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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10주년세미나
-지구촌 평화를 위하여
/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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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제10주년 기념세미나 [발제 3] 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
박 성 준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
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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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는 禾=자연=생명=쌀=밥=하늘(*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과 口=食口=사람=민중=인민=만민, 그리고 平=고름=공평=공정=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평화의 ‘平’은 고르게 하다=공평/공정/평등하게 하다=정의롭게 하다와 같이 ‘동사’(verb)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和’를 고르게 하고 정의롭게 하다(‘平’)라는 뜻의 ‘평화’도 동사로 보아야 합니다. ‘평화’가 이처럼 명사가 아닌 동사라면, 평화는 관념(idea)이나 주의=이념(ideology)이 아니고 삶(life)이고 살림(*죽임의 반대)이고 행동(praxis)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말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흔히 “peace”라는 말로 영역됩니다만, peace는 샬롬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peace는 단지 현재 교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에 비해,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샬롬은 전쟁행위가 중단된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샬롬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관계, 영역,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지극히 풍부하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샬롬의 개념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삶의 토대로 여겼던 것, 곧 서로가 함께 일구는 공동체를 포괄합니다.
이처럼, 샬롬이 공동체적 언어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샬롬은 단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내적 안녕’(internal well-being)을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를 말하는 것이며, 정의로운 정치와 균등한 부의 분배 위에 이룩되는 한 사회의 총체적 안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예수가 뜻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샬롬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평화(peacelessness)
2차대전의 참화(慘禍)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고조시켜,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각각의 학문분야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미소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살아남느냐 절멸하느냐가 전(全)인류적 의식(意識)이 되었던 그 시대에, 독일의 대표적 지성 C. F. 폰 바이cm제커는 “평화는 인류 생존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이 명제는 극한적 폭력이 만연하는 오늘날에도 타당합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국제사회의 현상유지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북반구 나라들의 국가 이해(national interest)를 반영한 연구들이 평화연구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나온 것은 제3세계, 발전도상국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제3세계에는 전쟁이 없는 때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쟁의 종식이 행복, 복지,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 빈곤, 기아, 환경오염, 착취, 억압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평화학자 수가타 다스굽타(Sugata Dasgupta)는 “비평화,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 1968)이란 책에서 비(非)평화(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써 제3세계적 삶의 정황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비평화의 구성요소로서 빈곤, 기아, 영양실조, 질병, 오염 등을 들면서 이들은 반드시 전쟁이나 국제적 긴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러한 비평화의 구성요소들을 제거하고 충분한 의식주, 의료, 위생적 생활환경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실현의 길이자 제3세계와 발전도상국의 평화연구의 과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의 현상유지가 아니라, 세계의 정치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혁(變革)을 평화연구의 중심에 놓는 제3세계 평화학의 입장과 접근방법이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異議) 제기에 대해, 북유럽의 평화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대표자격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하고, 이에 반해 행복, 복지,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했습니다.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란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실현이며,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통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폭력에는 신체에 직접 위해를 가해오는 개인적이고(personal) 직접적이며 현재적(顯在的)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이고 구조적이고 잠재적인 폭력이 있다고 하면서 전자의 예로는 전쟁, 테러, 린치, 폭행 등을 들고 후자의 예로는 나쁜 사회제도, 잘못된 관습, 불평등한 경제, 나쁜 정치나 법률, 환경파괴와 오염, 나쁜 개발 따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독의 신학자로서 평화문제를 깊이 연구해오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는 전쟁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인 현대 세계에서,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negative(부정적, 소극적)하게 정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라고 하는 개념은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국제 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릴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가 폭력의 악순환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도 결코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타 다스굽타의 ‘비평화의 개념과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의 개념, 그리고 볼프강 후버의 비판은 각각 평화의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일깨워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스굽타의 비평화나 갈퉁의 구조적 폭력 등의 개념을 매개로 하면서, 평화연구는 그 영역과 지평을 널리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빈곤의 문제, 전 지구적인 20대 80의 사회, 생태계와 환경 파괴 문제, 농업-농민 문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자차별, 학력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 등도 구조적 폭력으로서 평화연구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무관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미국 동행안을 여행하다가 커넥티컷주의 팍스우드라는 곳에 그 때 막 문을 연 ‘피쿼트 뮤지엄이라는 미국 원주민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피쿼트(Pequot) 민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인디언 거주구역에 살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이 박물관을 세운 겁니다. 박물관 안에는 자기들 옛 마을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모형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우리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쿼트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생김새도 우리와 엇비슷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과 물레를 잣고 있는 모습,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 농사를 짓는 도구들이 우리하고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누이와 고모가 있었고 이웃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일만 년 이상 지금은 아메리카라 불리는 이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온 원래의 주인이었구나!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그들을 거의 다 학살해버렸구나! 피쿼트 박물관에서 그들의 순결하고 발랄한 옛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륙이 원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감동에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국에 건너간 첫해, 말이 잘 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몹시 악화돼 있었는데, 그 날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위장병도 나아버리더군요. 키 크고 눈이 푸른 그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서투른 영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언젠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좋은 책을 한 권쯤 번역 출판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9월 11일의 충격 뒤로 사태전개를 보는 데서도 미국과 서방측의 잣대와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도움을 주는 자료나 책자가 거의 없었고 또 평소에 너무나도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지하드'에 대한 이해
