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설교 기도 묵상 토론 -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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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3 13:07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최경식
조회 수 1019 추천 수 55 댓글 21

제가 수련회이후 어디 피정 나와서 이제사 글을 봅니다. 한 목사님과 그리고 그때 더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발제상 구조문제도 지적하신대로 있었던 것 같구요. 첫 번 째 지적대로 통전적 선교를 말하며 에큐메니칼 진영의 문제가 있는것 처럼 말하는데 그 문제가 발제에 없었다는 지적은 정당하며 아마 제가 보안하여 답변을 넣어야 될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문제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질문자가 다르게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부분은 계속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어떤 한계나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고, 저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 것이죠.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최병천 목사님께서 사회하면서 어느정도 제가 할말을 하신것 같아 서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제 나름대로 이해한 것은 분명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갈등 내지 대립이 존재했던건 확실합니다.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자체가 복음주의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선 분명 복음주의와 대척점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요. 여기까진 서로 동의를 하는것 같은데---문제는 그럼 에큐메니칼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개인구원을 포기했느냐 그렇게 보는건 잘못이다--이런 주장을 하는것 같아요. 맞아요.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개인구원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진 않았지요.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만큼 개인구원에 대한 강조점을 많이 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원치않게 개인전도에 대한 열정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자 에큐메니칼 자체에서 반성이 일어나게 되고 여기서 복음주의 진영이 주장한 것에 대한 이해를 폭 넓게 하게되고,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옵니다. 바로 로잔대회에서죠. 여기서 복음주의자들도 자기들의 한계를 인정 하여 에큐메니칼 입장의 복음을 다시 정립하게 되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개인구원에 대한 부분도 다른 측면과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물론 개인구원을 포기한적은 없지만 약화될수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죠) 위의 질문에서 보면 발제자가가 에큐메니칼 입장에 대해 개인복음을 부정적으로 말을 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제가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측이 개인구원에 대해 약화된 부분을 다시 재정립했다고 보아집니다. 사실 이제껏 복음주의적 진영에서는 복음을 수직적 차원에서 이해하였고, 에큐메니칼은 원하든 원치않든 수평적 차원이 많이 강조된건 사실이지요.(그런다 해서 수직적 차원을 버린건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복음을 수평적차원에서 보는 것이 강조됨으로 수직적차원이 약화될 여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론을 들고 나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왜 통전적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그렇게 말한 이유와 배경을 잘 이해하면 그동안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에서도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선교를 보다 더 복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것을 다 포함하여 선교신학을 더 확립하려는 시도라 볼수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를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통전적 선교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선교의 개념을 보다 넓게 이해한 곳이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가 좀 되시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의 말을 우리가 같이 들었으면 합니다.
흔히 ‘통전적’이란 형용사는 선교를 수직적 차원이나 혹은 수평적 차원 중 한 방향만 이해하는 흐름을 수정하려 할 때 사용된다. 비셔트 후프트는 1968년 세계선교협의회(WCC) 웁살라 총회 개막연설에서 이러한 두 차원을 성서적으로 종합하여 함께 끌어 안으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삶과 연관된다는 복음의 수직적인 해석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갖는 복음의 수평적 해석 사이에 커다란 긴장이 여전히 상존함을 보면서, 이제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를 왕복하는 유치한 운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쪽으로 치우친 모습은 본질적인 면에서 복음의 진리를 충만하게 포용하려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직적 차원을 상실한 기독교는 소금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여, 스스로 맛을 잃고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공동체를 향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수직적 차원에 우선순위를 두는 기독교는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안에서 우리를 총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위의 말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하는 것으로 선교의 지엽적인 문제가 양자에 다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차원엥서 나온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을 이전보다 더 통전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관을 들고 나온 배경은 이제는 복음을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이렇게 나누어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큐메니칼이 수직적 차원을 거부한적은 없었죠, 그러나 복음주의와 달리하다 보니 그 부분이 그들이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약화를 불러올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선교를 주창한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론을 주장한 곳은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임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은 확실히 건강하다고 저는 보는것이죠. 어떤 한계나 부족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것이야 말로 진정 에큐메니칼이죠, 에큐메니칼이라 해서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식으로 보는것이야말로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며 맹신입니다, 에큐메니칼이 건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주창한 것에 어떤 한계가 보일 때 그동안 대척점에 서 있었던 복음주의자들과도 대화하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더 나은 선교신학을 주창하는 것이야 말로 에큐메니즘에 합당한 것이죠.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통전적 선교론이었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이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혹 이 부분을 더 쉽게 더 깊게 알기 원하는 분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면 될것 같습니다. 아마 이 책을 보시면 에큐메니칼 진영이 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왔는지를 알게 될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김동선, 대한기독교서회 출간


더 좋은 논의를 위해 계속된 질문과 응답을 기대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연화리 피정의 집에서 최경식드림

#답이 길어서 따로 올렸습니다.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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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1'
2012.02.23 15:09
좋은 답변입니다. 대화는 언제나 활기를 줍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토론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누구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글을 대화방으로 옮깁니다.
댓글

한상복 2012.02.23 17:47
이 논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다시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더 공부하며 토론에 임하겠습니다.
우선 몇가지 질문으로 다시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1. 1974년에 있었던 로잔 세계복음화 국제회의는 분명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1968년 제4차 에큐메니칼 총회가 웁살라에서 열렸고, 이 총회에서 WCC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더욱 강하게 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속 활동으로 1973년 '오늘날의 구원'이란 주제로 모인 방콕대회에서 구원을 다음과 같이 '통전적'으로 정의내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삶의 새로움으로,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전개로서, 또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죄인을 의롭게 하심과 사회적,정치적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120쪽)
이러한 구원에 대한 WCC의 정의는 복음주의 교회들을 우려케 하였고, 이듬해인 1974년 "땅이여 주의 음성을 듣자"라는 주제 하에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존 스토트가 중심이 된 로잔대회입니다. 물론 여기서 작성된 로잔언약에는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한 교회의 과거 모습을 참회하고 사회참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움직임은 통전적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에큐메니칼에 대한 우려와 대응으로서 양진영을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참여를 말하고 있으나 전도의 우위성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전도와 사회참여를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원과 순간,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문화, 복음화와 사회참여,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 구원과 해방, 세계와 교회 등,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원론을 없애는 것을 선교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교,김동선,41쪽)

로잔대회는 중립적인 대회가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의 대회임을 볼 때, 그 결과물로 통전적 선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 심방이 갑자기..... 다음에 계속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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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09:59
계속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이 조금씩 좁혀 지리라 여겼습니다
74년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대회가 맞습니다(이건 제가 잘못알았음) 그러나 이 대회는 복음주의가 회개하고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였지 분리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75년 나이로비 에큐메니칼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복음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통전적 선교방향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트게 한 대회였지요, 따라서 74년 로잔복음대회와 75년 에큐메니칼 총회는 자신의 입장만이 아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선교를 이해와 합일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선교대회였습니다.
지금 한목사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 초기에 나타난 것들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은 한목사님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선교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별 갈등없이 공동의 유산아래 선교를 하던 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 갈등과 대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근거는 갈등과 대립할 시기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그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복음주의적 요소를 반영하여 통전적 선교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초기신학과 후기신학에 조금의 차이가 있듯이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도 많은 변천과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에큐메니칼의 장점이면서 특징입니다. 다음의 자료를 자료실에 올려 드릴테니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시면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국신학계에도 복음주의 입장에 선 교수님도 계시고, 에큐메니칼 입장에 선 분들도 계시는데(호신에 김동선, 장신에 한국일), 한국일 교수님이 발제한 소논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논의한 것을 다루고 있으며, 앞전에 소개한 김동선 교수님의 책도 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 까지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가 단지 개인을 넘어 팩트에 근거한다면 더 발전적인 논의가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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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0:24
그리고 추가적으로 김동선 교수의 책 하나님의 선교(2000출간) 보다는 더 최근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007년 출간)을 참고하시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목사님은 ‘하나님의 선교’ 라는 책을 통해 에큐메니칼진영의 선교신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을 보시면 선교역사를 지금은 어떻게 보는지를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책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복음주의 진영과의 문제 그리고 화해와 일치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서술한 좋은 책입니다. 1장;선교와 전도, 2장;공동의 증언을 위한 소명, 3장;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4장;화해의 사역인 선교, 5장;교회의 치유선교---이 큰 목차의 흐름에서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떻게 변천되고 발전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로 좋은 공부의 기회입니다. 심방중 바쁠텐데 건강유의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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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수 2012.02.24 12:28
목사님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토론 내용을 읽으면서 다시 정리도 하지만, 다시 책을 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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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영 2012.02.24 12:55
이번토론을 보면서 느낀것은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가 어느 진영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다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자신들의 제한된 구원론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한목사님이 지적한데로 개인영혼 구원(일차적)도 중요하고 사회구원(이차적)도 중요하다는 식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주로 급진적인 구원의 확장으로 나아간 진영에 대한 경계로서 이 용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에큐메니칼' 진영을 포함한 인간 구원이해를 단지 '인간화'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서 '통전적인 선교'를 말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때 이 용어는 두 진영의 선교관의 한계를 바로 직시하면서 곧 구원이해를 '값싼 은혜'의 차원으로 보기 쉬운 복음주의의 문제점과 또 구원사가 세계사안에 흡수되어 버리는 급진적인 에큐메니칼 진영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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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3:12
강목사님 이번에 뵙지못해 아쉬웠습니다. 잘 계시죠 그리고 명목사님 먼데서 와서 깊은 얘기도 못나누고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그래요 통전적 선교는 복음주의진영과 에큐메니칼 양 진영에서 지금은 다 사용하고 있는 선교용어입니다. 이 말은 명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양진영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인식했다는 의미이며 선교의 이해를 넓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하여 선교에 대한 일치와 화해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볼수 있지요. 아뭏든 좋을 지적과 문제 제기들 감사하며, 자료실에 있는 한국일 교수의 소논문과 김동선 교수의 책을 보면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 훨씬 명쾌하게 선교신학에 지금 어디 까지 와 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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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4 13:54
답변 감사합니다.
이로써 에큐메니칼에 대한 보다 사실적 접근이 된듯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다시 질문드리자면,

