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⑦ -8 김흡영 교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 아주경제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입력 : 2021-03-0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⑦ 김흡영 교수<上>

경북 영주는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 유학의 본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享)을 배향하는 소수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감싸고 흘러가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40여 채 고택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이 건물은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金臺)의 손자가 1830년에 건립했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1879년에 중수(重修)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시원(始源) 김흡영 전 강남대 신학과 교수(72)는 해우당의 5대손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집안에 파란을 몰고 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무섬마을은 아직도 유교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철저히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큰 마을에는 으레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무섬마을에는 교회가 없다. 국가에서 유교 문화 존속 마을로 공인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 오래 있었고 신학과 교수를 지내다 보니 고향 마을에 가면 가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연구하고 묵상하고 글 쓰는 곳은 소수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소백산 자락에 있습니다. 영주에 살다 보면 ‘아직도 기독교는 우리 종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의 글방에서 산 너머로는 부석사, 왼쪽으로 소백산 비로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소수서원입니다. 유불선의 고적을 가까이 두고 ‘나의 신앙 기독교는 무엇인가’를 20년간 명상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 다석이 좋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GTU 신학대학원 전 총장 다니엘 레만 랍비(가운데)와 현 총장 유리아 김 박사(왼쪽)가 해우당을 찾았다.[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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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그 후 미국 뉴욕에서 무역상사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집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내는 유교 풍습이 배인 집안에 시집와서 처음엔 나와 종교 문제로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 종교인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다투다 보면 저희 집사람이 항상 마지막에 꺼내는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더라고요. 내가 논쟁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이라는 소리는 머리에서 뱅글뱅글 돌았죠. 하나님이 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쓴 ‘도의 신학 Ⅱ’라는 책의 부록에 나오는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밤 중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연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유가로 똘똘 뭉친 집안에서 자란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후 1982년 어머니 장례식 때 사달이 났다. 아버지는 종교에 관해 관용적이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맏상주의 유교적 권한을 행사해 어머니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그때 나는 아주 적극적인 기독교도였습니다. 종파는 장로교였죠. 1970년대 뉴욕의 한국 교회들이 엄청난 전도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게 최고고 절대였죠. 그 누구도 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덕을 베풀어 일가친척과 동네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장례식에 400~500명이 모였는데 기독교로 장례를 치르니 어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옛 식으로 따로 하시더라고요. 나를 지극히 아껴주던 큰어른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네놈이 어떤 신앙과 종교를 가져도 좋지만, 천 년 이상 지켜온 전통을 깨버릴 줄은 몰랐다’ 하고 돌아서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때 내가 깜짝 놀랐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결과는 친척에 큰 아픔을 주고 우리 전통을 깨버리는 배신이었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가. 거기서 나의 신학이 시작된 것이죠.”

"이웃 종교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지금 다시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다면 기독교 식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지금껏 내가 30년간 한 일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한국 종교의 막내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우리의 과거인 전통 종교를 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장례식과 유교 장례식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장례식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죠. 기독교 장례식의 주체는 하나님이죠. 진행은 목사가 하지만. 유교는 주체는 조상이고, 진행은 가족이 합니다. 신의 권위보다 조상에 대한 효(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에선 철저히 신의 권위 아래서 하지요. 유교적인 장례는 효를 가장 중시하는 거죠. 기독교는 조상과 관련된 제사를 미신적 요소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죠. 귀신하곤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천년이 넘는 유교 불교의 전통 앞에서 기독교의 독특성 차별성이 중요했지만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이웃 종교를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김 교수는 다작(多作)이다. 공저를 포함해 저서가 39권 (영문 25권, 한글 14권)이고 논문도 58편이 넘는다. 다석 류영모에 관한 저서인 <가온찍기>(2013)에는 ‘다석 류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고 학술서로는 드물게 3판이나 찍었다.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GTU에서 10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종교의 광석을 찾는 게 나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 한국의 사상가 퇴계와 왕양명을 비롯해 신유학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강남대 동료 교수가 날 보고 이화여대 교회에 가서 김흥호 목사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고 해서 따라나섰죠. 김 목사가 우리의 경전과 성경을 비교해서 강의하더라고요. 김 목사가 그동안 강의한 카세트를 몇 백 개 주더라고요. 출퇴근할 때마다 차 속에서 들었습니다. ‘아차, 이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다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서 <가온찍기> 표지

다석을 세계에 어떻게 소개시킬 것인가? 다석의 기독론을 영문으로 제일 먼저 썼는데요. 20세기 말 정평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종교 분야 단행본에 다석에 관한 글을 올린 건 내가 처음일 겁니다. 그 다음부턴 내가 개발한 ‘도의 신학’에 관련된 글들에서 조목조목 다석의 통찰을 집어넣고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석을 이해하는 해외 학자들이 늘어나는 데 도움을 줬다 할까요. 강남대학의 대학원 코스에도 최초로 다석 강좌를 넣었습니다.

다석은 정말 자유스럽게 동서를 회통(會通)해 풀어냈습니다. 과연 이것을 서양 기독교 신학 체계 속에서 기독교를 배운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고민했죠. 다석 사상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광맥입니다. ‘아이고 다석 멋지다’ 라는 찬탄으로 그칠 게 아니라 교육의 소재로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후학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저서 <가온 찍기>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반문화적으로 이식되고 기계적으로 전수된 서구적인 신학을 추종하기를 원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보수적인 풍토에서 다석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른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본다면….

“지금은 정통 보수 기독교인들이 다석의 사상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면 껍데기를 여섯 번은 벗어야 하니까요. 알을 까는 것처럼. 특히 한국 기독교는 너무 굳어지고 단단해져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느 정도 열려있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서삼경을 구약 대접하라’는 다석의 말은 동양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를 바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말 같은데요. 동양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던 ‘선교사 신학’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계보다는 세계 기독교계가 더 빨리 다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석은 학자들에게 정말 힘든 숙제입니다.
영어로 논문을 몇 편 쓰고 있는데 정말 어려워요. 기독교의 지평을 넘어서 동양의 모든 경전을 회통하는 개념을 외국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힘이 들어요. 그 다음 문제는 한글이에요. 한문은 세계적 수준에서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한글은 다석이 또 새로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 놓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다석이 ‘산보’ 또는 ‘정신 하이킹’이라고 이름을 붙인 기도문이 있습니다. 내가 ‘산보’를 stroll(sanbo), 정신 하이킹을 spiritual hiking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서구 신학자의 제자들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전략도 외국 신학의 제자가 된 사람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외국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목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다석은 ‘최후까지 진실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사람은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여러 군데서 강조하더군요. 그렇지만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김흡영 교수는 다석을 기독교라는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고 싶었던 김흥호 이화여대 전 교수의 신학과 맥이 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원주의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을 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놓고 외국 신학자와 논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서구에는 기독교밖에 없었잖아요. 그들은 선교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오니까 엄청난 종교들이 있던 거예요. 그래도 서구보다 열등하니까 계몽시켜야 하겠다고 선교를 했지요. 그러나 아시아의 종교들은 기독교보다 오래된 종교들이라 파면 팔수록 뭔가 나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기독교밖에 없고 기독교가 최상이라는 종교적 생각을 가진 서구 사상에서 나온 인식론적 개념이죠. 선교 전략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우린 기독교 이전에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여기에 기독교가 끼어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종교의 다원성이 우리의 맥락입니다. 전혀 모르다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를 그대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기본이 안 된 거죠. 한국의 종교는 상생적이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지만, 서구적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못 살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종교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은 종교 전쟁이 없어요.
다석은 기독교를 넘어선 사람이죠. 한국 종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국적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니죠.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주장하면 얘기를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제도권 테두리 벗어났지만 예수의 제자"

-다석은 기독교 테두리의 안에 있었습니까? 밖으로 나갔습니까?