전 세계 이슬람권 인구는 14억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인구 18억의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샬롬 즉 평화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슬람의 정신은 다양성의 존중과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라는 것은 이슬람의 특별한 신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하는 이슬람 말일뿐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히브리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멀지 않습니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가 갖는 의미는 내적 투쟁,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내면적인 투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투쟁이야말로 지하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합니다. 지하드의 더 깊은 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깊은 자기성찰에 의한 내적 쇄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외적인 것이 될 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불의와의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장투쟁이 지하드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우는 도발이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종교 가치가 짓밟혔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손에 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 것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지하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이슬람 사람들이 왜 폭력을 쓰게 되었는가. 그 폭력의 뿌리에 대해 모르면서 이슬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시각이 내면화되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큰 병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이런 병에 대해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각,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테러를 보는 눈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6천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을 두고 이런 반응을 보여도 되는 것인가?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제3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고 해방되었다지만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 이래로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감돌고 있고,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는 언제 다시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선 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그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마어마한 초현대 무기를 동원해 보복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서방 세계가 미국의 편을 들고 있고 우리 정부도 그러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을 천명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가령 6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테러 사건이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아랍지역에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행위자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미국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폭력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세계는 그런 미국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미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사건들, 엄청난 규모의 참혹한 파괴와 살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그러했습니다. 걸프전쟁에서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상하수도, 전기, 가스 시설 등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 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병으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 미국이 전해주는 대로 보도해 왔고 우리들은 그저 먼 산 보듯이 하면서 보도의 진실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무덤덤히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미국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관심을 가질 바에는 이 기회에 테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 되짚어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즉, 어떤 집단이 미국 중심의 세계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에 대해서만 테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강대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강대국들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엔의 승인까지 얻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살육을 행하는 전쟁이나 군사공격은 테러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연대(People's Coalition Against War; PCAW)라는 미국에 본부를 둔 평화단체에서는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테러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는 협상과 외교여야 하지 협박과 최후통첩, 봉쇄와 금수조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올 것이기에. … 테러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에 찬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에 의해 승인된 테러, 파시스트에 의한 테러, 개인과 집단에 의한 테러 등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의 개념에 따른다면, 미국이 수단의 제약회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라든가 걸프전에서 행했던 혹은 코소보에서 행했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살상행위도 테러에 포함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平和’와 ‘샬롬’, ‘적극적 평화’와 ‘비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판 미 육군의 ‘테러리즘 정의’(the US Army definition of terrorism)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협박이나 강제, 공포의 주입등... 계산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을 행사하는 것이다.”(Terrorism is “....the caculated use of violence or threat of violence to attain goals that are political, religious or ideological in nature....through intimidation, coercion or instilling fear.”)
이 정의에 따른다면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테러’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테러’도 폭력과 협박과 공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테러 전쟁’(war on terrorism)에 이르러서는 폭력과 공포의 사용은 더 한층 강화됩니다. 테러리스트와 그 동조자들로 간주되는 자들을 공격하고 살육하며 포로로 잡기 위해 한 국가의 무장력이 동원됩니다. 이렇게 볼 때, 테러와 대테러와 전쟁 사이에는 그다지 다른 점이 없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과 협박과 공포의 사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월성’(moral superiority)이나 ‘정의’(justice)를 내세우지만, 그 점에서는 테러리스트 측에서도 할 말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전쟁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전쟁은 평화의 반대말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평화의 반대말이 반드시 전쟁인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없지만 평화도 없다”는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샬롬’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평화’라는 말에는 전쟁의 부재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만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나머지 두 가지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전(保全)하는 것이고, 생명의 살림과 지킴과 보전인 평화는 정의(正義;justice)가 살아 숨쉴 때에야 비로소 담보됩니다.
