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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5

현대일본 공공철학 담론의 의의 - 김태창을 중심으로 - - earticle

현대일본 공공철학 담론의 의의 - 김태창을 중심으로 - - earticle

현대일본 공공철학 담론의 의의 - 김태창을 중심으로 -
The Meaning of Public Philosophy in Contemporary Japan : Focusing on Kim Taechang

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제31집  2014.09 pp.37-79 KCI 등재


초록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ultural meaning of Public Philosophy in contemporary Japan. In so doing, I will pay special attention to Kim Taechang, who has been leading the various discourses on Public Philosophy since inauguration of “Kyoto Forum” with Sasaki Takeshi, ex-president of Tokyo University in 1998. Kim Taechang maintains “empowering public minds and actions of peoples by animating each individual”(活私開公), “bridging public and private”(公私共媒), and “making happiness together”(幸福共創) as the three ideals of East-Asian Public Philosophy. As a result, this paper will analyze Kim Taechang's discourses on Public Philosophy from the standpoints of “Nihonjinron”, “Korean Wave”, and “East-Asia”, noticing the so-called “thought of parallel” which may seek for the ultimate harmony among the opposite.

본고는 2천년대 초입을 전후로 하여 일본에 일기 시작한 공공철학 붐의 문화론적 의의를 고찰하는 글이다. 이때 본고는 특히 998년 4월 사사키 다케시(佐々木毅) 전 동경 대총장 및 주식회사 펠리시모의 대표 야자키 카츠히코(矢崎勝彦)와 함께 <공공철학 교 토포럼>을 창시하여 현재까지 일본 국내외의 2천여 명이 넘는 일급 전문학자들을 끌어 들여 공공철학 붐을 불러일으킨 김태창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교토포럼>을 통해 지금까지 사상사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국가, 경제, 중간집단, 과학기술, 지 구환경, 자치, 법률, 도시, 리더십론, 종교, 지식인, 조직, 경영, 건강, 의료, 세대간 관계, 자기론, 매스미디어, 언어, 교육, 비교사상, 각 나라별 공사문제, 고도정보화사회, 세대계 승 문제, 성차 문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동아시아발 공공철학과 관련하여 학제간 토론 을 주도해 오면서, 그 세 가지 이념형적 목표로 활사개공(活私開公), 공사공매(公私共 媒), 행복공창(幸福共創)을 주창하고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김태창의 공공철학 담론에 대해 일본문화론으로서의 공공철학, 한류로서의 공공철학, 동아시아 담론으로서의 공공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궁극적으로 그것이 “무한의 저쪽에서 일치하는 평행선의 사유”를 지향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 김태창은 누구인가
 Ⅰ. <공공철학 교토포럼> : 왜 일본인가?
 Ⅱ. 김태창의 공공철학 비전
 Ⅲ. 공공철학 담론의 일본적 의의
  1. 영성적 지식인으로서의 김태창 : 스피리추얼리티 담론
  2. 일본 담론 : 부정적 일본문화론의 전략적 복권
  3. 한국 담론 : 한류로서의 공공철학
  4. 동아시아 담론으로서의 공공철학
 나오는 말 : 무한한 평행선 너머


 <참고문헌>
 <국문요지>
키워드
공공철학 김태창 활사개공 일본문화론 한류 동아시아 담론 Public Philosophy Kim Taechang Nihonjinron Korean Wave Discourse on East Asia


저자정보
박규태
Park Kyutae. 한양대학교 교수


참고문헌

김봉진(2013_12), "김태창의 공공하는 철학과 일본", <공공철학> 36, 2013.12.
김봉진(2013_11), "동아시아에서의 생명공동태와 공공하는 철학", <공공철학> 35, 2013. 11.
김봉진(2007), "공공철학의 지평", 철학문화연구소,『철학과 현실』 74.
김태창(2013_10), "기타가와 사키코 교수의 서거를 애도함",『공공철학』 34, 2013.10.
김태창(2013_8), "공공하는 철학을 통해서 한살림운동의 뜻을 생각한다", <공공철학> 32, 2013.8.
김태창(2013_7), "한국에서 공공하는 철학을 함께 이야기하다", <공공철학> 31, 2013.7.
김태창(2013_6), "공공하는 철학과 사회관계자본", <공공철학> 30, 2013.6.
김태창(2013_5), "실천적 공공지(公共知=良識)를 지향하여: 동아시아로부터 시동하는 공공철학으로의 전환시도", <공공철학> 29, 2013.5.
김태창(2012),『(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한삶과 한마음과 한얼의) 공공철학 이야기』, 야규 마코토 기록, 정지욱 옮김,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김태창(2012_11a), "'生命'과 '立志'를 주축으로 경영을 다시 생각한다(Ⅱ)", <공공철학>23, 2012.11.
김태창(2012_11b), "'포스트 경제국가'를 지향하는 구조개혁을 새로운 공공성의 시점에서 생각한다", <공공철학> 23, 2012.11.
김태창(2012_10), "'生命'과 '立志'를 주축으로 경영을 다시 생각한다", <공공철학> 22호, 2012.10.
김태창(2012_5), "'한'과 '야마토': 그 사이의 상극 상반 상척에서 상화 상생 상복으로", <공공철학> 17, 2012.5
김태창(2011a), "韓사상 韓철학과 공공윤리(학 교육)", 한국윤리교육학회,『윤리교육연구』 26.
김태창(2011b), "공공하는 철학으로서의 한사상: 원효 최제우 김범부를 생각한다", 위덕대아시아 태평양연구소,『아태연구』 10.
김태창 편저(2010),『상생과 화해의 공공철학: 중국과의 對話共働開新』, 조성환 옮김, 도서출판 동방의빛.
김태창(2007),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문화연구소,『철학과 현실』 74.
모리오카 마사요시(2013_12), "김태창 선생을 이야기하다: 타자와의 사이(間)를 연 사람",<공공철학> 36, 2013.12.
박규태(2011a), "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 종교문화비평학회,『종교문화비평』20, 청년사.
박규태(2011b),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현대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종교의 저울에 담아본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일본비평』 5, 그린비.

이 땅에서 공공철학하기(1) – 다시개벽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은?

이 땅에서 공공철학하기(1) – 다시개벽



이 땅에서 공공철학하기(1)




-‘공공’이란 무엇인가?


글: 조성환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공공성’의 유행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성’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가령 구글에서 ‘공공성’으로 검색해 보면, ‘법률의 공공성’이나 ‘의료의 공공성’또는 ‘교육의 공공성’이나 ‘건축의 공공성’, ‘금융의 공공성’과 같은 용례가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공공성’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만능어’처럼 보인다.
마치 조선시대에 성리학에서 ‘리(理)’라는 말이, ‘사랑[愛]의 리’, ‘효도[孝]의 리’, ‘마음[心]의 리’, ‘사물[物]의 리’와 같이,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성리학에서 ‘리’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그러나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른, 당위적 ‘가치’를 의미하였다. 모든 사물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에게는, ‘그렇게 있어야 할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마찬가지로 ‘공공성’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지켜야 하는, 어떤 분야에도 두루 적용되는, 공통의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덕목이 모종의 이유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있고, 그래서 ‘공공성’이라는 말이 일종의 화두처럼 쓰이는 느낌이다. 가령 세월호 사태가 있은 지 얼마 후, 〈공공성 꼴찌 국가 한국…세월호와 ‘공공성’〉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보도되었는데(2014.11.7. SBS 인터넷판 뉴스 「취재파일」). 이 보도에 의하면, SBS와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1년 동안 공동 연구한 결과, 세월호 사태의 원인은 한국 사회의 공공성이 낮은 데에 있었고, 실제로 OECD 국가들의 순위를 매겨 본 결과 한국의 공공성은 꼴찌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공공성’에서 찾은 대표적인 예이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공공성’이라는 말의 유행과 더불어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가령 조원희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매일노동뉴스》 2006.08.20.), 조한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2009), 이노우에 타츠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초청강연회, 2010.11.05.), 정태인 「공공성이란 무엇인가」(《공무원U신문》 2014.11.17) 등이 그것이다.
이 공통된 물음이 말해주는 것은 ‘공공성’이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공공성이 중요한지는 알겠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여기에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철학적 의미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즉 ‘공공성’이라는 말 속에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더 나아가서는 ‘정치’나 ‘경제’의 핵심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 논의에서 공통된 것은 ‘공공성’ 개념을 논하는 데 있어 하나같이 서양의 ‘public’ 개념을 출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공공성’을 ‘publicity’나 ‘publicness’의 번역어로만 이해하지, 원래 동아시아사상에서 논의되어 온 ‘공공성’ 개념은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실은 ‘공공성’ 개념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부분의 인문학적 논의에서 보이는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는 서양의 ‘publicity’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었을까? 다시 말하면 ‘publicity’의 번역어로서의 ‘공공성’ 개념은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그것은 원래부터 한자문화권에 있던 말일까? 아니면 번역을 위해서 만들어진 말일까? 이하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의 일환으로 동아시아 고전에 나오는 ‘공공’ 개념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에서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즉 한국 사회에서의 공공성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첫걸음으로 삼고자 한다.

