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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3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은? – 다시개벽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은? – 다시개벽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은?

-하늘은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동화되지 않는 한국적 영성을 대변한다



글: 조성환


시대의 키워드 생명과 소통

지난 학기에 대학에서 “한국철학사”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외국인 여학생으로부터 내 수업을 청강하고 싶다는 메일이 왔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현대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한국계 미국인 학생으로, 다년간 한국을 필드워크면서 제일 많이 접한 단어가 ‘생명’과 ‘공공성’인데, 내 수업계획서에 “생명과 공공성 그리고 하늘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에 접근한다”고 되어 있어서 청강을 신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은 대개 공개성, 공정성, 공평성, 공익성 등을 포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어원적으로는 서양어의 ‘public’에 기원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 “가치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국인 학생의 한국 사회 분석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공공성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세월호 사태를 분석하면서 ‘공공성’이라는 말이 화두로 등장한 것도(가령 2014년 11월 9일 sbs 뉴스 “공공성 꼴찌 국가 한국 – 세월호와 공공성”), 일차적으로는 어린 ‘생명’들이 무참히 죽어 가는 사태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생명’과 더불어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또 다른 말은 ‘소통’이다. ‘소통’은 특히 정치인들에 대해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현 대통령의 가장 큰 단점으로 ‘불통’이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소통’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생각한 공공성의 핵심 가치 중의 하나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과 더불어 ‘소통’을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의 핵심 가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생명과 소통, 이 두 가지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생명과 소통 그리고 하늘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을 탐색해 보고자 하는 시론이다.

생명과 공공성

태종실록이나 세종실록을 읽다보면 “호생지덕”(好生之德)이라는 말을 종종 접하게 된다. “호생지덕”이란 말 그대로 “생명을 좋아하는 덕”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왕의 최고 덕목이 ‘생명존중’–우리말로 하면 ‘살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한 고을에 굶어죽는 자가 발생하자 그 고을 수령에게 곤장 100대라의 형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은 위정자의 가장 큰 임무를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세종실록에 유독 ‘안민’(安民=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이라는 말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작년에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어떤 공직자도 책임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공공성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개인의 생명보호는 1차적으로 개인의 몫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병원’이라는 말 대신에 ‘활민원’(活民院)이나 ‘제생원’(濟生院)이라는 말이 쓰였다는 사실도 공공성의 핵심에 ‘생명’이 놓여 있음을 엿보게 한다. ‘병원’은 말 그대로 “병을 다루는 곳”이라는 지극히 기능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어휘이다. 이에 반해 ‘활민’이나 ‘제생’은 “생명을 살린다”는 가치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생명존중사상이 드라마틱하게 장면이 바로 퇴계이다. 퇴계는 말년에 증손자 창양을 보았는데, 불행히도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하여 창양은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다. 그때 마침 퇴계가 데리고 있던 여종 학덕이 아이를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손자 안도(=창양의 아버지)가 퇴계에게 여종 학덕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엄마 대신 여종의 젖을 창양에게 먹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퇴계는 <근사록>이라는 유교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자식을 죽일 수 없다”며 여종 학덕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창양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퇴계는 증손자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다.
우리는 흔히 ‘퇴계학’하면 ‘경학’(敬學)을 떠올린다. 여기서 ‘경학’이란 하늘이나 천리(天理)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퇴계의 ‘경’은 타인을 향한다. 그것도 신분이 미천한 노비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의 경학이 수기(修己=자기 수양)를 넘어서 경인(敬人=타인에 대한 공경)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그 바탕에는 생명 존중 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철학사에서 ‘경인’ 사상은 19세기 동학에서야 비로소 뚜렷하게 제기된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존재는 다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은 곧 ‘생명력’ 그 자체를 말함을 알 수 있다. 하늘님은 우주적 생명력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그 우주적 생명력이 개별적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시천주”라고 말한 것이다. 동학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은 이 우주적 생명력에 대한 존중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동학의 ‘경인’ 사상의 단초가 이미 퇴계에게서 배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동학의 생명 존중 사상은 퇴계사상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의 신분을 뛰어 넘은 생명사상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비도 천민(天民=하늘의 백성)이니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 세종의 말(26년 윤7월 24일)과도 상통한다. 유학과 동학, 임금과 백성이라는 이념적, 신분적 차이를 뛰어 넘어 이것들을 이어주는 개념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세종의 ‘천민’(天民)이나 퇴계나 동학의 ‘경천’(敬天)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에 대한 외경이 깔려 있다.

소통과 공공성

신라시대의 사상가 최치원은 화랑정신으로 ‘풍류’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중국의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를 포함하고(包含三敎) 뭇 생명들과 직접 접하며 교화한다(接化群生).” 여기서 ‘포함’의 의미에 대해서 김동리의 형인 범부 김정설은, 단순히 삼교를 조화시키거나 절충한 결과가 풍류도라는 뜻이 아니라, 신라 고유정신인 풍류가 먼저 있고 그 안에 이미 중국의 삼교가 들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범부 <풍류정신과 신라문화>). 한편 신학자 이정배 교수는 ‘포함’을 한국인들이 외래문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해석하였다. 달리 말하면 배제를 거부하고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는 우리가 한국의 독특한 사상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던져준다. 즉 ‘포함’이라는 말은 한 사람에게서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종교적 다원성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풍토가 바로 ‘풍류’라는 것이다. 이 풍류는 우리 말로 하면 ‘멋’의 다른 말이고, ‘멋’의 의미는, ‘포함’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면,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이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로서의 풍류정신을 멋있게 실현시킨 인물이 바로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다. 오늘날의 한국학계는 다산의 사상 체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크게 두 가지로 입장이 갈리고 있다. 하나는 그가 완전히 서학(=천주교)에 경도되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적으로 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즉 다산이 천주교에 더 경도되어 있었느냐, 아니면 유교에 더 가까웠는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의 핵심에는 ‘상제’(上帝) 개념이 있다.
‘상제’는 지금식으로 말하면 ‘인격적인 신’으로, 공자 이전의 문헌인 『시경』이나 『서경』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이고, 이후에는 16세기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시키기 위해서 쓴 한문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 ‘God’의 번역어로 채택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산이 『논어』에서 강조되는 ‘천(天)’이나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제(上帝)’를 선호한 것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는 원시유학으로 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즉 다산은 “유학자인가? 서학자인가?”라는 양자택일식의 물음에서 벗어나서, 최치원의 ‘포함’ 개념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다산은 유학과 서학을 아우르고자 한, 즉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서로 소통시키고자 한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다산에게는 처음부터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하나로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랑들에게는 최소한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라는 세 개의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상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일제시대의 종교사가인 이능화의 『백교회통』(1912년)이다. “백교회통”이란 말 그대로 “모든 종교가 장애 없이 서로 통한다”는 뜻으로, 화엄불교식으로 말하면 “백교무애”(百敎無碍) 또는 “교교무애”(敎敎無碍=종교와 종교 사이에 장애가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능화가 종교 간의 회통의 가능성을 ‘하늘’ 개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민족종교는 다 하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悉皆以天爲主)고 하면서 종교 간의 회통 가능성을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이 종교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일종의 ‘마당’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정약용에게 있어 유학과 서학의 조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전통적인 ‘하늘’ 개념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다산은 유학의 ‘天’이나 서학의 ‘God’, 혹은 양자에 결쳐있는 ‘上帝’ 개념을 한국인의 ‘하늘’ 개념으로 회통시킨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한반도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 고대 부족국가들의 전국적 규모의 제천행사, 즉 모든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이었다는 점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면 한층 설득력이 더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하늘은, 황제나 천자와 같은 한 사람이 독점하는 하늘이 아니라, 모든 이가 공유하는 가치이자 동시에 모든 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이라는 중국적 사상이 힘을 잃어가던 19세기에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사상을 기치로 내건 동학이 “서학과 동학은 모두 천도(天道)라는 점에서는 같다”면서 천주교와의 회통을 ‘하늘’ 개념에서 찾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능화가 종교사가의 입장에서 종교 간의 회통을 말하였다고 한다면, 바로 뒤에 나온 원불교는 실제로 종교 당사자의 입장에서 종교간의 융통을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불교 재단인 원광대학교의 한복판에 인류의 4대 성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정작 원불교의 창시자는 이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원불교를 상징하는 ‘원’의 이미지는 이러한 서로 다른 종교들을 ‘포함’하는, 혹은 서로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마당’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은, 이능화식으로 말하면 ‘하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사상 하에서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증산을 모두 ‘개벽’을 설파한 선지자로 극찬하였다. 여기서 ‘개벽’이란, 글자 그대로는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뜻인데,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으로 재해석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원불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사상사적 배경에서이리라.

