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정배 교수 독서 여정①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 기독 지성에게 듣는 책과 인생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인터뷰] 이정배 교수 독서 여정①
기자명 강동석
승인 2017.07.20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거리의 신학자', 이정배 교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 교수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지난해 초 은퇴했다. 정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은퇴한 것은 학교 밖을 교회 삼아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세월호 이후 집회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각종 행사와 집회에서 기도하고 설교했다. 2015년에는 감신대 정상화를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뒤로멈춤앞으로

이정배 교수는 누구보다 '토착화 신학의 산실' 감신대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신학자다. 윤성범 박사, 변선환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토착화 신학의 맥을 잇기 위해 바젤로 유학을 갔고, '개신교와 유교'를 공부했다. 같은 신학자인 아내 이은선 교수도 함께였다. 이미 30년 전부터 개신교 신학과 생태학, 과학, 이웃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글을 써 왔으며, 늘 한국적 신학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신교 신학자로서 대안을 만들고 길을 내는 일로 수렴된다. 다양한 주제로 수십 권의 책을 펴냈다.

이어지던 빗줄기가 잠시 잠잠해진 7월 11일,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쉰 목소리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또렷이 살아 있었다. 오늘날 이정배 교수를 만든 사유의 궤적을 두 차례 인터뷰로 나눠 싣는다.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고 유학을 갔다 온 뒤 '한국적 생명신학'을 논하기까지의 여정을 듣는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글쓰기와 설교, 종교개혁 500주년과 세월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눌 것이다(2부 인터뷰 바로 가기). 2시간여 대화를 정리했다.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이정배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다독(多讀)하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빠르게 1번 읽는다. 내용의 대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읽더라도 1번 읽으면, 머릿속에 내용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러면 2번째 읽을 때 어떤 책인지 알고 읽게 되니까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되도록 한 번에 읽으려 한다. 1,000쪽 정도 되는 책도 3~4일이면 읽는다. 열흘이나 보름 넘게 읽으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더라.

대부분 책은 빠르게 한 번 읽고 말지만, 10권 중 3권 정도는 깊게 숙고하고픈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읽으면서 노트에 정리한다.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정리하는 것이다. 논문이나 글을 써야 하니까 이런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즘에는 졸업논문을 안 쓰고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으나, 우리 때는 무조건 논문을 써야 했다. 400자 원고지 50매를 채워야 했는데,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학사 논문을 쓰면서부터 내용을 정리하며 독서하게 됐다.

- 어렸을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나. 독서 습관을 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늦게 알았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은 대학교 1학년 때다. 의사이자 소설가인 조지프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 1896~1981)이 쓴 소설 <천국의 열쇠>(바오로딸)를 읽고부터였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신부가 등장한다. 주변에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부와, 그와 대조적으로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실하게 소명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치숌이라는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처음으로 독서의 즐거움을 준 책이다. 신학도로서의 소명을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시 200원이면 문고판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천국의 열쇠>를 읽은 이후로 당장 읽지 못해도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웬만하면 다 사 모으려고 했다. 책을 발견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은 하나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책과의 만남을 귀하게 생각했다. 현재는 감신대에 종교철학과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대신 종교철학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을 비롯해 유명 철학자들 책을 친구들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 기독교 학교인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읽은 책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나.

고등학생 때 읽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생애에 대한 책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당시에는 잘 모르고 읽었다. 학교에 액자로 걸려 있는 위인 중 한 명으로 슈바이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림의 성자', 의사인 줄만 알았다. 그때는 안창호와 슈바이처의 삶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한 소명이 있었던 것인가.

특별한 소명이 있어서 신학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식구들이 충북 보은으로 이주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했다. 아버지는 유교인이었고,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토속신앙인이었다. 기독교 배경이 없는 집안에서 기독교 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 시절 6년간 아주 열심히 활동했다. 종교부장을 비롯해서 학교 임원, 학생회장까지 맡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영락교회 중등부에서 3년간 생활한 것도 큰 추억거리다.

고등학교 입학 후 평동교회를 다니면서 평생의 스승 장기천 목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나중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낸 분이다. 아주 올곧은 분이셨고, 이분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과 평소 행실을 보면서,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 저런 삶이 목사의 삶이라면 나도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신대에 진학했다.

감신대에 들어와서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감신대를 다니고 있을 때, 감리회 감독 선거가 있었다. 목사들이 모여서 160번 넘게 투표를 했다. 투표를 할 때마다 다 같이 기도했다. 기도하고 투표하고, 기도하고 투표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렇듯 목사들이 기도했는데 한 사람 마음도 움직여지지 않아 표가 그대로였다. 단 1표도 요동하지 않았다. 감독은 결국 그 자리에서 뽑지 못했고, 감리회는 양분됐다. 그 모습을 보고 심한 회의를 느꼈다. 기도가 거짓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군대나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친구와 군대 가기 전에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그 친구는 군대를 갔는데, 나는 안 갔다.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가 부임해 왔다. 그분과의 만남이 신학교에 계속 남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총학생회장도 맡고, 변선환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다.

- 시기별로 전환점이 됐던 책을 소개해 달라.

먼저 대학교 때 읽었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철학적 신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을 들 수 있다. 야스퍼스는 이 책에서 '차축 시대' 개념을 이야기한다. 보통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절대적인 한 점으로 인식된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광명이 찾아온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까지 이 땅을 총체적 어둠이라 여겨 왔다.

칼 야스퍼스는 이런 기독교 계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예수가 오기 전, 다른 종교들이 싹텄던 기원전 8세기부터 2세기까지의 '차축 시대'를 이야기한다. 갑작스럽게 홀연히 한 빛이 비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계사적으로 제(諸) 문화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종교성이 발현되는 응축적인 시기가 있었다. 기독교 역시도 '차축 시대' 종교의 발전적 양태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당시 예수를 믿어 구원받지 않으면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간다는 신앙 이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기독교에 입문하지 않은 가족들이 지옥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야스퍼스는 철학에도 신앙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신념 때문에도 죽을 수 있는 신앙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을 받았다가, 그 자리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과학자인 갈릴레이뿐 아니라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신부도 재판을 받았다. 수학자면서 신부였던 브루노는 갈릴레이와 달리 지동설에 대한 주체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하나의 객관적 지식으로 봤다. 지동설이 이미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사실관계는 바뀌지 않으니 살아남기 위해 지동설을 부정한 것이다. 브루노는 철학(주체)적 신념을 지키려고 지동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도 순교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야스퍼스는 주체적 자기 확신도 신앙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이것 역시도 기독교 계시 신앙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학사 논문의 주제였다. 대학원 시절에는 야스퍼스 철학을 신학화한 프리츠 부리(Fritz Buri, 1907~1995)를 공부했다. 당시 변선환 교수는 바젤대학교 프리츠 부리 교수 밑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온 상황이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의 신학은 칼 야스퍼스와 슈바이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부리 교수는 슈바이처에 대한 존경 때문에 신학 공부에 뛰어들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 이해인 '철저 종말론'를 논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철학자 야스퍼스를 교회의 교사, 교부 반열에 세울 정도였다.

다시 말해 칼 야스퍼스는 기독교 계시 신앙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근거해 '철학적 신앙'을 이야기했고, 부리 교수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슈바이처의 신학을 연결 지었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으나 종말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곧바로 오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인식이 아닌 '의지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의 의지와 내 의지가 결합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존재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슈바이처에게서는 이것이 생명 외경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슈바이처 본인이 아프리카로 향한 것은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리 교수는 동양 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슈바이처가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저마다 생명 외경을 말한다고 믿은 탓이다. 하지만 동양 종교들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계시 신앙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의 철저성 여부에서 비롯했다.



한쪽 서가에 자리한 때 묻은 책들. 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과 프리츠 부리 교수의 저서가 섞여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감신대에서 석사를 마친 우리 부부에게 변선환 교수가 윤성범 박사의 토착화 신학(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맥을 이으라며 유학을 권해 바젤로 유학을 떠났다. 토착화 신학을 할 수 있는 신학 방법론을 부리 교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바젤은 유럽에서도 특수한 곳이다. 모두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를 정신 나갔다고 믿었을 때, 니체에게 강단을 내줬고, 칼뱅(Jean Calvin, 1509~1564) 당시 제네바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을 지켜 준 도시다. 그런 의미에서 휴머니즘의 도시라 일컬어진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협조하지 않고 도망친 칼 야스퍼스를 대학교수로 세웠다. 티베트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유럽 도시로도 유명하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바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에 대세였다. 그가 물러난 이후 바젤에 세 가지 흐름이 생겼다.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동양 종교와의 대화, 전통 교의학이었다. 내가 유학 갈 당시 프리츠 부리 교수는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1929~2013)와 더불어 동양 종교와 대화에 관심이 있는 70대 학자였다. 앞서 변 교수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방법론을 알고 있어서 우리 부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려움 없이 6년 안에 박사를 마칠 수 있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는 칼 바르트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때, 바젤대학교에 와서 고유 영역을 개척했던 사람이다. 칼 바르트는 프리츠 부리 교수가 바젤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바젤은 프리츠 부리를 초빙했다. 우리 부부는 유학 생활 대부분을 신학자인, 칼 바르트 둘째 아들 집에서 지냈다. 신학적 이해가 다른 우리 부부를 일원으로 받아 준 것이다.

나는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유학과 신개신교 간의 공동의 구조와 문제점 탐색'이라는 박사 논문을 썼다. 유학자 3명(주희, 퇴계, 율곡)과 신학자 3명(슐라이어마허, 헤르만, 트뢸치) 총 6명을 다뤘다. 유교와 기독교가 다른 종교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를 말하는 과정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구조를 탐색한 논문이었다. 논문 평가도 까다로웠다. 유학자 1명과 한글과 한문을 아는 외국 학자 1명이 추가로 참여해 평가했다.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박사 논문이 아니라 그때부터 무슨 책을 읽고 어떻게 뻗어 가느냐다. 그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이 시절, 내가 배운 제일 중요한 점은 기독교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적 에토스를 배웠다. 이 배움이 내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6년, 한국에 들어온 뒤 제일 먼저 나한테 영향을 줬던 책은 물리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Carl Freidrich von Weiszacker, 1912~2007)가 쓴 <시간이 촉박하다>(대한기독교서회)이다. 1990년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서울 세계 대회를 앞두고, JPIC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는 세계의 분배 불균형과 핵무기 과다 보유, 지구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 JPIC 문제들을 책임지지 않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멀었다고 지적했다. JPIC 문제가 세계와 자연 생태계에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 종말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오늘날 세계가 굉장한 환경 위기에 처해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JPIC에서 Justice(정의)는 1세계와 3세계 간의 문제다. Peace(평화)는 핵무기의 문제다. 1세계와 1세계의 문제인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Integrity of Creation(창조질서의 보존)을 이야기하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전 세계 공통 문제인 탓이다. 이때 토론 과정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생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생태학을 하다 보니, 자연과 여성의 운명이 거의 동근원적으로 인식돼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은 늘 여성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고대에는 어머니, 중세에는 마녀, 근대에는 창녀 이미지로. 여성 인식도 그렇게 변했고, 자연 이해도 그런 메타포로 바뀌었다. 근대에 와서는, 남성이 돈으로 사서 마음 놓고 짓밟고 유린할 수 있는 존재(창녀)로 이해된 것이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같은 사람이 창녀 메타포로 자연을 이해했다.

그러다 보니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생태여성학)도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과 종교의 주제가 신학계에 널리 확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학사나 과학과 종교에 대한 책을 몇 권 번역하면서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여성학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JPIC를 근간으로 이쪽 분야 독서량이 늘어나면서 관심이 많아졌고 논문도 많이 써 냈다.

내가 번역한 것 중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책 두 권이 있다. 먼저 데이비드 린드버그(David Lindberg, 1935~2015)가 쓴 <신과 자연: 기독교와 과학 그 만남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이다. 신과 자연은 기독교 계시의 두 지평이었는데, 기독교는 자연을 잃어버리고 신만의 종교가 됐다. 따라서 기독교는 다시 자연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과학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세종연구원) 저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의 <생명권 정치학>(대화출판사)이다. 이 책은 로즈마리 루터(Rosemary Ruether, 1936~)를 비롯한 기독교 여성 신학자에게 신학 콘텐츠를 많이 제공했다. 이 두 권을 번역할 때 제자 박일준 박사 도움이 컸다.

생태학 문제는 결국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현대 과학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물리학자들이 자기 영역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종교적이 되어 가는 현실을 봤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은 종교와 다른 종교의 만남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흔히 양자 간에 공명론(consonance)적 방식이 통용된다.

아주 잘못된 만남의 결과물로 창조과학이 있고 그것이 발전한 형태가 지적설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과학도 종교도 아니다. 지적설계론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됐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무수한 장애인과 동성애자가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인가. 너무 가혹하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축복일지 모르겠으나, '정상'을 벗어나면 그처럼 가혹한 일도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기독교(창조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동성애 문제도 신앙이나 종교나 기독교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과학의 문제다. 자연 생태계에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생명체가 8~10%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자연 생태계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다는 것이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 1940~)의 말이다. 이들을 부정하고, 잘못된 시각으로 동성애자들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어둠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내몰고 있는 역할을 기독교인이 자처하고 있다.

천동설·지동설 문제가 성경 구절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동성애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계속 성서 구절 문제로만 본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종교를 해방할 수 있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해방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존재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는 시대가 됐다. 이것도 사실 유전자 조작 문제와 관련 있다. 유전자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에 대해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은 과학의 개벽을 정신의 개벽이 못 따라가는 상황이다. 과학의 개벽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신학자들이 논의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외계인도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가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우주 전체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든 비유가 있다. 지리산 크기가 전 우주의 크기라고 한다면, 태양계는 지리산 자락에 떨어진 인간의 눈썹 한 가닥 정도의 크기라는 말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지구와 인간 중심적인 사유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은하수가 수십억 존재하는 대우주를 발견했기에 신학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자꾸만 편협한 자세를 취한다면 신학은 점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스스로 위태롭고 무너질 것 같으니까 바깥에 적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슬람, 동성애, 종북, 좌빨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자기 영역을 좁게 만들고 타자를 악마시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도 기독교인 수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세월호 관련 서적들(위)과 이정배 교수의 저서와 역서 일부(아래). 뉴스앤조이 최승현

토착화 신학을 공부해 왔지만, JPIC 영향으로 서양의 생태학, 여성학,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공부하다 보니 우리 것에 대한 관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뿌리 깊이 깨달았다. 서양의 자연, 서양의 생각만 공부하지 않고, 동양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고민이 다시 생겼다. 생태학적 지평에서 토착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토착화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예컨대, 윤성범 박사가 조상의 효, 하늘의 효를 말했다면 나는 생태학 관점에서 땅에 대한 효(地孝)를 생각하게 됐다. 풍수지리설에 대한 생태신학 연구도 이때쯤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양 것에 대한 공부(생태학, 페미니즘,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고, 이를 토착화 신학의 내용으로 동화했다면 이후에는 민중신학의 정치적 토착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가 시대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민중신학이 관심을 보이고 있던 동학에 대해 여러 편 논문을 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후 유교 전통을 진일보시켜 대중화·서민화한 동학에 대한 관심이 점전 커졌다. 그렇게 동학,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다석 유영모와 바보새 함석헌에 대한 글도 그 연장선상에서 여러 편 생산했다.

