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소득공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궁리 | 2001년 10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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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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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인문 > 철학 > 한국철학 > 한국철학일반

한국인의 죽음론 고찰서. 죽음의 의미를 끈기 있게 고찰하는 한편, 고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태도를 심도있게 서술했다. 이를 통해 우리네 삶과 죽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공포를 덜어내고 정을 붙이려면 죽음과 절실하게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자소개

저자 : 김열규작가 정보 관심작가 등록
국어학자/국문학자
목차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29
-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44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59
-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64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149
-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158
-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165
- 과잉 상태의 죽음 ...177
- 열린 죽음 ...196
- 죽음이라는 전역 ...204

제4부 죽음의 문화적.신화적 형상
-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217
- 신화가 일군 죽음들 ...258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 죽음을 위한 몇 가지 슬픈 사연들 ...273
- 죽음의 유머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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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들을 죽음을 더불어서 우리는 경험한다. 더 이상 비길 게 없는 엄청난 감정의 복합체다. 그 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어둡고 습지고 침울했다. 공포롭기조차 했다. 하지만 끝내는 밝음과 화함으로 책을 끝맺기로 했다.'메멘토 모리.'삶을 다그치듯 죽음을 잊지 말자.
- <책머리>중에서

본문 중에서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죽음을 죽는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똑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뿐이다. 잘 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 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죽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체 성장과 소멸의 당연한 과정의 일부로서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설혹 그 과정에 껴들어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값을 지닐 수 있는 엄연한 왕국이다.

인간에게 목숨이 있는 동안, 인간은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에 매여 있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이 생물의 사슬을 깨기 위해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당위이고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애써 얻어낸 수확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생물학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생물학적인 사실로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과 영혼의 종교학에 짙게 물든 빛과 더불어 우리들을 찾아든다. 정신과 영혼의 자기 증명을 위해 우리들은 죽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법도 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명료하게 정신 및 영혼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여행 목적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은 거듭 자유의 징후가 될 수 있다. 죽음의 필연성은 종국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쿠제의 말은 그러기에 음미해봄직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에 기댄 피아론적인 명제가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목숨이 지는 그 순간에 자기 죽음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숨이 지는 순간의 죽음은 이미 자기 죽음이 아니다. 남의 죽음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흔히 임종이라고 하는 그 죽음이 자기 죽음이 아님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의식, 인간의 자의식 저 바깥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사뭇 먼 암묵의 어느 우주공간으로 유성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으로 잡혀지지 않는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과 주먹은 인간이 뭣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두 개의 큰 도구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과 따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모르는 시점에 두고, 그 시점에 도달하기까지 죽음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인간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수시로, 죽음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다름아닌 인간적 삶의 양상이다. 그것은 무척 개성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 누군가의 말은 매우 그럴듯한 것이다. 또한 죽음과 성애(性愛), 곧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둘을 서로 얽혀서 상호 기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아주 그럴듯하다고 해야 한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도 생물학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로서 명기되어야 할 명제다.

죽음을 문화로 가꾸다
인간은 죽음을 생물학에서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연에서 풀어놓았다. 죽음이 자연의 이법으로 절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을 인간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떠오른 해가 지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갈잎이 지는 것은 자연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인간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그것에 기댄 비유법으로만 처리하기를 인간은 바라지 않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대단히 인위적인 것, 매우 인공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그런 뜻으로 인간은 죽음을 만들고 생산한 것이다. 제 손으로 손수 죽음을 제작한 것이다. 죽음을 만드는 생산 공정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꽤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규격적이고 엄정한 것은 공산품이 아니다. 인공위성 따위도 아니고 유전공학 따위도 아니다. 그렇다면 뭣일까.

그것은 바로 의식, 종교적 의식이다.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이 육체의 것이기를 그만두게 된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인간 죽음은 인간 육체에 딸린 게 아니다. 육체의 종말, 말하자면 시신의 해체와 부패는 사실 죽음의 의식의 관여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인간 죽음을 떠난 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질적인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문화로 가꾸어왔다. 죽음을 문화가 되게 가꾸었고 뒤이어서 죽음을 문화 속에 가꾼 것이다. 에드가 모랭이 그의 유명한 저서 『인간과 죽음』에서 “이리하여 인간은 그 기원이 있은 뒤 줄곧 죽음을 그들의 풍족함과 그들의 갈망에 의해 길러온 것이다”라고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들은 소극적으로 죽음이 문화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사형제도가 빚는 죽음, 전쟁이 빚는 죽음은 인간 문화가 생산한 죽음의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앞서와는 좀 달리 이런 뜻으로도 인간은 죽음을 생산한다. 죽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고안해낸 인간적인 장치가 다름아닌 사형이고 그리고 전쟁이다. “죽음의 의식(意識)이 남겨놓은 마지막의 것, 그것이 곧 인간 자아이다”라는 명제에 맞추어서 “죽음의 의식이 남겨놓은 또 다른 마지막의 것, 그게 곧 문화다”라고 해도 큰 잘못은 없다.

'죽음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였기 때문이다. 하긴 자연에도 역사란 말을 쓰기는 한다. 가령, 지각의 역사, 지구의 역사, 그리고 우주의 역사란 말이 실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란 것이 결정론적인 변화인데다, 그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몇십, 몇백만 년을 예사로 넘나든다. 거기에다 그런 것을 역사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것에는 주체가 없다.

일어날 변화가 확인될 수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자연의 경우는 역사라고 부르기보다 변화라고 부르는 게 옳다. 덩달아 자연의 역사란 개념에 또 다른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다. 이 경우, 시간이란 게 완전한 중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로 참획하는 그런 시간 개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역사란 아무래도 문화의 몫이지만, 죽음의 역사가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닌 문화라는 것에 대해 말해주게 된다. 이른바 가정의례준칙에 묶인 오늘의 사람들이 조선조 말의 사람들이 누렸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누릴 수 없음은 사뭇 뻔한 일이다. 또한 주자가례에 묶인 조선조인들의 죽음이 불법에 귀의한 고려인들의 죽음과 다르리란 것은 아주 뻔한 일이다.

이같이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의 테를 벗어나고 자연의 테를 벗어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닌 죽음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죽음은 정신이나 영혼의 몫이 되고 문화의 몫이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경우, 조선조 말기를 거쳐 극히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도 확연하게 가족구성원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죽은 이는 가버린 가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서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보이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끼리 사이의 교섭보다 더 긴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호적부에서 삭제될 때, 죽은 이는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서 삭제되는 것이다. 사망신고서는 영원한 퇴거증명서다. 이 두 가지 죽음 사이에, 커다란 문화체계의 차이가 있음을, 역사의 차이가 있음을, 그리고 죽음을 정신화하고 영혼화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 소개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밑속학 전공.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역임.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연구교수 역임. 현재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저서:『한국인의 시적 고향』『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아리랑, 역사여 겨레여 소리여』『어머니, 동화는 이렇게 읽어주세요』『빈 손으로 돌아와도 좋다』『한국인의 신명』 등이 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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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l 2018-07-05 07:33:36 총 4 중4 구매 정독해요
삶에 대한 성찰과 가치 부여를 새롭게 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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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ha88 2018-06-22 01:26:44 총 4 중4 구매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내려놓게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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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죽음학의 대부! he**kmh | 2013-06-2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서울: 궁리, 2001.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308)
 
이 책은 한국 학자에 의해 쓰여진, ‘죽음’에 대한 에세이의 대표적인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작품과는 비슷한 관점이지만, 좀 더 한국스러운 글들이 담겨져 있다. 오히려 서양서적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워낙에 방대한 내용의 글들이 담겨있을뿐 아니라 한국사를 잘 모르는 까닭일 거다. 하지만 한글이라는 문자로 너무나도 잘 쓰여진 ‘죽음’에 대한 산문집이다. 너무 매력적이고, 인용할만한 문구들이 너무도 많았다.
 