하늘에 주목해야 할 때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사상사에서 ‘하늘’은 때로는 생명존중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전자의 예는 세종이나 동학에서 찾아볼 수 있고, 후자의 예는 동학이나 원불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의 ‘하늘’ 개념은 양자가 접해 있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사상 형태가 기본적으로 공자나 노자 혹은 붓다로 대변되는 ‘성교’(聖敎=성인의 가르침), 혹은 이러한 성인이 설파한 ‘도교’(道敎=도의 가르침)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천교’(天敎=하늘의 가르침)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국신화인 단군이 천신의 아들이고, 동학의 다른 말이 ‘천도’이며, 동학을 비롯하여 일제시대에 탄생한 민족종교들, 가령 대종교나 증산교 혹은 원불교 등에서 모두 ‘천제’(天祭=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하늘’에 대한 한국인의 외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인 유교경전인 『중용』 제1장에서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다”면서 도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고, 서양의 대표적인 근대사상가인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비참함과 신과 함께하는 최고의 행복”을 논하면서 신과의 불가분리성을 설파하였다고 한다면, 한국의 퇴계는 “상제(=하느님)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하였고, 동학의 최시형은 “하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구조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늘과의 불가분리성을 설파하는 점은, 각 문명권 간의 좋은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도’가 질서나 지침을 상징한다면 한국의 ‘하늘’은 생명과 포용을 의미한다. 하늘이 주는 애매모호함은 일신교처럼 배타적이지도 않고 유학처럼 위계적이지도 않으며 성리학처럼 이성 중심도 아니다. 하늘은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동화되지 않는 한국적 영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것은 한국인이 추구한 공공성의 최종적인 근거이자 목표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서시』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 ‘하늘’에 해당하는 일본어나 영어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외래사상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한국사상의 독특성을 말해준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세월호 사태를 보고서 “하늘님을 죽였다”고 개탄을 했을 것이고, 이능화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타 종교를 거부하는 배타적인 종교인들에 대해서 ‘하늘의 상실’을 느꼈을 것이다. 사회 각층에서 공공성의 상실이 우려되는 오늘날, 우리 전통사상에서의 ‘하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면 어떨까?

* 이 글은 『월간공공정책』 119호(2015년 9월호), 한국자치학회, <공공단상> 78~82쪽에도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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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기자명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입력 2022.04.01



공공학 공공철학


인류세, 인간에 의한 대멸종 이야기
요즘 TV를 켜면 두 갈래의 상반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편에서는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과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극적으로 이뤄진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도 두드러지는데, 가령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전례 없을 정도로 공중파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로 조금 늦은 시간대의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세계 각지의 환경악화 현상 및 그로 인한 비참함이 두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나 가뭄, 죽어가는 생명, 산불 등 빠르게 악화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뉴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현상은 인류세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후들로서, 서로 상반돼 보이지만 실은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를 부추기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는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파울 크뤼천 교수가 2000년도에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인류의 생태학적 과대 성장이 지구의 전체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지금 우리는 인간에 의한 지구상 6번째 ‘대멸종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이 야기한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려 한다. 그래서 환경 악화로 인한 세계의 비참을 고발하고, 이대로 계속될 경우 닥치게 될 암울한 종말론적인 미래상을 비관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대로 살면) 망할 것이고 이미 망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전 인류가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등.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너무 끔찍하고 두려운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도 인간이 악화시킨 지구환경은 다시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무력감과 불안감 속에서,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단기적인 감각적 쾌락에 몰입하는 현상이 반작용으로 일종의 트렌드처럼 나타나는 듯하다. 어차피 인류는 충분히 변하지 않고 있고, 어차피 너무 늦었고 망할 것이니 잊어버리자, 뭐 그런 것. 역설적이게도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오히려 사람들의 단기적인 쾌락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절망이나 외면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암울한 잿빛 전망뿐 아니라 다채로운 생명 세계의 신비에 대해, 녹색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 같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의 시야는 종종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 착안해서, 우리의 시야를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상’으로 넓히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시작된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넘어서야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이다.

낡은 애니미즘
‘애니미즘(animism)’이란 용어는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1871년에 출간된 E. B. 타일러의 『원시문화』에서 사용된 이래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이다. 1, 2권으로 이뤄진 그 책은 방대한 양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인간 문화에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야심찬 저술이었고, 타일러의 생전에 이미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로 번역됐을 뿐 아니라 10판이 인쇄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책의 인기와 함께 ‘애니미즘’이란 개념도 널리 퍼지게 됐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 책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당대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을까?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인류 문화의 보편적 법칙을 찾아내려고 시도했을 뿐 아니라 ‘애니미즘’이라는 종교 이론을 수립한 것도 『원시문화』의 인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의 종교 현상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일별한 그는 인류의 ‘하등종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교현상에 주목했다. 곧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일종의 영혼이 있다고 여기면서, 곰, 사슴 같은 동물이나 삼나무 같은 식물, 나아가 무생물까지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등의 현상 말이다. 타일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포함해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애니미즘은 “생명, 숨, 영혼”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까지, 나아가 돌 같은 사물이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까지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고 영혼이 있다고 여겼다니,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니.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 같다.

타일러에 따르면, 우리의 고대 조상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타일러는 ‘원시인’ 또는 ‘하등종족’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설명이 요구되는 두 가지 사실을 마주하고서 합리적인 답을 찾다가 모든 존재에 존재하는 영, 영혼을 상상하게 됐으리라고 보았다. 타일러가 볼 때, 원시인들이 직면한 설명이 요구되는 첫 번째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죽은 사람의 몸이 현격히 다르다는 점이다. 잠자는 사람이 누워있는 것과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외형적으로는 같아도 실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두 번째 사실은 바로 꿈이었다. 꿈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돌아다니며 말하는 형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타일러는 ‘원시인들’이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의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죽음과 꿈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았으리라고 여겼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영혼이고, 꿈속에서 나타나는 형상 역시 영혼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원시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식물, 심지어 물체의 영혼을 일반화하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 곧 영혼이 없는 존재에게 영혼이 있다고 상상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처럼 여기는 어린애 같은 믿음에 붙은 꼬리표가 애니미즘이었다. 근래까지 그 용어는 어리석은 자들의 유치하고 미개한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주로 사용됐다.