그런데 당시의 2세대 민중신학은 안병무 교수와 서남동 목사의 영감이 넘치는 1세대 민중신학과 달랐다. 마르크스적인 민중신학이 주된 흐름이었던 탓이다. '과학적 민중신학'이라는 이름하에 1세대에 비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했다. 토착화 신학 전통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수용하고, 서구 생태학을 아시아적 토양에서 다시 논하는 방식으로 '한국적 생명신학'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냈다. '한국적 생명신학'은 토착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민중신학과 생태신학과 문화신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사유의 틀을 가지고 서양 생태신학 개념을 담았고, 민중신학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로써 변선환 교수의 종교해방신학이 말하는 해방의 차원을 우주 생태적 지평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결과물이 1996년 <한국적 생명신학>(감신)으로 출판됐다. 민중신학과의 갈등과 투쟁, 서양 신학을 넘어 보겠다는 토착화 의식의 결과물이다.

거듭 말하지만, 2000년에 접어들면서 유영모, 함석헌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교수 초년 시절에도 다석 유영모를 배워 본 적 없었다. 마침 다석의 제자 김흥호 목사가 이화여대를 은퇴하고 감신대 명예교수로 오면서, 그분과 독대하며 다석 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해서 출간한 다석 유영모에 관한 책이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사람들), <빈탕한데 맞혀놀이>(동연)다.

나는 다석 유영모의 예수 이해를 케리그마 이전 예수, 곧 역사적 예수가 불교의 삼재론(三才論) 틀에서 토착화한 것으로 풀었다. 서구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동양적 사유로 기독교를 이해했던 다석 같은 사상가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 알게 됐다. 신학을 하는 데 있어 다석 유영모를 알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패러다임 시프트였다.(계속)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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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 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 Facebook

Philo Kalia - 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 Facebook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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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김태창 선생님은 교토 학파의 창시자인 기타로 니시다(Kitaro Nishita, 1870-1945)를 예로 들면서 그의 절대무의 철학, 場所의 철학을 언급하셨다. 

나는 감신 대학원 시절 변선환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교토 학파에 관하여 많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름만 들었지 그 철학의 내용에 대한 가르침은 없었다. 

선생님의 학위 논문 가운데 야기 세이이치의 장소적 그리스도론이 있어 읽은 적이 있지만 이해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금새 잊었다. 
선생님은 기독교-불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붓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끝내 말씀을 아끼시고 그냥 신비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말씀을 늘 흐렸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신학생들에게 파격적인 말씀으로 받을 충격을 염려하신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나 대화는 늘 기독교 측에서 심한 의심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이단 재판으로 귀결되기 일쑤이다.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인 사람들 불교 좀 공부하시라고,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듯 정성스럽게 공부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 후 이 책 <참 자아의 주님이신 붓다-그리스도>(Der Buddha-Christus als der Herr des wahren Selbst, 1982)를 알게 되었다. 저자인 프릿츠 부리는 바젤 대학 신학부 교수였는데 이 책에서 교토학파의 종교철학과 기독교를 다루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자아의 주님이시라면 붓다는 불교인들에게 참자아의 주님이시라는 내용이다. 물론 주님은 상징어이다.

  • 프릿츠 부리는 교토 학파의 8명의 철학자를 논의하는데, 
  • 기타로 니시다를 일본의 위대한 철학자요 교토학파의 창시자로,
  • 하지메 타나베(Hajime Tanabe, 1885-1926)에게는 “참회의 철학과 죽음의 변증법”을, 
  •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이제츠 타이타로 스주키(Daisetz Teitaro Suzuki, 1870-1966)는 “서양인들을 위한 선불교”로, 
  • 신-이치 히사마추(Shin-ichi Hisamatsu, 1889-1980)는 “무신론적 불교”라는 제목으로, 
  • 게이지 니시다니(Keiji Nishitani, 1900-1990)는 “禪의 종교철학”으로, 
  • 요시노리 타케우치(Yoshinori Takeuchi, 1913-2002)는 “불교적 실존주의”로, 
  • 시추테루 우에다(Shizuteru Ueda, 1926-2019)는 “자기상실적 자기의 삼위일체 속에서 대상적 실체 사유의 돌파”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 마사오 아베(Masao Abe, 1915-2006)는 “선불교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서술했다. 


나는 이 방대하고 어려운 책보다는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의 “절대무(Absolutes Nichts)”라는 책을 복사해서 두세 번 읽은 적이 있다. 
주로 게이지 니시타니의 “空의 철학”을 연구하여 제출한 학위논문이다. 

1989년 겨울 학위논문 완성을 앞두고 하이데거 생가는 꼭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이데거의 고향 독일 남부 메스키르히를 찾아 생가와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보고 들길을 걷고 하이데거 아키브를 들어갔을 때 마침 거기에는 게이지 니시타니의 흉상이 있었다. 
둘 사이의 사상적 깊은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흉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후 이 분야를 더 이상 공부하지 못했다. 


과정철학 사상이 더해져 하느님은 無이고 空이고....


김태창 선생님은 교토학파의 일본철학은 한국철학 수립을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동의하고 싶은 말씀이다. 
선불교적 전통에서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다시 서양철학을 선불교를 통해 해석하고, 선불교를 서양철학을 통해 해석하는 상호 교류, 만남, 논쟁, 대화 속에서 교토학파와 같은 일본철학이 형성됐으리라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일본철학은 아베 마사오 이후 계승되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5월 27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데 기독교-불교, 불교-기독교의 만남이 한국 사상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한국인의 영성 제고를 위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10명에서 100명이 되고, 1000명이 되고 10,000명이 되고 10만 명이 되고 100만 명, 1,000만 명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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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이찬수
어제야말로 참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고 죄송했습니다. 결혼33주년 1박2일 여행다녀오느라...^^
김태창 선생님께도 인사여쭙겠습니다
Reply14 h
Philo Kalia
이찬수 교수님 부재의 자리가 컸지만 33주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Reply7 h


오범석
멋진 박사님의 통찰과 고민, 그리고 신헉자로서의 기조가 좋습나다.
Reply14 h
Philo Kalia
오범석 공감의 마중글 감사드려요
Reply7 h


차건
학부 시절 스즈키 선사의 <선불교 입문>을 영어로 읽고 싸대기 한대 맞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죠.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죠. "당신은 왜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유감을 느끼는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제대로 각성하게 해준 한 마디였습니다. 그 뒤 스즈키의 물음을 복음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나의 신앙은 끝나겠다고 생각했었죠.
Reply13 hEdited
Philo Kalia
건차 공감합니다. 스즈키의 <서양의 길과 동양의 길>, <선불교에 대한 강연> 등을 읽었던 강렬한 느낌이 생각납니다.
Reply7 h


박상진
목사들이 불교를 공부하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일천하지만 불교를 공부할수록 그 깊이에 매료되어,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Reply13 h
Jongsoo Lim
연등은 곱고, 아롱진 얘기는 깊고 어려우니요. 연등 한 점 걸겠습니다. "깨닳음을 허하소서."
May be a doodle of lighting and text
Reply7 h
Philo Kalia
Jongsoo Lim 아롱지다는 말, 참 좋네요. 연등이 세상 곱게 만들어 인간들 아롱져 大通하길 바랍니다.
Reply7 h


변상규
페북에서
가장 좋은글 늘 감사합니다 심교수님
Reply5 h
Philo Kalia
변상규 변교수님, 안부인사 전합니다.
마중글에 감사합니다
Reply2 h


무(無)로부터 창조 Fritz Buri

무(無)로부터 창조
동토마햇빛교회(김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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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로부터 창조
stevision 2013. 10. 22. 19:34
[원문출처: Dogmatik im Dialog]

 

Die Schöpfung aus dem Nichts

무(無)로부터 창조

 

a) Fritz Buri

프리츠 부리

 

Beim Entwerfen des Progrmamms unserer Vorlesung haben wir uns gefragt, ob wir der creatio ex nihilo einen besonderen Paragraphen wiedmen wollen. In der neueren protestantischen Dogmatik wird diese Näherbestimmung der Schöpfung am Anfang - mit Ausnahme eines Exkurses, den Barth ihr im Rahmen der Anthropologie widmet(KD III, 2, S. 182-188) - nur spärlich behandelt: Brunner z. B. verwendet dafür vier und Trillhaas drei Seiten, auf denen aber beide mehr von deren Gegenpositionen als von dieser selbst handeln, Otto Weber kommt mit einer Seite aus, Fritzsche mit einer halben, Althaus erwähnt dreimal bloß den Begriff, Pöhlmann schließlich nur einmal, hält es aber für notwendig, ihn in einer Fußnote zu übersetzen. Eingehender pflegt sich dagegen die katholische Dogmatik mit dieser Formel zu befassen, weil sie seit dem 4. Lateranense (1215) zum Dogma formale declaratum gehört. Sie hat aber nicht nur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sondern auch de jüdischen und islamischen Theologie eine große Rolle gespielt, wie Gershom Scholem in einer längeren Abhandlung >>Schöpfung aus Nichts und Selbstverschränkung Gottes<< (in >>Über einige Grundbegriffe des Judentums<<, edition suhrkamp, 1970, S. 53-89) - allerdings mit besonderem Interesse für ihre Ausformung in der Mystik der Kabbala - mit reichen Literaturangaben gezeigt hat.

우리의 강의 계획을 구상할 때 우리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를 하나의 개별 논제로 삼을 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현대 개신교 교의학에서 태초의 창조에 대한 이 ‘보다 상세한 정의’가, 바르트가 인간론에서 그것에로의 일탈에 빠진 것은 제외하고(교회교의학 III, 2, p. 182-188), 단지 조금만 다뤄졌다. 예컨대 브룬너는 네 페이지를, 트릴하스는 세 페이지를 그것에 관해 다뤘고, 그런데 이 지면(紙面)에서도 이 둘은 그것 자체보다도 그것의 반대입장을 더 많이 다뤘다. 오토 베베는 한 페이지로, 프리츠쉐는 반 페이지로 그럭저럭 때웠다. 알트하우스는 단지 세 번 그 개념을 말했고, 끝으로 푈만은 한 번 그것을 각주에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반대로 카톨릭 교의학은 더 상세히 이 정식(定式)을 다뤘는데, 그것이 제 4차 라테란 회의(1215) 이후 ‘공식적으로 선포된 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식은 기독교 신학사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학사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왜 거룩한 신학 토론의 장에 사악한 이슬람을 등장시키나? 신학자는 부리처럼 종교적 간음을 좋아하면 안 된다.) 게르솜 솔렘이 그의 장문(長文)의 논문 >>무로부터 창조와 하나님의 자기제한<<(출처 >>유대교 기본 개념들에 대한 고찰<<, edition suhrkamp, 1970, p. 53-89)에서, 물론 카발라 신비사상 안에서의 그것의 형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풍부한 문학진술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Im Blick auf die Überlieferung, aber auch auf die heutige geistige Situation erachte ich den Ausdruck creatio ex nihilo für das Verständnis und die Verwendung der Schöpfungslehre nicht nur als nützlich, sondern für unerläßlich - allerdings mit der nicht unwesentlichen Ergänzung: in Christo. Diese Auffassung möchte ich im Folgenden kurz darlegen und begründen.

전승(傳承)을 고려하여, 또한 오늘날의 정신적 상황을 고려하여 나는 ‘무로부터 창조’라는 표현을 창조론의 이해와 활용으로 이해하고, 유용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보며,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본질적 보완과 함께 그리한다. 이러한 소견을 나는 이어지는 글에서 간략히 설명하고 확립하고자 한다.

 

1. Die Zurückhaltung, die man heute besonders in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der creatio ex nihilo-Lehre gegenüber an den Tag legt, scheint ihren Grund in der Fraglichkeit ihrer biblischen Begründung und in ihrem spekulativ-philosophischen Charakter zu haben.

오늘날 사람들이 특히 개신교 신학에서 ‘무로부터 창조 교리’에 보이고 있는 삼가는 태도는 그것의 성경적 근거의 불확실성과 그것의 사변적, 철학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부리 당신이야 믿음이 없어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의심하겠지만, 다른 자들은 그것을 증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Die Belegstellen, auf die man sich in der Überlieferung für die Schöpfung aus dem Nichts zu berufen pflegt, ergeben nicht, was man von ihnen erwartet:

전승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무로부터 창조의 근거로 삼았던 인용된 말씀들이 그것들에서 기대했던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Röm 4,17: >>der die Toten lebendig macht und das, was nicht ist, ins Dasein ruft<< bezieht sich nicht auf die Schöpfung am Anfang, sondern auf die neue Schöpfung. Hebr 11,3: >>daß die Welten durch ein Wort Gottes bereitet worden sind, damit nicht aus wahrnehmbaren Dingen das Sichtbare entstanden sei<< dokumentiert nicht das nihil pure negativum, sondern nur ein nihil privativum - um in scholastischer Terminologie zu reden. Im Logos classicus 2 Makk 7,28 erscheint das Nihil erst in der lateinischen Übersetzung von ouk ex onton, dem zudem noch die Lesart des textus receptus ex ouk onton gegenübersteht, die - wie Weish 11,18: ex amorphou hyles - auf die Herkunft von der griechischen Vorstellung des me on als der noch ungeformten Materie hinweist, wie denn auch tohu wabohu Jer 4,23 in der LXX mit ouden übersetzt ist. In diesem Sinne, d. h. in einer Kombination des Chaos von Gen 1,2 mit dem platonisch-neuplatonischen Materiebegriff ist bei Philo und im Hermasbrief und hernach bei den sog. apostolischen Vätern von creatio ex hihio die Rede. Hier setzten aber auch die Gnostiker und später die Mystiker mit ihren Spekulationen über das Nichts Gottes ein.

