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 가스펠투데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 가스펠투데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정성경 기자
승인 2020.01.2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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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코 하람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 출처 보코 하람이 공개한 동영상 갈무리

한국 VOM(Voice of the Martyrs Korea)은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이 지난 20일 나이지리아 기독교협회 회장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장단체 보코하람은 지난 3일과 6일 두 차례기독교인들을 급습, 아다마와(Adamawa)주 나이지리아 기독교협회 회장라완 안디미(Lawan Andimi)목사와 다른 목사 한 명, 교인 40명을 납치했다. 보코 하람은 이어 몸값을 받아낼 목적으로 동영상을 공개, 포로로 잡힌 라완 안디미 목사의 모습을 공개했다. 하지만 원하는 몸값을 받아내지 못하자 보코 하람은 지난 20일, 이 사건을 추적 조사한 나이지리아 기자 한 명에게 자신들이 안디미 목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 VOM 현숙 폴리 대표는 "“보코 하람은 테러 활동의일환으로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동영상 속 안디미 목사의 큰믿음을 증언하는 증거 역할을했다"고 말했다. 폴리 대표는 “동영상에서 안디미 목사는 매우 평온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울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보코 하람이 공개한 안디미 목사 영상 링크 (한국어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sIo8A5I6CP4

보코 하람은 지난 3일, 아다마와주 미치카(Michika) 지역을 급습해 안디미 목사를 납치했다. 보도에 따르면,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여러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마을에 들어와 약탈한 뒤에 안디미 목사를 트럭에 태워 데려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보코하람은 6일 이른아침에 카두나(Kaduna)주 카사야(Kasaya) 마을을 급습해 조슈아 사마일라(Joshua Samaila) 목사와 교인 40명을 납치했다.

현숙 폴리대표는 "최근 보코 하람이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사례들이 나이지리아에서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 해 성탄절, 보코 하람은 기독교인 10명을 참수하고 무슬림 1명을 총살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성탄절 다음 날에는 결혼식을 하러가는 신부 일행을 공격해 신부와 하객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에 현숙폴리 대표는 “보코 하람이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있지만,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린다. 기독교인에 대한 테러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우리는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지지하고 지원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고 말했다.

한국 VOM은 2월에 나갈 소식지에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보도할 예정이다.
Tag#나이지리아#보코하람#기독교인납치살해#테러#폭력#핍박받는기독교인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 - 크리스찬저널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 - 크리스찬저널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보코 하람, 간증으로 신자들을 격려한 나이지리아 목사를 참수해
크리스찬저널 | webmaster@kcjlogos.org

승인 2020.01.23 05:23:52






간증으로 많은 이들을 격려했던 나이지리아 목사의 인질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공유했던 기자에 따르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은 그 목사를 참수했다.


“이런 소식을 알리는 건 충격적일 수 있다. 나는 20일 보코 하람에 의해 처형된 라완 안디미 목사와 함께 싸우는 중이다.”라는 글을 아흐마드 살키다가 21일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안디미 목사는 교회 지도자이자 자녀들과 그가 섬긴 신자들의 아버지였다.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라완 안디미 목사는 어제 오후 참수되었다.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오후에 입수했다.”면서, 살키다는 “가족과 경찰, 교회 신자들은 오늘 아침 이 소식이 보도되기 전에 이미 알았을 것이라 확신한다.”는 글을 올렸다.


안디미가 소속된 교단인 나이지리아형제교회(EYN) 역시 목사의 죽음을 공식 인정했다.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안디미 목사의 죽음에 관해 EYN 사무총장 다니엘 응바야와 대화를 나눈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의 기드온 파라-말람 아프리카 대사는 “나이지리아에서 종교적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에 상처를 입혔지만 우리는 죄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이지리아기독교협회(CAN)은 사흘간의 기도와 금식을 선포하고, 안디미에 대한 “잔인한 살해”를 비난하고 나이지리아 정부에게는 수치라고 말했다. CAN의 법무를 담당하고 있는 쿠암쿠르 새뮤얼 본딥은 “교회는 안디미 목사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가능한 일을 다 했지만, 군사력이 없기에 구출할 수 없었다.”며, ”납치와 강탈, 크리스천 및 나이지리아 양민 살해가 멈추지 않는 것은 정부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CAN은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에게 “침착할 것”과 무하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무장 단체를 없애는 노력으로 생명과 재산의 파괴 종식을 촉구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나이지리아에서 테러리즘의 배후를 밝혀내고, 범죄로부터 나이지리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의 보호와 우리 주 그리스도의 힘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다”면서, 본딥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테러리스트와 배후의 위험한 행동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곧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생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가장 고귀한 선물로 여긴다.”면서, 세계기독연대(CSW)의 머빈 토마스 회장은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평온을 유지했던 용감한 남자를 애도한다. 그의 깊은 신앙은 후세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CSW는 최근 풀려난 인질이 인내심으로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의 영감을 준 십대 소녀 리아 샤리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오픈도어선교회가 발표한 ‘2020 세계 기독교 박해 보고서’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파키스탄에 이어 두 번째로 폭력적인 국가이며 50개 박해국가 리스트에서 12위를 차지했다. 보고서의 조사 기간인 2018년 11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1,350명의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이 목숨을 잃었고, 224명이 납치되었다.