최근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에서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는 종종 다른 나라의 애국투사입니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아랍에 편집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 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를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 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미국의 보복 군사행동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치인 미국의 하원의원 바바라 리 여사가 말했듯이,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서서 테러의 원인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테러리즘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미국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 왔기에 이슬람 민중들이 저렇게까지 처절한 증오심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자살테러를 감행했겠는가, 그들의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
어느 기자는 “미국 테러 참사는 일종의 부메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미하일 델랴긴(세계화문제연구소 소장)은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는 러시아 속담을 곁들이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약소국가들에 불안정을 조장해 이익을 챙기면서 약소민족들의 이권을 냉혹하게 무시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균열이 심해졌고 그 결과 악마적 테러가 폭발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시사저널2001년10월25일자 참조)
또 우리나라 신문과 잡지에 자주 글을 써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해진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는 ‘한겨레21 2001년10월2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노르웨이의 어느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 씨와 외과의사 후솜 씨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의료봉사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 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 손은 못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솜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솜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의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 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로 인한 아사사태에 시달려 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미국의 신무기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21세기 첫 전쟁은 겉으로는 빈라덴과 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은 명분일 뿐, 미국이 테러응징을 내세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지적합니다.(시사저널 2001년 10월25일자 참조) 숨겨진 전쟁목표는 또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토를 무기성능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려 합니다.
시대는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이번 사태가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후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첨단 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폭력에 맞서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생물학 무기가 등장하고 해서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이자 평화운동가인 월든 베리(Wendell Berry)씨는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 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위한 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4차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이래로 걸프전,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해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 상인들의 투자와 자본회전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는 완전 초토화라는 자연과 생활환경의 파괴가 가능하고 생태적 질서 자체를 완전히 변형해버리는 가공할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해내는 군수산업의 경쟁은 종착점도 브레이크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경쟁의 결과 무기체계는 이미 ‘전쟁무기’라는 한계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재래적 의미의 전쟁 도구가 아니라, 그 악마적인 힘은 신의 영역을 침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를 먹고사는 전쟁상인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체질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 미국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제도를 세계의 모든 지역과 나라에 전파하고, 심지어는 이슬람권과 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이러한 방식은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
이런 모든 문제-인류가 안고 있는 질병들-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문제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지금의 반 평화 흐름보다 더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로 일어나야 인류가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 옹의 저 놀라운 통찰에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꿈을 꿔야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9월 11일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전 세계 인류가 평화를 위해서 커다란 각성을 해야 하고 서로 연대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거대한 연대가 그 반대 방향, 즉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통제를 가하고 그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9. 11 직후, 뉴욕 타임스 9월 24일자 논단 ‘새로운 세계에서의 미국의 주권이란 글에서 펜실베니어 주립대학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공격은 그래도 전통적인 성격의 공격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미국 땅에서 6천명이 아니라 60만 명도 죽일 수 있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과학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는 세계 초 강대 제국이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오해이거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로버트 라이트 교수의 지적처럼, 이른바‘테러 집단’도 미국의 첨단무기에 못지않은 가공할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세계에서는 무기가 지나치게 발달해 버려서 전쟁이나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이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과 정보와 과학기술의 전 세계적인 소통의 결과로 ‘무기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오직 공멸이 있을 뿐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미국은 지금 이라크라는 수렁에 깊이 발이 빠져있습니다. 사건의 결과가 미국의 보복공격과 그에 대한 재 보복으로, 탄저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사용되는 바이오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공격과 같은 더 무서운 재앙으로… 이렇게 끝 모르는 폭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전 세계와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시민적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옹호해야 하며, 미국이 더 강화된 군사주의나 전시 파시즘 체제로 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있도록, 미국 안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고 평화적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점차 확산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무력감,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적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 창조적 상상력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평화의 새 문명을 여는 열쇠꾸러미 중 가장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엮어놓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 세계 반전 평화 연대세력의 힘으로 선의의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현재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님의 최근 편지를 조금 인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바그다드 상황은 현재 최악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진게 없습니다.