1.로잔언약이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선언인가?
로잔대회는 보편적 교회회의도 아니며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저는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과 웁살라와 방콕대회의 선교에 대한 지평의 확장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고 바른 선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여 에큐메니칼에 대항하는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따라서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진영이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로잔언약은 더욱 선교와 복음화의 이원화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대회였습니다. 그 언약 내용은 상당히 개방적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은 로잔언약에서 성서의 절대성(성서의 무오류성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복음전도의 긴급성, 국내교회의 자립을 위한 선교의 일시적 중단촉구 등이 표명되었습니다. 위의 표제들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어보입니다. 아니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에큐메니칼이 이런 중요한 것들을 흐트리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로잔대회 이후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간의 갈등이 첨예화 되었습니다. 이 로잔언약이 과연 과거 자신의 문제에 대한 회개에서 나왔으며,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수용한 것일까요?

2. 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복음전도 이 용어는 참으로 모호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한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이 결여되거나 소홀히 취급되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은 복음전도를 선교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이 둘은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 이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러한 통전적인 선교에 대한 이해가 에큐메니칼 진영 안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에큐메니칼 신학자는 복음주의자들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다시 교회가 복음전도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를 최경식 목사님께서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용어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다시 반복해서 질문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에큐메니칼에서 말하는 선교개념이 통전적이지 못하고 치우친 것이었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복음주의자들의 논리대로 이 둘(복음전도와 사회참여, 혹은 복음화와 인간화) 사이를 갈라내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저 이원론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복음을 문화로 부터 분리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제나 복음의 절대성을 부르짖게 될 것이고, 복음의 우월성을 주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회심 없는 사회참여의 중요성은 간과될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로잔언약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긴급성, 절대성, 유일성과 같은 표어들만 득실거리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화 사회참여 등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언제나 구원과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해봐야 그런 일들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니까요. 제가 과한 염려를 하는 것일까요?

애초에 에큐메니칼이 주장했던 구원의 개념과 선교의 개념들을 우리는 유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개인의 구원이 그가 속한 사회,정치,경제,문화,환경 등을 떠나서 논의될 수 있는것인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는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무관한 것이었는지. 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선포하고 선교를 하는 일을 주저하는 것일까요?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과 무종교인들과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런 통전적 개념들이 그 틀을 무너뜨리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지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처럼 할례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듯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성전을 짓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던 솔로몬처럼,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는 마치 유대교의 위치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신앙의 탄생을 두려워하는 자의 심정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제가 다시 반복되게 함을 용서하십시오.
여기서 접근되지 않으면 더이상의 토론의 진보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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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7:16
심방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바쁜중에 긴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답변을 드릴께요

1, 로잔대회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더욱 첨예한 갈등을 가져온 대회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로잔복음주의 대회는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개념에 있어 에큐메니칼 입장을 많이 수용한 대회였으며 향후에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틀을 확장시킨 대회였습니다. (참고서적,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김동선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259쪽)

2.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처음부터 얘기한 선교개념에 복음주의 요소를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통전적 선교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을 주장한데서 한발자국 더 진일보한 선교이론입니다.
“1972/1973년에 걸쳐 방콕에서 오늘날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선교대회는 선교에 대해 통전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된다. 방콕대회는 영적인 면과 사회 정치적인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둘 중 어느 하나에 우선 순위를 두지도 않았다 (참고서적 위의 책, 250쪽)
심지어 2005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을 연결하려는 접촉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세계교회 협의회 문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위의 책, 254쪽)
따라서 위에서 주장한 한 목사님의 말; 에큐메니칼 선교가 처음부터 통전적이 아니었나 라고 묻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고 세계교회협의회 문서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특징은 선교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점입니다. 이게 그들의 큰 장점입니다.

3.우리 모두는 어떤 신학적 관점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목사님의 신학적 관점도 존중합니다

4.그러나 우리의 신학적 토론이 어떤 사실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면 그건 역사적 팩트위에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위에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말할수 있다고 보나 그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5.만약 한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이었다고 말씀하신다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말한 그 근거를 밝혀 주시면 보다 나은 대화가 계속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한 개인이 주장하는 개인적 견해일 뿐이며, 이런 논의는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6.제가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 여러번 주장했듯이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내어 놓은 자료위에서 한 이야기 들입니다.

댓글

한상복 2012.02.24 19:22
여기서 의견차이가 더이상 좁혀지지는 않을듯 합니다.
1.역사적 팩트는 IMC와 WCC의 통합이 복음주의진영에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고 로잔대회로 모이게 했으며 LCWE(로잔세게복음화위원회)를 탄생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형기 교수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인식하고 번역한 WCC자료들이 있습니다. <기원과 형성>, <40년사>, <역대총회 종합보고서>, , <하나의 신앙고백>, <에큐메니칼 신학의 발전사1,2>, 등. 이들 책들에서 보면 로잔대회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조금씩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중 <40년사>를 인용하자면, 102쪽에 제가 위에서 인용한 방콕대회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인용한 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세계선교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희망의 한 징표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전적'(holistic) 접근은 다른 사람들을 우려케 하였다.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김동선 교수 역시 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 46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정치상황에 대한 개입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심한 반발을 받았다. 제네바대회가 열린 196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세계복음대회"가 열렸고, 1969년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빌리그레함이 주축이 되어 "미국전도대회"가 열렸다. 이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로 이어졌다"

이 로잔대회가 통전적이라는 것은 최경식 목사님에 따르면 김동선 교수님의 해석입니다.(사실인지 책이 없어 파악은 불가합니다.)
최경식 목사님 말씀대로 김동선 교수 역시 통전적 선교신학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의 인간화가 인간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회심을 과소평가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며 따라서 통전적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에서도 이렇게 주장합니다.)

로잔대회는 분명 에큐메니칼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지닌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는 WCC의 대척점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WCC를 교회대표기구로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음주의 진영의 새로운 교회협력기구가 생긴 것이죠(WCC와는 다른 느슨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저 이러한 역시 자료 위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로잔대회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개와 에큐메니칼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그 결과로 파생된 로잔언약의 신학이 통전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분이며, 분열이고, 과거로의 회귀입니다.

2.로잔대회와 그 결과물인 로잔언약이 결코 통전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것이고, 그 결과물에 대한 해석은 저의 견해입니다.
이미 밝혔듯이 에큐메니칼 안에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두가지가 병행될 때, 통전적 선교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말 그대로 병행(우선순위가 있는)이지 통전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옳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 다시 이원론으로 돌아가서 둘 다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 둘을 이분화함과 동시에 둘다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안에서 이러한 퇴보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큐메니칼이 더 철저하지 못하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3.우리가 만약 다시 이 둘을 구분하고 복음을 문화 위에 두며, 우월성과 절대성과 우선성 등을 피력하기 시작한다면 선교뿐만 아니라 다양성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의 정신이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선교를 외치는 에큐메니칼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주의가 우리시대에 득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안위를 걱정하여 교회주의자가 된다면 에큐메니즘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통전적? 복음화와 인간화의 조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의 조화?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들이 표상하는 것은 비록 복음일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개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를 삼킬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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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05
로잔대회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김동선 교수의 개인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발간한 선교역사 문서입니다.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펴낸 자료집 '세계선교대회의 역사(1910-2005)-참고 김동선교수 번역,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46-255//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목사님이 무얼 주장하고 싶어하는지는 제가 압니다.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그런 에큐메니칼 선교가 저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며, 또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그것을 에큐메니칼 진영이 포기한적도 없고 그대로 지금도 이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발제나 지금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이 그것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이론도 상당히 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스스로 발간한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왜 그걸 구지 부정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자료실에 한국일 교수님이 쓴 논문을 좀 읽어보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금방 알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어디까지 선교신학을 발전시켰는가 하면 그들 스스로의 자료집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까지 선교신학이 나아갔어요, 그게 2005년문서에 나와 있어요. 다만 예를 들면 이럴수는 있어요. 저나 한목사님이 저는 이런 에큐메니칼의 선교신학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개인의 신학적 주장을 펼수는 있다고 봐요, 저는 그런 것에 한목사님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진 않아요. 다만 제가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주장하는 것이 뭔가를 정확히 알자는 거예요, 이건 개인 신학이나 개인이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역사적 팩트가 있는데 이게 다르다고 하니---참 난감하네요. 저의 답변은 이제 이정도 해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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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17
한목사님이 위에서 역사적 팩트라며 이렇게 로잔대회에 대해서 인용을 했지요.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잔대회가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적 책임을 선교정책으로 입안하려 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될 경우 복음이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오히려 우려하는 목소리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오히려 로잔복음대회가 그만큼 에큐메니칼 진영의 많은 부분을 취하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세계교회협의회 자료와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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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4 21:37
위의 논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자들이 선교신학의 현 주소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최목사님과 한목사님, 두 분의 입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합니다. 어떤 부분은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 좁혀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시각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신학회의 장점이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1)다음에 책으로 낼 때, 여기서 행해진 논의도 요약해서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2)아마 선교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인해, 같은 자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위 논의는 이 정도로 하기를 권합니다. 수고했고, 좋은 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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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5 16:23
이번 토론으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1974년 로잔대회에 대해 더 바르게 공부할 수 있어서 최경식 목사님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연구하고 생각해 보니 최경식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따라서그 부분에 대해서만 첨가하고자 합니다.

