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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4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



(9)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는 논의 시리즈 준비로 먼저... - Chang-Seong Hong










Chang-Seong Hong
18 January at 03:56 ·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는 논의 시리즈 준비로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을 내 방식으로 소개해 보았다.

밑의 사진 하나는 경주 석굴암 부처님이신데, 몇 해 전 다시 경주에서 뵌 모습으로부터 천여 년 전에도 불상에 한류가 존재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인들의 예술적 '끼'는 고대로부터 역시 대단했다. 그 옆 사진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대왕이 정복한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그리이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불상 문화가 고대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는데, 한 눈에 보아도 석굴암의 조각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놀랍고 기쁜 인연이다.

https://www.dropbox.com/…/05%20%EC%83%81%EA%B3%BC%20%EC%A4%…

05 (2월 17일 원고 마감)
상相과 중도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광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념과 미신으로 우리에게 상相을 씌워 이용하려는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는 정치 종교적 상에 집착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속하며 극단으로 치달아 저지른 재앙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런데,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워야 할 불자들이라면 이런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극단을 피하는 지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중도中道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으로 표현되어 왔다. 붓다의 중도와 비유되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은 그의 행복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행복을 위해서는 중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통찰했다. 나는 우리가 상을 여의고 중도의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이 고대 희랍 철학자의 견해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정치 종교와 같이 큰 주제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생각거리로부터 시작하는 편이 논의의 초점을 흐리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사례들을 들어 그의 중도론을 소개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스스로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서양에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온 견해다. 서양인들은 행복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며, 행복을 수단으로 추구할 더 높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행복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다는 행복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일부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을 제외하고는, 돈 많이 벌고 잘생기고 인기 얻어서 권력을 누리면 행복하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철학자의 통찰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상식적이고 평범한 진리다. 자신의 가능성을 계발하여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반면에, 예술가의 자질을 타고나 창조적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부모의 강요로 돈만 버는 비즈니스밖에 할 수 없다면 그가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미국에서 철학과 대학원에 새로 입학한 40대와 50대 전직 의사들을 여럿 보았다. 젊은 날부터 동경해 온 철학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미국에서 최고 수입을 누리는 직업을 그만두고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원생 생활을 무척 행복해 했다.
그러면 잠재력을 실현하며 행복하게 사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德(virtue)을 가지고 덕스럽게 행위하며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서양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덕 있는 사람이 결국은 더 행복하게 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 또한 이 말이 최소한 확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덕목(moral virtue)은 아니었다.
희랍어로 ‘덕’에 해당하는 말(arete)은 원래 ‘탁월함(excellence)’을 의미했다.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가 (아폴론신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원거리에서 활을 쏘아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뒤꿈치를 맞힌 놀라운 궁술 같은 것이 희랍인들이 생각하던 덕이었다. 탁월한 능력, 탁월한 힘 같은 것이었다. 한자어 ‘德’도 원래 기능 또는 능력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고, 영어에서도 현재 ‘in virtue of’ 같은 표현에 그런 의미가 남아있다. 도덕적 덕만 덕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잠재력을 실현시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면서 얻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탁월함’이라는 의미의 덕은 어떻게 얻고 또 따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 바로 그 유명한 중도론中道論이다. 예를 들어 ‘용기’의 덕은 만용과 비겁이라는 두 악덕의 중간에 있다. 용기를 결여하면 비겁하고 이것이 지나치면 만용인데, 덕으로서의 용기는 모자라거나 지나친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에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통찰이다. 손님대접에 ‘관대하다(generous)’는 덕은 접대를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고 그 중도에서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행하는 덕이다. 이런 중도가 ‘탁월하다’는 의미에서의 덕이다. 동서양에 모두 중도의 가르침이 전해오는데, 그 이유는 분명 이 가르침에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지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도의 길이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중도의 덕을 곧바로 얻게 될까? 그렇지 않다. 덕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덕스러운 행위를 반복해서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져야 형성된다. 덕은 이해가 아니라 체득된 성향(disposition)이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해서 여름이 오는 것은 아니’듯이, 누가 한두 번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그가 덕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붓다의 중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에 공통된 지혜가 담겨있다고 많이 논의되어 왔다. 우리는 왕자시절의 안락했던 생활이 싯다르타 태자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들어왔다. 출가 후 6년 고행苦行도 그를 깨닫게 하지 못했다. 오직 이 두 극단을 피한 중도의 수행으로 그는 성도할 수 있었다. 악기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기 쉽고, 그 반대로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줄이 적당한 정도의 장력을 유지해야 제대로 된 악기 구실을 할 수 있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적절히, 중도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붓다의 중도론은 서양 중도론의 영역을 초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삶과 관련된 지혜에 국한되어 있는데 비해, 붓다는 만물이 존재하는 실제의 모습(實相) 또한 중도에 있다고 가르친다. 붓다는 사물에 영원히 불변불멸하는 아뜨만(또는 自性)이 있다고 보는 상주론常住論을 배격하지만 동시에 사물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 또한 거부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멸되어 있지도 않아서 그 양극단을 피해 묘妙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중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보다 더 포괄적인 가르침이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77조현, 孫永坤 and 7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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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감사합니다.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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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d

최선규 중도가 세상을 살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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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d

조기현 철학적질의에앞서,교수님본인이지혜라는덕을갖추고계시다고생각십니까? 또한제가생각키로부처의중도는환상과같은현실에서나라하고하는몸뚱아리를지탱하기위한것이지즉환상속에서진제를끌고가기위한것이라고생각합니다 자세한비교는철학자의몫일것같고요토론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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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d


Chang-Seong Hong 스스로 훌륭한 연주자여야 음악비평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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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d

조기현 홍창성 우문현답입십니다 다만 악기와 곡조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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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d

2020/01/22

박성용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9) 박성용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박성용 updated his status.
22 January 2017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출생 시에 주신 생명력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하도록 안내하는 그런 영성이다.