롬4:17 말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에로 부르시는 분”은 태초의 창조와 관계가 없고, 새 창조와 관련 있다. 히11:3 말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이로써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순수 부정(否定)의 무(無)(nihil pure negativum)’가 아니라, 스콜라 신학 용어로 말하자면, ‘결여적(缺如的) 무(無)(nihil privativum)’를 말하고 있다. (이 문제의) 전형적 예(例)인 마카비후서 7장 28(... et intellegas quia ex nihilo fecit illa Deus et hominum genus: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그것(세상)과 인간을 만드셨음을 알라)에 무(無)가 처음 ‘우크 엑스 온톤(ουκ εξ οντων: not from things: 어떤 것들로부터가 아닌)’의 라틴어 번역(불가타 성경을 말함)으로 나온다. 그런데 상이(相異)한 어구(語句)인 회복된 배열 ‘엑스 우크 온톤(εξ ουκ οντων: from not-things: 무로부터)’이 그것과 대립하고 있다. 이 상이 어구는, 지혜서 11장 17절의 ‘엑스 아모르푸 휠레스(εξ αμορφου υλης: from amorphus matter: 무형(無形)의 재료로부터)’의 경우처럼,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물질인, 그리스적(的) 개념인 ‘메 온(μη ον: not a being: 질료)’이라는 기원을 지시한다. 또한 렘4:23 ‘토후 와보후(형체 없음과 비었음: 혼돈과 공허)’가 70인역(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에서는 ‘우덴(ουδεν: nothing: 무(無))’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즉 창1:2의 혼돈(카오스)과 플라톤적, 신플라톤주의적 물질개념의 조합의 의미로 필로가, 그리고 헤르마스 서신에서, 그 후에는 이른바 사도적 교부들이 무로부터 창조를 말했다. 여기서 또한 영지주의자들과 후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무(無)에 대한 자신들의 사변을 시작했다.

 

2. Trotz - aber z. T. auch gerade wegen - dieses philosophischen Charakters bediente sich die kirchliche Theologie von den Apologeten über die Scholastik bis in die altprotestantische Orthodoxie der lehre von der creatio ex nihilo als Kennzeichen ihrer Auffassung von der Schöpfung Gottes, für die sie sich auf die Offenbarung der Schrift und - als Vorstufe derselben - auch auf die Vernunft beriefen. Mit ihr glauben sie, sowohl die Lehre des Aristoteles von der Ewigkeit der Welt und dessen ex nihilo nihil fit als auch die neuplatonische Emanationslehre widerlegen und zugleich die platonische Vorstellung von Gott als einem bloßen, auf ein vorhandenes Material angewiesenen Demiurgen und später die aus anderen Religionen bekannt gewordenen Weltentstehungslehren übertreffen zu können. Gott wäre nicht wirklich der Schöpfer, wenn er bei der Weltschöpfung auf etwas, das außerhalb von ihm gewesen wäre - einen Stoff oder andere göttliche Wesen - angewiesen wäre, und er wäre von der Welt nicht unterschieden, wenn sie aus seinem Wesen hervorgegangen wäre. Dabei betonte man, daß es sich im Nichts nicht um ein Etwas wie im Platonismus handle, was freilich im artikellosen nihil nicht so eindeutig zum Ausdruck kam und die Ergänzung durch pure negativum nötig machte, aber auch die Betonung des Umstandes, daß es sich darin um einen >>Gegenstand des Glaubens<< handle.

이 철학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호교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스콜라 신학을 거쳐 구(舊)개신교 정통주의에 이르는 교회신학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의 표시로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이용했고, 그것의 근거로 그들은 성경의 계시를, 그리고 그것의 전단계(前段階)로 이성을 내세웠다. 그들은 이 교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한 세계’와 ‘무(無)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이론을,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을 논박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동시에 ‘단순한, 기존의 어떤 물질의 도움이 필요한 조물주(데이우르고스)로서의 플라톤적 신개념(神槪念)’과 후에 다른 종교들로부터 알게 된 세계발생이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분의 외부에 있었던 어떤 것, 즉 어떤 물질이나 다른 신적(神的) 존재의 도움을 받으셨다면, 그분께서는 실제 창조주가 아니실 것이고, 세상이 그분의 존재로부터 나왔다면 그분께서는 세상과 구분된 분이 아니실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무(無)를 말할 때 플라톤 철학의 경우처럼 유(有)를 말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 유(有)는 관사(冠詞)가 없는 니힐(nihil)로 명확히 표현될 수 없고, 순수 부정을 통한 보완을 필요로 한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대상<<이다’라는 상황의 강조가 있다.

 

3. Für uns sind heute diese ontologischen und meontologischen, theologischen und philosophischen Spekulationen >>gegenstandslos<< geworden, weil darin vom Nichts in unangemessener Weise immer noch gegenständlich geredet wird, da ein gedachtes Nichts kein nichts, sondern eben ein Gedachtes, ein Etwas ist. Gerade an dieser Aporie der Gegenständlichkeit des Denkens - denn ein ungegenständliches Denken ist kein Deknken! - und an der Berufung auf die Heilsoffenbarung der Schrift für die Lehre von der creatio ex nihilo kann uns eine neue Bedeutung derselben aufgehen, die sie uns unersetzlich erscheinen läßt, und ich möchte nicht bezweifeln, daß es den klassischen Vertretern der creatio ex nihilo-Lehre nicht auch um dieses Unersetzliche gegangen wäre, wenn sie es auch in anderer Form zum Ausdruck gebracht haben.

우리에게 오늘날 이 존재론적, 무론(無論, 비존재론)적, 신학적, 철학적 사변들이 >>비대상적(공허한)<<이 되었는데, 여기서 부당한 방식으로 아직도 여전히 무(無)를 대상적인 것으로 여겨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고(思考)되어진 무(無)는 결코 무(無)가 아니라 ‘사고되어진 것’, ‘어떤 것(유(有))’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은 ‘내가 만화책에서 본 예쁜 여자를 지금 생각하고 있으니 그 여자가 내 마음에 지금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좋아하는 망상가 수준의 철학이다. 물론 저러한 주장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인간의 생각에도 떠오를 수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철학에 근거할 때 조금 맞는 말 같기는 하다. 저런 이상한 철학을 바탕으로 무를 연구할 때 ‘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안 나온다.) 바로 이 ‘사고의 대상성의 난제(대상이 없는 사고는 사고가 아니기에!)’와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위한 성경의 구원적 계시 원용’에 근거하여 바로 ‘우리에게 그것(무로부터 창조?)이 유일적이 되게 하는 그것의 새로운 중요성’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전형적인 무로부터 창조 교리 옹호자들이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이 유일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4. Mit dem Nichts - und zwar wirklich dem nihil pure negativum, über das schlechthin keine Aussage möglich ist - bekommen wir es in unserem Denken in zwiefacher Hinsicht zu tun, wenn wir darin bis zum Äußersten - in extremis rationis mundi et hominis et Dei - schreiten, und in beiden Hinsichten - der immanenten wie der transzendenten - je noch einmal in doppelter Weise.

우리의 사고(思考) 중에 우리는, 극단적으로 즉 세상과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사고(思考)의 극단으로 갈 때, 이중적 관점에서 무(無)(실제로 우리가 전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 부정의 무)와 관계하고, 그리고 두 가지 관점에서, 즉 내재적 관점과 초월적 관점에서, 하지만 이중의 방식으로 그러하다.

 

Ich deute nur in Stichworten an: Mit dem Nichts erfahren wir uns erstens konfrontiert im Verfolgen der Frage nach dem Sein, und zwar sowohl, wenn uns a) die Unfaßbarkeit des Seins als Summe alles Seienden zum Bewußtsein kommt, als auch b) die Unbegreifbarkeit des Seins des Seienden, weil das, was wir davon in den Griff bekommen, immer nur ein Seiendes ist. In beiden Richtungen erweist sich das Sein für unser Begreifen als ein Nichts. Die gleiche Erfahrung machen wir aber auch, wenn wir die Sinnfrage stellen, sowohl a) im Sinne der Bedeutung einer Aussage, in der sie ins Unendliche führt, als auch b) im Sinne der Frage nach dem Sinn der Welt und dem Sinn unseres Daseins in ihr, die uns um der Sinnzwiespältigkeit alles Seienden willen vor ein Sinnrätsel stellt.

나는 표어로 개요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존재에 대한 질문’의 결과로 우리가 무(無)와 대면하게 됨을 경험한다. a) 존재의 불가해성이 모든 존재자의 총체로서 우리에게 의식되어질 때. b) 존재자의 존재의 불가해성이 우리에게 인식되어질 때.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파악(통제)하고 있는 것이 항상 단지 어떤 존재자이기에 그러하다.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존재가 이 두 방향으로 무(無)로 판명된다. 그런데 우리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의미문제를 제기할 때 이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된다. a) 그것(의미문제?)이 무한대에 이르는 진술의 가치의 의미. b)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분열성으로 인해 우리를 의미 수수께끼 앞에 서게 하는, ‘세계의 의미’와 ‘세계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의미.

 

5. Um das Geheimnis des Seins, angesichts dessen die Seinsfrage in jener zwiefchen Weise ins Nichts aus- und einmündet, haben zu allen Zeiten die Mystiker gewußt - im Judentum wie im Christentum und Islam - und haben deshalb das nihil des creatio-Gedankens in Gott selber verlegt und ist Gott samt der Welt für sie zum Nichts für das begriflich-gegenständliche Erkennen geworden, das aber als solches für sie zugleich das Übersein, die Fülle des Seins in ihrer Unfaßbarkeit ist, vor der man nur staunen und verstummen, in Schweigen versinken kann - um dann doch davon zu reden zu versuchen.

존재의 신비(이것에 직면하여 존재문제가 저 이중의 방식으로 무(無)에 빠져드는데)에 관해,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에서,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창조 사상에서의 무(無)가 하나님 자신 안으로 이동되었으며,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그들에게 개념적, 대상적 인식에 있어서의 무(無)가 되었다. 하지만 이 무는 그러한 것으로서 동시에 그들에게 초존재(超存在), 그들(하나님과 세상?)의 불가해성 안의 존재의 충만이다. 이 불가해성에 대해 말하려면 인간은 그 불가해성 앞에서 놀라 말문이 막혀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

 

Um das Rätsel des Sinnes des Seins aber geht es in allen Formen der Theodizeefrage und ihrem Scheitern im Nihilismus und einer letzten trotzigen Selbstbehauptung in der Bereitschaft zum Untergang, um in dessen alles verzehrender Angst und der darin bewiesenen oder auch nur geahnten Möglichkeit einer letzten unvertilgbaren Würde des Menschen zu erfahren, was Freiheit ist.

하지만 모든 형태의 ‘신정론 문제’와 ‘그것의 허무주의에서의 좌초’와 ‘몰락의 각오를 한, 최후의 완고한 자기주장’에서 핵심은 존재 의미의 수수께끼다. ‘그것(허무주의?)의, 모든 것을 삼키는 불안’과 ‘그 가운데 증명되거나 단지 예감된 궁극적인, 제거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의 가능성’ 가운데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기 위해 그렇다는 말이다.

 

6. Die Orthodoxie aller Zeiten - die jüdische, christliche und islamische - hat die Sprache der Mystik und die Rebellion des Nihilismus, obschon oder gerade weil sie auf dem gleichen Boden erwachsen sind wie sie, immer nur als Gottlosigkeit verurteilen können, und in ihren Augen sind Mystiker und Nihilisten denn auch Häretiker und Apostaten. Aber es könnte sein, daß diese mehr als jene von creatio ex nihilo verstanden haben und mehr noch: verkörpern - und zwar gerade in einer Weise, in der diese Lehre nicht, wie ihre Vertreter es wohl gelegentlich versuchen, aus der Bibel abzuleiten ist, wohl aber als ein Symbol ihres wesentlichen Inhalts verwendet werden könnte - allerdings, wie schon eingangs vermerkt, nicht ohne eine wesentliche Erweiterung der Formel in christologisch-soteriologischem Sinne. Eine solche Erweiterung der creatio-ex-nihilo-Formel entspricht aber sowohl der Urform der biblischen Schöpfungsmythologie einerseits als auch der Mystik und dem Nihilismus anderseits.

모든 시대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정통주의가 신비주의의 언어와 허무주의의 반항을 (비록 이것들이 정통주의와 같은 땅에서 자라나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불경스런 것으로 정죄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사실 또 정통주의의 눈에 신비주의자들과 허무주의자들은 이단자들이고 배교자들이었다. 그러나 후자가 전자보다 무로부터 창조를 더 잘 이해했을 수도 있고, 그것을 더 잘 구체화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교리의 주장자들이 가끔 시도했던 것처럼 이 교리가 성경에서 이끌어내지는 게 아니라, 그 교리의 근본적 내용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처음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기독론적,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이 정식의 근본적 확장과 함께. 그런데 무로부터 창조 정식의 이러한 확장이 성경의 창조신화의 원형과도, 신비주의와 허무주의와도 일치한다.

 

7. In seiner ursprünglichen Gestalt ist das biblische Reden von Schöpfung keineswegs an kosmischen Vorgängen, und das heißt: nicht an der Seinsfrage interessiert - auch nicht in bezug auf die Schöpfung am Anfang -, sondern gerade in diesen Aussagen geht es ihr um die Lösung der Sinnfrage in Gestalt des Mythus von der Überwindung der Chaosmacht, in dem Israel sein geschichtliches Schicksal symbolisiert hat und im N.T. in anderen Formen auch die christliche Gemeinde das ihrige und die Bedeutung, die sie darin Jesus zuschreibt. Ausgesprochener noch, als dies schon in der Auffassung der Schöpfung als Drachenkampf im alten Israle der Fall ist, nimmt dieser jedoch in der spätjüdischen und urchristlichen Apokalyptik kosmische Formen an. So ist es verständlich, daß in einigen offensichtlich von der Gnosis beeinflußten Stellen - als einer weiteren Umbildung des Drachenkapf-Mythus - Christus auch als Schöpfungsmittler oder Schöpfungsprinzip erscheint, wie dies schon 1 Kor 8,6 und dann Kol 1,15ff., Hebr 1,2 und im Prolog des Johannesevangeliums der Fall ist. Aber nicht erst hier, wo dies expressis verbis geschieht, sondern in der ganzen Bibel ist die Schöpfung - um der Mitwirkung des Messias in der Überwindung des Chaos willen - messianologisch bzw. christologisch zu verstehen, d. h. im heilsgeschichtlichen Rahmen in bezug auf den Anfang als creatio ex nihilo in Christo. Davon wird im nächsten Parapraphen mehr zu hören sein.

창조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그것의 본래 형태를 고려할 때, 결코 우주적 사건들에, 즉 존재문제에 관심을 둔 게 아니라, 또한 태초의 창조와 관련된 게 아니라, 바로 이 진술들의 경우 그것(창조?)에 중요한 것은 ‘혼돈세력의 극복이라는 신화형식을 통한 의미문제 해결’이다. 이 신화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신약에서는 기독교 공동체도, 다른 형태로, 자신의 운명과, 자신이 예수께 부여한 의미를 상징화했다. 옛 이스라엘에서 창조를 대룡투쟁(對龍鬪爭)으로 이해했던 것보다 더 현저하게, 이 대룡투쟁이 후기 유대교와 원(原)기독교의 묵시문학에서는 우주적 형태를 취한다. 그리하여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몇몇 구절들의 경우, 대룡투쟁신화의 개조로, 그리스도도 창조의 중개자나 창조의 원리로 등장하는 게 납득이 간다. 고전8:6, 골1:15ff., 히1:2, 그리고 요한복음 서문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명확히 말해 이것이 발생한 이곳이 처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걸쳐 창조는, 혼돈의 극복에 있어서의 메시야의 협력 때문에, 메시야론적으로, 즉 기독론적으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로부터 창조’로서의 시작과 관련된 구원사적 틀(범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에 관하여는 다음 단원에서 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Hier dagegen haben wir deutlich zu machen, daß nicht weniger auch die Mystik und der Nihilismus im Grunde ihres Wesens auf creatio ex nihilo in Christo ausgerichtet sind und erst, wenn sie sich in diesem Symbol verstehen, von ihren Fragwürdigkeiten befreit werden und zur Verwirklichung ihrer eigentlichen Intentionen gelangen, in denen sie sich gegenseitig ergänzen könnten.

