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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5
동아시아신학의 미래와 한국신학의 과제 김흡영
아시아 속의 한국교회 > 특집 | (재)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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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6년 12월호)
동아시아신학의 미래와 한국신학의 과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가 인식된 이후 세계선교는 교세 확장보다는 그 선결 요건으로서 ‘땅끝까지’ 복음을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 내용의 구성, 즉 신학의 세계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어 왔다. 신학의 세계화에 있어서 마지막 ‘땅끝’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한국 외에는 선교에 실패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에 속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이다. 글로벌신학의 미래는 이 마지막 보루인 유교 문화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신학, 즉 동아시아신학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은 글로벌신학의 완성이며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해 중요한 동아시아신학의 미래를 누가 담당하느냐? 그것은 당연히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중간에 위치하며, 기독교와 유교가 동시에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신학자를 보유한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신학 및 나아가서 글로벌신학의 미래를 위한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이 지닌 최대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특집에서 필자가 맡은 부분은 신학 담론에 관한 것이어서, 교회 및 다른 실천적 주제에 관한 논의는 다른 필자들에게 위임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양지해주기 바란다.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이하 AAR)에 거의 매년 빠짐없이 참석해왔으며, 지난 8차 총회를 제외한 7차에 걸친 아시아신학자협의회(Congress of Asian Theologians, 이하 CATS)에도 모두 참석했다. AAR은 신학과 종교학 분야의 최대 학회로 매년 11월에 세계에서 약 1만 명의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현역 학자들은 물론이고 박사수련생들을 포함한 전 세대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매년 새로운 연구 주제들을 발표하며 토론하는 최고의 학회이다. 이곳에 참석하지 않으면 세계 담론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최신 학술정보와 네트워크에 소속될 수 없을 정도로 학자로서 자기 분야의 학술적인 촉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참석해야 하는 필수적인 학회이다. CATS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약 15개 국가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신학생들이 참석하는 지역적 신학 플랫폼이다. 이 두 곳을 중심으로 필자는 나름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간의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온 셈이다.
이 여정에서 필자는 항상 경계선 신학자로서의 딜레마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딜레마는 필자만의 문제가 아닌 이 학회들에 속한 모두에게 내재하는 공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오늘날 그 어떤 신학도 지금까지 주도해 온 서구신학 전통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적 문화사유체계에 토착화된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사상이라는 맥락적 한계에 부딪혀 글로벌신학으로 발전하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한계가 형상과 질료, 초자연(신)과 자연(인간), 정신과 육체, 이론(로고스)과 실천(프락시스) 등 서구신학의 온갖 것에 깊이 내포된 그리스적 이원론이다. 특히나 역사가 오랜 동양종교들을 만나서는 사유체계에 근본적인 도전을 받아 당황하고 있다. 더욱이 서구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지형 변화라는 엄연한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구 기독교는 교인 숫자로 볼 때, 더 이상 다수를 점하지 못하고 총 기독교인의 4분의 1에 불과한 소수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 감소 속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로 기독교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중심이동과 함께 ‘서구 기독교의 신화’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가고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이 도래하고 있다.1)
특별히 세계 모든 종교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 종교들과의 만남에서 서구신학은 충격을 받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서구신학자들은 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글로벌신학, 비교신학 등 계속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인 신학 장르를 만들어가며 대책을 마련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글로벌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환골탈태하는 대규모적 패러다임 전환보다는 기존 서구신학의 몸통에 성형 및 약간의 부분 시술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다. 그들의 속내는 앞으로도 계속 서구의 신학적 주도권을 유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세기 식민주의 선교 시절의 군림하던 자세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이지만, 아직 그들의 몸통은 서구신학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의 통계에서 숨겨져 있던 것이 확인된 것처럼, 내부적으로 백인 남성 기독교인 우월주의는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AAR에서 그들은 보다 진일보한 신학 상품들을 내놓았다. 소위 ‘담 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wall) 또는 ‘간종교적 신학’(trans-religious theology)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앞으로는 각종 교회의 담은 물론이고, 상표(레테르)가 붙은 기존 종교들의 담을 넘어 서로 소통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제안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지금까지 ‘선교’라는 미명하에 아시아 종교전통들을 반기독교적이라고 무시하며 파괴해온 역사적 오류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는 그런 상품과 제안들은 일종의 ‘값싼 은총’을 서구신학에 주려는 신학적 획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와서 서구신학자들이 그냥 책상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말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오류들을 참회하고 복구하려는 ‘값비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런 취지로 지난해 AAR의 한 분과 모임에서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하는 서구신학자들을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하나의 큰 주제는 여전히 “어떻게 서구신학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아시아신학을 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민중신학자들을 비롯하여 1세대 아시아 신학자들은 ‘반(서구)신학이 아시아신학’(Anti-theology is doing theology for us!)이라는 선언을 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환원적인 해체신학이었고, 그 비판과 해체의 방법론도 대부분 서구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 후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아시아신학은 로고스(토착화)신학과 프락시스(해방)신학이라는 서구신학의 이원론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아시아신학은 토착화신학(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등)과 해방신학(민중신학, 달릿신학, 투쟁신학, 아시아여성신학 등)의 분리를 확실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신학과 동아시아신학
아시아신학은 그동안 서구 기독교의 선교 역사와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언어적으로도 영어권이라 할 수 있는 인도를 비롯해 서양 언어에 능숙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왔다. 서구 식민지의 경험이 없는 한국과 일본 등에 있는 동아시아의 신학자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세계적 토론에 참여가 제한되었다. 또한 유교 및 도교 등 동북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배경은 이슬람, 힌두교 등 유신론적인 동남아시아의 그것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한스 큉(Hans Küng)이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종교전통을 독특한 지혜적 유형으로 규명하고, 중·근동의 유일신적 유형과 인도의 신비적 유형을 구분하여 제3의 세계종교 패러다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리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점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이다. 분명히 이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동남아시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었으며, 종교 간의 대화도 유교와 같은 주최지역의 전통보다는 중·근동과 동남아시아 종교전통들에 국한되었다. 다만 한 마당 프로그램에서 행한 필자의 발표가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이 동북아시아 종교문화 전통에 대한 엄연한 무시에 대하여 필자는 WCC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래서 WCC의 종교 간 대화 담당국은 자체 예산으로 한국에 사절단을 보내 유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자에게 그 주선을 일임했다. 그러나 아직 그 대화를 위한 마땅한 후원단체와 유림 등 유교를 대표해서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지 못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글로벌신학과 한국신학
세계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가진 위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일본과 중국 등 기독교인 숫자가 소수에 불과한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총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기독교인이며, 사회적으로도 강력한 위세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서구와 아시아와 관련된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한국신학에 대한 논의는 민중신학을 제외하고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성서신학 분야 외에 AAR과 같은 세계학회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 AAR과 같은 경우, 한국신학으로 소개되는 것은 오히려 한국적 맥락에서 온전하게 연구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디아스포라적 상황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경험한 실존적 입장에서 구상한 코리안-아메리칸(Korean-American)신학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결코 한국신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의 활발한 신학 활동으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를 모르는 서구학자들에게는 이들이 마치 한국신학의 핵심인 것처럼 인식되고 와전되는 경향마저 보여서 걱정된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CATS와 같은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도 극소수이다. 비교적 정교한 서구신학과 제1세계적 풍요에 익숙한 대부분의 한국 신학자들은 아시아신학의 수준을 우습게 보고, 제3세계적 열악한 상황에서 고투하며 쌓아 온 아시아 신학자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신학은 AAR과 CATS와 같은 세계적(글로벌-에큐메니컬) 신학토론의 장에서 동떨어져 있는, 고립된 고도에서 벌어지는 ‘우물 안 개구리’식 지역담론으로 고착되는 인상마저 든다.
한국에는 해외의 유수한 신학교육기관에서 연수를 받은 유능한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국내에 돌아와서는 글로벌신학 토론에 계속해서 참여하기보다는 한국교회와 신학교육 현장에 필요한 몇몇 주제에 국한되어 그것에 매이게 된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들은 아시아신학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학생 시절 외국에서 배운 서구신학만 소개하다가 시간이 지나 글로벌 담론의 흐름에 대한 촉각마저 상실한다. 그리하여 우수한 자질과 교육 배경, 그리고 탁월한 신학적 장래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용 신학자로 국한되어 굳어버리는 듯해서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능력 있는 교회들이 이런 우수한 자질을 가진 신학자들이 미래지향적인 한국신학의 개발을 위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지원해주기보다는, 한물간 백인 신학자들을 호사롭게 초청하여 고귀한 교인들의 헌금을 낭비하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이렇게 간다면 한국신학은 비단 제1세계적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10년 이상 뒤처진 채 계속 그 후진성을 탈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3세계 신학에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민중신학과 달릿신학의 관계에서 이미 그 실례가 나타나는 듯하다.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대한 민중신학의 공헌은 크다. 그러나 앞으로의 논의는 보다 큰 세계적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도의 달릿신학은 민중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발전한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글로벌신학으로서 자리매김은 오히려 민중신학을 앞서고 있는 듯하다.
동아시아신학의 미래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계적 영향력이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이 세계화 시대에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이들이 속한 전통적인 유교 문명권과 미국과 유럽 등 전통적 기독교 문명권 간의 충돌에 대한 경고음은 석학들을 통해 서방세계에 이미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 대신 유교를 내세우며 G2를 넘어서 세계적 리더십마저 주장하는 중국의 부상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동아시아신학이 처한 글로벌신학적 입지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선,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도해온 유럽신학은 박물관 신학으로 전락하였고, 미국신학도 급진적 미국신학 및 포스트모던신학을 내세우며 극복하려 했지만, 뾰쪽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강대국 백인 우월주의의 담을 성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젖어 있던 서구신학의 배타적 선민주의와 변증법적 지배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조화와 소통과 융합의 새로운 대안적 신학 패러다임을 동아시아의 신학적 자원에서 찾고자 한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선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의 무지, 즉 유신론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종교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있다. 글로벌신학은 진정한 세계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유교적 종교문화의 담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동아시아신학의 토착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신학의 온전한 세계화를 위한 선결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종교와의 만남 이외에도 가장 시급한 신학적 과제는 자연과학과의 대화이다. 그동안 초자연(신)과 자연(인간)의 계층적 분리를 전제 조건으로 하던 서구적 사유 얼개에서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글로벌신학은 이웃 종교들에서 그 대안을 찾고 있다. 여기에 유교와 도교 등 자연(내재)과 초자연(초월)의 분리를 극복한 동아시아의 지혜전통의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한 대안으로서 ‘도(道)의 신학’(theodao: theology of the Dao)을 제시해왔다.2) 개신교 신학의 시작은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coram Deo’(하나님 앞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질곡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면죄부를 위시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횡포에 저항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독교인의 독립된 자아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몸을 제외한 환원주의적 요소는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역기능을 초래했고, 결국 극단적인 무한경쟁적 상업주의와 더불어 생태계(지구의 몸)의 위기라는 종말론적 현상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흙으로 몸을 빚고 숨(영혼)을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7)고 믿는 기독교 신앙은 루터의 ‘코람 데오’보다는 다석 유영모(柳永模)가 언급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통전적(天地人) 실존, 즉 ‘가온찍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3)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대상화된 나 또는 나와 너(Martin Buber)의 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늘(天)과 땅(세상·우주, 地)과 내(人)가 연결된 통전적 상황에서 신과 연합된 나의 자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구원은 정신만이 아닌 육체(몸)의 구원, 나아가서 생태계의 구원이 포함되는-몸이 생태계의 일부이므로-온전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를 무시하고 정신을 강조하는 그리스적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하는 서구의 정체적 로고스신학은 이 한계에 막혀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글로벌신학은 이러한 서구신학의 고질병을 이어받아 그 이원론적 한계의 역사적 결과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해방)신학(theo-praxis)의 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시아신학도 여전히 그 한계를 답습하고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신학과 한국신학은 동아시아의 종교문화 전통에서 그 대안적 지혜와 통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러한 제3의 신학 유형을 ‘도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도(道)란 보통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런 ‘도’가 아니라 ‘머리 수’(首) 자와 ‘달릴 착’(辶) 자로 이루어진 ‘도’, 즉 지(logos)와 행(praxis)이 일치를 이룬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도’는 ‘로고스’보다도 더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로고스라고 말한 적이 없고 단지 호도스(o`do.j), 곧 길(道)이라 했고(요 14:6a), 사도행전에서도 기독교의 최초의 이름은 예수의 ‘도’였던 것이다.(행 9:2, 22:4, 24:14, 22)
한국신학의 과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한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여기에는 명백한 신학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개신교 전통인 개혁신학과 한국 성리학의 사유체계는 이들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유사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시대의 인물인 장 칼뱅(John Calvin)의 신학과 퇴계 이황(李滉)의 유학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내재한다.4) 그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 경건과 학문의 방법론(fides quarens intellectum과 居敬窮理), 인간론(신형상론과 천명론), 수양론(성화론과 수신론) 등에서 서로 크게 공명한다.5) 그러나 한국신학은 그동안 이러한 우리의 중대한 종교문화적 자산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해왔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유교전통 간의 특별한 만남의 자리가 한국신학이 정체성을 확립(가온찍기)하고 글로벌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신학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한국인의 종교적 유전자에 스며 있는 유교전통을 어떻게 신학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 둘 다 비판적 지식인들이던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유교적이다. 초기 성서 번역은 물론이고 실천 현장에서도 강한 유교적 내성을 표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주요한 종교문화적 콘텍스트인 유교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큰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500년 전 이러한 개신교 신학을 품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상적 콘텍스트인 퇴계를 비롯한 한국의 유학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볼 때, 한국 개신교는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자신의 종교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역사 속에 발전해온 개신교 전통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될 수 있다는 착각에 여전히 빠져 있는 듯하다. 전혀 다른 종교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영성과 정신(골수)을 우리 몸(종교문화) 속에 알맞게 체화하여 우리 신학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학을 베끼고 모방하는 종속적인 사대신학의 구태를 답습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자기의 종교문화를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종교문화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을 맹신하는 신학, 그러한 가현설적 신학에는 온전한 윤리성과 도덕성이 담보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글로벌신학의 큰 틀에서 오늘날 한국신학에 주어진 과제를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 동아시아신학: 동아시아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대화를 통해 동아시아신학을 개발하여 종교문화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동아시아에서 신학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다만 이 지역이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하였다고는 하나 한·중·일 각 나라와 유교와의 관계에는 온도 차가 있다. 일본은 유교의 역사가 짧아 불교의 영향이 더욱 강하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조직적 파괴 때문에 유교 전통이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도교가 성행하고 있다. 유교 전통이 아직도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곳은 한국사회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분업을 하자면, 일본은 불교와의 대화, 중국은 도교와의 대화, 한국은 유교와의 대화를 맡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에 한국신학의 유교 연구에 대한 특별한 중요성이 있고, 그것은 곧 글로벌신학이라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신학의 지킴이’로서 한국신학이 가진 시대적 사명을 함의한다고 하겠다.