‘공공성(公共性)’ 개념의 기원

먼저 ‘공공성’이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공공’+‘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성(性)’이란 ‘인간성’, ‘특수성’, ‘형평성’과 같이 명사 뒤에 붙어서 ‘어떠한 성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공공성’이라는 말도 일단 ‘공공의 성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즉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사상사에서의 ‘공공’ 개념에 주목한 학자는 일본에서 활동한 공공철학자 김태창이다. 그는 동아시아 고전에 나오는 ‘公共’ 개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공공철학’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김태창의 『상생과 화해의 공공철학』(동방의 빛, 2010)에 의하면, 한자어 ‘公共’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처음 등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사기』에 수록된 「장석지(張釋之) 열전」에 처음 나오는데, 장석지는 한나라 문제 때에 법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 있던 고위 관리였다. ‘공공(公共)’ 개념이 최초로 나오는 문맥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나라 문제(B.C.202~B.C.157)가 궁궐 밖을 행차하다가 마침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갑자기 다리 밑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오는 바람에 문제가 타고 있던 말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문제는 무사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황제가 말에서 떨어져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문제는 즉시 장석지에게 다리 밑에서 뛰쳐나온 사람을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장석지가 자초지종을 묻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황제의 행차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다리 밑에 숨었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행렬이 다 지나간 줄 알고 나왔는데 아직 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에 장석지는 황제의 행차를 방해했으므로 법률에 따라 벌금 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문제는 황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죄에 비하면 형벌이 너무 가볍다면서 크게 화를 냈다. 이에 대해 장석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법이란 천자가 천하와 함께 공공(公共)하는 바입니다.”
이 말은 문맥상으로 볼 때 제아무리 천자라 할지라도 법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임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공’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그 의미는, 앞의 ‘공公’은 ‘모두’ 또는 ‘공평하게’를 뜻하고, 뒤의 ‘공共’은 ‘함께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두와 공평하게 함께한다”는 정도의 뜻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핵심은 뒤의 ‘함께한다(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공(公)’은 ‘함께한다’를 수식하는 부사 정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석해 보면, ‘공공’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함께한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공공’이 동사로 쓰였다면 여기에 ‘성’이 붙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성’이란 말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대개 명사에 붙어서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공공성’이란 ‘공공하는 성질’, 다시 말하면 ‘모두와 함께하는 성질’이라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고전적인 의미의 ‘공공’에서 보면, “한국이 공공성이 낮다”고 한다면 “한국인들은 모두와 함께하는 성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모두’가 아닌 ‘일부’하고만 함께하거나, 아니면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공공철학을 다룬 도서들: 왼쪽부터 『상생과 화해의 공공철학』(김태창 저 / 조성환 역, 도서출판 동방의빛, 2010),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기획, 조병희, 이재열, 구혜란, 김지영 저, 한울아카데미, 2015),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조한상 저, 책세상, 2009), 『일본에서 일본인에게 들려준 한삶과 한마음과 한얼의 공공철학 이야기』(김태창 구술/야규 마코토 기록, 정지욱 역,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2)]


우주론적 차원의 ‘공공’

‘공공’ 개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사기』로부터 약 1000년 뒤인 성리학에서의 일이다. 성리학에서는, 『사기』에서와 같이 “법을 공공한다”는 용례 이외에도, “리를 공공한다”는 의미에서의 ‘公共之理(공공지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리’는 앞에서 말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쓰는 말이다. 즉 법과 같이 단지 인간 사회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쓰이는 개념이다.
그래서 ‘공공지리’란 “모든[公] 존재가 공유하는[共] 리”를 말한다. 이것을 줄여서 ‘공리(公理)’라고도 한다. ‘공리’는 근대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때 ‘axiom’의 번역어로 채택된 말이기도 하다. 수학에서 axiom이 “어디에나 두루 적용되는 증명이 불필요한 자명한 진리”를 의미하듯이, 전통시대에 ‘공리’ 역시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존재원리 같은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날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가치중립적인 법칙이나 원리를 말하였던 것은 아니다. 즉 뉴턴 물리학에서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유클리드 기학학에서의 ‘평행선 공리’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리’에는 무엇보다도 가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즉 그것을 실천하면 우주의 조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경우에 한해서 ‘리’라고 한 것이다(Brook Ziporyn 참조).
대표적인 예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다. ‘공’은 그 원리를 체득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고 다른 존재와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리’이다. 그리고 ‘공’이라는 ‘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공공지리’, 즉 ‘공리’이다. 붓다는 이 ‘공리’를 몸소 깨닫고 중생을 위해 설파했기 때문에 중국의 성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아울러 인도의 ‘불도(佛道)’가 유교와 같은 중국의 공식적인 ‘가르침’, 즉 ‘불교(佛敎)’로 격상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자극을 받아 성립한 성리학에서는 고대 유학의 ‘인(仁)’을 ‘리(理)’로 격상시켰다. 즉 맹자에서는 ‘인(仁)’이 타자의 아픔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라고 하는 인간의 심리현상으로 이해되었는데, 12세기의 주자에 가면 그것이 “우주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天地生物之心]이라고 하는 우주론적 원리, 즉 ‘공리’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이 우주의 마음으로 확대된 것이다. “인(仁)은 사랑의 리(理)이다”[仁者愛之理]라고 하는 주자의 말은 이러한 변화를 말하고 있다.

‘공공’의 세속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공공성’이란 개념은, 앞에서 소개한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주론적 차원에서의 ‘공공’이 인간사회의 영역으로 한정됨과 동시에 동사에서 명사로 그 쓰임이 변질되어 탄생한 말이다. 이와 같이 ‘공공’ 개념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세기 초의 일본에서의 일이다. 야마와키 나오시에 의하면, 일본의 윤리학자 와츠지 테츠로(和辻哲郎)는 1930년대에 『윤리학』이라는 저서에서 ‘公共性’이라는 개념을 처음 썼다고 한다.
그런데 와츠지는 ‘공공’을 추상명사화함과 동시에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을 ‘국가’로 제한시켰다. 즉 공공성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을 ‘국가’로 한정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윤리’적 차원으로 축소시켰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전후로 이른바 ‘전시체제’에 돌입한 시기이다. 즉 국가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점이었다. 이때 탄생한 ‘공공성’ 개념이 ‘국가’를 핵심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결과 전통시대의 ‘리(理)’의 자리에 ‘국(國)’이 들어가게 된다.
이때 생겨난 말이 “멸사봉공(滅私奉公)” 즉 “사(私)를 멸하고 공(公)을 받든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공(公)을 위해서 사(私)는 희생되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은 이제 ‘리’가 아닌 ‘국’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멸사봉공’은 달리 말하면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은 희생되어도 된다고 하는 국가지상주의적인 표어를 의미한다.
당시에 일본은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살 특공대를 만들어 미국과 싸우게 했는데, ‘멸사봉공’은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사용된 일종의 슬로건이었다. 또한 ‘멸사봉공’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를 다스렸던 일본 총독의 연설 속에 나오는 말로도 유명하다(〈이순신 장군이 ‘멸사봉공’? 뜻이나 알고 쓰나〉, 인터넷판 《오마이뉴스》 2012년 12월 5일자). 이 연설은 일본이라는 나라[公]에 대한 봉사[奉]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후에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되는데,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서, 또는 회사를 위해서, 또는 조직을 위해서라면 개인은 희생되어도 된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公)’은 주로 ‘정부’나 ‘관청’ 등을 나타내는 말로 제한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공직자’, ‘공무원’, ‘관공서’, ‘공기업’, ‘공익’과 같은 말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에 국가나 사회를 뛰어넘어서 모두가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 ‘공(公)’을 쓰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공(公)’ 하면 곧바로 국가나 정부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아울러 이때부터 ‘공공’이라는 말도, ‘공공 기관’이나 ‘공공 정책’과 같이, 국가로서의 ‘공(公)’을 나타내는 말로 의미가 한정된다.

나는 이것을 ‘공공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국가를 넘어선 우주론적 차원의 ‘공공’이 국가적 영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가와 국가를 잇는 사상적 고리는 끊어지게 되고, 인간의 문제를 우주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하는 사고는 소멸하게 되었다. 흔히 근대의 폐단으로 지적되는 인간중심주의, 생태문제, 국가주의 등은 모두 공공의 세속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제는 이 세속화된 ‘공공’을 어떻게 하면 다시 자연의 영역, 우주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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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은?




-하늘은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동화되지 않는 한국적 영성을 대변한다


글: 조성환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시대의 키워드 생명과 소통

지난 학기에 대학에서 “한국철학사”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외국인 여학생으로부터 내 수업을 청강하고 싶다는 메일이 왔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현대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한국계 미국인 학생으로, 다년간 한국을 필드워크면서 제일 많이 접한 단어가 ‘생명’과 ‘공공성’인데, 내 수업계획서에 “생명과 공공성 그리고 하늘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에 접근한다”고 되어 있어서 청강을 신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은 대개 공개성, 공정성, 공평성, 공익성 등을 포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어원적으로는 서양어의 ‘public’에 기원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 “가치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국인 학생의 한국 사회 분석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공공성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세월호 사태를 분석하면서 ‘공공성’이라는 말이 화두로 등장한 것도(가령 2014년 11월 9일 sbs 뉴스 “공공성 꼴찌 국가 한국 – 세월호와 공공성”), 일차적으로는 어린 ‘생명’들이 무참히 죽어 가는 사태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생명’과 더불어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또 다른 말은 ‘소통’이다. ‘소통’은 특히 정치인들에 대해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현 대통령의 가장 큰 단점으로 ‘불통’이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소통’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생각한 공공성의 핵심 가치 중의 하나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과 더불어 ‘소통’을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의 핵심 가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생명과 소통, 이 두 가지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생명과 소통 그리고 하늘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을 탐색해 보고자 하는 시론이다.

생명과 공공성

태종실록이나 세종실록을 읽다보면 “호생지덕”(好生之德)이라는 말을 종종 접하게 된다. “호생지덕”이란 말 그대로 “생명을 좋아하는 덕”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왕의 최고 덕목이 ‘생명존중’–우리말로 하면 ‘살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한 고을에 굶어죽는 자가 발생하자 그 고을 수령에게 곤장 100대라의 형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은 위정자의 가장 큰 임무를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세종실록에 유독 ‘안민’(安民=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이라는 말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작년에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어떤 공직자도 책임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공공성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개인의 생명보호는 1차적으로 개인의 몫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병원’이라는 말 대신에 ‘활민원’(活民院)이나 ‘제생원’(濟生院)이라는 말이 쓰였다는 사실도 공공성의 핵심에 ‘생명’이 놓여 있음을 엿보게 한다. ‘병원’은 말 그대로 “병을 다루는 곳”이라는 지극히 기능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어휘이다. 이에 반해 ‘활민’이나 ‘제생’은 “생명을 살린다”는 가치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생명존중사상이 드라마틱하게 장면이 바로 퇴계이다. 퇴계는 말년에 증손자 창양을 보았는데, 불행히도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하여 창양은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다. 그때 마침 퇴계가 데리고 있던 여종 학덕이 아이를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손자 안도(=창양의 아버지)가 퇴계에게 여종 학덕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엄마 대신 여종의 젖을 창양에게 먹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퇴계는 <근사록>이라는 유교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자식을 죽일 수 없다”며 여종 학덕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창양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퇴계는 증손자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다.
우리는 흔히 ‘퇴계학’하면 ‘경학’(敬學)을 떠올린다. 여기서 ‘경학’이란 하늘이나 천리(天理)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퇴계의 ‘경’은 타인을 향한다. 그것도 신분이 미천한 노비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의 경학이 수기(修己=자기 수양)를 넘어서 경인(敬人=타인에 대한 공경)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그 바탕에는 생명 존중 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철학사에서 ‘경인’ 사상은 19세기 동학에서야 비로소 뚜렷하게 제기된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존재는 다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은 곧 ‘생명력’ 그 자체를 말함을 알 수 있다. 하늘님은 우주적 생명력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그 우주적 생명력이 개별적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시천주”라고 말한 것이다. 동학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은 이 우주적 생명력에 대한 존중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동학의 ‘경인’ 사상의 단초가 이미 퇴계에게서 배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동학의 생명 존중 사상은 퇴계사상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의 신분을 뛰어 넘은 생명사상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비도 천민(天民=하늘의 백성)이니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 세종의 말(26년 윤7월 24일)과도 상통한다. 유학과 동학, 임금과 백성이라는 이념적, 신분적 차이를 뛰어 넘어 이것들을 이어주는 개념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세종의 ‘천민’(天民)이나 퇴계나 동학의 ‘경천’(敬天)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에 대한 외경이 깔려 있다.

