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4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은 누구인가?


- 가톨릭 교우들의 카페 어둠속에 갇힌 불꽃 (http://cafe.daum.net/bulkot) 교회쇄신 게시판에서 재인용합니다. 金敎臣은 누구인가?



1938년 당시 37세때의 모습

金敎臣의 人生

선생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젊은날 공자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십 년 단축하여 '육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달성해 보리라고 야심을 품었으나, 막상 '팔십이종심소욕불유구(八十而從心所欲不踰矩)'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적인 '낙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선생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가며' 냉정한 중에 성경을 연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선생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선생은 진리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분이었으며, 선생이 추구한 진리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의 진리였다. 그리고 선생이 제 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선생과 그 동지들이 옥고를 치를 때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에게 한 말은 역설적으로 선생이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선생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이 일생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선생은 '성서조선'을 위해 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성서조선'은 전호에 걸쳐 적자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의식(衣食)의 여분으로 잡지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 출판의 여분으로 생활을 해야'했다. '성서조선'은 그야말로 선생의 삶에서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던 것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信仰

김교신을 지도자로 출발하여 소수의 무리들에 의하여 이 땅에 맥맥하게 이어져 온 무교회운동의 핵심적 이념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공간을 점유한,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모여 기도드리는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부르짖는다. 또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그리고 기독자가 봉사하는 온 생활의 마당이 교회라고 믿는다.

둘째, 그들은 성직제도에서 비롯한 갖가지 교회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적 조직 못지 않게 관료화된 계층구조와 그에 따른 갖가지 비본질적인 구속.규제는 오늘날의 교회를 각 개인의 순수한 복음신앙생활의 질곡으로 화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국의 열쇠는 교회를 대표하는 법황이 쥐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요, 하나님만이 끝까지 쥐고 계신다고 믿으며, 성서의 구절의 참뜻은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만이 풀이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신자 각자가 하나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대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성서의 구절의 뜻풀이로 야기되는 교회의 분열과 중세기식의 '종교재판' 따위를 그들은 무의미한 일로 여긴다.

넷째, 그들은 섭리사관에 입각하여 신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자각, 정립하는 것을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과제로 삼는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業績

-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의 탐색 및 생활화

- 종교적 신앙과 교육적 실천의 이상적인 조화

- 교육에 있어서 인격적 감화력의 절대성을 나나내 보임

- 개인잡지를 통해서 소신을 밝힘으로써 온 민족사회를 교육의 대상으로 포섭

- 자신의 사상을 다음 세대에 계승,발전시킨 '코이노니아'의 육성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을 꾀한 독립운동에 몇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서재필, 이승만으로 대표되듯이 국제여론 환기에 힘쓴 외교독립방식이요, 둘째는 안창호로 대표되듯이 자아혁명을 통해서 독립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려 했던 인격혁명방식이요, 셋째는 김성수로 대표되듯이 민족 독립의 경제.산업적인 기초를 다듬으려 했던 산업입국방식이요, 넷째는 김구로 대표되듯이 힘에는 힘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항쟁방식이요, 다섯째는 이 모든 유형에 공통적인 교육입국방식으로서 그 대표자는 이승훈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교신은 이런 세속사적인 독립방략보다 더욱 차원 높은 사상 및 독립방략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기여해야 할 교유.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정립하고 이러한 민족의 섭리사적 '존재이유'에서 민족의 세속사적 독립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입국방식'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

민족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자각하고,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 이것은 되풀이 되풀이 음미돼야할 귀중한 사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민족정신사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 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 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이상적 한국인상

김교신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한국인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이상적 인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상'일 것이다. 이 선비상은 영국의 신사상, 독일의 장인상, 중국의 군자상, 일본의 무사상에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터하면서 우리가 고이 가꾸어 온 이상적 인간상이다. 선비상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이다.

그런데 '선비'라고 할 때 그것이 갖는 한계성을 긍정적인 면보다는 더욱 크게 부각시켜 '선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흠집내기도 한다. 특히 일본관학의 식민사관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크게 부각시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깎아 내리려 한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피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선비' 상에 대하여도 심하게 헐뜯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선비'의 부정적인 측면은 첫째 그것이 계급적 지칭이라는 데 있다. 사농공상이란 봉건적 신분질서 안에서 선비는 지배계급이었고, 그러기에 봉건질서 계승을 위한 보수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비생산성을 든다.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민중의 희생 위에서 여가를 즐기는 유한계급이며, 그러기에 그들의 논의가 또한 하나도 생산과 결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파당성이다. 선비는 지나치게 명분만을 내세워 파당을 형성하고, 그러기에 늘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해서, 선비는 조선 500년의 역사에 주인공 노릇을 했으면서도, 그것이 신라기와 고구려기처럼 진취적이지 못했고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건설적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관적인 그릇되고 왜곡된 선비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펼 수 있다. 선비상이 갖는 글정적인 특질, 즉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을 들고서 말이다. 학자적 기질이란 삶을 진리 자체를 묻는 데 바치는 생애를 이름이며, 예술적 기질이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생애, 그리고 지사적 기질이란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살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들에 묻히는 재야적 생애를 이름이다. 이러한 세 기질이 그의 인격 속에, 삶 속에 맥박칠 때 우리는 이것을 선비라고 일컫는다.