- 글로벌신학: 이처럼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형성된 한국신학은 토착화 및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것은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신학으로 이원화된 글로벌신학에 통전적 돌파구를 제공하고, 나아가 선교의 난제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을 포함한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예컨대, 도의 신학) 특히 현대신학의 최대 안건인 자연과학과의 대화에서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라는 장벽을 넘어 과학기술시대인 21세기에 적절한 신학의 모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글로벌한국신학: 한국신학에 주어진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국 신학자들은 서구 신학자들과 아시아 신학자들 모두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 AAR과 CATS와 같은 국제적인 모임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간의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구 신학자들에게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진하고, 아시아 현장의 어려운 사정을 인식시키며 아시아신학과 서구신학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한국신학은,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것과 같이, 서구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신학을 정초하려는 맥락적 착오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서구신학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들이 지닌 문화제국주의적 독소와 반문화적 요소를 해체하고 난 후, 그 골수(핵심)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조정하여 수용하는 신학적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안티테제의 자원으로서 유영모와 같은 토종신학의 활용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한국신학을 더욱 심화시켜 글로벌신학 담론에 공헌할 수 있는 수준의 글로벌한국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 환대(hospitality)신학: 나아가 한국신학은 토착화신학과 문화(상황)신학의 단계를 넘어 복음적인 환대신학으로 더욱 성숙되어야 한다. 성육신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품어주시는 신적 환대의 극치를 천명한다.6) 한국사회에 이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문화와 인종적으로 다양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문화적·인종적·이념적 장벽을 넘어 모든 것을 품고 환대하는 환대신학이 한국교회에 요청되고 있다.(마 25:31-46) 이것은 그동안 무시해온 우리의 종교문화는 물론이고 이웃들의 것, 나아가 우리를 억압한 자들의 것도 포함한다.
한국신학이 주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고 세계 속에 모든 이들을 품고 성령의 인도 아래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복음적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로 성숙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Oxford University Press, 2002), 79-105; 김신권 역, 『신의 미래』(도마의길, 2009) 참조.
2) 김흡영, 『도의 신학』(다산글방, 2000), 『도의 신학 2』(도서출판 동연, 2012) 참조.
3) 김흡영,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도서출판 동연, 2013) 참조.
4) 김흡영, 『도의 신학』, 181-228 참조.
5) 위의 책, 231-261 참조.
6) Heup Young Kim, “Embracing and Embodying God’s Hospitality Today in Asia,” CTC Bulletin: 28/1(2012), 1-11 참조.
김흡영 | 세계과학종교학술원(ISSR) 창립회원이고,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공동의장과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한국과학생명포럼의 대표이다. 저서로는 『도의 신학 I』, 『도의 신학 II』,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등이 있다.
> 아시아 속의 한국교회
특집 (2016년 12월호)
동아시아신학의 미래와 한국신학의 과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가 인식된 이후 세계선교는 교세 확장보다는 그 선결 요건으로서 ‘땅끝까지’ 복음을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 내용의 구성, 즉 신학의 세계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어 왔다. 신학의 세계화에 있어서 마지막 ‘땅끝’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한국 외에는 선교에 실패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에 속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이다. 글로벌신학의 미래는 이 마지막 보루인 유교 문화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신학, 즉 동아시아신학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은 글로벌신학의 완성이며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해 중요한 동아시아신학의 미래를 누가 담당하느냐? 그것은 당연히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중간에 위치하며, 기독교와 유교가 동시에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신학자를 보유한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신학 및 나아가서 글로벌신학의 미래를 위한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이 지닌 최대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특집에서 필자가 맡은 부분은 신학 담론에 관한 것이어서, 교회 및 다른 실천적 주제에 관한 논의는 다른 필자들에게 위임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양지해주기 바란다.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이하 AAR)에 거의 매년 빠짐없이 참석해왔으며, 지난 8차 총회를 제외한 7차에 걸친 아시아신학자협의회(Congress of Asian Theologians, 이하 CATS)에도 모두 참석했다. AAR은 신학과 종교학 분야의 최대 학회로 매년 11월에 세계에서 약 1만 명의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현역 학자들은 물론이고 박사수련생들을 포함한 전 세대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매년 새로운 연구 주제들을 발표하며 토론하는 최고의 학회이다. 이곳에 참석하지 않으면 세계 담론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최신 학술정보와 네트워크에 소속될 수 없을 정도로 학자로서 자기 분야의 학술적인 촉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참석해야 하는 필수적인 학회이다. CATS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약 15개 국가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신학생들이 참석하는 지역적 신학 플랫폼이다. 이 두 곳을 중심으로 필자는 나름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간의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온 셈이다.
이 여정에서 필자는 항상 경계선 신학자로서의 딜레마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딜레마는 필자만의 문제가 아닌 이 학회들에 속한 모두에게 내재하는 공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오늘날 그 어떤 신학도 지금까지 주도해 온 서구신학 전통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적 문화사유체계에 토착화된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사상이라는 맥락적 한계에 부딪혀 글로벌신학으로 발전하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한계가 형상과 질료, 초자연(신)과 자연(인간), 정신과 육체, 이론(로고스)과 실천(프락시스) 등 서구신학의 온갖 것에 깊이 내포된 그리스적 이원론이다. 특히나 역사가 오랜 동양종교들을 만나서는 사유체계에 근본적인 도전을 받아 당황하고 있다. 더욱이 서구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지형 변화라는 엄연한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구 기독교는 교인 숫자로 볼 때, 더 이상 다수를 점하지 못하고 총 기독교인의 4분의 1에 불과한 소수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 감소 속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로 기독교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중심이동과 함께 ‘서구 기독교의 신화’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가고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이 도래하고 있다.1)
특별히 세계 모든 종교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 종교들과의 만남에서 서구신학은 충격을 받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서구신학자들은 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글로벌신학, 비교신학 등 계속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인 신학 장르를 만들어가며 대책을 마련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글로벌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환골탈태하는 대규모적 패러다임 전환보다는 기존 서구신학의 몸통에 성형 및 약간의 부분 시술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다. 그들의 속내는 앞으로도 계속 서구의 신학적 주도권을 유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세기 식민주의 선교 시절의 군림하던 자세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이지만, 아직 그들의 몸통은 서구신학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의 통계에서 숨겨져 있던 것이 확인된 것처럼, 내부적으로 백인 남성 기독교인 우월주의는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AAR에서 그들은 보다 진일보한 신학 상품들을 내놓았다. 소위 ‘담 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wall) 또는 ‘간종교적 신학’(trans-religious theology)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앞으로는 각종 교회의 담은 물론이고, 상표(레테르)가 붙은 기존 종교들의 담을 넘어 서로 소통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제안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지금까지 ‘선교’라는 미명하에 아시아 종교전통들을 반기독교적이라고 무시하며 파괴해온 역사적 오류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는 그런 상품과 제안들은 일종의 ‘값싼 은총’을 서구신학에 주려는 신학적 획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와서 서구신학자들이 그냥 책상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말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오류들을 참회하고 복구하려는 ‘값비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런 취지로 지난해 AAR의 한 분과 모임에서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하는 서구신학자들을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하나의 큰 주제는 여전히 “어떻게 서구신학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아시아신학을 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민중신학자들을 비롯하여 1세대 아시아 신학자들은 ‘반(서구)신학이 아시아신학’(Anti-theology is doing theology for us!)이라는 선언을 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환원적인 해체신학이었고, 그 비판과 해체의 방법론도 대부분 서구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 후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아시아신학은 로고스(토착화)신학과 프락시스(해방)신학이라는 서구신학의 이원론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아시아신학은 토착화신학(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등)과 해방신학(민중신학, 달릿신학, 투쟁신학, 아시아여성신학 등)의 분리를 확실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신학과 동아시아신학
아시아신학은 그동안 서구 기독교의 선교 역사와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언어적으로도 영어권이라 할 수 있는 인도를 비롯해 서양 언어에 능숙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왔다. 서구 식민지의 경험이 없는 한국과 일본 등에 있는 동아시아의 신학자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세계적 토론에 참여가 제한되었다. 또한 유교 및 도교 등 동북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배경은 이슬람, 힌두교 등 유신론적인 동남아시아의 그것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한스 큉(Hans Küng)이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종교전통을 독특한 지혜적 유형으로 규명하고, 중·근동의 유일신적 유형과 인도의 신비적 유형을 구분하여 제3의 세계종교 패러다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리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점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이다. 분명히 이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동남아시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었으며, 종교 간의 대화도 유교와 같은 주최지역의 전통보다는 중·근동과 동남아시아 종교전통들에 국한되었다. 다만 한 마당 프로그램에서 행한 필자의 발표가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이 동북아시아 종교문화 전통에 대한 엄연한 무시에 대하여 필자는 WCC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래서 WCC의 종교 간 대화 담당국은 자체 예산으로 한국에 사절단을 보내 유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자에게 그 주선을 일임했다. 그러나 아직 그 대화를 위한 마땅한 후원단체와 유림 등 유교를 대표해서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지 못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글로벌신학과 한국신학
세계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가진 위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일본과 중국 등 기독교인 숫자가 소수에 불과한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총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기독교인이며, 사회적으로도 강력한 위세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서구와 아시아와 관련된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한국신학에 대한 논의는 민중신학을 제외하고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성서신학 분야 외에 AAR과 같은 세계학회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 AAR과 같은 경우, 한국신학으로 소개되는 것은 오히려 한국적 맥락에서 온전하게 연구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디아스포라적 상황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경험한 실존적 입장에서 구상한 코리안-아메리칸(Korean-American)신학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결코 한국신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의 활발한 신학 활동으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를 모르는 서구학자들에게는 이들이 마치 한국신학의 핵심인 것처럼 인식되고 와전되는 경향마저 보여서 걱정된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CATS와 같은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도 극소수이다. 비교적 정교한 서구신학과 제1세계적 풍요에 익숙한 대부분의 한국 신학자들은 아시아신학의 수준을 우습게 보고, 제3세계적 열악한 상황에서 고투하며 쌓아 온 아시아 신학자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신학은 AAR과 CATS와 같은 세계적(글로벌-에큐메니컬) 신학토론의 장에서 동떨어져 있는, 고립된 고도에서 벌어지는 ‘우물 안 개구리’식 지역담론으로 고착되는 인상마저 든다.
한국에는 해외의 유수한 신학교육기관에서 연수를 받은 유능한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국내에 돌아와서는 글로벌신학 토론에 계속해서 참여하기보다는 한국교회와 신학교육 현장에 필요한 몇몇 주제에 국한되어 그것에 매이게 된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들은 아시아신학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학생 시절 외국에서 배운 서구신학만 소개하다가 시간이 지나 글로벌 담론의 흐름에 대한 촉각마저 상실한다. 그리하여 우수한 자질과 교육 배경, 그리고 탁월한 신학적 장래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용 신학자로 국한되어 굳어버리는 듯해서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능력 있는 교회들이 이런 우수한 자질을 가진 신학자들이 미래지향적인 한국신학의 개발을 위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지원해주기보다는, 한물간 백인 신학자들을 호사롭게 초청하여 고귀한 교인들의 헌금을 낭비하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이렇게 간다면 한국신학은 비단 제1세계적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10년 이상 뒤처진 채 계속 그 후진성을 탈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3세계 신학에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민중신학과 달릿신학의 관계에서 이미 그 실례가 나타나는 듯하다.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대한 민중신학의 공헌은 크다. 그러나 앞으로의 논의는 보다 큰 세계적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도의 달릿신학은 민중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발전한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글로벌신학으로서 자리매김은 오히려 민중신학을 앞서고 있는 듯하다.