“기독교의 제도권 테두리는 벗어났으나 예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도를 따라간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김흥호 목사의 계보냐는 질문을 한 것이라면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나는 어떠한 계보도 없습니다.”

-해방 후 신학은 ‘신학 오퍼상’들이 들여온 ‘수입신학’ ‘번역신학’의 천국이었다고 서술했더군요.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보다 앞섰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건 학자로서, 제 범위를 벗어나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교육에서 교재와 같은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유동식 교수가 한국 신학의 광맥으로 감신대의 정경옥(자유주의), 총신대의 박형룡(보수주의), 한신대의 김재준(진보주의) 교수를 꼽았습니다. 셋 다 모두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형룡과 김재준 두 분은 장로교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정경옥은 시카고에 있는 개럿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분들이 미국에서 잠깐(2~5년) 배운 걸 한국에 수입해서 가르친 거죠. 그러니까 한국 신학의 광맥은 서구 신학, 특히 미국 신학이 뿌리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서구 신학은 서구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신앙 고백이죠.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에 신학의 광맥은 그게 다일 수 없지요. 신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느낀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자기의 이해와 통찰을 체계화한 것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한국신학의 광맥은 오히려 다석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신학 공부를 40년 했는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총체적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지 않더라도 제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한국의 자생적 신학을 한 대표적인 분으로 단연 류영모를 꼽겠습니다.”


김흡영 교수(왼쪽)와 대담하는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의 좌우명인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 중에서 일인(一仁)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인이 늘상 걷는 것이라는 해석은 누구한테 나온 것인지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김 교수의 저서 ‘가온찍기’에서는 십자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서의 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적 행위를 통해 인을 실현한 것에서 다석은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는데요. 이것이 일인의 해석에 더 적합해 보이는데요. 다석은 동광원 강의에서는 ‘성언 인’이라고 했어요.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한문처럼 여러 의미를 가지는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독특한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요. 한 신학자가 하버드에서 내 논문을 가지고 발표를 했는데 한국어를 전공한 한 참석자가 한글은 표음문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석하냐고 질문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석은 표음(表音)문자를 표의(表意)문자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동광원 강의에서 ‘성’은 몸이 성하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비하하는 건 다석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석의 사유에 있어선 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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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석의 숨신학과 몸신학은 선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참선 같은 인상을 줍니다. 다석의 숨신학 몸신학은 선도(仙道)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그리고 몸신학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A: “우선 ‘몸신학’ ‘숨신학’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독자들도 가끔 혼란스러워 하는데, 이 용어는 다석이 아니라 제가 창안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석을 선도 수행자로 보는 입장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흥호 목사는 스스로 호흡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선도 수행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다석의 글을 읽으면 머리에 잘 들어와요. 그렇지만 수행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국선도에서는 3가지 기본적인 수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신(調身), 둘째는 조심(調心), 셋째는 조식(調息)입니다. 조신은 몸을 성히, 조심은 마음을, 조식은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다석이 바탈을 닦는다고 말씀하실 때 단전호흡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선도 수련에 중요한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말은 성(후천의 바탈)과 명(선천의 몸과 숨)을 동시에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선도는 성명쌍수 중 성의 수련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석 사상을 말할 때 보통 성 수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 수련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의 핵심 사상인 ‘빈탕한데 맞혀놀이’하늘의 움직임과 내 숨과 몸의 움직임이 공명(율려)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을 이해하려면 선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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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흡영 교수 약력>
-1949년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1년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1972년~73년 대한항공 근무
-1973년~83년 대우, 삼화 등 종합상사 해외주재원 근무
-1986년~87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 교역학 석사
-1992년 GTU 철학 박사(신학 및 종교철학)
-1993년~2014년 강남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
-1997년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2002년~ 세계종교과학학술원(ISSR) 창립정회원
-2005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
-2006년~2012년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총회 공동의장
-2007년~2008년 일본 도시샤 대학 ‘유일신 종교 학제간연구소’ 등 선임연구원
-2012년~2013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2020년~ 예일대학 종교와 생태포럼 자문위원
-저서로는 <道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道의 신학Ⅱ)(2012) <가온찍기>(2013) <왕양명과 칼 바르트>(2020) 등 영문 25권, 국문 14권이 있고 논문은 58편 이상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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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짜기 정신에서 세계 사상 나온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10 16:28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⑧ 김흡영 교수<下>

조선 사회는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산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사회가 됐다. 유학의 지나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결국 조선 유교사회를 멸망시켰다고 김흡영 교수는 <가온찍기>에서 지적한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조선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까지도 불교 신앙에 의지했다. 조선은 국방의 중요 부문을 사찰과 승려에 의존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유교 불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서 나왔다. 북한의 김일성교를 종교로 분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멸종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이 과잉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본 주제입니다. 저는 이걸 골짜기 멘탈리티(mentality·사고방식)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골짜기 사람들이라 처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대신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합니다. 세계에서 불교나 유교나 한국처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중국도 불경 원전이 없어져서 한국에 와서 원전을 받아간 적이 있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중국엔 유교적 제사 같은 것이 사라져서 한국에서 배워갔죠. 한국의 이데올로기도 공산주의 자본주의 둘 다 원형에 가깝죠. 그런데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올 때부터 근본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도 골짜기 멘탈리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을 읽어보면 6장에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Mysterious Female(신비로운 여신)로 번역을 하지요. 이 현빈의 문이 천지만물의 근본이지요. 사실 모든 게 골짜기에서 시작하거든요. 사람도 현빈의 골짜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골짜기가 모든 것의 시작, 시원(始源)이에요(김 교수는 始源을 字로 쓰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라보면 한반도가 세계의 골짜기라고 볼 수 있죠. 다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살리는 사상과 영성은 한반도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흡영 교수가 소수서원 취한대를 찾았다. 그의 고향인 무섬마을은 여기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다. [사진=경향신문 제공]
 
-류영모 신학은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다석사상의 대중화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웃음) 지금 이 질문이 다석의 제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참 치열하게 다석을 따라서 일일일식(一日一食)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석의 윤리와 일상은 몸서리치도록 치열합니다. 나도 몇 년 일식을 해봤는데, 나는 좋지만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해요. 내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아내와 자식이 신경 쓰기 시작해요. 밥 먹을 때와 배고플 때는 표정부터 다르니까…. 나는 도를 닦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배가 고플 땐 강의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물론 제가 도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석은 귀한 도인이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율배반적이에요. 그분이 ‘빈탕한데’ 즉 텅빈 데를 주장하신 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꽉 차 있거든요. 누가 들어설 틈이 없어요. 말은 ‘비워 두라’고 하지만 꽉 찬, 그래서 사실 몸과 이웃이 품어지는 공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는 그런 의문도 가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몸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생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는 여기서 다석의 큰아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석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버클리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다석 자료를 찾고 있으니까 그분이 관심을 표시하더라고요. 자기가 다석은 직접 못 만났지만 다석의 아들과 교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석의 아들이 워싱턴에 살 때 은퇴하고 세상을 뜰 때까지 거의 매일 워싱턴 대학 도서관에 나오셨대요. 그분은 언어에 천재적이었답니다. 대학을 안 나왔는데도 박사과정의 한국인 학생들을 많이 도와줬대요. 다석 어른의 고집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대학자가 될 만한 소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대학의 도서관에 앉아서 소일 삼아 후학들을 도와준 거죠.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다석이 우수한 아들에게 기회를 안 준 거죠. 과연 그런 교육이 옳은 것인가. 그러한 태도가 다석 사상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후학들은 그걸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석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아들 의상은 해방 후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6·25 전쟁이 나자 일본 맥아더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공문을 번역하고 미군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을 했다. 의상은 휴전 회담을 할 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을 만큼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김흡영 교수의 글에 나오는 다석의 아들은 의상이다. 둘째 자상은 평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벌을 치고 젖양을 길렀다. 다석은 여름 8월 한달 동안 YMCA 강의가 쉬는 때면 매년 둘째 아들네 평창 농장에 갔다. 다석 부부와 자상의 묘소가 평창에 있다. 셋째 각상은 무선통신사를 하다 일본 여인과 결혼해 일본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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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수행 중시한 다석 사상, 몸과 얼 이원론으로 나눠선 안돼

