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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0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2) 보은취회 | Facebook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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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 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21/07/15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 에큐메니안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12.22 16:50

종교는 권위를 잃었다: 성경은 신학과 교학을 통해 형성된 제도종교와는 다르다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
명제 1 : 바르게 알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앎이다.
명제 2 : 바르게 믿었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명제 3 : 바르게 깨달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다.


구도자는 성경의 황금률을 귀감삼아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며 제도종교의 원천적 영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직업종교인은 위계적 조직화, 교리와 교학체계 정비, 구제(원)신앙을 종교적 기제로 종교조직을 유지하고 확산시킨다. 이 양자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무너지는 큰 원인은 제도종교의 성장의 핵심이었던 ‘교리와 신학, 교학, 유학과 도학’의 해석학적 전통과 의례체계가 영성의 원천인 성경의 생명을 ‘동맥경화’시키는데서 기인한다. 제도종교는 세속화의 원심력에 의해 형식화, 형해화되면서 종교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현대는 축 시대의 종교적 언어가 가진 종교적 영성이 역사의 추동력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이다. 성경의 영성과 제도종교의 문화의 ‘영성적 거리’가 회복불능의 단계까지 벌어진 ‘말기암’증상을 보이고 있다. 제도종교가 낡은 문명의 차별적인 사유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건물성소를 맹신하고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에 함몰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1) 동시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초과학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포스트 휴먼시대라는 신조어에 주눅이 들어 권위의 원천이었던 종교는 새 축 시대의 한 차원 높은 문명사적 지향점을 설정하지 못한채 과거의 영광을 찬미하는 복고풍의 소리만이 들린다.

종교혁신은 구도자적인 정신을 가진 종교인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순교적인 수난과 성경해석전통의 대전환을 통해 성경의 종교영성을 되살린다. 건물성소 중심의 종교문화의 극복과 종교 간의 융합과 회통, (초)과학의 지도적 영성의 확보는 새 축 시대의 종교가 지향해야 할 삼대과제이다. 새 축 시대는 종교 간의 분별과 차별의 시대가 아닌 다양성을 바탕으로 융합과 회통의 시대이자, 초과학을 포용한 초종교의 시대이다.

새 축 시대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한다. 축 시대에 형성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획기적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필자는 ‘새 축 시대’라고 제안한 바 있다.(2) 바야흐로 종교성과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할 새 축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 축 시대에 종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은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다. (초)과학은 이미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생명창조와 같은 창조주의 창조성을 모방하려는 차원까지 다가왔다. 과학도 분명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마치 인간 이성이 제시하는 합리성과 논리성의 가치척도라는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말하고,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아인쉬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말하고 있다. 수학세계와 관찰세계는 상대적이며,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인간 이성의 결론이다.

종교적 인간은 인간이성의 한계, 과학기술의 한계, 자본의 한계를 가진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종교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을 배타적으로 배척하지만, 우주의 공간이 확대되고 우주시간의 거리는 오히려 축소되며, 생명에 대한 제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직업종교인과 종교영역에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눈앞의 도전이다.

변찬린은 1985년 초에 그리스도교가 제도종교로서 형해화되어가는 시점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내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37년 전의 기록이지만 문명패러다임 전환점에 대한 적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 변찬린, 『요한계시록 信解』, 1985년 2월 22일 탈고 [원고 복사본] , 1986년 5월 25일 초판, 1992년 12월 25일 개판, 2019년 5월 18일 개정신판.


축 시대의 관성에 빠진 제도종교는 과학의 공세와 종교적 영성의 고갈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양식 있는 종교인은 현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말법시대’이고 ‘종말론적인 운세’임을 직감하며 끊임없이 경고음을 내고 있다. 종교인이야말로 과학을 배우고 과학적 유토피아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나가야 할 시대적 책임이 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에게 과학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지도(指導)의 대상이다.

위대한 종교인은 새로운 차원의 ‘종교(으뜸가는 가르침)’를 지향하며 종교관리자가 아닌 영원한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낡은 문명의 사유체계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차원을 제시하여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종교는 ‘宗敎’(=‘으뜸가는 가르침’)(3), 즉 시대의 화두, 역사의 공안, 혼돈의 문명에 대한 나침반과 등대불의 역할을 하는 시대적 언어이다. 종교적 영성을 체득한 구도자는 축적된 종교정보와 혼돈의 현실정보를 융합하고 회통하여 미래의 갈 길을 밝히는 목소리를 낸다. 혹자는 호교론적인 신앙의 울타리에서 안주할 줄 모르지만 구도자는 ‘불확실성의 시대’와 포스트 휴먼시대 등의 시대적 개념의 출현, 호모 데우스, 호모 이후의 호모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동 시대에 출현한 것 자체가 새 문명의 전조를 알리는 상징적 표식임을 직감하고 있다.