새로운 애니미즘
그런데 최근에는 근대적 시각에서 이뤄진 그러한 방식의 논의를 ‘낡은 애니미즘(old animism)’으로 규정하고, 특히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애니미즘 문화를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기보다 오히려 거기서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인 존재론,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 논의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들은 지금껏 원시인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평가절하됐던 세계 각지 원주민의 존재론과 생활방식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타일러의 시대부터 비교적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과학적 지식을 가진 우월한 ‘우리’가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너희’를 내려다보면서, 언젠가는 극복돼야 할 과거의 잔재로서 애니미즘을 다룬 것이 ‘낡은 애니미즘’ 논의였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파괴해왔고, 어리석다고 여겨져 온 ‘너희’가 오히려 생태계에 적절히 깃들어 사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에서는 ‘아니마’에서 ‘영혼’보다 ‘생명’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 원주민 사회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을 ‘살아 있는 존재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공존의 생활방식’이라고 적극적으로 재조명한다.

이 세계가 인간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 그리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밀접하게 관계를 주고받으며 공생해왔다는 점,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일원이기에 무수한 생명이 살아가는 세계에 적절히 깃들어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 이것은 오늘날 생태위기에 직면한 우리가 고통스럽게 깨우치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철학자, 의사, 화가이기도 했던 그야말로 만능 지식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1866)에서 ‘유기체와 무기적 환경,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다른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oecologie’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다(그 용어는 널리 받아들여졌고, 1893년 국제식물학회의부터 오늘날과 같이 ‘ecology’로 표기).

헤켈이 제안한 생태학의 정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관계’이다. 헤켈의 생태학 정의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오늘날 일어나는 각종 생태 문제들은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가 뒤틀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태위기의 근원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 각지 원주민의 애니미즘적 존재론과 생활방식이 오늘날 재조명되는 이유는,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적절하게 관계 맺으며 공생하는 지혜를 거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각계의 여러 학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뭇 생명과 적절한 방식으로 공생해온, 오늘날의 우리가 참고할 만한 대안이자 모델로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사회, 소규모 공동체들의 애니미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이 북미 원주민인 오지브와족의 애니미즘을 재발견한 할로웰의 글이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
인류학자인 할로웰(Irving A. Hallowell)은 1960년에 <오지브와족의 존재론, 행동, 그리고 세계관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오지브와족은 북미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이다. 할로웰은 특히 캐나다의 오지브와족을 찾아가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그들의 ‘사람(person)’ 범주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그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살피게 됐다. 할로웰은 오지브와족의 관념을 영어로 기록하면서 “인간 이외의 사람들(other-than-human persons)”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곰을 비롯한 동물, 나무를 비롯한 식물뿐 아니라 바위, 벼락 등을 포함한 여러 경험적 존재들 혹은 실재들이 포함됐다. 그의 글은 새로운 방향에서 애니미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가령 인류학자인 누리트 버드 데이비드(Nurit Bird-David)는 어떤 존재를 지역의 언어를 통해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 갖는 인식론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인간인 자기와 인간이 아닌 그가 이 세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탐구적인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까스뚜르 (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여기는 관습에 주목하면서, 타자를 알기 위해서 타자를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사람으로 칭하고 그렇게 여길 때, 그들의 예민한 생태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령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는 애니미즘을 매 순간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지각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생활방식으로 조명한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역 생태계에서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얻는 이들이 특히 이러한 생활방식을 몸에 익히고 사회적으로 전수해온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지역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관계적 태도로 임하며, 환경 속의 다른 존재들을 소통 가능한 주체들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는 눈(eye)으로 가득 차 있다
근대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종종 ‘보는 자’, ‘관찰하는 자’의 자리에 인간을 둔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인간의 관찰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때 흥미로운 부분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인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도 시점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이를 관점성으로 지칭한다.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저마다 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다. 나도 고양이를, 퓨마를, 악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자신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면 애니미즘은, 달리 말하면, ‘나는 보는 동시에 보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좀 더 민감한 존재론으로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 같다.


호주의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의 경험을 살펴보자. 1985년 2월의 어느 날,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홀로 카누를 타던 발 플럼우드는 상류의 폭우로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예상치 못하게 커다란 악어를 만나게 됐다. 악어는 카누 곁으로 돌진해왔고, 플럼우드의 카누를 되풀이해서 들이받았다. 악어는 플럼우드의 다리를 꽉 물고 몇 차례나 물속으로 처박았다. 그는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겨우겨우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플럼우드가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아름다운, 얼룩이 있는 황금색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인 자신이 다른 존재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에, 내가 이 세계를 관찰하지만 이 세계(의 존재들)도 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가령, 우리는 보통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시선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인간을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 그 의미는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대자연에 깃들어 살아온 많은 원주민 종족들의 경우, 동물이라는 인간과 다른 부류 존재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은 종종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인류학자인 빌레르슬레우(Eske Willerslev)가 연구한 시베리아 유카기르족의 사례도 우리를 응시하는 비인간 존재의 시선에 대해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유카기르족은 “세계가 눈(eyes)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동물은 물론이고 강이나 호수, 나무로부터 심지어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존재는 우리의 시선을 되받는 자신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카기르족의 세계는 인간만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만을 위한 곳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들의 세계는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면서 서로에게 감각되고 또 서로를 감각하는, 매우 감응적인 세계이다.
플럼우드는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경험 이후에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적 생태학적 맥락 안에서 죽음에 대한, 그리고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게 됐다. 애버리지니로 일컬어지는 호주 원주민의 애니미즘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심화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낡은 애니미즘’과 대비되는 자신의 철학적 애니미즘 논의를 전개했는데, 그 궁극적 목적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를 향한 종간(inter-species) 윤리를 정립하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인간이 이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비인간 타자를 동료인 행위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함께 살기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고 이 세계에는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부류의 존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학교에서 배워서 또 책을 읽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 특히 인공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도시 거주 현대인이 그러한 사실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시야는 이 세계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좁아져 있다.
최근 들어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면서,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적 통념에서는 인간이 아닌,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서 또 다른 의미의 ‘사람다움’을 발견하는 토착문화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람’이라는 용어를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까지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근대 서구 문명이 생태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들, 나아가 생태운동 활동가, 예술가, 작가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의 의미 확장이 시도되고 있다.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적용하는 흐름에는 뚜렷한 의도와 지향점이 있다. 곧, 인간이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의 일원이며,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러한 인간의 기본 조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6번째 대멸종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 인간이 다른 부류의 존재들과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에두아르도 콘이 말하듯이 “우리가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급속도로 비대해지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 이른바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잊었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고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가령 우리는 도시의 길고양이, 새, 나아가 가로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야를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미즘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의 생명성, 공동체성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webmaster@thepublicnews.co.kr 




2022/03/17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조성환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기자명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입력 2021.11.26

공공학/ 공공철학

우리가 지구상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 에드가 모랭, 『지구는 우리의 조국』 -

위험의 지구화
1990년을 전후로 서양 학계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제목이나 본문에 ‘지구(Earth)’라는 말이 들어간 학술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1988)이나 제임스 콜론의 『우리 시대를 위한 지구이야기』(1990), 에드가 모랭의 『지구는 우리의 조국』(1993)이나 데이비드 오어의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1994) 등이 그것이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서양 인문학자들의 관심이 ‘국가’에서 ‘지구’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편의상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90년 전후에 ‘지구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당시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 됐지만, 그만큼 위험도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는 국경을 넘어 온 나라와 전 지역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의 지구화’라고 했다.