동아시아신학의 미래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계적 영향력이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이 세계화 시대에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이들이 속한 전통적인 유교 문명권과 미국과 유럽 등 전통적 기독교 문명권 간의 충돌에 대한 경고음은 석학들을 통해 서방세계에 이미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 대신 유교를 내세우며 G2를 넘어서 세계적 리더십마저 주장하는 중국의 부상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동아시아신학이 처한 글로벌신학적 입지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선,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도해온 유럽신학은 박물관 신학으로 전락하였고, 미국신학도 급진적 미국신학 및 포스트모던신학을 내세우며 극복하려 했지만, 뾰쪽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강대국 백인 우월주의의 담을 성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젖어 있던 서구신학의 배타적 선민주의와 변증법적 지배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조화와 소통과 융합의 새로운 대안적 신학 패러다임을 동아시아의 신학적 자원에서 찾고자 한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선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의 무지, 즉 유신론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종교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있다. 글로벌신학은 진정한 세계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유교적 종교문화의 담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동아시아신학의 토착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신학의 온전한 세계화를 위한 선결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종교와의 만남 이외에도 가장 시급한 신학적 과제는 자연과학과의 대화이다. 그동안 초자연(신)과 자연(인간)의 계층적 분리를 전제 조건으로 하던 서구적 사유 얼개에서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글로벌신학은 이웃 종교들에서 그 대안을 찾고 있다. 여기에 유교와 도교 등 자연(내재)과 초자연(초월)의 분리를 극복한 동아시아의 지혜전통의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한 대안으로서 ‘도(道)의 신학’(theodao: theology of the Dao)을 제시해왔다.2) 개신교 신학의 시작은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coram Deo’(하나님 앞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질곡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면죄부를 위시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횡포에 저항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독교인의 독립된 자아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몸을 제외한 환원주의적 요소는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역기능을 초래했고, 결국 극단적인 무한경쟁적 상업주의와 더불어 생태계(지구의 몸)의 위기라는 종말론적 현상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흙으로 몸을 빚고 숨(영혼)을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7)고 믿는 기독교 신앙은 루터의 ‘코람 데오’보다는 다석 유영모(柳永模)가 언급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통전적(天地人) 실존, 즉 ‘가온찍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3)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대상화된 나 또는 나와 너(Martin Buber)의 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늘(天)과 땅(세상·우주, 地)과 내(人)가 연결된 통전적 상황에서 신과 연합된 나의 자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구원은 정신만이 아닌 육체(몸)의 구원, 나아가서 생태계의 구원이 포함되는-몸이 생태계의 일부이므로-온전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를 무시하고 정신을 강조하는 그리스적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하는 서구의 정체적 로고스신학은 이 한계에 막혀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글로벌신학은 이러한 서구신학의 고질병을 이어받아 그 이원론적 한계의 역사적 결과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해방)신학(theo-praxis)의 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시아신학도 여전히 그 한계를 답습하고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신학과 한국신학은 동아시아의 종교문화 전통에서 그 대안적 지혜와 통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러한 제3의 신학 유형을 ‘도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도(道)란 보통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런 ‘도’가 아니라 ‘머리 수’(首) 자와 ‘달릴 착’(辶) 자로 이루어진 ‘도’, 즉 지(logos)와 행(praxis)이 일치를 이룬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도’는 ‘로고스’보다도 더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로고스라고 말한 적이 없고 단지 호도스(o`do.j), 곧 길(道)이라 했고(요 14:6a), 사도행전에서도 기독교의 최초의 이름은 예수의 ‘도’였던 것이다.(행 9:2, 22:4, 24:14, 22)
한국신학의 과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한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여기에는 명백한 신학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개신교 전통인 개혁신학과 한국 성리학의 사유체계는 이들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유사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시대의 인물인 장 칼뱅(John Calvin)의 신학과 퇴계 이황(李滉)의 유학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내재한다.4) 그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 경건과 학문의 방법론(fides quarens intellectum과 居敬窮理), 인간론(신형상론과 천명론), 수양론(성화론과 수신론) 등에서 서로 크게 공명한다.5) 그러나 한국신학은 그동안 이러한 우리의 중대한 종교문화적 자산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해왔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유교전통 간의 특별한 만남의 자리가 한국신학이 정체성을 확립(가온찍기)하고 글로벌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신학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한국인의 종교적 유전자에 스며 있는 유교전통을 어떻게 신학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 둘 다 비판적 지식인들이던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유교적이다. 초기 성서 번역은 물론이고 실천 현장에서도 강한 유교적 내성을 표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주요한 종교문화적 콘텍스트인 유교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큰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500년 전 이러한 개신교 신학을 품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상적 콘텍스트인 퇴계를 비롯한 한국의 유학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볼 때, 한국 개신교는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자신의 종교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역사 속에 발전해온 개신교 전통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될 수 있다는 착각에 여전히 빠져 있는 듯하다. 전혀 다른 종교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영성과 정신(골수)을 우리 몸(종교문화) 속에 알맞게 체화하여 우리 신학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학을 베끼고 모방하는 종속적인 사대신학의 구태를 답습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자기의 종교문화를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종교문화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을 맹신하는 신학, 그러한 가현설적 신학에는 온전한 윤리성과 도덕성이 담보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글로벌신학의 큰 틀에서 오늘날 한국신학에 주어진 과제를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 동아시아신학: 동아시아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대화를 통해 동아시아신학을 개발하여 종교문화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동아시아에서 신학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다만 이 지역이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하였다고는 하나 한·중·일 각 나라와 유교와의 관계에는 온도 차가 있다. 일본은 유교의 역사가 짧아 불교의 영향이 더욱 강하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조직적 파괴 때문에 유교 전통이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도교가 성행하고 있다. 유교 전통이 아직도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곳은 한국사회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분업을 하자면, 일본은 불교와의 대화, 중국은 도교와의 대화, 한국은 유교와의 대화를 맡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에 한국신학의 유교 연구에 대한 특별한 중요성이 있고, 그것은 곧 글로벌신학이라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신학의 지킴이’로서 한국신학이 가진 시대적 사명을 함의한다고 하겠다.
- 글로벌신학: 이처럼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형성된 한국신학은 토착화 및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것은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신학으로 이원화된 글로벌신학에 통전적 돌파구를 제공하고, 나아가 선교의 난제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을 포함한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예컨대, 도의 신학) 특히 현대신학의 최대 안건인 자연과학과의 대화에서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라는 장벽을 넘어 과학기술시대인 21세기에 적절한 신학의 모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글로벌한국신학: 한국신학에 주어진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국 신학자들은 서구 신학자들과 아시아 신학자들 모두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 AAR과 CATS와 같은 국제적인 모임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간의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구 신학자들에게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진하고, 아시아 현장의 어려운 사정을 인식시키며 아시아신학과 서구신학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한국신학은,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것과 같이, 서구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신학을 정초하려는 맥락적 착오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서구신학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들이 지닌 문화제국주의적 독소와 반문화적 요소를 해체하고 난 후, 그 골수(핵심)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조정하여 수용하는 신학적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안티테제의 자원으로서 유영모와 같은 토종신학의 활용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한국신학을 더욱 심화시켜 글로벌신학 담론에 공헌할 수 있는 수준의 글로벌한국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 환대(hospitality)신학: 나아가 한국신학은 토착화신학과 문화(상황)신학의 단계를 넘어 복음적인 환대신학으로 더욱 성숙되어야 한다. 성육신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품어주시는 신적 환대의 극치를 천명한다.6) 한국사회에 이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문화와 인종적으로 다양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문화적·인종적·이념적 장벽을 넘어 모든 것을 품고 환대하는 환대신학이 한국교회에 요청되고 있다.(마 25:31-46) 이것은 그동안 무시해온 우리의 종교문화는 물론이고 이웃들의 것, 나아가 우리를 억압한 자들의 것도 포함한다.
한국신학이 주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고 세계 속에 모든 이들을 품고 성령의 인도 아래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복음적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로 성숙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Oxford University Press, 2002), 79-105; 김신권 역, 『신의 미래』(도마의길, 2009) 참조.
2) 김흡영, 『도의 신학』(다산글방, 2000), 『도의 신학 2』(도서출판 동연, 2012) 참조.
3) 김흡영,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도서출판 동연, 2013) 참조.
4) 김흡영, 『도의 신학』, 181-228 참조.
5) 위의 책, 231-261 참조.
6) Heup Young Kim, “Embracing and Embodying God’s Hospitality Today in Asia,” CTC Bulletin: 28/1(2012), 1-11 참조.
김흡영 | 세계과학종교학술원(ISSR) 창립회원이고,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공동의장과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한국과학생명포럼의 대표이다. 저서로는 『도의 신학 I』, 『도의 신학 II』,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등이 있다.
‘도의 신학’자 김흡영 교수가 한국신학과 세계신학의 나가야 할 길을 말한다 - 에큐메니안
‘도의 신학’자 김흡영 교수가 한국신학과 세계신학의 나가야 할 길을 말한다 - 에큐메니안
‘도의 신학’자 김흡영 교수가 한국신학과 세계신학의 나가야 할 길을 말한다종교학자의 물음에 신학자가 한국신학으로 답하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1.01.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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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2020년 11월 18일부터 2021년 1월 9일까지 대면 인터뷰, 유선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 필자 주
종교학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아시아신학연합회 공동대표, 한국조직신학회장, 강남대학교 신학교수를 은퇴하신 후에도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의 석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힘차게 일하고 계시는 김흡영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지금도 해외의 연구요청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신년 인사 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김흡영 교수 근영
신학자: 에큐메니안 편집진은 칼럼 마당까지 마련해주며, 제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그동안 해외 논문요청에 매달리느라고, 글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캠브리지(Cambridge), 옥스퍼드(Oxford), 티엔티클락(T&T Clark), 블랙웰(Blackwell), 블룸스베리(Bloomsbury) 등 세계 주요 출판사들이 차세대 신학자들의 교육을 위한 핸드북을 만드는데, 그 교재들에 실릴 챕터(chapter)를 요청한 것들이었습니다. ‘도의 신학’과 한국신학을 소개하고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호재 교수님께서 이렇게 독자들과 만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의 편집진과 독자들에게 먼저 심심한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려운 시절이지만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지면으로 종종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의 신학’의 대선언: 한국 신학계가 서구신학의 대리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학자: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 여쭈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이도(異道)와 외도(外道)로 취급되는 상황이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유비적인 역사적 상황이 벌어지는 듯합니다. 한국신학은 마치 서구 신학의 전시장 혹은 대리전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서구 신학과 서구 신학자에 의탁하지 않으면 ‘신학’을 할 수 없는지요?
신학자: 우리 민족은 산골짜기 지형 때문에 그런지 가진 것을 지키는데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기도 힘들지만, 일단 받아드리면 끝까지 원형을 보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고. 특별히 이미 근본주의화 돼서 우리에게 전래된 개신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자학의 약점을 보강하려 양명학이 이미 나왔는데도 주자학을 끝까지 고집해서, 약삭빠른 일본이 양명학을 받아드리고 개방하여 순식간에 우리를 앞지르고 심지어 지배까지 하게 된 데에는 후기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학자들이 세계에서는 이미 도태되어가는 때 지난 낡은 신학들에 매달려 옹고집을 부리다가는, 성령께서 마련해 주신 이 땅의 위대한 선교 은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는 죄와 직무유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을 이해하려고만 애쓰는 학생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때때로는 오히려 그들의 홍위병이 되어 이 땅에서 살벌한 대리전을 치루며 서로 싸우며 교회를 갈라놓는 작태를 벌리곤 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앞으로 후학들이 더 이상 이러한 서구신학에 주눅 들지 말고, 서구신학의 수련생이라는 자격지심을 넘어 자기 신앙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는 주체적인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을 가졌으며 합니다. 서구에서는 신학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발전돼서 더 이상 창의적인 새로운 신학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21세기이지만 그들은 천여 년 이상 쌓아놓은 큰 업적들에 각주달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사상들은 우리의 정신문화와 동양 사상을 모른 채 형성된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고 지구촌적 상황에서는 한 쪽에만 쏠린 매우 부족한 것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정신 자원들을 이 땅에 베풀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우리 땅에 숨겨놓은 이 미개발의 정신유산들을 개발하여 위기에 접한 세계신학을 구하고 발전시켜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부터는 서구신학자들은 신학할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신학을 개혁하고 개발하여 서구신학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글로벌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나갈 사명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도의 신학’: 생태신학 등 세계 신학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종교학자: 세계적인 지구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의 제자인 메리 에버린 터커(Mary Evelyn Tucker)와 존 그린(John Green) 등이 교수님의 영문저서 『A Theology of DAO』를 소중하게 평가하고 서구 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계적인 신학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 『A Theology of DAO』의 겉표지
신학자: 20세기 후기 지구생태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그 대안을 종교사상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연구가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에서 메리 에버린 터커와 존 그린이 주도한 <종교와 생태계> 컨퍼런스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연구는 수년간에 걸쳐 모든 종교들을 망라하여 시도되었는데, 터커와 그린의 결론은 세계종교사상들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생태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통은 동아시아의 유교와 도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젝트가 가장 활발하던 때, 제가 마침 그 하버드 연구소에 있었고, 적극적으로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면서 두 분과 깊은 교제를 맺게 되었습니다.
세계교회가 생태신학에 대하여 내놓은 문서들 중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현 프란체스코 교황이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 입니다. 이 회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주요한 인물이 뉴욕 시에 있는 포덤대학의 교수였던 토마스 베리라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그 분은 20세기 후반에 생태위기를 가장 중요한 영성적, 신학적 문제라고 끌어올리는 데 큰 공한을 한 생태신학의 선구자입니다. 베리 교수에게는 두 부분의 애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터커와 그린 부부였습니다. 베리는 앞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은 결국 종교적 영성인데 그 중에서도 유교와 북미주 토착민들의 영성전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애제자 터커에게는 유교(성리학)를, 그린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착 영성을 박사과정에서 전공하게 하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지금은 예일대학교 <종교와 생태학 포럼>의 대표로서,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서 생태학과 종교 분야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입니다. 이러한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와 배경 때문에 나의 『도의 신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이 앞으로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추천해 주었지요.
종교학자: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계신학계에서 핫이슈인 생태신학의 담론이 벌어지고 있는 담론현장에서 ‘도의 신학’등 한국신학자도 이 방면에 적극적인 발언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신학자: 앞으로 생태신학은 서구형에서 이탈하여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에코-페미니즘조차도 서구적이란 한계를 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도의 신학’적 생태신학의 입장을 에코-다오(Eco-Dao)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세계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논문 요청을 해왔습니다. 옥스퍼드의 윌리-블랙웰과 티엔티클락을 인수한 블룸스베리 출판사 등의 종교와 생태학 핸드북들에 제 챕터들이 실렸지요. 미국종교학회의 종교와 생태학 분야에서도 초청을 받아 발표를 했습니다. 서구학자들이 제 신학적인 입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와 같이 도와 관련된 유교와 도가 사상들이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인식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앞으로 한국신학의 전망이 아주 밝습니다. 저는 총론적인 화두를 던졌지만, 앞으로 후학들이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각론과 더불어 더욱 발전시켜주었으면 합니다.