반대로 여기서 우리는, 이에 못지 않게 신비주의와 허무주의도 이것들의 본질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로부터 창조에 맞춰져 있고, 자신들이 이 상징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자신들의 문제성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들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자신들의 본래의 의도들을 실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8. Wie in allen Fragen nach dem Sein geht es auch der Mystik um die in der Sinnzwiespältigkeit des Seins aufbrechende Sinnfrage und deren Beantwortung. Indem für sie jedoch im Verstummen vor dem Geheimnis des Seins auch die Sinnfrage verstummt, erscheint diese nur für die Zeit des schweigenden Versunkenseins in diesem Geheimnis als gelöst - ersteht jedoch in neuer Ungelöstheit, wenn der Mystiker aus seiner Weltentrücktheit in die Welt zurückkehrt und - wenn er sich und seiner Umgebung von den erfahrenen Seligkeiten Rechenschaft abzulegen versucht. Will er der Sinnzwiespältigkeit des weltlichen Daseins nicht durch leiblichen oder geistigen Selbstmord entrinnen, so müßte er ihr auf andere Weise begegnen: nicht durch Weltflucht, sondern durch das Aufnehmen des Kampfes mit den sinnwidrigen Mächten im Sinne des Mythus vom Kampf mit dem Chaosdrachen.

존재에 대한 다른 질문들의 경우처럼, 신비주의에게도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의미분열 가운데 발생하는 의미문제(의미질문)와 이에 대한 답변’이다. 하지만 신비주의의 경우 존재의 신비 앞에서의 침묵 가운데 의미질문도 침묵함으로써, 이 의미질문이 단지 이 신비에로의 침묵적 몰입의 시간 동안에만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신비주의자가 자신의 몽상에서 깨어 세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가 경험된 지복(至福)을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려 할 때, 새로운 미해결성으로 소생한다. 그가 세상적 존재의 의미분열성을 육체적 혹은 정신적 자살이 아닌 것으로 모면하고자 하면, 그것을 다른 식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은둔을 통해서가 아니라, 혼돈용(混沌龍)과의 싸움이라는 신화의 의미로, 모순적 세력들과의 투쟁의 수용을 통해서.

 

9. Das ist es nun, was derjenige unternimmt, der an der Theodizeefrage scheitert, weil er vrsucht, das Sein oder Gott so zu konzipieren, daß diese Größen von der Sinnproblematik befreit erscheinen, oder die Welt so zu gestalten oder sich in ihr mindestens so zu verhalten, daß darin ihr Seinsgrund auch als ihr Sinngrund, Gott als gut und seine Schöpfung als sinnvoll gelten können. Scheitert er daran, was angesichts des Sinnrätsels des Seins unausbleiblich ist, so deshalb, weil er sich in seinen universalen Sinnkonstruktionen übernommen hat, statt sich mit partialen Sinnmöglichkeiten zu begnügen, von denen eine grundlegende schon darin besteht, daß im Menschen überhaupt die Sinnfrage erwachen, während eine andere sich so ereignen kann, daß ihm Gelegenheiten gegeben werden können, konkret etwas in der Richtung einer Überwindung von Sinnwidrigkeiten zu tun - zwei Möglichkeiten, die er in seinem verzweifelten Nihilismus und in seiner trozigen Selbstbehauptung zu seinem Schaden übersieht. Was der Mystiker an Gnade des Seins in seiner Seligkeit zuviel hat, daran hat er in seiner gnadenlosen Unseligkeit zuwenig.

이제 이것이 바로, ‘존재나 하나님이 의미문제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이 두 존재들을 다루거나, 세상을 조작하거나 자신이 세상 안에서 적어도 의도적으로 행동하여 세상의 존재기반이 세상의 의미기반이 되게, 하나님이 선한 분이 되게, 그분의 피조물이 의미 있게 되게 하려 하기에 신정론 문제에서 실패한 자’가 취하는 행동이다. ‘존재의 의미수수께끼를 대면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관해 그가 실패한다면, 이는 그가 부분적 의미가능성들로 만족해하는 대신에 자신의 이 보편적 의미구성들로 자만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의미가능성들 중 하나의 근본적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인간 안에서 의미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에 있는 반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모순들의 극복의 방향으로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는 쪽으로’ 발생할 수 있다. 두 가능성들,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절망적 허무주의 가운데, 자신의 완고한 자기 주장 가운데 간과하여 손해를 본다.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지복 가운데 존재의 은총으로 너무 많이 가진 것을 자신의 무자비한 불행 중에는 너무 적게 소유하고 있다.

 

10. Nach dem Offenkundigwerden a) der exegetischen Fragwürdigkeit der traditionell kirchlichen Lehre von der Schöpfung aus dem Nichts und b) der Aporien, in die deren ontologische Fassung im Subjekt-Objekt-Schema des begrifflich-gegenständlichen Bewußtseinsdenkens hineinführt, und da wir es c) nicht für gegeben erachten, sich dieser Aporien zur Durchführung einer unglaubwürdigen Glaubensdialektik zu bedienen, sehen wir in den gegenständlichen Halbwahrheiten der Seinsmystik und des Sinn-Nihilismus Durchgangsstufen zu einer denkerisch einwandfreien und zugleich bibelgetreuen Verwendung der christologisch verstandenen creatio ex nihilo als Symbol für eine dem Menschen gnadenweise zuteil werdende Möglichkeit schöpfersicher Sinnvewirklichung, die sich als solche nicht aus einem postulierten Sinn des Seins herleiten läßt, sondern eine besondere Offenbarung des Seinsgeheimnisses darstellt, wie sie im biblischen Christusgeschehen gemeint sein könnte.

a) >전통적인 교회의 무로부터 창조 교리<의 해석학적 의문성의 공표와, b) 그 교리의 >개념적, 대상적 의식사고의 주관객관도식 안에서의< 존재론적 이해가 빠져 들어가는 난제들의 공표 이후에, 그리고 c) 우리가 >이 난제들을 ‘신뢰할 수 없는 신앙의 변증법의 실행’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적절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우리는 존재신비주의와 의미허무주의의 구체적 반쪽 진리에서 ‘사색적으로 명백한 그리고 동시에 성경에 충실한 >인간에게 은혜로 주어진 창조적 의미실현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의 >>기독론적으로 이해된 무로부터 창조<< <의 사용’을 본다. 이것(의미 실현 가능성?) 자체는 존재의 공준적 의미로부터 연역되지 않고, 성경의 그리스도 사건에서 의미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존재신비의 특별 계시이다.

 

b) Jan Milic Lochman

로흐만

                                                         I.

 

Die Information, mit welcher Fritz Buri sein Votum eröffnet hat, daß unser Thema >>in der neueren protestantischen Dogmatik ... nur spärlich behandelt<< wird, stimmt nicht ganz. Wohl wird fast von allen neueren Dogmatikern übereinstimmend festgestellt, daß die >>creatio ex nihilo<< nicht gerade ins Zentrum der theologischen Schöpfungsproblematik gehört: die biblisch-exegetische Deckung ist hier, wie Buri zeigt, tatsächlich recht bruchstückhaft. Daß dieses Theologumenon jedoch eine wesentliche und bis heute gültige >>Näherbestimmung der Schöpfung am Anfang<< darstellt, wird von den meisten nicht bezweifelt. Es lohnt sich, dazu den instruktiven Artikel von G. Gloege in der RGG zu lesen, in welchem gerade das >>creatio-ex-nihilo<<-Motiv eine gewichtige Rolle in der Explikation des theologischen Schöpfungsgedankens spielt.

부리가 자신의 발제를 시작하며 제시한 정보, 곧 ‘우리의 주제가 현대 개신교 교의학에서 단지 적게 다뤄진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거의 모든 현대 교의학자들이 한결같이 >>무로부터 창조<<가 신학적 창조문제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인정하기는 하다: 부리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성서해석학적 보증이 사실 상당히 단편적이다. 하지만 이 신학사상이 ‘본질적인, 오늘날까지 유효한 >>태초의 창조의 자세한 정의<<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치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RGG에 있는 글뢰게의 교육적 논문을 인용한 것은 헛일이 아니다. 그 논문에서 바로 >>무로부터 창조<< 모티브가 신학적 창조사상의 해석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Aus der Vielfalt der Stimmen greife ich drei Beispiele heraus - die drei >>großen B<< der deutschsprachigen Theologie, Barth, Brunner und Bonhoeffer -, zugleich um die verschiedenen Aspekte und die gemeinsame Ausrichtung der Behandlung des Motivs in der neueren protestantischen Theologie zu charakterisieren.

다양한 주장들로부터 나는 세 가지 예를 말하겠다. 독일어권 신학의 세 거장(巨匠) B들, 즉 바르트, 브룬너, 본회퍼 말이다. 이는 동시에 현대 개신교 신학에서의 이 주제의 취급의 다양한 국면과 공동의 방향을 규정짓기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Karl Barth behandelt das Thema in einem seiner großartigen, exegetisch und dogmengeschichtlich weit ausholenden Exkurse im anthropologischen Band der Kirchlichen Dogmatik. Die Lokalisierung der Problematik in der Lehre vom Menschen ist eigentlich überraschend und müßte auch Fritz Buri interessieren, besonders, wenn in diesem Zusammenhang von der Bedeutung des Motivs für menschliches Selbstverständnis geredet wird: Creatio ex nihilo ist nach Barth >>keine spekulative Konstruktion, sondern der natürlichste Ausdruck eines auf Gottes Offenbartung in dem Menschen Jesus begründeten menschlichen Selbstverständnisses<< (KD III/2, S. 187). Trotzdem (oder gerade deshalb) sind die breiteren dogmatischen Kontexte zu berücksichtigen: >>Die Tragweite dieses Theologumenons für die ganze Lehre von der Schöpfung ist nicht zu verkennen<< (S. 185). Die christliche Schöpfungslehre grenzt sich durch den Zusatz >>aus Nichts<< von den beiden möglichen Mißverständnissen der Welterklärung: dem monistischen und dem dualistischen ab. Die Welt des christlichen Schöpfungsbegriffes ist kein >>Teil oder Ausfluß des göttlichen Wesens<<, wie dies die pantheistisch-monistisch orientierten Kosmologien behaupten. Sie ist aber auch kein Gott von Ewigkeit koexistierendes konkurrierendes Sein, besonders nicht in dem Sinne, als ob Gott in seiner creatio auf eine ihm vorgegebene Voraussetzung seines Schaffens, etwa die Materie, angewiesen wäre, die er erst zu gestalten oder zu pazifizieren hätte; auch die dualistische Welterklärung wird durch den klärenden Zusatz >>ex nihilo<< abgewehrt. Denn das nihil des Theologumenons ist kein >>nihil privativum<<, also keine negative Potenz, sondern >>nihil pure negativum<< (wie dies die orthodoxen Dogmatiker formulierten): Ausschluß jeder konkurrierenden Potenz: nichts.

칼 바르트는 이 주제를 그의 대단한, 해석학적으로 또 교리사적으로 상세히 논한 >그의 교회 교의학의 인간론에서의 여담< 중에 다뤘다. 이 문제를 인간론에 국한시킨 것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특히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기이해’의 동기의 의미가 언급되었을 때, 부리의 관심을 끌었음이 분명하다: 바르트에 따르면 무로부터 창조는 >>결코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기초한 인간의 자기이해’의 가장 자연스런 표현이다<< (교회 교의학 III/2, p. 1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넓은 교의학적 연관들이 고려될 수 있다: >>전(全) 창조론에 있어서의 이 신학사상의 영향력은 확실한 것이다<< (p. 185). 기독교 창조론은 부가어(附加語) >>무로부터<<를 통하여 세계이해에 있을 수 있는 두 가지 오해, 곧 일원론적 오해와 이원론적 오해로부터 거리를 둔다. 기독교적 창조개념이 말하는 세상은, 범신론적, 일원론적 성향의 우주론이 주장하듯, >>신적(神的) 존재의 일부분이나 그것으로부터의 유출<<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공존하며 하나님과 경합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 시에 그분께 주어진 그분의 창조행위의 전제조건을, ‘예컨대 그분께서 맨 처음 형태를 부여하고 평정해야 하는 물질’을 의존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이원론적 세계이해도 설명적 부가어 >>무로부터<<를 통해 거부된다. 이 신학사상(무로부터 창조)의 무(無)가 >>결여적 무<<가 아니라, 따라서 ‘부정적 힘’이 아니라, (정통주의 교의학자들이 말하듯) >>순수 부정의 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합적 세력의 배제: 무(無).

 

Ähnlich wie bei Barth ist auch das Kapitel ausgerichtet, welches von Emil Brunner unserem Stichwort gewidmet wird. Er zitiert das bekannte Wort Fichtes, nach welchem sich der christliche Schöpfungsgedanke vom philosophischen Standpunkt aus >>gar nicht ordentlich denken lasse<< (J. G. Fichte, Ausgew. Werke V, S. 191). Brunner akzeptiert diese Kritik. Wird, wie bei Fichte, das Postulat einer vorbehaltlosen Kontinuität des menschlichen Denkens zum Grundgesetz der Welterkärung erhoben, so ist der theologische Schöpfungsgedanke tatsächlich ein >>metaphysischer Grundirrtum<<. >>Was wir als Schaffen kennen, ist nie creatio ex nihilo, sondern Formung eines voraus Gegebenen<< (E. Brunner, Die christl. Lehre von Schöpfung und Erlösung, S. 13). Genau dies möchte jedoch der biblische Schöpfungsbegriff klarstellen: Die göttliche creatio ist kategorial anders als menschliches Schaffen; eine Klarstellung, welche im biblischen Begriff >>br’<<, wie wir bereits gesehen haben, schon angelegt ist, mit dem Zusatz >>ex nihilo<< jedoch weiter getrieben wird: >>Er setzt an den Anfang die absolute Diskontinuität des menschlichen Denkens: Gottes Gegenübersein der Welt, der Welt Gegenübersein von Gott. Gott und die Welt sind durch keine Notwendigkeit verbunden; die Welt ist das Werk der göttlichen Freiheit<< (a.a.O. S.14).