“안디미 목사의 죽음은 순교이다. 그는 기독교 영웅이다.”라며, 파라-말람은 “순교의 피는 망가진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복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인질 동영상은 1월 13일 보코 하람에 의해 공개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와 자녀, 동료들과 함께 있다.”면서, 아다마와 주 나이지리아형제교회의 라완 안디미 목사는 “만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내하고 울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아디미 목사가 사는 동네는 1월 2일 밤 무장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주민들은 숲과 언덕으로 달아났지만, 아디미 목사 가족은 납치되었다.


보코 하람의 무장 대원 숫자를 5천 명이라는 추산도 있지만,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납치돼 군사 훈련을 받은 남자아동 1만여 명이 포함된 숫자는 아니다. 보코 하람은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무장 단체 중 하나이다. 2009년 이래 이들은 아니지리아 주민 3만 명을 살해하고, 2백만 명을 집에서 쫓아냈다.(크리스채니티 투데이 1월 22일 기사 요약 번역)


[일본의 정치사회] 전쟁 반대를 외첬던 그 많은 일본의 리버럴들은 지금 뭘하고 있나?


Sejin Pak
8 February 2018 at 23:01 · Adelaide ·



[일본의 정치사회] 전쟁 반대를 외첬던 그 많은 일본의 리버럴들은 지금 뭘하고 있나?
- 어느 일본인 변호사의 한탄
-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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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전쟁 반대는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눈앞에 있는 전쟁에는 반대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 "(일본의 2차대전) 전같은 파시즘"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이었을까. 나는 한국 전쟁에 일본 자위대가 관련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한미 군사 훈련이라는 이름의 도발 행위에도 반대한다. 배타주의적 내셔널리즘 캠페인과 북한 위협 캠페인은 알지만, 그래도 전쟁 반대는 전쟁 반대 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침묵,신경 꺼,컨디션이 안좋와, 라는 느낌으로, 우선 태도를 결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란 역시 사기인 것일까.

라디칼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전쟁하려 하는 자기 나라 정부는 타도하자는 것, 그것이 반전한다는 입장이다.

"리버럴"이라는 사람들의 내셔널리즘과의 지긋 지긋한 관계에는 질렸다. 그 애매한 느낌이 천황제를 긍정하고, 자위대를 긍정하고, 그리고 결국은 전쟁을 긍정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외롭다. 유보없이 전쟁을 반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뭐, 그만큼 시험하는 시대 인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날마다 시험 당하고 있다. 권력에 저항하지 말라는 압력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싫다"라며 과호흡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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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人は今?=「リベラルな人」は今?|御苑のベンゴシ 森川文人のブログ

 曖昧な戦争反対は、言えても、具体的な、目の前にある戦争反対は言えないものかも・・・。
 ・・・「戦前」化というのはそう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私は、朝鮮戦争に日本の自衛隊が絡むことには反対ですし、米韓の軍事演習という名の挑発行為にも反対です。
 排外主義的ナショナリズム・キャンペーンや北朝鮮脅威キャンペーンはわかりますが、それでも、戦争反対は戦争反対なのでは?と思います。
 沈黙・スルー・「調子わりい」なんて感じで、とりあえず態度決定しない「リベラル」ってインチキなんだろうなあ、やっぱり。
 ラディカルを自負する私は、戦争に進むもうとする自国政府を打倒しよう、それが反戦という立場です。
 「リベラル」な人のナショナリズムとの腐れ縁にはあきれます。その曖昧にな感じが、天皇制を肯定し、自衛隊を肯定し、そして、結局は、戦争を肯定してしまうのでしょう。
 寂しいな、と感じます。留保なしに戦争反対をいえない人たちを。まあ、それだけ、試される時代なのでしょう。もちろん、私も日々試されています。長い物には巻かれろ、という同調圧力がどんどん増してきていますから。「僕はいやだ」っと過呼吸にならずに言えるかしら・・・。]
https://ameblo.jp/mfb1991/entry-12350702182.html




4Park Yuha, 李昇燁 and 2 others

8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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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박선생님,
일본에서 리버럴이란 진보를 말합니다. 자신을 래디컬이라 허는 이사람은 급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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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그리고 리버럴도 전쟁 반대 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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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네, 그건 아는데 이 분은 일본의 리버럴은 추상적인 전쟁 반대는 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전쟁, 아마도 일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대가 아닌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다른 글 들을 더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만, 일본의 리버럴의 북한관 (스펙트럼이 일 것 이라 하나로 말하기는 힘들지만)에 관해서는 저도 불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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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Sejin Pak
자유주의라고 번역 하셨기에 드린 말씀이었어요.
그 부분은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아베를 비판하지않는 리버럴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전쟁이 났을경우 어떻게 할지를 너무 강조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도 어려운 문제죠.…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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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저역시 전쟁 반대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묶는 이사람의 사고는 아주 안이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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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시간이 있으면 더 읽어보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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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Sejin Pak 진보/보수/래디컬의 구분자체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도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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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이 분의 페북을 드려다 보니, 박노자 교수 정도의 시각을 가지고 있군요. 일본의 리버랄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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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이남곡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


Namgok Lee
7 hrs ·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을 가져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자신이 가진 감각과 판단(정보에 대한 선택)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혼란과 도전이 축의 시대 선구자들의 '인간 정체성'을 흔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특히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가진 두 분야의 괴리가 폭발적으로 커져서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 능력은 전인미답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데, 그것을 개발하는 인류의 관념체계(가치체계)는 아집과 소유 ㆍ자기중심적 개별관에 아직도 갇혀 있다.