-그리스도교 신학이 종교개혁 이후 말과 글 중심으로 환원되어 몸을 망각했다고 ‘가온 찍기’ 책에 썼는데요. 서양 기독교사에서 종교개혁 이전 중세에는 실천수행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중세까지는 수도원에서 몸을 쓰는 그런 수행 전통이 있었죠. 제도권과 수도원은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제도권은 항상 부패하게 되고 그러면 기도원 운동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새로워지는 식이죠. 루터가 위대한 종교개혁 사상을 펼쳤는데, 내가 보기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독이 되기도 했어요.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이 개인보다는 교회와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든요.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Coram Deo)을 신학의 핵심으로 본 점은 엄청나지만, 개인주의적이고 영혼 중심주의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몸이 날아가 버렸죠. 나라는 것은 영혼일 뿐만 아니라 천지인 중에 몸과 함께 연결된 ‘점’입니다. 천지인이라는 큰 맥락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온찍기입니다. 그걸 분명히 해준 이가 다석이죠. 과거의 기독교에선 그러한 몸 수행이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상당히 약화했고 그것을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다석의 통찰이 굉장히 유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석은 요가 체조 등을 통해 몸을 단련했다. 그 때문인지 하루 한 끼만 먹고서도 91세까지 장수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워가 다석의 인간론, 몸신학의 핵심이라고 했는데요, 모든 경전이 이 세 가지의 가르침에 수렴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다석 몸신학을 요점만 쉽게 설명해보세요.

“몸을 성하게 한다는 것은 ‘참몸’을 만드는 거죠. 체조를 통해서. 다석이 체조(體操)라고 했어요. ‘맘놓이’는 정조(情操)라고 하세요. 참마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죠. ‘바탈태워’는 지조(志操)라고 하셨어요. 의지, 바탈을 닦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몸 고르기(調身), 마음 고르기(調心), 숨고르기(調息)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분의 ‘성명쌍수(性命雙修)'에서 성을 고르는 것(바탈태워)만 볼 게 아니라 몸과 숨을 연마해서 명을 고르는 게(몸성히, 맘놓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바울이 예배의 최고의 경지는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라고 했어요(로마서 12장 1절). 다석이 그것을 기독자(基督者)라는 한시로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내 몸이 숨을 쉬는 게 기도다. 기도란 생명의 원기인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쉬는 것이라 했죠. 찬미반주건맥박은 성가대가 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뿐 아니라 내 맥박이 뚝딱 뛰는 게 찬미반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몸신학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몸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얼나로 나아가는 것이 다석의 핵심이라고 하면 틀리진 않았지만, 몸의 중요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나가 곧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기적인 나’라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몸을 비하하고, 정신에 비해 육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서구 이원론에 맞닿게 될까 우려됩니다. 주역을 공부해보면 지천태(地天泰)라는 괘가 나옵니다.
  지천태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삽니다. 하늘은 빛을 아래로 비추고 땅은 물을 올려주어야 합니다(水昇火降). 그래야 나무와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땅이고 얼은 하늘이죠. 성명(性命) 수행은 얼이 내려가고 몸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죠. 혼(얼)은 올라가고 몸이 내려가면 혼비백산이란 말 그대로 되는 파멸의 길입니다. 몸은 필요 없고 정신만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적 문제는 어떻게 몸인 지구를 회복시키는가에 있어요. 우리의 몸을 살리자면 어떻게 독을 빼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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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공지능이 나오고 코로나도 뛰쳐나왔습니다. 이 골치 아픈 몸을 없애고 수퍼 머신 바디(body)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첨단 기술에 의해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인간 이후의 존재자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을 예고하는 시대입니다. ‘영생을 꿈꾸는 초지성이 되어야 한다’ ‘몸을 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종교와 인류가 처한 최대 난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나’ ‘얼나’로 구분해 따지고 있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거죠.

생태계 파괴한 근거 제공한 기독교 자성 나와야

-다석의 한글 놀이는 재밌지만 어렵습니다. 그의 한글신학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창제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다석의 한글 사랑에 대한 김흥호의 해설을 읽다보면 구약에 나오는 유태인의 선민(選民)사상을 닮은 것 같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하나님의 글이요. 정음은 복음이다. 한글만으로도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저도 다석 선생님의 한글놀이를 ‘참 재밌다’ ‘오묘하다’ ‘어떻게 이분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무릎을 칩니다. 기가 막힌 용어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한글을 다시 창제한 거죠. 다석의 한글 사용을 훈민정음 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어의 단어도 시대에 따라 바뀌지요. 다석이 한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묘하게도 한글은 철저하게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이버 시대에 가장 잘 통용할 수 있는 글자라고 볼 수 있죠. 한글엔 틀림없이 그런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신 글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석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결국 철학 신학 특히 인문학은 언어의 싸움입니다. 현대의 대표적 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철학을 독일어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깊은 통찰, 철학, 사상을 알려면 먼저 우리의 언어의 지평으로 들어와라, 그러고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를 배우려면 독일어를 열심히 하고, 독일어 안에 들어가서 그 어원을 찾아내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하는 정도까지 갑니다. 다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생태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성경에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자연파괴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를 비롯한 어려운 위기를 가져온 종교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20세기 중반부터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생태신학은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서구와 세계를 지배한 로고스 신학은 철저하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몸과 자연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도(道)의 신학을 주장해왔습니다. 정신 중심의 로고스 신학에서 몸과 자연 친화적인 도의 신학으로 모형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여성의 소중함을 복구하고 생태계를 복구해야 한다는 것을 에코 페미니즘(eco feminism)이라고 합니다. 생태의 위기를 맞아 서양에서 내놓은 가장 유력한 신학이고 사상인데, 아직도 서양의 이원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 사상이나 태극 사상은 상극을 넘어 상생을 주장해왔습니다. 생태신학에 다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나 얼나로, 몸과 얼을 갈라놓으면 다석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혼 중심적인 사유체계에서 몸과 숨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다석 사상에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꾸로 몸과 얼을 자꾸 구분하려 드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염통 노래' '밥통 노래'는 왜 했겠습니까? 염통을 바라보면서, 염통이 몸에서 하는 무언가를 보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몸으로 수행하며 하는 얘기거든요. 몸통 노래, 밥통 노래를 이야기하는 분을 두고 몸과 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이죠. 숨도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목숨, 말숨, 우숨으로 나뉘거든요. 그의 사상은 결국 몸과 숨으로 말과 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말과 글의 신앙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본래 신앙은 말을 넘어서 몸으로, 글을 넘어서 숨으로 하는 차원의 신앙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생태신학의 경우 몸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숨이라는 걸 모릅니다. 숨이 사실 가장 중요한데, 숨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기계 인간이 되고 인간이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 사이버 세계와 기계인간이 인간과 다른 점은 몸과 숨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 아시죠? 게임을 할 때 자기 아바타 속에 들어가버려요. 아바타와 자기를 분리하지 못해요. 그건 고치기 힘든 병이 되어버립니다. 아바타는 몸과 숨이 없거든요. 그러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성의 비밀이 몸과 숨에 있는데, 그걸 몸과 얼로 나누기 시작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책에서 다석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시기적으로 언제쯤입니까. 다석도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부활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예수가 신격화하면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던데요.

