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3

Philo Kalia -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과 심광섭의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 “흰 그늘”을 처음 만난...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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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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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과 심광섭의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

“흰 그늘”을 처음 만난 시기는 김지하의 『예감에 찬 숲 그늘_김지하 미학 강의』(1999년)을 읽은 때였다. 책 머리에 수원농대 앞길 가로수를 새벽 1~2시에 걸으면서 느낀 감회를 적은 부분이다. “수원농대 앞길이 가로수가 죽 서 있고 아주 먼 지평선까지 일자로 곧게 난 길이었습니다. 거기에 달빛이 환하게 미쳐서 길이 하얗고 숲과 나무들은 까맣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흰 길이 검은 지평선을 넘어서 아주 멀고 먼 우주 저편까지 끝없이 뻗어 나가는 것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환상을 “흰 우주의 길”이라고 이름 짓는다.
나는 이 부분을 추체험하면서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어느 날인가 지인에게 나의 체험까지 곁들여 약간 흥분한 어조로 설명한 적이 있다. 시인의 체험은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이기도 하거니와 한 번 이상 그와 유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데, 다만 김지하가 그 경험을 꺼내어 해석하고, 그는 계속 이 체험과 생각을 꾸준히 집요하게 발전시켜 “흰 그늘의 미학”으로, 한국의 고유한 미학 사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흰 그늘”이 들어간 서적과 시집은 다음과 같다.
『1999 예감에 찬 숲 그늘: 김지하 미학강의』(실천문학 2003)
『흰 그늘의 길: 김지하 회고록 1-3』(학고재 2005)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미학강의』(실천문학 2006)
<시집>으로 『꽃과 그늘』(실천문학1999)
『흰 그늘의 산알소식과 산알의 흰 그늘 노래』(천년의 시작 2010)
『흰 그늘(작가 2018)
나는 김지하의 미학을 통틀어 “흰 그늘의 우주생명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김지하는 “‘그늘’이 판소리에서와 같이 온갖 신산고초의 어두운 중력의 그림자 영역이라면 ‘흰 빛’은 초월적인 아우라일 것이니 흰 그늘은 신체학과 영(靈)의 이중적 교호결합”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한편으로 그늘과 고난, 다른 한편 빛과 희망의 교호결합이었다. 십자가는 부활의 십자가이며 부활은 십자가의 부활로서,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不一不二),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알(생명)에서 태어난 쌍생아라고 비유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책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만을 드러내기보다는 고통과 고난은 창조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열정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생명은 고통 자체보다는 고통하는 사랑을 통해 태어나고 자라며 성숙된다고 생각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이지만 사랑 때문에 선택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마와 예루살렘의 권력은 예수님을 파괴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파괴하지 못했다.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있으며 생명의 근원이며 힘이다. 부활은 바로 이 생명의 나타남이다. 사랑의 십자가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진지하게 돌파하는 자만이 부활생명의 환희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표현한 성화를 원했다. 표지 그림으로 얼굴과 온몸에 고통만을 표현하는 십자가형 대신 사랑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고갱의 ‘노랑 그리스도’(yellow Christ)와 바탕색으로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을 선택했다.
신학적인 “십자가의 그늘”은 김지하의 미학적인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과 통한다.
성경과 찬송가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흰 그늘”이다.
십자가는 그늘이다.
찬송가 415장은 “십자가 그늘 아래”이다. 십자가 그늘은 쉼터이다. 햇볕이 심히 뜨겁고 무거운 짐을 지고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에게 선사하는 십자가 나무 그늘이다. 십자가 그늘은 생명의 그늘이다. 그래서 3절은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하고 찬양한다.
부활은 흰색이고 빛이다. 예전에서 부활절에 흰색을 사용하는 전거이다.
변화산에서 변모한 예수(마태복음 17:1-13)는 흰옷을 입고 나타난다. 부활절의 천사는 흰옷을 입은 천사들이다(요한복음 20:12-20)
십자가는 생명의 삶살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고난이며, 부활은 새로운 삶, 새로운 우주생명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復活은 復生이고 복승(複勝)이다. 김지하는 경락학에서 말하는 몸 안의 경락이 교차하며 생기는 새로운 현상이나 기운의 흐름을 의미하는 '복승(復勝)' 개념을 불교 화엄사상과 동학사상을 접목한 '복승 개벽'과 같은 새로운 문명 전환의 의지로 확장하여 사용한다. 김지하는 자신의 저서와 사상 전반에서 이 개념을 활용하여, 개인의 내적 변화를 넘어 우주적 생명과 문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의 주지(主旨)가 생명이라면,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은 그의 생명사상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생명학과 결부된 김지하의 미학은 “흰 그늘의 생명미학”이라 할 것이다. 김지하는 생명학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1991)
『생명과 자치』(1997),
『생명학 1-2』(2003),
『생명 평화의 길: 김지하 산문집』(2005)
『우주생명학』(2018)
왜 내가 오래 전 김지하의 “흰 그늘”에 이유 없이 끌렸는지,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을 구상하게 되었는지, 최근 다시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를 꺼내 읽으면서 알아차리게 되었다.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과 심광섭의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은 서로 통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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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 Joo Chin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건강하세요. 샬롬
여성훈
와우!
김수
환합니다. 고맙습니다!