그럼 한국 그리스도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 종교가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종교조직은 사회적 기능조직 가운데 가장 생기를 잃은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 작동하는 종교는 위대한 종교인과 각성된 민중들에 의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에 불과하였던 유대교는 예수와 바울에 의해 세계 종교인 그리스도교로서 재탄생되고, 중세 가톨릭은 존 위글리프, 얀 후스, 마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이 주도한 가톨릭 혁신운동으로 탈바꿈되었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형성된 것도 결국은 성서텍스트의 정신을 당대에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의 일환이다. 이는 신유학, 양명학, 선불교의 전통 등 역사 속의 다른 종교도 위대한 종교인의 혁신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시점에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종교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가톨릭(로마 가톨릭, 동방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나뉘어져 있다. 문명전환기에 과연 그리스도교가 창교목적에 합당한 본질적 정신을 역사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예를 들면 개혁교회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개혁을 시대의 언어로 삼아 대중에게 호소하여 성장한 교회이다. 만약 개혁교회가 개혁을 중단하면 개혁교회의 역사적 실험은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교회사가들이 후세에 기록할 것이다.

그럼 서학으로서의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을까? 한마디로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구 신학의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리전이다. 마치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정통으로 삼아 선맥(僊脈)과 무맥(巫脈) 등 한국의 종교문화를 ‘이도(異道)’ 취급을 하던 역사적 데자뷰이다.

이찬수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은 어쩌면 한국에서 한국 천주교와 한국 개신교를 동시에 균형 있게 비평한 거의 ‘유일한’ 책이랄 수 있다. 그는 한국에는 아직도 한국 천주교사와 한국 개신교사가 통사적 관점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관계자가 잘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토착화 신학’을 말하기에 앞서 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교회 분열사가 한국 교회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종교현상에 대해 깊은 반성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답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특수성을 가지면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이찬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어찌 되었든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지 굳이 한국적일 필요가 있느냐고 …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정답의 절반만 들어있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두고두고 진행되겠지만 그리스도교가 한국적이라는 말속에는 그리스도교가 더 그리스도교적다워야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다는 말 역시 지역적 특수성 – 이 글의 맥락에서는 한국 문화-이 반영되고 있을때에만 그리스도교도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특수성을 통해서만 성립된다.(4)


한편 한국의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서구에서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토착화를 추진하였을까? 김경재는 『해석학과 종교신학』에서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에 적응하는 개신교의 모델을 범주화하여 비평한다. 즉 보수주의 신학의 파종모델, 진보주의 신학의 발효모델, 자유주의 신학의 접목모델, 민중주의 신학의 합류모델이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떠한 모델에 해당할까? 이정배는 정약용, 유영모, 함석헌을 사례로 하여 『토착화와 세계화 – 한국적 신학의 두 과제』 등에서 “탈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한국문화신학회에서는 최병헌, 유동식, 유영모, 최태용, 함석헌, 김교신, 윤성범, 서남동, 안병무, 이정용 등을 『한국신학, 이것이다』라는 주인공으로 내세워 조명한다. 그렇다면 천주교인 가운데서는 어떤 종교인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신학은 이렇다”라는 주제의 글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다른 종교와 대화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천주교의 이런 입장은 보편교회를 표방한 제국종교의 관성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의 위계질서속에 정양모, 심상태, 김승혜, 박일영 등의 학문적 성과는 기억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드문 의문은 장 칼뱅, 존 웨슬리 등 교파교회를 계승한 한국 개신교는 교파교회가 만들어진 역사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원적 종교적 문화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교회’는 발생할 수 없는지 궁금하다. 서구의 교파교회만이 왜 한국 개신교 전통이 되어야만 하는가? 한국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제기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 천도교학자, 원불교학자 등이 모여 원불교, 천도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한국종교를 “종교답게 하기 위한 애정 어린 비판들”이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 책은 결국 성경에 근거한 종교적 신앙과 이를 상실한 종교문화의 괴리로 인해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게 만드는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5)

변선환은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어야 하고 서구 신학적 내용들이 각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촉구하고 나선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고 서구 신학적 내용이 각주가 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어디에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관점에서 ‘도의 신학자’인 김흡영은 한국 개신교에서 벌어지는 서구 신학의 대리담론에 각성을 촉구한다. 즉 한국 개신교는 서구신학의 구원론, 원죄론, ‘말씀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논쟁’, ‘번역신학의 경향’,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 신학의 이원화‘, 교회론적, 인식론적 수준의 신학“은 재고되어 한국의 주체적인 신학하기를 주장한다.(6) 이를 위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할 작업은 무엇일까?