”동광원 마지막 강의 같은 것을 들으면, 분명히 그분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성육신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평신도들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느라 그런지 모르지만 그 자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미국의 동양계 신학교육자들이 유교예절 교육을 받았다. [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다석은 “예수의 재림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고 정말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따라 자기의 생명완성에 정진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다석은 예수의 재림에 부정적이었나요?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얘기하면서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석도 예수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의 문제는 어느 신학자도 다 고민하는 거예요. 재림이 있다고 하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값싼 은총을 믿는 사람들에겐 굿 뉴스지요. 그러나 이미 천당 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윤리와 도덕을 간과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큰 것이죠.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도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재림의 문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의 도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지,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싸구려 신앙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제목인 가온찍기를 쉽게 설명하면….

"‘가온찍기’라는 건, 기역은 하늘, 니은은 땅이고. 그 사이 ‘아래 아’는 천지인의 자리 속에서 자기의 참 자리를 찾아서 찍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천지인이라는 연결망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내는 거죠.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하나님)과 땅(자연), 그리고 나의 관계성 속에서 통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나’라는, 즉 ‘참나’를 찾는 것부터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웃음)”

“어려운 얘기지만 쉽게 얘기하겠다”고 해놓고 더 어려워진 것 같다.

-학자로서 앞으로 구상을 말해주기 바랍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서울에 있습니다만 봄이 되면 다시 서울과 영주를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신학자로서 한국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과거와 단절되었거든요. 우리의 과거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변화 같은 것도 과학기술을 통해 또 해결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 시대에 우리의 신앙, 종교, 영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다석의 통찰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국내에서 도의 신학을 대중화하고 또 세계로 나아가 도의 신학 및 몸과 숨의 영성을 가지고 죽어가는 지구촌을 살리는 영성의 자료로써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는 “다석이라는 선지자는 내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도(道)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광맥의 하나”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9-⑩ 심중식 소장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 아주경제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24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17 17:09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⑨ 심중식 소장<上>

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은 1946년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종의 자취를 찾아 화순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공이 작고한 지 몇 년 뒤였다. 현 총무는 세계의 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다석과 현 총무를 광주역으로 이현필(1913~1964)이 마중 나갔다.
이현필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발생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25 전쟁 중에는 600여 고아들을 보살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거두어 주었다.
이현필과 마더 테레사(1910~1997)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 동안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살았다. 이현필은 가톨릭 같은 교회나 조직의 지원도 없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길을 다니다 벌레를 밟아 죽일까 염려해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의 불(不)살생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비슷한 삶의 자세였다.
다석은 당대에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식인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현필은 변변한 학력이 없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진리를 구하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식색(食色)을 초월하여 절대이신 하나님만을 모시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우리말로 처음 고쳐 부른 사람도 다석이다.

食色을 초월하는 하루 한끼와 해혼(解婚)

벽제 계명산 앵무봉 골짜기에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움막이 있었다. 1956년 현 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 수녀와 함께 수도처를 개척했다. 수녀 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녀골이라고 불렀다. 이현필은 1964년 52살 때 광주에서 이곳을 찾아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벽제 동광원은 다석이 살던 구기동에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석은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다석은 가끔 이곳에 와서 동광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도 하고, 예배도 보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도 벽제리 웃골에 살았다. 다석은 벽제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정재용의 집을 찾았다.
동광원, 귀일원, 귀일사상연구소 등은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자매 기관이다. 현재(鉉齋) 김흥호 목사가 다석의 뒤를 이어 동광원 수양회 강사를 하다 2002년 경부터 나이가 들어 그만두면서 심중식 귀일사상연구소장이 강사를 맡았다. 현재는 다석이 아끼는 제자인 김 목사에게 내려준 호다.

-이현필 성인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나중에 부부관계를 끊는 해혼을 했습니다. 금욕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현필 선생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사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신극기의 삶을 사셨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죠. 전쟁 통에는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연명했습니다. 내가 안 먹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지 않겠는가, 그런 자비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였지 자기학대는 아니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은 귀일(歸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다석이 1955년 6월 2일에 쓴 일지를 보면 귀일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統一爲言 人間譌 (통일위언 인간와)
歸一成言 天道誠 (귀일성언 천도성)

한시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죠. ‘통일(統一)을 이루겠다 떠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짓이다. 귀일(歸一)하여 말씀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요, 진실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하겠다고 야단을 쳤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우면서 계속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6·25 전쟁 3년 동안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다석은 정치지도자들이 떠드는 통일이란 말을 싫어했습니다. 다 제 욕심에서 나온 통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여 무아(無我)가 되어 진리이신 한 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에 순종하는 통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귀일의 의미가 다석과 이현필에 의해서 기독교식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적 사회원리로 확장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선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법화경에 일승(一乘)을 설명하면서 ‘회삼귀일(會三歸一 ·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통일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 현실을 놓고 나온 정치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은 통일을 말하지 말고 귀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진실이 되면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전쟁이 부른 참화

이현필은 말년에 정인세 원장에게 ‘귀일원을 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귀일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영혼이 없는 그런 민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일원은 현재 약 150여명의 장애인들과 50여명의 직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직원들 가운데 동광원 출신은 거의 은퇴하고 수녀님들 몇 분이 함께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다. 심 소장은 귀일원의 천사 복은남 수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 수녀는 이현필의 초기 제자로 여러 언님(다석이 만든 말로 동광원에서는 수사 수녀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따랐다.
“복 수녀는 귀일원에서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며 생활했는데 언제나 그 얼굴이 화평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맡은 환우 중에 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24시간 누워 지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우의 얼굴이 항상 밝아 차츰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환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한 천사의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복은남 수녀였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그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조금이라도 환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일어나서 수발했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과 목욕, 자세를 돌려주고 옷 갈아입히고 세수를 시켜주고 온종일 쉴 새 없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한결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자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복 수녀에게 ‘얼마나 힘드시냐’고 물으면 “힘들다니요?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있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이지만 지금까지 쇠창살 자물쇠 등의 격리시설이나 통제 없이 한 가족이 되어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저절로 동화되고 치유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성과 영적 감화의 능력이 대대로 축적되어 흐르는 곳이 귀일원이라 하겠습니다.”



이현필 묘소 앞에서 대담하는 심중식소장(왼쪽)과 인터뷰어.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 신앙공동체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와 불치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동광원은 1965년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귀일원에서 정신장애 및 지체장애인들을 보살피던 언님들이 정년 퇴임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남원시 대산면에 새로 터를 닦아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이 현재의 남원 동광원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세운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복지 봉사 기관이다. 2010년부터 귀일원에서 귀일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귀일사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과 <씨알의 소리>에 접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지요. 그러다 방향을 전환해 1981년부터 현재를 찾아가 다석을 공부하고 실존적 신앙을 배우게 됐다면서요?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시절과 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남과 경쟁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몇몇 동아리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시작으로 역사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서 몇 번 데모를 하고 친구들을 따라 함 선생 집회에 참석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재 타도! 민주평화통일 만세!’ 라고 외치지만 저에게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처음으로 실존적 물음을 해보면서 내 자신이 백지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를 알고 싶어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함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고 동양 경전들을 읽어보고 김태길 교수님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18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만난 분이 현재였습니다. 현재가 이끄는 이화여대 연경반(硏經班)에 처음 참석했을 때 선생은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종교철학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고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하루 한끼를 먹으며 세속을 초탈한 도인같은 느낌이 들고 동양경전과 성경을 새롭게 그리고 쉽게, 깊은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을 보고 차츰 말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고 일식(一食)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참 스승을 모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독특한 해석이 제게 천둥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울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요한 사상으로 기독교를 다시 살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이야말로 동양인을 위한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어떻게 동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연경반에서 현재는 다석뿐 아니라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에 대해 가끔 말했습니다. 1985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전기를 읽었습니다. 엄두섭 목사가 1977년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도 봤습니다. 현재는 다석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이현필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옷 속에 있던 이가 소매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을 잡아서 너도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집어넣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YMCA 화장실이 아주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는데 이 선생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께서 직접 또는 제자를 시켜 계속 청소하고 관리를 하니까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가장 척박한 땅을 가장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동광원 사람들이라고 김흥호 선생은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제 동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동광원 간판이 없었습니다. 허름한 토담집들이 두어 채 있는데 거기가 동광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재가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현재가 동광원 수양회에서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찾아오기 힘들다고 하자 동광원 사람들이 제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내가 처음으로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석, 현재,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3대(代) 강사라 할까요. ”

-현재의 강의를 녹취 편집해 주역, 원각경, 양명학, 법화경, 화엄경 강해를 펴냈는데요.

