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3

(2) Okjin Park -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2) Okjin Park -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1945년 9월에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그 해 10월 월남했으며 12월에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를 열었다. 다음 해인 1946년에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11월에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시초였다.
그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947년에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경찰 66명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벌어진 4.3 사건 때 제주도의 남로당이 5.10 총선거에 반대해 무장단을 결사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60여명이 사망하자,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그 주변부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로당 무장대로 규정해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을 자행하였고, 그 중 서북청년단 무장단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한국 내 남로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부역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 이유로 북한군 미점령지역의 보도연맹 인원들을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량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학살에 나섰으며 그 밖에도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고문, 폭행, 살해 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5.16 군사정변 시기에 해체되었고, 그 참가인원들은 지방으로 옮겨 교회를 건축하고 자신들의 '반공행위'를 내세우며 목회를 하였다.
한경직은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공식 석상에서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나, 영락교회에서 시작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하였으며, 사죄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위의 발언처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들이 반공의 선두였으며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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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오금숙 (제주 4 3연구소 연구원)

4 3당시 산에 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른 이춘형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증언 1 :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춘형(李春珩, 96년채록, 채록당시 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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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2 :얼굴이 고왔던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으나 4 3당시 홀로 된 상태였었는데 탁대위는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다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서청단장인 김재능도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그는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녀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어요.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는데 무서워서 가급적 나들이도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강소희姜曕熙, 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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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3 : 나는 그때 마흔 두 살이었어. 경찰관이 다짜고짜 '네 서방 어디 갔나. 폭도질 하러 갔지' 하고 윽박질렀어. 내 남편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계속 살았지. 그렇게 얘기해도 주먹질이야. 경찰은 그 사이에 겁을 먹고 골방에 숨어 있던 내 며느리를 붙잡아 공회당 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며느리를 걸상 위에 누인 후 배 위에 긴 나무를 깔아 놓고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 앉아 '네 서방 간 곳을 대라'고 고문했지. 차라리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달려드니 내 뺨을 때리면서 그 짓을 계속했어.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지.

경찰은 여러 사람을 심문하다가 갑자기 한 할아버지를 불러내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할머니를 지목, 그 위에 올라타 마부 흉내를 내면서 빈 터를 돌게 했다. 고난향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때 그 하르방은 60세 가량이었고 할망은 그보다 몇 살 위였어. 두 사람은 괸당(친척)이었어. 마치 하르방 말에 채찍질하라는 듯 마늘 뿌리를 할망 손에 쥐어 주더군. 할망이 머뭇거리자 또다시 윽박질렀어. 사람의 얼굴을 갖고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똑똑히 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그런 모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

(高난향, 89년 채록, 채록당시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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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4 :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

(좌봉左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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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경찰 내부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고문도 계속 발생한다. 4 3당시 서귀포 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씨는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증언 5 :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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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1949년 3월 3일에는 한 군인이 처녀를 강간하려다 반항하자 총살한 사건이 벌어져 가족과 주민을 분노케 했다.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은 사람은 강매옥(姜梅玉, 당시 19세)이었는데 강매옥의 언니 강경옥씨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증언 6 :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죠.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되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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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심지어 임신 중이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토벌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토산리의 한 증언자는 "중산간을 순찰하던 토벌대가 임신부의 배를 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고 했다. 당시 29세였던 안기정씨는 임신 중에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선흘에 살고 계신 차경구 할머니는 임신 중에 보름간 고문당해 결국 아기를 유산 시켰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증언 7 : 남편은 목수일을 하느라 잠시 조천리에 가 있던 48년 9월 말께입니다. 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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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9년 1월 성읍리 주민들은 토벌대가 저지르는 한 모자(母子)에 대한 총살극을 지켜봐야 했다. 그들은 남편이 산에 올랐다는 이유로 그 부인과 갓난아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죽였다.

