고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지구전요 서문 에서“무릇 사람들이 지구의 표면 위에 함께 살면서 (행성들이) 도는 데에 의지하고 기화를 타서 평생을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고 말했다. 이와 같은 그의 인간관에 굳이 이름 을 붙인다면“지구운화 내 공존재(地球運化內共存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와 생태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도 높아 지고 있는 오늘날, 최한기의 생각이 시사를 주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氣學

明南樓隨錄

神氣通

人政

地球典要 推測錄

김지하, 생명학, 서울: 화남, 2008.

노혜정, 「地球典要」에 나타난 최한기의 지리관」, 지리학논총 제45호,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 소, 2005. 야규 마코토(柳生眞), 崔漢綺 氣學 硏究, 서울: 景仁出版社, 2008. 이면우, 「地球典要를 통해 본 崔漢綺의 世界 認識」, 인문사회교육연구 제3호, 춘천교육대학교 인문사회교육연구소, 1999.

崔漢綺 저, 李佑成 편, 明南樓全集, 서울: 驪江出版社, 1986.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지음, 인류세, 정서진 옮김, 서울: 이상북스, 2020.

伊藤俊太郞, 近代科学の源流, 東京: 中央公論新社, 2007. 服部英二, 地球倫理への旅路──力の文明から命の文明へ, 札幌: 北海道大學出版會, 2020.

 

【지구형이상학】


6]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

 6]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

12)

요약문   현대 세계의 연계성과 상호의존성이 고도화되면서 종교들 간의 조우와 얽힘의 기회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속가능하지 못한 당대의 발전 방식은 지구 환경을 점점 더 불가역적으로 교란하고 있으 며, 이에 인류문명과 생태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의 공적 기여가 새롭게 요청되고 있다. 이 발표는 현대 지구화의 맥락에서 종교적 다양성과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지구종교학’을 모색한다. 필자는 먼저 아시아의 공간에서 제기되는 지구학의 조건을 살펴볼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는 아시아는 20세기 후반 이후 다양한 전통들과 문화유산의 지속 가운데, 탈식민화의 과정과 민족근대화의 복합적 결과들을 동시에 목도 해왔다. 이러한 아시아의 물질적·문화적 조건은 상이한 지구근대성의 양상을 보여주면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지구학을 요청한다. 둘째, 아시아의 지구학의 관점 에서 지구종교학의 개요를 살펴본다. 근대 종교학은 출발부터 지구종교학의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학문 분야로서 지구학은 비교적 최근에 출현했지만, 근대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뮐러 (F. Max Mül ler, 1823-1900) 이후 종교학의 발전은 지구화의 역사적 전개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 지구적·지역적 교류 와 의존성의 증가에 따라 심화되는 종교문화적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다루도록 인도하는 새로운 개념틀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필자는 지구종교학을 지구적 차원의 상호연계성의 맥락 속에서 종교현상을 고찰하

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사회 구성주의적 접근’(social constructionist approach)을 넘어 ‘지구 상호작용적 접근’(global interactive approach)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지구종교학의 개념틀이 적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전형적인 사례들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서 현대 지구사회에서 종교의 문화적 위치와 대안적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아시아의 지구화와 지구학

Ⅱ. 지구종교학 : 지구종교의 개념틀

 

* 캐나다 토론토 대학(University of Toronto)

I. 머리말

종교학(the science of religion)의 등장과 발전은 사회의 변화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유럽에서의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의 등장, 서구 국민국가들의 식민지 확장과 제국주의의 전개 등 근대 세계의 변화는 세계의 종교들을 두루 파악해야 할 필요를 낳았고, 이는 근대 종교학의 형성으로 귀결되었 다. 현대의 지구적 대전환은 지난 2-3세기 동안 근대문명 모델로서 자부해오던 서구사회의 탈중심 화를 낳고 있으며, 이는 종교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학문적 도전을 낳고 있다. 근대적 종교연구의 발생이 서구사회와 학계에 빚진 바 있지만, 지구화된 현대의 맥락에서의 종교연구를 돕는 새로운 개념들과 이론들, 분석모델, 가설, 지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필요해졌다.

20세기 후반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동하고 교류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지구 생태환경의 위기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인류의 삶에 끼치는 근 본적인 변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왔다. 21세기 들어서 지구적·초국가적인 현상의 여러 측면들 을 탐구하기 위한 학제간 연구의 분야로서 지구학(Global Studies)이 등장했다. 이러한 학문적·사회 적 변환 속에서, 지구적 관점에서 종교현상을 고찰하려는 지적 작업들도 크게 증가해왔다. 필자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종교의 다양한 차원들을 고찰하려는 연구를 지구종교학(Global Religious Studie s)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구종교학은 국경과 지역을 넘나드는 초국가적 종교활동뿐만 아니라 지 역의 종교현상이나 심지어 개인의 일상적인 종교활동도 지구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발표에서 필자는 먼저 아시아의 공간에서 제기되는 지구화(globalization)와 지구학의 조건을 

살펴볼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는 아시아는 20세기 후반 이후 다양한 전통들과 문화유산의 지속 가 운데, 탈식민화의 과정과 민족근대화의 복합적 결과들을 동시에 목도 해왔다. 이러한 아시아의 물 질적·문화적 조건은 상이한 지구근대성의 양상을 보여주면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지구학을 요 청한다. 둘째, 아시아의 지구학의 자리에서 지구종교학의 개요를 살펴본다. 근대 종교학은 출발부 터 다분히 지구종교학의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학문 분야로서 지구학은 비교적 최근에 출 현했지만, 근대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뮐러 (F. Max Müller, 1823-1900) 이후 종교학의 발 전은 역사적 지구화의 전개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 하지만 지구적·지역적 교류와 의존성의 증가 에 따라 심화되는 종교문화적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다루도록 인도하는 새로운 개념틀이 필요한 상 황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지구종교학의 개념틀이 적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전형적인 사례 들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서 현대 지구사회에서 종교의 문화적 위치와 대안적 역할에 대해 살펴본 다.

 

Ⅱ. 아시아의 지구화와 지구학

지구화란 무엇인가? 지구화란 세계가 하나의 생활의 장소로 바뀌는 것 ) 또는 국가나 문명의 경

계를 가로질러 지구적 차원의 상호연계성이 강화되는 일련의 사회적 과정 )을 가리킨다. 지구화는 

보편성(universality)과 특수성(particularity)의 공존과 길항, 모방과 상호침투가 다양한 형태로 펼쳐 지는 현상이다. 지구화는 한 편에서는 지배력을 가지거나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제도, 범주, 기구, 표준, 모델, 언어, 문화, 통화 등의 세계적 차원의 확장을 뜻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지역의 문화나 권력 관계, 정체성, 특징 등이 지구적 차원의 흐름과 상호 연결되고 이를 반영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움직임과도 관계된다. 지구지방화(Glocalization)이나 지방지구화(Locablization) 같은 신조어들은 바 로 이러한 ‘지구-지역 연계’를 보다 면밀하게 개념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지구화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지구사(global history) )는 점점 더 지구화되는 현대

사회가 지구의 과거와 사뭇 비슷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TGIF(Twitter, Google, Internet, Facebook) 같은 정보통신기술(ICTs)의 발달과 디지털 문화, 대륙을 

넘나드는 초장거리 이동의 대중화, 고도화된 초국적 금융과 기업의 등장으로 오늘의 지구인식(glob al consciousness/imaginaries)은 불과 몇 십 년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증가했다. 정보와 소통과 관련 된 기술의 발전과 초국가적 이동을 위한 장거리 운송수단의 광범위한 활용은 사람들이 국경과 문 명의 경계를 넘어 손쉽게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고안하고 더욱 사용하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정보-소통-이동 기술의 발전이 낳은 새로운 장치들과 도구들, 플랫폼 등을 활용한 지구적 소통과 상호작용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형성해온 문화와 관습, 지역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와 분리되지 않는다. 아시아의 사회들과 지역들, 국가들 안에서 또는 경계를 넘어서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해온 물질적·문화적 유산은 현대의 지구-지역 역학에 상당 부분 영 향을 미치거나 경로의존적 관성을 갖는다. 

정치, 경제, 문화, 환경, 기술, 종교 등 지구화의 측면들을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지구학(Global St

udies)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근대성의 기원을 서구에 두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로부터의 분리이다. 그간 유럽이 보편적이 합리적이라면 아시아는 특수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아시아는 폄하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주의나 옥시덴탈리즘, 배타적 지역주의에 대한 옹 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구화에 대한 자민족중심적 접근은 서구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국민국가 중심의 발전 패러다임의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동전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 다. 냉전 이후 아시아에 대한 지역연구는 지난 약 2-3백 년 간 사회구성의 기본틀이 되어온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중적인 정체성을 띠면서 지역을 넘나드는 소통으로 이루어졌던 아시아의 초 국가적 상호작용 또는 인터아시아적 연계망에 주목해왔다5). 특히 아시아의 바다는 문명사의 관점 에서 볼 때 지구화의 요람이자 출발점이었다. 일찍이 15세기 이전부터 아시아의 해상교역은 동서 간 장거리 해상 루트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의 상인들, 아랍 상인들, 중국 상인들이 아덴(Aden)에서부터 남중국의 광둥(廣東)까지 연결된 교역망을 활용하였다.6) 강력한 국경에 따라 지역이 영토로 나뉘어지는 근대의 공간이 형성되면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서양을 연결했던 무슬 림 에큐메네(ecumene)나 실크로드를 따라 존재했던 초지역적 상업문화 네트워크가 상당부분 해체 되었다. 그러나 전근대 인터아시아의 세계와 비슷하게 글로벌 냉전 이후 다양한 세력들이 이념보 다는 필요에 따라 관계 맺고 경쟁하는 다극화된 국제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현대 아시아에서 지구화로 인한 초국가적 상호의존과 이에 따라 다양하게 확산되는 지구적 상상(global imaginaries) 은 과거의 문화적 각인과 느슨하게나마 남아있는 오래된 초지역적 네트워크와 중첩되어서 증가하 고 있다. 

21세기 아시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문명의 모습은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일방적인 모방도 아니 고, 지역의 과거의 기원들과 상관없이 형성되는 오로지 현대적인 지구적 전환의 결과물도 아니다. 지금 아시아의 지구화는 아시아의 여러 문명권에서 원시적 형태로 나타났던 고유한 근대성의 맹아 들, 식민지 시기에 축적된 국가주의적 근대화의 잔재, 현대의 지구적 조우와 의존성 등이 서로 간 에 상호작용하여 형성되는 지구근대성(global modernity)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지구화된 한 국사회는 원시 근대성, 식민지 근대화, 탈식민의 결과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지구근대성의 좋은 사 례를 이룬다. 조선조 유교문화의 유산과 윤리규칙이 계속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의 뒤틀린 식민 지 개발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류가 보여주는 것처럼 현대의 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아시 아 및 세계 곳곳과 소통하거나 타국의 사람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이 동시에 함께 엉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아시아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지구화란 아시아 지역의 역사 와 문화의 경로, 현대의 지구적 연결망이 상호작용하여 나타나는 지구지방화(glocalization)의 모습 을 띤다.7)

2차 세계대전 이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등 아시아의 여러지역 의 탈식민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개발 프로젝트들은 국민국가 간의 상호고립을 지향하기보다는 초

 

5) Abu-Lughod, Janet.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D. 1250-135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Duara, Prasenjit. “Area Studies Scholarship of Asia”, Matthias Middel ed., The Routledge Handbook of Transregional Studies. London: Routledge, 2018, pp. 41.

6) 주경철, 대항해 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6-26쪽. 

7) 조규훈, 「현대·서구 중심적 지구화를 넘어서: 아시아의 종교전통들과 다중적 지구화들」, 종교연구 제

79집 2호, 2019, 51-55쪽.

국경적 교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남아시아지역협력 연합(SAARC),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CP), 아시아태평양협력체(APEC) 등 아시아의 지역협의 체들은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 개방적이고 느슨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고 연결되어 있다. 실크로 드나 무슬림 상인들의 사례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등 역사적으로 아시아는 교역이나 종교를 매개로 연결된 네트워크 지역이었다. 네트워크 모델은 영토적 균질성에 대한 상상을 전제로 하는 지역주 의 모델과는 다르다. 지금 중국이 진행하는 초지역적 교통인프라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 B elt and Road Initiative)는 고대에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했던 비단길이나 해상교역로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보여준다. 아시아의 지역들을 초국가적으로 연결하고 의존하게 만들어 지역의 평화 와 번영을 담보하려는 시민사회와 비정부기구, 국가들의 노력은 아시아의 지역들을 점점 더 연결 하며 지구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근대의 주권이나 발전의 개념들에 대한 변화를 요청한다. 