- 파커 파머, <일과 영성>중에서 -

내가 시민사회에서 평화활동가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소명(일,직업)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가장 내적으로 방해가 된 것은 삶의 의미에서 파커 파머와 똑같이 경험한 활동가와 관상가의 양극에서 오는 분열로 오는 고통이었다.

내가 30대말, 40대 시절에 내 삶에 중요하고 삶의 귀감으로 바라보았던 인물들이 토마스 머튼, 틱낫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소화 데레사)이나 노자 등이었고, 사실상 내 영혼의 성향이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시민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2년부터였으니까 50대초에 들어오면서 비폭력과 평화훈련영역에 대한 익숙함이 몸에 배이기 시작할 20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그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내가 잊거나 놓치고 있는 삶의 본질적인 측면으로서 관상에로의 이끌림이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실존적인 회의감과 불안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삶의 모호함과 거칠음, 구조적 폭력과 영혼의 폭력에 대한 밑이 보이지 않는 복잡성과 거대함,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도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일상의 파도를 그대로 몸으로 맞는 경우에는, 하는 일이 낯설어지고 도망치고 싶어지며 회의감이 증폭되어 내 내면에서 속삭이면서 ‘이 영역에서 철수하라’는 강한 목소리를 내부로부터 직면하곤 하였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내가 하는 활동의 영역과 내 내면의 영역 중간에 담을 쌓고는 바깥의 영역이 얼마나 거칠든 간에 내면의 영역에 정원을 가꾸는 분리의 원칙을 통해 최소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성소를 가꾸는 데 노력을 다한 것이었다.

시민사회활동가들 중 적잖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인들이고 실상 이들도 나와 비슷하게 자신의 일터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방전이 되는 지침과 피로감이 올라오면 거기서 물러서서 다른 공간으로 건너가서, 예를 들면, 여행, 자연에서의 치유,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어 자신의 일터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을 하곤 한다. 즉 일상에서는 일하는 장소와 나의 사적인 휴식장소가, 더 나아가 활동에 있어서는 직장/일터 그리고 교회나 절/명상의 집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어서 후자가 전자의 치유와 지원을 하고 궁극적인 장소 그리고 전자는 수단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내게 한 가지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내면의 의문이 있었다. ‘초목이 햇빛으로 꽃과 열매를 맺지만, 또한 어둠으로 성장을 하는 것이라면, 삶의 어둠과 고통 또한 거룩함으로 가는 통로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시민사회 영역에 깊이 뿌리박고 고통어린 현장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50대 중반부터 나의 관심의 영역은 어떻게 ‘일터가 성소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질문은 미묘하지만 확연히 다른 더 철저한 질문으로 나가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라는 관습적인 이해에서 보는 것처럼 부활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십자가의 필요성이라는 수단적/기능적 역할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는 더 힘과 역할을 못한다는 목적적 경험, 곧 ‘십자가 안의 부활’이라는 고통과 지침 그 안에 ‘이미 있는 그 뭔가의 생명있는 것’에 대한 돌파의 경험에 대한 추구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매우 오랜 기간동안 관상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최근에 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뜻밖에 알게 된 것은 나는 연구자, 훈련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조직가이자 활동가라는 내 능력에 대한 발견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현장에서 싸우거나 그 현장을 지켜내는 무명의 활동가들에 대해 내 눈길이 가고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나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저항과 대안에로의 활동이 지침과 소진이 아니라 거룩함에로 이르는 다른 ‘좁은 문’임을 어떻게 자각하고 일어서서 나가도록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지속적으로 듣는다.

나는 수많은 모임과 회의 속에서 대화, 문제해결, 갈등전환, 공동체형성, 미래기획 등과 관련된 활동들 한 가운데서 다양한 서클진행을 통해 무엇이 결핍하고 필요한지 보다는 이미 자신과 우리 안에 ‘충분함’이 존재하고, 접근할 수 있는 자원(resources)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도전적인 이슈나 문제가 ‘거부하거나 저항할’ 문제(a problem)이 아니라 그동안 보지 못하고 놓친 의미 영역의 출현으로서의 새로운 탐구의 기회(an opportunity)로 보는 시야를 얻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서클의 일반 작동원리나 조직학습 이론가인 오토 샤머의 ‘U이론’처럼 다가오는 도전, 위기, 과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 환대와 연결로 맞이하고, 대화와 참여로 함께 작업하며, 공동지성과 원하는 미래에 대한 초점어린 주목과 마음의 일치를 통한 선택을 하게 되면, 서클이 말하듯이 ‘거칠고 힘든 것으로 시작하여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나온다’는 이치가 작동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기자가 말했듯이 ‘생명을 주되 더욱 풍성하게’(요10:10)하는 활동적인 영성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주는 데 있어 파괴나 죽임이 아니라 회복이나 생명을 주는 데 주목하고(being attentive) 또한 결과가 풍성함으로 나타는 기여(giving)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하면 활동이 영성 그 자체가 되고, 일터가 그대로 성소가 된다는 깨달음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스트레스의 핵심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바로 ‘자극-반응’의 사이클에서 <자극>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반응>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일과 내면의 심리적 상태가 달라져 경험된다. 즉, 자극을 두려움의 한 변형으로 보면 그것은 일이 ‘부담’과 ‘짐’으로 보이며, 반응이 옳고 그름의 무자각적인 자동 반응에서 나오면 그것은 적절한 선택이 아닌 대응(reaction)의 상태로 격발되기 때문에 그 결과는 풍성함이 아닌 분리, 고통, 좌절의 상태로 추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안에 설정된 ‘자극-반응’의 무의식적인 사이클을 ‘자극’과 ‘반응’사이에 틈을 만들어, 멈춤을 통해 여기에 다른 형태의 ‘알아차림-선택’의 의식적 사이클을 리셋(reset)하는 것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사실 이 문제는 이미 로고테라피의 빅터 플랭클이 제시한 화두이기도 하다).