1974년 로잔대회는 방콕CWME대회의 구원이해에 대해 도전하기 위해 복음주의 진영이 계획한 대회였습니다. 그들은 이 대회를 통해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성령을 통한 거듭남이며, 따라서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되며 사회정의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후에 자연적으로 따라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명예회장인 빌리 그레이엄도 로잔대회의 목적중의 하나가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대회가 진행되어갈수록 존 스토트의 영향력으로 방콕대회에서 강조된 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대폭 반영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의 진일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결과 로잔언약은 이 두가지(반에큐메니칼적 의도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시각)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이 대회를 통해 사회적 책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점은 큰 발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의도에 집중하였기에 제가 오해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반에큐메니칼적 의도라는 관점으로 로잔언약을 읽어보면 한계성이 분명 보입니다.
사실 그동안 복음주의계열의 책들은 깊이있게 읽지는 못했습니다.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전도의 우선성에 대한 강박이 구원과 선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방콕대회의 구원개념의 정당성,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를 구분하기 보다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토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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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2012.02.25 19:11
두 분의 토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2012.02.25 21:58
잘 차려 놓은 밥상에 밥 숱가락 하나 더 얹어서 잘 얻어 먹고 갑니다.
최경식목사님과 한상복목사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댓글

성희경 2012.02.26 20:51
잘 읽고 갑니다.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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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8 10:49
토요일 주일준비하고, 주일-종일 예배드리고 월요일 심방갔다오다보니,---- 오늘 화요일 정상 출근해서야 여기 들어옵니다. 정신이 없다보니 답글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위에 한목사님 좋은 대화와 토론 감사합니다. 저의 발제에 대한 한계를 잘 지적해 주어서 감사를 드리고요, 다양한 토론으로 제가 공부를 더하게 되어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승하세요
댓글

박영생 2012.03.01 20:18
두분 목사님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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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출신 2012.04.02 13:10
글 잘 읽었습니다. 김동선 교수님한테 선교신학을 배운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은 17세기 칼빈주의의 문서에도 나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교리도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아래의 글에도 대글이 달려 있습니다. 참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복음주의 진영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할 수 있겠지만 보수 진영의 언어도 알고 보면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김동선 교수님의 도식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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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4.06 07:07
감사합니다. 참고 하겠습니다. 늦게 들어와서 이제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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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021 내가 꿈꾸는 교회 - 개벽교회론 서설

알라딘: 내가 꿈꾸는 교회


내가 꿈꾸는 교회 - 개벽교회론 서설 
손원영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21-03-20











































정가
25,000원
448쪽

책소개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자성하고 개탄하는 한 신앙인이 꿈꾸는 미래의 한국 교회상을 100가지로 제시한 꿈의 교회로 나아가는 지도책이며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교회의 설계도이다. 교회희망 100개조, 희망교회 100개조의 꿈의 지도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예수님처럼 '가나안 교회'를 설립하고 오로지 하나님과 오로지 믿음과 오로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저자가 목회의 현장에서, 기도의 단하에서, 연구의 책상에서 길어 올린 말씀이 기록이며, 소망의 기록이며, 신념의 기록이다.

책의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쉬이 읽히지만, 진한 여운과 깊은 울림과 느꺼운 감동을 자아낸다. 100편의 글이 모두 신학-특히 예술신학적 바탕 위에서 쓰였고, 미-선-진-애의 교회론적 구조에 따라 내가 꿈꾸는 교회, 꿈꿔야 하는 교회, 꿈에 그리는 교회, 꿈꿀 수밖에 없는 교회의 핵심 개념을 따라 25편씩 구성되어 있으며, 교회-신앙공동체라는 기본 바탕 위에 전개된다. 500년 전 95개조의 글이 교회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듯이, 100개조의 이 글-책이 교회개벽, 개벽교회의 새 기원이 되기를 기원하는 책이다.



목차


추천사: 정희수 / 이신건 / 홍인식

제1부 꿈꿔도 좋은 교회: 아름다움[美]의 공동체

1. 가고 싶은 공동체 2. 경건의 공동체
3. 과학기술 시대의 시뮬라크르 공동체 4. 교회 밖 예수꽃 공동체
5. 기도 수행의 공동체 6. 길 위의 공동체
7. 낯선 타자를 환대하는 공동체
8. 노래하고 춤추고 자전거 타는 놀이 공동체 9. 다양성이 존중되는 공동체
10. 리마예전의 성례전 공동체 11. 빛깔 십자가의 공동체
12. 상상력이 풍부한 공동체 13. 상징목과 함께 하는 수도공동체
14. 상징의 공동체 15. 생활 영성의 공동체
16. 성속불이의 공동체
17. 숭고미를 추구하는 영적 체험의 공동체 18. 시인의 마을 공동체
19. 실천형 영성의 공동체 20. 예수살기 공동체
21. 예술가-되기의 공동체 22. 웃음 가득한 명랑 공동체
23. 유머니즘의 공동체 24. 죽음 교육의 공동체
25. 춘안거 재가 수도 공동체

제2부 꿈꿔야 하는 교회: 공의[善]의 공동체

1. 너머의 공동체 2. 바이오필리아의 생태 공동체
3. 부끄러움의 공동체 4. 살림의 공동체
5. 안전한 공동체 6. 양심의 공동체더보기



책속에서


P. 5~6 ● 한국교회 130여 년의 역사에서 또 이런 위기가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비판을 넘어서는 하나의 ‘대안적 교회’를 상상하며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한국교회를 꿈꾸면서 그 꿈을 보다 ... 더보기
P. 20~21 ●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란 예수를 믿는 자들만 모이는 곳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고백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자르고... 더보기
P. 42 ●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길 위의 신앙이다. 예수의 삶이 길 위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 선포도 그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지로 한 ‘순례’(pilgrimage)는 교회의 핵심가치이다. 교회가 이 순례 대신 ‘거주’(dwelling)를 목적으로 할 때 교회는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면... 더보기
P. 53 ●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의 경우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더욱더 분명하다. 주지하듯이, 네 복음서는 같은 예수를 종종 서로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시각을 존중하는 맥락에서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전자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서 유대적인 시각이 주로... 더보기
P. 132 ● 지난 2천 년간의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는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 못지않게 부끄러운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교회는 늘 초대 교회 때 로마의 박해에 저항하면서 뜨거운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을 저버린 경우도 많았다. 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라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증오와 미움의 공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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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손원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기독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던 중 개신교인에 의한 훼불사건이 김천 개운사에서 발생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불자들에게 대신 사과하고 불당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서 강제 해직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은 종교평화와 예술목회를 위한 전도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연꽃 십자가』(편저), 『예술신학 톺아보기』(편저), 『교회 밖 교회: 다섯 빛깔 가나안 교회』(편저... 더보기

최근작 : <내가 꿈꾸는 교회>,<개벽의 징후 2020>,<교회 밖 교회>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백 개의 상상과 실천, 그리고 하나의 믿음
“나는 이런 교회를 꿈꾼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 꿈과 희망을 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손원영 교수의 『내가 꿈꾸는 교회: 개벽교회론 서설』이 그것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2017년, 저자가 부패한 한국교회에 저항하며 한국교회에 대한 꿈 100가지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로부터 꼭 500년 전인 1517년 루터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며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당 문에 붙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저자는 그 후 3년 동안 100가지 꿈을 하나하나 자세히 해설하였고,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저자 본인의 꿈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꿈이 담겨져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새 길을 찾고 있는 한국교회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기본 정신 위에 집필되었다.

첫째, 제2의 종교개혁을 꿈꾸는 창발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새로운 교회를 마음껏 꿈꾸고 있다. 저자는 그 새로운 교회를 일컬어 ‘개벽교회’라는 용어를 과감히 차용한다. 개벽이란 주지하듯이 동학에서 ‘새로움’(新)이란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저자는 이 용어를 차용하여 진정한 한국적인 교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창발적인 교회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 미래 한국교회의 방향으로 ‘예술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신학계에서조차 예술신학이란 용어는 아직도 낯설다. 그러나 저자는 예술신학과 예술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것이야말로 미래 한국교회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술신학자 발타살(Hans Ur Balthasar)의 예술신학적 통찰에 의지하여, ‘진-선-미’의 전통적인 순서를 뒤집어 ‘미-선-진-애’의 교회를 강조한다. 따라서 필자는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1930)에 나오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 교리의 구조와 발타살의 예술신학을 조합시켜, 이 책의 교회론적 구조를 구성하였다. 

그래서 제1부는 아름다움(美)의 공동체로, 제2부는 공의(善)의 공동체, 제3부는 진리의 공동체, 그리고 제4부는 사랑(愛)의 공동체로 구조화하였다.

셋째, 이 책의 교회론적 구조로서 미-선-진-애의 구조를 기본구조로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공동체의 내용은 현대신학에서 논의되는 신학적 논의들을 교회론의 내용으로 적극 수용하고 있다. 
====

그래서 제1부 ‘내가 꿈꿔도 되는 교회: 아름다움(美)의 공동체’는 예술신학적 논의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교회로서 ‘영성’(spirituality)의 측면을 강조한다.