조선조 500년 중에서 우리는 이런 좋은 의미의 선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학자적 기질이 가장 크게 나타난 선비로서는 이퇴계를 들 수 있고, 예술적인 기질이 크게 나타난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여성에 나타난 신사임당을 들 수 있으며, 지사적 기질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민중의 삶 속에 나타난 동학 농민군의 전봉준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선비상이 지니는 한계성 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장점 또는 긍정적인 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우리 민족이 지금도 '선비'라는 말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점과 긍정적인 면을 피부로 느끼고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정한 선비는 그러기에 한 계급적 지칭도 아니요, 비생산자도 아니며, 파쟁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계급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요,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생산자며, 진취적으로 관여하는 창조자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 온 민족, 온 민중의 정신적 유산이요 소유이어야 한다.

김교신은 위에 든 선비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온몸에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전통적 선비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두 가지 기질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 기질과 눈물 많은 다혈기적 기질이었다. 그의 이 다섯 기질은 선생에 있어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선생의 온 활동, 온 생활에 응고되어 나타났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학자적 기질

선생은 학자적 기질의 소유자였고, 꼼꼼하게 사리를 밝히며 원리.원칙을 잘 책기는 일면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그로 하여금 직관적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위에 터하는 문학의 세계보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에 터한 자연과학의 세계에 보다 친근감을 갖게 했다. 문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적성에는 자연과학적 학문이 맞다는 뜻에서다. 선생이 처음에 동경고사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뒤에 자연과학에 보다 가까운 지리.박물과로 전학한 것도 이런 기질에서였다고 풀이된다.

무교회클럽이 학자들의 모임이라든가 또는 학자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세인들은 곧잘 하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특히 김교신과 함석헌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오산고보 학생들을 골방에 모아 놓고 과외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독창적인 관점에서 강의하였거니와 김교신은, 전 158호에 이르는 '성서조선'과 전 6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이 증명하듯이, 일개 중등학교 교사로서는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그의 신앙의 소치이겠으나 그 신앙을 학문적으로 다듬어 나가는 그의 학자적 기질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특히 그의 이런 기질은 그의 담당과목인 지리수업 방식에 잘 나타나 있다. 교과서의 내용은 50분 수업 중 20분 정도로 끝내 버리고, 처음 10분간은 시사적인 이야기, 나중의 20분간은 지리와 관련된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다. 40 전후의 나이로 이렇게 자유자재하게 수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의 덕택이며, 그의 학자적 기질의 교육적 발로라 할 것이다.

그의 지리수업 방식은 참으로 특이했다 한다. 당시의 지리 교과서에는 한국의 지리에 관한 내용은 극히 적은 양이었다. 그는 교과서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지리를 많이 다루었고, 지리시간은 가히 철학시간이자 세계사시간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의 관련에서 참고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학생들의 끝없는 흥미를 촉발하고 학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별로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이 아니었는데도 지리과에 학문적 관심을 퍽 많이 갖게 했을 뿐더러, 그의 시간에는 인생철학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한다. 제자들은 이런 수업방식을 최선의 방법이덨다고 지금도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저서 '조선지리 소고' 같은 내용을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젊은 영혼들의 가슴은 얼마나 흐뭇하며 자랑스러웠을까. 우리도 충분히 추측하고 남음이 있다. 이런 방식은 천성적으로 교사로 태어난 그의 인격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 의식적으로 짜낸 것 같은 -좋은 의미로- 면도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여러 곳에 이런 방식을 저녁에 회상하고 메모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제 4학년 지리시간에 노량진 6충신묘와 양주 덕양산의 권율 도원수의 사적을 다루었고(1937.9.7), 하와이 몰로카이 섬과 신부 다미앙을 말하면서 우리 소록도 이야기를(1937.10.11), 북부 중국의 자원의 전부보다 곡부산 공자가 더 크다는 것(1939.2.13), 지리수업을 한 시간 쉬고 -저들이야 알 리가 만무하지만- 인생의 목적을(1940.1.31), 청년들과 함께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대통령 재취임 연설을(1940.6.29) 다루고 있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학문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학문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학문이 몸에 배인 교사에게서 표출되는 것이지, 결코 기교나 연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예술적 기질

중등교사로서 수업, '성서조선' 주필로서 원고집필과 발간사무, 그리고 경성성서연구회의 강사로서 성경강의, 이렇게 그는 일인 3역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과로의 탓인지 그의 눈은 늘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을 때가 많았다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성서조선'의 발간사무는 육체적인 고통과 노력을 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감, 회의심이 늘 따르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달이 발간할 원고가 될 때마다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며, 조판이 된 후에도 몇 번식 교정을 봐야 하고, 또 책이 되면 독자들에게는 자기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송해야 하며 시내의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자전거로 배달해야만 했다. 시내의 독자들에게 왜 직접 배달했는지, 그 이유를 자신은 피력하지 않았지만 아마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과 이왕이면 따뜻한 마음으로 전해 주자는 사랑에서 이리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가 갖은 고생 끝에 새 책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시내 독자에게 전해 주며, 시국이야기, 신앙이야기를 자전거를 받쳐 놓은 채 문간에서 나누는 광경을 상상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가슴도 훈훈해진다.

이런 고된 생활에 그 자신도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러기에 그는 '제소와 패소'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둘째 제소: 한 사람 몫의 직분을 가진 자가 일주의 6일간을 근무하고서 주말 휴가를 가질 것은 생명 부지상 절대로 필요한 일인 것을 당신도 아시는 바일 뿐이오리까. 여호와 당신께서 제정하신 법칙이 아니오니까. 주간 6일을 벌써 힘에 넘치게 지치고서 또 주일을 쉬지 못한 지도 대략 십여 년. 그동안 우리의 외침을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못난 것을 이용하셔서 장터에 나가 피리 불라 하셨으나 어디 춤추는 인간 하나 있습디까? 일주일 내내 교단에 섰던 자가 일요일에까지 강의하는 것은 그 내용의 여하는 논할 것 없이 그 행위 자체가 피를 뽑아 주는 일이요, 살점을 분배하는 일이 아니오니까? 그런데 누가 들으러 왔댔습니까?