증언 8 : 대부분 토벌을 갔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경찰 몇 명이 남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민보단과 부인 회원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고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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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 3이 양민 학살이라는 증거는 이렇듯 힘 약한 여성이나 노약자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사례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남성이 입산을 하면 그의 부인과 자식, 장모까지 학살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팽배했던 동서 냉전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까지 '빨갱이 새끼'로 몰아 넣어 학살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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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 시기에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나 강간 살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며, 사태가 완화돼 무장대와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도 토벌대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처형했다. 주로 재력 있는 사람들이 금품을 갈취하려는 서북청년단에게 끌려가 희생되었다.

서청이 강제결혼을 감행하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성적 대상물로 맘에 드는 여자를 골라 강제 결혼하는 사례와 또하나는 제주에 안착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재력가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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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강제결혼 사례를 몇개 더 들어보자.

증언 10 : 나는 48년 11월 2일 서청 출신 박 아무개에게 끌려갔다. 그는 악명이 높았고 지금도 제주에서 잘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은 교사 출신 고아무개인데 그가 지서 주임 시절 강제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애낳고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이 부부 동반한 것을 본적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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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런 성폭행에 관련된 증언은 본인 자신이 하기 힘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채록하는 과정에서도 당사자 본인의 증언보다 간접적인 증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래의 증언자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직접 증언했다.

증언 12 : 난 해방 직후 음악동지회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기로 성내에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차출되었다. 이때 노래를 부르면서 토벌대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서청단장 김재능이 나를 노렸다. 김재능이란 놈은 나이든 여자든 젊은 여자든 어떻게 하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해 볼까 궁리하는 놈이었다. 김재능에게 얼렁뚱땅 '다음에 보자'고 하여 도망쳐 나온 적도 있다. 또 2연대장이 날 노렸다. 한 번은 자신의 부하에게 날 몰래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부하들은 우리집 담을 넘다가 실수해서 우물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결국, 날 도와주었던 2연대 헌병 대장과 결혼했다.

(金아무개, 96년 채록, 채록당시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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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당시 서북청년단 서귀포 단장은 임아무개였는데 한 재력가의 사위가 됐다. 경찰 사찰계에서 근무하던 서청출신 김아무개도 역시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다.

한 피해 여성과 교원양성소를 같이 다녔다는 할아버지는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증언 13 : 한 군인 장교가 교사를 하던 한 여성을 탐내서 그녀를 위협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여성의 동생을 보고 반해서 이번에는 같이 살던 여성을 버리고 그 동생과 결혼하려 했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군인들은 총으로 위협했다. 그 여성의 집은 양철집(그 당시의 양철집은 부잣집의 상징)이었는데 총구멍으로 범벅이 됐다. 결국 그 군인장교와 결혼한 동생은 육지에 가서 살다가 나중에는 이혼 당했다고 한다.

(李아무개, 98년 3월 채록, 채록당시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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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Ⅰ}(445쪽 ∼446쪽)에 제주 여성과 결혼한 사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록에는 제2연대장 함중령은 '과거 9연대 시절 민폐가 있었음을 인식, 이를 막아 신뢰를 얻었다'면서 그 증거로 '뒷날 제주도 여성과 결혼한 사병이 적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들의 욕심과 재정 확보를 위해 강제결혼한 것을 '신뢰를 얻어서 결혼했다'고 표현하는 이 기록을 보고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강제결혼 당한 여성들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이렇듯 여성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와 같은 왜곡된 기록을 통해 여성들의 인권은 더욱 실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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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3. 살아남은 여성들의 수난

4 3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아픈 기억들을 오래도록 남겼다. 49년 1월 27일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인 송군옥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 눈이 멀었다. 주민 백문수 씨는 어린 손녀가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길을 지나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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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 3 이후의 제주 경제는 극도의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집은 불타고 재산도 상실된 가운데서 가장을 잃은 여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동광리의 박경생 할머니는 4 3당시 39살 나이였다. 남편과 두 딸, 아들 한 명 등 전 가족이 몰살당한 후 50년 가까운 여생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어렵게 살다가 95년 작고하였다.