 제2부 “내가 꿈꿔야만 하는 교회: 공의(善)의 공동체”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더욱 계승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예언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변혁과 회복적 정의 그리고 평화구축을 위한 역할 등을 상상한다. 

제3부 “꿈에 그리는 교회: 진리(眞)의 공동체”는 진구를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인문학과 현대과학을 비롯하여, 특히 이웃종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공동체로 새롭게 자리매김될 필요성을 강조한다. 

제4부 “꿈꿀 수 밖에 없는 교회: 사랑(愛)의 공동체”는 교회가 진정한 ‘한국적 교회’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적 교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발문은 예술신학자 심광섭 박사와 한국학 연구자 조성환 박사가 썼고, 미국 UMC의 정희수 감독, 성결교 조직신학자 이신건 교수, 그리고 해방신학자 홍인식 박사가 추천사를 썼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미래교회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꿈꾸는 이가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접기


춘계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에 관한 연구

통전적 신학 - Holistic Theology - Google 검색


춘계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에 관한 연구
소기천(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 교수)

한글초록
이종성의 신학은 통전적 신학(通傳的 神學)이라 불린다. 그래서 본 논문은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성서적인 개념인지 우선 탐구하고자 한다. 이종성은 통전적인 신학이란 기치 아래서 그의 조직신학대계 40권을 집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본 논문은 이종성의 통전적인 신학이 성서적인 근거를 가진다는 전제하에 그가 90세 가까이 살 면서 주도한 여러 분야와의 공통적인 연구, 성서이해, 삼위일체론, 과학과 신학과 문학, 간학 문적이며 간종교적인 수용, 종말론 등으로 나누어서 평가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필자는 김명용이 자신의 신학에 대하여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이 ‘통합한다’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편협하지 않고’ ‘온전하게 한다’ 등의 의미를 더 담고 있는 ‘온 신학’이 통전적 신학을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이 과연 정당한지도 평가하고자 한다.
이종성이 타 문명(학문, 종교)까지도 ‘기독교를 위한 준비과정’, ‘복음에 이르는 준비 과정’으로 바라보고 이해하였는데, 과연 그가 생각하는 통전적 신학의 구성 원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질적인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 문명을 기독교 세계관이 전제된 통전적 신학을 통하여 이해하고 기독교 안으로 이끌어 올 수 있는가? 이상의 질문들은 향후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계승하는 후학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주제어
이종성, 통전적 신학, 성서적 복음주의, 김명용, 온신학

I. 서론

본 소고는 9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춘계 이종성 박사(이하에서는 모든 학자들에게 직함 을 붙이지 않는다)의 통전적 신학1)을 연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교회 정치가로 서 학교행정가로서 조직신학자로서 한 평생을 살았던 이종성은 1922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 였다. 그는 일본, 미국, 독일 등에서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개혁파 정통주의, 근본주의 신학 등 2천년의 모든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 스(어거스틴이라 말하면 F학점을 주었다), 칼빈, 바르트 등 세 사람이다. 그는 영락교회 부목 사, 연세대학교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학감, 학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영남신학 대학교 총장,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등을 지냈다.
88세까지 제자들과 테니스 치기를 좋아한 이종성은 자신의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 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통전적 신학이란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 문명을 중심으로 한 서구 신학 외에 타문화권(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종교와 사상, 문화, 세계관, 가치관 등을 '복음에 이르는 준비과정' 또는 '기독교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고 적대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것

1) 이종성은 자신의 통전적 신학을 유일하게 영어로 표기한 199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Wholistic View (통전적 관점)과 the inter-connectedness(상호연관성)으로 이해하였다. 참고, 이종성, “The Wholistic View of Happiness in the Context of Korean Culture”,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 40권 외국어 논문집-Anselm’s Understanding of the Death of Christ and Other』 (서울: 한국기 독교학술원, 2001), 315, 346쪽.
 
들을 성서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기독교 안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는 신학이다. 그가 최후로 남긴 자서전에 스스로 통전적 신학 연구에 심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현재 필생의 과제로 통전적 신학의 더 깊은 경지를 구상중에 있다. 통전적 신학 이란 다음과 같은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첫째, 신학의 각 분야를 단독으로 이해 하지 않고 각 분야에 공통되는 점을 모색한다. 둘째, 삼위일체론으로 신학의 각 분야 를 관통시킨다. 셋째, 우주계를 태양계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성운계까지 확대해서 이해한다. 그리고 성운계도 생명체가 있을 것으로 전제한다. 넷째, 모든 종교나 학문
을 복음에로의 준비과정(preparatio evangelica)으로 수용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
도를 중심한 범종교계를 인정한다.2)

이러한 신학이 통전적 신학이라면 범 교단뿐만 아니라 범 종교까지 포용할 수 있는 신학이라 고 기대된다. 또한 이종성은 조직신학대계를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출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통전적 신학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종말론으로 신학을 종결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을 통전적 신학의 입구의 역할을 하도록 판을 짠 것이다 이러한 대원칙에 의하여 조직신학대계를 집필하게 되었다.3)

본 소고는 그가 비록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조직신학대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밝 힌 이러한 통전적 신학이 성서적인지를 되묻기 위해서, 신학의 여러 분야와의 공통적 연구, 성서이해, 삼위일체론, 과학과 신학과 문학, 간학문적이며 간종교적인 수용, 종말론 등으로 나 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통전적 신학을 평가하고 김명용이 주장하는 온신학 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신학의 여러 분야와의 공통적 연구

성서신학 분야에서 ‘통전적’이란 단어를 찾는다면 결코 찾을 수 없지만, 비슷한 표현이 하나 있다. 이것은 헬라어 형용사 o[loj이다. 이 단어는 마 14:35; 16:26 막 6:55 12:30; 눅 5:5
13:21 요 4:53 7:23; 19:23 행 11:26 21:31; 롬 1:8; 8:36; 딛 1:11 요일 5:19에 등장한다.
우리말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으나, 굳이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이야기 할 때 유일하게 어울릴 수 있는 단어이다.
물론 헬라어 형용사 te,leioj란 단어도 ‘온전한’이라는 형용사이기에 유사한 의미를 가
질 수 있지만 그 뜻에 차이가 있다. ‘온전한’이란 형용사의 의미는 약 1:4a, 17, 25; 히 9:11;

2)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2), 159쪽. 김성규는 본고를 논평하면 서 이종성이 언급한 네 번째 정의가 얼핏 보기에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포한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 과 신성이 모든 만물에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세상의 시작은 각기 달라도 모든 끝
은 복음으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이종성이 “모든 종교나 학문을 복음에로의 준비과정(preparatio evangelica)으로” 보는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 그리
스도를 중심한 범종교계를 인정한다”라는 결론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길로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들이 많은데 그런 종교들에서 과연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논하는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타당한지 의문이 제기된다. 참고, 김성규, “춘계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에 대한 성서신학적 평가,” 『한국개혁신학 회 제38차 학술심포지엄』 자료집(2015년 5월 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113쪽.
3)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24쪽.
 
요일 4:18에 나온다. 명사형으로 쓰인 ‘온전한 것’이란 의미는 롬 12:2; 고전 13:10에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은 ‘성숙한’이란 의미의 형용사로 고전 14:20; 엡 4:13; 히 5:14에 나온다. 고전 2:6에는 성인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고전 2:6; 빌 3:15; 골 1:28에는 신비스런 제의와 연결되
어 나온다. 마 5:48a 19:21; 골 4:12; 약 1:4b 3:2에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발전된 개념으로 나온다. 마 5:48b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헬라어 형용사 pa/j도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다렐 구더가 이야기 하는 듯이4)
te,leioj와 마찬가지로 통전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간주하기 어렵다. 다렐 구더는 pa/j도 통전적
개념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간주하면서 대표적으로 마 28:18; 요 3:16; 고후 5:19; 빌 2:9-11; 골 1:17-19 등을 꼽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단어는 단지 ‘모든’이라고 번 역되는 형용사에 자니지 않는다.
비록 te,leioj와 pa/j가 통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을지라도 굳이 배격할 필요는 없
다. 어차피 o[loj도 통전적이란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단어이기에, 전반적으로 ‘통전 적’이란 뜻을 가진 단어가 헬라어에 없기 때문에 te,leioj와 pa/j와 o[loj를 한꺼번에 아울러서 통 전적 의미를 도출해 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앞에서 언급한 다렐 구더는 형용사 o[loj의 명사 형으로 중성 전치사를 붙인 to.  o[lon을 “온전성, 통전성, 혹은 복음의 역동적인 중심성”5)을
뜻하는 단어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신약성서에서 ‘보편적’이란 의미 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6) o[lon도 여전히 통전적이란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상의 논의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통전적이란 의미의 단어가 헬라어에 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근본적인 입장에서 성서 언어적으로 신약성 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물론 본 연구는 통전적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결론 을 내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종성은 그의 통전적 신학을 성서신학의 토대위에 세우지 못했다 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통전적이라는 단어가 성서에 없다고 해서 그 신학적 개념도 성경에 없다는 것이 타당한 논증방법인지 재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그 자신도 성서신학의 토대 위에 세우지를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그가 생존해 있을 동안에 그의 제자들에게서부터 새로운 신학적 조명을 받게 되었다.
김이태는 처음으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란 명칭보다는 ‘중심에 서는 신학’이란 개 념으로 그 특징을 설명하였다.7) 맹용길은 통전신학은 ‘통합신학’이라고 하였다.8) 김명용은 통 전적 신학을 성서적이고 교회 전통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신학이라고 규명하였다.9) 현요한은 통전적 신학을 분석적 사고와 통전적 사고의 결과로 이해하여 혼합신학이 아니라 종 합의 과정 속에 있는 ‘창의적인 신학’이라고 평가하였다.10) 윤철호는 통전적 신학이 근대 이후 혹은 탈근대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통합하는 신학 이라고 간주하였다.11) 윤철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론을 예로 들면서 귀납적 방법과 연

4) 참고, Darrell L. Guder,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세계, 공동체, 이웃,” 『통전적 신학의 모색: 제
3,4회 춘계신학강좌 I』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2), 40-41쪽.
5) Darrell L. Guder,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세계, 공동체, 이웃,” 41쪽
6) Darrell L. Guder,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세계, 공동체, 이웃,” 43쪽.
7) 김이태, 『중심에 서는 신학 : 김이태의 신학세계』, 고 김이태 교수 저작 출판위원회 편(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4).
8) 맹용길, “통합신학-개요”, 『교회와 신학』 제18집(1986).
9) 김명용, “통전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통전적 신학』, 이종성 외 3인(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10) 현요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생명: 통전적 신학 형성을 위한 하나의 제안”, 『통전적 신학』, 269, 309 쪽.
 