‘알아차림-선택’의 사이클을 리셋한다는 것은 바로 서클의 작동원리가 보여주듯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저항보다는 환대와 연결로 맞이하고(inputing),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programming), 결과가 풍성함과 전체성이 보여지는 방식으로 나아가기(outputing)를 의식적으로 자기 내면과 타자/그룹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시킬 때 가능해진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1:1 개인상담, 학교폭력 등의 갈등사례를 다루기, 단체 내에서의 긴장어린 문제의 해결 등과 관련된 일련의 활동작업을 통해 그리고 내 자신이 급격히 스트레스가 없어진 원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러한 원리가 실제적이고 효과가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파커 파머가 말했듯이 활동적인 삶은 축복이자 저주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다. 축복은 일을 통해 창조와 보살핌을 통해 생명과 풍성함의 기회를 맛보는 즐거움과 생생함의 누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나의 내면의 지옥, 폭력, 무미건조함, 지침을 타자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이에게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 세대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스마트폰의 초연결의 시대에 살면서 그 축복과 저주의 전염력은 실 시각으로 빠르게 전파된다. 나의 활동이 죽음과 정지 그리고 낮은 에너지라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작동시키지 않고 열린 시스템으로써 계속적인 생생함의 활력과 신성한 에너지를 발현시키려면 무엇이 가능해져야 하는가? 나는 파머의 짧은 다음 글에서 통찰을 얻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출생 시에 주신 생명력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하도록 안내하는 그런 영성이다.

첫째 선택, 내적 자아와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을 택하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접근 방식이다. 외부의 끊임없는 폭력, 갈등, 혼란의 침입의 파도 속에서 내가 나의 안전(security)를 확보하는 성채(castle)로서의 안전함은 불가능하다. 내 안전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를 확대하는 성채개념이 아니라 폭력, 갈등, 혼란의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윈드서핑(windsurfing)의 방식으로 우리는 안전이 아니라 생생함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생생함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윈드서핑은 나의 정체성이라는 서핑보드에 대한 인식과 다가오는 사물, 사건의 실재에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 갈등과 혼란의 침입의 파도를 타면서 그것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방식으로 ‘일(work)’을 해 나간다. 즉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파도의 거칠음과 위협이 아니라 그 파도에 직면하고 환대함속에서 주의를 자기내면의 영혼의 진정한 목소리와 상황의 요청에 연결하는 –공명시키는-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뫼비우스고리 메타포가 말하는 ‘내면의 빛’이 세상에 비추고, ‘세상의 빛’이 내면에 비추는 상호 비추는(co-reflecting) 방식이다. 자극은 입자(particle)이 아니라, 전체 에너지의 일부 패턴화된 모습이다. 따라서 그 자극을 에너지의 특정화된 패턴으로 이해된다면 다시 그것을 에너지로 풀어 파장(wave)으로 흐르게 한다.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파도라는 실상과 공명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생생함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선택, 본래 생명력을 구현시키는 방식이다.

나의 활동하기는 나의 본성으로서 존재(esse)와 관계속에서 역할(roles 혹은 masks)이 서로 엮어 짬으로 구성된다. 나의 역할은 삶의 무대라는 곳에서의 연기자이며 연기자는 경험자(esse)와 구별된다. 연기자(role-takers; scrip-players)는 다양한 역할을 펼쳐낸다. 시민사회 활동가, 아빠, 남편, 단체의 대표, 목사, 평화교육자, 다양한 서클모델 진행자, 기획자, 조직가, 한국사람...등등의 연기자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구체성 곧 특정한 상황과 시간 및 특정한 관계의 매듭속에서 일어나는 적절한 행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정한 행위가 그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이해될 때 생명을 소진하며 시비/호불호의 기준에 의해 성취와 상실, 얻음과 잃음, 희망과 낙담이 교차되며 에너지를 소진하게 된다.

문제는 뇌과학과 심신면역의학에서 보듯이 ‘정당한’ 감정이나 실재가 아닌 상상력에 의한 것도 아드레날인과 코티솔이라는 스트레스호르몬을 분출한다는 점이다. 호르몬은 실재와 ‘허상’을 분간하지 않고 똑같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정당성은 이해가 가지만 몸과 정서의 손상과 탈진은 막아내지를 못한다. 무대의 연기자를 그대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무대에 내려와 관객으로 자기 연기를 보고 있는 ‘경험자’로 있을 때, 연기자의 얻음과 손실, 기쁨과 슬픔, 필요와 얽힌 관계라는 구체적인 연기들에 목도하는 본래의 자아는 그러한 성취나 손상없이 본래 생명력대로 있는다. 이것은 관찰을 하면서 연기자와 다른 경험자로서 전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변하지 않는 본래의 본성이 융통성있게 현존해 있는다. 여기서 계속적으로 샘처럼 발현하는 창조성과 변화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세 번째 선택은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활동성이 생명을 주되 더욱 풍성케 하는 방식으로 주고받는 행위가 되려면 먼저는 자기안의 자원으로써 내적인 자기 정체성과 성실성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이 바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에 대한 강렬한 열망/비전이다. 이것이 세상의 거칠은 파도에 주목하여 ‘두려움’을 생성하지 않고 그 거친 파도위를 걷는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길을 연다. 거칠은 파도에 있을 때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기’를 절실히 하는 방식이다.

