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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WCC 현상과 더불어 진보신학이 꽃피우다 11.03
WCC 현상과 더불어 진보신학이 꽃피우다
[한겨레21 / 2011.03.28 제854호]
향년 90세의 원로신학자 유동식은 1982년도에 발표한 글에서 한국신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로 1970년대를 평한다. 나는 이런 평가를 1980년대까지 연장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선 지난 글에서 본 것처럼 교회는 한국판 번영신학을 이 시기에 발전시켰다. 비록 학문적 체계에 있어서나 성과물의 양에 있어서 번영신학이 활성화되는 시기는 1990년대 후반 이후로 보이지만, 미국적 담론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창조적인 재해석이 돋보이는 시기는 뭐니뭐내해도 1980년대였다.
한편 ‘한국적인’ 진보신학의 시대 또한 1970~80년대에 도래했다. 이 글은 한국의 교회 상황과 진보적 신학의 활성화 문제의 연계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개신교 교단들 간의 분열 얘기를 해야겠다. 간략한 스케치를 하면,
1] 신사참배를 거부 했던 이들을 주축으로 하는 ‘고신파’가 1951년 분립했고,
1953년에는 현대신학을 수용하는 한국기독교장 로회(기장)와 거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가 갈라섰다.
이 둘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한국전쟁 기간 중에 교단분열로 나타난 사례다.
2] 두 번째 교단분열은,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147개 교회 대표가 모여 세계교회협의회 (WCC. World Council of Churchs)를 조직하고,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 때 한국교회가 가입신청을 하 게 되면서(1954년) 교회들 간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산물이다.
그 결과 1959년 장로교에선 WCC 가입파 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예장 통합)과 반대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예장 합동)이, 감리교에선 가입파 인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반대파인 예수교대한감리회(예감)가, 1961년 성결교에선 가입파인 기독교대한성 결교(기성)와 반대파인 예수교대한성결교(예성)로 각각 분립한다.(그러나 성결교는 WCC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3] 그리 고 1960년대 이후 WCC 가입 반대파 교단들, 특히 예장 합동측에서 무수히 작은 교단들이 분립하여 나가 게 되는 것이 세 번째 분열이다.
이러한 분열과 맞물리며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한다. 이것은 교단간의 성장주의 경쟁의 과열 을 낳았다. 교세 성장률이 최고조에 있던 1975년 각 교단의 성장주의 정책을 보면 그것이 여실히 드러 난다. 예장 통합측은 2,685개 교회를 1984년까지 5천 교회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입안했고, 합동측은 2,484개 교회를 10년 후에 1만 개 교회로 늘리겠다고 선언했으며,, ‘기감’은 15,000교회, 100만 신도 계획 을 세웠고, ‘기성’과 ‘기장’은 2천 교회 운동을 벌였다. 대개가 무모하리만치 과도한 목표치였다.
한데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교단간 규모 경쟁에서 신학생 수가 성장 목표치를 가정한 숫자로 급격히 팽창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장 신학교에 대한 투자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고, 교원의 수요 또한 급격하게 늘어났다. 한편 성장에 여념이 없던 교단 총회나 개별 교회는 신학교의 교수(敎授) 방법과 내용에 대한 통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즉 학문적 자율성이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잘 구 현되고 있었다.
교단 소속 신학대학들 간의 경쟁이 불음 뿜은 중심 주제는 WCC에 관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인 교단들이 WCC를 반대한 이유는,- 가톨릭, 그리스정교, 심지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까지 함께 하는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하나고,
-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 혐의가 둘째며,
- 용공 혐의가 마지막 다른 하나다.
하여 이들 교단의 신학자들은 사력을 다해 자신들의 자폐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정당화하고자 애썼고, 반공주의와 신앙을 결합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근본주의 특유의 반지성주의와 반현장주의적 성향 탓에, 경험을 신학적 논리로 구성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면 WCC 지지 교단의 신학자들은 새롭게 열린 엄청난 국제적 학문시장의 풍요로운 지적 자원을 접촉할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WCC 세계대회는 매 7년마다 개최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수십 개국의 수백 개 교단에서 파송한 수천 명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함께 논의 하는, 그리스도교계의 최대의 행사다. 한 회기에 발표된 문헌만도 수천 편에 이르며, 대회의 의제는 향후 수년간 국제적 학문의 장을 주도하였으며, 이때 주목받은 연구자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학자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WCC에 가입한 한국의 각 교단의 대표자들과 신학자들은 바로 이런 신학의 보고를 접하 게 된 것이다.
WCC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문적 담론들은, 특정 시공간과는 무관한 교리적 논의 따위가 아니라, 현장(locale)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다루는 ‘맥락적 신학’(contextual theology)이었다. 여기에는 지역적 맥락(제3세계)과 의제적 맥락(섹슈얼리티, 인종 등)이 포함된다. 그것은 WCC를 축으로 하는 세계 신학계가 이제까지 그리스도 교를 지배했던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 양식을 지양하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서구신학 또한 특정 한 시공간적 맥락의 산물이었음에도 초시간적인 진리 담론처럼 행세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제국 주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서구 제국의 팽창주의와 서구 그리스도교의 선교론은 ‘쌍생적’이었다는 문제제기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된 대표적인 신학 담론이 ‘신의 선교(미시오 데이) 신학’이다. ‘미시오 데이’라는 용어는 1952년에 처음 사용되었고, 1960년대에 서구신학에 대한 서구인 자신의 비판적 대체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이에 대립되는 개념은 ‘교회의 선교’다. 곧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 주의적 선교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세계와 만나 세계를 섬기는 ‘신의 선교’인 것이다.
이 개념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70년 어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에서 서구중심주의와 아울러 대형교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수용되었다. 교회의 대형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그리 두 드러진 교회가 있지는 않았던 시절, 그리고 번영신학이 소개되어 대형교회의 자기언어로 자리잡기 이전 의 시절에 이미 한국의 신학자들은 규모 중심적 교회주의에 대해 ‘신의 선교’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을 가장 빠르게 제도화하려 했던 교단은 ‘기장’으로, 교단의 각 신앙선언서와 인권지침서 및 교육지침서 등 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 다룰 1970~80년대 한국의 기독교사회운동은 WCC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신학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수용계기가 되었고, 또한 그러한 신학의 가장 열렬한 소비범주가 되었 다. 아무튼 ‘신의 선교’ 신학은 수많은 현장의 문제들과 결합하면서 등장하는 이른바 맥락적 신학들에 대한 서구신학의 지지이론이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맥락적 요소는 ‘분단’, ‘군부독재와 개발주의’, 그리고 ‘다종교 상황’의 문제였 다. 곧 국제적 학문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은 ‘통일과 탈분단의 신학’, ‘민중신학’, ‘종교신학’이었다. 이러한 진보적 신학들은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두 개의 구별된 학문의 장에서 각기 두드러진 발 전을 이룩하였는데, 후자는 기독교사회운동을 다루는 다음 글로 미루고 여기서는 제도권 내부에서의 진보적 신학운동만을 이야기해보자.
통일과 탈분단의 테마는 주로 유럽과 미국의 선교국이나 국제네트워크의 그리스도교 기구들과 연관되 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많이 발전했다면, 민중신학은 주로 ‘기장’의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을 중 심으로, 그리고 종교신학은 ‘기감’의 감신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물론 그렇게 한정할 수만은 없다. 다 른 대학이나 기구들의 학자들 가운데도 진보적 신학의 전문가들 또한, 많지는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통일과 탈분단의 신학은 주로 WCC 등 국제 그리스도교기구들을 단위로 해서 전개 되는 남북간의 국가간 정치신학 범주의 영역에서, 민중신학은 반독재와 관련된 국가정치신학의 범주에 서, 그리고 종교신학은 종교간 대화의 범주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한 토론이 되었다.