필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1) 성서를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맥락에서 형성된 ’교리와 신학‘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 새롭게 읽기, 
2) 성서를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으로 회통적인 성서해석을 하기 
3) 성서와 제도그리스도교의 괴리된 ’영성적 거리‘를 축소시키기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금도 일부 직업종교인은 한국 종교계의 혁신을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을 위한 운동‘인 종교이벤트행사가 아니라 핵심담론을 포함한 지속성이 담보되는 종교운동이어야 한다. 핵심담론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의 역사적 참회, 그리고 성전매매와 성전세습의 근절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두 과제는 실추된 제도종교의 종교적 권위를 일거에 회복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이다.

새 축 시대는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데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경읽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변찬린은 ‘교리와 신학’에 의해 왜곡된 그리스도교 문화의 본질적 훼손을 ‘성서’를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서구신학의 바탕이 된 성서해석을 텍스트로 삼고, 이로 형성된 서구 ‘신학과 교리’가 각주로 된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소화도 되지 않은 채 이식되었다고 한다. 변찬린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간을 이룬 성서해석 자체에 대한 해석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즉 성서를 새롭게 읽어 교리화된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성서를 텍스트로 삼아 다종교적 언어의 전통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 새 문명의 사유체계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종교혁명의 대선언이다. 그 종교적 주장이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하는 데서 탈피하자는 선지자적 목소리이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교리와 신학’에 의해 형성된 제도종교 문화와의 영성적 거리를 좁히는 첫 걸음이다.


우리는 이날까지 성경해석을 서구 신학자들의 방법을 무조건 답습(踏襲)했고 모방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학과 교리를 소화도 하지 못한 채 포식(飽食)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서양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만이 진리의 전부요 성경 해석의 방법이지 그 밖의 것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타매(唾罵)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서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입한 교리와 교파의 잘못된 선입관념을 버리고 빈 마음자리에서 성경을 다시 읽자. 우리는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 = 기독교라는 등식에서 빨리 해방되는 길만이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신과 해후할 수 있는 첩경임을 대각(7)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486.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 속에서 쓴 〈성경의 원리〉 상·중·하 세 권은 두 사이비 종교 (기독교와 맑스교)의 괴뢰로 전락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제출한 나의 피 묻은 각서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10.


위의 발언에 대해 ‘성서’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는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학, 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은 학문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의 비평과 텍스트로 인해 형성된 텍스트문화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터 위에 지식의 고고학을 형성한다. 비평이 없거나 비평을 허용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동시에 성경의 정신과 상당한 영성적 거리를 가진 종교문화를 비평하는 것은 해당 종교의 건전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교 종교문화는 건전한 비평과 진실된 종교선전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호교론적이고 선교론적인 글이 넘쳐난다.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될 수 있는 우월성이 가려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의 본질과 정신이 서구 신학에서 ‘교파와 교단과 교리’를 통해 고착되어가는 그리스도교 문화와의 괴리현상에 대한 비평은 한국 그리스도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8) 특히,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의 역사적 과오와 교회매매와 교회세습은 이 시대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신앙의 근저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을 한 한국교회가 진정한 참회없이 어떤 종교적 권위로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경도된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는 성서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현상임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의 목소리가 한국교회에 작동하고 있는지 여부는 교계 내부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순교의 정신과 고난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로 성장할 때 종교적 영성의 상징이었다.

주류 직업종교인은 ‘교리와 교학’을 통한 정교한 의례체계로 제도종교의 유지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창교자의 언행이 종교문화에 생동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새 축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새롭게 읽어야 할 때이다. 변찬린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문화에 국한하여 이렇게 진단한다.
무출구(無出口)의 현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시대를 뚫어보는 깬 자라면 마땅히 산으로 퇴수해야 한다. 현대의 산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올라야 할 산은 히말라야산도 시내산도 계룡산도 아니다. 성경은 상징의 아아(峨峨)한 영산(靈山)이다. 이 산에 입산하여 서양의 지혜에 의해 잘못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풀어야 한다.
(중략)
예수가 승천하고 사도들이 순교한 후 진리의 정맥은 지하깊이 스며들고 역사의 지표에는 연원을 잃은 온갖 교파들이 백강(百江)의 흐름처럼 아집과 독선의 탁류(濁流)를 일으키면서 도도(滔滔)히 흘러갔다.
생명수의 뿌리를 잃고 온갖 교리로 절단된 삽목(揷木)들이 나라와 민족과 풍토와 습관에 따라 심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리가 로마에 이식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곡해되고 헬레니즘과 혼음한 후 기독교(가톨릭) 라는 옷을 입고 서양화된다. 모든 고등종교는 동양에서 발아(發芽)되어 정과(正果)를 맺었다. 성경도 동양의 심성 속에 계시된 평화의 문서인데 피묻은 서양의 가위로 오리가리 재단(裁斷)되어 사과(邪果)를 맺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길 원했으나 쓸개 포도가 된 것처럼….
그리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착각이 2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이 엄청난 미망과 허위와 독단을 타파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새 축 시대의 성경읽기는 글의 맨 앞에 제시된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성경은 구도자의 입장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문서로서 읽혀져야 하며, 제도종교는 성경의 정신을 공동체성으로 구현하는 지향점을 가질 때에만 존재근거가 있다. 만일 그 심각한 부조화의 간격을 극복하지 못하는 제도종교는 역사의 유적으로 남을 뿐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정신과 제도종교문화의 영성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강한 종교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코로나 판데믹 시대의 제도종교가 관습과 관례의 굴레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는 역사적 고아로서 후세는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운동의 기수로서 기록될 것인지는 이해관계자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은 혼합과 융합, 혼잡과 회통을 혼돈하는 지점에 배타적인 종교담론을 형성하지 말고 ‘포월적 상생’할 수 있는 포용의 준거점을 설정하는데서 새 축 시대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다.