그것은 물질 ㆍ과학 기술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ㆍ제도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특히 현대자본주의와 생태기후위기의 모순 속에서 물어지는 것이다.

결국 진보의 핵심과제는 인간 자체가 갖는 그 능력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은 소유와 아집에 갇혀 있으면서 사회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허위의식'은 더 이상 진보라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생태파괴문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유와 아집 그리고 개별관에 갇혀 있는 인간의 관념을 정상화하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능력은 멈춰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가르는 것은 우리 인류가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이 밝히고 실천한 그 인간정체성을 보편화 ㆍ현실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혁명이라고 불리워왔던 것들과는 질이 다른 혁명(이것을 개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이 요구되고 있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진행 속도가 과학기술능력의 발달 속도에 못미치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인간 자체의 질적 진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최대의 낙관론이다. ㅎㅎ

변화가 도둑처럼 온다는 말도 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나타내는 말로도 들린다.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by Ted Lewis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by Ted Lewis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Ted Lewis
AUGUST 22, 2016

A simple question was put to the two young men who burned down the church: “Why did you do this to us?”

There was a long pause, and the question sat heavily in the room. The victims, a group of eight adults from the Scandia Lutheran Church in Barron County, Wisconsin, needed to make better sense of the situation. Some of them had belonged to this farmland church their entire lives, having been baptized there as infants. And now there was nothing left; the building had been reduced to ashes. The meeting was therefore happening in another rural church nearby.

The offenders began to go deeper into their own stories in hopes of giving a better answer to the victims’ question. The older one spoke of his recent tour of duty as a soldier in Iraq, how he struggled with what he saw there, and how on returning he blew his “award” money by living it up, only to regress into a drug habit that needed to be financially sustained. This led to desperate acts of stealing metal, such as copper, that could be traded for money. He, with his younger accomplice, had burglarized over ten locations. This story hit home for one of the victims, who shared the tragic story of his nephew who committed suicide after returning from Iraq.

The younger offender, recently out of high school, spoke of how he had been picked on at school for his minority ethnic status. He openly talked about the frustration and pent-up anger that brewed within him, often resulting from times when school staff treated him as the primary troublemaker. He eventually developed a habit of destroying property, as he did with the furniture in the sanctuary before a smoldering candle later set nearby items aflame. Wrecking things in the burglarized locations was his way of venting his feelings on a community that failed to show the care and support he sought.

On hearing these stories, one of the victims, speaking for the rest, replied with a genuine “thank you.” There was a palpable feeling of relief in the room. The offenders had previously expressed their remorse and apology, but when the victims received a fuller account of what motivated the misbehaviors, it helped them make better sense out of a seemingly senseless situation. And then one of the victims talked about her desire and choice to forgive the offenders since forgiveness was something they all recited every Sunday in the liturgy. When the offenders heard the victims say, “We want to forgive you,” it truly took them by surprise. It was the last thing they expected to hear.

As the main facilitator for this case, I noted how the entire dialogue process moved from an awkward tension at the beginning to a more relaxed state of conversation toward the end. This shifting of energies is nothing new for restorative justice practitioners to witness. In fact, the very model of bringing parties together for safe, constructive dialogue is designed to foster this sort of shift. Without such a shift that relaxes participants and even dispels mistrust and hard feelings, it is very difficult for people to move on well and experience greater peace. And it remains next to impossible for the group to focus on working out future reparations consensually. When the restorative justice process offers no genuine shift, people remain captive to the past.

Through my years working with victims and offenders, I have developed a passion for chronicling stories of deep resolution. There is something very powerful about people moving from a place of complete separation to a place where they shake hands or even hug each other at the end. I also enjoy finding connection points between this work and biblical narratives. In a concrete way, this work has allowed me to put my faith into practice. This is largely due to the many parallels between person-to-person reconciliation and divine-human reconciliation. One of the common features in restorative narratives is how true justice involves the overcoming of evil with good.

Religion and spirituality have always been integral to the restorative justice movement. This is evident in its North American genesis in 1974, when Mennonite probation officers in Ontario pushed their Bible study reflections into the realm of criminal casework. When the movement began to revitalize centuries-old indigenous traditions such as Native American talking circles and Maori family group conferences, it became evident that these non-Western models had sacred status on a par with other spiritual practices. And is not the mending of human hearts and broken relationships the core of the Christian gospel?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ological studies are increasingly being influenced by the restorative justice movement, as exemplified in the writings of Christopher Marshall.

When asked to summarize what restorative justice is, I often resort to a simple illustration. If your child throws a ball and breaks your neighbor’s window, what do you do? Invariably, adults will say: I would take the child with me to the neighbor to apologize, to listen to what the neighbor has to say, and to offer to make amends. This, of course, is what the neighbor would want too. If, on the other hand, the neighbor found out that the child was merely punished and no communication efforts were made, he or she would rightly feel that justice was not done, precisely because the victim was ignored. Restorative justice focuses on the harm done more than on the law broken. Attention to the harm draws greater attention to victims and thus to the repairing of harms.