신뢰의 서클 진행자모임에서 들은 한 ‘이야기’가 있다. 원주민이 바다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만일 폭풍우를 만나 주변이 캄캄하여 길이 안보일 때, ‘길잡이(wayfinder)’역할을 하는 자가 그 폭풍우속에서 선수에 앉아 침묵하며 온정신을 쏟아 도착할 목적지를 상상하며 그린다. 눈에 실제로 보는 것처럼 간절히 도착할 곳을 구체적으로 그리며 앉아있으면 홀연 듯 길이 어디인지를 확연히 심증에 잡히게 된다. 그건 말로 설명하거나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명백히 알게 되는 그 무엇과 같다. 그럴 때, 그 길잡이는 동료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그들은 목적지에 신비스럽게도 도착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깊은 영감을 받는 것은 바로 풍랑의 거셈과 그 강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목적지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길을 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야 할 목적지보다는 무엇이 안 되고 무엇이 장애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즉, 주로 우리는 안 되고 못하고 힘든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충족예언의 법칙이 작동된다. 비폭력 평화에 대한 활동은 이미 수많은 폭력의 현상과 국가의 제도적 지원, 사회문화적인 경향성으로 인해 그 변화의 가능성은 ‘안 되고 못하고 힘든 것’ 투성이요, 국가폭력의 경우는 대부분 이겨본 적이 없는 이미 진 싸움의 연속이었다. 사람, 재정, 그리고 시스템과 문화가 뒷받침은커녕, 억압과 지배의 힘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 두렵게 느껴야할 유일한 장애는 무엇이 안 되고 할 수 없는 이유인가가 아니라 가고 싶어하는 목적지인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신대륙에 대한 꿈꾸지 못함인 것이다.

활동적인 삶은 그 자체로는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고, 작업하고, 땀흘리고, 감정을 표현하고, 기획하고, 사고 팔며, 모이고 헤어지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처럼 별로 거룩함을 느낄 수 없는 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공감하고, 연결하며, 함께 마음의 일치를 통해 창조하고, 앞으로 나가는 그 속에서 내적 자아의 기쁨과 세상의 실상과 굶주림이 서로 공명하거나, 수많은 역할의 연기속에서 경험자 자신의 본원적 생명력에 관찰로 주목하거나 또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돌봄의 방식을 길잡이 삼아 나아갈 때는 활동 그 자체는 ‘익명의’ 거룩한 길이 된다. 그 속에서 ‘깊이’와 타자에로의 ‘초월’이 일어나거나, 전체성(wholeness)에 대한 민감한 감각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엔트로피의 법칙이 아니라 내면에서 창조적 에너지의 파동이 느껴지게 된다.

(2017.1.22.)

2020/01/21

휴심정 - 원불교의 넓은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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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넓은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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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201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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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철 원불교 교정원장












‘개교 100년’을 넘은 원불교가 서울 동작구 흑석동 한강가에 제2의 개교의 도약대가 될 서울센터를 마련했다. 교조 박중빈(1891~1943)의 호를 딴 ‘원불교소태산기념관’이다. 오는 21일 개관을 앞두고 원불교 행정 수반인 오도철 교정원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연면적 2만6300평(7969평)에 지하4층 지상10층 규모의 현대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크게는 10층 규모의 업무동과 2층 규모의 종교동으로 나뉜다. 소태산기념관엔 전북 익산 총부에 있던 교정원에서 사실상 절반가량인 국제부, 문화사회부, 청소년국, 사이버교화팀이 입주했다. 드디어 원불교가 익산시대에서 서울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오도철 교정원장도 월화수요일은 익산에서, 목금토요일은 서울에서 근무해 원불교 세계화시대를 이끈다.


 이 건물의 강연장과 공연장, 선(禪)실, 첨단 영상을 갖춘 명상실 등은 ’원불교의 미래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하드웨어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오도철 교정원장은 “원불교 교도가 아니라도 명상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건물을 개방하는 시간엔 언제든지 와서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겠다”고 한다. 특히 이 금싸라기땅 한강가에 2층으로만 지어 옥상 공연장을 인근 주민들과 서울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니, 역사보다 넓은 품을 느낄 수 있다. 옥상은 원불교 진리의 상징인 일원상을 형상화했다. 옥상 둘레로 원으로 벽을 쳐놓으니 올림픽대로의 소음도 들리지않아 공연장으로서도 그만이다. 소태산기념관의 개념은 ‘일원을 담아 은혜를 짓다’는 것이다. 진리 탐구로 깨달은 영성에 머물지 않고, 이를 세상에 돌려주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인근 흑석동주민들이 한강공원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없어서 소태산기념관 부지를 통로로 내놓았다”고 한다.





























 원불교는 탈종교화시대, 교도들의 고령화시대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자력갱생을 위해 애쓰고 있다. 소태산기념관 10층 가운데 한층만을 교단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대를 내놓는 것도 최대한 신도들에게 손을 덜 내밀고 교단을 운영하기 위함이다. 그런 내핍 속에서도 교단 시설을 과감하게 주위에 내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緣起法), 즉 인과법(因果法)의 진리를 깨달으셨고,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같은 진리를 깨달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네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다’는 은혜를 더욱 강조하셨다”며 이렇게 자신의 것을 내놓는 이유를 설명했다.





 원불교는 소태산기념관 개관일을 1년 전에 정했는데 우연히 세계평화의날이 됐다고 한다. 그는 최근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싼 계파간, 계급간, 세대간 갈등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집무실의 화초를 예로 들어 말했다.
 “수국이 어떤 것은 파랗고, 어떤 것은 빨갛다. 어떤 것은 하얗게 펴서 파란색이 됐다가 보랏빛으로 변하기도 한다. 같은 수국이지만 온갖 색이 있다.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파란색이 좋다고 모든 걸 파란색으로만 만들자고 하고, 혹은 빨간색이 좋다고 빨갛게만 만들자고 하면 다른 색을 좋아하는 이들은 불편해 한다. 그래서 편이 갈리고 갈등이 생기고, 불편함이 폭력이 되면 평화가 무너진다. 파란색은 파란색대로, 빨간색은 빨간색대로 보라색은 보라색대로 아름답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지않으면 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