에밀 브룬너가 우리의 핵심어에 관해 논한 단원도 바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그는 유명한 피히테의 말을 인용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창조사상은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제대로 사고되어지지 않는다<< (J. G. Fichte, Ausgew. Werke V, S. 191). 브룬너는 이 비판을 받아들인다. 피히테의 경우처럼, 인간사고의 무조건적 연속성이라는 공준이 세계이해의 근본법칙으로 승격된다면, 신학적 창조사상은 사실상 하나의 >>형이상학적 근본 오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창조로 알고 있는 것은 무로부터 창조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의 형태부여’이다<< (에밀 브룬너, 기독교의 창조와 구원 교리, p. 13). 하지만 성경적 창조개념이 명백히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창조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 설명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라(br’: 창조하다)<<의 성경적 개념에 이미 들어 있고, 이 설명이 >>무로부터<<라는 부가어로 더 진척된다: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적 사고의 절대적 단절(불연속성)을 설정한다: 세상에 대립적이신 하나님, 하나님과 대립적인 세상. 하나님과 세상은 그 어떤 필연성으로도 결합되어 있지 않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자유의 산물이다<< (위의 책 p. 14).

 

Diesen Aspekt, die Schöpfung aus Freiheit, stellt Dietrich Bonhoeffer in den Vordergrund seiner ausführlichen Gedankengänge zu unserem Thema (in seinem kleinen Buch >>Schöpfung und Fall<<). Die wahre Intention der creatio ex nihilo wird erst dort erfaßt, wo sie als interpretierende Abgrenzung des positiven Thema >>Freiheit<< verstanden wird. Der Zusammenhang zwischen dem Schöpfer und dem Geschöpf ist >>durch nichts bedingt als durch die Freiheit, d.h., er ist unbedingt<< (Schöpfung und Fall, S. 18f.). Darum ist in der Schöpfungslehre jede Anwendung kausaler Kategorien fehl am Platz. Es gibt kein neutrales Kontinuum zwischen den beiden. >>Zwischen Schöpfer und Geschöpf ist schlechthin das Nichts. Denn Freiheit vollzieht sich in und aus dem Nichts<< (a.a.O. S.19). Es gibt keine Notwendigkeiten - in Gott oder in der Welt -, die zur Schöpfung führen müßten. Es geht um die majestätische Freiheit Gottes - um >>nichts<< anderes: Die Schöpfung kommt aus diesem Nichts. Darum hat angesichts dieses nihil eine gnostische oder existentialistische Nichts-Spekulation keine Berechtigung: >>Das Nichts hat für die erste Schöpfung nichts Ängstendes, es ist vielmehr der ewige Lobpreis des Schöpfers, der aus dem nichts die Welt schuf. Die Welt steht im Nichts, das heißt im Anfang, und das heißt nichts anderes, als die Welt steht ganz in der Freiheit Gottes<< (S. 20).

이 국면을, 곧 자유로운 창조를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의 소책자 >>창조와 타락<<에서) 우리의 주제에 대한 그의 상세한 사고과정의 전면에 내세웠다. 무로부터 창조의 참된 의도는, 그것이 실속 있는 주제 >>자유<<라는 해석적 경계설정으로 이해될 때에 비로소 파악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자유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제약될 수 없다. 즉 그 관계는 무조건적이다<< (창조와 타락, p. 18f.). 그러므로 창조론에서 모든 인과론적 범주의 사용은 적합지 않다. 이 둘 사이의 그 어떤 중립적 연속지대도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무(無)만 있다. 왜냐하면 자유는 무 안에서 그리고 무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p. 19). 하나님 안에 혹은 세상 안에, 창조를 일으키는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핵심은 하나님의 위엄 있는 자유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창조는 바로 이 >>아님(無)<<으로부터 발생했다. 그러므로 이 아님(無)에 직면하여 영지주의적 혹은 실존주의적 ‘무에 관한 사변’은 정당성이 없다: >>무(無)는 첫 창조에서 걱정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에 대한 영원한 찬미이다. 세상은 무(無) 안에, 즉 시작 중에 있다, 즉 ‘세상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 안에 있다’ 외에 그 아무 것도 아니다<< (p. 20).

 

Die Übereinstimmung zwischen diesen drei Stimmen - und man könnte sie leicht vermehren, ich erwähne nur noch H. Vogel, P. Althaus, H. G. Fritzsche - ist weitgehend und eindeutig. Zwei gemeinsame Züge scheinen mir dabei besonders wichtig. Einmal: Unser Theologumenon wird in einen ganz präzisen Kontext eingegliedert, in den Zusammenhang der Schöpfungslehre, konkret: als Interpretament der schöpferischen Freiheit Gottes. In diesem Kontest ist sein >>Sitz im Leben<<; es darf daher nicht als ein freischwebendes Motiv in beliebige und sachfremde Zusammenhänge transplantiert werden.

이 세 주장들 간의 의견일치는 (그리고 우리는 이 일치를 쉽게 확장시킬 수 있는데, 예컨대 포겔, 알트하우스, 프리츠쉐가 있다) 광범위하고 분명하다. 이때 두 공통적 특징들이 내게는 특히 중요하다. 첫째: 우리의 신학적 진술은 하나의 매우 명확한 맥락 안에, 창조론과의 관계 안에 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자유에 대한 해석으로서. 이 맥락 안에 그것의 >>삶의 자리<<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멋대로 떠다니는 모티브 취급하여 자의적인, 현실과 괴리된 관계 안으로 옮겨지면 안 된다.

 

Und weiter: In diesem Kontext ist das >>nihil<< kein selbständiges Motiv und also auch nicht ein zu verselbständigendes Thema der allgemeinen Spekulation. Eine solche Verwendung ist zwar naheliegend, vor allem, seitdem das Nichts im europäischen Denken wieder eine große Konjunktur erreichte (etwa im Sinne Heideggers). Daß dies eine sinnvolle philosophische Problematik sein kann, möchte ich nicht bestreiten. Daß aber das Theologumenon creatio ex nihilo mit diesen Denkweisen nicht gleichgesetzt werden darf - will man dem biblisch-theologischen, dogmengeschichtlichen und systematischen Ansatz dieses Motivs treu bleiben -, darin herrscht unter den erwähnten Thelogen eine volle Übereinstimmng. H. Vogel ist zuzustimmen: >>Die Aussage von der Schöpfung durch das Wort aus nichts kennt gerde nicht das, was der Existentiallismus der Heideggerischen Philosophie verkündet, wenn er in dem Nichten des Nichts das Sein in das Dasein gekommen sein läßt, und zwar in jener Angst, deren Bejahung dann die Freiheit des so dem Nichts verhafteten Menschen bezeichnen soll<< (Gott in Christo, S. 415).

다음으로: 이 맥락에서 >>무<<는 결코 자립적 모티브가, 따라서 보편적 사변의 독립적 주제도 아니다. 그러한 사용이 특히 무(無)가 유럽의 사상에서 다시 대단한 호황을 맞이한 이후에 (이를테면 하이데거를 말함) 당연한 일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의 의미심장한 철학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로부터 창조라는 신학사상이 이 사고방식들과 동등하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람들이 이 모티브에 대한 성경-신학적, 교리사적, 조직신학적 접근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된 신학자들 사이에 완전한 의견일치가 있다. 포겔은 지지될 수 있다: >>말씀을 통한 무로부터 창조라는 진술은 하이데거 철학의 실존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다. 그 실존주의가 무(無)의 무(無)를 통해 근심(이것의 긍정은 무(無)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자유라 칭할 수 있는데) 가운데 존재를 현존재 안으로 들어가게 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p. 415).

 

                                                        II.

 

Befaßt man sich nach einer Orientierung in den Werken von anderen neueren protestantischen Theologen mit dem Votum von Fritz Buri, so kommt man sich vor, als wäre man auf einen anderen theologischen Planeten versetzt. Die beiden gerade angedeuteten Konsensuslinien werden bei ihm außer Acht gelassen. Dies gilt von dem schöpfungstheologischen Kontext der >>creatio ex nihilo<<. Zwar wird im ersten Votum dieser Aspekt der kirchlichen Theologie im Abschnitt 2 erwähnt und in seiner Intention gut charakterisiert. Im darauf folgenden Abschnitt wird er jedoch für uns heute als >>gegenstandslos<< erklärt. Was bleibt, ist eine pure, vom konkreten biblisch-theologischen Ansatz losgeläste Symbolik. Das Motiv der >>Schöpfung aus dem Nichts<< hilft uns, die menschliche Bedingung der Sinnfrage zu erhellen.

우리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글들의 방향에 맞춰 부리의 발제를 보면, 마치 다른 신학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는 암시된 두 공감대를 고려치 않았다. 이것은 >>무로부터 창조<<의 창조신학적 맥락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첫 발제에서 기독교 신학의 이 국면이 두 번째 부분에서 언급되었고, 그 의도에 맞게 특징이 잘 묘사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공허하다<<고 선언된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하나의 순수한, 구체적인 성경적 신학의 시각에서 벗어난 상징성’ 뿐이다. >>무로부터 창조<< 모티브는 의미질문이라는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Dabei wird auch jene andere Linie überschritten: die Zurückhaltung, in welcher sich die meisten anderen Dogmatiker mit guten Gründen bemühen, das Thema creatio nihilo von jeder allgemein-philosophischen Nichts-Problematik abzugrenzen. Fritz Buri hat da keine Bedenken. Er läßt Nichts nicht nichts sein - sondern thematisiert es. Er reflektiert relativ ausführlich die verschiedenen Dimensionen der allgemein Nichts-Problematik. Damit keine Mißverständnisse entstehen: eine solche Reflexion ist sein gutes Recht. Sie hat im philosophisch-anthropologischen Kontext ihre unbestreitbare Bedeutung. Ich bin gern bereit, auf diesem Felde von Fritz Buri zu lernen. Widersprechen möchte ich allerdings der Vorstellung, als ob durch solche Gedankengänge die ursprüngliche Intention des Theologumenons >>Schöpfung aus dem Nichts<< getroffen wäre. Dies ist meinem Verstehen nach nicht der Fall, sondern gerade umgekehrt: das nihil der Schöpfungslehre sträubt sich gegen jede allgemeine Thematisierung. Sie läßt das nihil nihil bleiben. Daß Fritz Buri an diesem Punkt das Nichts nicht lassen kann, ist mein Haupteinwand gegen sein >>creatio-ex-nihilo<<-Votum.

동시에 다른 공감대도 무시된다: 바로 삼가는 태도. 다른 대부분의 교의학자들은 이 삼가는 태도 가운데 지당하게 무로부터 창조 주제를 모든 보편적, 철학적 >무(無)의 문제<와 분리시키려 한다. 이 점에 부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비교적 상세히 일반적 ‘무(無)의 문제’의 다양한 차원들을 숙고한다. 이로써 오해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숙고는 그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 숙고는 철학적, 인간론적 맥락에서 그것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중요성이 있다. 나는 이 영역에서 부리로부터 배울 의향이 있다. 다만 나는 그런 사고과정을 통해 >>무로부터 창조<<라는 신학사상의 본래의 의도가 유지된다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이것은, 내 판단에 따르면, 그 경우가 아니라 그 반대다: 창조론의 무(無)는 모든 보편적 주제화에 저항한다. 그것(창조론?)은 무(無)가 무(無)로 남아있게 한다. 부리가 이 지점에 무(無)를 놓을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무로부터 창조<< 발제에 대한 나의 핵심 반론이다.

 

Es gibt auch andere Einwände. So scheint mir der wiederholte Versuch, den >>Mythus von der Überwindung der Chaosmacht<< zum ursprünglichen Anliegen der alttestamentlichen Schöpfungsbotschaft zu deklarieren, verfehlt. Ich möchte Fritz Buri bitten, diese Frage an Hand neuerer Kommentare und Deutungen der alttestamentlichen Theologie zu überprüfen. Er würde dann wahrscheinlich feststellen, daß das mythologische Chaos- und Drachenkampfmotiv zwar als Ausdrucksmittel zur alttestamentlichen Schöpfungsüberlieferung gehört, aber nie das theologische Gewicht bekommt, das ein dualistisches Schöpfungsverständnis legitimieren würde. Übrigens: das >>creatio-ex-nihilo<<-Motiv hilft als Bekenntnis zur souveränen Freiheit des Schöpfers zur Klarstellung dieses Sachverhalts. Mit Recht sagt G. Gloege im Blick auf unser Stichwort: >>Gen 1 ist doxologisches Interpretament des ersten Gebotes Ex 20,2f. in Form einer berichtenden Sage<< (RGG, V, 1485).

또 다른 반론이 있다. >>혼돈세력에 대한 승리 신화<<를 구약성경의 창조기사의 본래 관심사라고 선언하려는 거듭된 시도가 내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부리에게 이 문제를 현대 구약신학의 주석과 해석에 입각하여 재검토하라고 부탁하는 바이다. 그럴 때 그는 아마 이것을 확인할 것이다: 신화적 대(對)혼돈, 대룡(對龍) 투쟁 모티브는 표현수단으로서 구약성경의 창조 전승에 속하기는 하나, 이원론적 창조이해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영향력은 없다. 또 >>무로부터 창조<< 모티브는 창조주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고백으로서 이 상황의 설명에 도움이 된다. 글뢰게가 우리의 핵심어와 관련하여 정당하게 말했다: >>창세기 1장은 보고적(報告的) 진술 형식의 ‘출20:2f.의 첫 계명의 찬송적 해석’이다<< (RGG, V, 1485).

 

                                                        III.

 

Meine kritischen Bemerkungen sollen nicht verdecken, daß es im ersten Votum Gedankengänge und Akzente gibt, die mir wichtig sind und mit welchen ich übereinstimme. Ich denke etwa an dem Nachdruck darauf, daß das biblische Reden nicht primär an Beschreibung kosmischer Vorgänge interessiert ist; daß also die Schöpfung >>in Christus<< verstanden werden woll. Und auch zur Intention des zusammenfassenden Satzes möchte ich mich ausdrücklich bekennen, daß >>creatio ex nihilo als Symbol für eine dem Menschen gnadenweise zuteil werdende Möglichkeit schöpferischer Sinnverwirklichung<< fruchtbar gemacht wrden kann. Der Hinweis auf >>Gnade<< ist mir besonders wichtig. >>은혜<<에 대한 언급이 내게는 특히 중요하다. Ich bin überzeugt, daß die entscheidende Tendenz unseres Theologumenons in diese klare Richtung weist: also in die Richtung, die das >>Herz<< des biblischen Glaubens kennzeichnet. O. Weber brachte diese Intention der >>Schöpfung aus dem Nichts<< im Zusmmenhang mit anderen zentralen Aussagen des biblischen Glaubens klar und knapp in folgenden drei Kurzsätzen zum Ausdruck: >>Gott ist der schlechthin freie Schöpfer - creatio ex nihilo. Er ist der schlechthin freie Versöhner - iustificatio impii. Er ist der schlechthin frei Vollender - resurectio mortuorum!<< (Dogmatik I, S. 553.)