심문: 네가 나를 믿기 전보다 지금은 얼마나 약해졌느냐. 피로로 인하여 얼마나 감수된 듯하냐.

답신: 입신 이전에는 허약해서 약병만 차고 다니던 것이 근 20년내로 큰 병에 누워 본 일이 없고, 짐작컨대 어떤 사회에 가든지 저와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편일까 합니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 (1939년 10월)

이 '제소와 패소'라는 글은 하나님께 두 가지 따지자는 글이었다. 제 1소는 '그 비용을 저축했더라면 자녀교육에 염려 없을 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믿어지는 돈과 노력으로 '성서조선'을 발간해 왔으나 진정한 독자가 없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따진 것인데,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과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올시다'는 자답으로 패소하고 마는 내용이고, 제 2소는 위의 글에서 보듯이 일은 고되었지만 도리어 건강하게 되었다는 자답으로 역시 패소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렇게 바쁘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는 늘 자연의 즐거움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여유를 갖고 살았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예술적 기질의 단적인 표현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 의 일기의 거의 전부에 이런 마음의 여유가 보인다. 다음에 가장 대표적인 일기 하루분만 소개한다.

산기슭을 아침에 떠나 인쇄소 - 총독부 - 정릉리(원고) - 인쇄소 - 총독부 - 양정학교 - 인쇄소 - 북한산 기슭, 이렇게 뛰어 다녔다. 2월호의 정기일 발송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잡지 발송용의 겉봉을 쓰려니 어깨가 매우 오그라지는 듯 아팠다. 피로가 축적된 까닭인가? 사람의 비열하고 추잡한 일면을 보고 심화를 일으키다. 그래서 밤 10시경부터 동네 움집에 나가 자정 넘도록 한담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다시 달빛에 눈을 밟으면서 오전 2시 넘도록 시냇가를 오르내리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내 손에 일장검 짚은 것이 없으나 내 영혼이 별들을 향해 긴파람, 큰 한소리 아니하지 못한다. 건달이 도리어 호유하듯이 분망한 오늘밤에 시간적으로 크게 호유한 셈이다. (1939년 1월 31일[화], 맑음)

이렇게 바쁘고 갖가지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늘 자연의 미를 찾고 창조의 섭리를 음미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과 예술적 문장을 듬뿍 남겨 주었다. 그가 당시에는 인적 드문 북한산 기슭 정릉리에 거처를 정한 것도 이런 예술적 기질에서였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지사적 기질

그는 지사적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명문인 동경고사 출신이며 입신영달의 기회가 많았는데도 굳이 민족사학을 골라 교직에 투신한 것도, 또 수틀리면 그담둘 생각으로 언제나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것도, 또 그를 회유하기 위해 관립사범학교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꾄 총독부 학무국 관리에게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것도, 또 민족사학인 양정고보 재직시에도 감투 쓰기를 싫어하고 늘 '평교사'로 임하려 한 것도, 또 '성서조선' 독자 중세서도 소록도의 환자들을 가장 사랑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원조의 손길을 뻗친 것도, 또 학생들을 한치 한오리의 어김도 없이 명분대로 다스려 두 날이 다 시퍼렇게 선 '양칼'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도, 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위해서 뛰어든 것도 다 이런 지사적 기질의 표현이다. 신앙적 지사 최태용(崔泰瑢)을 찬미한 다음의 일기 한 토막이 그의 이런 기질을 웅변하고 있다.

오후 2시에 다니엘서 공부를 필하고 동일 오후 6시부터 최태용씨의 환영회를 본사에서 열다. 최형은 지금부터 16,7년 전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당시의 동창학우들과 같이 출세하였으면 현금은 상당한 지위나 재산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서 얻은 것이 없을 뿐더러 다소의 소유까지도 주 예수를 위해 없애버리고 지금은 '몸뚱이'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육탄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던짐이 되고자 한다.

예언자는 고향에 용납 안된다고 하지만, 조선에서도 전도사처럼 쓸쓸한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비행사가 고국을 방문할 때와 소녀가 공회당에 공연할 때와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서 귀국할 때에 민중들은 마치 구세주를 맞는 슷이 하였다마는 독립전도자 하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길바닥에서 아사한들 40만 경성부민에게 무슨 아픔이 되며 2천만 민족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1인보다 2천만이 가련하여 못 견딜 일이다. 반도에 기독교가 포교된 지 반세기에 처음으로 외국세력이나 조직, 기관 등에 의지함이 없이 조선 스스로가 비치는 전도자 하나가 섰다. 금후의 반도 영계에 처음으로 기골 있는 사람을 보리라. (1933년 6월 4일 [일])

김교신이 이렇게 찬양한 최태용은 뒤에 후꾸모도(福元唯信)로 창씨개명하고 앞장서 친일 훼절하여 그를 크게 실망시킨다. 당시의 관립고보 졸업생들이 총독부 식민지 관리나 되고, 판검사나 되고, 의사나 되어 세속적 행복을 구하며 개인적 입신영달을 꾀하는 모습에 언제나 분개하였다. 그의 일기의 도처에 이런 비판의 말이 나오고 있는데, 1934년 3월 15일자의 일기에는 그것이 아주 구체적,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강습소 선생을 구하는 데가 많지만 그 박봉을 감수할 사람이 없으며 농민학교 선생을 구하는데 농사의 경험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며, 중등학교 교사를 초빙하려 하여도 70원보다 80원, 80원보다 90원, 이렇게 월급을 계산하며, 또 도시로만 가기를 원하여 의주보다 평양, 평양보다 경성으로 쏠려 교육적 사명은 찾을 길이 없고, 사람들은 타인을 이용하려고만 들지 타인을 위해 일할 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러기에 '취직'이라 하면 '직무에 취임한다'는 뜻이 아니요, 먹을 것을 덮친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일자리는 많고 사람은 많이 필요한데 모두 자기 중심의 세속적 욕망만 채우고자 하고 있으니 어디 천거할 사람이 하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기도 했다.