» 명상실에서. 왼쪽부터 김제원 교정원부원장, 오도철교정원장, 이공현 문화사회부장







 그는 또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으로 ‘자기 비움’을 강조했다. 큰그림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자기를 비우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고, 그런 지도자들이 나와야 사회와 나라가 제대로 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불교는 철저한 진리추구의 종교다. 크리스찬들이 크리스마스를,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날’을 최대축일로 삼는 것과 달리 교조의 탄생일 아닌 깨달은 ‘대각개교절’을 가장 중시하는데서도 알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26세에 깨달음을 얻은 청년 소태산대종사님이 처음 한 일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배고픔에 시달리는 마을사람을 위해 저축조합을 결성해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를 내세울만큼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도록 건강한 수행법과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원불교가 최근 독신을 의무화했던 여자교무들도 남자교무들처럼 6년간의 교무교육과정을 마친 뒤 정녀(독신여성교무)와 결혼 여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게 한 것과 관련해 “‘남녀 권리는 동일하다’는 대종사님의 인권평등의 정신을 이제는 현실화할 시점이 되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출가자 감소와 관련해서도 “68세인 교무 정년을 6년씩 74세까지로 늘리는 방안을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소태산기념관에서는 오는 20일 오후 7시30분 봉불음악회가, 20일 오후4시부터 30일까지는 원불교문화예술축제가 각각 펼쳐진다. 법해 김범수 화백의 원불교 선묵화 ‘깨달음의 얼굴’과 법인성사 100돌 ‘하늘을 감동시킨 서원과 화합’ 특별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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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12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유상용
승인 201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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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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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가게에서

2020/01/17

알라딘: [전자책] 붓다를 죽인 부처



알라딘: [전자책] 붓다를 죽인 부처




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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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88쪽
책소개
한국인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제인의 시각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한국인’ 박노자.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다양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그동안 우리가 물들어 있던 현실이나 역사관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동양사상, 그중에도 ‘불교’가 있다.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로 마르크스가 있다면 인류의 궁극적 해방을 꿈꾸던 개혁가로는 붓다를 꼽는 그는,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개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목차


추천사: 분열의 종교가 아닌 화합의 종교로
서언: ‘해방 불교’를 위하여!

Ⅰ부. 붓다와 나의 시간

1. 욕망의 힘과 지혜의 힘
대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자
2. 여자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대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자
3. ‘기도발’은 약인가, 독인가
대담: 기도는 과연 필요한가
4. 계율을 지키는 일, 혹은 ‘나’를 지키는 일
대담: 병역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부. 붓다와 국가의 시간

5. 불상은 과연 신상(神像)이어야 하는가
대담: 선불교의 우상파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6. 모자라면서도 탁월한 초기 불교의 민주주의
대담: 욕구를 정당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은 반불교적
7.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
대담: 호국불교를 말한다
8.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정말 문제없는가
대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9. 한국 불교, 전통이 아니라 시대를 만나라

접기


책속에서



보시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분배가 잘되는 사회일수록 안정적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시’라 하면 흔히 사찰에 헌금, 즉 불전(佛錢)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초기 불교 경전에서 보시(산스크리트어: dana)는 아주 넓게 ‘나누는 일’, ‘베푸는 일’을 의미한다. 수행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는 것도 보시지만 하인이나 고용인, 손님, 친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재산 가진 사람의 도리다. (p. 35) 접기
붓다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주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계시’의 성격도 갖지 않는다. 붓다는 누구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설함으로써 그 진리의 자율적인 이해를 유도할 뿐 자신에게 어떤 초자연적,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붓다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구제할 수 있게끔 신도에게 업과 연기의 실상을 파헤칠 만한 지혜를 얻도록 도와줄 뿐이다. (p. 187) 접기
일본의 보수적인 주류 사회에서는 ‘갈등’ 자체는 무조건 부정적인 것인 반면 ‘총화·단결·단합’은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거의 ‘국민 도덕’처럼 받들었던 이런 의식들은 바로 현실적인 세계(事)와 이상의 세계(理) 사이에 막힘이 없다(無碍)고 주장했던 화엄(華嚴)류의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 사상’에 의해서 너무나 쉽게 합리화된다. (p. 252~253) 접기
붓다 자신과 일부의 직계 제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부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인(俗人)들이 불평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염원했다. 초기 불교를 보면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하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빠르게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가 발 빠르게 ‘국가 종교화’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p. 279) 접기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피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 기구들은 ‘나쁜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아무런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 (p. 281)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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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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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와 불교사 등을 연구했고 지금은 근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에 몰입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1·2) 『우승열패의 신화』 『주식회사 대한민국』 등이 있다.


최근작 : <전환의 시대>,<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총 87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박노자가 말하는 시대의 개혁론이자
인류의 궁극적 해방 철학으로서의 불교”