‘도의 신학’: 조직유학(Confuciology)과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로 종교간 대화모델을 유형화하다
종교학자: 작년에 출간한 『왕양명과 칼 바르트』(예문서원)라는 책은 28년 전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박사논문을 거의 그대로 한국말로 번역한 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신 정통신학자인 칼 바르트와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과 대등한 개념의 조직유학(confuciology)을 도입한 것은 지금 보아도 선구적인 신학적 모델의 대화유형인 것 같습니다.
▲ 『왕양명과 칼 바르트』의 겉표지
신학자: 먼저 제 졸저에 대해 훌륭한 서평을 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아우구스투스, 루터, 칼뱅, 바르트 신학에 매료되어 개혁신학 전통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이들이 제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고 마치 영어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듯 했습니다. 유교같이 다른 전통이 몸에 밴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을 신학과 더불어 같이 공부해야 하며, 그것도 단순 비교가 아니라 사상사적인 큰 틀에서 서로 대비하며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대화에 앞장서온 GTU로 옮겨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맹자와 아우구스투스, 주희와 칼뱅, 왕양명과 바르트와 같은 식으로 사상사적으로 짝을 맞춰 전체적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지요. 미국종교학회에서는 작년에야 비로소 『칼 바르트와 비교신학』이라는 책이 나오고 세션이 개최되었는데, 저는 그 서구신학자들보다 약 30년 앞서 한 것이지요.
제가 논문 쓰던 당시, 그리스도교와 유교간의 대화가 한스 큉과 줄리아 칭 등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방법론적으로 유가 사상을 신학의 범주와 개념에 맞춰 절충적으로 비교한 것이어서 체계나 학술 정밀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고도로 체계화되고 정밀한 현대조직신학과 전근대적 유교전통을 비교하자면, 그러한 조직신학 체계에 상응할만한 유학체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개발해 낸 것이 신학(theology)에 대비된 조직유학(confuciology)이란 개념입니다. 곧 조직신학과 종교 간의 대화(또는 비교신학)의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신학계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에서야 비로소 번역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유교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전통들로 가득 찬 우리나라에서 신학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작업은 신학 현장이 불분명하고 막연한 서구형의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조직신학/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자: 근본적 상이성을 가진 왕양명과 칼 바르트를 통해 상생적 대화 모델을 제시하셨다면 1996년에는 근본적 유사성 속에 차별성을 가진 대화 모델을 종교학자 금장태 교수와 공동 연구한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도의 신학’의 확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의 신학”을 구상하신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신학자: 한국에 귀국해서 서울대학교의 유학자 금장태 교수님을 설득하여, 칼뱅과 퇴계 간의 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장로교 개혁전통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칼뱅신학과 퇴계학을 위시한 한국유학간의 유사성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 또한 한국신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못 받았지만, 해외 개혁신학자들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연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성화론을 중요시했던 칼뱅이나 바르트는 형이상적인 이론신학보다는 삶속에 실천적인 ‘도의 신학’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바르트는 신학(앎)과 윤리(행위)는 서로 나눠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론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도(道)자는 머리 수(首)와 움직일 착(辶)로 구성되어, 어원적으로도 지행합일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세계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이론적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그를 비판한 실천적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 간의 이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행합일의 ‘도의 신학(theo-dao)’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글로벌 신학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고스라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길(호도스, ὁδός), 곧 ‘도’라고 하셨지요(요 14:6). 크리스천이란 말이 나오기 전 사도행전에서는 교인들을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라 하였습니다(행 24:14).
종교학자: 도(道)는 국제적으로 ‘Tao’로 영역되다가, 최근에는 ‘Dao’로 번역이 되고 교수님의 영문 저서도 “A Theology of DAO”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경우에 중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도(道)로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한국의 종교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로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세계 학문계의 실정이거든요, 그런데 ‘도의 신학’이라고 하면 외국인에게는 그럼 중국의 신학이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고, 한국신학자에게는 이게 ‘한국신학’인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편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자: ‘도의 신학’을 영어로 소개하면서, 바로 이점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일단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한국적 맥락이 분명하여, ‘Dao’ 대신 ‘Do’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창조론에 대한 티앤티클락 핸드북에서는, 그냥 ‘Dao’를 사용했습니다. ‘도의 신학’의 영어표기를 시작부터 ‘Theo-dao’보다는 ‘Theo-do’로 사용하려 했지만, 우선 후자가 일본의 ‘신도’와 혼돈을 가져 올 염려가 있고, 영어단어 ‘do’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중국신학이 떠오르기를 시작하지 못한 상태이었습니다. 세계신학에서 동아시아가 무시당하고 있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tao/dao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단어에서도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최근 싱가폴에 있는 한 명문대학 저널의 요청으로 집필한 다석의 영성신학에 대한 논문에서는 한자 전체를 핀인(平音, pingyin) 같은 중국식 로마자화 시스템이 아닌 우리 한글 발음의 로마자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학술논문에서는 획기적인 일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자가 중국 것이라고 믿는 현실에서(저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한자의 로마자화는 중국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겠지요. 우리 역사학자들이 하루빨리 한자의 근원에 대해 밝히고 세계적으로 그것을 인정받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도의 신학’을 창안했고 저는 한국신학자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알고 있습니다. 제 업적들이 먼저 출판되어있는 상황에서 양심적인 학자라면 ‘도의 신학’이 중국신학의 아류라고 결코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앞으로는 제 생각과 업적들에 대한 표절들이 문제가 되겠지요. 또한 ‘영어표기를 중국식으로 했다 해서 한국신학이 아니다’라고 하는 옹졸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우리 학자들이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수적 배타주의를 넘어서 중국이던 미국이던 좋고 필요한 것들을 품는 대승적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신학, 특히 동아시아 신학을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 신학자들의 몫이니까요.
옥스퍼드 핸드북에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소개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한국신학자들의 저술과 김 교수님의 관점의 차이 가운데 감명 깊었던 대목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적 근성을 극복해야 한국신학이 그래서 한국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의 사례로서 다석 유영모의 신학을 조명한 『가온찍기』는 그 부제가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공력을 들인 역작이라 평가됩니다. 그럼 유영모 이외에 서구신학의 전이해에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성서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으로 읽어낸 종교인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가온찍기』의 겉표지
신학자: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는데, 준비위원회가 가장 한국적인 철학자를 내세우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기야 채택된 인물이 다석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었습니다. 다석은 세계신학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종교사상가이지요. 그래서 20여 년간 깊은 관심을 갖고 강남대 신학대학원에 과목을 설치하며, 연구에 천착하였지요. 그의 그리스도론은 2003년에 최초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 후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가온찍기』를 출판하게 되었지요.
다석은 워낙 자유스럽게 동서고금의 경전들을 넘나들며 종교사상을 득도하신 분이 돼서, 조직신학 등 서구식 신학교육을 통해 오히려 서구적인 개념과 체계에 익숙한 신학자, 신학생,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이 그 오묘한 동양적 생각들에 접근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교량역할을 할 입문서로 그의 사상들을 좀 더 신학에 가깝게 체계화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도 너무 어렵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연구에서 제가 발견한 하나는 다석이 우리의 토착적 선도전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건 다석학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무시했던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다석 사상은 선도 수행자로서의 입장에서 더 깊이 조명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역을 비롯한 동양생명사상들과 특히 선도에서 중요한 한 수행지침은 ‘수승화강(水昇火降)’입니다. 내려가야 할 물은 올라가고 올라가야 할 불은 빛이 되어 내려 쪼여줘야 나무가 자라듯 생명이 자랍니다. 다시 말해 오히려 몸은 올라가야 하고 얼은 내려와야 합니다. 몸나는 가라앉고 얼나를 뜨게 하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착오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혼비백산(魂飛魄散)을 말하는 것으로 생명이 아니라 사망의 길입니다.
교수님 앞에서는 변찬린 선생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변찬린 선생의 중요성도 그가 성경을 우리의 독특한 가장 근본적인 영성이라 할 수 있는 선도의 시각에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개신교와 유교사상 간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삶에 깊이 흡수되어 있는 선사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도 크게 일익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길선주와 이용도 같은 한국기독교의 토착적 영성 개발자들은 선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한국장로교의 개척자 길선주 목사는 본래 열렬한 선도 수행자였지요. 그러한 것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푼 이가 바로 변찬린 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선경)에 이르는 선맥(僊脈), 곧 도맥(道脈)을 찾아내었지요. 이 성경해석은 ‘도의 신학’에서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조직신학적으로 그를 받아드리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도의 신학’조차도 꺼리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조직신학보다는 오히려 우리 성서신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변 선생의 도맥 해석론을 소개했습니다. 변 선생이 한국성서학계와 세계성서학계에 소개된 것이지요. 이것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게 이걸 숙제로 밀어붙여주신 교수님의 공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자는 세계 신학계에 공헌할 풍부한 한국의 종교적 자산을 개발해야 한다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뜻밖의 기쁜 소식입니다. ‘도의 신학’과 더불어 변찬린 선생의 『성경의 원리』가 “Oxford Handbook of the Bible in Korea”에 소개된다니 말입니다. 한국 신학으로서도 큰 경사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문명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촌 사유의 합류시대에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 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공지능, 포스트 휴먼 등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새 축 시대’라고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한국이라는 자리에서 학문하는 입장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신학자: 그런 문명사적 큰 그림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학자로서 앞으로 새 시대 신학의 매크로 패러다임은 한국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국의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새 시대의 사상가는 기득권 문명을 지배하며 호령하는 곳이 아닌 핍박 속에 고통과 한이 맺힌 변방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노자나 공자도 제국의 지배층이 아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태극을 그리고 있는 한반도는 태극기 이미지대로 새 시대의 핵, 블랙홀입니다. 동서양의 초대국인 중국과 미국이 만나서 각축하고 있고, 아직까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치열하게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가 새 시대를 여는 사상이 나올만한 곳입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공자와 노자의 춘추전국시대가 그랬습니다. 초강대국 미국과 초강대국 중국에서는 결코 새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초강대국으로서 기득권의 유지가 절대적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끼여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고 항상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의 한반도가 현실적으로 괴롭지만, 영적으로 그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최적지, 최고명당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계를 이끌 신학은 우리나라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는 그저 그 길을 열기 위한 터를 닦고 있는 정도이지만, 앞으로 그런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땅에서 나올 것입니다.
종교학자: 한국에서 세계적인 신학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적 소식은 상당히 반가운 말씀입니다. 특히 교수님은 회심 사건 후 유교인·그리스도교인·세계 속 한국인으로서 ‘신학과 동양 종교’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라는 두 주제가 결국 ‘신학, 동양 종교, 자연과학 간의 삼중적 대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신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처한 한국과 한국신학의 길이 나가야 할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겉표지
신학자: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COVID-19) 사태나 인공지능 시대에 거센 물결은 말과 지능 중심의 서구 문명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마스크 쓰기를 극히 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말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정체성을 주장하는 문명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본래 입을 가리고 말이 아닌 덕으로서 이웃을 대하며,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보다는 겸손하게 감추는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받아드리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양인들은 물론이고 (이젠 우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유산이 되었지요.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그러한 말 중심의 문명에 대해 자연이 이제는 입을 고만 닫고 잠잠하라고 전면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로고스)이 아닌 덕(道)이 중심인 문명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또한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지능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출현과 더불어 초지능의 포스트-휴먼 또는 기계인간을 추구하는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초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의 출현은 플라톤 이후 순수지능만의 세계를 추구해 온 서구적 이상의 기계적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완성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올까요, 멸망을 가져 올까요? 최근에야 유럽연합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 같은 곳에서 연구소를 설립하며 인간중심적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인들에게는 정작 인간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서구문화가 극단적 신중심주의로 흘러 인간존재에 대한 가치와 덕을 논할 수 있는 인간론적 공간을 상실한 것입니다. 인간론이나 휴머니즘에 대해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정신적 자원은 유교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말부터 과학기술의 시대에 있어서 유교의 중요성을 설득해 왔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 이후 시카고대학의 한 웹저널에 도덕적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래서 테크노-다오(Techno-dao)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침 유교의 본산지 안동에 있는 경안신학대학원대학 박성원 총장님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드려 안동시의 후원을 받아 해외 에큐메니칼 네트워크 신학자들과 함께 콘퍼런스를 4년째 계속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선교연합회(CWM) 및 세계교회연합회(WCC)가 인공지능 문제를 향후 장기간 다루어야 할 주요주제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세계교회 기관들이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콘텐츠는 유교를 비롯하여 우리의 정신자원에서 발굴해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독교 신학, 과학기술, 그리고 우리 사상 간의 삼중적 대화를 통해 과학기술 시대의 적절한 신학 및 사상 패러다임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후학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 세계를 이끌어가기를 바랍니다.
종교학자: 세계신학계의 동향, 선생님의 극적인 신학여정, 그리고 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폭 넓은 말씀을 더 듣고 싶은데 지면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에큐메니안」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대담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해외에서 요청받은 주요한 글로 바쁘신 줄 아는데 많은 시간을 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에큐메니안」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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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신학’자 김흡영 교수가 한국신학과 세계신학의 나가야 할 길을 말한다종교학자의 물음에 신학자가 한국신학으로 답하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1.01.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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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2020년 11월 18일부터 2021년 1월 9일까지 대면 인터뷰, 유선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 필자 주
종교학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아시아신학연합회 공동대표, 한국조직신학회장, 강남대학교 신학교수를 은퇴하신 후에도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의 석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힘차게 일하고 계시는 김흡영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지금도 해외의 연구요청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신년 인사 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김흡영 교수 근영
신학자: 에큐메니안 편집진은 칼럼 마당까지 마련해주며, 제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그동안 해외 논문요청에 매달리느라고, 글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캠브리지(Cambridge), 옥스퍼드(Oxford), 티엔티클락(T&T Clark), 블랙웰(Blackwell), 블룸스베리(Bloomsbury) 등 세계 주요 출판사들이 차세대 신학자들의 교육을 위한 핸드북을 만드는데, 그 교재들에 실릴 챕터(chapter)를 요청한 것들이었습니다. ‘도의 신학’과 한국신학을 소개하고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호재 교수님께서 이렇게 독자들과 만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의 편집진과 독자들에게 먼저 심심한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려운 시절이지만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지면으로 종종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의 신학’의 대선언: 한국 신학계가 서구신학의 대리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학자: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 여쭈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이도(異道)와 외도(外道)로 취급되는 상황이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유비적인 역사적 상황이 벌어지는 듯합니다. 한국신학은 마치 서구 신학의 전시장 혹은 대리전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서구 신학과 서구 신학자에 의탁하지 않으면 ‘신학’을 할 수 없는지요?
