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0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⑧]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 라틴아메리카·라스카사스·해방신학·민중신학

이재근 (newsnjoy@newsnjoy.or.kr)
승인 2018.11.28 13:22


라틴아메리카, 즉 중남미는 소위 기독교 대륙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와 도착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강력하고 신속한 식민화와 가톨릭화를 추진한 결과, 이 지역은 이미 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대에 전 인구의 92.0%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 비율이 가장 높았던 유럽 대륙의 91.8%를 뛰어넘는 기록으로, 이미 그 시기에 세계 최대의 기독교 인구 대륙이 되었음을 뜻했다. 이 비율은 점차 높아져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이 되면, 중남미 기독교 인구는 95%가 된다. 같은 해 유럽 기독교인의 비율이 76.7%로 떨어지고, 북미도 인구 대비 기독교인의 비율이 66.4%밖에 되지 않는 상황, 또한 새로운 기독교 대륙으로 최근 각광받는 아프리카도 사하라 이북 무슬림 인구 비율 때문에 대륙 전체의 기독교인 비율이 47.7%에 지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난 200년 이상 독보적으로 90%가 넘는 기독교인 비율을 유지해 온 대륙은 오직 라틴아메리카뿐이다.1) 즉, 지난 500년간의 가톨릭 확장과 지배, 그리고 지난 100여 년간의 개신교 전파와 확산으로 라틴아메리카는 21세기 세계 기독교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대륙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독교인이 많다는 것과, 그 대륙 안에 사는 기독교인이 믿고 있는 신앙 및 살아가고 있는 현실, 경험, 상황이 기독교적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다. 페루 출신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2)(Gustavo Gutiérrez, OP3), 1928~)는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및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과 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준거점으로 삼는" 새로운 신학 운동을 창시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주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라 불리는 이 신학 운동은 대표자와 창시자가 여럿이므로 기원을 단 한 사람에게로 소급할 수 없다. 그러나 구티에레스는 1971년에 이 운동의 교과서로 인식되는 책 <해방신학 Teología de la liberación: Perspectivas>(Lima: CEP, 1971)을 저술한 이래로, 여러 의미로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의 삶의 궤적을 훑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탄생과 발전, 논란 등을 함께 다루어야만 한다. 그의 삶을 지배한 세 핵심 단어는 △라틴아메리카 △라스카사스 △해방신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한국인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 △민중신학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노터데임대학교






1. 라틴아메리카




1928년생으로 학자로서 여전히 활동 중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페루 출신 가톨릭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해방신학의 창립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구티에레스는 남아메리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1928년 6월 8일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의 후손인 메스티소였는데, 원주민 중 케추아 부족 혈통이었다. 구티에레스는 열두 살부터 골수염을 앓아서, 자주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따라서 12살부터 18살까진 휠체어를 사용하는 날이 많았고, 이후에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평생 유지했다. 원래 구티에레스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1947년에 페루 산마르코스국립대 의대에 들어갔으나, 학교에서 정치 동아리에 참석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정치 현실에 눈을 떴다. 의학보다 철학과 신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곧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사제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리마 가톨릭신학교와 칠레 산티아고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1951~1955)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이어서 프랑스 리옹대학(1955~1959)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59년에 사제로 안수받은 후, 1년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이브 콩가(Yves Congar), 마리-도미니크 세뉘(Marie-Dominique Chenu), 크리스티앙 뒤코크(Christian Ducoq) 등, 당대의 저명하고 개혁 지향적인 가톨릭 학자들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또한 이들로부터 도미니코회, 그리고 예수회 사상을 배웠고, 에드바르트 스힐러벡스(Edward Schillebeeckx), 카를 라너, 한스 큉, 요한 밥티스트 메츠 같은, 가톨릭 전통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상을 전개한 혁신적 대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유학하던 시절의 유럽 교회는 당대 세상에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으므로, 이 분위기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카를 바르트 같은 개신교 신학자나 프랑수아 페로(François Perroux) 같은 사회과학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콩가, 세뉘, 스힐러벡스 등이 모두 도미니코수도회 소속이었던 데다가, 그의 해방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 그가 전기를 쓰기도 한 16세기 선교 수도사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의 소속 수도회였던 점 덕에, 구티에레스 역시 1998년 도미니코회에 가입했다.

1960년에 귀국한 구티에레스는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Pontifical Catholic University of Peru)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리마 빈민 구역인 리막(Rimac)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눈을 떴다. 이 시기에 체 게바라나 카미요 토레스 같은 혁명가들과도 교제했다. 이후 그는 현실을 반영한 학문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이 현실, 상황, 경험이 바로 해방신학의 근거와 기초, 추진력이었다. 특히 1974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라스카사스연구소(Instituto Bartolomé de las Casas)를 설립했다. 이후 북미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성십자회 대학인 노터데임대학에서 존 오하라 추기경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1993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la Légion d’honneur)을 받는 등, 여러 국가와 기관에서 권위 있는 상을 많이 받았다.4)



2016년 9월 27일 도미니칸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 단상에서 발언하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구티에레스가 눈뜬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이 대륙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인 도착 이전 라틴아메리카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정치조직, 종교 문화, 경제활동 등에서 상당한 고유성과 탁월성을 지닌 아즈텍, 잉카, 마야문명 같은 고도로 발전된 국가조직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1492년에 콜럼버스가 도착하면서,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유럽 해양 제국에 정복되어 착취·추방·학살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정치와 종교 간 구별이 분명치 않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가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두 제국이 보낸 함선 대부분에는 군인과 선원, 관리, 상인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군인이 군사적으로 정복한 곳에, 관리의 정치적 통치가 뒤따랐고, 이어서 상인들에 의한 경제적 착취와 함께, 사제들의 '강제' 개종 활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한데 뒤섞여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및 대륙의 생태 자체를 전복하는 총체적 변혁을 가져왔다.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의 군대는 숫자는 미미했으나, 발전된 무기, 특히 근대식 대포, 중무장한 기사, 군용견 등을 동원하여 활과 창, 독침, 주술 등을 사용한 원주민을 쉽사리 정복했다. 그러나 원주민의 패배와 멸절에 특히 기여한 것은 생화학 무기였다. 즉, 실제 생화학 무기를 유럽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몸에 지니고 온 세균과 바이러스가 오히려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미 유럽에서 홍역을 앓고 나서 면역력을 지닌 유럽인과는 달리, 홍역은 이 병에 한 번도 노출되어 본 적이 없는 원주민의 몰살을 불러왔다. 이외에도 돼지인플루엔자, 천연두, 결핵, 디프테리아, 독감, 페스트 등이 사람과 가축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통계가 저마다 달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5) 유럽인이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후 채 100년이 되기도 전에, 원주민 전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질병·전투·학살 등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이 당한 경험은 역사상 최대의 대학살(genocide)이라 칭할 만하다.

또한 금, 은, 설탕, 커피, 면화, 담배에 대한 욕망으로 수많은 광산이 개발되고,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들어서면서,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도 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에 부를 쌓는 식민지 귀족 계층이 탄생했다. 19세기에 라틴아메리카 여러 식민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독립 투쟁을 전개하면서, 오늘날 지도에 그려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국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 신생 독립국들의 진정한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다. 유럽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된 이들은 20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으면서, 점차 미국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에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원에 의존하고, 이전 시대 식민지 귀족층의 후예라 할 만한 부패한 권력층이 국가가 소유한 부를 거의 독점하면서, 실제 민중의 극단적 가난, 양극화, 뇌물과 부패, 결탁 등으로 인한 부패, 군사독재 정부와 종교계, 폭력 조직과의 결탁, 인구의 도시 집중과 슬럼화, 일상적 살인과 폭력 등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구티에레스와 해방신학이 등장하기도 전에 하버드대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1888~1965)는 "지금 이곳 라틴아메리카 인구수는 미국보다 1/8이 더 많다. 그러나 미국 국민총생산의 1/8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의 5%가 국가 총수입의 1/3을 차지하는 반면, 70%는 극빈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배후에 있는 정부들은 이와 같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지 위해 정치적·사회적 구조들을 조직화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6) 이것이 20세기 중반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었다.



