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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5

한국의 공공철학, 그 발견과 모색 - 조성환 2014

한국의 공공철학, 그 발견과 모색 - 다산ㆍ세종ㆍ동학을 중심으로 - earticle

한국의 공공철학, 그 발견과 모색 - 다산ㆍ세종ㆍ동학을 중심으로


Public-Common Philosophy in Korea, Its Tradition and Future

조성환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32호 
2014.09 pp.221-257 KCI 등재

초록


Until nineteenth century in East Asia, 'public-common(공공)' has meant not'government' nor 'people' nor 'open' as a noun or adverb, but 'co-act with'as a verb. Kim Tae-chang has constructed 'Public-Common Philosophy' byreinterpreting the meaning of 'public-common(公共)' as 'dialogue with others'. This article tries to approach the thought of Dasan, Sejong and Donghak fromthe Public-Common Philosophy of Kim Tae-chang. Dasan interprests 'Ren(仁)'as ' co-acting with others'(人人相與) and 'Shu'(恕) sympathy with others, andsuggests Public-common Ethics. On the other hand, King Sejong aims atPublic-Common Politics. His invention of Hanguel was a kind of pursuing cohappinesswith people. Lastly, Donghak proposes Co-acting of Heaven andMan, aiming at the Public-common World which nourishing and respecting alllife in the universe. This implies that the moral responsibility and active role ofman in the universe become emphasized. The Public-common Philosophy of Kim Tae-Chang emphasizes dialoguingwith others instead of canon of sages or reason of individual, and this has anenormous significance in modern East Asia which has enjoyed Confucianism forabout two thousand years and accepted European philosophy during the lasttwo hundred years. It is a kind of new philosophy which can give some cluesof today's lots of social problems in Korea.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는 ‘공공성’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학계는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공공성’을 주제로 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반증할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실에 맞는 공공철학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원래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 문헌에서 ‘공공(公共)’이란 말은, ‘정부’나 ‘대중’또는 ‘공개된’을 의미하는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보편적 원리를 ‘모두가 공유한다’ 또는 ‘누구나 함께한다’는 의미의 동사로 쓰였다. 이 개념을 “타자와 대화하고 협력한다”고 하는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여, 동아시아 전통에뿌리를 둔 ‘공공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공공철학공동연구소의 김태창 소장이다. 따라서 김태창이 말하는 ‘공공한다’에는 전통적인 ‘공공(公共)’ 개념에 ‘타자와 함께한다’고 하는 ‘상여(相與)’의 의미를 집어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타자와의 대화”를 핵심으로 하는 공공철학은 ‘성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하는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사상이나, ‘개인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서양철학과는 다른 형태의 철학으로, 특히 ‘공공함’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공공성’ 담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양의 공공철학이 주로 정치철학자들에 의해서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반해서, 김태창의 공공철학은동아시아의 사상전통에 뿌리를 둔 인간관의 영역까지도 범위에 넣고 있다는점에서(가령『 공공하는 인간』 시리즈와 같이) 보다 본질적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문맥에 훨씬 근접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은 대개 ‘서양식 해석’이나 ‘서양과의 비교’ 내지는 ‘유학의 현대적 해석’과 같은 소극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김태창의 공공철학은 중국이나 서양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전통과 현대를 이으면서우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철학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그런 만큼 훨씬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입장에서 김태창의 공공철학 개념을 활용하여 한국사상에서의 공공철학 전통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발견을 통해서 오늘날 윤리와 정치와 종교에서의 공공성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하나의 참고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 하에 본 논문에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사상은 다산의 윤리사상과 세종의 정치사상 그리고 동학의 종교사상이다. 이 세 사상은 모두 ‘(相)與’를 주요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철학적 요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가령 다산은 상호의존적 존재라고 하는 인간관을 바탕으로 “人人相與”로서의 ‘仁’(타자와 함께함)과 그것의 실천방법으로서의 ‘恕’(타자와의 공감)를 통해서 타자와의 만남과 공감을 핵심으로 하는 ‘공공윤리’를 제창하였고, 세종은 이러한 공공윤리를 실제 정치영역에 적용하여 백성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여민정치’를 지향하였다. 그의 한글창제는 ‘공향(共享)’, 즉 ‘공공행복’이라고 하는정치적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였다. 마지막으로동학은 “천인상여(天人相與)”, 즉 하늘과 인간의 공공이라고 하는 천인관을 바탕으로, 우주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길러주는 공공세계를 꿈꿨다. 동학의하늘님은 인간의 도움과 협력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하늘님으로, 이것은 곧우주의 경영자로서의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주체적 역할이 그만큼 강조되고있음을 의미한다.


2023/06/20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관리자 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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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에 대하여2 MONTHS AGO BY 무영 정 IN 다시 개벽이다 TAGGED: 개벽, 개벽신문, 개벽신문 63호, 개벽하는 사람들, 원광대학교, 콜로키움


* 이 글은 개벽신문 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제5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야규 마코토(柳生眞)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3월 17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제5회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文化內開花)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일본 난잔대학(南山大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김승철(金承哲) 교수를 발표자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이찬수 HK연구 교수를 토론자로 모시고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 학파인 교토학파(京都學派)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일본에서의 토착화, 일본 문화와 기독교 사상과의 조화·융합 시도, 기독교와 불교사상 혹은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대해 논의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활약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의 제자들로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와 동양(혹 일본)의 융합을 시도한 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는 크게 그 내용이 다양하고 종교색이 강한 우파(右派)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 좌파(左派)로 나뉘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교토학파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상의 일본 토착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철학적 융합 시도에 대해 다루어졌다. 김승철 교수가 발표에서 문화 내 ‘개화(開花)’라고 쓴 것은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바깥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씨앗’을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특수성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전국시대 일본에 와서 로마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금교령을 내린 이래로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국가와의 외교·통상 관계를 전면 금지시키고 철저한 기독교 탄압정책을 취했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의 내항으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이 개국했다. 그 이후 일본에 오는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끼리 성당·교회를 가지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일본인이 기독교를 믿거나 일본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심지어 유신 초기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도 애당초 기독교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신자. 몰래 가톨릭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서양 각국의 압력과 비판을 받고 메이지정부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한 후에도, 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공포, 1890년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제국헌법제28조)가 보장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는 늘 반일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에 입신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일본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의 패전 후 일본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안녕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규정이 없어지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일본국헌법 제20조 제1~3항). 그 후 옛날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시기와 적대감, 경계감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등도 포함해서) 신자 수는 일본 인구 약 1억2천만 명 중 불과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혼합적인 일본의 풍토를 가리켜 흔히 “일본인은 연초에 신사(神社)에 참배하고, 기독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절에서 장례식을 지낸다.”고 농담처럼 말해진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대학, 병원도 많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기독교 유래의 연중행사가 정착된 지도 오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는 표면적, 주변적, 부수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혹은 하나님과 1대1로 맞서는 강렬한 자아의 개념은 여전히 서양적인 것, 또는 비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는 다수파의 일본인에게 어떻게 유일신 신앙을 수용시키느냐가 계속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일본을 거울삼아 기독교 스스로를 보았을 때,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너무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이어서 다른 문명·문화·종교와에 갈등, 대립을 빚지 않았을까, 다종교·비기독교문화에 대해 너무 억압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특히 불교와의 대화는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기독교와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추진해 온 신학자인 얀 반 브라흐트(Jan Van Bragt)는 기독교가 불교와 대화해야 할 동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동기, 즉 너무 서구 기독교를 직수입한 일본 기독교를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와 닿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리게 한다는 동기이다. 가톨릭 문학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인 기독교도로서 영성,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에 영화화된 『침묵(沈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탄압을 견디지 못해 후미에(踏畵)1를 밟고 기교(棄敎)하려 한 선교사로 도리고 신부 앞에 예수가 나타나 “밟아라. 너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왔다.”고 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대화의 동기, 즉 소수파로서의 기독교인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불교도와 대화하고 신학적 통로와 중계를 마련하려는 동기이다.