나의 비판적 소견들이, 부리의 발제에서 내게 중요했고 내가 동의했던 사고과정들과 강조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덮지는 않는다. ‘성경의 진술은 우주적 과정의 묘사에 주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를 강조한 것이 그 예가 되겠다. 그리고 요약적 명제의 의도로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고백한다: >>은혜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의미실현’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의 ‘무로부터 창조’<<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신학사상의 결정적 경향이 이 분명한 방향을, 곧 성경적 신앙의 >>핵심<<과 일치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베버는 이 >>무로부터 창조<<의 의도를 성경적 신앙의 다른 핵심적 진술들과 관련지어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다음의 세 단문(短文)들로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창조주이시다 - 무로부터 창조. 그분께서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화해자이시다 - 죄인의 의인(義認). 그분께서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완성자이시다 - 죽은 자들의 부활!<< (교의학 I, p. 553).

 

Dies ist meinem Verstehen nach eine hilfreiche Weisung zum besseren theologischen Verständnis unseres Themas. So oft als spekulativ mißverstanden und verdächtigt, meint creatio ex nihilo letzten Endes diese >>gute Nachricht<<: Es geht in ihr um die Transzendenz der freien Gnade Gottes. Ich freue mich, daß auch Fritz Buri zuletzt in dieser Richtung denkt. Darin zeigen sich Konturen eines möglichen Konsensus. Er ist sicher labil. Um die Bestimmung und Begründung dessen, was mit >>Transzendenz der freien Gnade Gottes<< gemeint ist, werden wir viel streiten. Die Debatte um den Ansatz und Sitz im Leben der >>Schöpfung aus dem Nichts<< ist eine Etappe dieses Streites. Aber es ist gut zu wissen: der Hinweis auf Gnade - oder besser: diese Gnade, der >>Gegenstand<< unserer Theologien - erschließt gemeinsamen Boden - trotz allem!

내 판단에 이것이 우리의 주제에 대한 더 나은 신학적 이해에 유익한 지침이다. 너무 빈번히 사색적이라고 오해받고 의심받았지만, 결국은 무로부터 창조는 이 >>복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초월성이다. 나는 부리도 결국 이 방향으로 생각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 여기서 가능한 공감대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는 분명 불확실하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초월성<<이 뜻하는 것의 규정과 확립을 놓고 우리는 많이 논쟁할 것이다. >>무로부터 창조<<에 대한 시각(접근)과 그것의 삶의 자리에 대한 토론이 이 논쟁의 한 단계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것이 좋다: 은혜에 대한 언급, 좀 더 바로 말해: 우리의 신학의 >>대상<<인 이 은혜가 공동의 마당을 열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 Heinrich Ott

하인리히 오트

 

F. Buri zeichnet in seinem einleitenden Votum ein eindrückliches und geschlossenes Bild, welches zugleich wiederum fürs Ganze seines theologischen Ansatzes charakteristisch ist, und er gelangt von da aus zu einer Bejahung des alten theologischen Gedankens der >>creatio ex nihilo<<, freilich >>iuxta modum<<, d. h. so, wie er innerhalb seines systematischen Ansatzes dieses Theologumenon aufzunehmen vermag. - Für Buris Theologie, was ihre Rezeption der Bibel betrifft, spielt das mythische Motiv des Drachenkampfes eine zentrale Rolle. Drachenkampf bedeutet: die Überwindung des Urwelt-drachens, der personifizierten Chaos-Macht, durch den göttlichen Erlöser. Persönlich empfinde ich diese Sicht der Bibel als sehr eigenwillig. Ich vermag im Blick auf die Gesamtheit der bilischen Texte nicht zu erkennen, warum dieses (zweifellos vorkommende) Motiv wirklich das zentrale der ganzen Bibel sein soll. Doch ist es von Buris systematischen Ansatz her sehr wohl verständlich, daß er gerade dies zum Zentrum erklärt. (Und darin zeigt sich, wie Bibelauslegungen und systematische Deutungsansätze sich wechselseitig bedingen und bestimmen!)

부리는 그의 발제에서, 자신의 신학적 접근에 특징적인 인상깊은 완성된 관념을 내놓았고, 이것으로부터 >>무로부터 창조<<라는 옛 신학사상의 긍정에 이르는데, 물론 >>조건부로(iuxta modum)<< 그러하다. 즉 그는 자신의 조직신학적 시각 안에서 이 신학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부리의 신학에서, 그것의 성경 수용과 관련하여, 대룡투쟁(對龍鬪爭)이라는 신화적 동기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대룡투쟁은 이것을 의미한다: 신적(神的) 구원자를 통한 태고룡(太古龍), 인격화된 혼돈세력에 대한 승리. 개인적으로 나는 성경에 대한 이 시각을 매우 자의적(恣意的)이라 생각한다. 성경 말씀의 전체성을 고려할 때 나는 왜 이 (분명 가능한) 모티브가 실제로 전(全) 성경의 중심 모티브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리가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삼은 것이 그의 조직신학적 시각(접근)에서 보면 매우 쉽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성경해석과 체계적 해석시각이 서로 제한하고 규정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Der Chaosdrache ist nach Buris Sicht das mythische Symbol für das >>Sinnrätsel des Seins<<, dem jeder Mensch unausweichlich ausgesetzt ist. Das Sinnrätsel bedeutet: das Ausbleiben jeder Antwort, auf die der Mensch doch existentiell angewiesen ist, also die totale Versagung, das existentielle Nichts. Geschieht nun aber das Wunder, daß die Lichtbringer- und Drachentötergestalt des Christus den finsteren Chaosdrachen überwindet, so bedeutet das in der Sprache von Buris Existenztheologie: Das Sinnrätsel wird jah durchbrochen, von der Transzendenz her, durch eine schöpferische Sinn-Antwort. Diese ist allerdings je und je ein Geschenk der Gnade, über das der mensch nicht verfügt. Und auf dieses schöpferische Geschehen wendet Buri den Titel der >>creatio ex nihilo<< an: Es ist die Schöpfung von Sinn aus dem existenziellen Nichts. - Allerdings soll sich der sinn-bedürftige Mensch mit >>partiellen Sinnmöglichkeiten<< begnügen und sich nicht zu >>universalen Sinnkonstruktionen<< verleiten lassen.

부리의 견해에 따르면 혼돈용(混沌龍)이,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대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수수께끼<<를 표현하는 신화적 상징이다. 의미수수께끼는 이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각존재적(실존적)으로 의지하는 모든 대답의 부재, 따라서 전적(全的) 단념, 실존적 무(無).’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빛의 인물(人物), 용(龍)의 살해자(殺害者)가 흑암의 혼돈용을 무찌르는 기적이 일어나면, 이것은 부리의 말로 실존신학이다: 의미수수께끼가 초월 쪽으로부터 창조적 의미답변을 통해 돌파된다. 이 답변은 물론 때때로 인간의 권한 밖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창조적 사건에 부리는 >>무로부터 창조<<를 사용한다: 그것은 >실존적 무(無)로부터 의미창조<다. 물론 의미가 필요한 인간은 >>부분적 의미가능성<<으로 만족해야 하고, >>보편적 의미구성<<쪽으로 유혹되면 안 된다.

 

Ich nenne zunächst die Punkte, an denen ich selber Buris Systemkonstruktion und Mythosinterpretation nicht folgen kann, und versuche dann darzulegen, warum ich dennoch das Theologumenon der creatio ex nihilo meinerseits positiv aufnehmen muß. - Die Differenz zu Buri liegt diesmal primär auf dem Gebiet philosophischer Begriffe und Grund-Operationen. Aber dies hat dann sogleich auch theologische Folgen. So sind theologische Thematik und philosophische Begrifflichkeit stets ineinander verschränkt.

나는 먼저는 내 자신이 부리의 체계구조와 신화해석을 따를 수 없는 근거들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하지만 왜 내가 나로서는 무로부터 창조라는 신학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경우 부리와의 차이는 주로 철학적 개념과 기본작동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이것은 즉각 신학적 결과도 초래한다. 이처럼 신학적 주제와 철학적 개념성이 항상 서로 얽혀있다.

 

1. Buri verschiebt das Problem von der Seins-Ebene auf die Sinn-Ebene. So wird aus dem Nichts bei ihm das >>Sinnrätsel<<, das existentielle Nichts, und aus der Schöpfung aus dem Nichts wird die schöpferisch-gnadenhafte Sinngebung. - Ich bestreite nun nicht die Legitimität des Einbezugs der Sinn-Ebene, wohl aber die Trennung der beiden Ebenen, wie sie der Burischen Operation offenbar zugrunde liegt. Sinn-Ebene und Seins-Ebene, Sinnfrage und Seinsfrage lassen sich nicht voneinander trennen. Was wäre ein Sinn ohne einen Sinn-Träger, d. h. ohne ein personales Seiendes, für das dieser Sinn bedeutsam ist? Sinn, isoliert vom Sein gedacht, schwebt beziehungslos über der Wirklichkeit.

부리는 이 (무로부터 창조) 문제를 존재차원에서 의미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리하여 부리의 경우 무로부터 실존적 무(無)인 >>의미수수께끼<<가, ‘무로부터 창조’로부터 ‘창조적, 은혜적 의미부여’가 나온다. 지금 내가 반박하는 것은 의미차원의 포함의 정당성이 아니라, 이 두 차원들의 분리다. 이 분리가 부리의 사고과정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의미차원과 존재차원, 의미질문과 존재질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미의 담지자가 없다면, 즉 이 의미가 중요한 어떤 인격적 존재자가 없다면, 그 의미가 무엇에 소용된단 말인가? 의미는, 존재와 유리(遊離)되어 고려될 때, 현실세계 위에 아무런 상관도 없이 떠다닌다.

 

2. Buri erzeugt eine Unklarheit in bezug auf die Begiffe des >>Nichts<< und des >>Seins<<. Er will zwischen zwei >>Arten<< des Nichts unterscheiden, nämlich dem Nichts, das als Gedachtes immer noch ein Thema, etwas Gegenständliches ist, und dem >>nihil pure negativum<<, das wirklich nur Nichts ist ... Aber auch dieses absolute Nichts wird ja bei Buri noch einmal zum Gedachten. Er redet ja darüber ... Auch die Grenzerfahrung, die er im Auge hat, wenn er von Mystikern und Nihilisten spricht, ist ja für ihn ein Thema des Nachdenkens. Also doch nicht nichts? Ich selber würde hier trotzdem sagen: doch, Nichts! Es geht hier um eine Grenzerfahrung, eine Grenzerfahrung des Denkens und auch der Existenz. Und diese Grenzerfahrung bleibt Grenzerfahrung, auch wenn sie ihrerseits zu reflektieren versucht wird. Sie kann sich etwa philosophisch artikulieren in der berühmten Frage: >>Warum ist überhaupt etwas und nicht vielmehr nichts?<< Im Stellen dieser Frage wird das unvorstellbare Nichts als Grenze erfahren.

부리는 >>무(無)<<와 >>존재<<의 개념에 있어서 명료하지 못하다. 그는 두 >>종류<<의 무를, 곧 ‘사고되어진 것으로서 항상 여전히 어떤 주제, 어떤 대상적인 것이 되는 무’와 ‘실제로 단지 무(無)인 >>순수 부정의 무<<’를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 무(無)도 또 한 번 부리에 의해 ‘사고되어진 것’이 된다. 그는 그것에 대해 ...라고 말한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한계(경계)경험도, 그가 신비주의자들과 허무주의자들을 말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의 숙고의 주제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나 자신은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무(無)! 여기서 핵심은 한계경험, 사고와 존재의 한계경험이다. 그리고 이 한계경험은, 사람들이 그것을 숙고한다 할지라도, 한계경험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다음의 유명한 질문 가운데 철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대체 왜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나?<<. 이 질문을 하는 중에 상상할 수 없는 무(無)가 한계로 경험된다.

 

3. Buri scheint mir auch Verwirrung anzurichten mit Bezug auf den Begriff des Seins: Er spricht von >>gegenständlichen Halbwahrheiten der Seinsmystik<<, von >>universalen Sinnkonstruktionen<<, für welche >>der Seinsgrund auch als Sinngrund gelten<< könne. Ich habe den Verdacht, daß Buri hier folgendes Schema vor Augen hat, gegen das er angehen möchte: Es gibt ein (behauptetes, vermeintliches!) Totalwissen vom Sein, welches zugleich die Frage nach dem Sinn im ganzen beantwortet und erledigt zu haben glaubt. Dies lehnt Buri (mit Recht!) ab, denn hier wird das >>Sinnrätsel<<, die >>Sinnzweideutigkeit<< bzw. >>-zwiespältigkeit<< nicht ernst genommen. - Indessen: dieser Sparring-Partner, mit dem Buri boxt, ist selbstfabriziert. Er hat mit dem wirklichen metaphysischen Durchdenken der Seinsfrage, wie es uns (inspiriert von Thomas von Aquin, Kant und Heidegger) etwa in der modernen Transzendentalphilosophie und -theologie begegnet, kaum noch etwas zu tun. Denn für dieses Denken ist der Begriff >>Sein<< nicht etwa der verschwommene Inbegriff eines Totalwissens, welches die Sinnzweideutigkeit hinter sich gelassen zu haben wähnt, sondern >>Sein<< ist die transzendental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afür, daß der Mensch überhaupt nach Sinn fragen und so die Sinnzwiespältigkeit erfahren kann. Nur indem ich das rätselhafte Wörtlein >>ist<< zu bilden, vor dem Rätsel des Seienden als Seienden zu staunen vermag, gelange ich überhaupt dazu, nach einem Sinn zu fragen und das Ausbleiben einer Antwort als Grenze meiner selbst, als >>Nichts<<, zu erfahren und zu erleiden.

내 생각에 부리는 존재개념에서도 혼란을 야기한다: 그는 >>존재신비의 구체적 반쪽진리<<에 대해, >>존재기반이 의미기반으로서도 유효하게<< 될 수 있는 >>보편적 의미구조<<에 대해 말한다. 부리가 여기서 자신이 맞서려고 하는 다음의 도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전체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고 해결했다고 믿는 >존재에 대한 (이른바 오해로 생각되어지는!) 총체적 지식<이 있다. 이것을 부리는 (정당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미수수께끼<<, >>의미모호성<< 내지 >>의미분열성<<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리의 권투 연습 상대는 자아생산적이다. 그 상대자는,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하이데거로부터 영감을 받아) 예컨대 현대의 초월(선험)철학과 초월신학에서 그것을 만나고 있듯이, 존재질문에 대한 실제적 형이상학적 숙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사유(思惟)에게 >>존재<< 개념은 ‘의미모호성을 극복했다고 착각하는 총체적 지식의 희미한 전체’가 아니고, >>존재<<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의미분열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초월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수수께끼 같은 단어 >>존재한다(혹은 ‘...이다’)<<를 구성할 수 있고,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의 수수께끼 앞에서 경탄해 할 수 있음으로써, 나는 일반적으로 어떤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의 부재를 내 자신의 한계로, >>무<<로 경험하고, 감수할 수 있게 된다.