소통과 공공성

신라시대의 사상가 최치원은 화랑정신으로 ‘풍류’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중국의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를 포함하고(包含三敎) 뭇 생명들과 직접 접하며 교화한다(接化群生).” 여기서 ‘포함’의 의미에 대해서 김동리의 형인 범부 김정설은, 단순히 삼교를 조화시키거나 절충한 결과가 풍류도라는 뜻이 아니라, 신라 고유정신인 풍류가 먼저 있고 그 안에 이미 중국의 삼교가 들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범부 <풍류정신과 신라문화>). 한편 신학자 이정배 교수는 ‘포함’을 한국인들이 외래문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해석하였다. 달리 말하면 배제를 거부하고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는 우리가 한국의 독특한 사상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던져준다. 즉 ‘포함’이라는 말은 한 사람에게서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종교적 다원성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풍토가 바로 ‘풍류’라는 것이다. 이 풍류는 우리 말로 하면 ‘멋’의 다른 말이고, ‘멋’의 의미는, ‘포함’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면,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이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로서의 풍류정신을 멋있게 실현시킨 인물이 바로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다. 오늘날의 한국학계는 다산의 사상 체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크게 두 가지로 입장이 갈리고 있다. 하나는 그가 완전히 서학(=천주교)에 경도되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적으로 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즉 다산이 천주교에 더 경도되어 있었느냐, 아니면 유교에 더 가까웠는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의 핵심에는 ‘상제’(上帝) 개념이 있다.
‘상제’는 지금식으로 말하면 ‘인격적인 신’으로, 공자 이전의 문헌인 『시경』이나 『서경』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이고, 이후에는 16세기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시키기 위해서 쓴 한문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 ‘God’의 번역어로 채택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산이 『논어』에서 강조되는 ‘천(天)’이나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제(上帝)’를 선호한 것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는 원시유학으로 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즉 다산은 “유학자인가? 서학자인가?”라는 양자택일식의 물음에서 벗어나서, 최치원의 ‘포함’ 개념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다산은 유학과 서학을 아우르고자 한, 즉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서로 소통시키고자 한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다산에게는 처음부터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하나로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랑들에게는 최소한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라는 세 개의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상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일제시대의 종교사가인 이능화의 『백교회통』(1912년)이다. “백교회통”이란 말 그대로 “모든 종교가 장애 없이 서로 통한다”는 뜻으로, 화엄불교식으로 말하면 “백교무애”(百敎無碍) 또는 “교교무애”(敎敎無碍=종교와 종교 사이에 장애가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능화가 종교 간의 회통의 가능성을 ‘하늘’ 개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민족종교는 다 하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悉皆以天爲主)고 하면서 종교 간의 회통 가능성을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이 종교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일종의 ‘마당’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정약용에게 있어 유학과 서학의 조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전통적인 ‘하늘’ 개념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다산은 유학의 ‘天’이나 서학의 ‘God’, 혹은 양자에 결쳐있는 ‘上帝’ 개념을 한국인의 ‘하늘’ 개념으로 회통시킨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한반도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 고대 부족국가들의 전국적 규모의 제천행사, 즉 모든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이었다는 점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면 한층 설득력이 더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하늘은, 황제나 천자와 같은 한 사람이 독점하는 하늘이 아니라, 모든 이가 공유하는 가치이자 동시에 모든 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이라는 중국적 사상이 힘을 잃어가던 19세기에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사상을 기치로 내건 동학이 “서학과 동학은 모두 천도(天道)라는 점에서는 같다”면서 천주교와의 회통을 ‘하늘’ 개념에서 찾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능화가 종교사가의 입장에서 종교 간의 회통을 말하였다고 한다면, 바로 뒤에 나온 원불교는 실제로 종교 당사자의 입장에서 종교간의 융통을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불교 재단인 원광대학교의 한복판에 인류의 4대 성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정작 원불교의 창시자는 이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원불교를 상징하는 ‘원’의 이미지는 이러한 서로 다른 종교들을 ‘포함’하는, 혹은 서로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마당’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은, 이능화식으로 말하면 ‘하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사상 하에서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증산을 모두 ‘개벽’을 설파한 선지자로 극찬하였다. 여기서 ‘개벽’이란, 글자 그대로는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뜻인데,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으로 재해석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원불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사상사적 배경에서이리라.

하늘에 주목해야 할 때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사상사에서 ‘하늘’은 때로는 생명존중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전자의 예는 세종이나 동학에서 찾아볼 수 있고, 후자의 예는 동학이나 원불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의 ‘하늘’ 개념은 양자가 접해 있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사상 형태가 기본적으로 공자나 노자 혹은 붓다로 대변되는 ‘성교’(聖敎=성인의 가르침), 혹은 이러한 성인이 설파한 ‘도교’(道敎=도의 가르침)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천교’(天敎=하늘의 가르침)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국신화인 단군이 천신의 아들이고, 동학의 다른 말이 ‘천도’이며, 동학을 비롯하여 일제시대에 탄생한 민족종교들, 가령 대종교나 증산교 혹은 원불교 등에서 모두 ‘천제’(天祭=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하늘’에 대한 한국인의 외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인 유교경전인 『중용』 제1장에서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다”면서 도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고, 서양의 대표적인 근대사상가인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비참함과 신과 함께하는 최고의 행복”을 논하면서 신과의 불가분리성을 설파하였다고 한다면, 한국의 퇴계는 “상제(=하느님)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하였고, 동학의 최시형은 “하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구조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늘과의 불가분리성을 설파하는 점은, 각 문명권 간의 좋은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도’가 질서나 지침을 상징한다면 한국의 ‘하늘’은 생명과 포용을 의미한다. 하늘이 주는 애매모호함은 일신교처럼 배타적이지도 않고 유학처럼 위계적이지도 않으며 성리학처럼 이성 중심도 아니다. 하늘은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동화되지 않는 한국적 영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것은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의 최종적인 근거이자 목표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서시』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 ‘하늘’에 해당하는 일본어나 영어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외래사상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한국사상의 독특성을 말해준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세월호 사태를 보고서 “하늘님을 죽였다”고 개탄을 했을 것이고, 이능화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타 종교를 거부하는 배타적인 종교인들에 대해서 ‘하늘의 상실’을 느꼈을 것이다. 사회 각층에서 공공성의 상실이 우려되는 오늘날, 우리 전통사상에서의 ‘하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면 어떨까?

* 이 글은 『월간공공정책』 119호(2015년 9월호), 한국자치학회, <공공단상> 78~82쪽에도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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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  | 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하기 3
김태창 (지은이),조성환 (옮긴이),이케모토 케이코모시는사람들201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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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철학은 대화하는 활동이다”는 저자의 신념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나눈 철학대화가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제1부는 2010년에 동경대학출판회에서 나온 󰡔함께 공공철학한다 - 일본에서의 대화·공동·개신󰡕의 전문 번역으로, 시민철학자를 비롯하여 시민운동가 및 공무원 등과 나눈 대화 및 강연이 수록되어 있고, 제2부는 교육자 및 경영자와 나눈 대화가 소개되어 있으며, 마지막 제3부는 저자와 함께 공공철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학자 및 사회인들의 저자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목차
제1부 _ 일본에서 시민 및 공무원과 나눈 공공철학이야기
제1장—지금 왜 공공철학을 이야기하는가?
1. 지금 왜 일본에서 함께 공공철학하는가?
2. 동아시아에서의 공공세계의 공동구축을 향해서
3. 한중일을 맺고·잇고·살리는 공공철학
4. ‘공공하는 철학’과 ‘공공하는 이야기’의 사이
제2장—함께 공공철학하는 시공(時空)
1. ‘배움을 즐기는 것’과 ‘지혜를 연모하는 것’의 사이를 잇는 철학대화
2. 신문 / 매스미디어와 NGO / NPO / 자원봉사와 공공철학
제3장—국가공무원과 함께 공공철학한다
1. 국가공무원과 공공철학적 구상력
2. 공무원 윤리와 공공철학
제4장—동아시아발 공공철학의 사상적 원천 탐색
1. 실천적 공공지를 지향하여
2. 동아시아의 전통사상과 동아시아발 공공철학
3. 일본인의 참마음이란 무엇인가?
4. 한일강제병합 백년: 공공철학적 의미와 과제

제2부 _ 교육자 및 경영자와 함께 나눈 공공하는 철학대화
제1장—21세기 일본의 교육과제
1. 무엇이 문제인가?
2. 오늘날 일본 교육에서의 교사의 위상과 과제
3. 교육은 인간과 사회의 행복에 공헌하는가?
제2장—기업경영자와 실심실학적 구상력
1. 실심실학이란 무엇인가?
2. 학자와 기업인과 공무원이 나눈 공공철학대화
3. 생명과 입지 그리고 생기와 공복 경영을 다시 생각한다
제3장—공공하는 철학과 사회관계자본
1. 일본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
2. 부탄 왕국의 ‘국민총행복’
3.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제3부 _ 김태창, 그는 누구인가?
제1장—김태창을 이야기함으로써 오늘의 일본을 본다
제2장—김태창과 실심실학
제3장—김태창과 동아시아의 미래
제4장—김태창, 사람과 사상
제5장—김태창과 일본의 공공철학
제6장—한국의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공공하는 철학’
제7장—김태창 선생을 이야기하다
제8장—김태창의 공공철학 담론의 의의