문제제기를 하는 대목들은 다채롭고도 폭넓다. 죽음이라는 것이 절망적인 까닭은 그야말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38-9), ‘죽음의 몰개성’(67-8), 삶에 이어 죽음마저 박탈당하고(214),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이 산 자를 위해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져 형식을 존중하는 의례는 지나치게 간소화되었다.(167, 282-3) 한편, 우리 모두 홀로코스트의 공범이 될수 있다는 점까지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306)
 
이러한 잔혹한 현실을 직면할 때에라야 비로소 대안을 세울 수 있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한계가 인간 존재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270) 그런 까닭에 “죽음을 예성하며 삶이 재구성될 때부터 사람들은 죽음조차 살게 된다. 에누리없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사는 것이다.”(221) 죽음을 달관하고 미리 준비하고 연습했던 사람들의 ‘비창감’을 본받아야 하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닫기
'죽음의 선물을 받다'- 한국인의 죽음론을 통해 본 죽음의 의미와 가치 ch**edu59 | 2010-11-25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우리의 삶 주변엔 수많은 죽음이 공존하고 있고 죽음을 떼어놓고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외면한다.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나 또한 가지고 있는데, 어릴 적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두려움 또한 컸다. 항상 부모님이나 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서워 밤잠을 못 이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두려움은 커가면서 조금씩 극복이 됐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부정하고 망각하려는 태도를 갖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들이 외면하는 ‘죽음’이 ‘삶’만큼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소멸’과는 구분되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를 뛰어넘은 것이며, ‘죽음’은 오직 인간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도 큰 의미를 가지며 그러므로 인간이 ‘죽음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떠한가? 전 세계는 전쟁, 대량학살 등으로 죽음을 ‘대량생산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의 자살부터 노인, 초등학생의 자살까지 ‘자살공화국’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또한 뇌사, 안락사 등이 윤리적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 이 시대에 저자의 죽음에 대한 담론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우리, ‘한국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적 문화 중 많은 부분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언어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반된 모습들이었다. 사람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 말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쓰는 대신에 ‘돌아가시다’, ‘숨이 끊어지다’와 같이 돌려 말하는 우원법을 흔히 사용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도피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죽겠다’, ‘기가 죽는다’처럼 사람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말들에는 오히려 죽음이란 낱말을 과용하고 오용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은 죽음을 ‘떠나감’이 아닌 ‘돌아감’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은 생명의 원천이며 본향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죽음에 관한 인식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이처럼 조상들은 죽음을 단지 두렵기만한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경건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례와 관련된 여러 의식들이 존재했다. 저자는 지붕위에서 떠도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부터 곡성, 염, 상복과 상장 등의 다양한 의식들이 죽음과 관련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어찌 보면 복잡해 보이는 이러한 의식들은 조상들이 그만큼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저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과 더불어 현재의 죽음의 모습까지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인의 죽음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죽음이 의학적 결함이나 한계 등으로 간주되는 등 죽음은 인간의 물리적, 생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장례 의식이 간소화 되고, 장례가 상업화되었다. 이제는 집이 아닌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례의 모든 절차 또한 가족이 아닌 장례 관련 업체에서 모두 해 준다. 이러한 장례 의식의 쇠락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결국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해 장례를 경건하고 신성한 절차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시신을 ‘처리’하는 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장례 문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좀 더 확대하면, 본질을 잊은 채 편리성만을 추구하는 현대 물질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전통적 장례 의식이 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행태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에서 관을 크레인으로 옮기고 아픈 환자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것 등이 악상중의 악상에 해당한다며 이를 무성의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는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흐름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과거 조상들이 행하던 전통 의식을 모두 행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의식을 간소화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의식을 간소화함에 따라 거기에 깃든 사상이나 생각까지 없어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적 의식을 간소화한다고해서 이를 모두 악상이고 무성의 한 것이라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인 듯 해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나의 생각 또한 ‘산 자의 관점’에서만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일면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의식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히려 관의 이러한 형식적 요소들이 죽음을 무겁고 이질적이게 느끼게 할 것이다. 죽음을 웃으면서 맞이하자는 작가의 메시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과 문화와 연관된 ‘한국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새롭게 조명한 이 책은 오늘날 죽음의 의미를 되살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이 곧 삶으로 이어진다. 즉, 오늘날 우리사회의 죽음의 위기는 거꾸로 삶의 위기임을 말해준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책의 제목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 큰 메시지가 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알고 생에 대한 열정, 열의를 불태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죽음의 선물’이다.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되니, 나 역시 죽음에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닫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qu**tz2 | 2001-12-18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통곡한다. 마치 그것이 모든것의 끝이라도 되는 마냥. 상가집에 갔다온 사람들의 몸가짐은 조심스러워진다. 다른 이의 불행이 나에게 악을 가져다 주진 않을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때부터인지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배척했던 것 같다. 삶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의 말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표면화된 표현이 굳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은 산 자들에게 늘 배척되기 마련이었다. 무덤이나 화장터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동네마다 일어나는 님비현상은 어쩌면 산 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늘 그렇듯 산자들은 죽은자들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거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피함을 원했던...

이 책은 그러한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바라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도입과 함께 죽음에 있어서도 도래된 몰개성화, 무가치화, 대량화 등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차량이 지나갈 지라도 어느 누구 하나 그 차량을 보며 성호를 긋는다던지 조용히 묵념한다던지 하는 사람은 존재치 않는, 오히려 그 장례식 차량 조차도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차량과 속도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차가운 외침이랄까.

이 책의 그러한 관점이 때론 신선하게 느껴진다. 삶과 죽음은 정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태동에 죽음이 숨쉬고 있고, 죽음은 삶을 영양분으로 삼아 서서히 커가고 있는 것이라고... 영양분인 삶이 다 떨어졌을 때 마침내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가끔씩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보다 그것을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으리라 본다.

이 책은 죽음의 역사에 대해 굉장히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각 시대의 죽음에 대한 관점, 무덤의 모양 등을 통해, 태초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고 두려워하진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는 동쪽방향을 향해 일제히 뻗은 무덤과, 산이 있는 곳을 향해 자리잡고 있는 무덤들은, 죽음이 한 사람의 영원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상징함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예였다. 아이가 죽었을 경우 번데기처럼 나뭇가지에 매달아 또 다른 삶이 잉태되길 기원했던 모습, 죽은 이의 옷가지를 흔들며 그의 영혼이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갈망해보았던 것. 이와 같은 것들은 오늘날은 도무지 꿈꾸지 힘든 것인듯 하다. 단 4일만에 죽음의 모든 과정이 끝나야 하는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에....

중간에 인용된 제망매가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누이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부모와 자식이 나뭇가지와 낙엽에 불과하다는 식의 표현을 담고 있다. 자식의 모든 삶은 부모로부터 비롯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땅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존재임을... 어떻게 보면 너무도 쓸쓸하고 오늘날 죽음이 가지는 단절의 의미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의 떨어짐이 부식 아닌 보다 더 큰 세계, 미타찰을 향한 나아감임을.... 또 다른 영생을 위한 한걸음 다가섬임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잊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신선한 내용의 이 책에도 무언가 문제점이 있긴 있는 듯 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무슨 죽음을 기억할 것인가.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았을 때 나는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을 기대했었다. 그 내용이 조금은 어려울지라도,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이 이 책을 통해 벌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의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 정도에 그친 듯 하다. 새로운 의미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애초에 기대했던 거대한 의미는 함의하지 못하고 있는듯 해 조금은 아쉽다.

둘째, 계속적인 내용의 반복성이다. 역사적 고찰은 정말로 신선하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그 어떤 책에서조차도 죽음, 그것도 우리 나라 죽음의 역사를 이렇게 내실있게 다루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읽은 내용이 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뒤에서 2-3번씩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문장 자체가 아주 비슷하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은 다른 말로, 요약 정리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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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동학의 영적 기록: 회상영적실기 최종성

 

[기조발표 제 부2                2발표] 2020 한국종교학회 기조발표 요지문

초기 동학의 영적 기록: 회상영적실기

                                                                                                                                 최종성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1.     조선시대 민중을 위한 획기적인 문화 창달이 두 가지 있었다.[1]) 하나는 개국 후 50(1443)이 지나 면서 창제된 한글이고, 다른 하나는 망국 전 50(1860)에 창도된 동학이었다. 한글이 국가왕실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민중에게 배달된 하향식의 문화성과로서 어문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면, 동학은 민간 차원에서 개발되어 지역의 민중에게 수평적으로 퍼지면서 영적 소통을 실현시켜 주었다 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중들은 한글 자모를 깨우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원활히 할 수 있었고, 또 시천주(侍天主)의 주문을 통해 신인 간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2.     그런데, 동학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른바 갑오년(1894)의 동학이 그것이다.[2]) 당연히 동학년은 갑오년이고 녹두장군이 끈 전장,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오른 농민군, 깃발 나부끼는 들판이 압도한다. 이보다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운(水雲)으로 대변되는 경신년(1860)의 동학 이 자리한다. 동학의 지리적 풍경은 피 끓는 함성이 가득한 들판이 아니라 촛불 밝혀 기도에 전념하 는 고요한 산중으로 바뀐다. 각기 저마다의 동학에 대한 풍경과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혁명(전 쟁 과) 영성이 제대로 화해되지 않는 한 경신년의 동학은 몇몇 종교인들만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그들의 기억마저도 희미해지고 말 것이다.