역적 방법을 통시적 치원에서 해석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면서 통전적 신학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성 안에서 통합되는 신학이라고 규정한다.12) 이와 같 이 다양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지니고 있는 모호성을 분명 히 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결국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그의 제자 세대의 조직신학자들마다 처음부터 다른 접 근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특징 때문에 다양한 신학의 분야들과 협력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종성은 조직신학자이지만, 그의 통전적 신학은 신학의 어느 한 분야 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가 남긴 말을 주목해보자.

이제부터의 신학은 인간의 논리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한적이고 무제약적인 넓이 와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신학을 강구해야 한다. 즉 통전적인 신학을 강구해야 한 다.13)

이와 같은 표현은 이종성의 통전적인 신학이 다양한 신학의 분야들과 협력을 하면서 각각의 주제들을 포괄하는 신학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 그가 통전적 신학의 입장에서 제안한 신학들을 다음과 같이 성서 신학적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III.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에 대한 평가

1. 성서이해

이종성은 복음적인 성서이해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신학은 ‘성서적 복음주의 신 학’이다. 1979년 11월 16일에 발표된 글에 의하면, 이런 신학적 입장은 한편으로 박형룡처럼 신학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르쳐주시는 거룩한 학문이라는 주장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 로 칼빈처럼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신자들의 신념과 이해를 체계화한 것이라는 개혁교회의 신
학적 모토인 theologia semper reformanda를 받아들이는 것이다.14)
이종성이 말하는 ‘성서적’이란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작품이고, 성서 밖에서는 구원에 관한 바르고 정확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신앙생활과 구 원의 도리에 관한 정확한 표준이라는 뜻이다.15) 여기서 그는 ‘성서가 무오하다’는 의미를 기술 하지 않는다. 이미 당시에 칼 바르트(Karl Barth)가 성서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증언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오류가 있다는 주장 으로 인해서 한국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명용은 1934년 5월 31일에 발표된 독일의 바르멘 신학선언을 거론하면서 성서가 오류가 있음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논증한다.16) 성서 안에 모순과 혼란과 오류가 있다는 이런 주장 으로 인해서 한국에서 소위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칼 바르트를

11) 윤철호, “통전적 기독론에 대한 해석학적 구성”, 『통전적 신학』, 167-175쪽.
12) 윤철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54-56쪽.
13)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50쪽.
14) 이종성,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25권 소논문-종교개혁에서 현대신학까 지』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378쪽.
15) 이종성,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 379-380쪽.
16)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서울: 이레서원, 2007), 97, 100, 110-111, 113, 323-325쪽.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배격하기도 하였다.17)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김명용은 정통 주의가 지향하던 기계적 영감론을 버리고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말이 아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18)고 간주한다. 그러면 이종성과 김명용의 성서관에 결정적인 영향 을 미친 성서관과 관련해서 바르트가 1918년에 초판을 발행한 로마서 강해 서문에 다음과 같 은 내용이 나온다.

성서 연구에 대한 역사비평적 방법은 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피상적 인 것이 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내가 역사비평방법 과 신성한 영감론 중에서 택해야 할 궁지에 몰린다(driven)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채택할 것이다. 영감론은 보다 넓고, 보다 길고, 보다 중요한 의 (justification) 사상을 가지고 있다.19)

이런 발언을 보면 바르트가 역사비평적 방법을 거부하고 영감론만 중시한 듯이 보이지만, 사 실은 그렇지 않다. 로마서는 역사비평 방법론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복음서와는 달리 영감론에 근거하여 충실한 교리와 실천적 내용으로 넘쳐있는 서신이다. 바르트가 한 위의 말 은 로마서에 역사비평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영감론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 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러한 바르트의 성서관이 이종성의 성서관이 된 것이다.
이종성은 복음주의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의 구주로 믿는 기독론적 신앙과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은총주의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20) 그는 위 에서 확인한 성서관에 입각하여 성서적 복음주의를 견지하면서 성서적 복음주의를 “성서를 통 해서 선포된 복음을 바르게, 정확하게,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 시대 시대에 전달해주는 것이 라”21)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를 통하여 그는 1986년 2월 5일에 동경신학대학에서 행한 강 연에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에 관해서 “성서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믿는 근본적 입장에서 출발하여 성서를 통해서 말씀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포착하여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의식화하는 운동이다”22)라는 입장을 가진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통해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이 성서를 성령의 사역에 의한 복음적 이해에까지 승화하여 그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성도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창조되는 신학을 영위하게 되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것을 기대한다. 결국 그의 이러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신념은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그는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은 근본주의 신학은 율법주의에 빠 지거나 자아 만족적 주관주의로 타락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교회를 위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 학은 탕자와 같은 신학이 된다고 한다.23) 그래서 평생 동안 칼빈의 가르침대로 경건과 학문을

17)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 115, 118-119쪽.
18)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 324쪽.
19) K. Barth, Der Romerbrief, tr. by Edwyn C. Hoskyne,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1.
20) 이종성,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 381쪽.
21) 이종성,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 383쪽.
22) 이종성, “내부에서 본 한국교회”,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21권 소논문-한국교회의 현실과 이상』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244-245쪽.
23) 이종성, “내부에서 본 한국교회”,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37권 수상집-자갈밭을 기경하라』 (서 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47쪽.
 
모토로 성서적 복음주의 전통을 장로회신학대학교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종성은 조직신학이 성서를 소재로 하고 성서의 내용과 교훈을 표준으로 한다고 말 하면서 항상 신구약성서를 중요시하며 성서신학에 의존한다.24) 그래서 성서 언어를 알아야 하 고, 성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특정 상황에서 해석되고 이해된 성서를 그대로 받아 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인 시간과 장소와 문화적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야한다.”25)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서관이 다소 상대적인 관점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성서의 무오설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성서가 ‘신앙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오류가 없다’26)는 의미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다음의 항목에서 칼빈이 추구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인 삼위일체론을 이종성의 통전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2. 삼위일체론

과거에 신학이 기독론 중심으로 서구적 기성 기독교를 위한 전유물로 간주되고, 삼위일체적인 이해가 부족하며, 신학을 말하면서 인간의 신학을 더 강조하고, 신학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힘 을 서구 신학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27)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에 대한 기독론적 차원과 성령론적 이해를 가질 것이 촉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선교라 는 신학적 개념도 기독론적 관점과 성령론적 차원을 통해서 보완하게 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 적이며 통전적인 하나님의 선교28)라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통전적 신학은 이종성에게서 출발한다. 그는 메모에 성서적 복음주의에 입각한 삼위일체적 통전적 신 학을 구상한 내용이 있다.29) 그럼 그의 통전적 신학이 성서적인지 삼위일체론에서 살펴보자.
이종성은 칼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성서가 삼위일체론을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는 것”과 “성서가 그 교리의 가능성을 열러주는 것”30)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곧 이종성에 의하면, 성서가 ‘한 주(Yahweh, Kyrios), 한 분의 특이한 의지자(意志者- Willer), 그리고 사 역자(Doer)’를 한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을 증거한다.31) 전통적으로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

24) 이종성, “제2권 조직신학개론”,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16권 단행본집 조직신학개론 외』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199쪽.
25) 이종성, “제2권 조직신학개론”, 203쪽.
26) 이종성, “제2권 조직신학개론”, 223-224쪽.
27) 김영동, 『교회를 살리는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3), 131-165쪽을 보라. 특히 하
나님의 선교에 관해서는 위의 책, 145-149, 163쪽을 보라.
28) ‘통전적인 선교신학’에 관해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에서 발행된 『선교와 신학』 제7집(2001년) 의 특집논문들 중에서 손윤탁의 “성경적 선교신학과 통적적 선교관”(15-52쪽)과 안승오의 “통전적 선교 를 한국교회 예배의 역할 및 방향 연구”(173-208쪽)와 소기천의 "생명의 선교를 향한 예수의 시험이야기 새로 읽기: 통전 신학을 제안하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한국기독교학회 편, 제30권(2003): 183-209쪽 을 참고하라.
29)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마지막 쪽 화보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Other God
Other Christ 통전적 신학은 이 문제를 적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과의 관계를 밝힐 것
Other Holy Spirit

30) 이종성, “제7부 현대신학과 삼위일체론”,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7권 조직신학대계-삼위일체론
(2) 』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159쪽.
31) 이종성, “제7부 현대신학과 삼위일체론”, 165쪽.
 