생태적인 위기의식은 공포와 히스테리로 분출되면서 (…)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공동운명은 인간, 동물, 식물 사이의 한계마저도 지양하는 세계시민적인(코스모폴리탄) 일상 의식을 각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이 사회를 구축하고 (…) 전 〈지구적 위험〉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셈이다.
- 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거름, 2000, 81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

여기에서 울리히 벡은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험’이 역설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지역사회나 국가사회를 넘어선 ‘지구사회’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사회나 지구공동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을 생각하면 낯선 얘기도 아니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구소외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이듬해에 “인간들이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지구소외(Earth alienation)’이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돼 있는 우리는 마치 외부, 즉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지상에서 (…) 행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 근대 자연과학 발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 근대 과학의 기호가 됐다. (…) 근대수학은 인간을 지구에 묶인 경험의 한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식능력을 유한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20, 373~376쪽 -

여기에서 아렌트는 ‘근대성’의 본질을 ‘지구학’의 관점에서 포착해 내고 있다. 즉 근대라는 시기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지구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줬지만, 거꾸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의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에 의한 ‘천인불화天人不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구와의 조화를 지향하던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H. 로렌스의 우주상실
아렌트 이전에도 비슷한 통찰을 한 사상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D.H 로렌스(1885~1930)이다. 로렌스는 1931년에 간행된 『계시록(Apocalpse)』에서 “현대인들은 우주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마도 우리와 이교도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우주(cosmos)에 대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맺는 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점이 다 개인적이다. 경관과 하늘,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달콤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는 우리의 개인성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우주는 경관이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우주는 살아 있었다.〉 인간은 우주와 함께 ‘살았으며’ 우주를 자신보다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김명복 옮김, 『로렌스의 묵시록』, 나남출판, 1998, 51~52쪽 -

로렌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우주는 더 이상 경이로운 세계도 신비한 세계도 아니다. 전통 시대 사람들처럼 우주와 교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단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자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우주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롭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다. 그들은 우주(cosmos)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우주적 삶(cosmic life)〉이다.
- 『로렌스의 묵시록』, 59쪽 -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멋들어진 생명체였으며, 사람들은 그 생명체로부터 힘과 영광을 끌어내어, 그것에 경의와 영광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그 관계를 깨어지고 (…) 태양은 이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돼 버렸다. (…) 우주와의 교감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우주를 잃었다.
- 『로렌스의 묵시록』, 53~54쪽 -

여기에서 로렌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주상실’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아렌트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듯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을 말했듯이, 로렌스는 현대인들의 “우주와 함께 하지 않는 불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렌스는 우주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되찾는 것이고,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이다. 태양은 커다란 심장이고, 그 진동들은 우리의 핏줄을 관통한다. 달은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신경중추이고, 우리의 떨림은 거기에서 온다.
- 『로렌스의 묵시록』, 57쪽 -

내가 지구의 일부임을 나의 발은 안다. (…) 나의 개인주의는 실로 환상이다. 나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비유기적인 관계, 특히 돈과 관련된 관계들을 파괴하고, 그리고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류와 민족과 가족과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 『로렌스의 묵시록』, 235쪽 -

로렌스에 의하면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물체’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태양의 열을 받아 몸을 덥히고, 달의 빛을 따라 밤길을 거닌다. ‘혼자 산다’고 하는 ‘개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우주와 ‘함께’ 살고 있다. 이 ‘함께’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로렌스나 아렌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구소외와 천인분리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가가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가톨릭 신부인 베리는 로렌스나 아렌트가 그랬듯이, 근대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 원시 장엄의 현시로서 우주는 궁극적인 전거로 인식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긴밀한 제휴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존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 그 시기에 우주란 의미의 세계였고, 사회 질서, 경제적 생존, 질병 치유의 근본적인 틀이었다. (…) 그러나 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와 더불어 살고 있지 않다.
- 이영숙 옮김,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9~30쪽 -

문제는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가 우주를 주체들의 영적 교섭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의 집합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여기에서 베리는, 로렌스가 그랬듯이 “현대인들이 우주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주체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치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그랬듯이, 베리 역시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를 양육하고 인도하고 치유해준 행성 지구. 그러나 산업에 의한 착취가 이뤄졌던 지난 2세기 동안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남용했던 행성 지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9쪽 -

지구를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치유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지구를 대하자는 제안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존재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천지天地가 만물의 부모”라고 했듯이, 토마스 베리도 지구를 인간의 부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어우러지는 지구공동체
지구가 만물의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 부모에서 나온 친척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친교親交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울리히 벡이 ‘위험의 지구화’에 의한 ‘지구사회’ 개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베리는 정반대로 ‘친교의 지구화’를 통한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로서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돼 있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지구는 지금보다 인간과 더 친밀한 존재였다. 동물과 인간은 〈친척관계〉였다.
- 『위대한 과업』, 40쪽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것은 〈지구의 구성원들〉이며, 실상 그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지구공동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 존엄성, 자생성自生性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
- 『위대한 과업』, 17쪽-

지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동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구가 인간의 집이고 만물이 인간의 동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베리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의 지구문명론
울리히 벡이 ‘지구사회’를, 그리고 토마스 베리가 ‘지구공동체’를 강조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1921~)은 ‘지구문명(Planetary Civil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지구문명’ 개념은 ‘지구시대’(Planetary Era)나 ‘지구의식(Planetary Consciousness)’과 더불어 모랭의 지구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다.

먼저 ‘지구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탐험에 의해 “지구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류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활동”해 “지구의 일부분들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5세기 무렵에 해당하고, 이 시기의 주체는 서부유럽의 국가들이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 시기에 상응한다.

지구시대는 인류에게 ‘지구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싹트게 해준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 하나의 ‘지구인’이자 동일한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식’을 고조시킨 것은 ‘지구적 문제들(problems of a global nature)’의 출현이다. 지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지구에 대한 의식도 발전됐다(이상, 『지구는 우리의 조국』, 49~51쪽). 울리히 벡식으로 말하면 “지구적 위기”가 지구 의식을 고조시킨 것이다.

근대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
모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문명은 ‘야만화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야만화된 문명을 다시 문명화해야 하는데(civilizing of civilization), 그것이 바로 ‘지구문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구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랭은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이 ‘근대적’에서 ‘지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분되고 구획화되고 축소된 기계론적이고 분리된 지성은 〈세계의 복합성〉을 깨트려서 분리된 단편들로 만들고, 문제들을 분할하며, 이어져 있는 것을 나누고,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들이 다차원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들의 다차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위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같은 위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문제들이 점점 더 지구적인 것이 되면, 갈수록 그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생각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지구의 복합성〉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맹목적 지성은 분별도 없고 책임감도 없게 돼 버린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27쪽 -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구분 짓고 분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분리된 것들을 서로 잇고, 맥락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적 사고’다. 그러나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이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될 때,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고립될 때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그 부분들과 유리된 전체에 불과할 때 추상적인 것이 돼 버린다. 지구적 복합성의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보낸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31쪽 -

이에 의하면 모랭이 말하는 ‘지구적 사고’란 부분을 무시하고 전체만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도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화엄적 사고’이자 ‘상즉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엄밀히 ‘지구지역적 사고’(glocal thinking)라고 할 수 있다. 지구지역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넘나드는 사고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랭의 지구학은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시민운동의 형태로 부활했다. “오스트리아 평화와 갈등해결 연구센터(Austrian Study Centre for Peace and Conflict Resolution)”에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선언문」(A Manifesto for Planetary Solidarity)을 선포하고 <조국지구 캠페인>(A Campaign to Promote Planetary Awareness)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여 간다면 모랭의 바램대로 인류의 인식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행성 시대의 생태학 : 통합생태학
기자명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입력 2021.12.22 17:15  수정 2021.12.22 17: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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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 / 공공철학
행성적 사유(planetary thinking)
행성적 사유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경험에서 시작됐다. 영문학자이자 생태이론가인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게 되면서 생태학적 사유가 시작됐다고 보았다(『The Ecological Thought』). 이렇게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있다는 생태학적 존재 곧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를 구성하고 있다는 행성 시대(planetary era)가 시작됐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지구를 “물리적·생물학적·인류학적 측면이 복합된 총체”로 정의하면서 ‘지구운명공동체(earthly community of destin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공동체도 지구과 운명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20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인식의 발견이었다. 인류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지구에 속해 있으며, 지구 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그는 “지구는 조국(homeland)”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는 지구운명공동체라는 점을 깨닫고 지구를 보존하고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지구는 우리의 조국』, 이재형 옮김, 문예출판사, 1996).