소위 일류명사 또는 저명인사들을 대하기를 그는 아주 싫어했다. 물론 이승훈 선생처럼 신앙의 투사이자 서민적인 냄새가 피부로 느껴지는 분은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일한답시고 돈이나 거둬 자기 배나 채우고 글 쓴답시고 환상적인 꿈이나 비도덕적인 야욕장면이나 그려내고, 전도한답시고 부흥집회나 전문적으로 쫓아 다니며 일시적으로 종교적 감정이나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대전도사들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명사들을 비꼰 글이 1935년 3월 26일자 일기에 해학적인 필치로 담겨져 있다. 자기에게는 보약과 명사는 금물인데, 자기는 생래적으로 보약을 먹지 못할 팔자이고, 또 명사들을 대하면 흉금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사는 도리어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흉금이 열리는 사람들은 도리어 회개한 세리와 창기와 빈자와 병자들이라, 자신은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재야적 기질이 잘 담긴 말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종교적 기질

선생은 종교적 기질이 풍부했다. 그가 종교가임이 이것을 증명하기에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도 여겨지나, 그의 종교적 기질은 직업적 종교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 특질을 역시 이 자리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종교적 기질이란 무엇인가? 우선 절대적 가치기준을 이 세상에서 구하지 않고 저 세상에다 두는 기질을 말하며, 또 모든 가치 및 활동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는 삶의 ㄱ 기본적 자세를 말한다 할 수 있다.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자 교육철학자였던 쉬프랑어는 '생의 형식'이란 명저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여석 가지로 유별하고, 이 여섯가지 작용 중에서 어느 작용이 그 사람에게 가장 힘차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적 특질 또는 인간 유형이 생긴다고 논하였는데, 우선 그 6가지 유형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실현,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정치적 유형, 2. 실용성, 물질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유형, 3. 환상적 자기세계, 새로운 미의 형식을 추구하는 심미적 유형, 4. 진리탐구, 우주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론적 유형, 5. 동포에의 봉사, 공동체에의 참여를 삶의 동기로 하는 사회적 유형, 6. 양심의 명령에의 순종, 신 또는 절대자에의 귀의를 기하는 종교적 유형이다.

그런데 쉬프랑어는 이 6가지 유형, 또는 6가지 유형의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종교적 가치라고 말했다. 이런 쉬프랑어의 분석에 덧붙여 종교적 기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요약, 정리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며 창조주의 부름에 귀의하며, 모든 가치를 이에 따르게 하는 삶의 기본적 자세라 할 수 있다. 김교신은 이런 관점에서 참으로 종교적 기질로 삶을 일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치 해바라기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보듯이! 그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기도 속에 살았는가는 그가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이웃 약사사(현재에는 봉국사로 잘 알려지고 있는 정릉동 소재 사찰) 계곡에 가서 냉수로 목욕하고, 스님들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자신도 기도, 찬송한 나날의 경건한 사색과 생활이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다음 두 일기가 그것을 또한 잘 말해 주고 있다.

오후 짙은 안개에 흐림. 우리가 보는 은하보다 5만배나 더 큰 은하가 발견되었다고. 그 세로는 5천만 광년, 가로는 2천만 광년인데, 우리 지구에서 1억만 광년의 거리에 서로 있다고. 우주는 크고 넓다. 하나님의 능과 지와 애를 누가 능히 헤아려 내랴. (1937년 11월 12일 [금])

새벽 5시의 우리 마당은 오리온좌로 차일을 하고 천랑으로 등을 달고 북한 연산으로써 병풍을 두룬 것 같다. 인생이 무엇이관대 그 머리 위의 하늘이 저다지도 찬란하고 그 좌우의 산령이 이다지도 엄숙한고! (1938년 10월 17일 [월], 쾌청)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격정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 무레사네 >(물에 산에)라는 등산 클럽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인 식물채집도 겸하여 학생들을 들로, 산으로, 바다로 인솔하고 다녔는데, 한번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진 북한산 계곡에서 어찌나 감동했는지, 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중에, '이놈들아, 너희들도 느껴라, 울어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창조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되어 울고픈 격정을 금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도 중추의 달이 유혹적이라고 서재를 뛰쳐나가 공중에 솟은 달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물 속에 잠긴 달을 굽어 찾기도 했고, 또 가을벌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면서, 이 은혜가 자기 혼자에게만 주어진 듯, 내 살림 오늘 하루도 이로써 족하도다 하면서 자정이 지나도록 하늘을 바라보며 환희에 젖기도 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눈물이 헤푼 기질

슬픔이나 기쁨이 극에 다다를 때 우리는 운다. 그러나 이렇게 감동이 극에 다다를 경우란 우리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우리는 서러움이 북받칠 때 울기 쉽지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김교신은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고, 더욱 그것은 슬픔이나 기쁨보다는 어떤 순수한 강렬한 감동을 억누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라디오에서 심청전을 듣다가도, 자녀의 전학수속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도, 학업성적과 품행이 나쁜 학생을 타이르다가도,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다가도, 산에 가다가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1939년 5월 14일자 일기에는 새벽 4시 반에 깨어 시편 42, 43편을 주해하고자 정독하다가 감동되어 눈물로서 손수건 두 장을 다 적셔 버렸다고도 적고 있다. 다음에 눈물을 다룬 일기를 하나만 들어 본다.