2013년 당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홈페이지 갈무리






2. 라스카사스




라틴아메리카 비극적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은 정치적·경제적 부패와 인종차별, 학살의 역사가 종교, 특히 가톨릭의 전파 및 지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두 나라, 특히 스페인의 신대륙 종교 정책은 중세 시대에 확립된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스페인 영토 내에서 무슬림 무어인(Moor)7)을 몰아내는 일종의 십자군 운동인 레콩키스타(재정복, Reconquista)를 1492년에 완수한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이 스페인에서 사용했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교화 방법을 신대륙 원주민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스페인 내에서 카나리아제도와 그라나다를 스페인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서 탈환했을 때 교황은 이들이 정복한 지역의 교회를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왕실에 하사했다. 이를 국왕의 교회 보호권(patronate real)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신대륙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로써 왕이 신대륙의 주교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고 재정을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식민지 교회는 스페인 국가(민족)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 국가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군과 민간인이 자행하는 현지인과 환경에 대한 착취·파괴·말살 등의 악행도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했다.8)

1492년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시행한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착취형 선교에는 이면도 있었다. 성경에 기반하고, 선교사의 모델인 사도 바울이 구현한 참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피선교지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범을 이루려 노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수도사들의 헌신도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원주민의 눈으로 식민지 정책을 판단하면서, 유럽 정착민의 원주민 착취에 대항하여 원주민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이 보여 준 것이 바로 이런 이들의 선교 전형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유럽에서 예수회가 스페인과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서, 후에는 결국 교황에게까지 핍박을 받고 한때 해산되는 고초를 당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원주민 권리를 격렬할 정도로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남미 가톨릭 선교 패러다임에는 이런 극적인 대칭 구조가 있었다. 상부에는 지배 계층, 교구 주교나 재속 성직자, 스페인 정착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일부 수도자가 있었고, 하부에는 이를 비판하고 스스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원주민과 함께 길을 걸어간 진실한 선교사가 있었다. 이런 교회의 양면성은 오늘날까지 중남미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영화 '미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원주민들 사이에서 오보에를 부는 가브리엘 신부. 영화 '미션' 스틸컷




스페인령 중남미 선교 역사에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 중 특히 언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 c.1484~1566)라는 인물이 있었다. 라스카사스는 원래 1501년부터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에 해당하는 산토도밍고에 정착하여 사목하는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는 원주민 착취에 대해 별 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그런데 1511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사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c.1475~1545)가 산토도밍고에서 행한 설교를 들고 번민하다가 1514년에 일종의 마음의 회심을 경험했다. 몬테시노스는 스페인 정착민들이 그들의 악행 때문에 무어인이나 터키인처럼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설교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한 동료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 지방 관리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래 라스카사스는 원주민 보호를 조건으로 왕에게서 위탁받은 토지와 사람 사용권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활용하여 반노예나 마찬가지인 원주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하에서 원주민 보호는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권리는 원주민 보호가 아니라 원주민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노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라스카사스는 1514년 오순절에 자기 소유의 엔코미엔다를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은 원주민 착취와 공존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몬테시노스의 활동에 합류한 그는 스페인으로 수차례 건너가 이 제도의 악행을 고발하고 조치를 탄원했다. 그러나 어렵게 스페인 본국에서 엔코미엔다를 교정하려 시도해도, 식민지 현지 백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등지에서 비슷한 원주민 인권 활동을 벌이다 남부 멕시코 치아파스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개혁 활동을 계속 이어 갔다. 그러나 결국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정착민들과의 갈등을 이겨 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남은 39년 생애 동안 글과 연설을 통해 제도 개선을 시도하다가 1566년에 92세로 사망했다. 불행히도 라스카사스의 책은 1552년에 페루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가 쓴 여러 책이 종교재판소가 규정한 금서 목록에 포함되는 비극을 겪었다.9)

이미 언급했듯, 구티에레스는 1960년에 귀국한 후 교수와 사목 생활을 병행하면서 1974년에 라스카사스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서 1992년에는 <라스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En busca de los pobres de Jesucristo: El pensamiento de Bartolomé de las Casas>(Lima: CEP, 1992)라는 전기를 출간했다. 구티에레스가 라스카사스를 자신이 지향한 해방신학의 정신을 구현한 모델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3.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 역사적 현실, 그리고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모델로서의 라스카사스와 함께, 해방신학 탄생에 기여한 주요 요소들은 가톨릭교회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였다. 하나는 전 세계 가톨릭 전체를 대변하는 모임으로,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Vatican II), 다른 하나는 1968년에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였다. 두 회의와 이들이 발행한 문서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구조의 변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부여하여 해방신학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 전자가 주로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쇄신하고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언적 명제를 기술하면서 문을 열었다면, 후자는 더 구체적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그 쇄신 방향을 구체적으로 서술했기에 해방신학의 진정한 시원으로 간주된다.10)

광주 가톨릭대 김정용 교수는 CELAM II(간단히 '메데인'이라 쓰기도 한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메데인 회의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전면적인 해방, 온갖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인격적 성숙, 집단적 통합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 들어 서 있다고 진단하면서(메데인 문헌: 서문 4항)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라고 부를 불의의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으로 규정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한다. 그런 곳에서는 주님 자신조차도 거부된다"(메데인 문헌: 평화, 14항)고 천명하였다. 아울러 메데인 회의는 인간을 온갖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메데인 문헌: 정의, 3-5항 참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메데인 문헌: 교회의 가난, 9-11항 참조)를 강조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11)

해방신학의 주창자는 여럿이다. 그중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라질의 레오나르두 보프, 휴고 아스만, 멕시코의 호세 미란다, 우루과이의 후안 루이스 세군도, 스페인 출신으로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한 혼 소브리도 등이 유명하다. 해방신학이 가톨릭 배경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이지만 예외도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호세 미구에스 보니노는 개신교 중에서도 감리교 소속이었다. 미국 퍼시픽종교학대학원에서 오래 가르친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은 라틴아메리카 배경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이 신학을 가장 든든하게 옹호한 주창자 중 하나였다. 이렇게 주창자들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12) 그러나 대체로 공유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13)



도미니칸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있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1) 신학은 반드시 상황적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유럽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자, 교리 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학문이자, '위로부터의'(from above) 학문이다. 소위 이런 보편적, 절대주의, 이론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상황에 부적합하다. 이와는 달리, 상황신학은 언제나 특정하고 구체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에 깊이 연관을 맺어야 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하므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은 그 대륙의 현실과 경험을 반드시 취급해야만 한다.

2)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은 극단적인 빈곤과 양극화다. 다른 모든 대륙에도 빈곤은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은 북미나 유럽과는 달리, 외적 요인으로 부과된 빈곤이다. 즉, 이 가난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주민 대다수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희생해 가면서까지 소수에게 권력과 부를 몰아주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다. 특히 유럽과 북미 국가들과 일부 다국적 기업이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종속' 경제가 이런 고통을 극대화한다. 또한 이런 사회구조는 정부와 일부 재벌 기업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 대륙 국가 모두에서 국교이거나 주요 세력인 가톨릭교회는 체제의 질서를 지지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교회이므로, 교회는 사회정치 문제에서 중립적이라는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언제나 압제자를 편들었다. 따라서 국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함몰된 정부와 기업과 교회가 이 비참한 현실의 원인제공자이자 결탁자다.

3)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며, 우선 선택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예외 없이, 우주적으로,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이었다. 창세 이전에 창조주의 뜻에 따라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구원받기로 선택된 이들이 있다는 구원 예정론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기는 했으나,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편파적이거나 조건적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고, 하나님은 편파적으로 편애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편파적인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향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도덕이나 행위에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것이 조건은 아니다. 구티에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들이 선취권을 갖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의에 대한 이해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선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14) 1968년의 메데인 회의를 재평가하기 위해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1979년에 모인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I)는 이 명제를 더욱 확고하게 지지했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명백하고 예언자적인, 우선적이고 연대적인 선택을 나타낸 제2차 주교회의의 생각을 다시 수용한다. (중략)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포괄적 해방을 직시하면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전체 교회의 회개의 필요성을 확증한다. (중략)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반하고 섬기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갈 때, 우리는 우리처럼 가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가 됨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친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는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에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우선적 요소이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입과 바닥 공동체의 생성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는 복음화의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들은 교회의 회개를 외침으로써 항상 교회를 질문의 대상으로 세우기 때문이다."15)

4) 신학은 프락시스(praxis, 실천)에 대한 성찰에 따르는 이차적 행위다. 다른 말로, 해방신학은 바른 이론, 즉 정통 교리(orthodox)를 추구하지 않고, 바른 실천, 즉 정통 실천(orthopraxis)를 추구한다. 이 정통 실천이 신학의 기준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한 바른 실천과 헌신에서 신학이 시작해야 한다. 이는 전통 신학의 순서, 즉 바른 이론에서 바른 실천이 나온다는 고전신학의 방법론을 완전히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도 같다.

5) 구원은 곧 해방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다. 생명의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이들이 고난과 압제 중에 있으므로, 결국 사랑이신 생명의 하나님은 해방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해방신학의 주장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구티에레스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배운 요한 밥티스트 메츠 등 유럽 정치신학자들의 주장이 해방신학의 방법론에 차용되었다.

또한 해방신학은 기독교적 실천을 보조하는 이론적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도 주저 없이 차용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특수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는 토대로 마르크스주의 사회 분석을 활용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 이들은 사회주의 자체가 하나님나라는 아닐지라도, 이 체제가 현실 사회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활용하는 것과, 초대교회 당시 교부들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플라톤 등의 그리스 철학자를 활용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구원은 천국을 보장받는 행위가 아니라, 육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변혁, 이웃을 위한 삶으로의 회심을 포괄하는 총체적 해방이다. 그렇다면 이런 총체적인 해방과 정의를 위한 노력에 폭력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구티에레스와 보니노 등 대표 해방신학자들은 폭력을 이상화하지도, 우선 수단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무장투쟁보다는 비폭력 저항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되어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면, 이를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방신학이 탄생하기 전에, 원래 신부이자 콜롬비아국립대 교수였다가 교수직을 포기하고 무산계급을 위한 게릴라 혁명전에 참여하여 영웅이 된 콜롬비아인 카미요 토레스(Camilo Torres Restrepo, 1929~1966)16)가 이런 인식의 선구자였다.