전 지구적 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출현한 것처럼 오늘날 같은 행성적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행성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행성적 사유에 근거해 지구와 인간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존을 모색하기 위한 학문적 전환이 통합생태학이다.

생태학의 흐름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처음 사용한 생태학은 희랍어 ‘오이코스(oikos)’에서 나온 ‘에코(eco)’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가 결합된 용어로 유기체와 자연환경과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생태학은 노르웨이 철학자 아느 네스(Arne Naess)의 심층생태론(deep ecology)과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라는 두 흐름으로 전개됐다. 심층생태학은 생태중심주의, 근본생태론, 영성생태론의 흐름을 포괄한다.

우선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전환을 주장한다. 다양성과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시선에서 인간을 생태계 하나의 종種으로 보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공생적 존재’로 파악한다. 반면 사회생태론은 북친의 영향 아래 성립된 생태주의를 지칭한다. 북친은 사회문제를 무시하고 인간-자연의 측면만으로 생태문제를 바라보는 심층생태론을 비판하면서 생태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의 변화 없이는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박준건, 「생태적 세계관, 생명의 철학」,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엮음, 『인문학과 생태학-생태학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모색』, 백의, 2001, 64~75쪽).
통합생태학으로의 전환
생태학이 생물학적 연구에서 차츰 다양한 학문적 영역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은 생태 위기가 인류 및 지구 행성 자체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면서부터이다. 최근에는 통합생태학(integral ecology)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통합생태학은 세 가지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첫째, 생태 위기에 대한 대응은 다차원적인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둘째, 오늘날 지구와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의 위기 즉 행성 공존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사유를 통해 여러 생태적 지혜를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사고이다. 즉 오늘날의 생태 위기는 단순히 자연환경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정치적 문제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펠릭스 카타리의 생태철학
프랑스 녹색당 창당 멤버였던 지구철학자(geophilosopher)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세 가지 생태학』(윤수종 옮김, 동문선, 2003)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요한 문제로 설정한 환경생태학,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는 사회생태학, 이 세계의 상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연결돼 있다는 마음생태학 등 세 가지 흐름을 도식으로 표현했다. 가타리가 세 가지로 생태학을 분류하고 있지만, 지구적 차원의 생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세 가지 생태학의 작용 영역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생태철학(Écosophie)’은 세 가지 생태학을 통합시키기 위한 개념이다. 가타리는 이렇게 세 가지 생태학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주체성 생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통합생태학은 마음생태학에서 시작한다.

카타리는 네트워크나 공동체 속에서 어떤 특이점이 발생했을 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분자혁명론’과 결부시켜, 마음생태학의 영역을 주체성 혹은 특이성 생산기제로 보고 있다. 마음생태학을 통해 주류 사회와 다른 특이성을 창출시켜, 마치 생태계에서 부분의 변화가 전체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특이성이 출현하게 되면 생태계에 의존하는 자본주의는 고장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신승철, 「환경과 민주주의: 생명위기 시대에서 생태 민주주의 역할- 가타리의 생태학적 구도와 주체성 논의를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5, 2011, 50쪽).

생태지혜의 통합
통합생태학의 두 번째 흐름은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행성적 차원의 생태 위기를 설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이 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과학, 인문학 등 다양한 접근방식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생태학의 통합적 접근을 주장했다.

보프는 생태학을 “관계의 학문이자 관계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기존 살아 있는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된 생물학적 생태학 개념의 전환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면서 생태학을 “살아 있는 존재이든 그렇지 않은 존재이든 모든 존재가 자신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갖는 관계, 상호작용, 대화”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런 생태학 개념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자연과의 관계(환경생태학)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사회생태학, 인간생태학)와 연결된다.

그는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관점에서 생태학을 학제적 학문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생태학적 기본자세를 전체론 또는 통합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주장에 기초해 소외된 사람들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위협받고 있는 행성적 위기사태에서 모든 실천과 지식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다원주의에서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하듯, 생태학을 ‘기술의 길(생태 기술학)’, ‘정치의 길(생태 정치학)’, ‘사회의 길(사회 생태학)’, ‘윤리의 길(생태 윤리학)’, ‘정신의 길(정신 생태학)’, ‘영성의 길(우주적 신비)’ 등 ‘길’로 설명한다.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생태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환경생태학은 사회적 악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즉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과 생태 위기를 연결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생태신학』, 김항섭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3).

여기서 그는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다. 해방신학자인 대니얼 크스티요는 이러한 흐름을 ‘생태해방신학’으로 개념화했다(『생태해방신학』, 안재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 보프의 통합생태학은 생태적 위기가 단순히 생태 위기 문제가 아니라 행성적 차원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담론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가난한 자’와 ‘지구’의 통합적 해방을 위해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다(『생태공명』,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 : 해방신학과 생태학의 통합
주지한 바와 같이, 해방신학과 생태학의 통합을 주장한 보프는 해방신학과 생태 담론 모두 가난의 상처와 지구에 가해지는 약탈이라는 두 상처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해방신학이 생태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생태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다. 즉 가난한 이들과 억압당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생태적 곤경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프는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사회정의)과 인간이 자연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생태정의) 등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를 통합시킨다. 또한 지구도 인류의 진보와 발전모델의 탐욕[지구학살]으로 울부짖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 모두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프의 해방신학과 생태학을 통합시킨 해방생태학은 ‘위기의 지구’와 ‘기후위기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통합적으로 해방키기 위한 시도이다(『생태공명』,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그래서 보프가 주장하는 통합적 해방은 인간과 인간, 지구와 인간, 인간과 만물의 평화 곧 ‘지구평화’(Earth Peace)로 개념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관련돼 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통합생태학’을 논의한다.

생태 위기가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 곧 그들의 예술과 시,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괴한 모든 것을 바로잡게 하는 생태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어떠한 학문 분야나 지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와 그 고유 언어도 포함됩니다.
- 『찬미받으소서』 63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5 -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의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종교생태학을 포함한 다양한 생태지혜를 수렴해 생태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한다. 이렇게 교황은 생태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산업문명이 어떻게 지구를 착취했고, 불평등을 초래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통합생태학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 위기의 근원을 ‘기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에서 찾았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다른 시각, 사고방식, 정책, 교육, 생활방식, 영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찬미받으소서』 63항).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학의 사유가 확인된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회칙은 “모든 것은 관련돼 있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환경위기와 사회위기가 별개의 위기가 아닌 환경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복합적 위기에 당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통합생태론의 성찰을 제안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환경은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생태문제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회기능, 경제, 행태, 유형, 현실 이해 방식에 대한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찬미받으소서』 139항).

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 『찬미받으소서』 49항 -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프와 동일하게 가난한 이들과 지구의 취약함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그에게 지구를 소외시키고 약탈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것(생태적 불평등)은 분리된 것이 아닌 긴밀하게 연결된 위기이다. 그래서 생태 위기와 사회 위기는 분리된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복합적 위기로 인식된다. 따라서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환경, 경제, 사회, 문화 나아가

한국의 생명학과 생명운동
한국의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는 생명운동이다. ‘환경’문제를 사회문제로 간주하고 생명의 살림이라는 이념적 차원에서 운동화한 것으로, 근대 산업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해 인간과 생태 곧 모든 생명의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한살림”은 대표적인 한국 생명운동단체이다. ‘한살림’은 ‘모든 생명을 함께 살린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산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룬다’, ‘모든 생명은 유기적 연관 속에서 더불어 무한하게 공생한다’는 등을 의미한다(이상국, 「한살림운동이란?」. 『도시와 빈곤』. 통권 19호. 1995). 『한살림선언』(1989)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이며,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고,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라는 문구는 보프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학적 사유를 연상시킨다.