제가 나오기 전날 잠깐 시내를 나갔을 때, 무장저항 세력이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지나가지 않는 시간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 그린존 인근마저도 무장 저항세력이 순찰을 돌 정도로 무장 저항 세력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아마도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내부에서 조차 이번 전쟁에 대한 회의가 상당하게 퍼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빨리 이라크에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무장저항 세력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지만, 미군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미군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막강한 화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간인과 저항세력 구분하지 않고 폭격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이런 미군의 행위는 안그래도 이미 멀어진 이라크의 민심을 더욱 멀게만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미군은 민간인과 저항세력을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미군 검문소 앞에서 미군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방향을 돌리는 차량에 마저도 무차별 사격을 해 댑니다. 하다못해 기자와 무장 세력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2,500 만 모든 이라크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2004. 9.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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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의 굴레를 벗고 자율의 대지에 서자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를 어찌할 수 없어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부터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옳을 것인가? 이 물음을 품고 한걸음 물러나 간디 옹을 찾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간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간디가 직접 저술한 글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드문 글들 가운데 그의 ‘자서전’과 더불어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글 한편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어 있습니다. ‘힌두 스와라지’(안찬수 옮김, 출판사 강)가 바로 그 글입니다.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가 1909년 12월 남아프리카 트란스발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투쟁을 대표하는 주간 신문 ‘인디언 어피니언’지에 구자라트어로 발표한 글입니다.
그 글의 서문에서 간디는, “ ‘인디언 오피니언’의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인도의 자치라는 주제를 놓고 몇 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습니다. 스스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기에 간디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진솔하게 표출되어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라는 말은 간디의 방식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방식’이란 다른 사람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스와라지’(Swaraj)는 ‘자치’를 뜻하는 힌두어로, 간디 사상의 한 핵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swa=self; raj=govern, 따라서 self-government, self-rule 등으로 영역됩니다. 간디는 ‘민족적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은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때 그 주체는 계급이나 계층 또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개인인 나 자신이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고 하는 이 점을 간디는 주목하고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의 제10장에서 ‘폭력’의 문제에 언급합니다. 그 장의 구자라트어 제목은 ‘darugolo’인데, 이 단어는 4장에서는 ‘무기와 탄약’으로, 15장에서는 ‘총’으로 번역되었다. 간디는 이 말 대신에 ‘육체의 힘’ ‘총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로 ‘혼의 힘’(atmabal)을 사용하는 것과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sat=truth, agraha=firmness), [진리파지], [비폭력적(또는 수동적) 저항] [시민적 불복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이 말은 고통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혼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연민이 있는 곳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무기의 힘은 사랑의 힘이나 혼의 힘과 싸울 때에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간디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의 힘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고 근본적 변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 세계를 변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간디가 말하는 ‘사티아그라하’ 곧 수동적, 비폭력적 저항은 현실 속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간디에 관해서 가장 큰 오해가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간디는, “나는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비폭력 저항을 믿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사티아그라하‘를 현실과 세계를 변혁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비폭력적 저항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적 대안’(a realistic alternative)으로 얘기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를 군사적 언어(military terms)로 얘기했다고 말하는 해설가들 -‘A Force More Powerful’의 저자 Peter Ackerman과 Jack Duvall 같은 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로 간디는 “비굴한 굴복 보다는 차라리 폭력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간디는 누구보다도 ‘행동’과 ‘피동성’(passivity)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간디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베를린의 한 유태인 지도자인 랍비에게, “저항을 조직하고 나치의 위협에 맛서 싸울 수 있도록 많은 유태인들과 유태인 동조세력을 동원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간디는 불의한 상황에서의 피동성을 볼 때 마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비폭력적 저항이 피동성과 대체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라크 파병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간디 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혜를 얻습니다.