세 번째는 탈 서양적 형이상학의 동기이다. 이것은 지상적 존재를 정초(定礎)하려고 형성된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종교적 사실, 특히 셈족(유태)적 사고방식에 그 근원을 둔 기독교를 표현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그 희랍적 범주나 논리를 가지고 표현된 신학(과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기독교 신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신앙과 자유와의 갈등, 대립을 불교철학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혼다 마사아키(本多正昭)는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의 “즉(卽)의 논리”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의 입신이 단순한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신뢰와 사귐은 가역성의 지평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저 불가역성이 이러한 가역성의 인(因)이라고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노데라 이사오(小野寺功)는 가톨릭 신학과교토학파의 총수인 니시다 기타로 철학의 “장(場)의 논리” “절대무(絶對無)의 장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일본적 영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니시다의 ‘장소’론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가 거기에 있는 장소’(三位一體のおいてある場所)로서 파악할때, 실로 의미 깊은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적 영성의 실존적 자각의 논리인 ‘절대무의 장소’의 사상과, 성서와 교회의 신앙적이고 계시진리의 근본적인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론은 가장 깊이 상접(相接)하는 하나의 진실의 사태가 된다.”고 말했다.

오노데라는 일본적 영성(靈性)을 “대지적 영성”, “대지성(大地性)”이라고 설파한 불교학자이자 일본 선불교와 선문화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우리들의 이성에 있어서 절대무인 근원은 기독교적인 신앙 의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절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장소, 또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탄생하는 ‘장소’인 어떤 대지적(大地的) 영성(靈性)의 이념화의 시도이고, 성경의 ‘거기에 있어서 있는 장소’로써 절대자의 자기사영점(自己射映點)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의 근원이 기독교적인 신앙의식으로는 삼위일체론이 되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대지적 영성의 이념화임과 동시에 절대자가 스스로를 투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가톨릭 신학과 니시다 철학, 스즈키 다이세츠의 철학을 아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자인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배우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사회적인 본래성, 전체성의 회복이고, 그 중심은 원래 자기·자아인 인간이 자기·자아로써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이 ‘자각’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임과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覺)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기는 “… 예수는 사람이 어떠한 교단에 속하는 어떠한 교의를 받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방식이 사실상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가가 문제라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교토학파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신학자·사상가들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접목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반 브라흐트나 종교다원 주의를 주장한 존 힉(John Hick)과 같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에 반대한 종교 철학자·신학자와도 호응하면서 니시다의 “절대무의 장소”,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覺)의 논리 등을 통해 기독교 신학과 불교와의 접목, 서구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독선성(獨善性) 배제, 그리고 일본의 지적 풍토에의 기독교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는 교토학파와 기독교와의 대화
일본이 근대화한 이래로 기독교 또는 서양문명·철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대결할 때에는 불교사상 중에서는 특히 선불교(그리고 그것에 유래하는 니시다의 장소론,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론)를 내세웠다. (유교사상을 내세울 때는 양명학(陽明學)을 내세워 기독교나 독일관념론과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김승철 교수는그 배후에 서구 근대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적 전통과 시도는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던 범아시아적인 사상적 맥이다.
동서양의 사상적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떤 사상이 주로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를 맞이할 “호스트” 역을 맡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승철 교수는 불교의 경우 한국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찬수 교수는 “김 교수님의 발제 내용은 한국적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논평하면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교토학파의 니시다의 수제자이자 니시다철학의 비판자인 타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사상이다. 타나베는 니시다의 “즉(卽)”의 논리에게는 “매개”가 결여되고 있어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적에 공(空)을 색(色)과 “즉(卽)”하게 해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의 근저에서 “인식하려는 의지(Willezur Erkenntsis)”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적용한다고 지적했다.

타나베는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사상을 들어서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그 본원(本願), 중생의 신심(信心)의 세 가지를 중요한 요소로 요약할 때 “신심”은 바로 매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정토에 인도하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본원을 세우셨고, 아미타불의 은총과 중생의 신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심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을 구체화시켜주는 매개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신심이 없는 중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없다). 타다베는 신란의 사상에서 니시다가 보지 못했던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뒤 이것을 진리 체험의 타력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토학파이면서 니시다적인 “절대무의장”이론에 부족한 “매개”에 주목하여 독특한 구제론(救濟論)을 전개한 것이다.

또 이찬수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서로 겹치는 공통성의 겹치지 않는 문화적 차이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역시 일종의 도그마성이 있고, 또 불교 자체가 기독교나 서양철학과 만나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문화내(文化內)”가 아니라 서로가 문화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들
종합토론에서는 “왜 한국 사람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말하고 종교회통주의(宗敎會通主義)라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하나의 신성(神性)이 다양한 모습(종교)으로 표현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원효(元曉)의 화쟁회통(和諍會通) 이래 흔히 쓰여 온 “회통”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조선 시대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서 많은 서학(西學) 서적들을 가져와 동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있고, 19세기의 최한기(崔漢綺)와 같이 자타(自他)의 통(通), 동양전통의 기철학과 서양과학과의 통, 정치의 통, 사회경제의 통, 심지어는 교(敎)와 교 사이의 통까지 포괄적으로 논리화한 사상가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하는 기독교와도 불교, 또는 유교와도 완전히 다른 영성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에는 깊고 오래된 사상적 전통이 있고 서구 기독교와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한 역량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이번 회의에 청중으로 참석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26년간 교토포럼을 주재해 온 경험에서 “대화할 때 대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장 일본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본과 대화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내 개화”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일본은 외부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여서 자기 토양 속에 끌어들여서 “개화”시키는 것은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 문화의 문화 사이의 “문화 간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토포럼을 하면서 교토학파의 학자들과 늘 논쟁을 벌여온 것이 바로 니시다 철학의 “절대모순(絶對矛盾)의 자기동일(自己同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이 논리는 필경 동화(同化)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한사상·한철학이 지니는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 즉 자기와 타자가 모순이 있어야 오히려 서로, 함께 산다는 논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석
1 후미에는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를 부조한 동판을 가리킨다. 에도시대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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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 우리는 인간이 기후를 변화시킨 시대, 즉 ‘인류세’를 살고 있다. 인류세는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가 지구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이성적 동물’에서 ‘지질학적 행위자’로 전환하고, 사물의 위상도 무기력한 물질이 아니라 힘을 지닌 ‘행위자’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치의 영역도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 염두에 두는 ‘지구민주주의’ 또는 ‘정치생태학’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무한하게 주어졌다고 여겼던 ‘자유’가 실은 화석연료라는 자연에 기반한 조건적 자유였음을 자각시켜 주었다. 이처럼 인류세는 그동안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여 사유했던 근대 철학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여기에 한국의 근대 철학자, 최한기의 기학(氣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기학 체계에서는 인간의 기화와 자연의 기화, 기술의 기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기화체’로 우주를 설명하며, 따라서 기후변화는 세 차원의 기화가 얽혀서 일어난 지질학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그_인류세의 기학(氣學)

제1장 인간의 행위
제2장 기학의 귀환
제3장 유학의 경장
제4장 인간의 위상
제5장 사물의 위력
제6장 정치의 확장
제7장 행성의 대두
제8장 근대의 종언
제9장 자유의 제한
제10장 자연의 변화
제11장 생명의 평화
제12장 철학의 회고