구티에레스가 2013년 페루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에서 세계은행그룹 김용 총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출처 플리커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방신학의 주장을 독특한 기여로 인정한 이들도 있었고, 가혹하게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기여로 인식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첫째, 신자와 그들이 처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신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상기하여, 교회가 이 문제에 다시 천착하게 했다. 셋째, 구원이 영적이거나 교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육, 지정의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것이며, 교회와 사회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해방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넷째, 신학이 단순히 바른 이론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삶의 구체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바꾸는 바른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신학은 다음과 같은 비판18)도 받았다. 첫째, 우선 가톨릭교회에서 내린 공식 비판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는 '자유의 전갈: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훈령'19)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해방신학은 예언서와 복음서에 의존해서 빈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성서 속의 가난한 자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재난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문서는 당시 교리성 수장이던 보수주의자 요제프 라칭어(Joseph Razinger)가 작성한 것으로, 라칭어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재직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듬해에는 브라질 해방신학자 보프에게 1년간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구티에레스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거나 정죄를 하지는 않았다. 1986년 4월에 나온 두 번째 교시 '자유의 자각: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20)에서는 해방신학의 일부 요소에 대해 이전에 했던 비판을 반복하기는 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곧 메시야적 하나님 백성으로 환원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을 통한 인간의 자기 구원으로 환원되고, 하나님나라는 계급투쟁의 성공을 이룬 공산사회가 되며, 신앙은 역사에 대한 신실함으로 대체된다. 2년 전 교시보다는 발언 강도가 유화적이고 온건하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의 내재주의 성향을 비판한 것은 같았다.21)

둘째, 다른 보수주의 진영, 혹은 개신교의 비판도 신앙교리성의 판단과 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해방신학이 당연시하는 이원론적 이분법 구도가 과연 늘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은 모두 빈자와 부자로 선명하게 구별되는가?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의 원인이 전적으로 북반구 정부와 기업의 착취에서만 온 것인가? 외부인이 모든 죄를 덮어쓰고, 내부자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정책 실패, 라틴아메리카인의 관습과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 비롯된 것은 없는가?

셋째, 라칭어의 비판과 유사하게, 많은 비판자들은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에 대한 인식, 예컨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가치 대신에, 물질과 환경으로 결정되는 인간관을 주창한다는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바른 실천, 즉 프락시스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이다. 예컨대, 해방신학에 동정적인 영국 선교학자 앤드루 커크 또한 바른 실천(orthopraxis)의 우선성이 타당한지 질문한다. 즉, 바른 실천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려면, 어떤 실천이 바른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 전제되어야 할 텐데, 바른 실천 다음에야 바른 이론이 따라 나온다면 바른 실천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커크는 이론적 근거, 즉 기독교인의 지침으로서의 성경 계시에 대한 확고한 해석학적 지침이 전제되지 않는 바른 실천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22)



4. 민중신학




구티에레스와 그 동료들의 해방신학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역시, 우선 한국천주교의 공식 반응부터 살펴보자. 한국천주교주교회는 1984년 10월에 '해방신학 경계 성명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라며 해방신학을 비판했다.23) 그런데 이 내용은 사실상 같은 해에 발표된 교황청 교리성 문서와 차이가 거의 없다. 말하자면,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천주교 내부 입장은 교황청의 공식 입장에 순명하는 것이었다.24)

따라서 같은 이유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던 천주교인은 1970년대 말부터 활동하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와 인권 투쟁에 앞장 선 사제들을 해방신학에 오염된 이들도 정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라틴아메리카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보리(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추기경이 2013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되살아났다. 1984년 성명서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가 더 이상 한국천주교회의 대세는 아님을 뜻한다.25)



2014년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만나 악수하는 구티에레스. 바티칸뉴스 갈무리




개신교에서는 주로 진보를 대변하는 기독교장로회의 민중신학이 해방신학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문화, 신앙 환경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이 라틴아메리카 배경에서 탄생한 해방신학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을 한국판 해방신학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으며, 1960~1970년대 상황화신학의 세계적인 확장 및 유통 과정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한국 민중신학은 1975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서남동이 '민중의 신학에 관하여'를 기고하면서 독립된 신학 담론으로 등장했다. 서남동은 "대국적으로 보아 내 신학의 변화는 서구 신학의 흐름을 따른 셈입니다. (중략) 그러다가 우리 현실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해방신학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과제를 한국적 상황에서 문제시하여 이제는 '민중신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스스로 해방신학이 한국적 상황을 문제시하는 민중신학의 기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개념이 해방신학의 프롤레타리아보다 한층 더 포괄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단순히 무산 노동자 계층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모든 서민 대중이 민중(ochlos)이라는 것이다.26)

그러나 유럽에서 더 이른 시기부터 등장한 정치신학의 영향하에,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현실, 경험에서 등장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세계의 신학의 일부로서 상호 공명하는 신학적 대화와 실천적 연대의 파트너였다. 해방신학은 또한 흑인신학, 여성신학, 아시아신학, 생태신학 등 이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급진 신학의 모판이자 수원이기도 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급진적 바른 실천(orthopraxis)을 요청하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전 세계 상황신학을 대변하는 선구적 대표자였다.












1) 마크 A. 놀, 『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박세혁 역, 이재근 해설 (서울: IVP, 2015), 31.
2) 한국에서 대개 '구티에레즈'로 표기하거나 발음하지만, 스페인어에서 z는 영어의 s, 혹은 한글의 ㅅ에 해당하는 발음이므로, 여기서는 '구티에레스'로 쓴다. 국립국어원의 다음 표기 일람표를 보라. http://www.korean.go.kr/front/page/pageView.do?page_id=P000106&mn_id=97.
3) Ordo Praedicatorum 혹은 Order of Preachers(설교자회)의 약자로, 도미니코수도회를 뜻한다. 구티에레스는 1998년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4)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상) '가난한 이들' 의 관점에서 시작된 '해방신학', 문을 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4.3.16.).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0207&path=201403.
5) 추산치는 너무도 다양해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850만에서 1억까지 범위가 상당히 넓다. 그러나 대체로 학자들은 5000만 명에서 1억 명 사이로 잡는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399. 이 책 전체가 대항해시대 서유럽 제국의 해상 팽창 과정에서 구세계와 신세계가 어떤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다룬다. 특히 환경, 기독교, 문화의 세계화 과정을 다루는 3부(361-539)를 보라.
6) 김균진, 『현대 신학 사상: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의 삶과 사상』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613-618.
7) 8세기경 스페인이 속한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무슬림을 부르는 막연한 호칭으로, 원래는 모로코·모리타니아·알제리·튀니지 등의 베르베르인과 여러 원주민 부족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8)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에 식민지 기독교를 건설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후스토 L. 곤잘레스, 『중세교회사(개정증보판)』, 엄성옥 역 (서울: 은성, 2012), 285-349를 보라. 쿠바 출신인 곤잘레스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역사를 서양 교회사와 엮어서 상당히 균형 있게 다룬다.
9) 곤잘레스, 『중세교회사(개정증보판)』, 291-294.
10)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 신재구 역 (서울: IVP, 1997), 340f.
11)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상)."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0207&path=201403.
12)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 344.
13) G. 구티아레즈, 『해방신학(I): 원론편』, 편집부 역 (서울: 한밭출판사, 1984); 그렌츠, 올슨, 346-359; 김균진, 621-641;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8>구스타보 구티에레스(중)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간 해방 위해 투신하도록 초대," 「가톨릭평화신문」 (2014.3.23.).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1227&path=201403; 김정용, "[21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9>구스타보 구티에레스(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톨릭평화신문」 (2014.3.30.).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2292&path=201403.
14) Gustavo Gutié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 15th anniversary ed., trans. Caridad Inda and John Eagleson (Maryknoll: Orbis, 1988), xxxviii. 그렌츠, 올슨, 352에서 재인용.
15)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 문서. 김균진, 622에서 재인용.
16) "예수가 오늘 살아 있다면, 그 역시 게릴라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17) 김균진, 641-643.
18) 같은 책, 643-655; 그렌츠, 올슨, 359-363.
19) 한국천주교의 공식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http://www.cbck.or.kr/book/book_list6.asp?p_code=&seq=401423&page=20&KPope=&KBunryu=&key=&kword=.
20) 한국천주교의 공식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http://www.cbck.or.kr/book/book_list6.asp?p_code=k5160&seq=401410&page=21&KPope=&KBunryu=&key=Title&kword=.
21) 구티아레즈, 『해방신학(I): 원론편』, 3; 그렌츠, 올슨, 343; 김균진, 643.
22) J. Andrew Kirk, 『해방신학』, 전호진 역 (서울: 엠마오, 1989, 207-217; 그렌츠, 올슨, 361f.
23) "계급투쟁·폭력혁명 거부. 한국천주교주교단, 「해방신학」 비판 경명의 의미," 「중앙일보」 (1984.10.15.). https://news.joins.com/article/1787380.
24) 김정용, "[21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9>구스타보 구티에레스(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톨릭평화신문」 (2014.3.30.).
25) "알고 믿고, 믿고 알고 – 왜 다시 해방신학인가?" 「격월간 가톨릭 평론」 (2015.7.21.). http://review.wti.or.kr/?p=1131.
2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02, 183,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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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 | 창비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 | 창비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백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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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가수 구하라가 세상을 떠났다. 한해 2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는 나라,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죽음이 무수히 넘쳐나는 나라에서 이 죽음이 큰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세간에서는 가수 겸 배우 설리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전염효과를 미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으로 고양된 청년층 사이에서 이들의 죽음은 작은 사건이 아니라 손댈 수 없이 썩어버린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대 사안이자 징후이다.