김지하는 한국 생명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지하는 1980년대부터 생명학과 그에 기반한 생명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생명이 위태롭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심각히 오염돼 있다. 그것을 먹어야 하는 인간 생명도 위태롭다”라고 지구적 위기를 진단하고 죽임에서 살림의 문명으로의 전환을 주장했다(『생명과 평화의 길』. 문학과지성사, 2005). 김지하는 지구적 생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태학, 동학, 풍수학 등이 상호 보완적으로 통합해야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생명학’을 모색했다.

그는 ‘환경’은 모든 생명계를 인간의 병풍 혹은 무대장치로 보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관점이며, 무기물도 자기 조직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생명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생명계와 무생명계를 구분하는 생태학 역시 분명한 한계를 지고 있다고 비판한다(『생명학 1-생명사상이란 무엇인가』. 화남, 2008). 지구와 우주 전체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질서에 대한 근원적 인식에 기초한 생태학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전일적 사유를 통해 생태학이 변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주창한 ‘생명학’ 혹은 ‘우주생명학’은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종합학[통합생태학]이다.

지구평화운동으로서 생명평화 운동
생명운동은 평화사상과 만나면서 ‘생명평화운동’으로 확장된다. 생명운동이 ‘생명평화운동’이라는 보다 넓은 사회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평화’ 개념은 2000년 10월 21일 조계사에서 진행된 ‘새만금농성선포식’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여기서 ‘생명평화’는 생명과 평화의 합성어가 아닌 ‘생명의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임은경, 「“80년대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지금은 환경운동” - ‘생명평화’라는 용어와 ‘삼보일배’를 처음 만든 소설가 최성각」. 『월간말』 11월호, 2007). 그래서 ‘생명평화’에는 지구, 인간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본격적인 생명평화운동은 ‘지리산 살리기운동’이 모태가 된 2003년에 시작된 ‘생명평화결사운동’이다. 「생명평화서약문」을 통해 지구평화로서 생명평화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생명평화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모든 생명, 모든 존재 사이의 대립과 갈등, 억압과 차별을 씻어내고,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다정하게 어울려 사는 길이며, 저마다 생명의 기운을 가득 채워 스스로를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 『생명평화서약문』 -

‘생명평화’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모든 생명의 평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평화 즉 지구평화론이다. 개신교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한 김용복은 평화운동은 생명운동의 출발이고 생명운동은 평화운동의 포괄적 지평이라고 주장하면서,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평화운동은 인간 생명에만 한정돼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평화와 자연의 평화를 통합시킨 생명평화운동을 제창한다(「평화운동은 생명운동이다」, 『YMCA생명평화운동구상』, 한국YMCA전국연맹 생명평화센터, 2007).

우리가 꿈꾸는 생명평화의 삶은 모든 생명이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세상이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생명평화마중물 <창립 취지서> -

위의 인용문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생명평화 운동가인 문규현 신부가 2004년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과 평화운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한 ‘생명평화마중물’의 <창립취지서>의 내용이다. 모든 것이 생명이고, 이러한 생명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평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생명학과 생명평화운동은 생명을 행성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면서 지구공동체의 공생을 위한 지구평화학이며 지구평화운동이다.

최근 인류세는 지질학, 생물학, 기후학, 지구시스템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횡단하면서 성찰되고 있다. 인류세는 단순히 지질학적, 기후학적 문제가 아닌 인간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세는 지구의 고통,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성적 사유와 함께 지구와 지구생명체들과의 적절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재성찰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통합생태학의 의의가 있다.

※ 이글은 필자의 「통합생태학의 지구적 전개」(『한국종교』 50, 2021)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webmaster@thepub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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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기자명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입력 2021.11.26 10:20

공공학/ 공공철학

우리가 지구상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 에드가 모랭, 『지구는 우리의 조국』 -

위험의 지구화
1990년을 전후로 서양 학계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제목이나 본문에 ‘지구(Earth)’라는 말이 들어간 학술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1988)이나 제임스 콜론의 『우리 시대를 위한 지구이야기』(1990), 에드가 모랭의 『지구는 우리의 조국』(1993)이나 데이비드 오어의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1994) 등이 그것이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서양 인문학자들의 관심이 ‘국가’에서 ‘지구’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편의상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90년 전후에 ‘지구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당시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 됐지만, 그만큼 위험도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는 국경을 넘어 온 나라와 전 지역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의 지구화’라고 했다.

생태적인 위기의식은 공포와 히스테리로 분출되면서 (…)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공동운명은 인간, 동물, 식물 사이의 한계마저도 지양하는 세계시민적인(코스모폴리탄) 일상 의식을 각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이 사회를 구축하고 (…) 전 〈지구적 위험〉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셈이다.
- 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거름, 2000, 81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

여기에서 울리히 벡은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험’이 역설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지역사회나 국가사회를 넘어선 ‘지구사회’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사회나 지구공동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을 생각하면 낯선 얘기도 아니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구소외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이듬해에 “인간들이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지구소외(Earth alienation)’이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돼 있는 우리는 마치 외부, 즉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지상에서 (…) 행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 근대 자연과학 발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 근대 과학의 기호가 됐다. (…) 근대수학은 인간을 지구에 묶인 경험의 한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식능력을 유한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20, 373~376쪽 -

여기에서 아렌트는 ‘근대성’의 본질을 ‘지구학’의 관점에서 포착해 내고 있다. 즉 근대라는 시기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지구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줬지만, 거꾸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의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에 의한 ‘천인불화天人不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구와의 조화를 지향하던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H. 로렌스의 우주상실
아렌트 이전에도 비슷한 통찰을 한 사상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D.H 로렌스(1885~1930)이다. 로렌스는 1931년에 간행된 『계시록(Apocalpse)』에서 “현대인들은 우주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마도 우리와 이교도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우주(cosmos)에 대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맺는 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점이 다 개인적이다. 경관과 하늘,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달콤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는 우리의 개인성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우주는 경관이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우주는 살아 있었다.〉 인간은 우주와 함께 ‘살았으며’ 우주를 자신보다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김명복 옮김, 『로렌스의 묵시록』, 나남출판, 1998, 51~52쪽 -

로렌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우주는 더 이상 경이로운 세계도 신비한 세계도 아니다. 전통 시대 사람들처럼 우주와 교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단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자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우주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롭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다. 그들은 우주(cosmos)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우주적 삶(cosmic life)〉이다.
- 『로렌스의 묵시록』, 59쪽 -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멋들어진 생명체였으며, 사람들은 그 생명체로부터 힘과 영광을 끌어내어, 그것에 경의와 영광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그 관계를 깨어지고 (…) 태양은 이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돼 버렸다. (…) 우주와의 교감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우주를 잃었다.
- 『로렌스의 묵시록』, 53~54쪽 -

여기에서 로렌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주상실’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아렌트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듯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을 말했듯이, 로렌스는 현대인들의 “우주와 함께 하지 않는 불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렌스는 우주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되찾는 것이고,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이다. 태양은 커다란 심장이고, 그 진동들은 우리의 핏줄을 관통한다. 달은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신경중추이고, 우리의 떨림은 거기에서 온다.
- 『로렌스의 묵시록』, 57쪽 -

내가 지구의 일부임을 나의 발은 안다. (…) 나의 개인주의는 실로 환상이다. 나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비유기적인 관계, 특히 돈과 관련된 관계들을 파괴하고, 그리고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류와 민족과 가족과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 『로렌스의 묵시록』, 235쪽 -