에필로그_‘ 개벽파선언’은 ‘지구학선언’이다

참고문헌


책속에서


P. 29~30 인류세와 가이아, 가이아와 인류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은 가이아의 관점에서 인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해월이 “하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길러주는 기화(氣化)의 작용이다”라고 설파했듯이,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기화의 작용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다만 그 기화가 대기의 변화, 즉 ‘기후변화’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_ <제1장 인간의 행위> 중에서 접기
P. 53 인류세란 기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활동운화로 지구의 활동운화가 바뀌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된 지구의 활동운화가 다시 인간의 활동운화를 제약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의 활동운화에 주목한 최한기의 기학이야말로 인류세 시대에 다시 조명되어야 할 한국 철학이 아닐까? _ <제2장 기학의 귀환> 중에서 접기
P. 68~69 학살, 비애, 울부짖음….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측은지심이다. 이들은 모두 만물에까지 연민의 정서를 느낀다. 성리학자들이 외쳤던 만물일체의 인을 오늘날의 생태사상가와 환경운동가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은 ‘생태적 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태적 비애는 ‘지구적/행성적 차원에서 느끼는 비애(planetary grief)’라고 볼 수 있다. 나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까지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_ <제3장 유학의 경장> 중에서 접기
P. 81 플럼우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최상위 포식자’에서 ‘타자의 음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태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런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다른 존재와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론적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_ <제4장 인간의 위상> 중에서 접기
P. 102~103 베넷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고 본 요소는 ‘힘(power)’이다. 즉 사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사물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공 사물에 기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대인이 태양을 경배한 것은 그것이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제1의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물은 인간에게 외경할 만한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을 빌리면 ‘사물가외(事物可畏)’라고 할 수 있다. 최시형의 경물(敬物)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 즉 사물은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외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_ <제5장 사물의 위력> 중에서 접기
P. 129 토머스 베리가 인간의 생존 및 지구와의 화해를 위해서 일종의 ‘생명민주주의’를 말했다면, 그리고 라투르와 베넷이 비인간의 ‘행위성’과 ‘힘’ 개념에 주목하여 ‘사물민주주의’를 제안했다면, 김대중은 비인간 존재의 ‘생존권’에 주목하여 ‘지구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 시기는 베리(1988)와 라투르(1999)의 중간에 위치한다(1993년 전후). _ <제6장 정치의 확장> 중에서 접기
P. 147 글로브에는 인간의 강건함이 묻어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지구를 인간화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은 근대에 대두된 진보(progress)라는 이념과 궤를 같이한다. 반면에 플래닛에는 인간의 취약함이 드러난다. 인간은 행성을 인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행성은 인간화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 이후로 진행된 산업화와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인해 인류가 행성이라는 존재를 망각했다는 점이다. 차크라바르티가 행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성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홀로(獨) 존재한다(立). 노자의 개념을 빌리면 ‘자연’이고 ‘독립’이다. 그래서 인간이 개변할 수가 없다. 거주 가능한 임계영역은 과학기술로 개조할 수 있지만, 행성적 차원은 인간이 대면하거나 돌볼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무위의 영역이고 불인(不仁)한 존재이다. _ <제7장 행성의 대두> 중에서 접기
P. 165~167 차크라바르티는 이와 같은 과학적 성과에서 통찰을 얻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을 대비시킨다. (중략) 즉 거주가능성은 행성의 영역이고, 지속가능성은 글로브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지속가능’ 뒤에 ‘발전(develoment)’이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략) ‘지속가능성’ 개념은 (중략) 인간의 개발에 ‘지구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주어진 화석연료를 인류가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의도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지속가능성은 인간의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적 개념이다. (중략) 반면에 지속가능성과 대비되는 ‘거주가능성’은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이외 생명의 생존 조건을 묻기 때문이다. _ <제8장 근대의 종언> 중에서 접기
P. 192~193 자유는 서구적인 것, 근대적인 것을 대변한다. 반면에 자연은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전통적인 것, 동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자연은 발전이 없고 정체되어 있으며, 자유는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중략) 사실 동아시아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술어로 쓰였고, 그 의미도 억압보다는 오히려 해방이나 ... 더보기
P. 210 ‘인류세’ 개념이 등장한 2000년에 한국에서는 ‘생명평화’라는 말이 탄생했다. 따라서 나이로 치면 생명평화와 인류세는 동갑이 된다. 생명평화 개념이 탄생한 해가 인류세 개념이 주창된 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치 인류세 시대의 윤리를 ‘생명평화’로 제안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실제로 생명평화에서 ‘생명’은 인간의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을 아우른다. 그래서 생명평화는 ‘모든 생명의 평화’라는 뜻이다. 종래에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었던 평화 개념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마치 김대중이 1994년에 민주주의의 대상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하여 ‘지구민주주의’를 주창한 것과 유사하다. _ <제11장 생명의 평화> 중에서 접기
P. 239~240 여기에서는 가이아, 한울, 생명이 동일한 층위에서 논의된다. 한울이건 가이아건 모두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울은 동학의 가이아이고, 가이아는 서양의 한울인 셈이다. 이처럼 <한살림선언>은 한울을 지구학적으로도 해석한다. 결국 <한살림선언>에는 생명학과 지구학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한살림선언>은 동학을 생명학으로 현대화하고, 이를 다시 서구의 지구학과 대화하는 일종의 ‘지구지역학’ 텍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_ <제12장 철학의 회고>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조성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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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조교수.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원광대학교에서 역사와 종교를 공부했다. 20대에는 집합론과 대수학에 빠졌고, 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 철학을 공부했다.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사상과 개벽파를 연구했다. 최근에는 1990년대에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이병한과 함께 사단법인 다른백년 홈페이지에 칼럼 〈개벽파선언〉을 연재했고, 2022년에는 단독으로 〈K-사상사〉를 연재했다.
지은 책으로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모시는사람들, 2022),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소나무, 2022),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모시는사람들, 2018)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공역, 모시는사람들, 2022),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 사회』(오구라 기조 지음, 모시는사람들, 2017),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김태창·이케모토 케이코 공저, 모시는사람들, 2017)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K-사상사>,<동북아, 니체를 만나다>,<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 총 1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울은 동학의 가이아, 가이아는 서양의 한울이다”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이 무너진 자리에서,
인류세 철학과 기학의 대화로 ‘인류세의 기학’을 모색하다

지금 우리는 인간이 기후를 변화시킨 시대, 즉 ‘인류세’를 살고 있다. 인류세는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가 지구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이성적 동물’에서 ‘지질학적 행위자’로 전환하고, 사물의 위상도 무기력한 물질이 아니라 힘을 지닌 ‘행위자’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치의 영역도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 염두에 두는 ‘지구민주주의’ 또는 ‘정치생태학’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무한하게 주어졌다고 여겼던 ‘자유’가 실은 화석연료라는 자연에 기반한 조건적 자유였음을 자각시켜 주었다. 이처럼 인류세는 그동안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여 사유했던 근대 철학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여기에 한국의 근대 철학자, 최한기의 기학(氣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기학 체계에서는 인간의 기화와 자연의 기화, 기술의 기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기화체’로 우주를 설명하며, 따라서 기후변화는 세 차원의 기화가 얽혀서 일어난 지질학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인식이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차크라바르티(행성론)와 라투르(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그리고 제인 베넷(신유물론)과 같은 서양 현대철학자들의 논의를 빌려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대 인식과 한국 근대철학 및 생명담론이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깊이 탐색하고 있다. 과거 자연과학과 물질개벽이라는 서구 문명의 충격에 대한 반응에서 기학과 동학이 형성되었듯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인류세와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걸맞은 한국 철학, ‘K-사상’의 탄생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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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써먹지 못했던 혜강 최한기의 ‘기학’을 오늘날 기후변화 시대의 인류세 철학으로 다시 발명한다는 것이 독창적이고 놀랍고 재미있다. 물론 실천해야 할 과제마저도 안겨준다. 쉽게 읽히면서 쏙쏙 들어오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코카추잉 2023-05-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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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

書評「大貫隆・金泰昌・黒住真・宮本久雄編『一神教とは何か――公共哲学からの問い』」、『福音と世界』2006年9月号 | 書評 | 研究活動 | 小原克博 On-Line