 

Wegen dieser Differenzen im philosophischen Ansatz bin ich nicht in der Lage, Buris theologische Konstruktion zu übernehmen, so sehr ich mich über ihre Geschlossenheit, ihr lückenloses Aufgehen, gewissermaßen als über ein ästheisches Phänomen, freue.

철학적 시각(접근)에서의 이 차이 때문에 나는 부리의 신학 구성을 수용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그것의 짜임새, 그것의 빈틈없는 풀림을 거의 미적(美的) 사건처럼 좋게 보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Indessen halte auch ich den Gedanken der creatio ex nihilo für theologisch notweindig. Denn Gott begegnet uns in unserm Selbstverständnis, im Selbstverständnis des Glaubens, als absolute Grenze und als letztgültige Wirklichkeit und Wahrheit. Das Selbstverständnis des Glaubens >>weiß<< (und eben dieses >>Wissen<< ist es, was es zum Selbstverständnis des Glaubens macht), daß es weder an Gott vorbei noch hinter Gott zurückkommt. Es gibt nicht neben Gott noch eine andere Ur-Instanz. Keine Ur-Materie, sondern neben Gott ist eben nur noch - das Nichts. Und das Nichts ist eben - nichts. Das hießt: Da ist nur noch Gott: >>Von allen Seiten umgibst Du mich ...<< (Psalm 139).

그럼에도 나도 무로부터 창조 사상을 신학적으로 불가결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기이해 가운데, 신앙의 자기이해 가운데 절대적 한계로서, 궁극적 현실과 진리로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기이해는 ‘자신이 하나님을 비켜갈 수도, 하나님 뒤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바로 이 >>앎<<이 그 사실을 신앙의 자기이해로 만든다).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원(原)주무관청이 없다. 그 어떤 원(原)물질도 없고, 하나님 외에는 오직 무(無)만 있다. 그리고 이 무(無)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오직 하나님께서만 존재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방에서 저를 감싸십니다. ...(시139).<<

 

Ich halte es für unangemessen, das Tohuwabohu des ersten Schöpfungsberichtes in Richtung >>hyle<<, also ungeformten Urstoff, deuten zu wollen. Denn die >>hyle<< enthält das Bedeutungsmoment der Grundlage, nicht aber der Bedrohung. Die biblisch vorgestellten Wasser des Chaos dagegen bedrohen die Schöpfung, also das aus Nichts geschaffene Seiende, zu jeder Zeit. Sie würden die Welt ohne den Schutz der göttlichen Erhaltung sogleich wieder verschlingen. So die biblische Vorstellung. Das Nichts - ganz anders als die neutrale >>Urmaterie<< - bedroht das Sein in seinem Bestand. - Den Begriff des Nichts zu denken, z. B. die Frage: >>Warum ist überhaupt etwas und nicht vielmehr nichts?<< in dieser Form zu artikulieren, erfordert ein hohes Maß an philosophischer Abstraktionsfähigkeit. Dem archaisch-mythischen Zeitalter war dies noch nicht zu eigen. Aber dieselbe Erfahrung, eben jene Grenzerfahrung, wurde im mythischen Bild von der bedrohlichen Urflut des Chaos (oder vom fürchterlichen Drachen) ausgedrückt. Die Erfahrungsstruktur ist dabei die gleiche. Und diese Grenzerfahrung gehört als ein Aspekt mit zur Erfahrung des Glaubens. Gott, weil Er der absolut Souveräne, Unüberbietbare, die absolute Grenze ist, muß als der verstanden werden, der aus dem Nichts schafft. Dies gilt auf der Seins-Ebene wie auf der Sinn-Ebene, weil beide nicht zu trennen sind.

나는 첫 창조기사에서의 토후와보후(혼돈과 공허)를 >>휠레(재료)<<의 방향으로, 따라서 무형의 원(原)재료로 해석하는 것이 절절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휠레<<는 위협의 해석요인이 아니라 기반의 해석요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혼돈의 물은 언제나 창조를, 즉 무로부터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을 위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유지의 보호가 없다면 즉시 다시 세상을 삼킬 것이다. 성경적 이미지가 그러하다. 무(無)는, 중립적 >>원(原)물질<<과 매우 달리, 존재의 존립을 위협한다. 무(無)의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예컨대 >>대체 왜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나?<<라는 질문을 이런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높은 철학적 추상화 능력을 요한다. 이것은 아직은 고대 신화 시대의 특징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일한 경험이, 바로 저 한계경험이 혼돈의 (혹은 무시무시한 용(龍)의) 위협적 원(原)홍수(洪水)라는 신화적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이때 경험구조가 동일하다. 그리고 이 한계경험이 하나의 국면으로서 함께 신앙의 경험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자, 지존하신 분, 절대 한계이시기에, 무로부터 창조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존재차원과 의미차원에서 유효하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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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philosophy -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Japanese philosophy -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Japanese philosophy

By
Kasulis, Thomas P.


Article Summary


The most distinctive characteristic of Japanese philosophy is how it has assimilated and adapted foreign philosophies to its native worldview. As an isolated island nation, Japan successfully resisted foreign invasion until 1945 and, although it borrowed ideas freely throughout its history, was able to do so without the imposition of a foreign military or colonial presence. Japanese philosophy thus bears the imprint of a variety of foreign traditions, but there is always a distinctively Japanese cultural context. In order to understand the dynamics of Japanese thought,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both the influence of various foreign philosophies through Japanese history and the underlying or continuing cultural orientation that set the stage for which ideas would be assimilated and in what way.

The major philosophical traditions to influence Japan from abroad have been Confucianism, Buddhism, neo-Confucianism and Western philosophy. Daoism also had an impact, but more in the areas of alchemy, prognostication and folk medicine than in philosophy. Although these traditions often overlapped, each also had distinctive influences.

In its literary forms, Japanese philosophy began about fourteen centuries ago. Confucian thought entered Japan around the fifth century ad. Through the centuries the imprint of Confucianism has been most noticeable in the areas of social structure, government organization and ethics. Philosophically speaking, the social self in Japan has its roots mainly in Confucian ideals, blended since the sixteenth century with certain indigenous ideas of loyalty and honour developed within the Japanese samurai or warrior class.

The philosophical impact of Buddhism, introduced around the same time as Confucianism, has been primarily in three areas: psychology, metaphysics and aesthetics. With its emphasis on disciplined contemplation and introspective analysis, Buddhism has helped define the various Japanese senses of the inner, rather than social, self. In metaphysics, Buddhist esotericism has been most dominant; through esoteric Buddhist philosophy, the Japanese gave a rational structure to their indigenous beliefs that spirituality is immanent rather than transcendent, that mind and body (like humanity and nature) are continuous rather than separate, and that expressive power is shared by things as well as human thought or speech. This metaphysical principle of expression has combined with the introspective psychology and emphasis on discipline to form the foundation of the various aesthetic theories that have been so well developed in Japanese history.

Neo-Confucianism became most prominent in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Like classical Confucianism, it contributed much to the Japanese understanding of virtue and the nature of the social self. Unlike classical Confucianism in Japan, however, neo-Confucianism also had a metaphysical and epistemological influence. Its emphasis on investigating the principle or configuration of things stimulated the Japanese study of the natural world. This reinforced a tendency initiated with the very limited introduction of Western practical sciences and medicine in the sixteenth century.

Western philosophy, along with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has had its major impact in Japan only since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forced Japanese philosophers to reconsider fundamental issues in epistemology, social philosophy and philosophical anthropology. As it has assimilated Asian traditions of thought in the past – absorbing, modifying and incorporating aspects into its culture – so Japan has been consciously assimilating Western thought since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e process continues today.

What in all this is distinctively Japanese? On the superficial level, it might seem that Japan has drawn eclectically from a variety of traditions without any inherent sense of intellectual direction. A more careful analysis, however, shows that Japanese thinkers have seldom adopted any foreign philosophy without simultaneously adapting it. For example, the Japanese philosophical tradition never fully accepted the emphasis on propriety or the mandate of heaven so characteristic of Chinese Confucianism. It rejected the Buddhist idea that impermanence is a reality to which one must be resigned, and instead made the appreciation of impermanence into an aesthetic. It criticized the neo-Confucian and Western philosophical tendencies toward rationalism and positivism, even while accepting many ideas from those traditions. In short, there has always been a complex selection process at work beneath the apparent absorption of foreign ideas.

Both historically and in the present, some Japanese philosophers and cultural critics have tried to identify this selection process with Shintō, but Shintō itself has also been profoundly shaped by foreign influences. The selection process has shaped Shintō as much as Shintō has shaped it. In any case, we can isolate a few axiological orientations that have seemed to persist or recur throughout the history of Japanese thought. First, there has been a tendency to emphasize immanence over transcendence in defining spirituality. Second, contextual pragmatism has generally won out over attempts to establish universal principles that apply to all situations. Third, reason has often been combined with affect as the basis of knowledge or insight. Fourth, theory is seldom formulated in isolation from a praxis used to learn the theory. Fifth, although textual authority has often been important, it has not been as singular in its focus as in many other cultures. Thus, the Japanese have not typically identified a single text such as the Bible, the Analects, the Qur’an or the Bhagavad Gītā as foundational to their culture. Although there have been exceptions to these general orientations, they do nonetheless help define the broader cultural backdrop against which the drama of Japanese philosophy has been played out through history.

알라딘: 근대초극론 -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 일본의 현대 지성 5 히로마쓰 와타루

알라딘: 근대초극론


근대초극론 -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 일본의 현대 지성 5 
히로마쓰 와타루 (지은이),김항 (옮긴이)민음사2003-05-30

원제 : '近代の超克'論 - 昭和思想史への一視覺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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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1942년 잡지「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인 '근대의 초극'은 당시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키워드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금기시되어 온 용어이기도 하다.

당시 지성인들은 일본의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후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고발되었다. 지은이는 전후엔 논의조차 사라져버린 이 주제를 다시 끌어내어 '근대의 초극'은 당시 일본 사상계를 대변하는 키워드임과 동시에, 언제라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무서운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목차


서문

1. '문학계' 좌담에 대하여
2. 고오사카 마사아키의 견해를 다시 읽는다
3. '세계사의 철학'과 세계 대전의 합리화
4. 전시 '일본 사상' 비판의 한 이정표
5. 국가 총동원 체제와 역사의 간지(奸智)
6. 미키 기요시의 '시무의 논리'와 애로(隘路)
7. 민족주의적 자기기만
8. 절망의 여염(餘炎)과 낭만주의적 자조
9. 교토 학파와 세계사적 통일의 이념
10. 철학적 이념과 현실의 어긋남

(해설) 근대의 초극에 대하여 - 가라타니 고진
(옮긴이 후기) 지금 이곳의, 혹은 이미 지나간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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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히로마쓰 와타루 (廣松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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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태어나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사물적 세계관에서 탈피한 사건적 세계관, 사지 구조론, 공동 주관성 등을 축으로 서양 근대 사상과 비판적 대화를 계혹해 왔다. 1960년대 후반의 신좌파 중 특히 분트(공산주의자 동맹) 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은 책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지평>, <존재와 의미>, <자본론의 철학>, <유물사관의 본모습>, <과학의 위기와 인식론> 등이 있다.

최근작 : <근대초극론> … 총 27종 (모두보기)

김항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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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도쿄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표상문화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관심은 문화이론 및 한일 근현대 지성사이며 지은 책으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2009), 『제국일본의 사상』(2015), 『종말론 사무소』(2016)이 있고, 옮긴 책으로 『예외상태』(2009), 『정치신학』(2010) 등이 있다.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1.겨울>,<[큰글자도서] 제국일본의 사상 >,<레드 아시아 콤플렉스> … 총 22종 (모두보기)



전전과 전후의 단절... 그러나 연속

현대 일본은 전전과 전후를 분리하여 사고하려고 하고 그런 사고 속에 전전의 가해자에서 벗어나 전후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물론 가해자의 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러한 피해자되기는 경제부흥의 여파로 자신감을 회복한 이후 다시 전전의 자심감을 표현하는 논리로 전환하고 있다. 그 논리가 전전의 논리를 계승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과거 지식인의 논의가 현재에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는,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불철저성을 근대 일본 지성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밝히고 있다.
대장장이 2003-08-1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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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 사상이 있는가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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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2-07 공감 (1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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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1)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톱뉴스이다(*이 글은 2003년 12월 중순에 씌어졌다). 부시가 재선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제 문득 들었지만(*예감은 언제나 실현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체포되는니(우리의 KAL기 사건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미리 체포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곧 연말이니까 두주쯤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아니다! 그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다!...











연말연시는 비교적 좋은 책들이 나오는 계절이다. 주머니가 좀 넉넉해지는 시기인 만큼 (실제적인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책에 대한 소비도 다소 헤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책 소개의 주기도 빨라졌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건(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케밀 파야의 <성의 페르소나>(예경)이다. 지난주 한겨레 서평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이다.



원제는 'Sexual Personae'(1990)이고, 번역서의 분량이 9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718쪽에 이른다). 지난주 구내서점에 포장된 채로 들어왔길래 무슨 책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다소 싸구려틱한(!) 표지의 책이었다. 인터넷교보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고, 몇 군데에서 신간리뷰로 다루기도 했으니까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에 의하면 "서구 문화의 역사를 바로 이 3중의 이분법으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자연=여성 대 아폴론=문명=남성의 대립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논란만 불러일으켰다면, 그저 호사가적 관심거리만 될 터이지만, 내가 제임슨의 신간과 함께 이 책을 주문한 것은(내일쯤 책을 받아봐야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해롤드 블룸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말의 좋은 의미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책이 없다는 호평을 하고 있다. 나는 거물들의 그런 말에 잘 넘어간다.















두번째 책은 민음사에서 나오는 '일본의 현대지성' 시리즈의 7번째 책인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이다(*<문화의 두 얼굴>, <근대초극론> 등도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어제 영풍문고에 들렀을 때에도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책은 모두 읽을 만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추천할 수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은 커먼 센스 commom senses, 상식, 공통감각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화가 에스헤르,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리트 등의 회화론, 지각 심리학의 역전 시야에 대한 지각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파 언어학과 촘스키의 생성문법의 이론까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기억의 문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고 있다." 저자는 바슐라르, 푸코 등을 일어로 번역한 바 있는 일본의 중진학자이고, 역자는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를 번역했던 고동호 교수이다.