등교 수업. 제 4,5학년 생도들은 오늘 저녁 8시 반 등교하여 밤 새면서 야외교련하게 되다. 귀도에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또 시내에서 미국유학생 모씨를 만다 그곳 소식을 많이 듣다. 산기슭에 돌아와 묘포를 김매고 거름주다. 저녁에 새로 두 시까지 원고 쓰기. 이번 10월호의 권두문은 눈물의 점철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소외 패소'를 쓸 동안은 여러 차례 펜을 던지고 호곡하였다. 인간인 나로서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고 형용할 것이나 신앙에 눈 뜬 때의 나는 은총이 내 잔에 넘쳐 소리쳤다.

이 양극의 조화된 감정을 무엇이라 형용해 내랴? 자정 지난 후 때때로 멀리 군가 들려 오니 밤새면서 행군하는 경성중등학교 생도 연합교련대가 경성 동부를 공략함인 듯. (1939년 9월 22일 [금] 맑음)

김교신 선생에게 경기중학교에서 배움을 받은 심리학자 김성태(金聖泰)는 선생님의 눈물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히 감격이 아니고,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몸소 느끼고 합일되어 그 참모습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안타까워하여 도맡아 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생각된다.

충무공도 좋은 경치, 밝은 달밤이면 이에 도취하여 슬퍼서 잠 못 이루는 대목이 그의 일기에 자주 나온다. 매슬로우(Maslow)는 황홀경이 그리고 외경의 감정이 합친 어떤 신비적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특징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아몰각적이고 초월적이며 자아향상을 느끼는 사람됨이라 하겠다. 유교에서는 의로운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는 성현의 인격의 특징을 호연지기가 충만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ㅑ 선생의 울음이 헤푼 성향은 단순한 그의 기질적 특성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선생이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직감하여 이에 몰입하였던 그의 인격의 진지한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닉가 본다.(외솔회 '나라사랑' 제 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 1974년, 87쪽)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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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연구 머리말 Introduction of The Sermon on the Mount ( Matthew ch. 5,6,7 )
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or in Spirit ( Matthew 5:1-3 )
애통의 축복 Those who Mourn ( Matthew 5:4 )
온유한 자 The Meek ( Matthew 5:5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Those who are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 Matthew 5:6 )
자비로운 자 The Merciful ( Matthew 5:7 )
하나님을 보는 행복 The Blessed that will see God ( Matthew 5:8 )
평화의 복음 The Gospel of Peace ( Matthew 5:9 )
정의의 승리 The Victory of Righteousness ( Matthew 5:10-12 )
땅의 소금, 세상의 빛 The Salt of the Earth and the Light of the World ( Matthew 5:13-16 )
신구 도덕의 충돌 The Conflict between Old Law and the New ( Matthew 5:17-20 )
살인하지 말라 You shall not murder ( Matthew 5:21-26 )
간음과 이혼 Adultery and Divorce ( Matthew 5:27-32 )
맹세하지 말라 You shall not Swear Falsely ( Matthew 5:33-37 )
무저항 Nonresistance ( Matthew 5:38-42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 Matthew 5:43-48 )
선행과 동기 Charitable Deeds and its Motive ( Matthew 6:1-18 )
구제 (對人 관계) Charitable Deed (Personal Relations) ( Matthew 6:2-4 )
기도 (對神 관계) Prayer (Relations with God) ( Matthew 6:5-8 )
금식 (자기수양) Fasting (Self-culture) ( Matthew 6:16-18 )
시편 제 121편 Psalm 121

무교회신앙 자료실 | [이덕휴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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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휴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무교회자료]
박상익|조회 685|추천 0|2005.06.14. 23:18http://cafe.daum.net/nonchurch/Tikv/88

[이덕휴 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20020611]



이덕휴 목사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교수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주일 예배 후에(3일전)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선생님의 홈을 또 두드리게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앙은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의 매 순간이라고 할때,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E. H 카는 말하기를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현재사회와 과거사회와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성찰입니다.