書評「大貫隆・金泰昌・黒住真・宮本久雄編『一神教とは何か――公共哲学からの問い』」、『福音と世界』2006年9月号 | 書評 | 研究活動 | 小原克博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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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評「大貫隆・金泰昌・黒住真・宮本久雄編『一神教とは何か――公共哲学からの問い』」、『福音と世界』2006年9月号
投稿日2006年8月15日カテゴリ書評タグ一神教
 本書は、二〇〇四年一月に開催された「京都フォーラム」主催による第五二回公共哲学京都フォーラム「唯一神教と自・他論」で発表された内容に基づき、編集されたものである。そのことは「凡例」に記されているが、そもそも「京都フォーラム」や、それが目指している「公共哲学」についてなじみのない一般読者にとっては、本書を読み進めながら、その意図を察することを求められることになる。しかし、公共哲学が直接のテーマにな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本書の副題は「公共哲学からの問い」となっているが)、それについて理解せずとも、各章を味わうことはできる。
 本書は、九つの発題と二つの総合討論、一つの発展協議から構成されている。また、各発題の続きには討論が付されているので、全体として討論の占める割合はかなり大きい。討論はあまり編集上の整理はされずに掲載されているので、実際の雰囲気を伝えているだけでなく、本書に登場する第一線の研究者たちの目下の関心事やこだわりを随所に感じ取ることができ、興味深い。ただし、すべての討論が必ずしもかみ合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中には、誤解されたり、不愉快な質問をされたりして、怒りの様子がにじみ出ているような箇所もある。討論には確かに粗密の差があるが、全体としては、発題の論点を再確認できるという意味で有益であろう。
 本書の主タイトルは「一神教とは何か」である。そのテーマに対し、各発題が「自・他論」という焦点を緩やかに共有しながら、それぞれの専門的見地からアプローチしている。論文調の堅牢な発題もあれば、発題のテープ起こしが、ほぼそのまま原稿化されているようなものもあり、スタイルは様々である。分量も多いものからコンパクトなものまで差があるが、ここで各発題の論旨を詳細に追っていく紙面の余裕はないので、それぞれにおいて興味深いと思われる論点を中心に概要を紹介しておく(敬称略)。
 発題Ⅰ「新約聖書における神と自他――人格主義的神学と場所論的神学」(八木誠一)。ここで八木は、人格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関係において、人格を成立させているのが人格主義的神学だけでなく、場所論的関係もまた重要な役割を果たすことを強調する。前者の論理にのみ依存することを八木は問題視するが、場所論を適切に視野に入れることによって神義論的な問題を回避できるだけでなく、それがまたイエスの立場であり、仏教との親近性へと開かれていく道であることを指摘する。
  *
 発題Ⅱ「旧約聖書の宗教はいかなる意味で「一神教」的であったのか」(山我哲雄)。本書の中で、もっとも正面から一神教の概念整理に取り組んでいる発題である。ヤハウェ唯一神観が後代に成立してから、それ以前にあった旧約の伝承が「検閲」されたり、「校閲」されたりしてきたということを、様々な「検閲漏れ」、すなわち多神教的なイメージを取り上げながら紹介している。また、唯一神観の成立史をわかりやすく描写している。
 発題Ⅲ「人間の淵――ハーヤー存在とアウシュヴィッツ的解釈学」(宮本久雄)。アウシュヴィッツを根源悪のメタファーとして、あるいは解釈学的枠組みとして用いながら、旧新約聖書の様々なテキストを素材に用いて、物語のプネウマ的解釈を提示していく。そこで主題となる存在者は、空間的自己同一性を強調する西欧的存在論と区別される形で、ヘブライ的存在ハーヤーとして位置づけられる。
 発題Ⅳ「救済史の物語と神義論――一神教の落とし穴」(大貫 隆)。ここで「一神教の落とし穴」とは、一神教という枠組みの中で民族や共同体の「大きな物語」が救済史として語られるとき、不可避的に神義論が胚胎し、その中で、個人の苦難が忘れ去られてしまう事態のことを指している。またヨブ記と同様、モーセ契約が失効しているようなユダヤ教黙示思想においても、歴史は直線的に進むプロセスと理解されているのに対し、洗礼者ヨハネ、イエス、パウロがそれとは反対の方向、すなわち、救済史の神学から「新しい創造」の神学への転換の道(「宇宙の晴れ上がり」)を示していると大貫は語る。
 発題Ⅴ「アウグスティヌスの神研究――日本を公共性へと開く「神論」への途を求めて」(加藤信朗)。加藤は「神の国」が、その市民でありたい願う人々によって作られる共同体であり、神聖政治ではないことに注意を払いながら、我々が「地の国」に生きることの意義を説く。またそれが、日本の自己閉鎖性を克服していく道であることを示唆する。
 発題Ⅵ「唯一神と人格神」(鶴岡賀雄)。唯一神教における神の特質を、その唯一性より、むしろ、ペルソナ性に注目して描写している。旧約聖書や十字架のヨハネを援用し、我汝関係、「一」性、「二」性などの人称言語の作法を通じて、ペルソナ性と「私たち」としての共同体の関係を明らかにしようと試みている。
 発題Ⅶ「日本思想における「一神教的なもの」」(黒住 真)。一神教と多神教を対立的にとらえるのではなく、経験的な次元では、相互に関係性があると語る。日本神話や日本宗教の中にも一神教的なものの考え方があることを指摘すると同時に、近現代における一神教と多神教のあり方に対しては、歴史的な批判が必要であると主張する。
 発題Ⅷ「イスラーム政治思想における自と他」(池内 恵)。キリスト教には「神のものは神へ、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へ」という発想があるのに対し、イスラーム教において政治と宗教を分け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る。その言説にまつわる誤解を解きながら、その根拠や歴史的経緯について、イスラーム政治思想の立場から語っていく。また、イスラーム教における自・他論の代表例としてジハード理解を取り上げ、さらに、イスラーム社会内部においても、善や共同体の秩序をめぐって、絶えざる緊張関係があることを指摘する。
 発題Ⅸ「シーア派少数派における神観と他者認識」(菊池達也)。シーア派の中のイスマーイール派や、その分派であるドゥルーズ派に焦点を当てることによって、少数派と多数派との間に生じる他者認識を考察している。イスラーム教内部における正統と異端をめぐる緊張は今なお存在しており、その状況に対して、西欧的な公共空間の概念(公と私の区別)を安易に持ち込むことはできないと菊池は主張する。
 以上の概要からも察せられるように、必ずしも、それぞれの発題の間に有機的な関連があるわけではない。しかし討論を通じて、全体に通底するような課題を模索する努力は十分に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し、また時には発言の中から先鋭的な見解を聞き取ることもできる。研究者同士が交わす熱い議論に関心がある方は、本書を存分に堪能す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
  *
 最後に、本書が設定している課題、すなわち「一神教とは何か」という問いに対して、本書の内容が、全体としてどの程度応えているのかを最後に考え、あわせて、今後の課題についても言及したい。冒頭で、本書は一神教を外側からではなく「内側からその生きた現実を証し語ろうとする」と明確に述べられている(ⅰ頁)。本書の大半は聖書学や思想史で占められており、多様な一神教世界の葛藤や生々しい現実は、そもそも射程の範囲外であるのは、本書が(公共)哲学的関心を基盤にしていることから、ある程度やむを得ないと言える。しかし、本書全体を通じて感じ取られる一神教は、あくまでもキリスト教の視点や関心から整理された一神教であり、複雑に絡み合ったユダヤ教・キリスト教・イスラーム教の内側からその生きた現実を語る、ということにはなっていない。討論の中で大貫が「一神教という言い方は、私は自分自身のものとして、あまりリアリティがないのです」(三二七頁)ともらす言葉は、他の参加者にも共有される感覚であろうし、だからこそそこに、キリスト教と一神教の間を橋渡ししようとする本書の意図があるのは理解できる。しかし、キリスト教から(抽象化された)一神教概念への熱い思い入れは感じられても、現実の生きた他者としての一神教世界、具体的にはユダヤ教やイスラーム教からキリスト教がどのように見られているのかについての考察は、ほとんどない(ちなみにユダヤ教に関する発題は一つもない)。討論の中で池内が「ほとんどの先生方のまことに高度な議論が、往々にして他者性を失いがちだということに気づくたびに、そう感じます」(四二五頁)と語るのを、皮肉として受けとめ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
 もちろん、日本社会の中で一神教世界の現実に開かれていくことは容易ではない。しかし、討論の中でも、しばしば指摘されていた日本社会の自閉性を、まずは日本の神学の自閉性として自覚し、それを克服していく道を見いだすべきであろう。たとえば、聖書学者の発題の中には、組織神学を専門とする私にとっても啓発的な内容が多々あった。専門性の中に自閉す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教がマイノリティであるからこそ可能となる、越境的な「宇宙の晴れ上がり」(大貫)を、日本の神学的地平にも見出したいと感じさせる一書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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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오즈키 타카시, 김태창, 쿠로스미 마코토, 미야모토 히사오 편 「일신교란 무엇인가――공공 철학으로부터의 질문」, 「복음과 세계」 2006년 9월호
게시일: 2006년 8월 15일카테고리 서평태그 일신교