또 토벌대에게 총살당한 사람의 가족은 국가에서의 지원은커녕 연좌제에 묶여 장래가 막히기도 했다.(물론 실제야 어찌하였든 법률상으로 연좌제 폐지는 1984년에 이루어졌다) 연좌제인 경우 대토벌시기에 '대리학살'이라는 형태로 엄청나게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끔찍했던 4 3 사태는 끝났지만 유족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토벌대에게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또다른 피해를 당해야 했다.

증언 15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청 출신 순경들에게 구둣발로 채이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6 25가 나자 육군에 입대해 항공학교 조종사 모집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년 동안 1백 회 이상 출격하는 기록을 세웠지요. 그러나 어느 날 특부대에서 부르더니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 하면서 더 이상 조종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작은 아들이 ROTC에 합격하고도 못 들어갔습니다.

(홍문평洪文平, 97년채록, 채록당시 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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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승만 장로는 서울에서 열린 서북청년단 총회에 참석하여 서청원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신원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격려하면서 '저기 남쪽 끝 외딴 섬에 빨갱이들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서청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빨갱이를 타도하러 가는 애국자들'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서청은 이북에서 쫓겨온 상태였고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안은 채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 그들이 제주에 와서 '빨갱이 여편네'를 고문, 강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동서 냉전이 몰고 온 국가 폭력이고 잔혹한 인권유린이다.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 내에 두려는 미국과 남한만에서라도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화된 냉전 체제는 집단적 광기의 인권유린을 가능케 했던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체결된다. 이것은 미군이 완전 철수하기 전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권은 물론, 미군 주둔에 필요한 기지와 시설의 지배권을 계속 갖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군정의 지원과 방조 하에 자행된 집단광기적 인권유린은 '서북청년단'의 만행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군과 더불어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의 무소불위적 폭력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이들을 자신의 정권 장악에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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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 Hyun Yang 서북청년단에 대해선 결국... 반공이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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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인가 '마음챙김'인가

 '알아차림'인가 '마음챙김'인가

작성일 : 12-12-16 15:23
'알아차림'인가 '마음챙김'인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148  
생각은 떠오르나, 하나
생각은 떠오르는 것인가?
생각은 하는 것인가?
주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떠오르는 생각'은 생각이 주체이고, '하는 생각'은 내가 주체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떠오른 생각 자체가 주체가 되어서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른바 '망상을 피우는'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때는 그 생각을 알아차림하는 sati 수행으로 망상을 피우는, 즉 불필요한 생각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좋다. sati 하는 순간 망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럼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생각은 어떤 것인가?
그 생각은 '사유'라 부를 수 있고 구체적인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요구되는 samadhi 수행을 한다.
때로는 samadhi로, 때로는 sati로 적절하게 그 쓰임새를 가지면 된다.
'마음챙김'인가, '알아차림'인가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은 존 카밧진 박사가 1979년 미국 매사추세츠 의대에 처음 도입한 것으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이 토대다. 정신질환자나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 치료와 완화에 효과가 있다. MBSR에서 말하는 '마음챙김'이란 주로 부적응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명상요법을 통해서 편안하게 하여 정상으로 되돌리는 치료요법이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건강한 정상인을 대상으로 한다. 평소 마음근육을 만들어서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하고 좀더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한다. 일상생활로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고 마음에너지를 보충하여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게 한다. 그리하여 삶의 만족지수를 높이고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것이 '알아차림' 수행의 궁극지향점이다.
이와같이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은 서로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으며 드러난 차이가 있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알아차림'은 awakening 에 가깝고, '마음챙김'은 mindfulness 가 적당하지 않나 싶다.
(서양에서 명상을 받아들일 때 아마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정신을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알아차림'과 '마음챙김' 용어를 쓸 때 좀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글은 Buddhapala스님의 강의를 기초로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 - Daum 팁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