요컨데 아시아 지역들을 가로지르며 통합시키는 현대의 지구적 전환에 있어서 종교 네트워크나 

문화적 각인들은 선도적 역할을 하거나 변수, 심지어는 주요한 주체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시 아의 지구근대성이 보여주는 초국가적인 상호의존성의 형태는 지구화된 세계의 미래가 지구 과거 의 사회들이 연결되어 있던 방식들과 유사하거나 연계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지구화에 대한 세밀한(nuanced) 이해를 위해서는 전통, 사상, 문화, 종교, 전근대의 초지역적 소통의 방식들 등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III. 지구종교학 : 지구종교의 개념틀

1. 20세기의 종교연구 방법론을 넘어서기 근대 흄볼트적 철학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를 통합하고 인문주의적이고 개인적인 가치들을 진작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치들은 대체로 국가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고안된 의제들에 의해서 구성 된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 개념이 국민국가들에 수용되면서, 인문사회과학의 목표는 개인과 공동체 의 안전을 보장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명을 달성하기 위한 ‘국가현 대화’에 두어져 있었다.8) 이러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에 적합한 종교연

구를 위해서는 방법론적 민족주의(methodological nationalism)와 인식론적 지역주의(epistemological provincialism)를 지양해야 한다. 일국사회의 단위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분석의 기본틀로 삼기보다 는, 지구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종교현상을 ‘내부’와 ‘외부’, ‘식민지’와 ‘종주국’, ‘동양’과 ‘서양’의 접촉과 교류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만들어낸 우연적인 결 과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근대 서구와 동아시아 지역이 상당부분 공유하는 세속주의

 

8) Duara, Prasenjit (두아라 프라센짓), 「인류세에서 아시아 연구의 의제」, 아시아리뷰 제4집 1호, 2016, 

15-23쪽.

적 관점에서 다른 지역의 종교문화를 이해하려 하는 인식론적 국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다 른 문명권의 종교적 또는 세속적 역학을 최대한 통시적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다른 지역민들의 문 화 변동의 관점에서 자신이 속한 종교문화의 현실에 낯설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법론 적·인식론적 관점에서 ‘종교’ 또는 불교, 유교, 개신교, 천주교, 힌두교, 이슬람 같은 ‘종교 들’을 고정되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대신 종교를 공간과 시간의 맥락에서 인간적 흐름들의 교차가 형성하는 공간, 또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구성되는 고유한 소통의 양식으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9)

17, 18세기 유럽의 탈교회화 과정에서 계몽주의의 지적전통과 세속사회의 출현, 뒤이은 서구 국 민국가들의 식민주의적 확장에 따른 비서구 종교전통들의 ‘발견’은 근대 종교학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He who knows one, knows none.)”고 했던 막스 뮐러 이후 근대 종교학은 특정한 신앙이나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 비교의 관점에서 종교전통, 종교 현상, 종교사상, 종교집단, 종교의 역할 등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추구해 왔다. 이를 통해 다양한 종교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는 이론과 방법, 용어와 개념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 다. 종교학의 초창기에는 종교의 기원과 진화에 집중했다가, 점차 그것이 종교의 본질과 구조에 대 한 관심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종교의 의미나 기능에 대한 학문적 고찰로 옮겨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종교현상의 다중성과 복합성 자체가 주요한 주제로 부각하여,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방법론을 활용하여 이를 이해하려는 학문적 시도가 증가했다. 1980년대 이후 그리스도교나 아브라 함계 종교가 예증하는 ‘신앙’, ‘조직’, ‘기원’, ‘경전’, ‘신학’ 등과 같은 일련의 장치들 을 종교를 구성하는 암묵적 기준으로 삼아 종교를 정의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접근이 종교학 내에 여전히 만연하다는 비판도 나타났다.10) 현대 종교학은 ‘제도중심적’ 종교연구를 넘어서 종 교현상의 일상성과 물질성에 집중하거나, ‘주류종교’ 보다는 ‘신종교’ 또는 ‘새롭게 나타나 는 영적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탈식민이론이나 성(gender) 정치학의 관점에서 종교가 구성되 고 작동하는 미시적 역학이나 ‘문화정치’를 고찰하거나, 심지어 “종교란 연구자 상상의 산물” 이라는 관점에서 종교학자들이나 종교전문가들의 저술들의 바탕이되는 의식구조, 종교문화적 배경, 지정학적 지향 등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11)

20세기,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를 풍미한 대표적 사회과학적 종교이론은 ‘세속화론’(seculariz

ation thesis)과 ‘종교시장론’(market theory of religion)이었다. 전근대와 다른 근대사회의 세속적 전환에 따라 등장한 세속화론은 유럽사회가 탈주술화(disenchantment)를 겪으며 제기된 것이었다 면, 종교경제론은 자본주의 경제론 또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만연한 미국에서 교단화된 종 교들(denominational religions)이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종교시장’에 대한 관찰로부터 비롯되

 

9) 조규훈, 「종교와 지구화: 근대 종교체계의 형성, 탈구, 확장」, 종교연구 제79집 1호, 2019, 13-15쪽.

10) Asad, Talal. “The Construction of Religion as an Anthropological Category”, Melissa M. Wilcox. Religion in Today’s World: Global Issues, Sociological Perspectives. New York: Routledge, 2013, pp. 17-34.

11) Smith, Jonathan Z. Imagining Religion: From Babylon to Jonestow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 xi-xiii.

었다. 아직도 종교변동의 근대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이 종교이론들은, 현대 의 종교적 다원상황에 직면하여 각각 ‘종교의 쇠퇴’와 ‘종교의 성장’이라는 상반된 주장을 내 놓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창출된 경험적 토대가 서구세계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민국가에 기반한 일국사회를 종교현상에 대한 분석의 기본단위로 활용하였고, 세속적⋅합리적 민족근대화 의제에 부응하는 관점들에 인식론적으로 의존하는 문제를 노정했다는 점에서는 두 이론은 일치했다. 관찰 의 대상을 전 세계로 확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비서구사회를 보면, 훨씬 많은 인구가 종 교적 경외감을 소중히 간직하며 살고 있으며, 그들의 다수가 ‘종교’를 어떤 효율성의 관점에 따 른 선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자신과 세계를 통합시키는 ‘삶의 양식’으로 여긴다.

2001년의 9/11 테러 이후 세속문화가 재성화(re-sacralization)되고 공공영역에 종교의 개입이 일 상화된 ‘탈세속사회’(post-secular society)에 들어섰다는 공감대가 커졌다. 새천년의 종교적으로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인문사회과학 일반을 가로지르는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은 종교 에 대한 관찰과 분석의 범위를 서구나 특정 국가, 사회, 지역, 또는 특정한 종교문화권이 이끄는 것에 고정하기 보다는, 지구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종교문화적 상호작용으로 확장시키면 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세계는 세속화로 인한 ‘종교의 종언’보다는 광범위한 ‘종 교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으며, 현대 지구사회의 종교적 역동성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환원시키기 에는 훨씬 더 복잡한 역사적 뿌리와 다원성을 보여준다. 종교연구자들은 현대 지구사회로 ‘초월 성’ 또는 ‘성스러움’이 새롭게 소환된 이유 그리고 그것의 탄력성과 중층성의 형태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또한 명료하게 기술하고 설명해야 하는 학문적·사회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2. 지구종교학의 이론적·방법론적 기초

20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을 풍미한 두 종교이론이 갖는 설명력의 한계는 21세기의 종교연구에 있어서 지구적 전망의 필요성을 반증한다. 오늘날 종교학은 지구화된 세계의 종교문화적 연결과 상호의존, 혼종성, 보편적인 것으로 상상되는 ‘종교’와 ‘세속’이라는 범주나 표준 또는 가치에 대한 지역적 전유와 재해석의 양상들, 그리고 종교적 재현들, 담론들, 실천들의 물질성과 일상성 또는 ‘탈종교화’ 등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복합적인 종교현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다각적이면서도 엄격한 고찰을 통해 학문적 해석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론틀을 제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세계의 특정 지역이나 단위, 혹은 그것의 문화적 양식이나 역사적 결과에 일방적으 로 의존하는 방법과 이론으로 지구사회 곳곳의 종교문화를 이해하기보다는, 특정한 (지역의) 종교 변동도 세계적 규모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서 이해하도록 돕는 전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맥락에서 두드러지는 종교문화적 특징은 기존의 종교 개념이나 범주의 밖에 있거나 이를 통해서 파악하기 어려운 종교적 다양성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종교이론은 지구사회의 상호연결이 초래하는 미증유의 종교적 다양성을 총괄적으로 조망하면서 그것의 전체와 부분을 통 합적으로 설명하도록 요청받는다. 지구종교학은 ‘종교’의 형성과 변동을 지구화 과정의 주요한 측면으로서 이해하고, 경험적 연구를 통해 지역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지구종교’와 그 것의 관련문제들을 발견적(heuristic)으로 고찰함으로서 진화를 이루어 나가는 연구로서 정의될 수 있다.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이해와 관련된 주요한 쟁점들은 모두 이러한 지구화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장거리 운송수단의 대 중화, 대륙의 경계를 넘어가는 이주의 증가 등이 지구화 현상을 촉발시켰다고 흔히 주장된다. 어떤 면에서 종교전통이야 말로 지구화의 선구자였다. 지역과 인종, 문화적 경계를 넘는 ‘보편종교들’ 의 발생이야말로 종교의 지구성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구종교’(global religion)란 지구적 차원에서 관찰되는 종교적 다양성을 개념화하기 위한 용 어로 선택되었다. 새천년에 들어서 마크 주어겐스마이어(Mark Juergensmeyer) )는 지구화된 세계 의 종교현상을 총괄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지구종교’ (global relig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 개념을 좀 더 체계화하여 활용할 수 있다. ‘지구종교’는 ‘종교와 지구화’ (religion and glob alization), ‘지구화의 종교적 차원’ (religious dimension of globalization), ‘종교적 지구화’ (relig ious globalization)등의 표현과도 대체 가능하다. 지구종교학은 역사적 기원과 맥락을 주요하게 고려 하지만, 모든 시대를 가로질러 적용되는 보편적 이론을 지향하기보다는 일차적으로 근대시대로 제 한된다. 

‘지구종교’는 지구화가 초래하는 미증유의 종교적 복합성 전체를 조망하고 설명하는 이론적 전망으로서 제안된다. ‘지구종교’는 기본적으로 ‘종교-탈종교-탈세속’의 동시성으로 나타나며, 다양한 지역적·문화적 상황에서 각각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관계하고 때로는 상호의존하거나 중첩되면서 다양하게 맥락화된다. ‘지구종교’의 형성을 이러한 근대 종교체계의 등장과 그것으로부터의 탈구, 그리고 다른 사회영역들로의 종교의 확산이라는 삼중적 과정으로 구 분되지만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조망할 때, 현대의 종교적 다양성 또는 복합성과 그것의 변동 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국경과 문화적·지역적 경계를 넘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종교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일국 사회나 특정 지역, 어떤 영토화된 공간 내부의 종교적 역학에 대한 분석에 집중하는 ‘사회구성주 의적 접근’(social constructionist approach) 넘어, 지구적 차원의 상호연계성의 맥락 속에서 종교현 상을 고찰하는 ‘지구상호작용적 접근’(global interactive approach)이 필요하다. 지구화의 맥락에 서 주요한 종교적 쟁점이나 과정, 종교집단과 개인들, 실천들과 담론들을 고찰하고 해석하기 위하 여, ‘지구상호작용적 접근’은 종교/문화적 역사들 그리고 대화적이며 또는 순환적인 조우들 사이 의 상호작용을 주요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지구상호작용적 접근의 관점에서 지구화된 지역의 상황 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종교현상의 다양한 측면들과 행위자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종교’-‘탈종 교’-‘탈세속’라는 지구종교의 삼중적 측면들과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을 주요하게 살핀다.

 

지구종교를 형성하는 각 측면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 (religion). 역사적 지구화의 흐름은 ‘세속’을 종교적 규범과 제도들로부터 분리하는 방식

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는 ‘종교’(religion)라고 불리는 구별된 영역 또는 체계의 지구적 구성을 돕는다. 근대 지구화의 결과인 세속성 )의 등장 가운데 사회로부터의 ‘종교’의 분화가 제도화되 고 ‘종교들’, 특히 이른바 ‘세계종교’들이 ‘종교’의 주요한 구성물로서 나타났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한 쌍의 원칙을 통해 ‘종교’ 범주는 지구적인 차원에서 제도화된 것 으로 나타난다. 

탈종교 (post-religion). 현대 지구화의 진전은 국민국가 질서와 결탁된 ‘종교’의 경계를 넘나드

는 개인적이고, 물질적이며, 감각적이며, 일상적이고, 선택지향적인 ‘영성적 전환’을 추동한다. 이러한 ‘종교’의 해체 또는 문화적 탈구 현상에 집중하는 종교학자들은 ‘물질종교’, ‘생활종 교’, ‘종교 이후의 종교’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화의 진전에 따라 선진산업사회를 중심으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형성된 국민국가의 제도와 병행하지 않는 

‘대안적 종교성’, ‘탈종교’(post-religion), ‘영적혁명’(spiritual revolution) 또는 종교문화적 혁 신 현상에 대한 보고가 증가해 왔다. 

탈세속 (post-secular). 지구화로 인한 생활세계의 압축은 공적이거나 세속적 공간으로 간주 되어

온 사회영역들 속으로 종교의 확장과 개입을 요청하고 초래하는 ‘탈세속적 전환’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이에 대한 학문적 담론들이 ‘종교의 부흥’, ‘공공종교’, ‘종교의 귀환’, ‘현대의 재성화’, ‘종교의 탈분화’ 등의 표제들 아래서 증가해 왔다. 