At the high end of the harm spectrum, restorative justice allows for safe, well-prepared meetings between murder victims’ family members and the perpetrators in prison. The same building-blocks apply as with a simple shoplifting case: the expression of ownership, remorse, impacts, empathy, apology, amends, and so on. In cases of severe and violent crime, when parties share their deep emotional pain, they often end up experiencing the removal of a heavy internal weight. The goodness of honest, heart-to-heart conversation literally overcomes the evil of the crime and its consequences. While there is never a prescribed expectation that forgiveness will be expressed in the restorative process, time and time again participants experience genuine forgiveness whether or not the language of forgiveness is explicitly used.

I once interviewed a woman whose mother was murdered, asking her to sum up what it meant to her to meet with the man who had killed her mother. She talked about how helpful it was to hear him acknowledge the evil thing he had done and to take complete responsibility. She also talked about how good it was for him to hear her pain at not ever being able to get closer to her mother. “When I walked out of the prison, the core of my whole life changed. I felt I was in a state of grace. I felt like a completely new person. I felt like the whole burden of everything had lifted from me.” Through the facilitated dialogue process, she said, “I gave him his life back, and later I realized that he gave me my life back.”

Through this life-restoring lens, justice is defined in terms of positive responsibilities to render good for evil. Full justice is the reinstatement of the good to mitigate the evil that was done. If justice is only a negative response to match the degree of a prior negative – an eye for an eye at best – it may bring a type of equity into play, and it may deter future misdeeds, but such justice does nothing to set things right again between people. New research is now showing how punitive responses to crime that incorporate no remedial means of accountability are frequently counterproductive, driving up future crime rates and taxpayer dollars. Restorative justice, by contrast, seeks positive outcomes for both offenders and victims through attention to accountability and support, through the empowerment of direct communications, through the building of trust and understanding, and through the fulfillment of reparation and reintegration.

In all of the above examples, open communication is central. By speaking and listening from the heart, victims gain new trust and offenders gain new understanding. This internalized learning is an essential ingredient toward taking positive responsibility to make things right, not just for the one incident, but for sustaining right relationships in the future. For this kind of learning to be fruitful, it must involve responding to what one has learned. Unlike courtroom processes, where communication is highly restricted, restorative dialogue helps offenders to be “response-able” to what they have just learned. Meanwhile, the experience of being heard is vital in helping victims to transition toward trust and closure. Out of this comes a double peace: a peace within and a relational peace between persons.

In all of this we see how the restoration of human relationships is vital to the resolution of crimes. Communities are less served by retributive justice measures that fail to heal the brokenness both caused and revealed by crime. Restorative justice seeks to heal these wounds at every level: for victims, offenders, and entire communities. This fits well with the medieval English concept of atonement, literally “at-one-ment,” which is associated with the New Testament concept of reconciliation. Disconnections are overcome by connections.

One of the most pressing questions of our day is, “How can cycles of violence be stopped?” People are realizing that those who violently victimize others were almost always themselves once victims of unjust abuse and resulting trauma. The church-burning case certainly shows this cyclical pattern. Part of what helps victims to move forward out of their resentments or negative ruminations is to experience the humanization of the offender. At some level, every human being is a victim as well as an offender. We are all wounded and we can all wound others.

This is where the death of Jesus provides the ultimate answer. Because all people are victim/offender combinations, forgiveness has to cut both ways to be holistic. The cross in all of its significance is oriented to both offenders and victims. It addresses not only our sins but our sinned-uponness. This is very good news, considering how our own habits of sinning stem out of those deep, unhealed places of past pain. Once we begin to see this interplay within ourselves, we can better see how genuine justice between human beings must bring wholeness to both victims and offenders.

It was necessary for the two young men who had burned down the Lutheran church (and had already spent a year in jail for the crime) to make restitution and other reparations. These plans were worked out in detail so that they could demonstrate their intent to make things right. Even so, the highest restoration happened on a relational level. Forgiveness opened up the possibility for them to live well with others, and to live with themselves.

A while after the meeting with the church folk, I facilitated an encounter between the same offenders and a neighboring farmer and his wife. This elderly farmer had grown up in the same church and also knew the families of the young men. The offenders had stolen metal items from his farm and sold them as scrap to get cash. The farmer spoke very candidly about how hurt he was when he found out who had stolen his property and caused the church to burn down. There were plenty of tears in the room. Hearts were softened. And in the end there were handshakes, heads held high, and eye-to-eye contact before everyone parted ways. People came with their vulnerabilities, but they left with the strengthening gift of reconciliation. Evil was overcome by the good, and new life was rising again.

Photograph from www.restorativetrainer.com; used with permission.

16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Eva Mozes Kor
JANUARY 26, 2016

At the age of ten, Eva Mozes Kor and her twin sister Miriam were transported to Auschwitz. There Dr. Josef Mengele used the two girls along with other twins for medical experiments. Mozes Kor, who speaks internationally, went on to found the CANDLES Holocaust Museum in Terre Haute, In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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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January 27, 1945, four days before my eleventh birthday, Auschwitz was liberated by the Soviet army. I returned to my village in Romania to find that no one from my family other than Miriam had survived.