미주
(미주 1) 이 글의 논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길희성은 탈종교시대가 지향해야할 바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으로』, 북스코프, 2018.
(미주 2)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이 책의 제1편에서 개념을 도입하여 이런 맥락하에서 본문을 전개하고 있다.
(미주 3) 서양 종교문화에서 종교를 지칭하는 religio’는 신과 인간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연결시켜 준다는 그리스도교적 환경에서 만들어 졌으나, 이 ‘religio’가 1869년 독일과 일본의 두 나라가 통상협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종교라고 번역되었다. 종교는 벽암록에서 첫 출전을 보이며 ‘중요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학자들은 종교를 능가경의 싯단타(siddhanta), 즉 ‘성취하여 완성하다’는 싯다(siddha)와 ‘끝내다’라는 안타(anta)의 뜻을 차용하여 번역하였다. 
최종석,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 민족사, 2017, 5-8.
(미주 4)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11.
(미주 5) 사실 한국종교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글은 호교론적인 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 글들은 건강한 종교문화가 형성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을 참고할 것: 
  • 김근수 외, 『지금, 한국의 종교』, 매디치미디어, 2016; 
  • 김광식, 『새 불교운동의 전개』, 도피안사, 2002; 
  • 이정배, 『두 번째 종교개혁과 작은교회운동 : 종교개혁 500년 이후, 기독교의 한국적 재주체화를 위하여』, 동연, 2017; 
  • 이오갑, 『한국 기독교 개혁의 태마 20』, 한들출판사, 2002; 
  • 김영철, 『목회자가 사는 길: 하나님 앞에 선 노목사가 후배 목회자들에게 전하는 애끓는 당부』, 아바서원, 2013.
(미주 6) 김흡영, 『도의 신학 Ⅱ』, 동연, 2012, 27-41.
(미주 7) 인용글의 고딕체는 필자가 강조를 위하여 표시함.
(미주 8) 이호재,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교회론이 있는가-건물 교회에서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로〉, 《뉴스앤조이》, 2019, 11.5; 같은 필자, 〈한국교회, 새로 시작해야 한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 문명을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뉴스앤조이》, 2020, 11.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1/06/30

원불교 논산교당 고세천 교무 - 토론토 교당 설립에 관하여

On Fri, Mar 26, 2021 at 1:26 PM 으라차차 <kose1000@hanmail.net> wrote:

세진님.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원불교 논산교당 고세천 교무입니다.



최근들어 일선 이남순 어머님 책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 책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2남 2녀가 어머님에 대한 추억의 글이을 책에 기재했는데 그중 캐나다 원불교 역사 연혁에 포함될 내용이 있는데 세진님의 글에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페이지 250 ~ 251


원불교 재단법인 인가 캐나다에 포교사 주재 보장

원불교신문 |1974.10.25|

캐나다에 새 원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해외포교문제연구소에 의하면 8월 22일 「토론토윈부디스트 템플」이라는 이름의 재단법인 인가를 캐나다 주정부로부터 받았다. 이로 인해 캐나다에서의 본교 포교활동은 물론 원불교 포교사로서의 신분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는 캐나다 주재 교포 이남순, 박성철씨 부부의 원력으로 지난 6월부터 방 한 칸을 빌어 법회를 보아오면서 주선한 것이다. 캐나다 교도들은 조속한 시일 내로 교무파견을 원하고 있다.

원불교신문 webmaster@wonnews.co.kr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250페이지 중간부분 책 내용중에 
그리고 1975년에 북한을 방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우리 집은 원불교 집회 장소가 되었을 것이고 우리 가족 모두 거기 동참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집을 원불교 집회 장소로 제공하는 일이 틀어졌나요? 왜냐면 원불교 토론토 교당 연혁에는 이남순, 박성철(법호 화타원, 법명 이화중) 부부가 법인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어서요.