요컨대 지구화의 종교적 차원 또는 ‘지구종교’는 ‘종교’, ‘탈종교’, ‘탈세속’으로 분리 될 수 있지만 긴밀히 연동되어 작동하는 종교성의 중층적 구성으로서 나타나며, 이러한 종교적 다 원성의 체계는 일련의 관련문제를 만들어 내면서 지역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게 맥 락화 된다. 이러한 지구종교의 개념틀을 활용하여 개인의 (종교의) 자유, (종교) 집단 또는 전통의 위치와 역할, 종교적 혼종성, 국가제도의 성격 그리고 사회영역들과 제도들의 형태 등 일련의 관련 문제들(reference problems)이 어떻게 구체화 되는지 고찰해 나갈 수 있다. 

참고문헌

조규훈, 「종교와 지구화: 근대 종교체계의 형성, 탈구, 확장」, 종교연구 제79집 1호, 2019.

조지형, 「지구사란 무엇인가」, 서양사론 제92집, 2007.

주경철, 대항해 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Abu-Lughod, Janet.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D. 1250-135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Duara, Prasenjit. “Area Studies Scholarship of Asia”, Matthias Middel. The Routledge Handbook of Transnational Studies. London: Routledge, 2018.

Juergensmeyer, Mark. The Oxford Handbook of Global Religio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Robertson, Roland, Globalization: Social Theory and Global Culture, Sage Publication, 1992.

Steger, Manfred B., “What is Global Studies”, Mark Juengensmeyer, Saskia Sassen, Manfred B. Steger and Victor Faessel eds. The Oxford Hanbook of Global Stud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Taylor, Charles. A Secular Age, Cambridge, M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Turner, Bryan S., Religion and Modern Society: Citizenship, Secularization and the Sta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지구기학】


4] 【지구예술학】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

 4] 【지구예술학】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 

요약문   전 세계적 규모로 기후변동과 코로나19의 확대와 같이 인간활동에 기인하는 대재난을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예술은 의학이나 과학과 같은 방식으로는 인류의 생존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 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는 인간활동의 ‘지구화’의 흐름과, 인간활동으로서의 예술, 특히 마르셀 뒤샹(Marc el Duchamp, 1887~1968)이래의 현대 예술의 역사가 그 정의(定義)에 대한 다시 물음을 통한 영역확대의 연 속임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의 예술에서 인간의 지구인식의 변용을 촉구하는 ‘잠재력’의 기미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계 예술계에서의 인류세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는 그러한 전조의 측면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 발표에서는 한국의 최재은(1953~)이 DMZ를 무대로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기획한 《대지의 꿈》 프로젝트나 일본의 아메미야 요우스케(雨宮庸介, 1975~)의 ‘사과’를 주제로 한 작품 제작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구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동아시아 현대 아티스트

의 작업을 포스트-미디엄(post-medium)이나 신유물론(new materialism)과 같은 이론을 원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작품에 내재하는 기술/물질/정신의 고유성의 이종혼잡 상태=중간적 운동상태를 힌트 삼아, 예술제작이나 이론을 지구인식을 새롭게 하는 매체(medium)로서의 가능성으로 전치(轉置)시킬 것을 주장하 고자 한다. 전체적으로 지구를 자신의 반신(半身=alter ego)으로 간주하고, 미적이면서 직접적인 형태로 지구 에 살기 위한 사고영역, 즉 ‘지구예술학’에 이르는 방법을 제창할 생각이다.

차 례

Ⅰ.‘지구예술학’을 그리기 위해서

Ⅱ. 동력으로서의 사과:아메미야 요스케(雨宮庸介, 1975-)

Ⅲ. 세계를 꿈꾼다: 최재은(崔在銀, Jae-Eun Choi)

Ⅳ. 맺으며

이번 발표에서는 예술윤리와 존경할만한 예술가들의 작품제작의 사례 등을 소개하면서, 인간이 예술제작을 통해서 지구를 어떤 형태로 재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재인식을 토대로 무엇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런 사고의 형식을‘지구예술학’의 가능성

 

* 아오모리 현립미술관 학예원

을 검토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Ⅰ.‘지구예술학’을 그리기 위해서

‘지구예술학’이라는 미지의 학문영역의 개요를 알기 위해서 먼저 사과를 실마리로 삼고자 한 다. 여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아이작 뉴톤(1643-1727)이다. 그는 일설에 의하면 낙하하는 사과를 보 고 만물을 지구 내부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중력 작용에 대해서 미셀 세르(193 0-2019)는 그의 저서 자연계약(Le Contrat Naturel)(1990)에서“최초의 대규모적인 과학시스템”이 라고 말했다. 만유인력은 우리와 지구의 결속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인간은 이미‘사회 계약’을 매개로 인간들끼리의 결속으로서의 사회를 손에 넣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인간사회의 팽창, 즉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필연적이고, 최근의 하두인 인간활동이 지구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시대구분인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는 사회계약이 행해진 시점에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사회계약을 대신하여 세르가 주창한 것이 인간과 지구의, 오늘날로 말하 면‘공생의’‘지속가능한’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재생관계를 맺을 것을 주창한‘자연계약’ 이었다. 인간을 날줄, 자연을 씨줄로 해서 지구를 위한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세르의 제창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성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사물의 행위를 고찰하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 1947- )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과 접속된다. 그런데 세르가 제시한 바와 같이“모든 사람 들의 활동이 세계에 피해를 초래하고, 그 피해가 루프 회로에 의해 역전되어, 곧바로 혹은 일정한 기간 후에 모든 사람들의 노동의 소여가 되는”것을 믿는다면, 계약내용을 재검토하고 노동내용을 다시 묻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계약내용을 물을 시기는 지나가 버린 듯하다. 그것은 결국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아오모리현(青森県)은‘차세대 에너지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방사성 폐기물의 중간저장 시설이나 최종처분장과 함께 재생가능에너지를 다루는 기업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나는 자연과 의 공생관계를 희망하면서도 실제적인 계약테이블에 앉아 있는 상대방으로서 자연인가, 아니면 인 간존재의 그림자로서의 예술인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비생산적인 계약테이블을 떠 나서 방안의 창문을 열어젖혀야 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위의 문화나 자연환경과의 연대를 기점으로 세계를 다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이페이(台北) 비엔날레2020:你我不住在同一星球上 You and I Don’t Live on the Same Plan et”은 그 작업을 위한 인식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비엔날레는 브뤼노 라투르와 마틴 기나르 (Martin Guinard)의 큐레이션에 의해 전 세계 27개국으로부터 온 아티스트, 과학자, 활동가 57명 그 리고 단체가 참가한 국제예술제로 개최되었다. 타이페이의 아열대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타이 페이미술관 내외에서 개최된 이번 예술제를 특징지우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Planet TERRESTRIA L’이다. 거기에서는 지구 규모의 기후변동을 배경으로, 경제활동의 충실화와 지구에 가해진 부담 사이의 균형을 잡는 문제가 테마가 되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라투르가 지구 표면이나 풍토와 같은 뉘앙스를 담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예술제’라는 형식으로 검토하고 있는 점은 대단히 흥미 로운 일이다. 지역에 뿌리를 둔 예술제를 매체(medium)로 하여,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작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의 근육을 씨줄, 정의(定義)의 다시 물음에 의한 영역 확대의 연속으로 서의 마르셀 뒤샹 이래의 현대예술의 역사를 날줄로 해서 짜여진 한 장의 천을 상상해 보라. 그러 면 오늘날의 예술제작 가운데 인간의 지구인식의 변용을 촉구하는‘잠재력’의 기운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해서 매체로서의 작용으로부터 작품의 강도를 말하기 위한 실 마리를 설정함과 동시에 지구에 대한 이미지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찾아보고 자 한다. 

그것을 위해 이번에 접속을 시도한 것은 미술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 1940 -)가 제창한‘포스트 미디엄 이론’이다. 작품에서의 물질성을 중시하는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 t Greenberg, 1909-1994)를 스승으로 삼았던 크라우스는 점차 스승을 떠나 대안적(alernative) 비평 의 가능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에 걸쳐 제창되기 시작한 것이 포스트 미디엄 이론이었다. 대상으로는 주로 사진이나 영상 작품을 다루고, 작품을 성립시키 는 기술적 특질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작품에 포함되는 창조성을 이끌어 내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다. 작품 성립의 조건으로서의 물질에서 기술로의 시선 이동이 미술비평에서의 창조성을 새롭 게 한 것인데, 물론 현실의 작품제작은 그렇게 깔끔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의 작품제작은 물질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점점 복잡하게 얽히는 이종혼종성, 즉 뭐든지 들어 있는 상태가 자명 하게 되고 있다.     

본 발표에서는 오늘날의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기술/물질/정신이 이종혼합되는 상태를 중간적 인 운동상태로 새롭게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과 현실을 동시에 제작하고 새롭게 규정하는 등 의 행위를 발견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거기에서는 포스트 미디엄 이론을 매개로 새로운 지구인 식을 매개하는 예술제작의 가능성이 주장됨과 동시에, 그 주장은 작품 고유의 강도를 말하는 것으 로써, 끊임없이 작품 그 자체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구와 예술작품, 각각이 그리는 두 개의 원이 조금씩 겹치도록 해서 사과와 같은 형태의 방사선을 그려 나간다.‘지구예술학’이 라는 사고의 형식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런 형태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는 작품을 통해 사물의 운 동상태가 표면화되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지구를 새롭게 이야기하기 위한 동 력도 된다. 이 점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하에서는 두 명의 예술가의 멋진 작품을 소개하고 자 한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사과에 의해 보여졌던 꿈을 어디에서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 능성을 기대하고자 한다. 

Ⅱ. 동력으로서의 사과:아메미야 요스케(雨宮庸介, 1975-)

다시 아오모리현의 사과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아오모리는 일본 제일의 사과 생산지다. 그 역

사는 1887년 봄에 수입한 서양 사과 묘목 세 그루를 심은 데에서 시작된다. 그로부터 사과농업은 점점 발전해서, 지금도 이와키산(岩木山)이라는 산기슭을 중심으로 사과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 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너무나 단작농업의 풍경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주변을 걷거나 차로 달리거 나 하면 아오모리의 자연이나 사람의 활동은 사과 속으로 통째로 빠져 들어가서, 마치 한 개의 사 과 속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2019년 여름, 아티스트인 아메미야 요스케와 나는 이 사과 세계의 일각에서 사과 농가의 수확작 업을 거들고 있었다. 그 해 가을에“생명을 경작하는 장소”를 테마로  현대 아티스트와 농가 일 의 매력을 연결시켜 소개하는 전람회를 준비하면서, 출품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아메미야가 작업하 고 있는‘보편적인 사과’제작과 관련된 조사에 입회하기 위하여 그 장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아 메미야는 자신의 제작을 매개로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오가면서, 감상자에게 독자적인 지각이나 체험을 촉구하는 입체작품이나 퍼포먼스 작품 등으로 국제적으로 평가가 높은 예술가이다. 2005년 무렵부터 사과의 작품시리즈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 아메미야는 그 제작을 매개로 기존의 예술 이나 사회를 지탱하는 다양한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메미야가 목재에 유화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드는 사과 작품은 현실의 사과에 한없이 가까운 색채와 형태, 질감을 지니고 있고, 아메미야 자신의 말을 빌리면“사과가 어떤 기후나 지형에서 자라고 수확되 며, 어떻게 보관되어 현재 손 안에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독해하여, 그 문맥에 있어서 그 현재를 표 면에 그리는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사과가 썩지도 않은 채 전시된 상태 쪽으로 몸을 가 져가면, 왠지 그쪽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어 기르거나 먹을 수 있거나, 썩거나 변화하는 현실의 사과 가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된다. 