최근 내려진 성폭력 관련 사법조치 가운데 몇가지만 복기해봐도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불행 탓이 아니다다. 구하라씨는 본인의 동의 없이 촬영된 동영상으로 협박받았고 무단으로 침입한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했지만, 법원은 “구씨가 먼저 호감을 표시했고 두 사람이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던 사이”라는 이유로 가해자 최씨에게 불법촬영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구씨의 죽음 이후 같은 판사가 서울 시내 웨딩홀에서 여성 하객들의 치마 속을 수십차례 촬영한 사진기사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범죄 양형기준을 정비하라는 청와대 청원이 이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단순히 양형기준이 미비해서 생긴 일이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둔감한 사법부의 문제이자, 불법촬영된 성관계 동영상을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규제할 생각이 없는 한국사회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다.



몇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사법부는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촬영된 성관계 동영상 속 인물이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맞는다면서도 성접대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무죄를 판결했다. 검찰의 고의적인 수사 지연에 따른 일이지만 판결 자체에도 문제는 많았다.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전 대표도 성매매 알선 등에 대해 ‘객관적 증거’가 없다면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른바 ‘레깅스 판결’에서는 판사가 기소장에도 쓸 수 없는 불법촬영 사진을 판결문에 첨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동영상 사이트의 운영자를 붙잡았더니 한국인이었는데, 한국법원은 이 사람에게 징역 1년 6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분을 내렸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영상을 소지만 해도 일이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중죄다. 이 모든 일들이 길어야 석달 안에, 대부분 이달 들어 일어났다.



미투 이후 한국사회에도 어느 정도 의미있는 변화가 생겨났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이 가해자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분노하고 좌절했다. 특권층일수록 여성의 몸을 노골적으로 거래하고 도구로 사용하지만 법은 그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그들은 온갖 방식으로 처벌을 피해간다.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공수처만 생기면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검찰이 기껏 기소해도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는 모습 앞에서 그러한 낙관에 동의하기란 어렵다. 안희정 사건의 2심에서는 1심과 달리 성인지감수성에 입각하여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판결이 나왔다고들 하지만, 피해자가 경험하는 사회는 여전히 냉혹하다. 특히 피해자가 연예인이라도 될라치면 몸과 마음에 대한 권리를 모두 돈으로 산 듯이 구는 반응이 쏟아져 나오곤 하니, 폭력적인 성문화에 한국사회 전체가 가담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미투운동 이후에 한국사회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상식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사법부, 언론, 시장은 변화가 너무나 느리거나 간혹은 퇴행하기 때문에 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면도 있다. 도대체 이 사회가 내리는 법적 판단과 권력 행사에 나의 목소리, 피해자의 자리는 있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구하라씨가 사망한 후에 성관계 동영상이 실시간 연관검색어에 올랐고, 폭행피해 당시의 신체를 촬영한 사진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다시 퍼졌으며, 이는 여러 사람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판결 당시 판사도 피해자를 앞에 앉혀둔 채 성관계 동영상을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언론은 악성 댓글이 재능있는 한류 스타의 때 이른 죽음을 불러왔다며 댓글 문화를 비판했지만, 개인의 SNS에 올라온 내용을 일일이 기사화해 악성 댓글을 유도한 언론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같은 매체의 다른 지면에서 여전히 비슷한 류의 연예인 사생활 기사를 발행했다. 이미 위헌판결이 난 인터넷 실명제를 다시 도입해서 익명의 댓글을 막아야 한다는 실효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실명으로도 악성 댓글을 다는 시대가 되었다. 혐오발언과 악성 댓글이 오롯이 익명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는 여성 연예인이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혹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한다.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라는 이유 그 자체로도 인간됨을 박탈당하는 수준의 혐오발언이 가해지는 중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일단 인권을 포괄적으로 보호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절실한데, 이를 주장할라치면 이른바 ‘사회적 합의’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실제로 구하라씨의 ‘리벤지포르노’ 피해는 작년 10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혜화역 시위에서 여성차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차별금지법 요구는 보수교회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정부는 법 제정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하는 차별금지 대상에 성적 지향이 들어간 것은 사회적 합의 없이 일어난 일이라며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된 상태이다. 반면, 노골적인 혐오와 비하, 차별 행위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대통령 공약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재하다는 이유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이어지다보니 이제 심지어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어차피 법을 만들어도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기도 한다. 모든 입법이나 규제가 완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만 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의 반대가 있으면 인권마저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이나 다름없다.



지난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나온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말이 사용되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맥락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는 차별과 혐오를 행하는 사람들이 역차별이나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울 때 사용될 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담겨 있지 않다. 성폭력의 문제에서 종종 시민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법판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론이 혐오의 언어와 선정적인 보도, 심지어 가짜뉴스의 선동으로 차별에 앞장설 때 정부는 과연 어떤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고 있는가. 정부의 역할 없이 혐오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치’ 문제는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해결해도 성이나 차별 문제는 합의를 기다려야 하는 사항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량한 차별’도 아니고 그저 직접적인 차별이다.



백영경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19.11.27. ⓒ창비주간논평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이왕 사는 인생 재밌게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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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사는 인생 재밌게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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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201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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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각스님이 타이완 불광산사 성운스님이 보내온 글씨 앞에 서있다.






서울 강남구 광평로31길 56 광수산 기슭에 조계종 6천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의 중심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가 있다. 강남 요지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지 17년된 곳이지만 지금껏 일요법회도 없고, 비구니스님들의 회의처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런데 이곳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13일 4년임기의 전국비구니회장에 본각(67)스님이 취임하면서부터다. 25일 법륭사에 들어서자 한쪽 실내 벽면을 가득 채원 ‘일회용품 줄이기 스님들이 앞장서요’란 대형포스터가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취임식날 이제 비구니스님들이라도 절대 일회용품을 쓰지말라며 도시락통과 젖가락 2천여개를 제작해 선물한 본각 스님이다. 말만 하지 말고 나부터 달라져보자는 본각 스님으로 시작되는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본각 스님은 태생부터 ’전통적’이다. 본각스님네 6남매는 큰스님 천제 스님이 중학교 2학년때 성철 스님(1912~1993)의 맏상좌로 출가한 것을 시작으로 성철 스님의 권유로 6형제 모두가 출가한 전설의 집안이다. 본각스님네 집안은 원래 경남 합천에 살고있었는데, 장남 천제스님이 마산 동중학교로 유학을 가자 공부를 위해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고한다. 그런데 형편은 어렵고 대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자니 돈이 없어 흉가로 방치된 집을 구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사를 간지 얼마 안돼 부친이 갑자기 사망했다. 그래서 경남 통영 안정사에서 49재를 지냈다. 당시 성철 스님이 수행하던 곳이었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고통스러워하던 천제 스님은 49재를 끝내고도 절을 내려오지않았고, 성철 스님의 첫번째 상좌(제자)가 되었다. 갑자기 남편을 여의고 장남마저 출가해버리자 어머니와 5형제들은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이를 안 성철 스님이 온가족이 모두 절에 들어오면 어쩌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절에 들어가면 모든 가족이 함께 사는 줄 알고 이에 응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각기 은사(스승)의 절로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다. 이에 충격을 받았는지 어머니는 그 다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남매중 2남은 성철스님이 주석한 해인사로 출가했고, 4녀는 성철스님과 각별했던 비구니계의 대부 ‘인홍스님(1908~1997)과 그 상좌들에게 출가했다. 6형제의 막내로 불과 3살이던 본각스님이 맡겨진 곳은 인천에서 주로 고아들을 키우던 부용암 육년스님이었다.












 인천 용화선원을 창설한 선지식 전강 스님과 도봉산의 무애도인 춘성스님과 충남 덕숭산 수덕사 혜안 스님은 안거가 끝나고 나면 부용암에 모여 휴식을 즐겼는데, 그 때 전강 스님으로부터 ‘본각’이란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본각’(本覺)은 ‘본래 깨달아있다’는 뜻이다. 즉 수행을 해야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붓다라는 의미다.
 