3.     주지하다시피 갑오년에는 1)한반도를 둘러싸고 청 일이· 각축하는 대외적인 흐름 정치적( 환경) 2)조 세 및 토지의 모순에 반발하는 농민운동의 물줄기 경제적( 환경 와) 3)영적인 스승이 입은 억울함을 해 소하려는 신원운동의 맥락 종교적( 환경 이) 한 군데에서 만났다. ‘동학란 이든’ , ‘동학혁명 이든’ , ‘농민전 쟁 이든어떤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동학의 영적 자원이 간과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러한 종교 적 원천이 어떻게 활용되고 배분되었는지 살피는 것이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브루스 링컨의 말 대로, 폭력적 수단만 가지고는 혁명이 성사되기 어려우며, 이데올로기적인 설득과 정서적인 환기를 제공하는 종교적 담론의 힘이 결부될 때 사회의 재구성이 용이해진다고 할 수 있다.[3]) 동학을 소수 지도부만의 문제로 혹은 형식적인 외피로 간단히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목소리 (vox populi)를 하느님의 소리(vox dei)로 믿으며 응집할 수 있게 했던, 그래서 저들의 목소리가 군현 단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장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동학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이 서울로 잡혀와 공초했던 내용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동학을


수심경천(守心敬天) 하는 도()로 파악하고, 그러한 동학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진술한다. 아울러 불 가항력적인 괴질 콜레라 로부터( ) 벗어나는 길도 동학의 경천수심(敬天守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4]) 녹 두가 동학의 핵심으로 파악한, ‘하느님을 공경하며 모시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 이야말로수운이 역설 한 시천주와 상통한다. 마른 땅의 녹두(綠豆)를 촉촉이 적셔주며 생장시킨 것이 최제우가 몰고 온 영 적 비구름(水雲)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4.     초기 동학도들에게 기억되는 영적 천재의 자취는 어떠했을까? 시천교계열의 두 교단에서 발간한 두 도설서(圖說書), 『회상영적실기(繪像靈蹟實記) (』 시천교총부)와 『시천교조유적도지(侍天敎祖遺蹟圖志) (』 시 천교본부 가) 단연 주목된다. 그림과 문자로 교조의 자취를 설명하는 방식은 『석씨원류(釋氏源流),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바이다. 아마도 동학 교조의 신이한 행적과 일대기를 주제별로 정리하고 신성의 감화, 영적 수련, 상서와 이 적 등을 도해로써 쉽게 설명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잊혀진 종교사를 새삼 일깨우고 그것을 영적인 삶 의 원천으로 삼도록 교화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동학 2대 교주인 해월에게는 3, 즉 구암(龜菴), 송암(松菴), 의암(義菴)으로 대표되는 3 제자가 있었다. 송암 손천민(1857-1900)이 처형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의암 손병희(1861-1922) 1906년 귀국하여 구암 김연국(1857-1944)과 손잡고 천도교를 창건하면서 동학은 본격적인 종교조직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한때 의암의 측근으로서 고락을 함께했지만, 끝내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한 일진회 장 이용구(1868-1912)가 그해 시천교를 창립하고 대례사(大禮師) 직에 앉음으로써 동학의 분립이 본격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천도교 대도주를 역임하던 구암 김연국이 1907년 손병희와 불화를 거 듭하다 결별한 뒤 자신의 손으로 출교시켰던 이용구의 시천교로 들어가 최고 교직인 대례사가 되는 얄궂은 운명의 반전을 겪으면서 동학 진영은 더욱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병세 악화로 일본 고베 지역 스마(須磨)로 건너가 요양하던 이용구가 1912 5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잠재되어 있던 시천교의 알력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1913년에 이르러 송병준이 이끄는 시천교본부 견지동의( 송파시천교 와) 김연국을 따르는 시천교총부 (가회동의 김파시천교 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시천교 계열의 두 교단은 19155개월 상간으로 초기동학의 역사를 다룬 도설서를 앞 다투 어 내놓게 되는데,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회상영적실기(繪像靈蹟實記) (』 시천교총부, 1915 7) 가 그 하나이고 그 맞수격인 『시천교조유적도지(侍天敎祖遺蹟圖志) (』 시천교본부, 1915 2월 가) 또 다른 하나이다.

『회상영적실기 는』 총 51개의 도설을 다루고 있는데, 철저하게 영적 스승인 수운(1-24)과 해 월(25-51도 에만) 내용을 국한시키고 있다. 반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수운(1-25)과 해월(26 -54) 이외에도 해산 이용구(55-69도 와) 제암 송병준(70도 의) 도설을 추가하여 총 70개의 도 설을 구성하고 있다. 전자가 구암 김연국의 서사를 배제한 채 오로지 신앙적인 모델로서 스승들의 과거 이적에 주목하였다면, 후자는 과거의 종교적 유산을 이어받은 후예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각 시키려 이용구와 송병준을 추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과거 해월과의 친연적 관계로 치자면 당 대에 시천교총부의 구암 김연국이 단연 압권이었을 테고, 그러한 도통적 연원에 취약했던 시천교본 부 입장에서는 이용구와 송병준의 행적을 교조들의 유적에 병행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효과적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책의 구성에 있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도설 전체의 목차를 제시한 뒤 곧바로 70개의 도설을 차례대로 설명하며 끝을 맺고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을 싣고 있지 않다. 반면, 『회상영적실기』는 51 개의 도설을 전개하기에 앞서 당시 시천교총부를 이끌던 지도부 6명의 서문을 제시하면서 발간 배 경과 맥락, 그리고 책의 취지와 가치 등을 역설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당시 『회상영적실기』의 서 문을 작성한 이는 교주인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을 비롯해, 그를 따랐던 성도사(誠道師) 용암(龍菴) 김낙철(金洛喆), 경도사(敬道師) 인암(仁菴) 최유현(崔琉鉉), 경도사(敬道師) 청암(淸菴) 곽기룡(郭騎

), 신도사(信道師) 연암(淵菴) 김낙봉(金洛鳳), 신도사(信道師) 신암() 원용일(元容馹) 등이었다.

도설의 내용에 있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그림 이미지의 묘사가 정밀한 것에 비해 설명 내용이 다소 간략한 편이다. 반면 『회상영적실기 는』 도상이 다소 거칠지만 설명 내용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 다. 도설의 문헌만을 고려하자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한문 문장으로만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데 비해, 『회상영적실기 는』 한문으로 주제문과 찬문(贊文)을 작성하고, 연이어 국문의 번역(찬문 번역은 제외 을) 싣고 있다. 이러한 상호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책 모두 주제와 관련된 장면과 내용을 선택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지면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도설의 맥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원천으로서의 역사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천교조유적도지』의 경우에는 동일교 단에서 같은 시기에 출간한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 시천교본부, 1915), 『회상영적실기』의 경 우에는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 (』 시천교총부, 1920)를 각각 배경에 두고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고 본다.

5.     앞서 언급했듯이, 『회상영적실기 는』 6편의 서문과 51개의 도설로 이루어져 있다. 수운과 관련된 도 설이 24(1-24)이고 해월을 다룬 도설이 27(25-51)이다. 도설은 대개탄생-수도-각성-전발-피 체 죽음 묘역- - ’ 등의 순서로 전개되며 주제에 따라 초자연적인 상서, 현몽, 이적, 감응, 예시 등의 요 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회상영적실기 에』 수록된 도설 목차는 아래와 같다.