저는 지금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무교회주의라는 말과 현재의 무교회주의라는 말에 대하여 지금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역사는 당시 있었던 사실에 대한 하나의 상황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또는 시간(카이로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공동체 또는 회중 그리고 에클레시아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교회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를 통해서 겨우 두 구절에서 세번(마 16:18, 18:17) 말씀하셨습니다(이후 사도들을 통하여 신약성서에서는 115회 나온다). 성서의 표현이 모두 그렇듯이, " ~을 하면 ~한다", "~을 하라, 그러면 ~한다"라는 권고 내지는 명령어로만 이루어졌지 그 말씀에 대한 구체적 언급, 즉 말씀(교회)에 대한 본질이나 구성, 특성, 그리고 표상 등에 대해서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양한 용법을 사용하는데 교회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굳이 교회의 기구나 건물이 아닌 말씀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신앙공동체임은 물론입니다. 특히 에밀 브룬너를 위시한 칼 바르트, 한스 큉 등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사람들(이후 칼 바르트는 여기서 탈퇴하였음)은 보편적으로 교회를 신앙공동체로 이해하는 한편, 제도적인 기구나 외형적인 건물로 이해하던 교회관에 대한 신학적인 무지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간적 위치나 소속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저는 분명히 이해를 같이 합니다. 100%찬동한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교회의 원형은 제도화된 교회의 기구가 아니고 또한 소속단체나 교회건물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저도 확신합니다. 그 몸 되신 말씀의 기록이자 성령님의 가시적 표현인 성서, 즉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인 케뤼그마(kerygma)만이 유일하신 교회라는 것이 교회론의 본질이라고 저도 믿는 바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란 무엇이냐를 논의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 즉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 보이지 않는 교회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아프리카교회를 칭함)를 정면으로 대항하여 보이는 교회(visibl church)와의 구별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선택된 성도만을 포함시키는 교회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죄인들까지 포함된 보이는 교회와 섞여 있다"라는 말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보편적(catholic)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도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계속되어 논의되고 있습니다.
쟝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을 받아들여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각각 두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를 말하는 두 방식이라고 하였고, 이어서 루터는 가시적인 교회를 가촉적이고 확인할 수 있는 교회로 이해하고 불가시적 교회는 붙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교회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어서 불가시적인 교회는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회로 보면서 가시적 교회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비판적 원리에 사용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두 가지 방식 모두가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한 가지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 이후 교회는 분명 광야교회를 말하였으며, 다윗은 솔로몬을 통하여 출애굽 이후 480년만에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후 유대교에서는 "시나고게"라고 하는 회당(congregation)의 건물(cf. 약 2:2)을 분명하게 가리켰고 ,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은 예루살렘 모교회(또는 원교회)나 안티옥교회에서 사도회의를 하였으며 그 조직 내에서 각급 교회(고린도 교회, 데살로니카, 에베소를 위시한 각 지교회)등에 서신 등을 보내고 회의의 내용 등을 전달한 사실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에 와서 교회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은 브룬너와 바르트의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정의론자 에밀 브룬너의 경우에는 개신교에 있어서 교회론은 가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를 인격 공동체로 이해하지 않고 제도화된 비인격체로 이해되는 것에 대하여 에클레시아와 1611년 이후 킹 제임스 버젼의 ‘church’(교회)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교회론의 명시적 의미를 불분명하게 한다고 비난하였다. 김교신은 이러한 이유로 성서는 꼭 원어로 보아야 한다고 일갈했겠거니 생각합니다. 저도 이러한 문제가 매번 부딪히기에 성서를 읽을 때 히브리원서와 헬라어원서를 곁에 두고 개역성서 또는 KJV 또는 NIRV를 읽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번역은 때로는 죽음마저도(1525년에 번역된 최초의 영역본의 역자 틴데일은 이 일로 인하여 사형됨) 불러왔다. 교회의 본질은 오직 주님의 "머리되시고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라는 의미가 옳다고 일단 상정합니다.

이제 긴 사설을 접겠습니다. 제가 두 번 씩이나 선생님께 귀한 시간을 빼앗은 것을 다시 한 번 더 머리 숙여 사의를 표합니다.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교육철학(혹은 교육관) 내지는 신념을 여쭙고 싶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라는 이름의 건물과 제도 내에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또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선생(예수님 자신도 때로는 선생으로 호칭되었음)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다면, 학교 교육자(선생님 또는 교수님)는 학교라는 건물과 제도권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지도자 내지는 스승이십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학문이라는 유무형의 지식만을 전달하는 기구입니까 ? 아니면 학교라는 제도에서 가르쳐지는 유무형의 집단 활동을 통한 교육제도로서 올바른 시민의식을 가르치고 삶의 현장에서 요구되는 지식만을 가르칩니까? 꼭 학교라는 건물과 제도가 있어야만 지식과 인격 그리고 집단 활동에 필요한 제반 질서의식을 전달할 수 있습니까?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미셀 푸코는 그의 "감시와 처벌"(박홍규 역)에서 감옥을 정점으로 하여 감시와 처벌의 기구를 가정, 학교, 군대, 병원 등을 꼽으면서 사실상 근대사회가 감시와 처벌의 사회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학교교육의 본질적 또는 목적적 사실행위는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간단한 예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똑같은 법관(검사 또는 변호사 포함)일지라도 독학으로 골방과 사시학원만을 전전하다가 등용된 사람과 정규 법과대학을 거쳐 등용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학교교육 내지 제도는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제도적 모순은 없는지? 부정부패는 없는지? 모든 시행은 올바른지.. 등등을 제도권 밖에서 즉 광야에서 혁명투사처럼 울부짖어야 합니까? 아니면 제도권 내에서 살신하면서 그 비뚤어진 시행착오를 바로 잡아야 옳습니까? 아니면 학교제도가 푸코의 표현처럼 감시와 처벌의 상징이기에 아예 없애버려야 옳습니까? 아니면 매번 지적되는 학교행정과 제도의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학교무용론을 주장하시겠습니까?

쟈크 엘룰 같은 지성이 아무리 기독교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고(그의 저서, "뒤틀려진 기독교" , "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 역)해서 기독교 사회 내지는 교회가 올바로 선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잘못되고 있는 교회제도 내지는 교회론은 신학자 또는 신앙제도권 내에서 멸사봉공의 자세로 임하여 자기를 완전히 죽였을 때 바로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우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하여.

이제 제 소신을 확실히 말씀 올리고 맺겠습니다. 도둑놈을 잡으려면 도둑놈 소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도 우리나라(다른 나라의 사정도 비슷하겠지만)의 교회와 교회제도에 대하여 진저리를 냈습니다. 대학원 입학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버리지 못한 경멸과 모멸감입니다. 특히 신학교와 재단, 교단, 교회 그리고 교회내의 추잡한 모습들을 보면서 더러워서 나 목사 안한다, 라고 생각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입만 벌리면 헌금, 건축, 선교헌금, 돈 돈 돈, 돈 노래만 부르는 목회자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회사에 출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천막 짓기로 생업을 하였듯이.