또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251 페이지 이남순 어머니 시댁 아주머니가 원불교 교단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되어있는데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점은 원불교 토론토 교당 초창기 연혁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어서 그 공적을 자세히 기록해 놓아야 할듯해서 여쭙습니다. 원불교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요. 아마 세진님이 이 부분을 책에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묻혀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라도 단초를 언급해 주셔서 원불교 캐나다 초창기 교화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게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장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캐나다 토론토 교당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신점도 드러났지요.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Sejin Gmail <eatallday@gmail.com>
받는사람: 으라차차 <kose1000@hanmail.net>
날짜: 21.03.26 12:40 GMT +0900
제목: Re: [원불교 고세천 교무] 세진님. 오랫만입니다.

고세천 교무님,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반갑습니다.
제가 쓴 부분을 자세히도 읽으셨군요.

큰집 아주머니라는 분은 시인 박용철의 부인 임정희 (임정관) 입니다.

큰집이라는 것은 저희 할아버지가 박용철의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임정희 아주머니와 그 아들 박종달 (의사, 박인원), 두분 다 원불교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씁니다.

임정희 아주머니 덕분에 제가 1974년에 한국을 무전여행한다고 찾아갔을 때 영선선원에서 2주간을 보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의 영산선원은 촌에 집 두채에 교실겸, 기숙사겸으로 이용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교무가 되려고 교육을 받던 젊은이들과 알게 된 것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습니다.

오늘은 바빠서 다음에 사진을 몇장 보내드리겠습니다.

박세진

박용철 부인 임정희가 나오는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순수파 시인' 박용철 유작시 모두 공개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27/2004022770202.html

박용철 시인, 원불교소촌교당 관계
https://blog.daum.net/won84d/1102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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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Fri, Mar 26, 2021 at 2:34 PM 으라차차 <kose1000@hanmail.net> wrote:

네. 세진님의 친가도 대단한 집안이네요. 주로 어머님을 통해서 외가집 분위기만 들었었는데 오늘 새롭게 알았습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친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저도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세진님 2남 2녀의 글솜씨도 대단합니다. 참 훌륭한 집안입니다.






어머님 관련 소중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공유합니다. - eatallday@gmail.com - Gmail


어머님 관련 소중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공유합니다.

으라차차

Jun 28, 2021, 12:27 PM (2 days ago)





to me




대용량파일 2개 (13.93MB) ~ 2021.07.28 (30일 보관, 100회 다운로드 가능)


  KakaoTalk_4.jpg (6.73MB)


  KakaoTalk_5.jpg (7.2MB)



어머님과 아버님이 원불교 해외교화 역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셔서 그 공덕이 아주 큰데 지금은 묻혀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왜냐면 기록과 자료가 없어서 입니다. 하지만 파일 첨부한 것처럼 자료를 찾았습니다. 어머님 일생에 대해 세진님이 책 "나는 이렇게 평화를 찾았다" 에서 밝힌 자료와 "작은 거인 백상원교무" 책에서 퍼즐이 맞추어 주었습니다.

세진님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기쁜 마음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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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Gmail <eatallday@gmail.com>

11:03 AM (28 minutes ago)





to 으라차차









고세천 교무님께,


어머니에 관계된 자료를 발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974년 정도에는 임정관 아주머님과 어머니 사이에서 편지왕래가 자주였던 것이 제가 자서전 준비단계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불교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다시 한번 찾아보아야겠습니다.


토론토 교당 이야기와 직접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원불교와 관계된 아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동생 박유진이 70년대 말에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국제적 영성단체 에미서리와 만나게 되었는데요.
80년대에 가서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에머서리 본부 영성공동체에 들어가서 약 25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에미서리가 80년대 후반에는 한국에서도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에 원불교 교무님들도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에미서리 멤버들이 콜로라도 에니서리 공동체를 방문하기도 하고 1년 등 장기 체류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 중에는 원불교와 관계된 분들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사진 1: 유진님. 어머니. 한국. 년도는 1990년 정도?
사진 2: 1995년 토론토 교당. 중간 줄 왼쪽이 어머니.





박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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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알라딘: Won-Buddhism

알라딘: Won-Buddhism


Won-Buddhism - The Birth of Korean Buddhism
Joon-sik Choi (지은이)지문당(JIMOONDANG)2011-09-05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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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인이 창도한 세계적인 불교인 원불교를 영문으로 쉽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원불교는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초 박중빈이라는 천재적인 종교가에 의해 세워졌다. 박중빈은 기존의 불교를 계승하되 그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새로운 한국형 불교를 만들었다.