 본서는, 2004년 1월에 개최된 「교토 포럼」 주최에 의한 제52회 공공 철학 교토 포럼 「유일 신교와 자·타론」에서 발표된 내용에 근거해, 편집된 것으로 있다. 이것은 「범례」에 기재되어 있지만, 원래 「교토 포럼」이나, 그것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공공 철학」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에게 있어서는, 본서를 읽으면서, 그 의도를 찰것을 요구된다. 그러나 공공 철학이 직접적인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본서의 부제는 「공공 철학으로부터의 질문」이 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하지 않아도, 각 장을 맛볼 수는 있다.
 본서는 9개의 발제와 2개의 종합토론, 1개의 발전협의로 구성되어 있다. 또, 각 발제의 계속에는 토론이 붙어 있기 때문에, 전체로서 토론이 차지하는 비율은 꽤 크다. 토론은 그다지 편집상의 정리는 되지 않고 게재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서에 등장하는 제일선의 연구자들의 현재의 관심사나 고집을 곳곳에 느끼는 수 있고 흥미 롭습니다. 다만, 모든 토론이 반드시 맞물리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오해되거나 불쾌한 질문을 하거나 하여 분노의 모습이 흩어져 있는 곳도 있다. 토론에는 확실히 조밀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발제의 논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로 유익할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제목은 "일신교란 무엇인가"이다. 그 주제에 대해, 각 발제가 「자・타론」이라고 하는 초점을 완만하게 공유하면서, 각각의 전문적 견지로부터 어프로치하고 있다. 논문조의 견고한 발제도 있고, 발제의 테이프 발생이 거의 그대로 원고화되고 있는 것도 있어, 스타일은 다양하다. 분량도 많은 것부터 컴팩트한 것까지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각 발제의 논지를 상세하게 쫓아가는 지면의 여유는 없기 때문에, 각각에 있어서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논점을 중심으로 개요를 소개해 둔다 경칭 약어).
 발제Ⅰ「신약성경에 있어서의 신과 자타――인격주의적 신학과 장소론적 신학」(야기 세이이치). 여기서 야기는 인격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있어서, 인격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 인격주의적 신학뿐만 아니라, 장소론적 관계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자의 논리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야기는 문제시하지만, 장소론을 적절히 시야에 넣음으로써 신의론적인 문제를 회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예수의 입장이며 불교와 친근성으로 열려가는 길임을 지적한다.
  *
 발제Ⅱ「구약성경의 종교는 어떠한 의미로 「일신교」적이었는가」(야마가 테츠오). 이 책 중에서 가장 정면에서 일신교의 개념 정리에 임하고 있는 발제이다. 야하웨 유일 신관이 후대에 성립하고 나서, 그 이전에 있던 구약의 전승이 「검열」되거나 「교열」되어 왔다는 것을 다양한 「검열 누설」, 즉 다신교적인 이미지 를 다루면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신관의 성립사를 알기 쉽게 묘사하고 있다.
 발제Ⅲ「인간의 후치――하야 존재와 아우슈비츠적 해석학」(미야모토 히사오). 아우슈비츠를 근원악의 메타파로 혹은 해석학적 틀로서 이용하면서, 구신약성서의 여러가지 텍스트를 소재에 사용하여 이야기의 푸네우마적 해석을 제시해 나간다. 그래서 주제가되는 존재자는 공간적 자기 동일성을 강조하는 서구적 존재론과 구별되는 형태로 히브리적 존재 하야로 자리 매김된다.
 발제Ⅳ「구제사의 이야기와 신의론――일신교의 함정」(오오즈키 타카시). 여기서 「일신교의 함정」이란, 일신교라는 틀 안에서 민족이나 공동체의 「큰 이야기」가 구제사로서 말해질 때, 불가피하게 신의론이 배태해, 그 중에서, 개인의 고난이 잊혀져 버리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또한 욥기와 마찬가지로 모세계약이 해지된 유대교 묵시사상에서도 역사는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 반면 세례자 요한, 예수, 바울이 그와 반대 방향, 즉 구제사의 신학에서 '새로운 창조'의 신학으로의 전환의 길('우주의 맑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오오츠키는 말한다.
 발제 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연구――일본을 공공성으로 여는 「신론」에의 길을 찾아라」(카토 신로). 가토는 '신의 나라'가 그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신성정치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가 '땅의 나라'에 사는 것의 의의를 전한다. 또한 그것이 일본의 자기 폐쇄성을 극복해 나가는 길임을 시사한다.
 발제 Ⅵ 「유일신과 인격신」(쓰루오카 가오). 유일한 신교에서의 신의 특질을, 그 유일성보다는 오히려, 페르소나성에 주목해 묘사하고 있다. 구약성서나 십자가의 요한을 원용하고, 가성관계, '1'성, '2'성 등의 인칭언어의 작법을 통해 페르소나성과 '우리'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를 밝히려고 시도 있다.
 발제 Ⅶ 「일본 사상에서의 「일신교적인 것」」(쿠로스미 마코토). 일신교와 다신교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관계성이 있다고 말한다. 일본 신화나 일본 종교 중에도 일신교적인 것의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근현대에 있어서의 일신교와 다신교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발제 Ⅷ 「이슬람 정치 사상에 있어서의 자신과 다른」(이케우치 메구미).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발상이 있는 반면, 이슬람교에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다고 한다. 그 언설에 관련된 오해를 풀면서 그 근거와 역사적 경위에 대해 이슬람 정치사상의 입장에서 말해 간다. 또 이슬람교에 있어서의 자·타론의 대표예로서 지하드 이해를 거론하고, 또한 이슬람 사회 내부에 있어서도, 선이나 공동체의 질서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긴장 관계가 있는 것을 지적한다.
 발제 Ⅸ 「시아파 소수파에 있어서의 신관과 타자 인식」(키쿠치 타츠야). 시아파 속 이스마일파와 그 분파인 드루즈파에 초점을 맞추어 소수파와 다수파 사이에 발생하는 타인 인식을 고찰하고 있다. 이슬람교 내부의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긴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상황에 대해 서구적인 공공 공간의 개념(공과 나의 구별)을 안이하게 반입할 수 없다고 기쿠치는 주장한다 .
 위의 개요에서 알 수 있듯이, 반드시 각각의 주제 사이에 유기적인 관련이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토론을 통해 전체에 통저하는 과제를 모색하는 노력은 충분히 엿볼 수 있고, 또 때로는 발언 속에서 선예적인 견해를 들을 수도 있다. 연구자들끼리 교제하는 뜨거운 논의에 관심이 있는 분은 본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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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본서가 설정하고 있는 과제, 즉 「일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본서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응하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생각해, 아울러, 향후의 과제에 대해서 또한 언급하고 싶다. 서두에서 본서는 일신교를 바깥에서가 아니라 “안쪽에서 그 살아있는 현실을 간증하고 말하고자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ⅰ페이지). 본서의 대부분은 성서학이나 사상사에서 차지되고 있어 다양한 일신교 세계의 갈등이나 생생한 현실은 원래 사거리의 범위 밖인 것은, 본서가 (공공) 철학적 관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부득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서 전체를 통해 느껴지는 일신교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시점이나 관심에서 정리된 일신교이며, 복잡하게 얽힌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안에서 그 살아있는 현실을 말한다는 것에 되지 않았습니다. 토론 속에서 오오츠키가 「일신교라는 말은, 나는 자신의 것으로서, 별로 리얼리티가 없는 것입니다」 브로시, 그래서 그곳에 기독교와 일신교 사이를 다리려고 하는 본서의 의도가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추상화 된) 일신교 개념에 대한 뜨거운 생각은 느껴지더라도 현실의 살아있는 타인으로서의 일신교 세계, 구체적으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거의 없다 (덧붙여서 유대교에 관한 발제는 하나도 없다). 토론 속에서 이케우치가 「대부분의 선생님의 진정으로 고도의 논의가, 흔히 타자성을 잃어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렇게 느낍니다」(425페이지)라고 말하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일본 사회 속에서 일신교 세계의 현실로 열려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토론 속에서도 종종 지적되고 있던 일본 사회의 자폐성을, 우선은 일본의 신학의 자폐성으로서 자각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성서학자의 발제 중에는 조직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나에게도 계발적인 내용이 많이 있었다. 전문성 속에 자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월경적인 「우주의 맑음」(오오츠키)를, 일본의 신학적 지평에도 찾아내고 싶게 하는 것 책이었다.

2023/06/06

Taechang Kim. 일본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신학연구와 실천 - 宮平望 미야히라교수

 吴东日 is with Taechang Kim.

3 d

  · 

김태창 선생님의 말씀이 소중하여 중국어로 번역하여 남긴다.