“1981년 현재의 이화여대 연경반에 출석하면서 종교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석이 52세에 중생(重生) 체험을 했다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 현재는 35세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체험일까.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나 모두 거듭남의 체험을 가졌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현재는 늘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듣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의 말씀이 점점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깊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거의 다 알아듣는가 싶었지만 그게 곧바로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될 수 있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현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배우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댁으로 모셔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1992년 5월 5일 새벽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동광원 옆에 있는 현동완 YMCA 총무의 기도터. [사진=황호택]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2009.03.12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
입력 2009.03.12

하루 한 끼만 먹고, 항상 걸어 다녔으며,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잔 다석 유영모(1890~1981)는 함석헌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는 드물다. 유불선과 기독교 등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두루 회통한 그의 정신세계는 대단히 넓고 깊다.

현대적 의미의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 해석되기도 하다. 그에 대한 연구는 소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왔고, 학계에서는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를 통해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됐을 뿐이다.

토착 신학을 연구해온 이정배 감리교신학대 교수가 유영모의 신학세계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사람들 발행)을 냈다.

"오늘의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기독교의 길이 다석 신학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 교수는 위기에 빠진 한국기독교가 다시 소생하려면 함석헌, 김교신, 김재준, 이용도와 같은 초기 지도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사상적 원점이 유영모라고 말했다.

"유영모는 가장 한국적인 정신의 맥을 갖고 기독교를 이해한 분입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한국기독교는 성장, 물량화, 기복 위주의 가벼운 기독교가 되기 이전의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유영모에 대한 이해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의 사상이 한국적일 뿐만 아니라 충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이기 때문에 유영모는 한국이나 동양의 신학자가 아니라 세계의 신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영모가 말하는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사유방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서구의 존재론이니 실체론의 사상적 틀과는 완전히 다르며, 불교의 공(空)의 논리와 만납니다. 그런 하느님이 인간 삶의 밑둥, 본성 속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다석신학의 본질이 서구신학의 최근 경향에 견줄 수 있는 선진적인 것이라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요즘 목사나 신부들 가운데 예수를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영모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덜 없는 인간'은 유영모의 인간 이해다. 인간도 '없어야' 하는데 '아직 덜 없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유영모의 사상을 다산 정약용에서 시작되는 유교적 기독론의 맥락이나 역사적 예수 연구, 동학과도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유영모는 순수 우리말로 철학을 한 분인데, 경전 전문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은 '노자'와 '천부경'뿐입니다. 천부경이 다석 사상의 근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교수는 과거의 유영모에 대한 이해는 소수의 추종자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종교적 사고의 근거로 유영모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유영모는 기독교 신자가 된 지 38년째 되던 해에 불교 선승들의 오도송에 해당하는 오도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작곡가 조병옥씨가 20년 전 이 오도시에 곡을 붙여 부른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가 이 교수의 책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됐다.

"지난해 10월 서울 장충동의 대안교회인 겨자씨공동체에서 유영모에 대해 설교를 하는 날, 마침 조씨가 이 곡을 알려주려고 악보를 가져왔습니다. 특별한 인연에 매우 놀랐습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유영모는 교회 밖의 인물로 그려졌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적인 인물로 이야기할 때 그로부터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최성무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아주경제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31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최성무<上>

최성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는 목회할 적에 교회 통장 갖지 말라 했어요. 누군가에게 가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돈이 교회 통장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교회가 통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날 필요한 것 그날 구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말씀을 믿든지 장사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요.
나는 교회 초창기부터 통장을 갖지 않았어요. 헌금을 놔두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했어요. 그 돈을 써서 돈을 벌면 다시 가져다 집어넣도록 했죠. 그럼 다음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지요. 그래서 저축할 겨를이 없었죠.”

-목사들은 하느님한테 십일조를 내는데요. 국가에 또 세금을 내야 하는 겁니까?

“호주에서도 세금을 냅니다. 목회자들은 돈으로부터 해방돼야 합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서 설교를 합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요. 통장에 돈이 있는데, 돈 없어 헤매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19세기 말에야 기독교가 전파된 한국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도수가 많고 특히 여성 신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국에는 예부터 내려온 전통신앙이 있지요. 샤머니즘의 근간은 ‘믿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할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한울님한테 빌잖아요. 한울님이 하느님으로 바뀌는 것은 쉽잖아요. 이런 전통적 신앙이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여성 해방운동과 직결되었습니다. 기독교만큼 여성 해방운동을 장려한 곳이 없었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여자 성도가 주류를 이루고,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여성도가 다 하죠.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도회가 부흥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여성 신분 상승에도 기여한 바가 있지요. 기독교 덕분에 우리 사회에 생긴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기독교에 개혁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최성무 목사 약력>
-1947년생
-1966년 춘천고 중퇴
-1967~71년 단국대 사학과(야간)
-1973~75년 고려대 교육대학원(석사과정 2년 수료)
-1973~1983년 용산고교 등 서울시 고교교사 역임
-1998~2000년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
-2001~2002년 Epping Christian church 부목(연수)
-2003년 목사안수(Assembles of god in Australia)
-2003~2015년 한인에핑교회 체스터힐교회 한우리교회 한가정교회 크리스챤라이프센타 One familyworld church 등 교회 개척하고 2년 후 사임(개척목사)
-2012~2013년 시드니 한의대 수학
-현 여의도 다석연구회 대표회원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 교계 < 소식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 교계 < 소식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기자명 코닷   입력 2007.05.12 

도올 토론회에서 김광식 교수의 공격에 발끈
 


▲ 토론회 모습 EBS 요한복음 강좌와 “기독교 성서의 이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기존과 다른 성경 해석을 제기해 기독교계 안팎에 파문을 빚어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한국 조직신학회(회장 이정배 교수) 주최로 한국 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공개 토론회를 가졌다. 

2007년 5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1,2층 홀은 신학토론회가 시작된 오후 3시 전 이미 방청객 900여명으로(좌석 수 820) 복도까지 가득 차 출입문을 봉쇄해야 할 정도였다. 이 날 사회는 
  •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인 이정배교수(감신대), 
  • 토론자엔 도올 김용옥 교수, 
  • 김광식 교수(전 연세대, 협성대 전 총장),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 
  • 김준우 교수(감신대), 
  • 김은규 교수(성공회대)가 참여하였다. 
  • ▲ 인사하는 신학계 원로 유동식(85) 전 연세대 교수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 인사를 한 신학계 원로 유동식(85) 전 연세대 교수는 “반평생 넘게 신학토론회를 다녀봤지만 이런 토론회도 처음이고 또한 대단한 열기도 처음 본다”고 놀라워했다. 

토론에선 그동안 교계에서 금기시된 쟁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김광식 교수 /전 연세대, 협성대 전 총장 싹둑 복음 공방 

도올이 먼저 자신의 주장을 발제하자 원로 신학자 김광식 교수가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김 박사는 ‘믿음’보다는 ‘이해’를 강조하는 도올의 주장에 자신은 현재 기도원에서 설교자로 있다면서 “설교자의 목적은 신자들을 지혜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는 데 있다”며 “ 도올의 주장은 독일의 칸트와 18~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도올이 말하는 것은 짝퉁이고, 다시 한 번 더 보니 싹둑 잘라내어 버리는 ‘싹둑 복음’이다”라고 공격했다. 
▲ 도올 김용옥 교수

이에 도올은 특유의 날을 세우면서 “김 교수와 같은 생각이 교회를 망쳤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에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신학 체계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또 주입식의 방법으로 억압할 수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서 건물만 지으니 교회가 공동화되어 간다고 공격했다.