이들 학자들과 기구활동가들,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WCC에 가입된 교단을 포함한 여러 교단들에서 진보적 문건들이 신조나 선언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통용되었다. 비록 교회 현장은 대다수가 매우 보수적 이고 심지어 반지성주의적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음에도, 교단이나 기구들은 일정하게 진보적인 신학 을 기조로 하는 다양한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교회가 신학에 대한 지원을 늘렸음에도 학문적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상황이 조성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이러한 비의도성의 핵심에는 WCC를 축으로 하는 진보적인 국제적 학문시장이 조성된 결과다. 한국 신학계의 ‘국제통’들은 한국의 지역학적 신학의 활성화를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반면 한국교회의 과대성장에 관한 신학적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별로 주목할 만한 성과도 없었다. 예외적으로 몇 건의 연구들이 주목받았는데,
-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한완상은, 발전지상주의로 인한 급속한 이농현상이 야기한 공동체성의 상실과 정체성의 붕괴가 불안심리를 야기하였는데, 교회의 성장은 바로 그 것에 대한 반작용의 열광으로 해석하였다.
- 비교종교학 분야에서 유동식은 무교적 전통신앙과 순복음교회 의 모성적 성령 신앙이 갖는 신앙구조적 유사성을 강조함으로서, 교회의 빠른 성장을 해석하려 했다.
- 그러나 대개의 신학자들은 빠른 성장 자체를 성령의 역사로 보는 나이브한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고, 그것의 맥락성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아가 한국 교회의 자기 해석적 틀인 번영신학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199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는 신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요컨대 교회의 급격한 성장의 문제는 국내외 신학의 장에서 ‘외부’였다. 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대체로 무논리로 성장을 자화자찬하거나 반대로 성장지상주의를 비판하거나 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학문적 논의를 신학적으로 반박하지 못했고, 그리 관심도 없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반박은 신학교가 교회에 유용한 학생들을 배출하지 못하다고 뒷담화 투로 불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반박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신학의 내용과 형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 목사수련생으로 교회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체험해야 했다. 물론 학문의 진보성과 교회의 보수성 사이에서 중립지대가 없지는 않았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과 교회를 외면하는 것, 이런 어느 한 편에 경도된 극단의 행동만이 정체성의 혼란을 해소하는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립지대를 선택한 학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성을 무시한 채 서구 중심적인 낡 은 신학 담론을 매우 추상적으로 반복하여 말하는 신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적어도 당시의 대학에선 이 것이 교회 현장을 존중하는 모습처럼 여겨졌다. 그들도 교회 현장에서 유용한 신학을 가르칠만한 언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러므로 신학도들 가운데는 맥락적 신학보다는 서구 중심적인 추상적 신학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선택을 함으로써 갈등의 중립지대를 찾으려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훗날 진보적 신학이 퇴조하고, 교회의 통제가 강화될 때, 이러한 중립지대를 선택한 신학자들과 신학도들은 담론 지형의 중심에 서게 된다. 즉 과거처럼 약한 정체성의 존재가 아니라 강한 정체성의 존재로 부상한다. 그래서 신학의 탈식민주의는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2021/08/04
아둘람 공동체 최요한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생각 1-6]
oot1SpSSmse1ionrsa oJittruley adt 1S2hrd:43 ·
※ 지난 주 카톡으로는 글을 남기고, 페이스북에는 글을 남기지 않았네요... 이 글 올리고 곧 2편도 용감하게 올리겠습니다.
<아둘람 가족분들께>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단순명료하게 나쁜 놈과 착한 분들이 나뉘던 시대가 지나고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제 삶의 뿌리였던 기독교 – 심지어 제 이름은 ‘요한’입니다 – 가 심각하게 비판을 받는 시대가 되다 보니 진짜 ‘기독교는 뭐지?’라는 질문이 제 뱃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징글징글했던 기존 기독교회에서 쫓겨나고 나서, 나름 대안교회라는 곳에 출석하기도 하고(거기서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ㅠㅠ), 이리저리 치여 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목사아들 돼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시사평론가 김용민씨가 사역하고 있는 ‘벙커1’교회에 출석을 하기도 했지요. 요즘은 사정이 생겨서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가나안’ 교인이네요.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제가 생각하고 느끼고 정리한 것을 글로 남겨 두지 않으면 그냥 휘발(揮發)되겠구나 하는 겁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5.18이 부정당하듯이 왜곡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대단해서도, 너무나 엄청난 주장이라서가 아니라, 돌들이라도 소리를 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 돌이 던져졌으면 어디에 어떻게 던져졌고, 누굴 맞춰서, 어떤 파괴력이라도 보였나, 하는 것을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몇 주 동안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저서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를 중심으로 책도 읽고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도올 선생의 해석은 탁월했습니다. 제 생각과 맥이 닿는 부분이 있어서 좀 뒤적거려 보았더니 대략 10여 년 전에 썼던 글이 있네요. 지금 맥락에 맞춰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냥 이런 생각하고 사는구나 하고 여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210703 최요한
<생각 톺아보기1 - 20210704>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 문제는 ‘사도바울’이었다는 뼈아픈 깨달음
문제는 바울
1.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1:8~9)
2.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한14:6)
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전4:2)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누가 읽는지, 언제 어떤 장소에서 반포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만, 기독교인들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성경’에 분명히 들어가 있는 말씀입니다.
10여 년 전에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위험지역이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외교부에서 그렇게 막았었지만, 당시 정말 개념 없는 기독교인들이 정부를 속이고 넘어갔다가 납치되어 2명의 귀한 생명 희생되고 아까운 세금이 협상용으로 사용되는 ‘민폐’를 끼친 적이 있지요.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오직 예수’라는 단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온 세계 방방곡곡에 하느님 말씀이 널리 퍼져서 온 민족과 온 열방이 온리 지저스, 온리 하느님만 믿어야 하는 것, 부처니 이슬람이니 모두 다 불태워버리고, 오로지 기독교 지상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 오직 예수님만 믿고 천국가자는 바로 그 핵심논리 말입니다.
슬프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국민적 지탄을 받을 때는, 막상 납치당했을 때는 ‘선교’가 아니라 순수 ‘봉사’라고 하더니 지금 그때 살해된 두 사람의 ‘순교비’가 서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때의 이슬람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바뀌었기 때문일까요?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 선교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조계사와 봉은사에서 잇따라 개신교인들 10여 명이 소란을 피웠다고 하지요.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생각해 보면 조선 땅에 들어온 ‘복음’도 서양 선교사들이 대동강에서 목이 뎅강 떨어져 나가면서 전파된 것이지요. 그냥 분당샘물교회를 욕하거나 “개념 없는 개독교인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화가 나서 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순교와 순교자에 대해서 비하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물론 저는 순교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직도 버젓이 그 유가족들이 남아 있는데 도가 지나쳐서는 안 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이제 보니까 낯이 뜨겁습니다. 혹시라도 유가족분들이 그때의 제 글을 읽고 맘 상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이 부분이 명백하게 ‘순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짚을 것은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땅밟기(불교나 이슬람 사원 가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데도 그게 의미가 있다고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그쪽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공격적인 선교를 진행한 것이죠.
이제 생각해 보니 대동강에서 예수를 전파하다 대원군의 잔인한 명령으로 살해당한 선교사님들의 순수성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분들의 배경에는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제국주의의 시커먼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눈앞의 팩트가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옛날에도 복잡다단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더욱 복잡한 인간사입니다. 여기에 정치가 개입되어 있는 ‘종교’가 외피를 두르고 나타나면.... 사건이 커집니다.