티누스의 삼위일체 교리가 오늘날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다.32)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이 2세기에 영지주의 이단으로 낙인찍혔던 플로티누스 에 일차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적으로 플로티누스의 신관을 극복하였다는 사실을 중시하 며,33)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이 “플로티누스와 같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경험을 토대로 성서에서 가르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적인 존재 양식을 완전치는 못하나 인 간 이성의 힘을 다해서 설명한, 하나의 위대한 노력의 결정체”34)로 간주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가 essentia와 substantia이
다.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두 용어가 테르툴리아누스 때부터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원 래부터 성서적 용어가 아니라 헬라철학에서 줄기차게 사용되어 왔던 ou=sia와 u`po,stasij를 라틴어로 번역한 단어들이다. 여기서 동방교회의 헬라어 삼위일체(mia, ou=sia, trei/j u`po,stasij)란 용어가 나왔다. u`po,stasij는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라틴어 persona로 번역되 어 서방교회의 라틴어 삼위일체(Una substantia, tres personae)란 용어가 되었다.35) 그래서
삼위일체론을 논할 때 조직신학자들 사이에서 두 용어를 본체, 실체, 본질, 신성, 신적 실체, 본성 등 다양한 용어가 혼동되어 사용된다.36)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여전히 조직신학자들에 의 해 명확하게 규명이 안 되어 본질적으로 성서적인가 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종성도 이 같은 사실을 중시하여 “그리스도교는 시작될 때부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했다”37)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삼위일체론을 처 음부터 표적과 상징을 사용하여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 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란 구절과 같이 이러한 것을 신비적인 내용으로 설명하 였다고 한다.38)
이종성은 삼위일체 신관이 구약성서의 유일신관39)과 배치되지만, 신약성서가 하나님 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유일신관을 발견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룬 다고 간주한다.40) 그리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구 원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사 11:1-2).41) 그는 삼위가 각각 고유의 페르조나를 유지하면서 아 들은 아버지의 뜻과 목적을 같이하며, 성령은 때로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이름 아래,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광범위하게 동참하지만, 이러한 발전사적 방법에서 ‘삼위’가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일체’에 대한 강조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42)
이종성은 통일적 방법으로 삼위일체론을 논하는데, 이것을 그가 통전적 방법이라고

32) 이종성, “제3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논쟁과 결과”,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6권 조직신학대계
-삼위일체론(1)』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274-275쪽.
33) 이종성, “제3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논쟁과 결과”, 267; 이종성, “삼위일체론(2)”,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7권 조직신학대계-삼위일체론(2)』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345쪽.
34) 이종성, “삼위일체론(2)”, 352쪽.
35) 이종성, “삼위일체론(2)”, 325-327쪽; 이종성, “제3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논쟁과 결과”, 238쪽; 이종성, “제4부 본체와 위격의 개념”,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6권 조직신학대계-삼위일체론(1)』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296쪽.
36) 이종성, “제7부 현대신학과 삼위일체론”, 166쪽.
37)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6권 조직신학대계-삼위일체론(1)』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159쪽.
38)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64-165쪽.
39) 이종성, “제3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논쟁과 결과”, 189-193쪽.
40)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67-168쪽.
41)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69쪽.
42)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70-171쪽.
 
명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근접한 표현이다. 그는 제2위인 아들이신 로고스를 지혜자로 간주하 여 신구약 전반에 연결을 짓는다(잠 1:20-33; 2:1-22; 3:11-20; 7:4; 8:1-31; 사 8: 18;
63:9-11; 말 3:1; 마 3:3; 눅 1:17, 76; 3:4; 7:27; 요 1:1; 요 5:22; 17:5; 롬 9:5; 히 2:13;
요일 1:2).43) 이러한 구절을 도태로 그는 하나님이 로고스로 나타났고 신적 지혜와 동일시된 다고 결론을 짓는다(시 33:6; 솔로몬의 지혜서 1:6; 9:1-2, 7; 잠언 3:19; 8:22이하).44) 특히 아들이 하나님과 태초에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요 1:1-3; 히 1:1-2)을 중시하여, 그는 바울 서신에서도 삼위일체론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롬 11:36; 엡
1:10; 빌 2:6; 골 1:16).45)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이종성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교리를 만들기에 충분한 자료가 성서에 있다’46)고 주장하면서 통전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론 을 집대성하였다. 이로써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주성이 부인될 것”47)이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론 의 불가피성을 논증한다. 그는 ‘우주와 종교와 신앙’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삼위 일체론을 통전적 시각으로 간주하여 삼위일체론이야말로 “가장 체험적이고,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이론적인 그리스도교 교리”48)라고 평가하지만, 여전히 그가 논하는 삼위일체론이 충분한 성서적 논의를 거친 논리라기보다는 삼위일체론을 논한 학자들의 논의가 지닌 장단점을 평가 하고 그것에다 그 스스로 통전적 삼위일체 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인 측면이 다소 강하다. 그러 면 그가 ‘신학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두면서도49) 종교와 신앙을 우주의 범위로 넓히려는 시 도를 다음과 같이 신학과 타학문의 항목에서 논해보고자 한다.

3. 신학과 타학문

1) 과학과 신학과 문학

이종성은 과학과 신학의 연관성 속에서 통전적 신학을 논하고 싶어서 이미 서론에 언급한바 있는 우주계를 태양계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성운계까지 확대해서 이해한다. 그리고 성운계도 생명체가 있을 것으로 전제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하나님은 우주적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태양계에 존재하는 존재자만을 상대하고 있 었으며, 태양계 너머에 있는 별의 세계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 때까지의 신학은 자아당착에 빠진 신학이 되고 말았다.50)

주제선택: 인류문명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 즉 자연과 문화와 종교와 역사에 관한 모

43)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73쪽.
44) 이종성, “제3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논쟁과 결과”, 233-234쪽.
45) 이종성, “제6부 삼위일체론의 논라적 근거”,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7권 조직신학대계-삼위일체 론(2)』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56쪽.
46)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81쪽.
47)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82쪽.
48) 이종성, “제2부 성서의 가르침”, 184쪽.
49)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15권 이야기로 푸는 조직신학』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38-40쪽.
50)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50쪽.
 
든 문제. 종교관계: 범종교적 관점에서 인류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 태양계의 문 제만이 아니라 성운계까지도 검토한다. 범신론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통전적 견지에서 야훼의 절대성을 믿는 믿음에서 모든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려고 한다.51)

그는 ‘통전적 견지에서’ 이 같은 논의를 제안하고 있지만, 사실상 신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도 과학과 격심한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52) 그러나 그는 ‘신학적인 깊이가 없이는 참다운 과학도 없다’53)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학을 통전적 인 견지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이종성에 의하면, 한편으로 과학은 자연계의 현상을 분석하고 실증하는 방법을 택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학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지니는 의의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한 다.54) 또한 그는 과학이 외적인 면에서 사람을 돕지만, 신학은 내적인 면에서 돕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55) 그래서 그는 서로가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고 다루는 목적의 영역이 다르지만, 교회가 모르는 과학 지식을 신학이 존중해주고, 또 과학이 한계점에 도달할 때 신학이 그 너 머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56)
이점에서 이종성은 인문과학으로 간주되는 신학과 문학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한다. 곧 문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의 실존 상태를 지적해 주는데 반하여, 신학은 제기된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본다.57) 이러한 주제는 자연스럽게 교회와 사회란 주제로 더 넓혀진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사회를 떠나서 별개의 집단생활을 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사회는 교회 존재의 의의를 잘 이해하고 서로 협조하면 양자를 위해서 서로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58) 이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간학문적이며 간종교적인 영역에까지 그의 통전적 신학의 지평을 넓혀주는 효과를 낳는다.

2) 간학문적이며 간종교적인 수용

이종성은 간학문적이고 간종교적인 통전적 신학을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발 언을 그의 신학이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여준다.

서울에 있는 학술원은 모든 종교와 철학과 문학과 과학과 의학의 견해를 충분히 이 해하고 또한 미구에 학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우주학까지도 논구의 대상으로 하는 통전적 신학의 진원지가 되고 사령탑이 되고 광원(光源)이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59)

그는 ‘통전적 신학의 진원지와 사령탑’이 되도록 한국기독교학술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양면적인 면 곧 초월적이며 현실적이고, 이상적이며 구체적이고, 신적이며 인 간적인 학문이다. 이러한 신학에 대한 이해는 그가 신학을 포괄적이고 종합적이고 다차원적인

51)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47-148쪽
52)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47쪽.
53)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49쪽.
54)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47쪽.
55)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48쪽.
56)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48-49쪽.
57)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50-52쪽.
58) 이종성, “제1권 평신도와 신학”, 144-147쪽.
59)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50쪽.
 
학문으로 간주하게 하였다.60) 그래서 그는 한국의 제종교가 매우 폐쇄적이고 미신적이고 비과 학적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매우 개방적이고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것이 그 특징이라고 평 가한다.61) 이점에서 그는 과거 한국 기독교가 서양 문명과 호흡을 같이하며 보수적이며 봉건 적인 한국 사회에 신학문을 소개해주는 동시에 문화적으로 많은 개혁을 주도해왔다고 평가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도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고 전제하면서62) 한국의 기독교가 “샤머니즘과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한국 특유의 종교로 발전되었다.”63) 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특징이 한국 기독교가 지닌 혼합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여 러 종교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정신생활이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64) 그 래서 한국인은 모든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상에서처럼 이종성이 과학과 신학과 문학 그리고 간학문적이며 간종교적인 수용을 언급한 것은 이미 신구약성서에도 그처럼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고 그것을 종교적으로 수용 한 구절들도 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65) 그러면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마지막 때에 인 류가 반신적이거나 파멸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도울 수 있는지 다음의 항목에서 논하고자 한다.