그는 어려서부터 짖굿은데가 있었다고 한다. 어른스님들이 찾아헤매면 늘 부용암 밤나무 위에 숨어있으면서, ‘한번만 위를 쳐다보면 금새 찾을 수 있는 것을 왜 아래에서만 찾고있는지 인간의 시야가 얼마나 좁으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14살 무렵 인홍스님이 주석하던 울산 울주 가지산 석남사에서 바깥세상과는 단절돼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벽지를 바르기전 초벌로 바르라며 던져졌던 신문들을 다른 학인들과 함께 온종일 읽고서는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라고 궁금증이 동해 견딜 수가 없어서

어른스님들에게 떼를 써 다시 머리를 기르고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 졸업후 성철 스님이 `저대로 뒀다간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 우려했으니 기어코 떼를 써 대학교까지 다녔다. 그것도 동국대학 재학때 불교학이 아닌 서양철학을 전공한 것만 봐도 남다른 구석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세상 구경을 할만큼 한 뒤 그는 26살 때 다시 삭발을 하고, 성철스님에게 화두를 받기 위해 밤새 3천배를 한 이후 수행자로서 더 이상 한눈을 팔지않았다.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중앙승가대 교수직을 26년이나 했지만, 그는 교수가 아니라 수행자임을 한시도 잊지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전국비구니회장 선거에 출마하자 “이제 정치승으로 나선 것이냐”는 물음에 “정치하는 회장이 아니라 수행하는 회장이 되어보이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그는 회의 때만 오던 역대 회장들과 달리 이곳에서 먹고자며 머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0여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는 여법한 사찰의 훈기가 감돌면서, 서울에 와도 숙식할 곳 하나 없던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머물 장소로 재탄생하고 있다. 또한 일요법회 등을 통해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본격적인 사찰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가꾸었던 경기도 고양 금륜사의 신도들은 ‘우리 스님이 비구니회장이 됐다’고 좋아했다가 ‘우리 스님을 비구니회에 뺏겨버렸다’며 울상을 짖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각스님은 금륜사는 사직이지만 비구니회는 공직이며 개인적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본각스님은 “이곳에 전세계에서 비구니 출가를 원하는 교육하는 국제교육기관을 만들고, 지역 여성들을 위한 어린이집도 만들고, 나아가 노숙자를 돕는 일도 해야한다”고 말했다.그는 “비구니스님들이라도 더 이상 정의의 문제에 눈을 감아서도 안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많은 일을 벌일 태세이면서도 법룡사 공동체에 함께 사는 이들에게 ‘이왕 사는 한세상 재밌게 살아보자’며 끊임없이 긍정의 기운을 방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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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0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 Wiley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 Wiley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ISBN: 978-0-745-64492-9 October 2015 Polity 180 Page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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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
ON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Those who practice intellectual history have described themselves as eavesdroppers upon the conversations of the past, explorers of alien ideological worlds, and translators between historic societies and our own, while their critics have often derided them as narrow-mindedly studying the ideas of dead white men. Some consider the discipline to be among the most important in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because it facilitates a better understanding of contemporary ideological programmes and facilitates their rational evaluation.

In this engaging and refreshing introduction to the field, Richard Whatmore begins by examining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intellectual history, before dissecting its various methodological debates. He presents various alternative ways in which we should think about intellectual history, as well as presenting his own very clear definition of the field. Drawing on a wide range of historical examples, Whatmore shows how ideas - philosophical, political, religious, scientific, artistic - originated in their historical context and how they were both shaped by, and helped to shape, the societies in which they originated. He ends by casting a critical eye over the current state of intellectual history, and a brief discussion of how it might develop in the future.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will become an essential textbook for scholars and students of intellectual history, philosophy, politics, and the humanities.
Preface
Acknowledgements
Introduction
The identity of intellectual history
The history of intellectual history
The method of intellectual history
The practice of intellectual history
The relevance of intellectual history
Intellectual history present and future
Conclusion
Notes
Further reading
Index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is a powerful statement of the importance and relevance of its subject.  From a history of the field's development, with a particular focus on the transformation of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by John Pocock, Quentin Skinner and Istvan Hont, Richard Whatmore explores the possibilities as well as the limits of intellectual history, demonstrating the multiple ways in which it better enables us to understand the rich tapestry of human intellectual achievement."
John Robertson, University of Cambridge

"The ideal starting-point for anyone who wants to understand what intellectual historians are doing and why it matters. In this timely and useful book, Whatmore provides a lucid and refreshingly personal introduction to both the history of Intellectual History and the ways it is practised today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Ann Thompson,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Amazon.com: A Companion to Intellectual History (Wiley Blackwell Companions to World History) eBook: Richard Whatmore, Brian Young: Kindle 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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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Approaches to intellectual history. The identity of intellectual history / Stefan Collini --
Intellectual history and Historismus in post-war England / Brian Young --
Intellectual history in the modern university / Cesare Cuttica --
Intellectual history and poststructuralism / Edward Baring --
Intellectual history as Begriffsgeschichte / Keith Tribe --
Intellectual history and history of the book / Jacob Soll --
Michel Foucault and the genealogy of power and knowledge / Michael Drolet --
Quentin Skinner and the relevance of intellectual history / Richard Whatmore --
J.G.A. Pocock as an intellectual historian / Kenneth Sheppard. 




Part 2. The discipline of intellectual history. 



Intellectu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philosophy : their genesis and current relationship / Leo Catana --
Intellectu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 Duncan Kelly --
Intellectu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science / John F.M. Clark --
Intellectu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economics / Donald Winch --
Art history and intellectual history / Katharina Lorenz --
Intellectual history and global history / Andrew Sartori --
Intellectual history and legal history / John W. Cairns --
The idea of secularisation in intellectual history / Peter E. Gordon. 




Part 3. The practice of intellectual history. 



Liberty and the law / Ioannis D. Evrigenis --

Education and manners / Deborah Madden --
Republics and monarchies / Koen Stapelbroek --
Barbarism and civilisation / Michael Sonenscher --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 Norman Vance --
Citizenship and culture / David Burchell --
Democracy and representation / Manuela Albertone --
Religion and enlightenment / Sarah Mortimer --
Art and aesthetics / Francesco Ventrella --
Natural law : law, rights and duties / Knud Haakonssen and Michael J. Seidler --
Wars and empires / Sophus A. Reiners --
Reason and scepticism / Mark Somos.






Editorial Reviews

Review

"this is an exceptionally stimulating book.  Each chapter discusses complex matters with lucidity with no loss in rigor, and each raises questions with great intrinsic interest...... An outstanding work." (Choice Connect 2016)



From the Back Cover

A Companion to Intellectual History provides a unique and in-depth survey of the practice of intellectual history as a discipline, showcasing research undertaken by scholars in Britain, North America and the wider world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Its broad coverage incorporates every aspect of intellectual history as it is currently practiced, including the origins and method of intellectual history, its relationship with philosophy, religion, economics, politic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scholarly controversies to concern intellectual historians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Written by leading researchers in the field, these 40 newly-commissioned chapters consider developments in intellectual history in relation to particular national/continental histories; they demonstrate the ways in which intellectual historians have contributed to more established disciplinary enquiries, from the history of science and medicine to literary studies, art history and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Several chapters provide an expert overview of the seminal writings by contemporary intellectual historians that have caused particular historiographical controversy, and contributors pay special attention to contemporary controversies in order to provide readers with the most current overview of the field. Essays are written in a clear and accessible manner, designed for an international audience.





A companion to intellectual history

Whatmore, Richard; Young, B. W


$8.73 (USD)
Publisher: Wiley Blackwell
Release date: 2016
Format: PDF
Size: 3.1 MB
Language: English
Pages: 475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고전명구 | 고전산책 | 사업성과 | 한국고전번역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고전명구 | 고전산책 | 사업성과 | 한국고전번역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니 /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라 /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다만 한 무엇이 항상 홀로 나타나 / 獨有一物常獨露 독유일물상독로



담담히 삶에도 죽음에도 매이지 않네 / 澹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2019/11/16

한 윤정 [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 – 앤드류 슈왈츠 교수



[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 – 다른백년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

앤드류 슈왈츠 교수  한 윤정 2019.11.11 0 COMMENTS


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문명을 탐구한 뛰어난 학자인데, 그는 주류 제도들이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지 설명한다.