잠시 이야기가 샜습니다만, 전 세계에서 이렇게 사고를 저지르는 기독교인들,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요, 그 이유가 바로 ‘바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올쌤은 마가복음에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고, 그것으로 마가복음의 ‘베드로’는 끝났다, 라고 표현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초대교회 신자들이 떠받들어 교회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이제는 제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저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베드로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그런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가장 큰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칭해서?(마태오 16장 18절)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초대교회에서 베드로를 초대 지도자로 삼아서 처음부터 엇나간 것은 바로 [바울-베드로 동맹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가 동맹을 맺었고, 나머지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기독교가 ‘예수의 하느님 신앙’과는 전혀 다른 ‘예수에 관한 신앙’으로 변질되었고, 어떻게 세계종교로 성장하게 되었나,를 제가 공부한 대로, 그리고 한국기독교에 비추어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짬짬이 정리해서 글을 올리는 건데요, 혹시라도 팩트가 틀릴 수 있고 제가 착각했다면 지적해 주세요. 다만 기본적인 시각이 다르면, 맘이 상하실 수 있으니까 그냥 지나가 주세요. 서로에게 이롭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아직 많이 남았네요. 이만 총총.
===
<생각2 - 20210711>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 외전,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
“성경 3위1체 하나님 외에 누가 왈가왈부 할 수 없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john 요한 기쁜 성탄 되시길 형 *** 드림”
저는 압니다. 왜 최요한이 글을 쓴 것이 ‘왈가왈부’가 되는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왜 불편한지,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 불순해 보이고 ‘타락’으로 느껴지는지....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제가 전에 있던 교회로부터 쫓겨난 이유는 근본적으로 목사의 설교와 그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였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목사가 “다른 교회를 가라”는 결론을 내주어서인데, 사실 다른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2천년 기독교의 역사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느리지만 지금 바뀌고 있으며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방식과 형식으로 아주 혁명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만 결코 교인은 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교회는 줄어들고 쫄딱 망할 것입니다. 성경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은 예수의 직제자인 마태마가누가요한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고, 왜 성경이 66권에 한정되어 배포되었고, 왜 성경에는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8)이라는 살벌한 말씀이 편입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의 가장 근본의 문제는 성경의 문제이고 성경을 해석하는 문제이고 성경에 보이는 숱한 오류와 잘못을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보통 교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성경으로 돌아가자”
응? 그래서 어쩌자고?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엥? 성경이 인공지능도 아닌데, 성경책을 읽는 내가 해석하지 않고 성경이 나를 어떻게 해석해? 참 신실한 말장난이네....
실제로 그랬거든요... 어릴 때 성경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면 선생님들 혹은 전도사님들이 명쾌하게 해석을 해 주기보다는 저렇게 이야기 하거나 가끔은 회피해서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요한아... 우리가 생선을 먹을 때, 가시를 먹지 않는 것처럼 모르는 것은 묵혀 두었다가 어른이 되어서 먹도록 하자”
사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생선 가시는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도 몰라서 그런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혀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성경에는 너무 많이 나오거든요. 하지만 교회가 딱 기준이 되어 해석해 놓은 그 선을 넘으면 불경스럽거나 뭔가 잘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지키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는 식의 ‘신실한 말장난’이 나오는 거죠.
칼 바르트가 조직신학을 정립해서 지금 한국은 바르트로 천하통일 되었지만, 사실 루돌프 불트만(코가 빨간 루돌프 아님)이 성서신학을 정립하면서 서구 신학계에서는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많다는 이야기, 도올 쌤 ‘마가복음 강해’ 앞부분에 있으니까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성경을 읽다가 모르고 막히는 부분은 정직하게 해석하자는 겁니다.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를 벗어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친 듯이 혼자 깔깔 대면서 웃었던 부분이 바로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 verbal inspiration)’입니다.
음... 한 마디로 성경의 저자가 로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를 뒷받침 한다고 하네요. 성경의 저자가 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설사 한 사람이라고 고집한다 하더라도 저자가 하느님하고 접신(接神)합니까? 너는 딱 여기에 앉아서, 붓 들어... 지금부터 나 하나님의 감동을 줄테니 그대로 써! 잘못 쓰면 듀금이야~~ 라고 협박했을까요? 그래서 저자가 땀 삘삘 흘리면서 하느님과 접신한 상태에서 몽롱하게 하느님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했을까요? 그래서 성경이 오류가 없어서 ‘성경 무오류’를 주장하는 건가요? 성경저자가 그렇게 하느님한테 접신한 상태에서 성경을 쓰다가 배가 고파지면, 하느님, 저 밥 먹고 올게요 했을까요? 오줌이 마려우면 하느님 저 소피 좀.... 했을까요? 아니면 워낙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셔서 저자가 하느님과 접신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아예 배고프지도 않고 오줌도 마렵지 않게 했을까요?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소리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 하세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쳐들었던 슬로건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였습니다. 그게 축자영감설이나 성경무오설을 뒷받침하는 슬로건이 아니라 당시 중세 교황과 교회 내 부당한 권력자에 대항하는 강력한 슬로건이었습니다. 진짜 권위는 당신들의 그 허접한 교회정치와 세속적인 야욕에 눈이 멀어 맘대로 면죄부를 만들어 파는 교회행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성경에 있는 내용에 있는 것이다! 라는 차원에서 주장된 것입니다.
성경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널리, 자유롭게, 빛나는 인간의 이성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만큼, 니체나 도킨스를 포용할 정도로 성경은 해석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성경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고, 개판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잠깐 맑시스트가 되었을 때 성경을 바라보았던 그 관점으로, 민중의 착취도구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정상이예요. 인정했다가 부정했다가 다시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저는 그랬어요. 다석 류영모를 부정했다가 다시 인정하니까 그가 참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보게 되었어요.
오늘은 ‘바울깨기’의 외전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에 대해서 글 올립니다. 조금 걱정도 됩니다. 예전에도 제가 이런 글을 쓰니까 순복음교회 목사라는 사람이 –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 협박 메일을 보내고 그랬거든요... 협박죄로 고소할까 하다가 그만 뒀어요. 시간이 아까와서 ㅋㅋㅋ
오늘은 이만, 총총
4 comments
이기동
깊이있는 글에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생선 가시는 먹지 않습니다”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 저희 애들에게도 조심스럽게 말 해주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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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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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
구텐베르그가 괜히 성서를 인쇄 해가지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 이전의 일반 신자들은 성서 없이 어떻게 신앙을 잘 유지해서 지금까지 전달해 주었는지 참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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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이현희 삼위일체 하느님만 알면 성경이 없어도 ~~~수미산 보다 더 높이 쌓인 신학이론이 정말 삶에 필요한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은 성사와 구원을 필수로 엮는데, 프로테스탄 목사님들은 말씀만 갖고도 훌륭히 사시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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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14 gttJoulySponfs artu em1s3r:fuordo0u8edars ·
※ 제가 쓰는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제목의 글은 10여 년 전부터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제자 박영호 선생님의 책을 참조해서 써온 글인데요,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그냥 마구 퍼가고 이상한 곳에서 활용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ㅡ,.ㅡ;;;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생각3 - 20210714>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2)
지난번에 아프가니스탄 납치사건을 말씀드리고 10여 년 전 그때와 지금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단언컨대, 한국교회는 아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근본주의적 선교관을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단체든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겁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에 남아 있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또는 대교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예수 비즈니스를 포기할 때까지, 또는 기독교라 포장해서 어린 양들을 그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교리에 가두어 넣는 행태가 중지될 때까지, 납치와 테러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코미디를 겪을 겁니다. 불행한 거죠.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를 겪고도 이 교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답니다. 당시 피랍 후 살해당한 배형규 목사와 관련한 책을 출판하고(한솜미디어刊, 아프간의 밀알), 2011년 7월 31일에는 샘물교회 안에 '아프간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고 개관식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2012년 9월 5일에는 배형규 목사의 고향인 제주도에 배형규 목사 순교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니, 저는 이 망할 놈의 한국 개신교의 예수 비즈니스는 갈 데까지 갔다고 봅니다. 누리꾼들은 ‘아프간의 밀알’을 빗대어 아프간의 불알이나 아프간의 질알 또는 아프간의 니밀알이라고 조롱하고 있다네요 ㅡ,.ㅡ;;;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제로입니다. 자신들의 소명이(라 착각하는) ‘선교’라는 틀에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
오늘날 문제를 일으키는데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종교적 배타성이니 국제 정치문제니 다 집어치우고 위험하든 말든 무작정 들어가서 땅 밟기하고, 그러면 하느님 말씀이 전파될 거라고 생각하는 단세포 생각이 만들어낸 비극, 그 원인을 저는 ‘바울’로 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바울에 대해서
바울을 올바로 알아야 바울을 깨고 바울 너머를 보게 됩니다. 바울을 깨는 자신을 잘 알아야 바울을 깰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쓰는 거죠.