4. 종말론

이종성은 마지막 때를 맞이하여 신학이 파멸적인 길을 걸어가지 않고 문제를 복음적으로 해결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추진할 사업은 신학문제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세계문명과 역사 에 대하여 공헌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창출하고, 그 문제를 기독교가 어떻게 취급하고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발견하여, 인류역사와 문명이 반신적이거나 파멸의 길을 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학적으로 그리고 복음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66)

그는 창조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한복판에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한 나선형적 역사관을 통전적 역사관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인다.67) 그는 다양한 역사관의 긍정적 요소를 모두 나선형적 역사관에 흡수하여 통전적 역사관을 제안한 것이다. 곧 윤회설을 전진하는 바 퀴로 대치하고, 결정론과 운명론의 역사주관자를 인격적 주관자로 해방시키고, 이원론의 대립

60) 이종성, “제2부 현대지성인과 기독교 신앙”,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26권 소논문집-신학으로 본 문화와 철학』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132쪽.
61) 이종성, “제4부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의 절대성”,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26권 소논문집-신학 으로 본 문화와 철학』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390쪽.
62) 이종성, “제1부 나의 성장과 신학 형성”,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38권 수상집- 산을 보고 바다 를 보고』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47쪽.
63) 이종성, “제2부 현대지성인과 기독교 신앙”, 171쪽.
64) 이종성, “제2부 현대지성인과 기독교 신앙”, 172쪽.
65)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당대의 과학과 문학을 논하고 범종교적인 내용도 다 소 인정한다. 참고, 소기천의 “아레오바고 설교와 보편주의”, 『하나님의 사랑과 세계선교』 (서울: 장 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1), 194-257쪽.
66) 이종성, 『미완성의 완성』 , 146쪽.
67) 이종성, “제7부 역사관의 일곱 가지 유형”,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14권 조직신학대계- 종말론
(2) 』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555쪽.
 
적 투쟁 관계를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 하에 있는 두 가지 현상으로 환치시키고, 직선적 역사 관을 나선적 역사관으로 변경시키고, 중심적 과거 지향적 역사관을 전진적 미래지향적 역사관 으로 재해석하고, 중복된 역사관을 단일적 역사관으로 수정한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결과 가 그의 유명한 나선형적 역사관인데, 이러한 나선형적 역사관은 통전적 역사관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68)
이러한 나선형적 역사관으로 본 이종성의 통전적 역사관에서 역사는 하나이며, 역사 의 유일무이한 주인은 야훼이시고, 역사의 관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역사적 최종 목적 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구속의 역사를 보여주는 성서는 희망의 역사관으로 가득 차 있다.69) 그러므로 그는 역사가 있다면 하나밖에 없으며, 그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 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뿐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아무리 역사가 혼란스럽고 타락되고 악한 역사가 나타날 지라도,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계시지 않다. 역사의 마지막에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재림하시면 그 때가 곧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되는 때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때요, 모든 성도들이 영광 가운데로(communio gloriae) 영접받는 때이다.70)
이러한 이종성의 종말론과 역사이해는 신구약성서가 보여주는 다양한 역사를 단순하 게 통합하려는 관점이 아니라 나선형적으로 관통하는 역사를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 하나님께 서 주관하신다는 통전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에서 언급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에 관해서 다음의 항목을 달리하여 평 가를 해보고, 그것이 김명용의 온 신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V.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과 김명용의 온 신학과의 관계

이종성은 이미 위에서 인용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통전적 신학을 체계화하지는 못하였 지만, 자신의 조직신학대계를 ‘통전적 방법’이라고 명명하면서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계 시적 방법, 상관적 방법 등을 생소한 낱말인 통전적 신학 방법론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연역법 과 귀납법의 통합,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과정적 상관관계 등을 추론하여 통전적 방법이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 영역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곧 하 나님, 인간, 세계와 우주, 신학, 그리고 역사를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통전적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모든 존재의 차원과 공간에 미치게 된다.71)
이러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지닌 특수성은 제임스 로더가 말한 “논리적 암시나 인과론적 결정론에 의해 연역되거나 도출될 수 없는 두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 관계 성”72)을 해명하는 신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통합시키는 행위와 과정, 곧 두 차원 혹은 두 축의 양극적 구조를 하나의 유기적 체제가 되게 함으로써

68) 이종성, “제7부 역사관의 일곱 가지 유형”, 555-556쪽.
69) 이종성, “제7부 역사관의 일곱 가지 유형”, 556-575쪽.
70) 이종성, “제7부 역사관의 일곱 가지 유형”, 574쪽.
71) 이종성, “제1부 서론”,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1권 조직신학대계- 신학서론』 (서울: 한국기독교 학술원, 2001), 65-87쪽.
72) James E. Loder, The Knight’s Move: The Relational Logic of the Spirit in Theology and Science, 이규민 역, 『성령의 관계적 논리와 기독교교육 인식론: 신학과 과학의 대화』 (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09), 474-475.
 
양극의 관계적 연합을 이루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상반되는 개 념이 일종의 역동적-비대칭적 관계성의 형태로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게 되므로, 각각의 특성 과 차이가 유지되면서도 하나의 비대칭적 통전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표적인 예 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73) 뫼비우스의 띠는 띠의 겉과 속이 180도 회 전되어 만나고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면과 하나의 선만을 가진 독특한 형태의 띠로 변형되 고 있는 것처럼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상호적인 통전성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그가 삼위일 체론을 관계적 통전성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 이런 차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종성은 이론적으로는 관계적 통전성을 추구하였지만, 실제적으로 한국의 다 양한 신학적 입장들을 끈질긴 대화로 조율하거나 통합하여 그가 주창한 통전적 신학을 완성하 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지금까지 각 교단의 조직신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이 속한 장 로교 통합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서서 자신과 다른 신학들을 포용하여 관계적 연합을 이루는데 실패하였다.
이 점에서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미흡하기 때문에74) 그의 제자인 김명용은 온 신 학으로 발전시키기를 원한다. 여기서 잠시 통전적 신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서 김명용의 온 신학과의 연관성을 지어보자.
김명용은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신학적 용어로 등장한 것이 1984년에 출판된 『그 리스도론』 에서 통전적 기독론을 주장하면서부터라고 지적한다.75) 윤철호는 통전적 신학이 절 충주의나 혼합주의가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하는 신학이라고 평가한다.76) 이러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김명용의 온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김명용은 온 신학을 2014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직원 신년예배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다. 온 신학은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한 용어이다. 김명용에 의 하면, 온 신학은 130년간 한국 신학의 결론이자 정점이다. 1985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서 발표된 장로회신학대학교의 대학이념과 신학교육성명서에서도 나타났듯이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통전적 신학을 한마디로 보여준다. 특히 2002년 신학교 육성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야말로 인간과 사회와 세상 을 살리는 온전한 복음이라고 천명한다.77) 일각에서 ‘스승인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갈아엎 는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온 신학으로 표현한 것은 단지 통전이라는 의미에 영어로 integrity의 의미 곧 통합한다는 뜻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용은 그의 온 신학이 단지 통합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는 것, 즉 편협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신학이라고 주장한다.78)

73) James E. Loder, The Knight’s Move: The Relational Logic of the Spirit in Theology and Science, 477, 481.
74) 윤철호, “통전적 신학 방법론-춘계 이종성의 신학방법론을 중심으로”, 『장신논단』 제47권 제1호 (2015): 128쪽. 문병구는 본 연구를 논평하면서 이정성이 생각하는 ‘통전적 신학의 구성원리(Prinzip)’ 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참고, 문병구, “춘계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에 대한 성서신학적 평 가,” 『한국개혁신학회 제38차 학술심포지엄』 자료집(2015년 5월 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118쪽.
75) 김영용, 『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37,
121. 그는 통전적 신학을 영어로 TongJun Theology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미 우리말로 통전 신학이 라 표기되고 Tong Chun이라고 영어로 표기된 것은 2003년에 한국기독교 공동학회에서 발표된 소기 천의 "생명의 선교를 향한 예수의 시험이야기 새로 읽기: 통전 신학을 제안하며", 『한국기독교신학논 총』, 한국기독교학회 편, 제30권(2003): 183-209쪽에 있다.
76) 윤철호, “통전적 신학 방법론-춘계 이종성의 신학방법론을 중심으로”, 128.
77) 장로회신학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교육성명을 위한 기초문서”, 『교회와 신학』 제48호(2002):
12-19쪽.
 