신학자: 우리 민족은 산골짜기 지형 때문에 그런지 가진 것을 지키는데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기도 힘들지만, 일단 받아드리면 끝까지 원형을 보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고. 특별히 이미 근본주의화 돼서 우리에게 전래된 개신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자학의 약점을 보강하려 양명학이 이미 나왔는데도 주자학을 끝까지 고집해서, 약삭빠른 일본이 양명학을 받아드리고 개방하여 순식간에 우리를 앞지르고 심지어 지배까지 하게 된 데에는 후기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학자들이 세계에서는 이미 도태되어가는 때 지난 낡은 신학들에 매달려 옹고집을 부리다가는, 성령께서 마련해 주신 이 땅의 위대한 선교 은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는 죄와 직무유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을 이해하려고만 애쓰는 학생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때때로는 오히려 그들의 홍위병이 되어 이 땅에서 살벌한 대리전을 치루며 서로 싸우며 교회를 갈라놓는 작태를 벌리곤 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앞으로 후학들이 더 이상 이러한 서구신학에 주눅 들지 말고, 서구신학의 수련생이라는 자격지심을 넘어 자기 신앙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는 주체적인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을 가졌으며 합니다. 서구에서는 신학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발전돼서 더 이상 창의적인 새로운 신학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21세기이지만 그들은 천여 년 이상 쌓아놓은 큰 업적들에 각주달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사상들은 우리의 정신문화와 동양 사상을 모른 채 형성된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고 지구촌적 상황에서는 한 쪽에만 쏠린 매우 부족한 것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정신 자원들을 이 땅에 베풀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우리 땅에 숨겨놓은 이 미개발의 정신유산들을 개발하여 위기에 접한 세계신학을 구하고 발전시켜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부터는 서구신학자들은 신학할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신학을 개혁하고 개발하여 서구신학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글로벌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나갈 사명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도의 신학’: 생태신학 등 세계 신학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종교학자: 세계적인 지구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의 제자인 메리 에버린 터커(Mary Evelyn Tucker)와 존 그린(John Green) 등이 교수님의 영문저서 『A Theology of DAO』를 소중하게 평가하고 서구 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계적인 신학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 『A Theology of DAO』의 겉표지
신학자: 20세기 후기 지구생태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그 대안을 종교사상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연구가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에서 메리 에버린 터커와 존 그린이 주도한 <종교와 생태계> 컨퍼런스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연구는 수년간에 걸쳐 모든 종교들을 망라하여 시도되었는데, 터커와 그린의 결론은 세계종교사상들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생태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통은 동아시아의 유교와 도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젝트가 가장 활발하던 때, 제가 마침 그 하버드 연구소에 있었고, 적극적으로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면서 두 분과 깊은 교제를 맺게 되었습니다.
세계교회가 생태신학에 대하여 내놓은 문서들 중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현 프란체스코 교황이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 입니다. 이 회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주요한 인물이 뉴욕 시에 있는 포덤대학의 교수였던 토마스 베리라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그 분은 20세기 후반에 생태위기를 가장 중요한 영성적, 신학적 문제라고 끌어올리는 데 큰 공한을 한 생태신학의 선구자입니다. 베리 교수에게는 두 부분의 애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터커와 그린 부부였습니다. 베리는 앞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은 결국 종교적 영성인데 그 중에서도 유교와 북미주 토착민들의 영성전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애제자 터커에게는 유교(성리학)를, 그린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착 영성을 박사과정에서 전공하게 하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지금은 예일대학교 <종교와 생태학 포럼>의 대표로서,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서 생태학과 종교 분야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입니다. 이러한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와 배경 때문에 나의 『도의 신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이 앞으로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추천해 주었지요.
종교학자: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계신학계에서 핫이슈인 생태신학의 담론이 벌어지고 있는 담론현장에서 ‘도의 신학’등 한국신학자도 이 방면에 적극적인 발언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신학자: 앞으로 생태신학은 서구형에서 이탈하여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에코-페미니즘조차도 서구적이란 한계를 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도의 신학’적 생태신학의 입장을 에코-다오(Eco-Dao)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세계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논문 요청을 해왔습니다. 옥스퍼드의 윌리-블랙웰과 티엔티클락을 인수한 블룸스베리 출판사 등의 종교와 생태학 핸드북들에 제 챕터들이 실렸지요. 미국종교학회의 종교와 생태학 분야에서도 초청을 받아 발표를 했습니다. 서구학자들이 제 신학적인 입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와 같이 도와 관련된 유교와 도가 사상들이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인식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앞으로 한국신학의 전망이 아주 밝습니다. 저는 총론적인 화두를 던졌지만, 앞으로 후학들이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각론과 더불어 더욱 발전시켜주었으면 합니다.
‘도의 신학’: 조직유학(Confuciology)과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로 종교간 대화모델을 유형화하다
종교학자: 작년에 출간한 『왕양명과 칼 바르트』(예문서원)라는 책은 28년 전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박사논문을 거의 그대로 한국말로 번역한 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신 정통신학자인 칼 바르트와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과 대등한 개념의 조직유학(confuciology)을 도입한 것은 지금 보아도 선구적인 신학적 모델의 대화유형인 것 같습니다.
▲ 『왕양명과 칼 바르트』의 겉표지
신학자: 먼저 제 졸저에 대해 훌륭한 서평을 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아우구스투스, 루터, 칼뱅, 바르트 신학에 매료되어 개혁신학 전통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이들이 제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고 마치 영어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듯 했습니다. 유교같이 다른 전통이 몸에 밴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을 신학과 더불어 같이 공부해야 하며, 그것도 단순 비교가 아니라 사상사적인 큰 틀에서 서로 대비하며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대화에 앞장서온 GTU로 옮겨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맹자와 아우구스투스, 주희와 칼뱅, 왕양명과 바르트와 같은 식으로 사상사적으로 짝을 맞춰 전체적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지요. 미국종교학회에서는 작년에야 비로소 『칼 바르트와 비교신학』이라는 책이 나오고 세션이 개최되었는데, 저는 그 서구신학자들보다 약 30년 앞서 한 것이지요.
제가 논문 쓰던 당시, 그리스도교와 유교간의 대화가 한스 큉과 줄리아 칭 등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방법론적으로 유가 사상을 신학의 범주와 개념에 맞춰 절충적으로 비교한 것이어서 체계나 학술 정밀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고도로 체계화되고 정밀한 현대조직신학과 전근대적 유교전통을 비교하자면, 그러한 조직신학 체계에 상응할만한 유학체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개발해 낸 것이 신학(theology)에 대비된 조직유학(confuciology)이란 개념입니다. 곧 조직신학과 종교 간의 대화(또는 비교신학)의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신학계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에서야 비로소 번역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유교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전통들로 가득 찬 우리나라에서 신학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작업은 신학 현장이 불분명하고 막연한 서구형의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조직신학/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자: 근본적 상이성을 가진 왕양명과 칼 바르트를 통해 상생적 대화 모델을 제시하셨다면 1996년에는 근본적 유사성 속에 차별성을 가진 대화 모델을 종교학자 금장태 교수와 공동 연구한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도의 신학’의 확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의 신학”을 구상하신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신학자: 한국에 귀국해서 서울대학교의 유학자 금장태 교수님을 설득하여, 칼뱅과 퇴계 간의 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장로교 개혁전통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칼뱅신학과 퇴계학을 위시한 한국유학간의 유사성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 또한 한국신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못 받았지만, 해외 개혁신학자들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연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성화론을 중요시했던 칼뱅이나 바르트는 형이상적인 이론신학보다는 삶속에 실천적인 ‘도의 신학’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바르트는 신학(앎)과 윤리(행위)는 서로 나눠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론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도(道)자는 머리 수(首)와 움직일 착(辶)로 구성되어, 어원적으로도 지행합일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세계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이론적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그를 비판한 실천적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 간의 이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행합일의 ‘도의 신학(theo-dao)’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글로벌 신학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고스라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길(호도스, ὁδός), 곧 ‘도’라고 하셨지요(요 14:6). 크리스천이란 말이 나오기 전 사도행전에서는 교인들을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라 하였습니다(행 24:14).
종교학자: 도(道)는 국제적으로 ‘Tao’로 영역되다가, 최근에는 ‘Dao’로 번역이 되고 교수님의 영문 저서도 “A Theology of DAO”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경우에 중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도(道)로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한국의 종교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로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세계 학문계의 실정이거든요, 그런데 ‘도의 신학’이라고 하면 외국인에게는 그럼 중국의 신학이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고, 한국신학자에게는 이게 ‘한국신학’인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편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자: ‘도의 신학’을 영어로 소개하면서, 바로 이점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일단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한국적 맥락이 분명하여, ‘Dao’ 대신 ‘Do’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창조론에 대한 티앤티클락 핸드북에서는, 그냥 ‘Dao’를 사용했습니다. ‘도의 신학’의 영어표기를 시작부터 ‘Theo-dao’보다는 ‘Theo-do’로 사용하려 했지만, 우선 후자가 일본의 ‘신도’와 혼돈을 가져 올 염려가 있고, 영어단어 ‘do’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중국신학이 떠오르기를 시작하지 못한 상태이었습니다. 세계신학에서 동아시아가 무시당하고 있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tao/dao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단어에서도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최근 싱가폴에 있는 한 명문대학 저널의 요청으로 집필한 다석의 영성신학에 대한 논문에서는 한자 전체를 핀인(平音, pingyin) 같은 중국식 로마자화 시스템이 아닌 우리 한글 발음의 로마자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학술논문에서는 획기적인 일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자가 중국 것이라고 믿는 현실에서(저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한자의 로마자화는 중국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겠지요. 우리 역사학자들이 하루빨리 한자의 근원에 대해 밝히고 세계적으로 그것을 인정받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도의 신학’을 창안했고 저는 한국신학자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알고 있습니다. 제 업적들이 먼저 출판되어있는 상황에서 양심적인 학자라면 ‘도의 신학’이 중국신학의 아류라고 결코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앞으로는 제 생각과 업적들에 대한 표절들이 문제가 되겠지요. 또한 ‘영어표기를 중국식으로 했다 해서 한국신학이 아니다’라고 하는 옹졸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우리 학자들이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수적 배타주의를 넘어서 중국이던 미국이던 좋고 필요한 것들을 품는 대승적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신학, 특히 동아시아 신학을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 신학자들의 몫이니까요.
옥스퍼드 핸드북에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소개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한국신학자들의 저술과 김 교수님의 관점의 차이 가운데 감명 깊었던 대목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적 근성을 극복해야 한국신학이 그래서 한국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의 사례로서 다석 유영모의 신학을 조명한 『가온찍기』는 그 부제가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공력을 들인 역작이라 평가됩니다. 그럼 유영모 이외에 서구신학의 전이해에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성서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으로 읽어낸 종교인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가온찍기』의 겉표지
신학자: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는데, 준비위원회가 가장 한국적인 철학자를 내세우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기야 채택된 인물이 다석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었습니다. 다석은 세계신학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종교사상가이지요. 그래서 20여 년간 깊은 관심을 갖고 강남대 신학대학원에 과목을 설치하며, 연구에 천착하였지요. 그의 그리스도론은 2003년에 최초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 후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가온찍기』를 출판하게 되었지요.
다석은 워낙 자유스럽게 동서고금의 경전들을 넘나들며 종교사상을 득도하신 분이 돼서, 조직신학 등 서구식 신학교육을 통해 오히려 서구적인 개념과 체계에 익숙한 신학자, 신학생,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이 그 오묘한 동양적 생각들에 접근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교량역할을 할 입문서로 그의 사상들을 좀 더 신학에 가깝게 체계화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도 너무 어렵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연구에서 제가 발견한 하나는 다석이 우리의 토착적 선도전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건 다석학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무시했던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다석 사상은 선도 수행자로서의 입장에서 더 깊이 조명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역을 비롯한 동양생명사상들과 특히 선도에서 중요한 한 수행지침은 ‘수승화강(水昇火降)’입니다. 내려가야 할 물은 올라가고 올라가야 할 불은 빛이 되어 내려 쪼여줘야 나무가 자라듯 생명이 자랍니다. 다시 말해 오히려 몸은 올라가야 하고 얼은 내려와야 합니다. 몸나는 가라앉고 얼나를 뜨게 하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착오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혼비백산(魂飛魄散)을 말하는 것으로 생명이 아니라 사망의 길입니다.