바울은 랍비입니다. 유대교의 스승이기도 하죠. 소아시아 동쪽에 위치 한 항구도시인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는 당시 세계 최강국인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디아스포라(Diaspora)... 유민(流民)이었습니다.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이 바로 유민이라고 하는데요, 보통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하여 중동 전역에 생겨난 유대인 집단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자 단어가 생기게 된 계기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콤플렉스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살아있던 당시에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으로 와서 당시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요(사도행전 22:3), 또한 바울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대단히 과격한 유대교 근본주의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스테판 집사를 잔혹하게 죽이는데 앞장서는 사울로 나타난 것이죠.
또한 나자레언으로 불리던 유대 내 그리스도교인들이 당시 사울이 앞장서서 자행하는 박해를 피해서 사마리아와 팔레스타인, 특히 다마스쿠스(다메섹)과 안티오키아(안디옥)으로 많이 갔는데 바울을 그곳까지 쫓아가서 체포해 처벌하려고 하는, 끔찍한 근본주의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다메섹 길가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回心)의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성서 기자가 더욱 근본주의적인 사울을 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 어찌되었든 사울은 근본주의자에서 예수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었으며, 이 ‘바울’로 인해서 유대 내 메시야 사상은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전 세계적인 메시야 사상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바울 없이는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도 없었고 또한 예수도 없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논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기에 다석 류영모 선생과 그 제자들은 바울에 대해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한국의 기독교 아니, 전 세계의 기독교를 설명할 때 바울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기독교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울에서 사도바울로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다마스쿠스 성 밖에서의 ‘회심사건’입니다. 사실 이 회심사건으로 인한 바울의 등장은 유대교의 한 부류나 마찬가지였던 '예수주의'가 전 세계적인 종교로 급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바울은 그 이후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실명한 눈의 시력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의 사흘 동안 그야말로 암흑과 같은 깊은 절망과 혼돈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질병이 하느님의 노여움에서 오는 것으로 알았는데(요한 9:2), 유대교의 근본주의자였던 바울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다혈질적이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는 저 못된 예수 추종무리들,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 권위를 깎아 내리는 예수 추종자들을 모조리 싹 잡아다 죽여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하느님의 저주와 같은 질병이 걸렸으니 바울의 쇼크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 자신이 박해하는 사람들의 편이었다는 것을 결국 깨달았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깨달음은 인생의 대반전을 이루는 중요한 순간이자 이 깨달음의 주체인 바울의 다음 언명들이 향후의 기독교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루어진(?) 바울의 교리가 '대속교리'로 설명됩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사수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 명료한 이념이 다마스커스의 사건으로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질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한 바울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이념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이를 극복해 줄 도우미는 바로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포에 휩싸인 사람은 간절히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눈이 멀어서 앞도 보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공포에 쌓인 바울로서는 그저 '백기항복'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흘을 그렇게 지내고 나서 생전 처음 만난 아나니아라는, '주께서 보내셨다'라는 사람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고 완전히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스테파노 집사를 죽였지만 예수는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 공포와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타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 있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탄식과 바울이 예수에게 매달려 향후 자신의 전 생애를 다 바친 근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서7:24~25)
더군다나 유대인들의 기존 야훼 신앙은 유치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아버지로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공포의 대상인 것이죠. 바울도 그런 유치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커스의 사건으로 인해 단박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가 내 속에, 내가 아버지 속에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사랑의 신앙을 이제 바울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자신이 그렇게 잘못을 했는데도 예수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질병도 낫게 해 주었으니까요!
자!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 바로 여기까집니다. 바울이 예수를 다시 바로 알게 되고 하느님의 뜻이 저 유대민족의 신앙에 있지 않고 자신이 탄압했던 나자레언(크리스천)들에게 있다고 느끼는...... 바로 여기까지가 본연의 모습으로서의 바울이었습니다. 바뀐 바울이고 회심한 바울이고 돌아온 탕자로서의 바울이고 우리가 나아 갈 방향으로서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엄청난 경험을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박해했던 나자레언들에게도 알려야 했고 자신과 함께 나자레언을 탄압했던 유대교인들에게도 알려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그 공포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대적을 하던 사람도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그런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적의(敵意)에서 진정 예수가 하느님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의(善意)를 알려야 했습니다. 바뀐 바울은 그렇게 알려야 했습니다.
무엇으로 알려야 합니까?
예수를 단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했던 바울이 무엇으로 자신의 엄청난 경험과 하느님의 사랑을 알릴 수 있을까요?
바로 그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으로!!!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할아버지가 로마의 용병으로 군에서 복무하면서 시민권이 주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조부 대부터 로마인이 되었으므로 유대인다운 소양은 물론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의 학문상 소양들을 익힌 것으로 보입니다.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했다고 하지만, 정통 유대교의 율법학은 물론 당시 진보했던 헬라철학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섭렵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정리해보면
1) 바울은 당시 진보한 헬라 철학은 물론 정통 유대교의 율법학까지 정통했다.
2) 게다가 그는 로마 시민으로 신분이 보장되는 계급이었다.
3) 당시 예수 따라쟁이들을 박해했고, 스태파노 집사를 죽였다.
4) 다마스쿠스 길에서 결정적인 회심(回心)의 경험을 하게 되면서 눈이 멀었다.
5)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으며 눈이 나았지만, 그의 경험은 그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충격이었다.
6) 그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전파해야만 했다.
자~ 이 정도 되면 바울이 무엇으로 ‘예수’를 전하려고 하는지 결론이 나옵니다. 바울은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다마스쿠스 길에서 만난 예수가 그 전부이지만, 그를 전해야 했습니다. 유치신앙에서 벗어나 돌아온 탕자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를 전파합니다. 무엇으로? 바로 그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으로!!’
여기서부터 기독교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오만일까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요. 이만 총총하고, 다음엔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는 바울과 베드로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韓國人拉致事件)은 2007년 7월 19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23명(남자 7명, 여자 16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던 사건입니다.
탈레반은 피랍된 23명 중 심성민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 결과 다른 한국인 국민 인질 21명은 8월 31일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 피랍사태는 발생 42일 만에 종료되었고, 9월 2일 생존한 피랍자 19명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피랍자들과 해외 위험지역에 선교를 하러 다니는 일부 신교도들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향후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사에 남아야 할 정도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상 근본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가 무너지는데 이 사건이 상당한 이유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비판을 받게 되면,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분당샘물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러 사건을 묶어서 예수 비즈니스로 활용합니다. 탈레반에게 살해당한 배형규, 심성민 두 사람이 ‘순교’라는 범주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격적 선교관에 꽉 차 있는 근본주의 한국교회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근본주의는 예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있고요,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겁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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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영재 and 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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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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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2명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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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4 - 20210718>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3)
지난번에는 바울이 예수를 전할 때, 세상 잘난 바울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축적된 경험과 지식으로!!’ 전했다고 말씀 드렸어요.