吴东日牧师,要与中国人的历史宗教体验相融合,却不失基督教福音精髓的探索,请不要仅依赖西方神学家,应关注东亚,如在日本的基督教神学研究和实践。举一个例子,在有关三位一体神的基督教神学相关文献中,我本人也曾亲自见过并深入对话过的宫平望教授的《神の和の神学へ向けて:三位一体から三間一和の神論へ》(面向神和好的神学:从三位一体到三間一和的神论)似乎可以作为很好的研究。宫平教授在美国哈佛大学获得硕士学位,在英国牛津大学获得博士学位(神学),后在日本西南学院大学任教。这位1966年出生的年轻神学家,在深入研究西方神学的基础上,探索了融入日本文化和自然的特性,开拓了新的神学路径,可谓硕果累累。这本书是向牛津大学提交的博士论文,进行修改后,于1997年在日本出版的。

吴东日 목사님, 이제 부터 중국인의 역사적 종교적 체험내용과 융합하면서도 기독교복음의 진수를 잃지 않는 기독교개신을 위해서는 서구신학자들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동아시아, 가령 일본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신학연구와 실천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신학관련 문헌 가운데서도 저 자신이 직접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눈 바 있는 

宮平望교수의 《神の和の神学へ向けて:三位一体から三間一和の神論へ》(하나님의 화의 신학을 향하여:삼위일체에서 삼간일화의 신론으로)같은 것이 좋은 참고가 될 것같습니다. 

미야히라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신학)를 받고 西南学院大学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만났던 1966년생 젊은 신학자였고

 서양신학을 깊이 연구한 토대위에 일본문화와 자연의 특성에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 제출했던 박사논눈을 수정 가필해서 일본에서 1997년이 출판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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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の和の神学へ向けて: 三位一体から三間一和の神論へ 単行本 – 2017/5/25



投稿日1998年1月15日
カテゴリ書評タグ『福音と世界』

 独特な言葉を含んだ書名からも察せられるように、本書は伝統的なキリスト教の三位一体論を「日本の風土」の中で再構築しようとする意欲的な論考である。執筆の動機は序章に端的に示されており、それは「なぜキリスト教は日本で深く根づかないのか」という疑問に由来している。キリスト教の土着化といったことが声高に叫ばれていた頃より、こういった問いかけそのものは決して新しいものではないが、著者がその問題解決の一端を三位一体論に見いだそうとしている点に関心をそそられる。
 三位一体論は伝統的に「位格」や「実体」といった、古代ギリシア・ローマ文化に由来する用語で説明されてきた。しかし、これらの用語は日本人の伝統的思考方法には疎遠なものであり、それゆえ、日本の風土により適した用語を用いて、三位一体論を表現し直そうと著者は試みるのである。そのために西欧で形成された伝統的な三位一体論を破棄する必要はない。むしろ、著者は三位一体論についての伝統的な理解の中にも、日本の風土に通じるような考え方があることを指摘することによって、著者が三位一体論の再構築のために提起する「和」や「間」といった概念が、決して正統的信仰から乖離したものではないことを論証しようとする。その作業のために、第Ⅰ部と第Ⅱ部から構成されている本書の前半部分が用いられ、それは神学と文化の関係を問うための方法論的考察をも兼ねている。
 詳しく言うと、第Ⅰ部は、テルトゥリアーヌス、アウグスティヌス、カール・バルトら三人の神学者が事例研究として取り上げられている。いずれも三位一体論の形成に多大な貢献をした人物であるが、著者のねらいは、それらの神学者たちが、それぞれの文化的環境の中で三位一体論を表現するための素材を見いだし、しかし、ただそのままの形で受容したのではなく、聖書的な視点から「変革」し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点にある。「文化は神学の形成に情報を与える(inform)が、それ以上に聖書の釈義によって変革(transform)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一〇頁)。
 この視点から、テルトゥリアーヌスは「ストア哲学的キリスト教神学者」、アウグスティヌスは「プラトン主義哲学的キリスト教神学者」、バルトは「ヘーゲル哲学的キリスト教神学者」として特徴づけられ、それぞれが採用した固有の哲学的・文化的枠組みの変革者であることが強調される。その際、文化は(正統的な)キリスト教信仰に基づいて「修正」され、キリスト教に仕えるよう「キリスト教化」され得る「道具」と見なされている。そのような方法論的基礎づけのもとに、著者は続く第Ⅱ部で、日本人が日本の風土の中から三位一体論を語る言葉を紡ぎ出していくことは、決してキリスト教の伝統からの逸脱ではなく、むしろ必要なことであるとし、その具体案を提起していくのである。ただ、老婆心から付け加えると、一般的な読者が著者の論点を早くつかむためにはむしろ第Ⅱ部から読むことをおすすめする(一九九五年から九六年にかけて本誌において連載された「神の和の神学入門」を第Ⅱ部の一部要約として参考にすることもできる)。全体の展開の上で、第Ⅰ部は方法論的な重要性を有しているが、かなりの専門知識がなければ、納得しながらページを繰ることは困難であろう。
 さて、第Ⅱ部において、著者は日本の風土論を導入としながら、日本における三位一体論の構築にふさわしい概念として「和」と「間」という言葉を取り上げていく。和辻哲郎をはじめ代表的な日本の人間論を描写することにより、「和」や「間」という概念が日本における関係志向的・和合的特質を端的に表現する言葉として抽出される。しかも、それらの類例がキリスト教史の中に見いだされることを、ナジアンゾスのグレゴリウスやノウァティアーヌスらを引き合いに出して周到に論証している。
 これらの準備の上で、著者は、父と子と聖霊を区別し、差異化する概念として「間」を、それら三者を根源的に統一する概念として「和」を用いる。父・子・聖霊なる神は三つの「間」である(「神間」)と同時に一つの「和」である(「神和」)。神を「神間」と言うとき、それは父・子・聖霊がそれぞれの相互関係によって区別されることが意味されており、そこには三つの「間」が存在している。また、神を「神和」と言うときには、父・子・聖霊の三者の「間」にもかかわらず、起源的な一致としての「和」があることが意味されている。そして、これら「間」と「和」の緊密な関係性から「三間一和」という定式を考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一四二頁)。著者によれば、「三位一体」ではなく、「三間一和」に基盤を置く「神の和の神学」こそが日本の精神風土に適しているのであるが、同時に、著者はその聖書的適合性をヨハネ福音書の中に求め、「三間一和」の正当性を立証するための努力を惜しまない。
 以上、本書の内容を概観してきたが、最後にいくつか気づいた点を述べたい。著者は、キリスト教が日本に根づくことを願って「神の和の神学」の可能性を考察したのであるが、果たして「三位一体」を「三間一和」とすることにより、事態はどれほど変わるであろうか。思弁以上のものとして受容されるかどうか、「三間一和」の有効性は宣教の現場で問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であろう。特に「和」という概念には著者が考えている以上の繊細さが必要である。著者は確かに「和」が歴史的に有している負の側面を指摘している(一〇四頁以下)。しかし、「和」という言葉にいくら説明を加え、神学的な変革を試みたとしても、国家イデオロギーにまみれてきた「和」の歴史性をぬぐい落とすことはできない。アイヌや沖縄の人々、在日韓国・朝鮮人のことが重要な課題となっている今日、「和」という概念は倭人・ヤマトンチュ・「日本人」の自己満足を越えて、多文化的日本社会を見通す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か。むしろ、歴史の中にあった、そして今なお現実の社会の中にある差別構造を隠蔽することになりはしないだろうか。そういった細部を見る必要のない国外の人々に対して、「和」は日本の精神風土を代表する適当な言葉となるかもしれない(ちなみに、本書は著者が英国で提出した博士論文の日本語版である)。しかし、今われわれが視野に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大きな「和」の歴史の中で不当にも見過ごしにされ、伝統的な「和」の一般論では見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細部>の事柄であり、「和」の中に入れられなかった<周辺>の事情である。「和」という言葉は、あまりにも正統的過ぎるのではなかろうか。
 このことは著者の方法論とも関係している。著者は文化の問題を論じる際、しばしば引用していることからもわかるように、H・リチャード・ニーバーの『キリストと文化』における類型の一つ「文化の変革者キリスト」をモデルにしている。その意味で、「神の和の神学」も日本の文化を変革することが期待され、「変革」の類語として「修正」「矯正」などの言葉が見受けられる。著者にとって文化は自立した道具的存在である。ところが、近年、ニーバーの中に潜んでいる同様の傾向性が、社会倫理を扱う神学者たち(例えば、S・ハワーワス、J・H・ヨーダー)によって指摘され、批判されている。また、別の視点、例えばP・ティリッヒに即してこの問題を見るなら、著者の立場は「弁証神学」より、はるかに「宣教神学」に近い。文化的「状況」は第一義的には矯正すべき対象であり、「状況」からの鋭利な問いかけは巧みに回避され、自らは変革を迫られないからである。それはまた、近代日本史において「和」に内蔵されたメカニズムでもある。
 著者は「もし、三位一体論が...日本で形成されたとしたら」という問いを動機の内に含んでいる。三位一体論の日本的変容の例は、本書では触れられていないが、隠れキリシタンにおける女性原理をともなった四位一体や、戦中、いくつかの教会で唱えられた、天皇を含む四位一体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なぜ、このような形態を取ったのか。一つの理由として、伝統的な三位一体論が持つ家父長制的特質を指摘することができる。それが日本の文化の中では、女性原理による補完を求めたり、あるいは、より権威ある父権原理に服従するといった事態を生み出したのである。本書の場合、三位一体から「三間一和」という大胆な置き換えにもかかわらず、フェミニスト神学からしばしば批判される、三位一体論における男性中心主義の問題はほとんど考慮されていない。
 ポスト・オウムの時代に生きるわたしたちは、幸福な「和」のコスモロジー(和合的関係)が徹底して解体している野合的現実を認識することから出発すべきではなかろうか。