접기


책속에서

P. 75 행복공창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양쪽이 행복해지는 길을 함께 찾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공(하다)’은 대립되는 두개의 개인간·단체간·조직간·정부간·민관간(民官間)의 상극·상화·상생의 동태(動態)로서 ‘공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적으로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하여 수용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직감이나 감성이나 감정에 호소하여 공감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해나 공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과 국가(사회)와 세계의 연동 변혁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론이나 학설보다는 ‘이야기’가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공철학운동’을 ‘ 철학철학’과 ‘ 이야기이야기’의 양면에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철학하는’ 공공철학과 ‘이야기하는’ 공공철학은 각자의 강점과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양자 사이를 어떻게 상호연동적으로 발전시키는가가 중요 과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접기
P. 370 저는 ‘공공철학’은 ‘정책철학’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책과학은 전문가의 일로 맡겨 두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공(하는)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철학’과 ‘정책철학’과 ‘세계철학’의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책’에 관해서는 ‘정책철학’이 별로 없고 ‘정책과학’ 일변도였습니다. 그래서 ‘교육’문제도 ‘인간철학’과 ‘정책철학’과 ‘세계철학’의 삼차원 상극상생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접기
P. 522 교토포럼 활동을 통해서 특히 큰 자각을 하게 된 것은, 1992년에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있었던 ‘리우회의’(Earth Summit)에서 미국재단과 공동으로 현지에서 여러 활동을 했을 때였습니다. 이 ‘리우회의’에서 재인식된 개념인 ‘영속적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은, 결국에는 장래세대의 관점에서 영속적 발전의 방향으로 지금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지금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달에 미국에 「장래세대국제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활동을 통해서 작금의 여러 문제들이 공사의 이원적인 대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1998년 4월부터 「공공철학공동연구회」를 발족시켰고, 그것이 지금의 공공철학 교토포럼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사리사욕에서 출발한 지 30년 이상이 지나서야 늦게나마 간신히 공공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태창 (지은이)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주한미국경제기획보좌관,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동경대학교 객원교수, 중국사회과학원 객원연구원, 호주 시드니경영대학원 객원교수,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오사카)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에서 「교토포럼」을 20여 년 동안 기획하고 이끌면서, 50여 개국이 넘는 나라와 수천명의 학자들과 철학대화를 전개하였다.
동양포럼 주간
최근작 : <충청도 청주 동학농민혁명>,<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조선왕조의 공공성 담론> … 총 5종 (모두보기)


조성환 (옮긴이)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계간 『다시개벽』 편집인.
서강대와 와세다대, 원광대에서 수학과 철학, 종교와 역사를 공부하였고, 동학사상사와 지구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 근대의 탄생』에서는 동학의 탄생과 전개를 ‘자생적 근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고,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에서는 퇴계와 다산, 동학을 ‘하늘철학’의 전개 과정으로 서술하였다.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공저)에서는 토마스 베리와 해월 최시형을 ‘지구인문학’의 시선에서 비교하였고, 『개벽의 사상사』(공저)에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 더보기
최근작 :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개벽의 사상사>,<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 총 17종 (모두보기)


이케모토 케이코 (池本敬子)  

1964년에 오카야마에서 태어나고, 1986년에 오사카부립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 20년 동안 교토포럼 사무국 사무담당자로 일하면서 ‘공공철학 교토포럼’의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였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 이 책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30년 가까이 공공철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김태창 교수의 철학대화집이다. ‘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하기’ 세 번째이다.

출판사 서평

‘공공철학’이란
저자인 김태창 전 충북대학 교수는 30년 가까이 공공철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공철학’이란, 서양의 ‘Public Philosophy’의 번역어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상 전통에 기반한 ‘공공하는’ 철학을 말한다. 원래 ‘공공(公共)’이라는 말은 기원전 1세기경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에 “모두가 함께 한다”는 뜻으로 쓰인 동사였다. 저자는 여기에 ‘대화’나 ‘매개’ 또는 ‘협력’[共働]과 같은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여, 오늘날 다원화되고 글로벌화된 시민사회에 요구되는 공공철학을 제창하고 있다.
이 책에는 “철학은 대화하는 활동이다”는 저자의 신념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나눈 철학대화가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제1부는 2010년에 동경대학출판회에서 나온 󰡔함께 공공철학한다 - 일본에서의 대화·공동·개신󰡕의 전문 번역으로, 시민철학자를 비롯하여 시민운동가 및 공무원 등과 나눈 대화 및 강연이 수록되어 있고, 제2부는 교육자 및 경영자와 나눈 대화가 소개되어 있으며, 마지막 제3부는 저자와 함께 공공철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학자 및 사회인들의 저자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공공철학의 특징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저자의 공공철학의 특징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근대화 과정에서 부각된 “멸사봉공(滅私奉公)”과 그것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멸공봉사(滅公奉私)”가 아니라, ‘공’과 ‘사’를 모두 살리는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실험적인 철학은 일찍이 󰡔월간 공공철학󰡕(2011-2013년)과 󰡔공공철학이야기󰡕(모시는사람들, 2012)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가 있는데,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공공철학을 주제로 나눈 대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일 간의 학술교류사라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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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 이야기 -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한삶과 한마음과 한얼의  | 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 시리즈 5
김태창,야규 마코토 (지은이),
정지욱 (옮긴이)
모시는사람들  201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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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년이 넘게 일본에서 치열하게 “철학”을 하고 있는 공공철학자 김태창의 <철학대화> 가운데, ‘한국의 철학자/사상가’들을 일본인들에게 소개한 내용을 모아 엮어낸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한국사상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삶’과 ‘한마음’과 ‘한얼’의 기맥을 더듬어 그것을 현대 일본에서 되살리고 펼치려는 뜻을 밑바탕에 함축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뿐 아니라, 한국인 자신에게도 일본(인)과의 비교 속에서 온전한 “한국철학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다.


목차
책머리에 ──── 5

제1장│원효──── 41
1. 묘에 상인이 경모한 두 명의 신라승 ─── 44
2. 풍류란 무엇인가 ─── 49
3.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셨는가? ─── 54
4. 원효의 일대기 ───56
5. 원효의 화쟁회통론 ─── 71
6. 결론 ─── 85

제2장│화담 서경덕──── 91
1. 한·일의 대표적 가요에 깃들어 있는 서경덕의 한마음 ─── 93
2. 서경덕의 생애 ─── 102
3. 서경덕의 사상 ─── 116
4. 자득지묘의 민학인으로서의 서경덕 ─── 136

제3장│퇴계 이황──── 141
1. 에도일본에서의 이퇴계 ─── 143
2. 생애 ─── 145
3. 이퇴계의 사상 ─── 166
4. 결론 ─── 174

제4장│율곡 이이──── 179
1. 이율곡의 생애 ─── 182
2. 이율곡의 사상-이퇴계와의 대비에서 ─── 198
3. 결론 ─── 209

제5장│남명 조식──── 213
1. 남명 조식은 어떤 인물인가 ─── 215
2. 조식의 생애 ─── 218
3. 조식의 사상 ─── 222
4. 선비와 사무라이 ─── 230
5. 결론 ─── 239

제6장│ 하곡 정제두──── 243
1. 촌락교사 나카에토쥬 ─── 246
2. 하곡 정제두의 실심실학 ─── 254

제7장│다산 정약용──── 271
1. 현대 일본의『논어』붐과 히로세 단소 ─── 273
2. 다산의 생애 ─── 282
3. 다산의 사상 ─── 291
4. 신의 죽음이 아닌 천의 소생 ─── 299

제8장│혜강 최한기──── 303
1. 두 명의 기학자-최한기와 야마다 호코쿠 ─── 305
2. 최한기의 생애 ─── 311
3. 통의 사상 ─── 332

제9장│수운 최제우──── 351
1. 데모크라시에 부치는 노래 ─── 353
2. 최제우의 생애 ─── 355
3. 최제우의 사상운동 ─── 364
4. 최제우의 공공운동 ─── 374
5. 최제우는 살아 있다 ─── 380

제10장│증산 강일순──── 385
1. 지금 왜‘상생’을 말하는가? ─── 387
2. 강증산의 생애 ─── 391
3. 해원상생의논리 ─── 404

제11장│정산 송규──── 409
1. 송정산의 생애 ─── 411
2. 삼동상화로부터 보은상생에로 ─── 418

제12장│다석 류영모──── 429
1. 흙과 함께 산 사람들 ─── 431

2. 다석의 생애 ─── 436
3. 다석의 사상 ─── 452
4. 결론 ─── 465

제13장│신천옹 함석헌──── 467
1. 인간은 생각하는 종이다 ─── 469
2. 함석헌의 생애 ─── 473
3. 함석헌의 사상 ─── 498
4. 씨?·전체·한 ─── 516