세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이다. 이쯤되면 박교수의 놀랄 만한 생산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오리엔탈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그가 올 한해 (번역서를 제외하고) 낸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모두 7권이다. 이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듯하지만, 이에 견줄 만한 글쓰기의 생산성이라면, 강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의 글은 스피디하게 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어쨌든 지난번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저작 한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다른 입문서로는 2005년에 나온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있다). 굳이, 박교수의 흠을 덧붙여 지적하자면, 교정이 섬세하지 않다는 것. 하긴 우리 출판계에서 교정이 잘 돼 있는 책을 손에 꼽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번째 책은 남미문학의 거장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Llosa)의 <세상종말전쟁>(새물결)이다. 나는 그의 책 가운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초역판은 다른 제목이었다)를 부분적으로 읽고, '대단한 구라'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번쯤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아마도 올해 번역돼 나온 남미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들 가운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정도가 그와 견줄만한 생존작가들이다.














다섯번째 책은 프란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이다. 보노보에 대한 화보들이 실려 있는(그래서 책값이 256쪽에 35,000원이다) 이 생태 연구서는 제인 구달의 말을 빌면 "이 4번째 거대 유인원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줄 책"이다. 4대 유인원이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그리고 덩치가 작아서 '피그미침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보노보를 말한다.

내가 보노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하버드대 교수)과 과학저술가 데일 피터슨의 <악마 같은 남성>(사이언스북스, 1998)에서였다. 거기서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다른 가부장적 영장류들과 달리 보노보는 온화한 가모장적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보노보에 대한 드문 연구소개서인 만큼 관심을 둘 만하다.

참고로, 보노보는 동성애도 즐기는 프리섹스주의자들이라고. 저자인 영장류 학자 드 왈은 <정치하는 원숭이: 침팬지의 정치와 성>(동풍,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침팬지 폴리틱스>로 다시 나왔다. 드 왈(드 발)의 최신간은 작년 12월에 나온 <내 안의 유인원>이다).

이 책들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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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5-1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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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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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함
등록 :2015-06-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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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근대초극론>, 히로마쓰 와타루(廣松涉) 지음
김항 옮김, 민음사, 2003
일본 교토의 리츠 칼튼 호텔 지점 건물은 소박하다(안 들어가 봐서 내부는 모른다). 몇 걸음 건너 맞은편에 작은 가게가 있다. 이 도시는 간판이 크지 않아서 무슨 사무실인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곳이 많다. 쇼윈도에 수십개의 ‘예술 접시’가 사각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처음엔 당연히 미술관인 줄 알았다. 그다음엔 화원, 한의원인 줄 알았다가 동물 병원으로 ‘판명’되었다.
내게 그 가게는 ‘일본’을 상징한다. “일본인은 본심을 알 수 없다”는 혼네(ほんね, 속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잘 모르는 나라’다. 일본에 대한 무지는 식민성과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점령자가 교체되면서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를 자처,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탈식민 투쟁(성찰과 공부) 대신 손쉬운 비하를 택했다.
<근대의 초극(超克)>은 1920~1945년에 걸친 근대성 극복을 주제로 한 일본 지식계의 논쟁을 마르크스주의 석학 히로마쓰 와타루가 해설한 유명한 책이다. 비서구 일본의 입장에서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성(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을 극복하자는 논의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시작되었지만(모더니즘) 아시아의 일본에서 더 발달했다(포스트/모더니즘). 공간과 시간의 불일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지름길은 일본 연구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입한다)는 개화기 일본의 강박이었다. 일본은 추월에 성공했다. ‘원본’인 서구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근대의 초극’ 논쟁은 제국이 되고자 했던 일본이 자신을 알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수십권의 전집을 낼 만한 걸출한 지식인들이 탄생했으며 일본 특유의 인문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본은 따라잡으려는 대상을 치열하게 논파했다. 유럽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서구가 비서구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구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만든 이들을 거쳐야 한다. 비서구, 여성, 장애인… 모든 타자들에게 인생이란 이렇게 멀고 복잡한 우회로이다. 이는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근대 유럽의 철학과 역사, 미술, 음악에 두루 정통했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초극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근대가 나쁘니까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오자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근대인이 근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근대에 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일본) 고전으로 통하는 길이, 근대성의 벼랑 끝이라고 믿는 곳까지 걸어가서야,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히로마쓰의 해석은 “그의 말에는 서구 문명의 밑바닥을 보고야 말았다는 자부라기보다는 오히려 적막감을 동반한 안도감 같은 것이 존재하며,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한 감정’이 묻어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국수주의적 자만심이 아니다. 깨인 상대주의,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어디엔가 깊게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이 함께하는 깨달음이다.”(184쪽)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받는 자기 개념과 싸워야 하는 타자로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 나도 처음 여성주의를 공부할 때 그랬다. ‘남자들의 책’(더구나 동서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이 지나간 후 찾아오는 허탈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 끝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에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연재[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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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마쓰 와타루, 『근대초극론』, 김항옮김, 민음사, 2003.
12. 26일 『근대초극론』을 읽다.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넓은 의미의 ‘탈근대’ 혹은 ‘근대초극’의 논리가 지닌 반동성에 대한 비판이란 일정부분
이미 익숙한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한국에 있어 저널의 차원에선 탈근대에 대한 논의가 유행할 때 항시 ‘유행에 대한 비판’도 짝을 이루며 유행했
었고 그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판적 논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이 추적하고 있는, 근대초극론과 천황제파시즘의 연루란 것도
일본 근대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서 읽었을 때는, 두뇌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즉 일반적인 사항 정도로 축약되어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근대비판과 초극에 관한 의식이 한국에서는 어떤 굴절과정을 겪으며 연속되고 있었던가’란 궁금증을 가져보았는데, 그런 위치
에 있는 인물들의 저작을 조금씩이나마 직접 접해보고 비평해 보는 과정이 일반적인 차원으로 요약되어버릴 포괄적인 논의들에 접근하는 것보다 바
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저자가 인용했던 비평가 가토 슈이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 발언이 세계구조의 편제상 열등한(?) ‘동양’에서의
사상적 발화상의 교착(膠着)지점을, 현상적인 기술로서 잘 요약해준다는  이유에서다. ; “일본 낭만파가 말의 기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면, 교
토학파는 논리의 기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일본 낭만파가 전쟁을 감정적으로 긍정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다면, 교토 학파는 똑같은 전쟁을
논리적으로 긍정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일본 낭만파가 몸에 맞지 않는 외래 사상의 어색함을 거꾸로 뒤집어 국수주의를 고취하는 데 열중했다면, 교토
학파는 외래 논리가 지닌, 생활과 체험과 전통과 동떨어져 어디든지 적용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금세 ‘세계사의 철학’을 날조해
냈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따라붙기 마련인 사상의 외래성을,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만큼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희화화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논의
가 구체적인 현실과 맞닿으면 철저하게 엉터리가 된다는 점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논리 자체는 아주 그럴 듯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상의 외래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191쪽)
아래는 한번 읽은 ‘기억’을 유지놓기 위한 의무적인 정리인데, 1의 첫 문장을 쓸 때 신문의 <책 소개>란 처럼 정리할까하다, 2로 넘어가면서는 그냥 날
위해 정리해 두자는 식으로 책 내용의 대강을 요약했다. 
1. ‘근대초극론’은 협의로는 일본에서 1942년 《문학계》란 잡지를 통해 이루어진 좌담을 지칭하는데, 거기에는 교토학파의 인물들, 일본 낭만파,《문학
계》동인등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집단들이 참여했다. ‘근대초극론’의 의미를 확장하자면 일본에서의 ‘서양=근대’의 시스템이 지닌 현실적 아포리
아를 넘어서려 했던 시도들 전반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광의의 의미로 파악했을 때, ‘근대초극’이란 여전히 매우 현실적인 문제라 할 것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전체적인 구성이란 바로 서양에서 18~19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던 이념적·제도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현실의 불안정 역
시 바로 ‘근대’가 내포하고 있는 거시적인 틀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근대초극론』이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일본에서 1940년대에 전
개되었던 ‘근대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란 과제가 어떻게 그 한계에 봉착했고, 변질되었는지를 따라 가보는 독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토대에 대
해 재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2. 히로마쓰 와타루는 ‘어떻게 근대초극에 대한 담론이 일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묻고 있는데, 그가 이 주제를 다루
기 위해 접근하고 있는 줄기는 크게는 네 가지의 계열이다. (1) 금융자본주의가 봉착한 모순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국면, (2) 니시다 기타로
로부터 교토학파로 이어지는 이른바 ‘세계사의 철학’, (3) 미키 기요시로 대표되는 전향 좌파의 근대초극의 논리, 즉 협동주의 철학, (4) 맑스주의의 좌
절이란 분위기에서 태동한 일본낭만파의 논리.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의 1장과 2장에 실려 있는 ‘근대성 비판’의 논리는 흔히 현대에 무슨 거창한 타이틀을 건 좌담회에서 제시되
는 논의 틀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정도로 당시의 논의수준으로서도 그것은 꽤나 선진적인 셈이며, 지금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
용들이다. 이론들은 자본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에 대한 극복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이른바 "탈(Post)-"로 표상되는 담론들과 커다란 차이를 지
니고 있지는 않다. 핵심은 일견 이 시기를 둘러싼 담론들이 일견 파시즘을 부정하면서(외견상 심지어는 정부의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파시즘으로 성립
되었던 경위이다.
아무튼 간에 위의 네 계열 중, 현실을 해석하는 이론으로서의 이 세 가지 계열이 결국은 (1)이 나타내는 현실적 국면, 즉 ‘천황제 파시즘’의 옹호논리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저자가 결정적인 굴절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국체’(즉 천황제)란 사회·경제·정치적인 실제에 대한 ‘이론’의 억압 내지는 외
면이다. 각각의 계열이 지닌 문제는 다음과 같다.
(2)계열 : 교토학파가 제시한 ‘세계사의 철학’은 유럽중심의 보편사관을 비판하며, 동시에 서양의 근대가 만들어놓은 인간중심주의와 기계화, 소외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을 표상한다. 인간존재의 사회성, 민족, 국가등을 사고하는 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그들은 성급하게 그
‘불비’와 ‘결락’을 비판하며 기각하며 휴머니즘으로 넘어가 버린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초극’을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인 방향에 대해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때, 상당히 추상적인 차원으로 비약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초극을 모색해야 했을 때, 구체적인
현실로 대결했어야 할 ‘天皇=國體’란 문제지점을 외면하였다는 점에 있다. 정치·경제적인 매개를 배제한 상태에서 나타났던 그들의 형식은 걸맞는 내
용이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전시상황 속에서 ‘서양=근대’란 질병에 대항하는 세계사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동양의 대표자로서의 일본의
위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서양 제국주의와 어떠한 차이도 없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란 현실을 외면 내지는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그로 변질된
다. 감성적인 차원에 대한 긍정 및 유기체적 발상은 일본 낭만파와 연속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3)계열 : 전시체제란 국외적 상황, 그리고 재벌과 정당간의 야합으로 특징 지워진 금융자본주의적 체제의 한계·모순(공황으로 인한 농촌경제 붕괴 및
계급투쟁의 격화)이란 국내적 상황 속에서 군부는 쇼와유신에 착수한다. ‘사적 소유’의 절대적 인정,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자
유주의 경제시스템은 중앙 국가에 의한 통제경제(국가 독점 자본주의 : 사유재산의 상한선 설정, 토지국유화, 대자본의 국영화)로 이행하게 되는데, 군
[독서일기] 히로마쓰 와타루ㅣ근대초극론
노백성
2005. 12. 2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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韜光養晦
5/24/23, 8:24 PM [독서일기] 히로마쓰 와타루ㅣ근대초극론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n69/1200208183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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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내세웠던 논리는 ①천황친정, ②자본주의 타도, ③계급대립 극복, 국위의 세계적 발양이다. 금융자본주의로부터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그
리고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이 이 시기 역사의 국내적인 정세였다. 대대적인 좌파 탄압 속에서 일본 공산당은 거의 괴멸단계에 이르렀는데, 이 때 대
대적인 좌파들의 전향이 시작되었다. 전향이란 단순한 ‘배신’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이유’에 근거한 전향이었다.
전시체제의 대중적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서 좌파적 실천론자들은 대중적 실천이란 의식 속에서 ‘천황제 타도’란 구호를 폐기하며, 교조적인 지시를 내
리던 코민테른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킨다. 이 당시 좌파들의 논리적인 전향을 가능하게 했던 이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미키 기요시의 ‘협동
주의 철학’이다. “그는 소위 블록 경제로의 길을 밟아가고 있던 당시의 세계정세를 인식하면서 ‘일본과 만주와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협동체’를 구상하
고 ‘동양적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게마인 샤프트(공동사회)’와 ‘게젤샤프트(이익사회)의 종합’으로서의 고차원적인 광역체제를 지향했다.”(137쪽)
그와 같은 전향좌파들에게 있어서는 “국가총동원, 통제경제의 형태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셨다는 망상,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천황
을 정점으로 하는 협동체 국가라는 망상이, ‘근대의 초극’ 논의를 존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118쪽)였던 셈이다.
우익과 군부에게 있어 ‘황군의 위기’, ‘황국의 위기’를 통감하고 ‘천황 곁의 가신’, ‘정치기구와 결탁한 경제권력’을 제거하여 천황친정을 복구하자는 복
고적 주장이, 좌파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자본주의 극복이란 표상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근대초극론’이란 환상으로 봉합되었던 셈이다.
(4) 계열 : 야스다 요주로를 대표로 하는 일본낭만파는 ‘근대초극’에 관한 논의에서 대중적으로 흐르던 어떤 정서를 표상해 준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좌절과 전향이란 현실의 부산물이다. 당시 서양이론의 최첨단의 정수로 이해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들에게 있어 서구
근대문명의 모든 사상과 가치관을 단적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당사자들에게 인식되었다. 현실적인 실천의 장에서의 패배를 매개로 한 환멸과 냉소의
탈출구는 서구문명의 한계를 반성적으로 자각한 국수적인 미의식이었다. 절망한 그들의 내면이란 결과적으로 도착적인 현실(혁명?) 긍정으로 나타나
는데, 그들은 “절망적인 뻔뻔함”(183쪽)을 가지고, 일본의 만주국 건국의 슬로건인 ‘오족협화’, ‘황도낙토’등에 ‘근대초극’적인 공감을 표했다.
‘근대=서양’이란 질병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결과적으로 비유럽적이고 동양적인 원리에 대한 주목으로 현상하는데, 그러한 근대초극론은 정작 그것은
해결해야 될 ‘현실의 문제자체’(아포리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미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문제적 현실을 추인하는 기능을 했다.
히로마쓰 와타루의 평이다 ; “돌아보면 당시의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는, 일본이 세계 일대 강국이 된 정황을 기반으로 한 민족적 자각을 투영하면
서, 메이지 유신 이래의 유럽화와 그 귀결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심정을 계기로 존립했다.”(216쪽), “논리로는 장대한 과제의식을 표명한 추상태로 제
시되었고, 정서로는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국수주의에 의해 겨우 생기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 ‘근대의 초극’을 주술과 같은 통일적 슬로건으로 만들어
준 요인일 수 있었다.”(222쪽)
근대초극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