그는 “이제는 여러 신학적 담론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올은 “‘역사적 예수’도 ‘이것’이라고 한마디로 얘기(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제 말을 ‘싹둑 복음’이라면서 왜 저라는 사람을 (다른 면들은) 싹둑 잘라버리고 규정해버리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이 발언은 취소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 김경재교수 /한신대 명예교수 

인간과 신성 토론은 ‘인간과 신성(神性)’을 둘러싼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신이 33년간 (인간의) 몸으로 살다가 본래로 돌아갔다고만 하는데, 그것은 고대엔 흔해 빠진 논리였다”며 “다른 인간과 달리 예수만이 신의 화육(몸을 빌려 옴)이라는 교리가 예수에 대한 이질감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러자 김광식 교수는 “그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김경재 교수의 주장에 이의를 달았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김준우 교수는 "'요한복음'이 예수가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가르친 '예수에 관한' 복음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 김준우 교수 /감신대

이에 도올은 “저도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다 100%씩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예수뿐 아니라 인간도 100%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인격체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하나님이이서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100%로 본다. 그런 진보적인 측면까지 해석하지 않는다면 신학자가 아니며, 솔직히 말해 그런 것을 수용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다”며 김경재 교수 편에 섰다. 
 

김은규 교수는 "기독교가 초기에 정경(4대 복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더욱 탄력적인 기독교로 발전해 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도울 선생은 성서주의.정통주의를 강조한다. 그 자체도 사고의 틀에 갇힌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용옥 교수는 "불교는 정경과 외경 없이 대장경이란 틀 속에 모두를 수용했다. 기독교도 만약 그런 폭 넓은 수용틀을 마련했다면 더욱 풍부한 기독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 김은규교수 /성공회대 

구약 폐기론에서 구약주의 폐기론으로 후퇴 구약 폐기론이 불거지자 도올은 자신은 구약 폐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구약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후퇴하였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자신은 그것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사회자 이정배 교수 /감신대
 

정리(이정배 교수)

이정배 교수는 이 토론회를 마치면서 도올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1. 구약폐기가 아니라 화석화된 율법주의에 대한 폐기를 주장한 것이다.

2. 신약성서의 정경화 문제에서 도올은 “성서 안에 해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성서에서 해방 시켜라”고 주장한 것이다.

3. 요한복음 강좌에서 로고스 기독론을 언급하는 가운데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던 기독교가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새롭게 부각 시켜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이 신이 되는 가능성이다.

4.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에 관하여 실체론적 틀 속에서 이해되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도올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리고 토론회의 입장과 도올의 발제문은 아래에 따로 올려 드립니다. 또한 한겨레에서 낸 동영상을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참고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일명 한국적 신학에 대한 단상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05.19 17:44


며칠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 생각을 나누었다. 모두들 학위를 마친 학자들이었지만 옛적 내가 그랬듯이 신학교 틀에 갇혀있거나 목회현장에서 적응하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하 내용을 나누고 돌아설 때 이구동성으로 신학함에 있어 ‘얼’이 모처럼 다시 깨어났다고 토로 했으니 이후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삶이 어려운 탓이겠지만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자들 영혼의 크기가 작아지는 현실을 우리는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의 언어가 쓸모없어 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용지용, 쓸모없는 쓸모로서의 신학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이 토착화 신학의 근거라 할 때 이 신학 전통 속에 몸담은 우리의 삶 역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 1 >

필자는 본래 영락교회 출신이며 그 재단 소속 학교인 대광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을 끝내고 친구따라 작은 감리교회로 이적했으며 그곳서 만난 큰 목사(장기천)님 덕에 감신에 입학했고 치구지간인 일아 변선환 선생을 사사했다. 자연스럽게 토착화 신학 전통을 배웠고 기독교와 유학의 대화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마친후 30년을 모교에서 가르쳤으며 4년 반 전 명예퇴직을 했다.

2020년 8월이 되면 만 65세가 되어 정년은퇴 시점이 될 것 인바 이제 서야 비로소 은퇴를 실감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나의 신학적 과제를 짧게 서술할 것이다. 이후 긴 글로 다시 쓰여 질 것을 기대하며 스승의 날 찾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 속내를 짧게나마 내비쳐 보겠다.

< 2 >

사실 명퇴를 작정하기 몇 년 전부터 나의 신학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고 ‘생명평화 마당’을 통해 ‘작은교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자타가 이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직 중 필자는 탁사 최병헌에게서 시작되었고 윤성범을 거쳐 변선환에게서 꽃피운 토착화 신학 전통을 잇고자 애썼다.

▲ 한국적 혹은 토착화 신학을 추구했던 유영모·윤성범·변선환(사진 왼쪽부터)


토착화 2세대란 평을 들었으며 제자들을 그 3세대로 키우기 위해 때론 민중신학과 토론하고 민족개념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나름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학을 비롯하여 유·불·선 동양 종교와 문화들을 연구했고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극복하고자 일아 선생처럼 그렇게 서구 종교다원주의 사조를 방편 삼았다. 기독교의 배타적 ‘오직(only)’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출현한 다원주의 신학사조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거기에 머물지 않았으며 근간에 있어 이들과 같을 수 없었다. 토착(뿌리내림)을 넘어 항시 토발(솟구침)을 꿈꾼 까닭이다. 토착이란 말 탓에 종종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할지라도 토착화를 수동적 개념으로 서구 다원주의 신학의 아류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서구신학은 어떤 것이든지 각주일 뿐 본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필자는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변별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했고 그 실상을 여러 곳에서 밝혀 놓았다. 다석 연구자들 간 견해차가 생긴 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교회와 대학 그리고 사회, 어느 곳에 발 딛고 서있는 가에 따라 담론의 무게중심이 달라졌을 듯싶다.

< 3 >

어느 순간 필자 역시도 기존 토착화 전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과거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민족 주체성을 일깨워 주었으나 정작 정치적 보수성에 고개를 좌우로 내 저어야 했다. 선배 신학자들의 무색무취한 정칙성향, 이에 더해 태극기 부대에 편승하며 가짜뉴스를 진실처럼 매개하는 이들의 적극적(?) 역할마저 목도했던 까닭이다.

▲ 박순경 교수


기존 토착화 스승들, 소위 문화신학자들이 종교해방신학자 변선환 이전으로의 퇴행한 결과였다. 이로써 예전부터 언급된 것이지만 감리교 내 토착화, 문화신학 전통의 한계가 분명해 졌다. 이는 자신들 속에 자유(문화)주의 전통 뿐 아니라 진보성, 곧 사회주의 유산이 있었음을 잊은 자업자득이었다.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창준 그리고 전덕기를 중심한 독립 세력들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후 장기천 감독이 NCCK를 통해 그 뜻을 펼쳤고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연구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필자가 세월호를 비롯하여 4.27 판문점 선언에 생각을 보탠 것도 그리고 5.18, 40주년 행사를 눈물로 지켜보며 힘을 합했던 것은 과거 전통을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가 본래 사회주의였기에 소중하다는 이들 목회자들의 주장을 폄하, 조롱한다면 자본주의에 먹힌 기독교, 감리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감신 내 한 건물 벽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모교 출신 목회자 7분 얼굴상이 걸려있다. 자진 월북한 김창준의 얼굴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한 때 팽배한 적이 있었다. 그 타협안이겠으나 김창준의 얼굴이 다른 분의 그것보다 동판에 아주 희미하게 표현된 상태로 걸려있다. 마지못해 주조되어 걸려 있는 듯이 말이다.

조만간 그의 상이 다시 또렷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사회적 실천력을 잊고 정치성을 망각한 기독교는 토착화를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토착화그 역시 반쪽 기독교의 민낯일 뿐이다. 민족의 현실과 맞닥트린 기독교, 바로 그것이 토착화의 다른 이름이어야 옳다.