불쾌한걸회피미루지마|2012.11.08 20:27 수정됨 

|조회 1,107|신고
1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답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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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한곳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문으로 염念이라고 하며 뜻을 지킨다고 하여 수의守意라고도 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집중되지 않은 상태를 염의 반대말인 망념忘念 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내 마음이 집중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으면 망념이 생겨나고 잡념이 생겨나며 번뇌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산란하여 고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다시 한곳에 집중(마음챙김)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럼 마음이 순일하게 고요하여 집중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알아차린다는 것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순간 둘이 되어버렸기때문입니다.
    둘 아닌 상태에서는 알아차린다는 것도 없으며 한곳에 집중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한 곳에 집중하면서, 동시 '내가 지금 집중했구나' 하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집중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히 집중했을 때는 내가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마져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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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25 |의견 1 |신고
  • 답변
     질문 하신 내용은아주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엄중한  부분입니다.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에 대한 것은  똑같은 의미 입니다
    번역자의 단어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이를 다르게 설명한다면  너무나 큰 잘못된 견해라고 단언 합니다.
    수행에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있습니다.
    그것은 사마타(선 또는 참선이라고부름)과 위빠사나  입니다.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 이라고 하는것은  위빠사나 라고 하는 불교 수행의 핵심에 해당 됩니다.
    사마타(선 또는 참선) 수행과  염불 기도 등은 관념 수행이며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 수행입니다.
    바로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수행입니다.
    번뇌라고 하는것도  억압 굴복 회피 등의 방법으로 통제한다면  이는 결국 관념적 수행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번뇌도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지 극복이나 굴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음은 찰라에 일어나서 찰나에 사라지면서 흐릅니다.
    순간 순간 변하는 마음을  챙겨본다 또는 알아차린다는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수행 이라고 하는 이유가 얼마나 심대한 의미가있는지 꼭 배유고 체험을 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부디 훌륭하신  스승님을 만나시어  체계적인 공부를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 답변
    한국의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사띠(sati)를 번역할 때
    어떤 곳은 한글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서로 다르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냥 우리말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이해해야죠.
    이걸 제대로 이해못하면 삼매는 물건너간겁니다.

    사띠(sati)는 한자로 염(念)이라고 표현됩니다.
    정념(正念)과 정지(正知)가 있습니다.

    정념(正念)이란 팔정도의 그 정념입니다.
    정념(正念)의 뜻은 바른 기억이란 뜻 입니다.

    정지(正知)란 바른 알아차림이란 뜻이죠.

    정념(正念)이란 삼매의 대상을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을 말 합니다. 
    정지(正知)란 바른 알아차림이란 뜻으로 딴 생각에 빠졌나를 알아차리는 걸 말합니다.

    그러나 삼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념입니다.

    단계에 이르면 정지는 버려야 할 것이고, 이 정지가 곧 삼매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이 곧 삼매를 방해하는 겁니다.

    그땐 오로지 정념만이 필요합니다.

    사띠란 표현을 한글로 번역할 때,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보다.....
    기억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낫습니다.

    대상을 기억하는겁니다.
    알아차리는 것보다 기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 화를 내면 모든 공덕이 사라지고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라는 걸
    기억하면, 금새 화는 사그라 듭니다.

    이렇게 기억이라는게 중요합니다.

    삼매도 역시 마찬가지죠.
    대상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게 곧 대상에 몰입하는거죠. 
  • 답변
    부처님 당시에 가르침을 되짚어 보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나(眞我)를 칮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안에 마음이 있다고 설하십니다. 물론 이를 단번에 알 수 있는 논리는 지관(止觀)을 갖추고 몸과 마음을 인과법에 맞추어 분별할 수 있는 근기가 되면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나 이러한 근기를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빌린 것입니다.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은 사역적 개념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인연을 필요로한 표현입니다.

