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6

공부 이야기 - 장회익

공부 이야기
장회익 (지은이) | 현암사 | 201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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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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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 공부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seyoh ㅣ 2015-01-20 ㅣ 공감(0) ㅣ 댓글 (0)

공부이야기 -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다. 더하여 그가 했다는 공부도 재미있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면서 공부도 재미있게 하는 셈이다.

어떤 공부?
그가 전공했다는 물리학에 대한 매력을 담뿍 느끼며 또한 깨달음에 대한 과정을 마치 공부하듯 차근차근 해 나가는 재미, 이게 바로 책을 읽는 기쁨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책의 줄기가 잡힌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또 하나는 창고에 갇힌 도둑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저자의 생애와 오버랩되며 저자가 자기 생의 고비고비마다 비교하며 따라간 멘토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많이 알려져 있기에 여기에서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야기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앎을 훔쳐내는 학문 도둑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姜希孟)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나오는 것으로, 저자가 공부 도둑이라 자칭하며 자기 생에서 공부를 마치 부잣집 곳간에 들어간 도둑처럼 금은보화 같은 공부를 빼내어 온 것을 비유하는 아주 적합한 비유이자,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중 하나로, 아들에게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지극히 천하고 몹쓸 짓을 하는 도둑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도둑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7903939)

아버지 도둑이 아들 도둑에게 스스로 지혜를 깨우치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아들을 창고에 가두는 이야기를 '발단- 전개- 위기- 결말'의 서사적 구성 방식을 취하여 아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하고 있다. 강희맹은 도둑의 도(道)에도 '자득(自得)'이 있듯이 학문의 도(道) 역시 자득(自得)이 있어야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래서 도둑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득의 원리’는 장회익 교수의 학문 방법을 그대로 말해주는 아주 적절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자득’의 이치를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고, 이후 이 것이 내 일생의 공부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내가 수시로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대학 교육을 통한 수동적 학업에 지치고 질린 나머지 학업을 거의 포기할 상황에서 나 홀로 몇 년간 공부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평생의 학문적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412쪽)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이미 초판을 낼 때도 내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간 칠팔 년이 경과하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내 최근의 생각이다.>(5-6쪽)

<나는 나 자신을 공부꾼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도 했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 과정 자체를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러한 앎의 유희에 흥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공감하는 바를 넓혀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할 수 있다.>(9쪽)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큼 더 의미있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그는 어떤 스님을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201쪽) 그런데 그 스님 방에 들어가니 탁자 위에 ‘지구의’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 지구의는 나중에 커다란 깨달음의 소재가 된다. (‘지구인의 눈’과 ‘우주인의 눈’ - 343쪽) 그러나 그 때는 그 지구의에 대하여 묻지 못하고 그저 깨달음을 얻는 방법만을 물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돈오와 점오에 관한 경험을 하고 - 그저 듣고 오는 경험?- 돌아 온다.
돈오(頓悟)란 그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 즉석에서 깨닫는 것’이고, 점오(漸悟)는 ‘조금씩 학습해 가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해의 틀’과 그 틀 안에 넣어야 할 ‘이해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으며, ‘관념의 틀’과 ‘관심의 폭’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가 바로 깨달음이다. (207쪽)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이 필요한데, 그 물음은 꼭 명시적으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207쪽)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어떤 현상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

공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의외로 종교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색 중 하나이다. 각 마당마다 거의 한 꼭지씩 담아 놓았다.
셋째 마당의 ‘교회에서는 왜 질문을 안받나’, 넷째 마당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 다섯째 마당 ‘성경이 과연 하느님 말씀인가’, 여섯째 마당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아홉째 마당의 ‘인간의 도’ 등이다

이중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이 시험 -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 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릴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합격하면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나를 붙여 달라는 것은 누구 하나를 떨어뜨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닌가?> (147쪽)

여기서 잠깐! 독자들 중에 위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 결국 나는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147쪽)

어떤가? 그런 기도가 적절한가?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결국 그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다른 경우에서 발생한 일인데,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가지 않고 그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경우도 그렇게 - 공정하게 해달라고 - 기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라면 시험과정에서 실수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283쪽)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게 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끝으로 읽어야 할 대목은 410쪽 이하의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이다.
“뉴턴은 자기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는 그자신보다 한 세대 앞섰던 데카르트의 선구적 방법론에 힘입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14쪽) 고 말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익힌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었을진대, 오직 그만이 멀리 보게 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스스로의 공백기간을 통해 마련된 자기만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기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414쪽)

그래서 그렇게 할 때에 시야가 하루 하루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요체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는 평생을 걸려 공부했고, 공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두고 싶은 말들