서평 「미야 히라 망저 '신의 화의 신학을 향해 - 삼위 일체에서 삼간 일화의 신론에", "복음과 세계"1998 년 1 월호, 신교 출판사 | 서평 | 연구 활동 | 오하라 카츠히로 On-Line


서평 「미야히라망망저 「신의 화의 신학을 향해――삼위일체로부터 삼간일화의 신론에」」, 「복음과 세계」1998년 1월호, 신교 출판사
게시일: 1998년 1월 15일
카테고리 서평태그『복음과 세계』

 독특한 말을 포함한 서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서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일본의 풍토' 속에서 재구축하려는 의욕적인 논고이다. 집필의 동기는 서장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왜 기독교는 일본에서 깊이 뿌리 내리지 않는가"라는 의문에서 유래하고 있다. 기독교의 토착화라고 하는 것이 성고에 외치고 있었을 무렵보다, 이러한 질문 그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그 문제 해결의 일단을 삼위일체론으로 본다고 하고 있는 점에 관심을 갖고 된다.

 삼위일체론은 전통적으로 '위격'이나 '실체'라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유래하는 용어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일본인의 전통적 사고 방법에는 소원한 것이므로, 일본의 풍토에 더 적합한 용어를 이용해, 삼위일체론을 다시 표현하려고 하고 저자는 시도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구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파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저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속에서도 일본의 풍토에 통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저자가 삼위일체론의 재구축을 위해 제기하는 '합'이나 「간」이라고 하는 개념이, 결코 정통적 신앙으로부터 괴리한 것이 아님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 작업을 위해 제1부와 제2부로 구성된 본서의 전반부가 사용되며, 그것은 신학과 문화의 관계를 묻는 방법론적 고찰도 겸하고 있다.

 자세하게 말하면, 제1부는, 테르투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발트 등 3명의 신학자가 사례 연구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모두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지만, 저자의 목적은, 그 신학자들이, 각각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삼위일체론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를 발견했지만, 단지 그대로의 형태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관점에서 '변혁'한 것을 밝히는 점에 있다. “문화는 신학의 형성에 정보를 주는(inform)가, 그 이상으로 성경의 석의에 의해 변혁(transform)되어야 하는 것이다”(10페이지).

 이 시점에서 테르투리아누스는 '스토어 철학적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 철학적 기독교 신학자', 발트는 '헤겔 철학적 기독교 신학자'로 특징지어져 각각 가 채용한 고유의 철학적·문화적 틀의 변혁자임을 강조한다. 그 때 문화는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수정"되고 기독교를 섬기도록 "기독교화"될 수 있는 "도구"로 간주된다. 그러한 방법론적 기초를 바탕으로 저자는 계속되는 제2부에서 일본인이 일본의 풍토 속에서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말을 발휘해 나가는 것은 결코 기독교 전통으로부터의 편차 대신 오히려 필요한 일이라면 그 구체적안을 제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노파에서 덧붙이면 일반 독자가 저자의 논점을 빨리 잡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 2 부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일본의 신학 ​​입문」을 제Ⅱ부의 일부 요약으로서 참고로 할 수도 있다). 전체의 전개에 있어서, 제1부는 방법론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한 전문 지식이 없으면, 납득하면서 페이지를 진행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그런데, 제Ⅱ부에 있어서, 저자는 일본의 풍토론을 도입으로 하면서, 일본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구축에 어울리는 개념으로서 「화」와 「간」이라는 말을 거론해 간다. 와쓰지 테츠로를 비롯한 대표적인 일본의 인간론을 묘사함으로써, 「화」나 「간」이라는 개념이 일본에 있어서의 관계 지향적·화합적 특질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로서 추출된다. 게다가 이들의 유례가 기독교사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나 노아티아누스 등을 끌어내며 주도에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준비에서 저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개념으로 '사이'를, 이들 삼자를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개념으로 '합'을 사용한다. 아버지, 자녀, 성령이 되는 하나님은 세 개의 ‘간’이다(‘신간’)과 동시에 하나의 ‘합’이다(‘신화’). 하나님을 '신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버지, 자녀, 성령이 각각의 상호관계에 의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하며, 거기에는 3개의 '간'이 존재한다. 또한 하나님을 '신화'라고 말할 때에는 아버지, 자녀, 성령의 삼자의 '사이'에도 불구하고, 기원적인 일치로서의 '화'가 있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러한 '간'과 '합'의 긴밀한 관계성에서 '삼간일화'라는 정식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142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간일화」에 기반을 두는 「신의 화의 신학」이야말로 일본의 정신풍토에 적합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그 성서적 적합성 을 요한복음서 안에 구하고 '삼간일화'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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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본서의 내용을 개관해 왔지만, 마지막에 몇가지 눈치챈 점을 말하고 싶다. 저자는 기독교가 일본에 뿌리 내리기를 바라며 '신의 화의 신학'의 가능성을 고찰했지만, 과연 '삼위일체'를 '삼간일화'로 함으로써 사태는 얼마나 달라질까 있을까. 사판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삼간일화'의 유효성은 선교의 현장에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합'이라는 개념에는 저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저자는 확실히 「화」가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의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104페이지 이하). 그러나 '화'라는 말에 아무리 설명을 더해 신학적인 변혁을 시도했다 해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묻혀 온 '화'의 역사성을 넘어뜨릴 수는 없다. 아이누나 오키나와의 사람들, 재일한국·조선인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 오늘, 「화」라는 개념은 왜인・야마톤츄・「일본인」의 자기만족을 넘어, 다문화적 일본 사회 을 전망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역사 속에 있었고, 지금도 현실의 사회 속에 있는 차별 구조를 은폐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세부사항을 볼 필요가 없는 국외의 사람들에 대해서, 「화」는 일본의 정신풍토를 대표하는 적당한 말이 될지도 모른다(덧붙여서, 본서는 저자가 영국에서 제출한 박사논문의 일본어판 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시야에 넣어야 하는 것은 큰 '화'의 역사 속에서 부당하게 간과되어 전통적인 '화'의 일반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부>의 일이며 '화' 속에 들어갈 수 없었던 <주변>의 사정이다. '화'라는 말은 너무 정통적이지 않을까.

