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전 일본의 세월호를 만나고 통곡하다!
어제 40대 여성 교우의 아버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 이상하게 나의 발길을 이끄는 신사가 하나 있어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효고현 북부 시골 토요오카(豊岡) 이즈시쵸(出石町)의 이치노미야신사(一宮神社)... 1,0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들과 오랜 삼나무 숲이 그곳이 오랜 세월 지역의 종교적 공간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음습한 뒷길을 따라 올라가니 빽빽한 삼나무 숲 앞에 청일, 러일, 중일전쟁 등에 나가 목숨을 잃은 지역 젊은이들의 혼을 기리는 ‘충혼탑’(忠魂塔) 세워져 있어, 흔한 일본 신사의 국수주의 선양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오른 쪽에 서 있는 ‘대효고개척단 순난자의 비’(大兵庫開拓団 殉難者之碑弾)라는 비석이 호기심을 자극해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리고 비문을 읽고 아연(啞然)하여 통곡하고야 말았다.
“1944년 3월, 대효고 개척단원 476명 만주(국) 빈강성 난서현 북안촌, 쌍합 촌락 두 곳 입식(入植, 식민지 이주 시킴). 1945년 8월 17일 345명 입수자결(入水自決)하다.“
(昭和十九年三月大兵庫開拓団員四七六名満州浜江省蘭西縣北安村, 双合屯二入植シ昭和二十年八月十七日三四五名入水自決ス)
(昭和十九年三月大兵庫開拓団員四七六名満州浜江省蘭西縣北安村, 双合屯二入植シ昭和二十年八月十七日三四五名入水自決ス)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 구호로 국민들을 속이며 세뇌하던 일본 정부는, 전쟁 막바지까지도 전쟁 식량의 조달을 위해 자국의 농민들을 무리하게 만몽(만주몽골)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케 했다. 그리고 선량한 농민들로 하여금 본토 농민들을 노예로 삼게 하고 착취하도록 했다. 즉 가해자가 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은 가해자로 살아야만 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문제는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그들 농민과 가족(노인, 여성, 아동)들은 집단 자결을 강요받았다. 정부 정책과 명령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 1944년에 만주로 떠난 토요오카의 농민들은, 다음 해(1945) 패전 소식을 듣고, 어른아이 할 것이 없이 몸을 줄에 묶고 돌을 메달아 집단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 소련군의 포로로 비참하게 죽느니 자결을 선택하도록 종용한 국가의 무책임한 폭력이다.
내가 통곡한 이유는 만주로 떠난 토요오카 농민 가족의 숫자가 세월호 탑승객고 똑같은 476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 숫자도 세월호 306명(사망실종)을 조금 웃도는 345명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물속으로 빠지는 집단 자결을 강요받았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는 저 무책임한 일본 정부의 ‘대효고만주개척단’의 죽음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1944년 476명 만주행, 익년 345명 집단 익사 자살...
2014년 476명 제주행, 익일 306명 집단 익사 학살...
2014년 476명 제주행, 익일 306명 집단 익사 학살...
지난 2016년 8월 14일, 일본 NHK는 【마을 사람들(村人)은 만주로 보내졌다 - ‘국책’ 71년째의 진실】(村人は満州へ送られた~“国策”71年目の真実)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일본 농민들의 만주몽골 지역 이주정책은 무려 500만명을 목표로 했었고, 국내 빈곤층을 해외로 내보내어 국내 경제의 파이를 확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통제 관리 요원확대를 통해 효과적인 수탈과 전쟁동원을 획책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전북 지역 새누리 의원 정운천이란 자가 젊은이들 10만 명 쯤 캄보디아나 아프리카 보내면 좋겠다는 발상의 뿌리이기도 하다.
목표는 500만명이었지만, 패전 때까지 보내진 일본인 개척민의 수는 27만 명 이상이었고, 전황이 불리해져 위험이 극대화된 1943년 이후에도 6만 명 이상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향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3만 5천 명이라는 가장 많은 지역민을 사지(死地)로 내몬 나가노현의 비극적 일화를 소개한다. 전쟁 말기에 만주에 건너간 95명의 마을 사람들이 결국 집단 자결로 내 몰렸다는 것을 알게 된 촌장의 일기가 그것이다. 탁무성(拓務省)과 농림성 등 중앙정부와 각 도도부현(지방정부)이 교묘하게 마을 촌장들을 유도하여 만주 개척민 인원수를 강제 할당하였고, 그 확보 인원만큼 지역 보조금를 주는 등, 사탕과 채찍을 동원해 이주를 획책했던 경위가 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오직 전쟁과 부국강병의 광기에 빠져 있던 국가의 폭력 하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476명이 타고 있던 세월호처럼 말이다. 그리고 저 일본인 개척단의 최종 배후 조정자들은 만주의 관공군 군벌 장교들이었다. 박근혜의 아비 박정희는 바로 그들 ‘관동군’의 장교였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병징용, 그 모두가 그들이 주도한 야만적 군국주의의 죄악이다. 지금도 원자력발전소의 위기와 불안고조, 사드 배치 등의 무기의 과잉 수입과 전쟁 공포 조장 등의 문제는 이들 군국 좀비들이 일소되지 않은 까닭이다.
다큐멘터리에는 나가노현 남부, 시모이나군(下伊那郡)의 토요오카무라(豊丘村)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내가 어제 방문한 효고현의 ‘토요오카’와 발음이 같다. 2,900명이 살던 궁핍하고 조그만 이 마을에서는 전쟁 말기에 27세대 95명의 마을 사람이 만주에 보내졌다. 하지만 그 후 남자 농민들은 모두 군에 소집되었고,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 현지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으며 폭력과 강간에 노출된 여성과 아이들 73명은 산속으로 도주하던 끝에 결국 집단 자결을 하게 된다. 당시 15세였던 쿠보다 칸(久保田諫) 씨(현재 86세)는, 아이 어머니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이는데 협력했고, 20여 명의 아이를 죽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찌르며 집단 자결한 어른들... 산속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하지만 급소를 빗겨간 쿠보타 씨는 빈사(瀕死) 상태에서 발견되어 잘 알던 중국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 당시의 비참함을 증언했다. 전쟁 당시 촌장으로서 개척단을 꾸려 그들을 배웅했던 35세 촌장 쿠루미사와 모리(胡桃澤盛) 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패전 직후 41세가 되던 해에 촌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 “개척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라는 유서를 남기로 목을 매 자살했다. 지금 내 나이의 촌부(村夫)조차 자신의 오판에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 쿠루미사와 켄(胡桃澤健, 78세) 씨는 아버지가 자살했던 안방을 슬픈 표정으로 소개한다. 일본 정부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참회하는 내용은 1만 쪽 분량의 일기가 최근 공개됐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쿠리미사와 촌장의 일기와 달리, 당시 그 사업을 진행한 전직 관료들의 반성 없는 뻔뻔스러운 증언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책임지지 않는 국가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책’이라는 이름의 악마는 지금도 발악(發惡)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을 온순한 개로 길들여 ‘발선’(發善)케 하는 것은 시민들의 양심과 연대 의식이다.
71년 전, 나라의 지시만 믿고 만주행 배에 몸을 실었던 476명의 효고현 농민 가족 중 345명은 이듬해에 목숨을 잃었다. 3년 전 세월호에 몸을 실었던 476명의 승객들 중 306명이 선장과 해경의 지시를 믿고 따르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러한 역사는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기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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