6.     동학의 영적기록으로서의 『회상영적실기 를』 이해하기 전에 동학의 영성에 대해 간략하게 생각해보고 자 한다. 서구 개념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종교 전통의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로 수렴되는영성 의개념을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동학의 인간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영성은 진정한 인간 되기, 곧 자기 진정성- (self-authenticity)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생래적으로 자동적 으로 주어지는 인간(human being)이 아니라 어떤 각성과 공부를 통해 스스로 진정한 인간이 되려 는(being human) 노력과 관련된다. 불성(佛性), 천리(天理), 이마고 데이(imago dei) 등은 인간이 자기 진정성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 모본과 준거가 될 만한 것들이었다. 동학으로 보자면 그것이 시 천주(侍天主)으로 응집될 수 있다. 수운이 설명했듯이, 하느님 모심은 단순한 숭배나 일반적인 시중 듦이 아니라 신성의 내면화(內有神靈), 내적 신비의 외재화(外有氣化), 그리고 신인합일의 영속화(各知不移) 등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었다. 하늘을 모심으로써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를 체화하고, 기가 감응하고 심이 통하는 삶을 영속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7.     그렇다면 『회상영적실기 에서는』 영성, 혹은 영적인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동학의 영성과 관 련해 『회상영적실기 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얻기는 쉽지 않으나 몇몇 서()의 내용이 주목된다.

먼저, 시천교총부에서 경도사를 지낸 청암 곽기룡이 작성한 서문에는 천지영성(天地靈性)과 대성인 지영성(大聖人之靈性)을 언급하고 있다. 곽기룡이영성 이라는단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어 주목되는 데, 당대 교단 내부에서도영성의 생활 과’ ‘세정 세속 의( ) 생활 을대비시키며 영성을 독립적으로 사용 하고 있는 사례가 있어 그리 낯선 표현은 아니었던 듯하다.[5]) 교조의 삶에서 상서, 감응, 비술, 이적 등이 계속된 것은 천지와 합덕한 교조의 품성이었기에 가능했고, 이러한 성인의 영적 본성을 『회상 영적실기 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는 취지이다. , 교조의 인생은 천과 동행하는 삶이었고, 『회상 영적실기 는』 동학 후예들이 영적 표본으로 삼을 만한 원천들을 싣고 있다는 것이다.

! 이 책 중의 몇 개의 그림과 기록이 바로 두 성사와 대교주의 비밀스런 것과 신령스러움을 제시한 것에 지 나지 않으니, 즉 천지의 영성(靈性) 중 만분의 일일 따름이다. 오직 우리 후학 된 자가 이 그림을 공손히 우러 러보고 이 기록을 엄숙히 읽으면 숙연히 공경함이 일어나고 황홀하게 깨달음이 있을 것이니 곧 대성인의 영성 일부분만이라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구암문인.( 경도사청암 곽기룡 근서)

! 是卷中幾條繪像實記, 直不過兩聖師及大敎主秘題靈示也. 卽天地靈性萬分之一耳. 爲吾後學者, 拜瞻是圖, 莊讀是記, 肅然起敬, 然有覺, 則大聖人之靈性, 亦可以窺一斑矣.(龜菴門人 敬道師淸菴 郭騎龍 謹序)

두번째로 경도사 인암 최유현의 서문에서도 교조의 인생은 천지와 더불어 묘함을 공유하며 천지 와 동행하는 삶이었다고 진단하고 『회상영적실기 를』 통해 천인일치의 신비를 중생들에게 보편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본 실기에 실려 있는 것은 곧 몇몇 예를 들어 후세에 전해줌으로써 단지 우리 스승과 천지가 그 묘함을 함께 했었음을 증명코자 하는 것이다. … 오직 우리 구암 장석만이 바로 이 근원에 접하여 그 종지를 홀로 얻었다. 따라서 선사 당시의 비밀스럽게 숨긴 유적을 모두 모아서 마음으로 온갖 법을 전달하여 종류별로 다 갖추게 함 으로써 이 책을 인쇄하게 되었다. 그런즉 두 스승과 지금 우리의 장석 구암 이( ) 그 체와 용이 서로 들어맞고, 앞 뒤로 일치하니 어찌 공경히 칭송치 않겠는가! 오호! 이로부터 오만 년을 지내는 동안 항하사와 같은 중생이 영 적의 여러 예를 볼 수 있게 되어 모두 천인의 한 이치를 우러르게 되었으니, 어찌 본서의 그림과 기록에 힘입 은 바 아니겠는가? (구암문인 경도사인암 최유현 근서) 而載在本記者, 則示以幾例, 遺諸後世, 而只證我師與天地同其妙矣. … 惟我龜菴丈席, 直接斯源, 獨得其宗, 先師當時之秘藏遺蹟, 咸蒐彙輯, 心授万法, 類別悉備, 乃有斯編剞劂之擧,然則兩師與今我丈席, 用相符, 前後一致, 豈不欽頌哉! 嗚呼! 自玆以往經五万斯年, 恒沙衆生, 得見靈蹟之數例, 咸仰天人之一理, 豈非賴乎本書之繪記也哉! (龜菴門人 敬道師仁菴 崔琉鉉 謹序)

세번째로 시천교총부를 이끌었던 교주 김연국의 서문은 『회상영적실기 를』 통해 성인의 영적 자취 를 공표하고 전수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싣고 있다. 스승을 지근에서 오랫동안 모셨던 경험이 있는 교단의 책임자로서 그는 교조의 참된 자취 영적 가( ) 수운과 해월을 경험하지 못한 후예들에게 잊히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대중들이 상상하고 공경하며 앙망할 수 있도록 영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회상( ), 취지를 분명하게 밝힌 기록을 덧붙이게 해서 실기( ) 하나의 도설서를 완성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지금 성인께서 떠났으니, 참된 자취가 적막하니 후학들이 어찌 법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그 참된 자취 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함을 걱정하였고, 또 도유들이 알 수 없다고 여겨 탐탁지 않아 하며 버릴 것을 걱정하여 그 자취를 묘사할 것을 명하여 대강을 여러 제자들에게 주어 더욱더 지극한 자취를 마음에 새기게 하였다. 그 럼으로써 공경하고 앙망함을 만대에 전하여 영원히 법의 집의 하나로 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취의 말미암 은 바를 그림으로 그려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이 비록 다 그려져도 세대가 점점 내려가고, 그 사람이 적멸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면, 그림은 말을 할 수 없고 그 내용도 분명히 전해지지 않아 그 본래적인 취지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또 다시 그 일을 기록하여 덧붙일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취의 말미암은 바를 기록 하여 덧붙인 것이다. 실기가 이미 완성되어 두세 명이 세상에 공표되기를 원하여 나에게 서문을 쓰기를 요구한 까닭에 마침내 서를 써서 그 만분의 일을 이를 따름이다. (구암 김연국 근찬) 今者聖人去, 眞跡寂矣. 後學烏可效法? 嘗憂其眞跡之不傳於後世, 而又悶於道儒之以爲不可知而等棄, 命其跡描寫之, 槪以授諸子益印至跡, 而敬仰傳於萬代, 而永爲法戶之一也. 圖之所由以成者矣. 圖雖成劃, 世愈降焉, 而其人隨寂, 畵不能語, 而傳不得明, 恐不能盡其旨. 又命其記事而付之, 記之所由以付者矣. 『實記』旣成, 二三子欲公於世, 而要余序之. 故遂序其萬一云爾.(龜菴 金演局 謹撰)