먼저, ‘간디의 방식’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중대한 문제는 미국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을 때, 타율이 아닌 자율(‘스와라지’)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힘’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고, 끝내는 패배하고 이라크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미국에 추종하는 이라크 파병 한국군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우리는 ‘사티아그라하’ 곧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의 방법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미국정부의 압력에 의한 결정’이라는 데 공감하는 85%이상의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 국민들이 파병반대의 이유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각가지 방법으로 도와드리며 그 국민들과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파병결정이 철회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전후재건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적 대안’을 구체적, 세부적으로 마련하여 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들이 그 안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파병에 반대한다면, 정부는 파병결정을 철회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성숙한 ‘의사결정 과정’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파병반대운동의 내실(內實)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짓밟아버린 ‘절차적 정당성’을 국민과 시민의 차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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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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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제10주년 기념세미나 [발제 3] 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
박 성 준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
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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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는 禾=자연=생명=쌀=밥=하늘(*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과 口=食口=사람=민중=인민=만민, 그리고 平=고름=공평=공정=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평화의 ‘平’은 고르게 하다=공평/공정/평등하게 하다=정의롭게 하다와 같이 ‘동사’(verb)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和’를 고르게 하고 정의롭게 하다(‘平’)라는 뜻의 ‘평화’도 동사로 보아야 합니다. ‘평화’가 이처럼 명사가 아닌 동사라면, 평화는 관념(idea)이나 주의=이념(ideology)이 아니고 삶(life)이고 살림(*죽임의 반대)이고 행동(praxis)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말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흔히 “peace”라는 말로 영역됩니다만, peace는 샬롬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peace는 단지 현재 교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에 비해,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샬롬은 전쟁행위가 중단된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샬롬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관계, 영역,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지극히 풍부하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샬롬의 개념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삶의 토대로 여겼던 것, 곧 서로가 함께 일구는 공동체를 포괄합니다.
이처럼, 샬롬이 공동체적 언어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샬롬은 단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내적 안녕’(internal well-being)을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를 말하는 것이며, 정의로운 정치와 균등한 부의 분배 위에 이룩되는 한 사회의 총체적 안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예수가 뜻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샬롬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평화(peacelessness)
2차대전의 참화(慘禍)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고조시켜,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각각의 학문분야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미소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살아남느냐 절멸하느냐가 전(全)인류적 의식(意識)이 되었던 그 시대에, 독일의 대표적 지성 C. F. 폰 바이cm제커는 “평화는 인류 생존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이 명제는 극한적 폭력이 만연하는 오늘날에도 타당합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국제사회의 현상유지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북반구 나라들의 국가 이해(national interest)를 반영한 연구들이 평화연구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나온 것은 제3세계, 발전도상국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제3세계에는 전쟁이 없는 때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쟁의 종식이 행복, 복지,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 빈곤, 기아, 환경오염, 착취, 억압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평화학자 수가타 다스굽타(Sugata Dasgupta)는 “비평화,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 1968)이란 책에서 비(非)평화(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써 제3세계적 삶의 정황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비평화의 구성요소로서 빈곤, 기아, 영양실조, 질병, 오염 등을 들면서 이들은 반드시 전쟁이나 국제적 긴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러한 비평화의 구성요소들을 제거하고 충분한 의식주, 의료, 위생적 생활환경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실현의 길이자 제3세계와 발전도상국의 평화연구의 과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의 현상유지가 아니라, 세계의 정치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혁(變革)을 평화연구의 중심에 놓는 제3세계 평화학의 입장과 접근방법이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異議) 제기에 대해, 북유럽의 평화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대표자격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하고, 이에 반해 행복, 복지,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했습니다.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란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실현이며,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통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폭력에는 신체에 직접 위해를 가해오는 개인적이고(personal) 직접적이며 현재적(顯在的)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이고 구조적이고 잠재적인 폭력이 있다고 하면서 전자의 예로는 전쟁, 테러, 린치, 폭행 등을 들고 후자의 예로는 나쁜 사회제도, 잘못된 관습, 불평등한 경제, 나쁜 정치나 법률, 환경파괴와 오염, 나쁜 개발 따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독의 신학자로서 평화문제를 깊이 연구해오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는 전쟁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인 현대 세계에서,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negative(부정적, 소극적)하게 정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라고 하는 개념은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국제 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릴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가 폭력의 악순환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도 결코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타 다스굽타의 ‘비평화의 개념과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의 개념, 그리고 볼프강 후버의 비판은 각각 평화의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일깨워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스굽타의 비평화나 갈퉁의 구조적 폭력 등의 개념을 매개로 하면서, 평화연구는 그 영역과 지평을 널리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빈곤의 문제, 전 지구적인 20대 80의 사회, 생태계와 환경 파괴 문제, 농업-농민 문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자차별, 학력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 등도 구조적 폭력으로서 평화연구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무관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미국 동행안을 여행하다가 커넥티컷주의 팍스우드라는 곳에 그 때 막 문을 연 ‘피쿼트 뮤지엄이라는 미국 원주민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피쿼트(Pequot) 민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인디언 거주구역에 살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이 박물관을 세운 겁니다. 박물관 안에는 자기들 옛 마을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모형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우리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쿼트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생김새도 우리와 엇비슷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과 물레를 잣고 있는 모습,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 농사를 짓는 도구들이 우리하고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누이와 고모가 있었고 이웃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일만 년 이상 지금은 아메리카라 불리는 이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온 원래의 주인이었구나!