교수님 앞에서는 변찬린 선생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변찬린 선생의 중요성도 그가 성경을 우리의 독특한 가장 근본적인 영성이라 할 수 있는 선도의 시각에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개신교와 유교사상 간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삶에 깊이 흡수되어 있는 선사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도 크게 일익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길선주와 이용도 같은 한국기독교의 토착적 영성 개발자들은 선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한국장로교의 개척자 길선주 목사는 본래 열렬한 선도 수행자였지요. 그러한 것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푼 이가 바로 변찬린 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선경)에 이르는 선맥(僊脈), 곧 도맥(道脈)을 찾아내었지요. 이 성경해석은 ‘도의 신학’에서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조직신학적으로 그를 받아드리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도의 신학’조차도 꺼리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조직신학보다는 오히려 우리 성서신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변 선생의 도맥 해석론을 소개했습니다. 변 선생이 한국성서학계와 세계성서학계에 소개된 것이지요. 이것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게 이걸 숙제로 밀어붙여주신 교수님의 공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자는 세계 신학계에 공헌할 풍부한 한국의 종교적 자산을 개발해야 한다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뜻밖의 기쁜 소식입니다. ‘도의 신학’과 더불어 변찬린 선생의 『성경의 원리』가 “Oxford Handbook of the Bible in Korea”에 소개된다니 말입니다. 한국 신학으로서도 큰 경사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문명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촌 사유의 합류시대에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 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공지능, 포스트 휴먼 등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새 축 시대’라고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한국이라는 자리에서 학문하는 입장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신학자: 그런 문명사적 큰 그림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학자로서 앞으로 새 시대 신학의 매크로 패러다임은 한국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국의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새 시대의 사상가는 기득권 문명을 지배하며 호령하는 곳이 아닌 핍박 속에 고통과 한이 맺힌 변방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노자나 공자도 제국의 지배층이 아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태극을 그리고 있는 한반도는 태극기 이미지대로 새 시대의 핵, 블랙홀입니다. 동서양의 초대국인 중국과 미국이 만나서 각축하고 있고, 아직까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치열하게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가 새 시대를 여는 사상이 나올만한 곳입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공자와 노자의 춘추전국시대가 그랬습니다. 초강대국 미국과 초강대국 중국에서는 결코 새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초강대국으로서 기득권의 유지가 절대적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끼여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고 항상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의 한반도가 현실적으로 괴롭지만, 영적으로 그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최적지, 최고명당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계를 이끌 신학은 우리나라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는 그저 그 길을 열기 위한 터를 닦고 있는 정도이지만, 앞으로 그런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땅에서 나올 것입니다.
종교학자: 한국에서 세계적인 신학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적 소식은 상당히 반가운 말씀입니다. 특히 교수님은 회심 사건 후 유교인·그리스도교인·세계 속 한국인으로서 ‘신학과 동양 종교’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라는 두 주제가 결국 ‘신학, 동양 종교, 자연과학 간의 삼중적 대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신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처한 한국과 한국신학의 길이 나가야 할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겉표지
신학자: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COVID-19) 사태나 인공지능 시대에 거센 물결은 말과 지능 중심의 서구 문명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마스크 쓰기를 극히 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말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정체성을 주장하는 문명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본래 입을 가리고 말이 아닌 덕으로서 이웃을 대하며,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보다는 겸손하게 감추는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받아드리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양인들은 물론이고 (이젠 우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유산이 되었지요.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그러한 말 중심의 문명에 대해 자연이 이제는 입을 고만 닫고 잠잠하라고 전면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로고스)이 아닌 덕(道)이 중심인 문명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또한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지능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출현과 더불어 초지능의 포스트-휴먼 또는 기계인간을 추구하는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초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의 출현은 플라톤 이후 순수지능만의 세계를 추구해 온 서구적 이상의 기계적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완성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올까요, 멸망을 가져 올까요? 최근에야 유럽연합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 같은 곳에서 연구소를 설립하며 인간중심적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인들에게는 정작 인간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서구문화가 극단적 신중심주의로 흘러 인간존재에 대한 가치와 덕을 논할 수 있는 인간론적 공간을 상실한 것입니다. 인간론이나 휴머니즘에 대해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정신적 자원은 유교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말부터 과학기술의 시대에 있어서 유교의 중요성을 설득해 왔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 이후 시카고대학의 한 웹저널에 도덕적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래서 테크노-다오(Techno-dao)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침 유교의 본산지 안동에 있는 경안신학대학원대학 박성원 총장님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드려 안동시의 후원을 받아 해외 에큐메니칼 네트워크 신학자들과 함께 콘퍼런스를 4년째 계속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선교연합회(CWM) 및 세계교회연합회(WCC)가 인공지능 문제를 향후 장기간 다루어야 할 주요주제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세계교회 기관들이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콘텐츠는 유교를 비롯하여 우리의 정신자원에서 발굴해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독교 신학, 과학기술, 그리고 우리 사상 간의 삼중적 대화를 통해 과학기술 시대의 적절한 신학 및 사상 패러다임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후학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 세계를 이끌어가기를 바랍니다.
종교학자: 세계신학계의 동향, 선생님의 극적인 신학여정, 그리고 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폭 넓은 말씀을 더 듣고 싶은데 지면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에큐메니안」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대담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해외에서 요청받은 주요한 글로 바쁘신 줄 아는데 많은 시간을 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에큐메니안」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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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의 신학자 김흡영, 종교 간 대화 모델을 유형화하다 < 리뷰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도道의 신학자 김흡영, 종교 간 대화 모델을 유형화하다 < 리뷰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도道의 신학자 김흡영, 종교 간 대화 모델을 유형화하다
[책 소개] 김흡영 <왕양명과 칼 바르트>(예문서원)
기자명 이호재
승인 2020.06.15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서구적 이원화 틀 해체하고 탄생한 '도의 신학'
평자는 2015년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의 기초 자료를 광범위하게 조사하면서 신학 역사를 연구하던 중 '도의 신학자' 김흡영 선생과 그의 저서 <도의 신학Ⅱ>(2012)를 만났다. 그 후 저자로부터 2020년 5월 6일 출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저자는 유교 전통 집안의 장자로 태어나 그리스도교인으로 회심하는 극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우주공학도에서 신학으로 전환한 그의 종교적 생애는 '도의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대부분 신학자가 교차적·실존적 신앙 체험 없이 신학하는 반면, 그의 독창적 신학 사유의 배경에는 특별한 종교 이력과 전공 전환이 있다. 회심 사건 후 그는 유교인·그리스도교인·세계 속 한국인으로서 "'신학과 동양 종교'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라는 두 주제가 결국 '신학, 동양 종교, 자연과학 간의 삼중적 대화'라는 명제에 이르게 되었고, 이 삼중적 대화가 현재 내가 추구하고 있는 길이다. (중략) 결국 천지인의 궁극적 자리太極에서 하늘나라를 탐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도의 신학자가 된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도의 신학Ⅱ>, 374쪽).
그는 한국에서 조직신학회장이었으나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 신학계에 잘 알려진 신학자다. 전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 석학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이고 과학종교학술원(International Society for Science and Religion)의 창립 펠로우이기도 하다. 그의 신학 여정은 <Wang Yang-ming and Karl Barth>(1996), <도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Christ and the Tao>(2010), <도의 신학Ⅱ>(2012), <가온 찍기 다석 유영모: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2013)과 <A Theology of Dao>(2017), <왕양명과 칼 바르트: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2020) 등의 단독 저서와 26권의 공동 저서(영문 17권 포함), 그리고 국내외 학술지에 실린 30여 편의 논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상표와 같은 '도의 신학'은 여타 토착화신학과 결을 달리한다. 한국의 토착화신학이 서구 신학 전통을 표준으로 삼아 한국 종교 문화를 재단하는 선교신학의 모습을 가진다면, '도의 신학'은 서구 로고스 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의 뿌리 깊은 이원론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시도한 신학이다. '도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도(hodos, 행 9:2, 19:9, 22:4, 24:14, 22)라고 하는 성서적 준거에서 착안했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 형성된 '로고스' 신학 패러다임을 '도道'로 재구성하는 신학이다. 신학 토착화가 아닌 창조와 생명의 근본 자리에서 서구 신학의 근본 오류를 혁신하는 새로운 신학을 지향한다.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 김흡영 지음 / 예문서원 펴냄 / 368쪽 / 3만 3000원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과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문명사적 대화
당시 세계 종교는 일반적으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 유일신 종교, 힌두교·자이나교·불교 등 인도계 종교, 유교·도교 등 동아시아계 종교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해 가톨릭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다른 종교와 대화에 적극 나선다. 이 주제에 국한하면 유일신 종교 간의 대화, 그리스도교와 인도계 종교와는 대화가 활발했지만, 유교 등 동아시아 종교와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 가운데 뚜웨이밍杜维明는 유학을 서구 근대 문명과 융합해 미래 문명으로 구축하려는 구상을 학계에 소개했고, 줄리아 칭은 유교·도교 등 중국 종교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강조하며, 이를 서술적으로 대비하는 데 치중했다. 저자의 대화 모델은 이러한 종교 환경에서 나왔다.
저자는 중국 명대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1472~1528)과 스위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를 대화 상대로 선정한다. 두 종교인은 비교 대상으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특히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 사건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해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입장이기에 종교 간 대화를 주장하는 학자의 비판 대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한국 보수 교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 칼뱅과 주자학 창시자 주희, 대화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와 명대 삼일교 교조인 임조은(1517~1598) 등의 주제가 합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의 가치를 드러낸다. 근본적 차이를 가진 학자를 대화 테이블에 올려 치밀하게 대화를 주선하면서 종국에는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한 차원 높은 지향점을 향한 이웃 종교라는 점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 두 종교인을 대화할 수 있는 이해 지평의 융합으로 이끌어 낸다면, 다른 종교 간 해석학적 대화 공간은 상대적으로 쉽게 열릴 것이다.
왕양명은 왕희지 자손으로 중국 유학사에서 공자-맹자-주자를 잇는 걸출한 유학자다. 학문적으로 정주학의 폐단을 공격하고, 종교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으며, 장군으로서 무술에도 능숙하였다. 치양지致良知와 지행합일을 요체로 주자학적 패러다임을 실천론적 유학으로 변모시킨 <전습록>을 남겼다. 양명학은 명대 후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개화기 사상가, 일본 명치유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현대 중국 실용주의 사상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칼 바르트는 현대 신학 교부로 신정통주의 신학자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직면시킨 변증법적 신학을 주창한다. 그는 삼위일체 신학이 그리스도교 특성이라고 강조하며 그리스도 일원론적 신학을 펼친다. 특히 문화 그리스도교 현상을 비판하며 절대적 계시와 유일한 그리스도 사건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신학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자 선포의 신학으로 <로마서 강해>와 미완성인 <교회 교의학> 13권을 남기고 있다. 그는 '20세기의 바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신학계와 한국교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동서 사유 체계가 합류하는 시점에 유·불·도의 회통을 추구한 왕양명의 <전습록>과 신정통주의 신학의 초월적 영성을 추구한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텍스트를 주로 사용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와 유학자 왕양명의 대화는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문명사적 시도다. 이런 대화는 국제 질서에서 핵심 축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사유 체계와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의 만남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현재도 시의성이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사유 체계의 무미건조한 비교가 아니다.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하기 위한 실존적 신학 작업이며, 삶의 중심으로부터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되는가'하는 역동적인 주제를 선정한다. 초월적 영성의 성서적 인간과 내재적 영성의 유교적 인간이 어떠한 접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두 인물의 사유 체계를 구성신학적 방법을 통해 체계화·구조화한다. 이런 시도를 통해 도의 신학자로서 성장해 가는 초창기 저자의 학술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저자가 24년이나 지난 영문 저서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한국에 번역·발간하는 의도를 알 수 있는 서론 부분(19~40쪽)은 정독해야 한다.
첫째 부분은 두 종교인이 '근본적 상이성 안에서의 두터운 유사성'을 가진 인물로서 대화의 틀과 조건을 구조화한다. 왕양명은 유교적 패러다임에서 주자학의 성즉리를 심즉리로, 격물치지가 아닌 치지격물로서 지행합일의 이론적 실천을 한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한다. 양지良知와 인仁을 인간성 패러다임으로 설정하고, 이기적 욕구를 극복하는 치양지致良知가 말씀言을 체화成하는 성誠을 수신의 근본 메타포로 맥락화한다. 한편 칼 바르트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복음과 율법'으로 도치하며, 신학과 윤리의 합일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as Christ)과 신의 형상(Imago Dei)을 왕양명의 양지와 인의 인간성 패러다임으로 상응하게 설정하고, 태만을 초극하여 성령의 인도에 의해 사랑의 화신체가 되는 것을 성화의 근본 메타포로서 왕양명의 성誠과 유비 기제로 삼는다.
둘째 부분은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동등한 조건에서 비교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규정한다.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에 대응하는 유교의 조직 유학(confuciology)이다. 그는 이런 대화적 틀의 필요성 못지않게 이로 인해 야기되는 한계성도 적확하게 인식한다. 다른 신학자와 차별화되는 통찰력이 이 책의 백미이다(255~266쪽, 315~334쪽). 이런 구조화가 전제되지 않는 종교 간 대화 모델은 형식적 선언이지 종교 간 대화의 궁극적 지향점은 될 수 없다. 이 책은 두 종교인의 사상을 근거(마음과 하나님 말씀), 패러다임 전환(심즉리와 복음과 율법), 출발점(입지와 신앙), 이론과 실천(지행합일과 신학과 윤리의 합일성), 악의 문제(사욕과 태만) 등으로 비교한다.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하는 핵심 질문을 놓치지 않고 왕양명의 내재적 영성과 칼 바르트의 초월적 영성이 만나는 지점으로 견인한다.
셋째 부분은 그리스도교와 유교가 서로 다른 종교 문화에서 형성된 종교이지만 '수신'이라는 조직 유학의 궁극적 인간과 '성화'라는 신학적 인간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성장해 가는 '도의 인간'으로서 궁극적 인간, 즉 '우주적 인간성'을 지향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마무리한다.
포월적 상생 대화 모델로
에큐메니컬 신학 지향하자
저자는 근본적 상이성을 가진 왕양명과 칼 바르트을 통해 상생적 대화 모델을 제시한다. 1996년에는 근본적 유사성 속에 차별성을 가진 대화 모델을 종교학자 금장태 교수와 공동 연구한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도의 신학'의 확장성을 입증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동등한 이해 지평에서 대화 모델을 만들기 위해 상응하는 해석학적 용어와 방법론을 치밀하게 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종교 간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Christianity'(그리스도교)라는 단어에는 이미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다른 종교 하나의 -ism으로, 무언가 결핍된 학문이라는 학문 제국주의가 함의되어 있다.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현대 중국어 발음을 반영해 유교는 루이즘(ruism), 도교는 따오이즘(daoism)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이즘'(-ism)으로 설정된다.