8.     『회상영적실기 는』 교조의 탄생에서 죽음 이후까지의 영적 자취에 대한 예조, 상서, 비술, 감화 등을 상세하게 싣고 있다. 그중에서도 천성산기도, 경신년득도, 도통전수도, 적조암기도 등에 관한 도설이 주목된다. 이들 도설은 신성의 예비 신승헌천서도( ), 신성의 체험(천성산기도도, 시수천명도, 궁을영부 도, 은암강관도, 조암강도도), 신성의 전승 도통전수도( , 하몽전발도 을) 담고 있으며, 이런 사건과 경험 속에 강렬한 신적 감응(降話, 降筆, 降管, 扶鸞, )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9.     동학은 경신년(1860) 산중에서 시작된 영적 각성, 들불 같은 갑오년(1894)의 혁명과 전쟁, 그리고 전인미답의 새로운 근대적 환경에서의 분열 등을 차례로 겪어야 했다. ‘영성-전쟁-근대성 으로점철 되는 초기 동학의 경험에 대한 이해와 기억도 제각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1) 동학은 영성보다는 전 쟁, 산중의 고요한 기도보다는 깃발 나부끼는 들판의 함성, 수운보다는 녹두장군이 대중의 이목을 받고 있다. 2) 그러나 동학의 온전하고도 균형 있는 이해를 위해서 신앙적 원천으로서의 영적 기록 들에 대한 발굴과 정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3) 그런 의미에서 주류교단으로부터 배제된 시천교 계열 에서 발간했던 영적 기록물인 『회상영적실기 와』 『시천교조유적도지 를』 주목할 만하다. 4) 여기에서 는 『회상영적실기 에』 실린 영적 천재의 자취에 주목하였고, 그 중에서도 천성산기도, 경신년득도, 도 통전수도, 적조암기도 등의 도설을 살펴보고자 했다. 6) 그것은 동학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 즉 자기 진정성을- 모색하는 동학적 영성의 모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1] ) 최종성, 『한국 종교문화 횡단기』, 이학사, 2018, 80-81.

[2]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미래사, 1992, 90.

[3] ) Bruce Lincoln, DiscourseandtheConstructionof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p. 3-11.

[4] ) 『全準供草』(17285), 재초.

[5] ) 『龜岳宗報』 4(侍天敎報社, 1915.2) <勸誘文林>란에 실린 임우탁의宗敎人의 立言이라는 글 속의靈性의 生活과 世情의 生活의 如何를 館라 는제하의 내용을 참조할 만하다.

국가폭력과 한국사회의 트라우마 김동춘

 국가폭력과 한국사회의 트라우마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 도입

20세기 한국인들은 일제 말 징용과 징병, 일본군 성노예 동원, 해방 후 좌우 대립과 분단, 한국전쟁, 이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군사정권의 억압과 폭력과 광주 5.18 등을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폭력 의 경험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혔으며, 그것이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크게 손상 하였다. 분단, 전쟁, 군사독재 시간에 벌어진 국가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여러 과거청산 기구 의 진상규명 활동, 사법당국의 재심과 보상 결정,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회복 등의 방법으로 진행 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겪어온 정신적 외상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실태 조 사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인정, 집단적 치유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모 든 상처는 오직 개인의 질병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개인이 감당하고 치료해야할 일이다. 분단과 전쟁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 증상이 의학적 사실을 넘어서 사회적 사실로 되고, 과거청산이 법적인 처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의제가 되어야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무엇보다도 좌우 이념 대립으로 동족, 심지어 가족 간에 죽고 죽이는 일들을 수 없 이 많이 만들어 냈고, 지금까지 그 적대의 상처를 남기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자기 눈앞에서 부모나 형제가 총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거나, 그러한 일을 직접 경험했던 남북, 좌 우 양측에 의한 피학살 유족들은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을 갖고 살아왔다. 즉 가공할만한 폭력현장에서 벌레 취급을 당한데서 오는 극도의 무력감과 자기 비하,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겪고도 국가에 대해 가해 책임을 묻거나 가해자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부모 형제가 억울 하게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 등이 이들의 정신에 남아있다.

국가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여러 과거청산 기구의 진상규명 활동, 사법당국의 재심과 보상 결정,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회복 등의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와 PTSD 증상이 의학적 사실을 넘어서 사회적 사실로 되고, 과거청산이 법적인 처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 회적 의제가 되어야하고, 화해 치유의 과정이 사회적으로 전개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2.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정신적 상처

1) 집단학살 피해 한국전쟁당시 피학살자들과 그의 가족들, 군사정권 하의 고문과 폭력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광주

5.18 당시폭도 로지목된 사람들과 가족들이 모두가 그런 말도 안되는 충격을 당한 사람들이다. 모든 국가폭력 피해 중에서 학살, 고문 피해는 가장 충격적인 것이며, 그것은 당사자들의 정신 도덕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그의 평생을 옥죈다.

한국전쟁 전후 자기 눈앞에서 부모나 형제가 총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거 나, 그러한 일을 직접 경험했던 피학살 유족들은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을 갖고 살아왔다. 즉 가공할만 한 폭력현장에서 벌레 취급을 당한데서 오는 극도의 무력감과 자기 비하,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겪 고도 국가에 대해 가해 책임을 묻거나 가해자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부모 형제가 억울하게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 등이 이들의 정신에 남 아있다. 그래서 생존자들은원통하고 분한 생각이 솟구쳐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느낌을 갖고“, ” 식사를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대화를 하다가도 그 생각만 나면 정신을 잃는증세를 보였다. .경에 의해빨갱이 로        몰려서 죽은 것도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사건 이후 수십년 동안빨갱이 가 족 으로        지목되어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도 없었고, 계속되는 사찰과 감시, 사회적 차별을 당했다는 사 실 자체도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이들 유족들은 무기력감, 공포, 대인기피, 침묵, 그리고 과민증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그 자체로부터 상처를 입은 5,60년대 한국인들은 대체로내부 망명[1])과 망각, 기복 주의 신앙에의 집착을 통해 전쟁 분단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했고, 그 중 피학살자들은 가해자 즉 국가 의 편에 섬으로써 생존의 길을 갔다. 그것은신분정화 의   일종이었다. 피학살 유족들이 좌익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교회에 간 것도 그 중 하나였지만, 남성의 경우 군 입대가 대표적인 신분정화, 신분세탁 행 동이었다. 한국전쟁기 제주도 4.3 피해자들의 군 입대 선풍도 그것이었다. 들은 자신의 가족을 국가 안 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국가가 공식 사용하는 빨갱이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일부 피학살 유 족들은 빨갱이를 성토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두려워 선 거 때마다 무조건 여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정치 사회적 위치를 국가의 주류나 핵심에 두기 위한 자기방어, 자기변호의 몸부림이 었다. 즉 차별의 구조, ‘빨갱이 담론 을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 헤게모니의 제약 아 래서 행동의 반경을 설정하는 셈이다. 피학살 유족들이 희생자들이띠끌만한 잘못도 하지 않았던’ ‘순수 한양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상당한 교육수준을 갖고 있거나 사회단체에 가담한 경력이 있 는 유족들도 별 차이가 없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불순분자라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함으로써, 가 해자인 국가의 인정을 받으려 하였다. 여기서 바로 피학살자 진상규명 운동 과정에서 보도연맹 유족들 에 대한 여타 유족들의 거리두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학살사건 이후부터 보도연맹 가족들은 빨갱이라고 시골 동네에서는 이웃 사람들이 농사 품앗이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그들의 자녀들은 공무원도 못되고 육사도 못가고 회사에 들어가도 인사발령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피학살 유족들은 자신은 순 수양민이기 때문에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들을 차별하였다. 즉 당신들 (빨갱이) 때문에 우리순수한 양민 이함께 빨갱이 취급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들순수 양민 들이좌익 활동가 유족이나 보도연맹 유족들을 물리치는 이유였다.

사건 이후 거의 60여년 지난 시점의 조사에서도 제주 4.3 피해자 중 설문에 응한 70명 중 68.6% PTSD 장애를 겪고 있었고, 52.9%가 우울증을 겪고 있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군.

. 미군에 의한 피학살자 가족들의 대부분은 감정조절이 안되어 대인관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심리적 충격. 대인기피, 화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치료경험이 없는 사람이 85%에 달했다.