내 가정은 서구 현대성의 핵심이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다. 처음에 도덕적 질서는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의 정신에 있는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형성하며 사회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능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서구 근대성을 특징짓는 사회적 형식을 발전시켰다. 시장경제, 공공영역, 자율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테일러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명백한 특성을 강조한다. 1)우리는 상호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경제로서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 2)우리는 낯선 사람끼리 상호관심사를 숙고하고 토론하는 은유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우리는 초월적 원리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에 “기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이런 실천과 가치는 현대인에게 너무 자명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그럴까? 현대성의 개념적 토대를 생각해보자. 이른바 현대사상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를 의미와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전환을 감행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단지 기계로, 자연을 정신과 사고의 모험을 위한 배경으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사고하는 존재”와 “확장된 존재”둘로 나눴다.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아”를 생각하는 주체로 특권화하는 개인주의와 쌍을 이뤘다.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지배의 모델로 흘러갔다. 1649년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조건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며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은 “추잡하고 짐승 같고 단순하다”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자연으로 해석됐다. 이런 지배의 태도가 인간 존재와 사고의 전 영역에 만연하면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대국과 소국, 과학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 부자와 빈자의 위계를 가져왔다. 물론 다양한 형식의 협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게 성공을 위한 더 근본적 전략이라는 공생(symbiosis)의 아이디어는 대개 배척당했다.

현대문명에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유사하게 국가는 시민을 위해 배타적으로(“아메리카 퍼스트”) 존재한다.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제2논고에서 국가는 재산권을 가진 (남성)시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국가의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런 현대적 이상의 대변인이 됐다. 밀은 이 전통을 확장시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울 때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의 행동은 살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끼쳐 국가가 규제해야 할 때까지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인 공동체주의는 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마침내 현대성은 스스로의 옹호자가 됐다. 이전 단계의 역사는 모두 “전(前)과학적’이며 과학시대에 비해 열등한 것이 됐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낡은 정치체제와 철학, 사회적· 정치적 조직의 형식들이 대체됐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진보는 현대성의 원리 덕분이며, 사회는 점점 좋아진다는 신념인 사회개량론이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다

당연히 현대문명은 유일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등장은 농업 발전과 연결돼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최초의 문명은 농업이 인간에게 잉여의 음식과 안전을 보장했을 때 등장했다. 식량안전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기본적 생존을 넘어 예술이나 여가 활동 같은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은 인구의 집적, 문어(文語), 기념비적 건축물, 고유한 예술양식, 통치체제, 복잡한 분업, 그리고 사회적 계급으로 특징지어진다. 문명들은 농업과 더불어 등장하며 무역, 전쟁, 탐험 등으로 확대된다. 대부분 문명은 다른 확장되는 문명에 합병되거나 붕괴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사라진다.

과거 문명의 범위는 산과 대양과 원거리로 인해 제한됐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명은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초로 하나의 글로벌 문명 안에서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명들을 갈라놓았던 지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스마트폰, 할리우드 영화, 인터넷은 군대와 전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냄으로써 공유된 가치, 국가 간의 균형(혹은 불균형),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를 창조했다.

현대인과 현대국가는 이전에 없었던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함께 묶여있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술에 매혹됨으로써 소비자들은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욕망과 열망 앞에 도열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은 점점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군대와 예술작품, 문화적 성취도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소비주의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글로벌 시민으로 묶어냈다. 물질적 성취에의 매혹은 거대한 자석이 돼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글로벌 소비자를 “예스맨”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은 전세계의 필수품목 가운데 하나다.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는 유혹적이다. 의약품은 질병을 물리치고 사망률은 떨어졌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소비자들을 위해 준비한 안락과 효율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더 큰 번영과 즐거움으로의 전진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삶은 점점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성공 덕분에 더 많은 부가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계속 개선될 것이다.

이런 현대성의 마술은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해졌다. 전례 없이 에너지가 풍부해졌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엄청난 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구의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인 모두가 이런 문명의 변화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갈망하도록 했다. 인디아의 소농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가졌다. 아주 외딴 마을의 주민도 서구식 티셔츠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지구에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지구가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지구 스스로 현대문명을 끝장낼 것이다. 현대의 막바지인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지난 몇 세기를 돌아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문명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문명에 대한 짧은 학습의 결론은 분명하다. 앞선 모든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끝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 분명하다. 이는 다음의 핵심적 질문을 불러온다. 현대성 뒤에 진정으로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명이 올까? 인간은 현재의 문명이 막다른 지점에 이른 뒤 땅,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급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적 붕괴를 막고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 상호의존성을 배워야 한다

지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생태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봤다. 이제 생태적이라는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의 사실과 더불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자연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지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크다. 따라서 생태계와 관련된 사실은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홈즈 롤스턴에 따르면, “어원상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하며, 이는 똑같이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우리가 사는 세계)란 어원을 가진 ‘보편적(ecumenical)’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생태학은 탹월한 상호의존성의 과학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서 모든 과학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이용해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태과학 역시 다른 과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는 과학적 성공이 생태계에서 유기체로, 유전자로, 다시 생화학, 화학, 마지막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으로 이루어진 환원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일대 삼림과학대학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특정 숲에서 전체 나뭇잎의 표면적을 계산한 뒤 나뭇잎들의 생화학적 처리능력의 총량을 이용해 그 숲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태계 연구는 이런 식으로 환원적이지 않다.

생태계는 부분의 합보다 크고 복잡한 창발적 실재이며, 그런 복잡하고 통합적인 전체의 견지에서 개별적 유기체가 이해돼야 한다. 높은 수준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환원주의적인 설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종의 번성은 다른 종들의 번식률과 영양 수요에 달려있으며, 식물과 동물 간의 균형은 양쪽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매우 큰 유기체와 아주 작은 유기체가 상호의존의 복잡한 춤에 참여한다. 정교하게 조정된 그들의 공생적 관계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협동의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다윈 식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연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들이 경쟁자를 압도하고 더 많은 수의 자손들을 생식가능연령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 간의 협력이 그들의 생존과 생태계, 그리고 생태계를 이룬 다른 유기체들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외향적인 영향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향적으로도 상대를 변형시킨다. 포유류나 썩은 나무의 배출물이 다른 종들의 먹이가 된다. 생태계 내부의 이런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생태문명은 생태과학의 이런 통찰에 따라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것은 경제와 정치, 생산, 소비, 농업 등의 사회 시스템이 지구적 한계 안에서 재설계되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대의 확장, 정복, 소비 정신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계약, 협력, 육성 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살아있는 지구와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한다.



생태문명은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문명이 기존 다른 문명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이다. 다른 문명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을 위한 자연의 조작인 것과 달리, 생태문명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의 웰빙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고 공생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는 원초적인 자연의 순수성으로의 회귀와 같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며, 어쨌든 문명의 한 형식이다. 생태문명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끼리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까지 포함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에 그 위험성은 낮았다. 오늘날 지구는 최초로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 다른 문명들이 그랬듯이 이 단일 문명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미국정부는 몇몇 은행이 “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 글로벌 문명이 휘청거릴 경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50번째 혹은 100번째로 다시 한번 문명변화의 율동적인 순환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지금 들린다.

다음문명, 즉 사회조직의 다음 패턴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생태문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유토피아적 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최소 한도로 우리의 현재 문명 뒤에 올 어떤 것을 뜻할 뿐이다. 어쩌면 다른 문명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살거나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문명이 돼야 한다. 즉 현대문명이 지금 초래하는 종류의 파괴적 손상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 만큼 환경과 충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제레미 렌트에 따르면, “생태문명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고기를 덜 먹고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지구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내재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현대성이 (아마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그 계승자가 등장할 때, 과연 어떤 종류의 문명-어떤 종류의 세계관과 생명관–이 부상할 지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과학은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문명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 고통스러운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일으키고, 과소비 및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초래하고, 공공선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구조를 형성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하도록 만든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의 생태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번역: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

미 생태문명연구소 부대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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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2019/10/22

연찬문화연구소 |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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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자료실

남곡|조회 105|추천 0|2019.10.22. 06:44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한 단계 높은 인간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 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강좌를 마치려고 한다.







인(仁)은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①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안연 말하기를,“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 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② 공자 말하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신의로우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仁)을 가까이할 것이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1-6)







③ 공자 말하기를,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예(禮)는 무엇을 할 것이며,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악(樂)은 무엇을 할 것인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3)







허례 허식을 비판할 때 유교나 공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공자께서는 그 해악을 몇 차례 씩 거듭 경계하고 있다. 공자가 중히 여긴 예와 악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외부에 나타난 것이다. 외부로 나타난 형식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본래 성정인 인(仁)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다. 요즘 경조사에 임하는 실태나 혼수(婚需) 준비, 장묘((葬墓), 과시적 소비를 볼 때 더욱 다가오는 바가 있다.











④ 공자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仁)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인(仁)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4-1)











밝은 꿈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년들을 응원한다.





이 밝음은 돈ㆍ출세 등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과는 질이 다른 밝음이다.

즐거운 일터, 사이좋은 이웃, 자연친화적 삶, 함께 하는 지적ㆍ예술적 활동 등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꿈이다.



객관적인 물질적 수준이나 제도는 이런 노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운동이 넓혀져 가야한다.



이것은 범인류적인 시대의 요구다.