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그들을 거의 다 학살해버렸구나! 피쿼트 박물관에서 그들의 순결하고 발랄한 옛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륙이 원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감동에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국에 건너간 첫해, 말이 잘 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몹시 악화돼 있었는데, 그 날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위장병도 나아버리더군요. 키 크고 눈이 푸른 그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서투른 영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언젠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좋은 책을 한 권쯤 번역 출판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9월 11일의 충격 뒤로 사태전개를 보는 데서도 미국과 서방측의 잣대와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도움을 주는 자료나 책자가 거의 없었고 또 평소에 너무나도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지하드'에 대한 이해
전 세계 이슬람권 인구는 14억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인구 18억의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샬롬 즉 평화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슬람의 정신은 다양성의 존중과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라는 것은 이슬람의 특별한 신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하는 이슬람 말일뿐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히브리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멀지 않습니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가 갖는 의미는 내적 투쟁,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내면적인 투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투쟁이야말로 지하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합니다. 지하드의 더 깊은 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깊은 자기성찰에 의한 내적 쇄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외적인 것이 될 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불의와의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장투쟁이 지하드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우는 도발이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종교 가치가 짓밟혔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손에 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 것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지하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이슬람 사람들이 왜 폭력을 쓰게 되었는가. 그 폭력의 뿌리에 대해 모르면서 이슬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시각이 내면화되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큰 병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이런 병에 대해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각,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테러를 보는 눈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6천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을 두고 이런 반응을 보여도 되는 것인가?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제3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고 해방되었다지만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 이래로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감돌고 있고,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는 언제 다시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선 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그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마어마한 초현대 무기를 동원해 보복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서방 세계가 미국의 편을 들고 있고 우리 정부도 그러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을 천명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가령 6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테러 사건이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아랍지역에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행위자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미국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폭력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세계는 그런 미국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미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사건들, 엄청난 규모의 참혹한 파괴와 살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그러했습니다. 걸프전쟁에서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상하수도, 전기, 가스 시설 등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 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병으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 미국이 전해주는 대로 보도해 왔고 우리들은 그저 먼 산 보듯이 하면서 보도의 진실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무덤덤히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미국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관심을 가질 바에는 이 기회에 테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 되짚어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즉, 어떤 집단이 미국 중심의 세계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에 대해서만 테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강대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강대국들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엔의 승인까지 얻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살육을 행하는 전쟁이나 군사공격은 테러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연대(People's Coalition Against War; PCAW)라는 미국에 본부를 둔 평화단체에서는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테러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는 협상과 외교여야 하지 협박과 최후통첩, 봉쇄와 금수조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올 것이기에. … 테러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에 찬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에 의해 승인된 테러, 파시스트에 의한 테러, 개인과 집단에 의한 테러 등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의 개념에 따른다면, 미국이 수단의 제약회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라든가 걸프전에서 행했던 혹은 코소보에서 행했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살상행위도 테러에 포함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平和’와 ‘샬롬’, ‘적극적 평화’와 ‘비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판 미 육군의 ‘테러리즘 정의’(the US Army definition of terrorism)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협박이나 강제, 공포의 주입등... 계산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을 행사하는 것이다.”(Terrorism is “....the caculated use of violence or threat of violence to attain goals that are political, religious or ideological in nature....through intimidation, coercion or instilling fear.”)
이 정의에 따른다면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테러’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테러’도 폭력과 협박과 공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테러 전쟁’(war on terrorism)에 이르러서는 폭력과 공포의 사용은 더 한층 강화됩니다. 테러리스트와 그 동조자들로 간주되는 자들을 공격하고 살육하며 포로로 잡기 위해 한 국가의 무장력이 동원됩니다. 이렇게 볼 때, 테러와 대테러와 전쟁 사이에는 그다지 다른 점이 없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과 협박과 공포의 사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월성’(moral superiority)이나 ‘정의’(justice)를 내세우지만, 그 점에서는 테러리스트 측에서도 할 말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전쟁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전쟁은 평화의 반대말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평화의 반대말이 반드시 전쟁인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없지만 평화도 없다”는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샬롬’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평화’라는 말에는 전쟁의 부재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만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나머지 두 가지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전(保全)하는 것이고, 생명의 살림과 지킴과 보전인 평화는 정의(正義;justice)가 살아 숨쉴 때에야 비로소 담보됩니다.