육군대장을 정면에서 맞대항 하려면, 깡통계급장을 달고라도 같은 대장계급장을 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하나 드립니다.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장 24절). 이 구절은 제 학위논문 맨 마지막에 올린 글입니다.

그럼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덕휴 목사님,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교회론에 대해서는 결국 각자의 믿음에 맡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법률가 또는 육군 대장의 예를 들면서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점에 대해서는, 목사님이 선택하신 길을 100% 인정하되, 제가 선택한 길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법과대학 출신만이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법고시 개혁을 촉구하는 법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공대, 의대 출신 같은, 법학과 전혀 상관없는 전공자들도 법조계에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법의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요즘처럼 사이버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새로운 시대 환경에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법관이 있어야만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허 관련 업무도 법과대학 출신은 다룰 수가 없습니다. 공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제도권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그 분야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그건 너무 경직된 시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링컨도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땄더군요.

군대의 예를 드셨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이 임금 모시고 백성들을 버린 채 도망다니기 바빴을 때, 정작 환난에 처한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고 왜군과 맞서 싸운 것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습니다.

일전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히틀러 시대 독일 카톨릭 주교들이 주교 복장을 입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며 "하일 히틀러!"하고 구호를 외치더군요. 한편의 코미디 같았습니다.
실례지만 일제 시대 한국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신앙의 다양성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양사 전공하는 교수들을 학회 등에서 꽤 많이 알고 지냅니다. (저도 이 바닥 물을 30년 가량 먹었거든요.)


그중에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꽤 있지요.
그런데 그분들 중 자신의 신앙을 전공과 통합시키려고 애쓰는 학자는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실로 유감천만입니다.


다들 박사학위까지 받은 서양사학자이면서도 그저 일요일 교회 나가 예배보고 봉사하는 것만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봉사, 봉사 하지만, 인문 계통의 학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전공 학문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큰 봉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모두가 한국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입한 획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랜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다들 사고가 획일화 된 탓도 있겠지요.)
신앙이 좀 좋다 싶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신학교 가서 목회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그런 분들이 평신도 인문학자들에게 무슨 모범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교회 와서 청소하고, 밥해주고,... 몸으로 때우는 봉사하라는 것이 전부 아닌지요?
저는 이런 신앙을 일컬어 "따로 국밥 신앙"이라고 규정짓고, 이에 대해 글도 한편 써서 홈페이지에 올린 바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 교수로서 밀턴 연구자이기도 하고 "20세기 복음주의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평가 받는 C. S. 루이스(Lewis)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모든 자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기 다르게 사랑하실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면, 왜 우리를 개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개별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너무 잘 설명해주셨지요.
무교회는 각자의 개별성과 달란트를 최대한 존중합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의 은사이신 노평구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한 가지 점만으로도 무교회의 존립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 중 학계에 있는 분들이 쓴 신앙적 관점에서의 학문 연구 성과를 책으로 엮어 내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셰익스피어, 로제티, 프랜시스 톰슨, 휘트먼, 칸트, 밀턴, 카프카... 등등, 전공학자들이 각자 신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를 모으려는 것입니다.
아마 세 권 정도로 책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밀턴에 관한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무교회가 무슨 학자들만의 집단인 것처럼 여겨질까 우려되는군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김교신 선생의 신앙 동지였던 송두용 선생 같은 분은 일제 때 동경 유학생 출신이면서도 서울 오류동에서 거지, 문둥이 등을 집에서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하시며 평생 그야말로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60년대라고 기억합니다만, 그분 생존시 서울역 화장실 청소를 혼자서 도맡아 반년 이상 하신 적도 있습니다.
(신문엔 단 한 줄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시겠지요.)

아, 그리고 일본 분이긴 하지만 무교회주의자 중 교회를 만든 분도 있습니다.
구로사키(黑崎幸吉) 선생은 우치무라의 제자로서 교회(건물 있는 가시적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분이 쓴 <구로사키 신구약 성서 주해서>는 70년대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국 목사님들 대부분이 그분의 이름 정도는 알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만든 교회는 교파 교회가 아닌, 독립 교회였지요.