도시에서도 가능하지만, 농촌지역에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이야기되는 6차산업과 협동조합의 결합 같은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준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이 준비에는 인문적 자각이 필수적이다.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새로운 유형의 당당한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사이좋고 협동하며 즐거운 삶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서로 키워가는 길에 인문운동가로서 미력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 오래 처하지 못하고 즐거운 곳에도 길게 처하지 못하지만, 인자(仁者)는 인에 편안해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子曰 不仁者 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 安仁 知者 利仁 (4-2)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4-3)







⑦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4-4)







인자(仁者)는 어떤 사람일까.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하지만 즐거운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어떤 경우든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즐거울 때 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족감을 느끼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구분한 것도 사람의 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끼게 한다. 인(仁)의 이로움을 아는 것만 해도 좋지만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은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데서부터 몸으로 체득(體得)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성숙의 목표가 아닐까.

오직 인자(仁者)만이 호오(好惡)를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말씀일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小人)은 자기 중심으로 好惡를 선택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손해가 되면 미워한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仁者만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4장의 無惡也를 보통 악한 것이 없다고 읽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3장과 이어서 읽어본다면 惡을 오(미워함)라고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아니 진실로 인자라면 미워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와 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리요.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이니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키고 위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4-5)











부와 귀를 좋아하고 빈과 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일부러 부귀를 멀리하거나 빈천을 선택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부귀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과정의 정당성이다. 그것을 공자께서는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결국은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 이것은 그 동안의 수 많은 개인과 집단의 삶 속에서 예외 없이 증명되어 왔다.

도(道)는 개개인의 덕목일 뿐 아니라 집단(사회)의 덕목이기도 하다. 불의한 사회(도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과정의 정당성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길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또는 그 자손의 삶 속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항구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은 개인과 사회가 도(道)에 부합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자(知者)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인자(仁者)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모두가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 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선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같은 지금의 제도도 이러한 역사의 산물로 나타났고 또 끊임없이 변화해 갈 것이다.

빈과 천이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운명이나 팔자로 알고 체념하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보고 싶다.

빈과 천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닐까.

요즘 말로 하면 개인의 불행이 사회적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여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일까. 그 동안의 사회 변혁과정을 비롯한 수 많은 개인사 속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바탕으로 검토해 갈 테마라고 생각되었다.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또 인(仁)의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목표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황급하거나 위급한 때라도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늘 도(道)나 인(仁)을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다급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급급한 우리의 실태를 보는 것 같다.











<대화>











- 착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장은 가혹한 말씀이 아닌가요. 심하게 말하면 가난이 사회적 모순 때문일 경우에도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좀 다른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빈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 방법이 도(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체념한 나머지 자포자기의 삶을 살거나 자주적 인간으로서 긍지를 잃어버리는 것 보다는 그 빈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 아닌가요.

빈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범죄나 비리를 범하려는 유혹에 지고 만다면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겠지요.

또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도 무리(無理)나 폭력(暴力)을 수반하거나 밥그릇을 서로 빼앗는 싸움으로 되고 만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일까요.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不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몸에 더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하는데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4-6)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실태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신 것 같다. 정말로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不仁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不仁이 그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仁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남의 不仁을 보고 참지 못하며 그것을 비난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자기가 비난하고 싫어하며 고치려고 한 그 것을 닮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부모의 성품 가운데 '이것만은 싫어' 하며 닮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있다던지, 독재에 항거해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 가운데 독재적 성품이 나타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재를 싫어 한다면 자기 몸에 독재적 성향이 붙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싫어' 하고 비난하며 반대하지만 이윤동기는 몸에 붙어 있다면 진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목적과 방법이 일관되어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은 참으로 음미하고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라는 말에서는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는 하루 24 시간이 모자라!'라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하루를 仁을 실천하는데 온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술회하는 공자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서 느껴진다.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예, 그러하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의 제자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4-15)



'나의 도(道)는 일관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요즘 특히 생각되는 것은 목적과 방법의 일관됨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면서도(목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대립 투쟁의 길이라면 뭔가 일관됨이 아니라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억압과 수탈, 차별과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투쟁이 불가피할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관됨이 있어야한다. 사회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이 상당히 진전된 민주주의 제도에서 공자 이래 꿈꿔 왔던 이 일관됨이 현실적인 테마로 다가온다.

요즘 상생과 화해라는 말이 시대의 화두로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생과 화해는 목적일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어야할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일관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충(忠)과 서(恕)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감히 피력해 본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충(忠)은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흔히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충(忠)이라는 말을 써 왔지만 그것은 한 면(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계 속에 구현된)일 뿐이다. 어떤 관계· 어떤 사람·어떤 일에 있어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은 경쟁이나 대립에서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야 자기의 최고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충(忠)과는 다르다고 본다. 충은 절대적 세계이지 않을까.

서(恕)는 자기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자기와의 다름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많은 진보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신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충(忠)과 서(恕)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고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라면 충과 서는 일관되는 것이고 일관될 때 진실한 것이다.

그 일관됨이 자신에게 향하면 충(忠)이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서(恕)가 아닐까.











⑪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雍)은 인(仁)하기는 하나 말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남을 상대로 말로만 넘길 것 같으면 오히려 자주 남의 미움만 사는 것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5-5)















(가)

맹무백이 묻기를, "자로는 인(仁)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모르겠소"

맹무백이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는 천승의 나라에서 군무는 다스릴 수 있으나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나)

"구(求)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는 천 실의 고을과 백승의 집에서 읍장이나 가재(家宰) 일은 맡아서 함 직하나 그의 인(仁)함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겠소"







(다)

"적(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적은 예복을 갖추고 조정에서 빈객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논할 만하지만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孟武伯 問子路 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

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5-7)







⑬ 자장이 묻기를, “자문은 세 번 벼슬을 하여 영윤이 되었으되 기쁜 빛을 들어내지 않았으며, 세 번 쫓겨났으되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맡았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운 영윤에게 인계하였는데,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이다”



묻기를, “인(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알수는 없지만,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張 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5-18)











이 장들을 보면서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떠오른다. 편견이나 사심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이 그대로 보여 오는 것이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으면 그 정경이 떠올라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사심 없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어떤 재목인가가 보여 오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사심 없이'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편견이나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지만 않으면 그 사람(자신을 포함해서)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슴은 사슴으로 말은 말로 보이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인(仁)에 대해서는 부지(不知)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에 대해 '모른다'고 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 비판이나 비난의 마음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공자 쯤 되시는 분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이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인격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적성 같은 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 마음 즉 심층(深層)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되기 쉬운 것이다.

공자의 '不知其仁也'는 그렇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⑭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회(回)는 그 마음이 석달이 지나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달에 한 번 이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5)







⑮ 번지가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의(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인(仁)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란 어려운 것은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으로, 그래야 인(仁)이라 할 수 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6-20)











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動)하나 인자는 정(靜)하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간다.



子曰 知者 樂水 仁者 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6-21)







⑰ 자공이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에서 그치겠느냐? 반드시 성(聖)의 경지다. 요순(堯舜)도 그러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인자(仁者)는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6-28)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 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평균 IQ가 세계 제1이라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 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⑱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이 멀리 있겠느냐? 내가 인을 하려고 하면 곧 인이 이르러 오느니라.”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 至矣 (7-29)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양보 운전을 해 보면 이 말이 다가 온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깐 스톱하는 것만으로 그 길 위에 인(仁)이 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심정이 되어 잘 듣는 것 만으로 그 사람과의 사이에 인(仁)이 흐르는 것이다.



알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을!







⑲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세의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 된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불인을 너무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⑳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과 인(仁)에 관해 말씀하시는 일이 드무셨다.

子罕言利與命與仁 (9-1)







공자께서 운명이나 인(仁)을 이익과 연관시켜 말씀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흔히 운명을 이야기할 때는 개인이나 집단의 화복(禍福)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의 행(幸)불행(不幸)이 보통의 경우에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나 천명을 이런 일시적인 행복감(幸福感)으로 그치고 말 이기심과 연관시켜 말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탐하는 것은 진정한 명(命)과는 다른 세계라고 보신 것이다.

공자에게는 우주의 리(理)가 명(命)이고, 그 우주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가 인(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천명에 따른 삶이란 인(仁)을 실천하는 삶이며 어떤 개인의 외형적인 부귀공명(富貴功名)이나 빈천(貧賤)은 행복의 본질적 요소는 아닌 것이다.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순리에 따르는 삶인 것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는 곳에서 부귀는 부끄러울 뿐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그의 진정한 행복관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 그 나라의 의(義)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행복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한 단계 높은 인간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 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강좌를 마치려고 한다.







인(仁)은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①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안연 말하기를,“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 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② 공자 말하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신의로우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仁)을 가까이할 것이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1-6)







③ 공자 말하기를,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예(禮)는 무엇을 할 것이며,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악(樂)은 무엇을 할 것인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3)







허례 허식을 비판할 때 유교나 공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공자께서는 그 해악을 몇 차례 씩 거듭 경계하고 있다. 공자가 중히 여긴 예와 악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외부에 나타난 것이다. 외부로 나타난 형식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본래 성정인 인(仁)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다. 요즘 경조사에 임하는 실태나 혼수(婚需) 준비, 장묘((葬墓), 과시적 소비를 볼 때 더욱 다가오는 바가 있다.