최근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에서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는 종종 다른 나라의 애국투사입니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아랍에 편집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 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를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 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미국의 보복 군사행동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치인 미국의 하원의원 바바라 리 여사가 말했듯이,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서서 테러의 원인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테러리즘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미국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 왔기에 이슬람 민중들이 저렇게까지 처절한 증오심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자살테러를 감행했겠는가, 그들의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
어느 기자는 “미국 테러 참사는 일종의 부메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미하일 델랴긴(세계화문제연구소 소장)은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는 러시아 속담을 곁들이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약소국가들에 불안정을 조장해 이익을 챙기면서 약소민족들의 이권을 냉혹하게 무시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균열이 심해졌고 그 결과 악마적 테러가 폭발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시사저널2001년10월25일자 참조)
또 우리나라 신문과 잡지에 자주 글을 써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해진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는 ‘한겨레21 2001년10월2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노르웨이의 어느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 씨와 외과의사 후솜 씨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의료봉사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 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 손은 못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솜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솜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의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 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로 인한 아사사태에 시달려 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미국의 신무기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21세기 첫 전쟁은 겉으로는 빈라덴과 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은 명분일 뿐, 미국이 테러응징을 내세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지적합니다.(시사저널 2001년 10월25일자 참조) 숨겨진 전쟁목표는 또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토를 무기성능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려 합니다.
시대는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이번 사태가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후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첨단 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폭력에 맞서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생물학 무기가 등장하고 해서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이자 평화운동가인 월든 베리(Wendell Berry)씨는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 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위한 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4차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이래로 걸프전,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해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 상인들의 투자와 자본회전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는 완전 초토화라는 자연과 생활환경의 파괴가 가능하고 생태적 질서 자체를 완전히 변형해버리는 가공할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해내는 군수산업의 경쟁은 종착점도 브레이크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경쟁의 결과 무기체계는 이미 ‘전쟁무기’라는 한계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재래적 의미의 전쟁 도구가 아니라, 그 악마적인 힘은 신의 영역을 침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를 먹고사는 전쟁상인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체질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 미국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제도를 세계의 모든 지역과 나라에 전파하고, 심지어는 이슬람권과 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이러한 방식은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
이런 모든 문제-인류가 안고 있는 질병들-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문제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지금의 반 평화 흐름보다 더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로 일어나야 인류가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 옹의 저 놀라운 통찰에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꿈을 꿔야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9월 11일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전 세계 인류가 평화를 위해서 커다란 각성을 해야 하고 서로 연대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거대한 연대가 그 반대 방향, 즉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통제를 가하고 그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9. 11 직후, 뉴욕 타임스 9월 24일자 논단 ‘새로운 세계에서의 미국의 주권이란 글에서 펜실베니어 주립대학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공격은 그래도 전통적인 성격의 공격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미국 땅에서 6천명이 아니라 60만 명도 죽일 수 있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과학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는 세계 초 강대 제국이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오해이거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로버트 라이트 교수의 지적처럼, 이른바‘테러 집단’도 미국의 첨단무기에 못지않은 가공할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세계에서는 무기가 지나치게 발달해 버려서 전쟁이나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이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과 정보와 과학기술의 전 세계적인 소통의 결과로 ‘무기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오직 공멸이 있을 뿐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미국은 지금 이라크라는 수렁에 깊이 발이 빠져있습니다. 사건의 결과가 미국의 보복공격과 그에 대한 재 보복으로, 탄저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사용되는 바이오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공격과 같은 더 무서운 재앙으로… 이렇게 끝 모르는 폭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전 세계와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시민적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옹호해야 하며, 미국이 더 강화된 군사주의나 전시 파시즘 체제로 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있도록, 미국 안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고 평화적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점차 확산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무력감,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적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 창조적 상상력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평화의 새 문명을 여는 열쇠꾸러미 중 가장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엮어놓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 세계 반전 평화 연대세력의 힘으로 선의의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현재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님의 최근 편지를 조금 인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바그다드 상황은 현재 최악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진게 없습니다.