≫ 한국인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제인의 시각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한국인’ 박노자.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다양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그동안 우리가 물들어 있던 현실이나 역사관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동양사상, 그중에도 ‘불교’가 있다.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로 마르크스가 있다면 인류의 궁극적 해방을 꿈꾸던 개혁가로는 붓다를 꼽는 그는,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개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는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배반했는가
저자 박노자는 붓다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를 받은 불자다. 그를 매료시켰던 불교의 상생 논리와 비폭력 주의 등은 그가 평소 추구하는 이상과 철학적 맥락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불교를 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며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조계종은 물론 현존하는 어떠한 종단에도 가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대부분의 불교 종단 내지 ‘공식적’ 단체들은 국가와 자본에 종속돼 있거나,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다 해도 국가와 자본과의 ‘편안한’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불교의 정신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붓다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불교 종단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불교 종단은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일까?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는 석가족의 왕자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의 다른 명칭이다. 붓다라는 말이 중국에 와서 음역되는 과정에서 한자 ‘불(佛)’이 되었고, 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에 와서는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단어가 뜻하는 바는 다르지 않지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의 초기 가르침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첫 시작부터 일정부분 왜곡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전개된 모습도 수많은 모순을 낳게 되었다.
그 예로 저자는 ‘수능 기도’와 같은 현세 기복적 신앙 행위가 가지는 문제점을 든다. 나와 남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불교의 논리에 의하면 경쟁 사회에서 ‘남’을 누르고 ‘나’만 성공하기 위한 어떠한 기도나 기복 행위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입시제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정진대회라도 열어 모든 불자의 지혜와 신앙심을 모아 학력에 매달리지 않는 나라 만들기에 힘을 쏟아부어도 모자른 실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찰의 돈벌이로 ‘대입 기도’가 최고로 꼽히고, 몇몇 스님들의 고급 승용차 애용이나 고급 호텔 식당 출입 등이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이렇듯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되어버린 우리의 불교문화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가 지적하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되어왔던 불교의 모순은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 부처님의 영험을 바라는 ‘뿌리 깊은’ 기복신앙, 대형 불사 추진 등 우리는 그동안 불교의 철학과 사상을 직접 배우기보다는 산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꼽는 원효 대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대승 불교의 너무나 대승적으로 왜곡된 현세 구복적 불교의 논리가 어떻게 현실을 합리화하고 지배자의 폭력과 착취구조를 정당화하는 단서를 제공했는지 파고든다. 이는 어릴적부터 이론의 여지 없이 ‘위대한 고승’으로 주입되어온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쉽게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문제이기도 하며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주체 혹은 권력자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세뇌’시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국불교’다.

‘호국불교’에서 ‘해방 불교’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던 여승의 일화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불교계가 국가와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일제 강점기 천황을 위한 정복 전쟁이 불교적 실천이라는 논리 등 현재와 가까운 시점부터 호국불교의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한 원광 법사의 ‘세속 오계’ 등에 이르기까지 호국불교라는 ‘형용 모순’이 생기게 된 근원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간다. 호국불교라는 말은 ‘살인을 하는 부처’라는 말과 같이 모순적인 단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을 계율의 첫째로 삼는 종교인 불교에서 오늘날의 왜곡되고 모순된 ‘부처’는 인류의 행복과 편안함을 추구한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을 ‘죽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국가라는 폭력 기구의 살인 교육과 불교계의 묵인 내지는 세속화로 말미암아 너무도 자연스러운 단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호국불교는 하나의 대표 사례에 불과할 뿐 불교계와 국가가 만들어온 ‘형용 모순’은 그 밖에도 많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나 2006년의 황우석 사태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 등은 모순 그 자체다. 불교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런 세속적인 문제를 대처하기 위한 논리가 결국 속류 ‘애국주의’를 동원하는 것이었으니 저자는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불교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한탄한다. 이는 또한 불교계의 민주적이지 못한 권위적인 서열구조와도 연관된다.
본래 의미의 불교가 이처럼 왜곡된 것은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한 결과다. 과연 그 타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저자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불교의 여명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처한 현실부터 오늘날 국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현실까지 살펴보며 그 왜곡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과연 붓다가 원래 말하려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현실적인 권력자들과 가르침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이 개혁적이고 인류 해방적인 개혁가의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 왜곡해 왔는지 살펴본다.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
이러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기초한 지적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왔기에 우리가 놓쳐왔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불교계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하의 과도한 경쟁 시스템 등이 낳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교계에 만연한 모순은 결국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들이 투영된 집합체일 뿐 실제로는 그 욕망의 진원지인 ‘우리 자신’의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가르침으로 다시 탄생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을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라고 밝혔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지만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이와는 달랐다.

우선 붓다는 여성 해방을 주장한 양성 평등론자이자 당시의 뿌리 깊은 신분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몸소 평등원칙을 실현한 종교 개혁가였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생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구별이 없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뿐이다”와 같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주장으로 붓다는 여성 차별을 위시한 인간 세계에 만연한 모든 차별 관행에 철퇴를 가한다. 또 인도 사성(四姓) 계급 중 최하층인 수드라(Sudra, 노예나 천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던 우바리 존자를 수행자의 일원으로 삼는 등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파격을 보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종래의 인도 종교가 극단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고 중도를 설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는 사상관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마르크스 가르침이 모든 인간들을 자본주의적 소외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인류의 궁극적인 해방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나 기부(보시) 문화 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초기 불교란 일체의 인간들을 해탈을 이룰 수 있고 해방의 가능성이 잠재된 존재라 보는 고차원적인 인간 해방의 철학이며 또 나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해탈을 추구하는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각 장의 끝 부분에서는 ‘사회과학자 박노자’와 ‘도법 스님’이 만나 나눈 대담이 이어진다. 현실 속의 문제에 대해 저자와 스님이 진지하게 생각을 나눈다. 과연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불교의 관점은 무엇인지, 또 오늘날 불교가 사회과학과의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는 문제나 ‘간화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영험 있는 ‘기도’의 문제나 병역거부, 자본주의적 삶의 문제, 명분 있는 분노와 폭력의 정당성과 같은 사회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결국 사회과학의 이론과 불교의 논리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불교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도 하지만 사회과학 역시 불교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불교의 ‘아힘사(비폭력)’은 오늘날 사회과학이 수용해야 할 대원칙 중 하나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 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일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법 스님 역시 국가, 민족, 정의, 종교, 이념 등 어떠한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지라도 불교 철학으로 보면 어떤 명분을 붙여도 분노는 분노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사회과학이 불교로부터 수용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사실 종교라고 하면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낳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인류가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교를 비롯한 지금의 종교는 오히려 사회의 짐만 될 뿐 이런 역할을 외면하거나 아예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붓다 자신과 수행자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원만구족(모든 것을 완전하게 갖춘 깨달음의 상태)한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주류 종교계는 재정의 투명한 공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세속화되었으며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또 붓다가 이루었다는 깨달음을 승려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불교의 목표를 신비주의적이고 초세속적인 ‘깨달음’이 아닌 복지, 평화, 정의, 탈폭력 등의 의미를 담은 ‘심신의 행복’이나 ‘몸과 마음의 안락’ 정도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제안한다. 실제로 붓다는 무엇보다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말하는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이며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깝다. 책에 자세히 설명된 불교 용어는 불교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불교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붓다의 가르침 역시 ‘상식’에 속하는 문제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사회의 짐이 되어가는 종교가 아닌 평화를 지향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붓다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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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과 함께 읽은 이 책. 면밀한 자료분석. 적절한 문제의식. 진정 제행무상이라면 우리에게 남겨진 건 율법으로서, 기복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참의미를 시대적으로 해석하는 것..!
seyul88 2011-11-2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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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살아있는 불교로서 거듭나기 위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문제제기.. 가치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사과나무 2011-11-17 공감 (0) 댓글 (0)






