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뜬 구름 잡기
비정규 기독교 2015/12/04 09:28 http://blog.hani.co.kr/sydneytaxi/48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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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만남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이 사람 만나는 일이다. 대부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일 때문에가 아니면 재미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둘 중에 어느 것도 속하지 않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 사람을 만난다. 쉽게 이야기해서 뜬구름을 잡기 위해서 만난다는 것이다. 요즘 좀 큰 뜬구름을 잡기 위해서 쫒아 다닌다. 이 뜬 구름은 원래는 독일산인데 영국에서 많이 개발된 퀘이커라는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 기술을 배워온 황우승 목사를 만나서 이 퀘이커를 국산화 하려는 구름을 잡고 있다. 그러니까 뜬구름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잡은 것이다. 핵심 기술은 침묵이다. 요즘은 '침묵은 금이 아니라 납 '인 자기 표현의 시대이지만 그것은 사람을 사이에서의 일이고 신 앞에서는 침묵을 해야 통할 수 있는 법인데 그걸 모르고 있다. 내가 한국에 와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사람을 만나는 중에 씨끄러운 것이다. 왜들 그렇게 악들을 써대는지 모르겠다. 나는 신이 있다면 (나는 믿지만) 인간들이 자기를 향하여 떠드는 소리 때문에 무척 성가실 것 같이 생각된다. 더욱이 신에게 땡깡부리는 것을 가르치는 직업마저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하려는 것은 ' 신 앞에서의 침묵 지키기 '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애초에 기도를 잘못 배워 신을 귀찮게 해야만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애초에 기도를 잘못 배워 신을 귀찮게 해야만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디어 주사위를 던졌다. 모든 것이 황우승 목사님 때문이다. 황 목사님은 영국에서 오랫동안 퀘이커와 교류를 가졌던 경험이 있다. 종교적 형태의 가장 성숙한 모습으로서 퀘이커를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황 목사님의 등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샘이다. 이제까지 생각만 하고 가 보지 못하던 길이라서 자신이 없어 망서리고 있던 길을 떠나도록 등 떠밀어 재촉을 받은 것이다. 하여서 드디어 12월 13일 모처에서 극비리(?)에 첫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밖이 아닌 내면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나는 그동안 우리의 종교 생활이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모두 시끄럽다. 그렇다고 가부좌 틀고 앉아 참선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홀로 앉아 있던 예수처럼.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게 혼자서는 잘 안되니까 모여서 함께 해보자는 것이다. 원가가 가장 적고 들고 부가가치가 높은 영성개발을 해 보자는 것이다. 조직도 제도도 교리도 없는, 그러나 이미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그리고 지금도 가고 있는 길을 가보자는 것이다. 저 장바닥 같은 종교 시장에서 한 발 떨어져서. 다석 유영모 선생의 " 참생각을 하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고 하셨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참생각을 하는 것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종교이다. 자기들 문화권에서 형성된 제 멋대로의 개념으로 신을 주조해서 주장하고 다르게 믿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이고 2500년 불교역사이고 1300년 이슬람 역사이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만 찾은 탓이다.
참생각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다석 선생은 깊이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즉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관계여야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신관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극성을 포함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범신론과 범재신론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범재신론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극성을 포함하는 즉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신이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넘어(beyond in our midst) 있다"라는 의미이다. 신이 초월(transcendence)로 부터 내재(immanence)로의 轉移. 즉 신을 밖에서 찾으려는 노력보다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나 자신에 대한 정직한 질문만이 신 앞에 서는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월적인 요소를 찾는 것 보다는 삶의 참 모습에 직면 할수록 존재인 근원인 절대자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은 공관 복음 보다는 도마 복음에서 찾아 보기 좋은 태도이다.
다석 유영모는 범재신론을 생각하는 곳에 신이 있다고 하는 염재신론으로 표현 했다. 염재신론(念在神在)이란 말은 생각이 바로 神이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거룩한 참 생각은 神이 있음으로 존재하기에 생각하는 곳에 神이 있다."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신의식의 근거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방바닥에서 뒹굴 딩굴거리는 놈팡이의 공상 속에 신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