기록자 후기 : 지금의 일본에서 한철학과의 대화가 요구되고 있다 ─── 521
역자 후기 ─── 540
찾아보기 ─── 542

 
책속에서
P. 63 원효는 삼학三學에 널리 통효通曉하여 그 지혜의 깊이와 넓이가 만인에 필적한다고 칭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선술집이나 창가娼家에 출입하거나 칼을 차고 쇠지팡이를 짚고 길을 활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경전의 소疏를 짓고 화엄을 강의하여 청중을 감복시키거나 사祠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며 즐거워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서민들의 집에 머물거나 혹은 산수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는 등, 그의 행동은 말 그대로 자유무애하여 무언가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원효가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에도 일정한 틀이 없어, 어떤 때는 쟁반을 던져 중생을 구제하고, 어떤 때는 물을 뿜어 불을 껐으며, 또 어떤 때는 여러장소에서 동시에 모습을 나타내는신이神異를보였다고전해집니다.『(송고승전』「원효전」) 또한 누군가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방분주百方奔走하였기 때문에 세인은 원효를 초지初地에 달한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삼국유사』「원효불기」)‘초지’란 보살도에 있어 십지十地(10의 階悌)의 첫 단계로, 환희지歡喜地 즉 진리를 체득한 기쁨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접기
P. 132 서경덕은 자신의 수양이나 학문 연구에 있어서는 항시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르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사회적으로는 민중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입장에서 말하면, 주자학이나 심학의 윤리 사상이 ‘본연지성’·‘천리’·‘양지’등 인간 마음에 내재하는 선천적·생득적 도덕성에 의거하는 덕 윤리학(virtue ethics)적이었음에 반해, 기학에 입각한 그의 윤리 사상은 인간의 인정이나 자연스런 마음의 양태 혹은 일반 민중의 생활·생업의 실태에 토대한 생태적 윤리 사상(eco-ethics)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접기
P. 200 이퇴계나 이율곡은 은둔하여 자기 일신의 인격적·인간적 완성만을 지향한 ‘사’私의 철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와 국왕에의 절대적 복종과 멸사봉공을 말하는 ‘공’公의 사상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사’와 ‘공=국가’사이의 차원을 개신하고, 엮고, 연계하고, 살리려고 한 ‘공공하는’철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퇴계와 율곡은 모두 성학-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표로 하여, 각기 ‘성학’이라는 두 자를 관으로 씌운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왕에게 헌상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성인’이란 단지 개인으로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신에게 뽑혀진 성자聖者(saint)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어로 말한다면 ‘공공인간’의 이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성리학 자체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지만, 특히 퇴계와 율곡을 비교할 경우 그 시발점은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태창 (지은이)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주한미국경제기획보좌관,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동경대학교 객원교수, 중국사회과학원 객원연구원, 호주 시드니경영대학원 객원교수,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오사카)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에서 「교토포럼」을 20여 년 동안 기획하고 이끌면서, 50여 개국이 넘는 나라와 수천명의 학자들과 철학대화를 전개하였다.
동양포럼 주간
최근작 : <충청도 청주 동학농민혁명>,<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조선왕조의 공공성 담론> … 총 5종 (모두보기)


야규 마코토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 오사카(大阪) 출생.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일본 KYOTO FORUM 특임연구원, 중국 西安外國語大學 및 延安大學 일어전가(日語專家)를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저서로 <崔漢綺氣學硏究>(경인문화사, 2008), <東アジアの共通善─和・通・仁の現代的再創造をめざして─>(岡山大学出版會, 2017, 공저), <지구인문학의 시선>(모시는사람들, 2022, 공저), 역서로 <일본의 대학 이야기>... 더보기
최근작 :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공공철학 이야기>,<최한기 기학 연구> … 총 6종 (모두보기)


정지욱 (옮긴이) 

인문학자·번역가
서강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규슈(九州)대학교 중국철학과 졸업(박사).

현재 서경대학교, 세종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인간 행복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음. 역서로 『일본 양명학』, 『나 뛰어넘을 것인가 깨어있을 것인가』, 『양명선생유언록』 외 다수.
최근작 : <호모메디타티오>,<부의 철학>,<양명선생유언록>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공공철학이란?

<공공철학>이란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국가 중심, 제도 중심 혹은 집단 중심을 지향하는 사유 형태를 지양하고, 아울러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개인 중심, 이성 중심 혹은 자기 중심의 ‘멸공봉사’(滅公奉私)적인 성향도 견제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양자를 매개시키고 조화시켜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도모하고 지향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철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철학은 ‘성인’이나 ‘신’이 아닌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시민사회에 걸맞은 21세기형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전통시대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사상 자원을 ‘공공성’(公共性)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 그것도 중국과 일본과 한국에 직접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는 학자, 운동가, 시민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마치 한판의 마당극을 펼치듯이 생생한 철학적 대화를 하는 가운데 철학적 담론들을 펼치고, 빚고, 쌓아가고 있다. 한 일본인 학자는 이를 “대학을 뛰쳐나온 공공인문학”이라고 명명하였다.

대화와 소통의 공동(共動=함께 움직임)의 산물

이 책의 텍스트들은 독특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김태창은 사색을 통해 하나하나의 담론들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대담이나 방담, 토론)와 강연(질의 응답) 등을 끊임없이 전개해 가며 훈련된 기자(記錄者)로 하여금 그 과정을 치밀하게 정리하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초고를 다듬고 벼리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김태창이 전개하는 <공공철학> 시리즈의 텍스트들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박제화된 담론이 아니라 생생하게 지금-여기의 호흡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

5권 시리즈 중 <한국> 편

이 책은 5권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에서 <한국> 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고금의 사상가들을 전통적인 <한사상>과 현대적인 <공공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상을 일본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알리는데 힘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효나 정약용과 같은 저명한 한국사상가는 물론이고, 한국에서조차 소홀히 되고 잊혀지고 오해받기 쉬운 최한기나 최제우, 강증산, 송규 또는 유영모나 함석헌과 같은 현대사상가, 그리고 최근에는 조선시대 국가경영의 보고인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상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현대적으로 2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교토포럼>과 그 소식지인 '공공적 양식인'을 통해서 꾸준히 알리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이러한 일련의 활동의 한 결과물이자 보고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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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 시리즈

김태창 선생은 현재 오사카에 있는 <공공철학 공동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매달 개최되는 <교토포럼>을 기획 및 주재하고 있다. 아울러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을 오가면서 강연과 대화 그리고 문화교류에 힘쓰고 있는데, 그 대상은 학자를 비롯하여 학생, 시민운동가, 기업인, 공무원,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공공철학 시리즈’는 지난 20여 년에 걸쳐서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을 빈번하게 오가면서 펼쳐온 공공철학 활동 결실의 일부이다. 총 5권으로 기획된 시리즈로 나올 예정인 ‘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01 교토포럼에서 이루어진 공공철학 대화
02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
03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
04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
05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한삶과 한마음과 한얼의 공공철학 이야기(本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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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2022/11/17

[서평] "페허(ruin)와 공(空) 사이의 진동" : 문화 : 베리타스

[서평] "페허(ruin)와 공(空) 사이의 진동" : 문화 : 베리타스



[서평] "페허(ruin)와 공(空) 사이의 진동"
박일준(원광대학교)
입력 Nov 09, 2022 


편집자주- 원광대학교 박일준 교수가 최근 번역된 사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모시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서평글을 보내와 전문을 싣습니다.

(Photo : ⓒ모시는 사람들)
▲ 『인류세의 철학』 겉 표지

본서는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을 조성환, 이우진, 야규 마코토, 허남진이 공동으로 번역한 작품인데, 이 번역서의 가장 탁월한 부분은 번역자들이 꼼꼼히 챙겨준 '미주'에 있다. 저자의 인용들을 일일이 원서를 찾아, 원문과 번역문을 꼼꼼히 달아놓은 미주는 그만큼 역자들이 이 책의 번역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미주에서 원문을 직접 볼 수 있게 만든 노력은 이 번역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본서가 전개하는 『인류세의 철학』은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주체가 되었다는 디페쉬 차크라바티의 주장이 함의한 의미를 동일본 대지진 사태 이후 벌어진 현장과 연결하여, '사물의 의미'를 채근하고자 한다. 지질학적 행위자로서 인간이란, 자신이 이룬 인공의 문명보다 훨씬 더 장구한 지질학의 시간에 난입하며, 지질학적 흔적들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남기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읽는 시대이지만, 사실 기후변화라는 것 자체는 지구 시스템의 작동이지, 결코 '기후변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5번의 대멸종이 있었을 만큼 생태계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기후변화와 생태위기가 전과 다른 것은 이제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로 개입하여, 기후와 생태계에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며, 그래서 이를 파울 크뤼첸은 '인류세'(the Anthropocene)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지구에 압박을 가하는 "지질학적 존재가 되었다"(98).

본서에서 시노하라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 등과 같은 문제들의 발생으로 위협받는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면서, 이 위기들은 단지 인간 실존의 위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성찰한다. 이 위기들은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서 자연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토대를 뒤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환경이 인간을 위한 "안정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존재방식을 뒤흔드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진단한다(6). 즉 '사물들'이 인간의 눈 앞에 자신들의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본서는 이를 "붕괴감각"(sense of ruin)으로 포착하면서,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간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이 물음은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폐허(ruin)가 되어버린 희망을 어떻게 다시 집어 들고 나아갈 수 있을까?'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 문명은 붕괴하고 있다. SF 소설이나 영화가 그려주는 미래가 더 이상 첨단미래과학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시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기후변화나 생태위기로 잿더미나 폐허가 되어 더 이상 사람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화한 미래에서 그 영화들은 미래의 이야기들을 시작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보편적인 절망적 예감일까? 그런데 그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누구의 말처럼 현실화되고 있다. <인터스텔라>의 미래가 우리의 현실에서 싹트고 있는 상황 말이다.



시노하라는 이 예감의 전조를 1995년 고베 지진이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통해 포착한다. 그 재난들은 인간존재의 인공적인 삶의 조건들이 "언젠가는 붕괴해서 '무'로 돌아"간다는 의식, 즉 "인공적인 세계가 무너져서 언젠가는 폐허가 된다는 감각"을 전개한다(7).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통찰은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하여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것은 파괴되고 소멸되며 공터가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근원적 통찰-특별히 동일본 대지진으로 선명해진 통찰-로 보인다(121). 이 무(無)로 달려가는 문명은 이제 "지구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담지한 '파멸과 구축'(de/construction)의 사이클을 기술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123). 우리가 '해체'로 번역하는 de/construction의 본래 의미가 '파멸과 구축'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임을 상기해 본다면, 결코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은폐하는데 공모해 온 공범이라는 의혹이 짙어진다. 그들은 '사물의 행위주체성'을 저자의 죽음으로 은폐했다. 은폐된 것은 사물과 실재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들을 '저자', '거대한 이야기' 등으로 불렀다. 그 은폐 속에 가려진 것이 바로 존재의 취약성이다.

시노하라는 티모시 모틴의 말 "취약함(fragility)이 존재의 조건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7). 이는 문명에 대한 시노하라의 근원적인 통찰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시노하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 "인간은 인간이 만든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붕괴가능하다는 현실적 자각, 즉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것과 분리되었다고 여겼던 자연에 의해 간단히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로 이르기 때문이다(9-10). 시노하라에 따르면, 인간의 삶이 취약한 것은 "인간 생활의 조건이 인간적인 의도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공 공간만으로는 완결되지 못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지탱해주는 자연과 만나는 곳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90).