서구 그리스도교에 편향된 학자가 종교 간 대화의 당사자·주인공·중개인으로 나서기보다는 아시아 신학자 혹은 종교학자가 이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황에서 한국 유학생이 그리스도교신학(theology)과 대등한 개념의 '조직유학'으로 상생 대화 모델을 28년 전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학위논문에서 제안했다는 것은 큰 신학적 사건이다. 더구나 줄리아 칭을 포함해 유교·그리스도교 비교에 관심있는 여타 신학자들은 종교 간 대화로서 서술-규범적인 방법을 적용했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구체-보편적 방법을 통해 확장성 있는 대화 모델을 만들어 냈다. 서구 신학 전통과 유학 전통의 이해 지평이 대화할 수 있도록 조직유학과 신학이 공명하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특히 김흡영이 '도의 신학'이라는 근본 메타포를 가지고 예전 종교적 정체성이었던 유교와 지금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교를 '몸과 맘'의 신학으로 내면화해 치열하게 회통적 신학을 추구한 학문적 열정과 용기를 본받아야 한다. 공명 대화 모델은 이세종, 유영모, 함석헌, 변찬린 등과 같은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한국 종교 자산에 대해서도 세계 신학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타당한 모델로 적용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한국 신학계가 풀어야 할 큰 숙제이다. 저자가 앞으로도 '도의 신학'에 대한 후속 작업을 통해 한국 신학의 잠재력을 세계 신학계에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 <인생 지도>(2017) 등이 있다.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도道의 신학자 김흡영, 종교 간 대화 모델을 유형화하다
[책 소개] 김흡영 <왕양명과 칼 바르트>(예문서원)
기자명 이호재
승인 2020.06.15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서구적 이원화 틀 해체하고 탄생한 '도의 신학'
평자는 2015년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의 기초 자료를 광범위하게 조사하면서 신학 역사를 연구하던 중 '도의 신학자' 김흡영 선생과 그의 저서 <도의 신학Ⅱ>(2012)를 만났다. 그 후 저자로부터 2020년 5월 6일 출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저자는 유교 전통 집안의 장자로 태어나 그리스도교인으로 회심하는 극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우주공학도에서 신학으로 전환한 그의 종교적 생애는 '도의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대부분 신학자가 교차적·실존적 신앙 체험 없이 신학하는 반면, 그의 독창적 신학 사유의 배경에는 특별한 종교 이력과 전공 전환이 있다. 회심 사건 후 그는 유교인·그리스도교인·세계 속 한국인으로서 "'신학과 동양 종교'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라는 두 주제가 결국 '신학, 동양 종교, 자연과학 간의 삼중적 대화'라는 명제에 이르게 되었고, 이 삼중적 대화가 현재 내가 추구하고 있는 길이다. (중략) 결국 천지인의 궁극적 자리太極에서 하늘나라를 탐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도의 신학자가 된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도의 신학Ⅱ>, 374쪽).
그는 한국에서 조직신학회장이었으나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 신학계에 잘 알려진 신학자다. 전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 석학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이고 과학종교학술원(International Society for Science and Religion)의 창립 펠로우이기도 하다. 그의 신학 여정은 <Wang Yang-ming and Karl Barth>(1996), <도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Christ and the Tao>(2010), <도의 신학Ⅱ>(2012), <가온 찍기 다석 유영모: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2013)과 <A Theology of Dao>(2017), <왕양명과 칼 바르트: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2020) 등의 단독 저서와 26권의 공동 저서(영문 17권 포함), 그리고 국내외 학술지에 실린 30여 편의 논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상표와 같은 '도의 신학'은 여타 토착화신학과 결을 달리한다. 한국의 토착화신학이 서구 신학 전통을 표준으로 삼아 한국 종교 문화를 재단하는 선교신학의 모습을 가진다면, '도의 신학'은 서구 로고스 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의 뿌리 깊은 이원론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시도한 신학이다. '도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도(hodos, 행 9:2, 19:9, 22:4, 24:14, 22)라고 하는 성서적 준거에서 착안했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 형성된 '로고스' 신학 패러다임을 '도道'로 재구성하는 신학이다. 신학 토착화가 아닌 창조와 생명의 근본 자리에서 서구 신학의 근본 오류를 혁신하는 새로운 신학을 지향한다.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 김흡영 지음 / 예문서원 펴냄 / 368쪽 / 3만 3000원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과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문명사적 대화
당시 세계 종교는 일반적으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 유일신 종교, 힌두교·자이나교·불교 등 인도계 종교, 유교·도교 등 동아시아계 종교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해 가톨릭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다른 종교와 대화에 적극 나선다. 이 주제에 국한하면 유일신 종교 간의 대화, 그리스도교와 인도계 종교와는 대화가 활발했지만, 유교 등 동아시아 종교와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 가운데 뚜웨이밍杜维明는 유학을 서구 근대 문명과 융합해 미래 문명으로 구축하려는 구상을 학계에 소개했고, 줄리아 칭은 유교·도교 등 중국 종교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강조하며, 이를 서술적으로 대비하는 데 치중했다. 저자의 대화 모델은 이러한 종교 환경에서 나왔다.
저자는 중국 명대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1472~1528)과 스위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를 대화 상대로 선정한다. 두 종교인은 비교 대상으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특히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 사건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해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입장이기에 종교 간 대화를 주장하는 학자의 비판 대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한국 보수 교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 칼뱅과 주자학 창시자 주희, 대화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와 명대 삼일교 교조인 임조은(1517~1598) 등의 주제가 합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의 가치를 드러낸다. 근본적 차이를 가진 학자를 대화 테이블에 올려 치밀하게 대화를 주선하면서 종국에는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한 차원 높은 지향점을 향한 이웃 종교라는 점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 두 종교인을 대화할 수 있는 이해 지평의 융합으로 이끌어 낸다면, 다른 종교 간 해석학적 대화 공간은 상대적으로 쉽게 열릴 것이다.
왕양명은 왕희지 자손으로 중국 유학사에서 공자-맹자-주자를 잇는 걸출한 유학자다. 학문적으로 정주학의 폐단을 공격하고, 종교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으며, 장군으로서 무술에도 능숙하였다. 치양지致良知와 지행합일을 요체로 주자학적 패러다임을 실천론적 유학으로 변모시킨 <전습록>을 남겼다. 양명학은 명대 후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개화기 사상가, 일본 명치유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현대 중국 실용주의 사상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칼 바르트는 현대 신학 교부로 신정통주의 신학자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직면시킨 변증법적 신학을 주창한다. 그는 삼위일체 신학이 그리스도교 특성이라고 강조하며 그리스도 일원론적 신학을 펼친다. 특히 문화 그리스도교 현상을 비판하며 절대적 계시와 유일한 그리스도 사건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신학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자 선포의 신학으로 <로마서 강해>와 미완성인 <교회 교의학> 13권을 남기고 있다. 그는 '20세기의 바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신학계와 한국교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동서 사유 체계가 합류하는 시점에 유·불·도의 회통을 추구한 왕양명의 <전습록>과 신정통주의 신학의 초월적 영성을 추구한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텍스트를 주로 사용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와 유학자 왕양명의 대화는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문명사적 시도다. 이런 대화는 국제 질서에서 핵심 축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사유 체계와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의 만남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현재도 시의성이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사유 체계의 무미건조한 비교가 아니다.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하기 위한 실존적 신학 작업이며, 삶의 중심으로부터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되는가'하는 역동적인 주제를 선정한다. 초월적 영성의 성서적 인간과 내재적 영성의 유교적 인간이 어떠한 접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두 인물의 사유 체계를 구성신학적 방법을 통해 체계화·구조화한다. 이런 시도를 통해 도의 신학자로서 성장해 가는 초창기 저자의 학술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저자가 24년이나 지난 영문 저서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한국에 번역·발간하는 의도를 알 수 있는 서론 부분(19~40쪽)은 정독해야 한다.
첫째 부분은 두 종교인이 '근본적 상이성 안에서의 두터운 유사성'을 가진 인물로서 대화의 틀과 조건을 구조화한다. 왕양명은 유교적 패러다임에서 주자학의 성즉리를 심즉리로, 격물치지가 아닌 치지격물로서 지행합일의 이론적 실천을 한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한다. 양지良知와 인仁을 인간성 패러다임으로 설정하고, 이기적 욕구를 극복하는 치양지致良知가 말씀言을 체화成하는 성誠을 수신의 근본 메타포로 맥락화한다. 한편 칼 바르트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복음과 율법'으로 도치하며, 신학과 윤리의 합일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as Christ)과 신의 형상(Imago Dei)을 왕양명의 양지와 인의 인간성 패러다임으로 상응하게 설정하고, 태만을 초극하여 성령의 인도에 의해 사랑의 화신체가 되는 것을 성화의 근본 메타포로서 왕양명의 성誠과 유비 기제로 삼는다.
둘째 부분은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동등한 조건에서 비교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규정한다.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에 대응하는 유교의 조직 유학(confuciology)이다. 그는 이런 대화적 틀의 필요성 못지않게 이로 인해 야기되는 한계성도 적확하게 인식한다. 다른 신학자와 차별화되는 통찰력이 이 책의 백미이다(255~266쪽, 315~334쪽). 이런 구조화가 전제되지 않는 종교 간 대화 모델은 형식적 선언이지 종교 간 대화의 궁극적 지향점은 될 수 없다. 이 책은 두 종교인의 사상을 근거(마음과 하나님 말씀), 패러다임 전환(심즉리와 복음과 율법), 출발점(입지와 신앙), 이론과 실천(지행합일과 신학과 윤리의 합일성), 악의 문제(사욕과 태만) 등으로 비교한다.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하는 핵심 질문을 놓치지 않고 왕양명의 내재적 영성과 칼 바르트의 초월적 영성이 만나는 지점으로 견인한다.
셋째 부분은 그리스도교와 유교가 서로 다른 종교 문화에서 형성된 종교이지만 '수신'이라는 조직 유학의 궁극적 인간과 '성화'라는 신학적 인간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성장해 가는 '도의 인간'으로서 궁극적 인간, 즉 '우주적 인간성'을 지향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마무리한다.
포월적 상생 대화 모델로
에큐메니컬 신학 지향하자
저자는 근본적 상이성을 가진 왕양명과 칼 바르트을 통해 상생적 대화 모델을 제시한다. 1996년에는 근본적 유사성 속에 차별성을 가진 대화 모델을 종교학자 금장태 교수와 공동 연구한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도의 신학'의 확장성을 입증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동등한 이해 지평에서 대화 모델을 만들기 위해 상응하는 해석학적 용어와 방법론을 치밀하게 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종교 간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Christianity'(그리스도교)라는 단어에는 이미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다른 종교 하나의 -ism으로, 무언가 결핍된 학문이라는 학문 제국주의가 함의되어 있다.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현대 중국어 발음을 반영해 유교는 루이즘(ruism), 도교는 따오이즘(daoism)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이즘'(-ism)으로 설정된다.
서구 그리스도교에 편향된 학자가 종교 간 대화의 당사자·주인공·중개인으로 나서기보다는 아시아 신학자 혹은 종교학자가 이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황에서 한국 유학생이 그리스도교신학(theology)과 대등한 개념의 '조직유학'으로 상생 대화 모델을 28년 전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학위논문에서 제안했다는 것은 큰 신학적 사건이다. 더구나 줄리아 칭을 포함해 유교·그리스도교 비교에 관심있는 여타 신학자들은 종교 간 대화로서 서술-규범적인 방법을 적용했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구체-보편적 방법을 통해 확장성 있는 대화 모델을 만들어 냈다. 서구 신학 전통과 유학 전통의 이해 지평이 대화할 수 있도록 조직유학과 신학이 공명하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특히 김흡영이 '도의 신학'이라는 근본 메타포를 가지고 예전 종교적 정체성이었던 유교와 지금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교를 '몸과 맘'의 신학으로 내면화해 치열하게 회통적 신학을 추구한 학문적 열정과 용기를 본받아야 한다. 공명 대화 모델은 이세종, 유영모, 함석헌, 변찬린 등과 같은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한국 종교 자산에 대해서도 세계 신학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타당한 모델로 적용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한국 신학계가 풀어야 할 큰 숙제이다. 저자가 앞으로도 '도의 신학'에 대한 후속 작업을 통해 한국 신학의 잠재력을 세계 신학계에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 <인생 지도>(2017) 등이 있다.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1/07/09
성화 (기독교) - 위키백과, Sanctification Quake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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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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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성화(sanctification)란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인데, 성도가 일생을 살면서 그의 신앙적 삶이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나 행위를 말한다.[1] 그것은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인간이 성결하게 되는 선물이다
기독교[편집]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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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편집]
칼빈개혁주의에서는 성화교리에 대하여 칭의교리의 다음에 나오는 이른바 구원의 순서를 중시하였다. 이 구원의 순서는 황금 사슬이라고 불리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교리적인 질서를 갖게 되는 원칙으로, 교리적인 혼동을 막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효적 부르심,
중생,
회개,
칭의 ,
성화,
영화는 로마서 8장 28-30에 나오는 것이 아닌, 로마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 전체를 성령의 사역으로 보는 것으로 유효한 부르심으로부터 성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구원의 순서인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습관이라는 말을 로마 가톨릭의 주입된 은혜와 같이 사용하였으나 그것은 칭의와의 구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2]
동방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이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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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란[편집]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성화가 이루어지지만, 이 생애에서는 완전한 성화는 이룰수 없다고 본다.[3]
감리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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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교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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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서적[편집]
- 성화란 무엇인가 (이윤석지음, 부흥과 개혁사, 2017)
- 성화란 무엇인가 (싱클레어 퍼거슨외, 이미선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0)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김광열 지음,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0)
각주[편집]
- ↑ Oxford English Dictionary, 2nd ed.
- ↑ Fesko, J. V., 1970-.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Wheaton, Illinois. 264쪽. ISBN 978-1-4335-3311-2.
- ↑ WELS Topical Q&A: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by Wisconsin Evangelical Lutheran Synod
Sanct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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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See also: Divinization (Christian) and Theosis (Eastern Christian theology)
Not to be confused with canonization.