로렌스에 의하면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물체’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태양의 열을 받아 몸을 덥히고, 달의 빛을 따라 밤길을 거닌다. ‘혼자 산다’고 하는 ‘개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우주와 ‘함께’ 살고 있다. 이 ‘함께’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로렌스나 아렌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구소외와 천인분리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가가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가톨릭 신부인 베리는 로렌스나 아렌트가 그랬듯이, 근대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 원시 장엄의 현시로서 우주는 궁극적인 전거로 인식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긴밀한 제휴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존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 그 시기에 우주란 의미의 세계였고, 사회 질서, 경제적 생존, 질병 치유의 근본적인 틀이었다. (…) 그러나 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와 더불어 살고 있지 않다.
- 이영숙 옮김,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9~30쪽 -

문제는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가 우주를 주체들의 영적 교섭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의 집합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여기에서 베리는, 로렌스가 그랬듯이 “현대인들이 우주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주체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치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그랬듯이, 베리 역시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를 양육하고 인도하고 치유해준 행성 지구. 그러나 산업에 의한 착취가 이뤄졌던 지난 2세기 동안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남용했던 행성 지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9쪽 -

지구를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치유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지구를 대하자는 제안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존재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천지天地가 만물의 부모”라고 했듯이, 토마스 베리도 지구를 인간의 부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어우러지는 지구공동체
지구가 만물의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 부모에서 나온 친척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친교親交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울리히 벡이 ‘위험의 지구화’에 의한 ‘지구사회’ 개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베리는 정반대로 ‘친교의 지구화’를 통한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로서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돼 있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지구는 지금보다 인간과 더 친밀한 존재였다. 동물과 인간은 〈친척관계〉였다.
- 『위대한 과업』, 40쪽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것은 〈지구의 구성원들〉이며, 실상 그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지구공동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 존엄성, 자생성自生性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
- 『위대한 과업』, 17쪽-

지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동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구가 인간의 집이고 만물이 인간의 동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베리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의 지구문명론
울리히 벡이 ‘지구사회’를, 그리고 토마스 베리가 ‘지구공동체’를 강조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1921~)은 ‘지구문명(Planetary Civil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지구문명’ 개념은 ‘지구시대’(Planetary Era)나 ‘지구의식(Planetary Consciousness)’과 더불어 모랭의 지구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다.

먼저 ‘지구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탐험에 의해 “지구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류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활동”해 “지구의 일부분들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5세기 무렵에 해당하고, 이 시기의 주체는 서부유럽의 국가들이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 시기에 상응한다.

지구시대는 인류에게 ‘지구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싹트게 해준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 하나의 ‘지구인’이자 동일한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식’을 고조시킨 것은 ‘지구적 문제들(problems of a global nature)’의 출현이다. 지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지구에 대한 의식도 발전됐다(이상, 『지구는 우리의 조국』, 49~51쪽). 울리히 벡식으로 말하면 “지구적 위기”가 지구 의식을 고조시킨 것이다.

근대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
모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문명은 ‘야만화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야만화된 문명을 다시 문명화해야 하는데(civilizing of civilization), 그것이 바로 ‘지구문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구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랭은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이 ‘근대적’에서 ‘지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분되고 구획화되고 축소된 기계론적이고 분리된 지성은 〈세계의 복합성〉을 깨트려서 분리된 단편들로 만들고, 문제들을 분할하며, 이어져 있는 것을 나누고,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들이 다차원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들의 다차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위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같은 위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문제들이 점점 더 지구적인 것이 되면, 갈수록 그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생각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지구의 복합성〉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맹목적 지성은 분별도 없고 책임감도 없게 돼 버린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27쪽 -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구분 짓고 분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분리된 것들을 서로 잇고, 맥락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적 사고’다. 그러나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이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될 때,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고립될 때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그 부분들과 유리된 전체에 불과할 때 추상적인 것이 돼 버린다. 지구적 복합성의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보낸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31쪽 -

이에 의하면 모랭이 말하는 ‘지구적 사고’란 부분을 무시하고 전체만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도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화엄적 사고’이자 ‘상즉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엄밀히 ‘지구지역적 사고’(glocal thinking)라고 할 수 있다. 지구지역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넘나드는 사고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랭의 지구학은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시민운동의 형태로 부활했다. “오스트리아 평화와 갈등해결 연구센터(Austrian Study Centre for Peace and Conflict Resolution)”에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선언문」(A Manifesto for Planetary Solidarity)을 선포하고 <조국지구 캠페인>(A Campaign to Promote Planetary Awareness)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여 간다면 모랭의 바램대로 인류의 인식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webmaster@thepublicnews.co.kr

2021/10/12

공공철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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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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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公共哲學)은 최소한 두 개의 철학적 과제로 분리된다.

공공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중 한 과제는 철학을 통한 공공의 중요성 문제에 역점을 두는 것으로 특히 공공정책, 도덕성,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공철학은 내용의 문제이지 스타일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철학적 문제와 관련되어야 하지만 어떤 행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공공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중 두 번째 과제는 공공적 행위 중에서 철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Essays in Philosophy 특별판((Vol 15, issue 1, 2014)에서 볼 수 있는데 공공철학을 일반인과 함께 비학술적인 면에서 철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 공공철학은 이런 면에서 보면 스타일의 문제이지 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 것은 어떤 철학적 문제건 공공에 관한 것을 다루는 것이다. 어떤 공공철학자는 학문적인 전문가이지만 다른 이들은 가르치고 전문학술지에 논문을 쓰는 것 같은 학술활동에서 벗어난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있다.

관점[편집]

공공철학네트워크의 창설자 중 한 학자인 샤론 미거는 공공철학이란 단순히 공공적인 면에서 철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진정한 공공철학은 철학자가 사회지식의 학도가 되고 자신의 공공적인 일을 깊이 숙고하는 일인 것이다. 철학이 철학과 접함을 통해 공적인 것에 이득을 주는 만큼, 공공에의 접촉연계로부터 보탬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으로 일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문제점을 미리 안다고 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의 경험에서 문제를 이끌어내고 정리체계화한다. 더욱이, 공개적으로 참여한 철학은 철학자 자신이 그 대중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철학자 자신의 대중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2] .

공공철학은 단순히 공공장소에서 수행되는 철학이라는 대안적인 견해를 가진 철학자들은 두 가지 프로젝트와 연계성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이 중 하나는 대중과 협력하여 공공 문제를 식별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대중과 다른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법은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철학을 재건하는 필요성에 대한 작품에서 종종 영감을 얻는다[3]. 두 개의 접근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철학자 마이클 J. 센델은 공공철학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인 법적인 논쟁에서 철학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대 대중 담론에 설명을 할 수 있도록 도덕적, 정치적 철학을 가져와 적용하는 것입니다[4]

제임스 툴리는 공공철학의 역할은 공공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5]. Tully의 접근 방식은 시민권, 시민의 자유 및 비폭력이라는 경쟁 개념을 통해 실천을 강조합니다[6]. 어떤 의미에서는 공공철학은 스타일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용의 문제이다. 공공철학은 이런 면에서 공공장소에서 수행될 필요가 없고, 철학적인 문제의 특정부분을 다루어야 한다.


공공철학자[편집]

마국철학회는 2007년에 공공철학위원회를 설립하였다[7].

또한 공공철학네트워크가 2년에 한번 공공철학의 진보에 관한 학회를 개최한다[8].

다양한 개인들이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공공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학자로 Cornel West, Jürgen Habermas, Martha Nussbaum, Richard Rorty,[9] 와 James Tully가 있으며, 학자가 아닌 사회활동가로는 Jane Addams[10]가 있고, 소설가로는 Ayn Rand[11]가 있다.