말하자면 동일본대지진은 시노하라에게, 특별히 지금의 생태위기 시대에, "인간이 만든 인공물들이 자연과 분리된 채로 존속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했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인공물과 자연의 분리는 인공물들을 인간의 의지대로 거의 무한히 생산할 수 있었던 근대에 이르러 급속히 가속화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 혹은 자연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터전인 '지구'는 무사당하거나 외면당해왔다. 그런데 동일본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세상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 그 왜소함을 통해 시노하라는 차크라바티의 "행성과 조우하는 감각"을 발견한다(18). 그리고 그 놀람의 경험 속에서 시노하라는 인간이 자연을 만날 때, 그 자연세계의 사물성을 만날 때, 그 붕괴의 경험, 그것은 곧 인간이 "자연에 의해 지탱되고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새삼 각성케하고, 자연이라는 타자의 야생성을 접하게 된다(91).



차크라바티는 '지속가능성'(sustainablity)라는 범주를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속가능성' 개념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사유로부터 연원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차크라바티는 '세계화'(the global)와 행성성(the planetary)을 구별하는데, 이는 'global'이 언제나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연동되면서 식민지적 사유를 네트워크화된 제국의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화 제국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곧 스피박의 사유를 인용하자면, 타자성(alterity)을 인식하는 것인데, 가장 타자화된 존재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인 것이다. 근대란 "자연의 위험성을 제거해 나가는 역사"(20)로서, 다른 말로, "자연의 불안정성과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려는"(21) 역사이기도 하다. 즉 자연을 타자화하여 지배하고 정복해 나아간 역사가 근대화이고, 세계화란 이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진행되었던 식민주의의 역사를 세계적으로 디지털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확대/연장한 체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지구를 타자화시켜,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근대적 사유가 기호자본주의 시대 '세계화'라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붕괴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새롭게 설정하는 철학적 문제는 퀸텐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를 위시한 소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운동을 통해 21세기 초엽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참여자들은 이를 '객체-지향의 존재론'으로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의 철학들의 시대를 지나 이제 철학은 '객체를 지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체성의 철학에서 '타자'(the other)로 규정되었던 객체가 실은 존재의 기반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예를 들어, "우주의 생성과 지구의 형성은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에 인간과 무관한 곳에서 일어났다"(39). 즉 대부분의 현실 사건은 "인간의 사고, 의식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일어"난다는 인식의 전환이다(40). 이를 시노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상과는 무관하게 세계는 존재"하고 그리고 세계는 "인간의 생활을 둘러싸고 지탱하는 조건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40). 존재의 세계는 인간이 상상하는 세계 너머의 객체들의 관계로 존재하는 세계를 포괄하고, 그래서 상호주관성으로 엮인 인간들의 세계보다 상호객체성으로 엮인 비인간의 세계가 더 크고 근원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 말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계"(man-made world)를 통해 완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49). 그럼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세계 소외"(world alienation)를 감행한다(104). 이는 "인간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자연을 "개변"하는 것을 포함하는 과정으로서(49), 이는 곧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가 '자기-완결적'이 될 것을 의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연을 "세계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기도 하다(104). 하지만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펜데믹은 특별히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과정들을 통해 '자기-완결적'일 것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의 세계로 난입한다. 이를 통해 이제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가 실은 비인간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 구축한 인공적 세계에 익숙한 우리는 이제 우리 세계를 둘러싼 비인간 자연 혹은 지구의 응답에 어떻게 응답-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아렌트의 말을 따라, 시노하라는 인간 삶이 "무수한 인공물로 지탱되고 채워져 있다"고 전제한다(52). 그런데 인간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인공물들은 인간의 의도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게 인간 생활의 존재 방식을 근저에서 규정하며 좌우하고 있다"(55). 하지만 우리는 이 인공적 '물'(物)의 행위주체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그들은 우리 인간 삶을 위한 '도구'로서만 이해하기를 지속한다. 이 물의 행위주체성은 인간이 이룩한 인공문명을 "노화시키고 쇠퇴"시키는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87). 그리고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우리 인간은 "지구의 제약을 벗어나서, 자연이 부과하는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면서, "지구의 제약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탈하여, '뿌리없는 풀'처럼 살아가는 상황"을 오늘날 재현하고 있다(66). "뿌리없는 풀"이란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이한 인간존재의 상황을 표현하는 야스퍼스의 말이다(117).

인간의 세계가 붕괴하는 곳에서 사물을 만나다

이런 상황에서 시노하라는 테주 콜(Teju Cole)의 말을 인용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방식을 항구적으로 바꾸고, 새롭게 사물을 보는 시각을, 새로운 슬픔의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112).

우리가 만든 인공의 세계에서 살아가다, 문득 동일본대지진 사태와 같은 자연의 난입으로 인위의 산물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이 인간의 세계가 자연에 의해 둘러싸여 존재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 깨달음은 새로운 통찰이나 경이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한 것으로 당연시하던 시공간의 붕괴이다. "객관적인 인식의 조건들로서 초월적론적인 시간·공간의 형식"이 붕괴되는 것이다(113).

시노하라에 따르면, 그 붕괴에서 혹은 그 붕괴 이후에 "우리는 사물과 만"나게 된다(64). 이 만남을 '자연과의 만남'으로 획일화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자연'이라 말하는 객체의 이미지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튼은 '자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인간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야생성을 지닌 어떤 것으로서 자연을 상상하지만, 실은 자연은 유기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유기체적인 것들을 포함한다(75). 그 붕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파멸을 통해서 증언하며, 사물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사물을 만나는 곳은 "인간화가 미치지 않는 곳, 내지는 인간적인 세계가 균열되는 곳"이기 때문이다(67). 붕괴를 통해 사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 그것은 인간중심적 이해가 투사된 자연이 아니라 사물 즉 '무기물의 세계'일 것이다. 동일본대지진을 일으킨 '자연'은 결코 우리의 낭만적인 투사를 담지한 'outdoor'의 장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비유기체적인 시스템으로서 자연일 것이다. '붕괴'는 우리가 평상시 '손 안의 존재'(Zuhandenheit)로 살아갈 때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정상적으로 운행될 때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드러내주면서, 그 문제를 통해 사물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인간은 사물이 부서져야 비로소 그것에 의지하여 살고 있음을 의식화하는데, 이 의식화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다"(77).



사물을 만난다는 것은,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라가 붕괴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인간이 "사물을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 사물을 단지 거기에 있는 객체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1). 이 사물성이 드러나는 시공간으로서 환경은 "인간화되지 않을 여지, 인간에 의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여지가 있고, 그래서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한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이다(79). 그리고 '일어남'은 언제나 존재들의 얽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환경이나 세계는 곧 객체로서의 사물들의 상호연관성이 펼쳐지는 곳, 즉 상호객체성(interobjectivity)을 통해 세계가 구성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의 상호주체성의 세계는 이 상호객체성의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상호객체성의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상호주체성의 세계'가 담겨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주체가 객체를 만난다는 것은 곧 객체를 주체의 각도에서 파악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주체의 객체 이해는 언제나 주체가 파악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객체 이해는 언제나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 사이에서 진동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체의 객체이해가 담지한 불안정성이 결코 객체들의 존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객체들의 완고하고 엄연한 사실성이 존재한다.

객체의 행위주체성을 시노하라는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 신일본질소 화학공장에서 유기수은 유출사태를 통해 예증한다. 화학공장에서 유출된 유기수은은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내몰았고, 그 물고기를 먹은 인간의 몸도 유기수은으로 오염되어버린 일 말이다. 우리가 기후시스템에 압박을 가해 움직이게 만들고, 그 영향을 받은 기후 시스템이 다시 인간의 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이 딱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온전히 제어할 수 없는 객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끼친 영향력은 객체들의 행위주체성을 통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돌아오는데,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와 팬데믹이 바로 그것들이다.

폐허로부터 침묵의 '공'(空)으로

시노하라의 사물 이해는 좀 난해하다. 한편으로, 아렌트의 사유로부터 시노하라는 "인간적인 구성요소가 될 수 없고, 인간세계로부터 배제되고 버려지는 무용지물이자 폐기물로 취급"되는 존재를 '사물'로 간주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서로 무관한 것들의 퇴적이자 잡다한 무더기이자 불필요한 것에 불과"한 것이 사물이다(158). 즉 인간이 인공을 통해 구축되는 세계로부터 "세계가 아닌 것으로서 추방된 무용지물" 말이다(158). 그래서 사물들은 "경제적 ·문화적 근대화 아래에서 형성된 생활영역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쓰레기이자 잔해이자 폐기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시노하라는 서술하며, 이를 가와우치의 말을 빌려 "파편"이라고 표현한다(208).

다른 한편으로 시노하라는 모튼으로부터 "취약한" 사물 개념을 인용하는데, 그 사물은 "우리 주변에서 늘 죽어가고 있다"고 인용한다(158). 그래서 사물이 취약해져 사라져 가는 과정 가운데 존재한다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물이야말로 사물이 본래 갖추고 있는 성질을 느끼게 해주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 흩어져 있는 사물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아닌 영역으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을 둘러싼 생태적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시노하라는 말한다(161).



아울러 시노하라는 모튼의 관점에 따르면 사라져 가는 취약한 사물은 "잔향과 흔적 그리고 발자국"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은 우리가 알거나 말하는 것을 벗어나고 넘어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완전한 무(無)는 되지 않은 채, 거기에 있는 인간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서 존재한다"(161).