Philo Kalia - *믿음과 불교의 信 大乘起信論을 공부하기 위해 유튜브 강의를 탐색하다가 이중표 교수의 강의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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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불교의 信

大乘起信論을 공부하기 위해 유튜브 강의를 탐색하다가 이중표 교수의 강의가 제일 맘에 들어 듣고 있다. 이중표 교수는 2024년에 한 권으로 된 불경을 출간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성경을 손에 들고 교회에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그것이 불교인들을 위해 한 권으로 된 불경을 출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를 중심으로 결집한 무려 1,448쪽(70,000원)이나 되는 불경이다. 이 교수는 불교 경전 해석 등 많은 학술서적을 지어낸 훌륭한 불교학자로 알고 있다. 그의 강의는 분명하고 미더우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 교수는 대승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大乘起信의 信을 설명하기에 앞서 불교의 ‘신’은 기독교의 ‘믿음’과 완전 다르다고 운을 뗀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작정 믿으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하느님의 창조,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거론한다. 이들은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니 무조건 믿으라는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에서나 말하는 믿음 이해를 기독교의 일반적 믿음으로 설명하는 데 절망에 가까운 무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낙담이 생겼다. 극우 기독교에서나 이해할 법한 믿음을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믿음으로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중표 교수는 중견 학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기독교의 중견 신학자들이 말하는 믿음을 들어 같은 수준에서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웃 종교의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침묵하거나 아니면 공부하면서 좋은 방향에서 비교해야 하는 것이 학자의 기본 태도가 아닌가.
고대교부 중에 3세기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명제를 남겼다. 그러나 말씀의 불합리성은 비합리성이나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초논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후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Credo ut intelligam(알기 위해 믿는다)이라는 명제를, 11세기 안셀무스는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명제를 남겼다. 그 의미는 "faith seeking understanding" or "faith seeking intelligence”이다. 이 명제를 제목으로 삼은, 이미지에서 보는 신학서는 미국과 한국에서 신학도의 기초 공부를 위한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기신론에 “正信”이란 말이 있듯이, 믿음은 이해(지성)를 찾으며, 합당한 지성을 찾게 될 때 바른 믿음으로 이해되고 체득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참된 지식은 에피스테메(episteme)였고, 믿음(fistis)은 억견으로 취급당했으나, 성경 이후 중세 시기에는 믿음이 지식에 참된 빛을 준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지식보다 앞선 것이다. 불교에서 무명과 무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다르마(法)의 길이듯이, 세상의 지식에서 벗어날 때 참된 믿음을 얻게 되고, 참된 믿음은 지식을 얻는 전제가 된다. 지식보다 믿음 상위의 패러다임은 종교개혁기에 ‘믿음//지식’이라는 대등한 지위로 전환되고, 다시 근대기에는 믿음과 지식은 분리되었으나, 신학에서 세계의 지식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믿음을 맹목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다. 근대기 이후 성서에서의 다양한 비평 방법이라든가 교리 이해를 위한 해석학이 만발했음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란 신자의 믿는 행위(信行: fides qua)와 믿음의 대상(fides quae)인 하느님과의 상호 만남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자리는 인간의 주체적 믿는 행위나 일방적 신의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는 행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만남의 사건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Credo in Deum). 이 문장이 믿음의 기본적 문장이다.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하느님이다. 믿음의 대상은 성경이거나 그 어떤 교리적 개념(동정녀 탄생, 부활, 기적...)이거나 신조가 될 수 없다. 신조도 성경도 하느님을 가리키고 드러내는 방편일 뿐이다. 불교에서도 방편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자도 중요하다. 그러나 영원한 법은 不立文字이며 최후의 목적은 信解, 곧 成佛道에 있음이다. 불교에서도 마음의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일체가 만들어짐(一切唯心造)을 알게 되지만, 결국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객불이(主客不二)일지언정 주관주의나 객관주의가 아니다. 불교에 기독교가 믿는 하느님의 자리는 없지만, 객체의 차원이 없는 오직 주체로서의 心은 생각할 수 없다. 心은 살아 있는 생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무신론이라 하지만 대승의 一心은 이 우주와 천지, 이 인간세계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에 안으로, 안으로 향하여 함께 거주하려는 하느님의 마음(心)이 들어설 자리를 결코 없애지 않으리라 믿는다.










박희승
공감합니다! ^*^;;
_((( )))_
김세창
맞아요.
불교인들이 이웃종교에 관한 인식 수준이 그렇습니다.
이병일
그래서 저도 대승기신론과 로마서의 믿음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ㅎㅎ
朴忠良
이중표 교수는 경전에 대해서 아주 정직하고 엄격한 학자의 자세를 보이지요.. 저도 좋아합니다
유용선
"나는 믿을 필요없다. 알기 때문이다."
지형은
올리시는 글들, 고맙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우희종
불교에서 하느님의 자리가 없다기보다는 ’하느님의 ‘인격적 형태의 자리’가 없는’이 보다 정확할 듯합니다만.
궁신영
이번 폭우로 인한 피해가 심각합니까?
Lee Chan-Hee
선생님의 기독교관은 너무 건강한 관점인 것 같습니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그동안 박해를 많이 받아오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