<아침에 도를 깨닫고 낮에 이를 적어 놓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403쪽)

<학문의 본령을 터득한 학자가 학문 전체의 내용을 재음미 해가면서 그 안에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추려내고 이것을 다시 일반 지식인들이 함께 깨우쳐내게 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을 강구해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문이라는 것이 오직 이를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몇몇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407쪽) <‘앎 중심’ 학문이 식품의 생산에 해당한다면 ‘삶 중심’ 학문은 음식의 마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은 엄청나게 많은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이를 적절히 선택하고 배합하여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줄 요리사가 부족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408쪽)

저자의 선조인 '장현광'의 우주설(宇宙說) - 303쪽 이하

'동굴의 비유'(367쪽)
이 비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가 아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이 녹아 있는 신선한 비유인데, 이 부분 독자들이 읽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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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깊이를 더하는 공부하는 삶 《공부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인디캣 ㅣ 2015-01-19 ㅣ 공감(1) ㅣ 댓글 (0)
저자 장회익 선생님은 자신을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 지칭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것. 저 역시 소망하는 삶이기도 하고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그러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평생 앎을 추구하며 즐긴 놀이로서의 공부, 그 과정을 기록한 글 <공부 이야기>를 통해 앎의 유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독특한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공부 이야기라고 해서 여느 책처럼 학업과 관련한 이야기만 있지 않고,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네요. 가풍의 부재는 곧 자녀 교육 문제와 직결된다며 집안 이야기를 쭉 합니다.





나름 성적을 잘 따는 아이였다는데 공부 냄새와는 거리가 먼 할아버지의 반대로 1년간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집안 일꾼들과 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죠. 그런데 이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강희맹의 <창고에 갇힌 도둑> 이야기처럼 공부의 길을 막아놓으니 더 공부하고 싶어 한 탓에 오히려 공부꾼의 길에 무사히 들어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겨내면 좋은 훈련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알게 모르게 요즘 말로 자기주도학습이 되어버린 거죠. 책을 읽다 모르는 게 나와도 누구 하나 알려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힘으로 공부하는 경험을 터득하게 된 겁니다. 모든 기회를 자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최대한 활용하는 길을 마련한 셈입니다.





정규 교육에서 얻은 것보다 직접 삶의 현장에서 학문을 수행해보는 직접적 체험을 경험하는 것. 한마디로 야외생존훈련 덕분에 고등 물리학 전체를 혼자 힘으로 학습해낼 동기와 저력을 길렀다고 하네요. 선행학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역경을 기회로 활용한 장회익 선생님의 생각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 아버님의 영향이 아주 컸더라고요. 칭찬과 격려로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인터뷰에서도 봤었는데 아버님의 이런 좋은 영향이 진로는 물론 평생 공부꾼이 되게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부모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어려서부터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은 다시 독자적 학습경험을 낳으며 수동적 교육으로는 얻기 힘든 학습의욕과 학업 능력 향상에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학부모들은 궁금해할 듯하네요. 제도권 너머에서 머물던 독특한 공부방식이 제도권 내 시험에도 효력을 발휘할까요. 장회익 선생님은 자력으로 학습 습관을 익히면 놀라운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경험을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힘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건 약간의 노력을 더 해 최대 효과를 얻는 힘이 된다는 거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 후 70세까지, 상아탑 공부꾼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에서의 공부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파트에서는 특히 학문의 본질을 강조하네요. 제대로 공부하라는 말입니다. 학문에서는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보다 타당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그러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비로소 구분된다 합니다. 학문의 목적은 내 삶을 온전히 하기 위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에게 납득되도록' 알아보자는 것이라고 하네요.

『 학문의 요체는 자유이다. 생각의 실마리가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져야 하고, 성취나 보상 따위의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 - p193




물리학 공부 이후 DNA에 호기심이 생기면서 생명에 관해 관심이 확장되었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물리학 용어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수학, 물리학, 철학, 생물학 등 제법 손댄 분야가 많지만, 물리학이란 줄기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를 접목하며 일찌감치 융합이니 통합이니 요즘 유행하는 그런 개념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전통학문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과학 하면 서양과학만 염두에 둔 상황에서 전통학문의 과학적 논의를 소개하는데 신선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질문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장회익 선생님의 생명의 새로운 개념 제시는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이라는 개념들로 생명을 파악하는데 다음에 기회 되면 관련 도서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진짜 학문의 정수는 이런 것이란 걸 알려준 <공부 이야기>. 초반엔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옛이야기 듣듯, 중후반부에는 멘토의 조언을 듣듯 읽어왔네요. 이 시대는 현재 정신적 기아 상태라고 합니다. 공부의 의미, 앎의 의미가 협소해져 진정한 공부꾼이 드뭅니다. 그래서 이 책이 갖는 의미가 더 와 닿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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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배움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새창으로 보기
어떤하루 ㅣ 2015-01-08 ㅣ 공감(1) ㅣ 댓글 (0)