Sanctification or in its verb form, sanctify, literally means "to set apart for special use or purpose", that is, to make holy or sacred (compare Latin: sanctus). Therefore, sanctification refers to the state or process of being set apart, i.e. "made holy", as a vessel, full of the Holy Spirit of God. The concept of sanctification is widespread among religions, including Judaism and especially Christianity. The term can be used to refer to objects which are set apart for special purposes, but the most common use within Christian theology is in reference to the change brought about by God in a believer, begun at the point of salvation and continuing throughout the life of the believer. Many forms of Christianity believe that this process will only be completed in Heaven, but some believe that complete holiness is possible in this life.
Contents
Judaism[edit source]
Main articles: Kiddush Hashem, Self-sacrifice in Jewish law, and Martyrdom in Judaism
In rabbinic Judaism sanctification means sanctifying God's name by works of mercy and martyrdom, while desecration of God's name means committing sin.[1] This is based on the Jewish concept of God, whose holiness is pure goodness and is transmissible by sanctifying people and things.[2]
Christianity[edit source]
In the various branches of Christianity sanctification usually refers to a person becoming holy, with the details differing in different branches.[3]
Roman Catholicism[edi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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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tholic Church upholds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teaching that:[4]
Sanctifying grace is that grace which confers on our souls a new life, that is, sharing in the life of God. Our reconciliation with God, which the redemption of Christ has merited for us, finds its accomplishments in sanctifying grace. Through this most precious gift we participate in the divine life; we have the right to be called children of God. This grace is the source of all our supernatural merits and bestows upon us the right of eternal glory.[4]
According to the Catholic Encyclopedia "sanctity"[5] differs for God, individual, and corporate body. For God, it is God's unique absolute moral perfection. For the individual, it is a close union with God and the resulting moral perfection. It is essentially of God, by a divine gift. For a society, it is the ability to produce and secure holiness in its members, who display a real, not merely nominal, holiness. The Church's holiness is beyond human power, beyond natural power.
Sanctity is regulated by established conventional standards.
Eastern Orthodoxy[edit source]
Orthodox Christianity teaches the doctrine of theosis, whereby humans take on divine properties, and in a particular sense, participate in the being of God. A key scripture supporting this is 2 Peter 1:4. In the 4th century, Athanasius of Alexandria taught that God became Man that man might become God.[6] Essentially, man does not become divine, but in Christ can partake of divine nature. This Church's version of salvation restores God's image in man.[7] One such theme is release from mortality caused by desires of the world.[8]
Lutheranism[edit source]
Martin Luther taught in his Large Catechism that Sanctification is only caused by the Holy Spirit through the powerful Word of God. The Holy Spirit uses churches to gather Christians together for the teaching and preaching of the Word of God.[9]
Sanctification is the Holy Spirit's work of making us holy. When the Holy Spirit creates faith in us, he renews in us the image of God so that through his power we produce good works. These good works are not meritorious but show the faith in our hearts (Ephesians 2:8-10, James 2:18). Sanctification flows from justification. It is an on-going process which will not be complete or reach perfection in this life.[10]
Luther also viewed the Ten Commandments as means by which the Holy Spirit sanctifies.
"Thus we have the Ten Commandments, a commend of divine doctrine, as to what we are to do in order that our whole life may be pleasing to God, and the true fountain and channel from and in which everything must arise and flow that is to be a good work, so that outside of the Ten Commandments no work or thing can be good or pleasing to God, however great or precious it be in the eyes of the world...whoever does attain to them is a heavenly, angelic man, far above all holiness of the world. Only occupy yourself with them, and try your best, apply all power and ability, and you will find so much to do that you will neither seek nor esteem any other work or holiness."[11]
Pietistic Lutheranism heavily emphasizes the "biblical divine commands of believers to live a holy life and to strive for holy living, or sanctification."[12]
Anglicanism[edit source]
A 2002 Anglican publishing house book states that “there is no explicit teaching on sanctification in the Anglican formularies”.[13] A glossary of the Episcopal Church (USA) gives some teaching: “Anglican formularies have tended to speak of sanctification as the process of God's work within us by means of which we grow into the fullness of the redeemed life.”[14] Outside official formularies sanctification has been an issue in the Anglican Communion since its inception.
The 16th century Anglican theologian Richard Hooker (1554-1600) distinguished between the “righteousness of justification” that is imputed by God and the “righteousness of sanctification” that comprises the works one does as an “inevitable” result of being justified.[15]
Jeremy Taylor (1613-1667) argued that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cannot be separated; they are “two steps in a long process”.[16]
A 19th century Church of England work agreed with Jeremy Taylor that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are “inseparable”. However, they are not the same thing. Justification is “found in Christ’s work alone”. “Sanctification i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us, and is a progressive work.”[17]
Reformed[edit source]
Calvinist theologians interpret sanctification as the process of being made holy only through the merits and justification of Jesus Christ throug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at are then reflected in humanity. Sanctification cannot be attained by any works-based process, but only through the works and power of the divine.[18] When a person is unregenerate, it is their essence that sins and does evil. But when a person is justified through Christ, it is no longer the person (in their essence) that sins, but the person is acting outside of their character. In other words, the person is not being themself, they are not being true to who they are.[19]
Methodist[edit source]
In Wesleyan theology, which is upheld by the Methodist Church (inclusive of the Holiness movement), "sanctification, the beginning of holiness, begins at the new birth".[20] With the Grace of God, Methodists "do works of piety and mercy, and these works reflect the power of sanctification".[21] Examples of these means of grace (works of piety and works of mercy) that aid with sanctification include frequent reception of the sacrament of Holy Communion (work of piety),[22] and visiting the sick and those in prison (work of mercy).[23] Wesleyan covenant theology also emphasizes that an important aspect of sanctification is the keeping of the moral law contained in the Ten Commandments.[24] As such, in "sanctification one grows to be more like Christ."[25] This process of sanctification that begins at the new birth (first work of grace) has its goal as Christian perfection, also known as entire sanctification (second work of grace),[20][26] which John Wesley, the progenitor of the Methodist faith, described as a heart "habitually filled with the love of God and neighbor" and as "having the mind of Christ and walking as he walked".[27] To John Wesley the work of entire sanctification was distinctly separate from regeneration,[28] and was "wrought instantaneously, though it may be approached by slow and gradual steps."[28] A more complete statement of Wesley's position goes like this:
"It is that habitual disposition of soul which, in the sacred writings, is termed holiness; and which directly implies, the being cleansed from sin, 'from all filthiness both of flesh and spirit;' and, by consequence, the being endued with those virtues which were also in Christ Jesus; the being so 'renewed in the spirit of our mind,' as to be 'perfect as 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29]
This is the doctrine that by the power of God's sanctifying grace and attention upon the means of grace may cleanse a Christian of the corrupting influence of original sin in this life. It is expounded upon in the Methodist Articles of Religion:[30]
Sanctification is that renewal of our fallen nature by the Holy Ghost, receive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whose blood of atonement cleanseth from all sin; whereby we are not only delivered from the guilt of sin, but are washed from its pollution, saved from its power, and are enabled, through grace, to love God with all our hearts and to walk in his holy commandments blameless.[30]
Justification is seen as an initial step of acknowledging God's holiness, with sanctification as, through the grace and power of God, entering into it. A key scripture is Hebrews 12:14: "Follow after...holiness, without which no one shall see the Lord." The Wesleyan Church (formerly known as the Wesleyan Methodist Church) states that sanctification has three components—initial, progressive, and entire:[31]
We believe that sanctification is that work of the Holy Spirit by which the child of God is separated from sin unto God and is enabled to love God with all the heart and to walk in all His holy commandments blameless. Sanctification is initiated at the moment of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From that moment there is a gradual or progressive sanctification as the believer walks with God and daily grows in grace and in a more perfect obedience to God. This prepares for the crisis of entire sanctification which is wrought instantaneously when believers present themselv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acceptable to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being effected by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who cleanses the heart from all inbred sin. The crisis of entire sanctification perfects the believer in love and empowers that person for effective service. It is followed by lifelong growth in grace and the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The life of holiness continues through faith in the sanctifying blood of Christ and evidences itself by loving obedience to God’s revealed will.[31]
The importance of "growth in grace", according to Methodist doctrine, is important before and after entire sanctification:[32]
In order to maintain right relationship with God; it is necessary that we grow in grace (Eph. 4:15, 16; Col. 2:6, 7: I Pet. 1:5-10; II Pet. 3:18), both before and after sanctification. There is, however, a more abundant growth with increased fruitage after sanctification (John 15:2). To keep sanctified the soul must continually seek God's face and strength (Luke 21:36; Psalm 105:4). This is the maturing process of all Spirit-filled saints. —Articles of Religion, Immanuel Missionary Church[32]
In the same vein, in addition to entire sanctification, the Kentucky Mountain Holiness Association affirms a belief in "the progressive growth in grace toward Christian maturity through a consistent Christian life of faith and good works."[33] Methodist theology teaches that the state of entire sanctification can be lost through willful sin:[34]
After we have received the Holy Ghost, any careless attitude toward the covenant we entered into when we were sanctified shall cause us to depart from grace given, and to fall into sin. Only through deep repentance, which God may permit, shall we then turn to God and receive forgiveness of our sins. ―Principles of Faith, Emmanuel Association of Churches[34]
If a person backslides but later decides to return to God, he or she must confess his or her sins and be entirely sanctified again (see conditional security).[35][36][37]
John Wesley taught outward holiness as an expression of "inward transformation" and theologians in the Wesleyan-Arminian tradition have noted that the observance of standards of dress and behaviour should follow the New Birth as an act of obedience to God.[38][39]
Pentecostalism[edit source]
There are two Pentecostal positions on sanctification, entire sanctification and progressive sanctification.[40]
Entire sanctification as a second work of grace, is the position of Pentecostal denominations that originally had their roots in Wesleyan-Arminian theology, such as the International Pentecostal Holiness Church, Church of God (Cleveland), and 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41] These denominations differ from the Methodist Churches (inclusive of the Holiness Movement) in that they teach the possibility of a third work of grace—glossolalia.[42]
Progressive sanctification is the work of sanctification of the believer through grace and the decisions of the believer after the new birth.[43] This is the position of other Pentecostal denominations, such as the Assemblies of God.[44][45]
Quakerism[edit source]
George Fox, the founder of Quakerism, taught Christian perfection, also known in the Friends tradition as "Perfectionism", in which the Christian believer could be made free from sin.[46][47] In his Some Principles of the Elect People of God Who in Scorn are called Quakers, for all the People throughout all Christendome to Read over, and thereby their own States to Consider, he writes in section "XVI. Concerning Perfection":[46]
HE that hath brought Man into Imperfection is the Devil, and his work who led from God; for Man was Perfect before he fell, for all God's Works are Perfect; So Christ that destroyes the Devil and his works, makes man Perfect again, destroying him that made him Imperfect, which the Law could not do; so by his Blood doth he cleanse from all Sin; And by one offering, hath he Perfected for ever them that are Sanctified; And they that do not Believe in the Light which comes from Christ, by which they might see the Offering, and receive the Blood, are in the unbelief concerning this. And the Apostles that were in the Light, Christ Jesus, (which destroyes the Devil and his works) spoke Wisdom among them that were Perfect, though they could not among those that were Carnal; And their Work was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for that cause had they their Ministry given to them until they all came to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which doth destroy the Devil and his works, And which ends the Prophets, first Covenant, Types, Figures, Shadowes; And until they all came to the Unity of the Faith which purified their hearts, which gave them Victory over that which seperated [sic] from God, In which they had access to God, by which Faith they pleased him, by which they were Justified; And so until they came unto a Perfect Man, un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ness of Christ; and so the Apostle said, Christ in you we Preach the hope of Glory, warning every man, that we might present every Man Perfect in Christ Jesus.[46]
The early Quakers, following Fox, taught that as a result of the New Birth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man could be free from actual sinning if he continued to rely on the inward light and "focus on the cross of Christ as the center of faith".[48] George Fox emphasized "personal responsibility for faith and emancipation from sin" in his teaching on perfectionism.[48] For the Christian, "perfectionism and freedom from sin were possible in this world".[47]
Some Quaker denominations were founded to emphasize this teaching, such as the Central Yearly Meeting of Friends.[49]
Keswickianism[edit source]
Keswickian theology, which emerged in the Higher Life Movement, teaches a second work of grace that occurs through "surrender and faith", in which God keeps an individual from sin.[50] Keswickian denominations, such as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differ from the Wesleyan-Holiness movement in that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does not see entire sanctification as cleansing one from original sin, whereas holiness denominations espousing the Wesleyan-Arminian theology affirm this belief.[51][52]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edit source]
In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sanctification is viewed as a process and gift from God which makes every willing member holy, according to their repentance and righteous efforts, through the Savior Jesus Christ's matchless grace.[53] To become Sanctified, or Holy, one must do all that he can to live as Christ lived,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Christ. One must strive to live a holy life to truly be considered Holy.[54] In the Church's scriptural canon, one reference to sanctification appears in Helaman 3:35, in the Book of Mormon:
Nevertheless they did fast and pray oft, and did wax stronger and stronger in their humility, and firmer and firmer in the faith of Christ, unto the filling their souls with joy and consolation, yea, even to the purifying and the sanctification of their hearts, which sanctification cometh because of their yielding their hearts unto God.[55]
Elder Dallin H. Oaks, then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also expounded on the meaning of sanctity.[56]
Islam[edit source]
In Islam, sanctification is termed as tazkiah, other similarly used words to the term are Islah-i qalb (reform of the heart), Ihsan (beautification), taharat (purification), Ikhlas (purity), qalb-is-salim (pure/safe/undamaged heart). Tasawuf (Sufism), basically an ideology rather than a term, is mostly misinterpreted as the idea of sanctification in Islam and it is used to pray about saints, especially among Sufis, in whom it is common to say "that God sanctifies his secret" ("qaddasa Llahou Sirruhu"), and that the Saint is alive or dead.[57]
See also[edit sour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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