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백승종 교수님 글)
예수와 유다교
오래전부터 저는 예수가 유다교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였습니다. 얄팍한 제 지식으로 헤아려보면 예수는 유다교의 전통을 극복한 이로만 보였어요. 성경 속의 예수는 말과 행동으로 유다교의 오랜 관습을 부정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가령 안식일에도 그는 고통받는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아침에 한 권의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서를 깊이 연구하시는 분들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김근수 선생의 책, <<예수평전>>(동녘, 2021)에는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최근 주석학(성서 주석학이요)에서는 예수를 유다교의 다양한 모습 안에 그대로 놓고 보려는 흐름이 강하다. 기적도, 비폭력도, 종말론적 희망도, 소외된 사람에 대한 약속도, 예수에 대해 알려진 내용 가운데 어느 것도 예수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은 유다교 밖으로 나올 생각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유다교 내부의 묵시 사상을 윤리적으로 깊게 완성한 것이다.”(김근수, 같은 책, 209쪽)
김 선생의 이런 주장은 그의 무책임한 억측이 아닙니다. 선생이 달아둔 주석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서양의 탁월한 성서학자들은 이미 110년 전에도 예수와 유다교의 관계를 그렇게 말해왔어요. 놀라운 일이지요. 특히 슈바이처(Schweizer, A.)가 그렇더군요. 현대에 이르러 슈바이처 등의 학설이 이제 정설로 자리 잡은 느낌입니다(예: Sanders, Ed, Jesus and Judaism, London/Philadelphia, 1991, 3판).
<<예수평전>>을 읽으며 세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첫째, 새로운 주장/사조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과거의 관습이나 제도와 아주 다른 것이라며 환호하거나 배척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깊이 헤아려보면, 새것과 낡은 것이 흑백으로 선명하게 나뉘기보다는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입니다. ‘검찰 공화국’과 ‘유신 군사독재’, ‘태극기’, ‘촛불시민혁명’, ‘페미니즘’도 아마 그럴 줄로 압니다.
흔히 우리는 조선 시대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도 상반된 것으로만 보기가 쉽지요.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요. 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교회와 개혁파(프로테스탄트)는 또 얼마나 달랐을까요. 동학은 성리학이나 불교적 사유와 어떤 관계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새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전통에서 완전히 이탈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것은 전통에 내재하는 어떤 사상적 요소를 깊은 차원에서 완성하려는 시도였을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둘째, 중요한 것은 말이지요. 헌 것에서 새것이 출발하였더라도 그것은 결국에 새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낡은 것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우유부단하고 책임감이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은 서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지요. 그 공유부분은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비중이 큽니다.
더욱더 피부에 와 닿는 예를 들어볼까요. 현대의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적으로 볼 때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깝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일본인과 역사를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적어도 갈라진 지가 최소한 5천 년은 된다고 합니다. 이건 완전히 서로 다른 언어지요. 요컨대, 분화가 시작된 지점 – 분기점이라고 하지요 –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서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좀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으로, <<예수평전>>을 다시 살피면서 이 책의 저자 김근수 선생이 참으로 탁월한 성서학자라고 거듭 확신하였습니다. 김 선생은 이 한권의 책을 쓰려고 수백 편의 논문과 저서를 꼼꼼히 읽고 인용하였어요. 대개는 독일어 또는 영어로 된 것이지요. 참고문헌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우리말로 된 논저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아마 현재 한국의 성서학 연구는 매우 초보적인 단계인가 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김 선생이 그 많은 참고문헌을 구해서 깊이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경이롭지 않습니다. 게다가 김근수 선생은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거든요.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