붓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원래 붓다와 부처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이 책 제목에서의 붓다는 초기불교, 훼손되지 않은 석가모니의 원래의 사상과 실천을 의미하고

부처는 그 불교와 현실에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변질된 현재의 불교의 모습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원래의 석가모니의 혁명적인 사상과 실천으로 되돌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수능백일기도, 자신의 복을 빌기위한 기도, 기도발 잘 드는 절 등으로 이야기되는 불교, 사찰의 조그마한 이권다툼에 폭력도 불사하는 불교의 모습을 버리자고 이야기한다.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도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중간중간에 삽화와 용어 설명을 해주는 친절을 편집자가 해주어서 박노자의 글 중에서는 비교적 쉽게 읽히는 글이다.

하지만, 박노자 특유의 날카로움은 다른 글들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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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한아빠 2011-12-2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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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만 보면 되는 아쉬움




1.

도법의 추천사

인간과 삶과 수행하는 자의 도리에 대해, 짧지만 논리적이고 명징하다.




서언은 박노자가 생각하는 불교교리에 대한 핵심요약정리다. 해방불교의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속에 남아 있는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 사회화, 개별화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개인적 차원의 '업장의 소멸'에 그친다.




게다가 불교의 대 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불교적실천이란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해체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상당부분을 덜어줄 수 있는 집단 치유의 길이며 집단적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라 할수 있다. 개인의 해탈과 병행될수 있는 '더불어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와 사회의 세포를 하나하나 갉아먹는 암과 같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항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고 집단 전체를 위한 해탈의 결험이 될수는 있을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하화중생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동망가고 없다. '해방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좀 길어도 맥락을 따라가며 옮겼다.

서언이 가장 좋고, 본문은 서언만 못하다. 반성은 하는대 두리뭉실 술에 물타듯 처리하기 때문이다.







2.

박노자는 석가모니를 고대의 위대한 변증론 철학자라고 소개한다.

법륜스님의 책, 법정 스님의 책도 좋았지만, 답답하던 차에 박노자의 해석이 반갑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문장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더니

사회주의자의 삶은 대중의 바다, 인민의 고통과 함께 살며 함께 싸우는, 수행자라는 생각을 긍정해주는

박노자의 불교해석이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불교의 본질로 따지자면 내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 아들, 네 아들 구분없이 입시 지옥헤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으로 물심양면 학벌 타파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고 보편적인 상식수준의 질문과 답은 명쾌하다기 보다 순하다.







3.

징병제가 승려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중들도 군대가나, 궁금하기는 했지.

왜 중들이 군대가서 뭐하는지에 대한 책은 없을꼬. 총들고 사람죽이는 중이라니, 거시기 하다.

군대에가서 살인을 훈련하는것에 동의하면서 그 얘긴 쏙 빼고, 늘 산사에서 청정하게 사는 척했던 거쟎아. 가증스런 것들.

만일 징병제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예로부터 권력과 밀착하지 못했을테니까.

외적의 침입에 승병으로 나선 스님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마치 장수 같았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생을 막기위해 노력하는 것과 살인훈련하며 전쟁을 학습하는 징병에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 같아.

징병제에는 동의해주고, 세금은 안낼뿐 아니라, 사찰마다 절집 구경하는 값을 돈으로 받으시는것에 꼼꼼하시니, 참.




불교가 구가적 살생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가 십자군전쟁을 중세부터 21세기 오늘까지 수백년 하고 있는것보다 더 이상하다.

기독교의 신 야훼는 애초에 인격신이라 복수의 신이고 적들을 죽이고 벌하는 신이다.

불교는 연기, 공에 대한 깨달음이 논리적인 생활철학인대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사람죽이는 것조차 허용하는 것은 과하다.

그때그때 다르다는 융통성을 마구마구 밀어붙여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 오로지 국가권력을 위해 춤춘다. 더러워.






4.

아쉬운것은 참으로 소심한 해방불교의 실천지침이다.

배타적 학벌집단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명문대중심의 입시제도를 거부하고, 살인을 가리키는 군대를 거부하지는 못해도,

알고는 살아야 하지 않냐고 말한다. 내 참.

그렇게 알거면 아는거랑 모르는 거랑 뭐 다른가.




이천년전에 국가권력과 만나 세속화된 불교가 인민들을 자유롭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커녕

인민에게 재앙이 되는 것에 대한 분석이 무디다.

이천년전 말고, 오늘현실의 분석은 그나마 없다. 뭐야, 박노자 실망이다.




박노자의 불교성찰과 비판적 고찰도 이미 흐리멍텅한대 불교내부의 쟁점에 대한 도법스님과의 대화는 더하다.

도법은 이도저도 아니다.

불교를 비판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중립적인입장에서 객관을가장하여,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조심하는 것처럼

두리뭉실, 구렁이 담넘듯이 현실불교를 긍정한다.




불교는 붓다처럼 혁명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서언에서는 큰소리치더니 각론의 본문으로 들어가며 뭐하나 시원한 것이 없다.

한국불교의 문제가 딥다 많고 고질적이고 시스템상 고치기도 어렵다는 거다. 거기서 끝이다.