2) 고문 등 인권침해 피해

지난 군사정권 시절 고문 등의 현장에서 이들을 거의 짐승, 벌레와 같은 존재로 취급당했으며, 피해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이하의 존재로 느꼈다. 고문은 권력에게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고, 인간의 자존감과 자아를 철저하게 붕괴시키기 때문이다.켰다. 그리고 사건 이후 수십년 동안 권력과 사회가 이 들에게 가한 존재 부인( 빨갱이, 간첩 은) 이들을산 송장’, ‘금치산자혹은 국가 내의 식민지 백성, 천민 이나 노예처럼 살았다. 누구도 그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반공지 상주의 사회에서 빨갱이, 폭도, 간첩으로 지목되어 산다는 것, 그것은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로부터 퇴출 을 의미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살아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육체적 정신적 상처는 평생 따라다닌다. 그리고 고문 등 국 가폭력을 가한 국가가 이 문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모든 법과 제도를 고치고, 관련자를 처 벌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병든 국가는 계속 사회를 병들게 한다. 조작간첩 사 건 피해자 김철씨는수개월 동안 밀폐된 고문실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군을 고문 했던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다 고말했다. 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끔찍했던 고문실은 그 자체가 공 포다.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가족과 이웃을 불신하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자살하기도 했고, 가 족의 죽음이나 친구들의 고통을 보고서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즉 국가폭력이 계속 정당화되는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는다. 남들은 죽었는데 자기 손자 살아났다 는 수치심, 가족을 돕지 못했다는 수치심, 폭력에 굴복했다는 수치심, 고문 앞에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 다는 수치심이 그것이다. 전쟁 기 피학살자 가족들도 그렇지만 민주화 운동 유가족들도 혈육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데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다. 정보기관이 가족을 협박할 경우 수배자인 가족을 자수시키거 나 군 입대 시킨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삶과 생각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 즉 폭력을 당했던 그날 그곳에 머물러있다. “피해의 현 재성,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갖는 고통의 극단이다.... 정신활동이 그곳에 멈추어 있다는 것, 어떤 자질한 행복이나 감정을 잘 느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절정이다”. 사실 베트남 참전군인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체험에 주로 기초한 미국의 PTSD 라는 지표자체가 한국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고통을 측정하기에는 부적절한 지표 일지 모른다.

조작 간첩, 인권침해, 및 고문 피해자들의 경우는 본인이 직접 피해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 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모든 나라의 모든 형태의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와 피해의식, 사회의 냉대와 차별, 이웃과의 단절, 실질적인 불이익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에 일체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종류의 피해를 겪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 다. 이들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아도 언제나 죄인처럼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이 어느 정도 규명되고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어도 여전히 정상적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서투르다.

앞의 진실화해위 조사 중 피학살 가족의 경우 PTSD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20% 정도에 불과했으나, 군사정권 하의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경우 조사 대상자 58명 중 43% 25영이 PTSD 증상을 앓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8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살 피해자의 59%, 인권침해 피해자들 중 68%는 외상 경험에 대해 침투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기억이 났다고 답하고 있다. 한편 광주 5.18 피해자들 역시 사건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과잉경계에 의한 피해의식, 무기력 과 희망상실 등 만성화된 트라우마티즘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6년의 조사에서는 당사자 들의 경우 41.6% PTSD를 경험하고 있으며, 부상자들의 경우 45.2%가 중간이상의 PTSD를 경험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의학연구소의/              고문피해자 213명 대상의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6 % 163명 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고문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국가폭 력을 입고 생존한 사람 중 48.8% PTSD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생존자 중 41.6% PTSD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한편 이 조사에서 조사 참여자인 고문피해자의 11.3%가 정신 분열증 진단을 받았다고 응답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평생 유별율 인 0.5%에 비해서 매우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조사 참여자들 중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52 명으로 응답자의 24%를 차지하였다. 특히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은 전체 43 17(39.5%)이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은 3,4 회 정도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고, 10회 이상인 경우 도 2명이 있었다.


억울하게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그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한 일에 병적으로 집착을 한다. 즉 폭력의 트라우마는 자신의 해결되지 않는 원통함, 분노를 풀기위해 피해자임을 벗어나기 위해 집착 을 가져오게 된다. 자신이나 가족이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려 학살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나 는 간첩이 아니다’, ‘는 빨갱이가 아니다 라고계속 외치면서, 오직 그 멍에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사력을 다한다.

3) 가해 군인들이 겪는 트라우마

전쟁에서 동료가 죽는 것을 목격한 군인 일반,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할 수 없이 살인과 고문을 저 지르는 군인. 경찰도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군인 중 20% 2004년 당시 의 조사에서도 부정적인 심리적 충격에서 고통받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수백만명 중 몇 퍼센트가 외상에 시달려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정부가 한번 도 조사조차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 첨전 한국군도 공포증에 시달린다는 증언이 있 다, “풀밭 위를 걷다가 다리를 잃은 수 많은 동료 부하를 봤기 때문에 풀밭을 걸어가지 못하는 증세가 있다 고                 한다.        미군의 경우 이라크와 아프칸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 30%PTSD 증후군을 보인다는 보고서가 있고, 10만명당 미군 자살률은 이들의 2005년의 12.7명에서 2008년에는 20.2명으로 두배가 까이 늘었다.

전투 현장의 군인들에게 적은 사람이 아닌 존재, 즉 괴뢰, 빨갱이, 오랑캐 공비, 개 등으로 비인간화 됨으로써 살인에 대한 심리적 거부반응을 완화한다. 그리고 적군의 사살하는 것은 전우인 내 동료를 죽 인데 대한 복수 행위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어 살인의 부담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다. 군인들에게 전쟁은 승리하고 정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존을 위한 전투로 기 억되고 있으며, 공포 그 자체다.

학살 현장의 가해 군인이 겪었던 트라우마도 상상 이상이다. 80 5.18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 입되었다가 이후 시민에게 총을 겨눴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시민을 사살하라는 상관의 지시에 반항하 다 구타를 당한 군인이 이후 29년째 정신병원을 전전하였다. 보훈처는 군 복무로 인해 정신병이 생겼다 는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법원은 정신적 피해를 인정하고 불법행위로 동원된 데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5.18 진압 63대대 출신 임00씨는 "5.18에 투입된 63대대 제대 장병 350명 중 적어도 150명에서 100명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고" 말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상이군인이 된 사람들 역시 소모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에 대한 분노,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의 상실로 우울증을 겪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상관에 대한 분노도 있다. 그것은 전쟁 이후 이들이 버려지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빠지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부상당한 자 신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느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이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폭력을 표출하기도 했다. 5,60년대까지 우리 국민들은 손목에 쇠갈코리를 달거나 의족에 의지해 절둑리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을 하는 상이군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린 국가에 대한 분노의 표 출이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외침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는 아직 이들 군인의 정신적 피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후 참전군인, 상이 군인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졌지만, 이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상이군인의 고통은 물 리적 자원 연금 과( ) 교환되고 국가수호의 상징적 자본이 된다. 따라 고통의 정도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등급화), 전유됨으로써 전쟁의 참상에 대한 도덕적 호소가 금기된다. 상이와 용사가 국가에 의해 대중 의 기호로 표상됨으로써 개개인의 존재는 가려져 있다. ... 전우들이 전사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데 대 한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다. 대중매체는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상흔의 이야기로 전도시 켜 버린다. 이들의 육체적 상흔은 국가에 의해 반공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내세워진다. 그러나 전쟁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도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베트남 파병 군인이나 한국전쟁 참전군인 등 국가를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지휘관 급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누려도 이들은 사실상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징에 더욱 집착을 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이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들은 자신의 과거의 활동을 정당 화하고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국가에 더욱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화 이후 5.18 항쟁의 주도세력이나 민주화 세력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 더욱 강한 피해의식과 소외감을 가진 나머지 반공, 발전, 국가주의에 더욱 집착을 하게 된다(윤충로, 2007). 국가 를 위해 싸우다가 피해를 입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기를 열망하는 참전 군인 은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처럼 국가 폭력의 행사에 가해자의 일부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것이 국가라 는 정체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서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물론 참전자들 대상의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 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한국에서는 사건이후 오래 시간이 지속되어도 만성적인 트라우 마를 겪는 사람이 많고, 학력이 낮거나 계층적으로는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즉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정치체제가 분단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 고, 사회적 배제나 무관심이 지속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국가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들의 트라우마가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상이군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학력, 경제력,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 더욱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광 주 5.18 피해자의 경우도 항쟁에 끝까지 참여했던 주로 바닥 출신 사람들, 사건 이후에도 노동자나 사 무판매직에 종사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시 학생이었던 사람 등에 비해 훨씬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국가, 사회전체 차원의 트라우마와 도덕적 아노미

개인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식민지 체험, 외적으로부터의 공격, 대규모 재해나 따돌림 등을 집단적으 로 겪은 국가나 민족, 사회일반 그리고 특정 지역사회도 그와 유사한 정신 상태, 즉 공포와 슬픔, 과민 한 반응과 공격성, 과거 부정과 기억의 삭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집착 증세를 보일 수 있고, 또 위축 불신 희망 상실 등 도덕적 손상을 입을 수 있다. 20세기 한국인들은 일제 말 전시 동원, 해방 후 좌우 대립과 분단, 한국전쟁, 이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광주 5.18 등을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폭력의 경험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것이며, 그것 이 한국사회의 도덕적 손상을 가져온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국가나 사회 전체가 전쟁이나 폭력의 상처를 입고 이후에도 그와 같은 전쟁 폭력이 지속되거나, 이후 에 가해 국가나 가해 세력이 그것을 부인할 경우에는 피해 국가의 트라우마는 지속된다. 일본의 한국 과거사 부인이 한국인들에게 이와 같은 영향을 줄 것이고, 광주 5.18 가해세력이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거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여전히 승승장구 하면서 권력과 부를 누리고, 항쟁이 북한군의 소행이 라고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매체가 존재할 경우 광주 시민 일반은 더 큰 상처를 입는다.