쟝 보드리야르(1929-2007)의“현실은, 현실 그 자체를 치밀한 복사로 삼아 버리는 초현실로의 과 정에서 붕괴된다”는 말이 머리에 스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메미야는 사과 제작에 몰두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계의 모든 것을 다시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과 에 대한 깊은 지견이나 정치한 기술은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순간을 현실로 불러들이기 위한 장대 한 사전준비가 아니었을까? 아메미야의 사과작품에는 작품세계와 현실의 월경(越境)을 유발하고, 세계 속의 자기의 존재형식을 변용시키는 다이나믹한 시스템의 측면이 있다. 이 포스트 미디엄성 (性)을 지적할 수 있는 아메미야의 작품제작에는 외재화시키지 않고는 자기를 인식할 수 없는‘계 약’과는 또 다른 수법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통째로 전환시키는 수법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메미야의 이‘보편적인 사과’는 앞으로 실제의 농업을 매개로 과일로 현실화될 계획이다. 거기 에서는 바타이유-보드리야르가 죽음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세계가 그 내 부에서 통째로 개벽되는 순간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Ⅲ. 세계를 꿈꾼다: 최재은(崔在銀, Jae-Eun Choi)

아메미야의 작품세계를 매개로 세계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그 다 음의 제작행위는 현실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어 서 소개하는 것은 한국 출신 예술가 최재은(1953-)에 의한 프로젝트 구상《Dreaming of Earth Proj ect》이다. 최재은은 일본의 꽃꽂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품이 지니는 독자적인 장(場)의 존 재방식을 추구하고,‘지구의 치유와 인간의 회복’에 대한 관심을 일관되게 지니고 있는 예술가다. 프로젝트 무대는 북한과 남한 사이에 위치한 비무장지대(DMZ). 원칙적으로 사람의 출입이 금지 된DMZ의 경계선 부근에는 두 나라의 군대가, 그 내부에는 300만개를 넘는 지뢰가 묻혀 있어, 지금 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70년 가까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상태가 보존되어 온 DMZ는2800종을 넘는 동식물이 생식하는 풍부한 자연환경을 지닌 장소이기도 하다. 프로젝트에서는 최재은의 주도 하에 DMZ중에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궁예도성(弓裔都城)을 중심으로 10㎞ 정도의 범위에서 4개의 프로젝트「1. 궁중정원(空中庭園), 정 자, 탑의 설치 2. 생명과 지식의 지하저장고 3. 궁예도성의 숲의 치유 4. 지뢰제거」를, 몇몇 아 티스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실현하려는 구상이다. 「1」에서는 건축가인 반 시게루(坂 茂)가 설계한 

궁중정원 주위에 카와마타 타다시(川俣 正)、이불(Lee Bul), 이우환, Studio Munbai, Studio Other Sp aces가 만든 정자를 산재시킨다.「2」「3」에서는 승효상(Seung H-Sang)이 새가 쉬기 위한 장소 -「새의 수도원」을, 조민숙(Minsuk Cho)이 생태학을 주제로 한 도서관과 종자은행(Seed bank)을 지 하에 축조한다. 이상의 작품들 이외에도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갈 때의 규칙이 설계되고, 환경을 배 려하면서 이곳에 체재하기 위한 복장 디자인 등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이 매우 장대한 프로젝 트는 국제연합과 한국정부에 제안되어, 현재 실현을 향해 검토가 거듭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전모 를 이 짧은 글에서 소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다. 그래서 우선 이번에는 이 프로젝트 구상이 2019년에 일본의 하라미술관(原美術館)에서 전람회 ‘자연국가’로 소개되었을 때에 최재은이 어떤 작품을 제시했는지를 소개하겠다. 전람회의 서두에는 “No Borders Exit in Nature”라고 쓰여진 텍스트 작품이 전시되고, DMZ에서 숨쉬는101종의 절멸위기종의 이름이나 종자를 조합한 설치예술 《To Call by Name》, DMZ에서의 경계선으로 사용되었던 철조망을 다시 주조하여 만든 철판을 조 합한 통로 모양의 작품《hatred melts like snow》등이 발표되었다. 두 작품에서는 국가나 전쟁, 철, 증오가 최재은의 상상력 속에서 변용되고, 어느 하나의 지향성을 동반하면서 재표상되게 된다. 그 지향성은 최재은에게 있어서 이상인‘자연국가(자연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최재은은 자신의 작 품 소재에 깃든 기술/물질/정신의 혼합상태를 재귀적으로 응시하면서, 제작행위를 매개로 그것 들에 다른 운동상태를 접목함으로써 프로젝트 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최재은 의 작품의 포스트미디엄성(性)이 기점이 되어,“세계를 자연이 지배하는 나라”로 이 현실을 엄밀 하게 개벽하는 가능성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앞에서 소개한 다양한 작품은 예술작품임과 동시에 자연이 지배하는 나라의 기초로서 현실화되게 될 것이다. 

Ⅳ. 맺으며

서두에서 말한 뉴톤은 만유인력의 착상을 1665년에서1666년까지 2년 동안 고향에서 휴가를 취하

는 도중에 얻었다고 한다. 그 휴가는 당시 유럽을 석권한 페스트의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염병이 한창인 때에 탄생한 지혜라는 의미에서, 뉴톤의 만유인력과, 코로나 재앙이 한창인 와중 에 지구인문학(Global Humanities)에 대해 검토하는 우리 사이에 반복적이면서 인력적(引力的)인 관 계를 생각하고 싶어졌다. 이 발표에서는 아메미야의 제작을 매개로 세계 속에서의 자기의 존재형 식을 변용시키고, 최재은의 프로젝트 구상을 매개로 세계를 문자 그대로 개벽하는 가능성에 대해 지적했다. 전체적으로 개체와 세계의 위상의 반복을 제작을 매개로 변조시키는 것. 즉 작품에서의 포스트 미디엄성을 응시함으로써 자기와 지구, 자아와 타아(他我)의 경계가 교차되는 운동상태의 과정에서‘또 하나의’자기(alter ego)를 이끌어 내고, 사람이 미적이면서 직접적인 형태로 이 지구 와 함께 살기 위한 존재영역을 현실화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지구예술학’이라고 부 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이 현실세계에서의 매일 매일의 제작행위 속에 매몰되면서도 끊임없이 사색을 추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 발표는 그 실마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번역: 조성환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 프로그람 +박맹수+박치완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

Globalogy: The Humaniti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

구분 시간 발 표  및  내 용 진행

개회

기조강연 09:00~09:10 등록/접수 원영상 

09:10~09:20 【개 회 사】 박맹수(원불교사상연구원 원장/ 원광대학교 총장)

09:20~09:40 【기조강연】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박치완(한국외국어대학교)

제1부 해외의 지구인문학

09:40~10:00 【1. 지구재난학】 지구살림의 영성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토호쿠대학) 조성환

10:00~10:20 【2. 지구예술학】 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아오모리현립미술관)

10:20~10:40 휴 식

10:40~11:00 【3. 지구종교학】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토론토대학)

11:00~11:20 【4. 지구기학】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원광대학교)

11:20~12:00 제1부 섹션토론

12:00~13:00                                  점심식사

제2부 지구인문학 의 이론과 상상력

13:00~13:20 【5. 지구형이상학】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이원진(연세대학교) 이주연

13:20~13:40 【6. 지구인류학】 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차은정(서울대학교)

13:40~14:00 【7. 지구정치학】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역사정치학자)

14:00~14:20 【8. 지구유학】 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통(通)과 균(均)을 중심으로 김봉곤(원광대학교)

14:20~14:40 【9. 지구살림학】 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조성환(원광대학교)

14:40~15:20 제2부 섹션토론

15:20~15:40 휴 식

제3부 지구인문학 의 실천과 연대

15:40~16:00 【10. 지구수양학】 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원광대학교) 김봉곤

16:00~16:20 【11. 지구교육학】 세계시민에서 지구시민으로  

                                               이우진(공주교육대학교)

16:20~16:40 【12. 지구윤리학】 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원광대학교)

16:40~17:00 【13. 지구평화학】 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원광대학교)

17:00~17:30                            제3부 섹션토론 

종합토론 17:30~18:00                                종합토론 허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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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지구위험시대의 학문의 전환과 대학의 역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번 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캐나다와 일본, 그리고 한국의 각지에서 참석해 주신 모든 선생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지구위험시대에 요청되는 학문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의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2020년 4월부터 매 주 <지구인문학 연구모임>을 진행해 왔고, 그 과정 속에서 경계를 넘어선

다는 것,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1년 넘게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지구라는 단 하나의 공동체에서 서로 공생하며 조화롭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학의 사명은 학문적⋅사상적 토대를 확고하게 정 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구’는 전 인류의 삶의 바탕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구성원들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구공동체에 대해 무지해 왔고, 무관심하 게 여겼으며, 번거로워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사는 이곳 지구,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든 가 족들을 위해 겸허히 마음의 자리를 내줄 때가 왔습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지구가 아닌 지구 가 있어 인간이 산다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그 지구적 전환을 위해 준비한 자 리가 오늘의 ‘지구학 학술대회’입니다.

오늘 학술대회에서는 박치완 교수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가타오카 류 교수님의 지구재난학, 오쿠와키 다카히로 교수님의 지구예술학, 조규훈 교수님의 지구종교학, 야규 마코토 교수님의 지구 기학, 이원진 교수님의 지구형이상학, 차은정 교수님의 지구인류학, 김석근 교수님의 지구정치학, 김봉곤 교수님의 지구유학, 조성환 교수님의 지구살림학, 이주연 교수님의 지구수양학, 이우진 교 수님의 지구교육학, 허남진 교수님의 지구윤리학, 원영상 교수님의 지구평화학 등, 다양한 영역에 서 경계를 넘나드는 지구학 발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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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고정 관념과 낡은 방식을 과감하게 바꾼다 는 것을 뜻합니다. 부디 오늘 진행되는 학술대회가 종래의 인간중심주의를 다시 돌아보고 당면한 지구위기상황을 깊게 고뇌하는 성찰과 사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오늘 첫걸음을 뗀 ‘지구학’이 장차 21세기에 한국학이 나아가야 할 학문적 지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선생님들이 앞으로도 끈끈한 학문공동체로서 진지한 학술교류를 이어 나가 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것으로 개회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2021년 3월 19일 

원광대학교 총장 박맹수

 


 

   

 

  차 례

개회사····························································································· 박맹수  4

□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박치완……  9

□ 지구살림의 영성학····························································· 가타오카 류…… 33

□ 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 47

□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 59

□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眞)…… 69

□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이원진…… 83

□ 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차은정…… 107

□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김석근……119

□ 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김봉곤……137

□ 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조성환……151

□ 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161

□ 세계시민주의에서 지구시민주의로·············································· 이우진……177

□ 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189

□ 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201

 


 

【기조강연】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 지구(인문)학의 연구방법론을 제안하며 박치완(朴治玩)*

요약문   

삶의 공간, 즉 주거지는 그것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위치하건 인간이‘장소-세계(place-world) 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그런데 현대인의 생활공간이 점점 도시화, 상업화, 디지 털화되면서 장소-세계를 잃은, 빼앗긴 실향민들의 수가 매년 늘고 있다. 오직 경제-성장만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삶의 진원지인 장소-세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 소가 자본화되고, 비인간화된 곳에는 예외 없이 무한 소비를 부추기는 상업공간들이 들어선다. E. 렐프의 표현대로, 현대인은‘장소 상실’이 보편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우리가‘장소’개 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인간 = 장소-내-존재(Being-in-place)>라는 의미를 되새 겨보기 위해서다. E. S. 캐이시에 따르면,“장소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에 비춰보면,‘철학을 한 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사는‘장소를 철학화한다(philosophizing Place)’는 말이다. 실존의 장소를 주체, 의 식의 직접적 대상으로 연구한다는 뜻이다.‘장소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lace)’은 장소에서 발원하고 전개되는 개인과 집단(공동체)의 문제를 응용현상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한마디로‘철학을 장소화한다(placin g Philosophy)’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동안 철학은‘어느 곳’에서나‘언제나’ 적용 가능한 일종의‘기하 학적 공간 보편주의’에 함몰돼 있었다. 제3세계의 철학이 재지성(territoriality)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도 여 기에 있다. 재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제3세계의 철학은 운명적으로 구미 중심의 세계지배적·식민 적 지식체계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00년대를 전후해 이를 자각한 제3세계에서 탈식민적 운동의 일환으로 새롭게 제안한 철학의 디자인이 바로‘지역-로컬 기반의 세계철학(locals-based global philo sophy)’이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에서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지구학’을 지역-로컬 기반의 세계 철학 운동과 연대해 어떻게 한국철학을 세계화할 수 있을지 그 방법론에 관한 제안을 하는데 연구 목표가 있다. 주제어 : 장소, 장소 상실, 장소의 현상학, 철학의 장소화, 장소의 철학화, 지역-로컬 기반의 세계철학, 지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차 례 

I. 머리말 : 어디에서 철학을 하는가?

II.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과 그 방법론 

  1.‘지구학’, 용어 선택 또는 번역어의 문제

2. 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의 필요성

3. 로컬과 글로벌, 서구와 비서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E. 두셀의 해법

III. 맺음말 :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대와‘장소감’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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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는“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또는“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철 학에 대한 권리에 대한 질문은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어디’는 곧 어디가 철학의 권리를 갖는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철 학의 가장 적합한 장소는 어디인가?” 

- Derrida, cited by B. Janz, In“Philosophy as if Place Mattered”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E. S. Casey, Getting Back Into Place.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종속된 장소 안에 존재하며, 우리가 장소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장소가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장소는 우리 안에 있고,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다.” 

- E. S. Casey,“Between Geography and Philosophy: What Does It Mean to Be in the Place-World?”