그가 개혁한 점을 들어보면, 우선 원불교에서는 그 교당에 불상이라는 ‘우상’을 더 이상 모셔놓지 않는다. 대신 진리의 상징으로서 원을 모신다. 그래서 원불교라 불린다. 승려의 독신제도도 타파해 적어도 남자 승려들은 결혼할 수 있게 했다. 교당도 기존의 절처럼 산간이 아니라 도심에 위치하게 해 사람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교전도 어려운 한문이 아니라 쉬운 한글로 교체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점과 더불어 원불교의 교주인 소태산 박중빈과 그의 제자인 정산 송규의 일생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소태산이 원불교를 열었다면 정산은 원불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아 원불교가 오늘날 한국의 4대 종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목차


Preface

Chapter 1
A Mature and Enlightened Being
A Mature Childhood Full of Big Ideas
The Road to Truth
Sot'aesan's First Dharma

Chapter 2
Into the World
Spiritual Consolidation
In Preparation for True Work
Second Prime Dharma Master, Chongsan

Chapter 3
Doctrine of Won Buddhism
"With this Great Opening of matter, let there be a Great Opening of spirit"
How should we train?-Personal practice
About Truth
How to create a just society-Serving the Community

Chapter 4
Won Buddhism Today and Its Problems

Appendix
More teachings of Sot'aesan not to m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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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Joon-sik Choi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Joon-sik Choi (Ph.D. in Religion, Temple University) is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Korean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Ewha Women’s University. His research interests include religion, social culture, history and art. He has published extensively on various aspects of Korean religion and culture, including Do Koreans Have a Culture? (2003); Buddhism: Korea’s Religion (2007); Spirit of Korean Cultural Roots: Folk Religion (2009); Shamanism: A Central Religion of Koreans Pushed Aside by the Powerful (2009); and Introduction to Death (2013). 접기


최근작 : <Contemporary Korean Culture>,<Won-Buddhism>,<The Development of “Three-Religions-Are-One” Principle from China to Korea>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This book is about new Korean Buddhism called "Won Buddhism" which was created by a religious genius named Chungbin Park (Sot'aesan) in 1916. Park innovated traditional Buddhism in the following various ways. First, Won Buddhists do not worship Buddha statues any longer, but instead enshrine circle (Il-Won-Sang) as a symbol of the Truth. That is why this Buddhism is called Won Buddhism ('won' means circle in Korean). Secondly, celibacy system of traditional Buddhism is no longer valid in this Buddhism. But it should be noted that only male minister can marry, not female minister! Thirdly, we can find many Won Buddhist temples in the cities, whereas traditional Buddhist temples are located in deep mountains. The fourth characteristic of Won Buddhism is that canons of this Buddhism are written in easy modern Korean, while those of traditional Buddhism are mainly in difficult classical Chinese. This book may be remembered as the first easy introductory book in English on Wo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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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등록 :2006-09-26 18:24수정 :2006-09-2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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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영어 번역 이끈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



한국 자생 종교의 대표격인 원불교의 교전이 10년의 작업 끝에 영어로 번역됐다. 인쇄만 남겨둔 (원불교 교전)이다. 미국 뉴욕 인근의 50만평 부지에 미주총부를 건립중인 원불교로선 원기(탄생) 91년 만에 좀 더 큰 바다로 나아갈 소프트웨어까지 마련한 셈이다.



이 교전 영역엔 만만치않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로버트 버스웰(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과 원불교 교리에 동시에 탁월한 식견을 갖춘 최영돈(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주선학대교수인 박성기 교무와 버스웰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리 버스웰도 함께 했다. 백 교수는 1970년대 초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에게 출가했던 승려 출신 버스웰 교수를 이 작업에 참여시켜 영역본의 산파 구실을 했다. 버스웰 교수가 1971년과 1988년에 간행된 바 있던 교전 영역본을 기초로 초역을 하면 이를 기초로 정역위원들이 서울과 로스앤젤레스 등에 모여 2박3일 가량 합숙을 하며 정리했다.

<창작과 비평> 대표, 영문학 교수, <시민방송> 이사장 등으로 촌음도 쪼개서 살아가며 10년 간 이 작업을 해온 백 교수(68)를 25일 만났다.

지금까지 백 교수가 불교에 조예가 깊은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원불교의 관계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 “원불교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1970년대부터 원불교 교전을 읽은 흔적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인 덕에 교전 접하고 깊은 감명… 10년간 촌음 쪼개 공동작업
번역은 포교 차원보다 한국사상 세계 알리기 의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기자명 나세윤 기자
입력 2016.01.01
호수 1783

온전한 '조선''한국'만드는 자체가 정신개벽
▲ 백낙청 교수는 남북화해사업에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안타까움을 표하며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병신년(丙申年) 원숭이해를 맞아 특별인터뷰를 준비했다.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고 오랫동안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을 이끌었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 〈정산종사법어〉 영역작업을 비롯 최근 창비의 표절시비 등 현안에 대해 질의했다.