Forty years passed before I spoke to Miriam about our experiences in Auschwitz. She died in 1993 from the long-term effects of Mengele’s experiments. That year I was invited to lecture to some doctors in Boston and was asked if I could bring a Nazi doctor with me. I thought it was a mad request until I remembered that I’d once been in a documentary which had also featured a Dr. Hans Münch from Auschwitz, who had known Mengele. I contacted him in Germany and he agreed to meet with me for a videotaped interview. On my way to meet this Nazi doctor, I was so scared, but when I arrived at his home he treated me with the utmost respect. I asked him if he’d seen the gas chambers. He said this was a nightmare he dealt with every day of his life. I was surprised that Nazis had nightmares too and asked him if he would come with me to Auschwitz to sign a document at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He agreed.

In my desperate effort to find a meaningful thank-you gift for Dr. Münch, I searched the stores, and my heart, for many months. Then the idea of a forgiveness letter came to my mind. I knew it would be a meaningful gift for Dr. Münch, but even more important, it became a gift to myself. I realized I was not a hopeless, powerless victim. When I asked a friend to check my spelling, she challenged me to forgive Mengele too. At first I was adamant that I could never do that. But with time, I realized that now it was I who had the power: the power to forgive. It was my right to use it. No one could take it away.

On January 27, 1995, at the fiftieth anniversary of the liberation of Auschwitz, I stood by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with my children, next to Dr. Münch and his children and grandchild. Dr. Münch signed his document about the operation of the gas chambers while I read my document of forgiveness and signed it. As I did that, I felt a burden of pain lifted from me. I was no longer in the grip of hate; I was finally free.

The day I forgave the Nazis, I also privately forgave my parents, whom I had hated all my life for not having saved me from Auschwitz. Children expect their parents to protect them; mine couldn’t. And then I forgave myself for hating my parents.

I believe with every fiber of my being that every human being has the right to live without the pain of the past. For most people there is a big obstacle to forgiveness because society expects revenge. We need to honor and remember our victims, but I always wonder if my dead loved ones would want me to live with pain and anger until the end of my life. Some survivors do not want to let go of the pain. They call me a traitor and accuse me of speaking in their name. I have never done that. Forgiveness is as personal as chemotherapy – I do it for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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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 때 Eva Mozes Kor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Miriam은 Auschwitz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Josef Mengele 박사는 두 명의 소녀를 다른 쌍둥이와 함께 의료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Mozes Kor는 인디애나 주 테레 호트에 CANDLES 홀로 코스트 박물관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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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생일 4 일 전인 194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는 소련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나는 가족을 찾기위해 루마니아의 마을로 돌아 왔는데,  Miriam 이외는 내 가족 중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 음을 발견했다. 

 Miriam과 Auschwitz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까지 40 년이 지나야 했다. 그녀는 1993 년 Mengele의 실험의 장기적인 영향으로 사망했다. 그 해에 나는 보스턴의 일부 의사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초대되었고, 나치 의사를 데려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한때 다큐멘터리에서 Mengele을 알고있는 아우슈비츠 (Auschwitz)의 한스 뮌헨 박사 (Dr. Hans Münch)가 출연 한 것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 요청이 미친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비디오 녹화 인터뷰를 위해 나와 만나기에 동의했다. 이 나치 의사를 만나러가는 길에 나는 무서웠지만,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를 최대한의  존중을 가지고 대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스실을 보았는지 물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다루는 악몽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치도 악몽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고, 가스실의 폐허에서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나와 함께아우슈비츠에 와줄 것인지 물었다. 그는 동의했다. 

나는 Münch 박사에게 의미있는 감사의 선물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몇 달 동안 상점과 마음을 조사했다. 그런 다음 <용서 편지>에 대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뮌헨 박사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선물이되었다. 나는 내가 희망이 없고 힘없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에게 내 철자를 확인하도록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Mengele도 용서 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 나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권리였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199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 해방 50 주년에, 나는 뮌헨과 Dr. Münch와 그의 아이들과 손자 옆에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 폐허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용서 문서를 읽고 서명하는 동안 Münch 박사는 가스실 작동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렇게하면서 나는 고통의 짐을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증오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 

내가 나치를 용서 한 날, 나는 또한 부모님을 개인적으로 용서했다. 나는 아이들을 아슈비츠에서 구하지 못한 부모님을 평생 미워 했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보호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미워한 것을 용서했다. 

나는 모든 인간이 과거의 고통없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회는 복수를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에 큰 장애물이 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해야하지만,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과 분노로 살기를 원하는지 항상 궁금하다다. 일부 생존자들은 고통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용서는 화학 요법만큼이나 개인적이다 – 나는 나를 위해서 했다.






































2020/02/07

Five years since the COI, what progress on North Korean human rights? | NK News

15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Interview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1 15:21:00



2015년 0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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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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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게 낫다
● 경탄하고 감격하라, awesome!
● ‘참나’ 찾아 ‘자유’ 얻는 게 심층종교
● 행복의 원천은 성찰이 주는 ‘아하!’의 삶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가 전만 못하다. 존경할 만한 종교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오강남(74)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197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11일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오강남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해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믿음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유학을 한 후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한문을 다시 공부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그는 자기 안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가 대화하는’ 핵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체험이 ‘성불(成佛)’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노장에서 말하는 ‘붕새처럼 변화와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겠냐는 인식이었다.”