한국사회 전반의 사회적 정신병리, 특히 반공주의 콤플렉스는 20세기 최대의 재앙이었던 한국전쟁에 서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나, 남북한의 분단과 주기적인 적대 관계에 의해 강화 유지되었고, 멀리는 식 민지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의 억압, 전쟁의 공포는 모든 한국인에게 원초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는데 한국전쟁과 분단은 바로 식민지의 미청산 즉 국민국가 건설의 실패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

. 서구적 표준을 설정하고 식민지를결핍 으로만보는 태도, 식민지를예외적 일탈 로보면서 돌아보 지 않으려는 태도가 모두 여기에 대당한다. 식민지와 분단은 민족과 국가의 좌절. 분단은 서로가 민족 = 국가를 자처하는 과잉 상징화하게 된다. 분단 상태에서 남북한 자신과 민족을 동일시함으로써 상대방 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특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이나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모두 식민지 트라우마, 역사 적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의 경험은민족적 리비도 의흐름이 단절, 억압되는 것을 의 미한다. 그래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집단 전체의 성향이나 인격을 왜곡시키고 집단적 광기와 같은 현상 을 만들어 낸다. 오늘의 한국은 식민지, 전쟁, 분단의 한 세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심각한 외상을 입 은 사회라 볼 수 있고, 그것이 국가와 국민의 행동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북한, 빨갱이에 대한 공포와 공격성은 강자인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심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영어구사능력에 따라 지위가 좌우되고 능력이 평가받는 것, 미국의 유명대학 졸업장이 한국에서 대학교수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일종의 식민지적 멘탈리티가 지금까지 한국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이나 주류매체가 여전히빨갱이’, ‘종북 담론을구사하는 것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며, 사회전반으로도 이들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평행하는 두 개의 세계로 구분되면, 한 쪽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의 고통에 대해 아무련 연관 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들도 도덕적인 아노미 상태에 서 벗어날 수 없다. 정의의 훼손, 국가 범죄에 대한 분노도 일어나지 않고, 피해자에 연민의 감정도 생 겨나지 못하도록 사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설사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 다는 생각 때문에 심각한 무력감을 갖게 된다.

트라우마가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 발생하면 피해자 가해자/ , 처벌 보상의/ 구분을 넘어서 법적 정 치적 도덕적 문법으로 거론되어야 하며,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사회전체가 치료, 치유의 대상이 될 것 이다. 정치가 가장 중요한 치료제가 될 것이다.

4. 진상규명, 재심판결 등과 트라우마 극복의 가능성

학살사건, 고문 등 피해가 포함된 조작간첩 사건 등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상규명,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민사상의 보 배상이. 어느정도 진행되었다. 국정원(NIS), 국방부, 경찰청의 과거사 기구들과 진실화 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의 조사는 그동안 은폐된 인권침해 사건들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구제와 명예회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특히, 이 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의 학살, 고문 피해자들의 주장과 인권단체들 의 고문조작 피해 자료들이 상당수 진실로 밝혀졌다. 그 결과 피해자들이 부분적으로 구제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일부는 재심을 통해 배상을 받았다.

한국의 대다수 학살, 고문피해자들은 검찰이나 공안기관의 강압적인 수사와 이후 판결이라는 절차를 거쳐간첩 이되었고, 장기간 감옥 생황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첫걸 음은 우선 의문사 위원회(The Presidential Truth Commission on Suspicious Deaths) 혹은 진실화해 위원회 활동을 통한 사건의 진상의 규명이고, 이렇게 얻어진 진실을 통해 재심 판결을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이들 피해자들은 검찰과 법원이라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국가기관의사법절차 를통해 간첩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서는 그 절차를 거 꾸로 되밟아야 한다. 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지 않는 한 이로 인한 법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은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상규명 사건에 대하여 재심권고를 하였다. 검찰이 과거사 사 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직접 재심을 청구한 사례가 500여명에 육박했다. 많은 사건이 무죄로 확정되었고, 나머지는 무죄판결 후 상급심에서 진행 중이거나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아직 개시결정이 나지 않거나 개시 결정 후 재심 진행 중에 있다. 재심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여 재심사유인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 호7 , 422조에 의해 재심개시결정을 하였고, 실체 판단에 들어가서는 전부 무죄 선고를 하였다. 그리고 무죄 확정 판결 후 진행되는 민사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법원은 위원회의 결정 및 재심법원의 판결을 증거로 채택하고 1)체포, 구속과 정의 위법, 2)경찰과 검찰 수사과정의 위법 고문( ), 3)공판절차 및 형사판결의 위법으로 세분화하여 국가 배상 판결을 인정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 과거의 고문사건 자체와 그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후유증에 대해 국가차원의 체계적인 조사나 예방조치는 거의 없지만, 개별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 결정이 나오고 있고, 피해 자들에 대한 배상 작업은 비교적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보도연맹 학 살 사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사과했으나 군, , 국정원 등 가해기관은 제대로 과거 사실을 인정하거 나 공식적인 사과하지 않았고, 그리고 재판과정에서의 법원이 여러 가지 방식의 태도 변화가 있어서 피 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재심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은 고문,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국가에 의 해 조작되어 공식화된 진실을 뒤집는 과정이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된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당시의 정치적 맥락, 법적 논리,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어나가야 한다. 재심 에 이르는 과정은 이와 같이 불법감금과 고문,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해야 하는 과정이다. 물 론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문수사실의 고통스런 상황을 재연해야 했다. 그 리고 고문에 굴복하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허위자백을 한 그 순간의 그 무력감과 비참함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당시의 사건 조작, 고문, 기소, 판결 등을 통해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낸 가해자나 정치적 목 적으로 그러한 일을 기획하거나 명령을 한 사람 상당수가 아직 살아있는데, 당시의 지휘 명령계통예 있 었던 사람들에 대한 수사를 하지는 않고, 오직 피해자들이 수십년 전의 상황을 복기해서 무죄를 증명하 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가해자 중에서도 수사기관에 의한 고문사실을 고백해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윽박 질러 그러한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있던 검사나 판사들이 경찰이나 공안기관의 수사관보다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을 갖고 있지만, 이후의 재심사건에서는 이들에 대한 수사를 거의 생략하고 진행된다.

무죄판결은 한국사회에서 비시민(non-citizen), 사실상불가촉천민’(untouchable)과 같은 존재인 간 첩에서 인간으로, 이름 석자를 가진 보통 시민으로 되돌아오는 결정이다.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외상 경험으로 인해 무력감과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던 이들이 이제 자신의 내적인 힘에 눈을 뜨면서 외상이전의 삶보다 높은 자존감과 가치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정서적 둔감함 예민함 이 줄어들면서 타인에 대한 친밀감, 연민, 동정 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을 수용하게 되고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이들을 외면했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주는 활동까 지 하게 된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이들의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건 당시에서 고문 조 작을 통해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던 검찰이 사과나 반성을 하기는커녕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 상 고를 하는 일이다. 재심 법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법정에서는 '할 말 없다 거나' 고개를 푹 숙이던 검사 가 돌아서서 항소 상고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라며" "굳이 상급심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기계적으로 항소 상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 말한다. 즉 검찰은 자신의 과거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 겠다는 말이다. 검찰의 이러한 태도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이고, 그들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행위다.