- 새해 〈원불교신문〉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말씀 해주시죠.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원기101년에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외국의 선교사나 선교자금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자력으로 이만큼 성장한 것은 참으로 자랑할 일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나라가 두루 어지럽고 교단도 매사가 잘되는 것만은 아닐 터인데 올해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 〈창작과비평〉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이었고,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어려울 때 중심 추(錘)역할을 해왔습니다. 군부에 의해 폐간을 당하는 큰 시련도 있었는데요. 쉬지 않고 한국사회의 담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수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고 믿어준 덕분이고, 더 크게 본다면 한반도의 어변성룡(魚變成龍)하는 기운을 탔다고 말해야겠지요. 새해가 창간 50주년인데, 저는 편집인에서 퇴임하는 대신 제 공부에 더 열중해서 창비와 한국사회의 변화에 한층 슬기롭게 공헌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 그런데 지난해 한동안은 백 교수님과 창비가 이른바 표절시비와 관련해서 많은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지요.

예. 표절시비가 걸린 작가 본인은 물론 저와 창비도 그를 두둔한다 해서 돈에 눈이 어두운 문학권력으로 비난을 받았지요. 지금은 거의 잠잠해졌는데 저는 두가지 이유로 이번 사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첫째 논란 자체가 창비의 어리석은 초기대응으로 확대되었다는 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다른 여러 부족함도 함께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기에 고마운 일이고, 둘째로는 창비가 온갖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작가에 대한 과도하고 일방적인 단죄 여론에 끝까지 합류하지 않고 버텨냄으로써 향후 지속적인 발전에 필요한 도덕성을 확보했다고 믿어서 감사하는 거지요.

- 백 교수님은 이론가이자 문학평론가, 영문학자로서 살아오셨고, 한국 문학에 분단체제론이라는 사회과학적 이론을 세우셨습니다. 분단체제의 여정은 언제 끝이 날까요.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날씨예보 하듯이 언제 끝날 거라고 예측할 성질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근년에 남북관계가 악화되니까 흔들리던 분단체제가 다시 고착되었다고 판단하는 분들이 계신데 지금은 말기국면의 혼란상이요 더욱 위험해진 국면이지 분단체제가 안정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분단체제론은 사회분석의 도구이긴 하지만 기존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새로운 인문학이기도 합니다.

1945년의 광복과 동시에 분단된 우리 민족은 6·25전쟁의 참극을 겪고 무력통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전쟁이 아닐 뿐 온전한 평화도 될 수 없는 정전협정 아래에서 분단이 일종의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이런 체제를 제대로 알아서 더 나은 한반도체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인식능력이 필요하고 개개인의 마음공부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전환이 요청됨을 강조하는 것이 분단체제론입니다.

- 민중문학론에서 근대성 담론으로, 다시 분단체제론으로 나간 지적 모험이 경이롭습니다. 연세대학교 김호기 교수는 교수님을 "영문학자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른 '르네상스적 사상가'였다"고 말했는데요.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말씀하신 근대성 담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가설일 텐데 분단체제론보다 늦게 제출됐고 근년에 와서야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 서양의 담론계에서도 조금씩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김호기 교수의 평가는 저로서는 면구스러워요. 참다운 인문학은 마땅히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것이므로 그걸 추구했다고 르네상스적 운운할 건 아니고요. 게다가 우리나라의 전통적 선비들만 해도 학문과 정치적·사회적 실천을 병행하면서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는데 그 기준으로 봐도 저는 무척 초라하지요.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께서 물질적 가난말고도 여러가지 가난이 있고 그런 걸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셨으니 그 가르침을 따라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 〈원불교신문〉도 그렇지만, 〈창작과비평〉도 젊은 독자층 확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짧고 격정적인 스낵 컬처가 유행입니다. 이런 세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화(문학 포함)적 전망을 하신다면.

지난날의 너무 엄숙한 문학이나 논설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일부 젊은 세대의 풍조 역시 무조건 지지해줄 수는 없습니다. 선천시대가 후천시대로 바뀌는 세상의 혼란에 우리 모두가 휩싸여 있거든요. 어떤 묘책으로 단방에 해결될 사태는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각기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적공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 〈정전〉, 〈대종경〉 영역작업에 참여하셨습니다. 창교 100년을 맞은 원불교가 어떤 혁신과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전>, <대종경>에 이어 올해는 <정산종사법어> 번역을 마무리 짓게 돼서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전과 교서는 읽을수록 한국사회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불교 등 아시아의 전통에 생소한 나라와 대중들에게 가장 맞춤한 현대의 교법이 아닌가 해요. 원불교의 재가출가 여러분이 이 교법을 연마하고 실행만 한다면 무엇을 혁신하고 변화시킬지 저절로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교단의 규모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만, 일원대도와 삼동윤리를 몸에 익힌 교도가 일정 수만 되면 원불교보다 훨씬 큰 종교나 세속의 운동들에 대해서도 능히 정신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교단 통일운동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전해주시죠.