< 4 >

▲ 이신 목사(1927.12.25-1981.12.17). 감리교 전통에서 기독교 환원운동에 전념하며 고독한 길을 갔다.


30년 재직하면서 아주 늦게 자각한 또 한 사조가 있다. 이는 시대를 앞선 목회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헌신의 발로였다. 기독교 주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을 뿐 이들의 공헌은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감리교 내에 ‘기독교 환원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석기, 강명석 목사 등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들이 온갖 교파를 넘어 그리스도에게로의 환원을 주창했다.

이들 사상은 의당 누혈의 목회자 이용도와 잇대어 있을 것이다. 당시는 교파적 기독교가 대세인 상황이었다. 교파에 의지하여 선교를 해야 살길이 열리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교파적 기독교가 민족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일찍 자각했다. 유학파, 감리교 목회자란 후광을 걷어차고 이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것이다.

신학자 이신 역시 감리교 전도사로 시작했으나 이들 선배를 만나 ‘훤원 운동’에 몸 담으며 고독한 길을 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 환원 운동은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겠으나 당시 이들은 이 길에 생명을 바쳤고 가족마저 희생시켰다. 우리가 토착화를 말함에 있어 이런 그리스도, 이런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과 사변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못난 짓을 해도 교회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 정신- 그것이 하느님 나라 사상이든, 묵시적 인자 사상이든 혹은 역사적 예수의 지혜이든지 간에-에 입각하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에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 5 >

이렇듯 세 사조가 공존하며 지난 백년 남짓한 한국 신학계에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저마다 어느 한 사조에 속하여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비판을 앞세우며 자기 영역에 갇혀 세월을 보냈다. 한 노학자는 이들 세 사조를 자유주의, 진보주의, 복음주의라 개념화 했지만 일리는 있되 전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뜻인 까닭이다. 지금껏 이 세 흐름과 옳게 만나지 못한 채 이들을 일개 ‘-주의’로 이해했으니 비극이다. ‘-주의’로서의 세 사조는 모두 서로를 냉대했고 함께 여성에 무지한 한계를 자체속에 노정한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 문제를 날 것으로 관심할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현실과 조우하되 그를 신학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향후 토착화는 세 흐름의 본질을 꿰뚫어 하나로 녹여내는 치열한 논리와 열정 그리고 함께하는 마음을 요구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신학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바꿀 수 없다. 신학보다 큰 담론을 말하는 학문이 없으나 누구도 신학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 현실에 가슴을 칠 일이다. 향후 교파의식 역시 필자에게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감리교 신학 속에 담겼던 세 요소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해 자신 속의 보고를 내다 버린 탓이다.

이웃종교들, 온갖 이념들이 기독교 근원과 마주할 때 모두가 하나 되는 교파 초월적 신학, 큰 기독교를 기대할 수 있겠다. 이를 필자는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그리고 이후 교회라 불렀고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에서 이런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수년전 필자가 문화신학자들과 『한류로 신학하기: K-Christianity』란 큰 책을 펴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 6 >

이보다 앞서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가 말한 3개의 ‘오직’ 교리를 달리 구성할 것을 제안했었다. 중세를 극복하여 근대를 열어젖힌 동력이었으나 근대(자본주의)와 짝하면서 이 셋이 중세의 면죄부만큼 타락했으며 시대를 타락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 필자는 근대성(자본주의)과의 투쟁을 위해 이 세 가지 ‘오직’ 교리- 믿음, 은총, 성서- 를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이라 달리 풀었다. 믿음을 고독으로, 은총을 저항으로 그리고 성서를 상상력의 보고로 달리 개념화한 것이다.

▲ 이정배·이은선 교수는 명예퇴직을 하고 강원도 횡성에서 각각 현장아카데미와 신연구소를 마련하고 토착화신학에 매진하고 있다. ⓒ한겨레 조헌 기자


떼거리 군중 속에서 신독의 삶을 구했으며 늦게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하늘 은총을 세상저항의 동력이라 여겼고 성서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상상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웃종교들과의 공존하는 세상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을 은총이라 하겠고 그리고 깊이로 침잠하는 환원의식을 고독이라 명명해도 좋겠다 여긴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담은 글을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발표한 바 있다.

< 7 >

한편 여성신학자 이은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유교) 고전에서 배운 3개의 개념인 聖(성)·性(성)·誠(성)을 갖고서 나름 치열한 토착화 작업을 수행해 왔다.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재구성, 곧 여성신학적 차원에서 토착화 논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넓게는 기독교와 인문학간의 대화의 장을 펼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학적으로 위 세 개념들은 저마다 신론, 기독론 그리고 성령에 해당된다. 이를 인문학적 언어로 풀면 통합성, 타자성 그리고 지속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세 개념들은 모두 여성적 가치들로서 역사 속 남성들에게 많이 낯설 수도 있겠다. 체화된 한국적 여성의식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종교 보편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든 것과 관계하는 존재로서, 예수는 여성이 남성의 타자이듯 신의 타자성으로, 그리고 성령은 모성을 통해 경험하듯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지속성)으로 재언표 된다.

하지만 이은선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들 각각을 종교, 정치 그리고 교육의 차원에서 설명했고 셋의 한몸 짜기를 통해 토착화 과업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으로는 성과 속의 합일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유교의 일치(대화)일 것이며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서구(미국)와 중국문명(유교)를 함께 극복하는 길이라 하겠다. 이런 작업은 역시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소개되었고 그곳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결국 앞서 말한 환원운동과 저항운동 그리고 공존능력 간의 통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셋은 필자의 개념들,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과도 짝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믿음, 은총, 성서의 인문학적 재해석이라 해도 좋겠다. 이로부터 코로나 이후 시대 기독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8 >

이상에서 토착화론에 대한 짧은 단상을 소개했다. 압축적인 글이라 질문이 적지 않을 것이며 의심도 생겨날 수도 있겠다 싶다. 수많은 내용을 덧붙인다 한들 질문이 사라질리도 없고 의심 자체가 소멸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가 주장한다고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토착화 논의는 쉽지 않고 미정고로서 존재할 뿐이다.

주지하듯 은퇴 후 필자는 이은선 교수와 함께 강원도 횡성에 <현장 아카데미>을 열었다. 지난 주 한겨레 ‘휴심정’에 소개되었듯이 중세 수도원 전통을 따라 학문과 영성 그리고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토착화 연구를 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방향에서 우리 부부는 신학적 동지로서 통합적인 토착화 신학에 전념할 생각이다. 홀로 할 수 없기에 소장학자들의 뜻 또한 모아지기를 소망한다. 이 작업을 위해 조만간 ‘한국 신(信)연구소’가 출범할 것이다.

7월 중으로 예상하는 바, 이 시점에 맞게 몇 권의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가제)와 『동북아 평화와 聖(성)·性(성)·誠(성)의 여성신학』이 이은선의 이름으로 출판될 것이며, 필자 역시 『다석의 귀일신학』을 선보일 생각이다. 노동과 영성을 위한 연구와 실천도 별도로 계획 중에 있다.