오 교수가 2001년 한국에서 출간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은 파문을 일으켰다.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있었으되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는 그런 예수님은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저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1947~2010)다. 가수 조영남(70)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강남 교수는 글로 먼저 만났다. 목사가 되겠다며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주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1980년으로 기억한다. 공연을 마치고 우연히 누군가가 소일거리로 읽으라며 던져준 교포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는 섬뜩해졌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내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특별한 사람이다.”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맥매스터대 대학원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대 규장각과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고,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14년 전보다 지금 한국 종교의 위상은 더 후퇴한 듯 보인다. 기독교 신자가 감소한다.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출간한 저서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는 때로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번영만을 위한 종교, 권력에 기생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 종교, 양적 대형화에만 골몰하는 종교. 과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7월 2일, 그에게 물었다.

▼ 종교란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답이 있겠으나, 간단히 대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속적 안목으로 볼 수 없는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해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이 4가지 진리(四聖諦)를 깨침으로써 고통에서 자유스러워지라고 한 것,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욕심과 미망으로 가려진 눈을 떠 사물을 더욱 명확히 보면서 그만큼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종교기업’

▼ 한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압도적 크기의 교회 간판이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면 십자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교회도 이 시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십자가 물결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요. ‘종교기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좀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색, 노란색 십자가가 이따금 눈에 띈다는 거.(웃음) 십자가를 보면 그것이 예수가 달려 죽은 로마의 형틀이라는 생각 대신, 다석 류영모(1890~1981·교육자 겸 종교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인간이 대지를 뚫고 하늘과 하나 되고자 위로 솟남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의미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요.”

다석이 설파한 ‘솟남’은 기독교의 부활, 불교의 해탈에 비견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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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기독교도입니까.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는 교수님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기기도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는 불교 및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셨는데, 덕분에 저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때도 기독교 극보수주의 교수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요.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에서 가르친 것,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에 몰두했으니 캐나다에서는 동양 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기로 하고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했어요.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불교를 전공 분야로 삼았고, 말씀한 대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학위논문 주제로 택했지요.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다닌 교회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글로도 써야 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던 교적(敎籍)을 철회해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배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를 헐뜯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적이 없어 어느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셈입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합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주관하는 ‘일요 경 모임’에서 종교 경전을 읽습니다. 이곳저곳의 교회나 교역자 수양회, 사찰에서 초대받으면 가서 강연합니다. 개인적 이력을 물은 것 같아 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겸연쩍습니다.”


▼ 한국 불교의 상황도 신자 수가 줄어드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복(祈福)적 성향도 강하고요. 사업 잘되게 해달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시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찰(大刹)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렇지요. 뜻있는 스님들이 직접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불교계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건 알지만, 정법대로 해서는 사찰을 운영하지 못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속의 佛性, 神性


▼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바라는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가족의 평안을 간구(懇求)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종교는 나와 내 가족이 잘살고 싶다는 소망을 심리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하고요.


“물론 종교에 그런 면이 있어요. 종교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한국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에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어구(語句) 탓에 비(非)종교인이 기독교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영적 눈을 떠서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속에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의 근본은 우리가 이런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 속에 신성, 혹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고,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우리가 ‘한울님’을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하늘과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처럼 남을 하늘 섬기듯 대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기본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진리를 가졌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는 등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 탱화에 낙서하기, 땅 밟기 기도 등 일부 기독교도의 행동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의 기본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땅 밟기 기도는 일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성소에서 예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기독교 목사가 대구 동화사 탱화에 낙서해 논란이 인 적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명명을 두고 불교계와 기독교계가 갈등을 빚었다.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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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는 神’ 관념 수정돼야”

▼ 지난해 6월 문창극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 등으로 인해 낙마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할 만한 발언이라고 여겨지지만, 비(非)기독교인은 이러한 견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비(非)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담스러운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나 미국·소련의 분단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6·25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다면 독립을 위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싸운 운동가나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가 되는 셈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함석헌 선생이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것과 판이합니다. 함 선생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해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이 고난의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은 나태하고 무기력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나 미국의 개입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항과 자존의 역사냐, 숙명적 외세 의존의 역사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와 바울이 말씀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를 꼽고 싶습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대목은 할례나 기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장자’ 첫머리에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라는 큰 새가 되어 구만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 ‘닫힌 종교’가 아닌 ‘열린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느 특정 시대, 어느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생겨난 종교관을 비롯해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등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돼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특수 교리는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해요.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해 신이 인간사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한다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 같은 신관(神觀)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어놓음’이 중요합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병존하게 마련입니다.

“표층종교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나의 ‘참나’를 찾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를 얻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 중심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표층종교가 신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고 나와 나의 집단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과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신과 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가 경전의 문자에 매달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의 속내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나와 다른 해석에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층종교로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표층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심화 과정을 거쳐 종교가 줄 수 있는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하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표층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종교적 근본주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게 교황의 설명인데요. 한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진 의식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신학자 한스 큉처럼 근본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가톨릭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처럼 비교적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인 신부들이 있지요.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수 경향이 강한 분들이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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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성장률 1600%의 배경