말씀을 드리자면 끝이 없습니다.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고, 역사 속에 살다가 죽어간 모든 인류를 합치면 그 숫자는 수백억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수백억의 인류 가운에 똑같은 인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개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각자의 개성을 100% 발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려는 신앙, 그것이 바로 무교회 신앙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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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만이 05.03.30. 13:07
'신앙이 좀 좋다 싶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신학교 가서 목회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으려 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수는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공을 좀더 심화시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 믿는 대로 살 수 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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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kyoung 05.05.18. 14:27
"성령이 친히 가르치신다 "는 말씀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생각 할 만큼의 분량" 에 도달하면 반드시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각기 자기를 돌아 보며" 란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며, 그 분을 범사에 인정하며, 늘 그렇게 삽니다 .좋은 글들 감사 합니다. 박교수님! 건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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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개혁 05.06.15. 19:38
지식적 신앙이 많은 사람들과 복음의 화두가 많은사람들과 차이점은 뭐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학교가 잘못 가르침 목사들의 거짓 말씀으로 병들어가고 는데 아무도 이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제도권에서 신학하기보다 살아가는 현장에서 신학하는것이 생생한 신학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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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5.06.15. 23:01
그렇죠, 내가 서있는 이 땅이 거룩한 곳이죠. 살아가는 현장에서 위에 계신 분의 뜻을 헤아리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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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08.06.01. 00:59
작은 교회지만 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며 서로의 섬김을돕고 서로 세워가는 목회자와 성도들을 만난 저는 복이 참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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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8.06.01. 19:29
나도 고향이 청주인데...청주 산다고 하니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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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님달님 09.11.08. 01:16
"자신의 전공 학문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큰 봉사가 어디 있겠는가?" 교수님, 저도 동감합니다. 각자 자기가 전공한 학문을 자기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좀더 건강한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 오늘날 예수의 살을 치열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교회적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수님, 늘 건강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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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9.11.08. 15:46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서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이라야만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한국의 경우,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는 기업가, 정치인이면서 일요일 하루 교회 가서 헌금 바치고 봉사 하면 그걸로 신앙 끝! 이더군요. 그 대표적 사례를 현 청와대 주인에게서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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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선정애o 10.07.06. 15:43
이 글을 세 번째 읽었는데 이전에 두 번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두 분 모두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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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0.07.06. 16:08
동물로 비유를 하자면 무교회는 황야의 이리 같죠. 교회는 주인집에 목줄 매고 있는 개와도 같고...체질상 속박을 싫어하는지라 개줄은 죽어도 못매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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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선정애o 10.07.06. 16:51
졸지에 제가.....개꼴 됐네여.....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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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0.07.06. 18:13
그래도 이리보단 개팔자가 훨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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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11.07.06. 23:00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신앙 공동체...
그리고 송두용 선생님에 대한 글....그 분의 이야기는
첨 들어봅니다. 우리도 몰라도 주님은 아시겠지요.
그 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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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1.07.07. 11:27
우주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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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무교회자료]
박상익|조회 2472|추천 1|2004.06.01. 22:03
http://cafe.daum.net/nonchurch/Tikv/1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해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원리인 믿음지상주의, 성경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를 철저히 지켜내자는 데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의 상당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으로부터 중세 카톨릭을 향해 대거 유턴(U-turn)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만인사제주의는 거의 완벽하게 포기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회를 성전(聖殿)이라 부르면서 마치 건물 자체에 신성이 깃들기라도 한 듯이 생각하고, 설교단을 지성소(至聖所)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허망한 중세적 관행이 아무쪼록 교계 전체에 만연된 현상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한글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는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중추 기구였던 “민회” 또한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이다. 이런 용례에서 보듯이 에클레시아는 특정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복음 18: 20)는 예수의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간된 <개정 영어성경>(Revised English Bible, 1992)이 에클레시아의 역어(譯語)로서 집회(集會: congregation 또는 assembly)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음미해볼 만한 일이다.

일상 대화 속에서 우리는 흔히 “댁은 교회 믿어요?”라고 말한다. 교회를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일상 언어에 투사된 경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믿는 종교”는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말로 “교회교(敎會敎, Churchianity)”라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무교회주의자들에게는 교회―및 교회로 상징되는 설교단, 성가대, 헌금, 목사, 장로, 집사 따위―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에클레시아(집회 또는 회중)가 있다. 무교회주의는 교회교를 거부하고, 에클레시아를 바탕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하다.

무교회주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유형적(有形的)인 분파(sect)로서의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과거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선생 등이 모임을 이끌었고, 오늘날에는 노평구(盧平久), 유희세(劉熙世) 선생 등에 의해 전국 각지에 모임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무교회주의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편재(遍在)해 있는 무형적(無形的)인 “정신” 또는 “이념”으로서의 측면도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교회에 속하면서도 교회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무교회주의 정신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심지어 성직자들 중에서도 상당수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무교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도서출판 부키, 2000)에 실린 박상익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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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ty 05.07.21. 18:32
복음주의 (evangelicalism)라는 말을 보았는데 그게 무엇인지요? 기독교의 한 분파인가요?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 으로 세워진 종교라고 알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라는 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교회주의라는 말도 역설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라는 단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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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수 05.09.15. 13:33
듣던중 참말로 방가운 얘기입니다 앞으로 좋은 말씀 많이 읽게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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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쫙 06.02.24. 12:41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극단적인 근본주의에 회의를 느낀 근본주의자들이 표방하고 나선 운동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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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n 07.04.05. 01:30
무교회주의라는 주의에 고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무교회일 것입니다. 교회사에 의하면 기독교의 발전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천상의 교회"의 갈등으로 발전하는 줄 압니다. 꼭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도 교회를 벗어나서도 두 세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참 된 교회이라는 것이지요. 가운을 입는다고 성직자가 아니거늘 화려한 문장을 만들어 두르기까지 해야 성직자인 양하는 분들이 카톨릭으로 되고 싶어하는 분들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실례라면 용서하시기 바라고 글 감사합니다. 성경말씀사 최병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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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2.02.11. 14:00
'주의'란 말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개신교(Protestantism)도 ‘주의’(ism)고 장로교(Presbyterianism), 감리교(Methodism)도 모두 ‘주의’이거든요. 의미를 과잉 부여하는게 문제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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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하나님의 핸드폰Oo 07.08.01. 10:19
글에서 제도화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비판하는 부분을 읽으니 논리적인 괴리가 보입니다. 다른 글들을 더 읽어 봐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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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7.08.02. 14:35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는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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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림 09.01.18. 20:41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정예배를 보시는분들도 무교회신앙인들 입니다.그런분들에게 선교명분으로 목사/교파/복음을 가르치시려는 목사/교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무교회신앙인들은 순수한 기독교를 추구하도록 지하가정기독교인들에 복음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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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12.02.10. 12:10
제가 찾던 교회가 바로 초대 루터교회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바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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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2.02.11. 13:59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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