사사키 타케시

김태창


참조[편집]

  • 공공지식인

참고문헌[편집]

주요인용문헌 Wikipedia “Public Philosophy” retrieved on 19 December 2019, at 02:44.

1.^ Weinstein, Jack Russell (2014). "Public Philosophy: Introduction". Essays in Philosophy. 15 (1): 1–4. doi:10.7710/1526-0569.1485.

2.^http://api.ning.com/files/C*75Xw4bA4cU7vHOHS-zlLRmkdBskXa9IzuVBCJKtjhmSgMrQy8tWTu1s9vqumPuG2gyJfaPzwWJ1Tu4*NoJIUVYUXtPpC37/KetteringreportfinalcorrectedFeb2013.pdf

3.^ See part two of Volume I of The Essential Dewey: Pragmatism, Education, Democracy edited by Larry A Hickman and Thomas M. Alexander,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4.^ Sandel, Michael J. (2005). Public Philosophy: Essays on Morality in Politic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 5. ISBN 0-674-01928-8. OCLC 60321410.

5.^ Tully, James. Public Philosophy in a New Key: Volume 1, Democracy and Civic Freedom. Ideas in Context seri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3. ISBN 978-0-521-44961-8. OCLC 316855971.

6.^ James Tully, especially Chapter 9 "On local and global citizenship: an apprenticeship manual," Public Philosophy in a New Key, Volume II: Imperialism and Civic Freedom. Ideas in Context seri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43-309.

7.^ http://www.apaonline.org/members/group.aspx?id=110441

8.^ http://publicphilosophynetwork.ning.com/

9.^ Posner, Richard A. (2003). Public Intellectuals: A Study of Decline (paperback ed.).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p. 320–321. ISBN 0-674-01246-1. OCLC 491547976.

10.^ Hamington, Maurice (June 15, 2010). Zalta, Edward N. (ed.). "Jane Addam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etrieved November 1, 2013.

11.^ Sciabarra, Chris Matthew (1995). Ayn Rand: The Russian Radical.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p. 97. ISBN 0-271-01440-7. OCLC 31133644.

시리즈『공공철학』(총20권) 사사키 타케시 김태창 공동편찬(도쿄대학출판회 2001-2006)(일서)

시리즈『이야기론』(총3권) 공동편찬(도쿄대학출판회 2007)(일서)

『공공철학을 서로 말한다』(도쿄대학출판회 2010)(일서)

『함께 공공철학 한다』(도쿄대학출판회 2010) (일서)

시리즈『공공하는 인간』전5권(도쿄대학출판회 2010-2011)(일서)

김태창 2007.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현실 82-98. 철학문화연구소

마이클 샌들 2005. Public Philosophy.

윤용택 2011.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 시민인문학. 20:325-340.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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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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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philosophy is a label used for at least two separate philosophical projects. One project often called "public philosophy" is to address issues of public importance through philosophy, especially in the areas of public policymorality and social issues.[citation needed] In this conception, public philosophy is a matter of content, not style.[citation needed] It must concern certain philosophical issues, but may be undertaken in any venue.[citation needed] The second project often called public philosophy is to engage in philosophy in public venues. This view is exemplified by the Essays in Philosophy special issue on public philosophy (Volume 15, issue 1, 2014), which defined public philosophy as "doing philosophy with general audiences in a non-academic setting".[1] Public philosophy, in this conception, is a matter of style not content. It must be undertaken in a public venue but might deal with any philosophical issue.

Some public philosophers are academic professionals, but others may work outside of the usual academic contexts of teaching and writing for peer-reviewed journals.

Perspectives[edit]

According to one of the founders of the Public Philosophy Network, Sharon Meagher, “'public philosophy' is not simply a matter of doing philosophy in public. A truly public philosophy is one that demands that the philosopher both become a student of community knowledge and reflect on his or her public engagement, recognizing that philosophy can benefit at as much from public contact as can the public benefit from contact with philosophy. The publicly engaged philosopher does not assume that he or she knows the questions in advance, but draws on his or her experiences in the community to develop and frame questions. Further, publicly engaged philosophy demands accountability on the part of the philosopher to his or her publics—understanding that philosophers are themselves members of those publics."[2]

Philosophers who hold the alternative view, that public philosophy is simply philosophy undertaken in public venues, are engaged in two projects. One of these is to educate the public and the other to engage with the public collaboratively to identify and address public problems. The second approach is often inspired by John Dewey's work on democracy and the need to reconstruct philosophy.[3] The two approaches are not exclusive. For instance, philosopher Michael J. Sandel describes public philosophy as having two aspects. The first is to "find in the political and legal controversies of our day an occasion for philosophy". The second is "to bring 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to bear on contemporary public discourse."[4] James Tully says, "The role of a public philosophy is to address public affairs", but this "can be done in many different ways."[5] Tully's approach emphasizes practice through the contestable concepts of citizenship, civic freedom, and nonviolence.[6] Public philosophy, in some conceptions, is a matter of content rather than style. Public philosophy, in this sense, need not be undertaken in a public venue but must deal with a particular subset of philosophical problems.

It is commonplace to argue that public philosophy promotes democracy, but Jack Russell Weinstein, director of The Institute for Philosophy In Public Life argues that this argument assumes philosophers are better citizens than non-philosophers. It also assumes, he writes, "that rational argumentation plays an essential part in democratic participation," but that "citizens consistently act on false information, skewed attitudes, gut reactions, prejudices, and malicious motives."[7]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created a Committee on Public Philosophy in 2007.[8] Also the Public Philosophy Network has been holding conferences once every two years on advancing public philosophy.[9] A variety of individuals have been identified, either by themselves or others, as public philosophers. These include academics such as Cornel WestJürgen HabermasMartha NussbaumRichard Rorty,[10] James TullyJack Russell Weinstein and non-academics such as social activist Jane Addams[11] and novelist Ayn Rand.[12]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Weinstein, Jack Russell (2014). "Public Philosophy: Introduction". Essays in Philosophy15 (1): 1–4. doi:10.7710/1526-0569.1485.
  2. ^ "Create your own social network with the best community website builder - NING" (PDF).
  3. ^ See part two of Volume I of The Essential Dewey: Pragmatism, Education, Democracy edited by Larry A Hickman and Thomas M. Alexander,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4. ^ Sandel, Michael J. (2005). Public Philosophy: Essays on Morality in Politic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 5ISBN 0-674-01928-8OCLC 60321410.
  5. ^ Tully, James (18 December 2008). Public Philosophy in a New Key: Volume 1, Democracy and Civic Freedom. Ideas in Context seri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3. ISBN 978-0-521-44961-8OCLC 316855971.
  6. ^ James Tully, especially Chapter 9 "On local and global citizenship: an apprenticeship manual," Public Philosophy in a New Key, Volume II: Imperialism and Civic Freedom. Ideas in Context seri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43-309.
  7. ^ Weinstein, Jack Russell (2014). "What Does Public Philosophy Do? (Hint: It Does Not Make Better Citizens)"Essays in Philosophy15 (1): 33–57. doi:10.7710/1526-0569.1488.
  8. ^ http://www.apaonline.org/members/group.aspx?id=110441
  9. ^ "Sorry! We're under maintenance"publicphilosophynetwork.ning.com.
  10. ^ Posner, Richard A. (2003). Public Intellectuals: A Study of Decline (paperback ed.).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p. 320–321. ISBN 0-674-01246-1OCLC 491547976.
  11. ^ Hamington, Maurice (June 15, 2010). "Jane Addams". In Zalta, Edward N. (ed.).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etrieved November 1, 2013.
  12. ^ Sciabarra, Chris Matthew (1995). Ayn Rand: The Russian Radical.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p. 97ISBN 0-271-01440-7OCLC 31133644.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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