여기서 ‘세상 잘난’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주세요. 이 잘났다는 것은 사실 바울 스스로 이야기 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2장 후반부와 23장 상반부에 바울이 얼마나 신분상 엄청난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파견 나온 파견대장(백부장)은 엄청난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만, 바울은 아예 태생이 로마시민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로마의 용병으로 공을 세웠거든요. 그래서 로마시민은 체포하지 못합니다. 바울을 시기하는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를 때려죽이려고 했지만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 의회에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두 파가 있는 것을 알고 바울로는 거기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내 부모도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믿는 대로 나도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3장 6절)
바울은 공회당에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가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둘 사이의 이간질로 저런 발언을 한 겁니다.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사이파는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이런 배경도 다 이해할 정도로 바울은 당시 사정에 대해 빠삭(?)했고, 두 관계를 이간질 할 정도로 언변이 훌륭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지만 로마시민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학을 배우며 수학했고, 그리스(헬라) 철학에도 상당히 능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 잘난’ 사람이었죠. 요즘으로 치면 빵빵한 집안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울대 나오고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신분이 보장되는 안정된 ‘세상 잘난’ 사람쯤 됩니다. 신분만 잘 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도 당시 기준으로 매우 건실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당시 독실한 바리사이파 사울로서 초기 기독교 여러 공동체를 박살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살렘에서 각 처로 기독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고요, 그 흩어진 사람들마저 잡아 죽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회심사건을 만나게 된 거죠. 결국 저런 언변을 가진 바울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이를 갈라치기했고, 결국 소란스러운 논쟁이 일어나면서 바울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사도행전 23장 9~10절)
하여튼 이렇게 세상 잘난 바울도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신명을 바쳐서 전도하는 예수를 살아 있을 때 직접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예수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할 때 열두 명의 제자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직제자들이었고 – 물론 예수의 제자가 이 열두 명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리아나 마르다 같이 강력한 후원그룹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열두 명의 제자도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후일에 첨부되었을 수도 있지요. – 그들은 예수의 직제자였다는 이유로 상당한 권위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 직제자들의 직업은 흔히들 아시는 대로 어부라든지 기껏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면 ‘세리’ 정도입니다. 바리사이파에, 로마시민에, 정통 유대인 혈통에, 당시 진보했던 헬라철학까지 상당 수준으로 섭렵한 ‘바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적 갭과 지적 수준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직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직제자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둡니다. 아니, 직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밥 먹고 잠자고 ×싸고,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만, 예수 사후에야 예수를 다마스쿠스에서 만난 바울로서는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물론 나중에 전해 들었을 수는 있지요. 예수는 (엄청난 사투리가 심한)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수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쌤은 그의 저서에서 바울이 전한 예수와 직제자들이 전한 예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바울이 예수와 기독교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전했는가 하는 부분은 솔직히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면 기존의, 특히 보수적인 전통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 격렬하게 이단이라고 비판할 것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언사를 동원해 반발할 것입니다.
일단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노여움이든 아니면 사막에서의 급성 결막염이든 어떤 것이든 계기가 되어서 자신이 박해하고 있는 나자레언에게 진리가 있으며 자신은 '허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보통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잘못을 계속 하지 않지요? 바울도 마찬가지고 박해하는 것을 곧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그 예수를 직접 만나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함께 했느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 년 뒤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1:17~19)
어?
이게 뭐죠?
세상 잘 난 바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직제자들을 만나 배우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출신성분이 아무리 높다 해도, 바울이 아무리 당시의 ‘엄친아’라고 해도 당시에는 신약성서조차 기록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아는 예수는 그저 살기등등하게 나자레언을 탄압할 때 알던 왜곡된 상태의 ‘예수’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예수의 제자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데,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있지요? 그 누구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도로 칭하고 있습니다. 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로마서.1:1)
Paul, a servant of Jesus Christ, called to be an apostle, separated unto the gospel of God,(Romans. 1:1. KJV)
로마서의 시작에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자 용기입니다. 그 누구도 사도라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사도'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설명은 D 후릇사르 著 『유대인이 본 그리스도교』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로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교회와는 어느 면에서 대립 관계 속에 있었다. 바울로는 자기 자신의 특별한 가르침을 펼쳤다. 그것은 자신의 복음이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메시아인 예수에 의한 구원 곧 예수의 대속이 기독교의 중심문제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제2의 개조(開祖)로 생각되었다. 남아있는 유대국 내 그리스도교도의 자료에는 바울로가 대악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메시아적 그리스도교관은 유대 내 그리스도교는 바울로의 개인적인 의지의 산물로 보았다. 유대 내 그리스도교도는 10세기경까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아라비아에서 발견된 자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사도권에 집착하는 바울
성경을 잘 살펴보면 곳곳에 바울이 바로 이 ‘사도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바울이 사도권에 집착을? 그냥 믿으라고, 의심하지 말라는 교회의 일방적인 세뇌에 젖어 있으면 그게 보이지 않는데,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그게 명확하게 보입니다.
이참에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사도라고 자칭한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로 번역된 ‘사도’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apostle’라고 씁니다. 발음은 ‘어빠~쓸’처럼 들립니다. 발음기호는 [əˈpɑːsl]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가봅시다. 예수님의 열두 명의 제자를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의 의미는 아포(~로 부터)와 동사 스텔로(내가 보낸다)가 결합해 파생한 “~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에 이 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는 79번 나오는데, 마태와 마가, 요한복음에는 각각 한 번씩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서는 29번, 바울의 전도로 그의 제자가 되어 전도 여행을 함께 한 누가는 그의 저서 사도행전에 34번 사용했습니다.
헬라어 구약성경에는 단 한 번 사용된 이 용어는, 셉투아진트(70인 역·LXX)의 번역자에 따르면, 샬루아흐ַ(=being sent, Qal 동사 שָׁלַח 수동태 분사)를 명사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로 번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고 보냄을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messenger)로 표현합니다.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의 아내에게 자신을 하느님의 메신저로 이야기하지요.(왕상 14:6)
그래서 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는 단어 ‘사도’는 하느님 메시지의 전달자인 천사와도 다르고, 배우고 따른다는 제자의 의미인 ‘마테테스’(Maqhthj")와도 구분이 되는 독특한 용어라고 합니다. 그레코 로만 세계에서 바다 항해를 하는 군사적 목적의 함대나 함대장, 혹은 외교적 목적을 지닌 사절단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지만, 이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바울 혹은 다른 제자들에게 특정되어 기독교인들만이 쓰고 있는 기독교적 용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messnger Paul! 멋있잖아요!!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사도로서 권위를 부여한 바울은 서신 곳곳에 자신의 ‘사도권’ 방어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남겨놓았습니다.
나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 할 것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고후 11:5)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도해 줄 교사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교인으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고전 4:15)
비록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주님을 믿는 여러분이야말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표입니다. (고전9:2)
특히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도권에 대해서 간절하게 인정받기를 원했는지 구구절절하게 나와 있습니다. 특히 9절은 압권입니다.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요한’이 인정해 주었고, 더군다나 그들이 ‘친교의 악수’까지 청했다고 깨알 같은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총을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갈 2:9)
물론 바울이 구구절절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도라는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을 잘 읽어보시면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 것에 대해 바울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토로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와는 달리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에서는 이런 갈등이 상당히 심각했고,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파송 받아 고린도에 온 자들을 ‘위대한 사도’니 ‘초특급 사도’니 라며 냉소적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시면 되게 이해가 잘 됩니다. 꼭 권유드립니다.