I. 머리말 :‘어디’에서 철학을 하는가?

철학도 과학도 실제“세계에 대해 더 완전한 그림(a more complete picture of the world)” )을 그리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인간’을 잊는 경우가 허다하다.‘인간’이 철학 과 과학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것은 인본(인문)주의가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철 학과 과학이 추구하는‘더 완전한 그림’에서 어떻게‘인간’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는가? 철학 자나 과학자마저‘이해관계’에 따라 마치‘비즈니스’나‘사업’을 하듯 행동하는 것을 더는 지 켜보고 있어야 할까?‘인간’과 무관한,‘인간의 삶’과 거리가 있는 철학과 과학은“우리의 지성 사가 정당한(right)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반증이라 아니 할 수 없다.2) 

M.  맥베스가 철학과 과학에 필요한 것은“인간적 관점(human perspective)”,“인본주의적 규율 (humanistic discipline)”이라 강조하며 인간의 지성 활동이“인간의 삶, 우리의 삶, 그것들의 다양 한 측면”을 탐구하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라고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주어진 현실을‘객관 적으로’,‘과학적으로’,‘절대적으로’ 사고한다고 빙자하며,‘인간’과‘삶’을 망각한 것이 철 학과 과학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 맥베스의 주장인즉, 철학과 과학이 추구해야 할‘더 완전한 그 림’에는 기술-경제의 지배 시대일수록 인간과 인간의 삶을 위한 배려에‘더 많은 고민’을 투자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배려하고 고민하는 학문은“우리가 사고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과 함께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는가(where we are)로 부터 시작된다.” ) 

요인즉 철학과 과학은 각자가 존재하는 곳, 즉 삶의 장소에 대한 사고의 촉각을 계발할 때 기술 과 경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잊혀진‘인간’을 삶의 본래 자리, 하이데거의 표현대로,‘세계-내존재(Being in the world)’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세계-내-존재라는 것은 개 인과 사회공동체, 로컬과 글로벌 간에 자유와 평화, 정의와 분배, 인권과 민주주의가 일상의 삶에 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괘를 같이 한다. 철학과 과학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것 과 새롭게 등장한 것, 현실의 작은 조각에 대한 연구와 현실 전체를 통찰하는 연구, 한 지역-로컬 문화에서만 통용되는 지식과 전 지구촌에 이롭고 유용한 지식을 종합하는 노력에 더 많은 공을 들 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학자는 단지 과거의 개념들, 과거의 담론들과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임무를 다한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는 당대에 제기된 물음들과 씨름하는 것이 일차적 임무다. 자신과 씨름하며 자신의 철학을 그가 사는 시대와 장소 위에 새로 운 담론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곧 철학자의 역할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부합해‘창조된’철학적 결과물이라고 해도 5대양 6대주의 독자를 만족시킨 적은 드물거나 거의 없다. 이는 철학에도 기본적으로‘지리-문화적 색깔’이 배태돼 있다는 방증 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이성-진리-보편학인 철학도 지리(더 정확하게는‘장소’)의 제한을 받는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철학은 그 것이 탄생한‘장소’에서 자양분을 얻는다는 점일 것이다. ) E. S. 캐이시가 장소로 되돌아감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히 말하지만, 재 지성(在地性, territoriality)이 없는 철학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의 재지성은 마 치 개인의 신분증명서와도 같다. 인도에서 출발한 원시·근본불교가 치열한 자기 응시와 직관을 중시하는 한국의 선불교, 염불 수행법을 위주로 하는 일본의 정토 불교, 자비와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티벳 불교와 다른 것도 바로 그것이 탄생한‘장소’의 영향 때문이다. 로컬 지식의 저 자 C. 기어츠의 방식으로 이를 바꿔서 표현하면, 모든 철학은‘로컬 철학’이란 뜻풀이가 가능할 것이다. ) 단적으로 말해, 지리적 환경이 철학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바지만, 아테네는 국가의 탄생지이고, 쾨니히스베르크는 순수이성 

비판 등 3대 비판서를 탄생시킨 칸트의 고향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고 믿었던 철학에 이렇게 재 지성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대개는“그럴 리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하 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른 장소(지역, 국가)’에서는‘다른 철학’이 탄생한다는 점이다. 단지 하나 의 가정일 뿐이지만, 플라톤이 만일 곡부(曲阜, 취푸)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는 제2의 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강원도 평창의 판관대(判官垈)에서 태어났으 면 그는 분명 성찰이나 철학의 원리 대신 성학집요나 인심도심설을 남겼을 것이다. 철학 에는 이렇게 개인과 마찬가지로 장소, 번지수가 따라 붙는다.

철학의 재지성 및 본토성은 거듭 강조하지만 철학이‘장소’를 기반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증거이고 ), 철학의 적지(適地)가, 데리다가 믿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와 같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즉 철학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세계는 다양한 장소다(C. Geertz)” )라는 말과 같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런 이유 때문에‘하나의 보편적 대답’을 기대할 수 없으 며, 이를 기대하거나 염두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허황된 꿈인지 모른다. 감히 말하지만, 철학은 모든 사람, 모든 공간에 적용되는‘진리(episteme)의 학’이 아니라 개별 장소에서 각기 자신의 ‘의견들(opinions)’을 자유롭게 제시한 학문이었다고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자기 반성, 자기수련이 미족(未足)한 철학자들(philodox)은 여전히 마치‘야곱처럼’, 모두가 동일한 방식, 동일한 목표로 철학을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본고의 논제인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를 통해 필자가 근원적으로 역문(逆問)하

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은 기하학적 공간 보편주의자들의 믿음처럼 결코 장소와 무관한 학문이 아니다. 우리는 아테네에서, 슈투트가르트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서울에서, 동경

에서 철학을 한다. 철학은 재지적 세계관〔placial(geographic) worldview〕에 기초한 지적 구성이자 동시에 재지적 창조다. 그 때문에 재지성은“철학이란 무엇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골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결과물이 보편적인가 아니면 특수한(지역-로컬적인) 것인 가를 궁추(窮追)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결과물이 축적되었을 때, 즉 추후에 논의할 문제다. 재지적 철 학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런 철학을 실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편성/특수성의 문제가 선머리가 되어 논쟁의 화근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감히 말하지만, 한국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만일 탈장소적/초시대적“‘보편(성)’의 망

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대한민국과 같은 제3세계에서는 철학이 뿌리내릴 수도 시발될 수도 없다. 따라서‘비유럽적 개념화’를 시도해 철학을‘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재건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과제가 있을 수 없다. ) 데리다가 역설한 것처럼, 오로지‘그리스-서부 유럽’만이 철학의 적지인 것인가? ) 데리다 등 서부 유럽의 철학자들이 장소를 강조하면‘보편적’인 것이고, 비구미권의 학자들 또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장소를 언급하면‘상대적인’ 것인가? 

이상에서 필자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물음들을 본 연구에서 일일이 해명하거나 소화할 수는 없 다. 따라서 초점을 좀 더 좁혀 아래에서는 <철학 ≒ 장소(화)>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 제3세계가 중 심이 된 지구학 구성에 대해 논의를 집중시켜볼까 하며, 이는 곧 지역-로컬 철학의 장소화를 의미 하는 것이자‘지구촌’이라는‘장소’를 새롭게 철학화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II.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과 그 방법론 

제3세계의 지역-로컬 철학이 궁극적으로 보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 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D. 슈내퍼도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 구미에서 보물단지처럼 여겨온‘보 편주의’는 철학을 또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염원일 뿐 그것이 완성된 경우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참된 보편주의’,‘진정한 보편주의’,‘이상적 보편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 이 없다는 뜻이다. N. 스코어의 언급대로, 하지만‘거짓 보편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거짓 보편주의’를 타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제3세계의 지역로컬 철학의 탄생이 사고의 다양성이란 지평 위에서 존재 이유(raison d’être), 정당성을 얻는 이 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미에서는 보편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해 타자, 타문화에 대한 배제를 감행했고, 억압을 정당화했

으며, 불평등을 은폐했다. 구미의‘거짓 보편주의’가 그 명을 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15) 

“ 오늘날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all-inclusive) 보편주의의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 

스코어의 위 언급은 지역-로컬의 장소를 철학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서론에서 우리는 장소를 철학화하는 것은 철학을 장소화하는 것이라 했다. 철학 이 장소화될 때, 철학은‘독일의 관념론’,‘미국의 실용주의’처럼 개별화된다. 현실적으로 철학 은 이렇게 장소를 중심으로 개별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보편’의 휘장을 둘러 스스로를 ‘보편적인 것’이라 속이고 또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많은 지역-로컬의 학자들이 이에 속는다. 

‘코로나19와도 같은’ 서구 유럽의 보편주의는 서구 유럽을 절대화함으로써 ) 타자 및‘다르게 세계를 보는 것(seeing the world differently)’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고의 다양성을 자체를 인정하 지 않고 획일화, 단순화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한 지역-로컬 철학(서부 유럽 철 학)이 철학 자체를 획일화, 단순화시킴으로서 다른 지역-로컬 철학이 개별화되는 길이 가로막혔다 는 점이다. 서구 유럽 밖에서 지역-로컬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적 운동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 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맥베스가 철학은“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진정으로 세계적인 철학”이다,“어느 장소에도 속하지 않은 철학은 분석철학이 유일하 다”,“장소를 가졌을 때만이 진정으로 세계적인 철학이다”고 강조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철학은 결국 재지성을 띄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으며, 지역-로컬 철학이 세계화되는 길 도 재지성의 개별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역설 같지만, 구미의 보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지역-로컬 철학의 탄생에 불을 지폈다.‘기 존의 세계철학’의 지형도가 서구 유럽 중심에서 지구촌 전체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는 원인 제공 자가 서구 유럽이라는 것이다.“세계화는 철학을 변화시켰고,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 C. 타운 레이의 언급대로‘새로운 세계철학(global philosophy)’은 이런 와중에 탄생한 것이며, 그는‘새로 운 세계철학(지구철학, 지구학)’의 탄생과 관련해 다음 4가지에 주목하고 있다: i) 비서구적 철학공 동체의 활동이 세계적인 철학적 대화에 있어 두드러진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점; ii) 비서구 철학자 들이‘기존의 세계철학(world philosophy)’에서 노정하고 있는 지적 폭력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 기하고 그 해결책을 새롭게 제안하면서 철학의 중심 무대로 진입하고 있는 점; iii) 새로운 전문학 술지들이 다양하게 출현하고 있고, 철학적 공동체들 간에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 서 철학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신을 요구하고 있는 점; iv) 환경 문제를 필두로 어느 사회, 국가나 할 것 없이 만연해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등 세계적인 이슈와 관련해 초국가적 

보상적 정의(transnational compensatory justice)와 차이를 부인하지 않은 공정한 포용과 인정과 같 은 논제를 제기하고 공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는 점.

타운레이가 주목한 이 4가지 변화는 그 근저에“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제 더 이상 전 지구촌 

시민들에게“타당하지 않으며, 부분적이고, 잘못 인도된(irrelevant, partial, or misguided)” 것이라 는 함의가 숨어 있다. )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세계철학, 즉‘새 로운 세계철학’을 향한 변화는“유럽으로부터 물려받은 철학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의 심대한 도 전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마디로,“철학을 서구적 전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천해온 (different ways of practicing philosophy)” 제3세계철학자들에 의해 그간의 유럽 중심의 철학의 지 형도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1990년을‘워싱턴 컨센서스’와 더불어 본격화된 세계화는 이런 점에서“우리에게 철학의 본질 을 재고하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분명‘역설’에 해당하며 ), 이를 서구 유럽 철학계가 새로운 소통과 대화의 기회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전통을 계속해서 고수할 것인지는 그들의 선택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서구 철학계가 전통을 고수하며‘기존의 세 계철학’을 지켜낼 수 있을까? 봇물은 이미 터졌고,‘기존의 세계철학’은‘새로운 세계철학’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분명 바뀔 것이다. ) 

한국철학의 세계화란 기치로‘지구학(global studies)’,‘지구인문학(global humanities)’을 주창 하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도 바로 이러한 세계철학계의 혁신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연 구의 목표와 방향을 좀 더 분명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며, 철학 대중에게 이 참신한 논의를 확산시 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국철학의 고유성, 독립성을 재지성(장소성)을 견지하면서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서구적 사고틀을 넘어서는‘지구 학’,‘지구인문학’이라는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출발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 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제기한 이념에 걸맞는 방법론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지구학’,‘지구인문 학’의 목표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유영토에만 국한된 물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이 그 대상인 물음이 기 때문에 그렇다. 나아가 지구공동체(global community)에 거주하는 인류가 바로‘지구학’,‘지구 인문학’의‘주인(주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필자의 문제의식을 아래에서는‘지구학’,‘지구인문학’이란 창의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보강해야 해야 할지를 중심으로 본 논의를 전개해볼 계획이다.

1.‘지구학’, 용어 선택 또는 번역어의 문제

제1세계에서 지구학(global studies, 글로벌 연구: 전 세계의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에 관한 연 구 ))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대한민국과 같은 제3세계에서 지구학(지구유학, 지구개벽학, 지구종교 학, 지구재난학 등)에 대해 화제를 삼는 것 간의 차이는 없을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무 엇일까? 제1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중심으로, 즉 세계의 중심부에서 바깥 세계를 관찰하며 어떻게 계속해서 바깥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력을 존속시킬 것인지를 고심한다. 반면 중후진국가나 저개발국가가 대부분인 제3세계에서는 지구학에 대한 본연적 연구보다 제1세계 로부터 주어지는 공적 개발원조(ODA)나 지원 정책들에 동참하고 협력해서 어떻게 하면 경제적 수 혜를 입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만일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나아가 상반되기까지 하는 논리와 방식으로 지구학이 연구된다면, 양 자 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제3세계에서 단지 제3세계적 방식으로 지구학을 연구한다 는 것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 접점을, 앞서 언급한,‘전 지구적 관점(global perspec tive)’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염두하고 있는 전 지구적 관점에서의 지구학은 제3세계가 제1세계와 당당히 맞서 연구 주체로 설 때 비로소 본연적 지구학에 대한 지형도가 그려질 수 있다. 제3세계에서 지구학을 연구하려면 따라서 지역-로컬의 기반학(underlying studies of locals)이 무 엇인지부터 선결(先決)해야 한다. 제1세계와의 문화적 대화나 지적 교류 과정에서 제3세계가 진정 으로 주체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면,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갖추는 것은 일차적 요건이다. 지역 -로컬 기반학이 없거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제1세계의 영향력만이 강화될 뿐 기존의 학문적 지배-종속의 관계는 호전될 수 없다. 냉정한 국제 현실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인 문학, 철학과 같은 순수연구 분야에서도 어김없이 지배-종속의 관계가 적용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제1세계와 비자발적·강압적으로 묶인 학문적 식민성의 매듭을 푸는 주체는 제3세계여야 한다. 제3세계가 주체가 되어야 제3세계의‘지식들(knowledges)’을 제1세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것이 더 유용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선결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기반학을 기점으로 1단계에서 는 제1세계에 의해 전개·전파되었거나 오늘날에도 전개·전파되고 있는 지구학, 즉‘세계지배 학’과 비교문화적·비교철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25)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지식/철학의 비 교 작업이 필수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제국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제1세계에서는 늘 <global studie s>를 실행해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26) 

2000년대를 전후해 나타난 새로운 변화라면, 예전의 국가 간의 교류, 양자 간 또는 다자 간 합의 등을 단일 국가가 중심이 되어 연구했다면, 오늘날에는 글로벌과 로컬들의 관계를 이슈별로 협력 하며 공동으로 연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글로벌과 로컬들 간의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이 중요한 시대적 화두가 되었고, 제1세계에서의 지구학은 이에 부응 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 등의 학제 간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국을 대표하는 글 로벌 문제 전문가를 양성을 목표로 미국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이를 고등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 중이다. 특히 2008년부터 <global studies>는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까지 결성해 매년 기획 컨퍼런스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27) 연구 분야를 특정 <그림1>: 제1세계(유럽→미국) 주도의 세계지배학 모형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 시기, 연구이론, 공동연 구 주제까지 연구자들 간에 공유하면서 지구학에 대한 관심은 제1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28) 

 

25)‘세계지배학’은 필자가 다음 논문을 참조해‘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 이후 제1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세 계를 지배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순수하게 조어한 것이다: M. Thomas & A. 