    금정산인 정견(正見)_()_
  • 답변
    念이라는 말은 항상 잊지 않고 있음이란 의미가 있고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마음에 새긴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마음에 새긴다는 말은 心印이고 심인이란 용어는 천태지자대사도 혜능대사도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그래서 念은 마음새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거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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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念-알아차림-마음챙김]은


인경스님의 \"명상교실\" 3회-알아차림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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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1>



Park Yuha
16 hrs ·

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1>


책을 무료공개 하기 위한 홈피공개 후 한동안 재판이나 책 관련 일은 꼭 써야 할 때 빼고는 쓰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몸을 두고 있는 "지금 이곳"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4월 18일에 다시 형사재판이 있다. 국민재판 여부가 아마 그날 결정될 것 같다. 국민재판이 되든 아니든, 그 무렵 부터 다시 새로운 홈페이지를 공개 할 생각으로 준비 중이다.

그런데 홈페이지제작을 담당한 분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이하는 그 요청에 부응해 메모형식으로 쓴 글.

1. 한일문제 관심 배경

서울출생. 1남 3녀중 막내.

심신이 가장 편안했던 건 초등학교 시절. 나이가 많이 차이나는 언니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언니에겐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에서, 작은언니에겐 프랑스에 대한 관심에서. 엄마에게선 자립심.

문학소녀이자 공부 잘하는 반항아였던 중학교 시절.

비발디의 사계중 겨울을 듣다가 지각하거나, <금지된 장난>을 보러 프랑스문화원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빠지기도 했던 고교시절.

열 세살 위인 큰언니의 배우자가 외교관이었고 첫 부임지가 일본이었던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와 가까워진 계기.

고교졸업직후 도일. 1년동안 일본어학교에서 입시준비. 입시를 위한 유학생시험에서 일본어 1등. 1등이라는 성적은 이 때가 마지막. 내 인생에서 일본어를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그리고 남들이 흔히 가던 곳을 피해 게이오대학에 입학.

학부시절엔 소설과 프랑스어와 서양영화와 클래식을 끼고 지냈고, 이 기간동안 만났던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인식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졸업후에는 학부에 출강 왔던 동경대 교수밑에서 연구하고자 동경대 연구생이 되었으나 결혼하게 되어 귀국.

3년후, 아이/남편과 함께 두번째 유학. 근현대문학 교수진이 충실했던 와세다로 대학원진학. 이후, 공부와 가사및 육아, 아르바이트(한국어 교사,NHK국제국에서의 한국어 아나운서, 사이말통역회사의 파견통역등이 장학금 이외의 주수입원)로 수년간을 보냈다.

그러나 무리한 탓에 유학말기에는 건강악화. 귀국이후까지 통산 15년 정도가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산 기간이었다. 그 결과로 2000년에 큰 수술. 그 때 병원에서 탈고한 책이 첫 단행본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였다. 이 책에 담은 것은 귀국(1993)이후 몇년동안 본 한국에 대한 생각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에서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 치명적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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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2>
2, 연구/번역/활동/교류

일본근현대 문학을 전공하는이유로 `문학을 통해 일본인을 알고 싶다`고 "국문학과"선택 때 지도교수에게 말한 기억. 게이오대학에 가려 했던 이유중 하나도, 타교는 요구하지 않았던 사회과목시험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매력. 세계사를 선택해 시험을 치를 만큼 역사 역시 좋아했다.

대학원 시절, 문호 나츠메소세키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가장 많은 연구가 존재하는 대상이어서 결과적으로 첨단연구방법에 접하게 되었던 것은 행운. 또 선배들과의 이론공부와 일본을 대표하는 평론가 가라타니고진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이 이후의 지적자산. 문학론/사상론/역사론 사이 어디쯤에 있는 글을 쓰게 된 바탕은 아마도 이 때 만들어졌을 것.

박사과정때 와세다대학학회지에 실은 첫 논문은 소세키가 만주/한국을 방문하고 남긴 기행문 비판. 일본의 대표적 학회지에 실었던 첫 논문도 나츠메소세키의 <마음>을 페미니즘/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다룬 논문. 아직 일본인들 사이에 "외국인은 일본문학을 이해못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었을 무렵이어서 약간의 자부심.