요즘 남북화해사업에 대한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시국과 정부당국이 그렇게 만든 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아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남북의 화해와 협력, 나아가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종사께서 '조선이 다시 조선이 된다(朝鮮更朝鮮)'고 하셨을 때의 '조선'은 반도의 절반인 '남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기억해야 하고 온전한 '조선', 온전한 '한국'을 만들어가는 공부와 사업 자체가 정신개벽의 일환이며 '물고기가 용이 되는' 과정임을 더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합니다.


☞ 백낙청 교수는

ㆍ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
ㆍ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ㆍ〈창작과비평〉 편집인 겸 발행인
ㆍ시민방송RTV 명예이사장
ㆍ제2회 심산상 / 제1회 대산문학상
ㆍ제14회 요산문학상
ㆍ제5회 만해상 실천상
ㆍ제11회 늦봄통일상
ㆍ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ㆍ제3회 김대중학술상
ㆍ저술 〈흔들리는 분단체제〉 외 다수

나세윤 기자 nsy@wonnews.co.kr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기자명 원불교신문   입력 197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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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인쇄 착수 해외 포교에 활기
<사진설명: 감수진이 영역본 교전을 감수하고 있다.>
반백년 기념사업회의 하나로 추진돼 온 「원불교교전」의 영역이 전팔근 교수(원광대· 해외포교연구소장)에 의해, 착수한 지 1년 2개월만에 완료되었다.
전교수는 영역이 완료된 교전을 지난 6월말 교서 편수 기관인 정화사에 넘겼고, 정화사에서 감수위원회에 회부, 지난 7일 감수를 마침으로써 이제 출판의 과정만 남아있게 됐다.
지난 7월 2일부터 7일까지 서울수도원에서 가진 영역본 「교전」감수에는 박광전(원광대학장) 박장식(서울사무소장) 이공주(서울수도원장) 이운권(교정원장) 법사 등 감수위원 전원과 정화사 사무장인 이공전씨, 원광대학 원불교학과 주임 교수인 송천은씨, 그리고 책임 번역자인 전팔근씨가 참석했다.
일반 출판물과는 달리 종교의 경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도, 더구나 처음으로 손을 댄 「원불교교전」 번역은 참고 재료가 없어 애로가 많았고 감수하는 데도 그만큼 고충을 겪었다고 감수진들은 말하였다.
이공전 사무장은 『원불교 영어, 어휘에 대한 뚜렷한 해석(개념규정)이 시급함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책임 번역한 전교수는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니까 종교적인 심오한 진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기가 까다로웠고 독특한 원불교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앞뒤 문장에 따라 약간 다르게 표현할 때가 있어서 어휘사용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영역의 애로를 털어놓았다.
영역본 「교전」은 7월 16일 서울 「교학사」에서 초판 3천부를 인쇄하게 된다. 국판 4백 50 「페이지」정도.
영역본 「교전」이 간행되면 침체된 해외포교에 한층 활기를 띄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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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5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주제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경계를 넘는 지구학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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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경계를 넘는 지구학모색
시간: 2021년 3월 19일 08:00 오전
원불교사상연구원 유튜브 채널 링크:
유튜브 댓글로 의견 및 질문 참여가 가능합니다.
-학술대회 발표 요지-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원장 박맹수 총장)이 오는 3월 19일에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국내에는 아직 낯선 개념인 ‘지구학’은 “지구자연과학, 지구사회과학, 지구인문과학”을 통칭하는 새로운 학문 범주로, 20세기 후반에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Global Studies를 확장시킨 개념이다.
<2020년도 한국연구재단 학술대회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기조강연(박치완)을 포함하여 지구형이상학(이원진), 지구정치학(김석근), 지구평화학(원영상), 지구인류학(차은정), 지구종교학(조규훈), 지구재난학(가타오카 류), 지구예술학(오쿠와키 다카히로), 지구수양학(이주연), 지구교육학(이우진), 지구윤리학(허남진), 지구유학(김봉곤), 지구기학(야규 마코토), 지구살림학(조성환) 등 총 14개의 지구학 관련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국내에서 지구학을 주제로 이 정도로 방대한 규모로 학술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2016년에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연구”를 주제로 6년 동안 대학중점연구소로 선정되었는데 이번 학술대회는 그 다음 단계의 연구를 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지구인문학 학술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2020년 4월부터 1년 동안 매주 3시간씩 ‘지구인문학 스터디’를 개최하고 울리히 벡의 <지구화의 길>을 비롯하여 조지형 등의 <지구사의 도전>,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 사이토 코헤이의 <생태사회주의>, 김지하의 <생명학>, 혜강 최한기의 <지구전요>와 <기학(氣學)> 등 지구인문학 관련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이번 학술대회가 종래의 인간과 국가 중심의 학문에서 벗어나서 지구와 만물과도 공생할 수 있는 자생적 인문학을 탄생시키는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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