??"낼 또 학교가야해" , 울 아이가 한숨소리와 함께 무겁게 내뱉는다. 방학전에는 호기롭게 어느정도 공부(?) 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과후를 신청했으면서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벌써 어깨가 무거운가보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퇴직했기에 이제는 내 맘대로의 공부를 할 수 있어 좋고, 이제껏 알아왔던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넓은 세상을 보고있는 자신의 오늘보다 더 나아질 내일을 기다린다는, 희망에 차 있는 노老교수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새삼 궁금해지게 된다.

2008년 칠순이 되던 해, '공부 도둑'으로 나왔던 내용도 정리했지만 후에 달라진 생각 두 가지를 첨부하셨다고 한다. 하나는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의 일생과 비교해가며 남에게 배운걸 따라하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 기쁨을 중요시하는 장교수님은 사숙재 강희맹 선생의 도자설에 나오는 도둑 이야기를 꺼내신다.

도둑질을 업으로 삼은 아비와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밤 도둑질하는 중에 아비가 아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깨도록 소리를 낸 것이다. 이 위기를 재치로 가까스로 피하고 밖으로 나와 당연히 아비를 원망하는 아들에게 아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후에 과연 그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86

여러번 공부와 멀어질뻔한 일들을 공부의 창고에 자물쇠를 건 일에 비유하기도 하고, 자신은 아직도 학문의 창고에 들어가 앎을 훔쳐내는 '공부꾼'일뿐이라는 이야기에서 그의 일생 주요 흐름이 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를 즐기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를 알게된다. 초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채로 시골 농사일을 도울 수 밖에 없었기에 반강제로 시작된 혼자 공부는 돌아보니 스스로 앎을 찾아가도록 할 수 있는 힘이 쌓이는 시절이였다는 걸, 미적분 이해하게 됐다며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어했다는 이야기에서는 공부의 다른 이름이 경쟁이 아니라 알다 이해하다 가 주는 순순한 기쁨이라는 것을, 낯선 외국땅에서의 '아는 것은 알겠는데 모르는 것은 모르겠더라"로 아는 것을 다시 음미하여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모르는 것을 보고 알려고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에서는 모르는 걸 무조건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게 공부라 여겼기에 우리가 공부를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국 몸마저도 공부에 신명을 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94
좋아하고 즐겨라, 즐기는 것보다 그 일을 계속하게 할 스스로 만든 강제요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공부만큼은 누가 좋아하랴' 하던 우리에게 신명을 내는 경지라는 것이, 그의 인생을 열 두마당으로 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회고록이라 부를만큼 한 사람의 일생이 들어있는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일생의 큰 부분이 된 공부를 '앎 중심'이 아니라 '삶 중심'으로 만들어갔기에 자연스레 넓어지고 깊어진 학문을 여전히 즐기는 분의 모습을 어느 순간에서건 볼 수 있기때문이다.

공부 잘하던 아이가, 앎을 야금 야금 한 부분씩 꺼내가던 공부 도둑이 이제는 지식의 순환고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게 된 기쁨과 깨달음의 재미를 알려주고 싶어하는 커다란 지혜의 보고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분은 알고 계실련지, 어느 페이지를 들춰보아도 자신의 이런 일들이 깨달음과 또 다른 깊이를 얻게했다는 걸 말씀하시는 분의 이야기에서 아직도 고달픈 게 공부라면서도 여전히 하고있다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끼게 되니 나 또한 나를 돌아보게 되지않을수 없다.

하나와 둘, 명확히 다른 부분이라 여긴 지식의 부분들이 이제사보니 서로 연결된다는데, 난 어디까지 왔으며 누구에게 어떤 기쁨을 말해줄수 있는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꼭 물리처럼 어려운 과목이 아니더래도, 생명처럼 중요한 과목은 아니더래도 살아가면서 얻은 진짜 안다는 것의 기쁨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당신이나 나같은 사람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죽을 테지만,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늙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안에 태어난 이 거대한 신비Mystery 앞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들처럼 이것과 대면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424(아인슈타인의 친구가 그의 80세 생일에 보낸 편지 구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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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와 생명의 만남! 그리고 대하드라마 새창으로 보기
사랑지기 ㅣ 2015-01-03 ㅣ 공감(4) ㅣ 댓글 (0)


장회익 선생은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물리학자다. 생명과 물리는 별개의 영역 같지만 서로를 이해하는데 동반자 같은 관계다. 아니, 선생에 따르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모든 만물이 종내는 하나의 원리로 수렴되듯이 생명 현상과 물리 법칙도 그러하다. 선생은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획득한 후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색하기 시작한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갔듯이.