Thompson,“Empire and Globalisation: from‘High Imperialism’ to Decolonisation”,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36, No. 1, 2014. 19세기의 세계화(globalization)가 <Civilization, Westernization, Europeanization, 

Industrialization, Modernization, Colonization>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면 20세기-21세기의 세계화는 

<Americanization, Dollarization, McDonaldization, Virtualization, New Colonization, Digitalization, Hybridization, Planetization>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돌려 말해 후자는 전자의 21세기적 번역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세계의 중심은 이렇게 지배 형태만 바뀌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26) <global studies>는 2008년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1차 컨퍼런스를 개최했으며〔2009년 2차 대회: 두바 이의 전망 – 걸프와 세계화(두바이), 2010년 3차 대회: 글로벌 재조정 – 동아시아와 세계화(부산), 2011년 4차 대회: 신흥 사회와 해방(리오 데 자네이루), 2012년 5차 대회: 유라시아와 세계화 – 복잡성과 글로벌 연구(모스크바), 2013년 6차 대회: 남아시아의 사회 발전(뉴델리) 등이 개최되었음〕, 2021년 제15차 대회 는“팬데믹 이후의 삶: 새로운 글로벌 생명정치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캐나다의 몬트리얼(Concordia 

University)에서 6월 5-6일에 개최되며(원래는 2020년 개최예정이었으나 COVID-19로 순연된 것임), 2022년 에는 그리스의 국립아테네대학교에서 7월 22~23일 개최하기로 예정돼 있다(https://onglobalization.com/).

27) <global studies>를 학제로 운영 중인 대학으로는 미국의 피츠버그대학교, 미네소타대학교, 캘리포니아대 학교 등 49개 대학이 참여하고 있고, 유럽에는 영국의 런던경제대학,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스페인의 살라망카대학교 등 18개 대학, 캐나다의 경우는 턴대학교 등 6개 대학, 일본의 아키타국제대학, 도시샤대학 등 8개 대학, 홍콩은 홍콩대와 홍콩중문대 2개 대학, 중국은 중국정법대와 상하이대 2개 대학, 그리고 한국은 유일하게 부산대학교만이 연구 네트워크(Research Network)에 참여하고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28) 학제간 연구를 기초로 하는 <global studies>에서는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인류학, 사회학, 종교, 기술, 철학, 건강, 환경, 인종 등을 포괄하는 연구를 시도하며, 연구 시기는 그리스/로마 제국의 초국적 활동에

이러한 상황인식은 2020년부터 지구학, 지구인문학, 지구주의을 주창하며 공동(집단)연구를 시작 한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직시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29) 제3세계에서 연구자 몇 명이 모 여‘지구학’을 외친다고 해서 <global studies>가 비약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라 예측되지 않기 때문 이다. <global studies>를 단지 한글로‘지구학’이라 번역해 사용하는 것만으로 제1세계의 세계지 배학이 제3세계를 위한‘지구생명보호·배려학’으로 일신될 수 있을까?‘지구학’이 만일 제1세 계가 지적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지배학과 연구목표나 연구 대상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는 것 서부터 유럽의 식민주의 시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기 등 다양하다. 연구이론은 포스트 식민주의론, 포 스트 비판이론, 다문화주의 등이 주로 활용되고 있으며, 주요 연구 키워드는 상호의존성, 상호연결성, 교 차문화적 지식, 인권, 사회정의, 로컬/글로벌의 관계 및 작용, 글로벌 인지, 정치적 참여, 글로벌 교육, 글로벌 경쟁력, 참여적 민주주의, 세계시민, 효과적 시민의식, 국제테러, 국가안보, 기후변화 및 환경 파괴 등이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29) 주지하듯,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근년 들어‘개벽학’을‘지구학’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시도로‘지구인문학’이란 신개념을 만들어 다양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필자의 연구도 그 일환이 라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다소 우려스러운 것은 <globalization>을‘지구화’로 <global studies>를 ‘지구학’으로, <global humanities>를‘지구인문학’으로, <globalism>을‘지구주의’로 번역하며 한나 아 렌트, 데이비드 하비, 맨프레드 스테거, 울리히 벡 등의 이론을 전거(典據)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벡이 지구화의 길에서 정확히 언급하고 있듯, 지구화는 정확하게‘위험한 자구화’를 의미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지구화, 즉 세계화는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제1세계의 경제적 세계의 확장, 즉 신자유주의 의 전면화에 그 본의가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벡이 지구화를‘위험하다’고 했던 것이고, 아렌트나 하비도 전 지구촌이 자본 중심의 세계화의 메커니즘 하에 놓이는 것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세계화(지구화)

는 결국 제1세계가 주도해온 식민지적 세계시스템(colonial world-system)의 강화 논리(I. Wallerstein)에 다름 아니다. 만일‘지구인문학’에서 이러한 세계지배학의 논리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의도와는 상반되게 위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한국학, 한국철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개벽학’에서 찾고, 이 개벽학이‘지구학’으로 확장되는 것에는 필자도 이견이 없다. 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한다(이상은 조성환, 「장점마을에서 시작하는 지구인문학」, 文학 史학 哲학  제63호, 2020a, 216~220쪽; 조성환, 「현대적 관점에서 본 천도교의 세계주의: 이돈화의 지구주의와 지구 적 인간관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4호, 2020b, 88-89쪽 참조).‘지구인문학’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조성환이 다른 글에서 정확히 짚고 있듯,“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 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래의 개념 세계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조성환, 「다시 개벽을 열 며」, 다시 개벽 제1호, 2020c, 25쪽) 정확히 이런 의도로 지구학,‘지구인문학(Earth-centered Humanities)’을 주창한 것이라면, 이미 구미에서 비판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인 <globalization>, 

<globalism> 안에 儒學, 東學, 西學을 포괄하는 새로운 학문을 담아내겠다는 시도 자체가 엇박자라 생각된 다. 본론에서 언급하겠지만, 가능하다면 더 늦기 전에 제3의 개념(이미 연구팀에서 사용하고 있는‘지구개 벽학’이나‘천지공생학’과 같은)을 창안해 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수순(手順)이 아닐까 싶다. 만일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봉착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일례로,‘지구인문학’은 최근의 다중우주론과 관련해서 보면 자칫‘지구중심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지구인문학’은 다중우주론자들 에게는 지동설을 천동설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여기에다가‘지구학’은 <Earth Science>란 영어 번역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Earth Science(Geoscience, Geology)>는 주지하듯 지구 행 성(Planet Earth)과 관계된 자연과학의 모든 연구 영역을 포괄한다(https://en.wikipedia.org/wiki/Earth_science). 최근에는 지구(자연)환경 파괴, 빙하 붕락 등과 관련해 세계인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으며, 네 분야(암석, 물, 공기, 생명)의 주요 연구 영역 중 특히 생명권은‘지구학’과 직결돼 있으며, 환경 통찰력 개발 (development of environmental insight), 지리윤리(geo-ethics)를 포함해 사회적 웰빙(social wellbeing), 자연적 이고 본능적인 동기, 학습 본능의 생물학적 측면, 효과적인 의사결정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 영역을 다변화하고 있다 – N. Orion,“The future challenge of Earth science education research”, Disciplinary and Interdisciplinary Science Education Research, Vol. 1, No. 3, 2019, pp. 1~8 참조. 이런 까닭에 필자는 차제에 <global studies>를‘지구학’이라 그 의미를 특별하게 부여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거듭 제안하는 바이다.

이라면, 이는 결과적으로 제1세계에서의 기존 연구에 편입 또는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좀 더 효과적인 연구결과의 도출을 위해서라면, 이미 국제적으로 연대해서 활동 중인 기존 연구 (자) 네트워크와 협력하는 것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들과 같은 무대 위에서 새 로운 주장을 펼쳐야 독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그들과 다른 무대 위에서 아무 리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만일 독자 대중이나 관객이 없거나 적다면, 이 연구는 빛을 발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과 같은 무대 위에 다른 내용을 함께 올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그때 더 효과적으로 다른 내용을 전할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인문학의 제3지대인 대한민국의 소장학자들이 의기투합해 세계지식계를 겨냥해 지구학 또 는 지구인문학이라는 나름의‘글로벌 지식 디자인’을 그려보고 또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충 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미 관련 연구가 10여 년 이상 축적 된 데다 전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이미 <global studies>를 학과로 운영하고 있는 상태라는 점을 간 과한 채 외길을 고집하는 것은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데도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global studie s>를 굳이‘지구학’ 또는‘지구적 연구(global researches)’라 할 양이면, 제1세계에서의 기존의 연구와 변별점이 무엇인지를 지금보다 훨씬 더 예리하게 벼리는 작업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안목 은 거시적으로 갖되, 주제는 미시적으로 잡아 연구하는 것이 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 다.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마치 과거의 유럽이 그랬고, 현재의 미국이 그러하듯(<그림1> 참조), 제3세계의 연구자가‘새롭다’고 주창한 지구학을 과연 제1세계의 학자들이 거들떠보기나 할 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2. 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의 필요성 앞서 우리는 제3세계에서 지구학을 연구하려면 지역-로컬의 기반학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언급했 다. 같은 논리로 제3세계에서는 제1세계와 비교되는 제3세계의 관점을 방법론적으로 분명히 제시 할 필요가 있다. ) 돌려 말해 제3세계에서 발흥된 지구학은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에 대한 정확한 분석-비판-극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 

제3세계가 요구하는 지구학은 제1세계에서처럼“신의 관점을 가진 지식(God’s eye-view knowle dge)”을 재생산하는 것이 목표일 수 없지 않은가.31) 부언컨대, 모든“관점을 초월하는(the point-z ero perspective)” 방식에서 ) 모든 관점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지구학에 접근해야 한다. 지구촌의 현실을 탑-다운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텀-업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하는 것이 지구학의 기본적 출발 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텀-업 방식으로 세계지배학과 변별되는 지역-로컬 기반학을 독립적 관점으로 구성했다면, 2단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세계지배학 내에 결여돼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연구주제들에 대해 새롭게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2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제1세계 내에 결여된 제3세계의 지식/철학을 맞세워 변증법적으로 이 양자를 융합시키는 작업이 관건이 될 것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제3의 지식’을 탄생시키는 것이 가능해야만 비로소 제3세계에서 주창한‘지구학’은 새로운 이론/학문으로 그 가치를 범지구 적 차원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서구의 기독교성/ 개인주의/ 성경 기반의 서구지배학을 동양의 유 불선 사상의 종합이론, 집단주의, 유불선의 다양한 경전들을 새롭게 융합해‘글로벌 공공선’에 기 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철학을 제안하는 것도 하나의 연구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2단계에서는 제1세계와의 지적 대결이 필수조건이다. 이를 피한다면, 진정한“지구적 비판의식(planetary critical consciousness)”33)이 발현된 지구학 연구라 할 수 없다. 제1세계와의 지적 대결이 불가피한 것은‘모든 관점을 배려하는 방식의 지구학’의 구축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 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34) 

탈식민적 인식론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같은 무대(세계지식계) 위에서 새로운 주장을 펴는’ 

데 있어 단계적으로 요구되는‘지적 전략’이다. 정치적 투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 안 되는 것 처럼, 지구학을 제1세계의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욱이 최근 들어 제1세계나 제3세계나 할 것 없이 기존의 사상들에‘새로운(new)’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neo-liberalism, neo-Marxism, neo-Christianism, neo-Islamism, neo-Slavism, neo-Afric anism, neo-Judaism, neo-Eurocentrism, neo-Confucianism, neo-Hinduism 등35)). 따라서 지구학은 단

 

33) W. Mignolo,“DELINKING: The rhetoric of modernity, the logic of coloniality and the grammar of de-coloniality”, Cultural Studies, Vol. 21, No. 2~3, 2007, p. 500.