실로 ‘다른 기독교’를 절실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작업을 위해 기꺼이 우리들 남은 시간과 여력을 바칠 작정이다. 이를 위해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이 그립다. 신학마저 각자도생의 작업이 될 경우, 우리들 미래는 더욱 볼품없어 질 것이기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7월 어느 날 우리들 책 한 권이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5.18 40주년 광주 아픔을 새기며 동시에 한겨레신문 1만호 출간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에큐지에 이 글을 보낸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영모의 귀일신학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알라딘: 유영모의 귀일신학


유영모의 귀일신학 -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지은이)밀알북스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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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500쪽


책소개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재정리한 책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목차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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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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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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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바치며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룬 부분은 다석에게 그만큼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종교는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향 2020-12-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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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유영모의 귀일신학, 이정배지음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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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15일 (수) 08:05:41
최종편집 : 2020년 07월 16일 (목) 09:06:35 [조회수 :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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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유영모의 귀일신학
 

 

지은이 이정배

펴낸곳 신앙과지성사

값 30,000원

ISBN 978-89-6907-235-1 93230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내며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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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현암사, 1990)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강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歸一神學)으로 바꿔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서구와 변별된 차원에서‘ 귀일’이란 말에서 찾곤 했으나 아직까지 이 주제를 사용한 책이 출판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다석이 구술한『 다석강의』가『 귀일신학』이란 이차적 언어를 갖고서 재탄생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귀일’이란 말도 다석이 즐겨 쓰던 용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귀일신학』이란 제목은 필자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귀일신학』 속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을 통해 필자는 다석 사상의 출처 및 세계사적 의미를 밝혔고 귀일신학의 핵심을 서술했다. 이는 오로지『 다석강의』를 엮어 펴냈던 다석학회 회원들, 특히 앞서 다석의 생각을 밝혀준 박영호 선생님, 정양모 신부님의 덕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여 두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과『 빈팅한데 맞혀놀이』(동연, 2011)가 그것이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김흥호 선생님과 함께 펴낸 책도 있었다. 여러 학자들의 글 모음집이었던『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출판사, 2002)이 그것이다. 다석을 연구한 필자의 처음 글이 실렸고 선생님과 함께 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연구서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선 두 책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책 제목들 또한 모두 다석 고유한 언어에서 비롯했다. 앞의 책에서 필자는 다석 사상을 서구의 종교다원주의 사조와 대면시켰고 다석을『 천부경』(天符經)을 매개로 동학과 연결했으며 함석헌, 김흥호로 이어지는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일본 교토학파의 그것과 견주고자 했다. 나중 책에서는 다석사상을 통해 서구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과 대화하되 그 한계를 밝혔으며 유불선을 회통한 귀일신학의 골격과 본질을 연구했고 그리고 동서 생명사상의 틀에서 다석을 재조명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금번 『다석강의』를‘ 귀일’(歸一)개념에 근거하여 독해했고 이에 방점을 둔 채 논지를 펼쳤다. 이 과정을 통해『 귀일신학』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다석의 생각이자 그분 직계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일 뿐 그 이상일 수 없다. 신학교에서 30년 토착화 신학을 가르친 학자로서 다석 사상을 신학적 언어로 개념화시킨 작은 공헌만이 필자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다석강의』를 본격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 대학을 명예퇴직한 이후 다석 유영모란 인물이 학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붙들고 씨름해야 될 영성의 사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를 알수록 동서를 막론한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애시당초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저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한 갈급한 상태에서 다시 손에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읽어 가면서 값진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그를 종종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온 욕망으로서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 간혹 페이스북에 글을 옮겼을 때 제법 많은 이들이 다석이 내리치는 죽비에 정신 차렸다는 답 글을 올려주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글이 모아졌고 오늘 이 시점에 이르렀다. 다석의 글은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결코 읽히지 않았다. 때론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리 쓰인 글들은 흡족지 않았고 폐기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다석강의』를 읽고 정리하는 동안 모처럼 직업적 종교인(신학자)이 아닌 신앙인, 구도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다석을 가르쳐 주신 김흥호 선생님을 많이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 년 초에 세배를 가곤 했었다. 정월 초하루였음에도 선생님은『 다석일지』를 풀고 계셨다. 팔순을 넘긴 연세였지만 스승의 구술 언어를 글로 재탄생 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경이롭게 기억된다.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시간을 바칠 만큼 스승의 말씀이 귀했던 까닭이다. 지난 2년의 삶에서 김흥호 선생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책『 귀일신학』을 두 해 전 탄생 백 주년을 맞았던 김흥호 선생님께 바치고자 한다.

 

『다석강의』를 꼼꼼히 읽으며 새삼 발견한 것은 첫 강과 마지막 강의인 43강이 모두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다석에게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리라. 각 강의의 제목이‘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귀일신학』에서 다석의 사생관과 성령의 삶이란 말로 바꿔 달았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었으되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뜻을 보태면서 말이다. 종교란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죽음 이후의 몸 적 소생이라는 인습적 부활신앙을 다루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믿었을 뿐이다. 죽음을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얼로 사는 삶이다. 얼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삶 속의 부활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들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믿었던 고린도서 저자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삶이겠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종교들이 죽음장사를 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장례식 이후 낯선 공간으로의 이주를 믿으라 권하며 정작 삶 속의 부활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극복)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 믿는 것이 다석이 말하는 부활인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다석의『 귀일신학』이 인습화된 기독교에 던지는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목도하며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뉴 노말’ (New Normal)을 요구받고 있는 중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타 성에 젖은 신앙양식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교회를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의 오만과 성직자의 무능을 목도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역할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교회인지 안식일을 위한 교회인지 되묻기 시작한 까닭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여겼던 종교의 자기반성이 통렬히 이뤄져야만 한다. 축복신앙이 무너졌고 절대라 여겼던 가치가 실종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무너질 것이나 영성으로서의 종교는 영원할 것을 의심

치 않는다. 물론 제도 없는 영성도 위태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제도를 최소화시키고 영성을 깊게 하는 일이 더없이 필요하다. 안식일의 종교화가 아니라 일상의 영성화가 더 화급한 현실이 된 까닭이다. 일상이 없는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켜 교회만을 살찌울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교회의 본래 이름인‘ 에클레시아’ 즉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과감하게 부활시켜야 옳다. 평신도,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독생자의 길을 걷도록 종교가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만인 사제직을 입이 아니라 삶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독(愼獨), 즉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확신 하에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 옳다는 배타성도 자연스레 옅어질 수 있겠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만 바라봤듯, 한국 개신교도 지금껏 미국 교회만을 쳐다봤고 서구 기독교에서 답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들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고 알았다. 코로나 사태로 허둥대는 기독교 서구 문명의 허약성을 목도한 탓이다. 이 점에서 본 책『 귀일신학』은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 아니 종교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위해 본 책이 기여할 바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정년을 4년 6개월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이제 그 시간이 다 지났고 마침내 은퇴시점에 이르렀다. 4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은퇴자로 살지 않았고 나름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며 땅을 일궜고 현장을 찾고자 했다. 김흥호 선생님께 헌정한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정식으로 은퇴의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해야 할 작업이 산적해 있다. 모든 일을 잘 마친 후 여유를 갖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염려하며 주변을 더 열심히 살피면서 살아가고 싶다. 필자가 쓴 다석의 글을 읽고 그때마다 마음을 나누고 평해 주신 여러분들이 기억난다. 이은선 교수를 비롯하여 석준복 감독님, 하중조 장로님, 박정규 교수님, 이면주 목사님, 조용훈 장로님, 김선주 목사님 등이다. 이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을 소개해준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의 이정훈 선생의 수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과지성사’에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일전의『 수도원 독서』에 이어 연거푸 두 번째이다. 본 책의 독자가 얼마나 될지 염려하면서도 출판을 결정해준 최병천 장로께 많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교정을 보아준 권오무 목사님과 직원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바라기는 이 책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다석 강독회 모임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모임이 만들어지면 만사제치고 달려가 함께 토론할 생각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석을 좀 더 체화시켜 멋진(?) 토착화 신학의 골격을 만들어 낼 뜻도 마음에 품고 있다. 다시 한번 말을 주신 다석 선생님과『 다석강의』를 펴낸 다석학회 회원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길을 가다 길이 되라 했으니 애써 이분들이 가신 길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달려가고 싶다. 말에 삶이 실려야 힘 있게 출발할 수 있으리라.

2020년 5월 7일

아내 이은선 교수의 63번째 생일 날

부암동 현장 아카데미에서

이정배 두손 모음

 

차례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