▼ 한국 기독교는 교수님이 비판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 한국이 개명(開明)에 나섰을 때 도움을 줬습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과 기독교가 연결됐습니다. 1970~80년대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10년 동안 교인 성장률이 1600%가 넘은 교회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 덕분에 공격적 선교가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러 면으로 공헌한 바가 컸습니다. 교육, 의료, 독립운동, 계몽…. 그러다 1970~8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전통적으로 친숙하던 농촌 공동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한 도시생활에서 소속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에서 새롭게 소속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면서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더 뜨거워졌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교회가 기복적으로 경도된 주원인이면서 교인 수 증가의 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나 사회적, 심리적, 건강상의 소망을 교회가 아니더라도 채워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그런 필요에 의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선교에도 한계가 오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 성경의 문자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보는 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성경을 이렇게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경전이란 문자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내 눈높이에서 읽고 이해하도록 구성됐어요. 이해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해야 하고요.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 ‘신 없는 사회’를 보면 라디오,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이교도를 저주합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고요. 경찰서장이 범죄율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하더군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작을 알리면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께서 미국을 변함없이 축복하시길”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친 것도 떠오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유럽에서 근본주의가 거의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살아 있지요. 주커먼 교수가 지적했듯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회가 범죄율, 문맹률, 행복지수, 복지수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섭니다. 교회 출석률이 높은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 주들의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신들을 앞세우면 결국 ‘신들의 전쟁’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사회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제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들만의 신’ ‘만들어진 신’

주커먼에 따르면, 북유럽에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거나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후 부활했다든지 하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품위 있는 도덕과 가치관이 담긴 책이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소수의 북유럽 사람들도 대체로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모든 이교(異敎)의 군대가 무함마드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을 신께 맹세한다”고 다짐하면서 “신은 위대하다. 영광이 이슬람에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아·이라크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국가(IS)는 형제 격인 시아파마저 ‘불순한 이교도’라고 여깁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유일신교인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여기는 건데요. 그렇다면 ‘오직 한 분’인 하나님, 다시 말해 ‘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란 대부분 ‘만들어진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받드는 신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들만의 신관(神觀)입니다. 궁극실재로서의 신,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밝힙니다. 말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신관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만진 것만을 절대화하는 대신 서로 둘러앉아 각자 만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실물 코끼리에 근접한 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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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some!’을 외치는 삶

▼ ‘그들만의 신관’은 ‘부족신관(部族神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약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전투지휘관이 돼 다른 민족을 정벌합니다만….

“그렇지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신을 받드는 게 부족신관입니다. 지금도 가령 운동경기를 하면서 자기 팀이 이기기를 신께 비는 것, 자기 종교만을 사랑하는 신을 받드는 것은 부족신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도덕경’에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은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조건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망상인 셈이지요.”

▼ ‘신 없는 사회’가 오히려 평화롭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표층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지난해 ‘Living the Secular Life(종교 없는 삶을 살다)’를 썼습니다. 이 책은 경탄하고 감격하는 삶, ‘awesome(기막히게 좋은)!’을 외칠 수 있는 삶이 권위에 의존적인 종교적 삶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꾸면 성찰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아하!’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2012년 출간한 ‘종교를 넘어’에서 종교적 계율에 따라 강제되는 삶보다 선한 일을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물간 패러다임에 입각한 옛 신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에서 벗어나 생명, 평화를 기본으로 여기고 삶을 사는 세계시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 앞서 ‘장자’의 붕(鵬)과 ‘도덕경’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언급했는데, 노장사상이 21세기 한국과 세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노장뿐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심층이 활성화해야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만, 노장이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대목을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첫째, 도(道)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노장의 실재관은 오늘날의 세계관과 부합하는 점이 많습니다. 둘째, 도를 어머니나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합니다. 셋째, 자연은 신비스러운 기물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하는 환경보호 내지 생태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넷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면서 폭력, 전쟁을 반대합니다. 다섯째, 꾸미지 않은 통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면서 진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종교 같은, 종교 아닌 종교

▼ 한국 사회는 이념, 정치 성향에 따라 편갈림이 심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쟁은 요즘 말로 고치면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시각주의(perspec tivalism)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사물이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뜻이에요. 똑같은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지만,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싸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 스님이 중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중생이 중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 탓에 시끄러웠습니다. 기독교 교단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금품 살포, 상호 비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종교가 ‘소금’ 구실, ‘목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세태를 어떻게 봅니까.

“어느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 한국 종교는 기업만도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고 돈을 버는데, 종교는 거룩함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오히려 기업보다 돈 벌기에 더 혈안이 된 상태라고. 종교가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거나 권력화해 생기는 부작용이겠지요.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 우리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특권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과 불의의 원인을 꿰뚫어 살펴보고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도 종교가 할 일이라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사명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종교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선불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상도 죽이라는 뜻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 ‘종교는 궁극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변화된 개구리,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개구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항해하지 못하다가 바다의 실재, 곧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까지 항해할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

▼ 한국 종교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랍니까.

“지금까지 이렇게저렇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요약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돼야 하겠지요.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남양주시의 어느 큰 스님도 기복 일변도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할이 끝났다고 말씀하더군요. 생각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종교의 심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개인은 종교와 관련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영성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과정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캅 교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동방정교에서 행하던 예수기도(Jesus prayer),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사조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도 변화해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헌금은 ‘욕심 줄이기’ 연습

▼ 헌금은 왜 하는 겁니까. 십일조는….