그러나 재판을 통한 재심은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조치일 따름이다. 고문이나 잔학행위 가해자 인 국가는 사건 별로 유족들이 재심을 하도록 하기 이전에 일괄적으로 이런 사건을 처리했어야 한다. 의문사위원회나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차원의 공식 공개 사과, 그리고 포괄 적 배상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국가차원의 공개 공식 사과나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피해자나 생존자들은 개별적으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고, 무죄결정을 받은 이후 국가에 손해배 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였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법원은 국가기관이지만, 행정부가 아 니므로 개인 소송 당사자의 사건에 대해서만 심리와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배상 역시 판사의 판 단에 의존한다. 여기서 국가차원의 일관되거나 형평성 있는 조치를 기대할 수 없다. 둘째로 법원은 오 직 권리행사를 한 피해자들의 요구에 반응할 따름이며,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따라서 과거 고문 피해를 당하고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겪은 진실과 일치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얻지 못한 피해자, 그리 고 그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으로부터 무죄결정을 받기를 원하지 않아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 들은 법원으로부터 무죄 결정을 받지 못한다. 즉 피해는 동일한 것이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은 사 람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법원은 일관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결정이 되기에는 결함이 있고, 배상액수 에서는 판사마다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배상액수가 합리적이거나 공평한 기준에서 결정되 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의 주체이기도 하므로 가해의 주체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반성이 없이, 또다시 과거의 판결을 뒤집는다는 것도 모순인 측면이 있다. 개별 판사들이 사과를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공식사과, 즉 사법부의 공식사과는 아니기 때문이 다.

그래서 피해자 유족이나 생존자들이 법원을 통해 재심을 요청하거나 배상을 청구할 때는 법원의 이 러한 한계를 미리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즉 피해자 개인의 차원에서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몰라 도, 국가가 공직적으로 이 결과를 받아들어 어떤 법과 제도, 관행을 고치는 것이 아니므로 유사한 피해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학살, 고문 등 국가의 잔혹행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약간이라도 원상회복의 느낌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회가 복원될 수 있을까? 진상의 규명과 무죄의 결정, 국 가의 잘못 인정, 피해자 배상은 그것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지언정 원상회복, 진정한 과거사 정 리와는 거리가 멀다. 가해자 처벌이 없다면 정의의 수립을 기대할 수 없고,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치유의 과정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음은 물론 사회의 도덕적 질서의 복원 도 기대할 수 없다.

우선 법원의 무죄판결이 국가의 사과를 의미하는지가 의문이다. 일부 법관의 개인적 사과표시가 국가

의 공식적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국가가 이렇게 내키기 않은 방식으로 사건의 실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처벌은 말도 꺼내기 어렵다. 가해자를 규명하기도 처벌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을 규명할 의지도 처벌할 의지도 없는 국가는 여전히 그것은 사실상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그러한 잘못을 앞으로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2000년대 이후 국정원 등 이 국민을 사찰하거나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키고,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재발한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특히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국정원과 검찰은 탈북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조작되기도 했으나 관련 자들 중에서 처벌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과거 인권침해나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은 가해자 처벌 없이는 진정한 과거청산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거나 가해 기관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된 관행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들 개인이나 기관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적반하장 격으로 가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오히려 이들에게 2차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고문사건 재심 사건에서 검찰이 항소나 상고를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선 이후 검찰이 과거 방식 으로 권력자의 입김에 따라 정치적인 수사를 계속하거나 국정원과 보조를 맞추어 간첩조작에 가담하는 것도 그 예이다.

한편 피해자 개인의 상처의 치유는 결국 그들을 따돌렸던 사회가 그것을 반성하고 이들을 다시 품어 줄 때 가능하다. 이웃과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은 이들 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재심 무 죄결정을 담은 판결문은 간첩 혹은 '간첩의 가족 이라는' 누명을 벗겨주는 유일한 입증자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판결문 하나로 이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는 어렵다. 이웃은 오히려 "보상금을 얼마나 받으 려고 그러느냐 식의" 싸늘한 시선만 보내는 경우가 많다. 진실화해위는 간첩조작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주민들을 참여시킨 다음 위안잔치를 주선하곤 했다. 자치단체, ·,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잔치는 당사 자들의 수십 년 된 응어리를 푸는데 법원 판결 이상의 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웃들은 이들를 흔 쾌히 받아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내 형을 간첩으로 몰아세운 사람들에게 거짓이라도 좋으 니 사과 한번 받는 것이 유일한 바람 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재판을 통한 무죄 결정, 배상결정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필요한 절 차이기는 하나 그것은 잘못하면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고, 국가나 사회가 진정한 반성을 통해 거듭하는 절차를 차단하는 바람막이 장치일 수도 있다.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주장, 그리고 사회정의와 도덕성 회복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 재판을 통한 구제는 이런 한계에서 벗 어나지 못할 것이다.

5. 시민사회와 사회적 치유

반공 반북,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자행된 과거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의 모든 진실이 알려지고, 가해자 가 사과를 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어느정도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 했듯이 군, 경 등 말단의 가해자도 일종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사법 정의, 피해자 보배상 조치를 통해서 전체의 트라우마가 극복되기는 어렵다. 피해자 보상이나 배상은 하나의 치유와 복원이 될 수 있지만, 권력이나 가해자가 제대로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은 채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보상조치 를 실시할 경우 그것은 상처를 지속시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적대와 폭력을 가져왔던 바로 분단 체제 아래의 힘의 불균형이 시정되고, 피해자들 간에 불신도 해소되어야 한다. 억울한 처지에 대한 사 회적 인정과 공감이 일어나면 모든 피해자의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끊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 다.

한국처럼 식민지와 내전이라는 대참사를 몸으로 겪었고,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국가나 사회의 욕망 자체가 크게 좌절된 이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사회적 치 유가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정의, 특히 응보적 정의보다는 복원으로서의 정의가 중요하다. 억울한 피해자나 말단 병사 등 폭력의 하수인이었던 가해자들의 상처는 우선 국가가 사실을 인정하거나 잘못된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그에 합당하는 응분의 조치를 취해 줄 때 어느정도 치유될 수 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분단극복, 평화, 통일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판문점 정상회담, 그리고 남북한 화해와 평화의 시도는 최고의 분단 트라우마 치유제라 할 수 있다. 남북간의 군사정치적 적대가 해소되고, 지난 70년 동안 남과 북에서 분 단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남북한 정부로부터 적절한 위로를 받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 간의 화해 이전에 남남 간의 화해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남한 내부의 화해는 분단과 전쟁이 초래한 각종의 부정의를 바로 잡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 내에서의 국가와 국민,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관계의 회복, 민주주의의 질적인 심화를 통해 서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 내에서의 화해와 치유의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진실의 힘같은 단체는 고문피해자들 에 대한 치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 센 터의 역할도 의미심장하다. 행안부에서는 국가적 트라우마 센타 설립을 위해 용역도 발주했으나 구체적 으로 착수하지는 않고 있다.

특히 종교단체나 종교지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 기독교 등 중교 종교단 체는 과거의 국가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도 그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않거나 오히려 가해의 편에 섰듯 이, 사건을 해결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도 언제나 비켜서 있었다. 특히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동족 간에 전쟁이 발생하여 수만, 수십만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했는데, 종교기관 혹은 종교자들이 자신이 어느 한쪽의 편에 선 피해자라는 이유로 권위주의 정권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면서, 화해보다는 적대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한국의 제도권 교단이 얼마나 우리나라 대중들의 고통, 우리 민족의 진정 한 평화 통일에 무관심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교단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런 정도의 고통 과 비극이 있었다면, 적어도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하는 종교 지도자, 그러한 담론 정도는 본격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용서 화해 등과 관련된 주제에 기여하는 데서 남아 공화국은 물론이고 독일 등 외국에서는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그런데 한국의 각 종 교단체의 성직자들 중에서 한국전쟁으로 이렇게 사회가 심각하게 찢어져,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 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



[1] ) 최인훈의 [회색인 에서] 전후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