34) 본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제3세계’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불유쾌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대한 민국이 어찌 제3세계 수준이냐?”는 반문도 예상된다. 하지만 필자는 감히 대한민국 국민의‘국학(한국

학)’에 대한 관심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 연구 자체를 꺼리는 경향도 없지 않고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국제적 수준의 담론 생산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것도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지구학’을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서 필자가 이렇게‘제3세계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i) 이들 제3세계의 연구자 네트워크와 연대해 한국 학, 한국철학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 며, ii) 무엇보다도 탈식민적 인식론에서는 제1세계(구미)를 겨냥해 엄연히 구미와‘다른 세계들(worlds)’ 이 존재하고, 따라서 구미에서 추구하는 지식과는‘다른 지식들(knowledges otherwise)’이 존재한다는 사 실을 끝없이 전 세계 지식계에게 환기시키며 나름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들과 연대해 한국학, 한국철학의‘다름’, 즉 특수성, 재지성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면 최소한 제1세계의 거부감 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iii) 게다가 아래에서 두셀의‘초-근대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탈식민적 인식론은 모든 지역-로컬의 지식/철학의 비위계적(non-hierarchical), 자기-조직적(self-organic)인 ‘헤테라키(heterarchy, 지식체계 내의 이질적 요소들 간의 관계의 다양성 존중)’를 지향한다. 부언컨대 제3세계주의자들이 꿈꾸는 지식/철학은 동일성, 동질성의 위계(hierarchy)에 근간한 제1세계의 지식/철학 체계와 달리 차이와 바로 이 다양성을 실천(practices of difference, diversity)하면서“더 정의롭고 지속가 능한 세계(worlds), 유럽중심적 근대성〔식민성〕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원리를 통해 정의되는 세계

(worlds)”이다 - A. Escobar,“Beyond the Third World: Imperial Globality, Global Coloniality and Anti-Globalisation Social Movements”, Third World Quarterly, Vol. 25, No. 1, 2004, pp. 220~222 참조.  본고

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것은 탈식민적 인식론은 모든 지역-로컬 지식/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재건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이며,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점점 미시화되고 있는‘제국적 세계성(imperial globality)’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35) W. Mignolo(2007), op. cit., p. 500. 이 자리에서 우리는 미뇰로가 왜 자신의 논문의 부제에‘근대성의 수지‘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과거로, 국가·지역중심주의로 회귀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 분되어야 한다. 지구학은 학문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며, 모든 지역-로컬을 배려하고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제1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36) 미뇰로가 탈식민적 인식론을 위해서는‘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제1세계의 문법을 따르는 것으로 지구학은 세워질 수 없다. 지구학의 구축을 위해‘제3세계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며, 미뇰 로가 그의‘탈식민적 인식론’을‘지구적 비판의식’과 함께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언컨대, 지구촌 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에 대한 기존 논의를 다르게(새롭게) 

인식하려면 이를 위한 논리와 문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조성환이 새롭게 밝혀낸 동학 에서의‘자아의 지구성’이나 천도교에서의‘우주적 자아(세계적 자아, 무궁아, 천지아, 한울아) 논 의도, 제1세계에서의 데카르트-훗설 중심의 자아나 주체의 논의와 좀 더 적극적인 대결을 벌였으면 하 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37) 

3단계에서는 이미 탈식민적 연구자들(decolonialist s), 제3세계주의자들(thirdworldists)에 의해‘지방화된 유럽’과‘지방화된 미국’을 포함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 최근 새롭게‘정상 지식(n ormal knowledge)’으로 계발·소개되어 전 세계의 지식계에서 널리 수용하고 있는 제3세계의 지식과 의 2차적 결합을 시도해야 한다. 지식/철학의 지역 <그림2>: 지역세계화로서 지구학/철학의 재세계화 개념도 세계화를 목표로 한 이 새로운 밑그림은 <그림2>에서 보듯, 구미(Euro-American)를 포함해 지구촌 의 전 대륙을 포괄하는 지식/철학의‘재-세계화(re-worlding)’가 목표다.38) 

이런 점에서 지구학은 구미 중심의 세계지배학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며 포용적인 철학이라는 점 을 잊어선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윤리적이며 인륜적인, 평등적이며 분배적인, 미시적이고 지역로컬 배려적인 철학이 우리가 제3세계적 관점에서 구상하고자 하는 지구학의 기본적 설계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한번 더 요약하면, 제1단계에서는 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을 기반학으로 사학’과‘식민성의 논리’에 대응해‘탈식민성의 문법’을 강조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36) A. Escobar, op. cit., p. 219:“제3세계의 이론화는 〔제1세계에 대한, 특히 유럽중심주의〕 비판적 이론이 새로운 지리문화적·인식론적 위치에 포함되고 통합된다는 점에서 제1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37) 자세한 설명은 조성환(2020b), op. cit., pp. 90-96 참조. 이런 점에서 두셀의“Anti-Cartesian Meditations: 

On the Origin of the Philosophical Anti-Discourse of Modernity”, JCRT, Vol. 13, No. 1, 2014, pp. 11~53 참 조.

38)‘재세계화(re-worlding)’ 개념에 대해서는 Chih-yu Shih and Yih-Jye Hwang,“Re-worlding the‘West’ in post-Western IR: the reception of Sun Zi’s the Art of War in the Anglospher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Asia-Pacific, Vol. 18, 2018, pp. 421~448 참조.

구성(constructioin)하고, 제2단계에서는 다른 지역-로컬 지식들과 융합이 가능한 영역 간의 상호구 성(co-construction)을 시도하며, 마지막 제3단계에서는 제2단계에서 새롭게 연구된 지식들이 지구 촌 차원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제3의 지식으로 재구성(reconstruction)해 내야 한다. 이렇게 재구성 된 지식/철학이라야 비로소 제3세계가 제1세계의 주변부가 아닌 제1세계와 동등한·당당한 주체가 된‘지구학’이 탄생할 수 있다. 

지구학의 3단계적 구성(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에 동의한다면, 지구학을 꿈꾸는 우리 모두 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 명칭이‘지구적 영성학’이건, ‘지구적 윤리학’이건,‘지구적 평화학’이건,‘지구적 개벽학’이건, 목표는 제3단계인‘지식/철 학의 재구성’에 이르는 데 있으며, 그 출발은 1단계인‘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의 구성’ 여 부에 달려 있다. 지구학의 <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제3세계에서 단지‘지 구학’이라 목청을 높인다고 제1세계의 지식계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거나 자극을 받을 리는 없 다. 보편주의의 가면을 쓴 제1세계의 패권적 지식/철학의 식민성은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종식된 것 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39)

3. 로컬과 글로벌, 서구와 비서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E. 두셀의 해법 데리다의‘철학의 적지(適地)’,‘철학의 영지(領地)’ 운운이나 하버마스의‘미완의 근대성’이나 할 것 없이 서부 유럽 밖에서의 서부 유럽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수용할 염사(念思)가 전혀 없다는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즉 제3세계에서의‘지구학’ 주창은 명민하면서도 꾀바른 전술이 필요하며, 단독으로‘지구학’을 창안해 전 세계의 지식계에 오랜 시일을 두고 알릴 것인지 아니면 CSG(Center for Global Studies on Culture and Society (CGS) 나 AAGS(Asia Association for Global Studies) 등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40) 좀 더 빠른 시일 안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글로벌 식민성은 갈수록 진화해가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기에 선택은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 

감히 필자는 이 자리에서 국제적 연대가 상책이라 제안하며, 준비 중인 지구학의 인식론적 구성 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서구 유럽으로부터의“‘철학’의 해방”을 통해 탈식민 철학을 완성한 E. 두셀(E. Dussel, 1934~ )의‘초-근대성(trans-modernity)’ 개념을 소개해볼까 한다. 두셀은  

39) 식민주의(colonialism)는 분명 끝났다. 하지만 J. R. 리안도 강조하듯, 과거에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와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 간의 관계에서 식민적(지배/종속의) 관계(colonial relation)는 오늘날에도‘재현’,‘재 생산’,‘변형’의 형태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식민주의‘이후’를 의미하는‘포스트식민주의

(postcolonialism)’라는 용어의 등장과 사용이 무색할 정도로‘신식민적(neocolonial), 신제국적(neoimperial) 통치 형태로 변신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식민지배 형태를 과거의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심지어 는“다중식민주의, 준식민주의, 내부적 식민주의(multiple colonialisms, quasi-colonialism, internal colonialism)”라는 용어까지 등장한 상태며, 이는“미국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대표되는”“제국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다 - J. R. Ryan,“Postcolonial Geographies”, A Companion to Cultural Geography, Blackwell Publishing Ltd, 2004, p. 472. 

40) 본 협회(https://www.asianstudies.org/)는 2005년 결성되었으며, 연 2회 정기간행물, Asia Journal of Global Studies를 출간하고 있음.

자신의‘초-근대성’ 개념을 구미 학계에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으며,“세계현실(world reality)”, 즉“지구 전체(the whole earth)”를 그의 해방 철학의 적 지로 삼고 있다. ) 

두셀에게 철학은“지구 위의 비참한 사람들에게도 또한 현실”인 이 세계현실을 구제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의 탈식민 해방철학 관련 글들은 스페인어권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영어권에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굳이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소개하는 이유는 초-근대성 개념이 갖는 로컬/글로벌, 서구/비서구를 아우르는 탁월 한 방법론적 해법 때문이다. 

3-1) 서부 유럽은 주지하듯 지난 5세기 동안 서부 유럽 밖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기독교-계 몽(이성)-과학(기술)을 앞장세워 자신들의 폭력 행사를 정당화했다. 자세히 논할 공간은 없지만, 19 세기 중후반 서학(西學, 천주교)도 유럽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전통사상을 뿌리 체 뒤흔들며, 조선에‘천학(天學, 天主學)’으로 정착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정신을 지배 하고 있었던 유학을 서학이 일정 부분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두셀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기초교육시스템의 정착 및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역사도, 철 학도, 세계사도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의 관점이 지배적인 현실이라는 점에 대해 개탄한다. 그에게 ‘해방’은 모든 구미적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두셀의‘해방’은 미뇰로의 용어로 바꾸어 보완하면 구미와의‘연계의 고리 자체를 끊는 것’로 부터 시작된다. ) 두셀의 3대 해방서(신학의 해방, 철학의 해방, 윤리학의 해방)는 이렇게 구 미와 연결고리를 끊고‘독립적인 라틴아메리카학’을 탈식민적으로 구축하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제3세계는 두셀이 자신이 소속된 지역-로컬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라틴아메리카와 거 의 같은 상황이고, 거의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각 국가가 일반 교육을 실시한 기간이 70-80에서 100년 가까이 되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전 세계 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게 되자, 이 과정에서 세계지배학에 의 해 무엇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왜곡되고 불공평하게 기술되었는지를 자각하는 기회가 지역-로컬 민에게 자각의 기회가 된다. 자신이 소속한 문화, 국가에 대한 위상을 글로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안목, 즉 글로벌 비전에 따라 특히 제3세계에서는 지역-로컬의 식민적 현실에 대한 각성이 일게 되고, 그결과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세계지배학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고개를 들게 된다.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도 이런 배경과 문맥에서 탄생한‘반세계지배학’의 전형이 라 할 수 있다. 앞서 <그림2>을 통해 간략히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지구학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 했듯, 유럽이 지방화되었다는 것은“유럽은 유럽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며 ), 이는 유럽이 세계 철학의 적지가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국(물론 러시아, 호주를 포함해)과 함께 지식/철학의 미래, 즉 모든 지역-로컬이 상호적 구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철학의 재구성에 동참해 야 한다는 말과 같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해, 서부 유럽 철학만이 보편주의, 민주주의, 휴머니즘, 평 화의 상징이라는 편견, 착각일랑 이제 접으라는 것이다.

3-2) 이렇게 전 세계의 지식/철학을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로 통제하던 유럽이 지방화됨으로써 이 제 각 지역-로컬은 자신의 고유 지식/철학을 자긍심을 살려 기반학(토대학, 지역-로컬 고유의 인문 학)으로 창설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서부 유럽 철학의 특수성과 유일신론적 편견을 보완할 수 있 는 대안이 모색된다.‘새로운 지구철학’을 위한 아젠다에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포함시키려면 무

엇보다도 신개념, 신방법론(‘de-coloniality’,‘divesality’,‘pluriversality’나‘東學’과 같은)으로 

기반학을 세워 세계학계에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부 유럽 철학을 겨냥해“소리만 지르고 규 탄만 할 게 아니고 새로운 사유 질서를 만들겠다면 어떤 질서를 잡을 건지 구상을 해야 한다”44) 는 뜻이다. 