김명용은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교조적으로 이어온 파편 신학의 바탕위에서 얼마나 편 협한 신학이 많았는지를 지적한다. 더구나 2013년 10월에 부산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 (WCC)를 같은 장로교 교단에서 조차 완전히 이단시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많이 보았다고 전제 한 후에, 그는 온 신학을 더 잘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달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반달은 아직 온달이 되지못한 달이다. 반달이 반쪽짜리 달이라면 온달은 온전하
고 충만한 달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o[loj는 ‘온전한’이란 뜻이지만,79) 요한계시록 6장 12
절은 개역개정판에서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런 번역은 “온달[보름달
-필자의 주]이 피같이 되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온달도 결코 긍정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특 히 요한복음 19장 23절은 diV o[lou는 전치사와 함께 ‘통으로’ 혹은 ‘하나로’란 의미이다. 또한 사도행전 21장 31절의 o[lh sugcu,nnetai VIerousalh,m란 표현은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고 번역
되어 있으나 사실은 ‘예루살렘이 아주 요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 4:23의 evn o[lh|
th/| Galilai,a|란 표현과 같이 신약성서에서 o[loj는 ‘온’이라고 개역개정판이 번역을 하였지만 ‘모든’이라는 의미이므로, 마태복음 4장이 사용한 이 단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 신학에 연결 되지 않는다.
아무튼 김영용에 의하면, 반쪽짜리 달과 같은 신학은 편협한 신학이기 때문에 국민에 게서 지탄을 받을 정도로 교회 간에 처참한 갈등과 싸움을 일으킨다. 이미 한국의 장로교가 통합 측을 제외하고 200여개의 장로교단으로 분열한 것이 이 같은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래 서 이러한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에 의하면 거의 다 수가 온 신학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통전적 신학을 계승한 온 신학 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지니고 있는 궁극성에 기초하고 성령에 의해 펼쳐지고 세계 도처 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해방과 생명의 역사들에 대해 열려있는 신학이다. 그래서 그는
온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기독론적 차원과 하나님 나라 구현이라는 성령론적 차원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는 신학이다. 온 신학은 예수 그 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온전한 복음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성령론적 신
학이다.”80)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그는 온 신학이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학으로 단편적이고 파 편화된 신학을 거부하는 신학이라고 간주한다.
김명용은 자신의 온 신학을 신학적 토대 위에 세우기 위해 ‘박형룡의 근본주의 신학, 조용기의 삼중축복의 신학, 민중 신학’81) 등을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물 론 그가 한국의 다른 교단들의 신학을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신학’이라고 한 지적도 다소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지만,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온 신학이 스승의 하나 님의 나라를 위한 신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제자인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것 에 더 깊은 강조점을 두려는 신학이라고 강조한다.82)
김명용에 의하면, 온 신학은 폐쇄적이지 않고 열려있는 신학으로 핵심적인 통전적 신

78) 김영용, 『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 13-16, 99-102쪽.
79) 이미 각주 5번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다른 의미를 제외하고 o[loj는 마 14:35, 16:26; 막 6:55; 눅
5:5, 13:21; 요 4:53, 7:23; 행 11:26; 롬 1:8, 8:36; 딛 1:11; 요일 5:19 등에 ‘온전한’이란 의미로
쓰인다.
80) 김영용, 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 18, 104쪽.
81) 김명용의 온 신학과는 달리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로 주창한 이종성은 민중 신학이 짓눌리고 비참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최근에 상호연관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긍정적인 평 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참고, 이종성, “The Wholistic View of Happiness in the Context of Korean Culture”, 346쪽.
82) 김영용, 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 19-40, 105-124쪽.
 
학정신에 일치하면서 비록 다른 점이 있어도 포용하고 협력해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온 신학은 통합만 하는 신학이 아니고 바른 신학 의 기준위에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중요한 것은 더욱 강조하고 새로운 정신을 첨가하면서 완 성해가는 신학이다. 그러기에 온 신학은 높은 학문적 신학을 추구하면서 성령의 활동을 바르 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렇게 파악된 통전적 관점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역사까지도 결정적 으로 새롭게 만든다고 한다. 이 점에서 온 신학은 대화적 신학이다. 온 신학은 다양한 신학과 의 대화만이 아니라 타종교와 사상, 더 나아가 자연과학과 세계역사와도 대화를 여는 학문이 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한 성령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신학이 온 신학이다.83)
김명용에 의하면, 온 신학은 삼위일체 신학의 터전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오직 예수 만이 우리의 구주임을 믿는 온전한 복음을 강조하는 신학이며, 오직 교회에 의해서만 전파되 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통전적 교회론을 지닌 신학이며, 온 세상과 온 우주를 구원하고자 하는 성령의 뜻에 복종하는 생명신학이며, 끊임없이 개혁하는 개혁신학이 다.84)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오기에 그리스도 한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며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 리의 전도대상들이다. 그들과 담을 쌓고 대화도 거부하면 교회는 게토 화 된다.
김명용의 온 신학은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통전적 신학이 ‘여러 가지 의 패러다임을 통합하는 신학’이라는 반면에,85) 온 신학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또한 편협하고 편파적인 신학의 풍토에서 온전한 신학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종성은 통전적 ‘그리스도론’에서 기독론을 한국교회의 토양에 토착화하고 현실화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86) 과연 김명용의 온 신학이 향후에 얼마나 신학적으로 확고한 모양을 갖추면서도 한국적 상황에 토착화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여전히 온 신학도 아직까지는 서구적인 신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이미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이 대화와 통합의 한계를 드러낸 것과 같이 한국의 다른 교단에서 뿌리 를 내리고 있는 신학적 특징들을 포용하는 면에서 다소 부족한 점이 발견된다.

V. 결론

한국에서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로 주창한 학자가 이종성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자신의 통 전적 신학을 체계화하지 못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비록 성서에 ‘통전적’이란 단어 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통전적 신학 을 시작하였다고 자부하면서 그 유산을 후세에 남겨주었다. 이로써 그는 후학들에게 통전적 시각에서 성서를 중심으로 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할 것을 촉구한다.87) 그는 비록 엉뚱하

83) 김영용, 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 62-71, 144-152쪽.
84) 김영용,Ohn Theology: Holistic Theology, 『온 신학』 , 79, 158쪽.
85) ‘통전적 신학과 통전적 개혁신학’에 관해서 윤철호, 『현대신학과 현대 개혁신학』 (서울: 장로회신학
대학교출판부, 2003)의 제9장(245-271쪽)을 보라.
86) 이종성, “제4부 현대신학과 그리스도론”,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4권 조직신학대계- 그리스도 론』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574-575쪽; 이종성, “제3부 기독교 토착화론”, 『춘계 이종성 저 작 전집: 제27권 윤리와 토착화론』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399-442쪽. 물론 이종성은 우리 가 할 일이 복음을 토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되게 채색되고 토착화된 복음을 언제든지 비토착 화하는 작업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418쪽).
87) 이종성, “제1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22권 소논문집-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신학』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179-180, 279쪽. 김성규는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게도 한동안 ‘나그네 신학’88)을 역설하기도 하였지만, 교회의 설교와 생활을 다시 통전적 신학 으로 심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한국교회가 성서의 교훈을 도태로 한 기독교 문화까지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89)
이종성에 의하면, 통전적 신학이란 그레코-로만 문명을 계승 한 서구신학 외에 타문 화권(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남태평양 등)의 종교와 사상, 문화, 세계관, 가치관 등을 복음에 이르는 준비과정 또는 기독교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고 적대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것들을 성서를 기준으로 해서 기독교 안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는 신학이다. 이 점에서 김명 용의 온 신학은 그 스스로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신학’이라고 비판한 한국의 다른 교단의 신 학적 내용들을 그의 스승이 한 것처럼 비판하고 거부하였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우선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인 다른 교단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통합측 교단 내에서도 그 통전적 신학의 실체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여전히 통전적 신학이 되기 위 한 과정 중에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극복하려면, 한국개혁신학회와 같이 범교단의 신학자들이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더욱 활발한 신학적 논의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은 그 스스로 성서적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였지 만, ‘통전적’이란 단어 자체가 성서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그의 제자 세대의 조 직신학자들이 처음부터 다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통전적 신학은 다 양한 신학의 분야들과 협력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로써 이종성은 조직신학자이지 만, 그의 조직신학대계 40권에 드러난 통전적 신학은 신학의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통전적인 신학은 다양한 신학의 분야들과 협력 을 하면서 각각의 주제들을 포괄하는 신학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Abstract
A Study of the Holistic Theology by Dr. Jong Sung Rhee
Ky-Chun So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The theology of Dr. Jong Sung Rhee is called to the holistic theology. On the one hand, this article surveys whether the concept of  his holistic theology is Biblical, first of all, or not. He did not success his holistic theology, even though he published 40 greatest volumes of his systematic theology. In spite of its incompleteness, this article presupposes that the holistic theology of Jong Sung Rhee is based on the foundation of the Biblical theology and evaluates his theologies  that  he  enterprised  during  his  whole  life  almost  90  years  old: co-relational studies of various fields, an Biblical understanding, Trinity theory, science and theology and literature, an acceptance of interreligious and interdisciplinary dialogue, and eschatology etc.
As a result of this survey, on the other, this article evaluates whether the

이 ‘근원적으로 방향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참고, 김성규, “춘계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에 대한 성서신학적 평가,” 『한국개혁신학회 제38차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015년 5월 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114쪽.
88) 이종성, “제1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 160-168쪽.
89) 이종성, “제1부 교회안에서”, 『춘계 이종성 저작 전집: 제36권 수상집- 기독교는 살아있다』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221-223쪽.
 
holistic theology of Jong Sung Rhee is alright, or not, and whether the ohn theology of Myung Yong Kim is based on the Rhee’s holistic theology that ‘united’ various theological aspects, because Kim thinks that his ohn theology further contains the concepts of no one side or more holistic view.
What is the constructive principles of the holistic theology that he thought? He understood other civilizations (even science and religion) as ‘the preliminary process for the Christianity’ or ‘the one toward the Gospel.’ And how the Christian world view can understand the other religious world view through the holistic theology and lead the other different civilizations into the Christian civilization? Those questions are the major tasks that must be solved by the scholars who success the holistic theology of Jong Sung Rhee.

Key Words
Jong Sung Rhee, Holistic Theology, Biblical Evangelism, Myung Yong Kim, Ohn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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