이러한 시노하라의 사물에 대한 서술은 아무래도 "인간세계를 삼켜버린 자연이 일단 물러난 뒤에 다시 나타나는 세계"에 "정적"을 가져오는 경험, 즉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버려진 폐허의 정적에 대한 경험을 기반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사물이 등장하는 모습을 특정한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물은 늘 인간으로부터 배제된 것으로만 모습을 드러낼까? 오히려 사물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손 안의 존재'로 간주되어, 사물성을 박탈당한 채 인간세계의 일부로 귀속된 포로가 되어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노하라가 말하는, 이 흔적으로 우리 주변을 맴도는 사물은 '희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본정신보다 더 선명하다. 그래서 오노의 시는 일본정신을 외치며 총동원체제에 동원된 공장지대를 걸어가며 "내가 풀이라고? / 오히려 광물이야. 땅에 박힌 수억만 개의 유리관"이라고 시를 썼다(181). 인간 문명에 의해 버려진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위자위에 쌓여가고, 그렇게 쌓인 물질의 힘은 'tipping point'를 넘기면 거대한 초객체(hyperobject)의 힘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후변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노하라에게, "사물성이 감지되는 장소는 인간의 생활과 조화된다고 여겨지는 유기체론의 전체(全體)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182). 말하자면, "철저하게 진행된 공업화 끝에 정신은 사라"지고, 이는 "인간의 정신작용으로는 수렴할 수 없는 압도적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며, 바로 여기서 "물질과의 만남이 일어나고, 우리가 사는 곳이 가득 채워질 것"이다(185). 아마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경험하는 사물성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의 붕괴는 그렇게 우리와 공존하는 사물의 현존을 가까이 가져다 준다. 그 붕괴는 우리가 인공으로 구축한 세계의 정신의 붕괴를 의미한다. 사물은 그 정신이 붕괴해야만 포착되는 존재이다. 그 정신의 붕괴를 통해,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의도대로 만들어내려 했던 물질성, 그것은 우리의 이용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자신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물의 야생성이다.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된 인류세 시대에 우리는 우리와 공존하는 생명들과 사물들 그리고 물질들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돌이킬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붕괴 현상도 우리가 존재의 얽힘과 더불어 '공존'해 나아가는 한 양식임을 대멸종들은 증언한다. 이 공존의 관계 속에서 '인간 아닌 것' 즉 '비인간 존재들'은 인간의 삶의 시공간 너머에서만 포착된다. 우리의 삶의 공간 내 존재들은 우리의 '손 안의 존재'(Zuhandenheit)가 되어, 거의 인식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오직 그것이 우리 삶의 공간에서 문제가 될 때뿐이다. 목수는 망치가 부러졌을 때에야, 망치를 인식한다. 그렇지 않다면, 망치는 그저 목수의 몸의 연장(extension)일 뿐이다.



시노하라는 인간의 세계를 파괴하고 난 후 도래하는 정적이 인간에게 남겨놓는 "상처"를 "그때까지 객체화되고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자연이 그 주체성을 회복했다는 증거"로 삼는다(211). 즉 인간/자연의 관계가 더 이상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노하라는 그 정적의 '공'(空)을 주목한다. 거기는 "인간세계가 자연세계와 접하고 만나는 곳"이며, 결코 자연에 의해 삼겨지거나 일체화되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215). 자연과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자기-완결적인 세계로 포함되지도 않는 그 정적의 공(空)의 공간에서, 시노하라는 "사이"(the between)을 보았다(215).

침묵의 사물을 넘어서 물(物)의 진동으로

그렇게 시노하라의 『인류세의 철학』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성을 성찰하며, 인간을 넘어선 실재의 힘을 증언한다. 그를 통해 시노하라는 이제 우리가 사물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재난으로 폐허가 된 세상은 압도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정적'을 안겨준다. 그 정적은 인간의 세계가 여기서 끝난다는 경고이며, 또한 인간의 언어가 지배할 수 없는 영토를 표기하는 침묵이기도 하다. 그 정적의 '공'(空) 속에서 시노하라는 사물을 만난다.

하지만 사물은 '연장된 정신'이나 다시 말하자면, 사물은 수동적으로 혹은 죽어있는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더불어 삶을 함께 만들며 진동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제인 베넷은 『진동하는 물(物): 사물정치생태학』(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2010)에서 물(物)이 존재의 진동을 통해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어떻게 존재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증언한다. 이미 우리의 몸은 그 물과의 얽힘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 인체의 70%를 구성한다는 물은 인간 개체의 역사와 지구 및 우주의 역사에 접점을 이루면서, 50억년 지구의 역사를 담지한 채 우리 몸 속에 담겨있다. 자연생태계의 순환을 돌고 돌아, 우리 몸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지만, 그 물은 또한 지구의 역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몸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는 세포가 '광물화'(minealization)을 거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물(物)은 살아있는 것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통해 생명과 죽음을 넘나들며 존재를 구성한다. 그 물(物)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자본의 창출을 위해 추출 자본주의에 종속시켜 착취해 온 인간 문명의 역사가 이제 수유하는 엄마의 모유 오염이라는 사태로 다가온다. 북미 지역에서 수유하는 엄마들의 모유를 채취해 성분검사를 한 결과, 도저히 식약청의 판매승인을 받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양의 오염물질들이 함유되어 있었는데, DDT, 로켓연료, 드라이크리닝 용액,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유독한 유해물질들이 모유에 담겨 있었다. 이는 물(物)과 생명의 유기적 순환이 그저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것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시노하라의 사물은 물의 이 적극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物)은 또한 '연장된 정신'(the extended mind) 개념을 통해 인간의 연장으로서 작용한다. '사이보그로서 인간'이란 개념이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의 뇌는 감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두개골 속에 폐쇄되어 있는 뇌가 외부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몸의 감각들을 인터페이스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뇌는 감각의 한계 내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하지만 몸이라는 인터페이스가 만일 디지털 네트워크와 인공장치들과 더불어 '아상블라주'를 이루게 되면,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연장'(extension)된다. 아울러 신경가소성 연구는 뇌가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적응하여 새롭게 인식의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스트휴먼적 현실의 도래는 우리의 마음이나 인식이 결코 비물질적 정신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물(物)과 더불어 함께 구성되는 것임을 증언한다. 그래서 앤디 클라크는 인간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이보그'(natural-born cyborgs)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물'(物)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물이 침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은 우리의 사유와 의식 속에 이미 그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고 있다. 존재의 물(物)적 조건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남겨진 폐허 속에서 사물의 소리와 울림을 들었다는 시노하라의 사물 이해는 혹시 후쿠시카 원전에서 여전히 울려퍼지는 방사능 물질의 소리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방사능 물질들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진실에 두려워서 사실과 정보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방사능 물질들은 이제 물(物)의 힘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지 않은가? 문명의 이기들을 너무 신뢰하지 말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과학기술의 발전에 물(物)의 정치적 목소리를 반영하고 대변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추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정치적 민주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한 부르노 라트루의 이야기가 실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노하라의 '정적'과 공(空)은 폐허와 쓰레기더미 위에서 새로운 삶을 향한 통찰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폐허 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은 우리는 결국 이 모든 어려움과 절망을 극복할 것이라는 단순한 긍정의 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우리가 처한 이 절망적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즉 그 좌절과 체념과 절망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있다.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라고 캐서린 켈러는 『지구정치신학』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이 문명의 좌절과 실패는 바로 기독교 신학의 실패 아닌가? 이 실패 아래서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단초는 절망과 좌절을 은폐하고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다. 차리리 '실패하는 것이 낫다.' 거짓된 위로와 긍정으로 진실을 은폐하기 보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그리고 다시 시도하고. 그것이 바로 '실패의 정치신학'일지도 모른다. 시노하라의 침묵과 공의 사물은 우리가 대면해야 할 실패의 얼굴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2022/11/02

알라딘: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

알라딘: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 
야규 마코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2-10-10

384쪽

책소개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된 주요 철학적 주제를 비교함으로써 각 국가별 철학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유사성과 차이점이 어떠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갔는지를 고찰한다. 한국과 일본 철학의 친연성과 더불어 상호교류를 통한 철학적 성숙의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차이 속에서 유사성을, 유사성 속에서 근원적인 차이를 읽어내고, 철학적 안목을 한 차원 높여 나간다.

저자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중국-한국에서 각각 짧지 않은 학문적 연찬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를 통해 동아시아 삼국의 철학을 거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왔다. 이 책은 일본-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6년 동안 체류하며 천착해 온, 한-일 철학 비교작업의 연구 성과들을 담아, 철학적 대화로써 한일 양국을 잇고 있다.

목차
여는 글

제1부┃한국의 개벽

제1장 ┃ 근대 한국 공공성의 전개와 타자와의 연대
1. 들어가는 말
2. 동학에서의 공공성 전개
3. 일본 자료를 통해 다시 보는 동학농민혁명
4. 동학군 ‘대통령’ 손병희
5. 의암의 폐정 개혁 활동
6. 3.1독립운동의 종교연대와 의암의 ‘공공신앙’
7. 맺음말
제2장 ┃ 근대 한국 시민적 공공성의 성립
1. 들어가는 말: 시민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2. ‘공공종교’와 3.1운동
3. 종교의 역할
4. 의암이 바라본 세계시민적 공공성
5. 맺음말
제3장 ┃ 대종교 범퉁구스주의와 보편주의
1. 들어가는 말
2. 대종교의 ‘중광(重光)’
3. 대종교와 ‘범퉁구스주의’
4. 새로운 민족의식의 촉매로서의 범퉁구스주의
5. 보편주의의 계기로서의 범퉁구스주의
6. 맺음말

제2부┃일본의 개벽

제1장 ┃ 근세 일본사상의 성인관(聖人觀)
1. 들어가는 말
2. 근세 일본사상의 다채로운 성인관
3. 안도 쇼에키의 성인 비판
4. 맺음말
제2장 ┃ 일본 신종교의 개벽운동
1. 들어가는 말: ‘요나오시’의 정의
2. 일본 신종교와 ‘요나오시’
3. 맺음말
제3장 ┃ 현대 일본의 생명영성과 치유영성
1. 들어가는 말
2. 3.11과 영성
3. 일본의 코로나19 상황과 영성
4. 종래의 영성과의 비교
5. 맺음말

제3부┃실학의 시각

제1장 ┃ 19세기 실학자의 일본 인식
1. 들어가는 말
2. 최한기의 일본 인식
3. 이규경의 일본 인식
4. 맺음말
제2장 ┃ 최한기의 종교회통사상
1. 들어가는 말
2. 한국 종교회통사상의 계보
3. 최한기 ‘기학’의 체계
4. 최한기의 세계관과 ‘가르침[敎]’
5. 최한기의 ‘통교(通敎)’
6. 맺음말
제3장 ┃ 한국·일본·중국에 있어서 ‘신실학론(新實學論)’ 비교
1. 들어가는 말
2. 한국·일본·중국의 실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
3. 맺음말