제가 나오기 전날 잠깐 시내를 나갔을 때, 무장저항 세력이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지나가지 않는 시간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 그린존 인근마저도 무장 저항세력이 순찰을 돌 정도로 무장 저항 세력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아마도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내부에서 조차 이번 전쟁에 대한 회의가 상당하게 퍼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빨리 이라크에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무장저항 세력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지만, 미군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미군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막강한 화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간인과 저항세력 구분하지 않고 폭격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이런 미군의 행위는 안그래도 이미 멀어진 이라크의 민심을 더욱 멀게만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미군은 민간인과 저항세력을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미군 검문소 앞에서 미군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방향을 돌리는 차량에 마저도 무차별 사격을 해 댑니다. 하다못해 기자와 무장 세력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2,500 만 모든 이라크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2004. 9.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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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의 굴레를 벗고 자율의 대지에 서자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를 어찌할 수 없어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부터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옳을 것인가? 이 물음을 품고 한걸음 물러나 간디 옹을 찾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간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간디가 직접 저술한 글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드문 글들 가운데 그의 ‘자서전’과 더불어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글 한편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어 있습니다. ‘힌두 스와라지’(안찬수 옮김, 출판사 강)가 바로 그 글입니다.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가 1909년 12월 남아프리카 트란스발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투쟁을 대표하는 주간 신문 ‘인디언 어피니언’지에 구자라트어로 발표한 글입니다.
그 글의 서문에서 간디는, “ ‘인디언 오피니언’의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인도의 자치라는 주제를 놓고 몇 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습니다. 스스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기에 간디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진솔하게 표출되어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라는 말은 간디의 방식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방식’이란 다른 사람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스와라지’(Swaraj)는 ‘자치’를 뜻하는 힌두어로, 간디 사상의 한 핵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swa=self; raj=govern, 따라서 self-government, self-rule 등으로 영역됩니다. 간디는 ‘민족적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은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때 그 주체는 계급이나 계층 또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개인인 나 자신이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고 하는 이 점을 간디는 주목하고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의 제10장에서 ‘폭력’의 문제에 언급합니다. 그 장의 구자라트어 제목은 ‘darugolo’인데, 이 단어는 4장에서는 ‘무기와 탄약’으로, 15장에서는 ‘총’으로 번역되었다. 간디는 이 말 대신에 ‘육체의 힘’ ‘총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로 ‘혼의 힘’(atmabal)을 사용하는 것과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sat=truth, agraha=firmness), [진리파지], [비폭력적(또는 수동적) 저항] [시민적 불복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이 말은 고통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혼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연민이 있는 곳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무기의 힘은 사랑의 힘이나 혼의 힘과 싸울 때에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간디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의 힘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고 근본적 변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 세계를 변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간디가 말하는 ‘사티아그라하’ 곧 수동적, 비폭력적 저항은 현실 속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간디에 관해서 가장 큰 오해가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간디는, “나는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비폭력 저항을 믿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사티아그라하‘를 현실과 세계를 변혁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비폭력적 저항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적 대안’(a realistic alternative)으로 얘기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를 군사적 언어(military terms)로 얘기했다고 말하는 해설가들 -‘A Force More Powerful’의 저자 Peter Ackerman과 Jack Duvall 같은 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로 간디는 “비굴한 굴복 보다는 차라리 폭력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간디는 누구보다도 ‘행동’과 ‘피동성’(passivity)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간디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베를린의 한 유태인 지도자인 랍비에게, “저항을 조직하고 나치의 위협에 맛서 싸울 수 있도록 많은 유태인들과 유태인 동조세력을 동원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간디는 불의한 상황에서의 피동성을 볼 때 마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비폭력적 저항이 피동성과 대체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라크 파병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간디 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혜를 얻습니다.
먼저, ‘간디의 방식’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중대한 문제는 미국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을 때, 타율이 아닌 자율(‘스와라지’)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힘’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고, 끝내는 패배하고 이라크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미국에 추종하는 이라크 파병 한국군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우리는 ‘사티아그라하’ 곧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의 방법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미국정부의 압력에 의한 결정’이라는 데 공감하는 85%이상의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 국민들이 파병반대의 이유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각가지 방법으로 도와드리며 그 국민들과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파병결정이 철회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전후재건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적 대안’을 구체적, 세부적으로 마련하여 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들이 그 안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파병에 반대한다면, 정부는 파병결정을 철회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성숙한 ‘의사결정 과정’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파병반대운동의 내실(內實)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짓밟아버린 ‘절차적 정당성’을 국민과 시민의 차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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