갈라디아서의 고백처럼 바울은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곧장 복음 전도에 뛰어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라비아와 다마스쿠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후에야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같이 지낸 시간도 겨우 '보름' 뿐이었고 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리인데, 바울의 '대속교리' 즉, 바울의 특별한 가르침은 바로 이 시기, 삼 년 동안 고민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다마스쿠스와 아라비아와 각지에서 고민하고 연구하고 만들어낸 케리그마(신념체계)의 시간이 삼 년 필요했던 것이고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이 3년간 있었다는 ‘아라비아’라는 지역은 회심 사건을 겪은 다메섹 부근의 나바테아 왕국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 왕은 고린도후서 11:32에서 ‘아레다 왕’으로 간단하게 언급되는데, 사료에서 발견되는 대로 ‘아레타스 4세’(9BC~40AD)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 3년이라는 숨은 시간(hidden time)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합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선교를 했다, 준비기간을 가졌다는 등 크게 4가지 의견들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의견이든 제 개인적인 생각대로 ‘어떤 식으로든 치열하게 고민했다.’라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자들 중 가장 맏형 뻘인 베드로를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식하고 멍청해서 도저히 자신과는 격이 맞지 않는 예수 제자들을 바울이 만난 이유는 혹시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사도'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보름을 베드로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대속교리를 이야기하고 또 자신을 사도로 인정해 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신뢰를 보낼 정도로 '정통성'을 가진 베드로에게 사도로 인정받게 된다면 이후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이 평탄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그리 좋은 관계로 끝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고보 이외에는 다른 제자를 만나지 않은 것을 보니 별 영양가가 없는 만남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바울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복음 전도사역에 나서게 됩니다. 베드로하고는 어느 정도 쇼부(?)를 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동맹을 맺자! 어차피 예수 직제자들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나도 지분있다! 라는 거죠.
결과적으로 바울의 상당한 지위와 지식은 전도여행을 통해 상당 부분 실현이 되고, 베드로는 예수의 직제자로서 초대교회의 리더로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베드로와 맺은 ‘동맹’외의 다른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대해서는 방어막을 칩니다. 바로 이 말씀이지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1:8~9)
결국 초반부터 이견이 있던 ‘나자레언’을 이기고 크리스찬들이 득세하게 됩니다. 다음 4편에서 이 부분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지요. 이만 총총.
4 comments
Hum Kim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바울의 본격적인 복음 선포 준비 기간을 10년으로 보는 설도 있더라고요. 그 연표를 제가 보관해 뒀는데,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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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5 - 20210728>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 (4)
이미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부연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사도가 된’ 바울이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이라며 전달한, 그가 강조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공동번역,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0:9~10)
외국어가 더 편하신 분도 있으시니 킹제임스 버전으로도 올립니다.
That if thou shalt confess with thy mouth the Lord Jesus, and shalt believe in thine heart that God hath raised him from the dead, thou shalt be saved.
For with the heart man believeth unto righteousness; and with the mouth confession is made unto salvation. (KJV)
바로 이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고백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람들에게 전한 이 말씀으로 인해 지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가 오도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고린도전서1:2) 것 만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은 만족하였고 예수의 삶, 그의 생애, 그가 전하려고 한 하느님의 사랑은 가려진 것입니다. 교리에 갇혀버린 예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이 워낙 중요해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릴게요. 바울이 전했다고 전해지는 복음의 핵심이 잘못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울 그 스스로의 말에 의해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공동번역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8~9)
오늘날에는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바울의 기독교만 남아있지 예수의 기독교는 멸종한 상태라고 보입니다. 바울의 활동 당시 예수의 직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기독교는 히브리 그리스도교라 하였고 바울의 기독교를 헬라 그리스도교라 나누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내 예수의 기독교를 [나자레언]이라 불리었고, 유대 밖의 바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를 [크리스찬]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왔다. 거기에서 두 사람은 만 일 년 동안 그 곳 교회 신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에 있는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공동번역 사도행전 11장 26절)
“And when he had found him, he brought him unto Antioch. And it came to pass, that a whole year they assembled themselves with the church, and taught much people. And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in Antioch.”(King James Version)
위 말씀은 신실한 신자 바르나바가 다르소에 가서 사울(후에 바울)을 만나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일 년 동안 포교 활동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 두 사람의 제자들(공동번역에서는 ‘안티오키아에 있는 신도들’이라고 표현됨)이 비로소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는 호칭을 듣게 된다는 겁니다. 아래 영문 성경은 킹제임스 버전입니다. Christians이라고 되어 있네요.
갈라디아서에서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운운한 것은 바울의 기독교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유대 내 예수의 직제자를 중심으로 한 나자레언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더 해석해 보면
“(베드로든 요한이든 야고보든 간에)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나 바울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예수의 말과 바울의 말을 비교해서 이야기 해 볼까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14:10)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겸손한 말씀이며 모든 이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정말 복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배타성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남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격려하고 추켜세우고 독려하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유태인들의 치명적인 결점이라 일컬어지는 ‘배타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말씀입니다.
이에 비해 바울의 말은 달라도 정말 다릅니다. 신앙의 내용이 다르다고 저주를 퍼붓는 자가 어찌 예수의 복된 말씀을 전한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가르침이 그렇게 협량하고 배타적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준 것입니다 (공동번역 갈라디아서1:11~12)
이야~ 이제는 자신이 직접 예수께 받았다고(갑자기, 축자영감설이 떠오른다능...ㅋ)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 겁니다. 자! 이렇게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고 (당시로서는) 전 세계적인 포교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친 바울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고 결국은 나자레언을 이기고 크리스천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사도행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태동하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신약전서에서 바울로에게 할당된 분량을 살펴보면 바울로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바울로는 신약전서 본문에서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확실히 바울로는 신약성서의 주목할 만한 필자로서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는 신약성경에서 대개 4분의1을 차지한다. 바울로는 예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 월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제롬프리뵈르『예수 후 예수』)
“아주 최근의 신약학 동향을 따라 필자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바울로의 그리스도교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대략 그와 동시대에 예수의 육성과 행동을 직접으로 계승한 바로 그 공동체를 가리켜 「예수운동」이라 부른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갈릴레이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존재하였던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원류(源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을 버린 바울로(헬레니즘적 기독교)와는 달리 예수 이후 마르코복음이 출현하기까지 예수의 전승을 간직하여 온 공동체들이다.”(조태연 『예수 운동』)
우리가 접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앞부분, 그러니까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통 바울서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신약성서를 편집할 때, 그 헤게모니가 예수의 직제자인 나자레언에서 이미 바울의 제자들인 크리스찬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승하여 노력했던 예수의 직제자들이 유대교 랍비 바울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결국에는 그 예수의 교(敎)에 들어온 바울에 의해서 다시 도전받고 결국에는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도대체 이 아이러니한 현상에 대해 알고 나서 저는 한동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몰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들어왔던 수많은 성경 예화와 말씀들,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공관복음 4복음서조차도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변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 저는 이런 류의 글을 쓰는 의욕조차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본문이 종종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변개되었다는 것이다. 필사자가 본문을 베끼다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본문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고 싶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즉 필사자가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음으로써 본문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런 일은 필사자가 활동하던 당시 교리적인 논쟁 때문에 종종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변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기독교의 초기 몇 세기 동안 벌어진 교리적인 논쟁을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의 거의 모든 이문(異文)들 직업 필사자들이 폭 넓게 활동하기 이전단계인 바로 이 시기 즉 기독교 초기 몇 세기사이에 모두 발생하였다”(바트어만『성경왜곡의 역사』)
그런데 이렇게 실망을 많이 한 제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다가, 안 믿다가, 더 깊이 믿게 되는, 정말 희한한 경험입니다. 이른바 A-B-A’ 의 경험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간략하게 정리해볼게요.
A : 진짜 엄마 뱃속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스폰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면서 믿었다.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완독 만 해도 몇 독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심령부흥회는 물론이고, 오산리 기도원이니 관상기도니 산 기도니 다니면서 방언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열심을 가지고 종교행위를 했다. 주변으로부터 ‘요한’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 칭찬받았고, 그게 당연한 줄로 알았다. 의심 따위는 들지 않았다.