이 책은 2008년 《공부도둑》으로 나왔던 것을 새롭게 다듬어 낸 것이다. 선생은 1938년생이니 초판이 나온 2008년이 꼭 칠순이 되던 해였다. 본래 책 제목이 ‘공부도둑’이듯 선생은 앎을 훔쳐내는 도둑이 되고자 했다. 이제는 생명의 정수(精髓)를 찾아 ‘삶 중심의 학문’에 심취해 있다.

어떻게 물리학을 통해 생명의 신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을까? 책에는 선생이 지적 호기심과 학자의 열정으로 우주 만물의 근원을 찾아 한 평생 달려온 대하드라마가 펼쳐진다. 초반은 조금 생뚱(?)맞고 지루하게 시작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버텨보자. 선생 만이 선보일 수 있는 독특한 경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선생은 목차를 열두 마당으로 나누고 마당마다 이야기를 몇 토막 씩 담았다. 주요 내용은 그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30여년 재직하는 등 자신이 지나온 자취를 점검하고 생을 되돌아보는 형식이다. 선생에게 이 책은 자신의 회고록이자 자서전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쓴 『자서전적 노트Autobiographical Notes』(1949)와 같은.
내 삶이 끝없이 ‘앎’을 추구하며 지내온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 이것은 뭐 그리 대단한 탐험의 길도 아니었고 또 대단한 성취를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즐기면서 함께해온 놀이로는 의미 없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생애라고도 할 수 있다. - 초판 서문
그는 물리학이 좋아 물리학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청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자유로운 야생(野生)의 분위기에서 꾸준히 공부한 결과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선생은 자신이 읽고 공부했던 책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룬 학문의 성취에 대해 마치 지층을 쌓듯 하나 하나 들려 준다. 나는 이 책을 보는 독자에게 열두 마당을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책을 보면 선생은 자신의 교육관도 자세히 피력한다. 가령 물리학과를 다니던 당시 처했던 어려운 상황(강의가 체계적이지 못함, 구하기 힘든 원서 등)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았을지 조언한다. 이는 곧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공부법이다.

“물리학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이와 연결해 개별 과목에 대해 그것이 담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잠정적 결론을 자기 언어로 서술하라. 그리고 학습이 진행되는 대로 이것에 대한 수정·보완을 수행해 나가되 그 핵심은 반드시 유지하라. 이렇게 할 경우 설혹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더라도 핵심은 항상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학점 관리를 해나갈 수 있다.” - 161쪽

통찰과 혜안으로 학문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요, 먼저 전체를 파악해서 부분을 채우라는 것이다. 한국 대학의 교육 여건과 대학생의 역량 수준에서 이를 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주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송아지 사육론’을 제창한다. 이는 ‘자동차 조립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자동차 조립론’은 물리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수학을 비롯한 개별 과목과 항목들의 지식을 먼저 다 익혀야 비로소 쓸 만한 물리학자가 된다는 것.

이에 반해 ‘송아지 사육론’은 물리학은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살아 있는 송아지 같아서 이미 전체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단지 학습이라는 것은 여기에 영양을 공급해 키우는 일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부분을 마련하기 전에 전체를 의식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는 항상 살아 있는 것이기에 삶의 기쁨을 맛보며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 어느 것이 더 큰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학문마다 내용이 다르고, 과정에서도 수준에 따라 달리 적용되거나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서구 학문은 부분의 정확성을 중시하고, 동양 학문은 전체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살펴보면 금세 이해가 된다.

여담으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보면 양자역학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어떻게 발산되고 수렴되었는지 파악하기에 좋다.

선생에 따르면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

마치기 전에 선생이 제창한 생명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생명을 낱생명, 보생명과 온생명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생명체의 신비는 생명체(낱생명)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밖에 놓인 무엇(보생명) 사이의 관계에서 온다. 이 둘이 합쳐 완결된 실체로서의 온생명을 이루게 된다는 것. 이는 1940년대 슈뢰딩거가 설파한 생명의 원리보다 더 한층 진일보한 개념이다.

이제 선생이 생명에 관해 다룬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나도 선생이 이끄는 뫼비우스의 띠로 나서 보련다.

* 사족 하나. 본문에는 “심괄의 《몽계필담》이 국내에 한 번도 출간된 적이 없는 듯하다”(313쪽)고 언급되어 있다. 실은 2002년에 범우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