제4부┃비교의 시각

제1장 ┃ 일본에서의 퇴계·율곡·다산 연구의 흐름
1. 들어가는 말
2. 에도시대 일본의 한국유학
3. 메이지 이후 일본에서의 한국유학
4. 맺음말
제2장 ┃ 최한기와 일본의 공공 사상가 비교 연구
1. 들어가는 말
2. 중국 유교 사상사에서 성인과 예악 논의
3. 일본·한국의 독자적인 성인론·예악론 전환
4. 맺음말
제3장 ┃ 동서양 공공성 연구와 한국적 공공성
1. 들어가는 말
2. 서양의 공·사·공공
3. 동양의 공·사·공공
4. 대화를 통해 열린 ‘공공하는 철학’의 이념
5. 한국적 공공성의 탐구
6. 맺음말
닫는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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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5 동학은 ‘다시개벽(開闢)’ 또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내세우면서 유교·불교 등 ‘선천(先天)’ 시대의 사상·종교나 그것에 의해 지탱되던 패러다임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리고 ‘시천주(侍天主)’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는 고귀한 존재라는 영성적 자각을 통해, 전근대에 있어서는 통치와 교화의 객체였던 일반 백성, 혹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여성, 천민 등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동등하게 보유하였다고 설파함으로써 공공적 주체로서 부상시켰다. (근대 한국 공공성의 전개와 타자와의 연대)  접기
P. 53~54 천도교에서는 ‘종교’라는 말을 “고상한 인격에 의해 천연자연으로 화출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천도교에서는 ‘교정일치(敎政一致)’를 내세우면서 종교와 정치는 ‘인내천(人乃天)’의 서로 다른 표현일 따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종교를 단지 개인적인 것으로 보거나 정치가 미치지 못한 사회적 영역에서 인심세태를 개선하는 것을 기대하는 일본적 (혹은 총독부적) 종교관과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근대 한국 시민적 공공성의 성립)  접기
P. 82 1929년에 만주철도 촉탁의 기타가와 시카조[北川鹿藏]는 『판퉁구시즘과 동포의 활로―희망이냐 절망이냐 친애하는 경들에게 고함』이라는 소책자에서 범퉁구스주의를 제창했다. 기타가와는 ‘퉁구스’를 민족으로 보고 일본을 퉁구스 민족의 일원이자 문명적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퉁구스’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만주와 몽고를 중원의 한족과 분리시키고 ‘퉁구스’의 이름 아래 일본-한반도-만주-몽골에 걸친 일본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중국인의 반일·배일 운동을 타개하려 한 것이다.  접기
P. 87 초이토 진사이[伊藤仁齋]는 오로지 공자만이 삼황(三皇), 오제(五帝)보다 뛰어난 천하만세(天下萬世)·제왕신민(帝王臣民)의 스승이라고 주장했다. ... 오규 소라이는 성인이란 ‘작자(作者)’로서 제도를 제작한 고대 중국의 지배자, 문화영웅(文化英雄)이라는 면을 강조하였다. ...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중국의 성인은 사람이면서 신이지만 악신(惡神)으로써 능히 나라를 빼앗다가 다시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꾀를 잘 꾸민 자라고 주장했다. ...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성인을 천하의 도둑이라고까지 혹평했다. 그는 자연세(自然世)에 살아가던 사람들 사이에 성인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속이고 임금 자리에 오르고, 백성들의 생산물을 놀고먹는 ‘불경탐식(不耕貪食)’을 정당화했다고 평가했다.  접기
P. 121 일본 개벽종교로 ‘요나오시’를 전면에 내세운 천리교·마루야마교·오오모토를 다루었다. 원래 요나오시는 지진, 벼락을 피하는 주문이자 흉한 일을 경사로 바꾸는 것, 세상이 나쁜 상태를 좋게 고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에도시대 중기 이후, 요나오시는 곤궁하고 억눌린 민중이 새로운 세상을 소원하는 개념이 되고 요니오시 잇키(봉기·폭동)나 우치코와시와 결부되었다. 또 ‘요나오시’ 관념이 ‘에에자나이카’ ‘오카게마이리’라고 불리는 민중의 소동, 열광적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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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야규 마코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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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大阪) 출생.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일본 KYOTO FORUM 특임연구원, 중국 西安外國語大學 및 延安大學 일어전가(日語專家)를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저서로 <崔漢綺氣學硏究>(경인문화사, 2008), <東アジアの共通善─和・通・仁の現代的再創造をめざして─>(岡山大学出版會, 2017, 공저), <지구인문학의 시선>(모시는사람들, 2022, 공저), 역서로 <일본의 대학 이야기>(경인문화사, 2022, 쿠라베 시키倉部史記 지음, 공역), 『인류세의 철학』(모시는사람들, 2022, 시노하라 마사타케篠原雅武 지음, 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공공철학 이야기>,<최한기 기학 연구> … 총 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방면에 걸쳐 지속적으로 교류와 협력 또는 갈등을 지속해 오고 있다. 때로는 그 흐름이 역전되기도 하고, 또는 폭력적(전쟁)인 방식으로 그 관계가 비화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그 관계가 본질적으로 단절된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 조선은 일본의 문화적 발전의 원천이 되어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쳐 왔으나, 그 속에서도 일본은 독자적인 학문적, 철학적 특질을 구축해 나갔다.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성리학(신유학)이나 퇴계학이 일본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움으로써, 그 사상의 본질을 더욱 잘 드러내는 측면도 있으며, ‘실학(實學)’의 경우 한-중-일에서 각각 공통점과 아울러 독자적인 특성을 한껏 드러냄으로써 동아시아의 학문적, 사상적 발전과 사회적 다양성의 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의 교류는 자국 내에 유폐될 때 가져올 수 있는 사상적 근친상간의 위험성을 불식시키고, 서로에게 거울이 됨으로써 자기이해를 강화하며 하나의 뿌리에서 분기할 수 있는 다양성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사상의 심화와 확장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작지 않다. 이 책의 저자 야규 마코토는 일본에서부터 ‘공공철학’을 중심으로 한 한-일 간의 철학적 대화의 학문적 태도를 깊이 있게 성취하였으며, 가장 한국적인 철학으로서의 최한기 ‘기학’에 대한 연구로 한국 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계속해서 중국까지 오가면서 그 학문적 기반을 확장하면서 한-일 간의 비교철학을 위한 소양을 갖추어 왔다. 이러한 소양과 안목을 기반으로 수년간의 연구는 대체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공유되는 철학적 주제들의 상사성(相似性)과 더불어,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독자성(獨自性)을 함께 천착함으로써, 각각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1부에서는 ‘한국의 개벽’이라는 주제 아래 동학(천도교) 등의 ‘개벽종교(開闢宗敎)’가 한국 근현대의 시민적 공공성을 발달시켜 왔음을 논증했다. 수운 최제우가 ‘다시개벽’을 제창하며 동학을 창도한 이래 개벽종교는 남녀와 반상, 빈부 간의 차이를 넘어 모두가 신격(한울님, 부처님)과 동격인 귀한 존재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와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동학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이나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세계구축 과정을 실천적으로 추동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수운(최제우)와 해월(최시형)을 이은 의암(손병희)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3.1운동을 통해서 동학농민혁명의 폐정개혁의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이어나갔다. 이런 맥락에서 3.1운동은 한·중·일 세 나라가 서로 독립된 대등한 국가로 뭉쳐서 서구 제국주의와 맞서고, 장차 전 세계 나라들이 연대하여, 침략과 강권과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세계에서 없애야 한다는 동아시아적 공공성, 나아가서는 세계적 공공성 확립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종교가 “태백산(=백두산) 남북 7천만 동포”(「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라는 ‘범퉁구스주의’적인 동포 관념을 제시한 것도, 조선시대 유교에 입각한 소중화사상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로서의 한국시민의 정체성을 자각시키는 촉매 구실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부에서는 ‘일본의 개벽’이라는 주제 아래, 오늘날 현재화한 일본과는 다른 ‘개벽적 일본’에 대한 추구와 시도의 맥락을 살펴보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의 다양한 ‘성인’ 해석과 한국의 개벽종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한 일본 신종교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장 ‘요나오시’ 등을 통해 일본적 ‘영성’의 추구 경향의 특징을 드러내고 그것이 시대적으로 변천해 간 추이를 살펴본다. 일본의 신종교는 1970~80년대를 분수령으로 ‘신종교’에서 ‘신신종교(新新宗敎)’라는 새로운 용어로 자리매김하였지만, 1990년대 옴진리교의 연쇄 테러 사건을 계기로 종교 자체에 대한 사회의 인상이 악화된 데다가 고령화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200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쇠퇴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 및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와 2010년대 후반의 자연재해 속출, 그리고 2019년 말부터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일본 사회에서는 종교단체나 조직, 종교적 카리스마 등에 의존하지 않는 영성 현상이 잇따라 나타나게 되었다.

제3부에서는 ‘실학’을 키워드로 하여 19세기와 ‘실학’이 연구 대상이 된 현대의 한·중·일 세 나라의 신실학론을 다루었다. 우선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최한기와 이규경의 일본관을 검토함으로써, 그들 각자의 실학적 경향의 특질을 역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최한기는 ‘기학’의 토대 위에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에 치중한 반면 이규경은 풍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내 보인다.

제4부에서는 ‘비교의 시각’이라는 범주 아래 “일본에서의 퇴계·율곡·다산(茶山) 연구의 흐름”을 통해 일본 내에서 한국 유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의 변천 과정을 살피고, 특히 퇴계가 일본의 근대 유학 발전 및 근대사상사에서 끼친 영향을 검토하면서 일본에서 주자학의 도통론이 메이지 천황에게까지 이어지는 맥락을 살폈다. 또 “최한기와 일본의 공공 사상가 비교 연구”에서는 조선의 대표적인 기학자 최한기와 일본의 오규 소라이, 안도 쇼에키를 ‘공공사상가’라는 관점에서 비교하여 그들이 각각 독자적인 시각에서 유교적 성인의 개념을 공공세계를 구축하는 ‘제작’의 측면에 주목하여 논구하였다.

끝으로 “동서양 공공성 연구와 한국적 공공성-교토 포럼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에서는 교토포럼에서 축적되어 온 논의를 바탕으로 서양(고대·중세·근대)과 동양(중국·일본·이슬람) 그리고 한국의 공사(公私) 관념과 공공관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중국 문헌보다 풍부한 공공의 용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고금공공’이라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포함한 공공 개념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 한국 개벽종교 속에는 (1) 인간 존중 사상, (2) 생태·환경·사물존중 사상, (3) 새로운 공동체와 이상 세계(에 대한 지향), (4) 종교간 대화·소통·상호이해의 공공 지향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