B : 대학을 가서 뒤집어졌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현실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민중을 탄압하고 있는데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였다. 그나마 민중신학이니 해방신학이니 하는 몇 가지 가르침이 위안을 주긴 했다. 결국 내 머릿속 많은 방(room) 한켠에 ‘예수’를 감금하고, 내 맘 중심에 칼 맑스선생과 레닌선생을 모셨다.
A’ : 학교를 졸업하고 치열하게 살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정치 컨설턴트)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함석헌의 스승이었다는 다석 쌤을 만났다. 비록 책으로 만났지만, 만나긴 만났다. 충격이었다. 다시 뒤집어졌다. 다석을 만나고 나니 다른 선배들도 만나고 싶어졌다. 내 전공도 아닌데(학부는 행정학, 석사는 정치정책학, 박사는 북한학이다) 종교 관련된, 책을 사모으고 밑줄쳐가면서 혼자 공부했다. 결국 알게 된 것은 내 행로는 A-B-A’였던 거다. 바울이 예수를 자신의 식으로 전도하듯 전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쓴다. 이거, 하느님 은혜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도 글을 쓰는 거예요. 다음 글은 ‘교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요...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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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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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6 - 20210802>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5)
지금까지 썼던 글을 찬찬히 살펴보니까 대략 바울로 인해 기독교가 변질되었다, 라는 요지의 글을 전개했네요. 오늘은 그 변질의 원인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지요.
“바울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원래 엄친아였고, 집안도 빵빵하고,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조건은 내팽개치고 그 고생고생하면서,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세계선교를 떠나게 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요? 바울이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 신약성서의 어마어마한 분량을 차지하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냐? 왜,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예수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냐는 겁니다. 더 나아가 어째서 예수의 복음이 아닌 자기 자신이 정립한 바울의 복음을 만들었나? 라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누군가 갈라디아서 1장 11절~12절을 턱 들이대면서 ”봐라! 성경에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다고 하잖냐?“ 라고 이야기하면 진짜 힘 빠지는 일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뻔뻔하면 자기가 하는 주장의 근거를 자기주장에 두냐는 겁니다.(이런 것을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하지요.) 이런 건 과감하게 스킵해야 합니다.
위의 이 질문은 사실 풀어질 수 없는, 아니 각자가 믿음의 분량대로 해석할 부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석 류영모 선생은 바울에 대해서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비록 바울이든 누구로 인해서든 ‘하느님의 말씀에 오류(誤謬)와 변개(變改), 오염(汚染)과 변질(變質)이 생기더라도 진리는 바뀔 수 없다’는 하느님의 뜻을 더 널리, 더 확고히, 더 폭넓게 세우시기 위한 하느님의 깊은 뜻‘ 때문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해석입니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성장합니다. 잘못된 상황에 빠져서 이를 통해 경험으로 배우고 난 다음에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지요.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바울이라는 존재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어쩌면 바울이라는 가시를 통해 온 인류가 ’약한 데서 온전’(고린도후서 12장 9절) 해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가 생겨나고 나서 털 없는 원숭이가 나타난 것이 2백만 년 전의 일이고, 50만 년 전부터 불을 쓰게 되었으며, 1만 년 전부터 원시적인 농업을 겨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털 없는 원숭이가 제단을 마련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밀림에서 침팬지 무리가 제단을 쌓아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면 기절초풍할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정말 경이로운 일이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에 털 없는 원숭이들에게 일어난 것이지요. 이 털 없는 원숭이들이 자신들의 이성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숭배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2천 년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다석 쌤의 말씀에 의하면 “몸나에서 얼나로 깨어난 참사람이 나와서 얼나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기도를 올린”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의 역사적인 등장입니다. 또한 이 비슷한 시기에 털 없는 원숭이가 비로소 사람이 되어서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이 있었고요, 이 와중에 빛나는 지성들이 인류에게 제대로 깨달음의 울림을 주었습니다. 바로 공자, 맹자, 석가모니, 마호멧 등등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사람이 늘 직선으로만 곧추세워 걸어갈 수 없듯이, 꼬불꼬불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왔던 길이 긴가민가해서 왔다가 다시 가는 등의 인생길을 가듯이, 진리를 탐구하는 길은 무수한 오류와 변개와 오염과 변질을 거치면서 끝내 ‘빛나는 진리’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제 앞의 선배들이 그렇게 길을 걸어갔고 저도 지금 걷고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인도하신다고 저는 봐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바울은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한 것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가 만든 교리(예수는 교리를 만든 적도 없고 설파한 적도 없어요)는 어디까지나 바울신학입니다. 그것이 깨져나가야 진짜 얼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가 만든 5가지 교리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지요.
다석 류영모 선생뿐만 아니라 예수와 바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계속 고민해 온 것은 ‘예수와 바울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나 요한처럼 3년의 예수 공생애를 통해서 그의 가르침을 받거나 직접 보필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유대 기독교에서 세계 기독교로 급진적 발전을 이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5가지 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고, 또 왜 신앙으로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7장의 저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사례로 들고 싶습니다.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테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그래서 바울로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또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방인 유다 교도들과 토론을 벌였고 날마다 광장에 나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도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은 바울로와 토론을 해보고는 "이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또 바울로가 예수와 그의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들을 선전하는 모양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바울로를 아레오파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수 없겠소? 우리가 듣기에 당신은 생소한 말을 하는데 어디 그 설명을 들어봅시다.”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은 새것이라면 무엇이나 듣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7장 16절~23절)
바울의 사명은 선교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예수의 열두 명의 직제자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은 다마스쿠스(다메섹) 길 위에서 겪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신비한 경험으로 인해 완전히 ‘예수’에게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는 그 예수를 전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칩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해하는 예수는 그냥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혜의 샘물’을 마시고 확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너 이거 마시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듯이) 확 깨달아 알게 될거야!”하고 깨달음의 열매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랍비였고 가말리엘(Gamaliel)의 제자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원이며 율법학자였습니다. 또 희랍문학을 연구한 바리새파 자유당의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랍비 중에서도 최고 명칭인 ‘랍오니’(Rabboni, 요20:16)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말리엘의 제자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행22:3) 바울이 가말리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당연하지요. 더군다나 바울이 태어난 고향 다소는 번성한 역사적 도시였으며 특별히 교육의 도시였습니다. (행9:11, 21:39, 22:3) 또 바울은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유대 법에 따르면 다섯 살이 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 전승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학식과 그의 열정은 자신의 말에 의해 아주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는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은 당시 최강대국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반대자들에 의해서 옥중에 투옥되었을 때, 스스로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혀서 즉시 석방되기도 했습니다. (행 22:24-30) 이러한 바울이 다마스쿠스의 회심이라는 어마어마한 경험을 한 후에 열렬한 기독인이 되어 아테네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첫 마디를 이렇게 꺼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바울의 테크닉으로 봅니다. 아이스브레이크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성향과 그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격분하면서도 그들을 칭찬하면서 접근하는 세련된 언변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헬라인들은 대단히 지적이며 탐구적이고 우주의 원리와 만물의 이치를 찾아 연구하는 지적 선진국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을 연구했고 인간의 속성을 탐구하면서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제단을 세울 정도의 진지성과 정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은 이들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 소위 ‘말짱’들이었던 이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자신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 설득해야 합니다. 이에 최적임자가 바로 바울이지요.
바울의 설교는 매우 세련되고 도시적이었습니다. 투박한 농촌을 배경으로 비유로 표현한 예수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 : ① 도시건축 (고전3:11) ② 군대의 행진 (고후10:3-5, 고전14:8) ③ 노예 시장 광경 (고전6:20, 7:23) ④ 체육장의 형편(고전9:24-25)
예수의 설교 : ① 포도나무의 비유(요15:1-5) ②씨 뿌리는 비유(마13:18-23) ③무화과나무의 비유 (마24:32-33) ④ 목자와 양의 비유(요10:14-1527-28)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 나아가 세계의 시민들이 -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가 이런 고민을 한 것은 이때가 아니고 다마스쿠스의 회심 사건 이후 아라비아와 다마스쿠스에서 삼년 동안 머무르고 고민하면서였다고 예상이 됩니다. 그 이후에야 예수님의 직제자인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거든요. 물론 이 3년의 시기를 저처럼 그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으로 차분하게 ‘교리화’ 했다고 보지 않고 곧장 복음 전도에 뛰어들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의 분량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예수 탄생과 공생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후 재림한다는 개념만큼은 오랜 묵상과 연구를 통해 정식화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어디까지나 제 해석입니다.