④ 공자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仁)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인(仁)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4-1)











밝은 꿈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년들을 응원한다.





이 밝음은 돈ㆍ출세 등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과는 질이 다른 밝음이다.

즐거운 일터, 사이좋은 이웃, 자연친화적 삶, 함께 하는 지적ㆍ예술적 활동 등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꿈이다.



객관적인 물질적 수준이나 제도는 이런 노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운동이 넓혀져 가야한다.



이것은 범인류적인 시대의 요구다.







도시에서도 가능하지만, 농촌지역에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이야기되는 6차산업과 협동조합의 결합 같은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준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이 준비에는 인문적 자각이 필수적이다.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새로운 유형의 당당한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사이좋고 협동하며 즐거운 삶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서로 키워가는 길에 인문운동가로서 미력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 오래 처하지 못하고 즐거운 곳에도 길게 처하지 못하지만, 인자(仁者)는 인에 편안해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子曰 不仁者 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 安仁 知者 利仁 (4-2)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4-3)







⑦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4-4)







인자(仁者)는 어떤 사람일까.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하지만 즐거운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어떤 경우든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즐거울 때 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족감을 느끼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구분한 것도 사람의 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끼게 한다. 인(仁)의 이로움을 아는 것만 해도 좋지만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은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데서부터 몸으로 체득(體得)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성숙의 목표가 아닐까.

오직 인자(仁者)만이 호오(好惡)를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말씀일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小人)은 자기 중심으로 好惡를 선택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손해가 되면 미워한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仁者만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4장의 無惡也를 보통 악한 것이 없다고 읽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3장과 이어서 읽어본다면 惡을 오(미워함)라고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아니 진실로 인자라면 미워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와 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리요.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이니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키고 위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4-5)











부와 귀를 좋아하고 빈과 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일부러 부귀를 멀리하거나 빈천을 선택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부귀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과정의 정당성이다. 그것을 공자께서는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결국은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 이것은 그 동안의 수 많은 개인과 집단의 삶 속에서 예외 없이 증명되어 왔다.

도(道)는 개개인의 덕목일 뿐 아니라 집단(사회)의 덕목이기도 하다. 불의한 사회(도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과정의 정당성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길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또는 그 자손의 삶 속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항구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은 개인과 사회가 도(道)에 부합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자(知者)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인자(仁者)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모두가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 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선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같은 지금의 제도도 이러한 역사의 산물로 나타났고 또 끊임없이 변화해 갈 것이다.

빈과 천이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운명이나 팔자로 알고 체념하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보고 싶다.

빈과 천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닐까.

요즘 말로 하면 개인의 불행이 사회적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여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일까. 그 동안의 사회 변혁과정을 비롯한 수 많은 개인사 속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바탕으로 검토해 갈 테마라고 생각되었다.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또 인(仁)의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목표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황급하거나 위급한 때라도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늘 도(道)나 인(仁)을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다급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급급한 우리의 실태를 보는 것 같다.











<대화>











- 착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장은 가혹한 말씀이 아닌가요. 심하게 말하면 가난이 사회적 모순 때문일 경우에도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좀 다른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빈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 방법이 도(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체념한 나머지 자포자기의 삶을 살거나 자주적 인간으로서 긍지를 잃어버리는 것 보다는 그 빈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 아닌가요.

빈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범죄나 비리를 범하려는 유혹에 지고 만다면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겠지요.

또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도 무리(無理)나 폭력(暴力)을 수반하거나 밥그릇을 서로 빼앗는 싸움으로 되고 만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일까요.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不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몸에 더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하는데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4-6)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실태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신 것 같다. 정말로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不仁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不仁이 그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仁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남의 不仁을 보고 참지 못하며 그것을 비난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자기가 비난하고 싫어하며 고치려고 한 그 것을 닮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부모의 성품 가운데 '이것만은 싫어' 하며 닮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있다던지, 독재에 항거해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 가운데 독재적 성품이 나타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재를 싫어 한다면 자기 몸에 독재적 성향이 붙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싫어' 하고 비난하며 반대하지만 이윤동기는 몸에 붙어 있다면 진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목적과 방법이 일관되어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은 참으로 음미하고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라는 말에서는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는 하루 24 시간이 모자라!'라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하루를 仁을 실천하는데 온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술회하는 공자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서 느껴진다.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예, 그러하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의 제자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4-15)



'나의 도(道)는 일관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요즘 특히 생각되는 것은 목적과 방법의 일관됨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면서도(목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대립 투쟁의 길이라면 뭔가 일관됨이 아니라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억압과 수탈, 차별과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투쟁이 불가피할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관됨이 있어야한다. 사회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이 상당히 진전된 민주주의 제도에서 공자 이래 꿈꿔 왔던 이 일관됨이 현실적인 테마로 다가온다.

요즘 상생과 화해라는 말이 시대의 화두로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생과 화해는 목적일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어야할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일관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충(忠)과 서(恕)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감히 피력해 본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충(忠)은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흔히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충(忠)이라는 말을 써 왔지만 그것은 한 면(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계 속에 구현된)일 뿐이다. 어떤 관계· 어떤 사람·어떤 일에 있어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은 경쟁이나 대립에서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야 자기의 최고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충(忠)과는 다르다고 본다. 충은 절대적 세계이지 않을까.

서(恕)는 자기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자기와의 다름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많은 진보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신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충(忠)과 서(恕)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고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라면 충과 서는 일관되는 것이고 일관될 때 진실한 것이다.

그 일관됨이 자신에게 향하면 충(忠)이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서(恕)가 아닐까.











⑪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雍)은 인(仁)하기는 하나 말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남을 상대로 말로만 넘길 것 같으면 오히려 자주 남의 미움만 사는 것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5-5)















(가)

맹무백이 묻기를, "자로는 인(仁)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모르겠소"

맹무백이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는 천승의 나라에서 군무는 다스릴 수 있으나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나)

"구(求)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는 천 실의 고을과 백승의 집에서 읍장이나 가재(家宰) 일은 맡아서 함 직하나 그의 인(仁)함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겠소"







(다)

"적(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적은 예복을 갖추고 조정에서 빈객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논할 만하지만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孟武伯 問子路 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

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5-7)







⑬ 자장이 묻기를, “자문은 세 번 벼슬을 하여 영윤이 되었으되 기쁜 빛을 들어내지 않았으며, 세 번 쫓겨났으되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맡았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운 영윤에게 인계하였는데,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이다”



묻기를, “인(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알수는 없지만,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張 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5-18)











이 장들을 보면서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떠오른다. 편견이나 사심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이 그대로 보여 오는 것이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으면 그 정경이 떠올라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사심 없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어떤 재목인가가 보여 오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사심 없이'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편견이나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지만 않으면 그 사람(자신을 포함해서)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슴은 사슴으로 말은 말로 보이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인(仁)에 대해서는 부지(不知)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에 대해 '모른다'고 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 비판이나 비난의 마음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공자 쯤 되시는 분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이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인격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적성 같은 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 마음 즉 심층(深層)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되기 쉬운 것이다.

공자의 '不知其仁也'는 그렇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⑭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회(回)는 그 마음이 석달이 지나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달에 한 번 이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5)







⑮ 번지가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의(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인(仁)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란 어려운 것은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으로, 그래야 인(仁)이라 할 수 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6-20)











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動)하나 인자는 정(靜)하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간다.



子曰 知者 樂水 仁者 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6-21)







⑰ 자공이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에서 그치겠느냐? 반드시 성(聖)의 경지다. 요순(堯舜)도 그러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인자(仁者)는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6-28)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 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평균 IQ가 세계 제1이라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 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⑱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이 멀리 있겠느냐? 내가 인을 하려고 하면 곧 인이 이르러 오느니라.”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 至矣 (7-29)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양보 운전을 해 보면 이 말이 다가 온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깐 스톱하는 것만으로 그 길 위에 인(仁)이 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심정이 되어 잘 듣는 것 만으로 그 사람과의 사이에 인(仁)이 흐르는 것이다.



알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을!







⑲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세의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 된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불인을 너무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⑳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과 인(仁)에 관해 말씀하시는 일이 드무셨다.

子罕言利與命與仁 (9-1)







공자께서 운명이나 인(仁)을 이익과 연관시켜 말씀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흔히 운명을 이야기할 때는 개인이나 집단의 화복(禍福)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의 행(幸)불행(不幸)이 보통의 경우에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나 천명을 이런 일시적인 행복감(幸福感)으로 그치고 말 이기심과 연관시켜 말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탐하는 것은 진정한 명(命)과는 다른 세계라고 보신 것이다.

공자에게는 우주의 리(理)가 명(命)이고, 그 우주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가 인(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천명에 따른 삶이란 인(仁)을 실천하는 삶이며 어떤 개인의 외형적인 부귀공명(富貴功名)이나 빈천(貧賤)은 행복의 본질적 요소는 아닌 것이다.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순리에 따르는 삶인 것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는 곳에서 부귀는 부끄러울 뿐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그의 진정한 행복관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 그 나라의 의(義)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행복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