새로운 사유 질서(New order of philosophy)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개념에 담아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세계를 담아 타자에게 전달하는데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은 100여 개국 이상의 철학자들이 참여하는 세계철학자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 등에서 발표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참을 독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45) 철학의 중심 이동이나 새로운 중 심에 대한 고민을 세3세계의 학자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3-3) <그림2>에서와 같이 각 대륙이 고유한 기반학으로 제안한 지식/철학이‘새로운 세계철학’ 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앞서‘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을 논하며 강조한 바 있듯, <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이라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래에서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림3>은 두셀이 자신의 초-근대성(trans-modernity) 개념을 구미 중심의 세계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46) 이 그림의 핵심은‘전체성(식민지배의 주범인 구미의 중심성, 근대성)’과‘외재성(라틴아메리카를 대표로 하는 비구미, 탈근대성)’ 개념의 이해가 관건이다. <그림3>에서 근대성(A)은 본 연구와 연관해 구미가 과거에(또는 현재에도 여전히) 전 세계를 상대 로 전개·전파했고, 오늘날에도  전개·전파하고 있는 지식/철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림3>을 자 세히 들여다보면, A 밖에 B, C, E, F가 있고, D는 A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D는 결국 지역-로컬 

 

84집, 2020, 109-144쪽 참조.

44)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박윤철 엮음,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6, 318쪽 – 이는 백낙청 교수가 2016년 데이비드 하비와 창비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하비의 글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읽은 것이라 밝힌 내용을 간접 인용한 것임. 

45) 대한민국은 2008년 <동서문명의 향연>이란 주제로 아시아 최초로 제22차 서울세계철학자대회를 개최했 으며, 제1차는 프랑스 파리 대회였다. 

46) 그림에 대한 설명은 E. Dussel,“World-system and“trans”-Modernity”, Nepantia(View from South), Vol. 3, No. 2, 2002, pp. 234~236 참조. 두셀은 자신의 이 논문이 1960년대 이후부터 고민해온 것들이 집적된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고유의 지식/철학이면서 지속적으로 A와 상호 교류가 가능한, 최소한 A 와 교류경험이나 접점이 있는 지식/ 철학이다. D는 A와 최소한 상호성이 확보된 지식/철학인 셈이다. 반면 B 는 A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비구미적 지식/철학이다. 이를 타운레이의 표현으로 바꾸면,‘새로 운 세계철학’을 지향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A가 어쩔 수 없이 수 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런데 D, B의 작용이 점점 확대되면 <그림3>: E. 두셀의‘외재성’,‘초-근대성’ 개념도 언젠가 A의 테두리 선이 해체될 것이다. 구미에서 오랫동안‘그 밖의 세계(the Rest, the Third wor ld)’의 것으로 명명한 채 방치한 지역-로컬들의 지식/철학이 A 안으로 들어가 A를 구성하는 결정 적 요소가 되고 A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결국 A는 그동안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데만 공을 들였던 모든 것들이 덧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바로 이 D와 B의 역량으로 결국 A의 경계선, 즉 세계지배라는 폭력의 경계선이 와해되고 나면, 두셀이 꿈꾸는, 기존의 지배하고 종속하는 A와 B, C, D, E, F와의 관계, 즉 한쪽에서는 지식/철학의 표준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를 추종하기만 해야 하는 관계가 해체되어 모든 지 역-로컬의 지식/철학이 중심이 되는 초-근대성이 실현된다. 

두셀의“초-근대성 프로젝트”는,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서구가 그것들을 채택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경멸하기까지 했던 지식/철학의 외재성에 해당 하는데, 바로 이 외재성이 보유하고 있던 잠재성이 전체성에 변화를 가해 21세기에 이르러 중요한 의미의 창조적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 두셀의 초-근대성 프로젝트는“지구촌의 다수 문화들(p lanet’s multiple cultures)”이 동참해 세계사(world history),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영원한 중심 이 서부 유럽에 있다는“구미적 근대성을 넘어서는(beyond Western modernity)” 데 있다. ) 두셀

에 따르면, 근대성은“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부터 5세기 동안이나 유지된 세계-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데, 그에게 이는“실패한 제국주의적 세계(관)”일 뿐이다. 따라서“근대성에 의해 제거 된 문화들”,“근대성의 밖(‘outside’ of modernity)”에서 여전히“살아 꿈틀대고, 저항하며, 성 장한 다른 문화들, 즉 외재성”이“21세기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개발에 앞장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49) 

두셀의 초-근대성 프로젝트는 구미의 전체성의 외재성으로 배치되는 데 그쳤던 것들이 전체성의 

폭력을 단지 비판(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종합)해 21세기적 전망을 제3세계 적 관점에서 제시한다는 데 있다. 두셀의 프로젝트는 그의 학문적 자긍심과 비전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언급대로“유럽이나 미국 밖에는 수천의 문화들이 존재한다.” ) 이 수천의 문화 들이 존재하기에 인류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의 문화와 다른 문화들에 대 한 존경과 이질적 정체성에 대한 배려는 두셀이 그의 해방의 철학에서 강조한‘세계현실’에 대 한 반영이자‘지구 전체’에 대한 고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대다수의 인류는 그들의 일상에서, 계몽된 지평에서 각기 문화들을 유지하고, 세계성(globality)의 요소들을 쇄신하고 포함할 수 있도록 재조직하며,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 ) 

두셀의 이 주장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두셀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A를 향

한 B, C, D, E, F의 활동력을 높이는 데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보편적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역사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문화, 보편적 역사에 대한 환원적 요구는 각 지역-로컬이 역사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창조적 능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 기초한다. 모든 지역-로컬(유럽과 미국도 마찬가지지만)은 각기 독특한 문화와 특정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공동의 노력을 통해 되살리고 심화시켜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 식에 기초한 문화관, 역사관, 세계관, 지구관이다. 

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을 기반학으로 구성함에 있어 우리가 굳이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소개한 것은 그의 철학적 주장과 방법론이 본 연구의 화두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 구상은 결국 두셀과 같은 방식으로 중심/주변, 동양(동학)/서양(서학)으 로 지식의 경계를 분할하는 전통의 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로컬의 지식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 로 재구성해야 한다. 모든 지역-로컬이 중심이 된 대안적 세계화, 즉‘지역세계화(localobalizatio

n)’에 대한 자각이 시급한 시점이란 뜻이다. ) 그렇지 않으면 이미 중심을 전유한 <global>이 더욱 강화되고 비대해져 결과적으로 <grobal>이 되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III. 맺음말: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대와‘장소감’이 필요한 이유

오늘날 세계화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국가도 거부할 수 없는“후퇴할 수 없는 삶의 사실”(A. Gi ddens)이다.54)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구학에 대한 관심은 역으로 세계화의 강화로 인해 세계 화의 피해 지역-로컬인 제3세계권에서‘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여전히 경계 심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제1세계에서는 세계지배학의 꿈을 과거에 는 말할 것도 없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세계지배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3세계의 연대가 필요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 리한다면 지역-로컬의‘불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요인즉 단지 세계화에 맞서 지구학이라는 닻을 올린 것만으로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세계화, 세

계지배학의 피해, 불행이 사라질 것이라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W. 미뇰로는 우리에게“식민적 권력 매트릭스는 밖(outside)이 없기에 밖에서 관찰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고 경고한다.55) 즉“우리〔모두는, 구미인이나 비구미인이나 할 것 없이〕는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56) 미뇰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구미와의‘연결고리를 끊지 않고서 는’ 탈식민적 사유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할 정도로 식민성은 자체적으로 계속해 진화를 거듭하며 지배의 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E. 두셀이“탈근대성도 유럽중심주의만은 몰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미뇰로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57) 미뇰로의 목표도 결국 두셀과 마찬가지로 구미를 감싸 안고 포용하는 것 이지만, 바로 이 목표를 위해 현 단계에서는“인식적 불복종, 독립적 사고, 탈식민적 자유”가 불 가피하다는 것이며,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구미가 비구미에 제안한〕 신세계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알고, 감각하고, 믿고, 살아가는 방법들과 공존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부인하며, 파괴하고, 악마화했다.”58) 

미뇰로가 이렇게까지 유럽중심주의, 근대성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세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이는 세계화, 세계지배학의 위세에 대항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일종의 절망감의 토로가 아닐까? 그에게 세계화, 세계지배학은“제국주의적·식민적 정치학”에 다름 아니 다. 지식/철학에도 그가‘제국주의적/식민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이 유가 여기에 있다.59) 이는 제3세계에서 일고 있는 비판적·대안적 세계화 연구가 지역-로컬 지식

 

참조.

54) 재인용: 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55) W. Mignolo,“Interview”, E-International Relations, Jan. 21, 2017, p. 5.

56) Ibid.

57) E. Dussel(2002), op. cit., p. 233. 58) W. Mignolo(2017), op. cit., p. 4.

의  재건 운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말과 같다. )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 에 맞서 제3세계의 지구학이 지식/철학적‘담론의 복수화와 다원화’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구미로부터의 지식/철학의 독립은 어쩌면 정치적·경제적 독립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 정치나 경제적 저항에 비해 지식/철학의 저항이 약한 것은 물리적 폭력이 정신적 폭력보다 더 직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후자보다 전자에 대해 즉각적 반응을 보인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학에 대한‘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지구학은 인류가 공동의 노력을 통해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당면과제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외치는‘기존의 세계철학’을 극복한‘새로운 세계철학’, 지구철학에 대한 목소리 가 5대양 6대주를 관통하게 되면, 바텀-업의 방식으로 지식/철학의 재-세계화가 완성되면, <그림3> 에서처럼 비구미의 외재성이 구미의 전체성을 포용하고 감싸는 날이 오면, 타운레이가 제안한‘새 로운 세계철학’으로 중심 이동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면, 두셀의 해방철학은 분명 멀지 않은 장 래에‘지구 전체’에 감로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제3세계권의 실천적 철학자들 덕분에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고 배제된 다수의 목소리를 제1세계 권에서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 음에도,“이성의 지리학이 〔구미에서 비구미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 우리가 긴장의 끈을 놓 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제3세계권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신철학 운동이 아직은 엘리트들의 운동 차 원에서 제기되는 수준이고,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regionalization, localization)를 둘러싼 힘 겨루기는 상당 기간 더 지속될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세(戰勢)는 세계화의 힘이 훨 씬 세기 때문에 지역-로컬이 중심 잡기를 마무리짓기도 전에 <grobal>이 COVID-19처럼 전 세계에 먹구름을 들씌울 확률이 높기에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은 제3세계의‘권리 회복’의 문제이다. 제3세계는‘장소의 

현상학’을 통해 구성해야 한다. 실존의 장소는‘저기 있는 추상적 세계(world-there)’가 아니라 ‘여기 내 앞에 있는(I-here) 구체적 장소’다. ) 바로 이 구체적 장소, 즉 지역-로컬은 인간의 욕 망, 믿음, 사물들, 사람들이 포함된‘특수하고 특별한’ 장소다. 인간의 모든 현상학적 경험은 이렇 게 구체적 장소에서 실행된다. 구체적 장소에서, 그곳이 어디이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데, 이는 곧 장소, 장소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말과 같다. 캐이시가 자아와 장소를 신체로 성찰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캐이시에 따르면 우리는 결국“로컬 장소에서 체화된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며, 소위‘철학’

이란 걸 실천한다. 그런즉“지리적 동물(homo geographicus)” )인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염려를 로컬화하는” )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사항일 수밖에 없다. 이를 D. 모리스의 표현으로 바꾸 면, 인간은“장소에 뿌리를 둔 존재이기에 장소를 위해 염려를 로컬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렇게 자신의 실존적 염려를 로컬화한‘장소-내-존재’에게 장소는 무엇보다도‘장소감(sense of pl ace, 장소 의식)’을 제공한다.‘장소-내-존재’가 장소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장소가 더 이상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실존적 공간, 사회적·문화적 공간으로 장소의 성격이 존재에게 내밀화·내면화되고 복합적 의미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화론자나 신자유주의자들이 기획하는 글로벌-가상 공간은, 캐이시에 따르면, 전 지구촌을 하나로 병합하려는 자들의“획책된 일반론”에 불과하다. 이는“〔지역-로컬의〕 생활세계가 확장된 순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근대성의 신화”를 연장하려는 속셈에 다름 아니다. ) 글로벌-가 상 공간의 제산자(制産者)인 제1세계권에서는 이렇게 모든 지역-로컬을 자신들이 기획하고 있는 글 로벌 공간의 지배하에 두려고 한다.‘내’가 사고하고 노동하고 상상하는 곳이‘구체적 장소’라 는 인식 전환이 수반되지 않으면‘장소감의 결여’로 인해 종국에 우리 모두는‘장소 상실’을 경 험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1세계의 공간병합론자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 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종속적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취미도 욕망도 가치관도 세계관도 오직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이 결정할 것이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제3세계국가들은 제1 세계로부터 밀려드는 상품과 자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상품과 자본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제1세계의 자본력·경제력은“공간과 장소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결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경험하는지도 결정한다.” ) D. 매시가“필연적 반동”으로서“지역-로컬의 장소감(sense of local place)과 그 특수성” )에 대한 인식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의 장소-정체성은 문화적 정체성, 집단-공동체 의 정체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지구학, 지구인문학이 구체적 장소에 천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과 독립적이면서 포용적인 지구학, 지구인문학을 구성해낼 수 있다.“내가 생각하는 곳에 내가 존재한다” )는 사실을 망각할 때 기존의 관념론적 철학이 그랬 고, 현대의 데이터 과학이 그러하듯,‘인간’이 잊혀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그렇게 장소에 서 사람들(people)이 잊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각기 자신이 속한 장소를 지켜내 는데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장소를 철학화하는 우리의 과제, 철학을 지역-로컬화는 책무는 장 소-내-존재의 역할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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