귀국후 몇년동안은 번역작업에 몰두. 당시 아직 소개가 미비했던 일본근현대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무명작가에 가까웠던 오에겐자부로를 포함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웅진출판)을 기획/번역. 우연히도 시리즈가 나온 직후에 오에겐자부로가 노벨상을 수상. 당시 일반적이 아니었던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번역한 유일한 책이었기에 웅진의 인터뷰승락. 1995년 2월, 오에선생을 만나다. (<세계의 문학>게재)

1993년에는 가라타니 고진을 한일문학심포지엄(제주)에서 처음 만남. 아직 조선총독부가 남아 있을 무렵 같이 그 앞을 걸었고, 그 위치를 보고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었다니."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일본진보지식인에 대한 신뢰를 만든 또하나의 계기.

이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97 민음사)번역. 아마도 박유하의 번역서중엔 가장 많이 읽혔을 책 .가라타니가 읽은 책을 전부 읽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다.

2001년, 교과서문제로 한일갈등이 본격화 되었을 때 일본에서 문제된 교과서채택 반대운동에 앞장 섰던 고모리요이치 교수 초청 강연 기획. 그러나 이 때, 같은 이야기가 공간을 달리 할 때 이해/소비되는 양상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 이후의 한일갈등론집필의 계기.

비슷한 시기에,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역사포럼"이라는 연구모임에서 김철,임지현,문부식,윤해동,김은실,황종연등과 민족주의 문제연구. 민족주의 비판이 많지 않았을 때여서 즐거웠던 한때였으나 이 때의 멤버는 현재 내 책에 대한 입장에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태.

2003년 겨울, 그 해 가을에 나온 <思想>특집집필을 위한 모임에서 만나게 된 우에노치즈코와 나눔의집 방문.

2004년, 고모리요이치,와다하루키,우에노치즈코, 최원식,김철 교수등과 지식인 대화모임<한일, 연대 21>결성, 민족주의를 넘어선 대화 시도. 매년 개최했던 심포지엄 성과를 2008년에 발간.(<한일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東アジア歴史認識のメターヒストリー)

이 기간동안, 2001년의 문제의식을 담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2005. 일본어판은 2006) 발간. 한국에서는 몇몇 긍정적 서평을 얻었고 문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선택되었으나 일반독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음. 다만 일본판이 호응을 받고 높이 평가되면서 여성/외국인으로는 처음이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이 주어짐.

이 책에서 `업자`의 문제를 지적하게 된 계기는 2000년, 2002년에 군산 집창촌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여성들이 감금상태로 죽어간 사건. 계급과 젠더화공간에서의 폭력발동양상에 대한 고찰의 결과.

2007년, 뒤늦게 나츠메소세키론과 재일교포문학론들을 모은 일본어논문집 발간(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ジェンダー、2007,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나츠메소세키로 보는 일본근대,2011 문학동네) .이후,최근 몇년간은 <이동>에 대한 관심에 바탕한 식민지출신 일본인(문학)연구. <제국의 위안부>는 "국가/계급/남성의 의지로 이동하는/당하는 개인"에 대한 관심의 산물.

3.관심

어렸을 때는 `작가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 정서를 해 주거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 "양처"이데올로기를 제대로 내면화. 그러나 공부잘하는 학생이면서 반항아 기질이 중학교때부터 발동.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이 악마들아~`라고 일갈하는 선생님을 향해 `우리가 왜 악마인가요?`라고 친구들을 대표해 나서 따지기도 했으니 결코 순종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언니 책장에 있던 `폭풍의 언덕`으로 `어른들의 문학`에 눈떴고 이후 앙드레지드전집을 좋아하는 여고생이 되었다. 중고교 시절 고독할 때의 친구는 늘 음악이었고 고등학교 때 새벽 1시에 기독교 방송 시그널 뮤직으로 나왔던 드보르작 <아메리카> 2악장은 지금도 그 밤들의 공간이 생각나는 음악.