어찌 되었든 바울은 가말리엘로부터 전수받은 희랍의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자신의 학식을 총동원해서 ‘세계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전달하기 쉬운 메시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적어도 저는 선교의 사명감을 가진 바울이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립한 이론이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일컬음을 받음 – 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역한글 로마서 1장 17절)
예수를 전도하는데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사람들의 맘에 와 닿으며 또 쉽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이론체계...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바울의 발명품 ‘다섯 가지’ 교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에는 반론도 있습니다.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이신 차정식 목사님 같은 분은 이런 이야기에 반론을 폅니다. 차 목사님은 다석 쌤의 ‘마침보람’ 제자 박영호 선생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바울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책임은 바울보다는 바울의 후대 해석자들, 바울의 계승자들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었어요. 그리스도와 만난 사건이 전혀 새로운 삶의 기점이 되어 율법의 폐쇄적이고 족쇄로부터 과감하게 단절하고, 뛰쳐나가 예수님의 포용적인 정신을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와 옷을 빌려 참신하게 정립한, 예수를 세계화시킨 면에서 공이 있다고 봅니다.(중략)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사도신경이 만들어지고, 예수님의 역사적 생애와 전통이 많이 탈락되고, 기독교가 기득권화되고 제도화되고 좀 더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바울이 원했던 방향과 정반대로 왜곡되고, 어그러진 부분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은 굉장한 판단 착오가 아닌가 싶어요. 바울을 보면 굉장히 죄의식에서 불안한 서구적인 실존의 자아랄까요. 실상은 그게 아닌데 어거스틴의 시각으로 서구적인 자아의 상을 바울에 투과시켜 제조해냈다는 거죠. 바울이 책임질 것이 있다면 그 책임을 지울 수가 있고 그렇지 않고 바울 후계자, 콕 집어 말하자면 20세기, 21세기 한국의 소위 보수 정통을 자부하는 크리스천과 지도자들, 또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 한국에 큰 영향을 준 그런 분들이 성경을 너무 이렇게 좁게, 옹색하게 해석한 결과로 바울에게 책임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공동선 통권 79호】『 예수와 바울- 복음의 원형 찾기 』중에서
차정식 목사님의 말씀대로 백번 양보해서, 바울은 원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후대의 바울 해석자들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부분은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되었다고 용기를 내서 고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면 바울 이후 정립된 기독교 신학 자체는 이미 ‘신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하나의 거대한 ‘기득권’으로 변모했기 때문이죠. ‘신학’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치권력’과 싸워야 하는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제가 언급하지 않더라도 콘티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의 ‘죄악사’가 펼쳐졌는지에 대해서는 영국의 역사학자 폴 죤스의 「기독교 죄악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일부 신학자는 이를 극적으로 표현해서 “사탄은 마침내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선언이 있을 정도입니다.
너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이만, 하지만 연결되는, 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산다(6)’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이만 총총.
14이영재 and 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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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Min Jung
요한 형제님의 내공은 왠만한 목사나 먹사들을 벌벌 떨게 만들 지경입니다!!
(나도 지금 떨고 있니??)
북한학말고 신학을 전공하시라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은 지난 글들에서 이 때까지 바울이 죽어야 예수가 살아나신다는 대명제의 한문장으로 된 Thesis Statement 를 자꾸 아끼셔서 미괄식으로 맨 나중에 공개하려 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자꾸 궁금해서 총총 사라지시는 요한 형제님의 글을 읽게 만드시는 군요...!
미쿡에 오래 살아와서 서구식 사고에 익숙한 전 성급하게 자꾸 Thesis Statement 를 찾습니다. 제발 저희들에게 먼저 대명제를 선언해 주시고 증명해 주시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ㅎㅎ
최요한 replied
·최요한
Hum Kim
한 해 동안 책 한권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는 저는 '기독교 죄악사' 만은 꼭 읽고 싶습니다. 고통스럽지만요. 댓글 쓰고 바로 책을 구입할 수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요한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페북에서 만난 여러분들이 성서로 인해 고통 을 당하심을 알고 많이 놀라고 귀를 열어 경청했지만, 저는 입이 붙어 버린 경우가 되었습니다. 무식해서 행복한 경우더군요. 성서 혹은 성경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무관하고, 신약에서 바울을 쏙 빼 버린다면? 상상만 해도 절래절래고, 바울이 주님처럼 친환경생태삶적 설교를 했다면 매력 없지 싶고요.
강,바다,산,나무,바위,사람등 삼라만상이 속이 있고 겉이 있습니다. 바울이 없다면 예수님이 성부의 아들 성자인가? 하고 눈을 꿈벅꿈벅 하겠지만, 바울이 합쳐지니 성부의 아들 성자로 다가 옵니다.
저는 형제님께 딴지 거는게 절대 아니고 그런 주제도 못되지만 많은 분들이 신학을 바로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거시는 것 같아서 존경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백퍼 완성된 신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해도 교회가 바로 선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전능하신 아버지로 부터 창조의 능력을 일부 받아 왔기에 어떤 경우라도 내 입맛대로 왜곡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님의 글 읽고, 소감이 아닌 그냥 수다를 떨었습니다. 언짢으셔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흥미진진한 다음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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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기독교 죄악사
책이 상하로 있는데 저자가 조찬선이네요.
최요한
Hum Kim 맞습니다. <기독교 죄악사> 저자가 조찬선 목사님입니다. 이 책을 쓰셨을 때 연세가 80이 넘으셨던 분입니다.
바울에 대해서는 그냥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고요, 저도 제 믿음의 분량대로 쓰는 거예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무슨 신학을 새로 세우는 것도 아니고, 혼자 공부한 대로 정리하는 겁니다. 그냥 제 생각이 맞으니 꼭 따라오시라! 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렇게 봅니다~ 하고 이야기 하는 건데요.... 불편하시면 스킵하셔도 됩니다. 정영민 목사님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글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더 명료해지는 상황이라서요^^
그리고 기분 나쁘거나 속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순복음교단의 조용기 아래쯤에 있는 유럽 담당 목사로 보이는 사람이 저한테 이메일로 협박하고... 막 그랬거든요... 웃겨서 ㅎㅎㅎㅎ 네 생각은 그러니? 내 생각은 이래! 이러면 되는 걸 가지고..... 격려 감사합니다.^^
Hum Kim
최요한 감사합니다. 조찬선 목사님의 책을 구입하겠습니다.
Hae-Yong Park
잘 읽었습니다. 다음이 기대됩니다
오영숙
저도 사탄이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그분의 견해에 오히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지역의 성자를 숭배하는 이론으로 팽창적 교리를 설파하고 세계를 지배함으로 기독교의 죄악사가 진행되어 온 것은 사탄이든 천사든 상관없고 인간의 욕망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킨 덕분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신의 관점을 좁디좁은 제가 상상하는 무례를 용서 바랍니다.) "이놈의 강도들이 내 이름으로 전쟁과 살상으로 지구를 초토화 시켰겠다?" 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무력한 신은 이미 신이 아니겠죠)...그냥 주저리주저리 제 생각의 편린들을 읊어봅니다.
단테가 지옥 밑바닥에서 본 기독교 업자들이 다른 죄인들보다 더 나쁜것은 모든 사악한 짓들을 "신을 독차지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