“히브리 성서(구약) 마지막 책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000만 원이 필요하면 미리 100만 원을 바치고 1000만 원이 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헌금은 이처럼 내가 얼마를 내고 신의 축복으로 그 몇 배로 튀겨서 받는 투자나 투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욕심을 줄이는 연습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겠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종교기관에 바치는 것이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뉘어 있을 때 각 지파가 수입의 10분의 1을 제사장 족인 레위지파에 바치는 제도에서 비롯했습니다. 레위족은 그것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습니다. 당대에는 일종의 세금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를 강제로 바치게 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수입 일부를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적절한 곳에 바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2001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CP CURRENT PAGE:WORLD | WEDNESDAY, JANUARY 29, 2020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By Leah MarieAnn Klett, Christian Post Reporter| Wednesday, January 29, 2020

Chinese Catholic worshippers kneel and pray during Palm Sunday Mass during the Easter Holy Week at an "underground" or "unofficial" church on April 9, 2017 near Shijiazhuang, Hebei Province, China. | Getty Images/Kevin F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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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s across China are prohibited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for their deceased loved ones as the Communist Party continues to tighten its grip on the regulation of religion and religious activity.

Bitter Winter, a magazine documenting human rights and religious freedom abuses in China, reported that authorities throughout the country are enforcing policies that prohibit religious customs and rituals to be used during funerals.


In December, the government of Wenzhou city’s Pingyang county in the eastern province of Zhejiang adopted the Regulations on Centralized Funeral Arrangement.

Under the new rules, “clerical personnel are not allowed to participate in funerals,” and “no more than ten family members of the deceased are allowed to read scriptures or sing hymns in a low voice.”

The new rules aim to “get rid of bad funeral customs and establish a scientific, civilized, and economical way of funerals.”

Similarly, a village official from the central province of Henan told Bitter Winter that the local government convened a meeting for religious work assistants in April, informing them that all religious funerals are restricted.

Soon after, officials issued a document stipulating that clerical personnel should be “timely stopped from using religion to intervene in citizens’ weddings and funerals or other activities in their lives.”

In Wuhan, police stormed the funeral of a Christian member of a government-regulated Three-Self Church and arrested her daughter, who was praying for her mother at the time. The daughter was only released after the deceased was buried without Christian rituals two days later.

Last April, officials broke up an 11-person Christian funeral in the province of Henan that was honoring a deceased member of the congregation. Officials accused attendees of “hiding” their actions in the countryside and threatened them with jail time. The police registered the personal contact information of the attendees and told them that they could be investigated at any time.

“When my father died, village officials threatened to arrest us if we didn’t conduct a secular funeral. We did not dare to go against them,” a villager from Gucheng town in Henan’s county-level city of Yuzhou told Bitter Winter.

“My father had been a believer for several decades. He i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The crackdowns on religious funerals are part of the government’s campaign to “sinicize” religion, or bring it into unity with Communist Chinese culture.
In recent years, China has destroyed churches, burned down crosses, restricted religious expression online, and have attempted to rewrite the Bible and hymns so that the message reflects the Communist Party's ideology.

Beginning in February, the government plans to implement harsh new measures requiring all religious personnel to support and implement total submission to the CCP.

The “Administrative Measures for Religious Groups,” which consists of six sections and 41 articles, will control every aspect of religious activity within China and will complete the "Regulations on religious affairs" revised two years ago and implemented on Feb. 1, 2018.

“Religious organizations must adhere to the leadership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observe the constitution, laws, regulations, ordinances and policies, adhere to the principle of independence and self-government, adhere to the directives on religions in China, implementing the values of socialism,” says Article 5 of the new policies.

Persecution watchdog group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warns that the latest measures will be used by the Communist regime as a ”legal tool to further tighten space for religious groups.”

At a press conference earlier this month, David Curry, CEO of persecution watchdog group Open Doors USA, warned that the “greatest threat,” in his opinion, to human rights worldwide is China, which rose in the rankings from No. 27 to No. 23 in the 2020 report.

Curry stressed that the implications lie in China’s development of surveillance to control its people.

“Its implications are not just for Christians within China but for every country and for religious freedom generally,” Curry said. “Let me put it together. It is like a puzzle. The pieces are there but it is not until you put it together that you see it clearly. When you see it clearly, it is frightening.”

“I saw with my own eyes the surveillance on the street but also in the churches, watching their congregation,” he added. “Facial scans when you come in and then tracking you and generating reports [with] assumptions built into their artificial intelligence system that is tracking Christian behavior.”

Curry said that the more often a person is seen going to church, the more often they are to be labeled a “radical.”

“They are shutting down house churches at a massive rate — 5,596 churches shut down, many because they refuse to put surveillance cameras up to watch their congre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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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ing current conflicts and divisions and historical wounds, the annual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provides a multi-national platform for Christian leaders from diverse stakeholder groups – university, seminary, civil society, church, and younger leaders – to come together to pursue a common mission:

To forward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by inspiring and educating Christian leadership, fostering community and healing across divides, bearing prophetic witness, and being a catalyst for collaboration and new initiatives.

The Forum is the core program of the Northeast Asia Reconciliation Initiative (NARI). The geographic focus is currently China mainland, Hong Kong, Japan, Korea, Taiwan, and the United States.
Founded in 2012, NARI is grounded in mutually transformative relationships between the following partner organizations: the Duke Divinity School Center for Reconciliation, the Mennonite Central Committee, and institutions and leaders in Northeast Asia.The 88 participants of the 2018 Forum in Kyoto gather at Doshis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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