 이것은 저자의 방법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저자는 문화의 문제를 논할 때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H.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있어서의 유형의 하나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 의미에서 '신의 화의 신학'도 일본의 문화를 변혁할 것으로 기대되며 '변혁'의 류어로 '수정' '교정' 등의 말을 볼 수 있다. 저자에게 문화는 자립적이고 도구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최근 니버 안에 숨어 있는 유사한 경향이 사회윤리를 다루는 신학자들(예를 들어, S. 하워와스, J. H. 요더)에 의해 지적되고 비판되고 있다. 또 다른 관점, 예를 들어 P. 티리히에 따라 이 문제를 보면, 저자의 입장은 「변증 신학」보다 훨씬 「선교 신학」에 가깝다. 문화적 「상황」은 제일의적으로는 교정해야 할 대상이며, 「상황」으로부터의 예리한 질문은 능숙하게 회피되어 스스로는 변혁을 강요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근대 일본사에서 '화'에 내장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저자는 "만약 삼위일체론이...일본에서 형성되었다면"이라는 질문을 동기 내에 담고 있다. 삼위일체론의 일본적 변용의 예는 본서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숨겨진 그리스도인의 여성 원리를 겸비한 4위 일체나 전쟁 중 일부 교회에서 주창한 천황을 포함한 4위 일체를 들 수 있다.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형태를 취했는가. 한 가지 이유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가진 가부장제적 특질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이 일본 문화 속에서는 여성 원리에 의한 보완을 요구하거나 혹은 보다 권위 있는 부권 원리에 복종하는 사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책의 경우 삼위일체에서 "삼간일화"라는 대담한 대체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신학에서 종종 비판되는 삼위일체론에서 남성 중심주의의 문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포스트 앵무새 시대에 사는 우리는 행복한 '화'의 코스몰로지(화합적 관계)가 철저히 해체하고 있는 야합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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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ォロー
責任を取り、意味を与える神―21世紀日本のキリスト教〈1〉 (21世紀日本のキリスト教 1) 単行本 – イラスト付き, 2000/7/1
宮平 望 (著)

出版社
一麦出版社
発売日
2000/7/1
言語
日本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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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品の説明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苦悩する現代日本社会への意欲的提言。「間」と「和」という日本古来の概念を通して神の三位一体性を論じ、難解な二つのたとえ話(「不正な管理人」と「婚宴」のたとえ)の聖書釈義において、人間の生と死にたいする問題に大胆に取り組む…。
内容(「MARC」データベースより)
「間」と「和」という日本古来の概念を通して神の三位一体性を論じ、難解な二つのたとえ話(「不正な管理人」と「婚宴」のたとえ)の聖書釈義において、人間の生と死に対する問題に取り組む。
登録情報
出版社 ‏ : ‎ 一麦出版社 (2000/7/1)
発売日 ‏ : ‎ 2000/7/1
言語 ‏ : ‎ 日本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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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メリカ思想

アメリカに何らかの点で関係のある思想、人物、出来事などを研究します。







アメリカはビッグなだけで、歴史が浅く、犯罪が多い、といった印象を持っている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アメリカと聞けば、ハリウッド映画やディズニーランドをまず思い起こす人もいるでしょう。しかし、アメリカは実は、世界で最も優れた研究所や大学、充実した図書館や美術館、博物館を持ち、最多のノーベル賞受賞者を輩出している国です。

豊かで、幅広い思想と文化を持つアメリカから、私たちは多くのことを学ぶ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ゼミでは、アメリカの思想や文化に関するものを取り扱っています。各自の関心に応じて、アメリカに何らかの点で関係のあるテーマであれば、それで結構です。アメリカは、言わば、すべての事柄が学問となりうる国です。一見、学問と関係ないように見えるものも、個人的な趣味も、研究テーマとして追究し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







1.アメリカ研究をする以上、続けて「英語」に特に力を入れましょう。
2.次に、アメリカは歴史的に、世界中から種々の思想・文化が流入して来た国ですので、一般「教養」を大切にし、幅広い分野から履修しましょう。
3.そして、「アメリカ」という語が講義科目に入っている「専門」科目を履修しましょう。







参考までに、最近の卒論テーマには、銃社会、ビート・ジェネレーション、マクドナルド、家族における女性の役割、キング牧師、教育論、ロック・ミュージック、讃美歌、アファーマティブ・アクション、競馬、少年犯罪、メディア、戦争論などがあります。ゼミでは、こうしたテーマをアメリカの思想的・文化的背景に照らして論文を書き上げていきます。テーマ選択にあたっては、私がテーマを学生にプロアクティブ(proactive)に提示するよりも、むしろ、ゼミ生の自発的なテーマ選択に基づいてリアクティブ(reactive)にサポートしていく予定です。







私は日本の他に、期間の長短はありますが、ドイツ、アメリカ、イギリスで学ぶ機会が与えられました。その期間、フランス、イタリア、スイスなどにも旅行しましたが、こうした体験は、思想の歴史的な流れを実感させてくれるだけでなく、1.自己の視野を拡大し、2.自己と自国を相対化し、3.他者と他国の背景を理解することによって長期的に平和の文化を造り上げる一助となることを思い知りました。特に、他国との比較において日本を振り返り、日本には1.幸いなことに徴兵制が無い、2.身近に国境が無い、3.移民の背景が比較的少ないことが、日本の現状を大きく規定していることも実感できました。留学や旅行も、学問をすることの喜びを肌で感じることのできる貴重な場です。

私の研究は、アメリカ思想、キリスト教思想、比較文化論を中心としていますが、詳しくは、拙著や1997年以降の『西南学院大学 国際文化論集』(西南学院大学学術研究所)に掲載されている拙論をご覧ください。







各自の関心に応じて推薦したい書物は異なりますので、まずは、下記の各々のアメリカ研究入門書の中から興味のある分野(章)を見て、そこに掲載されている文献を更に調べることをお勧めします。

 ■ 陣崎 克博 『アメリカ研究序説』 (英潮社,1967)
 ■ デイヴィッド・W・ノーブル 編 『アメリカ研究の方法』 (山口書店,1992)
 ■ 阿部 斉 / 五十嵐 武士 編 『アメリカ研究案内』 (東京大学出版会,1998)
 ■ 矢野 重喜 編 『新・アメリカ研究入門』 (成美堂,1998)
 ■ 川上 忠雄 編 『アメリカ文化を学ぶ人のために』 (世界思想社,1999)
 ■ 日本アメリカ文学・文化研究所 編 『アメリカ文化ガイド』 (荒地出版社,2000)
 ■ 五十嵐 武士/油井 大三郎編 『アメリカ研究入門第3版』(東京大学出版会,2003)
 ■ 古矢 旬 『新版 アメリカ学入門』 (南雲堂,2004)

アメリカ研究家として知られている有賀貞、亀井俊介、斎藤眞、猿谷要、鶴見俊輔、本間長世らによる著作も参考になるでしょう。





 また、下記の拙著も参照してください。

■ 宮平 望

 ○ 『神の和の神学へ向けて 三位一体から三間一和の神論へ』 (すぐ書房, 1997)A
 ○ Towards a Theology of the Concord of God.
     A Japanese Perspective on the Trinity,
                  (Carlisle, Cumbria: Paternoster, 2000)A
 ○ 『責任を取り、意味を与える神 21世紀日本のキリスト教 1』(一麦出版社, 2000)G
 ○ 『苦難を担い、救いへ導く神 21世紀日本のキリスト教 2』(一麦出版社, 2003)G
 ○ 『戦争を鎮め、平和を築く神 21世紀日本のキリスト教 3』(一麦出版社, 2005)G
 ○ 『現代アメリカ神学思想 平和・人権・環境の理念』 (新教出版社, 2004)A
 ○ 『ゴスペルエッセンス 君に贈る5つの話』 (新教出版社, 2004)I
 ○ 『ゴスペルフォーラム 君に贈る5つの話』 (新教出版社, 2007)I
 ○ 『ゴスペルスピリット 君に贈る5つの話』 (新教出版社, 2008)I
 ○ 『ゴスペルハーモニー 君に贈る5つの話』 (新教出版社, 2019)I
 ○ 『神の和の神学入門 21世紀日本の神学』 (新教出版社, 2005)I
 ○ 『マタイによる福音書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06)G
 ○ 『マルコによる福音書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08)G
 ○ 『ルカによる福音書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09)G
 ○ 『ヨハネによる福音書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0)G
 ○ 『使徒言行録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1)G
 ○ 『ローマ人へ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1)G
 ○ 『コリント人へ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2)G
 ○ 『ガラテヤ人・エフェソ人・フィリピ人・コロサイ人へ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3)G
 ○ 『テサロニケ人・テモテ・テトス・フィレモンへ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4)G
 ○ 『ヘブライ人へ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4)G
 ○ 『ヤコブ・ペトロ・ヨハネ・ユダの手紙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5)G
 ○ 『ヨハネの黙示録 私訳と解説』 (新教出版社, 2015)G
 ○ 『ジョン・マクマレー研究 キリスト教と政治・社会・宗教』 (新教出版社, 2017)A
 ○ 『ディズニーランド研究 世俗化された天国への巡礼』 (新教出版社, 2019)G
 ○ 『ディズニー変形譚研究 世俗化された福音への信仰』 (新教出版社, 2020)G
  *Aは専門書、Gは一般書、Iは入門書です。

   その他、ネットでhttps://miyahiranozomuhome.wixsite.com/mysiteを検索してご覧ください (宮平望のホームル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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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年度から半期の授業回数が15回から14回に変更になり、種々の古い記述が残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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