어려우니 어째, 기양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며 인민의 고통을 빌미로 사기치며 중들이나 잘먹고 잘사는 거지.

영혼을 팔아 제 배를 채우는 탐욕스런 것들.

당장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내놓지는 못하면 당장 붓다처럼 살자고, 선동이라도 시원하게 하든지. 답답이.




도법은 비폭력을 강조한다.

최소한 양심적병역거부자들을 가두는 것은 옳바르지 고 군대도 총칼도 전쟁도 거부한다는 운동을 하며 비폭력을 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니 세련되게 파렴치하다.

더 큰 폭력을 용인하기위해 작은 폭력을 참으라는거지. 폭력이란 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까. 다 폭력이니까.

결국 힘없이 당하며 고통스럽게 살라는 거지. 평화적으로. 죽임당하는 자는 죽고, 아픈사람은 계속 아프라고, 평화적으로.

아, 이런 논리 식상해.

이게 아니라면 도법은 설명을 더 해줘야 한다.

국가폭력에 빌붙어 엄호하며 그 결실을 나눠먹고 살아온 불교의 오랜 탐욕이 인민을 고통스럽게 하는것에 대해,

그 폐해와 극복방법에 대한 언급없이 비폭력을 말하니 인민들의 숨찬 고통을 외면하는 뻔뻔함이다.




불교에서 아힘사는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을 무저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기껏 어영부영 진빼고 마지막 결론부분에 이렇게 썼다. 면피하자는 거야, 머야.

그리하여 박노자는 초기 불교의 정신에 근거해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꼬.

쌍차투쟁에 연대하는 불자들의 모임, 이런것은 아직 못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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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쥐만세 2012-02-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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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the Buddha?




불교.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중세의 유럽에서 사람들은 기독교 왕국을 꿈꾸었듯이 이 땅에서는 불국토라 하여 불교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불교가 외래종교이긴 하지만, 그만큼 한반도에 남긴 흔적들이 적지 않다. 비록 고려대 이후로 교세가 예전만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불교를 어린시절 나는 외면해 왔다. 뭐 특별히 관심이 없었을 따름이지만, 불교를 할머니들이 믿는 그런 종교, 따분한 것 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종교로서의 접촉이라기 보다는 붓다라는 거대한 사상가(?)의 가르침에 흥미가 느껴져 다가선 것이 불교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는데 큰 기여를 했다. 불교가 생각보다 만만한 종교가 아니였던 것이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던 불교의 편견이란 것은 비불교적인 한국불교에 기인한게 크다. 그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에는 비불교적인 것이 넘친다!



어떤 것이 비불교적인 것인가?



첫째, 영험한 기도발을 믿고, 아이들이 무한경쟁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경쟁에서 이기기를 빌며, 100일 기도를 드리는 기복행위다. 붓다는 방편으로서 신통력을 이용한 바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런 신통력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불자의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변성불성론이니, 여성불성론이니 하는 여성차별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승가는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으므로, 세속에서의 경제적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계속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 공동체로서의 존경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런탓에 아무리 어느 누구에게도 깨달음의 길이 열려 있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주는 붓다라도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오늘날에서도 계속 그런 가르침을 고수한다면, 승가에 대한 존경은 잃을 수 밖에 없다.



셋째, 한국불교의 주요한 성격으로 거론되는 호국불교 등이다. 부처의 제자들라는 사람들이 살생을 옹호한다? 대승불교의 여섯가지의 실천덕목에 지계란 것이 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 계율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불살생의 계다.



이렇게 한국불교에는 문제점이 분명히 있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현재의 한국불교, 종단불교에 미래는 없다고 한다. 솔직히 지금의 한국불교 문제점이 많아 보인다. 내부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들어난 것을 봐서는, 2000년 전의 붓다가 힌두교 사이에서 나왔던 것처럼 할 수 없다면 가망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 현재 원전번역이 활발해지고, 붓다의 원음에 가까운 가르침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무지한 한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다만 그래도 혼탁한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청정한 승가가 있는 것도 좋지 않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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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1-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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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죽인 부처





먼저 박노자라는 이름이 내 눈을 붙잡았다. 최근에는 한국 고대사가 그 대상이더니 이번에는 뭘 또 씹으시려고 그러시나... 제목을 보아 하니 불교가 씹힐 차례?

나는 특히 7장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에서 다루는 호국 불교 이야기가 가장 충격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살생을 하지요”라니... 불교 신자건 기독교 신자건 군대도 가고 총도 잡을 수 있다 생각한다. 내처 전쟁 중에 누군가 죽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단순하게 이해한다. 그런데 ‘당연히’라니... 책에 실린 1968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


장삼의 법의를 걸친 송도진 스님(20세)은 사격 자세를 잠시 쉬고 ‘대의를 위해서는 살생할 수 있는 것이 법가의 진리’라고 말하고는 다시 카르빈의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률은 2등 사수 정도. 송 스님은 임진란의 승군 대장 사명 대사의 고사를 펼치며 국토방위에 앞장서겠다고 기염이 대단하다.(208쪽)



진작부터 우리나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배워 왔기에 별 생각 없었다. 그런데 박노자 같은 근본주의자가 정리해 놓은 글을 보니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167쪽에 나오는 코끼리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사냥꾼을 용서하고 상아까지 준 코끼리 왕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다음 생애에 부처가 된다면 맨 먼저 그대의 삼독을 빼줄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불교 정신이라면 어느 누가 ‘당연히’ 살생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이 밖에도 여자는 성불할 수 없다며 남녀를 차별하는 전통, 초기 불교가 구현한 민주주의 이야기에서 오늘날 배울 게 많을 듯하다. 원효를 비판한 내용도 있는데 그 부분은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원효를 좋게만 생각해 왔나 보다. 자료 사진도 많고 낯선 용어에는 각주가 달려 있어 나처럼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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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그냥 2011-10-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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