동물을 좋아한 건 엄마의 영향이지만 동물은 내게, 압도적 약자(언어 소통 불가/일방적 보호가 필요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길러 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지배와 차별이 발생하는 권력관계에 민감했고 모든 폭력이 끔찍히도 싫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 건 주로 한국전쟁 관련 소설. 누구 작품이었는지 잊었으나 사람의 껍질을 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연장선 상에서 이른바 <양공주>가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이 아마도 훗날 <위안부> 에 관심을 갖게 된 원점. 혹은 학부시절 우연히 가능했던 한 한국인 "술집아가씨"와의 만남.

학부때는 막 나온 정보지를 한손에 들고 영화를 보기 위해 동경거리를 배회. 좋아했던 건 비스콘티, 베르이만,그리고 루이말의 어둡고 어두운 영화도 찾아 보았다. 클래식음악동호회 멤버였고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콘서트에 다닌 시기. 아슈케나지와 알반베르크 사중주단을 좋아했다.

나이들면서 미술/건축/사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지금도 <인간>과 <표현>이 주요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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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갈등의 시작

<화해를 위해서>일본어판이 나온 이듬해 (2007),일본 연구모임 WINC가 <화해를 위해서> 서평회 개최. 그러나 주변 일본진보지식인들이 이 책을 두고 분열.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 해 여름,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하기도 했던 재일교포김부자의 비판이 잡지게재. 그러나 반론을 쓰는 대신, 비슷한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그 책을 읽으면 박유하가 어디에 서 있는 지 이해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유하가 "일본우익과 친화적"이라고 했던 김부자와 주변인들은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박유하를 일본우익과 다를 바 없는 역사 수정주의자로 비판.
2008년 가을, 이번에는 재일교포 서경식이 한겨레 신문에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게재. 박유하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박유하를평가한 일본의 진보지식인(일본에서는 `리버럴`로 표현)에 대한 불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후, 한겨레는 다시한번 재일교포 윤건차의 인터뷰에서 <화해를 위해서>를 "일본보수 지식인의 찬사"를 받은 "섣부른 화해론"이라고 비판. 연말에는 윤건차의 책을 소개하는 단신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으로 소개. 한겨레에 전화해 해당기자(한승동)와 통화, 재일교포학자들이 한 얘기를 옮긴 것임을 확인했지만, 결국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만 받고 끝냈다.
그러나 몇년후, 고발장에 서경식/윤건차교수의 사고(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는 한일동맹을 강화시키는, 국가간 화해일 뿐)가 그대로 원용되어 있는 것을 발견. 고발사태가, 재일교포들의 생각이 이 기간동안 한국의 진보층 일부에 확산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2009년의 미온적 처리를 깊이 후회.
5.2013년 <제국의 위안부>발간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발간한 건 고발시점에서 10개월이나 이전 일이었다. 그리고 이 때는 조심스럽기는 해도 이 책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뷰를 해 놓고도 직전에 게재취소한 매체가 있었고, 정대협도 고발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았다 .정대협은 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조언을 듣고 포기했다고 하는데, 사실 책에서는 나눔의 집에 대해서는 두 줄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지원단체 비판은 대부분 정대협 비판이었다.
이후, 해당 학회나 지원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공론화하는 일은 없었고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2014년 4월, 몇몇 유지들과 함께 심포지엄을 개최. 그리고 책을 낸 이후 만나왔던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정대협 필요없다,직접 보상받고 싶다`는 등, 그동안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
이 심포는 한일양국의 큰 주목을 받았고, 고발사태를 만든 또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박유하는 이 심포지엄을 자비로 열었다. 이 아이러니에 답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
6.2014년 6월, 고발
2014년 6월초, 박유하가 가장 친하게 대화해 온 할머니가 작고. 그리고 불과 일주일 후에 박유하는 고발당한다.
고발장에는 "`박유하는 예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썼다, 그러더니 또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 심포지엄도 열었다. 그냥 놔두면 앞으로 또 책을 쓸 것이다. 그러니 박유하의 활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박유하는 위안부할머니를 "자발적매춘부"라 말한 몹쓸 친일파로 전국민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1년 9개월이 지났다.
(이상,2016년2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